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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털 기술 시대의 다큐멘터리 사진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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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 재현에서 수행으로

주 형 일*

1)

Ⅰ. 들어가며

Ⅱ. 다큐멘터리 사진영상과 사건의 재현

Ⅲ. 수행으로서의 다큐멘터리 사진영상

Ⅳ. 나가며

I. 들어가며

1855년 3월 영국 사진가 로저 펜튼(Roger Fenton, 1819-1869)은 영국 정부 의 요청으로 크림 전쟁(Crimean War)을 촬영하기 위해 사진 장비를 실은 큰 마 차를 끌고 조수와 하인을 대동한 채 크림 반도 남쪽에 있는 도시 발라클라바 (Balaklava)에 도착했다. 그는 6월까지 그곳에 머물면서 전투 지역의 풍경과 군인 들을 촬영했다. 영국 정부로부터 공식적인 허가를 받은 종군 사진가였지만 그가

* 영남대학교 교수

이 논문은 한국미학예술학회 2019년 특별기획심포지엄에서 발표한 원고를 수정보완하여 게재한 것임.

* DOI http://dx.doi.org/10.17527/JASA.57.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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촬영한 사진에는 전투, 사망한 군인, 폭발, 파괴 같은 장면이 재현되어 있지 않았 다. 당시 사진 기술의 한계로 전투 장면을 직접 촬영하기가 힘들었을 뿐만 아니 라 국내의 비판 여론을 피하기 위해 전쟁을 가능한 미화하고자 한 영국 정부의 의도가 반영되었기 때문이었다. 영국에 돌아온 펜튼은 런던을 비롯한 여러 도시 를 돌면서 300여장의 크림 전쟁 사진들을 전시했다. 사진의 판매는 신통치 않았 고 사진들은 곧 잊혀졌다.

1908년 미국의 비영리단체인 국가아동노동위원회(National Child Labor Committee, NCLC)는 사진가 루이스 하인(Lewis Hine, 1874-1940)을 고용했다.

10여 년 동안 하인은 신분을 숨긴 채 공장에 들어가 아동 노동자들을 촬영했다.

NCLC는 하인이 신변에 위험을 느끼면서도 꿋꿋이 촬영한 사진들을 계속 출판했 다. 이 사진들은 미국에서 아동노동의 실태를 고발하고 사회의 관심을 환기시킴 으로써 마침내 아동노동을 금지하는 법이 제정되도록 만들었다.

1944년 6월 6일 연합군은 프랑스 노르망디 해변에서 상륙 작전을 감행했다.

오마하 해변에 군인들과 함께 상륙하면서 종군 사진가 로버트 카파(Robert Capa, 1913-1954)는 바닷물을 헤치며 나아가는 군인들을 촬영했다. 106장의 사진을 촬영 해 런던에 보냈지만 현상 기사의 실수로 대부분의 필름이 소실되고 11장의 사진 만이 살아남았다. 이 사진들은 그 해 6월 19일 라이프 Life 잡지에 실려 공개되 었고 상륙 작전의 긴박함을 잘 재현한 영상으로 평가받았다.

1972년 6월 8일 네이팜탄이 베트남의 작은 마을에 떨어졌다. 화상을 입은 아이들은 울부짖으며 도망쳐 나왔다. AP통신 사진가였던 닉 우트(Nick Ut, 1951- ) 는 불붙은 옷을 모두 벗어던지고 알몸으로 도망치는 어린 소녀와 다른 아이들을 촬영했다. AP의 편집자는 소녀의 알몸이 드러난다는 이유로 처음에는 사진의 공 개를 거부했지만 전쟁의 참상을 재현하는 사진의 힘이 워낙 컸기 때문에 결국 사 진을 출판하기로 결정했다. 이 사진은 당시 대통령이었던 닉슨이 조작 사진이 아 닌지 의심했을 정도로 대중에게 큰 충격을 줬고 반전 여론을 확산시키는데 기여 했다.

2001년 9월 11일 비행기 두 대가 뉴욕의 월드 트레이드 센터에 충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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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동의 건물은 불에 탔고 결국 무너져 내렸다. 건물의 상층부에 있었기 때문에 탈출할 수 없었던 사람들은 불과 연기를 피해 뛰어내렸다. 불타는 건물과 뛰어내 리는 사람들, 그리고 결국 무너지는 건물의 모습이 텔레비전을 통해 생중계되었 다. AP통신 사진가 리차드 드류(Richard Drew, 1946- )는 건물에서 뛰어내리는 사람들을 촬영했다. 사진들 중의 하나가 <떨어지는 남자 Falling Man>란 이름으 로 언론을 통해 공개되었다. 사진을 본 미국인들은 분노했다. 자살을 죄악시하는 문화를 가진 미국인들은 사진 속의 남자가 스스로 뛰어내렸다는 것을 인정할 수 없었다. 쏟아지는 비난 앞에서 사진은 결국 자취를 감췄고 그 자리를 용감한 소 방대원을 재현한 사진이 대신했다.

2009년 6월 20일 이란의 테헤란에서 부정 선거를 비판하는 반정부 시위가 일어났다. 거리에서 네다 솔탄(Neda Agha Soltan)이 민병대원이 쏜 총에 맞았다.

가슴에 총을 맞고 쓰러진 그녀는 곧 피를 토하며 죽어갔다. 여러 시민이 동영상 을 촬영했다. 동영상은 곧 인터넷을 통해 전 세계에 공개되었다. 영상을 보고 분 노한 사람들은 솔탄의 피로 뒤덮인 얼굴 사진을 들고 반정부 시위에 나섰다. 피 가 그녀의 얼굴을 뒤덮은 장면을 캡처한 사진은 수 없이 복사되어 여러 시위에서 이용되었다.

2011년 12월 17일 이집트 카이로에 있는 타흐리르 광장(Tahrir Square)에서 이집트 군인들이 시위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쓰러진 한 여성을 구타하면서 끌고 갔다. 군인들이 땅에 쓰러진 여성을 질질 잡아끄는 과정에서 여성의 웃옷이 말려 올라가 브래지어가 노출되었다. 한 시민이 근처에 있는 건물 위에서 이 장면을 촬영했다. 동영상은 즉시 인터넷을 통해 전 세계로 퍼졌고 영상을 보고 분노한 이집트 시민들은 속옷이 노출된 채 군인들에게 끌려가는 여성을 담은 사진을 인 쇄해 들고 나와 시위를 벌였다. <파란 브라를 한 여성>이라고 명명된 이 사진은 이집트 시민 혁명의 아이콘(icon)이 되었다.

2019년 3월 15일 뉴질랜드 크라이스트처치의 이슬람 사원에서 브렌턴 태런 트(Brenton Tarrant)가 사람들에게 총을 난사해 50명이 사망하고 다수의 부상자 가 발생했다. 이 남성은 헬멧에 부착한 카메라를 이용해 촬영한 총격 장면을 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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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북을 통해 17분간 생중계했다. 영상은 페이스북 운영진이 삭제하기 전까지 1 시간 동안 전 세계에 공개되었으며 다른 사이트를 통해 공유되었다.

위에 열거한 사건들은 사진이 발명된 이후로 200여 년 동안 다큐멘터리 사 진영상이 어떻게 변화해 왔는지를 압축해 보여준다. 기술적 발명의 결과물이었던 사진은 기술의 발전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를 맺으며 변해왔다. 야외 촬영을 위해서 엄청난 무게의 장비를 마차로 옮기고 긴 노출시간을 감당해야 했던 19세 기 중반에서 정기적으로 출판되는 신문과 잡지에 인쇄된 사진을 보던 시기를 거 쳐 영상을 촬영하자마자 인터넷을 이용해 즉시 전 세계에 유통시킬 수 있는 현재 상황에 이르기까지 다큐멘터리 사진영상의 존재양식과 이용형태 그리고 사회에 미치는 영향은 크게 변해 왔다.

21세기에 들어와 디지털 기술 시대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면서 사진영상은 이 전 시대와는 매우 다른 방식으로 이해되고 이용되고 있다. 특히 정치적, 사회적 목적을 비교적 뚜렷이 드러내며 사용돼 온 다큐멘터리 사진영상은 기술의 발전은 물론 사회의 변화에 의해서도 직접적으로 영향을 받아 왔다. 과거의 다큐멘터리 사진영상이 기록과 재현이란 관점에서 이해되면서 신문, 잡지와 같은 인쇄 미디 어를 통해 대중에게 공개되었다면 현재의 다큐멘터리 사진영상은 동영상 미디어 및 인터넷 미디어와 결합하면서 실시간으로 소비되고 공유되고 있다. 이 글에서 나는 다큐멘터리 사진영상이 디지털 기술 시대에 어떤 방식으로 이용되고 있는지 를 살펴보고 다큐멘터리 사진영상에 새롭게 부여되고 있는 역할과 의미가 무엇인 지에 대해 생각할 기회를 갖고자 한다.

본격적인 논의를 시작하기 전에 먼저 명확히 해 둬야 할 것은 이 글에서 사 용되는 다큐멘터리 사진영상이란 용어가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장르로서의 다큐멘 터리 사진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여기에서 사용되는 사진영상이란 용어는 카메라로 빛을 기록하는 사진기술을 바탕으로 제작되는 정지영상과 동영상을 모 두 포함하는 영상을 지칭한다. 이 사진영상은 지표성(indexicality)을 기반으로 작 동하면서 객관적 현실과 사실을 기록하는 다큐멘트로서의 속성을 갖고 있는 것으 로 간주되기 때문에 다큐멘터리 사진영상이라고 명명될 수 있다. 따라서 여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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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 다루는 다큐멘터리 사진영상은 기존의 다큐멘터리 사진과 저널리즘 사진은 물 론 다큐멘터리 영화, 뉴스보도를 위한 동영상, 예술적 다큐멘터리 영상을 모두 포 함한다.

Ⅱ. 다큐멘터리 사진영상과 사건의 재현

19세기 초에 발명된 사진이 회화와 판화를 대체할 수 있는 영상으로 빠르게 자리를 잡은 것은 바로 당시 부르주아지의 세계관을 잘 재현했기 때문이다. 빠르 고 정확하게 대상을 재현할 수 있는 사진은 카메라라는 자동기계에 의해 만들어 지기에 근본적으로 객관성을 내포하고 있다고 여겨졌다. 실제로 사진은 지표성을 바탕으로 대상을 재현하는 최초의 영상이었다.1) 지표성 덕분에 사진은 인간과 자 연에 대한 관찰과 분석을 통해 얻은 지식을 기반으로 해서 인간과 자연을 이용하 고 착취해서 자본을 축적하고 이윤을 극대화하고자 하는 부르주아지의 필요에 잘 부응하는 영상이 될 수 있었다. 19세기 제국주의 국가들의 식민지 지배 과정에서 사진은 인류학 연구를 위해 이용되면서 유용한 식민 지배 수단으로 기능했고 멀 리 떨어진 곳에 있는 사람들과 사건들을 재현해 전달하는 영상으로 각광받았다.

영국 정부가 펜튼을 크림 전쟁의 한복판으로 보낸 것은 바로 이런 사진의 특성을 자신의 이익을 위해 이용하고자 했기 때문이었다.

크림 전쟁은 영국에서 최초로 여론을 등에 업고 참전이 결정된 전쟁이었다.

영국의 대중은 크림 전쟁을 사악한 러시아에 맞서 자유를 수호하기 위해 용감한 영국인들이 싸우는 정의로운 전쟁으로 이해했다. 크림 전쟁은 정보전달을 위해 전신이 사용되었으며 신문에 의해 광범위하게 보도된 전쟁이었다. 당시 전쟁터에 파견된 기자들은 전쟁 상황에 대한 기사를 신문에 연재했는데 전쟁이 교착 상태 에 빠지고 사망자가 늘기 시작하자 비판적인 기사들이 쏟아졌다. 특히 대부분의 1) 사진의 지표성과 관련해서는 다음의 논문을 참조할 것. 주형일, 「사진의 지표성과 의

미에 대한 고찰」, 한국언론학보 제50호 (2006), pp. 355-3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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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자가 전투 중에 발생한 것이 아니라 지휘관의 관리 잘못으로 인한 질병 등에 의해 발생한 것이었기 때문에 신랄한 비판 기사들이 신문에 게재되면서 영국 정 부는 곤혹스러운 상황에 빠졌다. 영국 정부는 비판 여론을 잠재우기 위해 전쟁터 의 긍정적인 모습을 보여줄 필요를 느꼈다. 펜튼 이전에도 사진가가 파견되었지 만 사고로 사망하는 바람에 목적을 달성할 수 없었다. 펜튼이 촬영한 전쟁터의 사진에는 건강하고 믿음직스러운 군인들과 광활한 풍경이 재현되어 있었다. 펜튼 의 사진은 전쟁의 현실을 기록해 보여주는 다큐멘트로 이해되었고 참전 군인들에 대한 영국 국민의 호감을 높이는 데 기여했다.2) 펜튼과 출판업자는 사진을 팔아 경제적 이윤을 얻고자 했지만 대중은 다큐멘터리 사진영상의 미적인 가치에 대해 아직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실패로 돌아갔다. 크림 전쟁은 최초로 사진에 기록된 전쟁이었지만 전쟁이 끝나자 사진도 대중의 기억에서 잊혀졌다.

하지만 펜튼의 작업은 사진이 현실의 모습을 기록하는 다큐멘트로,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특정한 정치적, 사회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현실을 재현하는 다큐멘 터리 사진영상으로 이용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줬다.

카메라에 의해 기록된 대상의 물리적 흔적인 사진은 대상의 형태를 완벽할 정도로 유사하게 재현할 뿐만 아니라 대상이 과거에 존재했음을 증명한다. 사진 의 이런 지표성으로부터 다큐멘터리 사진영상이 가진 힘이 나온다. 펜튼의 사진 을 보고 당시 참전했던 장교들과 병사들의 신원을 식별해 내는 것, 하인이 촬영 한 사진이 아동 노동의 실태를 고발할 수 있는 능력을 갖는 것, 카파가 촬영한 노르망디 해변의 병사가 누구인지를 밝혀내는 일이 가능한 것은 바로 사진영상의 지표성 때문이다. 사진영상은 이 특성에 기대 사실을 객관적으로 증명하는 역할 을 부여받게 되었다.

회화와 판화가 현실과 닮은 영상이라면 사진은 현실을 정확하게 복제한 영 상이다. 그래서 사진은 앗제(Eugène Atget, 1857-1927)가 말했듯이 “예술가를 위

2) Lucian Ciupei, “Censorship in the Crimean War Photography. A Case Study: Carol Pop de Szathmari and Roger Fenton”, in: Journal of Media Research, vol. 5, no. 1 (2012), pp. 61-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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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다큐멘트”가 될 수 있었다.3) 회화와 판화가 이성으로 교정된 눈이 바라 본 세 상을 재현했다면 사진은 바라보는 행위 자체의 결과물이었다. 회화와 판화가 재 현한 세상이 사람들의 이해를 바탕으로 재구성된 세상이었다면 사진이 재현한 세 상은 시각에 포착된 날것의 세상이었다. 손택(Susan Sontag, 1933-2004)이 말했 듯이, “사진 영상은 세계에 대한 진술이라기보다는 세계의 부분인 것처럼 보인 다.”4) 이런 이유로 회화나 판화와는 달리 사진은 곧장 저널리즘과 결합될 수 있 었다.

사진이 사실을 증명하는 다큐멘트로 이해되는 순간부터 사진의 정치적, 사 회적 이용은 결정되었다고 볼 수 있다. 어려운 기술적 여건에도 불구하고 영국 정부가 굳이 전쟁터에 사진가를 보내려고 한 이유도 다큐멘트로서의 사진의 역할 을 기대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펜튼이 촬영한 사진의 사례에서 나타나듯이 사진 이 다큐멘트로 이용된다는 것은 특정한 정치적, 사회적 목적을 위해 봉사한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왜냐하면 모든 다큐멘트는 본성상 기본적으로 조작의 위 험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사진에서 다큐멘트의 특성을 발견한 순 간부터 사진은 조작의 위험에 노출되었다. 합성이나 삭제, 연출의 방법을 통해 노 골적으로 조작되지 않더라도 펜튼의 사례가 보여주듯이 대상의 선택과 프레이밍 을 통해 사진은 사건의 특정한 모습을 부각시키면서 사건에 편향된 의미를 부여 한다. 실제로 장르로서의 다큐멘터리 사진은 처음부터 순수한 기록물이나 다큐멘 트로서의 사진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 양상의 진실을 드러냄으로써 보는 사람을 교화”하는 것으로 이해됐다.5)

20세기에 들어서 카메라가 작고 가벼워지고 촬영을 위한 노출시간이 줄면서 다큐멘터리 사진영상의 제작이 용이해졌다. 인쇄기술의 발달로 사진이 신문, 잡지 에 게재될 수 있자 다큐멘터리 사진영상의 정치적, 사회적 영향력은 더욱 커졌다.

3) 박원우, 윤학로, 「으젠느 앗제(Eugène Atget)와 진화하는 도큐먼트 - 앗제의 사진을 읽는 두 시선」, 글로벌문화콘텐츠 제13호 (2013), pp. 63-90, p. 67.

4) 수전 손택, 사진에 관하여, 이재원 옮김 (이후 2005), p. 19. 번역판의 문장을 수정함.

5) 아더 로드스타인, 다큐멘터리 사진론, 임영균 옮김 (눈빛 1993), p.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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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큐멘터리 사진영상으로 지면을 채운 신문과 잡지들이 출판되어 큰 인기를 끌었 다. 아동 착취, 도시 빈민, 인종 갈등, 환경 파괴 등의 사회문제들과 시위, 전쟁 등 의 사회적 분쟁을 기록, 재현해 보도하거나 고발하는 다큐멘터리 사진영상들이 제작되었다. 아동 노동 문제를 고발하고 결국엔 금지시키는데 기여한 루이스 하 인의 사진은 대표적인 사례이다.

제1차 세계대전부터 러시아 혁명, 제2차 세계대전, 중국의 공산화, 한국 전 쟁, 베트남 전쟁에 이르기까지 정치적 분쟁과 사회적 격변의 상황에서 다큐멘터 리 사진영상은 그 어느 때보다도 중요한 미디어로 활용되었다. 다큐멘터리 사진 영상은 객관성에 대한 믿음을 무기로 현실을 특정한 방식으로 재현해 의미를 부여 함으로써 큰 정치적, 사회적 영향력을 발휘했다. 노동자 사진가(Arbeiter-Fotograf) 운동, 포토 리그(Photo League) 등 특정한 목적을 가진 집단적 사진 운동이 조직 되었고 카파,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Henri Cartier-Bresson, 1908-2004) 등과 같은 세계적 명성을 떨치는 사진기자들이 등장했다.

이처럼 다큐멘터리 사진영상은 처음부터 정치적, 사회적 목적으로 이용됐다.

사진은 현실을 정확하게 보여주고 사실을 증명한다는 믿음을 바탕으로 특정한 집 단이나 계급에게 유리한 방식으로 현실을 재현하는 역할을 한 것이다. 정치적, 사 회적 목적으로 이용되는 다큐멘터리 사진영상에서 중요한 것은 누가 무엇을 어떻 게 재현하느냐하는 문제였다. 즉, 현실을 사회적으로 재구성하고 의미를 부여하는 행위로서의 재현이 문제가 됐다. 대상을 재현(representation)한다는 것은 글자그 대로 대상을 다시 보여준다(re+present)는 의미이다. 대상 자체를 그대로 보여주 는 것이 아니라 특정한 언어를 이용해 대상을 다시 묘사한다는 점에서 재현은 특 정한 관점에서 대상을 재구성해서 특정한 의미를 부여하는 작업이라고 할 수 있 다. 스튜어트 홀(Stuart Hall, 1932-2014)에 따르면, 재현은 “다른 사람들에게 세계 에 대해 의미 있는 어떤 것을 말하기 위해 언어를 사용하는 것”이다.6) 여기에서 언어는 의미를 담아 전달할 수 있는 기호로서 말, 문자, 영상 등을 포함한다. 언어 6) Stuart Hall (ed.), Representation: cultural representations and signifying practices

(London: Sage 1997), p.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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를 통해 대상을 재현하는 것은 언어를 통해 대상에 대한 의미를 만들어내고 전달 하는 것이다. 언어라는 것이 한 사회의 구성원들이 공유하는 문화적 산물이라는 점에서 재현은 동일한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세계에 대한 생각과 의 미를 공유하는 작업이다.

홀에 따르면, 언어를 통한 대상의 재현은 크게 세 가지 관점에서 이해될 수 있다. 첫 번째, 반영적(reflective) 관점이 있다. 이것은 언어가 마치 거울처럼 대상 을 반영한다는 생각에 기반을 둔다. 대상의 의미는 이미 대상 안에 들어 있고 언 어는 단지 대상의 의미를 그대로 비춰 보여줄 뿐이라는 것이 이 생각의 요지이다.

영상, 특히 사진영상은 거울이 대상을 반영하듯이 대상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 는 것처럼 이해될 수 있기 때문에 영상에 의한 재현은 대상의 충실한 반영으로 이해될 수 있다. 두 번째, 의도적(intentional) 관점이 있다. 언어의 사용자는 자신 만이 가진 특별한 의미를 대상에 부여하는 방식으로 대상을 재현할 수 있다. 즉, 언어 사용자의 의도에 의해 대상의 의미가 결정되는 것이다. 세 번째, 구성주의적 (constructionist) 관점이 있다. 이 관점에 따르면, 대상의 의미는 대상 자체나 언 어 사용자의 의도가 아니라 사회의 재현 체계에 의해 구성된다. 다시 말해, 대상 의 의미는 사회문화적으로 구성된다. 언어 자체가 사회문화적으로 만들어진 것이 고 사회 구성원들에 의해 공유되는 상징 체계라는 점에서 언어를 통한 재현은 사 회문화적인 의미의 구성 행위이다. 홀은 이 세 가지 관점 중에서 구성주의적 관 점이 재현의 속성을 가장 잘 이해하고 있다고 주장한다.7)

사진영상과 관련해서 재현의 문제는 다른 언어보다는 조금 더 복잡한 양상 을 갖는다. 왜냐하면 사진영상은 지표성을 기반으로 대상을 재현하기 때문이다.

앞에서 말했듯이, 사진영상은 대상의 정확한 형태를 표현하면서 대상이 존재했음 을 증명하는 다큐멘트라는 속성을 갖는다. 사진영상을 통해 대상을 재현하는 것 은 마치 거울이 대상을 그대로 비추듯이 대상을 완벽히 반영하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는 것이다. 사진영상에 의한 대상의 재현을 이렇게 이해한다면, 대상을 재현 7) Stuart Hall (ed.), Representation: cultural representations and signifying practices,

pp. 2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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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는 사진영상은 대상 자체가 가진 의미를 그대로 드러내는 것일 수 있다. 이때 사진영상은 자신이 재현하는 대상의 진실을 전달하는 언어가 된다. 왜냐하면 어 떤 진술이 대상과 일치(correspondence)할 때 우리는 그 진술이 진실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8) 사진영상은 대상과 형태적으로 일치하는 방식으로 대상을 반영 하기 때문에 사진영상에 의한 대상의 재현은 대상에 대한 진실을 보여주는 것으 로 간주될 수 있다. 20세기 초에 다큐멘터리 시진이 사회적으로 의미 있는 장르 로 등장했을 때 사람들이 다큐멘터리 사진은 “사회 양상의 진실을 드러냄으로써 보는 사람을 교화”한다고 주장했던 것은 바로 이런 이유에서였다.

일반적으로 ‘사진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거나 ‘사진은 진실을 말한다’는 진 술이 큰 저항 없이 수용될 수 있는 것은 사람들이 반영적 관점에서 사진에 의한 대상의 재현을 이해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문제는 진실이란 것이 관점에 따라 여 러 다른 의미로 이해된다는 점에서 발생한다. 진실은 일치라는 관점에서 이해될 수 있지만 동시에 완전히 다른 관점에서 이해될 수도 있다. 일치로서의 진실과는 구별되는 다른 유형의 진실이 있다. 바로 일관(coherence)으로서의 진실이다. 진실 은 대상에 대한 옳은 의미라는 개념으로 이해되기도 한다. 옳다, 올바르다와 같은 개념은 가치중립적인 것이 아니다. 어떤 관점에서 볼 때 옳은 것은 다른 관점에 서 볼 때 옳지 않은 것일 수 있다. 대상에 대한 해석은 사회적 맥락에 따라 옳은 것일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은 것일 수도 있다. 어떤 사회적 맥락에서 진실인 것이 다른 맥락에서는 거짓일 수 있다. 대상에 대한 사회적 해석은 나름대로의 일관성 을 갖고서 대상을 설명함으로써 사회 구성원들에 의해 옳은 해석으로 인정받을 때 진실이 된다. 이 두 번째 유형의 진실은 역사적, 사회적, 문화적으로 구성되는 진실이다.9) 시대와 사회가 변한다면 진실도 변할 수 있다. 사진이 있는 그대로의

8) 예를 들어, “현재 이 교실에 30명의 학생이 있다”와 같은 진술은 쉽게 진실 여부가 밝 혀질 수 있다.

9) 이런 진실은, 예를 들어, 미셸 푸코(Michel Foucault)가 말한 담론의 구성 규칙들 (règles de formation)인 에피스테메에 의해 구성되는 것일 수 있다. Michel Foucault, L’archéologie du savoir (Paris: Éditions Gallimard 1969), pp. 62-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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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상의 모습을 보여준다는 것과 대상에 대한 옳은 해석을 보여준다는 것은 다른 차원의 문제이다. 사진이 단순히 대상의 시각적 형태를 충실하게 보여주는 차원 에 그치지 않고 대상의 올바른 모습을 보여주고 대상에 대한 사회적 해석을 제공 하려 할 때 사진은 두 번째 유형의 진실과 관계를 맺는다.

첫 번째 유형의 진실, 즉 일치 관계에 의해 작동하는 진실은 엄밀히 말하면 진실이 아니라 사실의 문제이다. 바로 이런 이유로 사진이 다큐멘트라는 것과 다 큐멘터리 사진영상이 진실을 말한다는 것은 완전히 다른 차원의 진술이 될 수 있 다. 사진은 발생한 사실을 보여줄 수 있을 뿐 구성된 진실을 증명할 수는 없다.

카메라가 위험에 빠진 어린 아이를 촬영해 영상으로 보여줄 수는 있지만 그렇게 현장에서 촬영된 영상이라도 어린이는 보호받아야 할 존재라는 말이 옳다는 것을 증명하지는 못한다. 사진은 발생하는 사건을 보여줄 수 있지만 사건의 의미에 대 해서 말할 수는 없다. 사진이 어떻게 이용되느냐에 따라 사진은 사건의 의미를 구성하는 데 이용될 수 있을 뿐이다. 따라서 엄밀히 말해 사진은 진실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가 진실이라고 여기는 것을 구성하는 데 기여한다. 하인의 사진 은 아동이 공장에서 일을 한다는 사실을 보여줌으로써 아동 노동은 사회적으로 금지되는 것이 옳다는 진실을 구성하는 데 기여했다.

다큐멘터리 사진영상은 진실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진실을 구성하는 데 기 여한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누가 무엇을 어떻게 촬영하는가 하는 문제가 중요해 진다. 모든 사진가는 좋은 사진을 촬영하고자 한다. 다큐멘터리 사진가나 사진기 자에게 좋은 사진이란 무엇일까? 카파는 “사진이 그다지 좋지 않다면, 당신이 충 분히 가까이 있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10) 사건에 가까이 다가갈수록 사실 을 더 정확히 포착할 수 있다. 사진이 사실을 정확히 포착할수록 진실을 구성하 는 과정에 더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울부짖는 아이들의 모습을 정면에서 촬영 한 닉 우트의 사진은 전쟁이 추악한 행위라는 진실을 구성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하지만 동시에 바로 그런 이유로 다른 관점에서 사건을 바라보는 사람들에게 그 10) Russell Miller, Magnum: Fifty Years at the Front Line of History (New York:

Grove Press 1997), p. xi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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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은 진실에 반하는 잘못된 의미를 전하는 영상일 수 있다. 닉슨 대통령이 닉 우트의 사진이 조작됐을 가능성을 의심했던 것은 그 사진이 전쟁은 추악한 행위 라는 진실을 구성하는 과정에서 발휘할 영향력을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리차드 드류의 <떨어지는 남자> 사진이 미국에서 자취를 감춘 것은 자살은 죄악이라는 미국인의 진실을 훼손할 위험이 있었기 때문이다.11)

일반적으로 좋은 다큐멘터리 사진영상은 단순히 사실을 정확히 보여주는 사 진이 아니라 진실을 구성하는 데 기여하는 사진으로 이해된다. 좋은 사진을 얻기 위해서는 대상에 가까이 다가가야 한다는 카파의 말은 이제 물리적 거리의 근접 성만이 아니라 심리적 거리의 근접성도 확보해야 한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좋은 사진을 얻기 위해서 다큐멘터리 사진가와 사진기자는 충분한 시간을 갖고 현실을 깊이 조사하고 연구할 것을 요구받는다. 깊이 있는 조사와 연구는 사진가에게 내 부자의 시선으로 사건을 이해하는 가능성을 제공할 수 있다. 이를 통해 사진가는 진실에 다가갈 수 있다고 믿는다. 왜냐하면 충분한 조사를 바탕으로 사진가는 사 건에 대한 정보를 단순히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정보의 이면에 숨겨진 진실을 보 여줄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알프레도 크라메로티(Alfredo Cramerotti, 1967- )가 주창한 미적 저널리즘 (Aesthetic Journalism)은 그런 믿음을 기반으로 한다. 크라메로티에 따르면, 미적 저널리즘은 보이는 것을 보고(reporting)하는 것이 아니라 보이는 것 이면에 있는 진실을 목격(witnessing)하고자 하는 작업이다. 발생하는 사건들을 빠르게 기록하 고 보고하는 일에서 물러나 시간을 두고 다양한 관점에서 사건에 대해 조사하고 연구함으로써 무엇이 진실이고 거짓인지,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목격하는 것이 미적 저널리즘의 목적이다. 미적 저널리즘이 진실을 말하고자 하는 기존의 저널 리즘과 다른 점은 기존의 저널리즘이 사실의 관점에서 진실에 대해 접근했다면 미적 저널리즘은 진실을 열린 구조의 담론으로 본다는 데 있다. 미적 저널리즘에

11) Kate Birdsall, “Frenzied Representation and the Forbidden Image: 9/11's Falling Man and the Unrepresentable”, in: Journal of Transdisciplinary Studies, vol. 8, no.

1 (2015), pp. 39-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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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 진실은 예술가의 작업에 의해 도출되고 강요되는 것이 아니라 관객과의 상호 작용 속에서 구성되는 것이다. 진실은 작품에 의해 재현되는 것이 아니라 작품과 관객 사이의 상호작용에 의해 구성된다.12)

크라메로티가 미적 저널리즘을 주창하게 된 배경에는 미디어 환경의 변화가 있다. 스마트폰 카메라, 인터넷, 소셜 미디어 등이 등장하면서 세계 곳곳에서 일어 나는 사건들을 누구나 쉽게 촬영하고 전 세계에 유통시킬 수 있게 되었다. 크라 메로티가 보기에, 이와 같은 디지털 기술은 정보의 휘발성을 증가시키면서 사건 에 대한 진실이 구성되기 전에 사건을 단순한 스펙터클로 소비되도록 만든다. 그 는 이 현상이 저널리즘의 기반을 약화시키고 있다고 판단하고 저널리즘과 예술을 결합함으로써 단순히 사건에 대한 정보를 전달하고 소멸하는 것이 아니라 사건의 의미에 대해 질문하고 관객들과 함께 사건의 진실을 구성해 가는 미적 저널리즘 을 제안한 것이다. 결국, 크라메로티의 제안은 진실을 구성하는 다큐멘터리 사진 영상의 역할에 대한 오랜 믿음의 연장선에 자리 잡고 있다.

Ⅲ. 수행으로서의 다큐멘터리 사진영상

디지털 정보기술의 발달로 인한 미디어 환경의 변화는 사람들이 세상을 인 지하고 이해하는 과정에 엄청난 영향을 미치고 있다. 특히 2010년을 전후해서 벌 어진 일련의 사건들은 이런 변화를 잘 보여주고 있다. 1991년 로드니 킹(Rodney King) 구타 사건의 비디오 영상 사례에서 볼 수 있듯이 영상 촬영 장비가 대중에 게 보급되면서 일반인들이 촬영한 영상이 사건에 중요한 의미를 부여하면서 사회 적으로 큰 영향력을 발휘하는 일들이 증가했다. 하지만 이런 영상들이 대중과 만 날 수 있으려면 우선 매스미디어에 의해 선택되고 매개되어야 했다. 2001년 911 사태 당시에도 많은 일반인들이 영상을 촬영했지만 매스미디어를 통해서 공개될 12) Alfredo Cramerotti, Aesthetic Journalism: How to Inform without Informing

(Bristol and Chicago: Intellect 2009), pp. 69-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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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 있었다. 2000년대 말부터 세계적으로 인기를 끌면서 사용되기 시작한 소셜 미 디어와 스마트폰은 개인들이 매스미디어를 거치지 않고 네트워크로 연결되도록 만들었다. 이제 사람들은 매스미디어와 전문가 집단의 매개를 통하지 않고 개인 이 바라 본 세상의 모습을 공유하면서 직접 볼 수 있게 되었다. 이것은 영상을 통해 사람들이 세상을 인지하고 이해하는 방식을 뒤바꾼 혁명적 사건이다.

세계의 모든 사람들이 가진 카메라가 네트워크로 연결되는 일은 사적 영역 과 공적 영역에서 비슷하면서도 다른 방식으로 전개되고 있다. 우선, 사적인 사진 들의 네트워킹을 통한 일상적 세계의 확장이 나타난다. 페이스북, 인스타그램 등 으로 대표되는 소셜 미디어는 우선적으로 사적 사진들의 공유 플랫폼으로 작동한 다. 시시콜콜한 일상의 모습을 보여주는 개인적 사진들이 네트워크를 통해 공개 적으로 확산되면서 개인이 경험하는 일상적 시공간의 범위가 세계적 차원으로 넓 어졌다. 마샬 맥루한(Marshall McLuhan, 1911-1980)은 1960년대에 텔레비전이

‘지구촌(global village)’을 만들었다고 했지만13) 현재의 소셜 미디어는 ‘지구가정 (global home)’을 만든다. 이제 사람들은 마치 자기 방을 돌아다니듯이 세계 모든 곳과 모든 사람의 사적인 경험들을 자신의 일상으로 구성할 수 있다. 소셜 미디 어의 사진들은 개인의 삶을 보여주는 다큐멘터리다. 네트워크를 통해 공개되는 이 사진들은 개인 앨범에 보관되던 기존의 사진들과는 달리 과거 사건의 단순한 아카이브로 머물지 않는다. 소셜 미디어로 공개되는 사진들은 실시간으로 공유되 고 향유되기 때문에 과거의 삶에 대한 다큐멘트로 보존되는 아카이브가 아니라 현재의 삶을 구성하는 사건이다. 이 사진들은 네트워크로 연결된 세계 곳곳의 가 상적 친구들로부터 ‘좋아요’와 댓글을 이끌어내면서 개인의 현재 삶을 구성한다.

네트워크를 통한 사적 사진들의 공유가 개인의 현재 삶을 새롭게 구성하고 확장시키는 것과 비슷하게 공적인 사건들을 기록하는 사진들도 네트워크를 통해 공유되면서 기존의 다큐멘터리 사진영상이 갖고 있던 기능과 역할을 뛰어넘는다.

다큐멘터리 사진영상은 원래 전문가들에 의해 제작되고 생산된 영상이었으며 신 문, 잡지, 영화, 텔레비전 등과 같은 매스미디어를 통해 공개되고 유통되면서 인간 13) 마샬 맥루한, 구텐베르크 은하계, 임상원 옮김 (커뮤니케이션북스 2001), p. 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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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둘러싼 사회와 자연에서 일어나는 다양한 사건들을 재현하고 그 사건들에 의 미를 부여해 온 영상이었다. 하지만 누구나 스마트폰으로 언제든지 촬영할 수 있 고 촬영된 영상을 실시간으로 세계의 모든 다른 사람들과 공유할 수 있는 상황이 되자 사건 보도 영역에서 다큐멘터리 사진영상이 갖고 있던 독점적이고 권위적인 지위가 위태로워졌다. 무엇보다도 우선 시의성 있는 사건을 재현하고 사건의 의 미를 전달해 주던 저널리즘 사진이 예전의 위상을 잃었다. 카파, 카르티에 브레송 등으로 대표되던 저널리즘 사진의 시대가 저물었다.

네다 술탄이 피를 토하며 죽어가는 장면은 이름을 알 수 없는 시민들의 스 마트폰 카메라에 의해 촬영되어 인터넷을 통해 전 세계로 퍼져나갔다. 피에 덮인 네다의 얼굴 사진은 이란의 독재 정권에 항의하는 시위 현장 곳곳에서 사용되면 서 이란 정부에 큰 타격을 줬다. 이후 튀니지, 이집트 등에서 벌어진 일련의 민주 화 운동에서도 일반인들이 거리에서 촬영한 영상들이 실시간으로 공유되면서 반 정부 시위를 격화시키는 동력으로 작용했다. 이 사건들은 기존의 매스미디어를 이용한 저널리즘 사진이나 다큐멘터리 사진과는 완전히 다른 성격을 가진 다큐멘 터리 사진영상이 등장했음을 보여줬다.14)

이 글에서는 일반 시민에 의해 촬영되는 새로운 유형의 다큐멘터리 사진영 14) 2010년을 전후해 세계 각국의 민주화 운동에서 시민이 촬영한 영상이 어떻게 이용되 었는지에 대해서는 다음 연구들을 참조할 것. Omar Al-Ghazzi, ““Citizen Journalism”

in the Syrian Uprising: Problematizing Western Narratives in a Local Context”, in:

Communication Theory, vol. 24 (2014), pp. 435-454 (DOI: 10.1111/comt.12047);

Bolette B. Blaagaard, “The Aesthetics of Posthuman Experience: The Presence of Journalistic, Citizen-generated and Drone Imagery”, in: Westminster Papers in Culture and Communication, vol. 10, no. 1 (2015), pp. 51-65 (DOI:

10.16997/wpcc.212); Lucian Ciupei, “Censorship in the Crimean War Photography. A Case Study: Carol Pop de Szathmari and Roger Fenton”, pp. 61-77; Dalia Habib Linssen, “Reconsidering the Image of the Blue Bra: Photography, Conflict, and Cultural Memory in the 2011-2013 Egyptian Uprising”, in: Humanities, vol. 7, no. 1 (2018), pp. 27-42 (DOI: 10.3390/h7010027); Mervi Pantti, “Getting closer?

Encounters of the national media with global images”, in: Journalism Studies, vol.

14, no. 2 (2013), pp. 201-218 (DOI: 10.1080/1461670X.2012.7185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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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을 ‘시민 다큐멘터리 사진영상’이라고 부르겠다. 시민 다큐멘터리 사진영상은 처 음부터 전문가 윤리나 미적인 수준에 대한 고려 없이 만들어진다. 이 사진영상은 일반적인 영상 미학의 관점에서 봤을 때는 많은 결점을 갖고 있다. 사진은 대개 스마트폰을 이용해 촬영된 것으로 종종 동영상의 한 부분을 캡처한 것이기도 하 다. 초점은 맞지 않고 대상은 흔들려서 형태가 불분명할 뿐만 아니라 해상도가 낮아 전체적으로 흐릿한 영상인 경우가 많다. 처음 프레이밍할 때부터 신경을 써 서 조형적 요소들을 잘 구성해 시각적으로 미적인 쾌감을 불러일으키는 방식으로 촬영된 전문 사진가들의 다큐멘터리 사진영상과 비교한다면 시민 다큐멘터리 사 진영상의 촬영방법은 기존의 방법과 완전히 동떨어져 있다고 할 수 있다.

매스미디어를 이용해 활동하는 사진기자나 다큐멘터리 사진가는 훈련 받은 전문가이다. 그들은 사건을 관찰하고 사건에 의미를 부여하는 기자로서의 윤리뿐 만 아니라 사진의 미적 수준을 일정하게 유지해야 하는 예술가로서의 필요에 부 응한다. 그들의 사진은 사건을 기록하고 의미를 전달하는 정치적, 사회적 재현으 로서 기능할 뿐만 아니라 미적 쾌감을 주면서 미술관의 벽에 걸리는 예술작품의 자리를 차지하기도 한다. 바로 이런 이유로 손택과 같은 비평가들은 타인의 고통 을 재현하는 사진이 가진 미적인 속성이 사진이 담고 있는 메시지의 윤리적이고 도덕적인 면을 약화시킨다고 비판했다.15) 타인의 죽음과 고통을 재현하는 사진이 역설적으로 아름다운 예술작품이 되면서 그 죽음과 고통이 일종의 스펙터클로 소 비되는 문제가 발생한다는 것이다.

다큐멘터리 사진영상이 미적인 방식으로 소비될 경우 발생하는 심각한 문제 는 사진영상이 전달하고자 하는 정치적, 사회적 의미가 훼손된다는 점이다. 다큐 멘터리 사진영상은 타인의 고통과 죽음을 재현해 전달함으로써 사람들로 하여금 사건에 대해 비판적으로 성찰하게 만들고 윤리적 책임 의식을 갖게 만들 수 있다.

이를 통해 사람들은 정치적으로 행동할 수 있다. 하지만 사진영상이 스펙터클이 되어 미적으로 소비될 경우 사람들은 비판적 성찰이나 윤리적 책임감으로부터 멀 어지게 된다. 결국, 정치적이고 사회적인 메시지를 전달하는 다큐멘터리 사진영상 15) 수전 손택, 타인의 고통, 이재원 옮김 (이후 2004), pp. 150-1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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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역설적으로 사람들을 비정치화하는 결과를 낳는다.

시민 다큐멘터리 사진영상은 사건을 조형적으로 아름답게 재현하지 않는다 는 점에서 아름다운 조형미를 가진 기존의 다큐멘터리 사진영상이 유발할 수 있 는 관객의 비정치화 경향에서 벗어날 수 있다. 일반 시민이 촬영한 영상은 안정 된 구도와 선명한 해상도를 갖고 있지 않지만 바로 그런 점이 오히려 영상의 현 장성과 직접성을 부각시킨다. 시민 다큐멘터리 사진영상은 영상 자체가 가진 조 형미를 통해 관객에게 미적 쾌감을 불러일으키지 않는다. 하지만 오히려 거칠고 불안정하며 선명하지 않은 영상이 진짜 현실의 사건을 직접 보고 있다는 느낌을 제공한다. 기존 다큐멘터리 사진영상은 조형적 요소들의 적절한 조합을 통해 안 정된 방식으로 뚜렷한 정치적, 사회적 메시지를 전달한다. 관객은 사진을 보면서 저자의 의도에 대해 생각하고 사진이 재현하는 사건의 의미를 분석하도록 초대된 다. 반면에 급하게 촬영되었음이 분명하게 드러나는 시민 다큐멘터리 사진영상은 긴박한 현장을 직접 목격하는 느낌을 준다. 게다가 이 영상은 소셜 미디어를 통 해 사실상 실시간으로 유통되기 때문에 그런 느낌이 더욱 강화된다. 기존의 다큐 멘터리 사진영상이 가진 잘 구조화된 일관성 있는 이야기 전달이 나타나지 않는 대신에 시민 다큐멘터리 사진영상은 현장성과 직접성을 전달한다.

시민 다큐멘터리 사진영상에서 구조화된 이야기가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은 이 사진을 재현의 관점에서 보기 힘들다는 뜻으로 이해될 수 있다. 일반적으로 전문 다큐멘터리 사진영상에서 재현은 사진가, 대상, 관객의 관계 안에서 구축된 다. 사진가는 자신이 이해한 대상의 의미를 영상에 담아 관객에게 전달한다. 이 과정에서 관객은 영상을 통해 사진가의 의도와 만나면서 영상이 재현하는 사건의 의미를 구성한다. 시민 다큐멘터리 사진영상은 이런 재현관계 안에서 만들어지지 않는다. 이 사진영상은 사진가의 의도와는 무관하게 갑작스러운 사건의 발발에 의해 촉발된다. 시민 다큐멘터리 사진영상을 전체적으로 지배하는 것은 바로 사 건의 돌발적인 발생이다. 사건의 현장성과 직접성이 영상의 미적, 서사적 구조를 압도하면서 사진가, 대상, 관객에 의해 구성되는 재현관계가 성립할 여지를 주지 않는다. 우선, 사진가의 의도가 개입하지 않고 관객도 대상의 의미를 분석할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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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갖지 못한다. 한마디로 시민 다큐멘터리 사진영상은 관객을 위해 대상을 재현 하지 않는다. 시민 다큐멘터리 사진영상에는 재현관계가 단절되어 있다.

2013년 5월 22일 영국 런던 근교의 울위치(Woolwich)에서 근무를 마치고 부대로 복귀하던 영국 병사 리 릭비(Lee Rigby)가 두 명의 나이지리아계 영국인 에게 공격을 받아 목이 잘려 살해됐다. 범인들은 달아나지 않고 주변의 시민들이 촬영하는 동영상에 모습을 드러내 자신들의 살해 동기를 설명했다. 미술교사로서 마침 바로 그날 유디트(Judith)가 적장의 머리를 자르는 장면을 재현한 카라바조 (Michelangelo da Caravaggio, 1573-1610)의 그림이 가진 의미를 학생들에게 설명 하는 강의를 했던 애드킨스(Kirsten Adkins)는 인터넷에 공개된 동영상을 보고 큰 충격을 받았다. 그녀는 카라바조의 그림에서와 달리 릭비의 살해 영상에 대해 서는 재현의 관점에서 의미를 설명하는 강의를 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 녀에 의하면, “울위치 살해 영상은 비극적 시나리오의 재현보다 훨씬 더 한 것이 다. 그 영상은 사건이란 관점에서 보일 수 있었다. 살해의 사건, 촬영된 사진의 사 건, 공격자들이 카메라를 위해 수행한 사건 […] 아마도 그 영상 안에서 읽힐 유 일한 진실은 그 진실이 수행됐고 계속 수행되는 방식일 것이다.”16) 물론, 카라바 조는 그림으로 살해 장면을 재현했고 릭비의 살해는 카메라에 의해 촬영됐기 때 문에 두 영상이 주는 정서적 충격은 다를 수 있다. 하지만 애드킨스가 보기에, 사 건이 발생하는 순간을 촬영해 인터넷 등을 통해 유포되는 영상은 더 이상 재현의 관점에서 의미를 해석해야 할 영상이 아니다. 그녀는 현재 유통되는 영상은 무엇 을 재현하느냐 하는 관점이 아니라 무엇을 수행하느냐 하는 관점에서 접근돼야 한다고 주장한다.

시민 다큐멘터리 사진영상의 일차적 존재 의의는 사건을 직접적으로 목격할 가능성을 제공하는 데 있다. 사진가나 영상이 사건을 재현하지 않는다는 것은 사

16) Kirsten Adkins, “Aesthetics, Authenticity and the Spectacle of the Real: How Do We Educate the Visual World We Live in Today?”, in: International Journal of Art & Design Education, vol. 33, no. 3, (2014), pp. 326-334 (DOI:

10.1111/jade.12062), p. 3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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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의 의미가 사진가의 의도에 의해 부여되지 않는다는 뜻이다. 따라서 시민 다큐 멘터리 사진영상에서 말하는 자는 사진가나 관객이 아니라 사건의 참여자들이다.

이 과정에서 사진영상은 단순한 다큐멘트나 재현이 아니라 사건이 된다. 시민 다 큐멘터리 사진영상은 단순히 사건이 일어났음을 보여주거나 사건의 의미를 재현 하는 것이 아니라 사건이 일어나고 있음을 보여주고 사진가가 거기에 있음을 드 러낸다. 이를 통해 결정적으로 관객도 거기에 있을 수밖에 없음을 나타낸다.

소셜 미디어의 등장으로 누구나 어디에서나 손쉽게 다른 사람들과 연결된 네트워크를 통해 자신의 일상을 말하고 보여줄 수 있게 되면서 사람들은 이제 매 스미디어가 주는 정보를 받아보기만 하는 수동적 수용자에서 직접 정보를 전달하 고 공유하는 능동적 행위자가 되었다. 기존의 다큐멘터리 사진영상에서 시민은 사진가의 카메라 앞에 놓인 촬영 대상이거나 사진가가 촬영한 영상을 보는 관객 일 뿐이다. 하지만 시민 다큐멘터리 사진영상에서 시민은 사진가이자 대상이자 관객으로서 사건에 참여한다.

시간을 들여 깊이 있게 정보를 수집하고 분석해 사건의 의미를 치밀하게 구성하고 해석하는 다큐멘터리 작업이나 미적 저널리즘 작업에서 사진영상은 최 종 결과물로서 사건을 재현하고 사건에 대한 의미를 부여하는 역할을 한다. 반면 에 돌발적인 사건의 한 가운데에서 생산되고 실시간으로 유통되고 공유되는 시민 다큐멘터리 사진영상은 사건을 재현한다기보다는 사건을 구성하는 중요한 행위자 의 역할을 한다. 과거의 사건이 먼 곳에서 일어나는 일로서 매스미디어에 의해 재현되고 의미가 부여되어 관객에게 전달되는 것이었다면 현재의 사건은 스마트 폰, 소셜 미디어, 유튜브 등을 통해 사진영상의 형태로 매개되면서 많은 사람들에 의해 실시간으로 경험되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사진영상은 단순히 사건을 재현 하는 것이 아니라 관객들과 상호작용하면서 사건을 구성하는 행위자가 된다.

시민 다큐멘터리 사진영상에서 누가 영상을 촬영했는가는 중요하지 않다.

사건 현장에 있는 누구라도 그런 영상을 촬영할 수 있기 때문이다. 누구나 인터 넷과 연결되어 있는 스마트폰을 들고서 언제든지 소셜 미디어를 통해 내가 보고 있는 사건을 촬영해 다른 사람들과 공유할 수 있다. 실시간으로 공유된 영상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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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각적인 반응을 불러일으키면서 사건이 진행되는 방향에 영향을 미친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오히려 스마트폰, 소셜 미디어, 유튜브, 인터넷 등이다. 그런 장치들 이 시민 다큐멘터리 사진영상을 가능하게 만든다. 이 현상은 기술이나 기계를 단 순한 도구가 아니라 인간과 동등한 위치에서 상호작용하면서 네트워크를 형성하 는 행위자로 보는 행위자 네트워크 이론(Actor-Network Theory)을 통해 이해될 수 있다.17) 사건은 시민도 아니고 카메라도 아닌 시민, 스마트폰, 소셜 미디어, 인 터넷을 연결하는 혼종 네트워크 안에서 촬영되고 의미를 부여받는다.

혼종 네트워크 안에서 서로 연결되어 있는 인간행위자들과 비인간행위자들 은 쉼 없이 연결고리를 확장하고 수정하면서 사건을 구성해간다. 네다 솔탄과 파 란 브라의 여성을 촬영한 영상은 우선 페이스북과 유튜브를 통해 공개되었고 곧 다른 인터넷 사이트들로 퍼져나갔다. 영상을 본 사람들은 즉각적으로 반응했다.

영상의 대표적인 장면이 사진으로 만들어져 유포되었고 사람들은 크게 인쇄된 사 진을 들고 항의 시위에 나섰다. 매스미디어는 이 영상을 재매개하면서 정부의 폭 력에 확정된 의미를 부여했다. 매스미디어에서 영상을 재매개하면서 사건을 재현 하고 의미를 부여하기 전까지 네트워크로 연결된 시민들과 스마트폰, 소셜 미디 어는 연속적으로 행위를 유발시키면서 사건을 만들어갔다.

인간과 비인간을 구분하지 않고 여러 이질적인 행위자들 사이의 연합과 연 결망을 분석함으로써 사회 현상이나 문화 현상을 이해하려고 하는 신유물론적 (new materialist) 관점에서 시민 다큐멘터리 사진영상에 접근한다는 것은, 바바라 볼트(Barbara Bolt, 1950- )가 주장했듯이, 영상을 주체나 대상과 분리된 채 조작, 분석, 해석을 기다리는 사물로 보는 전통적인 서구 미학에 근원적으로 도전하는 작업일 수 있다. 볼트는 신유물론적 관점에서 영상을 영상하기(imaging)라는 수행 적 의미로 이해할 것을 제안한다. “영상하기의 과제는 세계를 보여주거나 세계에 대한 이야기를 말 하거나 정보의 흐름을 제공하거나 계획에 따라 정치적 입장을 취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영상하기는 재현을 무효화하고 상상 불가능하지만 17) Bruno Latour, Reassembling the Social: An Introduction to Actor-Network-Theory

(Oxford: Oxford University Press 2005), pp. 70-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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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은 정확히 ‘진짜 같은(true-to-life)’ 어떤 것을 창조하는 팽창력을 제공한다.”18) 이렇듯, 사건의 한복판에서 만들어지고 유통되는 시민 다큐멘터리 사진영상 은 사건에 대한 재현이라기보다는 사건의 일부분으로서 사건을 만들어가는 수행 행위(performance)에 더 가깝다. 시민 다큐멘터리 사진영상은 사람들로 하여금 사 건에 대해 생각하게 만들기보다는 사건 안에서 행동하게 만든다. 기존의 다큐멘 터리 사진영상이 사건을 기록하고 재현하는 다큐멘트로서 사건에 대한 아카이브 를 구성하고 사건의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었다면 시민 다큐멘터리 사진영상은 현 재 사건을 만들어가는 역할을 한다. 시민 다큐멘터리 사진영상은 사건에 대한 보 고서라기보다는 사건 안에서 외치는 말과 같다. 그것은 사람들을 부르고 행동하 게 만든다. 스마트폰을 손에 쥔 시민은 전문 사진가의 카메라 앞에 위치한 수동 적인 대상이 아니라 직접 사건을 목격하고 만들어가는 자율적인 행위자이다.

이슬람사원에서 총기 난사를 한 태런트는 헬멧에 단 카메라를 페이스북과 연결해 자신의 범행을 생중계했다. 이 영상은 순식간에 인터넷에 퍼졌다. 그는 사 건의 주된 행위자였을 뿐만 아니라 인터넷에 연결된 카메라를 통해 수많은 사람 들을 사건에 끌어들였다. 사람들은 사건의 의미를 알기 위해서 영상에 접속한 것 이 아니라 사건 자체에 들어가기 위해 영상을 클릭했다. 영상은 사람들에게 즉각 적인 충격을 줬다. 사람들은 그의 행위에 이슬람혐오나 인종차별 등의 의미를 부 여하기 전에 이미 영상을 통해 사건을 보는 것 자체에 의해 정서적 영향을 받았 다. 그의 영상은 사건을 재현하고 사건의 의미를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수많은 행위자들과 만나고 부딪히면서 사건을 진행시키는 행위자로 작용했다. 태런트는 영상을 촬영하고 인터넷에 유통시키면서 사건을 온전히 자신의 통제 하에 두고자 했지만 그 영상에 접속하고 공유한 사람들, 생중계를 금지시킨 페이스북, 영상이 업로드된 인터넷 플랫폼들, 사건을 보도한 매스미디어 등에 의해 사건은 그가 생

18) Barbara Bolt, “The athleticism of imaging: figuring a materialist performativity”, in:

On the Verge of Photography: Imaging Beyond Representation, eds. Johnny Golding, Daniel Rubinstein & Andy Fisher (Birmingham: ARTicle Press 2013),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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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한 것과는 다른 방향으로 전개되고 구성되고 재현되고 의미가 부여되었다.

정부나 조직의 게이트키퍼에 의해 심의와 검열을 받아야 하는 매스미디어와 는 달리 시민 다큐멘터리 사진영상은 손쉽게 인터넷을 통해 유통될 수 있다. 다 시 말해, 시민 다큐멘터리 사진영상은 사회문화적으로 고정된 관습적 의미 체계, 혹은 재현 체계에 의해 사전에 걸러지지 않는다. 이것은 시민 다큐멘터리 사진영 상이 기존의 관습과 통념에 균열을 일으킬 가능성이 크다는 것을 의미한다. 시민 다큐멘터리 사진영상은 아직 사회적으로 의미가 부여되지 않은 현실을 보여줌으 로써 사람들을 사건에 끌어들이고 사건의 의미를 만들어가도록 요구한다. 인터넷 에서 유통되는 시민 다큐멘터리 사진영상은 기본적으로 항상 움직이는 상태에 있 다. 이 근본적인 이동성 때문에 시민 다큐멘터리 사진영상은 매스미디어에 의해 포획되어 고정된 의미를 부여받을 때조차도 항상 다른 의미를 향해 열려 있다.

전문 사진가에 의해 촬영되어 매스미디어와 정부의 게이트키핑에 의해 걸러 진 영상이 아니기 때문에 시민 다큐멘터리 사진영상은 기본적으로 열린 영상이다.

시민 다큐멘터리 사진영상 안에는 사진가가 설명하는 사건의 고정된 의미가 존재 하지 않고 영상을 촬영한 시민과 영상에 접속한 시민들이 함께 찾아가면서 구성 하는 의미만이 존재한다. 이런 점에서 시민 다큐멘터리 사진영상에는 촬영자와 관객의 구분이 없다고 할 수 있다. 영상을 제작하는 전문가와 그 영상을 수동적 으로 감상하는 관객의 이분법적 분리가 나타나지 않는다는 점에서 시민 다큐멘터 리 사진영상은 자크 랑시에르(Jacques Rancière, 1940- )가 비판한 감각적인 것의 분할(partage du sensible) 논리에서 벗어나 있다. 랑시에르의 관점에서 본다면, 시민 다큐멘터리 사진영상의 관객은 해방된 관객인 셈이다.19) 시민 다큐멘터리 사진영상에서 촬영자는 영상을 통해 동등한 다른 시민들을 불러낼 뿐이지 자신의 생각을 영상에 담아 관객들에게 강요하지 않는다. 따라서 시민 다큐멘터리 사진 영상은 사회문화적으로 고정된 특수한 진실의 담론에서 벗어날 수 있다. 네트워 크로 연결된 시민 다큐멘터리 사진영상은 자유롭게 이동하면서 다양한 행위자들 19) 자크 랑시에르, 해방된 관객 : 지적 해방과 관객에 관한 물음, 양창렬 옮김 (현실문

화 2016), pp. 24-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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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의 관계 속에서 계속 의미를 구성해 간다. 그 의미는 전문가들이 시민 다큐멘 터리 사진영상에 부여한 의미가 아니라 시민 다큐멘터리 사진영상이 행위자로서 만들어가는 의미이다. 시민 다큐멘터리 사진영상은 인터넷 안에서 이동하면서 다 른 행위자들과 관계를 맺어가는 행위자이다. 시민 다큐멘터리 사진영상은 이처럼 열린 네트워크 안에서의 이동을 통해 연쇄적으로 발생하는 새로운 사건을 계속 만들어가면서 사건의 경계선을 불확정된 상태로 돌려놓는다는 점에서 기존의 재 현 체계에 균열을 일으키면서 새로운 의미를 구성해 간다.

사건이자 수행으로서의 시민 다큐멘터리 사진영상은 대상과 일치하는 진실 을 증명하거나 사회문화적으로 구성된 진실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 진 실을 드러낸다. 이 세 번째 유형의 진실은 내재적 진실이다. 스피노자(Baruch Spinoza, 1632-1677)는 진실이란 외재적 대상과는 무관하게 스스로 진실임이 드러 나는 것이라고 했다.20) 이 진실은 어떤 생각이나 사람, 사물이 가진 내재적 자질 이다. 생각, 담론, 사람, 사물의 진실은 자신을 참되게 드러내는 힘에 의해 스스로 진실임을 보여주고 거짓을 폭로한다. 예를 들어, 빛은 그 자체로 자신을 진실로서 드러내며 동시에 어둠을 드러나게 만든다.

앞에서 설명한 진실의 세 유형을 바탕으로 말하자면, 어떤 사람이 진실하다 는 것은 세 가지 의미로 해석될 수 있다. 우리는 어떤 사람이 자신의 생각이나 말과 일치하는 행동을 할 때 그를 진실하다고 말한다. 이처럼 언행일치로 드러나 는 진실은 첫 번째 유형의 진실이다. 우리는 어떤 사람이 특정한 시대와 사회가 요구하는 참된 인간상을 보여줄 때 그를 진실하다고 말한다. 이것은 역사적으로 구성되는 두 번째 유형의 진실이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어떤 사람의 본질이 스스 로 드러날 때 그가 진실하다고 말할 수 있다. 이 사람은 자신이 믿는 것을 실천 하는 사람도 아니고 사회가 요구하는 것을 따르는 사람도 아니다. 그는 모든 내 적, 외적 요인들과 관계없이 오직 인간으로서의 존재감을 드러내는 사람이다. 어 떤 사람이 자신의 삶을 진정으로 충실하게 산다면 그는 자신이 살아온 삶 자체를 20) 바뤼흐 스피노자, 지성개선론, 강영계 옮김 (서광사 2015), pp. 43-49; 바뤼흐 스피노

자, 에티카, 강영계 옮김 (서광사 2007), pp. 129-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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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로 드러내게 된다. 이때 그는 진실한 사람이라고 평가될 수 있다. 예를 들어, 평생 한 가지 일을 해 오면서 그 분야에서 일가를 이루고 자신의 삶에 만족해하 는 사람을 만나면 우리는 그 사람을 보는 것만으로도 진실을 느낄 수 있다. 세 번째 유형의 진실은 사람이나 사태가 어떤 정점에 달했을 때 드러난다.

시민 다큐멘터리 사진영상은 열린 네트워크 안에서 이동하고 다른 행위자들 과 연결되면서 불확정적 경계를 가진 사건을 만들어내는 수행성(performativit y)21)을 통해 일치나 일관과는 다른 의미의 진실을 드러낸다. 수행성은 “변화가 일 어날 수 있도록 허용하는 다음 순간을 펼쳐내는 틈, 파열, 간격”22)이라는 점에서 근원적으로 사건과 연결된다. 사건은 정의상 완결된 실체가 아니라 항상 생성 중 이고 변화 중에 있는 과정이며 이미 계획된 것의 구현이 아니라 우발적인 것의 발현이기 때문이다. 수행성의 관점에서 보면, 의미나 정체성은 물질적, 담론적 실 천을 통해서 항상적으로 만들어지는 과정 안에 있다. 기존의 다큐멘터리 사진영 상에서 진실의 문제는 현실과의 일치 관계나 사회적으로 인정된 일관된 진술이라 는 관점에서 논의되었다. 하지만 시민 다큐멘터리 사진영상에서 발견되는 진실은 그런 진실들과는 다른 유형의 진실이다. 왜냐하면 시민 다큐멘터리 사진영상은 현실의 사건을 재현하려는 목적을 가진 것이 아니라 그 자체가 사건의 일부로 제 시되고 다른 행위자들과 연쇄적으로 연결되는 수행성을 갖기 때문이다. 역으로

21) 수행성은 오스틴(John L. Austin, 1911-1960)의 언어학적 개념으로부터 시작해 데리다 (Jacques Derrida), 들뢰즈와 가타리(Gilles Deleuze, 1925-1995 & Félix Guattari, 1930-1992), 라투르(Bruno Latour, 1947- ), 버틀러(Judith Butler, 1956- )를 거쳐 바 라드(Karen Barad, 1956- ) 등의 신유물론적 페미니즘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한 분야에 서 다양한 의미로 사용되고 있기에 한마디로 정의하기 어려운 개념이다. 여기에서는 신유물론적 관점에 입각해 수행성 개념을 사용했다. 신유물론적 관점의 수행성 개념 에 대해서는 다음 논문을 참조할 것. Karen Barad, “Posthumanist Performativity:

Toward an Understanding of How Matter Comes to Matter”, in: Signs, vol. 28, no.

3 (Spring 2003), pp. 801-831 (DOI: 10.1086/345321).

22) John-David Dewsbury, “Performativity and the event: enacting a philosophy of difference”, in: Environment and Planning D: Society and Space, vol. 18 (2000), pp.

473-496 (DOI: 10.1068/d200t), p. 475.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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