三國史記 高句麗本紀의 原典과 完成*
– 광개토왕대 이전 기록을 중심으로 –
17)
全 德 在**
❙국문초록❙
본고는 광개토왕대 이전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기록의 原典과 그것의 編纂過程을 살펴본 것이다
.소수림 왕대에 편찬한 留記가 소수림왕대 이전 고구려본기 기록의 기본원전이었다
.李文眞은 留記
100권을 縮約 하여 新集
5권을 찬술하였는데
,이때 유기의 기록을 改修하였음이 확인된다
.구삼국사 찬자는 신집
또는 이것을 底本으로 하여 편찬된 어떤 史書를 전거자료로 삼아 구삼국사 고구려 기록을 찬술하였고
,삼 국사기 찬자는 여기에 전하는 기록을 대체로 인용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삼국사기 찬자는 구삼국사의 기록을 기본 골격으로 삼고
,여기에 중국 사서와 신라
·백제본기에서 인용한 기록을 고구려본기에 새로 添入 한 다음
,일부 새로운 내용을 추가로 기술하거나 王名과 王諱에 관한 異說 및 고구려본기의 기록 가운데 보충 설명이 필요하거나 의문이 드는 사항 등을 補注로 제시하고
,자신들의 역사관에 입각하여 褒貶한 史論을 고구 려본기에 揭載하여 광개토왕대 이전 고구려본기의 기록을 완성하였다
.[
주제어
]삼국사기
,광개토왕대 이전 고구려본기의 기록
,原典
,舊三國史
,留記
,新集
,資治通鑑
,後漢書
,新羅本 紀
,百濟本紀
❘목 차❘
Ⅰ
.머리말
Ⅱ
.중국 사서와 국내 자료의 인용 및 그 성격
Ⅲ
.고구려본기의 基本原典과 完成
Ⅳ
.맺음말
Ⅰ. 머리말
현재 三國史記 本紀의 底本은 舊三國史로 이해하는 것이 일반적이고
,
雜志와 列傳에 전하는 기록의* 이 연구는 2016년도 단국대학교 대학연구비 지원으로 연구되었음.
** 단국대학교 사학과 교수 / dj8794@dankook.ac.kr
原典은 家乘과 行錄
,
古記類,
그리고 중국 사서에 전하는 기록이었음이 밝혀졌다.
또한 舊三國史 찬자가 활용한 전거 자료와 관련하여 留記,
書記,
新集,
國史,
통일신라시기에 편찬한 實錄類의 역사서 등 을 크게 주목하였다.
그러나 本紀에서 삼국사기 찬자가 添入하였다고 추정되는 기록이 적지 않게 발견되 기 때문에 本紀의 전거 자료가 구삼국사의 기록이라고 하더라도 그들이 그것을 그대로 本紀에 인용하였다 고 보기 어렵다.
이러한 측면에서 三國史記 本紀의 원전에 대한 검토와 더불어 본기의 기본원전으로 기능 한 다양한 사서류의 改撰過程 및 삼국사기 찬자의 本紀 편찬과정에 대한 체계적인 검토가 이루어질 때,
비 로소 本紀의 기록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가능하다고 판단할 수 있다.
종래에 고구려본기의 원전에 대해서는 주로 중국 사서에서 인용된 기록을 밝히는 데에 집중되었을 뿐이 고
,
고구려본기 전체 기록의 원전에 대한 체계적인 검토는 미흡한 편이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1) 신라·
백제 본기와 달리 고구려본기에는 상대적으로 고구려 자체의 전승기록이 많은 편이 아니어서 이와 같은 방법론은 의미가 있다고 평가할 수도 있다.
이렇다고 하더라도 고구려 자체의 전승기록이 原典인 경우가 적다고도 말 하기 어려운 편이기 때문에 金石文,
「東明王篇」,
중국 사서에 전하는 기록과의 세밀한 비교 검토가 필요하지 만,
기존에는 이에 관해서 크게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본 연구는 바로 이와 같은 기존 연구의 한계를 극복 하고,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原典 연구의 새로운 전기를 맞이하기 위하여 준비한 것이다.
본고에서는 주로 광개토왕대 이전 고구려본기 기록의 원전과 편찬에 관해서 살펴볼 것이다
.
학계에서 이 시기 고구려본기의 기본원전을 소수림왕대 또는 광개토왕대에 편찬하였다고 추정되는 留記로 이해하는 측 면 및 그 이전 시기와 달리 장수왕대 이후 고구려본기의 기록 가운데 중국 사서에서 인용한 기록의 비율이 매우 높다는 사항 등을 두루 고려하여 일단 광개토왕대 이전 시기 고구려본기 기록의 원전과 그 改撰過程을 살펴보는 것으로 제한하였다.
차후에 장수왕대 이후 고구려본기 기록의 원전을 체계적으로 검토하여,
고구려 본기 기록의 원전과 편찬에 대하여 종합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하고자 한다.
부족한 점은 차후에 보완할 예정이다.
많은 질정을 바란다.
Ⅱ. 중국 사서와 국내 자료의 인용 및 그 성격
1. 중국 사서의 인용과 그 성격
삼국사기 찬자는 疏略한 국내 자료를 보충하기 위하여 중국 사서의 기록을 적극 활용하였다
.
광개토왕1)고구려본기의 原典을 검토한 연구성과로서 津田左右吉, 「三國史記高句麗紀の批判」, 滿鮮歷史地理硏究報告 第9, 東京: 東京 帝國大學文學部, 1922; 三品彰英, 「三國史記高句麗本紀の原典批判」, 大谷大學硏究年報 6, 京都: 大谷大學大谷學會, 1954;
井上秀雄, 「三國史記の原典をもとめて」, 新羅史基礎硏究, 東出版, 1974; 田中俊明, 「三國史記中國史書引用記事の再檢討」,
朝鮮學報 104, 1982; 신동하,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의 인용 자료에 관한 일고」, 삼국사기의 원전 검토, 한국정신문화연 구원, 1995; 이강래, 삼국사기 전거론, 민족사, 1996; 高寬敏, 三國史記原典的硏究, 雄山閣, 1996; 임기환, 「고구려본기 전거 자료의 계통과 성격」, 한국고대사연구 42, 2006 등을 들 수 있다.
대 이전 고구려본기의 경우도 예외가 아닌데
,
중국 왕조와 고구려가 접촉한 사실을 전하는 중국 사서의 기록 을 인용한 것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기존의 연구에서 밝혔듯이 동천왕20
년(246)
이후는 자치통감의 기 록을 인용한 것이 압도적인 다수를 차지하고,
그 이전 시기는 주로 후한서 고구려전의 기록에서 발췌하였 음을 살필 수 있다.
2)고구려가 후한에 조공하였다는 내용의 고구려본기 대무신왕
15
년12
월 기록,
후한에 사신을 파견하여 玄 菟郡에 복속되기를 요청하였다고 전하는 태조왕59
년 기록은 후한서 고구려전에서 인용한 것이고,
耿夔가 貊人을 습격하여 격파하였다는 내용의 태조왕53
년9
월 기록은 後漢書 卷4
和傷帝紀第4
元興 元年9
월 기 록을 그대로 발췌한 것에 해당한다.
蠶支落部 大家 戴升이 한나라에 투항한 사실을 전하는 민중왕4
년10
월 기록의 원전은 후한서 고구려전의 기록이 확실하다.
그런데 두 기록을 비교하면,
蠶支落을 蠶支落部로,
大加를 大家로,
萬餘口를 萬餘家로 改書하였음을 확인할 수 있다.
뒤에서 언급할 예정이지만,
改書한 주체 는 구삼국사 찬자였을 가능성이 높고,
3)삼국사기 찬자는 구삼국사의 기록을 그대로 인용한 것으로 보 인다.
고구려가 北平
·
漁陽 등을 공격한 사실을 전하는 모본왕2
년 기록은 후한서 고구려전에서 인용한 것이 분명하다.
다만 두 기록에 전하는 遼東太守의 이름이 차이가 난다.
전자에서는 蔡彤이라고 적기한 반면,
후 자에서는 祭肜이라고 표기하였던 것이다.
後漢書 卷1
下 光武帝紀第1
建武25
년(49)
正月과 資治通鑑卷
44
漢紀36
世祖武皇帝 建武25
년 正月 기록에도 祭肜으로 전하고,
後漢書 卷50
列傳第10
祭遵傳에서는 祭彤이라고 표기하였다.
이에 반해 太平御覽 卷278
兵部9
邊將 기록을4) 비롯한 太平御覽의 기록에서 蔡彤이라고 표기하였음을 확인할 수 있고,
冊府元龜 卷536
諫諍部 直諫 기록에서도5) 마찬가지이다.
물론冊府元龜의 다른 기록에서는 祭肜이라고 표기하였음이 확인된다
.
이에 따른다면,
삼국사기 찬자가 후 한서 고구려전의 기록을 원전으로 하여 모본왕2
년 기록을 찬술하면서도 태평어람의 기록을 참조하여 요 동태수의 이름을 祭肜이 아니라 蔡彤으로 수정하였다고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6)太祖王이 將軍을 보내 요동군의
6
현을 공략하게 하였음을 알려주는 태조왕53
년 정월 기록의 원전은 후 한서 고구려전의 기록이 틀림없다고 보이지만,
그러나 후자에는 단지‘
元興 元年 春’
이라고 기록한 반면에,
고구려본기에서는 구체적으로‘
春正月’
이라고 밝혀 차이를 보인다.
後漢書 卷4
和帝紀4
元興 元年條에 이 해 正月에 髙句驪가 遼東郡界를 侵寇하였다고 전하는 것을 보건대,
태조왕53
년 정월 기록을 찬술할 때에 그2) 田中俊明, 앞의 논문, 1982, 54~78쪽.
3)大家는 大加의, 萬餘口는 萬餘家의 誤記로 추정되고, 蠶支落集團이 1만여 구의 큰 집단이기 때문에 蠶支落을 蠶支落部로 改 書하지 않았을까 한다(노태돈, 고구려사연구, 사계절, 1999, 107쪽).
4)太平御覽 卷278, 兵部9 邊將, “又曰 蔡彤使招呼鮮卑 示以財利 其大都䕶偏何 遣使奉獻 願得歸化 慰納賞賜 稍復親附 其異種 滿離 髙句驪之屬 絡繹欵塞 上貂裘好馬 帝輒倍其賞賜 其後偏何邑落諸豪 並歸義 願自効.”
5)冊府元龜 卷536, 諫諍部 直諫第3, “前太僕蔡彤 逺出塞外 卒不見一胡 而兵已困矣. 白山之難 不絶如繼都䕶 䧟沒士卒 死者 如積.”
6)태평어람은 宋初 977년(太平興國 2)에 太宗의 勅命을 받아 李昉 등이 편찬한 類書이다. 태평어람이 宋에서 언제 高麗로 전래되었는가를 정확하게 알 수 없지만, 전래에 일정 기간이 소요되었음을 감안하건대, 삼국사기 찬자가 그것을 처음으로 참조하였다고 봄이 옳지 않을까 한다.
찬자는 이 기록을 참조하였다고 이해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
태조왕이 穢貊과 함께 후한의 玄菟郡과 華麗城 을 습격한 사실을 알려주는 태조왕66
년 기록의 경우도 이와 비슷한 사례에 해당한다.
이 기록 역시 후한서본기의 기록을 참조하여 월을 구체적으로 밝힌 경우로 이해되기 때문이다
.
7)후한에 사신을 파견하여 安帝가 元服을 입은 사실을 축하하였다고 전하는 태조왕
57
년 정월 기록과 똑같 은 기록을 후한서에서 찾을 수 없다.
그러나 後漢書 卷5
安帝紀第5
永初3
년(109)
기록에 이 해 정월에 皇帝가 元服을 입었고,
또한 이 달에 高句驪가 사신을 보내 공물을 바쳤다고 전한다.
아마도 후한서 본기 의 기록을 참고하여,
영초3
년 정월에 고구려 사신이 후한에 가서 安帝가 元服을 입은 사실을 축하하였다고 추론한 것이 아닐까 한다.
幽州刺史 馮煥 등이 穢貊渠帥를 습격하여 살해하자
,
태조왕이 遂成으로 하여금 풍환 등을 공격하게 하여 물리쳤다는 내용의 태조왕69
년 봄 기록은 후한서 고구려전에 전하는 기록을 인용하였다고 보이지만,
고 구려본기에서는 遂成을 태조왕,
즉 宮의 동생이라고 적기한 반면,
후한서에서는 宮의 嗣子라고 기술하였 다.
또한 고구려본기에서는 수성이 煥(
馮煥)·
光(
姚光)
등을 역습하였고,
수성이 거짓으로 항복하자,
煥 등이 이것을 믿었다고 서술한 반면,
후한서에서는 수성이 光(
姚光)
등을 역습하였고,
수성이 거짓으로 항복하자,
光 등이 이것을 믿었다고 서술하였다.
고구려본기의 찬자는 고구려 자체 전승기록에 의거하여 수성을 왕의 동생으로 개서하고,
일부 표현을 약간 수정하였음을 엿볼 수 있다.
한편 태조왕
69
년12
월 기록에서는 태조왕이 馬韓,
濊貊과 함께‘1
만여 기병’
을 거느리고 나아가 현도성을 공격하였다고 전하고,
후한서 고구려전에서는1
만여 기병이 아니라‘
수천 기병’
이라고 전하여 차이를 보인 다.
8) 고구려본기의 찬자가 일부러1
만여 기병으로 수정한 것인지,
아니면 고구려 자체의 전승기록이 남아 있었기 때문에 이와 같이 수정한 것인지의 여부를 정확하게 판단하기 어렵다.
후한 현토태수 耿臨이 고구려 를 침략한 사실을 전하는 신대왕4
년 기록은 후한서 고구려전에 전하는 기록과 거의 일치하지만,
다만 기 년상으로1
년의 차이가 난다.
고구려본기 찬자의 실수였을 가능성이 높다고 보인다.
9)고구려본기 유리명왕
31
년 기록은 王莽의 신료인 嚴尤가 고구려 장군 延丕를 유인하고 목을 베어 長安으 로 보냈다는 내용이다.
그런데 동일한 내용이 후한서 권99
王莽列傳에 전한다.
다만 여기에서는 엄우가 유 인하여 죽인 사람이 연비가 아니라 高句驪侯 騶라고 언급하였다.
유리명왕31
년 기록은 후한서 왕망열전 의 기록을 발췌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다만 엄우가 목을 벤 사람이 고구려 장수 연비와 고구려후 추라고 언 급한 점이 차이가 날 뿐이다.
이에서 엄우가 延丕를 살해한 내용을 중심으로 하는 자료가 어떤 사서에 채록 되어 전승되었고,
삼국사기 찬자는 후한서 왕망열전을 원전으로 유리명왕31
년 기록을 찬술하면서 고구 려 자체의 전승기록을 참조하여 고구려후 추를 將帥 延丕로 대체하여 첨입하였음을 추론할 수 있다.
10) 이와7) 후한서 고구려전에서는 단지 ‘元初 五年’이라고 밝힌 반면, 후한서 권5 安帝紀 元初 5년 기록에서는 구체적으로 이 해 여름 6월이라고 적기하였다.
8) 後漢書 卷5 安帝紀第5 建光 元年 12월과 資治通鑑 권50 漢紀42 孝安皇帝 建光 元年 12월 기록에서도 ‘數千騎’라고 언 급하였다.
9) 임기환, 앞의 논문, 2006, 30쪽.
10) 연비가 포함된 고구려 자체 전승기록이 매우 소략하였기 때문에 후한서 왕망열전의 기록을 원전으로 하면서도 다만 엄우
비슷한 사례가 고국원왕
12
년(342) 10
월과11
월 기록인데,
이에 대해서는 뒤에서 자세하게 살필 예정이다.
이상에서 고구려본기의 기록 가운데 후한서의 기록이 원전인 사례들을 살펴보았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 는 후한서의 기록을 인용한 주인공이 과연 삼국사기 찬자였느냐의 여부에 관해서이다.
삼국사기 지리 지 三國有名未詳地分條에 蠶支落,
華麗城이 보인다.
뒤에서 살필 예정이지만,
三國有名未詳地分條의 底本資 料는 삼국사기 편찬 이전에 간행된 어떤 사서였다고 한다.
따라서 두 지명이 포함된 민중왕4
년과 태조왕66
년6
월 기록은 삼국사기 찬자가 후한서에서 인용하여 새로 고구려본기에 첨입한 것이 아니라,
구삼 국사 또는 그 이전에 편찬한 어떤 사서에 채록된 것을 그대로 인용하였다고 봄이 옳을 것이다.
11) 그러나 모본왕2
년 기록은 태평어람의 기록을 참조한 사례였고,
뒤에서 살필 예정이지만,
태조왕69
년4
월 기록 의 일부는 資治通鑑의 기록,
신대왕5
년 기록은 冊府元龜의 기록이 원전이었음이 확인된다.
이와 같은 사례들을 참조하건대,
삼국사기 찬자가 후한서의 기록을 인용하여 고구려본기에 첨입한 것도 여럿 존재 하였을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하기 어려울 듯싶다.
12)광개토왕대 이전 고구려본기에서 후한서와 더불어 資治通鑑에서 인용한 기록을 적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
자치통감은 北宋의 司馬光이1084
년11
월에 완성한 것이다.
이것이 고려에 전래된 시점이 언제인지 정확하게 알 수 없지만,
현재 삼국사기 편찬 직전이라고 이해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13) 이에 따른다면,
자 치통감의 기록을 고구려본기에 添入한 주인공은 바로 삼국사기 찬자였다고 볼 수 있다태조왕이 鮮卑
8
천 인과 함께 遼隊縣을 공격하자,
遼東太守 蔡諷이 이를 막다가 戰死한 사실을 알려주는 태조왕69
년4
월 기록과 비슷한 내용은 後漢書 卷5
安帝紀第5
建光 元年(121)
여름4
월 기록과 후한서고구려전에도 전한다
.
그런데 전자에는 遼東太守 蔡諷을 보호하다 죽은 이들에 대한 정보가 전하지 않고,
14) 후자에는 그들이 功曹耿耗와 兵曹掾龍端,
兵馬掾公孫酺였다고 전한다.
15) 고구려본기 기록에 채풍을 보호하 다가 사망한 사람들이 功曹掾龍端과 兵馬掾公孫酺라고 전하는데,
동일한 내용을 資治通鑑 卷50
漢紀42
安帝 建光 元年4
월 기록에서 발견할 수 있다.
이에 따른다면,
태조왕69
년4
월 기록의 앞부분(
王與鮮卑八千 人 ― 將兵出於新昌戰沒)
은 후한서 고구려전에서,
뒷부분(
功曹掾龍端―死者百餘人)
은 자치통감의 기록 에서 인용하였다고 볼 수 있다.
16)한편 미천왕
21
년12
월,
고국원왕9
년과13
년2
월, 15
년10
월, 19
년, 25
년12
월,
광개토왕9
년2
월, 11
가 목을 벤 사람이 고구려후 추가 아니라 고구려 장수 연비였다고 바꾸어 서술하였던 것으로 이해된다. 11) 田中俊明, 앞의 논문, 1982, 74~76쪽; 임기환, 앞의 논문, 2006, 24~36쪽.
12) 신동하, 앞의 논문, 1995, 34~36쪽에서 삼국사기 찬자가 후한서의 기록을 인용하여 고구려본기에 첨입하였다고 이해 하였다.
13) 田中俊明, 앞의 논문, 1982, 100쪽.
김부식은 북송 말기인 徽宗 政和 연간(1111~1117년)에 송나라 사신으로 파견되었는데, 이때 자치통감을 구입하여 귀국 하였을 가능성이 높다고 보인다(오정환, 「조선시대 자치통감과 자치통감강목의 간행과 유통에 관한 연구」, 중앙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12, 22쪽).
14) 後漢書 卷5, 安帝紀第5 建光 元年, “夏四月 穢貊復與鮮卑寇遼東 遼東太守蔡諷 追擊戰歿 ––– 甲戌 遼東屬國都尉龎奮 承偽 璽書 殺玄莬太守姚光.”
15) 後漢書 高句驪, “夏 復與遼東鮮卑八千餘人 攻遼隊<縣名屬遼東郡也> 殺掠吏人. 蔡諷等 追擊於新昌戰殁 功曹耿耗 兵曹掾 龍端 兵馬掾公孫酺 以身扞諷 俱殁於陳 死者百餘人.”
16) 다만 자치통감의 기록에는 고구려가 공격한 곳이 遼隊縣이 아니라 遼東이라고 전한다.
년
, 13
년12
월, 14
년 정월, 15
년12
월 기록은 자치통감 권91
晉紀13
中宗元皇帝 太興3
년12
월,
卷96
晉 紀18
顯宗成皇帝 咸康5
년,
卷97
晉紀19
康皇帝 建元 원년2
월,
卷97
晉紀19
孝宗穆皇帝 永和 元年10
월,
卷98
晉紀20
孝宗穆皇帝 永和5
年,
卷98
晉紀20
孝宗穆皇帝 永和11
年12
월,
卷111
晉紀33
安皇帝 隆安4
年과4
년2
월,
卷112
晉紀34
安皇帝 原興 元年5
월,
卷112
晉紀34
安帝 原興3
년12
월,
卷114
晉紀36
安帝 義熙 원년 정월,
卷114
晉紀36
安帝 義熙 元年12
월 기록을 거의 그대로 인용한 사례에 해당한다.
삼국사 기 찬자는 자치통감의 기록에 전하는‘
高句麗’
를‘
我’
로 改書하는 한편,
고구려왕의 이름을 적기하지 않고,
단지‘
王’
으로만 표기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고국원왕25
년 기록에서‘
燕主’
를‘
燕王’
으로 개서하였음도 발견된다.
자치통감에 東晉 原興 원년(402) 5
월에 고구려가 宿軍城을 공격하였다고 전하나,
고구려본기에 서는 단지 이 해에 고구려가 숙군성을 공격하였다고 전할 뿐이다.
기록은 그대로 인용하면서도 사건이 일어 난‘
달(
月)’
은 수용하지 않은 점이 특징적이다.
이밖에 燕王熙가 요동성을 공략한 사실을 전하는 광개토왕
14
년 정월 기록의 경우,
資治通鑑 권114
晉 紀36
安帝 義熙 원년 정월의 기록에서‘
戊申’
이라는 간지를 제외하고 인용하였음이 확인된다.
또한 자치통 감에는 燕王 慕容熙가 본래 義熙 元年(405) 12
월과 그 다음 해1
월과2
월에 걸쳐 거란과 고구려 목저성을 襲擊하였다고 전하지만,
고구려본기에서는 광개토왕15
년 겨울12
월 기록에 그러한 사실을 몰아서 기술하였 음도 확인할 수 있다.
자치통감에 義熙 원년(405)
정월에 연왕 모용희가 고구려 요동성을 침략하였고,
그 해12
월과 다음해1
월과2
월에 걸쳐 거란 및 고구려 목저성을 침략하였다고 전하지만,
그러나 고구려본기에 는 각기 광개토왕14
년 정월과 그 다음 해12
월에 모용희가 그렇게 하였다고 전하여 결과적으로 기년상의 오류를 범하고 있음이 유의된다.
晉 平州刺史 崔毖가 도망하여 고구려에 왔다는 내용의 미천왕
20
년12
월 기록은 資治通鑑 卷91
晉紀13
元帝 大興2
년12
월 기록에서 일부 기사를 발췌 요약하여 고구려본기에 첨입한 사례에 해당한다.
삼국사기찬자는
319
년12
월에 東晉의 平州刺史 崔秘가 고구려로 도망해온 사실을 먼저 기술한 다음,
그가 도망해온 연유를 자치통감에서 발췌 요약하여 제시하였던 것이다.
前燕의 慕容農이 요동·
현토2
군을 공격하여 차 지한 사실을 전하는 고국양왕2
년(385) 11
월 기록 역시 資治通鑑 卷106
晉紀28
烈宗(
孝武帝)
太元10
년11
월 기록을 요약 발췌한 것이었다.
前秦이 前燕을 공략하여 격파하매,
太傅 慕容評이 고구려로 망망하자,
그를 잡아서 전진에 보냈다고 전하는 고국원왕40
년(370)
기록의 원전은 자치통감 卷102
晉紀24
海西公 太和5
年 기록임이 분명하다.
후자에서 前秦이370
년에 전연을 정벌한 사실을 자세하게 설명하였다.
삼국 사기 찬자는 그러한 사실을 秦 王猛이 燕을 정벌하여 깨트렸다고 매우 짧게 언급한 다음,
전연의 太傅 慕容 評이 고구려로 망명하자,
고국원왕이 그를 잡아서 전진에 보냈다고 서술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고구려본기에는 자치통감 기록에서 인용한 것뿐만 아니라 자치통감과 다른 중국 사서에 전하 는 기록을 조합하여 찬술한 사례도 여럿 발견된다
.
이와 관련된 기록을 정리한 것이<
표1>
이다.
<표 1> 자치통감과 다른 중국 사서의 기록을 조합한 고구려본기의 기록
年代 高句麗本紀 중국 사서
동천왕
20
년(246)
是役也 魏將到肅愼南界 刻石紀功
.
又到 丸都山 銘不耐城而歸.
初 其臣得來 見王 侵叛中國 數諫 王不從.
得來嘆曰 立見此 地 將生蓬蒿 遂不食而死.
毋丘儉令諸軍 不壞其墓 不伐其樹 得其妻子 皆放遣之正始 七年
(246)
春二月 吳車騎將軍朱然冦柤中殺略數千 人而去 幽州刺史毋丘儉 以髙句驪王位宫數為侵叛 督諸 軍討之.
位宫敗走 儉遂屠丸都 斬獲首虜以千數.
句驪之臣 得來數諫位宫 位宫不從.
得來歎曰 立見此地 將生蓬蒿 遂 不食而死.
儉令諸軍 不壊其墓 不伐其樹 得其妻子 皆放遣 之(
資治通鑑 卷75
魏紀7
邵陵厲公中).
(
正始)
六年 儉復討之 位宫輕將諸加 奔沃沮 儉使將軍王 頎追之.
絶沃沮千餘里 到肅慎南界 刻石紀功.
又到丸都山 銘不耐城而還 其後復(
梁書 高句驪傳).
광개토왕
17
년(407)
春三月 遣使北燕 且叙宗族 北燕王雲 遣 侍御史李拔報之
.
雲祖父高和 句麗之支 屬 自云高陽氏之苗裔 故以高爲氏焉.
慕 容寶之爲太子 雲以武藝侍東宮 寶子之 賜姓慕容氏三月 ― 髙句麗遣使聘北燕 且叙宗族 北燕王雲 遣侍御史 李㧞報之
(
資治通鑑 卷114
晉紀36
安帝己 義熙4
년).
慕容雲 字子雨 寳之養子也 祖父髙和 句驪之支庶 自云髙 陽氏之苖裔 故以髙為氏焉 ― 寳之為太子 雲以武藝給事 侍東宫 拜侍御郎 襲敗慕容㑹軍 寳子之 賜姓慕容氏
(
晉 書 卷124
載紀24
慕容雲).
동천왕
20
년 기록에 전하는‘
魏將到肅愼南界 刻石紀功 又到丸都山 銘不耐城而歸’
란 기사는 양서 고구려 전에 전하는 기록과 흡사한 바,
이것의 원전은 양서의 기록이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資治通鑑 卷75
魏 紀7
邵陵厲公 正始 七年(246) 2
월 기록에‘
見王侵叛中國’
이란 문장은 보이지 않지만,
그러나 이 기록 앞에‘
以髙句驪王位宫數為侵叛’
이란 문장이 기술되어 있는 바,
삼국사기 찬자가 이것을 근거로 하여‘
見王侵叛 中國’
이라고 작문하는 것도 그리 어렵지 않을 듯싶다.
이밖에 득래에 관한 일화를 소개한 고구려본기와 자 치통감의 기록이 거의 일치한다.
17) 결과적으로 삼국사기 찬자는 자치통감과 양서에 전하는 기록을 조합하여 동천왕20
년 기록의‘
是役也’
이하를 찬술한 셈이 된다.
광개토왕
17
년3
월 기록의 앞 부분은‘
高句麗’
를 제외하면 資治通鑑 卷114
晉紀36
安帝 義熙4
년3
월 기록과 거의 일치한다.
高雲(
慕容雲)
의 가계는 자치통감에도 전한다.
18) 그러나 여기에 慕容寶가 태자가 되었을 때,
고운이 武藝로서 東宮에서 侍衛하였다는 사실과 모용보가 그를 아들로 삼아 모용씨를 사여하였다 는 사실은 전하지 않는다.
두 가지 사실이 모두 전하는 기록이 바로 晉書 卷124
載紀24
慕容雲 기록이다.
여기에 비록 고운이‘
句麗之支屬’
이 아니라‘
句驪之支庶’
라고 전하지만, ‘
支屬’
과‘
支庶(
支孫)’
가 상통하는 용어 이므로 삼국사기 찬자가 진서의 기록을 원전으로 광개토왕17
년3
월 기록의‘
雲祖父高和’
이하 부분을 찬술하였다고 보아도 이견이 없을 것이다.
그런데 광개토왕대 이전 고구려본기 기록 가운데 후한서와 자치통감 이외에 魏書 高句麗傳
,
梁書17) 得來에 관한 일화는 三國志 卷28 魏書28 列傳第28 毌丘儉 기록에도 전한다. 그런데 여기에서 득래의 관등이 沛者라고 하였고, 아울러 여기에 다른 기록에 보이지 않는 ‘舉國賢之’란 표현이 더 보이고 있다.
18) 資治通鑑 卷109, 晉紀31 安皇帝(安帝) 隆安 3年, “以高雲為建威將軍 封夕陽 公養以為子 雲高句麗之支屬也. 高句麗 自云 高陽氏之後裔 故以高為氏. 燕王皝破高句麗 徙於青山. 由是 世為燕臣 雲沈厚寡言.”
高句驪傳 및 冊府元龜의 기록이 원전인 경우도 발견할 수 있다
.
먼저 고구려 건국신화에서 위서 고구려 전의 기록을 인용한 실례를 찾을 수 있는데,
이에 관해서는 뒤에서 자세하게 언급할 것이다.
신대왕이 大加 優居와 主簿然人 등을 보내 玄菟太守 公孫度를 도와 富山賊을 토벌하였다는 내용의 신대왕5
년 기록과 비슷 한 내용이 삼국지 위서 동이전 고구려전에 보인다.
19) 그런데 여기에서 公孫度가 玄菟太守라고 밝히지 않 았다.
반면에 冊府元龜 卷973
外臣部 助國討伐 靈帝 建寜2
年 기록에서 공손도가 玄菟太守임을 분명하게 적기하고 있다.
20) 삼국사기 찬자는 이것을 원전으로 하여 신대왕5
년 기록을 찬술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魏의 司馬宣王(
司馬懿)
이 公孫淵을 토벌한 사실을 전하는 동천왕12
년(238)
기록에서 司馬宣王을 太傅라고 명기하였다.
그런데 三國志 魏書卷3
明帝紀第3
景初2
년 기록 및 양서 고구려전,
冊府元龜 卷973
外 臣部 助國討伐 魏明帝 景初3
年 기록에서는 사마선왕을 太師라고 기술하였으나 양서 고구려전과 북사고려전에서는 太傅라고 기술하였다
.
따라서 동천왕12
년 기록의 원전은 이 두 사서에 전하는 기록이라고 볼 수 있다.
미천왕
31
년(330)
과 고국원왕6
년(336) 3
월 기록은 고구려가 後趙와 東晉에 사신을 파견한 사실을 전하 는 것이다.
전자는 晉書 권105
載紀第5
石勒 기록에서 인용하였음이 분명하다.
후자의 기록을 보면,
고구 려가336
년3
월에 동진에 사신을 파견하였다고 오해하기 쉽다.
그런데 정확한 月을 알지 못하는 기사의 경 우,
그것을 해당 연도의 말미에 첨입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21) 이에 따른다면,
고국원왕6
년3
월에 큰 별이 서북쪽으로 흘러갔고,
이 해에 고구려가 동진에 사신을 파견하였다고 이해할 수 있다.
晉書 권7
帝紀第7
成帝 咸康2
년(336)
기록에서는 이 해2
월에 고구려가 동진에 사신을 파견하였다고 분명하게 밝힌 반면,
冊 府元龜 卷968
外臣部 朝貢第1
咸康2
년 기록에서는 단지 이 해에 동진에 사신을 파견하였다고 기술하였을 뿐이다.
晉書 帝紀의 기록을 참조하였다고 하더라도,
고국원왕6
년 사신 파견 기록의 원전은 冊府元龜에 전하는 기록이었다고 봄이 옳을 것이다
.
고국원왕
10
년(340)
기록에 이 해에 왕이 燕王 慕容皝에게 世子를 보내 朝會하게 하였다고 전하는 것에 반하여,
晉書 卷109
載紀第9
慕容皝 기록에서는 咸康4
년(338)
의 일로 전하여 차이를 보인다.
자치통감卷
96
晉紀18
顯宗成皇帝 咸康5
년(339)
기록에는 이 해에 모용황이 쳐들어오자,
고국원왕이 盟約을 요구하 였다고 전하고,
삼국사기 찬자는 그것을 고구려본기 고국원왕9
년(339)
기록에 그대로 옮겨 실었다.
그런 데 자치통감에 고국원왕이 세자를 모용황에게 보내 조회하게 하였다는 기사는 전하지 않는다.
삼국사기찬자는 晉書 載紀의 기록을 인용하여 고구려본기에 첨입하였음이 확실시된다
.
아마도 그들은 진서에 함강
3
년(337)
에 고국원왕이 모용황에게 맹약을 요구하고,
그 다음 해에 세자를 연나라에 파견하였다고 전하는사실과22) 아울러 함강
5
년(339)
에 고국원왕이 모용황에게 맹약을 요구하였다는 내용이 자치통감에 전하19) 三國志 魏書 東夷傳 高句麗, “靈帝建寜二年(169) 玄菟太守耿臨討之 斬首虜數百級 伯固降屬遼東 公孫度之雄海東也 伯固遣 大加優居主簿然人等助度 擊富山賊 破之.”
20) 冊府元龜 卷973, 外臣部 助國討伐 靈帝 建寜 2年, “是年 高句麗伯固 遣大加優居主簿然人等 助玄菟太守公孫度 擊富山賊 討平之.”
21) 이강래, 삼국사기 형성론, 신서원, 2007, 273~274쪽.
22) 晉書 卷109, 載記第9 慕容皝, “咸康三年 ― 皝稱燕王 其年 皝伐高句麗王釗 乞盟而還. 明年 釗遣其世子 朝於皝”.
연대 고구려본기 중국 사서 비고
태조왕
62
년(114)
春三月 日有食之三月 癸酉 日有食之
(
後漢書 卷5
安帝紀 元初 元年)
고구려본기에 癸酉가 보이지
않음
.
태조왕
64
년(116)
春三月 日有食之三月 辛亥 日有食之
(
後漢書 卷5
安帝紀 元初3
年)
고구려본기에 辛亥가 보이지
않음
.
태조왕72
년(124)
秋九月 庚申晦 日有食之 九月 庚申晦 日有食之(
後漢書 卷5
安帝紀第5
延光3
年)
는 사실을 모두 고려한 다음
,
자치통감에 전하는 기년을 존중하여,
고국원왕이 世子를 모용황에게 보내 조 회하게 하였다는 내용의 기사를 모용황에게 맹약을 요구한 그 다음 해인 咸康6
년(340),
즉 고국원왕10
년 의 일로 인용하여 서술한 것으로 추론해볼 수 있다.
23)한편 고구려본기 고국원왕
12
년(342) 10
월과11
월 기록은 전연의 慕容皝이 고구려를 공격하여 丸都城을 함락시킨 사실을 전하는 내용이다. 10
월 기록은 資治通鑑 卷97
晉紀19
顯宗(
成帝)
咸康8
년(342)
겨울10
월 기록을 발췌 요약하였음이 확인된다. 11
월 기록 역시 일부만을 제외하고,
거의 그대로 자치통감의 기록 을 옮겼다고 볼 수 있는데,
다만 후자에‘
釗(
故國原王)
單騎走輕車’
라고 전하는 것에 반하여 전자에‘
王單騎走 入斷熊谷’
이라고 전하고,
또한 전자에‘
由是 皝不復窮追’
란 문장이 더 추가되어 있음을 살필 수 있다.
斷熊谷 이란 지명은 중국 사서에서 찾을 수 없다.
그런데 삼국사기 지리지 三國有名未詳地分條에 단웅곡이 전한 다.
종래에 三國有名未詳地分條의 원전은 삼국사기 편찬 이전에 간행된 어떤 사서였다고 이해하였다.
24) 이에 따른다면,
단웅곡이 포함된 어떤 자료를 삼국사기 찬자가 고구려본기를 찬술하면서 참고하였다고 볼 수 있다.
아마도 삼국사기 찬자는 거기에 실린 기록이 매우 소략하였기 때문에 자치통감의 기록을 원전 으로 고국원왕12
년10
월과11
월 기록을 찬술하면서,
환도성이 함락되자,
고국원왕이 말 한필을 몰고 도망 가 단웅곡으로 들어갔다는 내용을 추가하여 첨입한 것으로 추정된다.
25)삼국사기 찬자는 중국 왕조와 고구려가 접촉한 사실을 전하는 기록과 더불어 日食
·
星變 관련 기록도 중국 사서에서 인용하여 고구려본기에 첨입하였음을 살필 수 있다. <
표2>
는 이와 관련된 기록들을 정리한 것이다.
<표 2> 광개토왕대 이전 고구려본기에 보이는 日食·星變 기록 일람26)
23) 종래에 정호섭선생은 삼국사기 찬자의 실수로 인하여 기년상 2년의 차이가 발생하였을 가능성이 높다고 이해하였다(정호 섭,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4~5세기의 기록에 대한 검토」, 신라문화 38, 2011, 28쪽).
24) 高寬敏, 앞의 책, 1996에서 고국양왕대까지의 지명은 新集으로부터, 광개토왕대 이후의 지명은 구삼국사로부터 摘記한 것으로 이해하였다. 반면에 임기환, 앞의 논문, 2006, 49~73쪽에서는 三國有名未詳地分條 찬술의 원전이 바로 고구려본기 찬술의 기본 전거였고, 구삼국사나 기타 다른 고기류는 보조 전거 자료로 활용되었다고 주장한 바 있다.
25) 이밖에 고구려본기 태조왕 70년, 태조왕 94년 8월, 동천왕 10년 2월, 고국양왕 2년 6월 기록은 고구려의 자체 전승기록을 原典으로 하면서도 後漢書 卷5 安帝紀5 延光 元年 2월, 後漢書 高句驪傳, 三國志 魏書卷3 明帝 靑龍 4年 7월, 資治 通鑑 卷106 晉紀28 烈宗孝武皇帝 太元 10年 윤5월과 6월 기록을 참조하여 서술한 사례에 해당한다.
연대 고구려본기 중국 사서 비고 차대왕
4
년(149)
夏四月 丁卯晦 日有食之 夏四月 丁卯晦 日有食之(
後漢書 卷7
桓帝紀第7
建和3
年)
차대왕13
년(158)
夏五月 甲戌晦 日有食之 夏五月 甲戌晦 日有食之(
後漢書 卷7
桓帝紀第7
延熹 元年)
신대왕14
년(176)
冬十月 丙子晦 日有食之 冬十月 丙子晦 日有食之(
後漢書 卷8
靈帝紀第8
光和 元年)
고국천왕4
년(182)
秋七月 星孛于大微七月 有星孛于太微
(
後漢書 卷8
靈帝紀第8
光和5
年)
고국천왕
8
년(186)
夏四月 乙卯 熒感守心
.
五月 壬辰晦 日有食之(
中平)
三年 四月 熒惑逆行守心後星(
後漢書 卷22
天文志第12
天文下)
五月 壬辰晦 日有食之(
後漢書 卷8
靈帝紀第8
中平3
년)
후한서의 기록에 乙卯가
보이지 않음
.
산상왕
21
년(217)
冬十月 星孛于東北冬有星孛于東北
(
後漢書 卷9
憲帝紀第9
建安22
年)
후한서에
10
월이란 표현은보이지 않음
.
산상왕23
년(219)
春二月 壬子晦 日有食之 春二月 壬子晦 日有食之(
後漢書 卷9
憲帝紀第9
建安24
年)
서천왕4
년(273)
秋七月 丁酉朔 日有食之 秋七月 丁酉朔 日有食之(
晉書 卷3
帝紀第3
武帝 泰始9
年)
미천왕 원년(300)
十二月 星孛于東方十二月 彗星見于東方
(
晉書 卷4
帝紀第4
惠帝 永康 元年)
광개토왕대 이전의 고구려본기에 星變 관련 기록이 적지 않게 전한다
.
그런데<
표2>
에서 보듯이 중국 사 서에 대응되는 경우는 매우 적었던 것이다.
더구나 이 가운데 고구려본기의 기록과 중국 사서에 전하는 기록 이 완전히 일치하는 경우는 고국천왕4
년과 미천왕 원년12
월의 사례뿐이다.
고국천왕8
년의 경우,
고구려본 기에 乙卯라는 간지가 보이지만,
중국 사서에는 이것이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산상왕21
년의 경우,
고구려 본기에서는 겨울10
월에 살별(
星孛)
이 동북쪽에 나타났다고 하였고,
중국 사서에서는 단지 겨울에 살별이 동 북쪽에 나타났다고 언급하였을 뿐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두 기록은 중국 사서에서 인용한 것이라기보다는 고 구려 자체의 전승 기록에서 인용하였다고 봄이 자연스러울 것이다.
星變 관련 기록과 달리 고구려본기에 전 하는 日食 관련 기록과 대응되는 것을 모두 중국 사서에서 찾을 수 있다.
다만 태조왕62
년과64
년의 경우,
고구려본기에 癸亥와 辛酉 등의 干支가 보이지 않는 점이 유의된다.
光武帝 建武
2
년(
기원26)
에서 建安25
년(220)
까지의 후한서 본기에 전하는 일식 관련 기사는67
건이 다.
그런데 이 시기에 고구려본기에 전하는 일식 관련 기사는 겨우10
건에 불과하다.
이에 의거하여 고구려 본기의 일식 관련 기사는 고구려 자체 전승기록에 전하는 것을 그대로 인용하고,
干支와 관련된 정보를 중국 26) 고구려본기에 전하는 日食·星變 기록 가운데 중국 사서에 대응되는 기록이 발견되는 경우만을 정리하였음을 밝혀둔다.사서의 기록을 참조하여 추가하였다고 추론해볼 수도 있다
.
현재 고구려본기 태조왕과 차대왕대 기록의 기년 은 그대로 믿기 어렵다고 알려졌다.
27)고구려본기에 전하는 태조왕·
차대왕대의 日食 기사와 대응되는 것을 중국 사서에서 모두 찾을 수 있다.
만약에 대응되지 않는 기사가1
건이라도 고구려본기에 전한다면,
일식 기 사의 원전은 고구려 자체의 전승기록이라고 주장할 수 있는 여지가 전혀 없지 않지만,
그러나 아쉽게도 그러 한 기사는1
건도 보이지 않는다.
28) 더구나 고구려본기와 중국 사서의 기록이‘
干支+
朔 또는 晦’
까지 완전히 일치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라는 점도 유념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이와 같은 여러 정황을 두루 감안하건대,
기존의 연구에서 주목한 바와 같이 삼국사기 찬자가 중국 사서에서 일식 관련 기사를 선택적으로 인용하 여 고구려본기에 첨입하였다고 봄이 합리적이라고 판단된다.
29)2. 신라·백제본기의 인용
신라본기 기록의 원전을 추적한 결과
,
雜志와 列傳 등에서 인용한 것이 여럿 존재하였음을 확인할 수 있 다.
30) 그런데 고구려본기의 기록 가운데 잡지의 기록이 원전인 경우는 한 건도 찾을 수 없다.
한편 열전에 입전된 고구려의 인물 가운데 乙巴素,
密友·
紐由,
明臨答夫,
倉助利 등이 광개토왕대 이전에 생존한 경우에 해당한다.
그런데 약간 표현상에 출입이 있기는 하지만,
고구려본기에 전하는 정보를 뛰어넘는 내용을 열전 에서 전혀 찾을 수 없는 바,
31) 이들 인물의 열전에 전하는 기록은 대체로 고구려본기의 기록을 원전으로 하 여 찬술되었다고 봄이 옳을 것이다.
이를 통하여 신라와 달리 고려시대까지 전승된 고구려 관련 자료가 매우 빈약하였음을 엿볼 수 있음은 물론이다.
고구려본기에서 인용한 국내 자료 가운데 그 원전을 추적할 수 있는 경우는 백제본기와 신라본기의 기록 에서 인용한 사례뿐인데
,
먼저 신라본기의 기록이 원전인 실례들을 정리하면 다음<
표3>
과 같다.
27) 이에 대한 자세한 내용과 관련하여 노태돈, 앞의 책, 1999, 79~84쪽이 참조된다.
28) 참고로 고구려본기에 양원왕 10년(554) 12월 晦에 일식이 일어났다고 전하지만, 중국 사서에서 이에 대응되는 기록을 찾을 수 없다. 그러나 광개토왕대 이전의 고구려본기에서 이와 같은 사례를 발견할 수 없다.
29) 飯島忠夫, 「三國史記の日蝕記事について」, 東洋學報 15: 3, 東洋文庫, 1926.
30) 전덕재, 「삼국사기 신라본기 중고기 기록의 원전과 완성」, 역사학보 226, 2015a, 14~17쪽; 전덕재, 「삼국사기 신라 본기 중·하대 기록의 원전과 완성」, 대구사학 120, 2015b, 32~34쪽.
31) 명림답부열전은 고구려본기 신대왕 2년과 8년 기록을 원전으로 하여 찬술한 것으로 보인다. 다만 열전에 ‘漢玄菟郡太守耿 臨發大兵欲攻我’란 문장이 추가되어 있음이 확인되는데, 아마도 신대왕 4년 기록에 漢 玄菟郡太守 耿臨이 고구려를 침략하 였다는 기사를 참고하여 열전의 찬자가 이것을 명림답부열전에 첨입하지 않았을까 추정된다. 을파소열전의 경우, 左可慮 등 이 반란을 일으킨 사실을 요약 정리한 내용을 제외한 나머지는 고국천왕 13년 4월 기록과 거의 일치한다. 한편 창조리열전 은 봉상왕 9년 8월 기록과 거의 동일하며, 다만 후자에서 ‘왕이 국내 남녀 15세 이상을 징발하였다(王發國內男女年十五已 上)’고 서술한 반면, 전자에서는 ‘왕이 국내 정남 15세 이상을 징발하였다(王發國內丁男年十五已上)’고 기술한 점이 차이가 날뿐이다. 밀우·유유열전의 내용은 동천왕 20년 8월과 10월 기록에 전하는 것과 대동소이하다.
<표 3> 신라본기의 기록이 원전인 광개토왕대 이전 고구려본기의 기록 일람
연대 고구려본기 신라본기
대무신왕
20
년(37)
王襲樂浪 滅之.
高句麗王無恤襲樂浪滅之.
其國人五千來投 分居六部(
儒理尼師今
14
年).
동천왕
19
년(245)
冬十月 出師侵新羅北邊.
冬十月 高句麗侵北邊.
于老將兵出擊之 不克 退保馬頭柵.
其夜 苦寒 于老勞士卒 躬燒柴煖之 群心感激(
助賁尼師今16
年).
동천왕
22
년(248)
春二月 新羅遣使結和.
二月 遣使高句麗結和(
沾解尼師今2
年).
고국양왕
9
년(391)
春 遣使新羅修好 新羅王遣姪實聖 爲質
.
春正月 高句麗遣使
.
王以高句麗强盛 送伊飡大西知子實聖爲質(
奈勿尼師今37
年).
대무신왕
15
년(32) 4
월 기록에 고구려가 崔理의 樂浪國을 공격하여 항복을 받았다고 전한다.
종래에 이 기록에서 고구려 대무신왕의 왕자 好童이 沃沮로 놀러갔을 때,
樂浪王 崔理를 만났다고 언급한 사실을 근거 로 하여 최리의 낙랑국을 옥저 근처,
즉 함경도나 강원도 북부 동해안지역에 위치하였다고 알려진 領東7
縣 과 관련시켜 이해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32) 대무신왕15
년4
월 기록에서 고구려가 최리의 낙랑국을 공격하 여 항복을 받았다고 분명하게 언급하였는데,
그로부터5
년 뒤에 다시 고구려가 낙랑국을 습격하여 멸망시켰 다고 기록한 것은 무엇인가 석연치 않다는 느낌이다.
종래에 이러한 이유 때문에 일반적으로 삼국사기 찬 자가 신라본기 유리이사금14
년 기록을 요약하여 고구려본기에 첨입하였다고 이해하였던 것이다.
33) 대무신 왕20
년과 유리이사금14
년 기록의 紀年이 같고,
또한 신라본기에 전하는 정보의 양이 훨씬 많았음을 감안하 건대,
나름 일리 있는 판단으로 여겨진다.
동천왕
19
년10
월과 조분이사금16
년10
월 기록을 비교하면,
정보의 양이 후자가 압도적으로 많음을 쉽 게 인지할 수 있다.
여기다가 후자에는 昔于老가 등장하고,
馬頭柵이라는 지명도 언급되어 있기까지 하다.
이러한 측면을 두루 감안하건대,
전자는 후자를 저본으로 하여 찬술한 것으로 봄이 옳을 것이다.
동천왕22
년2
월과 첨해이사금2
년2
월 기록은 정보의 양이 엇비슷하기 때문에 어느 기록이 원전이라고 선뜻 판단하 기 어렵다.
그러나 여기서 한 가지 유념할 사항은 이것들은 동천왕19
년(245) 10
월 및 조분이사금16
년10
월 기록과 유기적으로 연관성을 지녔다는 점이다.
毌丘儉紀功碑에는 正始
5
년(244)
에 毌丘儉이 고구려를 공격하였고,
그 다음 해(
동천왕19) 5
월에 다시 魏 軍이 고구려를 공격하였음을 시사해주는 내용이 언급되어 있다.
34)주지하듯이 이때 위군의 침략으로 동천왕 이 동옥저와 북옥저지역으로 피신하는 등 고구려가 커다란 위기를 맞이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동천왕19
32) 김기흥, 고구려 건국사, 창작과 비평사, 2002, 180~182쪽; 문안식, 한국 고대사와 말갈, 혜안, 2003, 148쪽; 전덕재,
「이사금시기 신라의 성장과 6부」, 신라문화 21, 2003, 17~18쪽; 임기환, 「고구려와 낙랑군의 관계」, 한국고대사연구
34, 2004, 146~148쪽.
33) 이강래, 앞의 책, 1996, 82~83쪽; 임기환, 앞의 논문, 2004, 146~147쪽. 34) 毌丘儉紀功碑에 ‘督七牙門討句驪五’, ‘復遣寇六年五月旋’이라는 기록이 보인다.
년
,
즉245
년10
월에 고구려가 신라 북변을 습격하였다는 사실을 쉽게 납득하기 어렵다.
물론 신라본기 이사 금시기 기록의 기년 역시 그대로 신뢰하기 어렵다는 사실은 새삼스럽게 여기서 재론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이에 따른다면,
고구려가 신라 북변을 침략하자,
석우로가 군대를 이끌고 출동하였던 해가 딱히245
년이라고 말하기도 어렵지 않을까 한다.
이처럼 신라본기 초기 기록의 기년을 신뢰하기 어렵다는 점,
동천왕19
년(245)
에 고구려가 신라를 침략할 여유가 없었다는 점 등을 염두에 둔다면,
신라가 고구려에 사신을 파견하여화친을 맺은 시점 역시 딱히
248
년이라고 단정하기 곤란할 것이다.
앞에서 동천왕
19
년10
월 기록의 원전은 신라본기의 기록이라고 언급하였다.
이에서 본래 신라본기 조분이 사금16
년 기록에 고구려가 신라 북변을 침략하자,
석우로가 군대를 이끌고 출동하였다가 이기지 못하였다는 내용이 실려 있었고,
이로부터3
년 뒤에 해당하는 첨해 이사금2
년 봄2
월조에 신라가 고구려에 사신을 파견 하여 화친을 맺었다는 내용이 기술되어 있었다고 추론해볼 수 있다.
아마도 삼국사기 찬자는 후자의 기록을 참조하여 같은 기년에 해당하는 동천왕22
년2
월 기록에 동일한 내용을 첨입하였던 것으로 이해된다.
고구려본기 고국양왕
9
년 봄과 나물이사금37
년 정월 기록은 신라가 실성을 고구려에 볼모로 보냈다는 내 용이다.
전자에서는 실성이 신라왕의 동생이라고 표기하였고,
후자에서는 이찬 대서지의 아들이라고 기술하 여 차이를 보인다.
실성을 볼모로 보낸 시점을 전자에서는 이 해 봄이라고 표기한 반면,
후자에서는 구체적 으로 이 해 봄 정월이라고 밝히고 있다.
두 기록에 전하는 정보가 서로 달랐음을 염두에 둔다면,
전자의 원전 이 후자라고 보기는 곤란할 듯싶다.
그런데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 고국양왕이 재위9
년만에 사망하였다 고 전한다.
광개토왕릉비에 永樂5
년이 乙未年라고 전하는데,
이에 따른다면 광개토왕 원년은391
년으로 볼 수 있다.
踰年稱元法에 따른다면,
고국양왕은390
년에,
卽位年 稱元法에 따른다면,
고국양왕은 재위8
년만인391
년에 사망하였다고 보아야 한다.
나물이사금37
년은 기년상으로392
년에 해당하는 바,
어떠한 경우라도 실성이 고구려에 볼모로 간 것은 광개토왕대라고 볼 수밖에 없다.
본래 고구려 당대에 편찬된 사서에는 광개 토왕대에 실성이 고구려에 볼모로 왔다고 기술되어 있었을 텐데,
삼국사기 찬자가 고국양왕이 재위9
년만 에 사망하였다고 전하는 고구려본기의 전거 자료에 의거하여,
실성에 관한 사항을 나물이사금37
년의 기년에 해당하는 고국양왕9
년조에다 기술한 것이 아닐까 한다.
35) 이와 같은 추론에 커다란 문제가 없다면,
삼국 사기 찬자가 본기를 찬술할 때에 고구려본기가 아니라 신라본기의 기록을 준거 자료로서 활용하였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이상에서 광개토왕대 이전 고구려본기 기록 가운데 신라본기의 기록이 원전인 사례들을 살펴보았다
.
이외 에 고구려본기의 기록 가운데 백제본기의 기록이 원전인 사례도 다수 발견할 수 있다.
35) 종래에 실성이 고구려에서 신라로 還國하였다는 기록이 신라본기에만 전하는 사실을 주목하여 고국양왕 9년 봄조의 원전을 신라본기의 기록으로 이해하기도 하였다(이강래, 앞의 책, 1996, 96~97쪽).
<표 4> 백제본기의 기록이 원전인 고구려본기의 기록 일람
연대 고구려본기 백제본기
유리명왕
2
년(
기원전18)
百濟始祖溫祚立.
百濟始祖溫祚王 其父鄒牟 或云朱蒙.
― 以十臣爲輔翼 國號十 濟 是前漢成帝鴻嘉三年也(
시조 온조왕 즉위년).
대무신왕
2
년(19)
百濟民一千餘戶來投.
夏四月 旱 至六月乃雨.
漢水東北部落饑荒 亡入高句麗者一千餘戶 浿帶之間 空無居人
(
온조왕37
년).
고국원왕
39
년(369)
秋九月 王以兵二萬南伐百濟 戰於雉壤 敗績
.
秋九月 高句麗王斯由帥步騎二萬 來屯雉壤 分兵侵奪民戶
.
王 遣太子以兵徑至雉壤 急擊破之 獲五千餘級 其虜獲分賜壯士(
근초고왕24
년).
고국원왕
41
년(371)
冬十月 百濟王率兵三萬 來攻平壤城
.
王 出師拒之 爲流矢所中 是月二十三日薨 葬于故國之原.
高句麗擧兵來 王聞之 伏兵於浿河上 俟其至 急擊之 高句麗兵 敗北
.
冬 王與太子帥精兵三萬 侵高句麗攻平壤城.
麗王斯由力 戰拒之 中流矢死,
王引軍退(
근초고왕26
년).
소수림왕
5
년(375)
秋七月 攻百濟水谷城.
秋七月 高句麗來攻北鄙水谷城 陷之.
王遣將拒之 不克.
王又 將大擧兵報之 以年荒不果(
근초고왕30
년).
소수림왕
6
년(376)
冬十一月 侵百濟北鄙.
冬十一月 高句麗來侵北鄙(
근구수왕2
년).
소수림왕
7
년(377)
冬十月 百濟將兵三萬 來侵平壤城
.
十一 月 南伐百濟.
冬十月 王將兵三萬 侵高句麗平壤城
.
十一月 高句麗來侵(
근구 수왕3
년).
고국양왕
3
년(386)
秋八月 王發兵南伐百濟.
八月 高句麗來侵(
진사왕2
년).
고국양왕
6
년(389)
秋九月 百濟來侵 掠南鄙部落而歸.
秋九月 王遣兵 侵掠高句麗南鄙(
진사왕5
년).
고국양왕
7
년(390)
秋九月 百濟遣達率眞嘉謨攻破都押城 虜 二百人以歸
.
九月 王命達率眞嘉謨伐高句麗 拔都坤城
,
虜得二百人(
진사왕6
년).
광개토왕 원년
(391)
36)秋七月 南伐百濟拔十城
.
冬十月 攻陷百 濟關彌城.
其城四面峭絶 海水環繞 王分 軍七道 攻擊二十日乃拔.
秋七月 高句麗王談德帥兵四萬 來攻北鄙 陷石峴等十餘城
.
王 聞談德能用兵 不得出拒 漢水北諸部落多沒焉.
冬十月 高句麗 攻拔關彌城(
진사왕8
년).
광개토왕
2
년(392)
秋八月 百濟侵南邊 命將拒之.
秋八月 王謂武
(
眞武)
曰 關彌城者 我北鄙之襟要也.
今爲高句 麗所有 此寡人之所痛惜 而卿之所宜用心而雪恥也.
遂謀將兵 一萬 伐高句麗南鄙.
武身先士卒 以冒矢石 意復石峴等五城 先 圍關彌城 麗人嬰城固守.
武以糧道不繼 引而歸(
아신왕2
년).
광개토왕
3
년(393)
秋七月 百濟來侵
.
王率精騎五千逆擊 敗之 餘寇夜走
.
秋七月 與高句麗戰於水谷城下 敗績(
아신왕3
년).
광개토왕
4
년(394)
秋八月 王與百濟戰於浿水之上 大敗之 虜獲八千餘級
.
秋八月 王命左將眞武等伐高句麗 麗王談德親帥兵七千 陣於浿 水之上 拒戰
.
我軍大敗 死者八千人(
아신왕4
년).
36) 고구려본기에는 광개토왕이 392년에 즉위하였다고 전하지만, 광개토왕릉비에는 391년이 광개토왕 원년으로 전하고 있다. 광개토왕릉비에 의거하여 광개토왕대의 기년을 이와 같이 조정하였음을 밝혀둔다.
신라본기 始祖 赫居世居西干
21
년과40
년 기록에 고구려 시조 東明과 백제 시조 溫祚가 왕위에 올랐다고 전한다.
물론 이 기록들의 원전은 고구려본기와 백제본기의 건국신화임을 말할 필요조차 없을 것이다.
마찬 가지로 삼국사기 찬자는 백제 건국신화에 의거하여 유리명왕2
년조에 백제 시조 온조가 왕위에 올랐던 사 실을 기술한 것으로 이해된다. <
표4>
에서 정리한 고구려본기와 백제본기의 기록들을 상호 비교해볼 때,
백 제본기 기록의 정보보다 더 적은 경우는 대무신왕2
년,
고국원왕39
년,
소수림왕5
년7
월,
광개토왕 원년7
월,
광개토왕2
년8
월,
광개토왕4
년8
월 기록 등이다.
반면에 고구려본기 기록의 정보량이 더 많은 경우는 광개토왕 원년10
월과 광개토왕3
년7
월 기록에 불과하다.
나머지는 정보량이 거의 비슷한 경우에 해당한다.
백제본기 기록에 비하여 정보량이 매우 적은 고구려본기의 기록을 면밀하게 살펴보면,
대체로 백제본기에 전하는 기록을 매우 간략하게 요약한 것임을 쉽게 파악할 수 있다.
삼국사기 찬자가 백제본기의 기록을 전 거 자료로 삼아 동일한 기년에 해당하는 고구려본기의 기록에 그 내용을 간략하게 요약하여 첨입하였음을 시 사해주는 측면으로 유의된다.
종래에 이에 관해서 충분한 검토가 이루어졌기 때문에 본고에서 더 이상의 언 급은 자제하도록 하겠다.
37)여기서 문제는 고구려본기 기록의 정보량이 더 많은 경우,
과연 백제본기 기록의 원전이 고구려본기의 기록으로 볼 수 있는가의 여부와 더불어 정보량이 서로 비슷한 경우,
과연 고구려본기 와 백제본기의 기록 가운데 어느 것이 원전이냐의 여부에 관해서이다.
고구려본기 광개토왕 원년
10
월과 백제본기 진사왕8
년10
월 기록은 고구려가 백제 관미성을 공격하여 함락시켰다는 내용이다.
전자에 전하는 정보량이 후자에 전하는 것보다 훨씬 많은 것을 참고하건대,
후자의 원전은 전자로 봄이 옳을 것이다.
광개토왕3
년7
월 기록은 백제가 침략해오자,
왕이 직접 精騎5
천을 거느 리고 맞아 싸워 이겼고,
나머지 적들이 밤에 도주하였다는 내용이다.
그런데 백제본기 아신왕3
년7
월 기록 에서는 백제가 고구려와 水谷城 밑에서 싸워 패하였다고 언급하였다.
전자와 후자에 전하는 정보 내용이 서 로 다른 것이 특징적인데,
여기서 두 가지 가능성을 상정해볼 수 있다.
하나는 수곡성전투에 관한 고구려와 백제 자체의 전승기록에 의거하여 서술하였을 가능성이고,
또 하나는 각기 다른 전투를 전하였을 가능성이 다.
광개토왕대 고구려본기 기록의 기년이 실제보다1
년 늦게 설정되어 있음을 감안하건대,
필자는 후자의 가능성에 더 무게를 두고 싶지만,
여기서 확정적으로 말하기 곤란하기 때문에 일단 추후의 과제로 남겨두고 자 한다.
이밖에 고구려 자체의 전승기록이 원전인 사례로서 고국원왕
41
년10
월 기록을 들 수 있다.
내용상 백제 본기 근초고왕26
년 기록이 더 자세하지만,
여기에 고국원왕이 이 해10
월23
일에 사망하였다고 언급한 내 용은 보이지 않는다.
이는 고구려 자체 전승자료에서 인용한 것이 분명하다.
다만 고구려의 자체 전승자료에 단지 斯由,
즉 고국원왕이 이 해10
월23
일에 사망하였다고 전할 뿐이고,
평양성전투에서 화살을 맞고 왕이 사망하였다는 내용은 전하지 않았을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하기 힘들다.
이와 관련하여 日本書紀 권17
繼 體天皇25
년 겨울12
월 기록에‘
이 달에 고려(
고구려)
에서 그 왕 安(
安藏王)
을 시해하였다’
고 전하나,
삼국 사기 고구려본기에서는 재위13
년5
월에 왕이 사망하였다고 전하는 점이 참조된다.
만약 이러한 추론에 문 37) 이강래, 「삼국사기 본기간 공유기사의 검토」, 삼국사기 전거론, 민족사, 1996; 임기환, 앞의 논문, 2006, 36~44쪽; 정호섭, 앞의 논문, 2011, 39~48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