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조선의 도읍지, 건국(建國) 년도,국호 등에 관한 고찰-김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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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134 仙道文化 제 16 권. 키는 위사들이 삽입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위사(僞史)와 진사(眞史)를 분별하여 위사를 걷어내고 나니, 고대 역사적 지명들의 위치를 올바르게 추정할 수 있었다. 또 고대 지명의 위치를 올바르게 추정하고 나니,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의 기록에 따라 환웅의 태백산 신시, 단군이 건국한 고조선의 도읍지 평 양성과 아사달의 위치를 현재의 산서성 대동(大同)시에 위치한 태백 산 주변 일대, 현재의 산동성 덕주(德州)시 동쪽 지역, 현재의 하북성 내구(內邱)현과 산구(山口)현 등으로 각각 추정할 수 있었다. 또 고조선의 건국년도가 서기전 2333년 보다 213년이 앞선 서기전 2546년으로 추론할 수 있었으며, ‘고조선(왕검조선)’이라는 국호가 원 래 ‘조선(朝鮮)’이 아니고 ‘숙신(肅愼)’ 또는 ‘단국(檀國)’으로 추정해 볼 수 있는 근거를 찾을 수 있게 되었다. 주제어 : 신시, 태백산, 환웅, 평양성, 아사달, 고조선, 단군, 삼국 사기, 삼국유사, 왕검조선, 숙신(肅愼), 단국(檀國). Ⅰ. 들어가는 말 우리나라 역사의 가장 오래된 기록은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라 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삼국사기에는 고구려⋅백제⋅신라 등 삼국에 관한 기록 만 있고 삼국시대 이전에 관한 기록은 없다. 그러나 삼국유사에는 삼국 이전의 역사에 해당하는 부여, 또는 단군과 환웅에 관한 기록들 이 매우 함축적이지마는 일부 기록이 남아 있다. 비록 다른 문헌들의 기록에 의하면, 삼국시대, 고려시대, 조선시대 초기에는 삼국 이전에 관한 기록들이 많이 있었음을 알 수 있으나,.
(3) 고조선의 도읍지, 건국(建國) 년도, 국호 등에 관한 고찰ㆍ김진경 135. 전쟁과 내란 등을 통하여 많은 사료들이 멸실되었음을 알 수 있다. 즉, 삼국 이전의 역사를 연구하기 위하여 삼국유사에만 의존한다 면, 충분히 연구할 수 없는 현실이다. 따라서 중국, 일본, 러시아 등에 아직 남아있을 지도 모르는 역사 적인 사료들이 새로 발견되기 전까지는, 중국 25사 등에 기록되어 있 는 내용들이 우리나라 상고사를 이해하는데 적지 않은 도움이 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그런데 35년간의 일제강점기가 끝난 지 벌써 69년이 지났는데도 불구하고 우리나라 역사 왜곡의 원인이 일본 제국주의에 의한 역사 침탈이라는 주장만 반복하고 있는 현실임을 주목하게 된다. 본 연구자는 삼국사기와 중국 25사 등의 각 지리지들을 근거로 하여 고대 국가들의 강역(疆域)과 역사적인 지명(地名)들의 위치를 연구해 왔다. 따라서 그간 추정할 수 있었던 고대 지명들의 본래 위 치에 근거하여 삼국시대 이전의 역사인 고조선의 도읍지 평양성과 아사달의 위치를 추정하고. 아울러 고조선의 건국(建國)년도와 국호 등에 관하여 고찰해 보고자 한다.. Ⅱ. 선행 연구의 문제점 현행 국사 교과서1)에 고조선에 관하여 아래와 같이 기술되어 있다. 우리 역사상 최초의 국가인 고조선은 청동기 문화를 기반으로 세워졌다. 고조선은 기원전 5세기경에 철기 문화를 받아들이면서 더욱 강성하게 되었 다. 고조선의 성립 이후 만주와 한반도 지역에 부여, 고구려, 옥저, 동예, 삼 한의 나라들이 세워졌다. 1) 국사편찬위원회 국정도서편찬위원회, 중학교 국사, 두산동아(주), 2010년3 월 1일.
(4) 136 仙道文化 제 16 권. 또 일제강점기 이후 고조선의 강역에 관하여 많은 연구들이 이루 어져 왔는데, 이병도2)⋅신채호3)⋅권오중4)⋅노태돈5)⋅서영수6) 등은 고조선의 중심 강역이 현재의 요녕성 또는 평안도 지역 등이라고 주 장함으로써 다수설을 형성하고 있으며, 윤내현7)은 현재의 하북성 난 하 유역 등으로 주장함으로써 소수설을 형성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상기한 국사 교과서의 기록은 고조선 도읍지의 위치, 건국 (建國) 년도, 국호 등에 관하여 올바른 기록이라고 할 수 없으며, 국 사 교과서 내용의 근거와 배경이라고 할 수 있는 학계의 선행 연구 결과들도 연구 성과를 올바르게 축적했다고 볼 수 없다. 왜냐하면 이제까지 고대사(古代史)에 관한 선행 연구들이 삼국사기, 삼국유사, 중국 25사 등 사서(史書)에 근거하여 연구함에 있어서 근본적인 오류에 빠져있기 때문이다. 즉, 사서에 위사(僞史)들이 삽입 되어 있는데도 불구하고, 이제까지 선행 연구들은 대부분 사서의 기록 들이 절대로 위사일 수가 없다는 전제하에 이루어져 왔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서의 기록 중에서 위사인지 진사인지 여부를 명백하게 분별할 수 있는 기록들은 지명(地名)의 위치를 알려주는 기록들이다. 즉, 특정 지점에서 특정 지점까지 방향과 거리가 기록되어 있으므로, 기준이 되는 지점에서 방향에 따라 거리를 실측해 보면 진사(眞史)인 지 여부를 확인할 수 있게 된다. 다시 말해서 바로 숫자 자체에 기록 당시의 논리성이 있기 때문이다. 또 지명의 위치를 알려주는 기록 중에서 위사가 삽입되어 있는 이 유는 지명의 본래 위치를 북쪽 또는 동북쪽 방향으로 변이(變移)시키 2) 이병도, 「현도군고」, 「낙랑군고」, 한국고대사연구, 1985년 수정판 3) 신채호, 「평양패수고」, 단제신채호전집하, 1972년 4) 권오중, 「전한 시대의 요동군」, 인문연구17, 1995년 5) 노태돈, 「고조선중심지의 변천에 관한 연구」, 한국사론23, 1990년 6) 서영수, 「고조선의 대외관계와 강역의 변동」, 동양학29, 1999년 7) 윤내현, 「고조선의 위치와 강역」, 한국고대사신론, 1686년.
(5) 고조선의 도읍지, 건국(建國) 년도, 국호 등에 관한 고찰ㆍ김진경 137. 기 위한 의도였음을 알 수 있다. 한편, 후대(後代)에 위사(僞史)가 삽입된 사서들은 지명의 위치 외 에도 국가 간의 위상관계, 건국(建國)년도, 풍속 문화 등에 관한 기록 들을 의도적으로 왜곡시키기 위하여 위사(僞史)들을 삽입시켰을 개 연성이 매우 높다고 볼 수 있다. 왜냐하면 후대(後代)에 지명의 본래 위치를 변이시키려고 위사를 의도적으로 삽입시킨 이유는 고대 국가 의 강역(疆域)을 왜곡시키고자 한 것인데, 지명의 위치 외에 다른 내 용도 의도적으로 왜곡시키기 위하여 위사를 삽입시켰거나 본래의 내 용을 바꿔치기했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명의 경우에는 거리가 수치로 기록되어 있으며, 방향은 비록 8개 방향으로 표기되고 있어서 최대 ±45˚/2의 오차가 있을 수 있지만, 8개 방향을 분명하게 구분할 수 있으므로, 기록에 근거하여 논리적으로 지명의 본래 위치를 추정할 수 있다. 그러나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는 지명과 지명 간의 상호 방향 이 일부 기록되어 있으나, 지명간의 거리에 관한 기록은 거의 없다. 또 중국 25사에는 지명과 지명 간의 상호 방향과 거리수치가 기록되 어 있으나, 지명의 위치를 동북 방향으로 변이시키기 위한 위사(僞 史)들이 상당수 삽입되어 있다.. 따라서 먼저 사서의 각 기록이 위사(僞史)인지 진사(眞史)인지 분 별해 낸 후에 사서 원본에 기록되어 있었던 것으로 볼 수 있는 진사 (眞史)들에 근거하여 지명의 올바른 위치를 찾아내야만 할 것이다. 즉, 이제까지 고대 국가의 강역(疆域)과 주요 지명(地名)의 위치에 관 한 선행 연구들은 대부분 중국 25사에 삽입되어 있는 위사(僞史)들에 근거하여 이루어졌다고 볼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중국 25사에 삽입되어 있는 위사(僞史)의 예는 아래 각 호와 같다..
(6) 138 仙道文化 제 16 권. ① 요수, 패수, 압록수의 흐름 방향. 한서와 신당서지리지에 따르면, ‘압록수(마자수)가 서쪽으로 흘러 해(海)로 들어갔다’고 기록되어 있다. 또 한서와 요사지리지 에 따르면, ‘패수와 요수가 서쪽으로 흘러 해(海)로 들어갔다’고 기록 되어 있다. 그러나 압록수, 패수, 요수 등의 흐름 방향은 서쪽에서 동쪽으로 흘렀음을 알 수 있다. 즉, 한서⋅신당서⋅요사 등에서 압록수, 패수, 요수 등의 흐름 방향이 원래 ‘동쪽’이었으나 ‘동쪽’이 ‘서쪽’으로 바뀌어져 기록되어 있는 것이다.8) 비록 강에는 아무런 표식이 없어서 강의 위치를 올바르게 찾았다 고 하더라도, 압록수인지, 패수인지, 또는 요수인지 단정할 수 있는 표식은 별도로 없다. 그러나 다음의 ②항과 ③항에서 설명하는 바와 같이 특정 지명들 간의 방향과 거리수치에 근거하여 고대 지명들의 올바른 위치를 확인하게 되면, 그 지명들의 인근지역에 있는 강이 무 슨 강인지 입증할 수 있게 된다. ② 후한서군국지 각 군(郡)의 거리수치. 후한서군국지 제5에 따르면, 낙양에서부터 각 군까지의 거리가 <표 1>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모두 명(明) 대에 임의로 삽입 한 위사(僞史)임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한척(漢尺) 1리=약 420m9)와 굴곡지수 x=1.72510)를 활용 8) 김진경, 고대 요수(遼水)의 위치 비정(比定)에 관한 연구, 국제뇌교육종합 대학원대학교, 2012년 2월 9) 본 연구자는 사서 상의 리(里) 단위를 km로 환산할 때, 당척 1리=540m 또는 한척 1리=420m를 적용함(주석 9 참조). 10) 굴곡지수=실제 이동거리÷직선거리, A지점에서 B지점으로 이동할 때, 실제 이동거리는 지형에 따라 A와 B간의 직선거리보다 길어짐. 본 연구자는 박 사학위논문 요수의 위치 비정에 관한 연구에서 구당서및 신당서에 기록된 거리수치들이 중국 중동부지역 일대에서 굴곡지수(x)=1.725임을 산.
(7) 고조선의 도읍지, 건국(建國) 년도, 국호 등에 관한 고찰ㆍ김진경 139. 하면 요서⋅요동⋅낙랑⋅현도 등 각각의 위치를 [그림 1]과 같이 추 정할 수 있는데, 요서⋅요동⋅낙랑⋅현도 등이 속해 있었던 한(漢) 대의 유주(幽州)는 현재의 산서성 둔유현이었기 때문이다.11) <표 1> 후한서 군국지의 거리표기 지명(모두 위사로 판단됨) 현도군. 동북 4,000리. 요동군. 동북 3,600리. 요서군. 동북 3,300리. 어양군. 동북 2,000리. 우북평군. 동북 2,300리. 상곡군. 동북 3,200리. 대군. 동북 2,500리. 광양군. 동북 2,000리. 탁군. 동북 1,800리. 안문군. 북 1,500리. 서하군. 북 1,200리. 낙랑군. 동북 5,000리. <그림 1> 후한서와 신당서에 근거한 요동과 낙랑(위사임). 출하였음(지도 실측을 위해 4백만분의 1지도 사용).. 11) 김진경, 고대 요수(遼水)의 위치 비정(比定)에 관한 연구, 국제뇌교육종합 대학원대학교, 2012년 2월.
(8) 140 仙道文化 제 16 권. 즉, 한(漢) 대의 유주(幽州), 수(隋) 대의 탁군, 당(唐) 대의 유주대도독 부, 요(遼) 대의 남경 등이 모두 현재의 산서성 둔유현 주변지역에 있었 으나, 모두 현재의 북경시 주변지역으로 바뀌어져 있음을 알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상기한 <표 1>의 거리수치들은 모두 위사이며, 이를 입증하는 근거는 한서, 후한서, 구당서, 신당서, 요사등의 지리지이다. ③ 신당서지리지 안동도호부의 거리수치. 신당서지리지 제3에 따르면, ‘안동도호부의 위치가 낙양에서 3,820리, 서안에서 4,625리’라고 기록되어 있다. 즉, 안동도호부를 한 (漢) 대의 양평이었던 요동고성에 두었는데, 그 위치를 낙양과 서안 에서부터 각각 거리수치로 표기해 놓았다. 그런데 상기한 기록에 따라 안동도호부의 위치를 추정해 보면, [그 림 1]에서 보는 바와 같이 현재의 요녕성 요양시로 추정할 수 있다. 왜냐하면 한서와 신당서지리지 등에 근거하면 요수와 압록수(마 자수)가 동쪽에서 서쪽으로 흐른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요사지리지 에 근거하면 요하가 동북쪽에서 서남쪽으로 흐르는데 현재의 길림성 에 흐르고 있는 혼하, 태자하(동량하) 등과 합류한다고 기록되어 있 기 때문이다. 즉, 안동도호부의 위치를 현재의 요녕성 요양시 주변지 역으로 설정하고, 그 지역이 한(漢) 대와 당(唐) 대의 요동지역이었으 며, 그 지역에 안동도호부를 두었던 것으로 인식할 수 있게끔 기록되 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상기한 신당서지리지의 거리수치는 위사임을 알 수 있 다. 왜냐하면 안동도호부를 두었던 고구려 요동성(요동고성)은 [그림 1]에서 보는 바와 같이 현재의 하북성 한단시 영년현 광부진이기 때 문이다. 그 근거는 구당서, 신당서지리지 등이다.12) 12) 김진경, 고대 요수(遼水)의 위치 비정(比定)에 관한 연구, 국제뇌교육종합 대학원대학교, 2012년 2월.
(9) 고조선의 도읍지, 건국(建國) 년도, 국호 등에 관한 고찰ㆍ김진경 141. Ⅲ. 고조선의 도읍지 위치 추정(推定) 1. 부여, 고구려, 진국(발해) 등의 도읍지 1) 부여의 도읍지 이제까지 부여의 위치는 [그림 2]에서 보는 바와 같이 현재의 길림 성 장춘(長春)시 인근 주변지역으로 추정할 수 있었다. 그 이유는 후한서군국지에 따르면, ‘현도가 낙양에서 동북 4,500 리 거리에 있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후한서동이열전에서 다시 ‘부여 는 현도에서 북쪽으로 1,000리 거리에 있다’고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앞서 II장에서 논한 바와 같이 상기한 후한서군국지의 거리 수치들은 명(明) 대에 위사(僞史)를 삽입시킨 것임을 알 수 있었 다. 왜냐하면 한(漢) 대에 현도라는 지역은 유주(幽州) 지역에 속해 있었는데, 유주의 치소가 [그림 2]에서 보는 바와 같이 본래 현재의 산서성 둔유현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림 2> 후한서에 근거한 현도와 부여(위사로 판단됨).
(10) 142 仙道文化 제 16 권. 또 명(明) 대에 위사가 삽입되었다고 볼 수 있는 이유는, 원(元)이 북쪽으로 물러나면서 명(明)이 세워지고, 고려가 차지하고 있던 하북 성과 산동성 지역 등의 땅을 명(明)이 차지하게 되자 비로소 명(明)의 사관(史官)들이 사서에 기록되어 있던 지명들을 북쪽과 동북쪽으로 변이시킬 수 있었던 것으로 추론할 수 있기 때문이다. 즉, 한(漢) 대의 유주(幽州) 치소(계현)가 마치 현재의 북경(北京)시 에 있었던 것처럼 지명의 위치가 둔갑되어 있는 것이다. 또 부여는 본래 현도에 인접해 있었는데, 후한서동이열전에 따 르면 ‘부여가 현도에서 북쪽으로 1,000리 지점에 있었다.’고 위사(僞 史)가 삽입되어 있으므로, 한척 1리=420m와 굴곡지수 x=1.725를 적. 용하면 부여와 현도간의 거리는 직선거리로 약 243.5km13) 정도 떨어 져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는 셈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나라 연구자들은 [그림 2]에서 보는 바와 같이 부여가 마치 현재의 압록강 북쪽 장춘(長春)시 주변 만주(滿洲) 지역 에 있었던 줄로만 알고 있었다. 그런데 부여의 도읍지로 볼 수 있는 부여성의 본래 위치는 [그림 2]에서 보는 바와 같이 현재의 산서성 태원시 주변 인근지역으로 추 정할 수 있다. 그 근거는, 삼국사기에 기록되어 있는 ‘동북자부여성 동남지해(東北自扶餘城 東南至海)’라는 구절이다. 즉, 고구려 연개소 문 장군이 천리장성(千里長城)을 쌓는 일을 감독하였는데, 장성의 길 이는 1,000리에 달했으며, ‘동북쪽 부여성(扶餘城)에서부터 동남쪽 해 (海)까지였다’는 기록이다. 그런데 상기한 기록에서 도대체 동북쪽 방향과 동남쪽 방향은 어 느 쪽에서 어느 쪽으로 보는 방향인가? 고구려가 천리장성을 쌓았으며 고려가 삼국사기를 편찬하였기 때문에, 최소한 고구려(또는 고려)에서 천리장성을 바라보는 입장에 13) 1,000리(한척)×420m/리÷굴곡지수 1.725=약 243.5km,.
(11) 고조선의 도읍지, 건국(建國) 년도, 국호 등에 관한 고찰ㆍ김진경 143. 서 기록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림 3]에서 보는 바와 같이 동북쪽 방 향과 동남쪽 방향이라고 지칭하는 곳이 고구려(또는 고려)의 동쪽 지 역을 가리키고 있다.. <그림 3> 고구려에서 바라보는 천리장성의 위치. 즉, 고구려(또는 고려) 지역에서 바라보는 천리장성의 한쪽 끝이 동북방향이고 다른 한 쪽이 동남방향이 되기 위해서는, 고구려(또는 고려)의 중심 강역이 천리장성의 서쪽에 위치하고 있을 수밖에 없다. 다시 말해서 천리장성의 형태를 [그림 3]의 오른쪽부분에서 보는 바 와 같이 ①, ②, ③, ④ 등 네 가지 형태로 각각 추정해 보더라도, 상 기 네 가지 형태 중에서 어떤 형태도 모두 고구려(또는 고려)의 동쪽 에 위치하지 않을 수가 없다. 그런데 고구려가 동쪽에 천리장성을 쌓았다고 볼 수는 없다. 왜냐 하면 고구려의 동쪽에는 신라가 있었으며, 연개소문 당시에 고구려.
(12) 144 仙道文化 제 16 권. 가 대비하고 있던 주적(主敵)은 당(唐)이었으므로, 천리장성은 당이 있었던 고구려의 서쪽에 위치하고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동북자부여성 동남지해(東北自扶餘城 東南至海)’라는 구절 에 위사가 삽입되었음을 알아챌 수 있다. 즉, 삼국사기원본(原本)에 서 ‘동북(東北)’의 ‘동(東)’자가 원래 ‘서(西)’자였음을 알 수 있다. 다시 말해서 [그림 3]의 왼쪽 부분에서 보는 바와 같이 ‘동북(東北)’을 ‘서 북(西北)’으로 고쳐보면, 고구려가 서남방향에서 당(唐)과 대치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림 4> 요수와 고구려 요동성, 당의 유주, 영주 등. 또 [그림 4]에서 보는 바와 같이 요수(遼水)가 현재의 산서성 청장 하(淸漳河)14)이었으며, 당(唐)과 고구려는 그 당시 요수(遼水)를 국경 선으로 삼아 서로 대치하고 있었으므로, 고구려는 요수 주변 인근 지. 14) 김진경, 고대 요수(遼水)의 위치 비정(比定)에 관한 연구, 국제뇌교육종합 대학원대학교, 2012년 2월.
(13) 고조선의 도읍지, 건국(建國) 년도, 국호 등에 관한 고찰ㆍ김진경 145. 역에서 요수와 평행하여 천리장성을 쌓았을 수밖에 없다. 따라서 천 리장성은 현재의 산서성과 하북성 남부지역에 위치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부여성에서부터 해(海, 황하)까지 1,000리라고 했으므로 반 대로 해(海, 황하)에서부터 서북쪽으로 1,000리 거리에 부여성이 있었 어야 할 것이다. 즉, 중국 25사에 기록되어 있는 해(海, 황하)15)는 황 해가 아니고 황하 중류 지역이므로 황하 중류에서부터 서북쪽으로 1,000리 거리에 있는 지역에서 부여성이 있었던 곳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즉, 당척 1리(里)는 약 540m이므로 1,000리가 직선거리라면 약 540km에 해당하며 4백만분의 1 지도에서 약 13.5cm이다. 그러나 1,000리가 직선거리인지 실제 장성의 길이인지 명확하게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만약 1,000리가 장성의 실제 길이라고 한다면, 1,000리를 굴곡지수(x=1.725)16)로 나누면 천리장성의 한쪽 끝에서 다 른 한쪽 끝까지의 직선거리가 약 313km로서 4백만분의 1 지도에서 약 7.8cm임을 알 수 있다. 그런데 그 당시 황하의 위치가 현재의 황하 수로(水路)와 똑같다고 볼 수는 없다. 왜냐하면 황하는 홍수로 말미암아 지난 수천 년간 수 로(水路)의 위치가 수시로 남북으로 변경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중국 25사에서 해(海)라고 표기되어 있는 황하가 삼국시대 에는 현재의 하남성 활현(滑縣) 서쪽 지역에 위치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진서 모용덕전17)에 따르면, 후연(後燕, 384∼409 15) 김진경, 「갈석산(碣石山)의 위치 비정(比定)에 관한 연구」, 선도문화제 15 권, 국제뇌교육종합대학원 국학연구원, 2013년 8월 16) 주석 11 참조, 540km÷1.725=313km(4백만분의 1 지도에서 약 7.8cm) 17) 진서권125 모용덕: 융안(隆安) 2년(398년), 乃率戶四萬⋅車二萬七千乘, 自 鄴將徙于滑臺. 遇風, 船沒, 魏軍垂至, 衆懼, 議欲退保黎陽. 其夕流凘凍合, 是 夜濟師, 旦, 魏師至而冰泮, 若有神焉. 遂改黎陽津爲天橋津. 及至滑臺, 景星見 于尾箕. 漳水得白玉, 狀若璽. 於是德依燕元故事, 稱元年, 大赦境內殊死已下, 置百官. 以慕容麟爲司空⋅領尙書令, 慕容法爲中軍將軍, 慕輿拔爲尙書左僕射,.
(14) 146 仙道文化 제 16 권. 년)이 망하자 모용덕이 업(鄴)에서 남쪽으로 이동하여 활대(滑臺)에 터전을 잡았는데 바람을 만나 선박이 침몰했다고 기록되어 있으므로 강을 건넌 것으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즉, 활대(滑臺)를 현재의 하 남성 활현(滑縣)으로 추정할 수 있는데, 바로 활현 서북쪽에 강이 흐 르고 있었으며 삼국시대에 해(海)라고 불렀던 황하였던 것으로 추정 할 수 있다.. <그림 5> 대청광여도의 고황하수로. 또 [그림 5]의 대청광여도18)에서 보는 바와 같이 고황하수로(古 黃河水路)가 현재의 황하수로보다 서북쪽 지역에 있는 활현(滑縣)과. 대명부(大名府)의 서북쪽 인근지역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즉, 고황 丁通爲尙書右僕射, 自餘封授各有差. 初, 河間有麟見, 慕容麟以爲己瑞. 及此, 潛謀爲亂, 事覺, 賜死. 其夏, 魏將賀賴盧率衆附之.. 18) 대청광여도는 청(淸) 대 1785년에 채방병(蔡方炳)이 제작한 중국 전도이다. 크기는 190cm×186cm임..
(15) 고조선의 도읍지, 건국(建國) 년도, 국호 등에 관한 고찰ㆍ김진경 147. 하수로는 삼국시대에도 적용될 수 있음을 의미한다. 따라서 4백만분의 1지도에서 고황하수로에서부터 서북방향으로 약 7.8cm(직선거리 약 313km)거리에 있는 지역에 부여성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즉, 부여성의 위치를 [그림 4]에서 ①보다는 ②와 같이 현재의 산서성 태원시 남쪽 주변 인근지역이었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그러나 지명의 올바른 위치는 최종적으로 유적과 유물로 입증될 수 있어야만 할 것이다. 다만, 본 논문에서는 유적 답사에 앞서서 중 국 25사 등 사서의 기록에 근거하여 고대 지명의 위치를 추정하는 것이다.. 장안성. 상경. 하 고대 지명의 위치 비정요결론 국내성. 고구려 평양성은 현 산동성 덕주시 압록강 압록수 중경 장안성은 현 하북성 } 고구려 마지막 수도 압록부 대동강 탁주시 동경 환도성 } 패수는 현 산동성 오경하 남경 부여부 } 압록수는 현 하북성 호타하 }. 패수. 부여성. 평양성. 철리부. 장령부. 요수. 요동성. 회원부. 동평부. 정리부. <그림 6> 고구려와 진국(발해) 도읍지 등의 위치 비정. 2) 고구려와 진국(발해)의 도읍지 등 앞서 II장에서 논한 바와 같이 중국 25사에는 지명의 위치를 변이 시키고 있는 위사들이 삽입되어 있다. 그러나 삽입되어 있는 위사들.
(16) 148 仙道文化 제 16 권. 을 분별해서 걷어내고 원본에 본래 있었던 기록들에 근거하면, 고구 려와 진국(발해)의 도읍지와 주요 지명들의 위치를 [그림 6]에서 보는 바와 같이 추정할 수 있다.. 2. 환웅의 태백산 신시(神市) 우리 민족의 가장 오래된 역사기록으로서 삼국유사만한 사서(史 書)는 없다. 비록 삼국유사에 상고사(上古史)에 관한 내용이 별로. 많이 기술되어 있지 않지만, 가장 오래된 역사적인 기록으로서 삼국 시대 이전의 부여와 환웅, 고조선 등에 관한 사료(史料)상의 근거를 제공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삼국유사에 따르면, 고기(古記)를 인용하면서 ‘환국(桓國)’ 과 ‘신시(神市)’에 관하여 아래와 같이 기록되어 있다. 고기19)에 이르기를, 옛날에 환국(桓國)이 있었는데, 서자(庶子)인 환웅 (桓雄)이 천하(天下)에 자주 뜻을 두고 인간세상을 구하고자 하였다. 아버지가 아들의 뜻을 알고 삼위태백(三危太白)을 내려다보니 인간(人 間)을 널리 이롭게 할 만한지라, 이에 천부인(天符印) 세 개를 주며 가서 다 스리게 하였다. 웅(雄)이 무리 삼천을 거느리고 태백산(太伯山) 정상, 신단 수(神檀樹) 밑에 내려와 신시(神市)라 하였으며, 이에 환웅천왕(桓雄天王)이 라 하였다.20). 또 이어서 ‘단군왕검(檀君王儉)’과 ‘고조선(古朝鮮)’에 관하여 아래 와 같이 기록되어 있다.. 19) 고기(古記)라는 특정한 사서가 알려져 있지 않다. 따라서 옛 기록을 통칭 한 것으로 볼 수 있다. 20) 김원중 옮김, 삼국유사, 을유문화사, 2002년 11월 15일, 보급판 제1쇄.
(17) 고조선의 도읍지, 건국(建國) 년도, 국호 등에 관한 고찰ㆍ김진경 149 (중략) 환웅이 잠시 사람으로 변하여 웅녀와 혼인하였다. 웅녀가 잉태하 여 아들을 낳으니 단군왕검(檀君王儉)이라 하였다. 당(唐)의 요(堯)가 즉위한 지 50년인 경인(庚寅)년에 평양성(平壤城)에 도 읍하고 비로소 조선(朝鮮)이라 하였다. 도읍을 백악산 아사달에 옮겼는데, 궁홀산(弓忽山)이라고도 하며 금미달(今彌達)이라고도 한다. 그 후 1,500년 동안 나라를 다스렸다. 주(周)의 호왕(虎王, 武王)이 즉위 한 기묘(己卯)년에 기자(箕子)를 조선에 봉하니 단군은 곧 장당경(藏唐京)으 로 옮겼다가 뒤에 아사달에 돌아와 숨어 산신(山神)이 되었다. 수(壽)가 1,908세라고 하였다.. 즉, 상기한 바와 같이 삼국유사에 따르면, 우리 역사의 가장 오 랜 기록으로서 ‘환국(桓國)’⋅‘신시(神市)’⋅‘조선(朝鮮)’ 등이 기록되어 있다. 환웅이 도읍을 정한 ‘신시(神市)’의 위치는 태백산이 있는 곳이 었으며, 단군이 건국한 ‘조선(朝鮮)’은 처음에 도읍을 평양성에 두었 는데 백악산 아사달로 옮겼다고 기록되어 있다. 한편, 삼국사기고구려본기에 따르면, 고구려의 건국신화 중에도 ‘태백산(太伯山)’이 기록되어 있는데 아래와 같다. (중략) 부여왕 해부루가 죽자, 금와가 자리를 계승하였다. 이 때 태백산 (太白山) 남쪽 우발수(優渤水)에서 한 여자를 만났다. 그 여자가 말하기를 ‘저는 하백(河伯)의 딸이고 이름은 유화(柳花)입니다. 여러 동생들과 더불어 나가노는데, 그 때 한 남자가 스스로 말하기를 천제 의 아들 해모수라고 하면서 저를 웅심산(熊心山) 아래로 데려가서 압록(鴨 淥)변의 방안에서 사랑을 하고 곧바로 가서는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부모는 제가 중매도 없이 다른 사람을 따라갔다고 꾸짖어 마침내 벌로 우발수에서 살게 되었습니다.’라고 답하였다.. 상기 기록에 따르면, 삼국유사의 경우에는 태백산(太伯山)이 삼 위태백(三危太白)⋅평양성(平壤城)⋅조선(朝鮮)⋅백악산. 아사달⋅장. 당경(藏唐京) 등과 함께 기록되어 있다. 또 삼국사기의 경우에는.
(18) 150 仙道文化 제 16 권. 태백산(太伯山)이 우발수(優渤水)⋅웅심산(熊心山)⋅압록(鴨淥) 등과 함께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상기 삼국유사의 태백산과 삼국사기의 태백산이 같은 산이 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삼국유사의 태백산과 삼국사기의 태백산이 명칭은 같지만, 환웅 시대로부터 단군 시대를 거쳐서 부여와 고 구려에 이르기까지 도읍지를 여러 차례 옮겼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만약 두 태백산이 같은 태백산이며, 상기 기록에 나오는 지명 중에 서 하나라도 확실한 위치가 찾아진다면, 바로 환웅이 내려온 태백산 ‘신시’와 단군이 도읍을 정한 조선의 ‘평양성’, 또는 ‘백악산 아사달’ 등이 어디였는지 추정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환웅이 내려온 도읍지와 단군이 정한 도읍지가 동일한 지역은 아니더라도, 환웅이 ‘홍익인간(弘益人間)’을 위하여 세상을 이화(理化)시키던 일정한 지역 범위 안에 있었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상기 지명 중에 ‘압록(鴨淥)’이 있다. 즉, [그림 7]에서 보는 바와 같이 압록수는 현재의 하북성 호타하이다.21). <그림 7> 태백산과 압록수(산서성 흔주시) 21) 김진경, 고대 요수(遼水)의 위치 비정(比定)에 관한 연구, 국제뇌교육종합 대학원대학교, 2012년 2월.
(19) 고조선의 도읍지, 건국(建國) 년도, 국호 등에 관한 고찰ㆍ김진경 151. 따라서 삼국유사의 태백산과 삼국사기의 태백산이 같은 산이 라면, 환웅이 도읍을 정한 곳은 고주몽이 고구려를 건국한 졸본부여 가 있었던 지역으로서 압록수 주변 인근 지역에 있어야 할 것이다. 즉, 삼국사기의 태백산(太伯山)은 고구려 건국신화에 쓰여 있기 때 문에 압록수(鴨淥水)와 더불어 고구려가 도읍을 정한 곳의 주변 인근 지역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약 서로 다른 태백산이라면, 환웅이 도읍을 정한 곳과 단 군이 도읍을 정한 곳은, 고주몽이 고구려를 세운 곳과는 다른 곳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그런데 삼국유사에서 삼국사기에 기록되어 있는 고구려 고주 몽의 건국신화를 거의 그대로 인용하여 옮겨 적으면서도, 고기(古 記)에서 인용한 ‘태백산’과 삼국사기에서 인용한 ‘태백산’이 서로. 다른 산이라고 뚜렷하게 기록하지 않았으므로, 삼국유사를 쓰면서 삼국사기의 ‘태백산’은 고기의 ‘태백산’과 같은 태백산으로 간주 하고 있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따라서 환웅이 도읍을 정한 태백산은 [그림 7]에서 보는 바와 같이 압록수가 흐르는 현재의 산서성과 하북성 북부지역 주변 인근지역에 있는 산으로 추정할 수 있다. 즉, [그림 7]에서 보는 바와 같이 압록 수 주위에는 2,000m가 넘는 산들이 여럿이 있다. 현재의 산서성 대동 시 택원(澤源)현에 있는 항산(恒山)은 2,716m이며, 령구(靈丘)현에 있 는 태백산은 2,234m이고, 현재의 산서성 흔주(忻州)시에 있는 오대산 (五臺山)은 3,058m이다. 상기한 산 중에 태백산이 있으나, 명칭이 바뀌었을 수도 있으므로 곧이곧대로 환웅의 태백산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그런데 그 중에 서 오대산이 가장 높은 산이므로 [그림 7]에서 보는 바와 같이 오대 산을 포함하여 태백산을 중심으로 한 그 지역일대를 환웅이 신시(神 市)를 세운 태백산 지역으로 추정할 수 있다..
(20) 152 仙道文化 제 16 권. 3. 고조선의 도읍지 평양성과 백악산 아사달 앞서 2절에서 논한 바와 같이 삼국유사에 따르면, 단군왕검(檀君 王儉)이 평양성(平壤城)에 도읍하고 비로소 조선이라 하였다. 또 도읍. 을 백악산 아사달에 옮겼다. 즉, 삼국유사를 고려시대에 편찬하면 서 그 당시 잘 알고 있었던 지명으로서 ‘평양성’은 고구려 평양성을 가리키고 있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비록 삼국사기에는 현재의 이북에 있는 평양이 고려의 서경(西 京)이었으며, 고구려 평양성이 그곳에 있었을 뿐만 아니라. 고구려의. 마지막 수도였던 장안성도 마치 현재의 이북 평양에 있었던 것처럼 기록되어 있으나, [그림 7]에서 보는 바와 같이 고구려의 장안성⋅국 내성⋅환도성 등은 모두 평양성이 아니며 위치가 서로 다르다. 즉, 고조선의 도읍지는 삼국유사에 기록되어 있는 바와 같이 고구려 ‘평양성’이 있었던 곳으로서 현재의 산동성 덕주시 동쪽 인근지역으 로 추정할 수 있으며 그 위치는 [그림 7]에서 보는 바와 같다.22) 그런데 규원사화에 따르면, 단군은 평양에 자주 홍수가 나자 도 읍지를 백악산 아사달로 옮겼다. 즉, 고구려 평양성이 있었던 현재의 산동성 덕주시 주변 지역은 황하를 비롯한 여러 강들의 하류지역으 로서 그 당시에는 황토가 충분히 쌓이지 않아서 육지가 제대로 형성 되지 않았던 것으로 추론할 수 있다. 따라서 백악산 아사달은 황하 하류 지역보다 홍수의 영향이 적은 서쪽 내륙 지방으로 고려해 볼 수 있다. 또 삼국유사에 따르면, 백악산 아사달은 관성(關城)의 동쪽이라 고 기록되어 있으므로, 관성을 찾으면 아사달이라고 부른 곳이 어디 인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즉, 관성은 출입구와 성곽이 있는 지역으로 22) 김진경, 고대 요수(遼水)의 위치 비정(比定)에 관한 연구, 국제뇌교육종합 대학원대학교, 2012년 2월.
(21) 고조선의 도읍지, 건국(建國) 년도, 국호 등에 관한 고찰ㆍ김진경 153. 서 어떤 성(城)의 관문(關門)으로 볼 수 있으므로, 그 당시 잘 알려져 있 던 관문으로서 백성들의 출입이 왕성했던 관문을 고려해 볼 수 있다. 그런데 진(秦) 대의 만리장성 또는 고구려의 천리장성 등을 고려해 볼 수도 있으나, 고려가 역사책을 남기면서 남의 장성이나 옛 장성을 우선하여 고려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즉, 관성은 고려의 관성으로서 고려의 국경선에 관문이 있었을 것으로 추론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삼국사기가 쓰인 1145년을 전후하여 고려가 요(遼) 또는 금(金)과 국경을 맞대고 있었던 지역은 [그림 8]에서 보는 바와 같이 현재의 하북성 형태시 인근 주변지역으로 추정할 수 있다. 왜냐 하면 요(遼) 또는 금(金)은 고구려 요동성을 차지하고 고려를 방어하 기 위한 전방기지로 활용했으므로, 그 동쪽에 고려와 접하는 국경선 이 남북으로 있었던 것으로 추론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 삼국사기와 중국 25사에서 역사적으로 천혜의 요새지(要塞 地)로서 몇 차례 거론되는 지역이 있는데 바로 읍루이다. 즉, 읍루는. 진국(발해)왕 대조영이 처음에 나라의 기반을 닦은 곳으로서 동모산 이 있는 곳이었으며, 진국(발해)왕 대무예가 등주를 쳤던 곳이다.. <그림 8> 고려와 요, 금 간의 국경선 추정 지역.
(22) 154 仙道文化 제 16 권. 다시 말해서 단군조선 시대에 평양성 인근지역에 자주 홍수가 나 자 백악산 아사달이라고 불렀던 읍루지역으로 도읍지를 옮겼는데, 읍루는 ‘숙신의 땅’으로서 현재의 하북성 형태시보다 북쪽에 위치하 고 있는 내구현과 산구향 주변 인근지역으로 추정할 수 있다. 바로 읍루 지역을 고조선 시대의 백악산 아사달 지역으로 추론해 볼 수 있다.. Ⅳ. 고조선의 건국(建國) 년도와 국호 1. 부여의 건국년도 삼국유사23)에는 고기(古記)를 인용하면서, 북부여⋅동부여⋅ 졸본부여(고구려) 등에 관하여 아래와 같이 기록되어 있다. 고기에 따르면, 전한서(前漢書) 한(漢) 선제(宣帝) 신작(神爵) 3년(서 기전 59년) 4월 8일에 천제(天帝)가 오룡거(五龍車)를 타고 홀승골성으로 내려와 도읍을 세우고 왕(王)이라 일컬으며 국호를 북부여라 하였다. 스스 로 이름을 해모수(解慕漱)라 하고 아들을 낳아 이름을 부루(夫婁)라고 했는 데 해(解)씨를 성으로 삼았다. 왕은 이후에 상제(上帝)의 명에 따라 동부여 로 옮겼다. 동명제(東明帝)가 북부여를 이어 일어나 졸본주에 도읍을 세우 고 졸본부여라고 했으니 바로 고구려의 시조이다.. 상기한 삼국유사에서 인용한 한서(전한서)의 기록이 올바르다 면, 북부여가 서기전 59년에 건국되었으므로, 북부여와 동부여가 사 기조선열전에는 기록될 수 없었다고 하더라도 한서(전한서)의 ‘조 23) 삼국유사: 古記云 前漢書 宣帝 神爵三年壬戌四月八日天帝 降于訖升骨城 (在 大遼 醫州界) 乗五龍車立都稱王國號 北扶餘 自稱名 解慕漱 生子名 扶婁 以解爲氏焉王後因上帝之命移都于 東扶餘 東眀帝 継 北扶餘 而興立都于 卒 夲州 爲卒夲 扶餘 即髙句麗之始 (見下).
(23) 고조선의 도읍지, 건국(建國) 년도, 국호 등에 관한 고찰ㆍ김진경 155. 선열전’ 또는 별도의 (가칭)‘부여열전’에 기록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한서(전한서)는 한(漢)이 건국된 서기전 206년부터 한(漢) 이 멸망한 서기후 24년까지 230년간의 기록이므로, 북부여 또는 동부 여가 한(漢)과 최소한 83년간(서기전 59∼서기후 24년) 동시에 존재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부여에 관한 기록이 한서(전한서)에는 없고 후한서⋅ 삼국지⋅진서 등의 동이열전에만 기록되어 있다. 즉, 부여는 후한 (後漢)⋅조위(曹魏)⋅진(晉) 시기의 동이열전에 기록될 수 있을 정도 로 충분히 비중이 있는 국가였지만, 사기와 한서(전한서)에는 전 혀 기록되어 있지 않다. 비록 사마천은 사기를 서기전 91년경에 완성하였으므로 서기전 59년 에 세워진 부여에 관한 기록을 남길 수 없었다고 하더라도, 도대체 반고는 왜 부여에 관한 기록을 한서(전한서) 조선열전 등에 남기지 않았을까? 단순히 부여의 건국시기가 전한(前漢, 서기전 206년∼서기후 24년) 시기의 후기에 해당되기 때문에 기록하지 않은 것인가? 아니면 부여에 관한 기록을 사서에 남기지 못할 정도로 부여가 비 중이 없었던 나라에 불과했던 것인가? 그런데 사기와 한서(전한서)에는 ‘조선열전’ 외에 ‘흉노열전’이 별도로 편집되어 있다. 즉, 사기부터 진서까지 비교해 보면, 각 사서에 권별로 편집되어 있는 외국열전의 내용은 <표 2>와 같다. <표 2> 각 사서별 외국열전의 권별 분류내용 사 기. 한 서. 후한서. 삼국지. 진 서. 흉노. 흉노. 조선. 오환선비동이. 동이. 남월. 서남이양월조선. 남만서남이. 토욕혼. 동월. 서강. 흉노. 조선. 북흉노(멸실) 남흉노 오환선비.
(24) 156 仙道文化 제 16 권. 따라서 북부여가 서기전 59년에 건국되었으므로, 부여에 관한 기 록들이 사기또는 한서의 ‘조선열전’에는 실리지 않았다고 하여도 일부 기록이 ‘흉노열전’에 기록되어 있을 가능성이 있다고 볼 수 있 다. 그러나 사기흉노열전에 부여에 관한 기록은 전혀 없고 흉노의 거주 지역에 관하여 아래와 같이 기록되어 있다. 흉노 선우의 도읍지인 정(庭)은 대(代)와 운중(雲中)의 땅에 있었다. 또 좌현왕, 좌녹려왕 등 좌방(左方)의 왕이나 장수는 상곡군(上谷郡)으로 부터 동쪽에 해당되어 예맥과 조선에 접하고 있었으며, 우현왕, 우녹려왕 등 우방(右方)의 왕이나 장수는 상군(上郡)으로부터 서쪽에 해당되어 월씨 (月氏)⋅저(氐)⋅강(羌)과 접해 있었다.. 즉, 상기 사기흉노열전에 기록되어 대(代), 운중(雲中), 상곡군(上 谷郡), 상군(上郡) 등을 청(淸) 대에 제작된 대청광여도에서 찾아보. 면 [그림 9]와 같다.. <그림 9>북지, 상군, 삭방, 오원, 운중, 정양, 안문, 상곡, 대 등.
(25) 고조선의 도읍지, 건국(建國) 년도, 국호 등에 관한 고찰ㆍ김진경 157. 그러나 대청광여도에 표기되어 있는 지명들이 모두 올바른 위치 에 표기되어 있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명(明) 대의 사관들이 중국 25사에 기록되어 있는 많은 역사적인 지명들을 북쪽 또는 동북 쪽 방향으로 변이시켰기 때문이다. 그런데 상기한 사기흉노열전에 기록되어 있는 대, 운중, 상곡군, 상군 중에서 본래 위치를 명확하게 확인할 수 있는 대(代)와 상곡(上 谷)의 본래 위치는, 요동과 요서처럼 모두 한(漢) 대의 유주(幽州)에. 속하는 지역으로서 유주의 치소가 있었던 현재의 산서성 둔유현의 서북쪽과 서쪽 인근지역이어야 하므로, [그림 9]의 가운데 실선 원에 해당하는 지역으로 확인할 수 있다.24) 따라서 모두 [그림 10]에서 보는 바와 같이 현재의 산서성 둔유현 주 변지역으로 내려와야 함을 알 수 있다. 다만, 북지⋅상군⋅삭방⋅오원 등은 해당지역 지리지가 멸실되었다고 하므로 확인할 수 없을 뿐이다.. <그림 10> 대⋅운중⋅상곡군⋅상군 등 24) 김진경, 고대 요수(遼水)의 위치 비정(比定)에 관한 연구, 국제뇌교육종합 대학원대학교, 2012. 2..
(26) 158 仙道文化 제 16 권. 또한, 후한서남흉노전에 따르면, 남흉노의 거주지역에 속하는 지 역은 북지, 삭방, 오원, 운중, 정양, 안문, 상곡, 대군 등 8개 지역이었 으며, 8개 부족이 남흉노에 속해 있었다. 이 지역들을 대청광여도 에서 확인해 보면 [그림 9]와 같다. 그러나 앞서 II장에서 논한 바와 같이 대⋅안문⋅운중⋅상곡 등이 후한서군국지의 거리수치에 근거하여 모두 북쪽으로 변이되어 있 다. 즉, 남흉노의 거주지역은 상곡군과 대군을 포함하여 북지, 삭방, 오원, 운중, 정양, 안문 등 8개 지역 모두가 [그림 11]에서 보는 바와 같이 현재의 산서성 태원시 바로 남쪽 아래쪽 지역이었음을 알 수 있다. 또 선우 정(庭)이란 곳은 대(代)를 포함하여 남흉노지역의 바로 북부 지역에 해당하였음을 알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사기에 기록되어 있는 흉노의 거주지역들과 후한 서에 기록되어 있는 남흉노의 거주지역들이 모두 동일한 지명으로 같은 지역으로 일치함을 알 수 있다.. <그림 11> 한 대의 상곡군과 대군(선우 정) 등 남흉노지역.
(27) 고조선의 도읍지, 건국(建國) 년도, 국호 등에 관한 고찰ㆍ김진경 159. 그런데 앞서 III장에서 논한 바와 같이 부여성의 위치를 현재의 산 서성 태원시 주변 인근지역으로 추정할 수 있었다. 즉, 부여성의 위 치가 현재의 태원시 주변 인근지역에 있었다면, 부여는 [그림 11]에 서 보는 바와 같이 바로 남흉노의 거주 지역 바로 북쪽에 놓이게 되 며, 부여성의 위치가 선우 정(庭)을 포함한 남흉노 거주지역의 바로 북쪽에 인접해 있었든지, 또는 선우 정(庭)에 해당하는 대군(代郡)과 일부 중첩되는 지역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부여의 강역이 바로 북흉노 또는 선우 정(庭)에 속하고 있었는가? 또 후한서남흉노전에 따르면, 흉노가 서기후 48년에 남북으로 분리되었는데, 그 이전까지는 북흉노에서 대대로 흉노 선우를 이어 왔으니 부여왕이 바로 흉노 선우였는가? 아니면 흉노의 두만 선우(재위: 서기전 ?∼209년)로부터 대를 이어 서 선우를 맡아왔는데, 흉노가 인접한 지역에 별도로 부여를 건국한 것인가? 그런데 앞서 <표 2>에서 보는 바와 같이 흉노에 관한 기록은 사 기부터 진서까지 빠지지 않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한서(전한 서)를 인용한 삼국사기에 따르면, 북부여가 서기전 59년에 건국되 었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부여에 관한 기록이 한서(전한서)에는 없 고 후한서부터 흉노와 별도로 동이열전에 기록되어 있다. 즉, 후 한서를 쓴 범엽(范曄)은 부여와 흉노를 분리하여 기록했으므로, 부 여와 흉노가 서로 다른 존재라고 기록한 셈이다. 그러나 부여와 북흉노가 지리적으로 최소한 인접해 있었거나, 또 는 거의 중첩되는 같은 지역에 위치하고 있었으므로 부여가 바로 흉 노라고 볼 수 있지 않겠는가? 한편, 사기화식열전에 따르면, 연(燕)의 지리적 위치와 특색을 설명하고 있는데 아래와 같이 기록되어 있다..
(28) 160 仙道文化 제 16 권 연(燕)은 발해와 갈석산 사이에 있는 큰 도시인데, 남쪽으로는 제(濟)와 조(趙)에 통하고, 동북쪽으로는 흉노와 근접해 있다. 또 북쪽으로는 오환(烏桓)⋅부여(夫餘)와 이웃하고 있고, 동쪽으로는 예 맥(穢貊)⋅조선(朝鮮)⋅진번(眞番)과의 교역으로 이익을 독점하고 있다.. 즉, 상기 사기 화식열전의 기록에 따라 연(燕)과 주변국 간의 배치 관계를 그려보면 [그림 12]와 같다. 그런데 앞서 1장에서 논한 바와 같이 [그림1]에서 보면 전국시대 연(燕)의 도읍지를 연도(燕都)라고 <그림 12> 사기 화식열전. 불렀는데 현재의 산서성 둔유현 주변 인근지역임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상기한 사기 화식 열전의 기록은 사기 흉노열 전의 기록과 차이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즉, 사기흉노열전의 기록에 따라 연(燕)과 주변국 간의 배치관계를 그려보면 [그 림 13]과 같다.. <그림 13> 사기 흉노열전. 다시 말해서 상기한 사기 화식열전에는 연(燕)의 북쪽에 오환과 부여가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 으나, 사기흉노열전에 따르면 연(燕)의 북쪽에 동호와 산융이 있었 다고 기록되어 있다. 또 사기흉노열전에는 진(晋)의 북쪽에 임호와 누번이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즉, 사기흉노열전의 기록은 진(晋)이 서기전 453년 에 조(趙)⋅한(韓)⋅위(魏) 등 3개국으로 땅을 분할하기 전의 상황이 며, 사기화식열전의 기록은 453년 이후로서 한 무제가 조선을 공격.
(29) 고조선의 도읍지, 건국(建國) 년도, 국호 등에 관한 고찰ㆍ김진경 161. 한 서기전 108년 이전 상황에 해당한다. 그런데 [그림 13]에서 보는 바와 같이 연(燕)의 북쪽에 동호와 산융 이 인접해 있었는데, [그림 12]에서는 연(燕)의 북쪽에 오환과 부여로 기록되어 있다. 즉, 한 부족 또는 한 국가가 완전히 멸망하여 모두 몰 살당했거나 외부로 이주하지 않은 이상, 같은 지역에 살고 있는 부족 은 시대별로 부르는 호칭이 달라지더라도 같은 부족 또는 그 부족의 후예로 볼 수 있다. 따라서 오환이 바로 동호(東胡)였으며, 부여는 바로 산융(山戎)이었 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또 상기 사기화식열전에 따르면 오환 (烏桓)과 부여(夫餘)가 예맥(穢貊)⋅조선(朝鮮)⋅진번(眞番) 등과 같은 시대에 존재한 나라들이므로, 부여는 최소한 한(漢) 무제가 조선(朝 鮮)을 공격했던 서기전 109년 이전에 건국되었던 나라임을 알 수 있. 다. 더욱이 오환과 부여는 연이 진에 의해 멸망당한 서기전 221년 이 전에 함께 존재하였으므로, 부여는 최소한 서기전 221년 이전에 존재 하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한편, 사기흉노열전에 따르면, 당요(唐堯)⋅우순(禹舜) 시대 이전 부터 산융⋅험윤⋅훈육 등 여러 부족이 북쪽 미개지에서 목축을 하며 살고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즉, 산융(山戎)의 역사는 요⋅순(堯⋅舜) 시대보다 앞서고 있음을 알 수 있으며, 산융의 역사는 바로 부여의 역사로 이어졌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부여는 사기에 기록되지 않은 국명이지만, 유일하 게 사기 화식열전에 ‘부여’라는 국호와 위치가 기록되어 있음으로 해서, 부여의 역사가 밝혀질 수 있게 되었다. 다만, 부여를 건국한 통 치세력이 산융의 거주 지역에서 자발적으로 형성되었을 수도 있으며, 외부에서 이주해 들어간 세력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앞서 논한 바와 같이 삼국유사에 따르면, 해모수의 아들 부루가 ‘북부여왕’을 하다가 현재의 산서성 태원시 주변 인근지역에.
(30) 162 仙道文化 제 16 권. ‘동부여’를 세웠으므로, 외부에서 산융으로 이주해 들어간 세력이 부 여를 세웠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삼국유사에는 해모수가 서기전 59년에 홀승골성에서 북 부여를 건국했다고 쓰여 있으니 ‘북부여’와 ‘동부여’의 건국년도가 뒤 로 늦추어졌음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사기 화식열전에 따르면, 부여(동부여)가 최소한 서기전 221년 이전에 건국되어 있었으며, 해 모수의 ‘북부여’는 ‘동부여’(부여)보다 먼저 건국되었기 때문이다. 또 앞서 논한 바와 같이 삼국유사가 인용하고 있는 고기(古記) 의 기록을 유심히 보면, 고기는 또 한서(전한서)를 인용하고 있 음을 알 수 있다. 즉, 기록상의 문구 자체로 볼 때, 고기가 한서 (전한서)보다 나중에 편찬되었다고 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조선 중 종 7년(1512년)에 삼국유사를 다시 간행하는 편집과정에서 고기 와 한서(전한서) 사이에 기록되어 있었던, 고기를 인용한 내용이 모두 빠져버리지 않았는지 의심하지 않을 수가 없다. 또 상기한 삼국유사에서 보는 바와 같이, ‘고기에 따르면, 한 서(전한서)한(漢) 선제(宣帝) 신작(神爵) 3년(서기전 59년) 4월 8일’이 라는 구절은 북부여의 건국년도를 기록한 것인데, 문장 앞에서 고 기를 인용한 것인지, 한서(전한서)를 인용한 것인지 모호하게 기 록되어 있으므로, 편집과정에서 의도적으로 북부여의 건국년도를 바 꿔치기 하지 않았는지 의심해 보지 않을 수가 없다(한서 선제 본 기는 멸실되어 확인할 수 없음). 한편, 삼국사기에 따르면, 고구려는 서기전 37년에 건국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삼국사기고구려본기 보장왕 27년(668년)의 기록 에 따르면 ‘고씨(高氏)가 한(漢)으로부터 나라를 가지고 있은 지 지금 이 900년’이라는 구절이 기록되어 있다. 즉, 고구려가 망한 해가 668 년인데, 고구려가 900년 동안 존속되었다면 고구려는 서기전 232년 에 건국되었다고 볼 수 있다..
(31) 고조선의 도읍지, 건국(建國) 년도, 국호 등에 관한 고찰ㆍ김진경 163. 따라서 고구려의 건국년도가 바꿔치기 되었다면, 북부여의 건국년 도도 왜곡되었다고 볼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북부여와 부여(동부여) 가 고구려(졸본부여)보다 먼저 건국되었기 때문이다. 또한, 후한서오환선비전에 따르면, ‘후한 건무 22년(서기후 46년)’ 에 흉노 호도이시도고 선우가 죽었는데, 삼국사기에 따르면, ‘고구 려 대무신왕 5년(서기후 22년)’ 봄 2월에 왕이 부여국 남쪽으로 진군 하여 부여왕 대소의 목을 베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상기한 두 사건 이 비록 년도가 다르지만 서로 같은 사건이라면, 부여왕 대소는 바로 흉노 호도이시도고 선우임을 알 수 있다. 만약 부여왕 대소가 흉노 호도이시도고 선우라면, 부여왕 대소는 금와왕의 아들이므로 금와왕은 흉노 호한야 선우(재위: 서기전 58∼ 31년)가 된다. 더욱이 흉노는 대대로 부자 또는 형제 순위에 따라 선우를 이었으 므로, 금와왕이 흉노 호한야 선우라면 흉노 두만(頭曼) 선우(재위: 서 기전 ?∼209년)는 금와왕의 선조가 된다. 특히 금와왕에게 일곱 아들 이 있었는데, 호한야 선우도 일곱 아들을 두었다. 그리고 사기흉노열전에서 두만 선우보다 앞선 시대의 흉노 선우 에 관한 기록이 없으므로 알 수 없으나, 삼국유사에 근거하여 해모 수의 아들 부루가 현재의 산서성 태원시 주변 인근지역으로 가서 부 여(동부여)를 건국한 것이라면, 해부루가 흉노 두만 선우 또는 그 선 조가 되는 셈이다. 즉, 흉노 두만 선우의 시대를 해부루가 부여를 건 국한 시기로 본다면, 부여는 최소한 서기전 209년 이전에 건국되었다 고 볼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사마천은 황제(黃帝)로부터 한(漢) 무제(武帝) 태초(太 初, 서기전 104∼101년)까지 2,600여년의 중국 역사를 사기에 기록. 하면서 부여의 국호를 사용하지 않고 흉노의 역사로 기록하였음을 알 수 있다..
(32) 164 仙道文化 제 16 권. 특히 고구려가 900년을 지속했다는 삼국사기의 기록을 고려하면, 북부여와 부여는 최소한 서기전 232년 이전에 건국되었던 것으로 추 정할 수 있다. 즉, 진(秦)이 서기전 221년에 건국되었으니, 북부여⋅ 부여⋅고구려 등의 건국년도를 진(秦)보다 뒤로 늦춰서 바꿔치기한 것으로 추론할 수 있다.. 2. 고조선의 건국년도 삼국유사에 따르면, 위서(魏書)25)를 인용하면서, 고조선(古朝 鮮)에 관하여 아래와 같이 기록되어 있다. 고조선[古朝鮮, 왕검조선(王儉朝鮮)]. 위서에 따르면, 지금부터 2,000년 전에 단군왕검(檀君王儉)이 아사달[阿斯達, 백주(白州)에 있다. 또는 관성 (關城) 동쪽에 있다고도 한다.]에 도읍을 정하고 나라를 열어 조선이라고 했 다. 바로 요(堯)와 같은 시기이다.. 또 바로 이어서 고기(古記)를 인용하면서, 환국(桓國)의 환웅(桓 雄)과 단군왕검(檀君王儉)에 관한 건국(建國) 신화가 아래와 같이 기. 록되어 있다. 환웅이 무리 3,000명을 거느리고 태백산 꼭대기 신단수(神檀樹) 아래로 내려왔다. 이곳을 신시(神市)라 하고, 이분을 환웅천왕이라 한다.(중략) 단군왕검은 당요(唐堯)가 즉위한 지 50년인 경인(庚寅)년(당요의 즉위원 년이 무진년이므로, 50년은 정사년이다. 경인년이 아니다. 아마 사실이 아닌 듯하다.)에 평양성(平壤城)에 도읍하고 비로소 조선이라 하였다. 또 도읍을 백악산 아사달에 옮겼는데, 궁홀산(弓忽山)이라고도 하며 금 25) 북제(北齊, 550∼577년) 때 위수(魏收)가 지은 북위(또는 후위, 386∼534년) 대의 역사책이다. 위서(魏書)의 일부가 멸실되어 현재는 단군조선에 관한 기록을 확인할 수 없다..
(33) 고조선의 도읍지, 건국(建國) 년도, 국호 등에 관한 고찰ㆍ김진경 165 미달(今彌達)이라고도 한다. 그 후 1,500년 동안 나라를 다스렸다. 주(周)의 호왕(虎王, 武王)이 즉위한 기묘(己卯)에 기자(箕子)를 조선에 봉하니, 단군은 곧 장당경(藏唐京)으로 옮겼다가 뒤에 아사달에 돌아와 숨 어 살면서 산신(山神)이 되었으니 수(壽)가 1,908세였다.. 상기한 삼국유사에 따르면, 단군이 1,500년 동안 조선을 다스린 후, 주(周) 무왕이 기자(箕子)를 조선에 봉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즉, 주(周)가 은(殷)을 멸망시키고 기자를 조선에 봉한 해가 서기전 1046년경이므로, 단군이 조선을 세운 때는 서기전 2546년경이 된다. 다시 말해서 단군이 나라를 세웠다는 당요(唐堯) 즉위 50년(서기전 2333년) 보다 213년 더 앞서서 조선이 건국된 셈이다. 그런데 앞서 삼국유사에서 인용한 위서에서는 조선이 요(堯) 와 같은 시기에 건국되었다고 기록되어 있고, 고기에서는 조선이 ‘요 즉위 50년’에 건국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즉, ‘요 즉위 50년’을 ‘요와 같은 시기’로 이해할 수 있다고 하더라 도, 단군왕검이 조선을 요 즉위 50년(서기전 2333년)에 건국했다는 기록과, 기자를 조선에 봉하기 전에 단군왕검이 1,500년 동안 조선(서 기전 2546년경에 건국)을 다스렸다는 기록은, 고조선의 건국년도가 기록상 서로 상충되고 있음을 의미한다. 그런데 만약 단군이 서기전 2333년에 조선을 세웠다면, 1500년이 지난 때는 서기전 833년이 된다. 즉, 주(周) 무왕이 은(殷)을 멸망시킨 서기전 1046년경보다 213년이 지난 뒤에 기자가 조선에 온 셈이 된다. 따라서 단군이 서기전 2546년경에 조선을 세웠다면, 당요(唐堯)가 즉위한 지 50년에 조선을 건국한 것이 아니라, 요(堯)보다 163년 앞서 서 조선을 세운 것으로 볼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삼국유사를 조선 중종 7년(1512년)에 다시 간행하 면서, 단군이 조선을 세운 건국년도를 바꿔치기 하지 않았는지 의심 하지 않을 수가 없다..
(34) 166 仙道文化 제 16 권. 특히, 상기한 삼국유사의 기록에 ‘당요(唐堯)가 즉위한 지 50년이 되는 경인(庚寅)년’에 특별히 주석을 붙여서 ‘경인(庚寅)년’이 아니고 정사(丁巳)년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물론 단순히 60갑자(甲子)를 잘못 셈해서 기록이 틀렸다고 볼 수도 있겠지만, 역사책을 편찬하면서 이 런 기본적인 내용이 틀린다는 것이 한편 우습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 으로는 고조선의 개국년도가 바꿔치기 되었음을 후손들에게 귀띔해 주려는 의도가 있지는 않았을까? 즉, 조선의 사관들이 어쩔 수 없이 삼국유사를 뜯어 고치게 되 었으나, 고조선의 개국년도가 바꿔치기 되었음을 후손들에게 알려주 기 위한 비밀코드라고 해석할 수도 있는 여지가 없지는 않다. 특히 명(明) 대에 역사적인 지명들의 위치를 동쪽 또는 동북쪽으로 변이시켰으며, 조선이 삼국유사와 삼국사기를 뜯어 고쳤는데, 고대 국가(고조선 등)의 건국년도를 바꾸지 않았다고 장담할 수 있겠는가? 또 단군이 아사달에서 산신(山神)이 되었는데 수(壽)가 1,908세였다 고 한다. 그런데 단군이 1인이 아니라 대(代)를 이어서 나라를 다스 렸던 것으로 해석해 보면, 고조선이 서기전 2546년에 건국되어 서기 전 638년에 망한 것으로 추론할 수 있다.. 3. 기자를 봉했다는 ‘조선’과 단군왕검이 건국한 ‘고조선’ 삼국유사에 따르면 기자(箕子)가 조선에 봉해졌으며, 연(燕)이 진 번조선을 침략해 차지한 이후, 위만(衛滿)이 망명하여 진번조선을 차 지했는데, 위만조선(衛滿朝鮮)의 도읍지인 왕검성(王儉城) 주변에 패 수가 인접해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위만조선과 왕검성의 위치가 단군왕검이 세운 고조선(왕검 조선)의 평양성이 될 수 없으며, 더욱이 현재의 이북에 있는 평양이 될 수도 없다. 왜냐하면 [그림 14]에서 보는 바와 같이 위만조선의 위.
(35) 고조선의 도읍지, 건국(建國) 년도, 국호 등에 관한 고찰ㆍ김진경 167. 치와 고조선(왕검조선)의 위치가 서로 같다고 볼 수 없기 때문이다. 즉, 위만조선과 왕검성은 옛 은(殷)의 땅에 있었으며 은허(殷墟)의 유 적이 발견된 현재의 하남성 안양시 주변 인근지역으로 볼 수 있는 반면에, 고조선(왕검조선)은 옛 숙신(肅愼)의 땅에 있었다고 추론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은(殷)의 신하였던 기자(箕子)가 봉해졌다는 ‘조선’은 기자가 살던 고향인 옛 은(殷)의 강역에 속하는 지역으로 추론해 볼 수 있다. 왜냐하면 주(周) 무왕(武王)이 남의 나라(고조선)에 신하를 둘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림 14> 고조선(왕검조선)과 은(殷)의 추정지역. 또 [그림 12]에서 보는 바와 같이 주(周) 대에 해당하는 춘추전국시 대에 연(燕)의 동쪽에 예맥(穢貊)⋅조선(朝鮮)⋅진번(眞番) 등이 위치 하고 있었는데 바로 옛 은(殷)의 강역과 일치하기 때문이다. 그 반면 에 은(殷) 대에 이미 동북쪽에 ‘숙신(肅愼)’이 존재하고 있었는데, 바로 숙신의 땅을 고조선(왕검조선)의 강역으로 추론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숙신(肅愼)’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전혀 기록되어 있지 않 다. 단순한 지명에 불과한 것인지, 아니면 나라명인지, 부족명인지 명.
(36) 168 仙道文化 제 16 권. 확하게 알 수는 없다. 또는 사람이름일 수도 있다. 왜냐하면 흠정만 주원류고에 ‘숙신씨’라고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후한서동이열전에서 읍루를 ‘옛 숙신의 나라’라고 설명하 고 있으며, 그 위치는 [그림 14]와 같이 비정할 수 있다. 왜냐하면 요사지리지에 따르면, 읍루가 고구려 요동성(안동도호부)에서 북쪽 으로 270리(당척) 거리에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즉, 읍루 는 거리로 볼 때 요동 지역에 포함될 수 있다. 또 요사지리지에서 요동(遼東)을 ‘옛 조선의 땅’이라고 설명하고 있으므로, ‘숙신의 땅’이 바로 ‘조선’을 의미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숙신의 땅’이 바로 환웅, 또는 단군이 도읍한 곳으로 추론 할 수 있다. 한편, 청(淸) 대의 사서인 흠정만주원류고에 따르면, 숙신씨(肅愼 氏)는 주(周, 기원전 1046년경∼221년) 대 이전의 명칭이었다고 기록. 되어 있는데, ‘숙신의 땅’이 마치 현재의 길림성 심양(瀋陽) 인근 지역 인 것처럼 아래와 같이 기록되어 있다. 삼가 생각건대, 흥경(興京)은 주(周) 대 이전에는 숙신씨(肅愼氏)였다. 한 (漢)⋅진(晋) 대에는 읍루였으며, 남북조(南北朝) 대에는 말갈이었고, 당(唐) 대에는 발해 정리부(定理府)였다. 요(遼)⋅금(金) 대에서 원(元) 대까지는 심양(瀋陽) 지역이었다.. 상기한 기록에서 보는 바와 같이 읍루가 주(周) 대 이전에는 숙신 씨였으며, 요⋅금 대에서 원 대까지는 심양(瀋陽) 지역이었다고 기록 되어 있다. 즉, 청(淸) 대에 흠정만주원류고를 편찬한 사관(史官)들 은, 읍루가 주(周) 대 이전에는 숙신씨의 땅이었는데, 읍루의 위치가 [그림 15]에서 보는 바와 같이 현재의 요령성 심양(瀋陽) 인근 주변지 역이었던 것으로 인식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신당서지리지에 따르면, ‘당(唐)이 안동도호부를 두었.
(37) 고조선의 도읍지, 건국(建國) 년도, 국호 등에 관한 고찰ㆍ김진경 169. 던 고구려 요동성(요동)이 당(唐)의 서안에서 4,625리, 낙양에서 3,820 리’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요사지리지에 따르면, ‘읍루가 안동도호 부(요동)에서 북쪽으로 270리’라고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앞서 II장에서 논한 바와 같이 상기한 신당서지리지의 거리수치들은 명(明) 대의 사관(史官)들이 삽입시킨 위사(僞史)였음을 알 수 있었다. 즉, 청(淸) 대의 사관(史官)들이 명(明) 대의 사관들에게 깜빡 속아 넘어갔음을 알 수 있다.. <그림 15> 요양, 심양, 하얼빈(아성구) 등. 또 흠정만주원류고에 따르면, 길림(吉林)에 관하여 아래와 같이 기록되어 있는데, 마치 현재의 길림성 길림(吉林)시 인근지역이 ‘숙신 의 땅’이었으며 읍루였던 것처럼 기록되어 있다..
(38) 170 仙道文化 제 16 권 삼가 생각건대, 길림(吉林)은 주(周) 대 이전에는 숙신의 땅이었고, 한(漢) 대 이후에는 읍루⋅말갈에 속했다. 당(唐) 초기에는 신라의 계림주(雞林州) 였고, 얼마 있다가 발해에 속했다. 요(遼) 대에는 혼동강(混同江) 좌우에 빈주(濱州)⋅영강주(寧江州)를 두 었고, 혼동강의 서쪽이 황룡부(黃龍府)였다. 금(金) 대에는 혼동강 좌우에 조주(肇州)⋅강주(降州)⋅신주(信州)를 두었고, 혼동강 서쪽이 솔빈로(率賓 路)였고 남쪽으로 고려와 가까운 곳은 해란로(海蘭路)였는데 모두 상경에 속했다. 원(元) 대에는 해란부에 석달륵달로만호부(碩達勒達路萬戶府)를 두 어 혼동강 남북의 백성들을 5개 구역으로 나누어 통할했다.. 즉, 상기 기록에 따르면, 청(淸) 대에 흠정만주원류고를 편찬한 사관(史官)들은 현재의 길림성 길림(吉林)시 지역이 주(周) 대 이전에 는 ‘숙신의 땅’이었고, 한(漢) 대에 읍루⋅말갈에 속하는 지역이었으 며, 그 곳이 당(唐) 대에 신라의 계림주였고, 얼마 있다가 발해에 속 했었다고 인식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후한서군국지에 따르면, [그림 15]에서 보는 바와 같이 요동은 낙양에서 3,600리(한척)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신당서지리 지에 따르면, 요동(안동도호부)에서 동북쪽으로 1,500리(당척) 되는 곳이 발해 상경이었는데, 발해 상경을 ‘숙신의 땅’에 두었다고 하니, 현재의 길림성 길림(吉林)시 인근 지역이 ‘숙신의 땅’이었을 줄로 알 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앞서 흠정만주원류고에서 청(淸) 대의 흥경(興京)을 설명 하면서 읍루가 심양(瀋陽)이었다고 기록하였으나, 다시 읍루가 길림 (吉林)이었다고 기록함으로써 서로 내용이 상충되고 있는 모순을 드 러내고 말았다. 비록 상기한 흠정만주원류고에서 흥경(심양시)과 길림(길림시) 지역이 서로 인접해 있으므로 크게 보면 같은 지역이라 고 볼 수도 있지만, 인접한 지명이라고 하더라도 거리에 따라 구분할 수 있다면 구분해야만 할 것이다. 또 상기한 흠정만주원류고의 기록에 따르면, 청(淸) 대의 사관.
(39) 고조선의 도읍지, 건국(建國) 년도, 국호 등에 관한 고찰ㆍ김진경 171. (史官)들은 현재의 길림성 길림(吉林)시 지역을 설명하면서 요(遼)⋅ 금(金)⋅원(元) 대에 걸쳐서 혼동강(混同江)이 있었다고 덧붙여 놓았 다. 그러나 청(淸) 대의 사관(史官)들은 혼동강이 현재의 흑룡강인 줄 로 알고 있었으며, 대금(大金)의 상경이 현재의 흑룡강성 하얼빈시 아성구(阿城區) 인근 지역인줄 알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흠정만주원류고에 따르면, 흑룡강(黑龍江)에 관하여 아래와 같이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삼가 생각건대, 흑룡강(黑龍江)은 길림(吉林)에서 동북쪽에 있는데 동서 3,000리요, 남북이 4,000리이다. 북위(北魏, 후위) 대에 흑수부라고 불렀으며 물길(勿吉)에 속했다. 당(唐) 대에 흑수말갈이라고 불렀으며, 흑룡강에 걸쳐 서 남부와 북부로 나뉘어져 있었다.. 또 금사에 따르면, 대금(大金)의 상경에 혼동강이 있었는데, 아 래와 같이 혼동강이 흑룡강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금(金)의 선조는 숙신(肅愼)의 땅에서 살았다. 혼돈강(混沌江)⋅장백산(長 白山)이 있고, 혼돈강은 흑룡강(黑龍江)이라고도 하는데 이른바 백산(白山)⋅ 흑수(黑水)가 바로 이곳이다.. 즉, 청(淸) 대의 사관(史官)들은 현재의 흑룡강성 흑룡강이 혼동강 인 줄 알고 있었는데, 그 이유는 명(明) 대의 사관들이 금사에 혼동 강이 ‘흑룡강’이라고 위사(僞史)를 삽입시켰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청(淸) 대의 사관들이 명(明) 대의 사관들에게 깜빡 속아 넘어갔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후한서군국지에는 ‘요동이 낙양에서 3,600리(한척)’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신당서지리지에는 ‘안동도호부(고구려 요동성)가 서안에서 4,625리, 낙양에서 3,820리’라고 기록되어 있다. 즉, 요동이.
(40) 172 仙道文化 제 16 권. [그림 15]에서 보는 바와 같이 후한서에 근거한 요동(현재의 난하 동쪽 지역)과 신당서에 근거한 요동(현재의 요양시 주변 지역)이 각각 서로 다르게 나타나고 있다. 또 신당서지리지에 따르면, 발해 상경의 위치가 요동(안동도호 부)에서 동북쪽으로 1,500리(당척)가 된다고 기록되어 있으므로, [그 림 15]에서 보는 바와 같이 현재의 길림성 길림 인근지역과 흑룡강성 하얼빈시 아성구(阿城區) 인근 지역으로 두 군데로 나타나므로 청 (淸) 대의 사관들은 혼동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다시 말해서 [그림 15]에서 보는 바와 같이, 후한서군국지에 근 거한 요동의 위치와, 신당서지리지에 근거한 요동(안동도호부)의 위치가 서로 다르게 나타나는 이유는, 명(明) 대의 사관들이 2회에 걸쳐서 위사를 삽입시켰는데, 처음에 후한서군국지 등에 위사들을 삽입시켰으나 그 위사들을 지우지 않은 채 신당서지리지 등에 또 위사들을 삽입시킴으로써, 요동(안동도호부)의 위치가 중복되어 기록 되었기 때문인 것으로 추론할 수 있다. 그러나 앞서 II장에서 논한 바와 같이 요동(안동도호부)은 고구려 요동성이 있었던 현재의 하북성 한단시 영년현 광부진으로 추정할 수 있으며, [그림 15]에서 보는 바와 같다. 또 읍루의 본래 위치는 고 구려 요동성에서 북쪽으로 270리(당척) 거리에 있는 내구현과 산구향 인근지역으로 비정할 수 있다.26)27) 또 요⋅금⋅원 대에 걸쳐서 혼동강은 현재의 하북성 대동시 앞을 흐르고 있는 상간하(桑干河)로 추정할 수 있다. 왜냐하면 신당서지 리지에 따르면, ‘발해 상경에서 북쪽으로 1,000리 거리에 흑수말갈이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발해 상경은 [그림 6]에서 보는 바와 같 이 현재의 하북성 창평구로 비정할 수 있으며 신당서지리지 원본 26) 김진경, 고대 요수(遼水)의 위치 비정(比定)에 관한 연구, 국제뇌교육종합 대학원대학교, 2012. 2. 27) 김진경, 조선 600년간의 비밀 요동과 부여, 어드북스. 2013. 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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