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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문(詩文)에서의 독창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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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I. 조희룡의 시대와 생애

2. 시문(詩文)에서의 독창성

이 있다. 이런 자세는 근대로 오면서 작가의 예술적 표현기량이 점점 중시되는 예술계의 흐름을 생각할 때 매우 흥미롭게 주목해야 할 대목이라고 생각된다.70)

메밀꽃 피어 있고 석양은 밝은데

끊어진 다리, 시든 버들에 매미 한 마리 울고 있네 허수아비 마주보며 후인(堠人)처럼 서 있으니

넓은 밭에서 만곡(萬斛)이 나오길 가호(訶護)하는 마음일레 蕎麥花開夕照明, 斷橋衰柳獨蟬鳴.

草人相對候人立, 訶護平田萬斛情.73)

흐드러진 메밀꽃, 우는 매미, 그리고 마주 선 허수아비와 후인으로 펼쳐진 현 실의 세계를 언어를 통해 다시 시적인 이미지로 형상화했다. 메밀꽃이 달처럼 활짝 핀 저녁에 끊어진 다리, 허수아비와 후인이 담아내는 일만 섬의 정은 그리 움의 극화이다. 위 시에서 우리는 전형적인 농촌의 풍경을 본다. 시 전체는 눈 앞에 한 폭의 아름다운 그림이 되어 펼쳐진다. 특히 저녁을 환하게 밝히는 눈부 신 메밀꽃은 그 색을 말하지 않았지만 시를 읽는 독자는 흰색이라는 것을 알아 챈다. 2구의 매미소리는 고독의 이미지를 형성하여 매우 구슬프게 독자의 청각 을 울린다.74)

① 황량한 산 한낮에 그림자 침침하고 언덕 끼고 드리운 곳 옥수수 무성하다 荒山白日影沈沈, 夾岸垂垂蜀黍深75)

② 풀 엮어 만든 원두막 바람이 말아가려 하는데 외 지키던 사람 떠나가고 들새들만 지저귄다 縛草爲樓風欲捲, 護瓜人去野禽喧76)

③ 삐약삐약 마을 병아리 꿩처럼 날기를 배우고 누런 지붕 조그만 집은 맑은 햇살 속에 있구나 喔喔村계(奚+佳)學雉飛, 黃茅小築在晴暉77)

73) 『우해악암고』, 1항, p. 38

74) 이성혜, 『조선의 화가 조희룡』(한길아트, 2005), pp. 107-108 75) 『우해악암고』, 1항, p. 37

76) 위의 책, 1항, p. 40 77) 위의 책, 1항, p. 42

언어는 사람들간의 소통을 위한 상징적 기호체계이다. 그러므로 좋은 시는 가 장 먼저 적절한 언어로부터 출발한다. 하지만 단지 언어만으로 시인이 나타내고 자 하는 감정이나 상황을 완벽하게 표현해 전달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 또 설령 시인이 완벽한 언어로 표현했다고 하더라도 독자가 언어만으로 시인의 감흥을 고스란히 전달받기란 쉽지 않다. 언어 자체에 감정이 담긴 것은 아니기 때문이 다. 그러기에 시인들은 시에 전달하는 정서적 감동을 표현된 언어에서만 찾을 것 이 아니라 언어의 행간에서 찾을 것을 요구한다. 그러나 조희룡은 언어의 행간을 말하지 않고 시각적이며 청각적인 감각 이미지로 직접 전달한다. ①의 ‘황량한 산 그림자’와 ‘언덕 끼고 드리운 곳 옥수수’는 한편의 그림을 보는 듯 시각적이면 서도 자신의 처지를 비유적으로 표현해 어두운 느낌을 준다. ②의 ‘원두막 바람 이 말아가려는데 들새들만 지저귄다’는 섬의 쓸쓸하면서도 황량한 이미지가 고스 란히 전달된다. ③의 ‘삐약삐약’ 역시 청각적이다. ‘누런 지붕’과 ‘맑은 햇살’이 조 화를 이루도록 글의 묘미를 살렸다.

문학과 예술이 관념의 육화라면 조희룡의 시와 그림은 현상의 관념화이다. 사 대부의 시가 임금에 대한 충성과 절의를 드러내기 위해 맑은 바람 한 줄기를 가 져온다면 그의 시는 보이는 자연을 그림 그리듯 시로 옮긴다. 그러므로 조희룡의 시를 읽는 독자는 한 폭의 그림을 마주하게 된다.

또 사대부의 그림이 서권기와 문자향으로 설명되는 고고한 정신의 사유를 검 은 먹선 몇 줄과 흰 여백으로 표현한다면 그의 그림은 무리지어 있는 산의 난 초를 빽빽하게 그려낸다. 서권기나 문자향에 의존하기보다는 기예나 수예에 의 존해 여과없이 그려내면서 그 사물이 갖는 특징을 포착하려 한다.

배 위에 실은 석양 한 조각 비껴 있는데 붉은 구름 겨우 걷히고 흰구름 나타나네.

바람을 타고 노 재촉해도 도리어 멈춘 듯 다만 청산이 물 위에 떠가는 것 보일 뿐일세.

船載斜陽一片橫, 火雲纔罷白雲生 乘風催櫂還如駐, 只見靑山水上行78)

78) 『우해악암고』, 20항, p. 132

지는 노을의 붉은 색은 구름이 붉다는 사실은 2구에 와서야 드러난다. 그 붉 음은 흰색과 대치되면서 색의 조화를 이룬다. 그것은 푸른 물빛으로 더욱 선명하 게 드러난다. 그 속에 바람을 타고 노을 저어가다 문득 환상에 빠진다. 자신은 가만히 있는 데 푸른 산이 물 위를 달리는 환시이다.79)

머리 저으며 선을 긋는 것이 사람의 상정인데 하물며 내 거처가 철권(鐵圈)으로 이뤄짐에랴!

오직 고향 동산에서 옛날에 보았던 그 달이 고래 파도 치는 문 앞 길에 초승달로 떠오르네.

掉頭畫地亦常情, 況復吾居鐵圈成!

惟有家園舊看月, 鯨濤門徑一鉤生.80)

유배자가 된 자신의 처지를 가감없이 담담하게 그려낸 시이다. 2구에서는 임 자도로 귀양을 가게 됨으로써 지인들과 거리가 멀어지는 것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자신의 처지를 그리고 있다. 4구의 ‘고래파도 치는 문 앞 길’은 일반인 이 쉽게 접근할 수 없는 가혹한 유배지의 현실을 표현하는 글로 2구의 ‘철권(鐵 圈)’과 비슷한 의미이지만 거기에 그치지 않고 ‘고향동산의 달’이 이곳에서 ‘초승 달로 떠올라’ 절망 속에서도 희망을 놓지 않으려는 의지를 보여준다.

어사(漁舍)를 빌려 잠을 자니 다시 이웃도 없고 캄캄한 방 소나무 섶으로 불때고 있네.

베갯밑 소금모래, 조수(潮水) 나간 뒤 깊은 밤 등잔불로 고기줍는 사람들.

借眼漁舍更無隣, 漆色房瀧松作薪 枕下鹵沙潮退後, 夜深燈火拾魚人81)

임자도로 유배 가는 길에 어장막을 빌려 잠을 자는 경우를 읊은 시로 그 표현 이 아름답다. 차분히 시를 음미하다보면 손에 잡힐 듯 선명하고 감각적인 표현이 깊은 울림을 준다.

79) 이성혜, 『조선의 화가 조희룡』(한길아트, 2005), pp. 111-112 80) 『우해악암고』, 1항, p. 49

81) 위의 책, 1항, p. 47

그의 시는 소재가 무엇이든 또는 내용이 어떤 것이든 모두 감각적 이미지로 처 리하여 한 폭의 그림을 이룬다. 이는 앞에서 언급한 유화입시(由畵入詩)의 시관 (詩觀)을 잘 보여주는 것이다. “해·달·별·연기․구름·바람·비·우레·번개·눈·우박·산천·

초목·날짐승·물고기·길집승·곤충, 이것이 곧 천지간의 큰 그림이다. 사람도 그림 속의 한 물체이니, 그림 속의 존재로 그림 그리는 일을 하니 이것이 이른바 그림 속의 그림이다”82)라는 그의 회화 정신의 구현이다.

조희룡의 산문 역시 문장이 짧고 서정적이며 생활 주변의 자질구레한 관심사 를 감각적이고 다정다감한 필치로 그려내고 있다. 문장 표현은 특별히 묘사적이 고 감각적 인상을 강하게 남기는 특징을 지니고 있다.

이곳 봄 여름 사이에 나비가 짝을 지어 나는데 모두 하얀색이다. 동전보다 작은 것 이 푸른 숲 사이에 점점이 나는 모습이 꼭 눈꽃같다. 뿐만 아니라 닭이나 개도 흰 것 이 열에 일고여덟을 차지한다. 그 이유를 따져 보았으나 알 수가 없다. 섬이 남방에 있으니, 혹 그 타고난 기운 때문이라고 할 때, 여기에서 나는 것이 대부분 붉은 색이 라면 이치가 혹 그럴 듯 하지만 흰색이 많은 것은 무엇 때문인가? 흰색은 붉은 서방 (西方)의 색이니, 오행상생(五行相生)의 이치로 미루어 본다면 금(金)은 수(水)를 낳 게 되는 데 이런 것들은 수국(水國)에서 나온 것이므로 금에서 생성된 기운을 얻어 서 이렇게 된 것인가? 우선 기록해둔다.83)

섬에서 유배생활을 하게 된 조희룡에게는 모든 것이 생소하고 궁금했던 모양 이다. 하얀 나비에서 발휘되기 시작한 상상력이 섬 지방의 동물로 확대되고 이를 다시 음양오행으로 연결해 원인을 분석해보려고 하는 논리적 접근방식이 놀라우 면서도 웃음이 나온다. 그는 ‘바닷가에서 살다보니 이해할 수 없는 일이 많다.

간혹 수족이 물 위에 뛰어올라 쫓기듯 내달리는데 마치 내모는 것이 있어서 그 런 것 같다. 온 바다가 다 그러하면 사람들이 말하기를, 며칠 내로 하늘에서 반 드시 비를 내릴 것이다라고 하는데 과연 그러하였다’84)라든가 ‘바람이 일어나 는 것은 본래 정해진 곳이 없다. 그런데 이곳에서는 꼭 서쪽에서 구름과 함께 불 82) 日月星辰, 煙雲風雨, 雷電雪포(雨+包), 山川草木, 飛潛走蠢, 是乃天地大畵圖也, 人亦畵圖中一物, 以畵

圖中物, 作畵圖之事, 是謂畵中之畵. 『화구암난묵』, 35항, pp. 52-53

83) 此間春夏之中, 胡蝶作團而飛, 皆白色, 而小於錢, 點於靑林之間, 如雪花焉, 不惟是也, 계(奚+佳)犬之白者, 十居七八, 究其理不得, 島在南方, 亦稟氣, 而産於此者, 多赤色, 則理或近之, 至於白者, 何也? 白者, 西方之 色, 以五行相生推之, 金生水也, 此物生於水國, 得金所生之氣, 致此歟! 姑錄之. 위의 책, 63항, p. 96 84) 위의 책, 56항, pp. 84-85

어와 마치 정해진 한 길이 있어서 행로를 제멋대로 하지 않는 것 같다. 그러나 그 이치를 알 수 없다’85)는 등 새롭게 접한 일들을 낱낱이 기록한 뒤 무엇인가 자신이 알지 못하는 심오한 이치가 담겨있는 듯 한 것 같다는 호기심 속에 해답 을 찾기를 원하고 있다.

장석지산(長石之山)에는 초목이 없고 순전히 돌 뿐이다. 만약 한 번 모양 사나운 돌을 바라보게 되면 도리어 초목의 아름다운 그늘이 있는 것만 못하게 여겨진다. 시 문의 도(道)도 마땅히 이와 같이 보아야 할 것이다.

長石之山 無草木, 純是石矣, 而若一望惡石, 反不如草木之嘉蔭, 詩文之道, 當作是 觀86)

조박(糟粕:피상적 지식)을 조금 아는 것은 한 가지 불행이다. 세상 일은 대개 억 지로 일을 아는 척하는 데에서 허물어진다. 우리들이 가장 서로 권면할 만한 것이 이것이다.

稍知糟粕, 一不幸, 天下事. 車壞了强作解事, 吾輩之最可相勉者, 是耳87)

조희룡의 짧은 글은 소품문의 일반적 특징을 보여준다. 길이 면에서 100자 내 외이며, 구어를 사용하고 의문문과 문답형 등이 있다는 점이다. 말의 재미를 찾 으며 말하는 방법으로 뒤집기를 쓰기도 한다. 특히 조희룡은 내뱉듯이 하는 말로 시작해 무엇인가 말할만한 시점에서 그쳐버리는 거두절미 글쓰기나 환상적 기법 의 글쓰기를 보이기도 한다. 위의 두 인용문 역시 누군가에게 말하듯이 결론만을 말하고 있다. 하나의 비유를 들고 시문도 그렇게 지어야 한다고 말하며, 어설픈 지식으로 잘난 척하다가 되레 불행을 겪을 수 있다고 경고한다. 조희룡의 글에서 느낄 수 있는 묘미일 수도 있을 것이다.88)

강루(江樓)에 비바람 치는 날, 매화 그림 큰 폭을 그렸다. 그리기를 마친 저녁, 꿈에

85) 『화구암난묵』, 64항, p. 97 86) 『석우망년록』, 22항, pp. 62-63 87) 위의 책, 81항, p. 125

88) “조희룡의 소품체 글쓰기는 새롭게 시작될 20세기 도시민층의 간명한 사고에 부합한다. 이는 조선 후기 상공업의 발달로 활기를 찾은 도시민중이 요구하는 가볍고 짧은 호흡의 글쓰기이다. 또 중세사 회의 문학이 갖는 계몽적이고 설명적이 아닌 일정한 지적 수준을 전제한 압축된 내용의 글쓰기이 다.”, 이성혜, 『조선의 화가 조희룡』(한길아트, 2005), p. 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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