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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화의 월북 후 활동과 숙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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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논문

임화의 월북 후 활동과 숙청

오성호 순천대학교 교수

Ⅰ.머리말

Ⅱ. 임화의 월북 후 작품에 대하여

Ⅲ. 임화의 작품에 대한 비판과 숙청의 논리

Ⅳ. 마무리

Ⅰ. 머리말

식민지 시기의 대표적인 프로시인이자 평론가였던 임화가 6.25가 끝난 직후 숙청되었다는 사실은 이미 널리 알려져 있다. 그는 해방 직후부터 줄곧 미국의 간첩으로 활동했다는 혐의로 기소되어 유죄가 확정되었고 결 국 1953년 8월 6일 사형을 선고받았다1). 이후 그의 형이 언제 어떻게 집행되

1) 김윤식 교수가 작성한 임화 연보에 따르면, 임화의 재판은 인민공화국 최고재판 소 군사재판부에서 담당했고 재판장은 소장 김익선 판사, 판사 김룡숙, 박경호였 다. 김윤식, 임화연구 , 문학사상사, 1989, 67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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었는지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자신이 꿈꾸던 혁명에 의해 배신당한 그의 비극적인 종말은 두고두고 아쉬움을 남긴다. 하지만 임화의 비극은 단순히 임화 개인만의 것은 아니다. 그것은 국가의 이름으로 자행된 인간 말살행위 라는 점에서, 문인의 작품 행위에 대한 정치적 단죄라는 점에서, 그리고 정치의 논리가 문학의 논리와 진실을 압도함으로써 빚어진 결과였다는 점 에서 한국문학사와 근대사의 가장 비극적인 장면에 해당된다고 할 수 있다.

임화에 대한 재판기록에 따르면 임화는 간첩이라는 불명예스러운 혐의를 순순히 인정하고 자신의 간첩 행위에 대해 자백한 것으로 되어 있다. 일찍이 해방 직후부터 언더우드에게 포섭되어 당과 관련된 기밀을 넘겨주고 반당 행위를 배후에서 조종했을 뿐 아니라 무장폭동을 기도하는 등 간첩행위를 했다는 것이다. 이런 재판 기록의 내용을 액면 그대로 믿는 사람은 물론 그다지 많지 않다2). 오히려 대부분의 연구자는 임화의 숙청이 박헌영을 중심으로 한 남로당 계열의 정치적 패배로 인한 결과라고 이해하고 있는 듯하다. 이런 심증은, 6.25가 진행 중이던 1952년 무렵부터 북한에서는 해방 직후 형성되었던 권력분점 상태3)를 극복하고 김일성의 권력을 강화하려는 움직임이 분명하게 나타났다는 점에서 충분히 근거가 있다.

6.25가 진행 중이던 상황에서 시작된 권력투쟁은, 3차부터 5차까지 세 차례의 당 중앙위원회 전원회의를 거치면서 차례로 연안계와 소련계, 그리 고 남로계의 몰락을 초래했다4). 남로당 계열에 대한 비판이 시작된 것은,

2) 물론 개중에는 이 간첩설을 그대로 수용한 사람도 없지는 않다. 가령 일본 작가인 마쯔모도 세이쪼가 그 경우에 해당된다. 그는 이 간첩설에 기초하여 임화를 주인 공으로 한 소설을 썼다. 마쯔모토 세이쪼, 김병걸 옮김, 북의 시인 임화 , 미래사, 1987.

3) 이종석은 남로계열, 연안파, 소련계 한인이 권력을 분점한 상태를 ‘49년 6월 질서’

로 명명했다. 이종석, 조선로동당연구 , 역사비평사, 1995, 204-2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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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정의 철직을 가져온 3차 전원회의부터였지만, 남로당 계열의 몰락을 결정 적으로 확정지은 것은 당의 조직적, 사상적 강화를 의제로 내건 5차 전원회 의(1952.12)에서였다5). 이 5차 전원회의가 끝난 직후 박헌영과 이승엽이 간첩활동 혐의로 기소되어 유죄판결을 받았고 임화, 김남천, 이태준, 이원 조, 박찬모, 오장환, 설정식 등도 유죄판결을 받고 처형당하거나 당으로부터 축출되었다. 그 중에서 임화는 미제의 간첩으로 규정되었고 식민지시대부 터 이어져 온 그의 모든 경력과 활동 역시 일본의 사주에 의한 것이거나 미제의 간첩활동으로 철저히 부정되었다. 특히 그가 해방 이후 제기한 민족 문학론이나 작품들은 그에 대한 숙청을 정당화하기 위해 철저하게 비판되 었다.

4) 남로당에 대한 비판이 처음으로 제기된 것은 3차 전원회의에서부터였다. 하지만 여기서 주로 문제가 되었던 것은, 무정의 지휘책임에 관한 것이었고 그 결과 무정 은 돌이킬 수 없는 책벌을 받았다. 그리고 4차 전원회의는 이른바 ‘관문주의’와

‘책벌주의’에 대한 책임을 물어 허가이 등을 숙청하는 결과를 낳았다. 이에 대한 자세한 논의는 이종석, 조선로동당연구 , 역사비평사, 1995, 238-284쪽.

5) 이 회의에서 김일성은 「로동당의 조직적 사상적 강화는 우리 승리의 기초」라는 제목의 보고를 통해 자유주의 종파주의 잔재들과의 투쟁, 당사상 사업을 개선 강 화하는 문제, 당원들의 당성을 제고하기 위한 제반 대책 등을 제시했다. 또 문예 총과 관련하여 임화 일파가 “문예총을 내부로부터 와해시키고 자기들의 부르죠아 반동문학 로선을 조직적으로 보장할 수 있는 종파 단체로 전환시키려는 음흉한 기도” 밑에 전투적 작가 중상, 비판적인 평론가 공격, 우수한 사실주의 작가들의 작품 출판 방해, 신인들의 진출 방해했다고 비판했다(엄호석, 「조국해방전쟁시기 의 우리 문학」, 해방 후 10년간의 조선문학 , 조선작가동맹출판사, 1955, 191-201 쪽) 이후 이 회의의 문헌토의를 전당적으로 전개하는 과정에서 1953년 초 박헌영, 리승엽 등이 간첩 혐의로 체포된 데 이어 유죄판결을 받았고, 1953년 8월에 열린 당중앙위원회 제 6차 전원회의에서 남로당 출신과 그 관련자들이 출당조치를 받 음으로써 남로당 계열은 완전히 몰락하고 말았다. 남로계열의 몰락과정에 대해서 는 이종석, 앞의 책, 250-25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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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남한의 연구자들로서는 막연한 기대와 심증 이외에 임화가 미제 의 간첩이었다는 북한의 공식적 주장을 반박하거나 부정할 만한 명확한 증거를 갖고 있지 못하다. 해방 직후의 활동에 대해서도 그렇지만, 월북후의 활동과 관련해서 남한의 연구자들이 갖고 있는 관련 정보는 극히 미미한 수준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더욱이 숙청 이후 그에 관련된 모든 정보는 봉인(封印)되거나 접근이 차단되어 버렸으므로 임화의 월북 후 행적, 특히 북한에서 공식적으로 확정된 간첩 혐의의 사실 여부를 확인할 만한 사실 관계의 확인조차 쉽지 않다. 물론 김윤식 교수의 선구적인 업적 이래 몇몇 연구자들에 의해서 임화의 행적이 단편적으로나마 밝혀진 바 있기는 하지 만, 아직도 밝혀지지 않은 것이 훨씬 더 많은 실정이다.

따라서 월북 후 임화의 행적을 재구성하기 위해서는 단편적인 것이나마 관련된 사실들을 널리 수집할 필요가 있다. 관련 연구자들 사이의 정보 공유와 협력이 필요한 것은 물론이다. 그리고 이를 통해 밝혀진 사실들을 조합하고 거기에 다시 상상력을 가미한다면 월북 후 임화의 행적을 어느 정도 재구성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이렇게 하더라도 임화의 행적과 활동에 대한 완벽한 재구성은 불가능하고, 불완전한 조각그림 맞추기의 수준을 넘 어서기 어렵긴 하겠지만, 지금 상황에서 기대할 수 있는 최대치는 그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 맥락에서 이 글에서는 지금까지 알려진 것 이외에 월북 후 임화가 발표한 작품의 흔적을 찾아 정리하고 그에 대한 평가, 그리 고 그의 숙청을 사후적으로 정당화한 논리를 살펴보고자 한다.

특히 숙청 이전과 숙청 이후 임화의 시에 대한 북한 문단의 평가는 완전히 상반된다. 극찬에서 극단적인 폄하와 부정으로 급전하게 되는 것이다. 이 격렬하고 급박한 평가의 변화는, 정치의 논리가 문학의 논리를 압도하고 압살한 명백한 증거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런 현상은 1953년 무렵에 갑작스럽게 나타난 것이 아니라, 북한 정권 수립기부터 내밀하게 자리잡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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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던 어떤 경향이 이 시기에 와서 격화된 권력투쟁과 결합하면서 급격히 증폭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임화에 대한 숙청을 사후적으로 정당화 하기 위해 동원된 논리들이 어떻게 구성되었는가를 살펴보는 것은, 정치가 문학을 압살하는 과정을 이해하는 데 데 중요한 단서가 될 수 있을 것이다.

Ⅱ. 임화의 월북 후 작품에 대하여

임화의 월북 후 행적에 대해서는 그다지 많이 알려져 있지 않다. 기껏해야 몇몇 목격자들의 증언과 1953년 그가 간첩혐의로 기소된 후의 공판 기록에 나타난 단편적인 언급 정도가 임화의 월북 후 행적을 살펴 볼 수 있는 자료 의 전부이다. 이 자료들을 토대로 재구성된 임화의 월북 후 활동은 대체로 다음과 같이 요약될 수 있다.

임화가 월북한 것은, 남한에서 남로당이 불법단체로 규정되고, 임화가 관여했던 노력인민 이 더 이상 발간될 수 없게 된 1947년 가을(11월 20일) 의 일이었다6). 월북 후 그는 박헌영과 함께 주로 해주 제 1인쇄소에서 근무 하면서 남로당에 박헌영의 지령을 전달하는 임무를 담당했다. 전쟁 기간 중에는 종군작가단의 일원으로 1950년 6월 말경 서울에 왔고, 7월에는 낙동 강 전선에 종군하기도 했다. 시집 너 어느 곳에 있느냐 에 실린 <서울>

같은 작품은 이 무렵 씌어진 것으로 추측된다. 그 후 이른바 전술적 후퇴시 기에는 자강도로 피신, 이기영이 위원장으로 있던 조쏘문화협회 중앙위원

6) 김윤식, 앞의 책, 699-704쪽. 이하 임화의 월북 후 행적에 관해서는 주로 이 책 뒤 에 실린 공판기록을 참고했음. 한편 임화의 월북 시기에 대해서는 김명수도 김윤 식과 마찬가지로 1947년 11월경이라고 밝히고 있다. 김명수, 「흉악한 조국 반역의 문학」, 조선문학 , 1956.4, 16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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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의 부위원장직을 맡기도 했으나 주로 출판 부문에서 활동한 것으로 알려 져 있다.

이처럼 임화의 월북 후 행적에 대한 정보가 부족한 것은, 관련 자료의 수집, 확보가 쉽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근본적으로는 그의 활동 영역이 월북 이전과 달리 크게 위축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임화는 김일성의 정치적 라이벌인 박헌영 계열이었으므로 자연히 월북 후 운신의 폭이 크게 제한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임화가 주도한 문학가동맹을 거부하고 일찌감치 월 북했던 프로예맹 출신들이 헤게모니를 장악하고 있던 북한 문단에서 임화 가 차지할 수 있는 공간은 그다지 많지 않았다. 그가 전쟁 전까지 북한 문단의 중심이었던 평양이 아닌 해주를 무대로 활동했고, 그의 문단적 평가 나 위상에 걸맞는 작품 활동을 보여주지 못한 것은 이런 사정과도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임화가 예맹 계열의 견제를 피하기 위해 양남수(楊南樹)라는 필명을 사용했다는 박남수의 증언은, 1백 퍼센트 신뢰할 수는 없지만, 그런 대로 북한 문단의 분위기와 임화의 곤혹스러운 처지를 짐작케 해 준다7).

하지만 임화가 작품 활동을 전혀 하지 않았던 것은 물론 아니다. 이 작품 활동에 대해서는 앞에서 언급한 김윤식 교수 등의 노력으로 대체적인 윤곽

7) 현수, 적치 6년의 북한문단 국민사상지도원, 1952, 94쪽. 현수는 해방 직후 평양 에서 활동하다가 월남한 박남수(朴南秀)의 아호이다. 월남 직후인 북한과 북한 문 단을 비판한 이 저작을 내면서 아호를 필명으로 내세운 것은, 자칫 북에 남아 있 는 가족이나 친지들에게 피해를 입힐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현수는, 임화가 구문 맹계의 견제를 피하기 위해 양남수라는 필명을 사용했다고 진술하고 있지만, 양 남수의 작품을 인용하면서 극찬했던 한효의 진술 태도로 미루어 볼 때 양남수가 임화의 필명이라는 사실은 굳이 비밀이라고 할 것도 없을 정도였던 것으로 짐작 된다. 이와 관련하여 김재용은 임화가 양남수라는 필명을 사용한 것과 관련해서 현수와는 다른 견해를 내세우고 있다. 즉, 남한에 남아 있는 동지들에게 자신의 월북 사실을 알리지 않기 위해 양남수라는 필명을 사용했다는 것이다. 김재용, 「 임화와 양남수」, , 한국근대문학연구 , 한국근대문학회, 2001 상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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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밝혀졌다. 지금까지 확인된 것은 1950년 3월에 문화전선사에서 발간한 종합시집 한 깃발 아래서 에 실린 <그 고향이여 ! 한층 더 아름다워라>,

<형제>, <기적 울리는 죽령 고개에>등 3편과 1951년에 역시 문화전선사 에서 전선문고로 발간된 너 어느 곳에 있느냐 8)에 <서울>9), <한 번도 본일 없는 고향 땅에>, <밟으면 아직도 뜨거운 모래밭 건너>, <너 어느 곳에 있느냐>, <한 전호 속에서>, <평양>( 조선문학 , 1951.4), <바람이 여 전하라>.<흰 눈을 붉게 물들인 나의 피 위에>등 8편이다.

여기에 양남수라는 필명으로 발표한 작품이 두 편을 추가할 수 있다. <눈 이 나린다>( 로동신문 , 1950. 1. 12)와 <대숲 어득히 흔들리는 거기>( 로 동신문 , 1950. 3.21) 가 그것이다10). 이밖에도 종합시집에 실린 <그 고향 이여 ! 한층 더 아름다워라>의 제목에 ‘ 영웅전 가운데서’라고 부기되어 있고, <흰 눈을 붉게 물들인 나의 피 위에>의 말미에도 역시 ‘ 영웅전 가 운데서’라고 부기되어 있는 것으로 미루어 보면 영웅전 이란 제목의 시집

8) 이 시집은 51년 5월 9일에 김남천이 발행인으로 있던 문화전선사에서 <전선문고

>로 발간되었다. 정가는 50원, 5,000부가 발간되었다고 한다. 김윤식 교수는 이 시집에 대해 1945년 9월 22일 이후 시인의 삶을 포기하고 혁명가의 길을 걸었던 임화가 다시금 시인으로 회귀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증거라고 주장했다. 특히 이 시집 첫머리에 실린 <서울>은, 그의 시적 고향인 서울의 낙산, 그리고 핵심적 상 상력이자 모티프라고 할 수 있는 ‘네 거리의 순이’가 다시금 부활하고 있음을 보 여주는 작품이라고 평가했다. 김윤식, 앞의 책, 627쪽.

9) 이 작품은 1950년 8월에 발간된 시집 (조선인민군 전선문화훈련국)에도 수록되어 있다.

10) 이 점에 대해서는 신형기․오성호, 북한문학사 (평민사, 2000), 171-2쪽. 김재용, 앞의 글, 104-105쪽 참고. 김재용에 따르면 <눈이 나린다>와 <대숲 어득히 흔들 리는 거기>는 해주에서 발간되던 남로당 기관지 노력자 에 발표되었다가 1949 년 6월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 이후 남로당과 북로당이 협조적인 관계로 돌아서면 서 로동신문 에 전재되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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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존재할 가능성이 있지만, 이 시집의 발간 여부는 확실치 않다11). 이상이 지금까지 알려진 임화의 작품 목록이다.

여기에 최근 필자가 조선문학 에서 확인한 임화의 작품을 몇 편 더 추가 할 수 있다. 우선 추가해야 할 작품은 김일성의 40회 생일을 축하하는 축시

<40년>( 조선문학 , 1952.4)12)이다. 이밖에 실제 작품을 확인하지는 못했 지만, 북한 평론가들의 글에서 언급된 임화의 작품들을 몇 편 더 추가할 수 있다. 가령 임화를 “원쑤들이 문학예술분야에 파견한 이데올로기 전선의 괴수”로 규정한 김명수는, 임화의 죄상을 단죄한 자신의 평론에서 앞에서 언급한 <한 전호 속에서>, <한번도 본 일 없는 고향 땅에>, <밟으면 아직도 뜨거운 모래밭 건너> 등의 작품을 거론한 데 이어 <망명>(출전 미상)과 <쏘베트 련맹>(출전미상)이란 작품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13). 또

<기지로 돌아가거든> 같은 작품이 조선문학 시합평회 석상에서 거론되 고 있으나14) 역시 작품의 출전과 내용은 확인하지 못했다.

11) ‘ 영웅전 가운데서’라고 부기되어 있는 다른 작품들의 예로 미루어 보건대, 만약 영웅전 이 실제로 출간되었다면 그 내용은 주로 남한 전역에서 전개된 단선반대 운동이나 빨치산 영웅들에 관한 것이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12) 임화가 지도자 개인에 대한 노골적인 찬가를 쓴 것은, <박헌영 선생이시어, 노력 인민이 나옵니다>( 노력인민 , 1947.6.16) 이후 처음 있는 일인데, 이는 전황의 변 화와 북한 내부의 정치적 변화를 보면서 임화가 그 나름으로 생존을 모색하고 있 었음을 말해주는 증거라고 할 수 있다.

13) 김명수, 앞의 글, 160-161쪽. 참고로 김명수가 인용한 <망명>이라는 작품(전문을 인용했다고 보기는 어렵지만)을 여기에 소개한다. “우리 이제 손길을 난호며/무엇 을 말하리…//나루마다 푸른 물이/다른 산과 들을 흘러/산하―/남북에 아득하여도//

바람소리 들레는 밤중/눈 감으면 나란한 어깨/우리 평생/조국의 지척에 있어라”

14) 조선문학 , 1952.5. 리병철, 한진식, 민병균, 김북원 등이 함께 한 합평회의 총평 은, 이 작품이 빨치산 이름만 많이 나열했을 뿐, 빨치산 생활을 파고 들어가지는 못한, 총체적으로 실패작이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이유로 작가가 “비행기의 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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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한설야의 악의에 찬 언급을 통해서도 어렴풋하게나마 임화의 활동 흔적을 확인할 수 있다. 한설야는 임화가 조선문학 이라는 책을 통해서 서구문학에 대해 노골적으로 아첨을 했다고 비판했는데, 이 책의 출판 여부 나 실존 여부는 확인할 수 없지만, 한설야 외에도 여러 평론가들이 이 책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 것으로 미루어 보면 실제로 발간되었을 가능성이 높 다15). 그리고 그 내용은, 한설야의 언급으로 미루어 추측컨대, 식민지 시절 의 조선신문학사 나 해방 직후에 발표된 「조선민족문학 건설의 기본 과제 에 관한 일반보고」에 이어지는 문학사 관련 저작일 가능성이 높다. 만일 그렇다면 이는 월북 후 임화의 문학사관이 어떻게 변했는지를 보여주는 귀중한 자료가 될 것이다. 또 임화가 월북 후에도 여전히 시인이자 문학사가 로서의 삶을 포기하지 않고 있었음을 말해 주는 명백한 증거가 된다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 이외에도 다른 작품이나 저작이 남아 있을 가능성은 물론 있다. 하지만 북한 사회의 성격상 숙청된 이후 임화의 작품이나 저작은 소지나 유통이 금지되었을 가능성이 높고, 도서관의 장서고에서도 축출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게다가 전쟁 기간 중 많은 서적들이 불에 타 없어져 버린 북한쪽의 사정이나 북한 자료에 접근하기가 쉽지 않은 남한 연구자들의 사정을 감안

경꾼 같은” 위치에 머물러 있어서 “작가의 위치가 서지 못”했다는 점을 지적했 다.( 80-81쪽.)

15) 한설야의 언급으로 미루어 볼 때, 이 책이 만일 발간되었다면 그 시기는 1952년경 인 것으로 보인다. 이 책에 대한 언급은 한설야의 「전국 작가예술가대회에서 진 술한 한설야 위원장의 보고」( 조선문학 , 1953.10), 홍순철,「문학에 있어서의 당성 과 계급성」, 조선문학 , 1953,12.) 등에서 발견된다. 그밖에 김명수도 이 책에 대 해 언급하고 있다(김명수, 앞의 글, 150쪽). 이로 미루어 이 책은 실제로 발간되었 을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발간되었더라도 임화의 숙청과 함께 곧 압수되거나 판 금되어 실제 유통되지는 않았을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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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면 추가로 그의 작품이나 저작이 발견되기를 기대하기는 쉽지 않을 것처 럼 보인다. 단 중국이나 러시아의 도서관, 혹은 미국의 노획문서 가운데서 임화의 또 다른 작품이나 저작이 발견될 가능성은 여전히 남아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단순한 기대일 뿐이고, 현재로서는 임화의 월북 후 작품으로, 제목만 알려진 것을 포함하여, 모두 17편을 제시할 수 있는 셈이다. 그리고 거기에 조선문학 이란 제목의 문학사 관련 저서를 추가할 수 있다.

이상에서 제시한 임화의 작품에 대한 북한 문단의 평가는, 대체로 호의적 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특히 5차 전원회의에서 김일성이 임화를 포함한 남로계열 문인들의 반당 행위를 공개적으로 비판하고 뒤이어 한설야가 증 오와 적개심으로 가득찬 어조로 임화를 맹렬하게 비난하기 전까지만 해도 임화의 작품에 대한 일반적인 평가는, 몇몇 예외가 있기는 하지만, 대단히 높은 것이었다. 가령 한효만 하더라도 양남수라는 필명으로 발표된 두 작품 을 인용하면서 “우리나라에서 일찍이 어떠한 문학이 어떠한 시가 이렇듯 아름다운 사람들을 형상화해본 일이 있는가!”라고 극찬을 한 바 있었다16).

또 일찍이 임화의 논적이기도 했던 안함광은, 나중에 임화를 단죄하는 증거로 자주 이용되었던 <흰 눈을 붉게 물들인 나의 피 위에>, <너 어느 곳에 있느냐>, <바람이여 전하라> 같은 작품들을 예로 들면서 임화의 작품을 극찬했다17). 안함광은 <밟으면 아직도 뜨거운 모래밭 건너>에 대 해서는 “영웅적 특질을 개체 이상으로 집체에로 확장하여 노래”하고 있다

16) 한효, 「새로운 시문학의 발전」, 문학의 전진 , 1950.7, 김재용(편), 현대문학 비평 자료집 , 태학사, 1993, 65쪽.

17) 안함광, 「싸우는 조선의 시문학이 제기하는 몇 가지 주요한 특징」, 문학예술 (1951.8), 김재용 외(편), 현대문학비평자료집 2(태학사, 1993) 124-137쪽. 하지만 임화의 숙청 이후에도 안함광이 이 같은 입장을 고수할 수 있었는지는 의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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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평가했고 <흰 눈을 붉게 물들인 나의 피 위에>에 대해서는 “장구한 세월에 걸쳐 싸워온 이 시인의 인간에 대한 깊은 관심이 예리한 영웅적 테마와 완전히 결합되어져 있다”고 추켜세웠다. 그리고 뒤의 두 작품에 대 해서는 “거대한 비애를 뚫고 나가는 스산함과 이 더러움 앞에서도 미래를 확인 전망하는 낭만성을 또한 표현하고 있는 것”이라는 평가를 내리고 있 다. 이와 함께 안함광은 임화의 자연묘사가 “형상의 구체성을 도우며 풍부 한 감정의 윤색 있는 전달을 방조한다”면서 그의 자연묘사가 시적 흐름과 무관한 외로운 것이 아니라 “노래의 대상이 처하여 있는 구체적 정황의 일부로서의 생동하는 그림이거나, 그들이 마음 속 깊이 간직하고 있는 투지 와 지향과 애착과 증오와 동경 등의 가장 귀중한 것, 그리고 가장 구체적인 것과의 동조이며 연합이다”라고 평가했다.

여기서 안함광이 특히 주목했던 것은, 임화의 시가 생경한 구호나 관념을 직설적으로 토로하는 대신 구체적인 형상을 제시하고 독자들의 정서적 참 여가 가능한 시적 상황을 조성한 뒤, 이를 계급의 적에 대한 분노로 연결시 킴으로써 강력한 정서적 감염력을 발휘할 수 있다는 점이었다. 안함광의 눈에 임화의 시는, 형상성의 부족, 시적 선율과 시적 사색의 결여에서 헤어 나지 못하고 있던 많은 북한시의 한계를 넘어선 작품으로 비쳤던 것이다.

한효가 남한 전역에서 활약한 빨치산을 그린 임화(양남수)의 시를 고평한 것도 비슷한 맥락에서였지만, 안함광은 한효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임화의 시가 지닌 특질들을 섬세하게 분석함으로써 자신의 주장을 정당화했던 것 이다. 하지만 임화의 작품에 대한 긍정적인 평가와 찬사는, 숙청 이후 모두 부정되거나 아예 묵살되어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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Ⅲ. 임화의 작품에 대한 비판과 숙청의 논리

문예총 위원장인 한설야는 1953년에 열린 전국작가예술가대회에서 박헌 영과 이승엽을 비난한 데 이어서 임화 도당들이 “사회주의 레알리즘의 작품 의 출현을 막고 부르죠아적 자연주의 작품들을 전파하기 위한 파괴공작에 광분”하였다고 비난하였다. 그리고 그 구체적인 실례로 임화가 해방 직후 제기한 민족문학론을 통해 문학의 계급성을 부인한 반동적인 견해를 제시 했으며, 작품을 통해서는 “우리 인민을 절망과 영탄의 세계에 쳐넣으려고 시도하였으며 우리의 영웅적 현실을 파렴치하게 비속화하였으며 로골적인 반쏘사상과 꼬스모뽈리찌즘을 선전”하였다고 비판하였다. 한마디로 임화 일파는 “문학에서 당성과 계급성을 거세하며 우리 문학의 사상적 무장해제 를 획책하였으며 현실을 의곡비방하는 것을 주안으로 하는 자연주의 및 형식주의 백방으로 부식시키려고” 기도했고 그가 보여준 “서구라파 문학에 대한 비렬한 아첨”의 태도는 우리 문학을 초계급적이고, 비민족적으로 만들 려는 반당적인 경향의 발로라는 것이었다18).

이처럼 임화의 이론과 작품이 매도되는 과정은 정치 논리가 문학의 논리 와 진실을 압살하는 과정을 여실하게 보여준다. 5차 전원회의에서 이루어진 비판과 1953년 8월의 재판으로 그가 유죄라는 사실은 이미 의심할 수 없는 진실로 확정되었고, 평론은 사후적으로 구체적인 사례를 들어 그에 대한 숙청이 올바른 것이었음을 대중에게 확인시키는 역할을 했다. 다시 말해서 정치적인 유죄 판결을 미학적으로 설명하는 과정을 밟았던 것이다. 임화는 이미 당과 국가와 인민에게 씻을 수 없는 죄를 지은 죄인이었고, 따라서 프로시인이자 문학사가의 화려한 명성 뒤에 가려져 있던 그의 반동적인

18) 한설야, 앞의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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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모는 낱낱이 폭로되어야 했다. 그 결과 임화의 이론과 시는, 그 이전에 평론가들에 의해서 받았던 평가와 무관하게 부르주아적이고 반인민적이며, 사대주의적인 것으로 규정되었다19). 임화를 단죄해야 한다는 당의 요구 앞에서 평론가 개개인의 이성이나 양심, 혹은 논지의 일관성 같은 것이 작용할 여지는 전혀 없었고20) 평론은 단지 당의 논리를 대변하고 정당화하 는 역할을 수행했던 것이다.

그러나 엄격하게 말해서 임화의 작품에 대한 비판이 전적으로 정치논리 에 입각해서만 이루어졌다고 할 수는 없다. 물론 정치적인 논리가 압도적으 로 작용해서 임화의 전체 경력과 활동을 부정하고 왜곡한 것은 사실이지만, 정치 논리만으로 오랜 투쟁 경력과 화려한 명성을 지닌 시인 임화의 존재와 그의 작품이 남긴 영향이 말소되는 것은 아니었다. 북한의 평론가들이 나름 대로의 논리와 근거를 내세워, 반복적으로 임화의 시를 난도질한 것은 그 때문이었다. 임화만이 아니라 임화의 시가 북한 사회에서 용납될 수 없는 이유를 미학적으로 정당화해야 했던 것이다. 그것은 단순히 과거의 행적에 대한 단죄를 의미하는 것만은 아니었다. 오히려 진짜 문제가 되었던 것은 임화와 임화의 시가 막바지에 다다른 전쟁 수행과 전쟁 이후의 과제로 제기

19) 임화의 행적과 문학론이 낱낱이 부정된 데 비해, 이상하게도 작품에 대한 부정은 전면적이지 않았다. 특히 월북 후 임화 시의 반동성을 예증하기 위해 주로 인용된 작품은, <너 어느 곳에 있느냐>, <바람이여 전하라>, <흰 눈을 붉게 물들인 나 의 피 위에>의 세 편이었다. 그 이외의 작품이 임화의 반동성을 증명하는 자료로 인용된 예는 아직 발견하지 못했다.

20) 정치 논리의 변화에 따라 자신의 논지를 변화시킨 대표적인 인물로 엄호석을 들 수 있다. 엄호석은 일찍이 <흰 눈을 붉게 물들인 눈 위에>를 높이 평가한 바 있 었다.(엄호석, 「조국해방전쟁시기의 우리 문학」, 인민 , 1952. (김재용 외 편, 현 대문학자료집 2, 204쪽) 그러나 임화가 숙청되고 난 뒤인 1955년에 발간된 해방 후 10년간의 조선문학 에 실린 같은 제목의 글에서 그의 입장은 완전히 달라진다.

이에 대해서는 엄호석, 앞의 글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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된 전후 복구건설과 관련하여 도움이 될 수 있느냐 하는 미래적인 관점 또한 임화의 작품에 대한 비판과 단죄의 과정에 개입했다고 보아야 옳을 것이다.

임화에 대한 비판과 단죄를 정당화하는 논리의 근거를 제공한 것은 전쟁 상황과 전후 복구건설이라는 목전의 과제였다. 조국해방전쟁으로 정당화되 고 미화된 전쟁에 임하는 북한의 입장은 명백한 것이었다. 전쟁은 해방 후 5년 간 이룩된 ‘민주개혁’의 제반 성과를 부정하는 부도덕하고 야만적인 폭력이었고, 태어나서 처음으로 인간다운 삶을 살아왔던 북한 인민들을 다 시금 노예상태로 몰아놓으려는 제국주의자들과 반동계급들의 비열한 책동 으로 일어난 것이었다. 따라서 조국을 침략한 적에 대해 맹렬한 분노와 증오의 감정을 갖는 것은 지극히 마땅한 일이었다. 말하자면 부도덕하고 악랄한 적에 대한 맹렬한 증오와 분노와 적개심이 스스로의 인간됨을 확인 하고 증명하는 유일한 길이고 휴머니즘일 수 있었던 것이다. 이 ‘증오의 휴머니즘’21)과 짝을 이루는 것은 바로 동지에 대한 무한한 신뢰, 애정, 공화국을 위한 자발적인 희생과 헌신 같은 정신적, 도덕적 가치들이었다.

이 증오의 휴머니즘은 적과 아의 선명한 구분, 적의 부정성에 대한 최대한 의 강조와 우군의 혁명적 순결성에 대한 최대한의 긍정과 미화를 요구했거 니와, 이는 전쟁기 북한 시의 가장 핵심적인 형상화 원리였다. 이처럼 ‘증오 의 휴머니즘’이 지배하는 상황에서 전쟁에 대한 회의나 전쟁의 참혹성에 대한 비탄이나 비애, 그리고 전쟁의 광기에 휩쓸린 인간들에 대한 연민 같은 비전투적 감정이 들어설 여지는 없었다. 또 북한 전역을 초토화시킨 전쟁의 참화로부터 신속한 복구건설을 이룩하기 위해서도 증오의 휴머니즘 은 여전히 유효한 것이었다. 증오의 휴머니즘을 통해서만 정신과 도덕의

21) 이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신형기․오성호, 앞의 책, 131-13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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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와 이를 통한 전면적인 동원체제 구축이 가능했던 것이다. 남로당 계열 에 대한 숙청의 명분을 제공했던 당 중앙위원회 5차 전원회의에서 김일성이 당의 사상적, 조직적 강화를 의제로 내걸었던 것은, 바로 이런 맥락에서였 다. 그는 정신과 도덕의 강화와 전면적 동원체제 구축을 저해할 수 있는 모든 요소들의 배제와 척결을 주문했고 남로당 계열이 그 대상으로 지목된 것이었다22).

그러나 임화 시는 이런 전면적 동원체제의 구축을 위해 별다른 도움이 되지 않는 것이었다. 임화 시의 주조는 널리 알려져 있다시피 짙은 페이소스 였기 때문이다. 지나친 감상과 풍부한 서정 사이의 경계선에 걸쳐 있는 임화 시의 특유한 정조에서 나오는 페이소스는 연민의 감정과도 깊은 관련 을 맺고 있다. 임화 시에 등장하는 ‘서정적 주인공’들이 처한 시적 상황은 흔히 연민의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부모를 대신하던 오빠가 감옥에 간 뒤 남은 여동생과 어린 영남이의 처지가 그렇고(<우리 옵바와 화로>), 한설야

22) 이 점과 관련하여 임화의 작품 중 다수가 주로 남한에서의 빨치산 투쟁을 형상화 한 것이라는 사실(특히 ‘ 영웅전 가운데서’라고 부기되어 있는 작품)에 대해서는 별다른 비판이 제기되지 않았다는 점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반당적 분열 책동을 입증하기 위해서라면 남로당의 지도 아래 있던 빨치산 투쟁을 주로 그렸다는 사 실도 임화의 종파적 성향을 입증할 수 있는 중요한 근거가 될 수 있었기 때문이 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점이 전혀 거론되지 않은 것은 이상한 일이지만, 일단 다음 두 가지 가능성을 생각해볼 수 있다. 우선 1949년의 비밀합당을 통해 남로당 과 북로당이 조선노동당으로 통합되었고 그 결과 빨치산 투쟁을 포함, 남한에서 전개되고 있던 투쟁에 대한 박헌영의 지도가 묵시적으로 양해되었다는 사실이다 (비밀합당에 대해서는 박명림, 한국전쟁의 발발과 기원 1 나남출판, 1997, 268-275쪽 참조). 이와 함께 휴전 성립 과정에서 빨치산 투쟁을 철저히 외면했던 북한 정권의 도덕적 채무감도 그 이유 중의 하나로 꼽을 수 있을 것이다. 북한의 입장에서 남한의 빨치산 투쟁을 기억해내는 것 자체가 부담스러운 일일 수 있었 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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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엄호석에게 집중 포화를 받았던 월북 후의 시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사랑하는 딸을 적지에 남겨두고 홀로 후퇴의 길에 나선 “머리가 절반 흰 아버지”나 “가슴이 종이처럼 얇”은 어머니(<너 어느 곳에 있느냐>)나 압도 적인 적의 화력을 잠재우기 위해 자신을 희생할 것을 결심하는 공화국의 영웅 김창걸( <흰 눈을 붉게 물들인 나의 피 위에>), “너무나 많은 슬픔과/

이길 수 없는 원한과 분노에/머리 더욱 희고 가슴 더욱 얇아진” 어머니들 ( <바람이여 전하라>)의 형상은 모두 예외 없이 연민을 느끼게 하는 존재들 이다.

이 서정적 주인공들은 예외 없이 주어진 시적 상황에 대해 과잉된 정서적 반응을 보여준다. 구체적인 근거도 없이 오빠를 영웅시하는 막연한 소녀적 감상에 빠진<우리 옵바와 화로>의 누이동생은 계급운동의 대의에 대한 뚜렷한 자각도 없이 단지 오빠가 선택한 길이라는 이유 때문에 격앙된 어조 로 자신도 그 길을 따르겠다는 결의를 밝힌다. 또 <너 어느 곳에 있느냐>의 아버지는 비탄과 절망의 끝에서 돌연, 적에 대한 분노와 증오의 화신으로 돌변한다. 적의 화선(火線)에 몸을 던지기 전에 조국에 대한 불타는 애정과 자기희생의 각오를 다지는 김창걸의 내적 독백은 물론 비장하지만, 하지만 장황한 내적 독백은 오히려 영웅적 행위를 지연시키고 상황의 비극성을 고조시킨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임화의 시가 대중들에게 강한 호소력을 발휘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연민의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서정적 주인공’의 존재와 작품 전체를 지배하고 있는 감상적인 분위기 때문이었다. 그는 독자들이 자신의 ‘서정적 주인공’들에 대한 연민의 감정을 느낄 만한 시적 상황을 창조함으로써 독자들이 서정적 주인공의 감정과 행위를 비판적인 여과 없 이 수용하도록 만들었다. 다시 말해서 독자들로 하여금 시적 상황에 감정이 입되도록 함으로써 후반부에서 이루어지는 급작스런 논리의 비약(각성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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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적 노동자로의 전환이나 적에 대한 맹렬한 증오와 전투적인 결의의 다짐)을 거부감 없이 받아들이도록 만들었던 것이다. 그런 점에서 임화 시가 지닌 대중적 호소력은 그의 시에 내재된 감상성과 결코 무관하지 않다.

임화의 숙청 이후 그의 시가 지닌 반동성을 폭로하기 위한 예로 자주 인용되 는 다음 구절에서 이런 특징은 명확히 드러난다.

아직도 이마를 가려 귀밑머리를 땋기 수집어 얼굴을 붉히던 너는 지금 이

바람 찬 눈보라 속에 무엇을 생각하여 어느 곳에 있느냐

머리가 절반 흰 아버지를 생각하며 바람부는 산정에 있느냐 가슴이 종이처럼 얇아 항상 마음 아프던 엄마를 생각하여 해 저므는 들길에 섰느냐

그렇지 않으면

아침마다 손길 잡고 문을 나서던 너의 어린 동생과

모란꽃 향그럽던 우리 고향집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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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 소리 귀에 쟁쟁한 그리운 동무를 생각하여

어느 먼 곳 하늘을 바라보고 있느냐

― <너 어느 곳에 있느냐>부분

창작 시기가 1950년 12월로 부기된 점이나 시의 내용으로 미루어볼 때 이 시는 인천상륙작전 이래 인민군의 이른바 전술적 후퇴시기에 낙동강 전선에서 생이별한 딸(이귀례와의 사이에서 낳은 딸 혜란)을 그리워하는 아버지의 심정을 그린 작품이다. 고통스러운 후퇴 행렬 가운데서 잃어버린 딸의 안위를 걱정하는 초로의 아버지 모습과 열악한 장비로 혹한에 떨며 승산 없는 전투를 하면서도 가족의 안위를 걱정하고 그리워하는 낙오병 딸의 대조는 상당히 극적이다. 이 아버지와 딸의 극적 대조는 자연 독자에게 비애와 연민의 정서, 그리고 전쟁의 비극성에 대한 인식을 환기한다. 특히 되풀이해서 강조되고 있는 ‘머리가 절반 흰 아버지’의 형상―이는 서정적 주인공이 자기연민의 감정에 사로잡혀 있음을 시사한다―은 독자들에게 전쟁의 광포함과 전쟁에 휩쓸린 개인의 고통스러운 모습으로 뚜렷하게 각 인된다. 또 이 ‘머리가 절반 흰 아버지’가 애절한 목소리로 토로하고 있는 딸에 대한 그리움과 애틋한 정은 아버지와 딸에 대한 연민의 감정을 자극한 다.

일찍이 임화의 시를 고평했던 안함광도 이를 임화 시의 결점으로 정확히 짚어냈지만23), 이를 극복할 수 없는 치명적인 결함이라고 보지도 않았다.

23) 안함광, 앞의 글, 137-138. 안함광은 임화 시의 결점으로 시적 디테일에 대한 감각 과 선택에 있어서 감상적 특질을 보여줄 뿐 아니라 인텔리적 관점을 버리지 못하 고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 특히 <너 어느 곳에 있느냐>와 <바람이여 전하라>와 관련하여 “행동과 사상에 있어서만이 아니라 심리와 감정과 사고방식에 있어서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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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이 시의 밑바닥에 깔린 페이소스가 전투하는 인민의 감정과는 거리가 있는 지식인적 감정이라는 점을 인정하면서도, 일단 섣부른 구호화의 유혹 에 빠지지 않은 형상화의 능력을 높이 샀던 것이다. 물론 절망과 비애에 젖어있던 서정적 주인공의 감정이 시의 말미에 이르러 “외로이 흘린 너의 피와/너희들의 피를/백 배로 하여/천 배로 하여/원쑤들의 가슴파기/최후로 말라 다할 때까지/퍼내일 것이다”라고 부르짖는 모습은 그다지 자연스럽지 않지만, 안함광이 높이 산 것은 이 극적인 정서의 반전이, ‘전쟁의 광기에 휩쓸려 사랑하는 딸을 잃은 아버지의 슬픔과 분노’에서 솟아나오는 것이라 는 점이었다.

그러나 이 작품과 관련하여 임화의 시가 염전적인 태도를 불러일으킬 가능성이 대단히 높다고 비판한 북한 평론가들의 지적은 터무니없는 것만 은 아니었다. 실제로 전쟁 기간 중 어느 집회에서 이 시를 낭독한 후 장내의 분위기가 숙연해졌다는 진술은 이런 비판이 결코 과장된 것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말해 준다24). 비록 작품은 적에 대한 증오와 분노의 폭발, 그리고

지도 전사의 특질을 통했어야 할 그 자리에 전사가 아닌 인테리의 잠재적 관찰을 통하여 그 심리와 감정과 사고방식 그리고 감각의 특질 등을 성격지”웠다는 것이 다. 그리고 그 예로 “불타 허물어진 폐허 위를 외로이 걸어갈 머리 흰 사람”“애처 로운 사람”, “이길 수 없는 원한과 분노에 머리 더욱 가슴 더욱 얇아진 사람”들 같은 구절을 들고 있다. 물론 안함광의 비판은, 임화의 시적 역량에 대한 신뢰에 기초한 동지적인 것이라는 점에서 숙청 이후 임화에게 퍼부어진 악의적인 비난과 는 분명히 구별될 필요가 있다.

24) 장형준, 위대한 수령 김일성 동지 문학령도사 2, 문학예술종합출판사, 1993.

431-432쪽. 장형준은 <너 어느 곳에 있느냐>의 반동성을 최초로 간파한 것은 김 정일이었다고 주장했다. 그에 따르면 남로당 계열에 대한 격렬한 비판이 이루어 진 5차 전원회의가 끝난 직후인 1953년 설날 학급에서 가족들과 오락회를 열었을 때 한 여학생이 이 시를 낭독하자 실내의 분위기가 숙연해졌고 ‘애수와 비애’에 젖어들었기 때문에 김정일이 이 시의 반동성을 눈치채고 이 작품의 나쁜 점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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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주로 마무리되고 있지만, 독자에게 좀더 강렬한 인상을 남기는 것은 증오 와 분노의 감정이 아니라 이 시의 밑바닥에 깔린 짙은 페이소스이기 때문이 다. 페이소스는 결국 자아와 세계의 근원적 결렬에 대한 자각, 그리고 자아 의 왜소함과 무력함에 대비되는 세계의 광포함과 압도적인 힘, 다시 말해 전쟁의 광기와 비극성에 대한 인식에서 비롯되는 감정이다. 그리고 페이소 스에 내재된, 세계와 자기 존재에 대한 성찰 가능성은 북한 사회가 요구하 는, 동원을 위한 사상적 일체화를 위협하는 독소일 수 있었다.

또 절망과 비탄 끝에 증오와 분노의 화신으로 돌변하는 ‘머리가 절반 흰 아버지’의 형상은, 북한이 내건 전쟁의 명분을 훼손시키는 것이기도 했 다. 이 때의 증오와 분노란, 명확한 목표와 대상을 지닌 것이라기보다 차라 리 절망과 공포와 비탄의 끝에 터져 나오는 단말마적인 발악에 가까운 것일 수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임화의 ‘머리가 절반 흰’ 아버지가 토로하는 분노와 증오와 저주의 감정은, 비록 강렬하기는 하지만, 전쟁기 북한문학이 요구했던 ‘증오의 휴머니즘’ 수준에는 미달하는 것일 수 있었던 것이다.

엄중하게 지적하였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며칠 뒤 한 여학생이 다가오는 명절날 이 시를 낭송하기 위해서 암송하는 것을 보고 이 시를 상세히 분석하여 그 속에 내재된 패배주의, 투항주의, 염전사상을 엄중하게 비판했다는 것이다. 이에 비해 류만의 진술은 이것과 약간 차이가 난다. 즉, 1953년 3월 학생들의 예술소조 활동 을 지도하던 김정일이 어떤 여학생이 이 시를 읊는 것을 보고 이 시에 표현된 ‘부 르죠아적 사상독소’를 단박에 파악했다는 것이다. 류만, 현대조선시문학연구 (사 회과학출판사, 1988) 19쪽. 장형준과 류만의 진술은 모두 김정일이 임화의 시에 내 재된 투항주의와 염전사상을 밝혀내고 난 뒤에야 비로소 임화 일파에 대한 본격 적인 단죄가 시작되었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이는 말할 것도 없이 김정일의 조 숙한 천재성을 부각시키기 위한 것이다. 따라서 임화의 시에 대한 최초의 비판이 어떤 상황에서 이루어졌느냐와 관련된 사소한 차이는 무시되어도 좋다. 하지만 이 무렵 김정일의 나이가 12세에 불과했던 점을 감안하면 류만이나 장형준의 주 장은 조작된 신화일 가능성이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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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맥락에서라면 임화의 시가 ‘염전사상’을 유포했다거나 ‘조국해방전쟁’

과 영웅들을 모욕했다는 북한 평론가들의 지적을 근거가 없는 중상과 비방 이라고 할 수만은 없다.

1950년 12월 25일 황해도 선계고을 602고지에서 전사한 공화국 영웅 김 창걸을 그린 <흰 눈을 붉게 물들인 나의 피 위에>에서도, 장황한 어조로 자신이 감당해야 할 희생을 이야기하는 서정적 주인공의 모습은 북한이 요구하는 대중적 영웅의 모습에 미달하는 것이었다25). 서정적 주인공은

“불의 뜨거움을 믿는/원쑤들에게 조선 청년의 피가/불보다 뜨거움을 알게 하라/석벽의 두터움을 믿는/원쑤들에게 조선청년의 가슴이/석벽보다 두터 움을 알게 하라/강철의 굳음을 믿는/원쑤들에게 조선청년의 결심이 강철보 다 굳음을 알게 하라”고 부르짖지만, 결단을 앞둔 자신의 내면을 장황하게 토로함으로써 정작 영웅적 자기 희생의 순간은 끝없이 지연되고 있기 때문 이다. 이 작품이, 서정적 주인공의 “비겁성과 나약성을 보여주고 영웅적 비장성과 혁명적 랑만 대신에 애통한 감정과 비애의 눈물을 자아내게”26) 함으로써 공화국의 영웅을 모욕했다는 비판을 받은 것은 이 때문이었다.

공화국이 필요로 하는 영웅이란 국가의 호명 앞에 일사불란하게 복종하고 헌신하는 존재를 가리키는 것이었거니와, 이 영웅에게는 내면이 필요하지 않았던 것이다. 내면은 두려움도, 주저도, 회의도 없는 단호한 영웅적 행동 을 불가능하게 하기 때문이다.

임화의 시를 비판한 북한이 논리에 따르면 고상한 애국주의로 무장한 영웅은 처음부터 끝까지 영웅으로 그려져야 하고, 그들의 가족은 언제나 영웅의 가족다운 품위와 위엄을 지키는 것으로 그려져야 했다. 문학적 형상

25) 신형기․오성호, 앞의 책, 같은 곳.

26) 장형준, 앞의 책, 43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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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의 대상이 되는 순간 영웅은 단 한순간이라도 영웅답지 못한 모습을 보여 서는 안 되고, 그들의 가족 또한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이 같은 영웅에 대한 형상화의 평면성은 전쟁기의 시들에서도 되풀이해서 나타나는 것이지만, 임화의 작품에 대한 공개적인 비판은 이런 경향의 고착화를 가져왔다. 비판 자의 정치적 의도에 따라 작품의 일부가 전체로부터 분리되어 왜곡되게 비판될 소지가 있는 한, 자칫 영웅의 모습이 그 영웅적 행위에 걸맞지 않게 비속화되거나 단 한순간이라도 비탄과 절망에 사로잡힌 것으로 그려지지 않도록 세심한 주의가 기울여져야 했다. 비탄과 절망을 딛고 일어서서 인간 의 위엄을 보여주는 영웅의 형상은 허용되지 않았으며 영웅은 매순간마다 스스로의 영웅성을 입증하는 행위를 수행하는 것으로 그려져야 했던 것이 다.

그러나 임화가 창조한 영웅은, 스스로의 행동을 통해 그 영웅성을 입증하 는 존재가 아니라, 심리적 갈등과 내적 동요 때문에 행동의 순간을 끊임없이 지연시키는 존재였다. 이 점은 안함광의 지적처럼 임화의 인텔리적 성격과 관련된 것이었다. 하지만 안함광에게서는 충분히 극복 가능한 것으로 여겨 졌던 이 인텔리적 성격은, 앞에서 말한 감상적인 성격과 함께 임화에 대한 단죄 과정에서 극복 불가능한 근본적인 결함으로 간주되었다. 일단 임화에 대한 단죄를 정당화하고 임화의 죄상을 만천하에 폭로해야 하는 과제가 주어진 한, 사소한 결점은 치명적인 것으로, 부분적인 결함은 근본적인 것으 로 부각되어야 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를 입증하기 위해서 동원된 것은 작품 전체가 아니라 몇몇 특정 한 구절들이었다. 작품의 일부를 전체 구조로부터 단절시키고 그것이 직접 적으로 환기하는 정서적 효과만을 문제삼는 것이야말로 북한 평론가들이 임화의 시를 비판하는 일반적인 방식이었던 것이다. 마치 플라톤이 비탄에 빠진 영웅의 모습이 용기를 미덕으로 해야 할 전사들에게 부정적인 영향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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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칠 수 있다는 이유에서 호메로스의 서사시를 비판한 것과 비슷한 일이 벌어진 것이다27). 가령 엄호석이, 임화의 해방 전 작품들이 “절망과 통곡과 비애를 노래하면서 노동계급의 혁명 사업은 아무러한 전망도 없는 절망의 길이며 일제에 반항하는 것은 무의미하다는 사상을 인민들에게 퍼뜨렸다”

고 지적하면서 그 예로 “‘외로이 남은 깨어진 화로’”의 형상을 제시했던 것도 비슷한 맥락에서였다28).

이런 식으로 작품의 한 부분을 침소봉대하여 작품 전체를 매도하는 방 식29)은 한설야가 이미 선구적으로 보여주었던 방식이었다. 한설야가 비판

27) 최유찬 외, 문학과 사회 , 실천문학사, 1994, 91-92쪽. 플라톤은 미적 체험을 작품 의 각 부분이 주는 감각적 효과로부터 형성되는 인상과 직결시키고 있다. 그는 부 분적인 장면이 환기하는 일시적인 정서적 효과와 미적 효과를 동일시하고 있는 것이다. 임화의 시에 대한 비판도 이런 맥락에서 이루어졌다. 이처럼 작품의 특정 부분을 작품 전체로부터 탈문맥화하여 비판하고 매도하는 것은 정치가 공공연하 게 문학을 압살하는 전형적인 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

28) 엄호석, 「노동계급의 형상과 미학상의 몇 가지 문제」, 조선문학 1953.11.

29) 이런 식의 작품 해석 방식은 남로당 계열 문인들의 작품을 비판할 때 일반적으로 사용되었던 듯 싶다. 가령 조중친선을 주제로 한 이태준의 소설 <고귀한 사람들

>은 말미에서 중국인민지원군과 조선인 처녀 사이의 연애를 그림으로써 조중우 호의 주제를 속화시켰다는 이유로 혹독한 비판을 받아야 했다. 또 <호랑할머니

>의 경우는 해방 직후 문맹이 완전히 퇴치된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호랑할머니와 그 마을 주민들의 대다수를 문맹으로 그림으로써 혁명의 성과를 부정하고 있다는 비판을 받았다. 하지만 이처럼 작품의 특정부분을 작품 전체로부터 독립시켜 비 판하는 방식이 딱히 남로당 계열의 문인들에게만 적용되었던 것은 아니다. 가령 한설야의 <모자>에 대한 비판 역시 작품 전체에 대한 것이 아니라, 작품의 일부 가 환기하는 정서적 효과였다. 즉, 대독전(對獨戰)에 참전했다가 북조선에 온 소련 군의 정신적 황폐함과 그로 인한 파괴적 행동을 그림으로써 소련군 병사의 모습 을 왜곡하고 조소 친선의 주제를 훼손시켰다는 것이 비판의 요지였다. 하지만 이 런 식의 비판은 문자 그대로 ‘귀에 걸면 귀고리 코에 걸면 코걸이’ 식으로 누구의 어떤 작품에든 적용될 가능성이 있다는 데 근본적인 문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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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요지는, <너 어느 곳에 있느냐>는 “전선에 간 자식을 생각하여 한정없 이 초조해진 아버지의 마음과 ‘종잇장처럼 얇아진’ 어머니의 가슴, 그리고 온 집안이 전선에 간 자식을 생각하여 잠 못 이루는 광경을 그렸”고, <바람 이여 전하라>는 “‘머리 더욱 희고 가슴 더욱 얇아진’ 어머니를 그렸으며”

<흰 눈을 붉게 물들인 나의 피 위에>는 “우리의 마뜨로쏘브 영웅의 애국주 의를 파렴치하게 왜곡하면서 영웅의 어머니를 아무도 돌보는 사람이 없는 듯이 외로운 어머니로서 절망적으로 보여 주었”으므로 반동적인 작품이라 는 것이었다30). 요컨대 임화는 “우리의 어머니들을 무기력하고 초조에 떨고 고독감에 잠겨 절망과 영탄과 통곡으로 세월을 보내는 그러한 어머니로 모욕하였으며, 우리 후방 인민들의 영웅적 투쟁 모습을 가련한 고역자의 모습으로 묘사함으로써 후방의 공고성을 파괴하려 했다”는 것이다31).

임화의 시에 대한 이와 같은 비판은 두고두고 되풀이되었다. 그것은 그에 대한 숙청의 정당성을 입증하기 위한 것이기도 했지만, 북한이 추구하는 형상화의 원칙을 반복적으로 강조하기 위한 것이기도 했다. 이미 과거의 사건이 되어버린 ‘ 문장독본 사건’이나 ‘ 응향 사건’이 임화 등 남로당 계 열 문인들과의 관련 속에서 끊임없이 상기된 것도 같은 맥락에서였다. 문 장독본 , 관서시인집 , 응향 사건들은 모두 남로계열 문인들의 은밀한 책동과 사상적 영향에서 비롯된 것으로 해석되었다. 관서시인집 사건에

30) 한설야, 「평양시 당 관하 문학예술선전출판부문 열성자 회의에서 한 한설야 동지 의 보고」, 조선문학 1956.3, 김재용(외)편, 자료집 3, 508쪽.

31) 이런 논리는 뒷날 김명수에 의해서도 고스란히 되풀이되었다. 김명수는 6.25 기간 중에 임화가 발표한 작품의 경향을 다음과 같이 정리했다. 첫째, 당과 인민의 결 속을 와해시키며 “전선과 후방과의 공고한 련계를 약화시키도록”, 둘째, “인민군 대의 고상한 애국주의와 대중적 영웅주의를 와해시키며 그것을 비극적이며 절망 적인 감정으로 유도하도록”, 셋째, “염전기분과 패배주의 사상을 침투시키도록”

작품을 썼다는 것이다. 김명수, 앞의 글, 16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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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루되었던 박남수나 양명문 등의 월남은 이태준과 관련된 것으로, 또 응 향 사건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던 소련계 한인 정률은 임화의 시를 고평했다 는 이유로, 특히 로동신문 의 주필이었던 기석복은 임화, 김남천 등에게 많은 지면을 할애했다는 이유로 매도되었다32). 이 이외에도 4차 전원회의를 계기로 숙청되었던 허가이, 박창옥, 박영빈, 전동혁 역시 박헌영 및 임화 일파와 사상적으로 결탁하여 반당행위를 자행한 것으로 매도되었다.

이러한 공공연한 비판이 의미하는 바는 자명한 것이었다. 김일성과 경쟁 관계에 있거나 김일성의 권력독점을 방해할 만한 세력은 모두 반동이며, 서로 은밀하게 결탁하여 반당적이고 반국가적인 활동을 해온 이들 반동에 대한 숙청은 불가피하고 정당한 것이라는 것이다. 동시에 그것은 작가나 시인들에게 당의 요구에 일사분란하게 복종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사실을 공개적으로 선언한 것이나 다를 바 없었다. 더욱이 한설야는 “우리 문학 예술 분야에 아직도 남아 있는 비당적 요소들과 해독적 사상을 남김없이 적발 폭로하는 과업”33)이 남아있다고 천명함으로써 작가나 시인들에게 다 시 한번 압박을 가했다. 이는 문학에 대한 관료적 통제가 더욱 강화될 것임 을 공개적으로 천명한 것이었다.

이런 사태는 문학에 대한 관료적 통제가 본격화하는 계기가 되었던 ‘ 응 향 사건’에 비해 훨씬 더 부정적인 것이었다. ‘ 응향 사건’의 경우에는 적 어도 이런 식으로 작품의 한 부분을 전체로부터 탈문맥화하여 난도질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작품에 대한 비판이 곧바로 시인에 대한 직접적이고 물리적인 제재로 이어지지도 않았다. 월남한 구상 을 제외한 다른 시인들(박경수나 정률)은 비판을 받은 뒤에도 다시금 작품

32) 한설야, 앞의 글, 33) 앞의 글, 52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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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을 할 수 있었다. 또 관서시인집 과 관련해서 비판을 받았던 양명문 역시 월남하기 전 송가 (1947, 문화전선사) 같은 시집을 내는 등 활동에 제약을 받지는 않았다. 이들에게 남아 있던 부르주아적 요소는 비판과 견인 의 대상이었지 숙청의 대상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러나 임화 등 남로계열의 문인들에 대한 숙청과 관련하여 ‘ 응향 사건’의 교훈을 들먹이는 한설야에 게서 이런 식의 관대함을 기대하기는 어려웠다. 그런 점에서 임화를 포함한 남로당 계열 문인들에 대한 숙청은, 응향 사건에 시작된, 문학에 대한 관료적 통제의 결정판이라고 할 수 있다. 이로써 북한 사회가 요구하는 정신과 도덕의 승리를 담보해 줄 구심적 단결을 저해할 수 있는 다른 목소리 가 나올 수 있는 여지는 봉쇄되었다.

Ⅳ. 마무리

남로당 계열의 몰락과 임화의 숙청은, 단순히 과거의 행위에 대한 단죄라 고 할 수만은 없다. 오히려 그것은 북한이 처한 현재와 추구하는 미래와의 관련 속에서 이해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었다. 즉, 진행중인 전쟁과 앞으로 제기될 전후 복구건설의 과제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당의 사상 적, 조직적 강화가 요구되었고 이를 저해할 수 있는 일체의 요소들을 배제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북한의 입장에서 임화가 정말 미제의 간첩이 었느냐, 그렇지 않았느냐는 사실 그다지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을 수도 있었 다. 진짜 중요한 것은 임화의 존재와 시가 전쟁과 전후 복구건설의 승리를 담보해 줄 도덕과 정신의 강화, 그리고 이를 통한 전면적 동원체제 구축에 장애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임화가 설사 간첩 혐의로 처형당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숙청을 면하기는 어려웠다고 할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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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다.

앞에서 살펴 본 것처럼, 임화의 시는 북한이 요구하는 ‘증오의 휴머니즘’

에 미달하는 것이었다. 무엇보다 임화의 시를 지배하고 있는 페이소스는 동원을 요구하는 공적 목소리에 의해서 강제되는 도덕적 엄숙주의와 열광 대신 자신에 대한 성찰의 가능성을 내재하고 있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비애 의 정조가 세계와 자신의 존재에 대한 성찰의 계기가 될 수 있다면 그것은 전쟁 수행과 전후 복구 건설을 위해 요구되는 전면적인 동원체제를 구축하 는 데도 마찬가지로 장애가 될 수 있었다. 임화에 대한 가혹한 숙청은 바로 이 때문이라고 보인다. 임화의 시와 관련하여 줄곧 그 속에 내재된 염전사상 과, 공화국의 영웅들에 대한 모독 등이 운위된 것은 이 점과 관련된다. 임화 의 시에 깔려 있는 비애의 정조는 당과 국가의 요구에 따른 전면적 동원체제 에 균열을 가져올 수 있는 위험한 독소로 간주되었던 것이다. 이 점에 비한 다면 그의 시에 덧붙여진 갖가지 비판은 지엽적인 것에 불과했다.

남로당 계열에 대한 숙청 이후 1956년 8월의 종파투쟁을 거치면서 김일성 은, 문자 그대로 절대적인 권력자로 등장했다. 그런 의미에서 6.25와 전후복 구 건설 과정은 김일성의 권력 독점을 가능케 해 준 중요한 계기였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문학에 관한 한, 임화의 처형이 곧바로 문학에 대한 관료적 통제의 강화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이 시기에는 아직 상당한 정도로 창작의 자유가 허용되고 있었고, 전후 건설의 의욕을 고취시키고 그 성과를 찬양한 작품들에도 상당한 진정성을 지니고 있었다고 보인다.

이는 소련에서 스탈린이 사망한 뒤 개인숭배에 대한 비판이 제기되면서, 북한에서도 일시적으로 개인숭배 경향과 도식주의에 대한 비판이 대두되고 상당한 정도로 창작의 자유가 허용된 것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34).

34) 신형기․오성호, 앞의 책, 175-18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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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 기간은 길지 않았다. 1958년에 들어서서 천리마운동이 본격화 되면서 제한된 수준에서나마 유지되었던 창작의 자유는 더 이상 보장되지 않게 되는 것이다. 이미 권력을 독점한 김일성으로서는 자신의 장악한 권력 에 대한 인민의 동의를 이끌어내기 위해서, 그리고 새로운 비약을 위해 요구되는 사상혁명을 위해 문학에 대한 통제를 포기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이른바 천리마 대고조기로 명명된 1958년을 고비로 문학에 대한 사상적, 관료적 통제는 다시금 강화되었다. 특히 중소분쟁의 와중에서 그 나름으로 주체적인 노선을 견지하고자 했던 북한의 입장은 문학에도 이미 강력한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문학은 이제 천리마 기수와 그 원형인 공산주의 혁명투사(김일성의 항일유격대 전사)들을 그려야 했다. 이들은 이미 사상의 혁명에서 요구되는 정신과 도덕을 가장 높은 수준에서 구현한, 따라서 놀라 운 비약을 이룩할 새 시대를 이끌 기수들이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천리마 대고조기에 들어서면서 당이 제시한 문학적 형상화의 방향과 원칙은 작가 나 시인들이 반드시 따라야 할, 문자 그대로의 원칙이 되었다.

이 시기에 임화와 반동적 문인들의 죄과가 되풀이해서 비판된 것은, 당의 요구에서 벗어나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주지시키는 효과를 발휘했다. 임화 는 일종의 반면교사(反面敎師)일 수 있었던 것이다. 이 반면교사는 당이 제시한 방향과 형상화의 원칙을 벗어나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되풀이해서 상기시켰다. 임화의 숙청은 당이 제시한 길에서 벗어난 작가가 마주치게 될 운명을 예시한 것이었다. 일찍이 플라톤이 제안한 바 있던 시인추방론은 시공간의 차이를 뛰어넘어 전후 북한 사회에서 가장 가혹한 방식으로 구현 되고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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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고문헌

단행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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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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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BSTRACT

Lim Wha's Traces after the escape to North Korea and Expulsion

Oh, Seong ho

In this paper, I shared four poems and a book written by Lim Hwa who was one of the most prominent poets of KAPF group, all of which have hardly been known to critics or reachers in South Korea. I would not say I am fully satisfied with the result of my research so far. I was not able to introduce the full text for some of poems but just to confirm the titles because of difficult access to the North Korean materials under current political situation. I believe, however, it is unavailable to gather any available information, accumulate as much as possible, and at a certain point, to put them together in an effort to reorganize his life after his escape to North Korea and interpret his poetry on.

To explain Lim Hwa had been expelled from their political system, I analysed some sentimental features in his poem published in North Korea. His pathos was not adjustable to their system, where they were ruled by humanism of hate and they wanted to mobilize the whole society to carry out the war and later to focus on the post-war rehabilitation. One becomes pathetic when he understand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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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uman beings are too meager to fight to against the gigantic and outrageous world. Once he had self-reflection stimulated by pathos, he was considered a crack, threatening to break the wholly unified and fully mobilized system in North Korea. It was the major reason why his poems were hardly acceptable to and even severly criticized by critics, and finally purged from the society. Although his political choice was socialism, Lim, a born poet, could never fully agree with its political logics.

Key words | humanism of hate, mobilization, pathos, self-reflection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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