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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와 자유민주주의와 평화통일을 추구하는 인사를 합리적 보수주의자로 규정할 수 있다. 조선어학회 인사의 대다수가 여기에

42) 「여론은 이러타 : 좌우합작을 지지 정권수립후에 신탁은 론의」, 󰡔동아일보󰡕, 1946, 7, 16.

43) 「해방기념가」 제정대한연예협회에서」, 󰡔동아일보󰡕, 1946, 7, 27.; 「해방기념가」,

󰡔자유신문󰡕, 1946, 8, 9.

44) 유열, 「사전 간행 축하회」, 󰡔한글󰡕104, 1948, 6.

45) 최경봉, 󰡔우리말의 탄생󰡕, 책과함께, 2005, 336쪽.

해당한다. 앞 장에서 살펴본 민주주의 국가 건설에 참여한 6명(이인, 김양수, 윤병호, 서민호, 김윤경, 김도연)의 인사도 여기에 해당한다.

아울러 조선어학회 인사 가운데 16명(최현배, 이희승, 정인승, 정태 진, 이중화, 김법린, 장현식, 장지영, 이석린, 권승욱, 이강래, 김선기, 서승효, 정인섭, 신현모, 안호상)도 이 범주에 들어간다. 하나하나 살 펴보자.

최현배는 해방 이후의 국어정책 수립과 문자생활에서 한글전용정 책이 뿌리내리게 하였다. 미군정청 문교부 편수국장에 재임 시절에 그는 국가의 공문서와 교과서를 한글 전용으로 사용하고, 가로쓰기 를 관철시켰다. 그는 국회로 하여금 ‘한글 전용법’(1948)을 제정하게 하였다. 이후 그가 일관되게 주장한 한글 전용 주장은 박정희 정권의 국어정책에 반영되었다. 한글 나라의 실현은 그의 서거 이후에야 이 루어졌다.

한편 그는 해방 후 독재정치를 비판한 사회사상가로서 일생을 보 냈다. 그는 학문을 위한 학문을 하지 않았다. 부조리한 현실의 개혁을 위해 학문에 매진하였다. 그의 학문에는 실천성이 담보되어 있었다.

그의 저서는 절체절명의 위기의식의 산물이었다. 󰡔우리말본󰡕과 󰡔한 글갈󰡕 등 수많은 우리 말글 연구는 일제의 조선어 말살에 대항하고 자 나왔다. 󰡔나라사랑의 길󰡕(1958)과 󰡔나라 건지는 교육󰡕(1963)은 이 승만 정권의 부정부패와 한국 교육계의 부패를 비판하면서, 이의 타 개책을 제시하였다.

이희승은 해방 이후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교수로 있으면서 국어 학자로서의 활발한 활동을 하였다. 그는 우리나라 국민의 문자생활 에서 국한문혼용을 내세웠다.

그러나 국한문혼용체의 문장은 우리민족 전체 누구나가 읽고 쓰기 를 할 수 없게 한다는 점에서 명백한 한계를 가지고 있다.

1980년대에 들어가 이희승은 남북통일에 대한 자신의 신념을 다음

과 같이 분명히 밝혔다.

인류역사를 보아도 언어가 같은 사람 사이는 서로 엉키는 힘이 작용하게 되어 있었다.(중략)지금의 분단은 역사방향의 역행이다. 그 역행이란 우리 민족의 의사가 아니다. 강대국이 저희끼리 차치고 포치고 한 것이다. 우리 의견을 언제 묻기나 했던가, 그건 아주 부자연한 일이다. 부자연한 것은 물 리학적으로 언제든지 자연한 상태로 옮겨가고야 만다. 부자연한 것에 걸려 있는 힘이 약화되거나 해소되면 뭉치고 만다. 그것이 내 신념이다.46)

현재의 남북 분단은 역사의 진행방향에 역행하고 있기에, 이를 타 파해야 한다는 이희승의 유지는 합리적인 주장이라고 볼 수 있다.

정인승은 민족문화의 금자탑인 󰡔조선말큰사전󰡕을 완간하였다. 이 사전은 16만 이상의 우리말 어휘에 대해 뜻풀이를 하였다. 󰡔조선말 큰사전󰡕은 뒷날 남북한 국어사전의 모범이 되었고, 국어의 발달에 커다란 기여를 하였다. 전북대학 교수와 건국대학교 교수로 있으면 서, 국어와 관련된 󰡔한글독본󰡕(1946), 󰡔표준 중등말본󰡕(1949), 󰡔표준 옛글󰡕(1955), 󰡔표준 고등말본󰡕(1956), 󰡔의문 해설 한글 강좌󰡕(1960), 󰡔표 준 문법󰡕(1968) 등의 저서를 남겼다.

정태진은 해방 뒤 조선어학회에서 󰡔조선말큰사전󰡕 편찬에 집중하였 다. 아울러 여러 대학에도 출강하였다. 그는 󰡔한자 안쓰기 문제󰡕(1946),

󰡔중등국어독본󰡕(1946), 󰡔고어독본󰡕(1947), 󰡔조선 고어 방언사전󰡕(1948) 등을 발간하였다.

이중화는 해방 뒤 다시 조선어학회에 들어가 󰡔조선말큰사전󰡕의 편 찬위원 활동하였다. 1948년부터 국학대학의 학장을 역임하였고, 1949 년 조선어학회의 후원재단인 ‘한글집’의 초대 이사장으로 선임되었 다. 6⋅25전쟁 때 인민군에 납치되었다.

46) 「원로탐방, 방송 요즘 어떻습니까, 이희승과 송정숙 대담」, 󰡔방송연구󰡕7, 1983, 12, 52쪽.

한용운의 제자인 김법린은 해방 뒤 1945년 조선불교중앙총무원 초 대 원장을 역임하여 불교를 개혁하였다. 혜화전문학교에서 강의도 겸하였다. 1946년 비상국민회의 대의원과 입법의원의 의원에 선임되 었다. 1948년 민의원 의원 겸 동국대학 교수, 감찰위원회 위원이 되 었다. 1952년 제3대 문교부장관에 취임하였다. 1954년 제3대 민의원 총선거에서 당선하였고, 국회 문교위원장에 선임되었다. 1963년에는 동국대학교 총장으로 취임하였다. 1964년 3월 14일에 별세하였다.

이인도 통일에 대해 합리적인 주장을 하였다. 그는 1972년 5월 “우 리의 운명은 우리 손으로 개척해야 합니다. 시기의 빠름과 늦음은 있 을망정 통일은 되고 맙니다. 피는 물보다 더 진합니다. 제부모형제는 반드시 다시 결합하게 되어 있습니다. 통일문제에 관한 한 독일에서 배워야 합니다.”47)라고 절규하였다.

장현식은 해방 후 제2대 전북도지사를 지냈다. 1950년 제2대 국회 의원 선거에 출마하였으나, 유권자 앞에서 말을 더듬어서 낙선하였 다. 그가 말을 더듬게 된 사연을 유권자들이 알 턱이 없었다.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일제에 검거된 뒤에, 그는 일본 경찰로부터 혹독한 고문을 당하였다. 일본경찰은 장현식을 심문하던 도중에, 장 현식의 혀에 대못을 박기까지 하였다. 이로 인해 그는 평생 말을 더 듬어야 했다. 6⋅25전쟁 기간 인민군에 의해 납북되었다. 1950년 10 월 24일에 서거하였다.

장지영은 해방 뒤에 조선어학회 14대와 15대에 걸쳐 이사장을 역 임하였다. 아울러 미군정청 학무국 편수과장, 세종중등국어교원양성 소 소장, 연세대 교수로 재직하였다. 조선어학회 이사장 시절에 그는

「나랏 말을 깨끗이 하자」(󰡔한글󰡕98, 1946, 11)라는 글을 통해, 일본정 신이 남아있는 일본말을 청산하고 민족혼이 담겨있는 우리말을 쓰자 고 호소하였다.

47) 이인, 󰡔반세기의 증언󰡕, 명지대학출판부, 1974, 300쪽.

아울러 그는 「절박한 요청-문화인의 건의」(󰡔경향신문󰡕, 1949, 7, 26) 라는 글에서 공문서와 신문, 잡지와 법률 등을 한글로만 써야함을 강 조하였다. 장지영은 1976년 3월 15일 서거하였다.

이석린은 해방 뒤 조선어학회에 정회원으로 활동하면서, 문산농업 고등학교와 용산에 있던 철도학교와 양정고등학교에서 국어교사가 되었다. 일본을 이기기 위해 일본어 문법을 연구하다가 1999년 5월 10일에 서거하였다.48)

권승욱은 해방 뒤 조선어학회가 추진 중이던 󰡔조선말큰사전󰡕(총 6 권) 편찬 사업에 편찬 위원으로 모두 참여하였다. 아울러 수도여자사 범대학 강사, 건국대 강사를 역임하였다. 1956년 국정교과서(국어)의 편찬 위원으로, 1957년 국정교과서 도서편찬심의회 국어과 위원으로 활동하였다.

이강래는 해방 뒤 한글학회 이사, 한글 전용 촉진회 위원으로 활동 하였다. 배화여고 교장, 경복고 교감으로도 봉직하였다. 1967년 2월 19일 별세하였다.

김선기는 해방 이후 1946년 연세대 영문학과 교수로 복직하였다.

1950년 서울대 언어학과 교수로 자리를 옮겼다. 1956년 한국 언어학 회를 창립하고 초대 회장에 선임되었다. 1958년에서 1960년까지 문 교부 차관을 역임하였다.

김선기는 우리 국민이 문자생활에서 국한문을 혼용해서는 안 되고 한글 전용을 해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1966년경에 그는 텔레비전 공 개 토론에서 “한글 전용 사용은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며, 한글이 있 으므로 한국은 세계에서 10대 강국이 될 것”이라고 주장하였다.49) 노 무현 정권 때 한국은 10대 강국이 되었다.

48) 박용규, 「조선어학회사건의 마지막 생존자, 또나 이석린 선생」, 󰡔우리교육󰡕

44호, 1993, 10, 34∼39쪽.

49) 김선기, 󰡔탄신 100돌 기념 무돌 김선기 선생 글모이󰡕Ⅴ(무돌 김선기 선생 논 문⋅산문집), 2007, 한울, 173쪽.

그는 1975년 「나랏글은 한글만으로」라는 글에서, 한글만으로 문자 생활을 한다면, 우리나라는 일본보다 500년, 중국보다 1,000년을 앞서 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50)

계속해서 1976년 「한글과 겨레해방」이라는 글에서, 한글 맞춤법이 두 쪽으로 나뉜 “겨레를 묶어 하나가 되게” 하였다고 하면서, 한글 전용으로 문자 생활에서 문화 통일을 가져와 남북이 하나가 되게 하 자고 역설하였다.51) 1992년 11월 11일에 서거하였다.

서승효는 광복 후 1945년부터 조선일보의 지방부장을 역임하였다.

1945년 10월 18일에 개최된 조선독립운동사편찬 발기인회에서 발기 인으로 참여하였다. 1947년부터 동아일보의 편집고문을 맡았다. 이승 만 정권 등장 이후 부통령 이시영이 상공부장관을 시켜 주겠다고 서 승효에게 제안을 하자, 그는 “반쪽 자리 정부인 이승만 밑에서 장관 하지 않겠다”라는 말을 하여 거절하였다고 한다.52) 1954년 자유신문 의 객원사원으로 활동하였다. 1964년 9월 10일에 별세하였다.53)

정인섭은 해방 뒤, 1946년 3월 연희전문 교수를 마감하고 1946년 4월 부터 중앙대학교 법문학부장을 맡았다. 1966년 한글전용추진위원회 부회장을 맡아 한글 전용에 기여하였다. 1974년 3월 색동회 회장으로 취임한 이후 1983년 9월 16일 타계할 때까지 이 단체에 헌신하였다.54)

신현모는 해방 뒤 한국민주당 창당에 참여하였고, 당무부장을 역 임하였다. 제헌 국회의원에 당선되었다. 재정경제위원회에 소속하여 국회의원으로 활동하였다.

50) 󰡔한글 새소식󰡕제33호, 한글학회, 1975, 5.

51) 󰡔한글 새소식󰡕제50호, 한글학회, 1976, 10.

52) 딸 서차경의 증언; 서승효의 아들 서석주의 처 김명자(1940년생)님의 증언.

52) 딸 서차경의 증언; 서승효의 아들 서석주의 처 김명자(1940년생)님의 증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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