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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향교(全州鄕校)를 중심으로(1920~19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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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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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현대 ‘위성(衛聖)’ 공동체의 등장과 지역 사회 변동

-전주향교(全州鄕校)를 중심으로(1920~1960)-*

87)설주희**

<차 례>

1. 머리말

2. 전주향교 존성회(尊聖會)와 ‘교화(敎化)’

3. 유림 사회 균열과 위성계(衛聖契) 설립 4. 맺음말

[국문초록]

전근대 향교는 향촌 교육과 지역민 교화의 구심점이었고, 근대에는 식민권력에 흡수되어 촌락지배 선전기관으로 작동하였으며, 현대에는 유교 문화 부흥을 위해 공자 사상을 전파하는 기관으로 이어져 왔다. 이처럼 향교는 전근대부터 현대에 이르는 거시적인 시대 변화와 함께 미시적인 지역 사회 변동이 담겨 있는 상징적인 공간이다.

일제강점기와 해방 이후 전주향교 내에 세워진 존성회(尊聖會)와 위성계(衛聖契)는 같은 목표를 표방하였지만 실질적인 활동 양상이 달랐다. 일제강점기 조직된 존성회는 ‘유학의 진 흥’을 목적으로 설립되었으나 지역 유지 중심으로 구성된 공동체였기에 조선총독부의 식민정 책에 흡수되기 쉬웠고, 결국 지배정책의 촌락 전파를 위해 활동하게 되었다. 해방 이후 설립된 위성계는 해방이라는 사회적 혼란 속에 일어난 유림 사회 내의 균열, 그리고 일반사회에 널리 전파된 유학 혐오 사상의 제어를 위해 설립된 지역공동체였다. 하지만 이는 한국 전쟁의 발발 로 쉽게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결국 종전 이후 사회가 다소 안정화된 1954년에서야 위성계는 완성될 수 있었다.

동일 기관에서 동일한 목적을 표방하며 설립된 공동체임에도 불구하고 이들의 성격은 상이 하였다. 두 공동체 사이에는 일제강점기와 해방이라는 거대한 사회적 전환이 외부 요인으로 개재하였고, 내부적으로는 구성원의 변화가 큰 영향을 미쳤다. 때문에 존성회와 위성계는 각

* 이 논문은 2018년 대한민국 교육부와 한국연구재단의 지원을 받아 수행된 연구임 (NRF-2018S1A6A3A01045347)

** 전주대학교 한국고전학연구소 HK+연구단 연구교수 akatiara@jj.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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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 다른 형태의 성현 보호 운동을 수행하였다.

향교의 정체성은 향교를 점유하고 있는 지역공동체의 성격에 따라 결정된다. 때문에 향교 연구를 위해서는 ‘공간’으로서의 향교가 아니라, 지역공동체의 ‘집결지’로 위치했던 향교에 주 목해야 한다. 근대 이후 향교가 유교 문화의 재현 공간으로만 존재한 것이 아니라 지역공동체 의 의견에 따라 소비된 유교문화의 부산물이었기 때문이다. 탈유교사회에 여전히 존재하고 있 는 향교는 향교만의 역사가 아니라, 향교를 공유하고 있던 인간과 공동체의 발견을 통해 보다 넓은 시각으로 재해석할 필요가 있다.

[주제어] 전주(全州), 유교(儒敎), 조선총독부(朝鮮總督府), 지역공동체, 일제강점기

1. 머리말

근현대 한국 사회의 변동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지역공동체의 변화 과정을 탐색하는 일이 중요하다. 일제강점기와 해방이라는 변곡점을 겪은 지역공동 체가 시대의 조류에 대응해 온 양상을 통해 당대의 정책과 사회상, 그리고 지역민의 일상까지 도출할 수 있기 때문이다.1) 더불어 전근대부터 존속해 온 지역공동체는 전근대와 근대, 현대를 가로지르는 변화 과정이 함축되어 있기에 역사적 의미가 더욱 크다.

향교(鄕校)는 전근대와 근대, 현대를 아우르는 역사의 프리즘이자 중앙과 지 역을 동시에 조망할 수 있는 소재이다. 전근대 향교는 향촌 교육과 지역민 교화 의 구심점으로 활동하였고, 근대에는 식민권력에 흡수되어 촌락지배 선전기관 으로 전락하였으며, 현대에는 유교 문화의 부흥을 위해 공자의 사상을 전파하는 기관으로 이어져 왔다. 따라서 향교의 지역 사회 활동에는 전근대부터 현대에 이르는 거시적인 시대 변화와 함께 미시적인 지역 사회 변동이 내포되어 있다.

향교는 시기에 따라 지역 내 사회적 위치가 변화하였다는 특징이 있다.

전근대 향교는 교육기관으로 군림하였지만, 근대의 도래로 유교문화 파급력 이 약화됨에 따라 이전의 지위가 유명무실해졌다. 때문에 향교 건물 보수나

1) 김경남, 「일제하 식민도시 개발과 조선인 자본가 형성의 특징」, 영남학 30, 경북대학교 영남문화연구원, 2016, 199~20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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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전제(釋奠祭) 운영에 어려움을 겪게 되었고, 이때 향교 운영 기금을 마련하 려는 공동체들이 신설되었다. 성현(聖賢) 보호를 목적으로 향교 내에 조직된 이 공동체는 대부분 ‘모성(慕聖)’, ‘존모(尊慕)’, ‘존성(尊聖)’, ‘위성(衛聖)’ 등 의 이름을 표방하였다.2)

본고는 이 현상에 주목하여 향교 내 성현 보호를 표방한 공동체의 설립과 활동에 천착하고자 한다. 전근대와 근대, 근대와 현대라는 변화 과정 속에서 설립된 이 공동체는 ‘성현 보호’와 ‘유교 질서 전파’를 위시하였지만, 실질적 인 지역 사회 활동은 이와 달랐다. 특히 전주향교(全州鄕校)의 경우, 식민지 와 해방이라는 거대한 사회적 전환과 맞물려 향교 내 공동체에 지속적인 변 화가 일어났다. 이에 본고는 지역 사회 변화 과정을 함축하고 있는 전주향교 성현 보호 공동체를 주목하고자 한다.

일제강점기 전주향교에는 ‘존성회(尊聖會)’가 조직되었고, 해방 이후에는

‘위성계(衛聖契)’가 설립되었다. 모두 전주향교 내에 조직된 성현 보호 단체 였지만 지역 사회 내 활동은 달랐다. 단체 간 활동에 차이가 발생한 원인은 단체 구성원이 달랐기 때문이다. 1930년 존성회에 가입한 인물은 총 442명이 었고, 1954년 위성계에 가입한 인물은 656명이었는데 이 두 단체에 모두 가 입한 인물은 26명에 불과하였다.3) 두 단체 임원 역시 동일한 인물은 없다.

전주향교 내에 조직된 공동체였지만 두 공동체의 구성원은 상이하다. 이는 존성회 설립 이후 20여 년 만에 전주향교 주도 세력에 변화가 있었음을 의미 한다. 따라서 해방과 함께 일어난 전주향교 내 주도 세력 변화를 파악하기 위해 두 공동체의 설립 과정과 구성원, 단체 활동 형태를 분석하고자 한다.

이를 통해 근현대 전주향교의 성격 변화는 물론 지역공동체와 지역사회 변동

2) 근대 이후 성현 보호를 표방하며 결성된 향교 내 공동체와 관련된 사항은 다음의 자료에서 도 확인할 수 있다. 金允植, 雲養集 卷10, 「梁山郡慕聖修契序」, 1917; 金允植, 雲養續集 卷2, 「會寧鄕校慕聖稧序」, 1917; 安圭容, 晦峰遺稿 , 「尊聖契案序」, 1963; 尹錫熙, 誠菴文 , 「尊聖契案序」, 2014. 등

3) 존성회, 위성계 두 공동체에 모두 가입한 인물은 26명이다. 이들의 행적을 조사하였으나 뚜렷한 활동 내용은 찾을 수 없었다. 이는 추후 현장조사 및 구술조사를 통해 보완하고자 한다. 全州鄕校, 全州鄕校誌 , 全州鄕校誌編纂委員會, 2004, 641~644쪽; 李道衡, (重刊)全 州衛聖案, 全州衛聖案重刊所 編, 19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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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정 역시 천착할 계획이다.

주요 자료로는 전주향교 위성계 설립 전말이 기록된 계미삼월위성안(癸 巳三月衛聖案) 4)과 전주위성안(全州衛聖案) 5)을 활용할 것이며, 존성회원 명부가 수록된 전주향교지(全州鄕校誌) 역시 참고하고자 한다. 이 외 일제 강점기 이후 전주향교에서 작성한 통문(通文)과 신문기사를 통해 향교 외 사 회상도 보완할 예정이다.

2. 전주향교 존성회(尊聖會)와 ‘교화(敎化)’

1924년 12월 전주향교에서 ‘전주향교유교존성회(全州鄕校儒敎尊聖會, 이 하 존성회)’를 설립하려는 움직임이 일어났다. 당시 향교 유림은 ‘점차 인의 도덕(仁義道德)이 해체되어 유교의 윤리강상이 쇠퇴하고 있어 형언할 수 없 는 처참한 상태’임을 한탄하며, 존성회의 설립으로 ‘유교를 발전시켜 사회의 안녕질서를 구축하고, 풍기(風紀)를 개선하고, 도덕을 함양’시키기 위해 존성 회를 설립한다고 표명하였다. 유림은 이 목적을 기술한 취지서를 공표하고 존성회 조직을 위한 회원 모집에 박차를 가하였다.6)

당시 존성회 발기인은 유동근(柳東根), 박기순(朴基順), 김창섭(金昌燮), 임병철(林秉撤), 유학근(柳鶴根), 황의찬(黃義贊), 이강원(李康元), 박○경(朴

○庚)7), 유철수(柳哲秀), 김용규(金容奎) 등 40여 명이었다. 40여 명의 발기인 가운데 10여 명이 대표 자격으로 신문 기사에 이름을 올렸다.8) 대표 10명 가운데 행적을 확인할 수 있는 인원은 총 7명이다.

임병철, 유학근, 황의찬은 1921년 전주군수의 임명으로 전주향교 장의(掌

4) 李道衡, 癸巳三月衛聖案 , 미상, 1953.

5) 李道衡, (重刊)全州衛聖案 , 全州衛聖案重刊所 編, 1954. 이 자료의 국역은 전주대학교 한국고전학연구소 협동번역사업팀의 도움을 받아 작성하였다.

6) 매일신보, <全州의 尊聖會 창립, 倫堂을 扶植코자>, 1924년 12월 14일 기사.

7) 신문 인쇄상의 오류로 인명 확인이 어렵다.

8) 매일신보, <全州의 尊聖會 창립, 倫堂을 扶植코자>, 1924년 12월 14일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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議) 직책을 수행하였다.9) 일제강점기 향교 장의는 조선총독부의 자문 담당관 이기에 지역 내 신망은 물론 행정 권력의 신망 역시 두터운 인물이었다.10) 이 세 명은 장의직을 수행하였다는 신문 기사 외에는 별다른 행적을 확인할 수 없다. 이들 외에 인적 사항과 행적이 비교적 자세한 인물을 차례로 살펴보 면 다음과 같다.

김창섭은 김일손(金馹孫)의 12세손으로, 병조참판(兵曹叅判)이었던 김국 근(金國根)의 아들이다. 김창섭의 세 아들 김응두(金應斗), 김석두(金奭斗), 김학두(金學斗)는 모두 관직에 진출해 각각 중추원의관(中樞院議官), 경기도 관찰부주사(觀察府主事), 교관(敎官)을 지냈다. 김창섭은 1880년 무과(武科) 에 급제한 뒤, 1886년 부사과(副司果), 1890년 사헌부감찰(司憲府監察)을 역 임하였다. 이후 1913년 전주농공은행(全州農工銀行)의 주주원(株主員)으로 재직한 경력이 있다.11)

이강원은 효령대군(孝寧大君) 이보(李補)의 18세손으로, 아버지는 비서승 (祕書丞) 이기필(李起弼)이다. 1906년 전주사립양영학교(全州私立養英學校) 설립위원을 역임하였고, 1907년 이 학교의 교감과 교장을 역임하였다. 1907 년 10월 전주공립보통학교(全州公立普通學校) 학무위원(學務委員), 1910년 3월 전주공립농업학교(全州公立農業學校) 상의원(商議員)과 전주시구개정 실행위원(全州市區改正實行委員)에 선임되었다. 1912년 11월에는 전주군참 사(全州郡參事)에 임명되었고, 1915년 1월에는 전라북도참사(全羅北道參事), 전주농공은행(全州農工銀行) 이사, 전주금융조합장(全州金融組合長), 전주 고등보통학교(全州高等普通學校) 설립위원, 면협의회원(面協議會員), 조선 총독부 중추원참의(中樞院參議), 전라북도평의회원(全羅北道評議會員), 명 륜학원(明倫學院) 평의원(評議員), 전북육영회(全北育英會) 부회장, 농촌진 흥회장(農村振興會長) 등의 중직을 수행하였다.12)

9) 당시 전주군수는 유학근을 이서(伊西), 임병철은 초포(草浦), 황의찬을 용진(龍進)을 대표 하는 장의로 임명하였다. 매일신보 , <地方通信: 鄕校掌議 임명>, 1921년 2월 7일 기사.

10) 김명우, 「일제강점기 향교 直員과 掌議」, 중앙사학 25, 중앙대학교 중앙사학연구소, 2007.

11) 田中正剛, 朝鮮紳士寶鑑 , 朝鮮文友會, 1914, 244쪽.

12) 大垣丈夫, 朝鮮紳士大同譜 , 朝鮮紳士大同譜發行事務所, 1913, 10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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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기순의 가문은 앞서 서술한 이들과 달리 한미하였다. 박기순 집안은 대대로 양반 계급에 오르지 못하다 조선시대 ‘박진(朴蓁)’이라는 인물이 병조참의(兵曹參議)가 되며 비로소 양반 계급에 올랐다. 박진은 박기순의 15대 조부이다. 하지만 양반이 된 후에도 가산(家産)이 넉넉하지 못해 대대 로 빈곤하게 생활하였다. 박기순의 아버지 박인수(朴寅秀) 역시 가난을 면 치 못했고, 심지어 박기순이 12살 되던 해에 사망하였다. 때문에 박기순은 12세에 아버지 대신 집안의 가장이 되어 한 미곡상의 ‘소승(小僧)’이라는 낮은 직급의 사환으로 일하기 시작하였다. 이후 미곡상 주인에게 성실함을 인정받아 ‘소공(小供)’으로 승진하였고, 18살이 되던 무렵 자산을 모아 독 자적으로 미곡상을 운영하였다.13) 전주평야에서 생산된 미곡을 군산과 인 천에 팔아 큰 이익을 얻었고, 이 수익을 활용하여 토지 자본과 금융 자본을 잠식해 중앙 재계까지 진출하였다.14)

박기순은 1891년 승훈랑(承訓郞) 사헌부감찰(司憲府監察)로 임명되었고, 1901년 중추원(中樞院) 의관(議官) 주임(奏任) 6등, 1906년에는 시종원(侍從 院) 부경(副卿) 칙임(勅任) 3등에 서임되었다. 1908년 전주-군산 철도 수용지 내에 있던 본인 소유지 1,070평을 기부하여 내부대신의 포상을 받기도 하였 다. 1908년에는 일본적십자사(日本赤十字社) 협찬위원(恊贊委員)이 되었고, 1910년 여산군수(礪山郡守)에 임명되었다.15) 박기순의 아들 박영철(朴榮喆)16) 은 아버지를 ‘힘써 일하고 힘써 배우라고 한 공자의 가르침을 존경해 이를 실 천하는 삶을 살고자’ 한 인물이자 ‘늘 공자를 존숭한’ 인물로 회상하였다.17) 김용규의 본관은 김해(金海)이고 호는 해강(海岡)이다. 비서감승(秘書監

13) 朴榮喆, 五十年の回顧 , 大阪屋號書店, 1929, 8~17쪽.

14) 박기순 일가가 자본을 축적하여 식민지 개발을 주도하게 되는 양상은 다음의 논고를 참고.

김경남, 위 논문, 2016.

15) 田中正剛, 朝鮮紳士寶鑑 , 朝鮮文友會, 1914, 494쪽.

16) 박기순은 20살이 되던 해 전주 이씨와 결혼해 박영철을 낳았다. 박영철은 1888년 일본 유학을 떠나 1903년 일본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였다. 이후 1904년 러일전쟁에 참전한 뒤 하세가와 요시미치의 신임을 얻어 익산군수, 함경북도 참여관, 전라북도 참여관, 강원 도지사, 함경북도지사, 조선총독부 중추원 참의를 지냈다. 朝鮮新聞社, 朝鮮人事興信錄 , 朝鮮人事興信錄編纂部, 1935, 414쪽; 김경남, 위 논문, 2016.

17) 朴榮喆, 앞의 책, 1929, 8~1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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承)을 지낸 김동두(金東斗)의 아들이다. 전주에서 출생하여 참서관(參書官) 을 역임하였다.18) 1916년 전주위생조합 임원으로 선출되었고, 1920년 전주 군 참사(參事)와 면협의원을 지냈다. 1929년에도 면협의원에 당선되어 농촌 시찰단에 참가하기도 하였다. 1932년 전주군영(全州軍營) 설치를 위해 150원 (圓)을 납부하였다.19)

향교 직원(直員)으로 ‘향천(鄕薦)되어 전주향교의 무너져가는 전무(殿廡), 사당(祠堂), 문고(門庫), 변두(籩豆) 등을 자신의 재산으로 중수하였고, 석전 때에는 의장(儀仗), 관복(冠服), 기명(器皿) 등의 제사 용구 역시 본인 재산으 로 마련’하였으며, ‘향교 재산을 증식하여 춘계와 추계 석전제에 강연회를 개최’하였다. 김용규는 자신의 재산을 기부해 전주향교의 시설과 운영에 필 요한 경비를 조달하는 역할을 하고 있었다.20)

존성회 설립을 알리는 신문 기사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당시 존성회 발기 는 전주지역 ‘유지(有志)’들에 의해 이루어졌다.21) 이들의 발의는 머지않아 존성회 창립으로 발현되었고, 1925년 1월 4일 전주향교 명륜당에서 존성회 창립식이 개최되었다.22) 창립식 당일 진행된 임원 선거 결과 회장에 유동근,

18) 咸興鄕校, <1931년 2월에 함흥향교에서 귀군의 전참서관 김용규의 효우와 문학을 표창해야 한다는 내용으로 전주향교에 보낸 통문>, 1931; 茂長鄕校, <1932년 6월에 무장향교에서 전참 서관 김용규의 효우와 문학을 표창해야 한다는 내용으로 전주향교에 보낸 통문>, 1932.

호남기록문화시스템 참조. 검색일자 2020년 10월 20일. (http://honam.chonbuk.ac.kr/index.jsp) 19) 매일신보 , <지방통신: 전라북도, 전주위생조합원(전주)>, 1916년 4월 30일 기사; 朝鮮總 督府, 直員錄 , 1920; 매일신보 , <지방통신: 全州選擧界形勢>, 1920년 11월 15일 기사;

매일신보, <各地府面議逐鹿戰>, 1929년 11월 11일 기사; 매일신보 , <全州面主催의 農 村視察團 來月二日 出發>, 1930년 10월 30일 기사; 매일신보 , <軍營設置 寄附金配定 于先朝鮮人側만>, 1932년 1월 14일 기사.

20) 泰仁鄕校, <1928년 3월에 태인향교에서 선사 김용규의 효우와 문학을 표창해야 한다는 내용으로 전주향교에 보낸 통문>, 1928; 鎭安鄕校, <1928년 3월에 진안향교에서 전참서관 김용규의 효우와 문학을 표창해야 한다는 내용으로 전주향교에 보낸 통문>, 1928; 臨陂鄕 校, <1930년 12월에 나주향교에서 전참서관 김용규의 효우와 문학을 표창해야 한다는 내용으로 전주향교에 보낸 통문>, 1930. 호남기록문화시스템 참조. 검색일자 2020년 10월 20일. (http://honam.chonbuk.ac.kr/index.jsp)

21) 매일신보 , <全州의 尊聖會 창립, 倫堂을 扶植코자>, 1924년 12월 14일 기사.

22) 신문에는 ‘전성회(奠聖會)’로 되어 있으나 전주향교지(全州鄕校誌) 에 따르면 ‘존성회(尊 聖會)’의 오기로 보인다. 매일신보 , <儒敎奠聖會 創立總會, 전주향교에서>, 1925년 1월 8일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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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전 : 金允坤, 金海崗壽帖 , 以文堂石版所, 1938. 국립중앙도서관 소장본.

<그림 1> 󰡔김해강수첩(金海崗壽帖)󰡕 표지와 김용규 초상(肖像)

부회장에 박기순과 황의찬, 총무에 김용규, 회계에 박영진(朴永鎭), 평의원장 (評議員長)에 이강원, 찬성원에 임병철이 선출되었다. 임원 대부분이 발기인 으로 참여한 유지였다.23)

지역 유지로 구성된 존성회 활동은 조선총독부 향교 정책과 부합하는 양상 을 보였다. 1925년 1월 창립 당시 존성회에는 270여 명의 유림이 가입하였고, 이들은 각자의 사정에 맞게 10원(圓), 5원, 1원 등을 갹출하였다.24) 유림의 의연(義捐)으로 존성회 기금 1,000원이 모금되었으며, 3년 만에 기금이 2배로 늘어 2,000원에 달하게 되었다. 1928년 존성회는 이 기금을 ‘사회교화사업(社 會敎化事業)’에 사용할 것을 공표하였다.25)

전주향교 내 공동체인 존성회가 자신의 기금을 ‘사회교화사업’에 사용하 겠다고 공표한 배경에는 조선총독부의 식민정책이 자리 잡고 있다. 조선총독

23) 매일신보 , <儒敎奠聖會 創立總會, 전주향교에서>, 1925년 1월 8일 기사.

24) 全州鄕校, 앞의 책, 2004, 640쪽.

25) 중외일보 , <全州尊聖會總會> 1928년 3월 22일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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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는 1920년대부터 향교를 구심점으로 하는 사회교화사업을 시행하였다.

1919년 3⋅1운동의 발발로 격화된 조선 민중의 사상을 순화시켜야만 했던 조선총독부는 ‘순량(純良)한 국민’을 양성하는 사회교화사업의 중요성을 깨 닫게 되었고, 이로써 각 지역에 위치한 향교를 사회교화사업 기관으로 설정 하여 지역민의 사상 교화를 담당하게 하였다.26) 이때 교화(敎化)는 ‘유교 윤 리의 보급’이 아닌 ‘식민정책에 대한 순응’을 목적으로 하였기에 전근대 교화 와는 질적으로 다른 것이었다.

1920년부터 본격화 된 향교 내 사회교화사업은 조선총독부 향교재산 결산 내역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1919년 1920년

세입 세출 세입 세출

종별 금액(円) 종별 금액(円) 종별 금액(円) 종별 금액(円)

재산

수입 263,380 학교비 235,220 재산

수입 282,010 향사비 30,010 기타 91,640 향사비 6,382 기타 37,906 수리비 35,791

수리비 24,284 잡급잡비

(雜給雜費) 32,314 잡급잡비

(雜給雜費) 8,901 재산관리비 64,358

재산관리비 33,262 교화사업비 13,864

기타 10,336 보통학교

기부금 11,204 적립금 10,592 기본편입금 12,691 기타 1,694 예비비 107,398

합계 355,020 합계 318,385 합계 319,916 합계 212,518

*출전: 국가기록원 관리번호(CJA0004755 - 0027158125). 朝鮮總督府 內務局 社會課, 「豫算決算」, 1921, 10~13쪽.

<표 1> 1919년과 1920년 조선총독부 내무국 사회과 향교재산 결산 비교표

26) 조선총독부가 수행한 사회교화사업에 대한 자세한 사항은 다음의 논고를 참조. 설주희,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 사회교화사업연구」, 전주대학교 일반대학원 사학과 박사학위논 문,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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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 세출 항목에 부재하였던 ‘교화사업비’는 1920년에 신설되어 전체 세출 예산의 약 6.5%를 차지하였다. 1921년에는 그 비중이 더욱 확대되어 세출 예산의 약 13.1%까지 차지하였다.27) 1919년까지 향교재산 수입은 대부 분 보통학교 경비로 사용되었다. 하지만 1920년 「향교재산관리규칙(鄕校財 産管理規則)」이 제정되면서 각 향교 소유 재산은 전부 조선총독부 재산으로 귀속되었다. 조선총독부는 향교재산을 ‘지방 교화 진흥의 자원’으로 삼기 위 해 문묘 제사비와 교화사업비로 활용할 것을 공표하였고, 교화사업비의 지출 은 ‘각 향교 장의의 의견에 따라 사용됨’을 명시하였다.28)

1920년 조선총독부는 향교에 ‘장의’라는 직제를 만들어 지역 유림의 사회 진출을 촉발시킴과 동시에 ‘장의회(掌議會)’를 식민통치 자문기구로 활용하 였다. 또한 향교마다 직원(直員)을 두어 향교 행정을 담당하도록 하였고, 직 원의 임면은 전적으로 관이 주도하였다. 향교 직제 변화로 향교 재산과 운영 은 모두 조선총독부 통제 아래 이루어지게 되었다. 이 변화에 따라 향교는 선현의 가르침으로 지역민을 교화하는 역할을 잃고, 식민정책의 촌락 전파를 담당하는 공간으로 전락하게 되었다.29)

조선총독부는 향교재산의 중앙 귀속으로 지역 내 향교 운영비가 부족할 것을 예견하고, 향교 운영비 부족분을 유림의 의연으로 충당하도록 하였 다.30) 존성회 발기인 중 하나였던 김용규는 향교 직원이자 지역 유지로써

‘무너져가는 전주향교’의 건물을 보수하거나 석전제 운영을 위해 자신의 재 산을 의연하였다.31) 이로 보아 전주향교 역시 운영비 부족에 시달렸고 그

27) 1921년도 향교재산 세출 총액은 555,510円이며 그 가운데 교화사업비는 72,856円이다.

국가기록원 관리번호(CJA0004755 - 0027158153). 朝鮮總督府 內務局 社會課, 「大正10年度 鄕校財産 歲出入豫算 其他」, 1921, 5쪽.

28) 매일신보 , 1926년 9월 16일, 「鄕校財產과 社會敎化事業」.

29) 김순석, 「일제강점기 「향교재산관리규칙」 연구」, 태동고전연구 33, 한림대학교 태동고 전연구소, 2014; 류미나, 「식민지권력에의 ‘협력’과 좌절― 經學院과 향교 및 문묘와의 관계를 중심으로 ―」, 한국문화 36,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2005.

30) 조선일보 , <各郡鄕校直員에게告함 二>, 1920년 7월 8일 기사.

31) 泰仁鄕校, <1928년 3월에 태인향교에서 선사 김용규의 효우와 문학을 표창해야 한다는 내용으로 전주향교에 보낸 통문>, 1928. 호남기록문화시스템 참조. 검색일자 2020년 10월 20일. (http://honam.chonbuk.ac.kr/index.js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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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족분을 김용규의 기부로 충당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후 김용규는 1924년 존성회 조직을 제안하였고, 이를 계기로 지역 유지들이 발의하여 1925년 1월 존성회가 창립하게 되었다.32)

앞서 기술한 바와 같이 존성회는 1928년 자신의 기금을 사회교화사업에 활용하기로 선언하였다. 이들은 사업의 안정적이고 지속적인 수행을 위해 전 주 인접 지역인 봉동과 구이에 22두락(斗落)의 논을 구입하였다. 논에서 발생 하는 소작료로 사회교화사업을 수행하기 위함이었다.33) 존성회는 이 기금 수입을 활용하여 ‘독행자 표창’과 ‘신문 구독료 납부’ 활동을 하였다. 독행자 표창과 신문 구독은 다음의 표에서 제시한 바와 같이 조선총독부가 장려한 사회교화사업 활동 가운데 하나였다.

연번 지출내역 연번 지출내역

1 일본, 조선 시찰 여비 보조 7 서당(書堂) 교사 강습회, 서당 개선

2 강화(講話) 및 강연회 8 간이 도서관

3 학자금 보조 9 여자 강습회 및 주부회

4 독행자 표창 10 지방 개량 및 청소년 지도

5 유림 단체 표창

11 보통학교 기부

6 도서, 신문, 잡지 구독

*출전: 국가기록원 관리번호(CJA0004755 - 0027158153). 朝鮮總督府 內務局 社會課, 「大正10 年度 鄕校財産 歲出入豫算 其他」, 1921, 10~13쪽.

<표 2> 향교재산을 활용한 조선총독부 사회교화사업의 종류

1930년 존성회는 ‘윤리도덕을 존숭하고 예부터 이어온 미풍양속을 장려’

를 위한 독행자(篤行者) 표창식을 주최하였다. 전주군 내 거주자 가운데 효 (孝), 열(烈), 선(善) 세 부분의 독행자 13명을 선발해 표창한 것이다. 전주향 교 명륜당에서 열린 이 표창식에는 각 지역 군수와 면장, 참여관 이하 관공리 와 유지가 참석하여 축사를 하였다.34) 더불어 이해 예산 회의에서는 ‘신문

32) 全州鄕校, 앞의 책, 641쪽.

33) 全州鄕校, 앞의 책, 640쪽.

34) 매일신보 , <全州의 孝, 烈, 善表彰 尊聖會에서>, 1930년 4월 5일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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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독료 일체 납부’가 주 안건으로 상정되었고, 전원 찬성으로 가결되어 전주 향교는 매일신보 구독료를 일시에 납부하였다. 이로 보아 존성회가 지역 사 회의 식민지적 교화를 위해 조선총독부 식민정책을 보조하며 활동하였음을 알 수 있다.

향교의 이 같은 움직임을 전주의 한 유림은 다음과 같이 표현하였다.

내가 일제강점기 당시 향교에 한 번도 발길을 들이지 않았던 것은 부친께서 이에 대한 말씀이 없었기 때문이다. 부친께서는 오로지 조용한 곳에서 책을 읽으 라는 말씀만 해 주셨다. 내 나이 마흔 즈음 옥류동(玉流洞)에서 스승을 모시고 공부 하였는데, 옥류동은 향교와 매우 가까웠다. 이때 석전제(釋奠祭)에 대한 내용을 들 으니 석전제는 왜노(倭奴)가 전적으로 주관하고, (府)와 주(州)에서 유림(儒林)’

이라고 불리는 자들이 왜노에게 아첨하며 먹을 것을 구하는 데 불과하였다. 그제 야 부친께서 향교에 대한 말씀이 없었던 이유를 깨달았다. 부친께서는 실로 문을 닫아걸고 학문에 힘쓰게 하여, 스스로 성인(聖人)을 보호하는 것을 훌륭하게 여기 고, 또 선비의 출처를 소홀히 여기지 않도록 한 것이다.35)

전주에 거주한 이도형(李道衡)의 회고를 통해 일제강점기 전주향교에서 활동한 유림에 대한 이견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존성회와 전주향교 장의회는 유교 윤리 질서를 확립하기 위해 활동한다고 하였지만 향교 외부에서는 그들 을 다르게 평가하고 있었다.

1925년 설립된 전주향교 존성회는 전주 지역 유지들의 결의와 자본이 모 인 공동체였다. 유지들은 당초 유교 윤리를 회복시켜 사회의 안녕질서를 구 축할 것을 존성회 설립 목표로 하였지만, 실질적인 활동은 조선총독부의 향 교 운영 정책을 보조하는 형태에 그쳤다. 조선총독부는 지역사회 여론을 조 성하기 쉬운 유지의 사회적 위치를 이용해 촌락 지배의 효율적인 전파를 도 모하였다.

35) 李道衡, 앞의 책, 1954, 7~8쪽. 밑줄 강조 인용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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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5년 설립된 존성회는 1945년 해방 이후에도 존속되었다. 1945년 9월 존성회 총무를 맡고 있던 김명환(金明煥)은 존성회 회원 명부의 중간(重刊) 을 위해 금재(欽齋) 최병심(崔秉心)36)을 찾아가 서문(序文)을 부탁하였다. 존 성회가 수십 년 동안 지속되다 보니 명부에 사망한 자와 새로 입회한 자가 뒤섞여 있어 명부 수정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최병심은 서문을 작성하며 ‘존 성’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가하였다.37)

존성(尊聖)’이란 마땅히 해야 할 일이다. 이름에 그치면 안 된다. 충성으로 공부 하고 효도를 권고하며 예를 지키고 의를 돈독히 하여 몸을 깨끗이 하고, 실행을 다듬어 곧은 것을 지키고 덕을 세워 성인의 가르침을 다시 밝게 하면 삼강오륜이 다시 세워지리니 여러 군자들이 어찌 힘쓰지 않겠는가.

최병심은 ‘존성’을 당연히 해야 할 일로 명시하며 허울뿐인 이름보다는 실질적인 행동을 실천해 공자의 가르침을 다시 밝게 해야 한다고 하였다.

하지만 해방 이후 존성회는 유림 사회의 균열과 사회적 혼란 속에 그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38)

3. 유림 사회 균열과 위성계(衛聖契) 설립

1945년 해방이 되면서 각 지역에 수많은 사회단체가 생겨났다. 조선총독

36) 최병심(崔秉心, 1874~1957). 본관은 전주, 호는 금재(欽齋)이다. 이병우(李炳宇)와 전우(田 愚)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1917년 조선총독부가 잠업소 설치를 위해 전주 최씨 가문이 소유한 땅을 강제로 매입하려 할 때 최병심이 극력 반대하였고, 결국 일본 경찰이 최병심의 집을 소각하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최병심은 굴하지 않고 불에 탄 집터에 누워 끝까지 토지 를 매각하지 않았다. 일제강점기 당시 옥류동(玉流洞)에 거주해 ‘옥류동 최학자’로 불렸으며 해방 후 초대 전주향교 재장(齋長)에 올랐다.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에 추서되었다.

37) 全州鄕校, 앞의 책, 2004, 641쪽.

38) 현재 전주향교 내에 조직되어 있는 ‘전주향교존성회’는 1980년대에 재조직된 공동체이다.

전주향교 소장문서에 따르면 현 존성회는 초대 회장의 재임기간을 1988년부터 1991년으 로 명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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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의 유림 동원 기관이었던 경학원(經學院) 또한 사회단체로 전락하였다. 미 군정청은 일제강점기 교육 담당 부서 가운데 하나였던 경학원을 유교 중심의

‘사회단체’로 분류해 군정 소속 부서에서 제외시켰고, 경학원의 완전한 자치 를 인정하였다. 이로써 유교문화의 재흥(再興)을 주장하는 수많은 유림단체 가 생겨나기 시작했다.39)

유림단체의 난립으로 무질서한 유교문화 재건 운동이 이루어지자 유림 사 회 내부에서는 이를 한 방향으로 통합할 수 있는 단체 설립의 필요성을 느끼 게 되었다. 이에 1946년 서울에 유도회 총본부가 세워졌고 초대 위원장으로 심산(心山) 김창숙(金昌淑)이 추대되었다. 김창숙은 가장 먼저 향교재산을 각 향교로 다시 귀속시키고, 유교대학 설립을 주장하는 등 적극적인 사회 운동 을 펼쳤다.

김창숙은 이와 함께 문묘(文廟)에 모셔진 위패 중에 중국 성현의 위패가 우리나라 현인의 위패보다 많은 점을 ‘사대주의’라고 비판하며, 중국 성현의 위패를 모두 매안(埋安)할 것과 재원 절약을 위해 매년 2차례 지내던 석전제 를 1차례로 축소할 것을 각 향교에 통고하였다. 이에 1949년 5월 15일 성균관 이 가장 먼저 위패 매안을 시작하였다. 매안을 마친 성균관은 각 향교에 6월 1일까지 위패를 매안할 것을 지시하였다.40)

성균관의 지시와 민족국가 수립을 위한 열망이 맞물려 지역 향교에서도 점차 위패를 매안하기 시작하였다. 경상남도 창원향교(昌原鄕校)는 석전제 당일에 위패를 매안할 예정이니 많은 이들이 참석해 달라는 홍보 기사를 내 기도 하였다.41) 하지만 전라북도 내 향교는 타 지역과 달리 위패 매안에 매우 부정적인 입장을 표명하였다. 전북지역은 간재학파(艮齋學派)의 영향력이 강 한 지역이기 때문이었다.

간재(艮齋) 전우(田愚)42)는 근대의 도래로 유교문화가 쇠퇴하자 ‘유교는

39) 심산사상연구회, 김창숙문존 , 성균관대학교출판부, 1987, 280~291쪽.

40) 박민희, 「해방 후 위패매안과 전주향교의 대응」, 전주대학교 일반대학원 사학과 석사학위 논문, 2013, 12~19쪽.

41) 南朝鮮民報, <孔子祭奠 今日擧行>, 1949년 10월 18일 기사.

42) 전우(田愚, 1841~1922). 본관은 담양, 호는 간재(艮齋)⋅추담(秋潭)⋅구산(臼山)⋅고옹(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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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지않아 회복될 것’이라고 주장하며 ‘석과불식(碩果不食)’을 위해 전통 유 학을 고수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유교문화가 다시 번성했을 때 자신이 지 켜온 전통 유학으로써 공자의 도통(道統)을 이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 다. 그는 전통 유학을 지켜나가기 위해 끊임없이 강학하였고, 그 결과 전우가 말년에 거처하며 강학한 전북지역에서 가장 많은 문인이 배출되었다.43)

전우 문인 중 전주향교에 지극한 관심을 기울인 사람은 고재(顧齋) 이병은 (李炳殷)이었다. 이병은은 전주향교가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에 무너지는 것 을 막기 위해 완주 구이에서 전주향교 옆으로 거주지를 옮겨 향교를 지키고 자 하였다. 유학적 도통을 후대에 전해야 한다는 스승의 가르침에 따른 것이 었다. 전우의 고제(高弟)로 손꼽히는 그는 전우의 학문적 지침에 따라 유학은 오로지 강학을 통해 재건되는 것이며, 중국 선현의 위패를 매안하는 것은 윤리강상에 어긋나는 일임을 주장해 위패 매안을 반대하였다. 전북 내 다른 향교 역시 전주향교의 예를 들어 위패를 매안하지 않겠다고 성균관에 통고하 였다.44)

이에 성균관은 각 지역에 임원을 보내 향교 유림을 설득하였고, 점차 전북 지역 내 향교에서도 위패 매안이 시작되었다. 이병은은 아들 이도형(李道衡) 과 함께 끝까지 전주향교의 위패를 매안하지 않아 결국 1950년 3월 감옥에 투옥되었다. 성균관은 이들이 투옥된 직후 전주향교 내 위패를 소각해 1년 만에 위패 매안을 마칠 수 있었다.45) 소각 이후 이병은은 이도형에게 다음과 같은 당부를 하였다.46)

翁)⋅양하왕인(陽下尫人)이다. 전재(全齋) 임헌회(任憲晦) 문하에서 수십 년간 수학하여 매산(梅山) 홍직필(洪直弼)의 학문 계통을 잇게 되었다. 일본이 지배하는 땅에서 살 수 없다고 여겨 여러 섬에 들어가 ‘부해(浮海)’하는 삶을 고수하다 말년에 부안 계화도에 정착하였다. 이때 전국의 수많은 유학자들이 집지(執持)하였다. 간재 전우 문인록인 화도 연원록(華嶋淵源錄) 에 따르면 전라북도 출신의 문하생이 가장 많다.

43) 박학래, 「艮齋學派의 學統과 사상적 특징」, 유교사상문화연구 28, 한국유교학회, 2007.

44) 李道衡, 앞의 책, 1954, 12쪽.

45) 박민희, 앞 논문, 2013, 20~34쪽.

46) 李道衡, 앞의 책, 1954, 12~1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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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친(이병은-인용자)께서 말씀하시기를 오백년 동안 봄가을 상정일(上丁日)에 석전제를 지냈는데, 이제 전례 없이 위패가 불태워졌으니 형세상 (석전제가) 사라 지고 말 것이다. 다행히 공자와 선정(先正)의 위패는 나쁜 화를 면하였지만, 만약 이를 편안히 여긴다면 이마저도 불태워 없어질 것이다하시고는 나에게 향교에 출입해 감독하여, 제때에 인사들을 모아 포(脯) 한 장과 약간의 나물로 제사를 지 내라고 하셨다. 다행히 제사를 거르지 않고 지낸 지가 몇 년 되었지만, 시기가 어지럽고 흉년이 거듭 들어 참으로 해마다 지속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이병은은 소각된 위패처럼 석전제마저 사라질 것을 염려해 이도형에게 향 교를 출입하며 석전제를 유지하도록 당부하였다. 이로써 이도형은 일제강점 기 당시 ‘왜노(倭奴)의 아첨’으로 점철되어 있어 출입하지 않던 향교에 출입 하기 시작하였다. 이병은은 각 향교에 통문을 보내 ‘성균관에서는 재산상의 이유로 석전제를 1년에 1번만 지내도록 하지만 이는 옳지 못하다’고 하며, 석전제가 이전과 같이 매년 2번씩 행해져 유가(儒家)의 전통이 사라지지 않 도록 해 줄 것을 당부하였다.47) 하지만 1950년대 초반 거듭된 흉년으로 매년 2회에 걸쳐 석전제를 지내는 것이 어렵게 되자, 이도형은 1952년 12월 전주 향교의 안정적 운영을 위한 ‘위성계(衛聖契)’를 조직하게 되었다.48)

뜻이 같은 사람들과 의논해 약간의 돈을 거두어 계를 만들었다. 본전은 그대로 두고 이자를 취하여, 이자의 2/3는 봄가을 양정일(兩丁日)에 제사 지내는 데 쓰고, 1/3은 다시 이자를 불려 위패를 복원해 봉안하는 데 쓰려는 것이 목적이다. 마침내 계원 백여 명을 뽑았는데 모두 같은 군(郡)에 대대로 거주하는 명문가였다. 나머지 는 본적이 우리 군이 아니거나, 우리 군이지만 벽지(僻地)에 사는 사람이다. 이들은 오직 성묘를 보호하고 배우기를 바라는 인사이다. 계에 들기를 원하는 자를 허락 하니 이 또한 백여 명이었다.

47) 李道衡, 앞의 책, 1954, 27~28쪽.

48) 李道衡, 앞의 책, 1954, 12~1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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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도형은 1952년 위성계를 설립해 2가지의 목적을 달성하고자 하였다. 첫 째, 매년 두 차례 석전을 지내고 둘째, 훼손된 위패를 다시 제작해 봉안하는 것이었다. 이도형은 성현을 봉양하는 데 사농공상(士農工商)의 구분이 없다 고 하며 성현의 글을 읽고 음미해 성현의 가르침을 전파하는 데 힘써야 한다 고 강조하였다. 그와 뜻을 같이하기 위해 전주 내외에 거주하는 332명(전주 35명, 완주 292명, 익산 1명, 미상 4명)이 위성계에 입계(入契)하였다.49)

계가 결성된 뒤 이도형은 “지금 서양의 풍조와 미국의 풍속이 천지에 넘친 다고 하지만 짐승이 아니라면 성현의 가르침이 나쁘다고 할 수 없다”며 “빈 산의 불가(佛家)도 아침저녁으로 부처에게 공양하고, 서양에서 온 예수교도 한 달에 네 번 예배를 올린다. 하지만 유독 성묘에 위패를 봉안하고 양정일에 제사를 올리는 것을 눈엣가시처럼 여겨, 갓을 높이 쓰고 띠를 드리운 선비가 벌레처럼 칩거하고 거북이처럼 숨어들었다. 향교 안에 그림자 하나 없다”고 한탄하였다.50)

완주 구이에 거주하던 유림들 역시 “집집마다 ‘주일’을 찾으며 교회 종소 리를 듣고 분분히 달려 나간다. 수백 년 동안 높이 받들었던 부자(夫子)의 사당은 적막하여 사람이 없고 봄풀만 뜰에 가득하니, 아, 슬프다.”51)고 표현 하였다. 1950년대 초반 유학에 대한 부정적인 시선은 유림들에게 고스란히 전가되었고, 이는 향교의 쇠퇴를 추동하였다. 때문에 더욱 도통을 이어가고 자 했던 이도형은 퇴색한 유교를 부흥시키고 무너져가는 전주향교를 보수하 고자 위성계를 조직하였다.

하지만 위성계가 설립된 1952년 12월은 한국전쟁이 진행 중이었다. 전주에 서도 전쟁의 참화를 피하기 위해 전국 각지로 피난을 간 사람이 많아 위성계의 설립 소식을 듣지 못한 이들이 많았다. 이후 휴전 협정이 맺어지고 피란민이 귀향한 1954년 말, 본격적으로 위성계를 확장하려는 분위기가 형성되었다.52)

49) 李道衡, 앞의 책, 1953.

50) 李道衡, 앞의 책, 1954, 12~15쪽.

51) 李道衡, 앞의 책, 1954, 30~31쪽.

52) 李道衡, 앞의 책, 1954, 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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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전 : 李道衡, 癸巳三月衛聖案 , 미상, 1953. 개인소장본.

<그림 2> 1953년 󰡔癸巳三月衛聖案󰡕 표지와 계원 좌목(座目)

우리 교궁(校宮)을 거듭 새롭게 한 것은 모두 뜻이 맞는 많은 사람들이 함께한 덕분이니, 계안(契案)을 만들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런데 앞서 임진년(1952) 계안 을 만들 당시에 난리를 피하느라 알지 못했거나, 알더라도 혹 나서지 못한 사람이 있었는데, 지금 한목소리로 뒤미처 계에 들기를 바라고 있으니, 거듭 간행하는 것 을 어찌 그만둘 수 있겠는가.

위성계 확장은 계원의 적극적인 모집 활동을 통해 이루어졌다. 계원은 거 주지 내 지역민이나 지인을 만나 위성계 설립 목적을 설명하여 신규 계원을 모집하였다.53) 그 결과 1952년 332명이었던 계원이 656명으로 늘어났고, 전 주, 완주, 익산 외 남원 거주자도 입계하였다. 지역별 가입 인원 변화는 다음 표와 같다.

53) 李道衡, 앞의 책, 1954, 8~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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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 전주 완주 익산 남원 미상 합계

1952년 35 292 1 0 4 332

1954년 103 548 1 1 3 656

<표 3> 1952년과 1954년 지역별 위성계 가입 인원 (단위 : 명)

전주와 완주는 이병은과 이도형이 거주하였던 지역이다. 전주보다 완주의 계원이 더 많은 이유는 당시 완주가 10개의 면(面)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 다. 완주 지역의 계원들은 모두 구이(九耳)⋅우전(雨田)⋅이서(伊西)⋅상관 (上關)⋅용진(龍進)⋅소양(所陽)⋅초포(草浦)⋅조촌(助村)⋅삼례(參禮)⋅봉동 (鳳東)의 10개 면에 거주하고 있었다. 전주보다 완주의 범위가 더 넓었기에 완 주 지역의 인원수가 더 많았던 것이다. 익산과 남원에서 가입한 인물은 이맹승 (李孟承)과 방진(房珍)인데, 익산의 이맹승은 이도형과 혈연관계에 있었고,54) 남원의 방진은 이병은과 함께 전우의 문하에서 수학한 간재 문인이다.55)

이도형은 위성계의 계원 명단을 작성하며 계원의 학통(學統)을 밝히기 위 해 몇몇 인물에게 스승명을 부기하여 두었다. 계원 가운데 스승명이 부기된 인물은 총 43명이다. 스승 분석 결과 43명은 최병심, 이병은, 소학규(蘇學奎), 조희제(趙熙濟), 이병하(李炳夏)의 제자였다. 최병심, 이병은, 소학규, 조희제, 이병하는 전우의 제자였기에 43명은 전우의 재전(再傳) 제자로 볼 수 있다.

따라서 위성계원은 이병은⋅이도형 부자의 학문적, 혈연적, 지역적 연고가 있는 이들로 구성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위성계원들은 매년 1월 15일과 7월 15일에 회비를 납부하였다. 회비는 전 주향교의 건물 보수비용과 매년 2차례 이루어지는 춘계⋅추계 석전제 비용 으로 충당되었다. 더불어 지역의 효열자를 포상하는 데 활용하거나, 계원 가 운데 화(禍)를 당한 이를 도와주는 용도로 사용되었다. 조약문에 따르면 계원 들은 ‘권세와 지위에 상관없이 어린 사람은 어른을 공경’해야 했고 ‘오로지 효제충신(孝悌忠信)과 예의염치(禮義廉恥)를 본무(本務)’로 삼는 삶을 살기

54) 李道衡, 앞의 책, 1954, 162쪽.

55) 李道衡, 華嶋淵源錄 上, 南安齋, 1962, 9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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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전 : 李道衡, 全州衛聖案 , 全州衛聖案重刊所 編, 1954. 국립중앙도서관 소장본

<그림 3> 1954년 󰡔全州衛聖案󰡕 표지와 계원 좌목(座目)

로 약속하였다. 이를 어길 시에는 계안에서 이름을 삭제하도록 하였다. 위성 계는 이 조약을 설정하여 지역사회 활동을 실행하는 목적이 오로지 ‘공자의 도를 지키고 문묘를 보호해 대대로 이를 전하기 위함’이자 ‘유학의 풍습을 다시 일으키기 위함’이라고 하였다.56)

일제강점기와 해방 이후 전주향교 내에 세워진 두 공동체는 같은 목표를 표방하였지만 실질적인 활동 양상은 달랐다. 일제강점기에 설립된 존성회는

‘유학 진흥’을 표방하며 설립되었지만, 지역 유지 중심으로 구성된 공동체였 기에 조선총독부의 식민정책을 보조하는 형태를 취했다. 때문에 존성회 활동 은 지배정책의 촌락 전파를 위해 수행되었다. 해방 이후 설립된 위성계는 해방이라는 사회적 혼란 속에 일어난 유림 사회 내의 균열, 그리고 일반사회 에 널리 전파된 유학 혐오 사상의 제어를 위해 설립된 지역공동체였다. 전주 향교의 인프라를 재구축해 지역 내 유교문화의 부흥을 이끌어내고자 하였지

56) 李道衡, 앞의 책, 1954, 8~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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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 한국전쟁의 발발로 쉽게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결국 종전 이후 사회가 다소 안정화된 1954년에서야 위성계는 완성될 수 있었고, 계원의 확장과 함 께 조약 및 활동 사항을 정하여 전주 지역의 유풍(儒風) 진작을 도모할 수 있었다.

이처럼 동일 기관에서 동일한 목적을 표방하며 설립된 공동체임에도 불구 하고 두 단체의 활동 성격은 상이하다. 두 공동체에는 일제강점기와 해방이 라는 시기 전환이 거시적인 변화 요인으로 작용하였고, 미시적으로 구성원 교체가 영향을 미쳐 활동상에 큰 간극이 개재하게 되었다. 향교라는 유교 문화의 소산은 원거리에서 조망할 때 전근대와 근대, 현대를 가로지르는 하 나의 선(線)으로 분석되지만, 근거리에서 관찰하면 크고 작은 공동체가 끊임 없이 생성⋅소멸하며 지속된 연속과 단절의 점(點)으로 그려진다. 때문에 탈 유교사회 속 향교의 의미는 조망보다 ‘접안(接眼)’ 할 때 더 많은 이야기를 도출해 낼 수 있다.

향교의 정체성은 향교를 점유하고 있는 지역공동체의 성격에 따라 결정된 다. 때문에 향교 연구를 위해서는 ‘공간’으로서의 향교가 아니라, 지역공동체 의 ‘집결지’로 위치했던 향교에 주목해야 한다. 근대 이후 향교가 유교 문화 의 재현 공간으로만 존재한 것이 아니라 지역공동체의 의견에 따라 소비된 유교 문화의 부산물이었기 때문이다. 탈유교사회에 여전히 존재하고 있는 향 교는 향교만의 역사가 아니라, 향교를 공유하고 있던 인간과 공동체의 발견 을 통해 보다 넓은 시각으로 재해석할 필요가 있다.

4. 맺음말

전근대 향교는 향촌 교육과 지역민 교화의 구심점이었고, 근대에는 식민권 력에 흡수되어 촌락지배 선전기관으로 작동하였으며, 현대에는 유교 문화 부 흥을 위해 공자 사상을 전파하는 기관으로 이어져 왔다. 이처럼 향교는 전근 대부터 현대에 이르는 거시적인 시대 변화와 함께 미시적인 지역 사회 변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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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담겨 있는 상징적인 공간이다.

1925년 설립된 전주향교 존성회는 전주 지역 유지의 결의와 자본이 모인 공동체였다. 유지들은 당초 유교의 윤리 질서를 회복시켜 사회의 안녕질서를 구축할 것을 존성회 설립 목표로 하였지만, 실질적인 활동은 조선총독부의 향교 운영 정책을 보조하는 형태에 그쳤다. 조선총독부는 지역사회 여론을 조성하기 쉬운 유지의 사회적 위치를 이용해 촌락 지배의 효율적인 전파를 도모하였다. 하지만 해방 이후 존성회는 유림 사회의 균열과 사회적 혼란 속에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1945년 해방 이후 김창숙은 문묘 내 중국 선현의 위패 매안과 석전제 축소 를 주장하였다. 그러나 전우의 제자인 이병은은 이에 반대하였다. 이병은은 스승의 학문적 지침에 따라 유학은 오로지 강학을 통해 재건되는 것이며, 중국 선현의 위패를 매안하는 것은 윤리강상에 어긋나는 일임을 주장해 위패 매안을 반대하였다. 이병은은 자신의 아들 이도형과 함께 끝까지 위패를 매 안하지 않아 결국 1950년 3월 감옥에 투옥되었다. 성균관은 이들이 투옥된 직후 전주향교의 위패를 소각해 1년 여 만에 위패 매안을 완료하였다. 이병은 과 이도형은 다시 위패가 소각되거나 전주향교가 재원 부족에 시달리지 않도 록 하기 위해 위성계를 설립하였다.

전주향교 내에 세워진 두 공동체는 같은 목표를 표방하였지만 실질적인 활동 양상은 달랐다. 일제강점기에 조직된 존성회는 ‘유학 진흥’을 목적으로 하였지만 지역 유지 중심으로 구성된 공동체였기에 조선총독부의 식민정책 에 흡수되기 쉬웠고, 결국 지배정책의 촌락 전파를 위해 활동하게 되었다.

해방 이후 설립된 위성계는 해방이라는 사회적 혼란 속에 일어난 유림 사회 내의 균열, 그리고 일반사회에 널리 전파된 유학 혐오 사상의 제어를 위해 설립된 지역공동체였다. 하지만 이는 한국전쟁의 발발로 쉽게 이루어지지 못 하였다. 결국 종전 이후 사회가 다소 안정화된 1954년에서야 위성계는 완성 될 수 있었다.

동일 기관에서 동일한 목적을 표방하며 설립된 공동체임에도 불구하고 이 들의 성격은 상이하였다. 두 공동체 사이에는 일제강점기와 해방이라는 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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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사회적 전환이 외부 요인으로 개재하였고, 내부적으로는 구성원의 변화가 큰 영향을 미쳤다. 때문에 존성회와 위성계는 각기 다른 형태의 성현 보호 운동을 수행하였다.

향교의 정체성은 향교를 점유하고 있는 지역공동체의 성격에 따라 결정된 다. 때문에 향교 연구를 위해서는 ‘공간’으로서의 향교가 아니라, 지역공동체 의 ‘집결지’로 위치했던 향교에 주목해야 한다. 근대 이후 향교가 유교 문화 의 재현 공간으로만 존재한 것이 아니라 지역공동체의 의견에 따라 소비된 유교문화의 부산물이기 때문이다. 탈유교사회에 여전히 존재하고 있는 향교 는 향교만의 역사가 아니라, 향교를 공유하고 있던 인간과 공동체의 발견을 통해 보다 넓은 시각으로 재해석할 필요가 있다.

논문제출 : 2020년 10월 30일∥심사마감 : 2020년 12월 4일∥게재결정 : 2020년 12월 1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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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tablishment of Community in

Jeonju-hyanggyo(全州鄕校) and Community Activities in Modern History

SEOL Juhee

In December 1924, a movement to form a new community began in Jeonjuhyanggyo Confucian School in Jeollabuk-do. Yu-rim (儒林, Confucian scholar) that belonged to Jeonjuhyanggyo Confucian School lamented that ‘morality is slowly disappearing in society, and Confucian order declined that the society is becoming disastrous.’ Yu-rims held a meeting to establish Jonseonghoe(尊聖 會) in order to eliminate moral laxity and spread Confucian morality in the society.

Yu-rims who attended the meeting formed public opinion and established Jonseonghoe the next month, January 1925. Most of these Yu-rims were community leaders who maintained certain social status in the community. Most were in government service during the Japanese Colonial Era, or in financial business or social organizations and were trusted by both the government and community.

Since most of the members of Jonseonghoe were community leaders, Jonseonghoe had naturality with Japanese Government-General of Korea.

At the time of organization in January 1925, 270 Yu-rims raised 1,000 won (圓) as Jonseonghoe fund. 3 years later in 1928, this fund doubled to 2,000 won. Yu-rims announced to use this fund for social indoctrination. Since the 1920s, social indoctrination was the main policy of Japanese Government-General of Korea because they had to refine the public sentiment, which was intensified due to March 1st Movement in 1919. Members of JonseongHoe worked for this social indoctrination.

(29)

Jonseonghoe lasted until Joseon was liberated in 1945. In September 1945, Jonseonghoe member list was re-published. However, with the outbreak of the Korean War in 1950, Jonseonghoe was naturally disbanded. Later in 1952, when the traces of war still lingered, a movement to preserve Jeonjuhyanggyo Confucian School began. It was suggested by Lee Byeong-eun and his son, Lee Do-hyeong, who moved next to the school to protect it. They formed Wiseonggye (衛聖契) to repair ruined Jeonjuhyanggyo Confucian School and revive the community activities of the school. They were going to gather the Yu-rims spread throughout Jeonju area through Wiseonggye, and use donation for the repair and operation of Jeonjuhyanggyo Confucian School. However, public opinion was not formed easily, and this plan failed at the time in 1952. Lee Do-hyeong proposed it again in 1954, and at the end, Wiseonggye was established in 1954.

Key Words : Jeonju(全州), Confucianism, Japanese Government-General of Korea, Community, Japanese Colonial E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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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TAEDONG CENTER FOR EASTERN CLASSIC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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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ymbolism of Seokjeon and the Colonial Transformation of Hyanggyo Seokjeon during the Japanese Colonial Perio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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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SN 1225-9152

Special Issue

Articles

Translation

Book Review

Volume 45, December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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