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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Study on the Expansion and bracket type of Samcheok Jukseor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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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SN 1598-1142 (Print) / ISSN 2383-9066 (Online) https://doi.org/10.7738/JAH.2021.30.4.031

1. 서 론

죽서루(竹西樓) 강원도 삼척시 죽서로길 44에 위치 하는 삼척 관아 소속의 누 건축이다. 1963년에 보물 제213호로 지정되었으며 죽서루를 감싸고 있는 오십천 과 함께 2007년 명승 제28호로도 지정되었다. 죽서루 가 주목되는 것은 그 건축형식의 특이성 때문이다. 기 암괴석 위에 기둥을 자유롭게 세워 누각을 지은 것은 특이하기는 하지만 강릉 경포대 등 죽서루 이외에도 다수의 사례가 있기 때문에 죽서루만의 특징은 아니라 고 할 수 있다. 죽서루만의 특징이라면 정면 7칸 중에 중앙 5칸은 1출목 주심포 형식인데 양쪽 끝 퇴칸은 익 공형식이라는 점이다. 또 기둥의 배열도 중앙 5칸의 기둥보다 양쪽 퇴칸의 기둥이 외출목 폭만큼 밖으로 빠져나와 있어서 기둥 열이 서로 일치하지 않는다. 그 리고 중앙 5칸 측면에는 도리와 장혀 등의 출목이 층 급을 이루며 빠져나와 있다.

이러한 점으로 미루어 건축 역사학계에서는 처음에

5칸 맞배로 지었던 것을 나중에 양쪽으로 퇴칸을 각각 한 칸씩 달아내 7칸으로 하고 지붕도 팔작지붕으로 바 뀌었다는 것이 일반론이다.

1)

그러나 근래에는 처음부터 7칸 팔작지붕으로 건축되었다는 새로운 주장이 제기되었 다.

2)

또 이러한 두 주장의 불명확성으로 인해 ‘죽서루는 어느 것 하나로도 확정되지 않는 건축의 기표이자 무한 히 연장하는 용도의 차연’이라는 내용의 논문이 발표되기 도 하였다.

3)

인문학 쪽에서는 건물의 쓰임이나 시문학,

* Corresponding Author : [email protected]

1) 정인국, 『한국건축양식론』, 일지사, 1999, 273쪽/ 박언곤, 『한 국의 누』, 대원사, 1993, 63쪽/ 김봉렬, 『한국의 건축』, 공간사, 1988, 74쪽/ 김도경과 그를 사랑한 사람들, 『삶과 꿈 누정에 담 다』, 달아실, 2018, 14쪽/ 김민주, 「조선시대 관아 누각의 건축 특 성에 관한 연구」, 전남대학교 대학원 석사논문, 2011, 41쪽/ 삼척시,

『삼척 죽서루 정밀실측조사보고서』, 1999, 78쪽 등

2) 이희봉 외1인, 「고회화의 생활 복원과 공간, 형태 심층 관찰을 통한 죽서루 해석」, 건축역사연구 19권6호, 2010/ 이희봉, 「기존 정설 죽서루 증축설에 대한 반증」, 한국건축역사학회 추계논문집, 2011.11/ 이희봉, 『죽서루 : 한국건축의 모든 것』, 한국학술정보, 2013 등

3) 강윤식, 삼척 죽서루, 「명확한 불확정의 건축교본」, 교육시설

삼척 죽서루의 증축과정과 공포형식 고찰

A Study on the Expansion and bracket type of Samcheok Jukseoru

김 왕 직*

Kim, Wang-Jik

(명지대학교 건축대학 교수)

Abstract

Jukseoru is a pavilion building located in 44 Jukseoru-gil, Samcheok-si, Gangwon-do. Jukseoru is characterized by the fact that the center 5 bays out of the front 7 bays are in the form of Jusimpo, while the ends of each side are in the form of an Ikgong. In addition, the columns are not aligned with each other because the columns of both compartments are out of the center rather than the columns of the center of the five compartments of the columns do not match each other. Based on this, architectural historical circles initially built five bays in pairs, but later added one space to each side to make it seven bays. Recently, however, a new claim has been made that it was built with seven bays from the beginning.

Therefore, this paper proved that Jukseoru were expanded through historical data. We also looked at the characteristics of the Jukseoru period and the process of transformation through comparison of the bracket type.

주제어 : 죽서루, 누정, 공포, 증축

Keywords : Jukseoru, Pavilion, Bracket type, Building Extension

(2)

누정건축 전반을 다루면서 죽서루를 포함한 연구는 많이 있는데 이러한 연구사는 천득염 교수의 논문에 잘 정리 되어 있다.

4)

그러나 아직 증축의 시기를 분명히 한 논문 은 발표되지 않았다.

따라서 본 논문은 사료(史料)를 통해 죽서루의 중건과 정을 살펴 증축되었음을 명확히 하고 주심포 부분의 공 포형식 비교를 통해 죽서루의 시대적 특징과 위치를 살 펴보고자 한다.

2. 죽서루의 건립과 증축과정

2-1. 입지

죽서루는 조선시대 발행된 대부분 지도에서 읍성 서 쪽의 성곽 안쪽에 그려져 있다. 1530년에 간행된 『신 증동국여지승람』에서 죽서루는 ‘객관(客館)의 서쪽에 있으며 절벽이 천 길이나 되고 기이한 바위가 총총히 섰는데 그 위에 날아갈 듯 누를 지어 죽서루라고 하였 다. 아래로 오십천에 임해있고 냇물이 휘돌아서 못을 이룬다. 물이 맑아서 햇빛이 밑바닥까지 통하여 헤엄 치는 물고기도 낱낱이 셀 수 있어서 영동 절경을 이룬 다’고 하였다.

삼척부의 진산은 갈야산(葛夜山, 해발 178m)으로 죽 서루의 서북쪽에 위치하고 있다. 『삼척군읍지』와

『신증동국여지승람』 등에는 갈야산을 가야산(伽倻 山)이라고도 하며 부에서 1리쯤 떨어져 있다고 하였 다. 최근 발굴조사를 통해 삼척부의 공간구성이 잘 드 러났다. 죽서루길 동남 끝 주차장 부지에서 남문지가 발굴되었으며 여기서 북쪽 갈야산으로 이어지는 남북 도로가 주도로가 되고 이 도로와 죽장사지가 만나는 지점이 동문루였던 진동루(鎭東樓)가 있었던 지점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죽서루길을 중심으로 서쪽에 죽서루 가 있고 동쪽에 동헌이 위치하였다. 동헌 북쪽의 오십 천로는 근대기에 개통된 것으로 원래는 없던 도로이며 이 도로의 개통으로 지형의 변경이 많았다.

삼척읍성은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에서는 고려 정종 2년(947)에 성을 쌓았다고 하였으며 『세종실록 지리지』(1454년)에서는 토성으로 둘레가 540보라고

26권2호, 2019.01, 20쪽

4) 죽서루와 직접 관련된 논문으로는 인문학 쪽에서 <박연호, 죽서 루의 공간 특성과 그 의미, 강원문화연구 제28집, 2009>와 <최경환, 누정집경시의 창작 동기와 누정의 공간적 특성, 동양한문학연구 제 22집, 2006> 등이 있다. 누정건축에 관한 포괄적인 연구는 매우 많 으며 이는 <천득염, 누정에 관한 기존의 연구, 한국건축역사학회 창 립10주년기념 학술발표대회, 2001>에 잘 정리되어 있다.

하였다. 그리고 『신증동국여지승람』(1530년)에서는 읍성의 삼면이 석성이고 둘레가 2,054자이며 높이가 4 자라고 하였다. 그리고 서편은 431자로 절벽을 이용하 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따라서 16세기에 석성으로 다 시 쌓고 규모도 커졌음을 알 수 있다.

5)

그림 1. 광여도(18세기) 그림 2. 해동지도(18세기)

그림 3. 지승(조선후기) 그림 4. 여지도(미상)

죽서루

연근당 (죽서루별관)

내아 (서별당) 동헌

남문 진주관

(객사)

동문 (진동루)

그림 5. 삼척읍성의 공간구성과 죽서루(강원고고문화연구원, 삼척 죽서루 주변 유적 정밀발굴조사 4차 약식보고서)

이처럼 서쪽은 성벽은 없지만 자연 절벽을 성벽으로

5) 강원고고문화연구원, 삼척 죽서루 주변 유적 정밀발굴조사(4차)

약식보고서, 2016, 13쪽

(3)

인식하여 대부분의 지도에서는 모두 성벽을 그렸음을 알 수 있다.

18세기에 편찬된 광여도(廣輿圖)에는 남문과 동문만 표시되어 있으며 중앙에 객사가 있고 그 서쪽으로 죽 서루와 아사가 그려져 있다. 편찬연대가 미상인 여지 도(輿地圖)에서는 남문과 동문이 있고 중앙에 객사가 있으며 남쪽으로 아사, 북쪽으로 창고가 있다. 지승(地 乘)에서는 남문과 동문이 있고 중앙에 객사 동문 아래 죽서루와 아사가 있고 객사 북쪽으로 군창이 있다. 광 여도와 일치한다. 해동지도에서는 남문과 동문이 있고 동문 아래에 죽서루와 아사가 있고 중앙에 객사 그 위 쪽에 군창이 그려져 있다. 1872년 지방지도에서는 남 문만 그려져 있다. 그리고 중앙에 읍기(邑基)라고 하여 중층누각이 그려져 있는데 관아를 표현한 것으로 추정 된다. 그리고 오십천 절벽에 면해서 죽서루가 그려져 있다.

6)

그림 6. 현재 죽서루의 2층 평면도(삼척 죽서루 정밀실측조사보고서, 1999)

그림 7. 현재 죽서루의 서측 정면(삼척 죽서루 정밀실측조사보고서, 1999)

최근 발굴에 따르면 기록과 차이 없이 각 건물군의 위치가 나타났다.

7)

남문지를 들어서면 동쪽으로 동헌 (칠분당)이 있다. 발굴에서 중심건물은 동헌은 발굴되 지 않았다. 동헌 맞은편(서쪽)으로는 내아와 서별당 영 역이다. 내아는 1730년 동헌을 옛터로 옮기면서 건립 되었다. 내아 남쪽으로는 성석이 발굴되었고 조선시대 6) 규장각한국학연구원(https://kyu.snu.ac.kr/) 원문검색서비스 7) 강원고고문화연구원, 삼척 죽서루 주변 유적 정밀발굴조사(4차) 약식보고서, 2016, 17쪽

건물지 아래에서 고려시대 건물지도 나타났다.

죽서루 남쪽으로는 죽서루의 별관으로 사용되었던 연근당(燕謹堂)이라는 건물이 있었으나 발굴에서는 나 타나지 않았다. 연근당은 부사의 접객용 건물로 온돌 을 갖추고 있었다.

죽서루 북쪽은 객사 영역이다. 객사는 진주관(眞珠 館)이라고 하였으며 발굴을 통해 중심건물인 진주관과 남문, 행각, 서헌인 응벽헌(凝碧軒)이 조사되었다. 1934 년에는 진주관을 헐고 그 자리에 군청을 새로 지었다.

이처럼 죽서루는 삼척 객사에 딸린 부속 누각으로 지어졌으며 관아의 접객 건물로 사용되었다. 죽서루는 객사와 연근당, 동헌, 내아, 서별당, 칠장방, 향서당 등 많은 건물들과 함께 수없이 변화를 겪으면서 변천하여 오다가 현재는 다른 건물들은 모두 사라지고 죽서루 하나만 남게 되었다.

2-2. 창건과 중창

죽서루의 초창을 정확히 알 수 있는 자료는 아직 발 견되지 않았다. 다만 고려말 문인들의 시문집과 지리 지를 통해 개략적인 시기를 추정할 따름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의 죽서루를 설명한 부분은 많 은 문인들의 시문을 인용하였는데 가장 앞선 인물이 김극기(金克己, 1150-1209 추정)이다. 다음으로는 정추 (鄭樞, 1333-1382)와 안작(安雀, 1344-1421)으로 고려 말에서 조선 초에 걸친 인물들이다.

8)

지리지에 나타난 인물 외에도 안축(安軸, 1282-1348)의 근재집(謹齋集 )

9)

, 이곡(李穀, 1298-1351)의 가정집

10)

, 이달충(李達衷, 1309-1384)의 제정집(霽亭集)

11)

에도 나타나 있어 고려 후기에 창건되었음을 충분히 증명하고 있다. 고려 후 기에 창건된 죽서루는 이후 폐허가 되었다가 세종 3년 (1403)에 새로 지었다.

8) 신증동국여지승람, 卷四十四, 江原道, 三陟都護府, 樓亭, 竹西 樓。...(상략)○鄭樞詩:“竹西簷影漾淸流,潭上山光滿小樓。佳節遠 遊多感慨,斜陽欲去更遲留。曾聞有客槌黃鶴,今恨無人狎白鷗。夾岸 紅霞春又老,角聲吹欲裂眞州。”○“何人起樓俯喬木?黃昏一笑立於 獨。簷前脩竹數千竿,檻外澄江五十曲。頭陀山高倚恍惚,觀音寺古多 蔥鬱。長空淡淡鳥往來,微波粼粼魚出沒。”○金克己詩:“道氣全偸靖 長官,官餘興味最幽閑。庾樓夕月侵床下,滕閣朝雲起棟間。鶴勢盤迴 投遠島,鼇頭屭贔抃層巒。新詩莫怪淸人骨,俯聽驚溪仰看山。”....(하 략)(한국문집총간, 한국고전번역원)

9) 謹齋集, 卷二, 補遺○歌辭, “五十川,竹西樓,西村八景”(한국문집 총간, 한국고전번역원)

10) 稼亭先生文集卷之二十, 詞, 眞州新妓名詞, “客路春風醉不歸。笙 歌緩緩夜遅遅。竹西樓逈月參差。行樂雅宜無事地。尋芳却恨未開時。

他年誰折狀元枝”(한국문집총간, 한국고전번역원)

11) 霽亭集 卷一, 三陟八景, “右竹藏古寺○今爲燕謹堂、竹西樓,卽竹

藏廢址也”(한국문집총간, 한국고전번역원)

(4)

김수온의 『식우집』: “....(상략)去永樂癸未。府使金孝 孫。因舊址而創之。洪熙乙巳。府使趙貫。又丹雘之。至 今四十餘年。雨洗風磨。不堪登覽。今府使梁公瓚。來蒞 是府。翼年辛卯。政成民和。與鄕中父老謀之。乃改丹 靑。煥然可觀。凡樓閣之有名稱者。....(하략)”12)

허목의 『기언』: “....(상략)考官府故事。樓不知作於何 代。而至皇明永樂元年。府使金孝孫。修廢墟起此樓。洪 煕元年。府使趙貫。施丹雘。其後四十六年成化七年。府 使梁瓚。重修之。嘉靖九年。府使許確。增作南檐。又其 後六十一年萬曆十九年。府使鄭惟淸。復重修之。自太宗 永樂元年癸未。至淸主康煕元年壬寅。爲二百六十年。樓 下。古有竹藏古寺。樓有竹西之名。蓋以此云。仍誌之。

以爲竹西樓記.”13)

김수온(金守溫, 1410-1481)의 시문집인 『식우집(拭 疣集)』에는 영락(永樂) 계미(癸未)년인 1403년에 부사 김효손(金孝孫, 1373-1429)이 ‘옛터에 새로 창건(因舊 址而創之)’ 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같은 내용이 허 목(許穆, 1595-1682)의 시문집인 『기언(記言)』

14)

에도 나타는데 “고을의 고사를 살펴보아도 누가 언제 지어 졌는지는 알 수 없으나 명나라 영락원년(1403)에 부사 김효손이 폐허에 다시 일으켜 세웠다.”고 하였다.

따라서 죽서루는 고려 후기에 창건되었다가 이유는 모르겠으나 폐허가 되었던 것을 조선 시대에 들어서 1403년에 부사 김효손이 옛터에 새로 지었음을 알 수 있다. 이후로 소실기록은 없고 중수하면서 지금까지 이르렀다. 건물은 1403년에 새로 지었으므로 고려 후 기 건축은 아니지만 위치는 초창 때와 일치한다고 볼 수 있다.

그림 8. 발굴로 발견된 고려시대 죽서루의 진입시설(2차 발굴조사 약보고서)

12) 한국문집총간, 식우집, 拭疣集卷之二, 記類, 竹西樓丹靑記 13) 한국문집총간, 기언, 記言卷之十三○中篇, 棟宇, 竹西樓記 14) 허목의 시문집인 『기언』은 저자 자신이 직접 편찬한 것으로 1689년에 왕명에 의해 간행된 것이다. 전체 93권 25책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흔히 미수기언(眉叟記言)’으로 통칭되고 있다.

죽서루 주변 2차 발굴에서 고려 시대 층위가 나타났 는데 토성 밖 서쪽으로 죽서루에 오르는 진입 시설과 토성 동쪽에서도 토성에 오르는 계단시설이 발견되었 다.

15)

조선 시대 석성으로 바뀌면서 고려 시대의 토성 과는 성벽 선은 달라졌지만 죽서루 진입은 현재와 같 음을 알 수 있으며 이를 통해 죽서루 위치도 고려시대 와 변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2-3. 두 번의 증축

1403년에 부사 김효손이 옛터에 새로 지은 죽서루의 규모와 모습은 알 수 없으나 이를 추정하는데 1660년 10월부터 1662년 8월까지 삼척부사를 역임했던 허목 (許穆, 1595-1682)의 기록이 주목된다. 허목은 60대 후 반에 2년 남짓 삼척부사로 재임하면서 삼척 최초의 사 찬 읍지인 『척주지(陟州誌)』를 발간하여 당시 삼척 지방의 자연 및 인문지리적 상황과 삼척의 지방사를 체계적이고 종합적으로 정리한 업적을 남겼다. 그리고 서문에서 척주지의 발간 목적이 삼척의 옛일을 기록한 자료가 거의 없고 『세종실록지리지』나 『동국여지승 람』에 소략하거나 빠진 자료가 많아 읍지를 발간하게 되었다고 밝히고 있다.

16)

죽서루의 중건기록은 현종 3년(1662)에 허목이 쓴

「죽서루기(竹西樓記)」에 상세히 기록되어 있으며

『척주지』와 1689년에 발간된 허목의 시문집인 『기 언(記言)』에도 실려 있다.

허목의 『죽서루기』 : “...(중략)考官府故事樓不知作於 何代 而至永樂元年府使金孝孫修廢墟起此樓 洪熙元年府 使趙貫施丹雘 其後四十六年成化七年府使梁瓚重修之 嘉 靖九年府使許確增作南檐 又其後六十一年萬曆十九年府 使鄭惟淸復重修之 自太宗永樂元年癸未至康熙元年壬寅爲 二百六十年 樓下古有竹藏古寺有竹西之名蓋以此云 仍誌 之以爲竹西樓記”

허목은 「죽서루기」에서 죽서루는 “관청의 옛 기사 를 참고해 보아도 어느 시대의 건축물인지 알 수 없고 15) 강원고고문화연구원, 삼척 죽서루 주변 유적 2차 발굴조사 약식 보고서, 2012, 21쪽, 24쪽

16) 국립춘천박물관, 삼척죽서루-성스러운 땅, 나는 듯한 루, 2015,

58쪽/ 『척주지』는 허목(許穆)이 1662년에 편찬한 삼척의 읍지로 2

권1책으로 구성되어 있다. 서울대학교 규장각에 보관되어 있으며 원

문서비스가 가능하다. 상권에 건치연혁(建置沿革)·계역(界域)·영현

(領縣)·성씨(姓氏)·풍속(風俗)·토산(土産)·해착(海錯)·풍기지변(風氣之

變)·관할구역(管轄區域)·고사(古事)·도량형(度量衡)·유방(留防)·연대

(煙臺)·송금(松禁)·창고(倉庫)·연해산천도리(沿海山川道里)·권농(勸

農)·요해(要害) 등이 실려 있다. 또한 하권에는 군사(軍事)·양전(量

田)·여씨향약(呂氏鄕約)·호적(戶籍)·종사(從祀)·공물(貢物)·군적(軍籍)

등이 실려 있다.

(5)

영락 원년에 이르러 부사 김효손이 폐허에 누를 다시 일으켜 세웠고 홍희 원년(1425)에는 부사 조관이 단청 을 하였다. 그 후 46년이 지난 성화 7년(1471)에 부사 양찬이 중수하였고 가정 9년(1530)에 부사 허확이 남 쪽 처마를 증축하였다. 또 그 후 60년이 지난 만력 19 년(1591)에 부사 정유청이 다시 중수하였다. 영락 원년 에서 강희 원년(1662)에 이르기까지 260년이다. 죽서루 아래에 죽장이라는 옛 절이 있었는데 죽서라는 이름은 이로부터 기인 된 것이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죽서루기」는 1662년 허목이 부사로 있을 때 죽서 루를 중수하면서 쓴 것으로 추정된다. 이것을 읍지인

『척주지』와 본인의 시문집인 『기언』에도 실었던 것이다. 약간 문맥은 달라도 내용은 동일하다. 여기서 주목되는 것은 중종 25년(1530)에 부사 허확(許確)이

‘증작남첨(增作南檐)’했다는 기록이다.

허목의 『陟州誌』 : “....(상략)竹西樓最舊永樂元年我太 宗三年癸未府使金孝孫因舊址作此樓洪熙元年我世宗七年 乙巳府使趙貫施丹雘成化七年我成宗二年辛卯府使梁瓚重 修之嘉靖九年我中宗二十五年丙寅府使許確增作南檐車滄 洲竹西樓贈金使君作爲古今傑作....(하략)”

그림 9. 허목 『척주지(陟州誌)』(1662),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자료

두 번째 증축기록은 책 이름은 같은데 저자가 다른 김종언(金宗彦)의 『척주지(陟州誌)』에 실려 있다. 김 종언의 척주지는 1848년에 편찬된 것으로 개인소장이 어서 원본을 확인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국립삼척박 물관에서 번역본을 발간하면서 영인본을 부록으로 같 이 싣고 있어서 그 내용은 확인할 수 있다. 김종언의 척주지는 허목의 척주지 내용을 본(本)이라고 표기하 여 그대로 옮기면서 이후 추가된 부분을 별도로 부 (附)라고 표기하여 내용을 기록하였다. 허목의 척주지 (1662년) 이후 헌종 14년(1848)까지 186년간의 후대 기

사를 더 첨가한 것이다.

17)

김종언의 『陟州誌』 : “....(상략)(附)英廟丙午府使崔道文 重刱竹西樓其後府使趙載淵改造 正廟府使徐琢修增作後 檐後己酉府使金聖規超京畫工李大根丹靑”

허목의 중수기록 이후 내용을 알 수 있는데 “영묘 병오(1726년)에 부사 최문도(崔道文)가 중창(重刱)하였 고 이후 부사 조재연(趙載淵)이 개조(改造)하였으며 정 묘(1788년) 부사 서탁수(徐琢修)가 뒤쪽 처마를 증축 (增作後檐)하였다. 이후 기유(1789년)에 부사 김성규 (金聖規)가 한양의 화공(京畫工) 이대근(李大根)을 초 청하여 단청(丹靑)하였다.”는 내용이다.

여기서도 주목되는 부분은 1788년에 부사 서탁수가

‘증작후첨(增作後檐)’했다는 내용이다. 일반적인 중수기 록에서 보기 어려운 표현이 허목 척주지의 ‘증작남첨 (增作南檐)’과 김종언 척주지의 ‘증작후첨(增作後檐)’이 라는 기록이다. 이것은 분명히 죽서루의 양쪽 처마를 달아내 증축했다는 표현이다. 증축하지 않고 처마를 수리했을 경우는 두 『척주지(陟州誌)』에서 동일하게

‘개작남첨(改作南檐)’이라고 표현하였다. 이것은 만력 (萬曆) 신축(辛丑)에 객사를 수리한 기록인데 개수(改 作)한 것과 증축(增作)한 것을 분명히 구분하여 표기 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따라서 죽서루는 고려 후기 에 창건된 이후 폐허가 되었다가 1403년에 5칸 맞배로 새로 중창하였고 1530년에 먼저 남쪽 처마를 달아내 남쪽 지붕이 팔작인 6칸 건물이 되었다. 이후 1788년 에 북쪽 처마도 달아내 7칸 좌우 대칭의 팔작 건물이 되었다. 그런데 북쪽 처마를 달아내기 전까지 약 250 년 정도는 6칸으로 남쪽은 팔작, 북쪽은 맞배인 비대 칭 건물이었다는 것이다. 북쪽 처마를 달아내기 전까 지는 북쪽 끝 칸에 실을 꾸미고 남쪽으로 출입하였으 므로 크게 어색하지는 않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맞배에서 팔작으로 바꾸기 위해서는 폐기 부재, 교

체 부재, 보충 부재가 반드시 필요하다. 폐기 부재는

좌우측 대공과 박공 및 목기연 등이다. 교체 부재는

좌우 외출목 첨차 정도로 매우 간단하다. 주심포에서

는 장혀와 첨차로 분리되어 있던 부재를 춤을 키워 하

나의 통부재로 교체하였으며 출목첨차 열이 퇴칸에서

는 주심이 되었으므로 우주를 약간 밖으로 튀어나오게

배치했다. 보충 부재로는 충량이 있다. 남쪽은 두 개,

북쪽은 한 개가 사용되었다. 남쪽은 중앙을 진입통로

17) 삼척시립박물관, 국역 척주지, 2001, 원문편

(6)

로 만들기 위함이었다. 통상 충량은 대들보 위에 두겁 주먹장으로 맞춤되지만 여기서는 그 위치에 포형 동자 주가 놓여있기 때문에 대들보 측면에 통장부로 연결한 것이 차이점이다. 또 통상의 팔작지붕에서는 충량 위 에서 외기를 받치지만 여기서는 맞배였을 때의 모습 그대로 도리와 장혀 뺄목이 외기를 받치는 맞배구조의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이를 보아도 맞배구조 의 구성을 최소한으로만 변형하여 팔작을 만들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외에 측면 서까래와 선자연, 추녀, 합각 등이 추가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증축과정 으로 미루어 본다면 지금의 모습은 이후 비록 부재는 교체되었을 수 있으나 구조와 골격은 그대로 유지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후 중건은 누의 형태와 구조를 변경할 정도의 큰 공사는 없었다. 다만 북쪽 한 칸에 벽체를 들이고 실 을 꾸몄다가 언젠가 해체하여 현재와 같이 전체 마루 가 되었는데 그 시기를 아직 규명하지 못하고 있다.

3. 각종 ‘죽서루도(竹西樓圖) ’와 공포형식 비교

3-1. 각종 죽서루도

허목의 「죽서루기」와 『척주지』, 그리고 김종언 의 『척주지』를 통해 죽서루는 1403년 5칸 맞배로 새 로 지어진 이후 1530년에 남쪽 처마를 달아냈고 1788 년에 북쪽 처마를 달아내 지금과 같은 7칸 팔작임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모습이 각종 ‘죽서루도 (竹西樓圖)’에는 어떻게 표현되어 있으며 고증이 가능 한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죽서루를 그린 각종 그림

18)

을 살펴보면 1738년에 그 린 정선의 죽서루도가 가장 빠르다. 그리고 이병언 (1671-1751)이 그렸다고 전해지는 것이 맞다면 국립중 앙박물관의 금강산도화첩 속의 죽서루도도 정선 그림 과 함께 북쪽 처마를 달아내기 이전의 그림이다. 그런 데 두 그림 모두 양쪽 팔작지붕으로 그렸다. 건물의 칸 수는 정선 그림이 6칸, 이병언 그림이 4칸이다. 정 선 그림은 비교적 실물에 가까워 남쪽 칸은 3칸으로 현재와 일치한다. 그러나 이병언 그림은 동서와 남북 의 주칸이 명확하지 않으며 실경으로 그린 것이 아님 을 알 수 있다.

18) 1788년에 그린 김홍도의 금강전도(개인소장) 속에 죽서루도는

<삼성문화재단, 단원 김홍도 탄신 250주년 기념 특별전, 1995>에서 인용하였고 나머지 그림은 모두 <국립춘천박물관, 삼척죽서루-성스 러운 땅, 나는 듯한 루, 2015>에서 인용하였다.

그림 10. 1738년(정선)-국립춘 천박물관도록, 간송미술관(관 동명승첩)

그림 11. 조선후기(전 이병 언)-국립춘천박물관도록, 중박 (금강산도화첩)

그림 12. 1788년(김홍도)-삼성 문화재단도록, 개인소장(금강 전도)

그림 13. 1788(강세황)-국립춘 천박물관도록, 중박(풍악장유 첩)

그림 14. 19세기 경(엄치욱)- 국립춘천박물관도록, 중박(죽 서루)

그림 15. 18-19세기(이방운)- 국립춘천박물관도록, 중박(죽 서루)

그림 16. 1827(작가미상)-국립 춘천박물관도록, 춘천박(관동 팔경첩)

그림 17. 19세기(작가미상)-국 립춘천박물관도록, 중박(관동 팔경병풍)

그림 18. 19세기(작가미상)-국 립춘천박물관도록, 중박(금강 산도권)

그림 19. 조선(백운)-국립춘천 박물관도록, 관동대박(백운화 첩)

(7)

그림 20. 20세기(작가미상)-국립 춘천박물관도록, 민박(관동팔경도 병)

다른 그림들은 모두 북쪽 처마가 증축된 1788년 이 후의 건물이다. 공교롭게도 김홍도와 강세황의 그림이 북쪽 처마를 달아낸 1788년 같은 해에 그린 것이다.

김홍도의 그림은 동서는 7칸으로 일치하는데 남쪽이 2 칸으로 다르다. 강세황의 그림은 남쪽은 3칸으로 같으 나 동쪽이 6칸으로 차이가 있다. 19세기 엄치욱의 그 림은 동측이 6칸, 18-19세기 이방운의 그림은 3칸, 1827년의 작가 미상 국립춘천박물관의 그림은 3칸, 19 세기 국립중앙박물관의 작가미상 관동팔경병풍은 2칸, 19세기 작가 미상의 국립중앙박물관의 금강산도권은 4 칸, 관동대 박물관의 백운화첩은 3칸, 20세기 국립민속 박물관의 관동팔경도병은 2칸으로 편차도 크고 제각각 이다. 남북측면은 대개 1-2칸으로 그렸다. 지붕은 시대 에 관계없이 모두 팔작으로 그렸다. 비교적 정선과 김 홍도, 강세황의 그림이 실경에 가깝다고 할 수 있는데 김홍도의 그림에서는 남측을 2칸으로 그려 실경과 차 이가 있으며 강세황의 그림은 동측을 6칸으로 그려 차 이가 있다. 따라서 그림으로는 고증을 하기 어렵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다.

그리고 평면 구성에서 북쪽 협칸에는 실이 구성되어 있는 모습은 가장 이른 1738년의 정선 그림에서부터 19세기 국립중앙박물관의 작가 미상 금강산도권까지 공통적으로 나타난다. 맞배였을 때에는 북쪽 협칸이 없었으므로 실 구획 없이 모두 마루가 깔렸을 것이다.

그러나 남쪽 처마를 달아낸 1530년 이후 어느 시기인 가에 실을 구획하였을 것인데 정확한 시점은 알 수 없 다. 다만 1738년 정선 그림에도 나타나므로 그 이전임 은 추정할 수 있다.

김종언(金宗彦)의 『척주지(陟州誌)』에 따르면 1726 년에 부사 최문도(崔道文, 1676-1729)가 중창(重刱)하 였으며 이후 부사 조재연(趙載淵)이 개조(改造)하였다 고 기록하였다. 조재연은 1709년생으로 1741년 33세에 생원시에 합격하였으므로 삼척부사로 내려간 것은 그 이후일 것이다. 따라서 정선이 그림을 그린 시기보다

늦으므로 개조가 실을 구성한 것은 아닌 것으로 추정 된다. 그러면 구조를 변경할 정도의 수리는 앞선 최도 문의 중창이다. 중건(重建)이나 수리(修理), 중수(重修) 등의 용어를 사용하지 않고 중창(重刱)이라고 표현한 것은 구조에 변형이 있는 정도의 수리였다고 판단된 다. 그러나 1530년 남쪽 처마를 달아내고 정면을 남쪽 으로 바꾸면서 북쪽에 실을 꾸밀 수도 있기때문에 정 확한 시기를 확정할 수는 없다.

3-2. 공포형식 비교

공포형식을 통해 기록자료에 나타난 건물의 연대를 조 금 더 보완할 수 있을 것이다. 죽서루의 중앙 5칸은 주심 포 형식이고 양쪽 퇴칸은 익공형식이다. 특히 이중에서 중앙 5칸의 주심포는 1403년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장혀 폭으로 만든 창방과 직교하여 헛첨차를 사용했다 는 것이 첫 번째 특징인데 이것은 고려말과 조선 초 주 심포 형식의 특징이기도 하다. 헛첨차가 사용된 3포형식 건물 중에서 시기가 떨어지는 15세기 초로 추정되는 안 성객사 정청, 1473년의 전주객사 정청, 조선 중기의 경 주향교 명륜당 등은 창방의 폭이 커졌다.

그림 21. 안성객사 정청(해체수리보고서)

그림 22. 전주객사 정청(실측보고서)

그림 23. 나주향교

대성전(실측보고서) 그림 24. 도갑사 해탈문(실측보고서)

두 번째 특징은 보머리를 삼분두 형식으로 하고 뺄목

부분의 폭을 줄이지 않았다는 점이다. 이와 유사한 사례

로는 부석사 조사당(1377년), 나주향교 대성전(1407년),

강릉향교 대성전(1414년), 도갑사 해탈문(1457년) 등이

있다. 따라서 이러한 형식들은 14세기 말에서 15세기

(8)

초에 쓰인 형식이라고 할 수 있으며 1403년에 건축된 죽서루 공포형식도 이 범주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세 번째 특징은 헛첨차가 길지 않아 헛첨차 상부 소 로의 위치가 외출목까지 이르지 못하고 주심과 출목 사이에 놓였다는 점이다. 이와 같은 구성은 수덕사대 웅전(1308년), 부석사 조사당(1377년), 강릉 임영관 삼 문(1392년), 안성 객사 정청(15세기 초), 도갑사 해탈문 (1457년)에서 나타난다. 헛첨차는 외목도리로 전달되는 하중을 받기 위한 목적으로 사용되었는데 초기에는 출 목선상보다 안쪽에 놓였으나 후대로 가면서 출목선상 과 일치하게 되었다.

19)

따라서 죽서루는 초기 주심포 형식을 취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림 25. 죽서루 주심포(실측보고서)

그림 26. 강릉 임영관 삼문(수리보고서)

그림 27.

수덕사대웅전(실측보고서)

그림 28. 부석사 조사당(실측보고서)

그림 29. 죽서루 주심포형식(1403년)

19) 최유리, 천득염, 선행연구를 통해 본 헛첨차에 관한 고찰, 대한 건축학회지회연합회 2010년 추계학술발표대회논문집, 184쪽

그림 30. 부석사 조사당 주심포형식(1377년)

네 번째 특징은 첨차와 살미첨차의 모양이 다른 건

물에서는 볼 수 없는 교두형이라는 점이다. 헛첨차가

사용되기 이전, 고려 중기 이전의 주심포 건물인 봉정

사 극락전과 부석사 무량수전의 경우는 보 방향 첨차

와 도리방향 첨차가 같은 모양이다. 즉 첨차와 살미가

구분되어 있지 않은 상태였다. 그러나 수덕사 대웅전

이후로는 보 방향 첨차가 장식화하면서 앙서나 쇠서형

으로 바뀌었다. 즉 살미첨차가 탄생한 것으로 구조적

보강과 함께 장식이 화려해졌음을 의미한다. 그리고

첨차의 모양은 고려시대 첨차의 특징인 옆면을 사절하

고 밑면을 연화두형으로 한 것이 조선 초까지 이어졌

다. 수덕사 대웅전, 은해사 거조암 영사전, 강릉 임영

관 삼문, 강릉향교 대성전, 정수사 법당, 안성객사 정

청, 도갑사 해탈문이 대표적이다. 그러나 죽서루의 경

우는 연화두형은 아니지만 보 방향과 도리 방향 첨차

가 모양이 같다고 하는 측면에서는 봉정사 극락전과

부석사 무량수전과 같은 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

고 주두나 소로는 굽을 사절한 것으로 조선시대 양식

이다. 결론적으로 죽서루와 구성과 장식 측면에서 가

장 유사한 것이 부석사 조사당이다. 보 방향 도리 방

향 첨차가 교두형으로 같고 헛첨차를 사용했으며 헛첨

차가 짧아 출목선상에 이르지 못하는 점, 보머리가 삼

분두인 점, 출목상에 통장혀를 사용한 점까지 매우 유

사하다. 그러나 죽서루의 경우는 출목상에 교두형의

첨차가 사용되었으나 부석사 조사당에서는 출목 첨차

가 없다는 점에서는 차이가 있다. 또 하나는 죽서루는

공안을 그림으로 그렸으나 부석사 조사당은 실제 공안

이 있는 첨차를 사용했다는 점이다. 이처럼 약간의 차

이는 있으나 공포의 개념과 형식에서 부석사 조사당과

매우 유사함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죽서루의 공포형식

은 14-15세기 주심포 형식의 범주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9)

이러한 시기적 특징이 나타나는 것은 고려 말에 초창 되었지만 소실되어 사라진 것을 조선 초인 1403년에 다 시 지으면서 당시의 공포형식을 차용했기 때문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증축과정에서 사용된 익공형식은 조금 차이가 있다.

그림 31. 동남우주 익공

그림 32. 동남우주 이외 익공

그림 33. 충량하부 익공

그림 34. 동남우주 익공 그림 35. 동남우주이외 익공

남쪽과 북쪽은 1530년과 1788년 이라는 시차를 두고 각각 한 칸씩 증축하였는데 익공의 모양은 동일하다. 익 공의 춤이 높고 길이가 짧으며 위로 치솟아 강직하며 방 아다리 사이에 연봉이 조각된 모습이다. 이러한 형식은 조선 전기 익공형식에서 볼 수 있는 것으로 1530년의 시 대적 특징을 반영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북쪽의 경우는 1788년에 증축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남쪽과 같은 형식을 사용한 것은 시대적 특징을 반영했다기 보다는 좌우대칭 을 고려하여 조선전기 양식을 차용했다고 할 수 있다.

4. 맺음말

이상의 고찰을 통해서 죽서루의 증축 시기를 새롭게 밝혔으며 공포형식의 비교를 통해 죽서루 건축의 시대 적 특성을 살펴보았으며 다음과 같은 결론을 얻을 수 있었다.

죽서루는 고려 때 창건되었으나 소실되어 폐허가 되 었던 것을 부사 김효손(金孝孫)이 1403년에 옛터에 새 로 지었다. 이때는 5칸 맞배 누각이었으며 중창한 위 치는 발굴자료를 참고하면 현재의 위치와 일치한다.

허목 『척주지』의 1530년에 ‘증작남첨(增作南檐)’이 라는 기록, 김종언 『척주지』의 1788년 ‘증작후첨(增 作後檐)’ 이라는 기록을 통해 그동안 추정으로만 좌우 퇴칸이 증축되었을 것이라고 했던 것을 그 시기를 정 확히 밝힐 수 있었다. 먼저 남쪽 처마를 증축하여 6칸 좌우 비대칭 건물이었던 것을 다시 북쪽 처마를 증축 하여 7칸 대칭의 팔작 건물이 되었다.

팔작 건물을 중건하면서 맞배로 바꾸는 사례는 조선 초 불전에서 많이 볼 수 있으나 맞배를 팔작으로 중건 한 사례로는 유일하다고 할 수 있다. 또 오랜 기간 건 물의 형식을 통일하지 않고 다른 시기의 형식을 병존 시키면서 중건한 것은 중건역사에서도 보기 드문 일이 다. 또 같은 증축에 대해서 1530년에는 남첨(南檐)이라 고 했으나 1788년에는 북첨(北檐)이라고 하지 않고 후 첨(後檐) 이라고 표현했다. 이것은 동서남북이라고 하 는 향(向)보다는 건물의 정면성을 표현하는 전후(前後) 를 사용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개념의 변화는 남 쪽 처마를 달아내면서 건물의 정면을 동쪽에서 남쪽으 로 바꾸었음을 추론할 수 있다.

주심포 형식의 비교를 통해 가장 유사한 것은 부석 사 조사당이었으며 공포형식으로 보았을 때 죽서루는 14-15세기의 시대적 특징을 나타내고 있다. 즉 건축형 식과 공포에서 중창 시기의 시대적 특징을 잘 반영하 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죽서루는 기록과 건축 형식의 시기가 일치한다.

참고문헌

1. 강원고고문화연구원, 「삼척 죽서루 주변 유적 2차 발 굴조사 약식보고서」, 2012

2. 강원고고문화연구원, 「삼척 죽서루 주변 유적 정밀발 굴조사(4차) 약식보고서」, 2016

3. 국립춘천박물관, 『삼척죽서루-성스러운 땅, 나는 듯한 루』, 2015

4. 『김도경과 그를 사랑한 사람들, 삶과 꿈 누정에 담 다』, 달아실, 2018

5. 박언곤, 『한국의 누』, 대원사, 1993

6. 삼성문화재단, 『단원 김홍도 탄신 250주년 기념 특별 전』, 1995

7. 三陟郡, 『三陟郡邑誌』, 1871,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8. 三陟府, 『三陟府邑誌』, 1700,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9. 삼척시, 『삼척 죽서루 정밀실측조사보고서』, 1999 10. 서울대학교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신증동국여지승

람』, 1530

11. 이희봉, 「기존 정설 죽서루 증축설에 대한 반증」, 한국건축역사학회 추계논문집, 2011.11

12. 최유리, 천득염, 「선행연구를 통해 본 헛첨차에 관한 고찰」, 대한건축학회지회연합회 2010년 추계학술발표 대회논문집

13. 許穆, 『陟州誌』, 1662,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접수(2021. 06. 04)

수정(1차:2021. 07. 12)

게재확정(2021. 07. 23)

수치

그림 20. 20세기(작가미상)-국립 춘천박물관도록, 민박(관동팔경도 병) 다른 그림들은 모두 북쪽 처마가 증축된 1788년 이 후의 건물이다. 공교롭게도 김홍도와 강세황의 그림이 북쪽 처마를 달아낸 1788년 같은 해에 그린 것이다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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