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철학]제16강
오늘 수업에서는 <현대종교철학의 이해> 3장을 다룬다. 지난 시간에는 1, 2장과 관련해서 사고방식에 서 생활방식까지 포함하는 문화, 삶의 전환이라는 현대적 전환에 대해서 알아보았다. 현대라는 말이 자칫 시대의 흐름을 따르는, 유행을 따르는 기치를 내세우는 것처럼 들릴 수도 있지만 결코 그런 뜻이 아니다. 사상의 흐름을 인간이 자신의 삶을 더욱 적절하게 꾸려나가기 위한 사유 실험의 과정으로, 해 방을 향한 몸부림의 과정으로 읽는다면 우리 시대인 현대는 과거에 있던 시대적 전환들을 모두 싸안 은 채 인간 해방의 기치를 걸고, 그 가치를 향해서 가는 것이라 말할 수 있다. 이는 무조건적인 역사 낙관주의를 의미하지 않는다. 인간은 그런 몸부림의 과정 속에서 수많은 시행착오를 벌였고, 또 겪었 다. 역사의 진행 방향은 헤겔식으로 모든 모순과 문제가 지양되는 좋은 방향으로 간다고 할 수 없다.
인간이 더 적절한 삶을 꾸리고자, 삶의 온전한 뜻을 향하고자 벌이는 몸부림은 문명사 속에서 이런저 런 실험과 시행착오를 거쳤다. 시행착오를 했다해서 그것을 그릇되었다고 매도할 수도 없다. 하다보니 까 의도하지 않은 것이 벌어진 것이지 그 시대에는 나름대로 역할을 했다. 형이상학이 나름대로의 역 할을 했고, 고정적 우주론, 존재론 등 정지를 기준으로 세상을 보는 것이 나름대로의 역할을 했다. 하 지만 그것들을 가지고 설명하지 못하는 현실을 경험하고 그 경험이 누적되면서 시대의 전환이 이루어 진 것이다. 역사가 진보한다 말한다면, 바로 이런 의미에서 진보라 말할 수 있다. 모든 역사를 통째로 그렇게 읽을 수는 없지만 적어도 몸부림의 의도와 방향은 그렇다.
3장에서 배국원 교수는 알빈 플란팅가라는 미국의 종교철학자를 소개하면서 그에 관한 논의들을 소개 한다. 이 장에서 다루어지고 있는 이야기는 두어가지로 추릴 수 있다. 우선은 통칭 신 존재에 관한 것 이다. 고전 시대, 특히 중세 시대에는 신 존재 증명을 많이 했다. 밑도 끝도 없이 신 존재를 말하는 것 처럼 읽혀졌기 때문에 가만히 있다가 신 존재를 이야기하는 사람은 그 존재를 증명할 책임이 있었다.
그런 생각을 하지 않는 사람들, 즉 소극적, 적극적 무신론자들은 존재를 주장하는 유신론자들에게 그 런 증명을 요구했다. 유신론자들 역시 마찬가지로 그러한 증명을 자신들이 해야 할 중차대한 사명으로 삼았다. 중세에는 이것이 매우 중요한 작업이었다. 근세는 중세 방식으로는 곤란하다고 하면서도 나름 대로 신 존재 증명에 대한 논의가 있었다. 그 흐름은 존재 방식으로 있냐, 없냐에 대한 것과 증명 자 체가 가능하냐고 묻는 것이었다. 형이상학을 끌고 가려는 사람은 존재 증명의 의미 자체가 있느냐 없 느냐로 끌고 갔다. 할 수는 있는데 그것이 의미가 있냐고 하는 것이다. 그런가 하면 형이상학의 한계 에 대해 주목한 사람들, 한계에 대한 비판적인 사유를 한 사람들이 있다. 그 대표적인 사람이 칸트다.
칸트는 신 증명과 그 존재증명의 가능성에 대하여 심각하게 문제를 제기했다. 오늘날 역시 마찬가지인 데, 소개된 플란팅가의 이야기에는 현대 정신이 반영되어 있으면서도 독특한 그만의 전법이 있다. 그 의 전법이란 바로 유신론자만 증명 책임이 있는 것이 아니라 무신론자도 증명 책임이 있다는 것이다.
그 논거는 유신론을 반대하는 것과 무신론을 주장하고 입증하는 것은 다르다는 것이다.
플란팅가는 신 존재 증명의 가능성, 당위성을 주장하는 것과 이를 반대하는 것은 대립하는 것처럼 보 이나 존재에 반대하는 것이 신 부재의 증명, 입증 가능성을 바로 구축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한다. 물 론 이것은 플란팅가가 어떤 의미에서는 의도하지 않았고 초기에는 부차적으로 다루어진 것을 이후에 적극적으로 살려낸거라 볼 수도 있다. 플란팅가는 이러한 논의와 맞물려 전통적인 의미에서의 존재 증 명을 다시 옹호하는 방식, 즉 호교론적인 인식론을 전개하기 때문이다.
자, 이제 여러분은 이 대목에서 질문해야 한다. 여러분이 플란팅가를 옹호하고 지지하든지, 또는 반대 하든지 여러 가지 입장에 서서 질문과 시비를 해야 한다. 플란팅가에 대해서 여러분이 질문을 한다면
어떤 질문을 할 수 있겠는가? 플란팅가의 개혁주의 인식론이라고 하는 것은 과연 무엇인가? 여기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가? 존재 증명의 책임만큼이나 부재 증명의 책임이 있다는 그의 주장에 대해 서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그것이 타당하다고 생각하는가? 생각해보니까 그러네, 그렇지 않아도 주위에 서 신 존재에 대해서 시비하고 있는 놈들에게 어떻게 해야 할지 끙끙거렸는데 이제 해결방법을 찾았 다, 이제 역공을 할 수 있겠구나 라고 생각하는가? 그렇게 플란팅가를 규정하고 복음 선포를 하겠는 가? 어떻게 느끼는가?
Q: 저번 학기 때 종교철학수업에서 플란팅가에 대해 배웠습니다. 그때 항상 나온 비판은 플란팅가처럼 논의를 전개하면 오히려 역공을 당할 수 있는 측면이 많다는 것이었습니다. 모두 다 인식할 수 있는 기준으로서의 기초주의에 대해서 계속하면 회의한다면 입증 책임은 떠넘길 수 있습니다. 하지만 다른 믿음들에 대해, 이를테면 나는 호박귀신을 믿는다 라든지 집의 신주 단지를 신으로 믿고 있다는 식에 대해서 확인하거나 비판할 수 있는 여지를 자기 스스로도 깎아먹는 경우가 있는 것 같습니다.
A: 그러한 논의는 이 글의 끝에도 나오는데, 플란팅가에 대한 가장 일차적인 비판이라 할 수 있지.
책에 거론되지 않은 질문을 한다면 어떤 것을 할 수 있는가? 그리고 내가 픽업한 것 이외에 다른 플 란팅가의 주장에 대한 설명 중에서 여러분들이 더 새기고 꺼내서 살필 수 있는 것이 있으면 좋겠다.
Q: 지금까지의 수업에 의하면 칸트 이후로 이제 우리는 신 존재에 대해서는 알 수 없고, 그러한 방식 으로 사상의 전환이 이루어졌는데, 왜 현대에 와서 다시금 신 존재 증명이 등 장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 논리적인 명제들로 이러이러하기 때문에 있다고 말하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이 라고 믿고 있는 어떤 분을 또다시 가두는 것처럼 보여지는데요.
그것은 증명의 의미에 대한 문제이다. 형이상학은 서서히 탈형이상학적인 전환을 했다. 칸트에게서 신 은 인식론적인 한계 때문에 증명 자체가 불가능하다. 현대의 형이상학에서는 의미를 부르면서 결국은 형이상학의 껍질을 벗기는 쪽으로 갔다. 그렇다면 플란팅카의 이야기는 시대착오적이기만 하나? 우리 시대 정신의 요청에 비추어 플란팅가의 이야기는 어떻게 새길 수 있을까?
116페이지에 보면 신념의 기본성이라는 제목이 나오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라는 부제가 나온다. 이 는 플란팅가가 내세운 기본적 전략 중 하나다. 그것이 무슨 뜻인가? 여러분은 이를 어떻게 읽었는가?
이 딱딱한 표현을 일상언어로 바꾸면 어떻게 되는가?
117페이지를 보자.
“그는 우리가 인식론적으로 나 이외에 다른 사람들이 존재한다는 ‘확실하고 결정적인’ 증거와 기초를 말할 수 없다면 신의 존재에 대해서 역시 똑같은 판단이 내려져야 할 것이라고 강변하였다.”
"방법적 회의"는 데카르트 철학의 기초이다. 방법적 회의란 모든 존재를 부정하는 회의를 하다가 마지 막에 그 존재 부정이라는 사유 행위를 하고 있는 자기 자신을 발견하고 그것만큼은 부정할 수 없다는 것을 확신하는 것, 즉 인식적 자아의 확실성을 말한다. 방법적 회의의 틀 안에 담긴 모든 것들, 말하자 면 둘러싸고 있는 모든 것을 다 부정하는 것에는 신도 적용된다. 그런데 그것이 어떻게 신념의 기본성 인가? 그 다음에 설명이 나온다.
“즉 다른 사람들, 다른 정신들이 존재한다는 결정적인 증거가 확보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존 재를 믿는 것이 지극히 ‘합리적’인 것 같이 신이 존재한다는 결정적인 논증이 불가능하더라도 신의 존 재를 믿는 것은 ‘합리적’일 수 있다는 주장이었다.”
존재들은 방법적 회의에서 다 존재 부정을 당했고 그에 따라서 신도 존재 부정이 되어야 한다. 그러나 실제로는 방법적 회의를 끝내고 난 뒤에는 다시 주변 존재들의 확실성을 긍정하는 쪽으로 밀고 나간 다. 그럴 때 나 이외의 다른 것들이 증거가 없는데도 그렇게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신도 그렇다는 논 변으로 설명되고 있다. 그 기본성이란 무엇인가? 그 근본 뿌리는 어디에 자리잡고 있는가? 바로 사유 에 자리잡고 있다. 말하자면 앎이다. 어떤 논리인가? 사실 나를 둘러싼 모든 것들이 있어서 내가 아는 것이 아니라 내가 아는 것에 근거해서 아는 것이다. 앎 속에 그들이 있음으로 들어와 있는 것이다. 앎 안에 있음으로 들어와 있다. 앎 이전의 있음은 알 수 없다. 앎에 담긴 있음 뿐인데 우리는 그 있음을 마치 앎 이전의 있음이라고 간주하고 출발한다. 이것이 형이상학에 대해서 인식론이 가하는 작동 원리 였다. 그런 방식으로 사유대상이, 타자들이 앎 안에 들어와 있는 것이다. 사유의 대상이 되는 모든 타 자들은 앎의 대상이 된다. 모든 타자들이 사실은 모두 앎 안에 들어와 있는 있음, 즉 앎 이후의 있음 일 뿐이다. 플란팅가는 앎 이후의 있음을 마치 앎 이전에 있음이 있는 것처럼 간주하고 모든 삼라만상 에 대해서 논의를 전개한다면 삼라만상은 그렇게 해도 되고 신은 그렇게 하면 안 되느냐 반문하고 있 다.
Q: 데카르트식으로 본다면 내 앞에 있는 사람이 있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고백되어지는 것입니까?
A:"믿음"이란 말이 나오고 "고백"이란 말이 나오니 갑자기 중후하기도 하고 부담스러운데...
일단은 데카트르의 방법적 회의의 계기에 대해 말해보겠다. 데카르트는 열에 녹는 밀랍을 주무르면서 난로 앞에 앉는다. 그는 그 자리에서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라는 결과에 도달하는 사유 를 시작한다. 밀랍이 뜨근뜨근하니 녹고, 그와 맞추어 졸다가 난로에 머리를 박고 잠을 깼다. 그 순간 그는 저 유명한 방법적 회의의 계기를 발견했다. 잠시 졸다가 꾸었던 꿈 속에서 만나는 무수히 많은 사람들과 세계를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그건 꿈이야, 허상이야, 가짜라고 단정지어 말할 수 있는가?
꿈이 얼마나 리얼한가? 꿈 속에서 싸우면 외마디 소리를 지르기도 하고 꿈 속에서 울면 눈물도 나온 다. 몽정이라는 것도 있다. 꿈 속에서 섹스를 하면 사정을 한다. 남자뿐 아니라 여자도 그렇다. 실제로 신체 반응이 일어난다. 그만큼 꿈이 리얼하다. 꿈을 꿀 때 야 이건 가짜야 그러면 이런 일이 일어나겠 는가? 꿈 속에서 키스해보라. 그 감촉은 현실의 그것에 결코 못하지 않다. 모든 것들이 그렇다. 그런데 깨는 순간 눈 앞에서 다 없어진다.
그렇다면 도대체 둘러싸고 있는 모든 것들이 "있다"는 것은 무엇인가? 내가 그렇게 꿈 속에서 진짜 리 얼하게 알고 느끼고 체험하고 겪었던 모든 것들은 눈을 뜨면 일장춘몽처럼 사라진다. 그렇다면 현실 속에서 내가 지금 보고 있는 것, 그 대상의 "있음"은 과연 확실하다고 할 수 있는가? 꿈 안에서 감각 적 대상의 실제성은 현실에서의 감각적 대상의 실제성에 결코 못하지 않다. 감각적 실제성에 있어서 꿈과 현실에서 아무런 차이가 없다. 꿈 안에서는 그것이 가짜라고 읽혀지지 않는다. 현실이라고 우리 가 부르는 그 영역 안에서 등장하는 많은 대상의 감각적 대상의 실제성도 그런 감각 채널 이상의 것 이 아니다. 그렇다면 그것이 없지 않고 있다는 것의 확실성, 소위 꿈에서나 소위 현실에서나 적어도 감각적 대상의 실제성 간의 차이를 말할 수 없는 것 아닌가? 즉 현실에서는 있다 라고 하고 꿈에서는 없다라고 하는 근거가 감각적 대상의 실제성에서 나오지 않는다. 그럼 어디에서 나오는가? 정말 리얼 하다는 점에서 현실이나 꿈이나 동일한데 한쪽은 있다 라고 하고 한쪽은 없다 라고 한다. 무슨 근거로 그렇게 함부로 주장하는가?
방법적 회의는 꿈의 영역에서 없다 라고 한다면 현실이라고 불리는 영역에서도 없다 라는 생각을 못 해볼 이유가 없음을 밝힌다. 존재에 대해서 회의하는데 방법적 차원에서 한 것이다. 꿈에서의 것을 환 상이라고 부르는 것처럼 현실의 것을 환상이라고 부를 수도 있다, 아예 없을 수도 있다고 회의하는 것 이다. 그래서 모든 존재를 다 부정한다. 여러분이 앉아 있는 의자가 없다 라고 생각해보라. 그럼 바닥 에 떨어질 것이다. 바닥도 없애보라. 건물도 없을 것이다. 시간이 없으니 지구 자체를 없애자. 점점 없 애면 무궁한 공간이 남을 것이다. 그 공간도 없애라. 텅 빈 진공이 남나? 텅 빈 진공 자체를 없애라.
그런 식으로 계속 존재 부정의 소급을 계속한다. 공간을 없애려 하니 나도 없애야 한다. 내가 없어도 할 수 없다. 그런데 존재를 없애는 생각과 행위는 있는 것이 아닌가? 그리고 그 행위의 주체는 곧 나 다. 그러므로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가 되는 것이다. 이것은 삼단 논법이 아니다. 삼단논법으로 하려면 "생각하는 모든 것은 모두 존재한다"는 대전제가 있어야 한다. 그리고 소전제가 "나는 생각한 다"이어야 한다. 그 결과 "나는 존재한다"가 되는 것이다. 하지만 데카르트의 주장은 여기서 더 나간 것이다. 즉, 그것은 삼단논법론적 추론이 아니라 직관적 주장이다. ‘고로’는 ergo 인데 이것이 자꾸 therefore 로 번역되고 있어서 오해를 부르고 있다. 원래 뜻은 ‘즉’이다. 이것이 바로 신념의 기본성이 다. 생각한다? "생각한다"는 판단만큼 확실하다. 생각하기 때문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사유에서 존 재를 끌어내는 것이 절대로 아니다. "생각한다" 만큼은 확실하다는 것이다. 계속 존재 부정했지만 부정 하고 있는 행위만큼은 확실하다. 생각한다는 것이 확실하다면 그것이 있지 않고는 생각 못한다. 생각 은 존재를 거슬러 가리키는 것이지 생각이 존재를 끌어내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생각한다는 행위가 가능하다면 먼저 앞서서 존재하지 않고는 못 배긴다. 즉 생각에서 거꾸로 거슬러 올라가서 존재를 가 리킬 수 있다. "생각한다, 즉 이미 그런 생각에 앞서서 존재한다는 것"이다. 데카르트의 말의 뜻은 바 로 이것이다. 플란팅가의 신념의 기본성은 이와 같은 데카르트의 방법적 회의를 오늘날 맥락에서 복구 시켜보겠다는 것이다. "생각한다 즉 존재한다" 처럼 "믿는다 즉 존재한다" 라고 한다. 믿기 전에 이미 있다는 것이다.
플란팅가는 유신론자나 무신론자들이나 다 똑같다고 한다. 유신론자들은 신이 있다고 믿기 때문에 "있 다"고 주장하고, 무신론자들은 신은 "없다"고 믿기 때문에 없다고 한다. 플란팅가는 이런 점에서 유신 론이 신 존재증명의 책임이 있는 만큼 무신론도 거기에 대한 책임이 있다고 한다. 신념의 기본성이란 추론과정이기보다는 직관적 소급, 소급적 직관의 지시다. 소급이라는 말은 생각보다 더 앞선, 신념보다 더 앞선 뿌리로 거슬러 올라가서 가리키는 것이다. 끌어내는 것은 아니다. 없었던 것을 새로 만들어내 는 것이 아니다. 생각하는 행위, 믿는 행위는 확살히다. 이게 가능하려면 그 근본뿌리에 그렇게 있지 않고는 안 된다. 이것이 신념의 기본성이며, cogito ergo sum과 똑같은 논법이다.
이런 식의 사유는 현상학에서도, 특히 에드먼드 후설이 쓴 책 <<데카르트적 성찰>>에서 발견할 수 있다. 현상학에서의 현상에 대해 칸트 식으로 이야기하면 현상은 물자체이고 물 자체는 현상이다. 현 상은 겉으로 드러난 것이다. 근세적인 사고에서는 현상과 물 자체에 대한 경계가 확실했다. 칸트가 그 렇게 경계를 지어놓았다. 그 결과 칸트는 현대적인 전환의 결정적 계기가 될 수 있었다. 언젠가 이야 기한 것처럼 고중근현을 반으로 나누면 칸트가 기준이 된다는 주장이 헤겔이 기준이 된다는 주장과 팽팽하게 맞서고 있다. 헤겔은 그 다름에 주목을 했다는 것에 현대적 선구자라고 할 수 있지만 오히려 그 둘을 같음으로 싸잡으려는 느낌이 난다. 이 때문에 신칸트학파가 헤겔에 대한 반동으로 등장했던 것이다. 신칸트학파가 헤겔에 맞서 던진 질문은 자신들의 형님이 애써 가른 것을 당신이 왜 같음으로 싸잡느냐는 것이었다. 그런데 칸트에게서 현상은 물자체와 떨어져 있는 것이지만 후설은 현상은 그 안 에 본질, 물자체가 있다고 본다. 칸트의 사고에서는 현상 너머에는 넘을 수 없는 요단강 같은 경계가 있다고 하는데, 그것이 아니라 현상 안에 물자체가 있다는 것이다. 때문에 현상학에서는 현상의 껍질 을 벗기고 벗기는 작업을 끊임없이 하는데 이것이 바로 환원이다. 현상의 껍질을 벗기면 그 현상으로 들어가게 하는 본질이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본질을 직관하는 것이다. 이러한 방식으로 후설은 데카 르트를 현상학적으로 적용시켰으며, 플란팅가 역시 마찬가지다. 똑같은 것을 각본을 달리 해서 말해보 자. "있음"은 이미 "앎" 안에 들어온 "있음"이다. 그런데 유신론이나 무신론은 앎 이전의 있음이라고 떠들어대는, 인식론을 거치지 않은 형이상학을 떠든다는 점에서 피장파장이다. 형이상학 영역에서만 머물면 안 되고 인식론으로 나와야 한다는 점에서 존재 증명 뿐 아니라 부재 증명도 똑같은 책임을 지는 것이다. 플란팅가의 이야기를 더 자세히 살피는 것은 여러분에게 달렸다. 그의 이야기를 살피는 것이 의미가 없지는 않지만 그보다는 기왕 우리에게 던져진 물음으로 돌아가도록 하자.
지금까지 논의한 내용에서 알 수 있듯 근세에서는 신존재 증명에 대해서 무의미성과 불가능성이 동시 에 제기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 무의미성의 문제는 근세 후반에 나와 현대로 넘어가는 하나의 계기가 되었다. 하지만 우리는 여전히 그러한 사상적 계보를 문화적인 유산으로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 하고 이따금씩 존재증명의 과제를 요청받기도 하고, 도전받기도 하고, 그 과제 자체의 뜻을 어떻게 새 겨야할지 검토의 대상으로 느끼기도 하고 고민한다. 이야기가 나온 마당에 종교철학적인 입장에서 이 것을 추려보자.
종교철학에서도 존재 증명에 관한 이야기가 나온다. 고전적 종교철학에서의 존재 증명은 플란팅가 방 식의 이야기를 주고받는 것이 기본 흐름이다. 하지만 오늘날은 그보다는 좀 더 전진했다. 다시, 중세로 거슬러 올라가보자. 중세에서 신 존재 증명은 여러분이 철학적 상식으로 알고 있는 보편 논쟁에서 촉 발되었다. 보편논쟁은 내 나름대로 표현하면 보편자와 개별자 사이의 관계 문제다. 보편자는 쉽게 이 야기하면 본질이라고 할 수 있고, 개별자는 실존이라 말할 수 있다. 중세 스콜라 철학에서 실존은 주 어진 틀에서 속에서 임의적인 것이다. 즉 이미 본질 안에 갇혀진 잠재적 존재다. 하지만 현대의 실존 개념은 본질의 껍질을 깬 것이다. 고전적인 패턴에서는 보편적 본질 안에 주어진 개별적인 것, 필연성 안에 주어진 우연성이다. 즉 보편성과 개별성, 필연성과 우연성이 본질과 실존의 대비 구도를 규정짓 는 기본적인 성격인 것이다. 이것은 결국 고대 형이상학의 중세적인 버전이라고 할 수 있다. 좀 더 살 펴보면, 보편논쟁에는 보편실재론의 입장과 보편 개념론의 입장, 그리고 보편유명론의 입장이 있다. 더 쪼갤 수도 있지만 복잡한 이야기를 이 자리에서 세세하게 할 필요는 없다. 보편실재론은 보편자가 개 별자보다 앞서 있다고 주장한다. 보편개념론은 보편자가 개별자 안에 있다고 주장한다. 보편유명론은 보편자라는 것은 무수히 많은 개별자들을 관통하는 공통성에 해당되는 이름일 뿐이라고 주장한다. 존 재증명에 들어가기 전에 여러분이 여기에 주목하기를 바란다. 이 입장들의 고전적 원조는 누구겠는가?
개별자보다 보편자가 앞서 있다는 보편실재론의 원조는 플라톤이다. 그렇다면 보편개념론은? 질료형상 설이다. 형상이 질료를 취해서 실체를 이루고 그것을 뒤집어서 이야기하면 보편자가 개념자 안에 있 다. 형상이 질료를 취해야 하며 질료는 형상에 의해서 취함을 당한다. 이를 주장한 사람은 아리스토텔 레스다. 이와 똑같은 이야기가 중세의 보편개념론이다. 보편유명론은 개별자 후에야 보편자가 온다. 이 것들을 정리하면 앞서(보편실재론), 안에(보편개념론), 후에(보편유명론) 라고 거칠게 대비할 수 있다.
여러분에게 주목하라고 하는 부분은 보편실재론과 보편개념론, 그리고 보편유명론 간의 대립이다. 보 편실재론과 보편개념론은 보편성에 대해서 같은 이해를 가진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는 다른 만큼 공통적이다. 특히 형이상학적 상위 체계에 대해서는 서로 공유하고 있다. 현실에 대한 해석이 다를 뿐 이다. 보편실재론과 보편개념론의 차이는 전자는 보편자가 개별자 없이도 있을 수 있지만 후자는 보편 자가 개별자를 취해서 있다는 점이다. 하지만 보편유명론에 이르면 보편성을 말할 수 없다. 다만 공통 성만을 말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럼 어떻게 되는가? 보편성은 사실 그 앞에 언제나 "원초적"이라는 말 이 생략되어 있다. 우리가 보편성을 일반적으로, 통속적으로 쓸 때에는 공통과 보편을 구분하지 않는 다. 하지만 사실 공통성은 후천적이다. 공통성은 개별자를 취하고, 온갖 다른 것들 다음에 추려지기 때 문이다. 즉 원초적 보편성은 애당초 같음, 시작부터 같음이지만 후천적 공통성은 끝에서 추려지는 같 음이다.
이런 이야기가 근세로 가면 어떻게 되는가? 이성론이 표방하는 지식의 필연성, 질료의 일관성은 보편 실재론과 보편개념론을 뿌리로 가진다. 하지만 경험론은 다르다. 그것은 개별적인 것을 겪어봐야 하고 경험이라는 인식행위의 주체인 인간은 백지상태로 있다고 주장한다. 인간은 대상세계로부터 경험을 받 아들인다. 지식은 대상세계의 무수히 다른 개별자들로부터 경험을 받아들이는 가운데 오락가락할 수 있다. 선거에서 개표를 하는데 집계를 하다보면 1, 2위가 계속 바뀐다. 어떤 때는 민주당이 1위, 어떤 때는 한나라당이 1위, 어떤 때는 무소속이 1위이다는 통계가 집계를 통해서 산출된다. 이와 마찬가지 로 개별자들이 주는 경험의 누적과정에 따라 지식의 상태는 오락가락한다. 그리고 그 결론 역시 집계 로 결정된다. 이성론에서의 결론은 전체를 표방한다. 그 중에 한 개가 빠지면 전체가 아니고 한 개가 더해져도 전체에 합당하지 않다. 하지만 경험론에서는 집계일 뿐이다. 그래서 지식은 개연성의 논리로
간다. 이 입장에서 진리는 당연히 개연적이다. 이것이 근세 전기 인식론의 두 지류이다며, 그 뿌리는 중세 때의 보편논쟁과 맞닿아 있다.
왜 이 이야기를 지금 하는가? 이것과 관련되어 우리의 초점인 신 존재 증명이 이제 나오기 때문이다.
신앙주의에서 신 존재 증명을 하는가? 하지 않는다. 왜 안 하는가? 오직 신앙으로만 설명하니 존재를 증명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이성주의에서 신 존재 증명을 하는가? 이성만으로 족하고 신 이야기를 열심히 할 이유가 없기 때문에 할 필요가 없다. 신앙과 이성의 관계를 열심히 추리려는 동네에서만 신 존재 증명을 하는 부류가 있다. 중세에서 보편논쟁과 함께 등장한 신 존재 증명 중에는 두 가지 유명 한 것이 있다. 하나는 존재론적 증명, 또는 본체론적 증명이라고도 하고 또 다른 하나는 우주론적 증 명이다. 이 둘은 임의적인 선택에 의해 나온 것이 아니다. 이보다 앞선 고대 형이상학이 우주론, 존재 론, 신론, 세 개의 결합이었기 때문이다.
고대 형이상학은 우주론에서 출발했다. 왜 우주론이냐? 신화 시대 때 초자연에서 찾던 삼라만상의 근 본 원인, 뿌리를 자연 속에서 찾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신화에서 이성으로, 초자연에서 자 연으로의 전환이며 학문의 시작이다. 학문의 시작은 철학인데 그 철학 중 제 1철학이 형이상학이다.
그 형이상학의 첫 시작은 자연에 대한 주목인데 즉 그것이 바로 우주론이다. 탈레스는 만물의 근원으 로 물을 주장했고 아낙시멘드로스는 무한정자를, 아낙시메네스는 공기를 말했다. 처음에는 물 하나만 가지고 설명했다. 사실 물만 하더라도 막강하고 상당하다. 이 세상에 물 안 들어가는 곳이 있는가? 여 러분이 버티고 있는 이 콘크리트 건물은 만들 때 물에 재료를 넣고 짓이겼다가 말린 것이다. 마르니까 견고해졌다. 이 위에 가구도 올려놓고 사람도 밟고 있다. 2층도 올리고 150층도 올릴 수 있다. 이 콘 크리트 재질에 수분이 있을까? 거기 만약 수분이 없다면 다시 시멘트, 자갈, 모래로 와해되고 만다. 수 분이 지금도 어떻게든 작용해서 그것들을 응집시키고 있다. 물은 응집성과 용해성이라는 정반대의 성 질을 가지고 있고 삼라만상 중에 없는 곳이 없다. 플라스틱 재질에도 있고 공기 중에도 물이 있다. 사 람 몸의 75%가 물이다. 그 정도하면 탈레스의 주장도 막강한 것이다.
그런데 탈레스 이후에 아낙시멘드로스가 물이 아무리 보편산재하지만 그렇게 특정 자연물로 한정 지 을 수 있는가 라고 하면서 딴지를 걸었다. 그는 모든 만물이 물없이 있을 수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과 연 불 속에 물이 있냐는 똘똘한 질문을 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아낙시멘드로스는 만물의 뿌 리를 하나로 한정시키지 않고 한정이 없는 무한정자를 주장한다. 이 때부터 개념화가 시작되었다. 사 실 물도 개념이다. 그것은 보편산재성을 가지고 있고 용해성과 응집성이라는 반대 성질을 동시에 지니 고 있다. 아르케가 지니고 있는 패러독스의 성질을 그대로 가지고 있다. 대단한 통찰이다. 아낙시멘드 로스 이후에 아낙시메네스가 등장한다. 그는 불물을 싸잡아 이야기하기 위해서 공기를 말한다. 공기가 짙어지면, 응축되면 물이 되고 공기가 흐려지면 불이 된다고 설명했다. 이것이 바로 밀레토스의 탈레 스, 아낙시멘드로스와 아낙시메네스가 모여서 고스톱 치면서 읊었던 아르케에 대한 로고스이다.
우주론은 밀레토스 학파로부터 시작되었다. 그런데 반대편에서 피타고라스가 쟤들이 천박하게 까불고 있다고 하면서 수를 말했다. 그 당시로 말하면 - 딱 갈라진 것은 아니지만 - 밀레토스 학파는 물질적 인 성질을 강조했고, 피타고라스는 이를 정신적인 개념으로 끌고 들어왔다. 이는 합리주의 대 신비주 의라는 신화적 뿌리의 철학적 형이상학적 반영이며, 이러한 양대흐름이 우주론의 장에서 펼쳐졌다. 그 다음에 등장한 것은 존재론이다. 우주론에서 만물의 근본뿌리를 찾는다고 했지만 쉽게 결판이 나지 않 았고, 각도를 달리 잡았다. 존재의 양태가 matter냐 spirit이냐 라고 따질 일이 아니라 존재의 identity 를 찾으려 한 것이다. 여기서는 “정체성이 있다”, “고정되어 있다”, “영원불변”, “부동이다” 와 “변화한 다”가 팽팽히 대립한다. “부동이다”라 주장했던 사람은 파르메니데스이고 “끝없이 변한다”라고 주장한 자는 헤라클레이토스이다. 그들은 존재와 생성이라는 개념과 대비 구도로 존재를 말했다. 조금 지나니 이 존재론과 우주론이 결합했고, 거기에 대한 상대주의와 회의주의가 등장하다가 마지막 판에 드디어 등장한 것이 신론이다. 그리고 여기서 theos와 logos의 결합이 이루어진다. 우주론이 cosmos와 logos
의 결합, 존재론이 ontos와 logos의 결합이었다면 신론은 theos와 logos의 결합이었다. 이것을 처음으 로 결합한 이가 플라톤이다. 이것은 형이상학이라는 틀에서 벌어졌다. 플라톤적, 아리스토텔레스적인 관점은 내내 대립하는 듯 했지만 헬레니즘 시대에 등장한 스토아, 에피쿠로스 학파는 그 두 사람의 의 견도 일원론적, 일신론적 그림이라고 비판했다. 그래서 다신론, 무신론이라는 보다 다양한 그림이 신론 의 이름으로 펼쳐진다. 스토아는 다신론, 범신론이었고 에피쿠로스는 무신론이었다. 이것이 고대의 형 이상학이었다. 중세는 이것을 유산으로 물려받고 그것을 신앙과 엮으면서 신 존재 증명을 하기 시작했 다.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은 없듯, 저들의 증명방식은 실제로는 고대의 유산인 존재론과 우주론을 그대 로 써먹은 것이다. 존재론이 위에서 아래로의 방식이라면, 우주론은 아래에서 위로의 방식이다. 우주론 은 우주를, 즉 이 자연을 거슬러 올라가서 신에 도달한다는 그림이다. 존재론은 신이라는 개념이 애당 초 있는데 그 개념이 있으려면 개념으로만 있으면 안 되고 존재로까지 있어야 진짜 개념이 된다고 하 는 것이다. 즉 신이 개념에만 머물고 존재하지 않는다면 신이 아니다 라고 하는 것이다. 아까 cogito ergo sum에서 cogito가 sum을 끌어내는 것이 아니라 cogito가 ergo 다음에 sum을 가리키는 것처럼 신 개념이 신 존재를 가리킨다는 것이다. 이것이 존재론적 증명이다. 앞서 언급했던 입장들은 어떤 식 의 증명을 했는가? 보편실재론은 존재론적 증명을 했다. 왜 했는가? 나는 여러분에게 이것을 묻고 싶 다. 그 이 이유, 연결고리는 무엇인가? 보편실재론자 중 가장 대표적인 이가 캔터베리의 안셀무스다.
안셀무스는 삼단논법의 신존재 증명을 한다. 여러분이 잘 알고 있는 그의 유명한 표현은 “신은 그것보 다 더 큰 것을 생각할 수 없는 가장 큰 존재이다” 라는 것이다. 만약 그것보다 더 큰 존재를 생각할 수 있다면 그 존재가 신이다. 신은 가장 큰 존재이다. "있음"으로 말하면 "있음 자체"라고 할 수 있다.
신은 그것보다 더 큰 것을 생각할 수 없는 가장 큰 존재이다 를 삼단 논법으로 표현해보라. 대전제는 가장 큰 존재는 개념으로만이 아니라 실제로, 대가리 안에서뿐만 아니라 대가리 밖에도 있어야 한다 이다. 가장 큰 존재가 대가리 안에만 있다면 대가리 바깥에 있는 것보다 클 수 없다. 즉 신이라는 개 념이 이미 가장 큰 존재로 상정되었는데 가장 큰 것은 개념으로만, 관념으로만 존재하면 안 된다. 실 제로 그런 본질이 존재해야 한다. 그렇다면 존재론적 증명과 보편실재론 간에는 어떤 상통 관계를 이 을 수 있는가? 보편실재론은 보편자가 개별자에 앞서 있다는 것이다. 그것과 존재론적 증명이 어떤 관 계가 있는가? 저 보편자는 본질인데 본질 중의 본질이 바로 신이다. 이 연결 단계에 대해서 내가 다 설명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존재론적 증명은 존재라는 개념이 존재를 추론, 도출하는 것이 아니고 소급적으로 지시하는 것이다. 이걸 통칭 직관이라고 한다. 끄집어내는 것이 아니라 거슬러 올라가는 것이다.
반면 우주론적 증명은 우주에서 신을 찾는다. 우주는 신의 피조물이다. 피조물은 창조 행위의 결과이 다. 결과는 원인으로부터 오지 않을 수 없다. 그 원인을 찾고자 계속 올라가 결국 최초의 원인까지 이 른다. 최초의 원인은 곧 자기 자신이 원인이기도 하니, 그 존재가 없고는 이와 같은 세계가 있을 수 없다. 이 최초의 원인이 바로 신이다. 그것과 보편개념론은 어떻게 연결되는가? 여러분이 찾기를 바란 다.
보편개념론은 보편자가 개념에 들어있다고 했다. 보편실재론의 입장에서는 60억의 인구 가 있기 전에 인간의 본질이 먼저 있다. 그러나 보편개념론의 입장에서는 60억 인구가 600억 인구가 되면 인간의 본성이 달라질 가능성도 열려 있다. 즉 인간의 본성은 60억 인구 일일이 들어있다. 보편개념론의 실체 는 질료와 형상의 결합이다. 플라톤은 질료를 제끼고 형상만을 실체라고 한다. 그래서 그것을 제 1실 체라고 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질료와 형상의 결합을 제 2실체라고 한다. 이것은 우주론적 증명과 어 떻게 연결되는가? 두 마디만 있으면 연결된다. 이것 또한 여러분이 찾아볼 일이다.
그런데 이와 같은 논의는 모두 근세에 이르러 비판받기 시작한다. 아까 형이상학적인 비판과 인식론적 비판을 말했다. 형이상학적인 비판은 형이상학의 껍질을 벗고 결국 탈형이상학으로 간다. 즉 의미 문 제로 넘어간 것이다. 이와는 달리 근세 전기에는 대체로 인식론적인 작업이었는데, 칸트가 종합한 인 식론적인 종합, 선험적 구성설이라는 것도 바로 이 인식론적인 작업이었다. 독일 관념론은 이 토대 위
에서 다시 형이상학을 근세적인 버전으로 만들고자 했다. 칸트 이야기를 좀 더 하자면, 칸트가 가한 순수이성비판을 통해서 신 존재 증명에 대한 시비가 벌어졌다. 칸트는 존재론적 증명에 대해서도 시비 하고 우주론적 증명에도 시비했는데, 그가 보기에는 두 논의 모두 허점이 많았다. 칸트의 눈에는 무엇 이 문제였을까? 칸트 책을 읽기 전에 먼저 그것을 상상해보기 바란다. 칸트까지만 해도 엄청난 힌트이 다. 증명 자체의 정당성을 가정하고서라도, 증명이 올곧게 된다면 나름대로 가치가 있다는 전제 위에 서 비판해보라. 칸트의 결론은 "증명의 불가능성"이었고, 이는 현대로 넘어가면서도 증명은 불가능할 뿐 아니라, 가능한다해도 의미가 없다는 식으로까지 나아간다. 증명의 무의미성은 무슨 근거에 의해서 던져질까? 칸트가 지적한 불가능성의 문제를 다 극복하고 해결해서 증명을 올곧게 하더라도 탈형이상 학의 시대인 현대에는 의미가 없다. 이 근거를 여러분들이 짚어보기를 바란다. 오늘은 여기서 접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