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연은 역사 관련 누정시 2제 4수와 가문 관련 누정시 3제 4수를 통해 역사인식과 비애감을 드러냈다. 누정은 아름다운 경관에 위치하 고 있어 예부터 문인들의 문학 공간의 하나였다. 문인들은 아름다운 경관을 바라보며 시를 통해 자신의 소회를 밝혔다. 삼연 또한 그러한 문인 중 하나였다. 하지만 본고에서 살핀 5제 8수의 누정시는 완상이 아니라 역사인식과 비애감이 주를 이루고 있었다. 탄금대, 촉석루 등은 역사적 공간으로 뼈아픈 패배를 경험한 곳이었다. 비극의 현장이라는 측면에서 본다면 삼연이 이들 누정을 눈으로 보고 당시 상황을 회고하 는 자체가 아픔으로 다가왔을 것이다. 비애감은 이러한 상황에서 표출 된 것이라고 생각된다.
탄금대, 촉석루라는 공간은 각각 임진왜란51)과 관련된 전투가 벌어
51) 임진왜란은 조선왕조 500년간 있었던 최대의 국난 중 하나였다. 이시기 많은
진 곳이다. 이들 장소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희생되었다. 이들이 희생된 배경에는 당시 정국의 안일함이 작용하였다.52) 삼연은 역사적 현장에 서 비극적 그날을 회고하며 당시 정국의 안일한 태도에 대해 비판했 다. 또한 삼연의 당대에 대해서도 날카로운 비판을 가했다고 생각된다.
사화로 사람들이 희생되고 정국이 어지러운 당시 상황과 비극적 그날 의 상황은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탄금대에서 읊은 시는 6연의‘邦國將非人 猛卒棄與敵’과 8연의 ‘韓信 竟誤人 哥舒同敗績’을 통해 당시 정국을 비판했다. 적임자가 아닌 사람 을 장수로 삼았으니 용맹한 병졸들은 희생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53) 한신이 사람을 그르쳤듯이 당시의 조정도 신립을 장수로 삼아 뼈아픈 패배를 경험할 수밖에 없었다. 삼연은 탄금대라는 공간을 마주하고 비 극적 상황을 떠올리며 피를 토하는 아픔을 경험했을 것이다. 실재로 삼연은 불의를 보고 참지 못하는 성격을 가졌다고 생각된다. 아래의 일례가 바로 그러한 상황을 잘 보여준다고 하겠다.
나의 선인(先人)께서는 홀로 충직(忠直)한 길을 지키면서 그 가운데 서서 눈앞에 이해(利害)가 가득하다 하여 몸에 배이도 록 익혀온 선대의 유훈을 조금도 바꾼 적이 없었으니, 어찌 갑 자기 닥친 화를 면할 수 있었겠습니까? 아! 선인이 당한 화는 그 유래한 바가 멀고 얽어 만든 자가 많습니다. …(중략)…오늘
조선 백성들이 죽음을 당했으며, 농토는 황폐화되기에 이르렀다.(신명호, 「임진 왜란 중 선조 지계가족의 피난과 항전」, 군사 81,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2011, 115쪽.)
52) 조선 정부의 쇠미衰微 현상은 몇몇 충신의 노력으로 되돌려질 수준이 아니었 다. 선비들은 파벌을 만들어 경쟁했고, 그 결과 수많은 선비의 목숨을 앗아가는 사회가 조정을 뒤덮고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조선의 국방체제는 점점 붕 괴되어 외침을 방어할 능력을 상실한 상태였다.(류성룡 ․ 김흥식 옮김, 징비록
, 서해문집, 2014, 14~15쪽.
53) 임진왜란 초기 최대의 전투이자 조선군에게 막대한 손실을 안긴 것이 바로 탄 금대 전투이다. 신립이 조령의 험준함을 포기하고, 탄금대에 배수의 진을 친 것 에 대해서는 절대 다수가 부정적 인식을 가지고 있다.(이상훈, 「신립의 작전지 역 선정과 탄금대 전투」, 군사 87,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2013, 275~276 쪽)
날 과연 모두 씻고 털어서 끌어들이면 죄가 없다고 말할 뿐 아 니라, 다시 그들의 공로를 무언 중에 상찬(賞贊)할 것이니, 합 하의 심술(心術)이 여기서 그 전모가 다 드러났습니다. 합하는 지금 또 선대의 교훈을 계승하여 밝히고 사문(師門)을 세우는 것으로써 【최석정은 곧 남구만(南九萬)의 문생(門生)이다.】
능사로 삼고 있는데, 어느 겨를에 사화(士禍)를 근심하고 아파 하며 나라의 명맥(命脈)을 아끼겠습니까? 인후(仁厚)로써 군자 를 대접하고 법제로써 간흉한 무리를 징계해야 하는데도 지금 은 모든 것이 그 반대가 되었으니, 이택당(李澤堂)의 이른바 거 꾸로 행하고 거슬러 베푼다는 말이 어찌 이러한 일들을 가리키 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비록 그렇다 하더라도 합하의 행위는 오히려 매우 명쾌하지 못한 바가 있으니, 그 마음을 관찰하면 마음속에 깊숙이 감추어진 것이 모두 드러나지 아니한 것이 없 고, 그 행위를 추적하면 반간(半間)도 한계를 짓지 않은 것이 있음을 면하지 못할 것입니다.54)
삼연은 분노와 격정을 마다하지 않으면서 장문의 서신을 보낸55) 인 물이다. 그런 그가 탄금대라는 비극적 공간에 섰다면 분노와 격정을 느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6, 8연을 통해 다소 누그러진 비판을 가 하기는 했으나 명확한 비난을 하고 있다. 7, 9, 10, 11, 12, 13연을 통 해서도 비참하게 죽어가야만 했던 인물들에 대한 안타까운 마음을 드 러냈다. 이는 역사적 그날에 대한 깊이 있는 통찰에서 가능한 것이라 고 하겠다. 당시 조정의 무능함56)이 결국 사람들을 죽음으로 내몰았
54)‘동지경연 이여가 오시복 등을 서용한 일의 부당함을 아뢰다’(先人則以孤忠直 道, 立於其間, 曾不以利害之滿前, 而少變宿講之先訓, 則焉得免夫卒罹大禍? 嗚 呼! 先人之禍, 所由來者遠, 所構成者衆? …(中略)…果然今日, 一竝洗拂牽復, 不 惟曰無可罪, 且將默賞其功也, 閤下之心術, 於是乎全體呈露矣。 閤下方且以紹明 先訓, 建立師門, 【錫鼎卽南九萬門生也。】 爲能事, 奚暇夫愍痛士禍, 愛惜國脈 乎? 仁厚以待君子, 法制以懲奸凶, 今乃一切反之矣, 李澤堂所謂倒行而逆施者, 豈 指此等事耶? 雖然, 閤下所爲, 猶有未暢快者。 觀其心, 非不畢露底蘊, 而迹其施 爲, 未免有半間不界者。(朝鮮王朝實錄 <肅宗 二十三年 四月十八日 >.)) 55) 김동준, 「정치권력과의 상관관계로 본 金昌協 · 金昌翕의 문학비평과 그 성격
」,
한국한문학연구 76, 한국한문학회, 2017, 151쪽.
다. 삼연은 비극적인 역사의 현장에서 시를 지어 읊음으로써 역사인식 을 드러내고 있다고 하겠다.
촉석루를 읊은 세 시는 비애감을 각각의 방법으로 표출하고 있다.
첫 번째 시에서는 진주 촉석루의 자연경관과 분위기를 통해 2차 진주 성 전투의 비극적 사실을 노래하고 있다. 두 번째 시에서는 2차 진주 성 전투의 역사적 현장에서 과거 놓여 졌던 수많은 사다리를 떠올리며 희생된 인물들을 회고한다. 세 번째 시에서는 시인 당대의 촉석루를 바라보고 그 곳에서 풍류만을 즐기는 사람들을 비판한다. 즉, 첫 번째 시를 통해서는 현존하는 촉석루와 과거의 촉석루를 동시에 드러내 비 애감을 고조시키고, 두 번째 시를 통해서는 역사적 그날에 집중해 비 애감을 드러낸다. 세 번째 시를 통해서는 시인 당대의 촉석루에서 역 사적 사실들이 사람들에 의해 희미해져가는 현실을 노래하며 비애감 고조시킨다고 하겠다.
삼연은 비애감뿐만 아니라 역사인식 또한 드러냈다. 첫 번째 시에서 는 사람들이 기꺼이 목숨을 버렸으나 하늘이 망하게 해 애석하다고 하 고 있다. 이는 2차 진주성 전투를 운명적으로 바라본 관점이라고 할 수 있으나 또 한 편으로는 당시 조정에 대한 비판적 시각을 내보인 부 분이라고 하겠다. 목숨을 버리면서까지 진주성을 지키고자 했으나 모 두 죽임을 당하고 진주성마저 함락되어 버린 상황 그것은 당시 조정의 무능함이 자초한 결과라고 하겠다.
두 번째 시를 통해서는 하늘 어디선가 날아온 탄환이 너무도 무정해 라라고 했다. 이 또한 첫 번째 시에서 드러낸 역사인식과 맥을 같이 한다고 할 수 있다. 탄환이 무정하다라는 것은 희생되지 않을 사람들 이 희생되어야만 하는 상황을 조정이 만들었다는 의미라고 하겠다.세
56) 임진왜란이 일어났던 16세기 후반 무렵은 1589년 기축옥사 이후 왕권과 신 권의 미묘한 긴장 속에서 당파 사이의 정쟁이 이어지면서 조정은 당시 일본을 비롯한 동아시아 주변에서 나타나고 있엇던 정세 변화에 대해 능동적으로 파악 하지 못했다. (정구복, 「임진왜란의 역사적 의미-壬辰倭亂에 對한 韓·日 兩國 의 歷史認識」, 한일역사 공동연구보고서 2, 한일역사공동연구위원회, 2005, 199쪽)
번째 시를 통해서는 비석에 눈물 흩뿌리며 저물어가는 성곽에 기대었 네라고 했다. 이 또한 역사적 비극을 마주한 삼연의 심사가 직접적으 로 드러나고 있다. 이 부분은 삼연이 자신의 심사를 직접적으로 드러 내면서 조정을 비판하고 있는 부분이라고 하겠다.
역사적 현장과 관련된 누정에서 삼연은 비애감과 역사인식을 드러냈 다. 비극의 현장인 만큼 삼연은 그 장소를 마주하고는 솟구치는 슬픔 을 이기지 못했을 것이다. 많은 희생자를 낸 장소는 역사적 그날이나 삼연이 마주한 지금이나 변화가 없다. 하지만 그 장소에서 벌어진 비 극을 사람들이 잊고 있다는 사실에 그는 분노한다. 사람들의 희생을 만든 당시 조정이나 삼연이 마주한 그곳에서 유유자적 시간을 보내는 사람들을 보며 그는 비판적인 어조를 시에 담아낸다. 결국 비애감과 역사인식은 삼연의 가치관의 소산57)이라고 할 수 있다. 삼연은 당대 세태를 비판적 시각으로 바라본 인물이다. 때문에 역사적 현장에서도 비판적 시각으로 당시 상황에 대한 평가를 내릴 수 있었다.
가문과 관련된 누정에서도 삼연은 비애감과 역사인식을 드러냈다.
가문과 관련된 누정이기에 죽은 선조에 대한 그리움으로 비애감이 고
가문과 관련된 누정이기에 죽은 선조에 대한 그리움으로 비애감이 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