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검색 결과가 없습니다.

자유주의와 한국사회

N/A
N/A
Protected

Academic year: 2022

Share "자유주의와 한국사회"

Copied!
65
0
0

로드 중.... (전체 텍스트 보기)

전체 글

(1)

제도연구시리즈 3

자유주의와 한국사회

신일철․한상범․최병선 외

(2)

자유주의와 한국사회

1판1쇄 인쇄/2001년 10월 27일 1판1쇄 발행/2001년 10월 31일

발행처/한국경제연구원 발행인/좌승희 편집인/좌승희 등록번호/제13-53

(150-756) 서울특별시 영등포구 여의도동 28-1 전경련회관 전화(대표)3771-0001 (직통)3771-0057 팩시밀리 785-0270∼1

http://www.keri.org/

ⓒ 한국경제연구원, 2001 한국경제연구원에서 발간한 간행물은 전국 대형서점에서 구입하실 수 있습니다.

(구입문의) 3771-0057

ISBN 89-8031-209-1 5,000원

(3)

발 간 사

인간사회가 달성하고자 하는 궁극적인 목표는 사회가 처한 상황에 따라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다. 사회의 목표는 궁극적으로는 사회구성원 각자의 궁극적인 목표와 부합되어야 한다고 볼 때, 인간사회의 궁극적인 목표는 자유사회의 성취에 있다고 볼 수 있다. 우리가 목표로 하는 사 회는 자유사회이고 그 전제가 되는 가치관은 자유주의이다. 이 보고서는 자유주의의 전통을 한 국민족전통사상에서 찾아볼 수 있는지, 자유주의의 이념과 제도가 한국헌법에 어떻게 반영되어 있는지 그리고 자생적 질서가 한국사회에 어떻게 자리잡아가고 있는지를 심도있게 논의하고 있 다.

우리 민족의 전통문화와 사상에서 근대자유주의의 연원을 찾는 것은 어려운 작업이기는 하지 만 그 연원을 찾는 일은 매우 의미있는 일이다. 개화 이후 동아시아에서의 자유주의 운동은 일 본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의회의 강화, 입헌제의 법치국가, 언론․사상의 자유 등 자유민권 운동으로 개념화될 수 있다. 우리 민족의 전통사상 속에서 자유주의의 민권사상, 인치에 대한 법치주의, 큰 정부에 대한 작은 정부지향의 맹아들을 찾으려면, 경직된 역사결정론에서 자유로 워져야 한다. 특히 우리나라의 근대화 과도기에 자유주의적 민권, 인간 기본권의 인권, 자본주 의적 시장경제 등 미래지향적 진보사상이 싹텄다는 지적은 설득력 있는 것이라 할 수 있다. 해 방 이후 우리나라가 새나라 건설의 건국이념으로 의회민주제, 법의 지배, 복수정당제 등의 자유 주의 전통과 자유언론 등의 자유주의의 실현을 삼았던 것은 우연이 아니라 할 수 있다.

1948년에 제정된 우리나라 헌법은 자유주의를 그 이념과 제도로서 수용하고 있는데, 이것은 법규범으로서 이념이고 제도였다. 자유주의 이념이 잘 구현되고 있는가, 법규범이 법생활에서 제도로서 그 역할을 다하고 있는가 그리고 자유주의의 헌법제도가 정착화될 만큼 정치적․법적 으로 성숙되어 있는가 하는 것은 또 다른 문제이기는 하지만 우리나라 헌법은 자유주의 이외에 민주주의와 자유주의 이후단계의 가치체계와 질서를 갖춘 복합적 규범체계를 수용하고 있다.

이 같은 관점에서 볼 때 한국의 정치․경제․문화․사회의 현실은 복합적 이중적 가치질서의 동시적 조화와 실현이라는 어려운 과제는 안고 있다. 21세기에 선진자본주의의 치열한 경쟁질 서가 형성되고 있으며 이 같은 경쟁에 슬기롭게 대처하기 위해서는 이에 맞는 법제도의 마련이 필요하다고 할 수 있으며 그러자면 자유주의의 정치, 법문화의 정착이 필수적이다.

우리 사회는 다른 어떤 민주․자본주의 사회와도 견줄 수 없을 정도로 계획․통제적 사고와 인위적 질서 중심의 질서관념이 강하게 자리잡고 있는 사회라 할 수 있다. 오늘날에도 고도로 중앙집권적이고 권위주의적인 정부 아래의 국민들은 정부만을 사회질서의 유지자로 보고 모든 문제의 책임을 정부에 돌리고 있는 태도를 보이고 있다. 또한 우리나라에는 복잡하고 지극히 비현실적이고 불합리한 법규제가 만연해 있으나, 이런 규제들조차도 제대로 지켜지고 있다고 믿는 사람은 드물다. 이제 사회가 조작의 대상이 아니라 그 자체가 하나의 자생적 질서체계로 서 그 속에서 질서를 자생시키는 원리를 내포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4)

이 보고서는 중앙일보와 한국Hayek소사이어티가 후원하고 한국경제연구원과 월간emerge새 천년이 공동으로 주최한 자유주의와 한국사회 라는 제하의 심포지엄에서 발표된 주제발표논문 과 토론내용을 정리하여 발간한 것이다. 이 보고서에서는 자유주의와 한국사회의 전통사상, 자 유주의와 한국헌법, 자생적 질서와 한국헌법, 신제도주의와 한국경제 등 이 시대의 핵심논쟁거 리들을 폭넓게 논의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 의미가 매우 크다고 할 수 있다. 토론에 참여하여 주제발표를 해주신 신일철 명예교수님, 한상범 교수님, 최병선 교수님께 감사드리고 아울러 토 론해 주신 유석춘 교수님, 강경근 교수님 그리고 민경국 교수님께 감사의 말씀을 드린다. 아울 러 “신제도주의와 한국경제”라는 제하의 종합토론에서 활발한 토론을 해주신 이성섭 교수님, 유 정호 박사님, 유동운 교수님께 감사의 말씀을 드린다. 마지막으로 이 책의 내용은 본 연구원의 공식입장과는 무관한 연구자들의 개인적인 견해임을 미리 밝혀두는 바이다.

2001년 10월 한국경제연구원 원장 좌승희

(5)
(6)

차 례

제1주제 자유주의와 한국사회의 전통사상

-신일철 / 9

Ⅰ. 근대민족주의와 자유주의의 관계

/ 11

Ⅱ. “자유”와 “자유민권”의 개념 유래

/ 14

Ⅲ. 반강권의 “무위” 유토피아의 “원형” 순환

/ 17

Ⅳ. 도가, 도교의 수용과 정여립의 주자학 비판

/ 20

Ⅴ. 실학의 유토피아는 상공업지향사회

/ 24

Ⅵ. 동학의 민권적 자각과 개화기 자강주의

/ 30

Ⅶ. 결 언

/ 37

<논 평> 제1주제에 대한 논평-유석춘 / 44

제2주제 자유주의와 한국헌법

-한상범 / 49 문제의 초점 / 51

Ⅰ. 한국 자유주의의 계보 : 역사적 배경 / 53 1. 한국 시민사상의 원류와 시민주의 / 53 2. 1919년 3․1운동과 임시정부의 자유주의

- 임시헌장에서 건국강령까지 / 55

3. 해방 후(1945년) 미국식 자유주의 도입과 영향 / 57 4. 유진오兪鎭午의 헌법 구상과 자유주의의 수준 / 59 5. 한국과 일본 ‘다이쇼大正 데모크라시’ 시대의

자유주의와의 관계 / 64

6. 남과 북의 자유주의관과 대응 / 66

Ⅱ. 1948년 제헌헌법의 정신과 제도로서의 자유주의 - 이념과 현실의 괴리 / 67

(7)

1. 제헌헌법(1948)에 나타난 자유주의의 제도화와 그 문제 / 67 2. 한국헌법의 제도와 헌정에서의 괴리와 갈등

-장식적 헌법의 현실과 ‘교실(강단) 민주주의’ 문제 / 70 3. 1950년 전쟁과 반공주의 일변도의 정치상황 / 72

4. 개발독재 시대의 자유주의 헌법질서의 동면․가사상태 - ‘반공’ 국시론과 자유주의 부재의 시대 / 74

Ⅲ. 헌법정치의 과제로서 자유주의의 복권과 그 문제 / 76 1. 일본․중국․한국 등 3개국의 헌법정치와 자유주의

정착의 시행착오의 비교를 통한 문제 소묘 / 76 2. 자유주의의 올바른 평가와 인식-인권과 법치주의 및

민주주의화 / 78

3. 남북관계와 자유주의 / 79

4. 21세기 헌법질서로서 자유주의와 복지주의의 조화 - 세계화와 신자유주의 신화와 당면의 헌법적 대응 / 81 5. 문제점과 과제의 요약 / 82

<논 평> 제2주제에 대한 논평-강경근 / 86

제3주제 자생적 질서와 한국사회

-최병선 / 93

Ⅰ. 서 론 / 95

Ⅱ. 사회의 두 가지 질서 / 96 1. 인위적 질서 : 성격과 한계 / 97 2. 자연발생적(자생적) 질서 / 99

3. 자생적 질서(시장질서)의 기능과 작동 메커니즘 / 104 4. 자생적 질서와 정부간섭의 상극성 / 108

Ⅲ. 자생적 질서와 한국사회 / 111

<논 평> 제3주제에 대한 논평-민경국 / 117

종합토론 : 신제도주의와 한국경제

/ 123 좌승희 / 이성섭 / 유정호 / 유동운

(8)

◈ 제1주제

자유주의와 한국사회의 전통사상

신 일 철 (고려대 명예교수, 철학)

Ⅰ. 근대민족주의와 자유주의의 관계 ··· 11

Ⅱ. “자유”와 “자유민권”의 개념 유래 ··· 14

Ⅲ. 반강권의 “무위” 유토피아의 “원형”

순환 ··· 17

Ⅳ. 도가, 도교의 수용과 정여립의

주자학 비판 ··· 20

Ⅴ. 실학의 유토피아는 상공업

지향사회 ··· 24

Ⅵ. 동학의 민권적 자각과 개화기

자강주의 ··· 30

Ⅶ. 결 언 ··· 37

(9)

우리 민족의 전통문화와 사상에서 근대자유주의의 연원을 찾는 것은 산에 가서 물고기를 잡 으려는 것 같아서 “연목구어”격인 느낌이 드는 것이 사실이다. 그렇지만 산이나 뭍에서도 계류 나 시내에서 잔고기를 만날 수 있고 그 물길을 따라 더듬어 가면 큰 강과 바다에 이른다.

Ⅰ. 근대민족주의와 자유주의의 관계

역사상 처음으로 인류의 역사 혹은 세계사의 관념이 생긴 것은 근대진보사관의 산물인데 그런 선형적 상승의 세계사는 “자유의식의 진보”의 역사라는 명제가 헤겔의 세계사의 철학 의 주제였다. 헤겔에 의하면 인간의 사회제도의 기반은 가족이라 했고 가족의 반정립으로 다시 시민사회로 발전하는데 시민사회는 각 개인이 만인의 행복이라는 이름으로 자기의 “원 자적 욕망”을 충족시키는 결여태라 하여 마침내 변증법적 지양으로 국가의 단계로 고양됨으 로써 비로소 “인륜”이 실현된다고 했다. 헤겔은 역사변증법으로 근대사회를 시민사회와 국 가의 두 범주로 대담하게 추상화했다.

그러나 헤겔은 개체적인 시민적 자유를 유기적 통일의 국가에 종속시킨 점에서 근대민족 주의의 게르만적 표현에 기울어졌다. 근대시민사회의 기반에서 탄생된 리버럴리즘liberalism 의 “자유”는 고대, 중세의 왕권부정이나 근대적 국가권력의 구속, 강제로부터의 자유인 점에 서 그 기본은 법치국가이고 이 “법의 지배” 속에서 개인의 시민권이 확보된다고 본다. 서유 럽의 근대에 와서 개인의 불가침의 인권, 특히 개인의 표현과 결사의 자유, 정치적 참여의 자유가 자유시민권으로 쟁취되었다.

물론 이 시민적 자유는 근대상공업자의 경제활동의 자유가 보장된 자유기업, 민영화와 시 장제도, 사유재산권이라는 새로운 규범의 기초 위에 서 있다. 마르크스주의 사회경제사적인 표현을 빌린다면 “부르주아지”의 이데올로기였다. “부르주아”는 신흥상공업계층인 시민이다. 근대 적 의미의 “사회”와 시민은 그 생성의 역사적 성격에서는 상공업의 신흥사회계층의 발흥으 로 형성된 역사적 기반을 부인할 수 없다. 봉건적 신분차등을 철폐하고 만인이 다 같은 이 성적 존재라는 데카르트의 이성주의와 흄의 자유론을 비롯하여 칸트의 자율적 인격의 도덕 철학에 이르러 비로소 자유주의의 철학적 기초가 정초된다. 이처럼 자유주의는 개인주의적 개아個我의 자각에 눈뜨고 따라서 근대사회는 상공업 등 경제가 주된 사회단계인 점에서 근 대적 시장질서를 마련하게 된다. 아담 스미스는 새로 형성된 근대사회를 “거대사회great society”라 했는데 지난날의 전통적 공동체와 달리 근대사회는 “복잡성”이 특징인고로 시장 적 제도틀 속에서 개인들의 영리추구가 보장되고 시장적 번영도 꽃피게 된다.

자본주의적 시장은 한 나라를 민족통일시장권1)으로 만드는 시민적 민족운동에 의해 근대 적 민족nation을 만들어내는 경제적 기틀이 되어 근대민족주의가 대두된다. 씨족, 부족, 종족 또는 봉건적 분할경제하의 다만 언어, 풍습의 공동성만을 가진 “폴크Volk”가 “나치온Nation” 이 되는 것은 경제적 자유주의와 결코 무관하지 않다.2)

1) 마르크스주의의 관점에서 근대적 “네이션”의 형성은 언어, 풍습뿐만 아니라 경제적 공동성이 생김으로써 가능하다. 따라 서 “네이션”, 즉 하나의 국민, 국가는 자본주의 경제의 전국 통일시장이 됨으로써 비로소 형성된다. 그러므로 근대민족주 의 운동은 부르주아 민족운동의 성격을 가진다.

2) 스탈린의 첫 민족(Nazia)의 정의는 “언어, 지역, 경제생활 및 문화적 공통성에 나타난 심리적 상태의 공통성을 바탕으로 해서 생성되고, 역사적으로 구성된 인간들의 견고한 공동체”였으나 1950년 스탈린의 언어학 서한 에서는 이를 수정하여

“준민족(Narodnoschi)”과 “국민(Nachia)” 두 단계로 수정했다. “아르드노스치”는 두 언어의 Volk, 나치아는 Nation에 해 당되는데 이 후자의 “네이션”은 자본주의의 민족통일 시장으로 생긴 경제적 공동성과 부르주아 민족운동의 산물이다. 전

(10)

또한 고대의 군사지배나 봉건왕권, 근대의 절대군주제 등 권력의 압제에서 해방된 자유는 신흥시민계급과 산업화, 시장의 성장에서 구현되었다. 한마디로 자유시장이 없는 곳에 시민 적 자유, 특히 인권은 숨쉴 수 없다는 것이 지난 100여년간의 세계사가 중시해 주었다.

근대민족주의 유형을 편의상 두 갈래로 나눈다면 민족주권을 앞세우는 헤르더Herder형과 나라 안의 자유시민권을 앞세우는 루소형으로 구분할 수 있다. 근대화혁명은 민족국가건설 의 내셔널리즘을 씨로 하고 근대적 시민권, 다시 말해서 자유민권의 리버럴리즘을 날로 해 서 짜지는 편직물이라 비유할 수 있다. 19세기 후진 독일이나 러시아, 중국 특히 우리 한국 의 민족독립운동기에는 완강한 저항적 민족주의의 강세 속에서 자유민권의 자유주의의 성장 은 뒤로 처질 수밖에 없었다. 1930년대 이후의 우리 민족운동은 “민족진영”과 “좌익진영”으 로 대분되어 자유주의 사조는 민족주의 속의 일부로 간주되었다. 특히 전후 아시아, 아프리 카의 민족운동 속에 침투된 레닌주의는 그 사회발전 단계의 마르크스적 자연성장성이론을 거부하고 부르주아 민주혁명 단계를 뛰어넘을 수 있다는 나로드니끼적 과오를 범함으로써 무자유의 예증에의 길을 걷게 된 큰 재앙을 결과했다.

1989년 사회주의의 해체를 보고 난 다음 레닌주의적 사회변혁의 사상가였던 무페Chantal Mouffe 등은 과거의 마르크스레닌주의가 저지른 치명적 잘못은 인류가 200여년간 싸워 확보 한 자유주의의 가치와 제도의 위대한 유산을 무시한 데 있다고 고발했다.3) 역사적 자유주의 의 제도틀—의회민주주의, 복수정당제, 법의 지배, 언론․결사의 자유 등의 민주주의의 철저 화가 포스트마르크스주의의 수정주의가 되어야 한다고 하여 이를 “래디칼 데모크라시”라 명 명했다.

1990년을 분기점으로 해서 지난날 마르크스주의자들에 의해 “자본가 계급의 착취” 이데올 로기로 왜곡 폄박貶薄당했던 자유주의의 이념 속에서 다시 살려야 할 중요 가치들이 복권되 고 있다. 사회주의 해체와 특히 동독의 몰락을 보고 하버마스는 이 시민혁명을 “재수혁명 Nachholen de Rovolution”이라고 개념화했고 덩샤오핑의 중국은 시장제 사회주의를 “근대화”

또는 “중국 특색의 사회주의 초급단계”라고 표현했다. 북한도 자유주의 제도틀, 민주주의, 시장경제의 개혁개방의 대세를 더 이상 거역할 수 없을 것이다.4)

자유주의 부정의 진보주의적 환상은 끝났다. 이제는 자유주의의 시민사회 이념을 우리의 몸에 맞게 어떻게 수정하고 잘 조정하느냐가 문제이지, 더 이상의 냉전형 이데올로기 논쟁 의 되풀이는 별로 의미가 없게 되었다.

Ⅱ. “자유”와 “자유민권”의 개념 유래

자유주의적 “자유”의 개념은 19세기말까지도 동아시아 문화권에서는 전혀 생소한 개념이 었다. 19세기말까지도 도대체 한자로 “자유自由”에 대응되는 개념이 없었고 중국 고전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자유”의 용례는 “탈아입구脫亞入歐”의 19세기말 일본에서 처음 만든 “리버티liberty”의 일본 어 번역말이다. J. S. 밀의 자유론On Liberty 이 1872년 일본에서 자유지리自由之理 의 책명으 로 번역되어5) 일본의 자유민권운동에 큰 영향을 주었다고 한다. 그러나 중화주의의 수구적

후 분단국가 독일, 베트남, 예멘이 모두 시장경제제도로 통일된 사실이 시사해 주는 바가 크다.

3) Mouffe C., “Democratic Politics Today,” in Dimensions of Radical Democracy, (Verso, 1992).

4) 1945년 8․15 직후 북한의 사회공산주의자들도 당시의 사회발전단계를 “자산계급성 민주혁명” 단계라고 규정한 바 있다.

(11)

자존 속에 파묻혀 있던 중국에서도 이 일본의 영향으로 강유위康有爲, 장지동張之洞 등이 먼 저 “자유”의 용어를 쓴 바 있으나 자유민권적 자유의 이념과는 거리가 멀었다. J. S. 밀의 자유론 의 중국어 번역은 엄복嚴復이 냈는데, 자유방종의 어감에 거부감을 느껴 그 역서명 을 군기권계론群己權界論 이라 했다.6)

서구의 “리버티里勃而特”의 중국어 번역에 고심한 장지동은 중용 의 “천명지위성, 솔성지 위도天命之謂性, 率性之爲道”와 그 뜻이 같다고 했다. 장지동은 차라리 이 “리버티”를 “공론 ”이라 의역하고 “자유”의 번역어를 기피했다. 이런 양무洋務론자도 “군주권”의 제한을 뜻 하는 민권이나 자유권을 수용할 패러다임이 없었다고 볼 수 있다. 변법자강의 선각자 엄복 도 “자유”의 어감이 싫어서 밀의 자유론을 무리(群), 즉 집단과 자기(己)의 권리의 한계를 어떻게 확정하느냐의 의미로 옮겼다. 개인․개성의 자각에 기초한 자유주의 민권의 진보사 상이 동아시아 문명권에 수용되는 데는 장벽이 높았다. 이 서구 수용기 지식인에게는 서로 다른 전압의 변압기적 인텔리겐치아의 고민이 컸다.

더욱이 “천부인권설”에 기초한 서유럽의 개인권․민권에 대해 손문孫文마저도 부정적이었 다. 그의 “삼민三民주의”의 “민권주의”는 개인자유권의 민권이 아닌 “인민독재”의 정치체제 를 염두에 둔 “국권”이었다.7) 손문은 개인의 자유권을 인정하면 모래알(散沙)과 같이 분열 되어 “민족적 단결”의 견고한 “국가”를 건설하는 데는 부적합하다는 반개인주의 정서가 강 했다.

중국의 변법자강사상의 영향을 받은 20세기초 대한제국기에는 충군애국의 군주국가의 국 왕권만이 강조되었고 민권이나 자유권은 그 설 자리가 없었다.8) 대한자강회를 결성한 장지 연張志淵이 쓴 그의 백과사전적 개화기 교과서 만물사물 기원고 (‘Encyclopedia’의 우리말 번역)의 계몽주의 책 속에도 “자유”의 항목은 보이지 않는다. 장지연은 우승열패, 약육강식 의 사회진화론적 새 세계에서 “자강”의 길을 밝혔고, 다만 “단체결합”에 의한 부강자강국가 인 “신국”의 건설에 주력하였다. 이런 사회다윈주의적 자강론의 진화론논리는 근대 국제사 회의 “열국경쟁” 속에서 자강국가 건설로 살아남겠다는 이른바 정치의 진화론이었고, 그 국 가 안에서 시민사회의 개인들간의 관계를 진화론적인 시장적 경쟁사회로 파악하는 경제의 진화론에 의한 스펜서류 자유주의의 수용에는 무감각했다. 자강론자 신채호는 오히려 자강 론이 “강자지원”을 인정하는 데서 독립운동의 적인 일본의 강권지배를 정당화한다는 데 뒤 늦게 눈뜨고 1926년을 기해 반강권, 민중의 자유연합의 애너키즘에 경도하게 된다. 그의 조 선혁명선언 은 중국 무정부주의의 영향을 받아 반강권, 반국가, 민중의 자유연합의 “민중적 조선”의 자유사회를 희구한 점에서 애너키즘적 자유주의와 민족주의의 결합을 볼 수 있다.9)

그렇지만 그의 조선혁명선언 과 “국제 무정부주의사건”에 연루되어 투옥된 신채호의 애 너키즘은 일제 강권국가와 같은 것을 독립국가의 비전으로 삼을 수 없는 점에서 그의 독립

5) 中村敬宇, 自由之理 .

6) 중국에서는 서양사회학을 ‘군학(群學)’이라 번역했고, “사회”의 개념이 없어 그 대신 “군(群)”이라 했는데 이는 무리, 떼이 다. “개인”이나 “개성”도 전통 중국사상에는 없었으므로 “자기(自己)”의 뜻으로 엄복(嚴復)은 “기(己)”라 번역했다. 논어의

“기소불욕(己所不欲), 물시어인(勿施於人)”에서 나와 타인이 “기(己)”와 “인(人)”으로 되어 있다.

7) 손문은 개인의 자유를 제한하지 않는다면 견고한 단체를 만들 수 없다고 하는 개인주의비판에 입각하여 그의 “민권주의”

는 “천부인권”과 전혀 다르고 오직 집단주의적 “민권”만을 뜻하며, 당시의 서구의 민권제도는 부르주아의 전유물이요, 평 민을 압박하는 도구라고 신랄하게 비판했다. 따라서 손문의 민권주의는 우익의 국민당 “국권”주의 파시즘과 좌익의 인민 독재의 “당권”주의의 두 길의 양자택일이 있을 뿐 자유주의와 그 민주정치, 시장경제, 언론, 사상의 자유 등은 배척되었 다.

8) 신해영, 윤리학교과서 (1907년).

9) 신일철, 「신채호의 무정부주의사상」, 신채호의 역사사상연구 (고대출판부), pp.167-207에서 상론

(12)

운동의 목표가 “자유연합사회”로서 반권력주의적 민중주체의 시민사회상을 표방하였다. 오 히려 그의 애너키즘적 자유사상은 강자와 강권과 싸우는 약자, 약소민족에게는 권중, 폭탄 등의 의열테러 투쟁도 채용될 수 있다고 해석하여 “의열단” 투쟁의 무정부주의적 투쟁수단 에 역점을 둔 점에서 비타협적 민족주의의 극단화에 이르렀다고 볼 수 있다. 자유주의의 중 앙권력 견제가 더욱 극단적으로 강조되면 무강권無强權 지향의 애너키즘적 자유주의가 된다.

그러나 8.15 해방 후의 건국 도상에서 “국가”의 국권주의가 주류를 이루고 애너키즘적 자유 주의의 설 자리는 북한에는 전혀 없었고 남한에서도 건전한 자유주의의 자유민권사상은 4.19혁명에 이르러 그 새출발의 기반을 얻게 되었다.

Ⅲ. 반강권의 “무위” 유토피아의 “원형” 순환

동아시아문화권, 특히 한국과 중국의 19세기 20세기초 왕조사의 몰락기에는 자유주의적 자유민권의 새 사상이 발생한다. 그렇다고 해서 이런 자유민권의 이념이 전적으로 서구수용 에 의한 것이라 단정해서는 안된다. 우리 동아시아 전통사상 풍토 속에도 통치 이데올로기 로서 중앙권력의 “유위有爲”에 대한 노장老莊적인 “무위자연”의 “무위無爲”의 반강권反强權적 민의 자유의 이상이 그 안티테제로서 잠재해 있었다. 요순성세의 유토피아 원형原型으로 항 상 되풀이된 “무위지치無爲之治”의 유토피아는 통치자측이 항상 경계의 대상으로 삼지 않을 수 없는 자유민권의 맹아로서 재야의 소외 독서인이나 민중의 마음 속에 깊이 묻혀서 특히 도가, 도교, 신선신앙 등의 형태로 민간의 민속신앙 속에서 면면이 그 명맥을 이어왔다.

동아시아 문명에서 “천하”는 중화문화권인데 그 질서의 이념적 기초는 유교이념인 “수신 修身 제가齊家 치국治國 평천하平天下”였다. 이 이념에는 계층적 사회존재론이 전제되어 있어

“국”은 있었으나 근대적 주권국가로서의 “국가”가 결락되어 있었다. 각 국가 나름의 주권 이 인정되는 국가평등의 열국경쟁 질서는 서세동점西勢東漸의 서구수용에 의한 것이다. 우리 전통사상에는 “국가”가 없었고 나라 안의 민족 성원간의 대등한 가로의 인간관계의 규범도 자랄 수 없는 상하주종의 세로관계가 사회규범의 기간을 이루었다.

통치자, 특히 우리의 조선시대 양반지배층의 규범은 “수기치인修己治人”이라 해서 군자다 운 교양을 쌓아서 백성을 다스리는 “치인”에서 “민”은 원리상 피치자被治者였다. 따라서

“민”의 복종의 의무는 많았으나 “민”의 권리인 “민권”의 개념은 아주 희박했다.

동아시아 “천하”의 통치철학은 “황권천수설皇權天授說”인데 권력의 유래와 대천자代天者로 황권을 부여하는 “천”이 절대통치권력을 정당화해 주는 권원權原인 점에서, 민에게 그 민권 이 하늘에서 부여된다는 “주권재민”적 천부 인권사상을 기대하기는 힘들다. 중앙권력이 아 무런 제약없이 그 왕조 내의 모든 영역에 침투하는 권력만능의 통치행위가 유가, 성리학, 법 가 등의 권력지상주의적 “유위有爲”였고 거기에 맹자에서 비롯된 왕도와 패도의 민본주의 정치이념에도 민의 권리나 민의 자치사상은 성립될 수 없었다. 다만 왕도는 패도에 비해 인 자한 전제의 “인덕정치”이다.

동아시아 문화전통에서 자유주의적 “민권”의 맹아나 반권력의 리버럴한 사상의 실마리를 찾는다면 노자老子의 “무위자연”과 요순성세의 “무위지치”의 유토피아가 재발견될 수 있다.

특히 노자 도덕경 10)의 무위자연 설에 나타난 “무위”의 정치는 그 반강권적 의미에서 자 유주의, 작은 정부, 자유민권, 무정부주의 등의 선구사상으로 후세에 재해석되기도 했다. 이

10) 노자, 도덕경 .

(13)

“무위”에서 서구의 야경국가나 20세기 정치철학에서 노직Nozik의 “최소국가minimal state”가 상기되고 있다.

유가의 “도”는 부자간의 상하주종과 군신간의 “층”의 질서규범으로 통치권력의 합법화 의 근거였다. 이와 대조적으로 노자의 “도”는 공자의 “정명正名”주의의 반정립이었다. 노자 의 “도”나 “명”은 절대적인 것이 아니었다. 노자의 이상주의적 정치도 “태상부지 유지太上不 知有之11)라 하여 요순과 같은 무위의 정치였다. 가장 훌륭한 통치는 백성이 그 이름이나 그 통치의 있음을 모르는 것이었고, “백성은 모두 나 스스로 그러하다고 말한다(百姓無謂我自然)”는 명제에서 나타나듯 유교적 권력의 “유위”에 대한 반권력적 “민”의 “자연”을 주장하며, 이

“무위”의 정치가 오늘의 시민적 자유의 선구라 할 것이다.

1998년 아시아 위크 지가 중국역사 5천년에 최고 명언 50선을 고른 것 중 노자의 명언으 로 “큰 나라 다스리기를 마치 작은 생선 굽듯이 하라(治大國若烹小鮮)”를 도덕경 에서 찾 아낸 것은 자유주의적 “작은 정부”론의 해석학이라 하겠다.

중국이나 한국의 재야․민중 속에는 언제부터인가 반권력적인 민의자치의 이상향으로 “격 양가”, 태평곡 등의 “무위”의 자유이념이 끈질기게 왕조저변에 살아 숨쉬어 왔다. 최제우의 동학 가사에도 그 유토피아로 격양가 가 태평세계의 이상향으로 떠오르고 있다.

“해뜨면 일터에 나가고 해지면 쉰다. 우물을 파서 물을 마시고 밭을 갈아 먹으니 제왕의 권력(權 力)인들 어찌 나에게 미치리오.

(日出而作, 日入而息, 鑿井而飮, 耕田而食, 帝力干我何有哉)”

11) 도덕경 , 제17.

(14)

최수운의 동학사상에는 “억조창생 많은 백성, 태평곡, 격양가를 불구에 불 것이니”(몽중노 소문답가), “춘삼월 호시절에 태평가 불러보세”(안심가) 등에서 “격양가”, “태평가”가 나온다.

이처럼 우리 전통사상 속에서는 “격양가” 원형이 되풀이되어 1860년 동학에서도 “무위이 화無爲而化”의 반강권적 민의 자치이상향으로 정착되었다. 우리 민족전통의 사상 속에서 노 자나 격양가 의 “무위”의 이상향은 근대 자유민권의 맹아로 볼 수 있고, 그 “최소국가”적 자유주의의 전통사상, 특히 조선왕조 후의 유토피아는 공산주의적 일당독재 강권체제나 시 민사회를 질식시킨 마르크스-레닌주의적 사회주의 평등사회 지향적이 아니라 중앙권력의 제약과 상공업의 번영된 시장사회를 지향했다고 해석된다. 그 점에서 실학과 동학의 민족사 상은 자유주의적 자유민권의 유토피아를 지향했고 자유기업․자유시장의 근대시민사회상이 우리 전통사상 속에서 자생적으로 싹터온 것을 찾아볼 수 있다. 이런 자유주의의 선구적 사 상의 명맥은 주로 조선왕조 후기의 해체기에 선각적 실학자들의 사회․경제개혁안으로 제시 되었고, 왕조저변의 민의 새 사상의 주류였던 동학이 지향한 후천개학의 대안도 “4민”의 신 분질서가 붕괴된 만민평등의 새 사회상이었다. 이 개벽사상을 자유민권의 자유주의 지향적 인 것으로 재발견하여 그 사상사적 성격을 자리매김할 수 있을 것이다.

Ⅳ. 도가, 도교의 수용과 정여립의 주자학 비판

우리 민족의 전통사상 속에서 자유주의적 뿌리를 찾으려면 우선 도가道家․도교道敎의 수 용에 주목하게 된다.12) 노장사상과 특히 도덕경 은 삼국시대에 이미 우리 땅에 전래되었으 나 그것은 주로 군왕의 통치이념의 일부로 채용되었을 뿐 권력견제의 “무위”사상의 흔적은 찾아볼 수 없다. 우리의 민족사상 전통은 “유․불․도(선)”의 3교의 종합을 지향했으나 고려 조에는 불교, 조선왕조에서는 유교가 지배적이었고, 도교는 풍수지리설 속의 왕조의 “도참 ”, 정치지리사상으로 왕권합리화에 이바지했다. 고려 때의 명심보감 속에 수용된 인격수 양, 양생훈養生訓이나 신선신앙 등으로 도교적 단편이 우리 사상 속에 구현되었다.

중화권 형성기에 고려왕조 통치층이 주도한 사대주의에 반발한 묘청의 “8성”신앙은 도 교적인 명산신앙과 결부되어 있다. 8성당에서는 국토 내의 백두산 등 8대 명산이 민족신의 자리를 차지했다. 기성권력의 유교적 이념에 반항한 묘청은 도교가 가미된 토착민속신앙에 서 반역의 명분을 만들어냈다. 조선조 초기까지도 “소격서昭格署”를 두었으나 이 역시 공식 적 통치이념은 못되고 다만 액운이나 재난을 면하려는 일종의 왕권 비호적인 “호국신앙”일 뿐 왕권의 권력제약에는 이르지 못했다.

한국에 수용된 도가사상은 재야의 독서인들이 즐겨 현실도피적으로 산수자연에 귀의하거 나 권력투쟁에 염증을 느껴 청담을 즐기는 “예외자”적인 선비들의 이른바 “소요유”에 속했 다고 할 수 있다. 조선시대 “죽림7현”으로 자처한 선비들도 노장에 심취하여 “청담”의 학통 을 이루어 현실도피적 은둔거사의 길을 걸었다. 이는 소극적 “무위”였다고 하겠다.

17세기에 박세당朴世堂이 노자도덕경 의 주석을 낸 것이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도덕경 연 구이지만 유교적 교조의 틀 안에서 노자를 유교적으로 해석한 것에 불과했다.13) 이처럼 도 가, 도교는 유교의 정통에서 이단시되었고 세도에서 소외된 선비들의 현실도피와 민간의

“신선”사상의 형태로 그 명맥을 이었다. 도가, 도교의 사상이나 종교가 한국에 영향을 준 것

12) 차주리, 도가․도교 연구 (서울대학교 출판부, 1978) 참조

13) 조문호, 「박세당의 <노자> 이해 2」, 도가사상과 한국문화 (국학자료원) 참조

(15)

은 정통학문에서 일탈된 “단학丹學”의 도맥과 동의보감 으로 유명한 허준으로 대표되는

“동의”의 의약분야에서였다. 유교, 성리학이 주리설主理說에 기초한 두뇌의 철학이었다면 도 교는 신체의 양생․의료 등 “몸의 철학”이었다. 특히 단학의 도맥에서 장생불로의 양생술은

“기인” 김시습의 수양론에서 볼 수 있듯이 신선이 될 수 있는 “양성복기養性服氣”의 수련을 통해 체득되는 장생술의 몸철학이었다.

우리 민족의 전통사상의 흐름에서 비주류인 도가, 도교, 그리고 신선신앙, 양생술, 동의 , 청담 등은 권력지배의 “유위”에 대한 “무위자연”의 재야의 반권력사상이었고 유교적 “치 인治人”의 통치권력 만능의 세상에서도 권세의 그물에서 해방된 “무위”의 공간을 확보하려 는 소극적 반권력의 이단의 흐름이었음을 오늘에 재발견, 재평가해 볼 만하다.

조선시대 선조때 붕당朋黨의 발생도 그 부정적 평가와 아울러 정치다원주의의 맹아로 그 긍정적 측면에서 재평가될 수 있다. 왕조체제하에 유일한 중앙권력이 붕당의 정치과정을 통 해 집권경쟁을 하는 복수정당제적 싹과 권력분할의 관점에서 다시 평가될 수 있는 새로운 해석은 비록 성리학적 명분론의 차원의 예론논쟁에 머물렀다고 하나 동인과 서인 등의 붕당 이 정책대립과 경쟁으로 발전되었다면 영국의 휘그당과 토리당처럼 근대적 정당정치의 맹아 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이 붕당의 와중에서 1589년 정여립鄭汝立의 모반인 “기축옥사”는 다당제하의 야당의 싹으 로 주목될 수도 있다. 이때 동인의 주류가 “청담”에 흘렀다고 함은 바로 중앙권력에 대해 비판적인 재야의 선비들이었다는 뜻이 된다. 또한 이들 중 “한사寒士”가 많았다는 것은 사대 부가 못된 권력소외의 천지에서 지배이념인 성리학에 대한 반대발상도 거기서 나올 수 있었 을 것이다. 다시 말해서 유일통치이념에 대한 반대의견을 제기하는 사상의 자유도 이런 시 도에서 그 싹을 찾을 수 있다.

단재 신채호는 20세기의 반유교적인 민족주의사관의 관점에서 고려조의 반역, 묘청과 아 울러 조선조때의 정여립의 난에 주목했다. 신채호는 정여립이 주자학朱子學적인 존왕주의에 비판을 가한 가이 돌비적 혁명사상가라 하여 다음과 같이 재평가했다.

“정여립이 ‘충신은 두 임금(君)을 섬기지 않으며 열녀(烈女)는 두 남군을 갈지 않는다’는 유교윤리 관을 일필로 말살하여 ‘인민에 해되는 임금은 직(殺)함도 가하고 행실 부족한 남군은 버려도 가하다’

하며…”14)

이렇듯 정여립이 “공구주자孔丘朱子”의 역사필법을 정면으로 반박했다고 신채호는 그를 민 약론의 선구자인 듯이 극찬했다.

신채호의 정여립 극찬은 우선 기축옥사의 정사기록에서 정여립을 반역으로 몰기 위해 그 역사기록이 과장되었을 수도 있고 그의 사상의 계승이 끊어진 점에서 볼 때 공정한 역사평 가라고 보기에는 많은 무리가 있다.

임진왜란 후 난세를 살았던 고달픈 민중 속에서는 각종 비결의 유언비어적 왕조권력 비판 이 싹텄는데 그 집약적 민간기록이 정감록 비결이다. 정감록 은 그 골격이 “이망정흥李亡 鄭興”의 이씨조선왕조 쇠망과 왕조교체의 말세관인데 거기서도 민의 자유권적 발상을 엿볼 수 있다. 이와 같은 조선왕조 쇠운설은 동학가사에까지 이어져 있다.

14) 신채호, 「조선사총론」, 단재 신채호 전집 상권, p.60.

(16)

Ⅴ. 실학의 유토피아는 상공업지향사회

조선시대 후기에 들어서서 성리학의 인성론․예론 등 공리공론을 탈피하여 주로 권도에서 소외된 재야의 선각적 선비독서인 가운데 부국민안의 “시무책時務策”적인 실학實學이 대두되 었다. 실학의 “실사구시”, “이용후생”의 시무책은 경제개혁적 정책에 주안점을 두어 서유럽 자연과학의 수용, 박지원朴趾源의 이른바 “유민익국裕民益國”의 농업․수공업․상업․무역 등 의 산업화 진흥으로 가히 그 사상운동에서 자유주의적 발상을 볼 수 있다.

이런 사회변혁의 구조적 전환기에는 기성질서에 비판을 가하는 유토피아적 미래상이 제시되 는데, 그 중 대표적인 것이 허균의 홍길동전 에 나오는 “율도국”과 연암 박지원의 “공도空道” 개척이다. 허균의 홍길동전 에는 산적 등의 도적떼가 창궐하던 왕조의 사회질서의 이완이 묘사되고 기성 왕조질서에 대한 대안으로 “율도국”의 유토피아가 제시되었음을 볼 수 있다.

이 율도국의 유토피아에서는 산에 도적이 없고 저자에서 물건을 주워가는 이가 없다는 표 현에서 민의 생업보장과 “요순시절의 덕화”, “격양가”의 태평세를 표방한 “위민爲民”정치의 실학적 이상향이 나왔다고 볼 수 있다. “율도국” 건설에 나타난 의적 홍길동의 개혁이념은 이미 양반지배의 변혁을 희구한 “호민豪民”혁명으로 주목된다. 양반신분이 아니면서 부자가 된 세력가들이 호민인데 이 호민은 부르주아 신흥시민 계급의 대두를 예감하게 해준다. 허 균의 “호민”론에서는 피치자, 민을 항민恒民, 원민怨民, 호민豪民으로 구분하는데, 특히 호민 은 기회가 오면 혁명을 하려는 개혁자 계층이었다. 연암의 양반전 의 부자도 “우리들이야 남부럽지 않은 부자이지만 늘 천하게만 산단 말이야”라고15) 탄식하는 데서 봉건적 신분차등 제의 해체기미를 느낄 수 있다. 여기서 양반신분을 돈으로 산다는 현상은 양반제 몰락의 뚜 렷한 조짐이다.

실학운동의 혁명성은 양반질서의 근간이던 사․농․공․상 “4민”의 계층적 신분제 를 허문 것이다. 연암의 양반전 에서는 “양반” 사대부의 지배층이 기왕에는 천정天定의 불 변원칙으로 규범화되었던 것을 알 수 있다. “무릇 하늘이 백성을 낳으실 제, 그 갈래를 넷으 로 나누었다. 그 네 갈래의 백성 중에서 가장 존귀한 이가 선비이고 이 선비를 불러 양반이 라 한다.”16)

연암의 실학사상에서 부국안민의 개혁안은 몰락양반 대신 신흥 지배계층으로 4민 중 사 이외의 농․공․상, 특히 상공업 계층이 주도하는 호민의 새 시대를 예감한 상공업사회 대 망을 담고 있다. 연암의 허생전 은 양반에 대한 해학적 비판과 아울러 기왕에 천시되던 상 업과 시장․상인에 대한 발상전환을 감행하고 있다. 그의 실학에서 “이용후생”의 “이용利用” 은 수공업과 “상통商通”을 하여 “민”의 “용”을 이롭게 한다는 정책으로 거기서는 상공업의 자유로움이 허용되고 진흥되어야 한다는 근대적 시민사회의 미래상이 제시되어 있다.

우선 연암의 허생전 에서 몰락양반 허생은 노동천시, 금전천시의 양반적 에토스를 파격 적으로 타파하고 호민 변씨한테서 장사밑천으로 만금을 차용하여 장사를 시작한다. 당시 상 업의 요지인 안성에서 잔치나 제사용 과일을 모두 매점매석하여 10배의 이득을 얻고 다시 제주도로 가서 말총을 몽땅 매점하여 망건 값을 10배로 올려놓고 매석으로 폭리를 취한 다.17) 이 소설에서 허생이 자기와 같은 매점매석의 폭리행위를 하는 자가 많이 생기면 나라 시장질서를 망친다는 것도 지적하고 있다. 연암은 허생의 대담한 상행위를 과시하여 시장적

15) 박지원, 양반전 . 16) 박지원, 양반전 .

17) 박지원, 허생전 , 이무성 역 참조

(17)

사고를 가진 새로운 사회계층의 대두를 예시했다. 우리 근대사회의 구조전환에서 일제 식민 지사관의 가설과 같이 일제 침투에 의해 한국이 자본주의 시장사회로 외발적으로 전환된 것 이 아니라 그 자생적 맹아를 허생전 등 실학운동에서 확인할 수 있다. 왕조쇠망기의 백성 들이 홍길동전 에 나타난 도둑떼였고 연암의 허생전 속에서도 처자가산 없는 도둑떼가

“민”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미 양반사회의 경제체제는 몰락양반을 비롯해 양민을 도 둑떼로 만든 단계, 현대적으로 표현하자면 “봉건제 해체기 대량 실업자”의 만연이었고, 이에 따른 직업확대창출의 해결안이 실학자들의 주된 시무책이었다. 그 해결은 상공업의 진흥으 로 이 도둑떼가 된 백성들에게 세속적 직업을 마련해주며 그런 새 직장을 만들어내는 신흥 사회계층인 기업가起業家의 생성으로 4민질서를 와해시키는 과정에 들어섰다고 할 수 있다.

4민질서가 해체된 다음의 주역은 신흥 상공업 발흥에서 생성되는 시민이다.

허생전 의 “빈섬(空島)” 개척의 유토피아도 도둑떼가 된 양민들에게 생업을 마련해두는 실업대책의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그 “빈섬” 개척에서는 아직 농본주의에 머물러 그 무인 도 농업개간에서 7년 먹을 식량을 비축하고 나머지를 수출(일본 나가사키로)하는 해외무역 의 본보기는 명백히 상업과 무역을 통한 자본주의적 부강의 길을 선구하고 있다고 하겠다.

허생전 의 주제인 “유민익국”의 부강국 건설의 비전은 먼저 민생을 부하게 한 연후에 문 자文字를 만들고 의관을 새롭게 제정하겠다는 경제개발 우선의 “선부론先富論”이 우리의 눈 을 끄는데, 이는 성리학적 명분론보다 상공업의 산업을 앞세워야 한다는 경제개혁의 발상의 전환 철학이 전제되어 있다. 연암이 이 소설에서 전개하는, 공도 유토피아의 보호를 위해

“글을 아는 자들”을 떼내서 “이 섬의 화근을 없애야 한다”는 “양반추방론”은 그가 얼마나 조선왕조의 사대부 지배에 대한 비판이 날카로웠는가를 실감하게 해주는 대목이다. 연암은 허생의 상행위와 선부론을 통해 근대자유기업․시장제의 신흥지도층인 기업가상의 모형을 그렸다고 평가할 수 있다.

실학운동을 통해 우리 사회에는 경서經書적 사고에서 시장적 사고로의 정책 패러다임의 전환이 준비되고 있었다.

연암의 경제적 자유주의 지향에 비해보면 정다산의 실학은 정치․행정․법 제면의 “수기 치인”의 “통치” 개념에서 목민관과 민의 주객전환으로 근대적 위민정치사상, 주로 통치 권 원權原문제에서 기왕의 성리학적인 “왕권천수설王權天授說”을 버리고 “왕권민천설王權民薦說” 로 바꾼 데서 사상사적 의의가 크다. 다산은 “원목”, “탕론”의 정치론에서 통치권력의 유래 를 밑으로부터의 민의 단계적 천거의 “민천民薦”으로 재구성했다.18) 다산은 통치권원이 통치 자에게 하늘에서 부여한다는 기왕의 “천애天愛”의 한나라 때의 존왕주의에는 “위민”의 근거 가 희박했고 더욱이 다산은 세습왕권을 합리화한 성리학적 “천애”론의 단점을 개변시키려 시도했다. 다시 말해서 다산의 “민천”적 권원론은 밑에서 민으로부터의 단계적 천거를 받아 목민牧民의 최고의 통치자인 황권, 왕권이 발생한다는 점에서 “위민정치”의 중앙(목민관)권 력의 절대화의 견제의도가 뚜렷이 드러나 있는 자유주의적 발상을 엿볼 수 있다.19)

원목 에서 다산이 목민관의 통치권 “권원”의 설명에서 그 최초의 “자연상태”에 대해 “고 지초古之初”라 했다.20) 홉스의 국가계약설은 그 이론구성의 원초상태가 “자연상태”인데 이는

18) 정약용 저, 박석무․정해염 편역, 다산논설선집 참조

19) 안병도, “다산의 후재론(侯載論)”. 이 논문에서는 “원목(原牧)”, “탕론(湯論)” 이외의 “일주서극은편변(逸周書克殷篇辨)”의 제후가 천자로 추대한다는 논지에도 주목하고 있다. 한국실학연구 (창간호, 1999) 수록, pp.274-304.

20) 정다산(丁茶山)의 원목(原牧) 에는 아직 목민관(牧民官)이 없고 백성이 있었던 “고지초(古之初)”를 재정치론의 원초상 태로 전제하고 있다.

(18)

계약에 의한 국가권력 발생 이전에는 다만 개인마다의 자연권과 그들간의 “만인 대 만인의 싸움”상태였다. 적어도 홉스는 국가계약 이전에 자기보존의 개인권들이 전쟁상태에 있었음 을 전제하는 점에서 개인주의적 자연권의 자각이 뚜렷하다. 이에 비해보면 다산의 “고지초”

의 자연상태는 개인권의 정체가 뚜렷하지 않고 다만 목민관을 공정하게 천거할 수 있는

“민”의 양식이 전제되어 있다.

오히려 다산의 원목 , 탕론 의 “자연상태”는 루소의 불평등 발생이전의 “자연”에 가깝고 로크적이라 하겠다.21) 그러나 로크는 소유권의 발생에 대해 원초상태는 신의 피조물로서 무 주물인데 어떤 대상에 자기노동을 혼입하면 사유재산의 “전유專有”가 생긴다고 했다. 다산의

“고지초”는 소유면에서 무주물이 아니라 왕토사상과 같은 대천자代天者 황제, 군왕의 소유권 만이 인정된 가정에 서 있어 자유주의의 소유권 개념은 희박했다고 보겠다. 따라서 다산의 위민정치론에서 목민관의 권력이 민의 천거에서 유래한다고 했으나 자유민권의 의식도 아직 은 뚜렷치 않은 점에서 정조正祖와 같은 현군의 “인자한 왕도”정치를 이상화해서 합리화하 고 군왕과 민 사이에 있는 부패한 양반층의 배제로 오히려 절대왕권의 강화를 꾀하는 데 그 본뜻이 있었다는 설도 있다.

그러나 원목 에서 고지초古之初에 민이 우선 이정里正을 추대하고 다시 다수의 민이 당정 黨正을 추대하고 다수당들의 민이 주장州長을 추대한 다음 수주數州의 장이 국군國君을 추대 하고 군주들이 다시 방백을 추대하고 사방의 백들이 황왕皇王을 추대하니 황왕의 통치권이 민에서 유래했다는 일종의 가설사假設史적 설명이 된다. 이 권원설명에서 목민관의 권력은 주로 “위민爲民”에 있게 된다. 무엇보다도 최고통치권의 권원설명에서는 권력제약의 의미가 있어 자유주의의 선구가 될 수도 있다.

다산의 “탕론湯論”은 은나라의 시조인 탕왕의 방벌을 바탕으로 이론화한 왕권교체의 혁명 론이다. 한나라 이후 원목 에 제시된 민의 추대와는 반대되는 “상이하上而下”의 왕권천수설 이 성립되었는데 탕론 에서는 이를 뒤집어 다시 “하이상下而上”의 목민관 민추대설에 기초 하여 폭정통치자를 “방벌”할 수 있는 논거가 되어 인민저항권의 연원을 위민정치론으로 시 사한 것이 된다.

다산의 정치개혁 사상은 성리학적인 세습왕권과 목민관, 관료의 권력의 유래를 민 추대의 이른바 원시적 “소비에트”형에서 구성한 점에서 민의 권리신장에 기여하는 것이 된다. 그러 나 정전제井田制 등의 다산의 공유제에만 역점을 두어 1930년대 이래 좌파 사회경제학 연구 와 전후의 북한 관학계에서 다산의 실학을 “공상적 사회주의 사상”으로 규정했으나, 1960년 이후 남북한의 다산학 연구가 깊어지면서 다산 사회주의설은 자취를 감추었다. 오히려 북한 의 다산학 연구는 다산의 실학의 역사적 성격에 대해 봉건사회의 태내에서 자본주의적 요소 가 발생했다22)고 자가수정을 했다. 결국 다산 실학의 개혁안은 근대적 민권과 자유주의의 새 질서를 지향했다는 기본틀에서 재탐구되어야 할 것이다. 특히 다산의 흠흠신서 의 판례 연구적 법사상은 자유주의의 “법치”의 선구적 업적으로 그 사상사적 의미를 재조명해 볼 수 도 있을 것이다.

다산의 실학은 왕권의 권원이 민에서 유래한다는 “주권재민”의 “위민”설, 관권의 횡포에 분노하고 관권의 무법․불법․전횡을 “법치”로 다스리려고 노력한 점에서 자유주의적 개혁 의 선구사상가였다. 목민심서 에 나타난 그 민을 위하는 “위민” 우선의 목민의 바른 길이

21) 로크는 “자연상태”에는 일정한 불편함(inconvenience)이 있어 이를 배제하기 위해 시민정부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 불 편함은 자연법의 해석의 의견차이 등이다.

22) 정성철, 「실학과 철학사상과 사회정치적 견해」, (평양 사회과학 출판사, 1974) 참조

(19)

중앙권력의 제약인 점에서도 자유주의적이다.

Ⅵ. 동학의 민권적 자각과 개화기 자강주의

조선왕조 철종조의 “민난의 시대”에 왕권 쇠락과 민권 각성의 예명이 왔다. 1860년 수운 최제우의 동학각도와 그 동학운동은 존왕주의적 통치 이데올로기의 유일사상하에서 민속신 앙과 습합된 형태의 “민”의 민권적 자각이 움튼 것이라는 점에서 근대 시민사상의 발아로 볼 수 있다.

고려․조선의 왕조시대에는 통치이념이 국정 전반과 민의 내면까지 일원적으로 지배하였 고, 민간의 사상은 다만 민속신앙의 형태로 무속이나 귀신신앙 등 이른바 “잡신” 신앙에 머 물렀다. 서유럽에서도 대개 근대적 시민의식은 독일의 도이치미스틱의 신비주의, 프로테스탄 트, 퓨리턴 등의 종교개혁의 모습으로 나타났다. 우리나라 근대사상에서는 “사문난적”의 일 사불란한 유일사상체제 때문에 관학인 성리학 이외에 그 어떤 다원적인 사상의 개화도 기대 할 수 없었다. 그런 사상풍토 속에서도 성리학에 대한 “종교개혁”에 해당하는 재야 “민의 학”의 대표가 위로는 실학이고 아래로는 “동학”이었다.

우선 동학은 그 교조 최수운의 “시천주” 사상에서 통치권원인 “천”, “천주”의 보편자를 만 민에 내재화하는 세계관의 전환이 감행된다. 그리고 성리학에서 가장 존귀한 인격인 “군자”

의 인격은 임금과 양반에 의해 독점되어 왔는데, 최수운의 “시천주” 신앙은 상하귀천의 차 등 없이 누구나 “내 몸 안에 한울을 모신” 군자적 인격이 되는 길을 열었다. 왕조시대에 천 명, 천도, 천리는 천자, 군왕, 사대부, 양반층에만 임하는 “천애”의 혜택이었고 일반 상민과 천민은 “소인”에 불과했다. “수기치인修己治人”의 성리학 교조에서는 오직 군주와 양반층만 이 독서인 교양으로 군자가 됨으로써 통권자의 권위를 소유하게 된다. 그런데 동학은 이러 한 통치교조를 파괴하고 만민평등의 “시천주” 신앙으로 만민이 존귀한 인격이 되는 길을 엶 으로써 근대적 인권과 시민권의 선각이 되었다. 이로써 조선왕조의 “4민” 신분질서는 와해 된다.23)

더욱이 동학의 기본이념은 “보국안민輔國安民”인데, 일반 민중이 경국제세의 경세적 치자 로 감히 자처하는 발상 자체가 가히 혁명적이다. 이렇게 “보국안민”의 주체가 민이 될 때 통치 자와 피치자, 관과 민의 주종관계가 전환되는 “민의 자기통치”가 싹트게 된다. 이 “민 자치”의 동 학사상이 자유민권의 싹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제2대 교조 해월 최시형에 와서는 스승의 “시천주” 신앙을 더욱 세속화․보편화시켜 “사 물마다 천 아닌 것이 없고 일마다 천 아닌 것이 없다(物物天 事物天)”와 같은 범천론汎天論 이 된다. 이런 동학의 범천론은 농업 “공장이”(수공업) 등의 노동천시나 장사 등의 상업천시 가 끝나고 직업의 귀천이 철폐됨을 의미한다. 해월에게는 며느리의 베짜는 일이나 가사노동, 새끼꼬는 일, 아녀자의 부엌일 등 세속적 일상사가 모두 하늘의 일이 되어 상공업활동이 내 안에 한울을 배양하는 일(養天主)로 신성화될 수 있는 서구 칼빈주의적 천직관을 연상하게 한다.

이제 왕조질서의 기본규범이 되어온 부자간, 군신간의 주종적 세로관계가 무너지면서, 인 간들간의 대등한 대인관계가 서로를 한울로 모셔야 하는 “사인여천事人如天”의 시민적 가로 (橫的)의 윤리규범의 새 발상으로 나타난다. 최수운도 후천개벽의 새 세상에 대해 “백성이

23) 신일철, 동학사상의 이해 (사회비평사)에서 상론

(20)

모두 요순(民是爲堯舜)”24)이라는 무위無爲의 유토피아를 시사했다. 특히 최수운의 가사, “몽 중노소문답가”는 정감록 비결의 이정문답李鄭問答 형식을 연상시키고, 그 가사 끝에 왕조 쇠망 후의 새 세상을 “격양가”, “태평곡”의 “무위이화無爲而化”로 묘사하여 반강권사상의 취지가 잘 드러나 있다.

최시형의 동학교문 조직시기에 접․포 등 교문조직이 생겼는데, 이는 기왕의 왕조질 서에서는 허용될 수 없는 민간조직이었다. 1890년 교조신원의 동학 공인화 운동과 광화문전 의 집단상소 등을 보고 선무사 어윤중魚允中은 이 동학집회를 “민회民會”와 같다고 조정에 보고했다. 비폭력적 동학도들의 집단적 시위는 산발적 농민난의 단계를 넘어선 근대적 자유 민권의 시위와 근대사회 형성의 단초였다고 볼 수 있다.

동학농민혁명에서는 “제폭구민除暴救民”의 구호를 내걸고 왕권하의 탐관오리의 횡포에 반 항을 표시했고 특히 전주화약全州和約 후의 “동학당집강소”의 설치는 민자치적인 치안행정의 일시적 출현이었으나 그 평가에는 더 많은 연구가 필요할 것이다.

이미 동학농민혁명 10년 전의 개화당사건에서도 그 정강 14조에 “인민평등권”이 명시되었 고 이 개화운동이 근대적 자유민권의 공화제국가로 발전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었다. 독립 협회와 만민공동회운동은 자유민권 지향의 개화독립운동이었다.

1896년의 독립협회는 그 “독립”의 기본목표가 중화권의 사대事大에서의 독립이요, 입헌군 주제를 지향한 점에서 황제권의 제한을 은연중에 의도했다고 볼 수 있다. 이 협회활동에서 만민공동회와 같은 각계각층이 모인 군중집회는 자유민권운동으로 발전할 수 있는 예비단계 에 위치한다고 볼 수 있다. 절대왕권에 대한 의회의 강화가 자유주의운동이다. 이러한 개화 기 근대적 단체결사와 집회는 그 “헌의6조憲義六條”에서와 같은 건의문에 명시적으로 자유민 권사상이나 공화제 표현은 전혀 보이지 않으나, 외세배척의 독립이라는 국가정책을 처음으 로 관민합동으로 추진한 것은 이미 우리 사회가 민권신장의 초기단계에 도달한 조짐이기도 하다.

독립협회에서 싹텄던 개화운동은 1906년의 대한자강회, 1907년의 신민회운동에서 더욱 뚜 렷해진 공화제 지향으로 진일보했다. 20세기초 우리 민족의 개화사상의 주류는 중국의 변법 자강운동의 영향을 받아 부국강병의 근대국가 형성을 지향한 사회진화론적 자강自强주의였 다. 장지연, 박은식, 신채호 등 자강론자들은 주로 중화권의 사대주의를 탈피하고 새로운 국 제세계가 우승열패․약육강식의 천연론天演論적인 열국경쟁 상태라는 진화론적 세계관을 가 지게 되었다. 장지연의 자강술은 식산殖産과 교육으로 근대적 “국가”를 형성하고 상공업의 진흥으로 부국을 만들자는 것이다. 국가애의 애국계몽 교육으로 애국심을 계몽해야 한다는 신채호의 민족주의 국사관은 근대 민족주의의 국권론적인 “국가” 관념의 역사적 뒷받침을 했다.

그러나 장지연, 신채호 등의 자강주의에서는 국제적 열국경쟁에서 패퇴하거나 쇠망하지 않기 위한 자강의 기본단위가 “국가”였다. 왕조사가 끝난 개화기 국제질서에서 왕조시대의 왕권신수설은 이미 소멸했으므로 근대적 “국가”를 만들기 위해서는 “4민”의 신분차등을 극 복한 “국민”의 형성이 요청된다. 그 “국민” 형성의 “자강술”이라는 방법은 “단체결합”이었다.

“단체결합 연후에 민족가보”라는 장지연의 논설25)은 민족보존을 위해서는 “단체결합”으로 근대적 국가를 만들어내야 한다는 국가형성론이었다. 자강주의의 국가형성론은 개인의 자연 권을 전제로 한 국가계약설과 달리 주로 국가관념의 애국심 계몽으로 국가주권만 강조하고

24) 동경대전 “논학문”.

25) 장지연, “團體結合然後民族可保”, 「대한자강회보」 제5호, p.7.

(21)

개인본위의 자유민권은 고려되지 않았다. 아직 “민권”이 뒷전에 밀린 “국권”론 단계였다.

우리 한국의 자강주의에 가장 큰 영향을 준 양계초의 음빙실문집 과 그 우리말 번역인 음빙실자유서 에서 “단체결합”에 의한 국가형성론이 나온다. 개인의 민권은 그 개인적 자 유가 모래알과 같이 분열되는 자유방종에 흐르기 때문에, 견고한 국가 만들기를 위해서는 이런 자유민권설을 극력 경계해야 했다. 양계초는 루소의 “민약론”의 사회계약설을 거부하고 블 룬츨리J. K. Bluntschli26)의 유기체적 국가론을 채택했다. 양계초가 블룬츨리의 유기체적 통일 로서의 국가라는 국가유기체설을 선호한 것은 아직 그에게는 시민사회의 자유민권에 대해 이를 분산성으로밖에 파악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블룬츨리는 유기체적 통일로서의 “국가”

와 분열과 분산성으로서의 “사회”의 2분법에서 시민사회에 대해 헤겔 이래의 원자적 욕망의 체계로서의 시민사회의 결여성 이론 위에 서 있다고 볼 수 있다.27)

장지연도 국가의 단체결합을 위해서는 사리私利를 버리고 “공공적 관념公共的 觀念”만을 견지하여 국가아國家我만을 가지기를 강조하고 개아個我나 개인적 자유는 극력 배척했다.

1907년의 신민회운동에서 “신민”도 양계초의 신민설의 영향으로 이해할 때 그 “신민”도 아직 자유민권의 시민은 아니고 국가의 공속감을 가진 입헌군주제하의 신민이거나 민족주의 적 민족주권을 앞세운 새 국민에 머문다고 하겠다. 그러나 미국견문을 하고 돌아온 안창호 가 주동의 일익을 감당했다는 점에서 신민회 취지서 속에 나온 “자유문명국”으로서의 신국 상은 미국을 모델로 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신민회의 목적 규정에서 “오직 신정신을 환성하야 신단체를 조직한 후에 신국을 건설할 뿐이다”28)라는 명제는 양계초의 신민설의 국 가유기체론의 논리를 따르고 있다.

한국 개신교의 선교활동과 미션스쿨도, 특히 미국의 장로교와 감리교계의 선교구역이었던 이북지방에 “천부인권설”의 영향과 프로테스탄트적 에토스가 개화기 이래의 상인층에서 산 견된다는 점에서, 서구적 자유주의가 한국에 수용되는 통로의 하나로서 이를 주제로 한 연 구도 시도해 볼 수 있겠다.

3.1독립선언의 선언주체는 황제도 양반층도 아닌 “민족대표”로 명시된 3대 종교계의 대표 들이었고 이 선언에서의 주체는 조선의 “자주민아의 고유한 자유권”이라 했다. 그리고 3.1운 동의 “독립”이 왕정복고의 복벽이 아닌 점에서 “제국에서 민국에의” 전환이 수행된 것이라 하겠다. 따라서 상해임시정부의 헌법에서 비로소 주권재민의 공화제의 새로운 “대한”이 탄 생되고 그 헌법 속에 자유민권사상이 명문화된 것이다.

일제하 광복운동기의 근대 자유주의의 자유민권사상은 역시 도산 안창호의 흥사단운동과 그의 “자아혁신”이라는 미국모델의 개인주의적 자유민권사상이 대표적이다. 상해임시정부운 동 초기에 민족주의적 국권론과 좌파적 반자유주의 노선이 경합하는 가운데 안창호는 국민 형성의 기초로서 “자아혁신”의 자유주의를 강력히 내세웠다.

1920년 1월 신년축하회에서 안창호는 독립운동의 방략으로 “6개 사업”의 연설을 통해 상 해임시정부의 기본이념이 자유민주주의임을 분명히 했다.

“오늘날 우리나라에는 황제가 없나요. 있소. 대한나라에는 과거에는 황제가 1인밖에 없었지만 금 일에는 2천만 국민이 다 황제요, 제국이 앉은 자리는 다 옥좌(玉座)이며, 머리에 쓴 것은 다 면류관 이외이다. 황제란 무엇이나 주권자의 이름이니 과거의 주권자는 유일이었으나 지금은 제군이외다.

26) 梁啓超, 「政治學大家 伯倫知理之學設」, 新民叢報 , 38, 39合輯.

27) 양계초도 밀의 자유론의 영향을 받아 자유는 노예의 반대이고 “4민평등”이라고 언급했다.

28) 大韓新民會趣旨書及章程 .

참조

Outline

관련 문서

◦통일시대를 맞아 남과 북을 하나로 잇는 통일 열차를 구상하여 고구려, 고려의 역사 본산지 북한 문화유산 관광지를 개발하여 보는 활동을 통하여 통일의 문제를

- 상황제시에서 드론의 필요성을 느낀 다음 드론의 능숙한 조작능력을 갖춘 전문가가 양성 되어야 함을 느끼도록 한다.. - 모둠이 함께 논의하기 전에 자신의

◦미래 교육은 분과 영역이 무너지고 자신의 삶에 교육의 내용을 적용하려면 학 습 내용을 내면화해야하기 때문에 배움 과정에서 교과의 벽을 무너트리고 생활 과

이 프로그램을 통해 학생들은 자석에 대해 알아보기 위한 실험을 스스로 설계하고 결 과에 대한 반성과 토의 활동을 통해 과학적 지식과 함께 다양한 창의적 요소를 신장시 킬

◦교사연구회 참여를 통한 STEAM 프로그램 개발·적용 관련 좋았던 점과 어려웠던 점 - 코로나19로 인해 대면수업 및 체험을 할 수 없어 프로그램 운영에 어려움을 많음..

또한, 에너지 지도를 통해 지속가능 발전의 필요성을 느끼고, 실천 방안에 대해 스스로 탐색 하고자 한다.. 이전 차시에서 제작한 에너지 지도를 바탕으로

이 디자인으 로 IDEO는 자전거 제조사 스페셜라이즈드(Specialized)에서 주최한 디자인 공모전에서 대상을 받았다... 긍정적인

디자인 측면에서 보면 미술중점반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 학생들의 요구와 의미 있는 변화 측면에서 더욱 긍정적일 것이나 4차 산업혁명시대를 살 아갈 많은 학생들에게 의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