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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학연구론총 27집> 삼연 김창흡 누정시에 나타난 역사인식과 비애감 (이심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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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ademic year: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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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三淵 金昌翕 樓亭詩에 나타난 歷史認識과 悲哀感

20)*

이심권1)**

- 차례 - 1. 서론

2. 역사 장소 관련 누정시에 나타난 역사인식과 비애

3. 가문 관련 누정시에 나타난 역사인식과 비애감 4. 역사인식과 비애감의 의미

5. 결론

◎ 국문초록

三淵 金昌翕(1653~1722)은 17~18세기 시단에서 중요한 위치를 점했던 시인 이며, 학자이다. 그는 조선후기 대표적 경화거족인 壯洞金氏 출신이었으나 벼슬에 나가지 않고, 각지의 명승을 유람하며 200여 수에 달하는 누정시를 창작했다. 그의 누정시에는 그가 가진 사상이나 역사관, 그리고 경관에 대한 시각, 내면의 심사들 이 잘 녹아있다.

본고는 삼연이 지은 누정시에 나타난 역사인식과 비애감을 살펴 그 의미를 다음 과 같이 도출할 수 있었다.

첫째, 삼연은 역사, 가문과 관련된 누정시에서 비애감을 표출했다. ‘彈琴臺’와

* 이 논문은 2020년 대한민국 교육부와 한국연구재단의 지원을 받아 수행된 연구 임 (NRF-2020S1A5B5A17091874)

** 영남대학교 한문교육과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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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矗石樓’는 역사적인 전투의 현장이었으며, ‘泠泠亭’과 ‘塗磻溪亭舍仍宿’은 아버지 인 김수항과 관련된 장소였으며, ‘南門樓’는 선조의 비석이 세워진 곳이었다. 이들 장소는 모두 삼연에게 비애감을 불러일으키는 장소였다.

둘째, 삼연은 역사, 가문과 관련된 누정시에서 또한 역사 인식인식을 드러낸다.

비극적인 역사 현장에서 그 비극을 잊어버리고 유유자적한 사람들을 비난하기도 했 으며, 아버지를 죽음으로 내 몬 당시 정국을 풍성검의 고사와 오나라 부차의 고사 를 인용하여 비판하고 있다.

셋째, 삼연은 누정시를 통해 비극적인 역사를 회고하며 희생된 이들을 애도하고, 당대의 세태를 비판하기도 한다. 이는 삼연의 가치관이 드러난 부분이다. 삼연은 비판적 시각으로 역사를 바라보았다고 하겠다.

◎ 핵심어

삼연, 김창흡, 누정시, 가문, 역사, 조선

1. 서론

三淵 金昌翕(1653~1722)은 17~18세기 시단에서 중요한 위치를 점 했던 시인이며, 학자이다. 그는 조선후기 대표적 경화거족인 壯洞金氏 출신이었으나 가문의 기반을 뒤로한 채 벼슬에 나가지 않았다. 일평생 處士의 신분으로 전국의 산수를 유람하며 시문 창작에 몰두 하였다.1) 5천 여수의 방대한 분량의 한시는 바로 이때 지어진 것이다. 그가 17~18세기에 중요한 위치를 점했던 인물이었으므로 그에 대한 다양한 평가들이 존재했었다.

1) 회재 이언적은 獨樂堂이라는 공간을 마련함으로써 산수자연과 함깨 하는 隱士 의 삶을 경영하게 된다.(이정화, 「晦齋 李彦迪의 山水詩 硏究」, 택민국학론총

24, 2019, 75쪽.)라는 논의는 좋은 참조가 된다. 이언적은 출사시에도 항상 은 사의 삶을 동경해 이후 은사의 삶을 실천했다. 삼연의 경우는 처음부터 출사를 하지 않았다. 때문에 방대한 양의 시를 창작할 수 있었다고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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洪愼猷는 ‘三淵이 門戶를 따로 열어, 조선에 새로운 분위기가 일어났 다.[三淵別門戶, 左海新鼓吹.]’라고 했으며, 삼연의 제자 李天輔도 ‘오 늘날 시를 짓는 사람들 중 삼연을 본받지 않으면 남들이 그를 이상한 눈으로 바라본다.[今之爲詩者, 不步趨三淵, 則人爭怪之.]’고 평했다.2) 또 日省錄에서 “三淵의 시를 누군들 애독하지 않겠는가. 다만 華門盛 族 중에 이렇게 초야의 차갑고 어려운 시어가 있는 것이 어찌 우연한 일이겠는가!3)”라고 삼연을 평가하기도 했다. 이는 삼연의 위치와 영향 력이 당대 어느 정도였는가를 방증하는 좋은 일례들이다.

방대한 분량의 시를 창작하고, 당대 문학에서 중요한 위치를 점했던 삼연이기에 그에 대한 연구는 지금까지도 활발히 전개되고 있다. 그 중 가장 활발히 전개되고 있는 것이 바로 삼연의 시문학이다. 삼연의 시문학에 대한 연구는 작가론, 작품론적 측면에서의 논의와 시에 나타 난 사상적 측면에서의 논의, 시의 주제적 측면에서 다룬 논의들로 대 별될 수 있다. 작가론적 측면에서의 논의는 생애를 중심으로 각 시기 의 작품을 고찰한 특징을 보인다.4)

작품론적 측면의 논의는 「葛驛雜詠」5)과 山水詩6) 분야에 집중되어

2) 안대회, 「三淵 金昌翕의 「葛驛雜詠」 硏究」, 한국한시연구 1권, 한국한시학회, 1993, 240쪽.

3) 일성록, 「정조 19년 을묘(1795) 11월 7일(갑인)」」, “三淵詩, 孰不愛看, 而顧 其華門盛族之中, 有此山野寒瘦之語者, 豈偶然也哉!’(고전번역 DB)

4) 이승수, 「金昌翕의 生涯와 詩世界의 變貌」, 한국언어문화 9권, 한국언어문화 학회, 1991.; 이승수, 삼연 김창흡 연구, 한양대학교 박사논문, 1997.; 李鍾虎,

「三淵 金昌翕論」, 조선후기 한시 작가론1, 이회문화사, 1998.; 김남기, 「삼연 (三淵) 김창흡(金昌翕)의 삶과 시세계」, 한국한시작가연구 13권, 한국한시학 회, 2009.;김남기, 「三淵 金昌翕의 詩文學 硏究, 서울대학교 대학원 박사학위 논문, 2001.

5) 이승수, 金昌翕의 詩世界 硏究 : <葛驛雜詠>을 중심으로, 한양대학교 석사 학위논문, 1992.; 안대회, 「三淵 金昌翕의 「葛驛雜詠」 硏究」, 한국한시연구 1 권, 한국한시학회, 1993.; 김남기, 三淵 金昌翕의 詩文學 硏究, 서울대학교 박 사논문, 2001.

6) 김남기, 金昌翕의 山水詩 硏究, 서울대학교 석사학위논문, 1994.; 고연희, 「 김창흡 (金昌翕) , 이병연 (李秉淵)의 산수시 (山水詩)와 정선 (鄭敾) 의 산수 화 (山水畵) 비교 고찰」, 한국한문학연구 20권, 한국한문학회, 1997.; 이경수,

「삼연 김창흡의 설악산 은둔과 한시표현 」, 강원문화연구 26집, 강원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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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찰한 특징을 가진다. 사상적 측면에서의 논의는 성리학과 불교를 중 심으로 고찰되었다는 특징을 가진다.7) 이밖에도 불교시, 매화시, 관물 시 등 다양한 주제8)적 측면에서 논의되기도 했다. 삼연의 시문학 연 구는 특히 산수시 분야에 집중되었다. 하지만 樓亭9)이라는 공간을 중 심으로 樓亭詩10)를 다룬 연구는 아직까지 많지 않다.11) 삼연의 산수 시에 관한 많은 연구들을 통해 유의미한 연구 성과들이 축척되었다.

본고는 지금까지 산수시의 연구 성과들을 토대로 누정이라는 공간을 중심으로 삼연의 시를 살펴보고자 한다. 이는 선행연구를 보완하는 하 나의 시도가 될 것으로 생각된다.

강원문화연구소, 2007.; 이경수, 「18세기 한시에 나타난 설악산의 심상(心象) -삼연 김창흡과 그 주변 인물들을 중심으로-」, 한국시가연구 32집, 한국시 가학회, 2012.; 이경수, 「삼연 김창흡 한시의 금강산 표현」, 인문과학연구 44 집, 강원대학교 인문과학연구소, 2015.; 한영, 「김창흡 산수시와 일기체 유기의 상호연관성 연구」, 한국한시연구 26집, 한국한시학회, 2018.

7) 신경훈, 김창흡 시의 사상적 특성과 시적 형상화 연구, 창원대학교 박사학위 논문, 2019.; 유호선, 「김창흡의 불교적 사유와 불교시」, 한국인물사연구 제2 호, 한국인물사연구소, 2004.; 최유진, 三淵 金昌翕의 哲學的 詩世界 硏究, 고 려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15.; 정혜린, 「三淵 金昌翕의 성리학과 시문학」, 대 동한문학」 34집, 대동한문학회, 2011.

8) 여희정, 「金昌翕 매화시의 특징 : 「松栢堂詠梅」를 중심으로」, 한국한문학연 구 48집, 한국한문학회, 2011.; 신경훈, 「삼연 김창흡 시에 나타난 관물정신의 변모 양상」, 사림어문연구 23집, 사림어문학회, 2013. 또한, 채환종, 「삼연 김 창흡의 사회시 연구」, 어문연구 제27집, 어문연구학회, 1995.; 강혜선, 「김창 협, 김창흡 가문의 한시에 나타난 “아버지”」, 한국고전연구학회 학술대회 발표 집, 2019. 등과 같은 연구도 보인다.

9) 樓亭은 樓閣과 亭子의 약칭이다. 新增東國輿地勝覽 의 樓亭條에서는 樓, 亭, 堂, 臺, 閣, 軒, 廳, 館, 觀, 房등을 범칭한 개념으로 일반화 되어 있다. 우리나라 의 누정은 통계적으로 정자가 대부분이다. 누정은 자연을 배경으로 한 남성위주 의 유람 내지 휴식공간으로 家屋 외에 특별히 지은 건물이다.(朴焌圭, 韓國의 樓亭攷, 호남문화연구 제17집, 전남대학교 호남문화연구소, 1987, pp.2~3.) 라고 한 논의는 누정에 대한 개념에 대해 좋은 참조가 된다.

10) 본고의 樓亭詩는 누정이라는 공간에서 혹은 그곳을 소재로 창작된 한시들을 가리킨다.

11) 이심권, 三淵 金昌翕의 樓亭詩 硏究, 영남대학교 석사논문, 2016.에서 처음 누정시를 주제로 연구했다. 여기에서는 김창흡의 누정시에 대해 개괄적으로 다 루었으며, 본고는 특징적인 면모를 드러내어 면밀한 분석을 시도하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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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정은 문인들에게 있어 중요한 공간으로 인식되었으며, 누정시 또 한 지역, 시기, 인물 등을 중심으로 다각도에서 논의되어 유의미한 성 과를 내고 있다.12) 그러나 삼연의 누정시에 대한 연구는 심도 있게 다 루어지지 않았다. 삼연은 각지의 명승을 유람하며 200여 수에 달하는 누정시를 창작했다. 그의 누정시에는 그가 가진 사상이나 역사관, 그리 고 경관에 대한 시각, 내면의 심사들이 잘 녹아있다. 때문에 삼연의 시 문학을 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누정시에 대한 연구가 시급하다고 하겠다.

논자는 본고에서 삼연의 누정시 중 삼연의 가문과 역사적 장소와 관 련된 누정시 5제 8수를 다루고자 한다. 이들 5제 8수의 누정시는 일반 적인 누정시에서 보이는 완상이 주를 이루지 않는다. 오히려 강한 비 애감이 표출되고 있다. 그렇다면 왜 완상이 아닌 비애감이 주를 이루 고 있는지를 살펴야 하겠다. 이는 삼연 누정시의 특징적 면모를 밝히 는 데 일조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된다.

2. 역사 장소 관련 누정시에 나타난 역사인식과 비애감

문인에게 있어 누정13)은 아름다운 山水를 배경으로 한 교류의 장소 이자, 역사의 현장이고, 사색의 장소이기도 하고 수양의 장소이기도 했 다. 많은 문인들은 누정을 찾아 자연경관을 예찬하거나 역사를 회고하 거나 사색의 정서를 시로 남겼다. 삼연 또한 그런 문인 중 하나였다.

삼연의 200여 수에 달하는 누정시에는 지인들과의 교류, 역사에 대한

12)누정에서는 주로 일반 가정의 울타리를 벗어난 문화 활동이 이루어졌다. 시문 을 제작하거나, 강학을 베풀거나, 담론을 펼치거나, 접객을 하거나, 회합을 하거 나, 심신을 닦거나, 휴식을 취하거나 하는 일들이 그것이다.(김신중, 「전남의 누 정과 그 연구 동향」, 국학연구론총 8, 택민국학연구원, 2011, 240쪽.)라는 논 의는 좋은 참조가 된다. 또한 박명희의(박명희, 「無等山圈) 누정문학의 문화지 도」, 국학연구론총 16, 2015.) 논의는 무등산권의 누정문학에 대한 문화지도 를 그려보았다는 측면에서 좋은 참조가 된다고 하겠다.

13) 이심권, 위의 논문, 2016,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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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고, 수양 등의 내용이 담겨있다. 또한 그 시들 안에는 삼연의 다양한 심사들이 잘 녹아있다.

그런데 역사적 장소 혹은 가문과 관련된 누정시에서 삼연은 역사인 식과 비애감을 드러내고 있어 주의를 요한다. 그렇다면 왜 이러한 것 들이 존재하고, 또 역사인식과 비애감이 어떠한 양상으로 표출되고 있 는지에 대해서도 살펴볼 필요가 있겠다. 이 장에서는 역사적 장소와 관련된 누정시 2제 4수를 통해 삼연이 나타내고자 한 역사인식과 비 애감을 살펴보고자 한다.

먼저 삼연이 임진왜란과 관련된 역사적 장소인 탄금대에서 읊었던 누정시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彈琴臺悼國殤 탄금대에서 나라 위해 죽은 이들을 슬퍼하며

行舟琴臺下 배를 타고 탄금대 아래 이르니, 棹歌忽變曲 뱃노래가 문득 곡조를 바꾸네.

悲吟溯㺚水 슬피 읊조리며 달천을 거슬러 오르니, 水急浪層複 물살이 빨라 물결이 출렁이네.

輪旋正眩目 소용돌이는 눈을 어지럽게 하고, 矢激欲漂礫 거센 물결은 조약돌까지 띄우려는 듯.

欹崖生怒草 가파른 벼랑에 억센 풀 자라나고, 過鴈拂危木 지나가는 기러기 높은 나무 스치네.

蒼茫於此乎 창망한 이곳에서

撫爾國殤迹 순국한 이들 자취 더듬어 보니.

邦國將非人 나라에서 적임자 아닌 사람을 장수로 삼아, 猛卒棄與敵 용맹한 병졸들을 적에게 내어주었네.

鳥嶺旣失險 조령은 이미 그 험준함을 잃었으니, 此江無氣力 이 강물은 무기력하기만 했고 韓信竟誤人 한신이 마침내 사람을 그르쳤으니, 哥舒同敗績 가서한의 실패와 마찬가지로다.

哀哀同日魂 슬프구나, 같은 날에 죽은 혼백들이여, 永淪無窮碧 끝없이 푸른 물결 속에 영원히 사라졌도다.

裹尸異馬革 말가죽으로 시신을 싸지 못했으니,

(7)

飮恨在魚腹 물고기 뱃속에서 한을 머금고 있으리.

春風來無賴 하염없이 봄바람 불어와도,

古水愁煙積 옛 물엔 근심스레 안개만 쌓여있네.

滿船涕濺棹 뱃사람 모두 눈물 흩뿌리며 노를 저으니, 哀咤滿寥廓 애달픈 탄식만 텅 빈 하늘에 가득하네.

去去且疾棹 가고 가며 또 빨리 노질하니,

此曲使心惻 이 곡조가 내 마음 슬프게 하노라.14)

위의 시는 1688년 충청도지역을 유람하던 삼연이 탄금대 아래에서 순국한 이들을 슬퍼하며 읊은 26句의 五言 古詩이다. 주지하다시피 탄 금대는 임진왜란 당시 신립이 조선의 정예병 약 1만 5천여명과 왜장 고니시 유키나가가 이끈 병사들과 맞서 싸우다 대패하고 죽음을 맞이 한 역사적인 장소이다. 시인은 이곳에서 역사적인 그날을 회상하며, 위 의 시를 읊은 것이다.

1연에서는 시인이 배를 타고 탄금대 아래에 이르자 사공의 뱃노래가 구슬프게 바뀌었다고 하고 있다. 시인은 사공의 구슬픈 뱃노래를 통해 자신이 이른 곳이 많은 사람들이 억울하게 죽어간 역사적 장소인 탄금 대임을 간접적으로 드러내고자 한 것으로 생각된다. 특히 ‘忽變曲’라는 시어에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 ‘忽變曲’은‘문득 곡조를 바꾼다.’라는 뜻 이다. 배를 타고 유람하던 삼연이 달천에 이르자 뱃사공이 부르는 노 래의 곡조가 바뀌었다는 것을 감지한다. 이는 탄금대와 관련한 역사적 사실을 뱃사공 또한 인지하고 있다는 것을 드러냄과 동시에 삼연이 역 사적 사실을 회고하는 계기가 된다고 하겠다.

2연에서는 ‘슬피 읊조리며 달천을 거슬러 오르니, 물살이 빨라 물결 이 출렁이네.’라고 읊고 있다. 시인은 탄금대의 험준함을 이 연을 통해 직접적으로 전달하고 있다. ‘悲吟’라는 시어는‘슬피 읊다’라는 뜻을 가 진다. 뱃사공이 탄금대가 있는 달천에 이르자 바꾼 곡조를 따라 슬피 읊 조리는 것을 말한다. 여기서도 삼연의 비애감이 간접적으로 드러난다.

3, 4연에서는 강물에 일어나는 소용돌이와 거센 물결, 가파른 벼랑

14) 金昌翕, 「三淵集」 권4, 「彈琴臺悼國殤」.

(8)

과 그 사이에 자라난 억센 풀 그리고 지나가는 기러기의 모습을 묘사 하고 있다. 이는 시인이 탄금대의 험준함을 직접적으로 제시해 공간에 서 느껴지는 적막함을 드러내고자 한 것으로 생각된다. ‘가파른 절벽에 서 자라는 억센 풀, 나는 기러기가 스치는 나무가 있을 만큼 높이 솟 은 벼랑’이라고 표현한 것을 통해 역사적 상황을 떠올리는 계기가 될 수 있었다고 생각된다.

5연에서는 ‘창망한 이곳에서 순국한 이들 자취를 더듬어 보니’라고 하여 3, 4연에서의 경관을 통해 드디어 역사적 사건과 인물들을 회고 하게 된다. ‘蒼茫’이라는 시어는 ‘광활하여 끝없는 모양’혹은 ‘모호하여 선명하지 않은 모양’15)이라는 뜻이다. 삼연은 거센 물결, 그리고 가파 른 벼랑과 높은 나무가 있는 탄금대를 바라보며 창망하다고 표현하고 있다. 즉, 시인은 ‘蒼茫’을 통해 찌를 듯이 솟아있는 벼랑을 시각적 심 상을 통해 직접적으로 제시하고 있다. 또한 그곳에서 억울하게 죽어야 만 했던 아득한 그날의 자취를 더듬고자 하고 있는 것이다.

6연에서부터는 역사적 사실을 제시한다. ‘나라에서는 적임자 아닌 사 람을 장수로 삼아’라고 한 부분은 당시 북방 방비에 뛰어났던 신립을 탄금대 지역으로 보낸 것에 대한 잘못을 지적하고 있다. 거침없이 북 진해오는 왜군 때문에 당시 조정에서는 적임자를 모색할 시간이 없었 다. 때문에 그 지역에 문외한 신립을 탄금대로 보냈던 것이다. ‘용맹한 병졸들을 적에게 내어주었네’라고 한 부분은 신립을 등용한 조정과 자 신의 주장만을 펼친 신립 때문에 1만 5천여 명의 병사들이 제대로 싸 워보지도 못하고 적들에게 죽임을 당해야 했던 상황을 나타낸다. 이는 당대를 비판하는 삼연의 역사인식이 드러난 부분이라 하겠다.

7연에서 ‘조령은 이미 그 험준함을 잃었으니, 이 강물은 무기력하기 만 했고’라고 한 것은 신립의 아둔함을 지적한 것이다. 특히‘旣失險’이 라는 시어는 ‘이미 험준함을 잃었다.’는 뜻이다. 삼연이 8구에서 ‘지나 가는 기러기 높은 나무 스치네’라고 읊었던 것처럼 조령은 여전히 그

15) 廣闊無邊的樣子, 模糊不淸的樣子의 의미로 사용된다. 漢語大詞典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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험준함을 자랑하고 있다. 하지만 임진왜란 당시 신립은 조령의 험준함 을 이용하지 않고, 무리하게 배수진을 쳐 자신뿐만 아니라 많은 병졸 과 장수들을 죽음에 이르게 했다. 다음 구절에 나오는 ‘無氣力’이라는 시어도 조령과 달천 즉 탄금대 지역의 지형지물을 잘 이용하지 못했던 것에 대한 한탄을 나타내는 것이다. 즉, ‘旣失險’, ‘無氣力’라는 시어를 통해 박탈감, 허무함을 드러내어 비애감을 고조시키면서 삼연의 역사 인식을 드러낸 부분이라 하겠다.

8연에서는 한신과 가서한의 고사를 인용하고 있다. ‘한신이 마침내 사람을 그르쳤으니’라고 한 부분은 한신과 역이기酈食其, ‘가서한의 실 패와 마찬가지로다’라는 부분은 가서한의 고사를 통해 인재를 바로 보 지 못한 조정의 잘못을 드러내고 있다.16) 즉, 삼연은 7연과 8연을 통 해 당시 조정과 신립을 비판하고 있는 것이다. 절망, 비통의 목소리라 고 할 수 있겠다.

9연에서는 ‘슬프구나 같은 날에 죽은 혼백들이여, 끝없이 푸른 물결 속에 영원히 사라졌도다.’라고 읊고 있다. ‘哀哀’라는 시어는 ‘슬프고 슬 프다.’라는 뜻이다. 이는 삼연이 1592년 4월 28일에 배수진을 치고 싸웠지만 왜군에게 대패하여 물속에 수장되어야 했던 장병들에 대한 슬픔을 드러낸 것이다.17) ‘永淪’이라는 시어는 ‘영원히 잠기다’라는 뜻 이다. 잘못 사용된 배수진으로 인해 달천에 빠져 죽은 많은 병졸과 장 수들이 돌아올 수 없는 곳, 즉 죽음에 이르게 되었음을 표현한 것이다.

10연에서는 ‘말가죽으로 시신을 싸지 못했으니’라고 하고 있다. 後漢 의 복파장군이었던 마원의 고사를 인용하여18) 전쟁터에서 죽은 병사

16) 한 고조가 고양(高陽)에 이르렀을 때 역이기가 고조를 찾아가서 세 치의 혀를 놀려 제(齊) 땅의 70여 성을 취해 주겠다고 한 다음, 제왕(齊王) 전광(田廣)을 찾아가서 고조에게 붙어야만 제 땅을 보전할 수 있을 것이라고 유세하여 고조 에게 붙게 하였다. 그 뒤에 한 고조 휘하의 한신(韓信)이 제 땅을 침입하자, 전 광이 역이기를 팽형(烹刑)에 처하였다. 《史記 卷97 酈生列傳》

17) 조선왕조실록, 「선조25년 4월 17일」 “砬至忠州, 諸將皆欲據鳥嶺之險, 以遏 敵衝, 砬不從, 欲長驅於平原。 二十七日陣于丹月驛前, 軍卒有言: "賊已至州內。

" 者, 砬以爲驚衆, 卽斬以徇。 賊設伏繞, 出我師之後, 衆遂大潰。 砬突圍至㺚川 月灘邊, 召其下曰: "無面目見殿下。" 遂溺死。 其從事金汝岉、朴安民, 亦溺死.”

(10)

들에 대한 안타까움을 드러내었다. 전쟁터에서 병사들이 용맹하게 싸 우다 죽었다면 땅에 묻혀야 마땅하다. 하지만 탄금대 전투에서 용감히 싸웠던 여러 병졸과 장수들은 水葬될 수밖에 없었다. ‘飮恨’시어가 바 로 그것을 나타냈다. ‘한을 머금고 있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 다. 앞의 9연‘永淪’과 10연의 ‘飮恨’이라는 지속성을 나타내는 시어를 사용해, 억울한 죽음을 당해야 했던 사람들의 한의 깊이와 비통한 심 경의 깊이를 생생하게 전달하고 있다고 하겠다.

11연에서는 ‘하염없이 봄바람 불어와도, 옛 물엔 근심스레 안개만 쌓여있네’라고 하고 있다. 봄바람은 삼연이 탄금대에 갔던 시기를 알려 준다.19) ‘古水’라는 시어는 정체된 시간을 나타내고자 한 것이다. 즉, 물리적 시간은 흐르고 있지만, 탄금대라는 장소는 역사적 시간인 그날 에 정체되어 있는 것이다. ‘愁煙積’라는 시어는 ‘근심스레 안개가 쌓인 다.’는 뜻이다. 이는 시인의 심사를 시각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삼연이 탄금대를 지날 때의 날씨는 맑았다.20) 그렇다면 ‘근심스레 안개가 쌓 였다’라고 한 것은 기상의 상황을 나타낸 것이 아닌 삼연의 마음인 것 이다. 삼연은 죽은 이들에 대한 안타까움으로 근심이 쌓여간다고 한다.

즉 ‘愁煙積’이라는 시어를 통해 비애감을 고조시키고 있다. ‘涕濺’시어 는 ‘눈물 흩뿌리다.’라는 뜻이다. 삼연은 역사적인 그날을 회고하자 눈

18) 후한(後漢)의 복파장군(伏波將軍) 마원(馬援)이 “사나이는 마땅히 전쟁터에 서 죽어 말 가죽에 시체를 싸 가지고 돌아와 땅에 묻혀야 한다.[男兒要當死于邊 野 以馬革裹尸還葬耳]”고 말한 데에서 유래한 것이다. 《後漢書 卷24 馬援列 傳》

19) 金昌翕, 三淵集拾遺 권27, 「丹丘日記」, “三月初七日晴, …上略… 歷金熱至彈 琴臺。㺚水自南而匯江。衝濤怒瀧。喧撼臺下。水色亦沈黑。此卽我國之陳濤 也。悼惋國殤。舟爲之凝滯。歷無情掃潭。…下略…”

20) 金昌翕, 三淵集拾遺 권27, 「丹丘日記」, “初七日晴. 曉過木溪, 至荷潭, 烟收 霧斂. 暄景甚舂融, 四山倩翠滴滴流, 江波光瑩如菱鏡, 蕩棹而行, 風襟灑然. 岸上 林丘入望, 皆姸秀可居. 其中金徵別業, 勝致備愜, 近水有松林成叢, 倒影綠潭. 下 以蒼石承之, 可以垂釣. 就其奧丘, 置華屋累構, 擁以無數桑柳, 吠烟甚稠, 仲長統 樂志論其在是矣. 得此而卧者, 猶有軒冕之念乎. 稍近爲玉江, 所見一㨾, 淸美如之.

至月灘水中有巨石, 巉岩人立, 古傳相思岩, 未詳其命意矣. 前有塔淵, 南邊平臯, 上有白塔, 高可數十丈. 歷金熱至彈琴臺, 㺚水自南而匯江, 衝濤怒瀧, 喧撼臺下, 水色亦沈黑, 此卽我國之陳濤也. 悼惋國殤, 舟爲之凝滯, 歷無情掃潭.”

(11)

물이 흩뿌려진다. 삼연의 비애감을 시각적으로 표현한 것이라고 하겠 다. 때문에 탄금대에서 시인은 더욱 근심스럽고 애잔해진다.

12, 13연에서 뱃사공과 시인의 안타까운 마음을 노래한다. 12연의

‘哀咤’이라는 시어는‘애달픈 탄식’을 이른다. 삼연은 눈물을 흩뿌리며 슬퍼하고 있다. 하지만 비극적 역사는 되돌릴 수 없다. 때문에 삼연은 애달픈 탄식을 낼 뿐이다. 즉 ‘哀咤’는 삼연의 비애감을 청각적으로 나 타낸 시어라고 하겠다. 13연의‘心惻’이라는 시어는 ‘마음이 슬프다.’는 뜻이다. 삼연은 2구에서 ‘뱃노래가 문득 곡조를 바꾸네’라고 했다. 곡 조로 인해 임진왜란 당시의 상황을 회고하게 된 삼연은 슬픔이 일게 된다. ‘心惻’은 그러한 삼연의 비애감을 직접적으로 드러낸 시어라고 하겠다. 탄금대에서 역사적 그날을 마주한 뱃사공과 시인은 슬픔에 눈 물을 흘릴 수밖에 없다. 때문에 노를 저으며 부르는 곡조는 더욱더 슬 픈 여운을 남긴다고 하고 있다.

이 시에는 탄금대에서 일어났던 역사적 사건에 대한 시인의 생각이 담겨 있다. 삼연은 여전히 소용돌이와 거센 물결이 이는 달천에서 가 파른 벼랑을 바라보고는 역사적 그날을 회고한다. 창망한 이곳, 탄금대 에서 그날 많은 사람들이 거센 물결이 이는 달천에 빠져 죽어야만 했 다. 때문에 시인은 그 곳에서 슬픔을 느낄 수밖에 없었을 것이고, 이를 시 속에 강하게 담아내고 있는 것이라고 하겠다. 또한 6, 7, 8, 9, 10, 11, 12, 13연을 통해 당대를 비판적 시각으로 보고 있다. 이는 삼연의 역사인식이 드러난 부분이라고 하겠다.

다음은 2차 진주성 전투와 관련된 장소인 촉석루에 대해서 읊은 시 이다.

晉州矗石樓 진주 촉석루

春日愁雲滿晉陽 봄날 시름겨운 구름이 진양에 가득한데, 登樓倚劍劍光長 누각 올라 칼 짚으니 검 빛이 길게 드리우네.

高灘迅若黃間激 급한 여울은 빨라서 강한 쇠뇌가 날아가는 듯하고,

(12)

悍壁環如赤幟張 견고한 성벽은 둥글어 붉은 기를 펼쳐놓은 듯해라.

勢有必爭嗟地險 형세상 반드시 전투가 벌어질 곳이니 지세가 험준함을 탄식하고,

人能捨命惜天亡 사람들이 기꺼이 목숨을 버렸으나 하늘이 망하게 해 애석하네.

江流不盡魚龍活 강물이 다하지 않아 어룡은 살아있으니, 注目深潭詠國殤 깊은 물가 바라보며 순국한 이들을

읊조리네.21)

위의 시는 삼연이 영남지방을 유람(1708년 2월 초3일~윤3월 21일) 하던 중 당시 진주 촉석루에 올라 지은 것이다. <晉州矗石樓> 는 2차 진주성 전투 당시 많은 장군과 관병, 의병들이 목숨을 잃은 비극적 장 소이다. 1구의‘愁雲’이라는 시어는 ‘시름겨운 구름’을 이르는 말이다.22) 구름이 시름겹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는 삼연의 마음이 시름겹다는 것 을 표현한 시어이다. 구름은 수를 셀 수 없을 만큼 하늘 위에 떠있다.

근심이 구름의 수만큼 많이 있다는 것을 나타내기 위함이다. 즉 삼연 이 가지는 근심의 크기를 시각적으로 표현한 시어라고 하겠다. 1구의 내용을 통해 우리는 촉석루에서 바라 본 하늘에 구름이 가득 끼여 있 을 것이라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영남일기」를 통해 삼연이 촉석루 에 올랐을 때의 날씨가 맑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23) 그렇다면 실 제 구름이 낀 것이 아니라 촉석루에 오른 시인의 감정을 투영하고 있 다고 하겠다. 수심이 가득한 구름처럼, 시인의 심사가 시름겨움으로 가 득 차 있음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보인다.

2구는 촉석루라는 현장에서 2차 진주성 전투 상황을 몸으로 느끼듯

21) 金昌翕, 三淵集 권8, 「晉州矗石樓」.

22) 謂色彩慘淡, 望之易於引發愁思的煙云. 漢班倢伃《搗素賦》:“佇風軒而結睇, 對愁雲之浮沉.”의 의미 혹은 比喩憂郁的神色. 元張可久《塞鴻秋·春情》曲:“疎 星淡月秋千院, 愁雲恨雨芙蓉面.”의 의미로 쓰인다. 漢語大詞典 참조.

23) 金昌翕, 三淵集拾遺 권28, 「嶺南日記」 “十二日晴。早發至介水院朝飯。歷一 大野至晉州。登矗石樓。勝槩與嶺南相埒。江岸嶄絶。石灘迅急。憑檻騁目。有 豪壯之意。所欠面勢歪斜。不能如嶺南之方平爾.”

(13)

이 표현한 부분이라고 하겠다. ‘倚劍’이라는 시어를 통해 현장에서 검 을 짚는 삼연의 모습이 그려진다. ‘劍光長’이라는 시어를 통해서는 역 사적 그날의 비장함이 시각적으로 표현된 부분이라고 하겠다. 즉 2구 를 통해서는 촉석루의 현장감을 눈에 보이듯이 전하고 있다.

3구에서는 ‘黃間’24)이라는 시어를 사용했다. 이는 촉석루 앞을 흐르 는 남강의 빠른 물살을 비유한 것이다. 4구에서는 ‘赤幟’25)라는 시어 를 사용했다. 이는 웅장하고 튼튼한 진주성의 성벽을 전쟁에서 승리한 깃발인 ‘붉은 기’에 비유한 것이다. 3, 4구에서는 전고를 활용하여 성 을 둘려싼 남강과 성벽의 모습을 마치 눈으로 보이는 듯 시각적으로 제시했다. 남강은 빠르게 흘러가고 성벽은 웅장하게 둘러쳐져 있었으 나 역사적 그날에는 비참하게 함락되었다는 것을 반어적으로 표현한 부분이라고 보인다.

5구에서는 ‘嗟地驗’이라는 시어를 사용했다. 이는 진주성이 함락될 당시 상황을 제시한 것이다. 즉, 지세가 험준했기 때문에 도망조차 갈 수 없이 죽어야만 했던 관병과 의병들을 안타까워하는 것이다. 6구에 서는 ‘惜天亡’이라는 시어를 사용했다. 당시 관병과 의병이 목숨을 걸 고 싸웠지만, 진주성은 함락되었다. 시인은 진주성은 함락될 수밖에 없 었던 상황을 운명론적으로 해석하고 있다고 하겠다. 탄식의 시어를 사 용하여 삼연의 마음을 직접적으로 드러내주고 있는 부분이라 하겠다.

7구에서는 ‘魚龍’26)이라는 시어를 사용했다. 삼연이 시에서 이러한 시 어를 사용한 것은 역사적으로 굴욕적인 상황을 겪었으나, 나라를 수호 하는 ‘어룡’이 여전히 건재하고 있으므로 희망이 있다는 의미로 해석 가능하다고 하겠다. 8구를 통해서는‘國殤’이라는 시어를 사용했다. 이

24) 黃間 : 화살처럼 빠르다는 뜻이다. 황간은 황견(黃肩)이라고도 하는 매우 강 한 쇠뇌이다. 한(漢)나라 때 활을 잘 쏘았던 장수인 이광(李廣)이 이 쇠뇌로 화 살을 쏘았다는 기록이 있다.

25) 赤幟 : 漢나라에서 썼던 붉은 깃발로 韓信이 趙나라를 칠 때 조나라 군사를 유인하여 성을 비우게 한 뒤 매복시켜두었던 기병들이 성으로 들어가 조나라의 깃발을 뽑고 한나라의 붉은 깃발을 꽂아 승리했던 고사이다.

26) 魚龍 : 한국 설화나 고대 소설에서 ‘龍’은 왕을 상징하거나 護國, 護佛의 상징 으로 등장한다. (박다원, 한국의 용설화, 지성인, 2017, 84~133쪽.)

(14)

는 나라를 위해 희생한 사람을 뜻한다.27) 2차 진주성 전투는 관군뿐 만 아니라 민간인, 기생 등 다양한 인물군들이 진주성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걸고 싸웠다. 하지만 전투는 패배로 끝나고 그곳을 지키던 사 람들은 모두 희생당했다. 삼연은 ‘國殤’이라는 시어를 통해 비애감을 표출하고 2차 진주성 전투로 희생된 인물들을 위로하고자 했다고 보인 다.

晉州矗石樓 其二 진주 촉석루 그 두 번째.

雲梯百道殺盈城 높은 사다리 수 없이 놓여 죽은 이 가득했던 진주성에,

斂盡英豪與共平 영웅호걸 다 거두어들여 함께 묻혔네.

玉貌在圍彰義使 옥 같은 모습으로 포위되었던 창의사 김천일, 白袍從事復讐兵 흰 도포를 입고 종사했던 복수병.

拜辭黃屋龍灣震 임금 계신 곳 향해 절하니 용만이 진동하고, 腋挾靑衣水府驚 겨드랑이로 왜장을 낀 푸른 옷 입은 논개에

수부가 놀랐네.

大事黃公先去矣 큰일을 앞두고 황공이 먼저 떠나갔으니, 自天雷礮太無情 하늘 어디선가 날아온 탄환이 너무도

무정해라.28)

두 번째 시에서는 2차 진주성 전투 상황에 대해 읊고 있다. 1구에서 는 약 4만 3천의 왜군이 진주성을 공략하기 위해 설치했던 사다리를 떠올리며, 참혹했던 전투의 상황을 이야기하고 있다. ‘殺盈城’이라는 시 어는 ‘죽은 시체가 성에 가득하다’라는 뜻이다. 2차 진주성 전투 당시 전투에서 전사한 사람들이 성 여기저기에 널브러져 성안에 가득 차 있 었다고 표현하기 위해 이 시어를 사용한 것이다. 삼연은 ‘殺盈城’이라 는 시어를 통해 2차 진주성 전투 당시의 참혹했던 현장을 시각적으로

27) 指爲國犧牲的人. 南朝宋鮑照《代出自薊北門行》:“投軀報明主, 身死爲國殤.”

의 의미로 쓰인다. 漢語大詞典 참조.

28) 金昌翕, 三淵集 권8, 「晉州矗石樓 其二」.

(15)

생생하게 전달하고 있다고 하겠다.

2구에서는 진주성을 지키기 위해 격렬하게 싸웠으나, 그 곳에서 숨 을 거두어야만 했던 영웅들에 대해 읊고 있다고 하겠다. 특히 ‘斂盡’이 라는 시어는 ‘다 거두어들이다’라는 뜻이다. 삼연은 2차 진주성 전투 당시 진주성을 지키던 사람들이 한 명의 생존자도 남기지 않고 모두 섬멸된 상황을 이 시어를 통해 직접적으로 나타내고 있다. 즉, ‘斂盡’라 는 시어를 통해 당시 참혹했던 현장을 시각적으로 나타내고 있다고 하 겠다. 3구에서는 왜군에게 포위당했으나 항복하지 않고 끝까지 진주성 을 지키려고 노력했던 창의사 김천일에 대해 이야기 한다. 4구에서는

‘復讐兵29)’이라는 시어를 사용했다. 이는 당시 전투에 참여했던 의병 들을 가리키고 있다. 관병과는 다르게 의병들은 자발적으로 일어났으 므로 전투 의복이 마땅치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3구를 통해서는 삼 연은 당시의 의병장과 의병들을 회상하고 4구를 통해서는 가족을 위해 자발적으로 목숨을 바친 희생자들을 애도하고 있다고 하겠다.

5구에서는 ‘龍彎震’이라는 시어를 사용했다. 진주성이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의주인 용만의 왕과 사람들이 격분한 모습을 나타내고 있 는 것이라고 하겠다. 6구에서는 ‘水府驚’이라는 시어를 사용했다. 이는 논개가 품었던 애국심의 크기를 드러낸 것이라 하겠다. 즉 논개의 애 국심이 남강의 신이 사는 곳까지 전해져서 그들을 놀라게 하였다라고 표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당시 상황을 비판하는 의미로도 해석된 다.

7구에서는 진주성 전투에서 탄환을 맞고 죽은 黃進(1550~1593)을

‘先去’라는 시어를 사용해 표현하고 있다. 그가 죽었기에 진주성이 함 락되고 말았다는 안타까움을 표현했다고 하겠다. 8구에서 ‘無情’이라는 시어는 7구에서 사용한 ‘先去’에 대한 삼연의 속마음이 드러난 것이라 고 보인다. 이 또한 2차 진주성 전투를 운명론적 시각으로 바라보고

29) 復讐兵 : ‘復讐兵’은 高從厚(1554~1593)가 아버지 高敬命(1533~1592)이 의병장으로서 금산(錦山)에서 전사하였으므로 다시 의병을 모집하여 복수병이 라 칭했던 것을 말한다.

(16)

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부분이라고 하겠다. 이 또한 당시를 바라보는 삼연의 역사인식이 드러난 부분이라 하겠다.

이 시에서는 2차 진주성 전투에서 희생된 인물들을 회고하고 있다.

앞의 시가 진주 촉석루의 경관과 분위기를 묘사하며 2차 진주성 전투 와 자연스럽게 연결시키고 있는 반면, 두 번째 시에서는 당시 2차 진 주성 전투로 희생된 인물들을 자세하게 나열하고 있다. 즉, 이 시는 각 각의 인물들의 행적을 회고하며, 이를 통해 비애감을 더욱 고조시키고 있으며 당대를 바라보는 삼연의 역사인식 또한 드러내고 있다.

晉州矗石樓 其三 진주촉석루 그 세 번째

灘聲野色七哀生 여울소리, 들 빛에 일곱 가지 슬픔 생기니, 淚洒龜頭倚晩城 비석에 눈물 흩뿌리며 저물어가는 성곽에

기대었네.

面水樓譙仍舊壁 물에 닿아 있는 성곽은 바로 옛 성벽이요, 揷雲旌纛亦新營 하늘 높이 세운 깃발은 새로운 군영이로다.

淸樽豈乏登樓用 어찌 누각에 올라 쓸 맑은 술이 부족하겠는가마는,

雄劍惟堪弔古鳴 웅장한 칼만이 지난날의 울부짖음을 위로할 만하네.

多事遊人閒弄筆 일 많아 노니는 사람들이 한가로이 붓을 놀리며,

風流鬪却嶺南名 풍류로 영남의 명예를 다투어 물리치네.30)

이 시는 진주 촉석루를 읊은 세 번째 시이다. 1구의‘여울소리’, ‘들 빛’이 삼연에게 ‘七哀生’31)을 촉발하는 매개가 된다. 이것은‘일곱가지 슬픔이 생겨난다’라는 뜻의 시어이다. ‘七哀’는 위진 남북조 악부시의 한 종류로 漢나라 말기에 생겨났다. 삼연은 王粲의 칠애시32)를 인용하

30) 金昌翕, 三淵集 권8, 「晉州矗石樓 其三」.

31) 七哀 : 王粲이 전쟁의 참혹함을 읊었던 칠애시를 의미한다.

32) 王粲, <七哀詩>, “西京亂無象, 豺虎方遘患. 復棄中國去, 遠身適荊蠻. 親戚對 我悲, 朋友相追攀. 出門無所見, 白骨蔽平原. 路有飢婦人, 抱子棄草間. 顧聞號泣

(17)

여 2차 진주성 전투의 참혹함을 전하고자 한 것으로 보인다. 왕찬의 칠애시는 전쟁 상황을 자세하고 섬세하게 담고 있다. 삼연 또한 그러 한 심사에서 이 시를 남겼을 것이다. 삼연은 진주성을 둘러싼 들과 남 강을 보고 있자니 2차 진주성 전투 당시 상황이 눈앞에 그려지는 듯 했을 것이다. 촉석루에 오른 삼연에게 진주성 주변의 들판과 남강에는 시체들이 즐비하고, 울부짖는 사람과 죽어가는 사람들이 생생하게 그 려졌다고 생각된다. 때문에 그는 일곱 가지의 근심이 생긴다고 한 것 이다. 2구에서 ‘龜頭’라는 시어는 진주성 안에 있는 김시민 등 많은 이 들의 비석을 가리킨다. ‘淚洒’이라는 시어는 ‘눈물을 흩뿌리다.’라는 뜻 이다. 촉석루에서 여울소리와 들 빛을 보고 슬픈 마음이 생긴 삼연은 진주성 안에 있는 비석들을 바라보며 눈물을 흩뿌리고 있는 것이다.

삼연은 비애감을‘淚洒’라는 시각적 시어를 통해 드러내고 있다.

3구와 4구에서는 ‘舊壁’과 ‘新營’이라는 시어를 통해 진주성에 과거 와 현재가 공존하고 있음을 표현하고자 했다. 목숨이 유한한 인간은 세월이 흐르면 죽어 없어지지만, 성벽은 과거를 관통하여 오늘날까지 여전히 건재하고 있다. 때문에 성벽을 보면 과거 희생되었던 인물들이 떠올라 더욱 슬퍼지는 것이다. 5구에서는 ‘어찌 누각에 올라 쓸 맑은 술이 부족하겠는가마는’이라고 했다. 이는 죽은 영혼들을 위로하기 위 한 술이 충분하지만 그것으로는 부족하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6구에서의 ‘雄劍’이라는 시어는 전투에서 죽었던 김시민, 김천일, 황진 등과 같은 충절 가득한 장수를 의미하는 것이라 생각된다. ‘古鳴’이라 는 시어는 ‘지난날의 울부짖음’이라는 뜻이다. 이는 2차 진주성 전투에 서 죽어간 이들의 울부짖음을 가리키는 말이다. 삼연은‘古鳴’이라는 청 각적 시어를 통해 패배의 아픔을 다시 한 번 되새기고, 그런 일이 되 풀이 되지 않아야 한다는 다짐을 드러냈다고 보인다. 즉 5, 6구는 맑 은 술로 조문하는 것이 그들을 위한 진정한 위로가 아니라, 그 전투 이후 진주성이 함락되지 않고 잘 보존되고 있다는 사실만이 희생된 이

聲, 揮涕獨不還. 未知身死處, 何能兩相完. 驅馬棄之去, 不忍聽此言. 南登覇陵岸, 廻首望長安. 悟彼下泉人, 喟然傷心肝.”

(18)

들을 진정으로 위로할 수 있는 방법이라고 하고 있다.

7구와 8구에서는 ‘鬪却’이라는 시어를 사용하고 있다. 처참한 역사의 공간이었던 촉석루가 지금은 시인묵객의 풍류의 장소가 되었다고 하고 있는 것이다. 즉, ‘閒弄筆’, ‘鬪却’이라는 시각적 시어를 통해 비극적인 역사적 사건이 사람들의 인식 속에서 내쳐지는 모습을, 보이는 것처럼 표현하고 있다. 이는 당대를 비판하는 삼연의 역사인식이 드러난 부분 이라 하겠다.

3. 가문 관련 누정시에 나타난 역사인식과 비애감

<泠泠亭>과 <塗磻溪亭舍仍宿>은 아버지인 김수항과 관련된 장소 였으며, <南門樓>는 선조의 비석이 세워진 곳이다. 이들은 모두 삼연 의 가문과 관련된 곳이라고 하겠다. 이 장에서는 가문과 관련된 누정 시 3제 4수를 통해 삼연이 나타내고자 한 역사인식과 비애감을 살펴 보고자 한다.

이 시는 삼연의 아버지 김수항과 관련된 장소인 영령정에서 읊었던 시에 나타난 역사인식과 비애감을 살펴보고자 한다.

泠泠亭 영령정

亭子新成朗月來 정자가 막 완성되고 밝은 달이 떠오르니, 弟兄秋夜起徘徊 형제들 가을밤에 일어나 배회하네.

空山風珮那能聽 빈산에 불어오는 바람소리 어찌 들을 수 있을까?

霜露沾人永世哀 서리와 이슬 사람을 적셔 길이 슬프게 하누나.33)

위의 시는 삼연의 나이 39세인 1691년에 지어진 시이다. 泠泠亭은 33) 金昌翕, <泠泠亭>, 三淵集 권4.

(19)

경기도 영평 지역에 있었던 정자로 ‘泠泠’이란 이름은 아버지 김수항이 지은 것이다.34) 1689년 기사환국으로 賜死되었던 선친의 이루지 못한 뜻을 받들기 위해 형제들이 영령정을 완성시킨 것이다. <泠泠亭>과

<塗磻溪亭舍仍宿>은 삼연의 아버지인 문곡 김수항과 관련된 장소들 이다. 때문에 삼연은 선친을 회고하며, 당대에 대한 역사인식과 비애감 을 나타내었다고 생각된다.

<泠泠亭>의 1구에서는 정자가 완성된 날의 모습을 읊고 있다. 2구 에서는 가을밤에 형제들이 다함께 일어나 정자 주위를 배회하는 모습 을 노래한다. ‘徘徊’라는 시어는 ‘목적 없이 거닐다’ 또는 ‘주저하다’라 는 뜻이다. 선친의 뜻을 받들어 완성한 곳에서 삼연과 형제들은 왜 배 회하고 있는 것일까. 그와 형제들은 선친이 그리웠을 것이다. 삼연을 비롯한 다른 형제들이 아버지를 그리워하는 모습을 나타내고 있다. ‘徘 徊’라는 시어는 3구의 ‘空山’이라는 시어와 관련지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3구의 ‘空山’에서 山은 白雲山을 지칭하는 것이다. 백운산은 아버지 가 생전에 은거하고자 했던 곳이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셨으므로 空山 이라 표현한 것이다. 선친이 은거하고자 했던 ‘空山’에서 바람소리를 듣기를 고대하지만 이미 아버지는 곁을 떠났다. 때문에 그들은 혹여나 아버지의 소리를 들을 수 있을까 하는 마음에 泠泠亭을 ‘徘徊’하고 있 었다. ‘風珮’는 晉나라 葛洪의 洗藥池 시35)에 나오는 시어로 김수항이 洞이름으로 삼은 것이다.36) 삼연은 ‘空山’과 ‘風珮’라는 표현을 통해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4구에서 삼연은 차가 운 ‘霜露’가 사람을 적신다’라고 하였다. 이는 선친에 대한 그리움이 마 음속에 상처로 깊이 남아 있음을 촉각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결국 삼

34) 김창협, <泠泠亭記>, 農巖集 권24, “亭之名泠泠, 吾先君名之也. 名之也而 亭蓋未作也, 亭未作而名先焉者, 樂其勝而識之焉爾.”

35) 葛洪, <洗藥池>, 古詩紀, “洞陰泠泠, 風珮清清. 仙居永刼, 花木長榮.“

36) 김창협, <泠泠亭記>, 農巖集 권24, “始先君買田於白雲之陽, 卽有卜居之志 焉, 旣而, 得故李氏釣臺而樂之, 遂名之曰風珮洞, 而送老菴作焉. 亭之名也, 蓋在 是時矣.”

(20)

연은 이 시를 통해 선친과의 심리적 거리감을 실감하고 절실히 슬퍼하 고 있다. ‘永世哀’라는 시어는 삼연의 슬픔이 직접적으로 표현된 것이 다. 길이 슬프게 한다는 것은 아버지의 죽음이라는 사실이 지속적으로 삼연에게 슬픔의 원인이 되고 있음을 나타낸다. 즉, 삼연은 이 시를 통 해 비애감을 고조시켜 선친에 대한 그리움과 아버지의 죽음을 절실히 느끼고자 했다고 생각된다. 또한 직접적으로 제시하지는 않았지만 간 접적으로 당대를 비판하는 역사인식 또한 드러난다.

이 시는 삼연이 아버지인 김수항을 회고하면서 일어난 감정을 읊은 것이라고 하겠다. 자식들은 선친의 못다 이룬 꿈을 완성하고 그 주변 을 돌아본다. 하지만 선친의 흔적을 찾아 볼 수 없다. 그들은 쓸쓸하고 적막했을 것이다. 때문에 눈물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그 눈물은 서리 와 이슬로 인해 더욱더 깊이 베어 든다고 하고 있다. 아버지에 대한 깊은 비애감과 당대를 바라보는 역사인식이 간접적으로 드러난다고 하 겠다. 사화가 일어나지 않았다면 김수항은 희생되지 않았을 것이기 때 문이다.

다음은 <塗磻溪亭舍仍宿>이다. 제목의 磻溪는 문곡 김수항이 은거 했던 경기도 과천의 盤溪村을 가리킨다. 이 시는 삼연 나이 42세인 1694년경에 지어진 시로 추정된다. ‘磻溪’는 아버지인 문곡 김수항이 은거했던 곳으로 과거 삼연이 아버지와 잠시 머물렀던 곳이다. 삼연에 게 이곳은 선친과의 추억이 깃든 장소 중 하나였을 것이다. 삼연은 34 살이던 丙寅年 여름 부친을 쫓아 이곳에 와 <磻溪感興> 21수를 짓기 도 했다.37) 선친과 함께 한 장소에 있으니 선친에 대한 생각들이 떠오 르면서 그리운 마음이 생겨났다고 보인다.

塗磻溪亭舍仍宿 반계정사의 벽에 흙을 새로 바르고 하룻밤 묵으며

37) 이승수, 위의 논문, 1997, 76쪽.

(21)

無月江湖百丈深 달 없는 강과 호수는 백길 만큼 깊으니, 有風樓閣二更陰 바람 부는 누각은 二更에 음산해라 身邊燈火明如此 내 몸 옆의 등불은 이다지도 밝은데, 心上氷霜着至今 마음속 빙상은 지금도 여전하네.

酆劍長埋悲紫氣 풍성검38) 길이 묻히니 붉은 검기가 슬프고, 吳薪已冷愧重衾 오나라 땔나무39) 이미 식었으니 두꺼운 이불이

부끄러워라.

皤皤老母吾何往 백발의 노모 계시니 내 어디로 가리오?

舊屋新塗淚滿襟 옛 집에 새로 흙 바르니 눈물이 옷깃에 가득하네.

<塗磻溪亭舍仍宿 >의 1,2구에서는 누각에서 바라본 강물의 모습과 밤늦은 시간의 누각의 분위기를 노래하고 있다. 달은 달빛의 遍滿함에 서 연유하는 가족이나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표현하는데 흔히 사용된 다.40) 시에서는‘無月’이라는 시어를 사용하고 있다. 이는 아버지의 부 재로 인한 삼연의 심리 상태를 말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二更에 달이 없어 강과 호수가 백길 만큼이나 깊다’고 한 것은 결국 아버지의 죽음이 삼연의 삶을 막막하게 해버렸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보인다.

‘陰’41)이라는 시어를 사용한 것도 앞서 쓰인 ‘無月’과 같은 맥락으로 해석된다. ‘陽’의 대비적 이미지로 ‘陰’은 어둡고, 쓸쓸함을 함축하고 있 는 시어이다. 아버지의 부재로 삼연은 어둡고 막막한 삶을 이어가고

38) <張華列傳>, 晉書 卷36, 晉나라 雷煥이 얻었다는 龍泉, 太阿의 두 보검을 말 한다. 吳나라 때 북두성과 견우성 사이에 늘 보랏빛 기운이 감돌기에 張華가 豫 章의 占星家인 뇌환에게 물었더니 보검의 빛이라 하였고, 이에 豐城의 땅속에서 두 검을 발견했다 한다.

39) 춘추 시대 때 吳王 夫差가 越王 句踐을 쳐서 父王의 원수를 갚고자 매양 고생 스럽게 섶 속에 누워 자면서 원한을 잊지 않았다.

40) 김창호, 「한시의 시어, 사유, 자료적 가치와 고전시가 교육」, 한국교육연구

49, 한국한문교육학회, 199쪽.

41) 《素問·六節藏象論》:“日爲陽, 月爲陰”, 《孔子家語·本命》:“群生閉藏乎陰, 而爲化育之始.” 王肅注:“陰爲冬也.” 指秋冬季節의 의미로 사용된다. 漢語大詞 典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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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다고 하고 있는 것이다.

3,4구에서는 등불과 대비되는 자신의 마음을 노래한다. ‘明’이라는 시어를 통해 자신의 곁에 있는 등불은 밝은 빛을 내며 타고 있다고 한 다. 반면 ‘氷霜’이라는 시어를 통해 자신의 마음은 여전히 얼어있다고 하고 있다. 1,2구의 어두워 끝을 알 수 없는 강과 호수 그리고 바람 부는 누각의 음산함은 4구에서처럼 자신의 마음속을 자연에 빗대어 묘 사한 것으로 생각된다. 시인은 자신의 앞길이 막막하고 음산하다고 느 낀다. 그래서 마음이 얼어 있다고 했다.

5구는 아버지를 ‘酆劍’에 비유하고 있다. ‘長埋’라는 시어를 사용하여 아버지인 문곡 김수항이 세상을 떠난 사실을 표현하고 있다. ‘悲’42)는 애통해하는 삼연의 심정을 직접적으로 드러낸 시어이다. 선친을 ‘풍성 검’에 비유해, 풍성검의 검붉은 빛이 묻혀 버린 사실을 슬퍼한다고 하 고 있는 것이다. 즉, 아버지의 죽음을 비통해하고 있다고 보인다.또한 당대를 비판하는 삼연의 역사인식이 드러난 부분이라고 하겠다. 6구는

‘吳薪’이라는 시어를 통해 오나라 夫差의 고사를 인용하여 자신을 부차 에게 투영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앞의 5구에서 풍성검의 고사를, 여기서는 다시 부차의 고사를 인용 하고 있다는 사실을 통해 삼연은 아버지를 죽음으로 몬 정국에 대한 불만을 표출하고 있다고 생각된다. ‘冷’43)이라는 시어는 삼연의 현재 마음을 직접적으로 나타낸다. ‘愧44)라는 시어는 죽은 아버지를 그리는 마음이 식어 버린 자신의 감정을 표현한 것이다. 7,8구는 홀로 남겨진 어머니에 대한 걱정과 회한이 담겨있다. 淚45)’라는 시어를 사용해 아 버지 억울한 죽음을 잊어버리고 있는 자신, 늙은 노모에 대한 걱정 등 이 뒤섞여 서글퍼 흙을 바르며 눈물 흘렸다고 표현하고 있다. 이 시는 삼연의 비애감을 직접적으로 제시하고 있으며 역사인식은 ‘酆劍’, ‘長

42) 哀痛, 傷心, 思念, 悵念의 의미로 사용된다. 漢語大詞典 참조.

43) 冷淸, 淸閑, 冷落의 의미로 쓰인다. 漢語大詞典 참조.

44) 中庸 “尙不愧于屋漏”의 의미로 사용된다.

45) 孔稚珪, <北山移文>, “淚翟子之悲”의 의미로 쓰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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埋’, ‘吳薪’등의 시어를 통해 간접적으로 제시하고 있다.

다음으로 살펴 볼 작품은 <南門樓>이다. 남문루는 강화도 교동읍성 에 있었던 누각중 하나이다. 당시 교동읍성에는 동쪽, 남쪽, 북쪽에 문 이 있었는데 남쪽 성문에 있던 樓가 庾亮樓였다. 이 시의 남문루는 유 랑루를 가리키는 것이다. 삼연은 1698년 겨울 江華 留守로 있던 金昌 集을 방문했다. 시는 1699년 봄에 지어진 것이다. ‘南門樓’는 그의 선 조인 선원 김상용의 비석이 세워진 곳이다. 조상과 관련된 장소를 방 문하여 삼연은 역사적 사실을 회고하며, 조상을 그리고 있다.

南門樓 남문루

千秋瞻挹此南樓 오랜 세월 이 남문루를 우러러 보니, 相國衣冠昔未收 그 옛날, 상국의 의관 수습하지 못했었네.

甲子重回神赫赫 갑자가 거듭 돌았지만 정신은 혁혁하고, 金湯猶在恨悠悠 金城湯池가 남아 있지만 한은 아득해라.

悲騰暮郭煙光紫 슬픔 차오르는 저물녘 성곽에 노을빛이 붉고, 淚入春天日色愁 눈물 흐르는 봄 하늘에 햇빛도 근심스럽구나.

文獻後人成子過 문헌집안의 후손인 성자가 지나다가, 共謀城側屹龜頭 함께 성 옆에 신도비 우뚝 세울 것을

도모했네.46)

<南門樓> 1구는 남문루를 바라보고 있는 삼연의 모습이 담겼다. 2 구의 ‘相國’이라는 시어는 당시 우의정의 벼슬을 지냈던 仙源 金尙容을 가리키는 것이다. 김상용은 병자호란 때 우의정직을 지내고 있었는데 廟社의 신주를 받들고 嬪宮ㆍ元孫을 수행해 강화도에 피난했다가 이듬 해 성이 함락되자 1월 22일 그곳에 있던 화약에 불을 지르고 순절했 다.47)‘昔未收’라고 한 것은 김상용이 불에 타 죽었기 때문에 의관을 수습하지 못했다라고 한 것이다.

46) 金昌翕, <南門樓>, 三淵集 권7.

47) 朝鮮王朝實錄, 「인조 15년 정축(1637)1월 22일」조에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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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구에서의 ‘神赫赫’이라고 한 시어는 김상용의 충절 정신이 혁혁하게 빛난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4구의 ‘金湯’이라는 시어는 교동읍성을 가 리키는 것이다. ‘恨悠悠’라는 시어는 한의 깊이가 끝이 없다는 것을 나 타내며, 이는 한의 깊이가 아래로 끝없이 이어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3, 4구에서는 시간은 흘렀지만 김상용의 충절의 정신은 아직 빛나고 있고, 교동읍성은 여전히 굳센 면모를 뽐내지만 김상용의 한은 아직 거두어지지 못했다고 하고 있는 것이다.

5, 6구에서는 남문루 성곽 주변을 서성이는 시인의 모습을 읊고 있 다. ‘悲騰’이라는 시어는 슬픔이 점점 차오른다는 것을 나타낸다. 이는 슬픔이 위로 끝이 없이 계속된다는 것을 표현하고 있다. 저물녘 성곽 에 점점 붉어지는 노을빛처럼 자신의 슬픔도 점점 차오르고 있다고 표 현한다. 붉은 빛은 슬픔의 강도를 나타내는 것이라고 보인다. 즉, 강렬 한 슬픔을 드러내고자 붉은 노을빛이라는 시어를 사용했다. ‘淚, 愁’라 는 시어를 통해서 삼연은 자신의 심사를 직접적인 방법으로 표출하고 있다. 눈물을 흘리고 근심스러워하는 것은 선조가 겪은 한의 깊이와 슬픔의 깊이를 공감한 까닭이라고 하겠다. 또한 당시 조정에 대한 원 망이 간접적으로 표현되어 삼연의 역사인식이 드러난 부분이라고 하겠 다.

‘남문루’라는 공간에 와보니 더욱 절절하게 그것들이 느껴졌기에 삼 연은 눈물을 흘리고 슬퍼한 것이다. 또한 눈물을 흘리며 바라본 봄 하 늘의 햇빛에 자신의 마음을 투영시키고 있다. 봄 하늘의 햇빛은 다른 이에게는 따사로운 빛으로 인식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시인에게 는 근심스러운 존재일 뿐이다. 시인의 심사가 근심스러움으로 가득 찼 기에 주변의 경관 또한 그렇게 느껴질 수 있었다고 생각된다.

7구의 ‘成子’는 獨靑軒 成璟(1641~?)을 가리키는 것이다. 성경이 김 창집에게 이 남문루는 김상용이 순절한 곳인데‘어찌 비석을 세워 그것 을 기록하지 않는가?”라고 질책한 일이 있다. 그 후 김창집이 농암, 삼 연과 함께 비석을 세웠다.48) 7, 8구는 비석을 세운 당시의 상황을 제 시했다고 보인다. 비석을 세운 후 삼연은 형제들과 조상을 생각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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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에 잠겼던 사실을 노래하고 있는 것이다.

다음은 <南門樓>와 관련된 두 번째 시이다. 이 시에서는 역사적으 로 비극적 사건인 병자호란의 일을 언급하면서, 선조인 청음 김상헌의 일까지 회고하고 있다.

南門樓 其二 남문루 그 두 번째

南漢江都陷後先 강화도와 남한산성이 앞뒤로 함락되니, 弟兄雙節日星懸 형제의 두 절개 해와 별처럼 걸렸구나.

降書碎手城摧哭 항서를 손으로 찢으며 성이 무너지도록 통곡하고,

高焰投身羽化僊 치솟는 불꽃에 몸을 던져 신선이 되었네.

義熟連床講有素 의리가 익숙하니 책상을 함께하여 평소 강론했기 때문이고,

心符易地處皆然 마음이 부합하니 처지가 바뀌었어도 똑같이 했을 테지.

諸孫若昧春秋義 여러 후손들이 만약 춘추대의에 어둡다면, 便是全忘二祖年 이는 곧 두 선조가 충절을 다한 해를 완전히

잊은 것이라네.49)

<南門樓 其二> 1구의‘陷後先’이라는 시어는 자신들의 선조가 역사 적 사건 아래에서 시간차를 두고 서로 죽었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강 화도가 함락되자, 연이어 남한산성 또한 함락되었다. 그때 두 선조들이 죽음을 당한 것이다. 이 시어는 위태롭고 급박한 당시 상황을 제시해

48) 성해응, <成氏世譜下>, 『硏經齋全集』권48, “獨靑公以崇禎辛巳八月二十九 日生, 十一歲始學, 文思奇壯, 不愧爲翠虗公弟也, 公豊貌偉幹, 風度峻整, 常有遺 世長往之意, 文谷欲薦爲官, 公力辭之, 歸安山丙舍, 手植松一株, 仍爲號以見志, 好從滄海許公格遊, 許公甞橫罹於獄, 獄久不解, 公獨數訪于獄中, 相與唱酬, 公世 居白嶽下, 與金氏諸公爲文章之好, 夢窩忠獻公留守江都, 農巖,三淵二先生往遊, 而公亦自安山往, 相與爲歌詩甚盛, 江都之南門, 文忠公殉節之所也, 公謂忠獻曰盍 樹碑以記之, 此公責也, 忠獻曰諾, 卽伐石表之, 三淵詩曰文獻後人成子過, 共謀城 側屹龜頭者是也, 肅廟壬辰二月十日卒, 葬于廣州參奉公墓後, 有集二卷, 詩甚精 工, 三淵稱之曰獨靑晩年成就, 勝於石洲云.“

49) 金昌翕, <南門樓 其二>, 三淵集 권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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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애감을 고조시킨다. 당시 인조는 남한산성에 있었고 빈궁과 왕자들 은 강화도로 피난해 있었다. 청나라 군대가 강화도를 함락했다는 소식 을 들은 인조가 남한산성에서 항복을 결심하게 된 사건에 대해 언급하 고 있는 것이다. 2구에서 ‘兄弟雙絶’이라는 시어는 김상용과 김상헌 형 제의 절개를 가리킨다. ‘日星縣’이라는 시어를 써서 두 선조의 절개가 해와 별처럼 빛나게 되었다고 하고 있다. 하지만 이 시어는 동시에 두 선조의 죽음을 비통해하는 것으로도 해석될 수 있다. 해와 별은 우리 를 비춰주는 것이지만 결코 가까이 할 수 없는 곳에 위치해있다. 이는 선조들이 높은 곳 즉, 죽었다는 것을 의미함과 동시에 그들의 절개가 죽음을 통해 빛이 나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3구의 ‘降書’라는 시어는 인조가 남한산성에서 청나라의 용골대·마부 대에게 항복할 때 최명길이 작성한 문서를 가리킨다. ‘城摧哭’이라는 시어는 당시 상황을 현장감 있게 전달한다. 청음 김상헌이 작성하고 있는 항복 문서를 찢어 버리고 통곡하는 모습50)이 생생하게 그려진다.

즉, 이를 통해 현장의 비애감을 직접적으로 전해준다. 4구에서 ‘高焰 投身’이라는 시어는 김상용이 강화도 남문루에서 화약을 쌓고 불을 붙 인 후 몸을 던진 사실에 대해 읊은 것이다. 이 또한 당시 상황을 눈 에 보이듯이 표현한 부분이라고 하겠다. 삼연은 역사적 사실을 현실감 있게 전달함으로써 비애감을 더욱 고조시켰다고 생각된다.

5구는 김상헌과 김상용의 의리가 두텁다고 하고 있다. 형제가 평상 을 같이하며 학업과 덕을 닦았기에 절개가 뛰어날 수 있었음을 언급하 는 것이다. 6구에서는 두 사람의 마음이 같았기 때문에 서로 상황이 바뀌었다고 해도 같은 행동을 취했을 것이라고 한 것이다. 7에서 ‘諸 孫’라는 시어로 표현한 것은 삼연 자신을 포함한 모든 후세사람들을 가리킨다. ‘春秋大義’라는 시어는 忠義思想과 尊王攘夷로 대표되는 춘 추대의를 말한 것으로 여기에서는 역사에 대한 지식을 갖추는 것을 의 미한다고 하겠다. 8구에서 삼연은 ‘二祖’라는 시어를 통해 김상용과 김

50) 朝鮮王朝實錄, 「인조15년 정축(1637)1월 18일」조에 보인다.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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