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녕부 자비령(慈悲嶺)과 고려 서북 경계/김영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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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156 仙道文化 제 29 권. 【국문요약】 동녕부 자비령은 고려사를 근거로 현재 황해도 서흥군 서북쪽에 위치하 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고려사는 자비령 위치에 대해 구체적으로 명시하지 않았고, 지명이 같다는 이유로 근거로 사용됐다. 반면 대명일통 지는 “평양성 동쪽 160리에 있다”고 자비령 위치에 대해 구체적으로 명시 하고 있고, 원 시기 경계로 삼았다고 설명하고 있다. 평양성은 427년 고구려 장수왕이 천도한 곳으로, 현재 중국 요녕성 요양시 일대이다. 요양시 동쪽으 로 160리, 약 80km 떨어진 곳은 본계시로, 그러나 현재 본계시에서 자비령 이란 지명은 찾을 수 없다. 현장 답사를 통해 경계로 삼을만한 지리조건을 갖춘 곳을 찾아본 결과, 본계시 사산령촌이 자비령으로 확인됐다. 자비령은 원과 동녕부의 경계로, 고려 서북 경계 중 일부이다. 자비령을 바탕으로 고려 서북 경계 일부를 살펴 본 결과 관문산-제형산-천산산맥으로 추정할 수 있었다. 이전 논문에서 고려 서북 경계 일부로 추측한 길림합달령과 연결 해 본다면 고려 서북 경계는 길림합달령-관문산-제형산-천산산맥으로 추 측해 볼 수 있겠다. 주제어 : 동녕부, 자비령, 사산령촌, 길림합달령, 천산산맥.
(3) 동녕부 자비령(慈悲嶺)과 고려 서북 경계 157. Ⅰ. 서 론 1269년 임연(林衍)이 고려 원종(元宗)을 폐위시키고 안경공(安慶公) 왕 창(王淐)을 왕위에 세우자, 서북면병마사(西北面兵馬使) 영리(營吏) 최탄 (崔坦) 등은 임연을 주살(誅殺)한다는 명분을 내세워 그들의 상관을 죽이고 서경(西京)을 근거지로 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이듬해 최탄은 고려 정부의 토벌군에 맞서기 위해 원(元) 세조(世祖)에게 군사 3,000명 파견을 요청했 고, 원의 군사는 서경에 진(鎭)을 쳤다. 이후 원 세조는 조서(詔書)를 내려 고려 서경 지역을 내속(內屬)해 동녕부(東寧府)를 설치하고 자비령(慈悲嶺) 을 경계로 삼았으며, 최탄 등을 총관(摠管)으로 삼았다. 현재 자비령 위치는 황해도 서흥군(瑞興郡) 서북쪽으로 알려져 있다. 이 것은 고려사(高麗史)⋅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 「세종실록(世宗 實錄)」 지리지(地理志) 등의 한국 문헌 자료를 근거로 한 것이다. 그런데 최근 남의현은 대명일통지(大明一統志) 외이(外夷) 「조선(朝鮮)」의 기록 을 근거로, 자비령을 중국 요녕성 연산관진(連山關鎭)으로 재고증했다1). 대명일통지 기록은 자비령 위치에 대해 다른 어떤 문헌 자료보다 상세 하게 적고 있지만, 선행연구에서 대명일통지 기록이 검토된 적은 없다. 대명일통지는 1373년 편찬된 책으로, 당시 명(明)이 관할한 부(府)⋅주 (州)⋅군(郡)의 건치(建置)⋅연혁(沿革)⋅산천(山川)⋅형승(形勝)⋅풍속 (風俗)⋅토산(土産) 등을 상세히 기록한 지리지이다. 조선은 대명일통지 에게 영향을 받아 1481년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과 1530년 신증 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을 편찬했으며, 신증동국여지승람은 대명일통지 기록을 인용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명일통지 기 록이 검토된 적이 없는 것은 고려 서북 경계가 현재 압록강(鴨綠江)을 넘지 않았다는 인식이 작용했기 때문으로 생각된다. 01) 남의현, 「원말⋅명초 한중간의 요동국경지대연구-東寧府,東寧路,東寧衛와의 상관성을 중심으로-」, 인문과학연구 제61집, 강원대학교 인문과학연구소, 2013, 207쪽..
(4) 158 仙道文化 제 29 권. 또 자비령은 현재 동녕부와 고려의 경계로 인식된다. 그런데 관련 문헌 자료를 자세히 읽어본 결과 자비령을 동녕부와 고려의 경계로 보기에는 문맥 상 어색한 부분이 있다. 가-1. 최탄(崔坦)이 몽고 군사 3천 명을 요청하여 서경(西京)에 주둔 시키자, 몽고 황제가 최탄⋅이연령(李延齡)에게 금패(金牌)를, 현효철 (玄孝哲)⋅한신(韓愼)에게 은패(銀牌)를 차등 있게 하사하였다. 조서 (詔書)를 내려 내속(內屬)하니, 동녕부라고 이름을 고치고, 자비령을 그어 경계로 삼았다.2) 가-2. 고려국왕(高麗國王) 왕식(王禃)이 사신을 보내어 와서 말하 기를, “근래에 신이 조서를 받들어 이미 복위하였으니, 이제 700인을 이끌고 조정에 들어가 뵙고자 합니다.”라고 하였다. 조서를 내려 400 인만 데리고 오고, 나머지는 서경(西京)에 머무르게 하였다. 조서를 내려 고려 서경을 내속(內屬)하니, 동녕부로 고치고, 자비령을 그어 경계로 삼았다.3) 가-1과 2를 자세히 읽어보면 글자를 생략했기 때문에, 자비령이 무엇의 경계인지 알기는 힘들다. 연구자의 해석과 관점에 따라 여러 가능성이 존재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대다수의 선행 연구는 ‘고려’가 생략된 것으로 보아 자비령을 고려와 경계로 인식했다. 그런데 앞의 단어가 중복되면 그 단어를 생략하기도 한다는 점에서 문맥 상 앞에 쓰인 ‘동녕부’가 생략된 것으로도 볼 수 있다고 생각한다. 또 이 문장에서 주어는 원(元)이므로 원의 입장에서 풀이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점들을 보면, 자비령을 원과 동녕부의 02) 高麗史 卷26 世家 元宗 11年 2月 丁丑 丁丑 崔坦請蒙古兵三千來鎭西京, 帝賜崔坦⋅李延齡金牌, 玄孝哲⋅韓愼銀牌 有差. 詔令 內屬, 改號東寧府, 畫慈悲嶺爲界. 03) 元史 卷7 本紀7 世祖4 至元 7年 春 正月 甲寅 高麗國王王禃遣使來言, “比奉詔臣已復位, 今從七百人入覲.” 詔令從四百人來, 余留之西 京. 詔高麗西京内属, 改東寧府, 畫慈悲嶺爲界..
(5) 동녕부 자비령(慈悲嶺)과 고려 서북 경계 159. 경계로 볼 수 있다고 생각한다. 원의 입장에서 동녕부는 비록 내속한 지역 이지만, 최탄 등이 다시 원을 배신하고 고려로 되돌아 갈 가능성이 늘 존재 한다. 그러므로 원은 동녕부를 원의 영원한 영토로 보지 않고 자비령을 그어 원의 영토와 구별하고자 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한다. 실제로 동녕부 설치 20년 후 원은 동녕부 지역을 아무런 조건 없이 고려에게 돌려 주었다. 본 글은 먼저 고려사 등의 한국 문헌 자료와 대명일통지를 자세히 검토하고, 그 결과를 바탕으로 자비령 위치를 살펴보고자 한다. 그리고 그 자비령 위치를 근거로 고려 서북 경계 일부를 살펴보고자 한다. 자비령 은 동녕부와 원의 경계이고 동녕부는 서경과 그 일대 지역에 해당되므로 자비령은 고려 서북 경계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단, 고려 서북 경계를 살펴보는데 자비령 이외에도 요(遼) 불탑인 요탑(遼 塔)과 금(金)의 관리인 왕적(王寂)이 쓴 압강행부지(鴨江行部志)를 추가 로 활용하고자 한다. 이 두 자료는 각각 요와 금의 영역을 추측할 수 있는 적절한 자료라고 생각한다.. Ⅱ. 자비령 위치 문헌기록 검토 1. 뺷고려사뺸 지리지 고려사에서 자비령 위치와 관련된 구체적인 설명은 찾을 수 없지만, 고려사 지리지 평주(平州)⋅동주(洞州) 편에 자비령이 등장한다. 나-1. 동주(洞州)는 본래 고구려의 오곡군(五谷郡)(우차탄홀(于次 呑忽)이라고도 한다)으로, 신라 경덕왕(景德王) 때에 오관군(五關郡) 으로 고쳤다. 고려 때에 지금 이름으로 바꾸었다. 성종 14년에 방어사.
(6) 160 仙道文化 제 29 권. (防禦使)를 두었다. 현종 초에 방어사를 폐지하고, 내속(來屬)시켰다. 원종 때에 왕의 태(胎)를 묻은 곳이라 하여 서흥현령관(瑞興縣令官)으 로 승격시켰다. 별호(別號)는 농서(隴西)이고(성종[成廟] 때 정하였 다), 요충지로 절령(岊嶺)(즉 자비령(慈悲嶺))이 있다.4) 나-1에 의하면 고려 서해도 동주(洞州)에 요충지로 절령(岊嶺)이 있고, 그 절령의 이칭(異稱)이 자비령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고려 동주의 행정 범위는 조선왕조실록 「세종실록지리지」⋅ 신증동국여지승람 등으로 추측해 볼 수 있다. 나-2. 본래 고구려의 오곡군(五谷郡)인데, (우차탄홀(于次呑忽)이 라고도 한다.) 신라에서 오관군(五關郡)으로 고쳤고, 고려에서 동주 (洞州)로 고쳤다. 성종(成宗) 을미에 방어사(防禦使)를 두었으며, 현종 (顯宗) 때에는 방어사를 폐하고 평주(平州) 임내에 붙였다. 원종(元宗) 때에, 태실(胎室)을 봉안하고 서흥현으로 승격하여 영(令)을 두었고, 본조 태종(太宗) 15년 을미에 1천 호 이상이 되므로, 지군사(知郡事)로 승격하였으며, 금상(今上) 6년 갑진 2월에, 고을 사람 환자(宦者) 윤봉 (尹鳳)이 명나라에 들어가 상선감 태감(尙膳監大監)이 되어 사신(使 臣)으로 본국에 돌어와서 관호(官號)를 승격하여 주기를 청하므로, 도호부(都護府)로 하였다. 별호는 농서(隴西)이다. (순화(淳化) 때에 정한 것이다.) … 요해처는 자비령(慈悲嶺)이니, 부의 서쪽에 있으며, (곧 절령(岊嶺)이니, 험준하고 꼬불꼬불하며, 산 서쪽 허릿길 북쪽에 나한당(羅漢堂)이 있다.) …5) 04) 高麗史 卷58 志 卷第12 地理 3 西海道 平州 洞州 洞州本高句麗五谷郡(一云于次呑忽), 新羅景德王, 改爲五關郡. 高麗, 更今名. 成宗十四 年, 置防禦使. 顯宗初, 廢防禦使, 來屬. 元宗朝, 以安胎, 陞爲瑞興縣令官. 別號隴西(成 廟所定), 要害處, 有岊嶺(卽慈悲嶺). 05) 世宗實錄 152卷 地理志 黃海道 黃州牧 瑞興都護府 瑞興: 都護府使一人. 本高句麗 五谷郡(一云于次呑忽), 新羅改爲五關郡, 高麗改爲洞州..
(7) 동녕부 자비령(慈悲嶺)과 고려 서북 경계 161. 나-3. 본래 고구려의 오곡군(五谷郡)이었다. 우차탄홀(于次呑忽) 이라고도 하였다. 신라에서는 오관군(五關郡)으로 고쳤고, 고려에서 동주(洞州)로 고쳤다. 성종(成宗)조에 방어사(防禦使)를 두었으며 현 종(顯宗) 때에는 방어사를 폐지하고 평주(平州)에 속하게 하였다. 원 종(元宗) 때에 임금의 태(胎)를 이 땅에 묻고 지금 이름으로 고치고 현령(縣令)을 삼았다. 본조 태종 15년에 지군사(知郡事)로 승격하였으 며 세종 6년에 명 나라 조정에 들어간 환자(宦者) 윤봉(尹鳳)의 고향이 므로 승격하여 도호부를 삼았다. … 자비령(慈悲嶺) 부의 서쪽 60리에 있으며 절령(岊嶺)이라고도 하는데 평양에서 서울로 통하는 옛길이다. 세조 조에 호랑이의 피해가 많고 또 중국 사신이 모두 극성(棘城)길을 경유하여 통행함으로 그 길이 폐지되었다. 대명일통지에 의하면 원 (元) 나라 때에 여기로 경계를 삼았다 한다. …6) 나-2, 3에 의하면 조선 황해도 서흥도호부(瑞興都護府)가 과거 고려 동 주임을 알 수 있다. 또 19세기 제작으로 알려진 김정호의 대동여지도(大東 輿地圖)도 서흥군 서북쪽에 자비령을 표시하고 있다. 즉, 고려사 지리지 를 근거로 한다면 동녕부 자비령은 현재 황해도 서흥군 서북쪽으로 고증할 수 있다.. 成宗乙未, 置防禦使, 顯宗時, 廢防禦使, 屬平州任內, 至元宗時, 以安胎室, 陞爲瑞興縣, 置令. 本朝太宗十五年乙未, 以一千戶以上, 陞爲知郡事. 今上六年甲辰二月, 以郡人宦者 尹鳳入侍天庭, 拜尙膳監大監, 奉使還國, 請陞官號, 於是爲都護府, 別號隴西(淳化所定). … 要害, 慈悲嶺在府西(卽岊嶺, 險峻曲折, 山西腰路, 北有羅漢堂). … 06) 新增東國輿地勝覽 第41卷 黃海道 瑞興都護府 本高句麗 五谷郡(一云于次呑忽), 新羅改五關郡, 高麗改爲洞州, 成宗置防禦使, 顯宗時, 廢防禦使, 屬平州, 元宗時, 安胎今名爲縣, 今本朝太宗十五年陞知郡事, 世宗六年以入朝 官者尹鳳之鄕陞爲都護府… 慈悲嶺 在府西六十里, 一名岊嶺, 自平壤通京都舊路也 世祖 朝以多虎害, 且中朝使臣皆由棘城路, 以行其路遂廢, 大明一統志元時畫此爲界. ….
(8) 162 仙道文化 제 29 권. [그림 1] 뺷대동여지도뺸 자비령. 동녕부 자비령 위치를 현재 황해도 서흥군 서북쪽으로 보는 입장은 현재 학계 대부분의 인식이다. 이 입장은 근대적 역사연구가 시작된 대일항쟁 시기부터 계속 제기됐다. 1913년 남만주철도주식회사(南滿洲鐵道株式會 社)에서 출판한 조선역사지리(朝鮮歷史地理)의 부도(附圖)인 원대고려 북경도(元代高麗北境圖)에서 황해도와 평안도 경계에 자비령을 표시하고 있다. 1934년 편찬 간행된 조선사편수회(朝鮮史編修會)의 조선사(朝鮮 史)는 제3편 제4권 고려 원종 12년 2월 7일 동령부 설치 관련 기사에서 자비령 위치를 ‘황해도 서흥군, 일명 절령(岊嶺)’이라고 세주(細註)로 적고 있다.7) 광복 이후 자비령 위치는 자세하게 연구된 적은 없고, 황해도 서흥 07) 七日(丁丑) 蒙古、 西京(平壤)ヲ改メテ東寧府ト號シ、慈悲嶺(黃海道 瑞興郡、一名岊 嶺)ヲ畫シテ界ト爲ス。是ヨリ先、崔坦等、蒙古ニ助兵ヲ請ヘルヤ、帝、坦及ビ李延齡 ニ金牌ヲ、玄孝哲⋅韓愼ニ銀牌ヲ賜フコト差アリ、詔シテ內屬セシム。是ニ至リ、坦 等ヲ以テ東寧府摠管ト爲ス。 7일(정축) 몽고가, 서경(평양)을 고쳐 동령부(東寜府)라 호칭하고, 자비령(慈悲嶺)(황해.
(9) 동녕부 자비령(慈悲嶺)과 고려 서북 경계 163. 군 서북쪽이라는 인식 아래에서 관련 연구가 진행되고 있다.. [그림 2] 뺷조선역사지리뺸 부도 원대고려북경도. 도 서흥군, 일명 절령(岊嶺))을 구획해서 경계로 삼았다. 이보다 먼저, 최탄 등이, 몽고 에 구원병을 요청하자, 황제가, 탄 및 이연령(李延齡)에게 금패를, 현효철(玄孝哲)⋅한 신(韓愼)에게 은패를 하사함에 차등이 있었고, 조서로 내부에 복속하게 하였다. 이이 이르러, 탄 등으로써 동령부총관으로 삼았다..
(10) 164 仙道文化 제 29 권. [그림 3] 진단학회 뺷한국사(韓國史)뺸. [그림 4] 이기백 뺷국사신론(國史新論)뺸.
(11) 동녕부 자비령(慈悲嶺)과 고려 서북 경계 165. 그런데 고려사에서 자비령은 조위총 반란 기록에서 또 등장한다. 1170 년 정중부(鄭仲夫)⋅이의방(李義方) 등이 무신정변(武臣政變)을 일으켜 고 려 의종(毅宗)을 시해하고 명종(明宗)을 세우자, 1174년 고려 서경유수(西 京留守) 조위총(趙位寵)은 이들을 토벌한다는 명분을 내세우고 서경을 근 거지로 해서 반란을 일으켰다. 고려 조정은 토벌군을 보내 서경을 공격했 고, 1176년 토벌군에 의해 서경이 점령당하면서 조위총은 죽음을 당했다. 조위총은 고려 조정에서 토벌군을 보내자 서언(徐彦)을 금(金)에게 보내 내속 의사를 보였다. 다-1 … 조위총(趙位寵)이 다시 서언(徐彦) 등을 보내어 금에 가서 표(表)를 올려 아뢰기를, “전왕(前王)은 본래 왕위를 사양하고 물러난 것이 아니라, 대장군(大將軍) 정중부(鄭仲夫)와 낭장(郎將) 이의방(李 義方)이 시해한 것입니다. 신(臣) 조위총은 절령(岊嶺)의 서쪽에서 압 록강(鴨綠江)에 이르는 40여 성(城)을 들어 내속(內屬)할 것을 요청하 니 군사를 보내 도와주실 것을 바랍니다.” 라고 하였다. …8) 다-2. 신묘일에 고려 서경유수(西京留守) 조위총이 그 임금에게 반 란을 일으키고는 자비령(慈悲嶺) 서쪽, 압록강(鴨淥江) 동쪽의 40여 성(城)으로써 내부(內附)하겠다고 청하였으나 받아들이지 않았다.9) 다-1, 2에 의하면 조위총이 금에게 내속을 요청한 지역의 범위는 ‘자비령 서쪽, 압록강 동쪽에 이르는 40여 성’ 임을 알 수 있다. 단 다-1는 절령, 다-2는 자비령으로 그 명칭이 다르지만 다른 지역이 아니며 두 지명 중 08) 高麗史 卷100 列傳 卷第13 諸臣 趙位寵 … 位寵復遣徐彦等, 如金上表曰, “前王本非避讓, 大將軍鄭仲夫, 郞將李義方弑之. 臣位 寵請以岊嶺以西至鴨綠江四十餘城內屬, 請兵助援.” … 09) 金史 卷7 本紀7 世宗 中 大定 15年 9月 辛卯 辛卯, 高麗西京留守趙位寵叛其君, 請以慈悲嶺以西, 鴨淥江以東四十餘城內附, 不納..
(12) 166 仙道文化 제 29 권. 하나가 이칭으로 짐작된다. 조위총과 최탄 모두 서경 관리로 서경과 그 일대 지역을 내속하고자 했던 점에서 나-1, 2와 다-1, 2에 기록된 자비령은 같은 지역으로 짐작된다. 다-1, 2의 자비령을 황해도 서흥 서북쪽으로 본다면 조위총이 금에게 내속을 요청한 지역을 선정함에 문제가 생긴다. 조위총이 금에게 내속을 요청한 지역을 선정하기 위해 먼저 압록강 의미를 구별해야 한다. 다-1에 서 압록강은 ‘鴨淥江’으로 다-2에서 ‘鴨綠江’으로 한자표기가 다르게 기록 돼 있기 때문이다. ‘鴨淥江’에서 ‘鴨淥’은 만주어인 ‘yalu’를 음차(音借)해 한자로 쓴 것으로 ‘경계⋅토지의 구역을 가르는 경계’의 의미를 가진 말로, ‘鴨淥江’은 ‘경계⋅토지의 구역을 가르는 경계를 이루는 강’으로 풀이된 다.10) ‘鴨綠江’은 강의 이름으로11), ‘대한민국과 중국의 경계를 이루는 강’ 으로 풀이된다. 하지만 다-1, 2처럼 두 개의 압록강은 독음(讀音)이 같아 문헌 자료에서 혼용하고 있는 경우가 많아 그 기록의 내용에 따라 그 의미를 구별해야 한다. 그러나 다-1, 2에서 압록강이 2가지 의미로 모두 사용됐을 가능성이 있어 2가지 의미로 각각 살펴보겠다. 먼저 압록강을 ‘鴨淥江’으로 본다면, 황해도 서흥군 서북쪽 자비령 부근에 금(金)과 고려의 경계 또는 과거 경계를 이루었던 강이 존재해야 할 것이다. 현재까지 문헌연구나 고고 학 조사를 통해 서흥 인근 지역에서 경계를 이루었던 강이 확인되거나 보고 된 적은 없다. 다음으로 압록강을 ‘鴨綠江’으로 본다면, ‘鴨綠江’은 서흥군 북쪽에 위치하므로 ‘자비령 서쪽, 압록강 동쪽의 40여 성’보다 ‘자비령 북 쪽, 압록강 남쪽의 40여 성’이 자연스럽다. 이 같은 문제는 고려사 지리지를 인용함에 2가지가 고려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첫 번째는 고려사 지리지 동주 편에 자비령을 기록하면서 동녕 부 자비령이라는 설명이 빠져있다는 점이다. 다-3에 대명일통지를 인용 하면서 그 설명을 하고 있지만, 그 보다 빠른 기록인 다-1, 2에는 그런 10) 이훈 편저, 滿韓辭典,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2017, 924쪽. 11) 이훈 편저, 滿韓辭典,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2017, 924쪽..
(13) 동녕부 자비령(慈悲嶺)과 고려 서북 경계 167. 설명이 빠져있다. 다-3에만 설명이 있는 점은 국경선 변화 등으로 지리 인식이 변화한 것으로 짐작됐지만 조금 더 연구가 필요하다. 결국 고려사 지리지 동주 편에 기록된 자비령을 동녕부 자비령으로 보는 것은 단지 지명 이 같다는 이유일 것이다. 라-1. 절령도장(岊嶺道掌) 11역(驛). 절령(봉주), 동선⋅단림(황 주), 도공(봉주), 금동(안주), 사암(수안), 회교⋅생양⋅고원⋅신지⋅ 운봉(서경)12). 라-1은 고려 역참(驛站) 중 절령도장(岊嶺道掌)에 관한 기록이다. 라-1 에 의하면 절령도장은 봉주(鳳州)에서 고려 서경까지 11곳의 역참을 포함한 다. 절령도장의 첫 역참은 절령(岊領)으로 봉주에 위치한 것으로 주석이 달려 있다. 봉주는 고려 서해도 황주목(黃州牧)에 속한 주(州)로,13) ‘절령’ 이란 지명이 같은 서해도 봉주에도 존재함을 알 수 있다. 이는 지명이 같은 곳이 여러 지역에 있을 수 있음을 보여준다. 그러므로 단지 지명이 같다는 이유로 고려 동주의 자비령을 동녕부 자비령으로 볼 수는 없을 것이다. 두 번째는 고려의 행정 범위가 조선의 행정 범위와 일치하느냐하는 점이다. 행정 범위는 고정된 것이 아니라 경계선 이동⋅전쟁⋅자연재해⋅인구 변 화 등의 다양한 이유로 축소⋅확대되거나 그 치소(治所)가 다른 지역으로 이동하기도 한다. 고려 동주 편에 기록된 자비령을 조선 서흥의 자비령으로 한다면 고려 동주와 조선 서흥의 행정 범위가 일치함을 증명 할 수 있어야 하겠다. 최근 연구에 따르면 고려 서북 경계는 현재 알려진 의주-원산을 12) 高麗史 卷82 志 卷第86 兵2 站驛 岊嶺道掌十一. 岊嶺(鳳州), 洞仙⋅丹林(黃州), 陶工(鳳州), 金洞(安州), 射嵒(遂安), 迴 郊⋅生陽⋅高原⋅神地⋅雲峯(西京). 13) 高麗史 卷58 志 卷第12 地理 3 西海道 黃州牧鳳州 本高句麗鵂嵓郡(一云租坡衣, 一云鵂鶹城), 新羅景德王, 改爲栖巖郡. 高麗初, 更今名. 成宗十四年, 置防禦使. 顯宗初, 廢防禦使, 來屬. 忠烈王十一年, 復稱防禦使. 尋知鳳陽 郡事. 別號池河(成廟所定)..
(14) 168 仙道文化 제 29 권. 잇는 선이 아니라 중국 길림합달령 부근이며, 이 경계선도 여말선초에 변화 했다고 한다.14) 이상으로 동녕부 자비령 위치를 고려사 지리지 동주 편을 근거로 살펴 보았다. 그러나 고려사 지리지 동주 편을 근거로 하기에 부족한 부분이 있었다. 동녕부 자비령 위치를 살펴보려면 추가적으로 문헌자료를 살펴보 거나 보다 구체적인 문헌자료가 필요하다.. 2. 뺷대명일통지뺸 외이(外夷) 조선(朝鮮) 대명일통지는 1461년 명(明) 이현(李賢) 등이 황제의 영(令)을 받아 편찬한 지리지이다. 대명일통지는 명 영토의 지리 사항을 행정구획별로 기록했을 뿐만 아니라 주변 나라(夷國)의 지리 사항도 기록해 놓고 있다. 마-1. 자비령 평양성(平壤城) 동쪽 160리(里)에 있다, 원나라 때 이곳을 그어 경계로 삼았다15). 마-1에 의하면 자비령은 평양성(平壤城) 동쪽 160리(里)에 있고, 그 자비 령은 원(元) 시기 경계로 삼은 장소임을 분명히 알 수 있다. 즉 10리를 약 5km 정도로 보면 자비령은 평양성 동쪽 약 80km에 있는 것이다. 이처럼 대명일통지 외이 조선 편은 고려사보다 자세하게 자비령 위치를 기록 하고 있다. 마-1에 따라 자비령 위치를 살펴보려면 먼저 기준점이 되는 평양성 위치 부터 살펴보아야 한다. 마-1는 외이 조선 편에 기록돼 있기 때문에 우선. 14) 김영섭, 「고려 서북면 경계 재검토-강동6주를 중심으로-」, 인문과학연구 제62집, 강 원대학교 인문과학연구소, 2019, 159∼188쪽. 허우범, 여말선초 서북 국경선 연구, 박사학위논문, 인하대학교 대학원, 2020. 15) 大明一統志 卷之 89 外夷 朝鮮 慈悲嶺 在平壤城東一百六十里元時畫此爲界.
(15) 동녕부 자비령(慈悲嶺)과 고려 서북 경계 169. 조선의 경계 안에서 찾아보도록 하겠다. 마-2. 본래 조선의 옛 땅이다. 삼국(三國) 시대에는 고구려의 소유 (所有)이었는데, 보장왕(寶藏王) 27년 무진(당나라 고종(高宗) 총장 (摠章) 원년)에 신라 문무왕(文武王)이 당나라 장수 이적(李勣)과 더불 어 이를 멸(滅)하고 드디어 그 땅을 병합했다. 효공왕(孝恭王) 9년 을축 (당나라 애제(哀帝) 천우(天祐) 2년)에 궁예(弓裔)가 철원(鐵原)에 웅 거하여 스스로 후고려왕(後高麗王)이라 일컫고 패서(浿西) 13진(鎭)으 로 분정(分定)했는데, 고려도 그대로 따라 패서도(浿西道), 또는 북계 (北界)라고 불렸다. 숙종(肅宗) 7년 임오(송나라 건중정국(建中靖國) 2년) 에 서북면(西北面)이라 칭하고, 고려 말에 황주목(黃州牧)⋅안악 군(安岳郡)⋅철화현(鐵和縣)⋅장명진(長命鎭)을 내속(來屬)시켰다 가, 홍무(洪武) 무진년에 다시 서해도(西海道)에 붙이었다. 본조 태종 (太宗) 13년 계사에 평안도(平安道)로 고치고, 16년 병신에 영길도(永 吉道)⋅갑산군(甲山郡)⋅서면(西面)⋅여연(閭延) 등의 땅이 본도(本 道)와의 거리가 너무 멀므로, 소훈두(小薰頭) 이서(以西)를 떼어 여연 군(閭延郡)으로 삼고 내속(來屬)시켰다16). 마-3. … 【건치연혁】 본래 삼조선(三朝鮮)과 고구려의 옛 도읍이다. 당요(唐堯) 무진년에 어떤 신인(神人)이 태백산(太伯山) 박달나무 아 래에 내려오니, 나라 사람들이 임금으로 삼아 평양(平壤)에 도읍하고 단군(檀君)이라 불렸다. 이것이 전조선(前朝鮮)이다. 주(周) 무왕(周 16) 世宗實錄 卷154 地理志 平安道 平壤府 平安道 本朝鮮故地, 在三國爲高句麗所有, 寶藏王二十七年戊辰(唐 高宗 摠章元年) 新羅 文武王, 與唐將李勣滅之, 遂倂其地. 孝恭王九年乙丑, (唐 哀帝 天祐二年) 弓裔據鐵原, 自稱後高麗王, 分定浿西十三鎭. 高麗仍稱浿西道, 或云北界, 肅宗七年壬午, (宋 建中靖 國二年) 稱西北面. 高麗之季, 以黃州牧 安岳郡 鐵和縣 長命鎭來屬, 洪武戊辰, 復屬西 海道. 本朝太宗十三年癸巳, 改平安道, 十六年丙申, 以永吉道 甲山郡西面閭延等地距本 道遼邈, 割小薰頭以西, 爲閭延郡來屬..
(16) 170 仙道文化 제 29 권. 武王)이 상(商)을 이기고 기자(箕子)를 여기에 봉했다. 이것이 후조선 이다, 전하여 41대 손 준(準)에 이르러 연인(燕人) 위만(衛滿)이 그 땅을 빼앗아 왕험성(王險城)(험(險)은 검(儉)이라고도 쓰니, 바로 평양 이다)에 도읍한다. 이것이 위만조선이다. 그 손자 우거(右渠)가 한(漢) 의 조명(詔命)을 받들려 하지 않으니, 무제(武帝)가 원봉(元封) 2년에 장수를 보내어 토벌하여, 사군(四郡)으로 만들어 왕험성을 낙랑군(樂 浪郡)으로 삼았다. 고구려 장수왕(長壽王) 15년에 국내성(國內城)으로 부터 옮겨와 도읍했다. 보장왕 27년에 당(唐) 고종(高宗)이 이적을 보내 신라와 함께 협공(夾攻)하여 고구려를 멸하고 안동도호부(安東 都護府)를 두어 좌위위대장군(左威衛大將軍) 설인귀(薛仁貴)에게 군 사 2만을 거느리고 진무(鎭撫)하게 하였는데, 뒤에 당 나라 군사가 떠나자 그 땅이 다 신라로 들어갔다. 고려 태조 원년에 평양이 황폐했 기 때문에 염주(鹽州)⋅백주(白州)⋅황주(黃州)⋅해주(海州)⋅봉주 (鳳州) 등 여러 고을의 백성들을 옮겨서 인구를 채워 대도호부(大都護 府)를 삼았고, 조금 뒤에 서경(西京)으로 삼았다. 광종(光宗) 11년에 서도(西都)로 고쳐 불렸고, 성종(成宗) 14년에 서경 유수(西京留守)로 고쳐 불렸다. 목종(穆宗) 원년에 또 호경(鎬京)이라 고쳤다. 문종(文 宗) 16년에 다시 서경 유수라 고쳐 부르고, 경기(京畿) 사도(四道)를 두었다. 숙종(肅宗) 7년에 문무반(文武班) 및 오부(五部)를 설치했다. 인종(仁宗) 13년에 중 묘청(妙淸) 및 유참(柳旵), 분사시랑(分司侍郞) 조광(趙匡) 등이 반란을 일으켜 절령(岊嶺) 길을 끊으므로 김부식(金富 軾)을 명하여 이를 쳐서 평정하게 하고 유수(留守)⋅감군(監軍)⋅분사 (分司)⋅어사(御史)를 제외한 모든 관반(官班)을 없애고, 조금 뒤에 경기 사도를 삭제하고 여섯 현(縣)을 두었다. 원종 10년에 서북면 병마 사영기관(西北面兵馬使營記官) 최탄(崔坦)과 삼화현 교위(三和縣校 尉) 이연령(李延齡) 등이 난을 일으켜 유수를 죽이고 서경 및 여러 성(城)의 백성을 거느리고 반란을 일으켜 몽고(蒙古)에 붙으니, 몽고.
(17) 동녕부 자비령(慈悲嶺)과 고려 서북 경계 171. 가 서경을 동령부(東寧府)로 삼고 절령을 그어 경계로 삼았다. 충렬왕 (忠烈王) 16년에 원(元)이 도로 우리에게 돌려주어 드디어 다시 서경 유수 가 됐다. 공민왕(恭愍王) 18년에 만호부(萬戶府)를 설치하였다가 뒤에 고쳐 평양부(平壤府)로 삼았다. 본조에서 그대로 두어 관찰사로서 부윤 (府尹)을 겸하게 하였으며, 세조조(世祖朝)에 진(鎭)을 두었다. …17) 마-2, 3에 의하면 조선 평안도에 평양부가 있음을 알 수 있다. 평양부의 행정 범위는 현재 평안도 대동강 유역이다. 그렇다면 동녕부 자비령은 현재 대동강 동쪽 80km 범위 안에 위치한다고 할 수 있다. 조선 시대 발간된 여러 지리지에서 대동강 유역 동쪽 80km 범위 안에서 자비령이란 지명을 가진 장소는 찾을 수 없었고, 자비령으로 볼 수 있는 자연지리 조건을 지닌 장소도 찾을 수 없었다. 그러므로 마-1의 평양성은 조선 시기 이전의 평양 성으로 봐야 할 것 같다. 그런데 대명일통지 요동도지휘사사 편에 고적(古蹟) 중 하나로 평양성 (平壤城)이 기록돼 있다. 마-4. 평양성 압록강(鴨淥江) 동쪽에 있다, 일명 왕검성(王儉城) 즉 기자(箕子)의 옛 나라이다. 성 밖에 기자묘(箕子墓)가 있다. 한나라 17) 新增東國輿地勝覽 第51卷 平安道 平壤府 …【建置沿革】 本三朝鮮高句麗之故都, 唐堯戊辰歲, 有神人降太伯山檀木下, 國人立爲君 都平壤號壇君, 是爲前朝鮮, 周武王克商封箕子于此, 是爲後朝鮮, 傳至四十一代孫準燕人 衛滿其地都王險城(險一作儉卽平壤), 是爲衛滿祖先, 其孫右渠不肯奉漢詔, 武帝元封二年 遣將討之, 定爲四郡以王險爲樂浪郡, 高句麗長壽王十五年自國內城從都之, 寶藏王二十七 年唐高宗遣李勣與新羅夾攻滅之, 置安東都護府, 以左威衛袋將軍薛仁貴摠兵二萬以鎭撫 之, 後唐兵既去其地皆入於新羅, 高麗太祖元年以平壤荒廢, 量從塩白黃海鳳諸州民以實之, 爲大都護府, 尋爲西京, 光宗十一年改稱西都, 成宗十四年稱西京留守, 穆宗元年又改鎬京, 文宗十六年復稱西京留守置京畿四道, 肅宗七年設文武班及五部, 仁宗十三年僧妙淸及柳旵 分司侍郞趙匡等叛斷岊嶺道, 命金富軾討平之, 除留守監軍分司御史外悉汰官班, 尋削京畿 四道置六縣, 元宗十年西北面兵馬使營記官崔坦三和縣校尉李延齡等作亂, 殺留守, 以西京 及諸城叛附蒙古, 蒙古以西京爲東寧府畫岊嶺爲界, 忠烈王十六年元還歸于我遂復爲西京留 守, 恭愍王十八年設萬戶府, 後改爲平壤府, 本朝因之以觀察使兼府尹, 世祖朝置鎭. ….
(18) 172 仙道文化 제 29 권. (漢) 때 낙랑군(樂浪郡) 치소(治所)가 됐다. 진(晉) 의희(義熙) 시기 이후 그 왕 고련(高璉)이 살기 시작했다. 이 성은 뒷날 서경(西京)으로 불렸다, 원(元) 동녕로(東寧路)가 됐다18). 마-4에서 진(晉)은 중국 6조(朝) 중 하나인 동진(東晉)이며, 동진 의희 (義熙)는 405∼418년이다. 고련(高璉)은 고구려 장수왕(長壽王)을 말한 다.19) 그러나 마-4기록만으로 평양성 위치를 알기에 부족한 부분이 있다. 마-4에서 평양성이 원(元) 시기 동녕로(東寧路)가 됐다고 했으므로 원사 (元史)에서 동녕로를 살펴보기로 하겠다. 마-5. 동녕로(東寧路)는 원래 고구려 평양성이었고 또 장안성(長安 城)이라고 했다. 한나라가 조선을 멸명 시켜 낙랑, 현도군을 설치했는 데 이곳은 낙랑의 영역이었다. 진나라 의희(義熙) 이후 그의 왕 고련 (高璉)이 처음으로 평양성에 거주했다. 당나라가 고려를 정복하고 평 양을 없앴다. 그 나라가 동쪽으로 옮겨갔다. 압록수 동남쪽으로 약 천리 떨어진 곳인데 옛날 평양이 아니다. 왕건(王建) 때에는 평양을 서경(西京)으로 했다. 원나라 지원(至元) 6년에 이연령(李延齡), 최원 (崔垣), 현원렬(玄元烈) 등이 부(府), 주(州), 현(縣), 진(鎮) 등 60개 성을 이끌고 귀복했다. 8년에 서경(西京)이 동녕부(東寧府)로 개설됐 다. 13년에 동녕로총관부(東寧路總管府)로 승격했다. 녹사사(錄事司) 를 설치했다. 정주(靜州), 의주(義州), 인주(麟州), 위원진(威遠鎮)을 분할하여 파사부(婆娑府)에 예속하게 했다. 동녕로(東寧路) 아래 사 (司) 1개를 관할한다. 나머진 성이 폐하므로 사(司)가 남아있지 않다. 18) 大明一統志 卷之 25 遼東都指揮使司 平壤城 在鴨淥江東一名王儉城卽箕子之古國 城外有箕子墓 漢爲樂浪郡治 晉義熙後其王 高璉始居 此城後號西京 元爲東寧路. 19) 三國史記 卷18 高句麗 本紀 第6 長壽王 卽位 長壽王, 諱巨連(一作璉), 開土王之元子也. 體貌魁傑, 志氣豪邁. 開土王十八年立爲太子, 二十二年王薨, 即位..
(19) 동녕부 자비령(慈悲嶺)과 고려 서북 경계 173. 오늘날 원래 지명만 남아 있다20). 마-5에 의하면 지원(至元) 13년(1276) 동녕부가 동녕로총광부(東寧路總 管府)로 승격했음을 알 수 있다. 마-4의 동녕로는 동녕부가 승격되면서 그 명칭이 바뀐 것이다. 또 동녕부는 고구려 장수왕의 평양⋅고려 서경 지역에 설치됐음을 알 수 있다. 동녕부 지역에 대한 현재 학계 대부분 의견은 평안도 대동강 부근이다. 그러나 앞서 애기했듯이 평안도 대동강 유역 동쪽 80km 범위 안에서 자비 령이란 지명이나 자비령으로 볼 수 있는 자연지리 조건을 가진 곳을 찾을 수 없다. 또 마-4의 평양성은 명(明) 요동도지휘사사(遼東都指揮使司) 관 할 내 고적 중 하나로 기록되어 있으므로 중국 요녕성(遼寧省) 지역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최근 동녕부 설치 지역이 평안도 대동강 유역이 아니며 중국 요녕성 요양 시(遼陽市) 지역이라는 주장이 제기됐다21). 남의현은 요양시부터 160리 (里)를 사행기록을 통해 추적하면 중국 요녕성 연산관진으로 확인되며 이곳 이 자비령이라고 주장한다22). 남의현은 마-5에서 등장하는 고구려 장수왕 의 평양성⋅고려 서경⋅원 동녕부⋅원 동녕로 모두를 동일한 지역으로 보 고, 고구려 장수왕의 평양성 위치를 찾았다. 고구려 장수왕의 평양성은 14세기 이전 자료에서 항상 압록수(鴨淥水)와 함께 등장하는데, 이 압록수 20) 元史 卷58 志第10 地理 1 東寧路, 本高句驪平壤城, 亦曰長安城. 漢滅朝鮮, 置樂浪、玄菟郡, 此樂浪地也. 晉義熙 後, 其王高璉始居平壤城. 唐征高麗, 拔平壤,其國東徙, 在鴨綠水之東南千餘里, 非平壤 之舊. 至王建, 以平壤為西京. 元至元六年, 李延齡、崔垣、玄元烈等以府州縣鎮六十城來 歸. 八年, 改西京為東寧府. 十三年, 升東寧路總管府, 設錄事司, 割靜州、義州、麟州、 威遠鎮隸婆娑府. 本路領司一, 余城堙廢, 不設司存, 今姑存舊名. 21) 남의현, 「원말⋅명초 한중간의 요동국경지대연구-東寧府,東寧路,東寧衛와의 상관성을 중심으로-」, 인문과학연구 제61집, 강원대학교 인문과학연구소, 2019, 177∼217쪽. 복기대, 「원나라 동녕부 위치에 대한 고찰」, 몽골학 57권, 한국몽골학회, 2019, 97 ∼124쪽. 22) 남의현, 「원말⋅명초 한중간의 요동국경지대연구-東寧府,東寧路,東寧衛와의 상관성을 중심으로-」, 인문과학연구 제61집, 강원대학교 인문과학연구소, 2019, 207쪽..
(20) 174 仙道文化 제 29 권. 를 현재 요하(遼河)로 보았다. 따라서 고구려 장수왕의 평양성은 중국 요녕 성 요양시이며, 고려 서경⋅원 동녕부⋅원 동녕로 모두가 요양시 지역에 있었다고 주장한다. 여기에서 고구려 장수왕의 평양성이 고려 서경⋅원 동녕부⋅원 동녕로와 과연 동일한 지역인지 검토할 필요가 있다. 마-5를 다시 살펴보면, 당(唐) 이 고구려를 멸망시킨 후 고구려 장수왕의 평양을 없앴고, 고구려 유민이 압록강(鴨綠江) 동쪽 천 여리(里) 이동하면서 평양도 함께 이동했는데 그 평양은 고구려 장수왕의 평양이 아니며(非平壤之舊) 새롭게 옮긴 평양에 고려 태조(太祖)가 서경을 설치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 기록을 해석해 보면 고구려 장수왕의 평양과 고려 서경⋅원 동녕부⋅원 동녕로는 동일한 지역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따라서 대명일통지 외이 조선 편에 기록된 평양성은 고구려 장수왕의 평양성이거나 또는 고려 서경을 가리키는 것으 로 나눠 봐야 한다. 그런데 고려사 지리지 북계(北界) 서경유수관(西京留守官) 편에서 고 려 서경의 연혁을 살펴보면 태조 원년(918) 대도호부(大都護府)가 처음 설 치된 후 서경→서도(西都)→서경유수(西京留守)→호경(鎬京)→서경유수 관(西京留守官)→동녕부→서경유수관→만호부(萬戶府)→평양부(平壤府) 로 명칭이 변화했다23). 평양부로 명칭이 바뀐 시기는 만호부가 설치된 공민왕 18년(1369) 이후이다. 고려가 멸망한 시기는 1392년으로 고려 서경 이 평양부 또는 평양으로 불렸던 시기는 약 20년에 불과하다. 그 이전 시기 는 대부분 서경 또는 서경유수관으로 불렸다. 또 요사(遼史)⋅금사(金 23) 高麗史 卷12 地理3 北界 西京留守官 平壤府 … 太祖元年, 以平壤荒廢, 量徙鹽⋅白⋅黃⋅海⋅鳳諸州民, 以實之, 爲大都護府. 尋爲 西京. 光宗十一年, 改稱西都. 成宗十四年, 稱西京留守. 穆宗元年, 又改鎬京. 文宗十六 年, 復稱西京留守官, 置京畿四道. 肅宗七年, 設文武班及五部. 仁宗十三年, 西京僧妙淸 及柳旵, 分司侍郞趙匡等叛, 遣兵斷岊嶺道. 於是, 命元帥金富軾等, 將三軍, 討平之. 除 留守⋅監軍⋅分司御史外, 悉汰官班, 尋削京畿四道, 置六縣. 元宗十年, 西北面兵馬使營 記官崔坦⋅三和校尉李延齡等, 作亂, 殺留守, 以西京及諸城, 叛附于蒙古. 蒙古以西京爲 東寧府, 置官吏, 畫慈悲嶺爲界. 忠烈王十六年, 元歸我西京及諸城, 遂復爲西京留守官. 恭愍王十八年, 設萬戶府. 後改爲平壤府.有大同江 ….
(21) 동녕부 자비령(慈悲嶺)과 고려 서북 경계 175. 史)⋅원사도 고려 서경을 평양 또는 평양성으로 부른 용례(用例)는 찾기 힘들다. 즉 고려 서경은 고구려 평양 지역에 설치됐지만 고구려 장수왕이 427년 천도한 평양성은 아니며 그 명칭도 평양 또는 평양성은 아니었다고 짐작된다. 이상의 내용을 종합하면 고려사와 달리 대명일통지는 자비령 위치에 대해 ‘평양성 동쪽 160리’라고 구체적으로 기록해 놓았고, 원 시기 경계로 삼았다고 분명히 전하고 있다. 그리고 이 평양성을 살펴본 결과 고구려 장수왕이 427년 천도한 평양성을 가리키는 것으로 나타났다. 즉 자비령은 고구려 장수왕의 평양성 동쪽 160리(里), 약 80km 범위 안에 위치했던 것이다.. Ⅲ. 자비령 위치 현재 자비령 위치는 고려사 지리지 동주 편을 근거로 황해도 서흥군 서북쪽으로 알려져 있지만, 고려사 지리지 동주 편은 근거로서 부족한 부분이 많았다. 반면 대명일통지 외이 조선 편은 자비령을 ‘평양성 동쪽 160리’라고 구체적으로 명시하고 있으며, 원 시기 경계로 삼았다고 설명하 고 있다. 그러므로 자비령 위치는 대명일통지 외이 조선 편을 근거로 살펴봐야 할 것이다. 대명일통지에서 기록된 평양성은 검토 결과 고구려 장수왕이 427년 천도한 평양성으로 확인됐다. 현재 고구려 장수왕의 평양성은 평안도 대동 강 부근으로 알려져 있지만, 최근 그 위치가 중국 요녕성 요양시라는 주장 이 제기되고 있다.24) 관련 기사를 바탕으로 고구려 장수왕이 천도한 평양 성 위치를 살펴보겠다.. 24) 인하대학교 고조선연구소, 고구려의 평양과 그 여운연구총서2, 2017, 주류성출판사..
(22) 176 仙道文化 제 29 권. 사-1. 12월에 황제가 함원전(含元殿)에서 포로를 받았다. 왕은 정치 를 자신이 한 것이 아니므로 용서하여 사평태상백(司平太常伯) 원외동 정(員外同正)으로 삼고, 천남산은 사재소경(司宰少卿)으로, 승려 신성 은 은청광록대부(銀靑光祿大夫)으로, 천남생은 우위대장군(右衛大將 軍)으로 삼았다. 이적(李勣) 이하의 사람들은 책봉하고 상을 주었는데 차등이 있었다. 천남건은 검주(黔州)로 유배를 보냈다. 5부, 176성 (城), 69만여 호를 나누어 9 도독부(都督府) 42주(州) 100현(縣)으로 만들고, 평양(平壤)에 안동도호부(安東都護府)를 두어 이를 통치하게 하고, 우리 장수 중에 공이 있는 자를 뽑아 도독⋅자사⋅현령으로 삼아 화인(華人)과 함께 다스리는 데 참여하게 하였다. 우위위대장군(右威 衛大將軍) 설인귀로 검교(檢校) 안동도호를 삼아 병력 2만 인을 거느리 고 백성들을 진정시키고 어루만져 달래게 하였다. 이때가 고종 총장 (總章) 원년 무진년이었다25). 사-2. 안동. 상도호부(上都護府)이다. 총장(總章) 원년에, 이적이 고려국을 평정하고, 성 176곳을 얻었다. 그 곳을 나눠 도독부 9곳⋅주 42곳⋅현 100곳으로 삼고, 안동도호부를 평양성(平壤城)에 설치해 이 들 지역을 다스렸다. 그들 우두머리(酋渠)를 등용해 도독(都督)⋅자사 (刺史)⋅현령(縣令)으로 삼았다. 상원(上元) 3년에 요동군(遼東郡) 옛 성으로 옮겼고, 의봉(儀鳳) 3년에 또 신성(新城)으로 옮겼다. 성력(聖 曆) 원년에 다시 안동도독부(安東都督府)로 이름을 바꿨다. 신룡(新 龍) 원녀 다시 옛 이름으로 바꿨다. 개원(開元) 2년에 평주(平州)로. 25) 三國史記 卷22 高句麗 本紀 第10 寶藏王 27年 冬 12月 十二月, 帝受俘于含元殿. 以王政非己出, 赦以爲司平大常伯⋅貟外同正, 以泉男産爲司宰 少卿, 僧信誠爲銀青光禄大夫, 泉男生爲右衞大將軍. 李勣已下, 封賞有差. 泉男䢖 流黔 州. 分五部⋅百七十六城⋅六十九萬餘戸, 爲九都督府⋅四十二州⋅百縣, 置安東都護府 於平壤, 以統之, 擢我將帥有功者, 爲都督⋅刺史⋅縣令, 與華人叅理. 以右威衞大將軍薛 仁貴檢校安東都護, 㧾校勘 兵二萬人, 以鎮撫之. 是髙宗緫章元年戊辰歳也..
(23) 동녕부 자비령(慈悲嶺)과 고려 서북 경계 177. 옮겼고, 천보(天寶) 2년 또 요서(遼西) 옛 군성(郡城)으로 옮겼다. 지덕 (至德) 이후 폐지됐다. 토산 공물(土貢)로 인삼(人葠)이 있다. 안동수 착(安東守捉)이 있다. 회원군(懷遠軍)이 있다. 천보(天寶) 2년에 설치 했다. 또 보정군(保定軍)이 있다26). 사-1, 2에 의하면 당(唐) 고종(高宗) 총장(總章) 원년(668)에 당 고종이 고구려를 멸망시킨 뒤 고구려 평양성(平壤城)에 안동도호부(安東都護府) 를 설치했음을 알 수 있다. 이때 평양성은 427년 고구려 장수왕이 천도한 곳으로 알려져 있다. 사-3. … 서진(西晉) 때 고려(高麗)에 함락되었다. 뒤에 모용수(慕 容垂)에게 귀의하였다가 그 아들 모용보(慕容寶)가 고구려 왕 고안(高 安)을 평주목사(平州牧使)으로 삼아 그곳에 살게 하였다. 원위(元魏) 태무제(太武帝)가 그가 살고 있는 평양성(平壤城)으로 사신을 보내니, 요 동경(東京)이 본래 이곳이다. 당나라 고종(高宗)이 고구려를 평정 하고 이곳에 안동도호부(安東都護府)를 두었다. …27) 사-3에서 원위(元魏) 태무제(太武帝)는 중국 남북조 시기 북위(北魏) 태 무제를 지칭하며, 즉위기간은 424∼451년이다. 북위 태무제 시기는 고구 려 장수왕 시기(413∼491)에 해당한다. 북위 태무제가 고구려 왕이 사는 평양성으로 사신을 보냈는데 그 곳이 요(遼) 동경(東京)이며 당 고종이 고구 26) 新唐書 卷39 志 第29 地理三 河北道 安東. 上都護府. 總章元年, 李勣平高麗國, 得城百七十六, 分其地為都督府九, 州四十 二, 縣一百, 置安東都護府於平壤城以統之, 用其酋渠為都督⋅刺史⋅縣令. 上元三年徙遼 東郡故城, 儀鳳二年又徙新城. 聖曆元年更名安東都督府, 神龍元年復故名. 開元二年徙于 平州, 天寶二年又徙於遼西故郡城. 至德後廢. 土貢人葠. 有安東守捉. 有懷遠軍. 天寶二 載置, 又有保定軍. 27) 遼史 卷38 志 第8 地理志 2 東京道 東京 遼陽府 … 晉陷高麗, 後歸慕容垂, 子寶以勾麗王安爲平州牧居之. 元魏太武遣使至其所居平壤城, 遼東京本此. 唐高宗平高麗, 於此置安東都護府 ….
(24) 178 仙道文化 제 29 권. 려를 멸망시키고 그 지역에 안동도호부를 두었음을 알 수 있다. 즉 당이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안동도호부를 설치한 평양성이 요 동경도 요양부이 며, 요 동경도 요양부가 곧 고구려 장수왕이 427년 천도한 평양성으로 추측 할 수 있다. 현재 요 동경이나 요 동경도 요양부 위치는 중국 요녕성 요양시 지역으로 보고 있으므로, 결국 고구려 장수왕이 천도한 평양성은 중국 요녕성 요양시 지역임을 알 수 있다. 대명일통지에서 평양성이 중국 요녕성 지역인 명 요동도지휘사사 고전 편에 기록된 점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고구려 장수왕의 평양성이 중국 요녕성 요양시 지역이므로 동녕부 자비 령은 요양시 동쪽 80km 범위 안에서 찾을 수가 있다. 요양시 동쪽 80km 범위는 중국 요녕성 본계시(本溪市)에 해당된다. 그러나 현재 본계시에서 자비령이란 지명을 가진 곳은 찾을 수 없다. 약 천 년 전의 지명이기 때문에 현재는 사라졌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필자는 경계로 삼을 수 있는 자연지리 조건으로 2가지를 선정하고 본계시 지역에서 경계로 삼을 만한 곳을 찾아 현장 답사를 진행했다. 경계의 자연 지리 조건으로 첫 번째는 육상교통로 상의 길목으로, 두 번째는 요충지(要 衝地)로 선정했다. 경계는 그곳을 통해서 많은 사람이 교역⋅외교 등의 이유로 오고가야 하며, 무력충돌이 발생할 경우 내지(內地) 진출을 막는 1차 군사방어선이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먼저 육상교통로 상의 길목을 찾아 봤다. 과거 중국 요녕성 지역의 중심 지역은 요양시 지역이었다. 한반도 북부에서 요양시에 이르는 육상교통로 는 현지답사를 통해 2개를 확인했다..
(25) 동녕부 자비령(慈悲嶺)과 고려 서북 경계 179. [그림 5] 한반도 북부-요양시 육상교통로. 첫 번째 육상교통로는 평안도 의주(義州)-봉황시(鳳凰市)-통원보(通遠 堡)-연산관(連山關)-첨수만족향(甛水滿族鄕)-요양 궁장령구(弓長嶺區)요양시이다. 이 육상교통로는 청(淸) 사행로(使行路)로도 알려져 있다. 이 육상교통로는 좁은 골짜기를 따라 형성되어 있고 고개가 높고 험했다. 이 육상교통로에서 본계시 지역에 속하는 곳은 첨수만족향이다..
(26) 180 仙道文化 제 29 권. [그림 6] 첨수만족향 입구(2020.01.). 그러나 첨수만족향은 요양시에서 동남 방향에 위치해 대명일통지 외이 조선 편에서 기록된 방향과 일치하지 않는다. 대명일통지는 동서남북과 동북⋅동남⋅서남⋅서북을 포함한 8방위로 방향을 기록하고 있기 때문이다. 두 번째 육상교통로는 평안도 삭주(朔州)-관전현(寬甸縣)-애양진(愛陽 鎭)-새마진(賽馬鎭)-초하장진(草河掌鎭)-사산령촌(思山嶺村)-요양시 이다. 이 육상교통로는 현지답사 결과를 근거로 선정한 것이다. 이 육상교 통로 시작을 평안도 삭주로 잡은 이유는 현재 평안도 삭주 앞 압록강에 하구 단교(河口斷橋)라는 다리가 있기 때문이다. 이 다리는 일본이 길림성 장춘시에 만주국(滿洲國)을 세운 뒤 한반도에서 만주국으로 쉽게 이동하기 위해 1942년 12월 건설한 것이다. 현재 이 다리는 중간 부분이 교량(橋梁)만 남아있는데, 한국전쟁 당시 중공군 진격에 이용되어 폭격을 당했기 때문이 다. 이 같은 역사적 사실은 과거 평안도 삭주가 의주 나루처럼 압록강을 건너는 나루터 중 하나였음을 보여준다..
(27) 동녕부 자비령(慈悲嶺)과 고려 서북 경계 181. [그림 7] 하구 단교(河口斷橋)(2019.06.). 관전현은 평안도 삭주에서 압록강을 건넌 뒤 북쪽으로 약 45km 떨어진 곳에 위치한다. 관전현 지역의 도로 환경을 확인한 결과 남쪽은 평안도 삭주, 동쪽은 요녕성 환인현(桓仁縣), 서쪽은 단동시(丹東市), 북쪽은 철령 시(鐵嶺市)으로 도로가 나있음을 확인했다. 따라서 관전현은 압록강과 요 녕성 서북지역 사이 육상교통로 상의 길목으로 평안도 삭주에서 압록강을 건넸다면 관전현으로 이동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리고 관전현 이후 국도 나 지방도로를 따라 이동해 본 결과 애양진-새마진-초하장진-사산령촌요양시로 확인됐다..
(28) 182 仙道文化 제 29 권. [그림 8] 관전현 교통표지판(2019.04.). 이 육상교통로는 비교적 넓은 골짜기를 따라 형성되어 있고, 고개는 비탈이 완만하고 높지 않았다. 이 육상교통로에서 본계시 지역에 속하는 지역은 사산령촌이다. 사산령촌은 요양시 동쪽에 위치해 대명일통지 외이 조선 편에서 기록된 방향과도 일치한다. 또 사산령촌 동쪽은 산간지 역이고 서쪽은 태자하(太子河) 중류의 평지지역으로, 사산령촌을 기준으 로 자연환경이 크게 달라져 자연적 경계로 삼기에 충분한 조건을 갖추고 있다..
(29) 동녕부 자비령(慈悲嶺)과 고려 서북 경계 183. [그림 9] 사산령촌 입구(2020.01.). 다음으로 요충지를 찾아봤다. 사산령촌 북쪽에 평정산(平頂山)이 있는 데, 현지답사 결과 평정산 정상 부근에서 군사유적을 확인 할 수 있었다. 첫 번째 군사유적은 원(元) 말기(末期)에 쌓은 것으로 추측되는 성(城)이다. 이 성은 평정산 정상 부근을 둘러쌓은 퇴뫼식 산성(山城)으로 보이며, 현재 돌로 쌓은 성벽 일부가 남아있었다. 두 번째 군사유적은 러일전쟁 시기 돌로 만든 참호(碉堡)이다. 참호는 1∼2명 정도가 들어갈 수 있는 크기이며, 평정산 능선에 따라 일정한 간격을 두고 만들어져 있었다. 평정산 지역에 군사유적이 존재하는 것은 본계시 일대가 잘 조망(眺望)되고, 북쪽으로 심양(瀋陽) 동쪽으로 요양으로 나눠지는 지역에 해당되기 때문이다. 이처 럼 평정산에 긴 시기에 걸쳐 군사유적이 존재한다는 점은 사산령촌 부근이 과거부터 요충지로 여겨졌음을 보여준다..
(30) 184 仙道文化 제 29 권. [그림 10] 본계시 전경 (평정산 정상, 2019.03.). [그림 11] 평정산 유적 안내판 (2019.03.). 이상으로 경계로 삼을 수 있는 자연지리 조건에 요양시 사산령촌 지역이 모두 해당되는 것으로 나타났다. 따라서 1270년 원이 동녕부를 설치하고 동녕부 경계로 삼은 자비령은 중국 요녕성 본계시 사산령촌 지역으로 추측 해 볼 수 있다..
(31) 동녕부 자비령(慈悲嶺)과 고려 서북 경계 185. Ⅳ. 고려 서북 경계 검토 1270년 원 세조가 동녕부의 경계로 그은 자비령은 중국 요녕성 본계시 사산령촌(思山嶺村)으로 추측된다. 동녕부는 고려 서북 경계인 고려 서경 및 그 일대를 포함하므로 원과 동녕부의 경계인 자비령을 고려 서북 경계로 도 볼 수 있다. 따라서 자비령을 시작점으로 고려 서북 경계 일부를 추측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자비령은 원 시기의 경계로 고려 말기에 해당되므로, 그 이전 시기의 경계도 살펴보기 위해 요 불탑인 요탑(遼塔)과 금 관리인 왕적이 쓴 압강행부지를 추가로 살펴보겠다. 요(遼)는 타 민족과 융합 정책의 하나로 불교를 장려하고 숭상(崇尙)해 정치 영역 곳곳에 ‘요탑(遼塔)’이라는 불탑(佛塔)을 건설했다. 현재 요탑은 내몽고자치구(內蒙古自治區) 동부지역부터 요녕성 전체⋅길림성 일부 지 역에 분포하며28), 요탑의 분포 지역은 요의 정치영역과 대략적으로 일치하 는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29) 그래서 요탑 분포의 최동단(最東端) 지역은 요의 동쪽 경계이며 고려의 서북 경계로도 볼 수 있다. 요탑 분포의 최동단 지역을 보면 개원(開原)-철령(鐵嶺)-무순(撫順)-본계-대련(大連)으로 이어진다. 이들 지역을 잇는 선이 고려와 요의 경계선이며 고려 초기 고려 의 서북 경계로 추측된다.. 28) 张晓东, 辽代砖塔建筑形制初步研究, 박사학위논문, 길림대학교, 2013. 谷赟, 辽塔研究, 박사학위논문, 중앙미술학원, 2013. 정영호, 中國遼塔, 학연문화사, 2019. 백만달, 거란 전탑 연구, 박사학위논문, 인하대학교, 2020. 29) 복기대, 「중국학계의 거란 동(東)쪽 국경에 인식에 대(對)하여」, 선도문화 14권, 국제 뇌교육종합대학원 국학연구원, 2013, 361∼393쪽. 谷赟, 辽塔研究, 박사학위논문, 中央美术学院, 2013, 40쪽..
(32) 186 仙道文化 제 29 권. [그림 12] 요탑의 최동단(最東端) 분포지역. 압강행부지(鴨江行部志)는 1191년 금(金) 관리인 왕적(王寂)이 압강 (鴨江)지역을 순시(巡視)한 일정을 기록한 책이다. 압강행부지에서 왕적 이 순시 간 지역과 그 지역을 현재 지역으로 고증한 것을 정리하면 다음 표와 같다30).. 30) 张博泉, 鴨江行部志注释, 黑龙江人民出版社,1984..
(33) 동녕부 자비령(慈悲嶺)과 고려 서북 경계 187. <표 1> 뺷압강행부지뺸순시 지역 일시. 순시 지역. 현재 지역. 2월 10일 망해루(望海門). 요녕성 요양시. 2월 14일 징주(澄州). 해성시(海城市). 2월 19일 석목(析木). 해성시 석목진(析木鎭). 2월 20일 탕지현(湯池縣). 대석교시(大石橋市) 탕지진(湯池鎭). 2월 22일 진주(辰州). 개주시(盖州市). 2월 25일 웅악현(熊嶽縣). 영구시(營口市) 웅악진(熊岳鎭). 2월 28일 갈소관(褐蘇館). 와방점시(瓦房店市) 영녕진(永寧鎭). 3월 04일 복주(複州). 와방점시 복주성진(複州城鎭). 3월 08일 순화영(順化營). 대련시(大連市) 금주구(金州區). 3월 09일 신시(新市). 대련시 벽류하(碧流河) 부근. 3월 10일 용암사(龍岩寺). 벽류하와 수암현 사이. 3월 11일 마석산(磨石山). 수암현(岫岩縣) 연와령(燕窩嶺). 3월 12일 대녕진(大寧鎭). 수암현 일대. <표 1>을 보면 3월 11일부터 12일까지 왕적이 순시한 지역은 마석산과 대녕진이다. 두 지역에 대해 왕적이 적은 내용을 자세히 살펴보면 특별한 자연지리 모습을 알 수 있다. 아-1. 기미(己未)(3월 11일) 용암(龍岩)을 출발했다. 북쪽을 바라보 니 큰 산이 끊임없이 이어져 있고, 여러 산봉우리가 아련히 서 있는데, 모양이 마치 푸른색 병풍과 같아, 빼어난 색상이 움켜쥐고 싶을 만하 다. 마을 사람은 이 산을 마석산(磨石山)이라 일컫는데, 숫돌(磨石)이 나오기 때문이다.31). 31) 己未, 發龍岩. 山前數十裏, 北望大山連延不絕, 數峰側立, 狀如翠屏, 秀色可掬. 裏人謂 之磨石山, 以出磨石故也..
(34) 188 仙道文化 제 29 권. 아-2. 경신(庚申)(3월 12일) 대녕진(大寧鎮)으로 나아갔다. 가는 중 간에 어지러이 솟은 산들이 겹겹이 있어, 사람이 겨우 지나갈 정도였 다. 그래서 모두 작은 언덕이나 산봉우리라서, 볼 만한 것이 없다. 다시 동쪽으로 40∼50리(裏)으로 가서, 남쪽을 바라보니 산봉우리가 끊임없이 겹쳐져 있어, 먼 산의 푸른빛이 어렴풋하고, 많은 길이 폭포 처럼, 산기슭을 돌아가며 흐른다.32) 아-1, 2에 의하면 마석산(麻石山) 북쪽과 대녕진(大寧鎭) 남쪽에 큰 산이 끊임없이 이어져 있음을 알 수 있다. 즉 마석산 북쪽과 대녕진 남쪽으로 큰 산맥이 지나가고 있다는 것이다. <표 1>에서 2월 10일부터 3월 8일까지 왕적이 순시한 지역을 보면 요동반 도(遼東半島) 서쪽 해안 지역임을 알 수 있다. 요동반도에서 큰 산맥으로 천산산맥(千山山脈)이 있는데, 본계시 남쪽에서 시작해 대련 방향으로 뻗 어 있다. 마석산 북쪽과 대녕진 남쪽으로 지나가는 큰 산맥을 천산산맥으로 본다면, 마석산은 천산산맥 줄기에 속하는 산으로 대녕진은 천산산맥 북쪽 에 위치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금 관리가 순시를 간 지역이라면, 그 지역은 분명 금의 정치 영역이므로 고려와 금은 대략 천산산맥을 경계로 삼았다고 생각할 수 있다. 따라서 고려 중기 요동반도 내에서 고려 서북 경계는 천산 산맥으로 추측된다.. 32) 庚申, 赴大寧鎮. 中路亂山重複, 人跡僅通, 然皆培嵝, 無可觀者. 又東行四五十裏, 南望 層巒迭嶂, 空翠溟蒙, 百道飛泉, 環流山麓. 下缺..
(35) 동녕부 자비령(慈悲嶺)과 고려 서북 경계 189. [그림 13] 뺷압강행부지뺸 일정도. 고려 말기 고려 서북 경계는 자비령 이외에 한 곳 더 확인할 수 있다. 아-3. 이 지시에 따라 주차사(奏差使) 소루(邵壘)와 조진(趙振)이 심 덕부(沈德符) 등을 따라서 왔다. 이 두 사람이 첨수참(甛水站)에 도착하 여 고려[本國]에서 문천식(文天式)과 오계남(吳季南)을 북원(北元)에 사 신으로 파견했다는 소식을 듣더니, “지난번에 우리 사신들을 죽였고, 이제 딴 마음을 먹고 있다. 우리가 고려 땅에서 죽기보다는 차라리 우리 땅에 죽는 게 낫다.”라고 말하고, 드디어 오지 않고 돌아갔다.33) 아-4. …홍무 15년 다시 온 힘을 다해 금은과 포, 말을 변통하여 원래 바치기로 한 수량에 맞추어 배신 김유(金庾)⋅홍상재(洪尙載)⋅ 33) 高麗史 卷134 列傳 卷第47 禑王 5年 3月 乃使奏差邵壘⋅趙振, 隨德符等來. 二人至甛水站, 傳聞本國遣文天式⋅吳季南使北元, 乃 曰, “昔殺行人, 今又懷二心. 吾與其死於高麗, 寧死於我土.” 遂不至而還..
(36) 190 仙道文化 제 29 권. 김보생(金寶生)⋅정몽주(鄭夢周)⋅이해(李海)⋅배행검(裴行儉)을 파 견하여 그 공물을 가지고 상국의 조정으로 가게 하였습니다. 요동의 첨수참(甛水站)에 도착하여 입국 허가를 기다리는 동안에, 요동도사 가 서 천호(徐 千戶)를 보내어 황제의 지시를 보여주니 그 내용에 ‘세공 을 몇 년 분을 합쳐 하나로 하였으니, 그 뜻이 진실하지 못하다. 이전처 럼 입국을 거절하고 국경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라.’고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김유 등이 명령에 따라 그대로 돌아왔습니다. …34) 아-3, 4에 의하면 고려와 명의 사신이 상대국으로 입국하기 위해 도착한 곳은 첨수참(甛水站)이므로 이 첨수참은 고려와 명의 경계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첨수참이란 지명은 청 사행길인 동팔참(東八站)에서 확인되는 데 요양현(遼陽縣) 첨수만족향이다. 아-4에서 요동(遼東) 첨수참이라고 기 록한 점과도 일치한다. 첨수만족향은 앞서 살펴본 첫 번째 육상교통로 길목 중 하나인 곳이다. 첨수참이 고려와 명의 경계 지역이지만 이전 시기인 고려 와 원의 경계 지역으로도 볼 수 있다. 아-3, 4의 시기는 각각 1379년, 1383 년으로 요녕성 지역에서 원에서 명으로 그 지배 세력이 점차 교체되는 시기 인데, 요녕성 지역에서 원이 점령하고 있던 곳 대부분을 명이 차지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첨수참은 사산령촌에서 서남쪽으로 약 45km 떨어져 있다. 이상 살펴본 내용을 정리하면 고려 초기부터 말기까지 고려 서북 경계 일부는 본계시 동남쪽에서 요동반도 천산산맥을 잇는 선으로 확인된다. 그런데 본계시 동남쪽 지역을 산이나 산맥으로 다시 선정할 필요가 있다.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행정 지역은 변화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보통 산이나 산맥처럼 변화 가능성이 적은 것을 경계의 기준으로 삼아 왔기 때문이다. 34) 高麗史 卷135 列傳 卷第48 禑王 9年 8月 洪武十五年, 再行儘力, 措辦金銀⋅布匹⋅馬匹, 輳足原奉之數, 差陪臣金庾⋅洪尙載⋅金 寶生⋅鄭夢周⋅李海⋅裴行儉, 管押前赴朝廷. 到於遼東甛水站, 聽候閒, 蒙都司差來徐千 戶, 錄示聖旨, 節該, ‘歲貢以數年之物, 合而爲一, 其意未誠. 仍前阻歸, 不許入境.’ 欽 此. 金庾等欽遵回還. 當年六月, 再差陪臣周謙, 前去懇告, 亦蒙阻回..
(37) 동녕부 자비령(慈悲嶺)과 고려 서북 경계 191. 본계시 동남쪽에 해당되는 사산령촌과 첨수만족향 부근에서 뚜렷한 산세 (山勢)를 가진 산이나 산맥을 찾아보면, 사산령촌 동남쪽에 관문산(關門山) 이 있고 첨수만족향 동남쪽에 제형산(弟兄山)이 있다. 현지답사에서 두 산을 확인해 본 결과 두 산은 주변 산보다 해발 고도가 높고 뚜렷한 산세를 가지고 있었다. 두 산을 사산령촌과 첨수만족향을 대신해서 고려 초기부터 말기까지 고려 서북 경계 일부를 다시 선정해 보면 관문산-제형산-천산산 맥을 잇는 선으로 추측된다.. [그림 14] 관문산 전경(2019.03.). [그림 15] 제형산 전경(2019.08.).
(38) 192 仙道文化 제 29 권. 필자는 이전 논문에서 고려 강동(江東) 6주(州) 지역을 중국 요녕성 서풍 현 동쪽 구하 상류의 남쪽지역에서 철령현 동쪽 범하 상류의 북쪽지역으로 새롭게 보고, 이 지역을 바탕으로 고려 서북 경계 일부를 현재 길림합달령 으로 보았다.35) 길림합달령은 길림성 길림시 남쪽 송화호(松花湖) 부근에 서 시작해 서남방향으로 뻗어 내려오다가 무순시 부근에서 약간 남쪽으로 방향을 바꿔 내려오다가 본계만족자치현(本溪滿族自治縣) 부근에서 끝이 난다. 그런데 길림합달령이 끝나는 지점은 본 글에서 동녕부 경계로 본. [그림 16] 고려 서북 경계선 35) 김영섭, 「고려 서북면 경계 재검토-강동6주를 중심으로-」, 인문과학연구 제62집, 강 원대학교 인문과학연구소, 2019, 159∼188쪽..
(39) 동녕부 자비령(慈悲嶺)과 고려 서북 경계 193. 사산령촌 부근이다. 따라서 이 두 경계선은 연결이 가능하고, 이 두 경계선 을 이어 고려 서북 경계를 추정 해 볼 수 있겠다. 즉 고려 서북 경계는 대략 길림합달령-관문산-제형산-천산산맥을 잇는 선으로 추정 해 볼 수 있다. 단 본 글에서 추정한 고려 서북 경계는 998년 이후의 고려 서북 경계이며, 시기와 상황에 따라 그 경계가 변화했을 가능성이 충분하다.. Ⅴ. 결 론 서북면병마사 영리 최탄 등은 고려 원종을 폐위한 임연을 주살한다는 명분으로 반란을 일으켰다. 1270년 최탄은 원 세조에게 몽골군 파견을 요청 했고, 원 세조는 고려 서경에 몽골군을 주둔시키고 고려 서경 지역을 내속 했다. 원 세조는 내속한 지역에 동녕부를 설치하고 자비령을 원과 동녕부의 경계로 삼았다. 선행연구에서 자비령을 고려사 지리지 동주 편에 근거해서 황해도 서 흥군으로 보거나 대명일통지 외이 조선 편에 근거해서 중국 요녕성 연산 관진으로 보았다. 그러나 고려사와 대명일통지을 재검토한 결과 자비 령을 황해도 서흥군으로 본 경우 고려사의 다른 기사와 모순되는 부분이 있었고, 중국 요녕성 연산관진으로 본 경우 평양성에 관한 자세한 검토가 필요했다. 문헌 자료를 자세히 재검토한 결과, 자비령은 중국 요녕성 요양시에서 동쪽으로 80km 떨어진 본계시 일대에 위치한 것으로 확인됐다. 그러나 본계시 지역에서 자비령이란 지명을 가진 장소는 찾을 수 없어 현지답사를 통해 자비령으로 삼을만한 자연지리 조건을 갖춘 곳을 찾아보았다. 자연지 리 조건은 육상교통로 상의 길목과 요충지로 선정했다. 현장 답사를 진행한 결과 본계시 사산령촌(思山嶺村)이 자비령으로 가장 유력했다. 사산령촌 부근은 한반도 북부에서 요양시로 이어지는 육상교통로 상의 길목 중 하나.
(40) 194 仙道文化 제 29 권. 였고, 사산령촌 북쪽에 위치한 평정산에 긴 시간에 걸친 군사유적이 남아있 었기 때문이다. 동녕부은 고려 서북 경계 지역인 고려 서경을 포함한 그 주변 지역을 포함하므로 원과 동녕부 경계인 자비령도 고려 서북 경계로 볼 수 있다. 고려 서북 경계인 자비령을 바탕으로 요탑 분포와 금(金) 관리인 왕적이 쓴 압강행부지를 추가로 검토한 결과 고려 서북 경계 일부가 관문산-제 형산-천산산맥을 잇는 선으로 추측됐다. 이전 논문에서 고려 서북 경계 일부를 길림합달령으로 추측했다. 그런데 길림합달령이 끝나는 지점이 본계만족자치현으로 사산령촌 부근이다. 즉 원과 동녕부 경계이자, 원과 고려의 경계인 자비령 부근이다. 길림합달령 과 본 글에 추측한 고려 서북 경계 일부가 서로 연결하면, 고려 서북 경계는 길림합달령-관문산-제형산-천산산맥을 잇는 선으로 추측됐다. 단, 본 글 에서 확인한 고려 서북면 전체 경계는 998년 이후의 서북면 전체 경계이며, 시기와 상황에 따라 그 경계가 변화했을 것이다. 동녕부는 고려 서경과 그 일대에 설치됐다. 현재 고려 서경의 위치는 평안도 대동강 유역으로, 동녕부도 대동강 유역을 중심으로 설치된 것으로 인식된다. 그러나 본 글에서 원과 동녕부의 경계인 자비령을 중국 요녕성 사산령촌으로 새롭게 추측함에 따라 동녕부의 범위도 달라져야 하며, 고려 서경의 위치도 달라져야 할 것이다. 이에 대한 연구는 계속해서 이어나갈 예정이다..
(41) 동녕부 자비령(慈悲嶺)과 고려 서북 경계 195. 【참고문헌】 三國史記 高麗史 高麗史節要 世宗實錄 新增東國輿地勝覽 遼史 金史 元史 明史 大明一統志 遼東志 鴨江行部志 진단학회, 韓國史 [中世編] 을유문화사, 1961. 이기백, 國史新論 제일문화사, 1961. 이훈 편저, 滿韓辭典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2017. 인하대학교 고조선연구소, 고구려의 평양과 그 여운 연구총서2 주류성출 판사, 2017. 인하대학교 고조선연구소, 압록(鴨淥)과 고려의 북계 연구총서3 주류성출 판사, 2017. 변태섭, 韓國史通論 삼영사, 1986. 동월/윤호진 옮김, 朝鮮賦 까치, 1994. 정영호, 中國遼塔 학연문화사, 2019. 津田 左右吉, 朝鮮歷史地理 제2권 남만주철도주식회사(南滿洲鐵道株式會 社), 1913. 朝鮮史編修會, 朝鮮史 第3編 第4卷 朝鮮總督府, 1934..
(42) 196 仙道文化 제 29 권. 张博泉, 鴨江行部志注释 黑龙江人民出版社, 1984. 国家文物局, 中国文物地图集 辽宁分册 上下 西安地图出版社, 2009. 中国大百科全书出版社, 中国地理地图集 中国大百科全书出版社, 2011. 강재구, 「몽골의 高麗 北界 분리 시도와 동녕부의 편제」, 지역과 역사 39권 부경역사연구소, 2016. 김영섭, 「고려 서북면 경계 재검토-강동6주를 중심으로-」 인문과학연구 제62집 강원대학교 인문과학연구소, 2019. 남의현, 「明 前期 遼東都司와 遼東八站占據」 명청사연구 21호 명청사학회, 2004. 남의현, 「원말⋅명초 한중간의 요동국경지대연구-東寧府,東寧路,東寧衛와 의 상관성을 중심으로-」 인문과학연구 제61집 강원대학교 인문과 학연구소, 2019. 박돈, 「高麗 末 東寧府征伐에 대하여」 중앙사론 4집 한국중앙사학회, 1985. 방동인, 「東寧府置廢小考」 관동사학 2권 관동사학회, 1984. 복기대, 「중국학계의 거란 동(東)쪽 국경에 인식에 대(對)하여」 선도문화 14권 국제뇌교육종합대학원 국학연구원, 2013. 복기대, 「원나라 동녕부 위치에 대한 고찰」, 몽골학 57권, 한국몽골학회, 2019. 신안식, 「고려후기의 영토분쟁-쌍성총관부와 동녕부를 중심으로-」 군사 99호 국방부군사편찬연구소, 2016. 오기승, 「高麗 末 東寧府의 形態 變遷과 高麗 流移民」 역사민속학 46집 한국역사민속학회, 2014. 유재춘, 「중⋅근세 韓⋅中間 국경완충지대의 형성과 경계인식-14세기∼15세 기를 중심으로-」 한일관계사연구 39호 한일관계사학회 2011. 허우범, 「위화도의 위치 재고찰」 인문과학연구 제62집 강원대학교 인문과 학연구소, 2019. 백만달, 거란 전탑 연구 박사학위논문 인하대학교, 2020. 허우범, 여말선초 서북 국경선 연구 박사학위논문 인하대학교, 2020..
(43) 동녕부 자비령(慈悲嶺)과 고려 서북 경계 197. 张晓东, 辽代砖塔建筑形制初步研究 박사학위론문, 길림대학교, 2011. 谷赟, 辽塔研究 박사학위론문 중앙미술학원, 2013..
(44) 198 仙道文化 제 29 권. 【Abstract】. Jabilyeong of Dongnyeongbu and Northwestern Limit Line of Goryeo Dynasty Kim, Young Sub (Ph.D. completion, University of Inha). Based on Goryosa, Jabilyeong of Dongnyeongbu is known to be located in the northwestern part of Seohung, Hwanghaedo. However, Goryosa did not specify the location of the Jabilyeong of Dongnyeongbu, and was used as a basis for the same geographical name. On the other hand, Daemyungiltongji. specifies. the. location. of. the. Jabilyeong. of. Dongnyeongbu, which is 160-ri east of Pyongyang. Pyeongyangseong was founded in 427 by King Jangsu of Goguryeo, and is currently located in Liaoyang, Liaoning cheng, China. 160-ri east of Liaoyang, namely about 80km east of Liaoyang are Bunxi, but the name Jabiryeong can not be found at present. According to a field survey, Sisanring Cun in Bonxi was presumed to be Jabilyeong of Dongnyeongbu. Jabilyeong is the boundary between Won and Dongnyeongbu, which is part of the northwestern boundary of Goryeo. Based on the Jabilyeong, we checked some of the western and northern boundaries of Goryeo, and found that it was the Gunmen mountain, Dixiong mountain and Tianshan mountain.
(45) 동녕부 자비령(慈悲嶺)과 고려 서북 경계 199. range. If you connect it with the Jilinhedaling which was estimated as part of the northwestern boundary of Goryeo in the previous paper, you can guess that the northwestern boundary of Goryeo was the Jilinhedaling, Gunmen mountain, Dixiong mountain and Tianshan mountain range. Keyword : Dongnyeongbu, Jabilyeong, Sisanring Cun, Jilinhedalin, Tianshan mountain range. 논문투고일 : 2020년 07월 14일 게재확정일 : 2020년 08월 10일. 심사완료일 : 2020년 07월 2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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