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유사에 따르면 기자(箕子)가 조선에 봉해졌으며, 연(燕)이 진 번조선을 침략해 차지한 이후, 위만(衛滿)이 망명하여 진번조선을 차 지했는데, 위만조선(衛滿朝鮮)의 도읍지인 왕검성(王儉城) 주변에 패 수가 인접해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위만조선과 왕검성의 위치가 단군왕검이 세운 고조선(왕검 조선)의 평양성이 될 수 없으며, 더욱이 현재의 이북에 있는 평양이 될 수도 없다. 왜냐하면 [그림 14]에서 보는 바와 같이 위만조선의 위
치와 고조선(왕검조선)의 위치가 서로 같다고 볼 수 없기 때문이다.
즉, 위만조선과 왕검성은 옛 은(殷)의 땅에 있었으며 은허(殷墟)의 유 적이 발견된 현재의 하남성 안양시 주변 인근지역으로 볼 수 있는 반면에, 고조선(왕검조선)은 옛 숙신(肅愼)의 땅에 있었다고 추론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은(殷)의 신하였던 기자(箕子)가 봉해졌다는 ‘조선’은 기자가 살던 고향인 옛 은(殷)의 강역에 속하는 지역으로 추론해 볼 수 있다. 왜냐하면 주(周) 무왕(武王)이 남의 나라(고조선)에 신하를 둘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림 14> 고조선(왕검조선)과 은(殷)의 추정지역
또 [그림 12]에서 보는 바와 같이 주(周) 대에 해당하는 춘추전국시 대에 연(燕)의 동쪽에 예맥(穢貊)⋅조선(朝鮮)⋅진번(眞番) 등이 위치 하고 있었는데 바로 옛 은(殷)의 강역과 일치하기 때문이다. 그 반면 에 은(殷) 대에 이미 동북쪽에 ‘숙신(肅愼)’이 존재하고 있었는데, 바로 숙신의 땅을 고조선(왕검조선)의 강역으로 추론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숙신(肅愼)’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전혀 기록되어 있지 않 다. 단순한 지명에 불과한 것인지, 아니면 나라명인지, 부족명인지 명
확하게 알 수는 없다. 또는 사람이름일 수도 있다. 왜냐하면 흠정만 주원류고에 ‘숙신씨’라고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후한서동이열전에서 읍루를 ‘옛 숙신의 나라’라고 설명하 고 있으며, 그 위치는 [그림 14]와 같이 비정할 수 있다. 왜냐하면
요사지리지에 따르면, 읍루가 고구려 요동성(안동도호부)에서 북쪽 으로 270리(당척) 거리에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즉, 읍루 는 거리로 볼 때 요동 지역에 포함될 수 있다.
또 요사지리지에서 요동(遼東)을 ‘옛 조선의 땅’이라고 설명하고 있으므로, ‘숙신의 땅’이 바로 ‘조선’을 의미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숙신의 땅’이 바로 환웅, 또는 단군이 도읍한 곳으로 추론 할 수 있다.
한편, 청(淸) 대의 사서인 흠정만주원류고에 따르면, 숙신씨(肅愼 氏)는 주(周, 기원전 1046년경∼221년) 대 이전의 명칭이었다고 기록 되어 있는데, ‘숙신의 땅’이 마치 현재의 길림성 심양(瀋陽) 인근 지역 인 것처럼 아래와 같이 기록되어 있다.
삼가 생각건대, 흥경(興京)은 주(周) 대 이전에는 숙신씨(肅愼氏)였다. 한 (漢)⋅진(晋) 대에는 읍루였으며, 남북조(南北朝) 대에는 말갈이었고, 당(唐) 대에는 발해 정리부(定理府)였다.
요(遼)⋅금(金) 대에서 원(元) 대까지는 심양(瀋陽) 지역이었다.
상기한 기록에서 보는 바와 같이 읍루가 주(周) 대 이전에는 숙신 씨였으며, 요⋅금 대에서 원 대까지는 심양(瀋陽) 지역이었다고 기록 되어 있다. 즉, 청(淸) 대에 흠정만주원류고를 편찬한 사관(史官)들 은, 읍루가 주(周) 대 이전에는 숙신씨의 땅이었는데, 읍루의 위치가 [그림 15]에서 보는 바와 같이 현재의 요령성 심양(瀋陽) 인근 주변지 역이었던 것으로 인식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신당서지리지에 따르면, ‘당(唐)이 안동도호부를 두었
던 고구려 요동성(요동)이 당(唐)의 서안에서 4,625리, 낙양에서 3,820 리’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요사지리지에 따르면, ‘읍루가 안동도호 부(요동)에서 북쪽으로 270리’라고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앞서 II장에서 논한 바와 같이 상기한 신당서지리지의 거리수치들은 명(明) 대의 사관(史官)들이 삽입시킨 위사(僞史)였음을 알 수 있었다. 즉, 청(淸) 대의 사관(史官)들이 명(明) 대의 사관들에게 깜빡 속아 넘어갔음을 알 수 있다.
<그림 15> 요양, 심양, 하얼빈(아성구) 등
또 흠정만주원류고에 따르면, 길림(吉林)에 관하여 아래와 같이 기록되어 있는데, 마치 현재의 길림성 길림(吉林)시 인근지역이 ‘숙신 의 땅’이었으며 읍루였던 것처럼 기록되어 있다.
삼가 생각건대, 길림(吉林)은 주(周) 대 이전에는 숙신의 땅이었고, 한(漢)
(史官)들은 현재의 길림성 길림(吉林)시 지역을 설명하면서 요(遼)⋅
금(金)⋅원(元) 대에 걸쳐서 혼동강(混同江)이 있었다고 덧붙여 놓았 다. 그러나 청(淸) 대의 사관(史官)들은 혼동강이 현재의 흑룡강인 줄 로 알고 있었으며, 대금(大金)의 상경이 현재의 흑룡강성 하얼빈시 아성구(阿城區) 인근 지역인줄 알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흠정만주원류고에 따르면, 흑룡강(黑龍江)에 관하여 아래와 같이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삼가 생각건대, 흑룡강(黑龍江)은 길림(吉林)에서 동북쪽에 있는데 동서 3,000리요, 남북이 4,000리이다. 북위(北魏, 후위) 대에 흑수부라고 불렀으며 물길(勿吉)에 속했다. 당(唐) 대에 흑수말갈이라고 불렀으며, 흑룡강에 걸쳐 서 남부와 북부로 나뉘어져 있었다.
또 금사에 따르면, 대금(大金)의 상경에 혼동강이 있었는데, 아 래와 같이 혼동강이 흑룡강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금(金)의 선조는 숙신(肅愼)의 땅에서 살았다. 혼돈강(混沌江)⋅장백산(長 白山)이 있고, 혼돈강은 흑룡강(黑龍江)이라고도 하는데 이른바 백산(白山)⋅
흑수(黑水)가 바로 이곳이다.
즉, 청(淸) 대의 사관(史官)들은 현재의 흑룡강성 흑룡강이 혼동강 인 줄 알고 있었는데, 그 이유는 명(明) 대의 사관들이 금사에 혼동 강이 ‘흑룡강’이라고 위사(僞史)를 삽입시켰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청(淸) 대의 사관들이 명(明) 대의 사관들에게 깜빡 속아 넘어갔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후한서군국지에는 ‘요동이 낙양에서 3,600리(한척)’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신당서지리지에는 ‘안동도호부(고구려 요동성)가 서안에서 4,625리, 낙양에서 3,820리’라고 기록되어 있다. 즉, 요동이
[그림 15]에서 보는 바와 같이 후한서에 근거한 요동(현재의 난하
의 기록이 ‘북쪽’이 아니라 ‘서쪽’이었음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즉,
있었던 것으로 추론할 수 있다.
한편, [그림 12]에서 보는 바와 같이 전국시대에 연(燕)의 동쪽에 예맥(穢貊)⋅조선(朝鮮)⋅진번(眞番) 등이 있었으므로, [그림 14]에서 보는 바와 같이 조선(朝鮮) 등의 위치는 연(燕)의 동쪽으로서 옛 은 (殷)의 위치와 일치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즉, 기자를 봉했다는 ‘조 선’은 은(殷)의 강역에 속하는 지역이었던 것으로 추론할 수 있다.
그렇다면 기자를 봉했다는 ‘조선’과 단군왕검이 세운 ‘고조선’이 같 은 ‘조선’이란 국호를 가지고 [그림 14]에서 보는 바와 같이 나란히 존재하고 있었겠는가?
또는 ‘조선’이란 국호를 같이 썼다면, 누가 먼저 썼겠는가?
그런데 삼국유사에 기록되어 있는 ‘고조선(왕검조선)’은 후대(後 代)에 붙인 명칭임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삼국유사가 쓰인 고려 시대에는 굳이 ‘조선’이라는 국호를 구분하기 위해 ‘고(古)’자를 붙여 야 할 이유가 없었으나, 조선 시대에 삼국유사를 뜯어 고치면서 그 당시 국호인 ‘조선’과 구분하기 위해 ‘고조선(왕검조선)’이라고 기록한 것으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명(明) 대에 지명의 위치를 동북 방향으로 변이시키면서 위 만조선과 왕검성의 위치가 현재의 이북에 있는 평양인 것처럼 꾸며 졌으며, ‘숙신의 땅’은 현재의 요녕성 심양시, 길림성 길림시, 흑룡강성 하얼빈시 등의 주변지역인 것처럼 꾸며졌음을 알 수 있다. 즉, ‘숙신’이 란 명칭은 역사에서 사라지고 ‘조선’이란 국호만 남아있는 셈이다.
다시 말해서 ‘고조선(왕검조선)’의 본래 국호가 ‘조선’이었는지 의 심하지 않을 수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