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근현대사 14주차 교안- 군사정권과 민주화운동
한국의 군부는 한국전쟁을 계기로 급속히 성장하였습니다. 휴전 직후 무려 72만 규모로 증강 된 한국군은 이후 감군이 있었으나 60만 명 이상의 비대한 규모를 계속 유지했습니다. 이렇게 비대해진 한국군은 전쟁 이후부터 한국사회에 영향력 있는 집단으로 부상하게 됩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일부 군인들은 1950년대부터 쿠데타를 모의하는 등 정치화되는 양상을 뚜렷하게 보 여주었습니다. 박정희와 김종필을 중심으로 하는 일부 군인들은 장면 정권의 무능과 사회적 혼란을 명분으로 마침내 1961년 5월 16일 쿠테타를 일으킵니다. 제2공화국의 장면 정권은 무 기력하게 무너졌으며 미국은 쿠데타를 인정하고 군사정권을 지원했습니다. 이후 박정희 정권 의 제3공화국이 성립됩니다.
박정희 정권은 1960년대 말에 이르러 안팎으로 총체적 위기상황을 맞이하였습니다. 우선 닉 슨독트린의 발표와 동북아에서의 긴장완화의 진전으로 정권을 지탱해 오던 반공이데올로기가 위협을 받게 되었습니다. 거기에 무분별한 상업차관 도입에 따른 원리금 상환난과 차관기업의 부실화로 자본축적상의 위기가 도래했던 것입니다. 성장위주의 경제개발정책에 의해 누적된 사회모순은 KAL빌딩 폭동사건과 광주대단지사건, 전태일 분신사건 등으로 폭발했습니다. 이 리하여 민심은 박정희 정권에서 점차 이반되어 갔습니다. 이러한 정권위기에서 탈출하고자 박 정희 정권은 특단의 조치를 취하게 됩니다. 이것이 1972년 10월 17일을 기해 단행된 10월 유 신입니다. 이는 군부대를 동원, 헌법기능을 마비시키고 반대파의 정치활동을 전면 봉쇄했다는 점에서 사실상의 쿠데타로 볼 수 있습니다.
유신체제는 긴장완화와 남북관계의 개선이라는 새로운 정세 속에서 사회통제를 강화하여 정권 위기에서 탈출하려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1인 종신집권체제였습니다. 이러한 유신체제는 민주 화를 지향하는 국민들의 저항에 부딪치게 됩니다. 박정희 정권의 폭압성과 반민중성이 그 강 도를 더해감에 따라, 반독재민주화운동 또한 강화되어 갔으며 민중지향성을 띠기 시작했습니 다. 참가층도 학생, 지식인, 언론인, 정치인, 노동자, 농민 등 전 계층으로 확산되었고 경우에 따라서는 야당도 이들과 공동보조를 취했습니다. 이러한 민주화운동과 민중운동의 성장 발전 은 결국 박정희 정권을 붕괴시키는 계기를 마련했던 것입니다.
1. 5․16군사쿠데타와 제3공화국
(1) 5․16군사쿠데타의 발발과 배경 (2) 제3공화국2. 유신체제와 제4공화국
(1) 유신체제의 성립 배경 (2) 유신체제의 내용3. 민주화운동의 성장과 발전
(1) YH사건과 부마항쟁(2) 민주화 운동의 전개와 좌절, 그리고 발전
1. 5․16군사쿠데타의 발발과 배경
(1) 쿠데타의 발발
군부통치의 시작을 알리는 5․ 16군사쿠데타는 1961년 5월 16일 새벽에 발생하였다. 박정희 소장을 지도자로 하는 청년장교들은 약 3,500여 명의 군대를 이끌고 서울을 점령하였다.
이들은 ‘군사혁명위원회’를 조직하여 정권을 장악하였다. 이후 초헌법적 최고통치기구인 ‘국가 재건최고회의’(1961.6)를 설치하여 군정을 실시하였다.
군사정부는 1962년 12월 대통령중심제와 국회단원제를 골자로 하는 새 헌법을 제정하였다.
(2) 쿠데타의 배경
5 ·16 군사쿠데타가 발생하게 된 배경적 원인에 대하여 학자들마다 그 강조점을 달리하지만, 군 자체의 내부적 요인과 군 외부적 요인들이 상호 결합되어 쿠데타가 발생하였다는 점에는 의견이 대체로 일치한다. 그러나 군의 내외적 상황이 쿠데타 발생에 유리했다고 하더라도, 강 대국의 강한 영향력 하에 있는 신생국의 경우, 강대국이 쿠데타에 대해 단호히 반대하면 그것 의 발생 및 성공은 어렵게 된다. 당시 한국정치가 미국의 강력한 영향력 아래에 있었다는 점 에서 쿠데타 발생 및 성공과 관련된 미국의 역할도 검토해야 할 중요한 요인이다.
1) 군의 내적 배경
한국전쟁 이후 쿠데타 당시까지 진행되었던 군부의 양적 팽창과 질적 향상은 군부의 민간정치 개입의 구조적 요인을 제공하였다.
군부의 성장은 양적 팽창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질적 성장을 동반한 것이었다. 미국의 막대한 군사원조 및 교육은 군부의 전술 ·전략 운용수준뿐만 아니라 조직적 운영능력, 경제 및 정치 적 지식, 장기전략의 기획능력 등을 습득케 하였다. 1951년 처음 실시된 한국군 장교의 미국 군사학교 유학 프로그램 이후, 1961년까지 약 6,000명의 한국군 장교들이 미국에서 리더쉽 교육을 받기 위해 파견되었다. 이들은 미국유학을 마친 후, 국내에서 그들이 습득한 내용을 여타 장교들에게 교육하였다. 그 결과 1950년대 군부는 한국사회에서 가장 근대화되고 서구화 된 집단의 하나가 되었다.
이 같은 군부의 양적· 질적 성장은 한국사회 내에서 군부의 지위와 역할을 자연스럽게 향상시 켜, 군의 정치적 진출의 잠재력을 제공하였다. 특히, 남북의 군사적 대결 상황 및 민간사회의 미성숙은 군부의 정치적 잠재력을 더욱 상승시키는 방향으로 작용하였다.
2) 군부 외적 배경
거시적이며 장기적 측면에서 볼 때, 건국 이후 정치· 경제적 파행이 군부 쿠데타의 발생을 유 인하는 배경적 요인으로 작용했다. 이승만 정권의 부패와 군의 정치적 이용은 소장 장교들의 불만을 야기했고, 이는 박정희를 중심으로 한 일단의 소장 장교들의 쿠데타계획의 모의라는 형태로 발전하고 있었다. 그러나 1960년 5월 8일로 예정되었던 쿠데타 계획은 4월혁명의 발 발로 연기되었다. 그들은 장면 정부가 군의 정화와 정치적 안정을 달성해 줄 것을 기대하였으
나, 장면 정부의 내부적 분열 및 정책실행 능력의 결여로 사회 정치적 불안은 증폭되었고 침 체된 경제상황은 나아지지 않았다. 이러한 군부외적 상황은 쿠데타 세력에게 군부 정치개입의 명분을 제공하였다.
미시적이며 단기적인 측면에서 볼 때, 장면 정부의 무능력이 군의 정치개입을 용이하게 하였 다.
(3) 5 ·16과 미국의 관계
5 ·16과 미국의 관계에 대한 대부분의 기존 연구들은 미국이 쿠데타의 발발을 사전에 전혀 모 르고 있었으며, 설사 알고 있었다고 할지라도 군사쿠데타에 대해서는 반대하는 입장이었다는 주장이 지배적이다. 그러나 최근 일부 논자들에 의해 이러한 입장이 비판되면서 최소한 미국 이 사전에 쿠데타를 알고 있었으며, 더 나아가서는 지원 · 조종하였다는 주장이 등장하고 있 다.
① 미국의 쿠데타 반대설
우선, 미국이 쿠데타에 반대했다는 주장을 전개하는 학자들은 다음과 같은 사실에 근거하고 있다. 첫째, 쿠데타 당일 미국 대사관이 기자들에게 배포한 유엔군 사령관 매그루더(Carter B. Magruder)대장과 그린(Marshall Green) 대리대사의 ‘장면 정권 지지, 쿠데타 반대’ 성명 서와 같은 날 오전 11시 유엔군 방송을 통해 발표한 5 ·16쿠데타를 비난하는 성명이다. 둘째, 당시 케네디 행정부는 5 ·16군사쿠데타에 대해 비판적이었다는 점이다. 즉 케네디 행정부가 처음부터 쿠데타를 인정한 것은 아니었고, 민정이양을 통한 민주주의 이행을 전제로 박정희 정권을 인정했다는 식이다.
② 미국의 쿠데타 묵인 또는 지원설
이와는 달리, 5 ·16의 발생에 있어 미국이 일정한 역할을 담당했음을 주장하는 학자들은 전혀 상반된 근거들을 제시한다. 첫째, 미국정보기관들은 5 ·16의 진행상황을 잘 파악하고 있었다 고 주장하는데, 그 근거로 당시 미 중앙정보국 한국 지부장이었던 실바(Peer de Silva)와 주 한미군 사령관 비서실장이었던 하우스만(James Hausmann)의 증언을 들고 있다. 예컨대, 실 바는 한 한국장교를 통해서 쿠데타 계획을 사전에 알고 있었다고 증언하였고, 하우스만은 자 신이 당시 실바에게 지속적으로 한국군부의 동향과 쿠데타의 진행상황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 였다는 것이다. 이러한 증언들이 사실이라면, 미국은 쿠데타에 대한 정보를 갖고도 쿠데타 음모에 대해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둘째, 쿠데타 당일 매그루더 주한미군 사령관과 그린 대사의 쿠데타 반대성명은 워싱턴의 고 위 당국과 사전협의 없이 취해진 조처였음을 강조한다. 그 증거로 1961년 <<타임>>지와 동년 5월 29일의 <<뉴스위크>>지의 기사를 들고 있다. 당시 <<타임>>지는 “위싱턴의 미국무부 관 리들은 서울주재 미 대사관이 쫓겨난 총리를 ··· 지지한 것에 당황해 했다”고 보도하였고,
<<뉴스위크>>는 그들의 “성급한 발언은 미국정부를 당황시켰고 케네디 대통령을 노하게 했 다”고 보도하였다. 이러한 보도를 첫 번째 지적한 사실들과 연관지어 판단하면, 워싱턴 당국 은 쿠데타의 진행상황을 알고 있으면서도 이를 묵인했다는 사실을 쉽게 파악할 수 있다는 것 이다.
③ 미국의 쿠데타 직접 개입설
미국은 쿠데타의 묵인을 넘어서 쿠데타에 직접 개입 ·지휘했다는 주장이다. 이는 당시 CIA국
장이었던 덜레스가 1964년 5월 3일 영국 BBC TV에 출연해서 행한 다음과 같은 언명을 근거 로 제시한다.
“ 내가 재임중에 CIA의 해외활동에서 가장 성공한 것이 바로 이 혁명이었습니다. 미국의 일부 지 도자가 지지하고 있는 장면 내각은 부패하였고 이승만 정권을 타도한 민중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하였 습니다. 위태로운 순간이었습니다. 만일 미국이 무엇인가를 하지 않았더라면, 민중은 공산주의의 선전 에 현혹되어 남북통일을 요구하는 폭도들을 지원하였을지도 모릅니다.”
이러한 증언은 5 ·16 직후 주한 미대사관과 미군사령부가 밝힌 태도와 상반된 것이다. 이에 대해, 일부 학자들은 미국 CIA가 쿠데타를 배후 조종하였고, 쿠데타 직후 미 대사관과 미군 사령부의 행위들은 미국의 개입사실을 은폐하기 위한 고도의 알리바이의 조작이었다고 주장한 다.
2. 제3 공화국(1963.12-1972.10)
1963년 10월 새 헌법에 의한 대통령 선거가 실시되었다. 이때 5․ 16군사쿠데타의 주역이었던 박정희는 민주공화당 후보로 출마하여 윤보선 후보를 근소한 차이로 이기고 대통령에 당선되 었다. 그리하여 1963년 12월 16일 제3공화국이 성립되었다.
박정희 정부는 ‘경제제일주의’와 ‘조국근대화’ 최우선 정책으로 내세웠다. 제3공화국 정부는 이러한 정책적 목표를 달성하기 위하여 ‘경제개발5개년계획’과 ‘한일국교정상화’를 추진하였 다. 한일국교정상화는 경제발전에 필요한 자본확보와 미국의 압력이라는 복합적인 이유로 추 진되었다. 제3공화국 후반부터는 급속도로 경제성장이 이루어졌다. 박정희는 고성장․ 수출드라 이브․ 산업기지건설 등을 통하여 국정에 자신감을 갖게 되었다.
*제3공화국 대통령 임기
제 5대․민주공화당(1963. 12~1967. 6) : 대통령(직선) 박정희 제 6대․민주공화당(1967. 7~1971. 6) : 대통령(직선) 박정희 제 7대․민주공화당(1971. 6~1972. 12): 대통령(직선) 박정희
1972년 10월 대통령 박정희는 헌법 효력의 일부 정지, 국회 해산, 정당활동금지의 담화를 발 효하고 전국에 계엄령을 선포하였다. 정부는 ‘유신헌법’을 제정, 국민투표를 거쳐 확정하였다.
‘유신헌법’을 근거로 박정희는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간접선거를 통해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이로써 유신체제, 제4공화국이 시작되었다.
유신체제가 권위주의적 정치 체제라는 것에는 논란의 여지가 없다. 논란이 될 수 있는 것은 권위주의 체제가 경제 개발의 효율성을 높였는가의 여부인데, 연구 결과에 의하면 정치 체제
와 경제 발전의 성과와는 체계적인 관계가 약한 것으로 밝혀지고 있다. 권위주의 체제 하의 경제개발이 성공적이지 못한 경우도 많고, 역으로 민주주의 체제하의 경제개발이 성공적이지 못한 경우도 많기 때문이다.1)
박정희 대통령은 경제 개발을 국가 경영의 목표로 정하고, 정치는 이를 달성하기 위한 하나의 수단으로 보았다. 이것은 달리 말하면 경제의 논리가 정치에 우선하는 ‘정치의 경제화’라고 할 수 있고, 그의 이러한 경제우선 내지 경제제일주의 사고는 ‘선경제개발 후정치발전’이라는 형 식으로 표출되었다.
* 제4공화국 대통령 임기
제 8대․민주공화당(1972. 12~1978. 12): 대통령(간선) 박정희 제 9대․민주공화당(1978. 12~1979. 10): 대통령(간선) 박정희
1. 유신체제의 성립 배경
1960년대 후반에 들어서면서 박정희 정권은 대내외적으로 일대 위기를 맞이하였다. 닉슨독트 린이 한반도에 적용된 결과 발표된 7․4남북공동성명은 이때까지 정권유지와 정적 탄압의 도구 로 이용되어 왔던 반공이데올로기를 위협했다. 또한 외자의존적인 경제개발은 원리금 상환난 과 기업의 경영부실을 초래했으며, 그 결과 자본축적상의 위기가 도래했다. 그리고 성장제일 주의와 저곡가저임금정책은 농민과 노동자의 생활을 파탄시켰으며, 대도시 외곽에는 이농민들 로 구성된 거대한 빈민촌이 형성되었다. 민심은 박정희 정권으로부터 이반되어 갔다.
1) 경제위기
1960년대의 수출지향적이고 외자의존적인 경제개발정책은 한국경제의 대외의존성을 심화시켰 으며, 국내 산업구조를 기형화시켰다. 또한 상업차관을 마구잡이로 도입한 결과 1960년대 말 에는 원리금 상환난이 초래되었으며, 차관기업의 45%가 부실기업으로 드러나는 등 정부의 재 정․금융 특혜에 의존해 온 기업들은 경영부실 상태에 빠져들었다.
2) 정치위기
박정희 정권은 한국경제의 균형적이고 자립적인 발전이나 농민과 노동자의 생활안정은 제쳐놓 고 외형적인 성장만을 추구했다. 선성장 후분배 논리로 인해 각계각층에서의 사회모순은 심화 되어 갔으며, 그것은 전태일 분신사건, 한진 파월 노동자들의 KAL빌딩 폭동사건, 현대조선소 2만 노동자 투쟁, 광주대단지사건 등으로 격화되어 갔다. 그 결과 1971년 대통령 선거에서 박 정희는 온갖 부정선거행위를 자행했음에도 불구하고 김대중후보를 겨우 100만 표 차이로 누 르고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신민당이 65명의 지역구 국회의원을 당선시 켜 개혁저지선을 확보했으며, 여당은 47.8%의 득표율밖에 얻지 못했다.
1) 김광동 외 공저, 『한국현대사이해』, 경덕출판사, 268쪽 참조.
2. 유신체제의 내용 1) 유신체제의 성립
1960년대 말 정권의 총체적 위기가 도래하고 민주화운동이 치열하게 전개되자, 박정희 정권은 1971년 10월 15일 서울시 일원에 위수령을 발동했으며, 10월 19일에는 ‘학원질서 확립에 관 한 대통령의 특별명령’을 공포했다. 뒤이어 1971년 12월 6일 비상사태 선포, 12월 27일 ‘국가 보위에 관한 특별조치법’을 공포했다. 1972년 7월 4일 그동안의 대북한정책과는 다른 남북공 동성명을 발표하여 국민의 관심을 집중시킨 뒤, 10월 17일 대통령 특별선언을 통해 계엄포고 제1호를 선포하여 국회를 해산하고 정당 및 정치활동을 금지하는 한편 대학을 폐쇄하였다. 그 후 국민투표를 통해 유신헌법을 확정시켰다. 이로써 1인 종신집권을 가능케 하는 유신체제가 성립되었다. (제4공화국)
2) 권력구조
유신체제의 대표적인 기구는 통일주체국민회의와 유신정우회였다. 유신헌법은, 통일주체국민회 의의 대의원들에 의한 간접선거를 통해서 대통령을 선출하도록 하고, 중임(重任)에 관한 조항 을 폐지함에 따라 종신집권의 길을 열어 놓았다. 행정부 수반으로서 대통령은 국군통수권과 국회해산권을 가지는 이외에 법관과 국회의원 1/3에 대한 임명권을 장악하였다. 국회의 국정 감사권까지 폐지한 유신체제는 삼권분립을 철저히 무시하고 대통령의 권한을 비약적으로 확대 시킨, 민주주의의 제원칙을 무시한 독재체제였다.
박정희 정권은 유신체제를 ‘한국적 민주주의’로 합리화하고 정당화했다. 그들이 이야기하는
‘한국적 민주주의’란 한민족의 역사전통 위에 뿌리박고 현실여건에 부합되는 한국적 민주정치 체제라는 것으로서, 서구식 대의제민주정치를 그대로 모방해서는 안보문제와 경제발전의 추진 을 동시에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한국적 민주주의란 결국 민주주의의 허울을 쓴 독재정치이념으로 국민들의 기본적인 권리조차 제약하는 것이었다.
3) 유신체제와 경제
유신체제는 시기적으로 중화학공업 선언(1973년 1월)과 거의 때를 같이하고 있었다. 중화학공 업은 대규모, 장기간 투자를 요구하는 사업으로 사업 추진의 지속성 및 연속성이 보장되어야 성공할 수 있다. 장기적 정치 안정을 가능하게 한 유신체제는 그런 면에서 본다면 중화학공업 전략을 성공으로 이끈 요건 중 하나로 역할을 했다고 볼 수도 있다.2) 유신체제의 독재적 요소 가 초래한 해악으로 인해 유신체제가 이룩한 경제적 성과는 상당 부분 폄하된 측면도 있다.
한국 경제는 1962~1979년에 눈부신 성과를 이룩하였다. 경제성장률은 연평균 9%를 기록하였 다. 1인당 GNP는 1962년 87달러에서 1979년 1,647달러로 약 19배 증가하였다. 수출은 연 평균 39%씩 증가하여 1962년 5,500만 달러에서 1979년 약 150억 달러로 그 규모가 275배 커졌다.
2) 김광동 외 공저, 『한국현대사이해』, 경덕출판사, 270쪽 참조.
1970년대 민주화운동은 학생운동을 중심으로 한 언론계, 종교계 등 각 부문운동간의 연계가 강화되면서 조직화되어 갔다. 전태일 분신사건의 영향으로 민중지향성을 띠기 시작한 민주화 운동은 민중들의 투쟁을 지원하고 그들의 투쟁을 조직화하고자 노력하였다.
1979년 5월 선명야당을 내세운 김영삼이 총재로 당선되자, 정국은 초긴장 상태로 접어들었다.
신민당의 강력한 헌법 개정 요구를 시작으로, 8월의 YH 여공들의 신민당사 농성, 10월초 김 영삼 총재에 대한 제명, 그리고 10월 중순의 ‘부마사태’ 등 일련의 사건으로 이어졌다.
1. YH사건과 부마항쟁
이른바 'YH사건‘은 제조업체인 YH무역이 경영난을 이유로 폐업을 단행한 데 항의하는 여공 200여명이 1979년 8월 9일 오전 신민당사에 몰려와 농성을 하면서 시작되었다. 정부는 11일 새벽 경찰력을 투입하여 여공들을 강제해산하였다. 이는 즉각 정치문제로 비화되었다.
1970년대는 군부쿠데타로 집권한 박정희 정권이 장기집권을 위해 유신헌법을 제정, 정치적으 로는 민주적 절차와 과정이 무시되는 억압적이고 초헌법적인 권력이 행사되는 가운데, 경제적 으로는 외자를 동원하여 저임금과 강도 높은 노동통제를 통해 대기업 중심의 급격한 산업화를 추진한 시기였다. 따라서 다수 국민의 불만과 저항은 증대할 수밖에 없었다.
YH사건은 바로 이러한 조건을 배경으로 발생한 것이다. 이는 유신체제의 자본편중적이고 노 동억압적인 성격으로부터 기인한 것이었으며, 유신체제의 반민주적 성격과 위기에 취약한 정 치구조적 성격을 드러냄과 동시에, 본격적인 반유신세력의 결집을 매개하는 계기로 기능하였 다. 이러한 배경에서 YH사건은 유신체제에 대한 국민적 저항을 이끌어 내고 확산시키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하였다.
부마항쟁이란 유신정권이 김영삼 신민당 총재를 제명시킨 직후 부산과 마산 일대에서 일어난 결렬한 항의시위를 말한다. 10월 16일과 17일 학생 및 시민들이 항의시위를 벌였고, 이는 마 산으로까지 번져갔다. 이에 정부는 10월 18일 부산직할시 일원에 비상계엄을 선포하고 공수단 병력을 투입하여 시위군중을 해산시켰다. 이어 마산과 창원으로 시위가 확산되자 이 지역에도 위수령을 선포하였다.
이러한 부마항쟁은
① 박정희 정권을 국제사회에서 고립시켰다.→ 세계 각국의 신문․ 방송․ 통신들은 한국학생들 과 시민들의 투쟁을 크게 보도하였다.
② 민주화와 통일을 염원하는 민중의 정치적 투쟁이었다. 이는 유신체제에 대한 시민들의 불 신과 분노가 절정에 달하였음을 의미한다.
③ 유신체제를 뿌리째 뒤흔들어 박정희의 암살로 이어졌다. 부마항쟁으로 인해 견고해 보이던 체제 내부에 심각한 분열현상을 보이기 시작하였다. 부마항쟁에 직면하여 권력 내부에 정책상 의 강․ 온 대립이 촉발되고, 이것이 권력투쟁으로 진전되었으며, 마침내 박정희 피살과 체제의 와해로 이어졌던 것이다. [김재규와 차지철의 갈등과 10․ 26]
2. 민주화 운동의 전개와 좌절, 그리고 발전
10․ 26에서 12․ 12까지는 유신체제의 재편을 둘러싼 지배블럭 내의 강․ 온파들간의 헤게모니
투쟁의 기간이었다. 이것은 12․ 12사태를 거치며 지배블럭은 독점자본의 이해를 더욱 충실히 대변하는 강경파의 신군부가 장악하게 되었다.
[* 12․ 12사태는 전두환 소장을 중심으로하는 군부내 강경파가 1979년 12월 12일 불법적으로 병력을 동원하여 계엄사령관인 정승화 장군을 체포하고 계엄하의 군권을 장악한 사건을 말한 다.]
신군부의 등장에 대하여 국민들은 생존권과 민주화를 요구하였다. 이에 신군부세력은 5․ 17 계엄령선포로 표현되는 사실상의 쿠데타를 감행하면서 통치권을 장악하였다. 즉 12․ 12로 시 작된 쿠데타가 5․ 17로 종결되는 것으로 신군부집권계획의 1단계가 완성되었다.
신군부는 1980년 5월 17일 전국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일체의 정치활동을 금지시켰다. 이어 신군부는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를 설치하고, 전두환이 위원장이 되었다(5.31).
1980년 5월 18일 광주에서 대규모 학생시위가 발생하였다 (5․18민주화운동). 결국 광주는 5월 27일 수백 명의 사망자를 내고 계엄군에 의하여 무력 진압되었다.
1980년 ‘서울의 봄’으로 표현되는 민주화운동은 민주화의 발전을 가져오는 주요한 계기였음에 도 불구하고 결국 좌절되고 5공화국이라는 권위주의체제의 탄생을 가져왔으므로 우리에게 아 픈 역사적 사실로 남는다. 하지만 ‘서울의 봄’이 7년 후, 1987년의 6․ 10항쟁으로 이어지는 역사적인 맥을 형성한다는 점에 비추어 볼 때 그 의의는 자못 크다.
* 민주화 일시적 좌절의 원인
① 민주화 운동을 좌절시킨 책임은 전적으로 실질적 물리력을 독점한 신군부의 신지배체제 구 축계획에 있다.
② 민주화 운동세력의 취약성. 당시 노동자운동, 농민운동 등 기층운동은 분단상황에 연유한 특수성, 국가의 억압적인 국가조합주의적인 통제 등으로 인하여 미발달한 상태였다.
중산층은 원칙적으로는 민주화를 바라면서도 민주화투쟁에는 참여하지 않는 방관적 태도를 보 이거나 경제회복을 위한 정치적 안정화를 암묵적으로 지지하는 분위기였다.
③ ‘저항의 구심점’이 부재하였다[박정희라는 ‘독재자의 몰락과 부재’].→ 신민당과 재야의 민 주세력의 지도부는 분열하였다.
이번 시간에는 1961년 5월 16일 군사쿠데타 이후 등장한 군사정권과 독재정권의 영구집권기 도로 성립된 유신체제에 대하여 알아보았습니다. 또한 이에 맞선 민주화운동과 민중운동의 성 장과 발전에 대해서도 살펴보았습니다.
5․16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박정희는 과거 중앙정보부 창설(1961.6.10) 주체들을 중심으로 민 주공화당을 조직하고, 곧이어 대통령후보에 올라 1963년 12월 17일 취임함으로써 마침내 강 력한 군사독재의 서곡을 알리는 제3공화국을 출범시켰습니다.
박정희 정권은 ‘반공’을 국시로 내걸어 정권을 안정화시키고 당면과제였던 대다수 국민의 절 대적 빈곤을 해결하기 위해 ‘선건설 후통일’, ‘자립경제’ 등의 구호하에 경제개발을 추진하였 습니다. 그러나 도입된 외국자본을 중심으로 한 수출주도형 공업화정책은 수출의 급증으로 경 제성장률 수치는 높였으나, 그 이상으로 수입이 늘어나 무역적자폭은 더욱 커지고 외채의 악 순환은 반복되어 60년대말부터는 경제전반에 위협을 가해왔습니다. 70년대에 들어서서 국제정
세는 급변하여 긴장완화의 분위기가 조성되었습니다. 정치적 위기에 몰린 박정희 정권은 영구 집권을 획책하여 1972년 10월 17일 10월 유신을 선포하고 본격적인 유신체제에 돌입하게 됩 니다.
그러나 이러한 독재정권에 맞선 국민들의 민주화운동은 유신체제 붕괴에 일격을 가하기시작하 여 유신체제에 대한 민중의 분노와 저항이 최고조에 달했던 부마민중항쟁이 일어남으로써 결 국 박정희 군사독재정권은 붕괴되기에 이르렀습니다. 이후 한국 사회는 민주화의 긴 여정에 들어서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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