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용규*82)
Ⅰ. 머리말
Ⅱ. 조선어학회 인사의 정치 활동 1. 통일 민족국가 건설 운동에 참여 2. 민주주의 국가 건설에 기여
Ⅲ. 조선어학회 인사의 정치 지형 1. 좌우합작 노선의 인사 2. 합리적 보수 인사 3. 극우 인사
Ⅳ. 맺음말
【국문요약】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탄압을 받은 조선어학회의 항일투사들은 해 방 이후 새나라 건설 작업에 참여하였다. 항일 투사들은 통일 민족국 가 건설 운동에 참여하였고, 민주주의 국가 건설에 기여하였다.
조선어학회의 일부 항일투사들은 해방 이후 분단 정권의 수립을 거부하고 통일 민족국가를 건설하고자 좌우합작운동과 남북협상운
* 고려대 한국사연구소 연구교수
동을 전개하기도 하였다.
한편,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이후, 대다수의 조선어학회 인사들 은 민족주의자로서의 입장을 유지하며 민주주의 국가 건설에 기여하 는 합리적 보수주의자로서 활동하였다. 이렇게 해방 이후 조선어학 회의 정치 지형은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일제로부터 탄압을 받은 33 명 가운데 4명을 제외하면, 좌우합작 노선의 인사(6명), 합리적 보수 인사(22명), 극우 인사(1명)로 나뉘어져 있었던 것으로 파악되었다.
조선어학회 인사의 대다수는 자본주의와 자유민주주의와 평화통 일을 추구하는 합리적 보수주의자였다. 이들은 대한민국을 민주주의 국가로 만드는데 기여하였다.
주제어 : 조선어학회, 항일투사, 합리적 보수주의자, 극우 인사
Ⅰ. 머리말
올해는 광복 70주년, 분단 70주년이 되는 해이다. 분단 때문에 독 립유공 포상이 이루어지지 못한 채 북한에서 생애를 마친 3명(이극 로, 이만규, 정열모)을 제외하더라도, 현재까지 조선어학회 선열 33인 가운데 24명이 독립유공자로 포상되었다. 이를 보더라도 조선어학회 인사들의 항일 투쟁은 혁혁하였다.
조선어학회는 한글 맞춤법 통일안(조선어 철자법 통일안)(1933),
사정한 조선어 표준말 모음(1936), 외래어표기법 통일안(1941)을 완성하여, 일제의 지배에서 벗어나면 곧바로 국어 규범으로 쓸 수 있 게 하였다. 더불어 1942년에 16만에 달하는 우리말 어휘의 뜻풀이가 담긴 조선어대사전을 기어코 출판하여 민족어를 영구히 유지하고 자 하였다. 이런 활동은 언어독립운동 즉 항일 투쟁이었다.
이를 간파한 일제는 1942년 10월 1일 ‘조선어학회 사건’을 일으켜, 조선어학회의 회원 33명을 검거하여 탄압하였다. 일제 형사로부터 이윤재와 한징은 물고문과 날마다 난타를 당하여 옥사하였다. 일제 경찰이 장현식의 혀에 대못을 박는 만행을 자행하여, 장현식은 평생 말을 더듬어야 했다. 일제 경찰은 함흥경찰서와 홍원경찰서에서 26 세 청년 권승욱을 상대로 하여 허파에 물이 들어가게 하는 물 먹이기 (일명 해전)와 비행기 태우기(일명 공중전) 등의 고문을 자행하였다.
이극로, 최현배, 이희승, 정인승은 함흥형무소에서 복역하다가 1945년 8월 15일 일제 패망의 결과 8월 17일에 석방되었다.
감옥살이에서 풀려난 조선어학회의 항일투사들은 해방 이후 새나 라 건설 작업에 참여하였다. 국어 교육의 확립과 통일 민족국가 건설 운동에 뛰어들었다. 본고는 먼저 조선어학회 인사들이 무슨 정치 활 동을 하였는지를 고찰하고자 한다. 이어서 이들이 어떠한 입장을 가 지고 정치 현실에 참여하였는지를 검토하고자 한다. 이러한 검토를 통해 우리는 이들의 정치 지형을 파악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
Ⅱ. 조선어학회 인사의 정치 활동 1. 통일 민족국가 건설 운동에 참여
70년 전 우리민족은 일제와 싸워 광복을 맞이하였으나, 자력으로만 광복을 쟁취하지 못해 분단되었다. 독립운동에 참여한 애국지사들은 분단국가를 수립하자고 목숨을 바치지 않았다. 민족통일이 되었을 때, 독립운동이 완수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일제의 패망으로 우리 민족은 해방되었다. 해방을 맞이하였으나, 미⋅소의 분할 점령상태에 있었다. 정치권은 좌우익 세력이 존재하
였다. 통일 민족국가를 수립하려면 미⋅소의 협조 하에 좌우익세력 이 합작해야 가능하였다. 통일 민족국가를 수립하고자 정치권에서는 좌우합작운동과 남북협상운동을 전개하였다. 조선어학회 인사들도 이 운동에 참여하였다.
완전한 독립국가를 건설하고자 좌우익이 참여하여 1945년 8월에 조선건국준비위원회를 조직하였다. 여운형이 조선건국준비위원회를 이끌어갔는데, 여기에 조선어학회 인사인 안재홍과 이만규가 참여하 였다. 1946년 1월 이극로는 정열모, 이우식, 배성룡과 함께 좌우정당 의 합작을 위해 통일정권 촉성회를 조직하였다.1)
1946년 6월 3일 이승만이 정읍에서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을 발 표하여 분단으로 가는 첫 번째 발언을 남기자, 이에 대해 6월 8일 이 극로는 이준 열사의 아들 이용과 함께 이를 반대하는 최초의 담화를 발표하였다.2) 이 무렵 이극로는 이승만에게 편지를 보내 ‘좌우가 싸 우지 말고 단결하여 건국하자’는 장문의 논문을 보내 좌우단결을 통 한 민족국가의 수립을 촉구하였으나, 거절되었다.3)
1946년 6월 16일 이극로는 윤세복, 권동진과 함께 좌우합작과 남 북합작을 위해 조선건민회(위원장 이극로)를 결성하였다.4)
1946년 7월 미군정의 주도로 좌우합작운동을 추진하자, 이극로는 이 합작운동에도 대찬성을 하였다. 그는 조속히 미소공동위원회를 속개하여 남북을 통일하는 임시정부를 수립하자는 주장을 강력히 피 력하게 된다. 미소공위 속개에 대해 조선건민회에서는 현단계 좌우 합작운동을 남북합작운동으로 전향적으로 지향할 것을 주장하였다.5)
1) 「통일정권촉성회, 좌우정당의 즉시합작을 희구하는 성명발표」, 조선일보, 1946, 2, 4.
2) 서울신문, 1946, 6, 8. ; 자료 대한민국사2, 1969, 724∼725쪽.
3) 최기일, 자존심을 지킨 한 조선인의 회상, 2002, 생각의 나무, 387쪽.
4) 대중일보, 1946, 6, 18. ; 이극로, 고투사십년, 89∼90쪽. ; 이극로, 「조선 건민회의 이념」, 웅변학과 연설식사지침(안석제 저), 연학사, 1949, 120쪽.
이러한 주장은 좌우합작운동이 남북협상의 모체가 된 점에서 그 역 사적 의의를 갖는다.
여운형과 김규식이 1946년에서 1947년까지 좌우합작운동을 이끌 어갔다. 이들은 좌우합작 위원회를 조직하였다. 여기에 이극로와 안 재홍이 위원으로 참여하여 활동하였다.6) 조선어학회에서도 이사회를 열어 미소공동위원회에 참가하기로 가결하고 김병제를 대표로 선정 하였다.7)
1947년에 들어가면서 미국에 간 이승만이 그곳에서 남한 단독정부 수립을 강력히 주장하고, 미국 국무성도 단독정부 수립계획을 시사 한 후 제2차 미소공동위원회가 사실상 결렬(7.10)되었다. 더욱이 좌우 합작위원회의 좌측 주석이던 여운형이 암살되었다(7. 19). 이후 미국 은 모스크바 3상회의 결정을 버리고 한반도 문제를 그 지지 세력이 절대 유리한 유엔으로 가져감으로써 단독정부 수립안을 확정시켰다.
이러한 국내외 정세의 변화로 좌우합작운동이 난관에 부딪치자 이 극로는 9월 김병로⋅안재홍⋅김호⋅홍명희 등과 민족국가로의 독립 을 염원하는 공동성명을 발표하였는데, 사대편향을 배제하고 극좌경 향과 극우보수를 아울러 방지하고 만민이 공생할 수 있는 신민주노 선으로 완전한 자주독립을 지향하는 통일신당을 결성하고자 하였다.
결국 정치적⋅경제적 완전 자주를 확보하고 민족독립을 목표로 이들 은 다음달 10월에 민주독립당을 결성하게 된다.8)
한반도 문제가 유엔으로 넘어감으로써 남한만의 단독정부 성립 가 능성이 높아지자, 단독정부 수립반대운동이 일어났다. 좌우합작을 주 도하던 김규식은 여운형 암살이후 중도파 세력을 규합하여 좌우익
5) 1946년 11월 23일 조선건민회 성명서에서 나온 것이다.
6) 「좌우합작위원회, 위원 확충」, 조선일보, 1947, 6, 19.; 조선연감, 1948, 439쪽.
7) 「조선어학회 미소공위참가」, 동아일보, 1947, 6, 25.
8) 한성일보, 1947, 10, 21.
편향을 배제한 채 민족의 자주노선을 표방하는 ‘민족자주연맹’(의장 김규식)을 결성(12.20)하여 활동하였다. 이극로도 여기에 적극 참여하 여 민족자주연맹 준비위원회 선전국장과 민족자주연맹 집행부 부의 장을 맡기도 하였다.9) 이들은 남조선 단독정부설을 비판하며 남북을 통한 총선거로 통일정부 수립을 주장하였다.
1948년에 들어가 유엔은 그 소총회에서 단독선거⋅단독정부수립안 을 결정(2.26)하였다. 여기에 대하여 김구⋅김규식을 중심으로 한 우 익 및 중간파세력도 단독정부 수립 반대운동을 벌렸다. 3월 10일 조 선건민회 위원장 이극로는 유엔 소총회의 결정을 반대하는 담화를 발표하였다. 그는 “UN소총회는 조선민족의 요구를 무시하고 ‘가능한 지역내에 총선거로 중앙정부수립’안을 결정하였으나, 우리는 이 결정 에서 오는 단선 단정은 반대 배격하며 다만 앞으로 양군철퇴와 남북 통일 완전자주독립전취를 위해서 투쟁할 것이다”라는 성명서를 발표 하였다.
아울러 이극로는 남북한 모두가 참여하는 국민투표가 이루어져 통 일 국가가 건설되어야 한다는 주장을 하고 있다. 우리는 다음의 글에 서 알 수 있다.
우리나라에도 빨리 삼팔선이 없어지고 남북을 통한 통일국가가 건설되 어 정당투표가 실시되는 선거 시기 그 때라야 국정이 바로 잡힐 것이다. 이 시기를 촉진시키려면 문자 계몽과 정치 계몽을 동시에 병행하여 현대 국가 의 국민이 된 도(道)를 다하여야 된다. 그렇지 아니하면 행복이 있을 수 없 으니 뜻있는 선비는 두 주먹을 쥐고 부르짖으며 피땀을 흘리면서 일할 때 가 왔다.10)
9) 서울신문, 1947, 12, 23. ; 대한민국사5권, 국사편찬위원회, 1972, 766쪽, 876쪽.
10) 이극로, 「조선민족성과 민주정치」, 개벽2⋅3월 합병호, 1948, 3, 15쪽.
이승만과 한민당계가 본격적으로 남한 단독정부 수립 노선으로 가 게 되자, 이들과 결별한 김구가 김규식과 노선을 같이 하면서 북쪽의 지도자에게 남북협상을 제의하였다.11) 남북의 통일정부 수립을 위해 남북 협상 운동을 전개하였던 것이다. 급기야 1948년 4월 평양에서 남북협상이 열렸다.
남북협상을 지지하는 문화인 108인의 성명이 같은 해 4월 14일에 나왔다. 여기에 조선어학회 인사인 이극로, 이병기, 정인승, 유열, 정 열모, 김병제가 서명하였다.12) 통일국가를 수립하는 운동에 정치인뿐 만 아니라 문화인이 전면적으로 참여하였다는 점에서 역사적 의미가 크다고 하겠다.
건민회 대표와 민족자주연맹 대표로 이극로는 1948년 4월 16일에 서울에서 출발하였다. 이후 평양에 도착하였고, 남북협상에 참여하였 다. 그 뒤 북한에 잔류하였다.13) 여운형과 같은 정치노선을 걷던 근 로인민당 대표로 이만규도 남북협상에 참여하였다.14)
2. 민주주의 국가 건설에 기여
조선어학회 인사들은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이후, 민주주의 국 가를 확립하는데 앞장섰다. 특히 이인⋅김양수⋅윤병호⋅서민호⋅김 윤경⋅김도연이 기여하였다.
이승만 정권은 친일파를 청산하고 민주주의 국가를 정착시킬 역사 적 과제가 부과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승만은 친일파를 등용하여 민 족정기를 훼손하고 장기집권을 위해 독재정치를 자행하였다. 민족정
11) 박용규, 북으로 간 한글운동가 이극로 평전, 차송, 2005, 208쪽∼210쪽.
12) 「문화인 108인의 남북협상 지지성명」, 조선중앙일보, 1948, 4, 29.
13) 조선일보, 1948, 4, 25. ; 조선일보, 1948, 4, 27. ; 한글, 조선어학회, 1948, 6, 73쪽.
14) 「각대표의 북조선 시찰담-근민당 이만규씨」, 조선중앙일보, 1948, 4, 30.
기의 확립은 독립유공자를 포상하고 민족반역자를 징치하는데서 이 루어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승만 정권은 12년 동안 내내 민족반역자를 중용하고 수많은 대한민국 건국 공로자들을 포상하지 않았다. 항일 투사로부터 울분과 비난의 표적이 되었다.15) 이런 점은 고려와 조선 왕조에서 건국 초에 행한 개국공신 책봉과 비교해 볼 때, 이승만 정 권의 반역사성과 파렴치함을 극명하게 드러내었다.
조선어학회 인사들은 이승만의 독재정치에 항거하였다. 이인은 대 한민국 정부 수립 뒤 제헌국회의원, 초대 법무부장관, 반민족 행위 특별 조사 위원회 위원장, 법전 편찬 위원회 위원장, 국회의원, 헌법 위원 등을 역임하였다. 초대 정부 조각 구성 때 그는 가인 김병로를 대법원장으로 추천하여 관철시키기도 하였다.
이승만 정권이 3⋅15 부정선거를 자행하자, 학생들이 4⋅19 혁명 을 주도하였다. 이인은 1960년 4⋅19혁명 때에 시위학생들을 1천여 명이나 집에 숨겨주고, 총에 맞아 부상당한 40여 명에게 응급 치료를 해주어 ‘학생의 부모’라는 존칭까지 받았다.16) 같은 해 그는 4월 20일 김병로, 서상일 등 13인과 이승만 정부의 책임을 추궁하는 결의문을 발표하였고, 뒤이어 68명과 같이 이승만의 하야와 체포학생의 석방 을 촉구하는 경고문을 냈다. 그는 서상일과 대표로 이 경고문을 내각 에 전달하였다. 이처럼 그는 이승만 정권의 퇴진을 요구하였다.
김양수는 해방 후 전라남도 순천 건준위원장으로 활동하였다.
1948년 한국민주당 상무위원에 선임되었다. 1950년 5월 전라남도 순 천에서 출마하여 2대 국회의원 선거에 민주국민당 출신으로 당선하 였다.
15) 김승학 편저, 「자서」, 한국독립사, 독립문화사, 1965. 이승만 정부에서 독 립유공자는 이승만 자신과 부통령 이시영 단 2명만 서훈되었다고 한다.(이 덕일, 한국사, 그들이 숨긴 진실, 역사의 아침, 2009, 338쪽.)
16) 이인, 애산여적1, 세문사, 1961, 30쪽.
그는 이승만 정권이 추진한 신국가보안법의 제정에 반대하였다.
이승만 정권은 기존의 국가보안법을 개정하여 1958년 11월 18일 신 국가보안법안을 국회에 제출하여, 야당을 탄압하고 장기집권을 획책 하였다. 김양수는 「호소문운동의 제창 보안법안반대 국민운동으로」
이라는 글을 게재하여 신국가보안법의 제정에 반대하였다.17) 야당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이승만 정권은 1958년 12월 24일 자유 당 의원들만 참여하여 신국가보안법을 통과시켰다.
윤병호도 이승만의 독재 정치를 비판한 민족주의자로서 일생을 보 냈다. 그는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지킨 김구를 존경하였다. 그도 이승 만 대통령으로부터 농림장관 직책을 제의받았으나, 거절하였다. 3대 국회의원 선거에 무소속으로 고향에서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이승만 정권의 3선 개헌 반대 투쟁에 나섰고, ‘호헌 동지회’ 대표 간사로 활 약하였다.18)
조선어학회 인사 가운데 서민호는 목숨을 내걸고 이승만 독재에 항거하였다. 해방 뒤 1945년 전남 벌교의 건국준비위원회 위원장으 로 활동하면서, 좌익 계열을 탄압하였다. 1946년 광주시장에 취임하 였다. 1947년에서 1948년까지 전라남도지사를 역임하였다.
1950년 5월 고흥에서 출마하여 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당선되었 다. 6⋅25전쟁 중에도 이승만 정권의 실정은 계속되었다. 서민호는 국민방위군 사건과 거창 양민학살사건의 진상을 폭로하여, 이승만 정권으로부터 정치보복을 당하였다.
두 사건의 진상을 폭로한 뒤, 그는 “너무 날뛰면 목숨을 부지하기 어려울 것이다.”, “복수를 할 것이니 그리 알아라.”는 등 협박 전화가 한밤중에 걸려왔다.19) 이상과 같은 행위로 인해 서민호는 이승만 정
17) 김양수, 「호소문운동의 제창 보안법안반대 국민운동으로」, 동아일보, 1958, 12, 3.
18) 윤희표, 「창남 윤병호 선생」, 조선어학회 수난 50돌 기념글모이, 한글학회, 1993.
권에서는 ‘눈에 가시 같은 존재’가 되었다.
한편 국회 간선제로는 당선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한 이승만 정권은 국민 직선제로 대통령을 선출하는 헌법 개정안을 국회에 제출하였 다. 1952년 1월 18일 국회는 반대 143표, 찬성 19표로 압도적인 표차 로 부결시켰다.
그러자 이승만은 국회의원을 압박하는 공개 성명을 발표하였다.
관제데모도 일으켰다.
대통령의 독재를 막고자 국회는 1952년 4월 17일 의원 123명의 서 명을 받아 내각책임제 개헌안을 제출하였다. 서민호도 서명하였다. 이 후 그는 반대측으로부터 “너 정부 개헌안을 끝까지 반대하면 이번에 는 그만두지 않겠다.”라는 협박전화와 협박장을 쉴 새 없이 받았다.20) 이처럼 국회와 행정부는 정면 대결로 치닫고 있었다. 특히 대통령 이승만과 서민호는 정치적으로 대척점에 서 있었다. ‘서민호의 서창 선 사살 사건’을 계기로 이승만 정권은 야당 국회의원 탄압과 이승만 재선의 호기로 판단하였다.
이 사건을 살펴보자. 1952년 4월 24일에 일어난 ‘국회의원 서민호 의 서창선 대위 사살 사건’은 서민호(당시 국회 내무분과위원장)가 지방선거 시찰 도중 순천에서 일어났다. 육군대위 서창선이 먼저 서 민호에게 권총을 발사하였고, 이에 피신한 서민호를 발견한 서창선 이 다시 발사하려고 하였기에, 서민호가 자신의 생명을 보호하기 위 한 자구수단으로 소지한 권총을 뽑아 그를 사살한 사건이었다. 이는 서민호의 명백한 정당방위로, 무죄에 해당한 사안이었다.
사건 다음날 4월 25일 서민호는 순천지검에 자진 출두하였다. 신 익희 국회의장의 지시를 받아 유홍 의원이 4월 26일 순천 현지에 내 려가 현장에 있었던 9명의 증인들에게 증언을 들었다. 모두 사건 당 19) 서민호, 월파 서민호 회고록, 98쪽.
20) 서민호, 월파 서민호 회고록, 98쪽.
시 서대위가 먼저 총을 쏘아 서의원도 정당방위로 응사하였다는 진 술을 확보하였다.21)
그러나 사건을 맡은 권오병 검사는 노덕술, 최난수 등과 함께 증인 들을 혹독하게 다루며 서민호에게 불리한 증언을 강요하였다. 검찰 은 다른 증인들의 증언은 채택하지 않고, 여관종업원 최정용의 증언 (“서의원이 대문으로 걸어 나가는 서대위를 뒤에서 쏘았다.”)만 채택 하였다.22) 다른 증인들은 사건 당시 현장에서 최정용을 본 사람이 없 다고 진술했지만, 검찰은 묵살하였다. 5월 10일 부산지검은 서민호를 살인죄로 기소하였다. 부산형무소에 수감되었다.
국회는 조사위의 보고서를 토대로 서민호의 행위를 정당방위로 판 단하여 5월 14일 석방 결의안을 상정하여 통과시켰다. 이어서 국회는 법원에 그의 석방을 요구하였다.
부산지법 재판장 안윤출 판사는 5월 19일 국회 회기 중에 국회의 원은 불체포 특권이 있다고 판단하여 서민호의 석방을 결정하였다.
당일 석방되었다.
서민호 석방에 대한 보고를 받은 이승만은 “사람을 죽인 놈을 어 떻게 석방하느냐”고 대노하여 내무, 법무장관과 검찰총장 한격만을 불러 서민호의 재수감과 안윤출 판사의 체포를 지시하였다.23) 삼권 분립을 전혀 지킬 의사가 없는 이승만의 모습을 엿볼 수 있다. 이러 한 대통령의 발언을 보면, 이승만은 어떻게 해서든 서민호를 제거할 의도를 가지고 이 사건에 개입하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민사재판으로 진행되면, 서민호가 풀려날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한 대통령 이승만은 자신의 재선 당선에 걸림돌이 되고 있는 야당과 특 히 정적인 서민호를 탄압하고자 계엄령을 선포하기에 이르렀다.
이승만 정권은 계엄령을 5월 25일 자정을 기해 영남지방에 선포하 21) 비화 임시수도 천일상권, 부산일보사, 1985, 314∼315쪽.
22) 비화 임시수도 천일상권, 316쪽.
23) 「내가 겪은 이십세기 동암 한격만씨」, 동아일보, 1973, 4, 5.
였다. 5월 26일 새벽에 헌병들은 서민호의 집에 몰려가 그를 강제 구 인하여 마산헌병대로 끌고 갔다. 같은 날 야당 국회의원을 체포하기 시작하였다.
5월 26일 경무대를 찾은 신익희 국회의장에게 대통령 이승만은
“해공, 그래 어떡하자는 게요. 살인범을 석방하는 일이나 하는 것이 국회란 말이요. 살인자는 사(死)야!”라고 말하며 흥분을 가누지 못하 였다.24)
1952년 5월 26일 계엄령 선포 일부터 7월 4일 발췌 개헌안의 통과 까지 이승만 정권이 벌린 독재 정치 행위를 ‘부산 정치파동’이라고 부른다. 정치파동 기간에 서민호는 군사재판에 회부되어 사형 판결 을 언도받았다.
같은 해 6월 1일 최경록 준장이 재판장이 되어 비상계엄 고등군법 회의를 열어 서민호 사건에 대한 심리를 진행하였다. 6월 7일 최경록 재판장(준장) 주재로 첫 공판이 열렸다. 이 날 최 재판장이 막 법정에 들어가려는데, 그 앞으로 정부 고위층의 메모가 전달되었다. 메모지 에는 ‘오전 중에 심리를 끝마치고 오후에 사형선고를 하라’라는 내용 이 기재되어 있었다. 최경록 재판장은 이 메모의 요구를 거절하였다.
당시 변호사였던 정구영은 “모든 증거에 비추어 이 사건은 전형적 인 정당방위라고 주장”했다. 권오병과 김달기 두 검사는 서의원의 행 위를 살인행위라고 주장하였다.
한 달여 동안 재판을 끌었는데, 최 재판장은 정부측 인사로부터
‘승진시켜주겠다’는 회유의 메모도 두 번이나 받았다. 그는 묵살하였 다. 그러자 정부측은 결심 공판을 하루 앞둔 6월 31일, 최 재판장을 교체하고 박동균 준장을 내세워 사형선고를 내리게 하였다.25)
24) 비화 임시수도 천일상권, 부산일보사, 1985, 326∼327쪽.
25) 위의 내용은 최경록과 정구영의 증언을 정리한 것이다. 「서민호 사건」, 민 족의 증언5, 중앙일보사, 1983, 342∼343쪽. ; 비화 임시수도 천일상권, 부 산일보사, 1985, 328쪽.
7월 1일 1심에서 재판장 박동균 준장은 서민호에게 사형을 언도하 였다. 서민호에 대한 사형선고는 내외의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국내 외의 비판 여론 때문에, 8월 1일에 군법회의에서 재심이 열렸다. 이 때에도 권오병 검찰관은 사형을 구형하였다. 재판장 민기식 준장은 그에게 징역 8년을 선고하였다.
1953년 5월 7일에 국방장관은 부산지방법원장에게 서민호의 소송 기록을 이송하였다. 1년 만에 다시 민사재판으로 되돌아왔다.
1953년 10월 20일 재판장 양회경 부산지방법원 판사는 서민호에게 적용된 배임은 징역 10월에 집행유예 2년, ‘살인 및 업무상 횡령’에 대해 무죄 판결을 내렸다. 그의 살인은 정당방위임으로 무죄라고 적 시하였다. 권오병 검사는 그 자리에서 불복 공소하였다. 서민호도 10 월 22일 불복 공소하였다.
그 뒤 대구형무소에서 서민호는 병보석을 신청하였다. 대법원장 김병로와 검찰총장 한격만은 이승만에게 병보석 문제를 상의하자, 이승만은 “아니 서민호가 아직까지 살아 있느냐?”26)라고 말하였다고 한다. 이 발언은 보면 이승만이 서민호가 살아 있는 것에 대해서도 역정을 내었다고 볼 수 있다. 결국 서민호의 보석 문제는 수포로 돌 아갔다.
서민호 사건은 1955년 9월 16일 대법원은 상고기각의 최종 판결을 내려 종결지었다. 군법회의가 내린 징역 8년 형벌의 판결만을 수용하 여 확정하였던 것이다.
1960년 4⋅19 혁명으로 이승만 정권이 붕괴되었다. 같은 해 4월 27 일 국회는 서민호의 석방을 결의하였다. 4월 29일 대전형무소에서 석 방되었다. 총 8년 5일 만에 그는 출옥하였다. 6월 25일 허정 국무총 리가 그를 특별사면하였다.
서민호 사건이 정당방위였다는 사실은 30년이 지나서야 검사의 입 26) 서민호, 월파 서민호 회고록, 월파서민호선생기념사업회, 2013, 120쪽.
을 통해 드러났다. 군사재판에서 민사재판으로 돌아온 뒤, 이 사건을 취급하였던 부산지청 부장검사 김달기는 다음과 같이 증언하였다.
군재(軍裁)에서 권오병검사가 결정적인 증인으로 내세운 최정용의 증언 은 증빙성이 없었어요. 최씨의 증언(서의원이 뒤에서 서대위를 쏘았다는 내 용)은 앞뒤가 안맞는데다 현장에 있었는지 조차 의심스러운 데가 있었어요.
서의원은 서대위가 총을 먼저 빼들자 이에 맞서 응사했던 게 분명합니다. 무 죄구형을 하고 싶었지만 상부의 지시로 어쩔 수 없이 사형을 구형했지요.27)
서민호 사건과 관련된 판결은 우리나라 사법 역사를 평가할 때 반 드시 참조해야 할 것이다. 서민호 사건은 대통령 이승만이 야당 국회 의원을 정치보복한 사건이었으며, 사법부가 권력(행정부)의 시녀 노 릇을 한 상징적인 사건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김윤경도 이승만의 독재 정치를 비판하여 4⋅19 혁명에 불을 붙였 다. 연세대 재직시절 그는 1960년에 일어난 4⋅19혁명을 겪었다. 4⋅19 혁명 전후에 그는 이승만 정권이 자행한 3⋅15 부정 선거에 대해 신 랄히 비판하였다. 그는 1960년 3월 6일에 흥사단에서 “삼일 정신의 부활이 없다면 우리 민족은 멸망으로 쏠리어 들어가지 아니할 수 없 다.”라고 말하였다.28)
같은 해 4월 6일과 7일 이틀에 걸쳐 4천여 명의 연세대 대학생들 앞에서 삼일 정신의 고귀함을 말하고 현재에는 이 정신이 자취를 감 추고 있음을 통탄한다고 말하는 동시에 삼일 정신이 부활하지 않고 는 우리 민족의 장래는 쇠망에 빠지지 않을 수 없음을 경고하고 호 소하였다.29) 이승만 정권의 독재정치에 대해 대학생을 포함하여 우
27) 비화 임시수도 천일상권, 부산일보사, 1985, 323쪽.
28) 김윤경, 「우리의 민족정신-삼일 정신 부활의 길-」, 코메트44, 공군본부 정 훈감실, 1960, 8, 25쪽.
29) 김윤경, 「졸업생에게 주는 글-자유를 사랑하는 인간-」, 연세춘추239호, 1961, 2, 27.
리 국민이 행동으로 비판하여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그가 말한 삼일 정신은 1919년 3⋅1운동 때 우리 민족이 보여준 고귀한 정신을 가리킨다. 그는 삼일정신을 “자유와 독립을 위하여 종 파와 계급과 남녀와 노소와 지방색을 초월하여 통일되었고 신의와 용기와 희생의 정신으로 단결하였던 것”이었다고 풀이하였다.30)
그는 4월 혁명의 날 세브란스 병원 앞에서 연세대학교의 학생들이 수많은 희생을 치르면서 이승만 독재 정권을 비판하는 모습을 보았 다. 학생들은 삼일정신이 살아 있음을 행동으로 보여주고 있었다. 이 를 현장에서 확인하고 그는 감격의 눈물을 흘리었다.31) 4⋅19혁명은 이승만의 하야를 이끌어내어, 독재정권을 종식시켰다.
한편, 조선어학회 인사들은 박정희 군부 독재 정권을 비판하였다.
이인은 1964년 7월 함석헌 김홍일 등과 함께 한일협정의 시정을 촉 구하는 운동을 전개하였다. 1966년 9월 함석헌, 김홍일, 신숙 등과 함 께 부패한 관료와 악덕재벌을 비판하는 시국선언을 발표하였다.
김도연도 박정희 정권의 한일협정 체결에 반대하였다. 김도연은 해 방 뒤 한국민주당 총무, 입법의원 의원, 제헌국회의원, 초대재정부장 관, 3대⋅4대⋅5대⋅6대⋅7대 국회의원에 당선되었다. 그 가운데 4⋅
19혁명 이후에는 민주당 출신으로 국회부의장을 맡았고, 박정희 정 권의 졸속한 한일협정 체결에 반대하여 국회의원 직을 사퇴하는 결 단을 보여주었다. 1967년 7월 19에 서거하였다.32)
김윤경도 박정희 정권의 졸속한 한일협정 체결을 비판하였다. 그 는 5⋅16 군사쿠데타 세력으로부터 탄압을 받아, 1961년 5월 19일 체 포되어 15일간 서대문 경찰서에 구금되었다.
박정희 정권이 졸속으로 체결한 한일협정에 대해 다음과 같이 신
30) 김윤경, 「천의를 거역하는 소행」, 새벽7-5, 새벽사, 1960, 5, 104쪽.
31) 김윤경, 「졸업생에게 주는 글-자유를 사랑하는 인간-」, 연세춘추239호, 1961, 2, 27.
32) 김도연, 나의인생백서, 상산회고록출판동지회간, 1965.
랄히 비판하였다.
보호조약에 반항하다가 희생된 애국자, 의병, 105인 사건에 희생된 자, 3⋅1 독립운동 때 희생된 자가 모두 몇 만인지 몇 10만인지 헤아릴 수 없이 많은 희생자 피해자에게 마땅히 배상금을 청구할 권리가 있으나 이번에 조인된 한⋅일협정에는 배상이나 청구권이란 말조차 쓰지 않았을 뿐 아니라 겨우 3억불도 「무상원조」니 독립축하금이니 하였으니 우리는 일본에게 구걸하려 는 거지 노릇하기는 싫다. 3억불은 아예 받기를 원하지 않으니 그만 두고 위에서 말한 희생자 피해자에게 배상금을 내어라! 30년 간 한반도를 식민지 로 만들고 상업⋅공업⋅광업⋅농업(척식회사로 착취한) 기타 일체의 경제 적 착취를 배상하라고 청구한다. 자유를 박탈하고 문화를 말살하여 온갖 발 전을 방해함에 대한 배상을 청구한다.
그는 한국의 국민 다수가 반대하는 한⋅일협정을 고쳐, 새 협정을 맺으라고 촉구하였다. 아울러 한⋅일협정에 대한 찬반논란은 관권의 개입이 없는 가운데 국민투표에 붙여 판정을 받으라고 주장하였 다.33) 1969년 2월 3일 서거하였다.
서민호도 남북 교류를 주장하여 박정희 정권으로부터 또다시 탄압 을 받았다. 1961년 5⋅16군사쿠데타 이후 군부세력은 비상계엄령을 선포하고 정치활동을 금지하는 조치를 하였다. 군부세력은 서민호의 남북교류 주장을 문제 삼아, 그를 군 수사기관에 연행하여 4개월간 구금하였다.
1963년 서울 용산에서 자유민주당으로 출마하여 제6대 국회의원 선거에 당선하였다. 3선 국회의원이 되었다.
서민호는 1965년 박정희 정권이 추진한 한일협정에 대한 반대투쟁 에 앞장섰고, 의원직을 사퇴하였다. 1969년 8월 5일 대중당 당수 서민 호는 기자회견에서 박정희 정권의 3선 개헌에 반대한다고 말하였다.
서민호는 남북 교류를 주장한 것이 문제가 되어, 박정희 정권에서 33) 김윤경, 「오늘에 대한 고발, 걱정⋅불안⋅공포」, 사상계13-10, 1965, 9.
반공법 위반으로 두 차례 투옥되었다. 그러나 모두 무죄 판결을 받았 다. 그의 평화 통일 주장이 정당하였음을 대한민국 법원이 인정하였다.
첫 번째 반공법 위반 사건은 1966년 6월 3일에 발생하였다. 당시 서민호는 1966년 4월 혁신정당인 민주사회당 창당주비위를 구성하였 다. 같은 해 5월 6일 서민호 중심의 민주사회당은 주비대책위원회에 서 통일에 앞선 조치로 국제정세가 허용하는 범위 안에서 남북간 서 신 교환, 기자교류 등을 선행할 것을 주장하는 발기취지문을 발표하 였다.
같은 해 5월 27일 오전 민주사회당 창당 준비확대회의에서 그는
“내가 집권하면 김일성과 국제기구를 통하거나 직접 면담하여 대결 할 용의가 있다”는 내용의 개회사를 하였다.
서울지검은 중앙정보부가 수사해온 기록을 바탕으로 6월 3일 서민 호를 반공법 위반 혐의로 구속하였다. 검찰은 서민호의 이전 월남파 병반대도 문제 삼았다. 그는 이날 서울교도소에 수감되었다. 김형욱 중앙정보부장은 6월 4일 남북교류론을 일체 불허한다고 발표하였다.
1966년 9월 5일 법원의 보석허가로 그는 94일 만에 출감하였다. 같 은 해 12월 27일 서울형사지법은 그에게 징역 2년 자격 정지 2년을 선고하였다. 서민호는 항소하였다. 1967년 3월 그는 대중당을 창당하 였다.
1970년 10월 17일 서울형사지법 항소1부 유태흥 부장 판사는 징역 2년 자격정지 2년의 유죄 판결을 내린 원심을 깨고 무죄 판결을 내 렸다.34)
두 번째 반공법 위반 사건은 1967년 5월 8일에 발생하였다. 검찰은 같은 해 4월 14일 대중당 대통령 후보 서민호가 대전 유세를 마친 후 기자 17명을 만나 “국민에게 큰 부담이 되고 있는 막대한 국방비 를 절약키 위해 남북인구비례에 의한 감군을 할 수 밖에 없다.”, “정 34) 「서민호씨 무죄판결」, 동아일보, 1970, 10, 17.
치는 현실이라 국제 올림픽이나 판문점 등에 북괴도 대표를 파견하 는 것으로 보아 심적으로는 인정치 않으나 북괴를 현실적으로는 국 가로 인정할 수밖에 없다.”라고 발언한 것을 문제 삼았다. 검찰은 그 의 발언이 북괴를 하나의 국가로 인정, 그들의 활동을 고무 동조하였 다고 판단하였다. 검찰은 6대 대통령 선거 후보였던 서민호를 반공법 위반 혐의로 같은 해 5월 8일 구속하여 서울 교도소에 수감하였다.
같은 해 5월 27일 서울형사지법의 서민호 보석 허가로, 그는 20일 만 에 출감하였다. 같은 해 6월 8일 그는 고향 고흥에 출마하여 제7대 국회의원 선거에 대중당 출신으로 당선하였다.
그 뒤 1972년 4월 17일 서울형사지법은 그에게 징역 1년 자격정지 1년 집행유예 2년을 선고하였다. 서민호는 항소하였다. 결국 1973년 10월 30일 서울형사지법 채명묵 부장판사는 서민호의 선고 공판에서 원심을 깨고 무죄를 선고하였다.35) 이로써 분단체제에 도전한 서민 호는 박정희 정권의 반공 정책에 맞서 승리하였다.
서민호는 1971년 11월 사단법인 통일연구협회를 조직하고 서거 전 까지 이끌어갔다. 1974년 1월 24일 별세하였다. 박정희 정권시기 1차 의 구금, 2차의 투옥을 치렀다. 그의 선구적인 남북 교류론은 김대중 이 계승하여 결실을 맺었다.36)
Ⅲ. 조선어학회 인사의 정치 지형
조선어학회 인사 33인 가운데 4인을 제외하고 29명을 대상으로 정 치 지형을 살펴보고자 한다. 제외된 4인은 이윤재, 한징, 김종철, 권 덕규이다. 이윤재와 한징은 일제시기에 옥사하였다. 김종철은 해방 35) 「서민호씨 무죄 반공법위반 항소심」, 경향신문, 1973, 10, 30.
36) 서민호, 이래서 되겠는가, 환문사, 1970.
이후 고향 구례에 있으며, 사회 활동을 하지 않았다. 권덕규는 해방 뒤 행방불명되었다.
1. 좌우합작 노선의 인사
해방 이후 좌우합작운동과 남북협상운동을 지지하고 이를 통해 자 주적 통일정부를 수립하려는 인사를 좌우합작파 인사 또는 중간파 인사로 규정할 수 있다. 조선어학회 인사 가운데 이극로, 안재홍, 이 만규, 정열모, 이병기, 이우식 등 6명이 여기에 해당한다.
이극로는 해방 이후 자주적 통일민족국가를 건설하고자 1945년 9 월 전국정치운동자후원회를, 1946년 1월 31일 통일정권촉성회를 조 직하였다. 1946년 6월 8일에는 이승만의 단독정부 수립 획책을 신랄 히 비판하였다. 1946년 6월 16일 좌우합작과 남북합작을 위해 조선건 민회를 조직하였다. 1947년 3월 민주주의 독립전선을 결성하였다.
1947년 6월 15일 좌우합작위원회 위원으로 선임되어 활동을 시작하 였다. 1947년 10월 민주독립당을 결성하였고, 1947년 12월 20일 민족 자주연맹을 결성하여 활동하였다. 1948년 4월 건민회 대표와 민족자 주연맹 대표로 평양에 가 남북협상에 참여하였고, 이후 그곳에 잔류 하였다. 그에게 북한 잔류는 생사존망의 문제였다. 그는 1947년 7월 민족지도자인 여운형의 서거 이후 남쪽에서 생존의 위협을 느꼈던 것이다.
북한에서도 1978년 서거 전까지 30년간 우리 말글 연구에 헌신하 였다. 북한의 언어정책을 이끌어 갔고, 특히 조선어소사전(1956) 편 찬에 기여하였다. 1992년 북한 정권에서도 그의 공로를 인정하여 ‘반 일애국열사’로 평가하였다.
9차의 옥고를 치르며 끝까지 일제와 맞섰던 안재홍은 해방 뒤 조 선건국준비위원회 부위원장, 미군정청 민정장관 등을 역임하였다. 안
재홍과 이극로는 미소공위대책 각 정당사회단체 협의회를 조직하였 고, 좌우합작위원회 위원으로, 민주독립당을 결성하는데 주도적인 일 을 하였다. 안재홍은 6⋅25전쟁 때 인민군에 납치되었다. 1965년 3월 1일에 서거하였다.37)
이만규는 해방 이후 조선건국준비위원회에 참여하였다. 이후 중도 좌파 정당인 조선인민당과 근로인민당에서 여운형과 함께 활동하였 다. 그는 여운형을 도와 남북통일정부 수립에 온 힘을 기울였다.
1947년 여운형이 암살당한 현실을 맞아, 생존 차원에서 1948년 4월 남북협상에 참여하였다. 경찰의 근로인민당 탄압이 심해지자, 월북하 였다.
1948년 9월 북한정권에 참여하여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그 뒤 조 국전선 서기국장, 문자개혁부위원장, 문자개혁연구위원장, 조국통일 사 사장으로 활동하였다. 묘소는 애국열사릉에 있다.38)
정열모는 광복 후 1946년 국학전문학교 교장, 홍익대학 초대 학장 을 역임하였다. 한글문화사 대표, 숙명여대에서 교수로서 국문법을 강의하였다. 국학전문학교 교장 시절에 그는 「국학이란 무엇인가」라 는 글을 통해, 국학을 조선민족의 문화 곧 민족정신을 탐구하는 학문 으로 정의하였고, 국학 연구가 민족문화의 옛 것을 아는데서 그치지 않고 새 길을 찾는 것에 그 목적이 있다고 강조하였다.39)
1946년 1월 정열모는 이극로와 함께 좌우정당의 합작을 촉구하는 통일정권 촉성회에 참여하였다. 1948년 4월 남북협상을 지지하는 문 화인 108인의 성명에 그도 조선어학회 인사인 이극로, 유열, 김병제
37) 천관우, 「민세 안재홍 연보」, 민세안재홍선집4, 지식산업사, 1992, 393∼415쪽.
38) 박용규, 「민족주의 교육사상가 이만규」, 역사비평22호, 역사문제연구소, 1993.; 박용규, 「이만규 연구」, 한국교육사학제16집, 한국교육학회 교육사 연구회, 1994.
39) 정열모, 「국학이란 무엇인가」, 국학창간호, 국학전문학교 학생회편집부, 1946, 6.
등과 함께 서명하였다.
1949년에 한글 학회 이사, 한글 전용 촉진회 위원 등을 지냈다. 6⋅25 전쟁 도중에 월북하여 1951년 김일성대학 교원, 1955년 김일성대학 언어학 교수, 1965년 사회과학원 언어학연구원 등에 근무하였다.
1967년 8월 14일에 별세하였다.40)
광복 이후 좌우의 분열을 극복하고자 이우식은 1946년 1월 31일에 이극로, 정열모, 배성룡 등과 함께 통일정권촉성회를 조직하였고, 그 위원으로 활동하였다. 통일정권촉성회는 좌우정당의 즉시합작을 바 라는 성명서를 발표하여 각 정당의 정객 및 정치단체의 각성을 촉구 하였다. 더 이상 통일을 지연하는 것은 민족의 멸망을 자초하기에, 동시에 통일만이 민중이 염원하는 유일의 목표이기에, 좌우 정당이 합작하여 통일노선으로 일로매진하자고 호소하였다.41)
그의 희망과 달리 1948년 두 개의 분단 정권이 수립되었다. 경남의 의령 군민들이 초대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하라고 권유하였으나, 그 는 ‘통일되지 않은 조국에서는 결단코 할 수 없다.’라고 말하며 사양 하였다. 이후 정계에 관여하지 않았다. 1966년 7월 5일 그는 민족의 통일을 보지 못하고 서거하였다.
이병기는 해방 뒤 상경하여 미군정청 편수관, 편수과장을 거쳐 서 울대 문리과 대학 국문학과 교수로 취임하였다. 이외 여러 대학에 출 강하였다.
해방 이후 그는 자주적인 통일 정부가 수립되기를 희망하였고, 자 신의 의사를 밝혔다. 1946년 7월 좌우합작위원회가 조직되어 활동을 시작한 후, 동아일보 여론조사국은 좌우합작교섭에 대한 의견을 듣 고자 “좌우합작의 선결조건은 무엇인가”라는 설문을 제시하였는데,
40) 유목상, 「백수 정열모 선생」, 조선어학회 수난 50돌 기념글모이, 한글학회, 1993.
41) 「이 이상 통일 遷延하면 민족 멸망을 초래. 통일정권 촉성에 유지들 궐기」,
자유신문, 1946, 2, 1.
이병기는 “자주독립 一路로 나가라. 일체의 政論은 기술적인 문제로 서 잘 조화될 것이다. 민의와 같이 民望과 같이!”라고 답변하였다.42) 이처럼 그는 좌우합작을 지지하며 낙관적인 전망을 하고 있었다. 같 은 해 광복절에 부를 ‘해방기념가’를 그가 작사하였다. 미군정청 문교 부가 해방 1주년을 기념하여 누구나 부를 수 있는 노래를 제정하고 자 하였는데, 그가 ‘해방기념가’를 지었던 것이다. 이 노래는 이흥열 이 작곡하였다.43)
1948년 4월 6일 조선 문학가 동맹이 주최하여 조선말 큰사전과
표준 조선말 사전 간행 축하회를 열어주었다.44) 사전 간행 축하회 가 열리는 데는 이병기의 역할이 컸다. 그는 좌파와 우파 문학인 모두 의 신뢰를 얻고 있었고, 조선 문학가 동맹의 대표를 맡기도 하였다.45) 남북협상을 지지하는 문화인 108인의 성명에 1948년 4월 14일 이 병기도 이극로, 정열모, 김병제 등과 함께 서명하였다. 이 지지 성명 에는 같은 해 4월 6일 조선말큰사전 간행 축하회를 함께 치른 정지 용, 염상섭, 박태원도 서명하였다.
1952년 그는 전북대 문리과 대학 학장을 역임하였다. 서울대 대학 원 강의도 하였다. 1968년 11월 29일 자택에서 서거하였다.
2. 합리적 보수 인사
자본주의와 자유민주주의와 평화통일을 추구하는 인사를 합리적 보수주의자로 규정할 수 있다. 조선어학회 인사의 대다수가 여기에
42) 「여론은 이러타 : 좌우합작을 지지 정권수립후에 신탁은 론의」, 동아일보, 1946, 7, 16.
43) 「해방기념가」 제정대한연예협회에서」, 동아일보, 1946, 7, 27.; 「해방기념가」,
자유신문, 1946, 8, 9.
44) 유열, 「사전 간행 축하회」, 한글104, 1948, 6.
45) 최경봉, 우리말의 탄생, 책과함께, 2005, 336쪽.
해당한다. 앞 장에서 살펴본 민주주의 국가 건설에 참여한 6명(이인, 김양수, 윤병호, 서민호, 김윤경, 김도연)의 인사도 여기에 해당한다.
아울러 조선어학회 인사 가운데 16명(최현배, 이희승, 정인승, 정태 진, 이중화, 김법린, 장현식, 장지영, 이석린, 권승욱, 이강래, 김선기, 서승효, 정인섭, 신현모, 안호상)도 이 범주에 들어간다. 하나하나 살 펴보자.
최현배는 해방 이후의 국어정책 수립과 문자생활에서 한글전용정 책이 뿌리내리게 하였다. 미군정청 문교부 편수국장에 재임 시절에 그는 국가의 공문서와 교과서를 한글 전용으로 사용하고, 가로쓰기 를 관철시켰다. 그는 국회로 하여금 ‘한글 전용법’(1948)을 제정하게 하였다. 이후 그가 일관되게 주장한 한글 전용 주장은 박정희 정권의 국어정책에 반영되었다. 한글 나라의 실현은 그의 서거 이후에야 이 루어졌다.
한편 그는 해방 후 독재정치를 비판한 사회사상가로서 일생을 보 냈다. 그는 학문을 위한 학문을 하지 않았다. 부조리한 현실의 개혁을 위해 학문에 매진하였다. 그의 학문에는 실천성이 담보되어 있었다.
그의 저서는 절체절명의 위기의식의 산물이었다. 우리말본과 한 글갈 등 수많은 우리 말글 연구는 일제의 조선어 말살에 대항하고 자 나왔다. 나라사랑의 길(1958)과 나라 건지는 교육(1963)은 이 승만 정권의 부정부패와 한국 교육계의 부패를 비판하면서, 이의 타 개책을 제시하였다.
이희승은 해방 이후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교수로 있으면서 국어 학자로서의 활발한 활동을 하였다. 그는 우리나라 국민의 문자생활 에서 국한문혼용을 내세웠다.
그러나 국한문혼용체의 문장은 우리민족 전체 누구나가 읽고 쓰기 를 할 수 없게 한다는 점에서 명백한 한계를 가지고 있다.
1980년대에 들어가 이희승은 남북통일에 대한 자신의 신념을 다음
과 같이 분명히 밝혔다.
인류역사를 보아도 언어가 같은 사람 사이는 서로 엉키는 힘이 작용하게 되어 있었다.(중략)지금의 분단은 역사방향의 역행이다. 그 역행이란 우리 민족의 의사가 아니다. 강대국이 저희끼리 차치고 포치고 한 것이다. 우리 의견을 언제 묻기나 했던가, 그건 아주 부자연한 일이다. 부자연한 것은 물 리학적으로 언제든지 자연한 상태로 옮겨가고야 만다. 부자연한 것에 걸려 있는 힘이 약화되거나 해소되면 뭉치고 만다. 그것이 내 신념이다.46)
현재의 남북 분단은 역사의 진행방향에 역행하고 있기에, 이를 타 파해야 한다는 이희승의 유지는 합리적인 주장이라고 볼 수 있다.
정인승은 민족문화의 금자탑인 조선말큰사전을 완간하였다. 이 사전은 16만 이상의 우리말 어휘에 대해 뜻풀이를 하였다. 조선말 큰사전은 뒷날 남북한 국어사전의 모범이 되었고, 국어의 발달에 커다란 기여를 하였다. 전북대학 교수와 건국대학교 교수로 있으면 서, 국어와 관련된 한글독본(1946), 표준 중등말본(1949), 표준 옛글(1955), 표준 고등말본(1956), 의문 해설 한글 강좌(1960), 표 준 문법(1968) 등의 저서를 남겼다.
정태진은 해방 뒤 조선어학회에서 조선말큰사전 편찬에 집중하였 다. 아울러 여러 대학에도 출강하였다. 그는 한자 안쓰기 문제(1946),
중등국어독본(1946), 고어독본(1947), 조선 고어 방언사전(1948) 등을 발간하였다.
이중화는 해방 뒤 다시 조선어학회에 들어가 조선말큰사전의 편 찬위원 활동하였다. 1948년부터 국학대학의 학장을 역임하였고, 1949 년 조선어학회의 후원재단인 ‘한글집’의 초대 이사장으로 선임되었 다. 6⋅25전쟁 때 인민군에 납치되었다.
46) 「원로탐방, 방송 요즘 어떻습니까, 이희승과 송정숙 대담」, 방송연구7, 1983, 12, 52쪽.
한용운의 제자인 김법린은 해방 뒤 1945년 조선불교중앙총무원 초 대 원장을 역임하여 불교를 개혁하였다. 혜화전문학교에서 강의도 겸하였다. 1946년 비상국민회의 대의원과 입법의원의 의원에 선임되 었다. 1948년 민의원 의원 겸 동국대학 교수, 감찰위원회 위원이 되 었다. 1952년 제3대 문교부장관에 취임하였다. 1954년 제3대 민의원 총선거에서 당선하였고, 국회 문교위원장에 선임되었다. 1963년에는 동국대학교 총장으로 취임하였다. 1964년 3월 14일에 별세하였다.
이인도 통일에 대해 합리적인 주장을 하였다. 그는 1972년 5월 “우 리의 운명은 우리 손으로 개척해야 합니다. 시기의 빠름과 늦음은 있 을망정 통일은 되고 맙니다. 피는 물보다 더 진합니다. 제부모형제는 반드시 다시 결합하게 되어 있습니다. 통일문제에 관한 한 독일에서 배워야 합니다.”47)라고 절규하였다.
장현식은 해방 후 제2대 전북도지사를 지냈다. 1950년 제2대 국회 의원 선거에 출마하였으나, 유권자 앞에서 말을 더듬어서 낙선하였 다. 그가 말을 더듬게 된 사연을 유권자들이 알 턱이 없었다.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일제에 검거된 뒤에, 그는 일본 경찰로부터 혹독한 고문을 당하였다. 일본경찰은 장현식을 심문하던 도중에, 장 현식의 혀에 대못을 박기까지 하였다. 이로 인해 그는 평생 말을 더 듬어야 했다. 6⋅25전쟁 기간 인민군에 의해 납북되었다. 1950년 10 월 24일에 서거하였다.
장지영은 해방 뒤에 조선어학회 14대와 15대에 걸쳐 이사장을 역 임하였다. 아울러 미군정청 학무국 편수과장, 세종중등국어교원양성 소 소장, 연세대 교수로 재직하였다. 조선어학회 이사장 시절에 그는
「나랏 말을 깨끗이 하자」(한글98, 1946, 11)라는 글을 통해, 일본정 신이 남아있는 일본말을 청산하고 민족혼이 담겨있는 우리말을 쓰자 고 호소하였다.
47) 이인, 반세기의 증언, 명지대학출판부, 1974, 300쪽.
아울러 그는 「절박한 요청-문화인의 건의」(경향신문, 1949, 7, 26) 라는 글에서 공문서와 신문, 잡지와 법률 등을 한글로만 써야함을 강 조하였다. 장지영은 1976년 3월 15일 서거하였다.
이석린은 해방 뒤 조선어학회에 정회원으로 활동하면서, 문산농업 고등학교와 용산에 있던 철도학교와 양정고등학교에서 국어교사가 되었다. 일본을 이기기 위해 일본어 문법을 연구하다가 1999년 5월 10일에 서거하였다.48)
권승욱은 해방 뒤 조선어학회가 추진 중이던 조선말큰사전(총 6 권) 편찬 사업에 편찬 위원으로 모두 참여하였다. 아울러 수도여자사 범대학 강사, 건국대 강사를 역임하였다. 1956년 국정교과서(국어)의 편찬 위원으로, 1957년 국정교과서 도서편찬심의회 국어과 위원으로 활동하였다.
이강래는 해방 뒤 한글학회 이사, 한글 전용 촉진회 위원으로 활동 하였다. 배화여고 교장, 경복고 교감으로도 봉직하였다. 1967년 2월 19일 별세하였다.
김선기는 해방 이후 1946년 연세대 영문학과 교수로 복직하였다.
1950년 서울대 언어학과 교수로 자리를 옮겼다. 1956년 한국 언어학 회를 창립하고 초대 회장에 선임되었다. 1958년에서 1960년까지 문 교부 차관을 역임하였다.
김선기는 우리 국민이 문자생활에서 국한문을 혼용해서는 안 되고 한글 전용을 해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1966년경에 그는 텔레비전 공 개 토론에서 “한글 전용 사용은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며, 한글이 있 으므로 한국은 세계에서 10대 강국이 될 것”이라고 주장하였다.49) 노 무현 정권 때 한국은 10대 강국이 되었다.
48) 박용규, 「조선어학회사건의 마지막 생존자, 또나 이석린 선생」, 우리교육
44호, 1993, 10, 34∼39쪽.
49) 김선기, 탄신 100돌 기념 무돌 김선기 선생 글모이Ⅴ(무돌 김선기 선생 논 문⋅산문집), 2007, 한울, 173쪽.
그는 1975년 「나랏글은 한글만으로」라는 글에서, 한글만으로 문자 생활을 한다면, 우리나라는 일본보다 500년, 중국보다 1,000년을 앞서 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50)
계속해서 1976년 「한글과 겨레해방」이라는 글에서, 한글 맞춤법이 두 쪽으로 나뉜 “겨레를 묶어 하나가 되게” 하였다고 하면서, 한글 전용으로 문자 생활에서 문화 통일을 가져와 남북이 하나가 되게 하 자고 역설하였다.51) 1992년 11월 11일에 서거하였다.
서승효는 광복 후 1945년부터 조선일보의 지방부장을 역임하였다.
1945년 10월 18일에 개최된 조선독립운동사편찬 발기인회에서 발기 인으로 참여하였다. 1947년부터 동아일보의 편집고문을 맡았다. 이승 만 정권 등장 이후 부통령 이시영이 상공부장관을 시켜 주겠다고 서 승효에게 제안을 하자, 그는 “반쪽 자리 정부인 이승만 밑에서 장관 하지 않겠다”라는 말을 하여 거절하였다고 한다.52) 1954년 자유신문 의 객원사원으로 활동하였다. 1964년 9월 10일에 별세하였다.53)
정인섭은 해방 뒤, 1946년 3월 연희전문 교수를 마감하고 1946년 4월 부터 중앙대학교 법문학부장을 맡았다. 1966년 한글전용추진위원회 부회장을 맡아 한글 전용에 기여하였다. 1974년 3월 색동회 회장으로 취임한 이후 1983년 9월 16일 타계할 때까지 이 단체에 헌신하였다.54)
신현모는 해방 뒤 한국민주당 창당에 참여하였고, 당무부장을 역 임하였다. 제헌 국회의원에 당선되었다. 재정경제위원회에 소속하여 국회의원으로 활동하였다.
50) 한글 새소식제33호, 한글학회, 1975, 5.
51) 한글 새소식제50호, 한글학회, 1976, 10.
52) 딸 서차경의 증언; 서승효의 아들 서석주의 처 김명자(1940년생)님의 증언.
53) 「조선독립운동사편찬발기인회 개최되어 위원 선임」, 매일신보, 1945, 10, 19.;
유광렬, 「한국의 기자상, 서승효 선생」; 현준건, 「연아 서승효」, 한국언론인물 사화8⋅15전편(상), 대한언론인회, 1992.; 「지평선」, 한국일보, 1964, 9, 13.
54) 엄기원, 「한글을 세계에 알린 눈솔 정인섭 선생」, 조선어학회 수난50돌 기 념글모이, 한글학회, 199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