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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강 신문물의 수용과 여성의 의식변화 A friend in need is a friend inde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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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강 신문물의 수용과 여성의 의식변화

A friend in need is a friend indeed.(어려울 때 돕는 친구가 참된 친구!)

No cross No crown. (고통이 없으면 영광도 없다!)

개화기 연대사

강화도조약(1876)(병자수호조약)체결로 인한 개항과 함께 새로운 서구문 물이 수용됨으로써 조선은 정치·경제·사회·문화 전반에 걸쳐 큰 변화의 물결속에 유입됐다.

이후 개화기 연대사는 다음과 같다. 1882년-임오군란, 제물포조약 체결 1883년-태극기를 국기로 선정 1884년-우정국 설치, 갑신정변, 한성조약 체결 1885년-광혜원 설치 1885년-거문도사건, 배재학당(1885) 설립 1886년-이화학 당(1886) 설립, 육영공원(1886) 설립 1887년-새문안교회(언더우드) 설립 1889 년-조병식, 방곡령 선포 동학농민운동,청일전쟁,갑오개혁,홍범 14조(1894) 제 정 1895년-을미사변, 단발령 선포, 을미의병 1896년-서재필:독립신문 창간 1896년-독립협회 설립, 아관파천 1897년-경인선 철도 기공, 대한제국 성립 1898년-만민공동회 개회 1898년-매일신문 창간 1900년-경인선 철도 개통 1901년-제주민란 발생 1903년-대한YMCA 창립 러일전쟁(1904) 발발,한일의 정서 강제 체결(1904) 을사조약(1905) 강제 체결 , 장지연:황성신문에 <시일 야방성대곡> 발표, 손병희:동학을 천도교로 개칭 통감부 설치(1906), 이토 히 로부미 부임 1907년-국채보상운동 시작 1907년-헤이그밀사사건, 한일신협약 체결 1908년-전명운ㆍ장인환, 스티븐스 저격 1908년-동양척식주식회사 설립 1909년-안중근:이토 히로부미 암살 한일병합조약(1910)

개화기의 교육 1. 시대적 배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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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은 오랫동안 성리학을 정치적 지도 이념으로 하고 중국 대륙과의 사대 적 외교를 통하여 체제를 유지해 왔으나, 말기에 대내적으로 집권층의 갈등 과 사회적 혼란, 대외적으로는 서세동점(西勢東漸)의 세계사적 조류와 이에 편승한 일본의 침략 야욕에 의해 문호를 개방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우리나라는 개화기를 맞게 되고 열강들의 각축장이 되었고, 외세에 의해 강 요된 개방은 근대화 추진을 위한 계기가 되었으나 동시에 커다란 민족사적 시련을 맞게 되었다.

문화개방에 반대하는 위정척사(衞正斥邪) 운동과 임오군란, 개혁파의 갑신 정변, 동학혁명, 갑오개혁, 민비시해와 을미사변, 각지에서의 의병운동, 아관 파천, 대한제국의 성립과 멸망 등 숨가쁜 정치 사회의 격변은 끝내 1910년 한일합방으로 일제의 식민지로 전락하여 국권을 상실하는 치욕을 당하기에 이른다.

이런 시련과 격동 속에서도 교육입국(敎育立國)의 의지를 가지고 각계 각층 에서 교육 근대화를 위한 노력을 경주했다.

2. 정부주도의 교육개혁

유길준은 서구 여러 나라를 다녀와 [서유견문록]을 쓴 한국 최초의 유학생으 로 알려져 있다.

서양의 발달된 기술문명을 접한 개화사상가들은 개화의 선결 요건은 서양의 발달된 과학기술을 도입하는데 있다고 주장하였고, 외국과의 빈번한 교류가 이루어지게 되자 정부 당국이 가장 시급하게 필요성을 느낀 것은 외국어 교 육이었다. 독일의 묄렌도르프가 세운 통변학교와 정부가 세운 육영공원은 바 로 그와 같은 현실적 필요에 의한 것이었다.

1883년 설립된 통변학교(通辯學校)는 주로 영어를 가르쳤으나 오래 지속되지 못했다.

1886년 설립된 육영공원(育英公院)은 최초의 근대식 학교이다.

정부가 본격적으로 근대식 교육제도를 도입하기 위한 학제를 마련하고 정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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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인 전환을 가져온 것은 갑오개혁 이후의 일이다.

갑오개혁의 중요한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 중앙 관제를 2부 8아문으로 개편하였다.

• 과거제를 폐지하고 새로운 관리 임용 시험제도를 채택하였다.

• 종래의 신분계급을 타파하여 귀천과 문벌을 가리지 않고 인재를 등용한 다.

• 공사(公私) 노비의 문서를 없애고 인신매매를 금했다

• 종래의 문존무비(文尊武卑)의 차별 폐지하였다.

• 조혼을 금하고 남자는 20세, 여자는 16세 이상이 되어야 결혼 허락한다.

• 아내와 첩이 다같이 아들이 없을 때 양자를 허락한다.

• 과부의 재가를 허락한다.

• 범죄자 가족의 연좌제를 폐지한다.

• 품행이 방정하고 학력이 우수한 청년을 해외로 유학시킨다.

1894년 12월에 제정하여 이듬해 1월 7일에 공포 홍범 14조는 각 기관의 직 무와 권한을 확정하고 징세는 법정 세율에 의할 것, 우수한 자제를 널리 파 견하여 외국의 학술과 기예를 배워오게 할 것, 문벌을 타파하고 인재를 등용 할 것, 등을 규정하고 있다.

1895년 2월 고종이 ‘교육입국조서’에서는 종래의 유교중심 교육을 지양하고, 덕, 체, 지 3양(三養)을 힘쓰고, 허명과 실용을 분별하여 실용의 교육에 힘쓸 것을 강조했다.

학무아문이 중심이 되어 정부에서는 학교 설립에 관한 법령을 제정하고 교 과서 편찬으로 근대학교 설립의 길을 열었다.

근대화된 학제를 갖추게 되었다는 점과 교과 내용을 유교의 경전 중심에서 벗어나 다양한 근대적 교과목을 도입했다는 점에서 역사적 의의를 발견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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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소학교

1895년데 제정되었고, 소학교 중 서울의 학교는 비교적 순조롭게 운영되었으 나 지방의 것은 규모나 내용면에서 옛 서당과 별로 다를 것이 없었다.

나. 중학교

1899년에 제정되었고, 지방에서 중학교를 세울 때는 해당 지방의 향교로 할 것을 정했다. 이는 폐교 상태의 향교를 중학교로 대치하려는 계획이었으 나 실제로 이 법령에 따라 설립된 중학교는 오직 서울의 한 곳 밖에 없었다.

이는 취업과 관련되는 실업계통의 학교를 선호했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다. 사범학교

사범학교 관제가 가장 먼저 제정된 것을 보더라도 정부로서는 교사 양성이 얼마나 시급한 일이었던가를 짐작할 수 있다. 국비로 숙식을 제공하였으나 사범학교 역시 점차 학생이 줄어 들어 유명무실 했다.

라. 외국어 학교

1895년에 일어∙영어∙불어학교등이 있었으며 1896년에 러시아어학교, 1900 년에 한어∙독어학교가 설립되었으나 수업연한을 마치고 졸업하는 학생을 드물었다.

마. 경성의학교

1899년 2월에 설립되었으며, 각종 의술의 교수를 목적으로 하였고, 식비와 옷,교과서 등을 국비로 지급하였으나 그 때까지도 의술을 천시하는 인습 때 문에 지원자가 적었다.

바. 상공학교

1899년 본과와 예과의 편제를 가지고 설립하였고, 당시에 유일한 실업학교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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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에도 역시 기술교육을 천시하는 인습 탓으로 지원자가 적었다.

사. 그 밖의 학교들

1900년 8월에 광무학교, 1895년에 법관양성소, 1897년에 우편학당과 전무학 당이 설립되었다.

이상 정부에서 설립한 학교들은 당시의 국민들의 이해부족과 정부의 재정적 뒷받침이 빈약하여 성공을 못하다가 1905년 일제가 통감부를 설치한 후 교 육내용에 대한 통제강화로 친일 교육장으로 변해가게 되자 국민들로부터 더 욱 외면당하게 되었다.

3. 민족 선각자들에 의한 교육 구국운동

청일전쟁의 승리를 계기로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 야욕은 드디어 1905년 을 사조약의 체결로 구체화되어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에 뜻있는 민족의 선각자 들은 국민계몽을 통한 국권회복을 위해 다각적인 노력을 전개했다. 정치,사 회 단체 결성, 언론기관 설립, 학회와 학교를 설립하였다.

민족 선각자들은 외세의 침략을 막아내고 국권을 회복하는 길은 국민의 각 성을 통한 민력(民力)의 양성에 있다고 보고 “아는 것이 힘이다. 배워야 문 명하고 부강한 국가를 만들 수 있다”는 신념 아래 각종 문화운동, 강연회, 토 론회, 육영사업 및 민중교화사업 등을 전개했다.

고종 20년(1883) 원산에 세워진 원산학사(元山學舍)는 우리나라 최초의 근 대적 사립학교이다. 주민들이 외세의 도전에 대응하기 위하여 자력으로 세운 근대적 학교였다는 점에서 교육사적 의의가 크다고 할 수 있다.

특히, 도산 안창호가 1899년에 세운 점진학교는 남녀공학을 실시한 최초의 사립 초등 교육기관이었다.

1905년 5월 5일에 이용익은 교육구국의 이념 아래 최초의 사립 전문학교인 보성 전문학교를 설립했고, 1906년에는 보성중학교를 설립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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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창호의 대성학교(1908)는 특히 안창호가 가장 모범적인 교육기관을 설립 하기 위한 원대한 뜻을 품고 이종호의 재정적 지원과 윤치호의 자문을 얻어 설립한 학교로, 우수한 교사진과 건전한 인격과 애국정신의 함양을 중요한 교육방침으로 삼았다.

이들 근대 민족 사학의 기본 성격은 국권회복을 위한 민족운동 지도자의 양 성, 민족의식의 고취, 과외활동을 통한 애국사상의 함양과 항일운동, 건전한 인격과 강건한 신체의 함양 등으로 요약할 수 있다.

4. 종교계의 교육활동

이 시기의 종교계의 교육활동은 기독교계와 불교계로 나누어 설명할 수 있 다.

서양 선교사들은 첫째로 교세확장을 위한 교리 전파가 주된 목적이었으나 기독교의 평등사상과 인도주의적 정신에 입각하여 조선 사회의 소외 계층을 대상으로 교육과 서구 문물을 전파하고 기독교 문화를 전수하려고 했다.

알렌은 광혜원을 세워 최초로 서양식 의료기술을 전파하였다.

고종이 배재학당이라는 교명과 액을 내렸고, 학생 수도 늘어 났으며, 잘 정 비된 현대적인 규칙과 평가방법에 따라 근대적인 기독교계 사학으로서의 면 모를 갖추었다.

1887년 명성황후 민비가 ‘이화학당’이라는 이름을 내렸고 이화학당은 우 리나라 최초의 여학교로서 여성교육기관의 효시가 되었다. 또한 이화학당 을 계기로 삼아 남녀평등의 기독교 정신에 입각하여 여학교가 급격히 많아 졌다.

개화와 더불어 외국 선교사들과 일본의 승려들이 내한하여 선교와 포교 활 동을 활발히 함에 자극 받아 정부는 조선조 500년간의 억불정책을 철회하고 불교계에서도 교계의 통일을 꾀하였다.

1902년 36개조로 된 대한사찰령이 제정되고 서울의 원흥사(元興寺)를 수사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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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首寺刹)로 하고 16개의 지방 수사찰을 정하여 불교행정을 정비했다.

불교계 최초의 근대식학교인 명진학교(明進學交)가 원흥사에서 1906년에 개 교하였다. 이 명진학교의 설립은 불교계에 큰 자극을 주어 지방 각 사찰에서 자체적으로 학교를 세우게 되었다.

5. 개화기의 교육사상가

교육에 대한 민족적 각성과 열의가 높았고, 민족교육을 통한 민족의식 제고 에 뚜렷한 업적을 남겼다.

가. 이용익(李容翊: 1854-1907)

근대국가로의 발전은 근대 공업기술의 도입에 있다고 보고, 1902년 내장원경 에 있을 때 사기 제조소를 설립하고, 각 도에 공업 전습소를 설립하여 염직, 직조업, 제지업, 금은세공, 염공, 목공 등의 근대 기술자 양성을 시도했고 1903년에는 총포 제조소를 설치하려고 시도 하기도 하였다.

러일전쟁 때 인재 양성이 무엇보다 선결과제임을 깨닫고 각급 학교를 설치 하여 단계적인 교육을 실시하기로 하고 1905년 각종 교과서의 인쇄기구를 구입하여 가지고 와서는 1905년 보성전문학교를 설립하고, 이듬 해 보성중학 을 설립했으며. 아울러 보성사라는 인쇄소도 설립하였다.

이용익의 교육사상은 보성(普成)이라는 교명과 널리 인간성을 계발하고 인간 본성을 실현하고, 널리 학교를 세워 인재를 교육하여 국권을 회복하며, 관립 학교는 일제의 간섭이 심하므로 사립학교를 널리 세워 민족독립 정신을 육 성해야 한다는 것이다.

나. 남궁억(南宮檍: 1863-1939)

호는 한서(翰西)이며, 관리로서, 언론인으로서, 또 교육실천가로서, 저술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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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 탁월한 업적을 남겼고, 시대의 흐름을 일찍 파악하고 주위의 비난을 무릎 쓰고 영어를 열심히 배워 능통하였으면서도 우리의 역사와 우리의 말과 글 을 사랑하고 보호하는데도 앞장섰다. 현산학교와 모곡학교를 직접 세워 교육 했을 뿐만 아니라, 최초의 통신강의록이라 할 수 있는 [교육월보]의 창강, [조선어 보충],[조선사][조선이야기][조선어법]등의 저술은 모두 그와 같은 노 력의 산물로 역사적 의의가 크다.

특히 [조선어 보충]이란 교재를 편찬한 것도 우리 국어에 대한 관심의 표현 이며 다양한 교육활동을 통하여 실천궁행의 교육자상을 몸소 보여준 참으로 드문 교육자였다. 교육 방법면에서 시대를 앞서가는 새로운 방법을 창안하여 실천하였다. 교육목적을 애국애족하는 사회인, 성실한 도덕인, 생산 실천하는 산업인에 두고, 교육과정으로는 역사교육,예능교육,실업교육,언어교육을 중시 했다.

다. 이승훈(李昇薰: 1864-1930)

호는 남강(南崗)이며, 1907년 12월 오산학교(五山學校)를 설립하여 이후 항일 독립정신의 요람이 되기도 하였으며, 유언으로 자신의 시체를 표본으로 만들 어 오산학교 생리학 표본실에 비치하라 하였으나 일제의 방해로 실현되지 않았다.

라. 안창호 (1878-1938)

호는 도산(島山)이며, 을사조약이 체결되어 국권이 일제의 손에 넘어가는 절 박한 상황에 귀국하여, 국내에서 애국지사들의 비밀단체 신민회를 조직하고, 대성학교 설립, 청년학우회 조직, 평양에 도자기회사 및 태극서관 설립 등 활약을 하다가 다시 망명길에 올라 로스엔젤레스에 돌아갔다.

도산은 교육에 관심과 열정을 쏟았다. 국권을 잃어버리게 된 중요한 원인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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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이 없기 때문이며, 그 힘은 정직과 성실을 바탕으로 한 건전한 인격과 공 고한 단결에서 나온다고 했다.

도산의 교육사상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 우리가 믿고 의지할 것은 우리 자신의 힘밖에 없으므로 민족의 힘을 길 어야 한다는 자력주의(自力主義)

• 인간에 대한 지극한 사랑과 관용의 정신, 그리고 모든 사회개조의 출발 은 인간에서 비롯된다는 인본주의(人本主義)

• 민족사회에 대한 영원한 책임감을 강조하는 주인정신(主人精神)

도산 안창호가 실천하고 강조한 교육적 방법은 점진주의, 소크라테스식 문답 법, 솔선수범, 동맹수련, 일인일기(一人一技), 미소운동을 통한 인화와 단결 등이다.

마. 김교신(金敎臣: 1901-1945)

유교적 인생관과 사회관에 회의을 느껴 기독교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조선성서연구회]를 결성하여 성서를 통하여 한국민족의 영혼을 구원하는 사 업을 하기로 약속했다.

[성서조선]은 김교신이 단독으로 집필과 편집 및 보급을 계속했으며 얇은 책 이지만 김교신의 얼과 나라 사랑의 정신이 담긴 것으로 지식인들 사이에 많 은 영향을 주었다.

김교신의 사상과 삶은 민족적 기독교 사상을 바탕으로 하고 있으며 그의 삶 은 민족기독교의 이념과 실천방안을 모색하고, 민족교육을 실천하고, 기독교 사상을 바탕으로 높은 차원의 애국의 길을 모색하고 실천하자는 것으로 일 관되었다.

바. 교육사적 의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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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말 장기간의 쇄국정책으로 세계사의 흐름에 능동적으로 대처하지 못하 다가, 근대적 과학문명을 먼저 받아들인 일본의 강요에 의하여 개방이 되고, 이를 계기로 주변 강대국들의 세력이 밀려들어 급격한 변화의 소용돌이 속 에서 혼란을 겪어야 했다.

전통적으로 교육열이 강하고, 새로운 문물의 수용과 흡수에 적극적인 우리 민족은 새로운 문화의 수입과 지적 욕구를 자극 받자 잠재되었던 교육에 대 한 욕구가 빠른 속도로 증폭되어 어려운 여건 속에서 근대적인 학교 설립 운동을 활발하게 전개 되었고, 서양의 기독교 선교사들에 의학 학교 설립은 민족 선각자들을 자극하여 우후 죽순격으로 사립학교의 설립을 통한 교육 구국운동이 일어났다.

기독교 선교사들의 학교 설립은 우리나라에 서양식 교육제도와 신학문을 소개하고, 현대식 교육방법을 도입하는 계기를 마련했으며, 계급과 남녀를 초월한 평등한 교육기회의 확대를 촉진하는데 기여했으며, 직업의 귀천의식 을 불식시키고, 근로의 정신과 경제적 자립정신을 가르쳤으며, 새로운 과학 기술 교과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했다. 또한 다양한 근대적 교육과정의 도입 과 정규교과 이외의 과외활동에 대한 교육적 가치를 새롭게 인식하는 계기 가 되었다는 점은 교육 근대화를 촉진시키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원산학사 : 1883년에 원산에서 외국의 도전과 새로운 정세변화에 대응하기 위하여 설치한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학교

-동문학 : 외아문(외교부) 소속 국가기구로 외국과의 교섭을 하기 위한 실무 담당 관리의 영어 연수(=통변학교)를 위해 만들어진 특수직업학교.(이걸로는 충당 부족해서 미국으로부터 교사를 초빙→ 육영공원)

-육영공원 : 서양의 제도와 문화를 받아들이기 위하여 조선정부 최초로 설립 한 신식학교. 좌원과 우원으로 나눠 학생을 선발하는데 좌원은 과거급제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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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직관리중에서, 우원은 과거미급제자, 관리가 아닌 사람(학생)중에서 선발되 며 대부분 고급관리나 양반가 자제들이다. 실무관리양성과 영어와 세계지리, 수학, 국제법, 실용과목(농리, 기기, 화훼, 초목...)등을 가르친다.

-배재학당, 이화학당 : 기독교 포교를 목적으로 설립..이들 근대학교의 교육 과정을 보면 원산학당은 일반국민들이 자발적으로 설립한 학교로 근대 민족 교육의 효시라 할 수 있는데, 역사교육은 구체적으로 보이지 않지만 그와 관 련하여 이루어졌던 것으로 추측된다. 육영공원에서의 역사과목은 영어로 강 의했고 교과서도 영어로 채용되었음을 감안할 때 서양역사로 추측할 수 있 다.

※ 개화기 교육에 영향을 준 세력들

1. 개화사상: 의무교육과 여성교육 주창, 실업기술교육 강조

※ 박영효(개화당의 핵심인물)의개화상소문: 여성의 인격존중/ 학대 멸 시의 금지/ 노예화금지, 교육의 남녀균등, 과부재가의 허락과 남성의 축 첩금지.

2. 동학사상: 만민평등사상으로 근대교육의 이념이 됨(=평등교육론의 토대)

※ 2대교주 최시형: 스스로 과부와 혼인(재가여성을 죄인시하던 시대) 으로 남여평등주장

3. 개신교: 양의술과 영어강습을 시작으로 중등학교, 병원, 교회부설 초등학 교로 발전하였으며 가장 큰 관심은 중등학교에 있었다. 광혜원(알렌, 양의 술), 배재학당(아펜젤러, 협성회, 영어․교양교육, 한문과 설치), 이화학당 1920년대 국내 최초 개업…신여성 ‘마실’(여성의 개화)

볕 좋은 날이면 엄마는 마당에 의자를 내놓고 아들딸을 차례로 불러냈다. 보 자기를 목에 둘러씌우고는 기다랗게 자란 머리칼을 가위로 슥삭슥삭 잘라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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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동네 어느 집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풍경이었다. 그러나 제대로 미용기 술을 배운 적 없는 엄마의 커트는 늘 성공적인 것은 아니어서 한동안은 바가지머리를 하고 다니기도 했다. 당시 드라마 <몽실언니>가 인기를 끌 면서 적잖은 아이들이 바가지머리를 하고 다녔지만 어린 마음에도 예쁘다는 생각

은 들지 않았다. 한동안 엄마에게 불평을 했더니 효과가 있었나보다. 어느 날 엄마는 딸을 미장원에 데리고 갔다.

1982년 두발자율화 시대를 맞아 여고생들이 동네 미장원에서 자유로운 스타일로

머리를 손질하고 있다.

물론 이전에도 미장원에 간 적은 있다. ‘파마’(퍼머넌트웨이브·펌)하는 엄마 따라 갔다가 덩달아 함께 머리를 말고 몇 시간씩 옴짝달싹 못하고 갑갑해한 기억이 난다. 기술이 좋아진 요즘에야 2시간이면 파마가 끝나지만 1980년 대만 해도 파마가 완성되려면 한 나절은 족히 걸렸다. 당시 어머니들은 아 침 일찍 머리를 감고는 미장원에 가서 머리를 말고 수건이나 보자기로 동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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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 뒤 집에 가 아이들 밥을 챙겨주거나 시장에 다녀온 뒤 미장원으로 돌아 왔다. 그렇게 해서 완성된 머리가 일명 ‘아줌마 파마’ 혹은 ‘뽀글이 파마’였 다. 풀리지 않게끔 오래 가라고, 짧은 머리를 라면 면발처럼 꼬불꼬불하게 만 파마머리는 당시 아줌마들의 공식 헤어스타일이었다.

각양각색의 머리를 한 금발미녀들의 대형 포스터가 붙어 있는 미장원에는 주부들을 위한 온갖 잡지가 완비되어 있었다. 아줌마들은 ‘마실’ 가듯 미장 원에 들러 <선데이서울>이나 <주간경향>을 돌려 보며 수다를 떨었다.

미장원은 온갖 소문이 생겨나는 진원지이자 유통되는 허브였다.

국내에 미장원이 최초로 생긴 것은 1920년대. 조선 최초의 미장원 ‘퍼머 넨트’가 화신백화점에 개업했다. 그러나 당시 ‘퍼머넨트’에서 지금과 같은 파마를 시술하지는 않았다. 현재와 같이 약품을 사용해 웨이브를 만드는 방 법은 36년에야 고안됐기 때문이다. 서구의 신문물을 습득한 모던 걸들은 짧 게 머리를 자르고 열을 가한 고데로 머리를 바깥으로 말아올려 멋을 냈다.

20년대 이 같은 ‘신여성’의 단발은 사회적으로 논란 대상이어서 토론회까 지 열릴 정도였다.

파마가 일본을 통해 수입된 것은 30년대 후반이다. 그러나 태평양전쟁으로 인해 침체·억압됐던 사회분위기에 따라 파마는 사치풍조의 하나로 금지되기 시작했다. 파마가 다시 유행한 것은 해방 이후다. 당시의 파마 역시 불에 달 군 아이론을 이용한 것으로, 머리카락이 타서 끊어지기도 하고 이마나 귀 주 위에 화상을 입는 일도 왕왕 있었다.

한국전쟁을 거치고 본격적인 근대화·산업화 바람이 일면서 짧은 커트머리와 단발 등 서양식 머리스타일은 이제 전 국민 사이에 보편화된다. 영화, 잡지 등을 통해 당대 외국의 패션스타일도 따라 들어왔다. 55년 국내에서 <로마 의 휴일>이 개봉하자 한동안 이 영화의 여주인공 오드리 헵번 스타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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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은 단발이, 61년 <슬픔이여 안녕>이 선보이자 여주인공을 따라 짧은 보이시한 커트머리가 여대생들 사이에 인기를 끌었다.

본격적인 파마의 유행은 70년대 이뤄졌다. 여성들의 사회활동이 늘어나면 서 시간 절약을 위한 간편한 스타일이 선호되기 시작한 것이다. 헤어스타일 의 변화만큼이나 미용산업도 큰 변화를 겪었다. 해방 후 미용사 자격증 제도 가 생겼음에도 도제식으로 계속되던 미용사 교육은 80년대 들어 체계화됐다.

서구의 미용기술이 빠른 속도로 유입되고 미용학원과 대학 내 미용학과가 줄줄이 생겨났으며 93년 이후 외국계 프랜차이즈 미용실까지 국내에 상륙 했다.

미장원이란 전통적 명칭 대신 미용실, 헤어살롱, 헤어숍, 뷰티살롱 등으로 간판이 바뀌었고, 일부 국내 미용실은 체인점화되면서 해외에 수출될 정 도로 규모가 커졌다. 미용사들의 위치도 한 사람의 스타일을 완성하는

‘헤어 디자이너’로 격상됐다. ‘남자들은 이발소, 여자들은 미장원’의 구분도 사라졌다. 요즘에는 젊은 남성 대부분이 미장원에 가서 머리를 매만진다. 손 님뿐 아니라 미용사들 사이에서도 남성의 진출이 두드러진다.

참고문헌 김수정(2005). 「한국미용100년」. 동서교류

문화원형 백과사전(2011). 다음백과사전. 다음케뮤니케이션.

브리태니커(2011). 다음백과사전. 다음케뮤니케이션.

손미경(2005). 「한국 여인의 髮 자취」. 이환.

손미경(2009). 고전머리따라하기. 미디어뷰.

정현진(2005). 「미용문화사」. 광문각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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