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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난인문학 정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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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ademic year: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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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의 함의와 역할에 대한 분석

1)박승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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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 차

1. 재난과 인문학은 어느 지점에서 만나는가?

2. 과학성에 기초한 현대학문과 생명의 학문으로서 인문학 3. 인문학의 실천성 확보-인간의 존엄성 실현의 길 4. 공감능력 회복과 인문학

5. 맺는 말

<국문초록>

‘재난인문학(Disaster Humanities)’이란 용어는 우리 학계에서 아직 생소하 다. 인간이 행복을 추구하는 일반적인 삶의 의도와 바람과 상치되는 재난에 대하 여 인문학적 관점에서 이해하고, 해석하고, 그 대응의 방법을 찾아나가려는 시도 라고 할 수 있다.

재난인문학’이란 개념이 실질적 의미를 갖기 위해서는 재난이란 고통스럽고 비 극적인 현실의 문제에 대하여 ‘인문학’은 어느 지점에서 개입이 가능한 것인가에 대한 답을 하는 것이 우선되어 보인다.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가 여기서 말하는 인문학이란 어떤 함의(含意)를 담고 있으며, 그 역할은 무엇인지에 대한 논의가 이어져야 할 것으로 보인다.

현대사회는 위험사회라고 정의된다. 그러한 위험사회 속에서는 인류를 포함한 전 지구의 생태계가 파멸의 위기에 직면할지 모른다는 불안감과 위기감이 늘 우리

* 이 논문은 2019년 대한민국 교육부와 한국연구재단의 지원을 받아 수행된 연구임 (NRF-2019S1A6A3A01059888).

** 조선대학교 재난인문학연구사업단 HK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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를 압박하게 된다. 이러한 ‘위험’이 현실화하여 ‘재난’이 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서는 인간의 기존의 삶의 패러다임과 세계관을 변화시킬 방법을 마련하여야 한다.

만약 세계관의 대전환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인류의 장래는 어둡다고 할 수 있 다. 사실 인류의 운명을 결정할 수 있는 것은 인류 이외에는 아무것도 없기 때문 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이러한 ‘위험’을 내재한 재난의 상황에 윤리 철학, 그리고 인문학이 개입할 가능성이 열려 있는 것이다. 지금의 이른바 ‘위험사회’의 ‘불안’을 제거하기 위해서는 우리의 기존의 삶의 방식과 가치관의 전환을 요구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러한 가치관의 전환은 인간의 의지에 호소할 수밖에 없다. 인간의 의지 발현 은 인간의 이상 실현을 위한 것이고, 그 이상은 바로 ‘내재적 도덕성’에 기반해야 만 한다. ‘내재적 도덕성’에 기반한다는 것은 인간이 자신의 존재를 긍정함과 동시 에 타자성을 인정하는 공존의식을 발현하는 것이다. 인간이 인간다움을 실현한다 는 것은 자신만의 생존을 추구하는 이기적 욕망을 극복하고, 타자와 더불어 삶을 실현하는 것이다. 바로 이 부분에서 인문학의 역할이 드러나는 것이다.

주제어 : 재난, 인문학, 재난인문학, 과학, 인간 존엄성, 위험사회, 내재적 도덕성

1. 재난과 인문학은 어느 지점에서 만나는가?

우리 학계에서 ‘재난인문학’(Disaster Humanities)이란 용어는 아직 생소 하다.1) 전체적 의미에서 말하면, 인간이 행복을 추구하는 일반적인 삶의 의 도와 바람과 상치相馳되는 재난에 대하여 인문학적 관점에서 이해하고, 해 석하고, 그 대응의 방법을 찾아나가려는 시도라고 할 수 있다. 재난은 사전

1) ‘재난인문학’이란 용어는 2019년 5월 조선대학교 재난인문학 연구사업단이 한국연구재 단에서 지원하는 인문한국플러스(HK⁺)사업에 “동아시아 재난의 기억, 서사, 치유: 재난 인문학의 정립”이란 아젠다로 선정되면서 처음 사용된 것이다. 이 사업은 한국과 중국, 일본 등 동아시아에서 일어난 재난을 역사적․문학적․철학적 관점, 즉 인문학적 관점 에서 조명하고 연구하고자 하는 새로운 시도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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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으로 상당한 물리적 상해나 파괴, 생명의 상실, 혹은 환경의 급격한 변화 를 야기하는 자연적 혹은 인공적 위해를 뜻한다. 우리의 주변에서 늘 접하 게 되는 재난의 종류는 다양하지만,2) 이러한 재난이 한번 일어나게 되면, 필연적으로 그것이 “우리의 삶과 사회를 변화시키는 심각한 사고이고 사 건”이라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렇다면 ‘재난인문학’이란 개념이 실질 적 의미를 갖기 위해서는 재난이란 고통스럽고 비극적인 현실의 문제에 대 하여 ‘인문학’은 어느 지점에서 개입이 가능한 것인가에 대한 답을 하는 것 이 우선되어 보인다.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가 여기서 말하는 인문학이란 어떤 함의含意를 담고 있으며, 그 역할은 무엇인지에 대한 논의가 이어져 야 할 것으로 보인다.

우선 학문의 적용 대상에 비추어 보면, 실재적으로 발생한 재난이란 현 상황에 대하여 인문학적으로 실질적 대응의 방안을 제시하는 것은 불가능 해 보인다. 왜냐하면 재난의 발생은 우리의 눈 앞에 펼쳐지는 구체적인 물 리적, 사회적 현상이기에 과학적이고 기술적인 합리적 방안을 제시하는 것 이 실효성 있는 대응책인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3)사실 과학은 구체적인

2) 재난은 다양한 원인으로 발생한다. 크게는 자연적, 인적(기술적), 사회적 재난으로 나눌 수 있을 것 같다. 지진, 쓰나미, 홍수, 가뭄, 기아, 전염병 등 인간의 통제력을 완전히 벗어나 자연의 힘에 의하여 일어나는 것을 자연재난라 부르고, 원자력 유출, 기름유출, 전쟁, 테러리즘, 전력마비, 화재로 인한 통신장애, 폭발사고 등의 인간의 조작의 실수나 부주의로 발생하는 것을 인적재난라 분류할 수 있다. 그리고 IMF로 불리는 외환위기로 초래된 경제 위기는 사회적 재난에 속할 것이다. 그 밖에도 사스, 조류인플루엔자(AI), 또한 전염병으로 인한 동물의 살처분도 우리가 최근 겪게 되는 재난 상황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며, 산업의 발전과 더불어 발생하는 공해의 문제, 미세먼지의 재앙은 자연재난 과 인적재난이 결합된 형태로 현재 우리가 심각하게 직면한 일상적 재난 상황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후쿠시마 원전사고에서 볼 수 있듯이 일차적으로는 쓰나미에 의한 자연재난이지만 이차적으로 방사능 유출에 의한 기술적(인적) 재난이라고 할 수 있다.

고도의 기술사회에서 발생하는 이러한 형태의 재난을 따로 복합재난이라고 말한다. (재 난건강위원회편, 뺷재난과 정신건강뺸, 학지사, 2015, 26쪽 참조.)

3) 우리 학계에서 흔히 사용하는 ‘인문과학’이란 용어가 타당한지를 우선 물어야 할 것이 다. 이것은 모든 학문을 과학적 차원에서 이해하려는 ‘과학 일원론적 사유’에서 비롯된 것이라 할 수 있다. 박이문도 “사회과학은 사회학, 경제학, 정치학, 인류학 등을 포함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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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각적인 경험 세계를 다루는 것이고, 눈앞에 드러난 사실의 세계에 대하여 조목별로 세밀하면서도 조리 있게 분석하여 그 원리를 분명하게 밝혀내는 것이다. 이에 반하여 인문학은 자연과학적인 학문의 방식과는 달리 현상의 배후에 숨겨진 의미를 해석하고, 반성적으로 성찰하는 것이다. 한마디로 말 하면, 자연과학이 자연 현상에 관한 학문이라고 한다면, 인문학은 마음에 관한 학문이다.4)따라서 과학이 밝혀내는 것은 대상에 관한 경험적 지식을 말하는 것이라면, 인문학은 반성과 성찰의 과정을 거쳐서 도달하는 지혜를 가리키며, 인간들의 반성적 깨침(각오覺悟)이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5) 이처럼 자연과학적 방식으로 접근하는 것이 더 효율적일 것으로 보이는 재 난에 대하여 인간의 반성적 깨침을 강조하는 인문학은 어느 지점에서 개입 이 가능한 것일까?

고 있으며, 인문학은 문학, 역사학, 철학을 포괄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 인문학은 결코 과학이 아니다. 인문학도 일종의 앎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널리 사용되는 인문과학이라 는 개념은 자기 모순적이다. 인문학에는 그냥 인문학이라는 개념이 더 적절하다. 객관성 을 바로 앎이 지향하는 바이고, 자연과학적 앎이 가장 객관적인 앎이라는 점에서 자연과 학적 앎이 모든 앎의 이상이기는 하지만, 모든 앎이 자연과학으로 환원될 수는 없다.”는 주장을 하고 있다. 논자도 객관적 경험의 세계를 다루는 과학과 인간의 정신적 영역, 가치의 영역을 다루는 인문학의 영역이 구별되어야 한다는 생각에서 이 논의를 출발하 고 있다. (박이문, 뺷더불어 사는 인간과 자연뺸, 미다스북스, 2001, 40쪽.)

4) 인문학이 지닌 함의를 박이문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인문학을 대표하는 문학, 역사, 철학 등은 그들의 앎의 대상이 물리적 혹은 물리적 현상으로 보여진 현상이 아니 라 기호 혹은 기호적으로 보여진 현상이라는 점에서 동일하다. 학문으로서의 문학의 대상은 문자적 기호로서 문학작품이며 역사학의 대상은 문자적 기호로서의 역사적 기 록 혹은 기호로 볼 수 있는 역사적 유물과 유적이다. 또한 철학의 대상은 문자적 기호로 서의 철학 텍스트 혹은 기호로 볼 수 있는 철학적 사유 활동이다. 기호는 해석의 대상이 며, 해석은 언제나 의미의 해석이다. 그러므로 기호를 앎의 대상으로 하는 인문학은 지 각할 수 있는 기호 속에서 비지각적인 의미를 찾아내고 해석을 해석하는 학문, 즉 일종 의 기호학이다. 기호의 의미는 어떤 물리적 현상, 사건, 상황일 수 있고, 기호를 표시한 인간의 감정이나 의도 혹은 생각일 수 있다.” 이러한 점에서 인문학은 분면 과학의 방법 론과 구별되는 지점이 있다. 이 점은 본문에서 더 자세히 살펴볼 것이다. (박이문, 위의 책, 41쪽 참조)

5) 牟宗三, 「簡論哲學與科學」, 뺷牟宗三先生晩期文集뺸, 1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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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난에 대한 정의는 다양하고 많으나, 재난이 발생하게 되면 많은 사람들 에게 엄청난 피해를 가한다는 것 이외에는 이들을 하나로 묶을 수 있는 공 통된 정의는 없을지 모른다. 그렇다면 재난의 상황과 늘 직면하면서 살아가 는 인간들은 재난의 상황 앞에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당면한 불행을 애도 하고, 그것을 기억하고, 또 망각하면서 주어진 상황 속에서 새롭게 삶을 준 비하는 것 이외에 다른 무엇이 없을지도 모른다. 이러한 불행한 사태에 대 하여 인문학의 중심에 있는 철학은 어떤 문제 제기를 하여 왔는가? 불행히 도 철학은 이에 대하여 중심된 논의의 주제로 삼지 않았다. 왜냐하면 철학 은 인간의 사유 범위와 의지의 영역 속에 들어오는 것을 다루어 왔기 때문 에, 과거 재난은 인간의 문제가 아닌, 인간의 방만한 삶의 태도에 대한 하늘 의 응징 같은 것으로 치부했고, 인간이 어찌할 수 없는 불의의 사고를 의미 했기 때문이다. 인간 능력의 한계를 넘어서는 원인에 의한 것이기에 철학적 사유의 범위에 벗어난 것으로 취급하고, 재해를 필연적인 것, 숙명으로 받 아들이는 것에 머물러 있게 되었다. 문명 역사에서 재난은 인간 의지보다는 자연이나 우연에 의한 것에 의해 지배되어 왔기 때문이다.6)

그러나 이러한 재난의 개념은 서양 근대를 거치면서 자연을 인간 이성의 대상, 즉 타자화시킴으로써, 인간의 이성적 통제의 대상 안으로 이끌고 들 어와 자연과학적 설명이 가능한 과학적 관리의 대상으로 다루어지게 되었 다. 자연 현상으로서의 재난은 원칙적으로 설명 가능한 것이 됨으로써 인간 의 통제 범위 안에 들어온 것이다. 이미 자연재난에 견딜 수 있는 도시계획, 건축의 내진설계 등, 지진에 의한 피해를 줄이려는 노력이 근대에 들면서 시행됐다.7) 이런 의미에서, 재난은 도덕적 원인을 갖거나 신의 뜻에 달린

6) 허라금, 「위험시대“재난”과 정치적 책임」, 뺷철학연구뺸 108, 2015, 73쪽.

7) 1755년 11월 1일에 일어난 리스본 대지진이 재난에 대한 개념을 근대적 의미로 바꾼 계기가 되었다. 재난을 도덕적 타락에 대한 신의 응징으로 보던 시각에서 벗어나 과학 적 방식으로 설명하는 계기를 제공하게 되었다.(니콜라스 시라디, 뺷운명의 날-유럽의 근대화를 꽃피운 1755년 리스본 대지진뺸, 강경이 옮김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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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가 아니라 과학적 연구와 인간적 영역의 문제가 된 것이 근대적 재난 패러다임으로의 가장 큰 변화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인간의 이성적 통제 범위 내에 들어왔다고 믿었던 근대적 재난 개념은 기술 문명이 고도로 발전하고 있는 현대의 관점에서는 지나친 과학 기술 중심의 낙관론에 바탕을 둔 것을 보인다. 왜냐하면, 현대사회에서는 자연적 위력에 의한 것보다, 예측․관리가 불가능한 인위적 요인에 의한 재 난 발생 비율이 점차 높아지고 있기 때문이다. 발생할 것이 예측은 되지만 통제할 수 없는 위험들이 과거에 비하여 훨씬 더 많아진 것이 사실이다. 또 한 현대사회에서는 인간의 삶을 풍요롭고 편리하게 만들어 준 과학적 지식 과 기술 그 자체가 오히려 안전한 미래를 예측할 수 없는 위험을 만드는 원인이 되고 있다.

사실 현대 물질문명의 발전은 자연정복, 달리 말하면 자연파괴의 대가라 고 할 수 있다. 현대문명이 발전할수록 자연환경은 그것을 감당하기 점점 어려워지고, 인류에게 도리어 큰 재앙으로 되돌아오고 있다. 현대문명 사회 는 전기에너지를 기반으로 돌아가고 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하지 만 전기를 기본 에너지로 하는 사회적 시스템을 포기하지 않는 한, 아니면 보다 빠른 교통수단을 포기하지 않는 한 재난의 위험은 점점 더 커질 수밖 에 없다. 일본의 후쿠시마 원자력 발전소 사고, 비행기 추락, 기름 또는 유 해가스 대량 유출 등등의 일들은 오늘날 기술문명 발전의 혜택을 적극적으 로 누리고 있는 현대인의 삶의 방식과 분리될 수 없다. 인간의 행복을 위해 고안되었던 자연정복을 바탕으로 한 기술문명의 발전은 그 과도한 성공의 결과 때문에 인간을 포함한 지구의 전 생태계에 가장 큰 도전을 초래하게 되었다. 이러한 현대사회의 불안과 위기를 울리히 벡은 ‘위험사회’라고 규 정한다.8)

8) 독일의 사회학자 울리히 벡은 ‘위험’(리스크)이라는 개념을 통하여 이러한 재난의 위험 이 가진 역설적 특징을 포착해낸 바 있다. 벡은 근대 이전사회, 근대 사회(18세기∼2차 세계대전), 현대사회(2차 세계대전 이후)에서 ‘위험’의 의미를 구분한다. 근대 이전 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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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위험사회 속에서는 인류를 포함한 전 지구의 생태계가 파멸의 위 기에 직면할지 모른다는 불안감과 위기감이 늘 우리를 압박하게 된다. 이러 한 내재된 ‘위험’이 현실화되어 ‘재난’이 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는 인간 의 기존의 삶의 패러다임과 세계관을 변화시킬 방법을 강구하여야 한다. 만 약 세계관의 대전환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인류의 미래는 어둡다고 할 수 밖에 없다. 왜냐하면, 인류의 운명을 결정할 수 있는 것은 인류 이외에는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이러한 ‘위험’을 내재한 재난의 상황에 윤리 철학, 그리고 인문학이 개입할 가능성이 열려 있는 것이다. 지 금의 이른바 ‘위험사회’의 ‘불안’을 제거하기 위해서는 우리의 기존의 삶의 방식과 가치관의 전환을 요구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9) 그러한 가치관의 전환은 인간의 의지에 호소할 수밖에 없다. 인간의 의지의 발현은 인간의 이상 실현을 위한 것이고, 그 이상은 바로 ‘내재적 도덕성’에 기반해야만 한 다. ‘내재적 도덕성’에 기반한다는 것은 인간이 자신의 존재를 긍정함과 동

에서의 위험이 대개 ‘밖’에서 인간에게 닥치는 어쩔 수 없는 자연재난으로 받아들여졌다 면, 종교나 전통, 자연의 막강한 힘에 구속되지 않은 채 “스스로 산출한 미래의 개방성, 불확실성, 장애물과 직면”하게 되는 근대사회에서는 인간의 합리성을 통해 통제하고 극 복하려 한다. 하지만 현대사회는 “스스로 산출한 위험을 통제할 수 있다는 믿음”자체가 불가능해진 단계이다. “누구도 위험을 피할 수 없고 누구도 적절한 보호책을 마련할 수 없는” 현대, 즉 ‘위험사회’는 인류문명의 ‘승리’가 재난의 가능성을 가속화시키며, 그에 대한 확실한 통제가 불가능해진 사회를 지칭한다. 가령, 기후변화, 대량실업, 테러리즘, 핵폭발 등의 현대적 ‘위험’은 바로 성공적인 현대화의 산물일 뿐 아니라 인류가 여전히 해법을 마련하지 못하고 있는 글로벌한 문제들이라는 것이다.(문강형준, 「왜 ‘재난’인가 -재난에 대한 이론적 검토」, 22.)

9) 여기서 동양의 노자가 물질적 욕망 충족과 물질적 풍요의 향락에 빠져 상대적 빈곤감 에 살아가는 인간들에게 던지는 경고를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노자는 “만족함을 알면 욕되지 않고, 멈춤을 알면 위태하지 않다(知足不辱, 知止不殆)”라고 경고한다. 만약 기 존의 욕망과 사회적 구조를 바꿀 의지를 발휘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기존의 욕망 충족의 큰 구조적 흐름에 휩쓸려 파편화된 개인으로 전락할 수밖에 없고, 물질문명의 흐름을 그대로 방기하게 될 것이다. 왜곡된 욕망과 삶의 태도를 ‘멈추는 것’과 주어진 삶에 ‘만족 함’을 아는 것은 바로 우리의 의지를 발휘할 때 가능한 것이다. 따라서 가치관의 전환은 인간의 의지에 호소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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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에 타자성을 인정하는 공존의식을 발현하는 것이다. 인간이 인간다움을 실현한다는 것은 자신만의 생존을 추구하는 이기적 욕망을 극복하고, 타자 와 더불어 함께 살아가는 삶을 실현하는 것이다. 바로 이 부분에서 인문학 의 역할이 드러나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인문학을 한마디로 말하면 ‘인간다움’을 탐구하고, 그 실 현의 방법을 연구하는 학문이라 할 것이다. 그래서 “인간이란?”, “사람이 사람답다는 것은 무엇인가?”란 질문을 끊임없이 던지는 것이다. 이러한 인 문학의 활동을 다른 말로 표현하면 일차적으로 ‘문화의식의 고양高揚’이라 고 정의할 수 있다. 문화의식이란 바로 인간을 인간으로 대우하고, 물건으 로 취급하지 않는 반물화反物化의 의식이고,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면 바로 가치관념의 발현이다. 이러한 문화의식이 침체하게 되면, 인간 사회는 인간성 상실의 국면을 맞이하게 될 것이고, 인간을 그 자체의 목적이 아닌, 하나의 물건이나 수단으로 취급하는 물화物化의 단계에 접어들게 된다. 이 러한 단계에서는 인간을 생물학적 차원의 인간으로만 보게 되고, 가치적 측 면에서 인간으로 보지 않게 된다. 따라서 인간이 인간다움을 실현할 수 있 는 근거인 인성人性, 정의正義, 이상理想, 가치價値 등은 전부 부정당하게 되고 학문의 대상에서 제외되기도 한다.10) 그렇게 되면 인간은 본능적 욕 구에 충실한 짐승의 차원으로 떨어지게 되는 것이다.11)이러한 차원에서는 약육강식, 적자생존이란 무한 경쟁의 논리가 당연시 되는 사회적 분위기가 우세한 힘을 얻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인문정신은 인간을 인간으로 대우하 지 물건으로 취급하지 않는 ‘반물화反物化’의 활동이고,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면 인간이 인간다움을 실현하는 가치관념의 발현이라고 할 수 있다.

10) 牟宗三, 「人文主義的基本精神」, 뺷道德的理想主義뺸, 대만학생서국, 1985, 151쪽 참조.

11) 짐승의 차원이라고 하여 동물을 비하하는 것이 아니다. 생물학적 차원에서는 인간은 동물의 한 종이고, 다른 동물보다 우월한 지위를 점하고 있다고 할 수 없다. 다만 가치적 차원에서 인간이 인간다움을 실현하려는 그 지점에서 인간은 다른 동물과 구별될 수 있다. 인간다움이란 바로 나만의 생존을 넘어 더불어 사는 삶을 고민하는 가치관념을 발휘하는 그 지점에서 출발점을 삼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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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끝까지 인문학의 끈을 놓지 않으려는 것은 바로 짐승의 차원으로 떨어지지 않고, 더불어 사는 삶의 가치, 즉 인간다움의 가치를 실현하기 위 한 노력이라고 할 것이다.

현대인의 삶을 냉정히 돌아보면, 현대인들은 과학기술의 혁명에 따른 물 질적 풍요와 기술적 편리함의 달콤한 마력 앞에서 끊임없는 물질적 욕망 충족을 추구하고 있다. 하지만 인간의 물질적 욕망 충족의 정도가 높아갈수 록 인간들이 직면하게 되는 ‘위기’와 ‘위험’의 공포는 - 멸망을 불러올지도 모르는 재난 - 점차 더 커지게 마련이다. 이러한 ‘위기’와 ‘위험’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그 극복의 단서를 어디에서 찾을 수 있겠는가? 우리는 재 난으로 이어질 개연성을 내포한 ‘위험사회’를 조장하는 것은 자본주의와 첨 단 과학기술의 발전이 원인이라고 책임을 전가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러한 문명발전과 자본주의의 큰 흐름을 어느 누구도 막아낼 방법은 없는 것처럼 보인다. 만약 이러한 문명의 혜택을 송두리째 부정하고 제거하자고 주장한 다면, 이것은 마치 돈키호테식의 공허한 절규에 지나지 않을 것 같다. 이러 한 상황에서 보면, ‘위험’과 ‘공포’를 불러오는 재난이란 절박한 문제에 대하 여 인간의 ‘반물화’와 ‘가치실현’을 주장하는 인문학적 접근을 시도하는 것 도 역시 현실성 없는 공허한 메아리로 들릴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한걸음 더 들어가 살펴보면, 이러한 위기를 불러오는 것은 자본주 의 경제체제와 첨단과학기술에 있는 것이 아니라 정신보다 물질을, 마음의 양식보다는 몸의 양식을 선호하는 인간의 가치관에 기인하고 있는 것이 아 닌가? 현대사회는 바로 이러한 물질중심, 과학중심의 가치관이 지배를 하 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냉철히 돌아보면, 자본주의 경제가 지배하는 사회 와 첨단과학기술 발전이 정신적 만족보다는 물질적 안락을 선호하는 인간 을 만들어 낸 것이 아니라, 거꾸로 정신적 가치보다는 물질적 만족에 더 큰 비중을 두는 인간의 보편적이고 원초적 욕구가 자본주의 경제체제와 첨단 과학기술 발전을 가져오게 됐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12) 앞에서 인류의 운명을 결정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인류뿐임을 강조했다. 따라서 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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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가 직면하고 있는 재난의 문제는 인간의 주체적 책임 의식을 확인하고, 인간의 지위와 역할에 대한 자각과 삶의 방향성을 가름할 가치관에 대한 전환을 절실히 요구하지 않을 수 없다. 그렇다면 인간의 가치관의 전환을 어디에서 찾을 수 있는 것인가? 이러한 인간의 가치관의 전환을 가능하게 할 근거를 우리는 인문학에서 찾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이처럼 위험사회의 문제를 해결할 실마리를 인간의 가치관과 세계관의 전환에서 찾고, 그 가치관의 전환에서 인문학이 개입할 수 있다는 것을 주장 하게 되면, 여기서 직면하는 문제는 가치전환을 유도하는 ‘인문학’이란 과연 어떤 함의를 지닌 학문인가에 대한 물음에 답하지 않을 수 없다. 최근 우리 사회에서 대중적으로 인문학의 요구가 넘쳐나고 있고, 다양한 명칭이 붙은 인문학 강좌가 개최되고 있지만, 인문학이 과연 무엇을 하는 학문인가에 대 한 물음에 적절하게 대답하는 경우를 찾기 어렵다. 그렇다면 여기서 말하는 인문학이란 어떤 함의를 지니는지에 대한 논의를 전개할 필요가 있다.

2. 과학성에 기초한 현대학문과 생명의 학문으로서 인문학

현대 사회에서 기계문명이 발달하게 됨으로써 인간의 노동시간과 역할 은 점차 줄어드는 반면 삶은 더 편리해지고 있지만, 그와 동시에 인간의 지 위와 역할, 그리고 존엄성은 점차 약화되어 가고 있다. 하지만 과학 기술과 자본주의 산업이 급진적으로 발전할수록 인문학적인 지성에 바탕을 둔 인 간의 주동적 역할은 더 절실하게 요구되고 있다고 할 것이다. 왜냐하면, 달 리는 것은 자동차에, 나는 것은 비행기에, 계산하기는 인공지능에, 산업 노 동은 로봇에 맡긴다고 하더라도 이것들을 적절하게 조절하고, 조율하는 것 은 인간의 역할이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서 인간에게는 균형 잡힌 통찰력, 곧 인문학적 소양을 갖춘 지성이 더욱 필요한 것이다.

12) 박이문, 뺷더불어사는 인간과 자연뺸, 미다스북스, 3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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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근대에 들면서 개인의 발견을 통한 이성과 합리성이란 측면에서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였지만, 기술 산업의 발전의 영향 하에서 인간다움을 증진하고, 인문학적 소양을 쌓아가기란 현실적으로 그렇게 녹녹하지 않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현대사회에서 중시되는 것은 ‘과학기술’에 대한 맹목에 가까운 믿음이라고 할 수 있다. 현대인들은 과학적 방식으로 증명되지 않으 면 신뢰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심지어 학문적 영역에서 제외시켜 버리기 도 한다.13)현대인들은 과학기술 방면에 중점을 두고, ‘정감’에 따른 감각적 쾌락을 중시함으로 인하여 인간만이 가질 수 있는 ‘죄악감’이 없어지고, 도 덕의식이 약화 되어 점차 타락하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도덕의식이란 자 기행위를 돌아볼 수 있는 반성적 작용이며, 자기행위를 도덕적 차원에서 옳 고 그름을 따져 묻는 것이다. 이러한 도덕의식은 바로 ‘죄악감’에 기초한 다.14)하지만 인간만이 죄악감을 가지고 있는데, 현대인들은 죄악감마저도 가지지 않고, 기술의 문제만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모든 도덕적 문제를 기 술의 문제로 바꾸어 버린다. 그로 인하여 도덕상의 옳고 그름(是非)을 묻지 않고, 기술상의 진위眞僞만을 문제 삼게 되는 것이다. 인간이라고 한다면 죄악감이 없을 수가 없다. 인간은 혼자서 살아갈 수 없기에, 죄악감은 타자 와 더불어 사는 삶을 고민하는 그 지점에서 발생한다. 만약 인간을 인간의 신분으로 볼 때, 인간이 죄악감이 없으면 곧 바로 타락하게 된다.15)진정한 인간다움이 무엇인가에 대한 물음은 생략되어 버리고, 더불어 사는 삶의 가 치보다는 생물학적 측면에서 생존을 위한 노력만 강조되게 된다. 그로 인하 여 과학기술 문명에 대한 반성적 사유로 접근하기 보다는 물질문명의 향유 에만 빠져드는 경향을 나타내기도 하는 것이다.

13) 서양의 분석철학과 실증주의가 바로 그러한 학문적 태도를 취한다.

14) ‘죄악감’은 기독교에서 말하는 ‘원죄의식’과는 다른 개념이다. 원죄는 선악판단의 주권 을 하나님으로부터 인간으로 가져온 것에 대한 종교적 책임을 묻는 것이라고 한다면,

‘죄악감’은 인간 자신의 도덕적 주체적 역량을 발현하여 스스로 자신의 행동의 정당성을 묻는 책임성의 원리라고 할 수 있다.

15) 모종삼, 뺷중국철학19강뺸(정인재역), 3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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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현대인들은 심리학, 인류학, 사회학 등의 방법으로 인간을 연구한 다. 이것은 과학적인 이해이고, 인간을 순수하게 세포로 구성된 물질적 대 상으로만 간주하게 된다.16)마치 원자나 전자를 다루듯이 인간을 물건으로 취급하는 것이고, 인간의 신분도 사라져 버린다. 만약 인간을 과학적 태도 로만 연구하게 되면 인간은 외적 대상이 되어버리고, 주체적인 의미는 사라 져 버린다. 인간의 주체적인 의미가 사라져 버리면 인간다움을 실현할 수 있는 길을 회복할 수가 없는 것이다. 인간을 인간으로 보고 물건(物)으로 보지 않는 것에서 주체의 회복을 논할 수 있다.17)주체의 회복에 관한 것은 과학을 연구할 때 표현되는 추론적인 지성에 의한 것이 아니고, 시비선악을 판단하고, 가치의 판단을 하는 인간의 의지에 의하여 드러나는 것이다.18)

16) 서양의 학문의 발전에서 다윈의 진화론 출현이 큰 전환점을 이룬다. 이전의 각 문화 전통에서는 인간의 가치적 관점에서 인간을 보고, 인간이 가진 이성적 능력을 중시하였 다. 하지만 다윈 이후에는 자연적 사실로서 인간을 보게 됨으로써 생물학적 측면의 인 간에 중점을 두게 된다. 그 이전 전통에서 중시되던 인간의 존엄성이란 가치적 측면을 경시하는 경향으로 흐르게 된다. (牟宗三, 「近代學術的流變」 뺷牟宗三先生晩期文集뺸 全集27, 115쪽 참조)

17)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인문정신은 반물화反物化의 과정이고,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 가는 것이 가치관념을 발휘하는 것이다. 이를 통하여 인간은 주체성과 존엄성을 확보하 게 되는 것이다.

18) 익명의 논문 심사자 한 분이 “논자는 인문학이 무엇인지를 ‘정신 vs 물질’이라는 구태 의연한 이분법에 입각하여 논의함으로써 스스로 인문학의 입지를 좁히고 있다. 이러한 논의는 인간의 정신 활동이 물질에서 비롯된다는 현대의 학문적 성과를 아예 도외시하 는 맹점을 안고 있다.”라고 지적하고 있다. 논자는 현대 서양학문의 흐름에 비추어 심사 자의 지적을 일면 긍정할 수 있지만, ‘인간의 정신 활동이 물질에서 비롯되었다는 현대 의 학문적 성과를 도외시 하였다’는 심사자의 견해를 받아들일 수는 없다. 왜냐하면, 논 자는 바로 그러한 현대의 학문적 활동이 인간의 입지를 더 좁게 만들고, 가치적 영역의 문제를 도외시 하게 됨으로써 인간의 존엄성에 관한 문제를 놓치고 있다는 점을 지적하 는 것에서 본 논의의 출발점으로 삼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정신 vs 물질’의 구분은 인간의 도덕적 문제를 논의하는 데 빠질 수 없는 문제이다. 인간의 정신을 경험적인 사실적 차원과 가치적 차원의 구분을 하지 않고, 단지 하나의 사실적, 물질적 차원에서 만 보려는 것에서 인간의 지위를 생물학적 진화 과정에서 가장 앞서 있는 존재로만 보 게 되고, 가치의 문제를 다루는 인문학을 인문과학이란 용어를 사용함으로써 인문학의 입지를 오히려 좁히는 결과를 가져왔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구분을 ‘구태의연한 이분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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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진정한 존엄성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과학 기술에만 신뢰는 보내 는 학문적 방향을 전환하여야 한다. 자연에 대한 탐구의 방식으로 인간의 가치문제를 접근해서는 안 된다. 인간의 의지에 의하여 표현되는 학문이 바 로 반성적 학문, 즉 ‘생명의 학문’인 것이다. 수학과 물리학등과 같은 학문은 경험 세계를 설명하기 위한 도구이다. 이것은 대부분 지식에 해당한다. 지 식과 구별되는 것이 지혜이다. 보다 나은 삶의 의미와 방향을 찾아가는 것 을 지혜라고 부른다. 이것은 객관경험 세계를 설명하려는 것이 아니라 진정 한 삶의 가치가 무엇인가에 대하여 질문함을 통하여 얻어지는 것이다.

현대의 학문을 돌아보면 대부분 다 과학을 표준으로 삼고 있다. 자연과학 의 성과를 실용적으로 이용하기 위하여 기술과 결합하게 된다. 이른바 과학 기술은 인간의 복지와 행복, 편리를 위하여 발전해 온 것이 사실이다. 하지 만 이것은 다른 면에서 보면 현대인들의 주된 관심인 세속적인 행복추구와 무한 욕망충족을 위하여 기여하는 일면이 있다. 과학 기술의 발달은 인간의 물질적 풍요와 생활의 편리를 가져 온 것이고, 또한 인간의 물질적 만족을 행복의 실현으로 연결시켜 생각하게 된다. 그러나 돌아보면 인간들이 물질 적 풍요와 만족이 진정한 인간들의 행복일까를 묻는다면 그렇지 않다고 대 답할 것이다. 어떤 경우이든 ‘인간이 인간다워지는 길’에 대한 물음을 제기 하지 않고, 인간의 무한한 욕망 충족에만 몰두하고 있다면, 그러한 과학적 지식은 도리어 인간들에게 불행을 가져올지 모른다. 그것은 곧 바로 인간들 의 자기상실의 문제와 연관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과학과 달리 인간이 인간다움의 길을 묻는 인문학은 무엇을 가 리키는 것인가? 실상 잘 상상이 가지 않는다. 왜냐하면 오늘날 대학의 학문 편제는 이른바 과학을 기반으로 하여 분류되어져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 늘날 말하는 학문의 개념을 염두에 두고 인문학을 생각하면 잘 받아들여지 지 않는다. 그러나 삶의 전체적 영역에서 보면, 우리의 인생 방향을 묻고

으로 취급하는 것이 현대학문의 맹점이라는 것을 지적하고자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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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는 인문학 공부의 중요성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이것은 ‘인간이 인간 다워지는 길’, 즉 참다운 삶의 가치와 방향성에 대한 물음과 깊은 연관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지혜의 추구는 그 자신의 내면으로 돌아가서 그 자 신에게 질문을 던지는 것이다. 반면, 지식의 추구는 객관세계에 대한 질문 이기 때문에 밖으로 질문을 던지는 것이다. 인문학을 공부를 하는 것은 바 로 그 물음의 방향을 자기내면으로 전환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래서 인문학 은 경험의 세계에서 오는 지식과 감각적 욕망을 반성하고 성찰함을 통하여 자신의 생명의 가치19)를 보다 더 높이고자 하는 생명학문이라 할 수 있다.

‘생명학문’이란 바로 삶의 방향성을 묻는 학문을 말하는 것이며, 바로 도 덕적 주체성을 확립하고자 하는 것이다. 과학적 태도로 인간을 연구하는 것 은 주체적인 의미가 없어지게 되지만, 도덕적으로 인간을 연구하는 것은 인 간의 주체적 의미를 상실하지 않는다. 도덕적 주체성, 즉 ‘생명’에 대하여 관심을 기울이게 되면, 자연히 자신의 덕성을 바르게 하는 것에 관심을 돌 리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자신의 덕성을 바르게 한다는 것이 말처럼 그리 쉬운 일은 아니다. 사실 어디로 튈지 모르는 자신의 ‘생명’을 잘 다루기란 무척 힘든다는 것은 누구나 아는 일이다. 흔히들 세계를 정복하기는 쉬워도 자기 자신을 정복하기란 쉽지 않다고 한다. 그래서 뺷논어뺸에서도 “극기복 례위인克己復禮爲仁”이라고 말한다. 인간다움의 경지인 ‘인仁’의 실현은 자기 자신을 이기는 것에서부터 시작한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자기를 정 복한다는 것은 바로 자기 자신의 생명을 돌보는 것이다. 덕성의 문제는 바 로 자기 자신의 의지에 의해 조정되는 것이다. 공자가 “내가 仁을 하고자 하니, 이러한 仁이 이른다”20)라고 말하는 것은 도덕실천에서 자발적으로 실천의 의지를 드러내는 순간 바로 도덕적 행위의 결과가 나타난다는 것을 말한다.

도덕적 실천의지를 드러낸다는 것에서 ‘인간다움’을 찾을 수 있다. ‘인간

19) 여기서 말하는 생명은 생물학적 의미의 생명이 아니라, 도덕적 차원의 생명을 가리킨다.

20) 뺷논어뺸 「술이」, “子曰:“仁遠乎哉? 我欲仁, 斯仁至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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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그것은 바로 ‘부끄러움’을 아는 것에 서 시작된다고 할 수 있으며, 그것은 인간의 ‘각성覺醒’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 ‘부끄러움’을 안다는 것은 나만의 생존과 자기중심적 이기심을 넘어서 남과 더불어 살아감을 고민하는 지점에서 나타난다. 부끄러움을 안다는 것 은 자신의 행위을 돌아보는 깨어있는 마음을 자각하는 것이다. 우리의 마음 속에 옳고 그름을 따져 물을 수 있는 ‘깨어있는 마음’이 없으면, 우리는 쉽 게 편법을 동원하여 자신만의 이익을 추구하고, 사회적 공익을 저버리는 행 위를 선택할 것이다. 우리가 보다 나은 사회를 만들어 가려고 한다면, 자신 의 양심의 소리를 항상 들을 수 있어야 하고, 남과 더불어 살려고 하는 깨어 있는 마음이 매 순간 작동하고 있어야 할 것이다.

3. 인문학의 실천성 확보 - 인간의 존엄성 실현의 길

그렇다면 인간들은 어떻게 매 순간 깨어 있는 마음을 작동시킬 수 있는 가? 그것은 우리의 진정한 내재적 도덕성에 호소할 수밖에 없다. 인문학이 구체적인 삶의 현장에서 실천성을 확보하려면, 인간의 마음에 있는 내재적 도덕성에 기반하지 않으면 안 된다. 하지만 우리의 일상에서 흔히들 도덕을 언급하게 되면, 인간을 구속하는 외적 규범을 상상하게 되고, 인간을 억압 하는 기제로 작동하는 것으로 받아들이거나, 혹은 고리타분한 것으로 치부 해 버리기도 한다. 그러나 진정한 도덕은 우리를 구속하는 것이 아니다. 도 덕은 인간다움을 실현하는 길이고, 그것은 자율성과 자발성에 근거할 때 진 정한 의미를 지닌다.21) 자율성이란 자신의 행동원칙을 보편적인 도덕기준

21) 칸트도 인간의 존엄성을 자발적이고 자율적으로 도덕적 실천을 행할 때만이 확보될 수 있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는 “우리는 이상에서 행위에 도덕적 가치를 부여할 수 있는 행위의 동인은 공포도 기호도 아니며 다만 법칙에 대한 존경일 뿐이라는 사실도 지적하 였다. 우리 자신의 의지가 그 준칙을 통해 가능한 보편적 법칙의 조건 아래에서 행위하 는 한, 이념 안에서 가능한 이 의지가 바로 본래적인 존경의 대상이다. 인간의 존엄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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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적합하게 세운다는 것이다. 자발성이란 자신이 자신의 행동원칙을 실천 에 옮기는 것을 말한다. 일상적으로 도덕적 행위에 관한 논의를 할 때 “마 음에서 우러나서 행동해야 오래 가고 진정성이 있다”, 그리고 “스스로 하고 싶어서 해야 오래 간다”라고 말한다. 여기서 ‘마음에서 우러난다’는 표현이 바로 칸트가 말하는 ‘자기입법自己立法’, 즉 자신의 행위의 원칙을 스스로 원칙을 스스로 세우고 실천에 옮기는 원동력인 것이다. “하고 싶어서 한다”

는 것은 바로 자발성을 의미한다. 인간이 인간으로서 마땅한 도리를 스스로 해야한다는 자각에 기초하여 자발적으로 다 실현할 때 도리어 인간들은 그 속에서 자유롭고 만족감을 느끼게 된다. 또한, 그러한 도덕적 실천을 통하 여 인간의 존엄성을 찾을 수가 있는 것이다.22)자신의 삶의 책임성을 자각 하고 그것을 다 실현하려고 노력하는 가운데 도덕의 진정한 의미가 부각된 다. 다시 말해 현실적 인간23)은 비록 시간과 공간의 한계 속에서 살아가는 유한 존재임에 틀림없지만, 자발적인 실천 수행의 과정을 통하여 스스로

‘인간이 인간이 되는 길’, 즉 존엄성을 확보함을 통하여, 인간은 위대해지고 무한해질 수 있다는 가능성을 열어놓고 있는 것이다. 인간이 무한하다고 하 여 인간의 육체가 시공時空의 한계를 넘어 무한해지는 것을 말하는 것은 물론 아니다. 인간은 물리적인 시간과 공간의 한계를 벗어날 수 없는 것이

비록 그가 바로 그 법칙에 동시에 복종하고 있기는 하지만 <그가> 보편적 입법자일 수 있다는 이 능력에 있는 것이다.”라고 말한다.(칸트, 뺷도덕형이상학원론뺸(최재희 역), 박영사, 1988, 95쪽 참조)

22) 인간이 존엄함이란 무엇이 객관적으로 존재한다는 것을 알리는 과학적 사실을 언급하는 사실 개념과 다르다. 인간의 존엄성을 도덕적 영역에서 인간의 실천을 통하여 획득되는 가치적인 개념으로 실천의 통하여 그것이 드러날 때 그 존재를 확인할 수 있다. 예를 들면 부모에 대한 ‘효’는 부모에 대한 따뜻한 도덕적 정감을 실천에 옮기는 그 순간 그 현장에 드러나고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인간이 마땅히 따라야 할 인지상정人之 常情과 삶의 책임의식을 바탕으로 한 도덕은 사람을 구속시키지 않는다. 그러한 도덕적 실천 속에서 자신의 존재 가치를 더 높이고, 인간의 존엄성을 실현해 나가게 되는 것이다.

23) 각 문화권 마다 인간에 대한 이해의 출발점이 다르다. 특히 기독교에서 인간의 지위는 언제나 하나님의 창조물로서의 피조물의 지위에 머물러 있게 된다. 그런 의미에서 여기 서 말하는 인간의 이해는 동양의 관점에 근거하고 말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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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하지만 육체를 가진 우리는 시간과 공간의 제약 속에서 놓여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만약 우리가 자신의 도덕적 본체를 체현해낼 수 있고, 실천적 으로 잘 드러낼 수 있다면, 우리의 생명은 무한의 의미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 자신은 비록 하나의 유한한 존재이지만, 우리가 가치적 측면 에서 무한의 의미를 가지게 되는 것이다.

인간이 인간다움의 실현의 출발점은 바로 자신의 존재가치를 자각하는 것이 일차적인 것이고, 그것을 통하여 삶의 책임의식을 가지는 것이 중요하 다. 책임의식은 바로 자신의 행위와 삶의 방향성을 항상 돌아보는 깨어 있 는 마음, 즉 도덕의식, 즉 ‘양심’에서 비롯된다. 그렇다면 이러한 도덕의식은 어떤 내용을 담고 있는 것인가? 도덕의식을 ‘깨어있는 마음’이라고 말한다 면, 이것은 다른 말로 우환의식憂患意識24)이라고 할 수 있다. 우환은 사전 적 의미로 근심하고 걱정하는 것을 가리킨다. 여기서 말하는 우환은 도덕적 의미로 사용되어지는 것으로, 초보적인 표현은 바로 “일을 앞에 두고서 그 것을 이룰 수 없지 않을까 두려워하는” 책임감과 진지한 태도이다.25)

우환의식은 우리의 삶 속에서 마주하는 순간순간의 사물과 사건에 대한 일종의 책임감의 표현이고, 깨어 있음을 나타내는 자각의 표현이다. 만사만 물에 대하여 각기 자신의 마땅한 바를 얻지 못함을 항상 걱정하고 있는 것 이다. 이러한 우환의식이 점차로 커져서 최후에는 자연과 인간에 대한 연민 과 근심이 자리 잡게 된다. 이러한 연민과 근심은 그 밑바탕에 도덕의식이 자리 잡고 있다. 다시 말해 그가 우려하고 근심하는 것은 바로 자신의 재화 나 권력이 충분하지 못함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인격적으로 자신의 덕德 이 아직 제대로 닦여지지 않음과 학문을 아직 성숙되지 못함이고, 이것은 자기 자신에게 제기하는 일종의 물음인 것이다. 이러한 삶에 대한 책임감은 살아가는 동안 한 순간도 멈출 수가 없고 죽는 날까지 계속되는 것으로 우

24) 우환의식憂患意識이란 개념은 서복관徐復觀의 뺷중국인성론사中國人性論史뺸 2장 「周 初宗敎中人文精神之躍動」에서 처음 제기된 개념이다.

25) 牟宗三, 뺷모종삼교수의 중국철학강의뺸(원제 뺷中國哲學的特質뺸, 김병채 외 옮김), 5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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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의 마음속에 언제나 내재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맹자는 “근심 걱정 속 에서 살고, 안락 속에서 죽는다.”26)라고 말하는 것이다. 살아가는 동안 삶에 대한 책임을 완수하기 위한 노력은 계속될 것이며, 그러한 삶에 대한 무거 운 책임감은 죽음을 맞이하여 비로소 내려놓고 편히 쉴 수가 있는 것이다.

그래서 서복관은 “우환의식은 인간이 직접 사물을 대할 때 정신적으로 발 생하는 책임감의 표현이고, 또한 정신적으로 인간의 자각이 시작되는 것을 표현하는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다.27)우리가 어떤 임무를 맡게 되면 그것 을 완성하기 위하여 끊임없이 고민하고, 실수하지 않기 위하여 여러 가지 사항들을 고려하게 된다. 우환의 초보적인 표현은 바로 자신이 맡은 일을 성사시키기 위하여 끊임없이 두려워하는 책임감과 진지한 태도이다.

이러한 우환의식에 바탕한 도덕의식이 작동할 때만이 인간은 자신의 삶 에 대하여 진지한 물음을 제기할수 있고, 새로운 각도에서 삶의 방향성을 모색하고, 삶의 태도를 바꾸어 나갈 수 있는 가치관의 전환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인문학이 가치전환을 전제로 한다면, 과학적 지식에 기반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이러한 도덕의식에 기반하여야 가능한 것이다. 그래서 인문학 이 진정으로 인간을 물화시키지 않고, 가치관념을 창출하기 위해서는 인간 의 내재적 도덕성에 기반해야 하는 것이다. 현대사회가 직면하고 있는 위험 사회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인간의 가치관의 전환이 요구된다고 앞 에서 언급한 바 있다. 이러한 가치관의 전환은 반드시 도덕의식에서 발로한 사명감과 책임의식에 호소할 수 밖에 없다. 인문학적 측면에서 사명감과 책 임의식을 자각하게 되면, 보편적 자아로서 존재가치를 적극적으로 인정하 는 자기긍정의 길로 나가는 동시에 나와 더불어 사는 인간과 자연에 대한 타자성을 인정하게 되고 더불어 사는 공감의 세계를 열어나갈 수 있게 되 는 것이다.

26) 뺷孟子 告子下뺸 “生於憂患, 死於安樂”

27) 徐復觀, 뺷中國人性論史뺸, 臺灣商務印書館, 1982, 2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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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공감능력 회복과 인문학

인문학이 인간다움을 실현하는 길을 묻는 것이라고 한다면, 인간다움이 란 바로 남과 더불어 사는 삶을 고민하는 지점에서 출발한다. 인간이 어떤 시대를 살아가든 사람답게 살아가려고 한다면, 자신의 양심의 소리를 항상 들을 수 있어야 하고, 남과 더불어 살려고 하는 깨어있는 마음이 매 순간 작동하고 있어야 한다.28) ‘깨어있는 마음’이 작동은 일차적으로는 자기 존 중의 길로 나아간다.29) 자신을 긍정하고 존중하지 않는다면 결코 타인을 배려하고 존중할 수가 없을 것이다. 자신을 존중하고 사랑한다고 하는 마음 은 자기중심적인 이기적인 마음과는 다른 것이다. 자아긍정을 통하여 외적 으로 타자를 인정하고 타인의 아픔을 함께할 수 있는 공감능력을 발휘하게 되는 것이다. 논자는 공자와 맹자가 말하는 ‘仁心’30)을 따뜻한 마음이라고 번역한다. 깨어있는 마음, 양심이 바로 도덕실천의 원동력인 우리의 주체인 동시에 따뜻한 마음인 것이다. 이것이 안으로는 자아를 긍정하고, 밖으로는 타자의 존재를 그 자체로 인정하고 받아들이고, 타인의 아픔과 고통을 함께 할 수 있는 공감능력이라고 할 수 있다.31)비유적 표현이지만, 차갑게 식어 있는 마음에서 남의 고통을 헤아리고, 배려하고 존중하는 행위가 나올 수 없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절실하게 아파해 본 사람이 남의 아픔을 진실 로 이해할 수 있듯이, 자기 자신을 스스로 존중할 수 있는 마음을 가진 사람 이 비로소 남을 존중하고 배려할 수 있는 마음을 내어놓는 것은 너무나 당 연하다고 할 것이다. 그러므로 인문학은 바로 자기 존중과 타자의 아픔을 함께 느끼고 아파할 수 있는 공감능력을 배양하려는 것이다. 이러한 공감능

28) “깨어 있는 마음‘을 유가철학의 표현을 빌면 ‘인심仁心’이고, 그것은 양심이라고 말할 수 있다.

29) 동양에서 강조하는 수양의 궁극적 길은 진정한 자아의 긍정에 있다.

30) 몰론 공자가 직접적으로 ‘인심’이란 용어를 사용하지 않았다. 다만 그가 말한 ‘仁’에는

‘인심仁心’의 내용을 담고 있다. 인심이란 용어를 직접 사용한 것은 맹자이다.

31) 박승현, 「공자의 인사상과 공감능력회복」, 뺷동서철학연구뺸 84권 참조,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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력이 바로 인간이 인간다움을 실현하는 길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현대사회에서는 이러한 마음이 작동하지 않고, 남들의 고통에 대 하여 무감無感하게 지나가는 것 같다. 함께 극복해야할 고통과 아픔의 상 황에서 자기 자신의 안위를 우선하는 극단적 이기주의가 팽배해 있다고 할 수 있다. 우리 사회를 돌아보면 일등만을 우선시하고, 승자만이 존중받고 대우받는 승자독식사회로 전락한 것 같다. 그래서 남보다 조금 더 나은 지 위와 금전적 혜택을 선점하고 누리기 위하여 이웃과 무한 경쟁을 벌이고 있는 것이다. 이런 사회는 가진 자와 못 가진 자 사이의 격심한 경제적 문화 적 차이를 낳게 되고, 적대적 감정이 상승하고, 상대적 빈곤감이 팽배하게 되는 된다. 그러한 사회는 끊임없이 패자를 양산하게 되고, 삶의 질과 가치 가 점차 떨어지게 된다. 다시 말해, 승자독식사회에서는 더불어 사는 사는 삶의 가치란 존재하지 않고, 오직 경쟁에서 이기는 기술인 ‘약육강식’. ‘적자 생존’의 논리만이 판치게 된다. 이러한 환경에서는 실용적 가치만이 우선시 되고, 인간을 목적 실현을 위한 수단으로만 간조하고, 인간의 존엄성은 도 외시 되기 십상이다. 이러한 삶의 모습은 짐승이 살아가는 동물의 세계의 생존법칙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짐승의 삶의 최고의 목적은 생존이지만, 인간은 생존을 넘어 공존을 생각할 때 인간이 인간다움을 실현할 길이 열 리는 것이다. 우리가 보다 나은 삶을 이야기 하려면, 이러한 생존의 논리가 최우선시 되는 흐름에 제동을 걸어야 한다. 이러한 흐름에 제동을 걸수 있 는 것은 인간의 삶의 태도의 변화와 가치관의 전환에 기대할 수 밖에 없다.

인간의 삶의 환경변화는 오직 인간만이 바꿀 수 있기 때문이다.

재난이란 극한 상황에 대하여 인문학적 접근이란 것도 바로 공감능력의 발휘를 말하는 것이다. 공감능력을 발휘한다는 것은 바로 연대의식을 형성 하는 것이다. 현실적으로 타자가 겪고 있는 고통과 아픔을 대신할 수는 없 지만, 고통을 받고 있는 사람이 자신의 주위에 아픔을 더불어 공감하고, 항 상 그의 편에 함께하고 있는 사람이 있다는 연대의식을 확인할 때, 보다 빠 르게 재난의 아픔을 치유하고 새로운 삶의 희망을 논할 수 있을 것이다. 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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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만 최근 우리가 겪은 참담한 재난의 기억들을 떠 올려보면, 우리 사회가 얼마나 그러한 재난을 격는 사람들을 외면하고, 공감능력을 발휘하지 못했 는지를 쉽게 목격하게 된다. 나만 아니면 된다는 이기적인 마음이 극단적으 로 발휘되고, 당한 자만이 재수 없고, 억울하게 만드는 사회적 구조인 듯하 다. 재난이 일어나고, 일정한 시간이 흘러 사태가 조금 정리되고 나면, 대부 분의 사람의 기억에서 사라져 버리게 된다. 그렇게 되면 정작 억울하게 당 한 자들만 그 재난이 낳은 고통의 휴유증에 한 없이 시달리게 되는 것이다.

그 대표적인 예를 들어보면, 2003년의 대구지하철 참사를 들 수 있을 것 이다.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도 많은 사람이 그 사건의 후유증(트라우마)으 로 고통을 받고 있지만, 정부나 사회적으로 관심을 적극적으로 기울이지 않 고 있는 것 같다. 그리고 논자의 기억에 지워지지 않는 사건은 20여 년 전 화성의 c랜드라는 곳에서 일어난 화재 사건이다. 화성으로 유치원생들이 캠프를 떠났다가 숙소의 촛불이 넘어져 큰 화재로 20여 명의 유치원생이 부모의 품으로 돌아오지 못한 사건이다. 사건 수습과정에서 희생자의 부모 중의 한 명이 국가와 사회의 무관심에 충격을 받고, 국제대회에서 딴 금메 달과 훈장을 국가에 반납하고, 한국 사회를 등지고 외국으로 이민을 떠났던 일을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그것은 당시 사건을 당한 아이들이 나의 아이와 비슷한 나이이었기에 아이를 잃은 그 부모의 마음을 너무나도 잘 이해할 수 있었다. 그래서 아직도 나의 기억에서 잘 지워지지 않는 사건 중에 하나이다. 그것도 역시 당한 자만이 억울하게 만든 경우라고 할 수 있 을 것이다.

그리고 지금까지도 제대로 해결을 하지 못하고 진상 조사를 벌이고 있는 세월호 사건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사건이 일어났을 때 자식과 가족을 잃은 유족들이 단식이란 극단적 방법까지 동원해 사고의 원인을 제대로 밝혀달 라고 정부에 항의하고 시위를 벌이고 있는 그 현장 맞은편에서 일부 세력 들이 피자와 음식을 시켜놓고 조롱하듯 음식을 먹는 그 장면에서 인간적 비애감과 참담함을 느꼈던 기억을 지울 수 없다. 그러한 남의 고통을 저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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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는 행위를 하는 것도 다 오직 자신과 자신 집단의 이익만을 중시하는 이 기적인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할 것이다.

근대 이후 우리가 겪은 망국과 전쟁, 이념의 조작으로 비롯된 분단의 아 픔으로 빚어진 왜곡된 삶의 행태, 즉 자신만 잘살겠다고 발버둥 치는 이런 바 승자 독식의 놀음을 멈추고, 새로운 삶의 방향을 모색해야 할 때가 된 것이다. 인문학은 바로 더 나은 이상적 방향으로 자기 삶의 가치관을 전환 하고, 실천적으로 더 이상적 삶을 살기를 요구하는 학문이다. 재난에 대하 여 인문학적으로 이해하고 해석하고, 그 대응의 방향을 모색하는 것은 바로 더불어 사는 삶을 실현하기 위한 공감 능력을 높이고자 하는 것이다.

5. 맺는 말

‘재난인문학’이란 용어는 아직 그 의미를 제대로 정립되어 있지 않고, 재 난을 인문학적으로 이해하고 해석함을 통하여 보다 이상적 방향으로 대응 책을 모색하려는 새로운 시도라고 할 수 있다. 본 논문은 과학적 방법론으 로 접근하는 것이 더 적절해 보이는 재난에 대하여 인문학이 어느 지점에 서 개입이 가능한가에 대한 시론적 물음에 답하는 차원에서 시작된 것이다.

현대사회는 위험사회라고 정의된다. 그러한 위험사회 속에서는 인류를 포함한 전 지구의 생태계가 파멸의 위기에 직면할지 모른다는 불안감과 위 기감이 늘 우리를 압박하게 된다. 이러한 ‘위험’이 현실화되어 ‘재난’이 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는 인간의 기존의 삶의 패러다임과 세계관을 변화시 킬 방법을 마련하여야 한다. 만약 세계관의 대전환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인류의 장래는 어둡다고 할 수 있다. 사실 인류의 운명을 결정할 수 있는 것은 인류밖에 없다는 것이 사실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이러한 ‘위험’을 내 재한 재난의 상황에 윤리와 철학, 그리고 인문학이 개입할 가능성이 열려 있는 것이다. 지금의 이른바 ‘위험사회’의 ‘불안’을 제거하기 위해서는 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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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기존의 삶의 방식과 가치관의 전환을 요구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러한 가치관의 전환은 인간의 의지에 호소할 수밖에 없다. 인간의 의지 발현은 인간의 이상 실현을 위한 것이고, 그 이상은 바로 ‘내재적 도덕성’에 기반해야만 한다. ‘내재적 도덕성’에 기반한다는 것은 인간이 자신의 존재 를 긍정함과 동시에 타자성을 인정하는 공존의식을 발현하는 것이다. 인간 이 인간다움을 실현한다는 것은 자신만의 생존을 추구하는 이기적 욕망을 극복하고, 타자와 더불어 삶을 실현하는 것이다. 바로 이 부분에서 인문학 의 역할이 드러나는 것이다. 재난에 대하여 인문학적으로 이해하고 해석하 고, 그 대응의 방향을 모색하는 것은 바로 더불어 사는 삶을 실현하기 위한 공감 능력을 높이고자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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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stract

An Analysis on the Meaning and Role of Humanities in Establishment Disaster Humanities

32)Park, Seung-hyun*

The term “Disaster Humanities” is still new in our academic area. It is an attempt to understand, interpret and find ways of responding to disasters that conflict with the wishes and the intentions of human beings in pursuit of happiness.

In order for the concept of Disaster Humanities to have practical meaning, it is imperative to answer the question at which point the humanities could involve into the disasters which mean painful and tragic parts of our realities. Furthermore, it seems that which implications the humanities here have and what its role need to be discussed consistently.

In such society, the anxiety and sense of crisis that the entire ecosystem including human beings may face destruction always suppress us. To prevent this risk from being reality and turning into disaster, we must find the ways to revise existing paradigms and perspectives of the world.

If nothing has changed in the view of our world, the future of mankind would be dark. At this point where disastrous situations have potential dangers, there is possibility of involvement of ethical philosophy and the humanities. In fact, there is nothing but humanity who determine the fate of mankind.

In order to eliminate the current “risk society”, we cannot help but call for a shift in our established way of life and the values. Such changes of the values depend on the will of human. The manifestation of human will

* Chosun Universi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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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e for realization of human ideals, which must be based on ‘internal morality’. Standing ‘internal morality’ on the basis means a sense of coexistence in which humans not only affirm their own existences but acknowledge otherness. To overcome selfish desire to only pursue one’s own survival and then realize life together suggests that human beings achieve humanity. This is where the role of the humanities is revealed.

Key Words : Disaster, disaster humanities, humanities, science, human dignity, Hazardous Society, Inner Morality

<필자소개>

이름: 박승현

소속: 조선대학교 재난인문학연구사업단 전자우편: psh310@hanmail.net 논문투고일: 2020년 2월 5일 심사완료일: 2020년 2월 21일 게재확정일: 2019년 2월 21일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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