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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도 8월 석사학위논문

조희룡의 예술론 연구

조선대학교 대학원

미학미술사학과

김 만 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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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희룡의 예술론 연구

A Study on the theory of art in Cho Hee-Ryong

2014년 8월 25일

조선대학교 대학원

미학미술사학과

김 만 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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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희룡의 예술론 연구

지도교수 조 송 식

이 논문을 미학미술사학 석사학위 논문으로 제출합니다.

2014년 4월

조선대학교 대학원

미학미술사학과

김 만 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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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 차

ABSTRACT

I. 서 론 ··· 1

II. 조희룡의 시대와 생애 ··· 4

1. 시대 배경 ··· 4

1) 국내·외 흐름 ··· 4

2) 문화예술활동 ··· 5

2. 생애와 교유 ··· 7

1) 생애 ··· 7

2) 교유 ··· 10

Ⅲ. 예술과 사상 ··· 14

1. 유희론(遊戱論)과 수예론(手藝論) ··· 14

1) 유희론(遊戱論) ··· 14

2) 수예론(手藝論) ··· 17

2. 중인 신분의 자각과 예술가 의식 ··· 19

3. 자성일가(自成一家) ··· 22

Ⅳ. 독창적 예술의 실현 ··· 24

1. 시(詩)·서(書)․화(畵)론 ··· 24

2. 시문(詩文)에서의 독창성 ··· 29

(7)

3. 그림에서의 독창성 ··· 36

1) 묵란도(墨蘭圖) ··· 36

가. 경시위란(經詩緯蘭) ··· 36

나. 즐거움의 난 ··· 38

2) 묵죽도(墨竹圖) ··· 40

3) 묵매도(墨梅圖) ··· 43

가. 장륙매화(丈六梅花)-매화병풍(梅花屛風) ··· 43

나. 도화불사(圖畵佛事)-홍매도대련(紅梅圖對聯) ··· 45

다. 용매도(龍梅圖), 매화서옥도(梅花書屋圖) ··· 47

Ⅴ. 결 론 ··· 50

참고문헌

도판목록

도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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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STRACT

A Study on the theory of art in Cho Hee-Ryong

Kim, Man-Sun

Advisor : Prof. Cho, Song-Sik, Ph.D.

Department of Aesthetics and Art History Graduate School of Chosun University

This paper is to study works of Cho Hee-Ryong(1789-1866) who led a group of painters in the literary artist's style of the late Joseon Dynasty era.

The reason to focus on Cho Hee-Ryong's works is because he did not follow the flow of the time while Joseon faced great social and political changes and while he suffered from the pain of being exiled.

He emphasized originality instead of following the flow and made himself an excellent example as an artist with personality.

Main text of the paper is 6 volumes of the Complete Works of Cho Hee-Ryong published by Hangil Art in 1998.

Cho Hee-Ryong was born in Yangjoo, Gyeonggi Province in 1789, and died in 1866 at the age of 77. He actively interacted with the middle class. With his friend Yoo Choi-Jin, he formed 'Byuk-Oh-Si-Sa(碧梧詩 社)' and shared friendships through poems and paintings.

Culture and art of the time was motivated by scholarship and culture of the Qing Dynasty. Study and culture developed with Kim Jung-Hee in the center, the Enlightenment Thought grew, gap between differ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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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cial classes narrowed, and commoners' literature prospered.

There are different opinions on if Cho Hee-Ryong were one of disciples of Kim Jung-Hee who was the leader of culture at the time. However, considering researches done so far, Cho Hee-Ryong could have greatly affected by Kim Jung-Hee due to difference in their social classes.

The most important ideas of Cho Hee-Ryong's works are 'Amusement (遊戱論)' and 'Handicraft(手藝論).' Center of his poems, writings, and paintings is in pursuit of 'amusement,' 'play and have fun.' He emphasized handicraft that focuses on painter's skill than painter's ideology.

It seems that development of Cho Hee-Ryong's own artistic opinion was based on realization of his social rank as a commoner. Artists who appear in Cho Hee-Ryong's book, Ho-San-Oe-Gi(壺山外記) are mostly commoners. In pattern of their behavior, criticism on the social class is embedded.

Due to criticism based on self-realization of his social class, he did not stop at imitating works of the upper class, but built his own world of art.

Cho Hee-Ryong's view on understanding poems stood with unity of poem and painting(詩畵一致). He especially focused on putting painting in the poem. By seeking pictorial image in poems, he escaped from political ideology criticizing the system, and pursued free and pure art.

Cho Hee-Ryong used poetic concept to voice his opinion on paintings.

He added comprehensive and detailed thoughts based on theory of Namjong literary artist's style formed in late Ming Dynasty.

His Mooklando, ink painting of orchid, was affected by Kim Jung-Hee, but he did not insist on technique of the time.

His drawings of bamboo were finished in a place of exile. Cho Hee-Ryong admitted his bamboo drawings were influenced by Jung Pan-Gyo, but still adhered to his own style saying that 'at the end, it is just my way.'

He loved plum blossom very much and drew many pieces of it. Und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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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fluence of plum blossom drawings from the Qing Dynasty, he changed composition and developed calligraphic and glamorous style with his own touch.

He was a commoner. Still he opened his own world of art by reinterpretation of Chinese Namjong Paintings using Joseon's sentiment and artistic sense.

Especially, he did not stop at absorbing Kim Jung-Hee's influence. He created his own works with his own theory.

The most important years of his life as an artist were 3 years of exile. He was exiled to Imjado at the age of 63. The exile gave him a great deal of shock, but it worked as a chance to mature his work.

Lessons that can be learnt from Cho Hee-Ryong's work are as following. First, he stressed creativity and sensitivity of an artist while fully understanding the tradition. He also emphasized 'amusement' that let an artist freely express his emotion in work, and 'handicraft' that highlights skill of an artist.

Second, he also created painting in the literary artist's style as an independent area of art. Before Cho Hee-Ryong, it was considered as leisure for a nobleman.

Third, he emphasized originality of art. It is a part that stands out in Cho Hee-Ryong's work. He opened his original world of art with spirit of 'never follow other's foot step(不肯車後).'

This study shows that Cho Hee-Ryong's art world is in context of traditional literary artist's style. But it is different from current of the time and the difference came from his experience of exile.

Cho Hee-Ryong's work that inherited tradition of literary artist's style, took unique characteristic of the time independently, and created with his own personality provides modern culture and art with great lesso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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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 서 론

이 논문은 조선시대 말기 추사 김정희와 함께 우리나라 문인화단을 이끌었던 우봉(又峯) 조희룡(趙熙龍, 1789~1866)의 예술론을 연구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1)

조희룡의 예술론에 주목한 이유는 여항(閭巷)2)문인서화가인 그가 정치·사회 적으로 격동했던 조선 말기의 시대적 상황과 유배의 고통 속에서도 당시의 흐름 만을 좇지 않고 독창성을 강조함으로써 개성있는 예술의 꽃을 피운 좋은 본보기 가 된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특히 예술에서의 독창성이나 개성은 현대에 와서 도 그 중요성이 점점 커지고 있는데다 작품의 완성도나 가치를 가늠하는 척도가 되기도 한다는 점에서 조희룡의 예술세계를 되짚어보는 것은 더욱 의미가 있다.

조희룡은 중인이라는 신분 자각을 통해 여항인물들에 대한 애정을 강조하면서 도 중국 문화의 답습에 그쳤던 양반사대부의 봉건문화에는 대단히 비판적이었다.

그는 18세기 말부터 19세기 중반을 거치는 생애 동안 창작활동을 병행하면서 시(詩)․서(書)․화(畵)에 대한 독창적인 견해와 설명을 내놓아 질적으로나 양적인 측면에서 우리 역사상 드물게 왕성한 예술활동을 펼친 대가로 꼽히고 있다.

한 시대의 예술가가 작품을 통해 보여주어야 하는 것은 자신만의 느낌과 표현 으로 현실세계를 형상화하는 것이며, 진실의 토대 위에 이같은 느낌과 표현을 쌓

1) 이 논문은 ‘조희룡의 예술론’의 텍스트로 실시학사고전문학연구회, 『조희룡 전집(전6권)』(한길아트, 1998)을 사용했다. 조희룡 전집 1권인 『석우망년록(石友忘年錄)』은 조희룡이 예술창작 활동 틈틈 이 생각과 느낌을 짤막하게 쓴 산문집이며 2권 『화구암난묵(畵鷗盦讕墨)』은 유배생활의 고적함을 토로하기도 하고 그림에 대한 생각도 군데군데 쓴 일종의 수필집이다. 3권 『한와헌제화잡존(漢瓦軒 題畵雜存)』은 그림에 써 넣는 시문(詩文) 262개를 모아놓은 것이며, 『우해악암고(又海岳庵稿)』와

『일석산방소고(一石山房小稿)』 등을 묶은 제4권은 한가로운 생활을 담고 있는 칠언절구나 풍경을 읊은 글이다. 5권은 친지들에게 보낸 글 60편을 그 자신이 직접 가려뽑은 『수경재해외적독(壽鏡齋 外赤牘)』과 『우봉척독(又峰尺牘)』 및 여항인들의 시문집 속에 산발적으로 전하는 글을 모았으며 대표작으로 꼽히는 6권 『호산외기(壺山外記)』는 중인층을 중심으로 한 서민 등 소외계층에 대한 전기물이다. 사용된 텍스트 중 원문이 중요한 시(詩)나 문장은 본문에 함께 실어 이해를 돕고, 일반 텍스트의 경우 한글을 중심으로 하고 원문을 각주에 소개한다.

2) 여항인(閭巷人)은 조선 후기에 와서 경제적·문화적 성장을 통해 사회세력으로 형성된 서울의 중간계 급이다. ‘중간 계급’은 그 직임이 역관(譯官), 의관(醫官) 등의 기술직 중인이거나 경아전(京衙前, 조 선시대 중앙 各司에 소속된 하급관리)의 서리를 말한다. 이들은 조선이 중세적 질서로 이탈해 가는 과정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매우 의미있는 사회세력이라고 할 수 있다. 강명관, 『조선후기 여항문학 연구』(창작과비평사, 1997), pp. 2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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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올릴 때 작품의 완성도도 높아진다고 할 수 있다. 좋은 작품이나 위대한 예술 작품에서 높이 평가되는 것들 중 하나는 ‘자신만의 느낌과 표현’과 일맥상통 하는 독창성이다. 하지만 단지 새로움 만으로는 독창성에 기여할 수 없다. 독창 성이란 어떤 특정한 종류의 예술적 성취로 이뤄진다고 할 수 있다. 어떤 예술적 문제에 대한 독립적이고 주목할 만한 해결책을 실현한다든지, 새로운 예술적 문 제에 대한 독립적이고 주목할만한 해결책을 실현한다든지, 새로운 예술적 기술을 발전시킨다든지, 너무나 익숙한 소재를 놀랍도록 신선하게 다루는 것 등이 여기 에 해당한다.3)

역사적으로는 때로 너무 독창적이어서 그 시대에는 인정받지 못했던 예술의 모습을 발견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러한 독창성은 소수의 사람에 의해 동의되어 지고, 향유되면서 새로운 예술의 흐름을 이뤄내고 결국 특정한 시간과 사건, 공 간에 이르러 획기적인 것으로 재발견되며 진정한 가치를 되찾기도 한다.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가 예술의 새로운 주류로 기록되기도 한다.

문화예술의 중요한 역할 중 하나로 개별의 작품을 통해 인류문화에 폭넓게 공 헌하는 것을 꼽을 수 있다. 예술은 끊임없이 창조성과 독창성을 발휘해 새로운 사회와 문화를 이해할 수 있도록 해준다. 인간의 존엄한 가치를 깨닫게 할뿐 아 니라 사람을 이해하고, 사람과 사람을 연결해주는 고리 역할을 담당하기도 한다.

이로 인해 한 시대를 지배하는 예술 흐름은 모든 장르에 나타나는 경우가 많으 며, 어떤 예술을 이해한다는 것은 인간과 그 삶, 또는 시대를 이해하려는 시도라 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어떠한 예술작품이나 이론을 잉태시킨 배경을 분석할 때, 그와 함께 한 시대의 역동적이고 다양한 흐름을 함께 짚어보는 것은 필수적이라 고 할 것이다.

이와 같은 시각의 바탕에서 이 논문에서는 조희룡의 삶과 시대적 배경은 물론 그의 창작론이 어떻게 만들어졌으며, 또 어떻게 작품을 통해 직접 실현했는가를 모두 5개 장으로 나눠 살펴볼 것이다. 먼저 본문 Ⅱ장 1항에서는 당시 조선의 국내·외의 전반적인 상황을 알아본다. 이와 함께 당시 정치, 사회, 그리고 사상

3) “좋은 작품, 또는 위대한 예술작품에서 우리가 높이 평가하는 것들 중 하나는 독창성이다. 여기서 독 창성이란 단지 처음으로 무언가를 하는 것만을 뜻하지는 않는다. 굉장히 나쁘거나 끔찍한 어떤 것을 처음으로(지금껏 아무도 그렇게 하지 않았던 데에는 다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만드는 것도 새로운 것이며, 다른 사람의 생각이나 기술에 미미한 변화를 주어서 복제하는 것만으로도 새롭다고 할 수 있 을테니까 말이다. 단지 새로움 만으로 독창성에 기여할 수 없다.”, 매튜 키이란, 이해완 옮김, 『예술 과 그 가치』(북코리아, 2010), p.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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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흐름이 어떤 방식으로 당대의 일반적인 예술 현상으로 구현됐으며 여항문인 들은 어떤 역할을 했는지 등의 문화예술활동 전반을 알아볼 것이다. 본문 Ⅱ장의 2항에서는 중인 계층인 여항인으로서 살아간 조희룡의 생애와 폭넓은 교유관계 를 살펴본다. 이를 통해 외부 환경에 대응해 한층 성숙해지는 예술정신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본문 Ⅲ장은 조희룡의 예술과 사상을 살펴볼 것이다. 당시 문화예술계의 큰 흐 름을 일방적으로 좇지 않고 그가 강조한 유희론(遊戱論)과 수예론(手藝論)을 알 아보고 중인신분으로서의 자각과 예술가 의식, 자성일가(自成一家)의 창작정신을 알아본다.

본문 Ⅳ장에서는 조희룡이 작품에서 자신만의 독창성을 어떻게 드러냈는지를 정리해보고자 한다. 본문 Ⅳ장의 1항에서는 앞서 Ⅲ장의 맥락 속에서 조희룡 시․

서․화론의 요체는 무엇인가에 대해 살펴볼 것이다. 조희룡은 문인 사대부층과 전 문화원 화가의 경계에 있는 문인화가였다. 그는 시론과 서론, 화론을 함께 고민 한 인물이었으며, 따라서 그의 창작론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각각의 이론에 대한 유기적인 이해가 필요하다. 본문 Ⅳ장의 2․3항에서는 조희룡의 예술창작론이 구 체적으로 어떻게 실현됐는지를 알아보고자 한다. 2항은 조희룡이 그림뿐 아니라 시와 산문에서도 상당한 개성을 지녔음을 살펴보는 장이다. 그의 개성있는 시와 산문을 통해 각각의 글에 담긴 깊이 있는 의미들을 알아볼 것이다. 또 3항에서 는 조희룡의 묵란과 묵죽, 묵매화 등을 통해 자신의 독창성을 어떻게 나타내고 예술적 성취를 이뤄냈는지 확인해볼 것이다. 이 과정에서 드러나는 그만의 독창 성은 조희룡 창작정신의 실제적 증명이 될 것이다.

(14)

Ⅱ. 조희룡의 시대와 생애

1. 시대 배경

1) 국내·외 흐름

조희룡이 활동하던 조선후기는 정치·경제·사회·문화에 이르기까지 모든 방 면에 변화의 폭이 큰 시기였다. 19세기는 20세기로 넘어가는 근대 이행기 시점 이기도 하다.

대외적으로는 서구 열강의 팽창하는 제국주의가 아시아 지역의 국가들에게 개항을 강요하고 식민지화를 진행하는 중이었다. 일본은 1854년 미일화친조약 (美日和親條約)을 시작으로 서양에 문호를 개방했으며, 중국은 아편 전쟁 (1840~1842) 이후 미국, 영국, 프랑스, 러시아 등의 서구 열강에게 개항과 개 방의 침탈을 당하고 있었다.

대내적으로는 1866년 병인양요를 시작으로 서양의 통상수교 압력이 가시화되 는 시점이었으나 주류 담론인 성리학의 위정척사론이 대외 대응책의 국론으로 채택돼 쇄국정책을 고수하고 있었다.4) 안동 김씨(安東金氏)의 세도정치, 개화파 의 등장과 패퇴 등이 이어지면서 이에 수반한 각종 사건들이 줄지어 발생했다.

기독교가 들어와 박해 끝에 자리잡게 됐고, 이에 수반된 서구의 사상과 문화가 파급되게 됐다. 엄격하던 종래의 사회적 신분이나 계급이 해이해지거나 와해되기 시작했다.

조선의 지배층은 급변하는 시대적 요구에 부응한 현실극복의 능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그것은 당시 지배층의 성리학적 사조가 고답적인 형이상학의 탐구가 아 니면 비생산적 심성수양에만 전력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국내․외로 직면한 많은 문제에 대해 당대의 현실극복 논의의 중심은 성리학계, 즉 지배층 권력구조의 안 정과 질서 유지를 위한 공방 속에서만 이뤄졌다. 경제적으로도 19세기 초 조선 은 불안정한 사회였다. 왜란으로 대부분의 토지대장과 호적 등이 소실돼 기존의

4) 야마베 겐타로우, 유달영 외 역, 『일제의 조선침략사』 (보문서원 1965), pp. 30-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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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지제도가 극심한 혼란을 안고 있었고, 계급분화와 빈부격차는 심해졌으며 기본 생산계급인 농민층은 몰락하고 있었다.5)

다른 한편으로는 조선조의 통치 이념이었던 성리학 내에서 조선 후기 이후 정 권을 주도하게 되는 주기론을 기반으로 한 서인 계열, 그리고 서인 계열 중에서 도 서울을 중심으로 인성과 물성이 같음을 주장하는 다소 개방적인 학풍의 남론 계열 자제군관들이 청나라의 연행(燕行)을 경험하면서 서양의 과학과 사상을 수 용한 청문화를 적극적으로 수입하게 됐다. 이에 따라 조선에는 실사구시(實事求 是)를 기본으로 하는 실학이라는 새로운 학풍이 생겨났으며, 여기에 여항문인계 층이 그들의 행정실무 능력을 바탕으로 부(富)를 축적, 새로운 문화담당 층으로 성장하는 토양을 제공했다. 실학계열에서 청조 고증학을 기반으로 당대 예술계를 대표하는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 1786~1856)와 여항문인화가 조희룡의 활 동은 이같은 시대를 배경으로 한 것이다.6)

2) 문화예술활동

조선 후기는 급변하는 시대적 상황과 조류가 당시의 문화와 예술에도 다양한 영향을 끼친 시기였다. 19세기 중엽에는 청조(淸朝)의 학술과 문화의 자극을 받 아 김정희를 중심으로 고증학(考證學)과 금석학(金石學)이 발달됐고, 이수광의

『지봉유설』을 위시한 백과사전류의 업적들이 배출됐다. 개화사상이 싹트고 성 장했으며, 사회적 신분의 격차가 완화되고 평민문학이 융성하게 됐다.

문학 부문에서는 판소리계 소설, 한문단편, 후기가사, 사설시조 등이 성행하거 나 번창했으며, 여항인들의 문학참여 등의 새로운 국면도 진행되고 있었다. 문학 의 장르 및 형식변화는 그 시대의 변화와 밀접하게 관련해 전개되기 마련인데, 19세기 문학의 변화는 그 이전 시대와 다르게 당대의 현실과 아주 밀접하게 맞 물려 있다.7)

5) 이세영, 「19세기 전기 사회경제의 변동」, 『추사와 그의 시대』(돌베게, 2002), pp. 96-98 6) 정원희, 「우봉 조희룡의 창의성 고찰」(홍익대학원 석사논문, 2011), pp. 6-7

7) 서종문은 「19세기 한국문학의 성격」( 『19세기 한국전통사회의 변모와 민중의식』 고려대 민 족문화연구총서 1)에서 ①역사적 현실을 반영하는 문학세계의 전개 ②현실비판의 강화와 위기의 식의 강화 ③문학양식체계를 변환시키는 개방성의 가중을 19세기 문학의 전반적 성격으로 규정 하고 있다. 그는 ①항의 세부적 내용으로 역사적 현실 반영의 일반적 현상, 조선조 후기의 사회 해체현상의 투영, 인습적 관념의 파괴와 실질적 가치의 표명을 내세웠고 ②항에 대한 세부적 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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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당시의 문화예술에서 절대적인 영향을 끼친 인물은 김정희였다. 이 시기 에는 조선 후기까지 전래돼 축적됐던 중국 송(宋), 원(元), 명(明)의 남종화가 계승되고 청으로부터 새롭게 전래된 정통파(正統派), 양주팔괴(揚州八怪), 해상 파(海上派) 등 여러 계통의 화풍과 화론이 수용돼 새로운 화풍을 창조하는 데 필요한 풍부한 자원을 확보하고 있었다. 더욱이 북학파의 영향을 받아 청조문화 (淸朝文化)의 수용에 적극적이었는데 김정희는 청조 고증학풍을 통해 조선의 구 (舊)문화를 신(新)문화로 전개하고자 했다. 그는 경학(經學), 금석학, 문자학, 사 학(史學), 지리학, 천문학뿐 아니라 불교학, 서화(書畵) 등 매우 광범위한 분야 에서 깊은 안목을 갖고 있었다. 김정희의 학문은 이처럼 넓고 분명한 바탕을 토 대로 하며, 그의 예술은 시(詩)·서(書)·화(畵) 일치사상에 입각한 고답적인 이 념미의 구현으로 고도의 발전을 보인 청조 고증학에 기반하고 있었다. 종래 조선 성리학을 바탕으로 독자적인 발전을 보인 조선 고유의 화풍에 대해서는 철저하 게 비판적인 태도를 보였던 김정희의 예술은 그 전파성이 학문에 비유할 수 없 을 만큼 강력한 진폭으로 조선의 예술계를 석권했다.8)

김정희와 그를 추종한 이들은 사의(寫意)를 존중하고 형사(形似)를 경시하는 남종문인화를 크게 발전시켰다. 이 시기, 문필과 관련된 왕정실무를 담당하면서 배양된 한문학 실력을 토대로 성장한 여항문인 역시 김정희의 영향을 받으며 새 로운 문화담당층으로 활약했다. 여항문인들은 문화적 측면에서 사대부 문인들과 동렬에 오르게 되면서 누구보다도 중세 문인문화의 묵수와 강화에 앞장섰으며 이에 수반해 갖춰야 할 사대부문화의 하나였던 감상물 회화의 창작과 향유활동 에도 적극 참여했다. 신분의 제약에서 비교적 자유로웠던 이들은 새로운 화풍의 수용과 변화에 적극적이었다. 이들에 의해 서화를 만드는 것은 하나의 직업이 됐 고, 서화는 구조적으로 유통되기도 했다. 여항문인들의 이러한 회화활동은 12세 기를 전후해 우리나라 그림의 중세적 감상물로의 전환에 이념과 토대를 제공했 던 문인화 사상과 시서화 겸비풍조의 저변확산을 촉진시키면서 19세기의 회화 조류형성에 크게 작용했던 것으로 판단된다. 이러한 흐름과 성향은 구한말을 거

용으로 현실 폭로와 현실비판적 관점의 형성, 풍자를 통한 비판정신의 강화, 위기의식과 응전 의 지의 표출을 제시했다. ③에 대한 세부적 내용으로는 율문양식의 형태적 확장과 판소리의 개방 성, 문학장르의 접융과 문학양식의 결합을 내세웠다. 허준구, 「조희룡의 현실인식과 예술론」,

『淵民學誌』 3호(1995), p. 155 재인용

8) 정원희, 「우봉 조희룡의 창의성 고찰」 (홍익대학원 석사논문, 2011), p. 10 재인용, 정병삼 『추사 와 그의 시대』(돌베게 2002), p.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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쳐 20세기 초반까지 지속되는 등 근대초기 전통회화의 전개에도 적지 않은 영향 을 미쳤던 것으로 보인다.9)

이 시기 여항문인들로서 조희룡의 『호산외사(壺山外史)』, 유재건(劉在建)의

『이향견문록(里鄕見聞錄)』, 이경민(李慶民)의 『희조일사(熙朝佚事)』, 역관 중인출신인 오세창(吳世昌)의 『근역서화징(槿域書畵徵)』 등이 선보였다. 회화 에 있어서는 북경을 통해 들어온 서양화법이 이 시대의 궁궐도(宮闕圖), 기명절 지도(器皿折指圖), 책가도(冊架圖), 초상화 등에 다소 적극적으로 반영돼 새로운 양상을 띠었다.10) 특히 훗날 조선문인화의 창안으로 ‘묵장(墨場)의 영수(領 袖)’11)로 불릴 만큼 여항화가들의 중심 역할을 하였던 조희룡은 이 변화와 개 혁의 중심에 서 있었다.

2. 생애와 교유

1) 생애

조희룡(趙熙龍)은 1789년(정조 13년) 5월 9일 경기도 양주(지금의 서울 노 원구 월계동)에서 태어났다. 자(字)는 이견(而見), 치운(致雲), 운경(雲卿) 등이 며 호는 우봉(又峯), 호산(壺山), 범부(凡夫), 단로(丹老), 매수(梅叟), 매화두타 (梅花頭陀) 등이 있고 족보명은 희룡(羲龍)으로 되어 있다.

조희룡은 이성계를 도와 조선을 개국하는데 공을 세운 조준의 15대손으로서 문학적 소양이 있던 아버지 조상연(趙相淵)과 어머니 전주 최씨(全州崔氏)가 낳 은 3남 1녀 중 장남이었다. 그는 둥근 머리와 모난 얼굴, 가로찢어진 눈과 성긴 수염에 키는 1미터 80센티미터가 넘었다고 한다. 큰 키에 몸은 야위어서 오세창 은 『근역서화징』에서 그가 길을 가는 모습을 ‘마치 학이 가을 구름을 타고 9) 홍선표, 『조선시대 회화사론』, 「朝鮮 末期 閭港文人들의 회화활동과 創作性向」(문예출판사, 1999),

p. 325

10) 안휘준, 「朝鮮王朝末期(약1850~1910)의 畵壇과 畵風」, 『조선말기 회화전』(삼성미술관, 2006), p. 134

11) “조희룡은 『근역서화징(槿域書畵徵)』의 편저자 오세창(1864~1953)이 ’묵장(墨場)의 영수‘라고 칭 했을 정도로 추사 김정희와 함께 화단의 중심 인물이 되어 조선말 우리나라의 문인화단을 이끌었던 인물이다.”, 김영회, 『2004 이달의 문화인물-조희룡(1월)』 (문화관광부, 2004), p.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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펄펄 나는 듯 하다’고 묘사했다.12) 열 네 살 되던 해(1802)에는 어느 집안과 혼담이 있었으나 너무 허약해 일찍 죽을 것이라 하여 퇴짜를 맞았다고 한다.

조희룡이 보낸 어린 시절은 영조와 정조가 나라를 밝게 다스려 평화가 계속되 던 이른바 ‘소대(昭代)의 시절’이었다. 사대부는 아니었으나 어엿했던 집안의 내력과 상당한 재력에도 불구하고 어린 시절 조희룡은 옷조차 이기지 못할 정도 로 허약한 소년이었다고 전한다.

조희룡의 생애를 구성하는 데 가장 어려운 점은 초년과 중년에 관한 기록이 없다는 점이다. 기록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조희룡의 성격상 일기든 아니면 그 무 엇이든 자신의 삶에 대한 기록이 있을 법한데 아직 발견되지 않는다.13)

조희룡이 사회에 눈을 뜨던 20대, 조선사회는 세도정치가 본격화되면서 잘못 된 정치의 후유증으로 사회의 기강이 무너지고 있었다. 영조와 정조 치하에서 유 지됐던 건강한 조선의 기풍이 사라지고 저속하고 부패한 저급문화가 날로 확산 됐다. 만연한 부패와 사치, 세속적 쾌락은 조선역사상 전례가 없는 수준이었고 나라를 생각하는 젊은 지식인이라면 누구나 사회기강의 해이현상에 고민하지 않 을 수 없었기에 조희룡 역시 시대에 대한 많은 고민을 안고 있었을 것으로 짐작 된다.

그가 혼인을 언제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전주 진씨(全州陳氏)를 아내 로 맞아 성현(星顯)․규현(奎顯)․승현(昇顯) 세 명의 아들과 세 딸을 두었다. 당시 로선 늦은 나이인 스물아홉에 큰 아들 성현이 태어났다고 한다. 하지만 이 아들 은 아비보다 앞서 1858년 마흔 두 살로 생을 마감한다. 이에 앞서 그는 나이 스 물 여섯에 어머니를 여읜다(1814). 이듬해 2월에는 백부 상린(相麟)의 상복을 입어야 했고 6월에 다시 아버지를 여의(1815)는 아픔을 겪는다. 조희룡은 부모 사망 후 외부출입을 삼가고 3년간 시묘살이를 하면서 어머니와 아버지를 여읜 빈 마음을 서화골동수집과 그림공부로 채웠던 것으로 보인다.

조희룡이 그림을 시작한 것은 나이 삼십이 되었을 무렵이다. 그는 젊은 시절

12) 이성혜, 『조선의 화가 조희룡』(한길아트, 2005), p. 51

13) 이성혜는 조희룡의 종손인 명호(明鎬, 1884~1951)가 조희룡 유배지 임자도를 방문해 유품들을 수 습해 개성으로 가져갔기 때문이라 짐작한다. 후손인 종상씨에 따르면 명호는 조희룡에 대해 관심을 갖고 두 차례 임자도와 제주도를 방문해 유품을 정리했다. 그가 개성으로 전근을 가면서 집안의 근 거지도 옮겼는데 이 때 경기도 고양군에 있던 조희룡의 무덤을 비롯한 몇 구의 가족묘를 정리하고 개성에 개인 산을 사서 이장해 갔다. 조희룡의 저술과 그림 등 유품 등도 이때 옮겨졌을 것으로 추 정된다. 위의 책, p. 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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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엔가 몰두하면 침식을 잊을 정도로 집중하는 성품을 갖고 있었다. 마음에 드 는 서화골동품을 얻으면 기뻐서 밥먹는 것도 잊고 황홀경에 빠져 있었다고 한다.

조희룡은 시서화(詩書畵)에 모두 능해 삼절(三絶)로 불렸다. 이조의 아문 액정 서에 근무하며 문향실의 편액글씨를 쓰는 등 현종의 총애를 받았다. 또 지기들과 후배문인들을 규합하여 ‘벽오시사(碧梧詩社)’(1847)를 만들었다. 벽오시사를 중심으로 활동하면서 그들과 함께 김정희 등이 도입한 정통 중국 남종 문인화에 서 중국적인 것을 세탁하고 조선인의 정서와 미적 감각으로 재해석해 조선문인 화의 세계를 열고자 했다.

그는 서체나 난 그림에 있어서는 김정희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김정희가 잘 그리지 않았던 매화나 대나무 그림에 있어서는 자신만의 예술세계 를 펼쳐갔다. 그는 당시 유행했던 여항문인들의 시사를 주도하면서 문단과 화단 에서 두드러진 활동을 하여 조선 말기 여항화가들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다.

또 조희룡은 조선후기 예술인 여항인들의 삶을 전기형식으로 정리한 『호산외 기(壺山外記)』를 편찬하는 등 많은 글을 남겼다. 문집을 통해 남긴 회화에 관한 글은 그의 회화세계와 당시 화단의 경향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 다. 다방면에 걸친 그의 재능은 그보다 세 살 위인 김정희와 연관되기도 하고 또 대비되기도 하면서 여러 각도에서 평가된다. 그의 독특한 회화관과 화풍은 19세 기 조선 화단의 새로운 경향을 대변하는 것으로서 의미가 있다.

조희룡의 생애에서 가장 커다란 시련은 1851년(철종 2)에 신안군 임자도로 유배를 가게 된 일이다. 안동 김씨 세도가들과 왕실의 전례문제를 둘러싼 공방으 로 권돈인(權敦仁)과 김정희 등이 유배를 가게 되는데 이 때 조희룡은 오규일 (吳圭一)과 함께 각각 권돈인과 김정희의 ‘조아심복(爪牙心腹)’으로 지목돼 함께 유배당하게 된다. 이들 중인층의 유배는 중인층의 양반 사대부로의 접근에 대한 지배층의 경고의 의미를 담고 있기도 하다.

63세 고령의 나이에 외딴 섬에서의 귀양살이는 조희룡에게 적잖은 충격을 주 었다. 그는 유배 초기에는 자신이 왜 유배를 왔는지 모르겠다는 원망을 여러차례 나타내기도 했다. 하지만 유배의 체험은 조희룡으로 하여금 자신의 처지를 다시 한 번 절감하고 예술세계를 성숙시키는 계기가 됐다. 3년 간의 유배살이에서 조 희룡은 그림을 그리거나 저술을 하는 것으로 음울한 마음을 해소한다. 간간이 함 께 귀양 온 우석선생(友石先生)이라는 인물과 괴석을 수집하러 다니기도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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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자도의 젊은이 홍재욱(洪在郁)과 주준석(朱俊錫)에게 서화를 가르치기도 했 다.14) 이 시기에 그는 예술에 관한 잡록인 『화구암난묵(畫鷗盦讕墨)』과 시집

『우해악암고(又海岳庵稿)』, 친구들에게 보낸 편지를 모은 『수경재해외적독(壽 鏡齋海外赤牘)』등 3종의 책을 남겼다.

유배에서 풀려난 후 조희룡은 서울 강가에서 은거하며 『석우망년록(石友忘年 錄)』을 완성하고 여항인들의 문집에 시문을 지으며 한가로이 즐기다 1866년 7 월 11일 여생을 마쳤다.15)

2) 교유

조희룡이 교유했던 인물들을 보면 그 폭이 상당히 넓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우선 당대 예술을 주도했던 김정희가 있고 추사와 관계가 돈독했던 권돈인과도 직접 교유했던 것으로 보인다. 철종의 장인이며 김문근(金汶根)의 외종질이었던 남병철(南秉哲)은 조희룡에 대한 <회인시(懷人詩)>를 남기기도 했다. 또 신위 (申緯)의 외종손인 동랑(冬郞) 한치원(韓致元)이나, 강세황(姜世滉)의 종손인 대 산(對山) 강진(姜溍) 등과도 시를 주고받은 것이 보인다.16)

하지만 조희룡이 진정으로 교유한 인물은 여항의 중인층이었다. 직업화가이자 조희룡의 오랜 친구로서 중요한 사람은 이재관(李在寬, 1783~1838)이다. 조희 룡은 20여세 때 이재관과 함께 도봉산 천축사에 놀러가 도봉서원에서 이재관이

<추산심시도(秋山尋詩圖)>를 그리고 자신이 그 위에 제를 썼다고 회고했으며,17) 그가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고 가난하여 그림을 팔아서 어머니를 봉양했다고 밝 혔다.18)

14) “…이곳에 홍재욱(洪在郁)·주준석(朱俊錫) 두 사람이 약관(弱冠) 동갑으로 밤낮 상종하고 있는데 시 와 글씨가 청묘(淸妙)하여 놀랍고 기뻐할 만하다. 붓과 벼루 사이에 일을 맡아 조금도 게을리 함이 없으니 어찌 어하(魚蝦)의 고장에서 이런 아름다운 젊은이를 얻어 나의 시름을 위로해줌이 이와 같 을 줄 알았으리요. 이에 그 시를 묻는 뜻에 응답하노니 말은 비록 조리가 없지만 또한 스스로 옛법 이 되는 것이니 혹 시도(詩道)가 아니겠는가?”, 『우해악암고』 pp. 107-108

15) 『석우망년록』, p. 26

16) 김영회 외, 『조선문인화의 영수-조희룡 평전』(동문선, 2003), p. 13

17) 내가 소당(小塘·이재관)에게 말하였다. “우리들이 가을철 바람소리 쓸쓸한 산 속에서 기숙하니 연하 (煙霞)의 기운이 요기가 될 만하다. 시화로써 기록해 둘 수 없겠느냐?” 소당이 흔쾌히 응하여 ‘추산 심시도’를 그리고 내가 그 위에 화제를 붙였다. ‘우연히 종어가 있는 곳을 향하다가, 조두가에 와서 문을 두드렸다. 이 행차 걸식이 아닌데, 이미 연하에 배를 불렸네(偶向鐘魚地, 來敲俎豆家. 此行非乞 食, 已是飽煙霞.)’, 『석우망년록』, 65항, pp. 111-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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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희룡은 1847년 봄 친구·후배들과 함께 벽오시사(碧梧詩社)를 결성했다. 벽 오당(碧梧堂)은 절친했던 평생친구 산초(山樵) 유최진(柳最鎭, 1791~1869)의 집 이름이다. 유최진을 맹주로 하고 그들 주변의 인물들이 참여해 그곳에서 시와 그림으로 우정을 나눴다. 맹원은 모두 아홉이었다. 조희룡은 59세로서 가장 나 이가 많아 좌장이었고, 유최진과 이기복(李基福)은 동갑으로서 57세, 전기(田琦, 1825~1854)는 23세, 유숙(柳淑, 1827~1873)은 21세, 나기(羅岐)는 20세, 유재소(劉在韶)는 19세의 나이였다. 그들은 의형제를 맺고 서로를 형님 동생으 로 부르면서 혈육을 넘어선 관계를 표방했다. 조희룡과 유최진, 이기복은 지긋한 나이가 돼 있었고 전기, 유숙, 유재소는 아들뻘에 해당하는 젊은이들이었다. 특 히 유최진과는 임자도 유배기간 중 가장 많은 서신을 주고받을만큼 각별한 사이 였다.

‘유산초(柳山樵)를 그리워함’

벽오당 노인에게 말 부치노니

생각건대 떨어진 꽃은 뉘와 더불어 쓸어내시는지.

한 봄 동안 이미 고향 그리는 눈물을 억제해버렸더니 구슬 같은 시편을 받고 다시 옷깃을 적신다네.

寄語碧梧堂裏老, 商量花事與誰掃 一春己制思鄕淚, 自得瓊琚却混衣19)

조희룡은 벽오시사에서 젊은 후배화가들에게 그림을 지도하면서 자신도 왕성 한 창작활동을 벌였다. 특히 전기에게는 산수화와 매화도를, 유숙에게는 매화도 의 화풍에 큰 영향을 주었다. 그들은 벽오시사에서 시와 그림에 대해 논하면서 조선인에게 낯선 중국의 문인화를 소개했다. 조희룡과 후배화가들이 그려내는 작 품들로 조선의 문인화단은 꽃이 만개하게 됐다.

또 조희룡보다 10여 년 연상이면서도 40여 년의 우정을 쌓은 대산(大山) 오 창렬(吳昌烈), 30대에 50대의 조희룡을 찾아 중국 역대의 화파(畵派)에 관해 밤 샘 토론을 벌였던 소치(小痴) 허련(許鍊, 1808~1893)도 있다.

18) “이재관의 자는 원강(元剛), 호는 소당(小塘)이다.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었는데 집이 가난하여 그림 을 팔아서 어머니를 봉양하였다. 그림은 어떤 측정 화가를 사숙한바가 없었는데도 옛 법에 들어맞으 니 아마 하늘이 준 재주인 듯하다.”, 『호산외기』, 30항-이재관전, p. 128

19) 『우해악암고』, p. 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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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희룡은 여항의 저술에도 서문을 여러 편 남기고 있다. 유재건(劉在建)이 편 찬한 『이향견문록(里鄕見聞錄)』과 『고금영물근체시(古今詠物近體詩)』의 서 문, 안진석(安晉錫)의 시집인 『우현재시초(又玄齋詩鈔)』와 정수혁(鄭守赫)의 문집인 『소은고(小隱藁)』 등의 서문이 모두 조희룡의 손에 의해 씌어졌다. 몇 안 되는 19세기 여항인들의 문집이나 편저에 대한 서문이 대개 그의 손을 거치 고 있는 것이다. 이 점을 통해서도 19세기 여항문예에 있어 조희룡의 주도적 위 치를 확인할 수 있다.

특히 조희룡의 교유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은 김정희이다. 19세기 전반기에 김정희를 중심으로 펼쳐진 문학예술 활동은 학계에서 ‘완당바람’, ‘김정희파’, ‘추사 학예파’ 등의 말로 통용되고 있다.20)

조희룡과 김정희가 언제 어떻게 교분이 시작됐는지에 대한 명확한 근거 자료 는 발견되지 않고 있다. 기존의 연구에서는 조희룡을 김정희의 제자나 아류로 보 는 시각21)과 이를 부정하거나 의문을 제시하는 시각22)이 있다.

사제지간으로 보는 시각은 조희룡이 김정희의 심복으로 지목돼 유배를 간 점 과 김정희가 아들 상우에게 보낸 글에서 “…조희룡 같은 무리(趙熙龍輩)는 나 에게서 난 치는 법을 배웠으나 끝내 그림 그리는 법식 한 길에서 벗어나지 못하 는 것은 가슴 속에 문자기가 없는 까닭이다.”23)라는 대목이 있는 점을 제시하 고 있다.

유홍준은 ‘조희룡의 글씨는 완당의 글씨를 빼박은 듯이 똑같이 써서 어떤 경 우는 구별할 수 없을 정도였으며, 산수·매화·난초 그림에서는 완당 일파의 문 인화풍을 대표하는 아름다운 작품을 많이 남겼다. 그리고 조희룡은 완당을 스승 으로 극진히 모셔 완당이 북청으로 유배갈 때는 연루되어 임자도로 귀양가서 3 20) 정원희, 「우봉 조희룡의 창의성 고찰」(홍익대학원 석사논문, 2011), p. 15 재인용, 이동주, 『우리 나라의 옛 그림-완당바람』 (학고재, 1995), pp. 314-315, 안휘준, 「한국 근대회화명품-조선말기 화단과 근대 회화로의 이행」 (국립광주박물관, 1995), p. 134, 김양동, 「한국서예일백년-한국근대 서예의 전개와 양상」 (예술의 전당 1988), pp. 304-310

21) 유홍준 『완당평전 1~3』(학고재, 2002), 한명규, 『매화삼매경』(태학사, 2003), 정병삼 외, 『추 사와 그의 시대』(돌베게 2002), 허준구, 「조희룡 현실인식과 예술론」(1995), 정원희, 「우봉 조희 룡의 창의성 고찰」 (홍익대 석사논문, 20011), 한영규, 「조희룡의 예술정신과 문예성향」(성균관대 박사학위 논문, 2000)

22) 김영회 외, 『조선문인화의 영수 조희룡 평전』(동문선, 2003), 이성혜, 『조선의 화가 조희룡』(한 길아트, 2005), 이수미, 「조희룡의 화론과 작품」(서울대 석사논문, 1991), 윤경란, 「우봉 조희룡의 회화연구」(홍익대 석사논문, 1984), 손순옥, 「우봉 조희룡의 서화연구」(원광대 석사논문, 2004) 23) ‘如趙熙龍輩, 學作吾蘭, 而終末免畵法一路, 此其胸中, 無文字氣故也.’ 金正喜. 『阮堂全集』 卷 2, -

與佑兒, 김정희, 최완수 역, 『추사집』(현암사, 1976), p. 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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년간 유배생활을 할 정도였다’24)며 조희룡이 추사의 제자임을 밝히고 있다.

하지만 이를 부정하는 시각은 김정희가 1852년(철종 3년)에 유배에서 풀려난 데 반해 조희룡은 그 이듬해 해배된데다 서로가 외딴 곳에서 그리워하는 시구 (詩句)나 서찰이 없다며 의구심을 제기한다. 이에 앞서 김정희가 1840년(헌종 6년) 제주도에 9년동안이나 유배를 갔을 때도 조희룡이 위로차 방문이나 위로의 글을 보냈다는 기록이 보이지 않는 점도 의문부호를 붙인다. 김정희가 아들 상우 에게 편지를 보낼 때 김정희는 제주도에서 고초를 겪고 있었던 반면 조희룡은 서울에서 왕성한 예술활동을 펼치고 있었다. 그 당시 헌종이 조희룡은 총애하고 김정희는 유배길에 올린 것을 고려할 때 김정희는 조희룡이 곱게 보이지 않았을 여지가 있으며, 신분과 학식에서 월등히 앞섰다고 자부했을 김정희의 시각은 신 분이 주는 이념적 사고가 판단의 기준으로 작용했음을 배제할 수 없다.25)

또 조희룡이 추사체를 쓰는 점 역시 그가 중국의 예서에 열중했고 김정희도 중국 예서를 바탕으로 자신의 독특한 서체를 창안한 만큼 공통점을 가질 수밖에 없다는 의견을 제기하고 있다.26) 추사에 대한 조희룡의 만사(輓詞)에서도 ‘선생’

이라거나 사(師), 문생(門生), 제(弟)라는 단어가 없다는 점을 예로 들기도 한 다.27)

이를 종합해 볼 때 조희룡과 김정희의 관계를 명확히 밝히기 위해서는 보다 많은 관련 자료의 발굴과 연구가 병행돼야 할 것으로 보인다. 다만 현재까지의 연구자료들을 검토해보면 조희룡을 김정희의 제자로 단언하기는 어렵다고 볼 수 있으나 신분상하적인 관계 속에 김정희 예술세계를 접하고 새로운 청의 문물을 익히는 등의 많은 영향을 받았을 것으로는 생각된다.

24) 유홍준 『완당평전 1~3』(학고재, 2002), 1권, p. 297. 이와 같은 시각의 책과 논문은 다음을 들 수 있다. 한명규, 『매화삼매경』(태학사, 2003), 허준구, 「조희룡 현실인식과 예술론」(1995), 정 원희, 「우봉 조희룡의 창의성 고찰」(2011)

25) 손순옥, 「우봉 조희룡의 서화연구」(원광대 석사논문, 2004), pp. 13-16 26) 김영회 외, 『조선문인화의 영수 조희룡 평전』(동문선, 2003), pp. 197-198 27) 이성혜, 『조선의 화가 조희룡』(한길아트, 2005), p. 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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Ⅲ. 예술과 사상

1. 유희론(遊戱論)과 수예론(手藝論)

1) 유희론(遊戱論)

조희룡을 포함한 여항문인들의 창작성향은 창작의식과 태도, 창작이론 등을 통해 엿볼 수 있다.

창작의식에 있어 이들은 작화행위를 ‘희작(戱作)’과 ‘희사(戱寫)’, ‘자성유희(自 成遊戱)’로 여기고 ‘붓놀이(遊戱之筆)나 붓장난(戱筆)’ 또는 먹장난(戱墨)으로 인 식했다. 이런 관점은 북송대 사대부 문인화가들에 의해 제기됐던 한묵유희론(翰 墨遊戱論)을 계승한 것으로, 회화제작을 생업으로 삼지 않았던 문인화가들의 자 기 목적의식을 반영했다고 본다. 실용적 타목적에 예속돼 존재하던 작업화가들의 회사(繪事)와는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차별의식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자신들의 창작행동을 ‘놀이’나 ‘희롱’으로 규정했던 이러한 인식태도에는 문인화가로서의 비직업적 행위임의 전제와 함께 창작주체로서의 자유로운 활동 임이 천명돼 있다고 생각된다.28)

여항문인화가들은 그림을 도덕심 앙양과 교훈을 전파하는 왕조적·도덕적 입 장에서 교조적 규범으로 세력을 누려왔던 공리적 가치관을 거부하는 대신 사대 부 문인화가들의 자기충족적 가치관인 수기자오적(修己自娛的) 측면을 계승 강 조했었다.29) 더욱이 이때는 ‘완당바람’이 일세를 풍미하던 시기이다. 조희룡 은 김정희의 영향을 많이 받았던 인물이다. 그러나 조희룡은 김정희의 고답적이 고 기품있는 문인화의 세계를 그대로 수용하거나 안주하지 않았다.

특히 조희룡 사상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예술의 유희성이다. 그의 모든 시서화 핵심은 ‘즐겁게 놀며 장난한다’는 ‘유희(遊戱)’의 추구에 있다고

28) 홍선표, 『조선시대 회화사론』, 「朝鮮 末期 閭港文人들의 회화활동과 創作性向」(문예출판사, 1999), pp. 341-342

29) 위의 책, p. 3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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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 수 있다. 그림을 그림으로써 즐겁고 시를 감상함으로써 즐거우며, 글을 읽음 으로써 즐거움을 느끼는 것이다. 유희의 추구는 조희룡에 있어서 화두에 해당 된다 할 것이다. 그는 소동파를 매우 추앙하여 유배지에서 <동파입극상(東坡笠 屐像)>을 걸어두고 그에게 바치는 그림을 그리거나 그의 시를 차용해 짓기도 했다. 주목되는 부분은 조희룡이 동파의 문학관에서 유희적인 문자에 관심을 보였다는 점이다.

…동파공은 문장에 있어서 신선의 경지에 든 분으로, 그 남은 힘을 가지고 대체로 문자유희(文字遊戱)의 붓을 놀렸다. 모록문(茅鹿門·茅坤)이 이르기를 “이와 같은 문자는 한유(韓愈)와 구양수(歐陽修)가 하고자 하지 않은 바요, 이와 같은 견해는 한유와 구양수가 할 수 없는 바이다. 문자로 유희하는 것은 사람들이 하고자 하는 바인데, 공이 그것의 선구자가 된 셈이다. 천하에 만약 동파공이 없었다면 후생들이 어찌 유희의 문자를 누릴 수 있었겠는가?”… 30)

이를 통해 조희룡은 소동파의 문학관에서 유희정신을 중요시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시와 소품 산문에서 개성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는데 이를 뒷받침하는 것이 유희설이다.

‘왕유(王維)의 그림 속의 돌이 날아갔다’는 말은 어찌 그럴 리가 있겠는가마는, 옛 사람들은 모두 고사로 사용하였다. 무릇 시를 지으매 만약 이런 따위의 말거리가 없으면 곧 삭막할 것이다. 대개 시에 있어서 한 가지 도(道)는 굳이 정경(正經)과 정사(正史)를 따질 것이 아니고, 오히려 이런 따위의 말이 더욱 새롭고 더욱 기이함 이 없을까를 걱정해야 할 것이다.31)

조희룡은 시 속에 유희적 요소를 가미해 새로운 맛과 생동감을 불어 넣어줄 것을 권유하고 있다. 이는 곧 실제 작품에 구현돼 그의 시 세계에서 개성으로 나 타나기도 한다. 그는 또 그림 그리는 행위 자체에서도 즐거움을 찾는 유희론을 강조했다.

30) 坡公, 仙於文章, 而以其餘力, 率多遊戱之. 茅鹿門所云: “此等文字, 韓歐所不欲爲; 此等見解, 韓歐所不 能爲. 遊戱翰墨, 人之所欲, 公爲之先路, 天下若無坡公, 後生何以消愛?”, 『석우망년록』, 136항, pp.

177-178

31) ‘王維畵石飛去’之說, 豈有是理? 外此妄誕者, 何限? 而古人皆使故實. 凡爲詩, 若無此等語料, 便索然, 蓋時之一道, 不必論正經正史, 猶患無此 等語之愈新而愈奇也. 위의 책, 157항, p. 1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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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년 동안 개구리와 물고기만 있는 고장에서 문을 닫고 그림을 그려 거의 하루도 빠지지 않았다. 간혹 문 밖으로 흘러나갈 내 그림이 있어도 그것들을 내버려두었다.

이로부터 고기잡이 하는 늙은이나 소 먹이는 아이들도 매화 그림과 난초 그림을 얘 기할 수 있게 되었다. 아래와 같은 시 한 구가 있다.

이로부터 고기잡이가 매화 그림을 얘기하니

스스로 웃는다. 이 황무지에 하나의 유희 개시하게 된 것을.32)

특히 조희룡에게 유희, 그 자체였던 것은 난이었다. 시 공부를 통해 얻은 깊고 그윽한 정취를 난의 현상으로 만들어가는 과정은 특이한 체험이었다. 조희룡은 그림의 유희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홍라화상(紅螺和尙)이 여울에서 낚시를 하여 때로 홍하(紅蝦)가 나오기도 하였는 데 그 낚아올리는 것이 모두 유희였다. 나도 때로 벼루에 임하여 연지로 꽃을 그려 내면서 스스로 유희로 삼았다.33)

조희룡은 현실사회 속에서의 신분적 한계를 서화예술과 시문의 성취를 통해 승화시키려는 의지를 가지고 스스로에게 예술가로서의 사명감을 부여했다. 그러 한 사명감은 회화의 기법을 끊임없이 개발해나가는 동시에 시와 산문에서도 형 상적인 사유를 통한 회화적이고 감각적인 문장을 만들어냄으로써 일상생활적 소재를 다루더라도 새로운 의미가 드러나도록 독자적 세계를 구축하도록 만들 었다.34)

32) 二年䵷魚之鄕, 閉戶作畵, 殆無暇日. 或有流出門外者, 亦復聽之. 從此漁翁牧竪, 能設梅花蘭蕙. 有詩云:

“從此漁人說畵梅, 自笑開荒一遊戱.”, 『화구암난묵』, 20항, pp. 42~43

33) 紅螺和尙, 釣灘, 時有紅蝦, 隨其所獲, 都成游戱, 余時臨硏池, 以胭脂點花, 自成游戱, 『한와헌제화잡 존』, 52항, p. 62

34) 이지양, 「조희룡의 예술가적 자의식과 문장표현의 특징-소품 산문을 중심으로」, 『고전문학연구 제13집』(1998), p. 2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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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수예론(手藝論)

조희룡은 양주팔괴 정판교(鄭板橋)35)의 대그림 이론을 배우다가 "대나무를 그 리려면 먼저 가슴속에 대나무가 이루어져 있어야 한다"라는 흉중성죽(胸中成竹) 의 논리가 절대적 진리가 아니라는 사실을 발견했다. 중국인들은 그림에 앞서

“서권기(書卷氣) 문자향(文字香)이 가슴속에 들어 있어야 한다”고 했고 산수 를 그리려면 “가슴 속에 언덕과 절벽이 들어있어야 한다”고 했다.

그러나 조희룡은 비록 가슴속에 '서권기 문자향'이나 ‘대나무, 언덕과 절벽, 서권기 문자향이 이뤄져 있다’ 하더라도 손의 기량이 따라주지 않으면 그것을 표현할 수 없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산이 높고 달이 작다' 라든지 '물이 흐르고 꽃이 핀다' 라는 개념들은 그림으로 그릴 때 가슴 속의 그것과는 별 관계가 없으 며 오히려 손의 기량에 그림의 성패가 달려 있음을 주장했다. 그는 가슴 속의 이 념보다 화가로서의 기량을 중시하는 수예론(手藝論)을 강조했다.

동파공이 대나무 그리는 것을 논하여 ‘가슴 속에 대나무가 이루어져 있어야 한 다’고 했는데 이 말을 나는 일찍이 의심하였었다. 가슴 속에 비록 대나무가 이루어 져 있더라도 손이 혹 거기에 응하지 못하면 어찌하겠는가.

坡公論畵竹, ‘胸有成竹’, 是說余嘗疑之. 胸强有成, 手或不應, 奈何?36)

글씨와 그림은 모두 솜씨에 속하는 것이니, 그 솜씨가 없으면 비록 총명한 사람이 종신토록 그것을 배울지라도 능할 수 없다. 그런 까닭에 ’손 끝에 있는 것이지 가 슴 속에 있는 것이 아니다‘라고 하는 것이다.

書與畵, 俱屬手藝, 無其藝, 雖聰明之人, 終身學之, 不能, 故曰: ‘在於手頭, 不在胸 中.’37)

조희룡의 이 말에는 예술의 표현기법을 중시하는 태도가 나타나 있다. 아무리 작가의 정신세계가 훌륭하더라도 그것을 표현해낼 실무적 기량이 없으면 무엇으

35) “청나라 양주 흥화(興化) 사람 정섭(鄭燮). 판교는 그의 호. 위인이 소탕하고 탈속의 기운이 있었으 며, 천성이 순후했다. 시사에 재능이 있고 서화를 잘하였다. 화훼목석을 잘 그렸는데, 특히 난과 대나 무 그림이 묘한 경지에 이르렀다.”, 『한와헌제화잡존』, 171항-각주, p. 129

36) 『화구암난묵』, 12항, pp. 36-37 37) 『석우망년록』, 169항, p. 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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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 나타낼 수 있겠는가 하는 것이다. 그가 재능을 중요시 했음을 보여주는 예는 다음의 글에서도 잘 나타난다.

음률 한 가지 일에도 역시 의문을 가질 만한 것이 있다. 비록 총명한 사람일지라 도 그것을 배워 능치 못한 자가 있으며 비록 대단히 미련한 성품으로도 한 번 귀로 스쳐 듣고서 능한 자가 있다는 것이다.38)

고 하여 음률은 학식의 유무가 아니라 타고난 재능이 있어야 함을 강조했다. 그 는 또 사람의 재능을 세 가지로 나눠 설명한다.

사람이 부여받는 재주에는 세 가지가 있는데 첫째가 천재(天才)요, 둘째는 선재 (仙才)요, 셋째는 귀재(鬼才)이다. 옛날의 대작가들은 각기 이 한 재주를 얻은 다음 에야 이룰 수 있었던 것이니, 이 어찌 쉽게 말할 수 있겠는가?39)

라고 하며 시서화로 대성하려면 천부적인 재능이 있어야 함을 역설했다. 그는 이 런 생각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자기 자신을 직업적인 화가와는 구별하였으면 서도 문인화의 독특한 경지를 표현해내는데 힘썼고 문인학자와 동일시하지 않으 면서도 시문에서 자신의 내면과 생활주변을 생생하고 진실되게 담아내고자 노력 했다. 실무적 기량과 표현기법을 새롭게 만듦으로써 예술세계 자체도 새로운 것 으로 만들 수 있다는 생각은 정신성에 많은 비중을 두는 사대부들의 관념적인 예술론과는 매우 뚜렷이 구별되는 점이다. 그는 실제 표현기법의 연마를 위해 무 척 노력했다.

글씨를 쓰고 그림을 그리매 독서의 안목이 아니면 그것을 얻을 수 없으며 좋은 것, 훌륭한 것을 성취시킬 만한 손이 아니면 그것을 이룰 수 없다. 이 눈은 그 빛이 횃불과 같으며 이 손은 그 힘이 큰 솥을 들만한 것으로, 이러한 솜씨와 안목이 미치 는 곳에서 하나의 세계가 주조된다.40)

38) 音律一事, 亦有可疑者, 雖聰明之人, 有學之未能者; 雖以下愚之品, 有一經耳而能之者.『석우망년 록』, 40항, p. 78

39) 人之賦才有三, 一曰天才, 二曰仙才, 三曰鬼才, 古之大作家者, 各得此一才, 然後可成, 是豈易言哉?, 위 의 책, 16항, pp. 57-58

40) 作書作畵, 非讀書眼, 無以得之, 非濟勝手, 無以成之, 此眼其光如炬, 此手其力扛鼎, 手眼所及, 鑄一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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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희룡은 중국의 화가들이 소위 '심의(心意)'를 절대시한데서 더 나아가 '화가 로서의 기량', 즉 '수예'를 중시하게 됐다. 그는 중국의 화가들과 김정희가 중요 시하던 '흉중에 서권기와 문자향이 있어야 한다'라는 절대명제를 거부했다. 물론 조희룡이 수예론을 강조한다고 해서 문자향 서권기를 완전히 배제했다고는 볼 수 없다. “화가에게 있어서 노숙함과 유치함, 능란함과 졸박함은 모두 제이 의(第二義)에 속한다. 문장과 학문의 기운이 종이와 먹 사이에 떠올라 생동

해야만 보배가 될 수 있다”41)라고 한 것을 보면 서권기․문자향이 필요 없다

는 뜻이 결코 아니었다. 단지 조희룡은 서권기, 문자향뿐 아니라 ‘수예’를 강

조함으로써 김정희뿐만 아니라 당시 중국 중심의 절대명제와는 지향점의 차이를 나타냈고 이는 그림에 있어 이념과 기법의 차이를 불러오게 됐다.

2. 중인 신분의 자각과 예술가 의식

18세기 이후 시작된 여항인들의 시사활동의 맥락에서 해석할 수 있는 문화활 동은 상위신분인 사대부층에 대한 열망과 동경, 그리고 어느 정도의 열등감을 수 반했다. 이에 따라 그들은 중세적 문인 문화로의 편입을 원했으며, 서화창작활동 에 있어서도 사대부층의 기득권이라고 할 수 있는 사의적 가치관의 이념으로 연 결된다. 그들은 신분제의 한계를 문화적으로 극복하고자 하는 돌파구로써 벽오사 (碧梧社)라는 여항시사(閭巷詩社)를 결성했으며, 함께 격려해 창작활동에 임했 다. 또한 이러한 수평적 인간관계를 기반으로 당대의 많은 여항문인과 사대부들 이 교유관계를 형성하고 있었다. 벽오사의 맹주인 유최진이 김정희의 일행과 더 불어 연경과 설악, 금강산 등에 유람을 간 것은 작은 예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 다.42)

조희룡의 사상을 엿볼 수 있는 중요한 자료는 「호산외기(壺山外記)」이다.

「호산외기」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모두 여항인이거니와 그 서문에서 그는 “옛 사람의 언어와 행동이 전해질 만하건 전해질만한 것이 아니건 모두 ‘대인거필

坤. 『한와헌제화잡존』, 123항, p. 101

41) 畵家老穉工拙, 俱屬第二義, 文章學文之氣, 浮動于楮墨之間, 乃可爲珍. 『석우망년록』, 103항, p. 145 42) 정원희, 「우봉 조희룡의 창의성 고찰」(홍익대학원 석사논문, 2011), p.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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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人巨筆)’의 손에 의해서만 전해지는데 여항의 인물은 전해질만한 것이 있어 도 전해질 자료가 없으므로 내 자신이 기록해둔다.”43)고 서술했다. 사대부와 여항인을 대타적으로 인식하고 자신이 속한 여항의 인물들에 대한 애정을 강조 한 것이다. 「호산외기」에 언급된 인물의 대다수는 여항의 예술인들이며 이들의 행동 방식 기저에는 봉건 신분제 사회에 대한 강한 비판정신이 흐르고 있다. 조 희룡은 중세 예교의 속박에서 벗어나 주체적 자아를 실현하는 인물의 전형으로 여항 예술인의 존재에 주목하고 이를 개성적인 필치로 그려낸 것이다. 이는 18 세기를 거쳐 축적된 여항의 문화적 역량이 바탕이 된 것이지만 중인층으로서의 강한 신분적 자각이 없이는 탄생하지 못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자신의 신분에 대 한 철저한 자각에 기반한 비판의식으로 인해 그의 예술세계는 단순히 상층 사대 부문화의 모방과 추수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일정한 자기 세계를 구축하고 있는 것이다. 추사와 변별되는 조희룡의 독자성은 이 지점에서 출발하는 것으로 생각 된다.44)

조희룡은 또한 예술가로서의 주체적인 의식도 뚜렷했다. 그는 화가의 사회적 존재 위치와 자기 자신의 선택에 대해 고민한 글을 남겨 놓기도 했다.

회화와 같은 예술에 속한 일은 산림종정(山林鐘鼎)의 밖에 잇다. 그것을 관리하고 차지함은 따로 사람이 있다. 시험삼아 묻노니 그 사람은 누구인가?45)

…나는 금정안(金睛眼:금빛 눈동자)의 상(相)이 없으며, 위대하고 널리 통달할 상 이 없으며, 금마(金馬)·석거(石渠)의 상도 없고, 일구(一邱)·일학(一壑)의 상도 없 으니 그 장차 어디로 돌아갈 것인가? 가히 손을 이끌어 함께 금석서화(金石書畵)의 사이에 숨을 뿐이다.46)

그는 회화와 같은 예술세계는 산림처사나 고관대작의 생활 밖에 있어 그것을 담당하는 인물은 따로 사람이 있다면서 그는 누구인가라고 자문한다. 그리고 그 43) …古人言行之可傳而傳, 與不必傳而傳, 皆借大人巨筆而後傳, 吾豈其人乎哉! 且將拉燒之不暇, 而竊有感 焉. 雖有里巷略于人之可傳, 而何從而得之乎? 世有大人巨筆, 或從而訪之, 庶有微於是卷, 姑存之. 『호산 외기』, p. 30

44) 『석우망년록』, p. 28

45) 畵圖之事, 在山林鐘鼎之外, 管領自有其人, 試問其人誰也?, 『한와헌제화잡존』, 191항, p. 140 46) …無金睛眼相; 無瓌偉博達相; 無金馬石渠相; 無一邱一壑相, 其將何歸? 可携手同隱於金石書畵之間,

『석우망년록』, 100항, pp. 142-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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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부귀영화를 누리는 귀족이나 고관대작, 은둔한 도학자와의 길과는 아무 관련 없는 예술세계에 귀의하겠다는 의지를 보이고 있다. 이는 사대부 문화의 여기(餘 技)로 취급되고 그 독자성을 인정받지 못하는 현실에 반발해 회화예술의 독자적 의의를 강조한 것이며 그 밑바탕에는 시서화의 분야를 독점해온 양반사대부의 봉건문화 풍토의 권위주의에 대한 반발이 깔려 있다. 또 이처럼 주체적으로 각성 된 예술가적 자의식은 예술세계에의 몰입이 곧 조희룡 자신의 존재근거로 연결 되고 이를 통해 현실의 울분을 해소할 수 있게 된다.

검속(檢束)이 일변하여 환락에 이르고, 기쁨이 일변하여 취함에 이르고, 취함이 일변하여 글씨에 이르고, 글이 일변하여 그림에 이르고, 그림이 일변하여 돌에 이르 고, 난에 이르고, 광도난말(狂塗亂抹)에 이르고, 권태에 이르고, 잠에 이르고, 꿈에 이르고, 나비의 훨훨 나름에 이르른다.47)

검속에서 환락, 취정에 이르는 행위는 일상 세계로부터 예술적 충동이 솟아나 고, 이에 몰입하는 일련의 과정을 말한 것으로 여겨진다. 이에 글씨를 쓰고 그림 을 그려 억누를 수 없는 충동을 해소하게 되는데 ‘미친 듯이 칠하고 어지럽게 긋는다’(狂塗亂抹)에서 작가의 예술적 격정의 강렬함을 감지할 수 있다. 이처럼 조희룡이 예술적 격정을 중시하는 태도는 시문창작에 있어서 성령을 강조하는 것으로 이어지며 성령에 격조를 배합하고자 한 김정희와의 입장과는 일정한 차 이를 지니는 것이기도 하다.48)

47) 檢一變 至于歡: 歡一變, 至于醉: 醉一變, 至于書; 書一變 至于畵; 畵一變 , 至于石, 至于蘭, 至于狂塗 亂抹, 至于倦, 至于眼, 至于夢, 至于蝴蝶栩栩. 『한와헌제화잡존』, 112항, p. 95

48) 『석우망년록』, pp. 29-30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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