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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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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ademic year: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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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연의 한국 전래와 정착

비교문학은 방출자(放出者, 생산자)ㆍㆍ매개자(媒介者, 전달 자)ㆍ수용자(受容者, 향수자, 향유자)의 연구로 나누어 생각할 수 있다.---유럽식 비교문학과 영미식 비교문학

1. 삼국지연의의 전래시기

三國志 正史의 한국전래 시기는 확정할 수 없다. 周書 列傳 제 41, 고구려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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書籍有五經ㆍ三史ㆍ三國志ㆍ晋陽秋

라 하였고, 또 李延壽의 北史 列傳 제 82, 고구려조에

書有五經ㆍ三史ㆍ三國志ㆍ晋陽秋

라 하였음을 보면,

이미 高句麗時代에 五經ㆍ三史와 더불어 三國志가 전래하였 음을 알 수 있다.

고려초에도 전래기사가 보이는데, 顯宗 7年(1016)에 戶部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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郞 郭元이 宋에 갔을 때 宋帝(眞宗)로부터 九經ㆍ史記ㆍ兩漢 書ㆍ三國志ㆍ晋書ㆍ諸子ㆍ曆日ㆍ聖惠方 등의 서적을 하사받 았다.

이로써 보면, 우리나라에는 三國時代로부터 高麗初에 이르기 까지 三國志 의 전래가 일반화되었을 것이다.

朝鮮王朝實錄 선조 2年(1569) 6月 壬辰條에 보면, 宣祖 2年 (1569)에 국왕이 三國志演義를 읽었기 때문에 侍讀官 奇大升 (1527~1572)이 經筵에서 同書의 내용이 正史의 기사와 어긋 날 뿐만 아니라 무익하고 義理를 해치는 책이라고 열독을 말 렸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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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奇大升이 此書出來未久라 한 것을 글자 그대로 三國 志演義 의 전래가 오래되지 않았다고 풀이할 것인지는 의문이 다. 대체로 옛사람들의 표현에는 시간관념이 모호한 것도 있 고, 三國志演義가 전래된 다음 국왕까지 읽게 될 정도로 널 리 퍼졌다면 상당한 시일일 걸렸으리라고도 생각된다.

三國志演義가 선조 이전에 전래되었으리라고 생각되는데 당 시에는 큰 반응이 없다가 壬辰亂 이후 士大夫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널리 애독되어 왔다. 그리하여 그 번역을 물론 다른 많은 작품을 파생시키기도 하였다.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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