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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란도(墨蘭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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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I. 조희룡의 시대와 생애

1) 묵란도(墨蘭圖)

가. 경시위란(經詩緯蘭)

조희룡은 난초를 많이 그렸다. 그의 그림을 보면 김정희의 영향이 강하게 느 껴져 그를 따라 그리려는 의식이 엿보이는 작품이 있는가 하면 자신만의 화법으 로 그려 개성을 보이는 것도 있다.

조희룡 묵란도의 특징은 난초, 서체, 낙관의 3요소가 각기 비슷한 비중으로 화 면에서 서로 어울려 있다는 것이다. 이전 시대와 달리 조희룡의 난초에서는 화면 에서 화제가 차지하는 비중이 난초와 대등해 시서화의 통합이 화면에서 구체적 으로 이뤄졌음을 알 수 있다. 이 점은 김정희의 그림에서 영향을 받을 것으로 보 인다(도판 1, 2). 하지만 김정희의 영향권에서 벗어나 자신의 개성을 살리려는 조형의식도 느낄 수 있다. 조희룡은 부드러운 필치로 난초를 그렸으며 김정희의

<불이선란(不二禪蘭)>(도판 3)과 같이 강한 정신성을 내포한 필획을 쓰기 보다 가볍고 묘사적인 필치로 자연에서 성장하고 있는 듯한 자연스러운 난초의 모습 을 화면에 담았다.

장기(瘴氣) 서린 바다, 적막한 물가, 황량한 산과 고목 사이에 달팽이집같이 작은 90) 이지양, 「조희룡의 예술가적 자의식과 문장표현의 특징-소품산문을 중심으로」, 『고전문학연구

제13집』(1998), pp. 273-274 91) 『우해악암고』, 4항. p. 25

움막 속에서 움츠려 떨고 있으면서도 오히려 한묵(翰墨)의 능사(能事)에 손을 대어 온갖 돌과 한 떨기 난초를 때때로 그려내었다. 되는 대로 붓을 놀리고, 먹을 튀겨 빗 물처럼 흩뿌려서 돌은 흐트러진 구름처럼, 난초는 젖혀진 풀처럼 그리니 자못 기이 한 기운이 있었다. 하지만 알아줄 사람이 아무도 없으니 애오라지 스스로 좋아할 따 름이다.92)

이 글에서 조희룡 스스로 자신의 난초 그림이 젖혀진 풀과 같다고 했는데 <난 도(蘭圖)>(도판 4)를 보면 자신이 쓴 글처럼 난초의 정제된 모습을 그렸다기보 다 강가에서 무리지어 야생하는 모습을 일반적인 풀을 그리듯 하여 주변의 경관 과 함께 자유롭게 표현하고 있다. <난생유분도(蘭生有芬圖)>(도판 5)는 조희룡 이 부채에 남긴 난 그림으로 리듬감 있게 굵기의 파장이 변하는 잎의 감각적 묘 사가 돋보이는 작품으로 꼽힌다.

조희룡의 묵란도 가운데에는 화분에 심어진 그대로 난초를 그린 작품이 있다.

이런 예로서 팔폭병풍 중의 <난도(蘭圖)>(도판 6)를 들 수 있다. 이 작품은 특 히 화분을 그릴 때 입체감을 살리려는 노력을 하여 화분의 표면에 붓질을 가함 으로써 명암의 효과를 냈으며, 주둥이를 둥그렇게 그려서 사실감을 높이고 있다.

이처럼 조희룡의 묵란도는 자연경관이나 배경에도 관심을 갖고 묘사적인 필치로 난을 그려서 김정희가 난초, 서체, 낙관만의 정선된 구도에 함축적이고 강한 필 획의 난초를 그렸던 것과는 다른 양상을 보인다.93)

조희룡은 또 엄격하게 지켜지던 화란법(畵蘭法)에도 구애받지 않았다. 자유롭 게 난엽을 삐치고 뿌리부분의 난엽은 벌려 그리고, 시련 속에 비쩍 마른 난엽이 아니라 여유롭게 자라 통통하게 살진 난엽을 그렸다. 심지어 삼전법(三轉法)이라 는 기초 화법조차 지키지 않으며 개성있는 작품세계를 추구하고자 했다.

글씨를 배우지 않고 난과 매를 먼저 배우는 것은 마치 오경을 읽지 않고 능엄경을 읽는 것과 같다.94)

난을 그릴 때 그 제사(題辭)는 반드시 난을 그리고 남은 붓으로 해야지 다른 붓으

92) 瘴海寂寞之濱, 荒山古木之間, 蝸羕小盧之中, 凌競피(口+皮)탁(口+乇), 猶能及翰墨能事, 亂石叢蘭, 是復得之, 頹唐放筆, 潑墨如雨, 石如亂雲, 蘭如顚草, 頗有奇氣, 無人證之, 聊以自好而已. 『화구암난 묵』, 1항, p. 29

93) 이수미, 「조희룡의 화론과 작품」, 『미술사학연구』(한국미술사학회, 1993), p. 63-64 94) 不學書, 而先學蘭梅, 如不讀五經, 而讀, 楞嚴. 『한와헌제화잡존』, 64항, pp. 69-70

로 바꿔서는 안된다. 이는 그 형세가 그러한 것이다. 그림에서 글씨로 들어가거나 글 씨에서 그림으로 들어갈 즈음에 그 때를 놓치면 서로 어긋나게 된다. 붓을 바꾸지 않고자 함이 아니라 실로 붓을 바꿀 겨를이 없는 것이다.95)

난은 조희룡의 예술관을 함축하고 있다. 조희룡은 시를 배우면서 그윽한 즐거 움을 회화적이면서도 감각적인 언어로 표현했고 그림을 그리게 되면서는 자기의 가슴 속에 스며든 시를 자연스럽게 이미지로 형상화 했다. 그는 난 그림을 ‘시 를 날줄로 하고 난을 씨줄로 교직하여 경영된 것’이라 정의하고 그러한 자신의 난의 세계를 '경시위란(經詩緯蘭)' 이라 칭했다.

경(經)을 날줄로 하고 사(史)를 씨줄로 엮는 여가에 또 무슨 영위(營爲)가 있을 까? 시를 날줄로, 난을 씨줄로 엮는 것은 철적도인으로부터 시작되었다.

經經緯史 作何經緯 經詩緯蘭, 自鐵道人始.96)

경전의 진리를 불변으로 전제하여 날줄로 인식하고, 변화하는 역사를 씨줄로 생각한 것이 '경경위사(經經緯史)'이다. 경(經)은 보편적 진리를 설파한 것이기에 인류의 보편적 진리를 바탕으로 하고 거기에 인간의 구체적 행동결과인 역사가 교차한다는 동양의 우주관이 함축된 단어이다. 조희룡은 마음 속의 시를 난에 교 직시켜 그림으로 형상화했다. 시의 아름다움을 보편으로 하고 그것을 시각적 아 름다움으로 표출해 낸 것이 조희룡의 난이었다. 마음 속의 시가 꿈틀거리고, 시 를 자양분으로 하여 난이 자랐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나. 즐거움의 난

조희룡 난은 지향점이 매우 선명하다. 비록 김정희는 조희룡의 난에 문자기(文 字氣)가 없다97)고 지적했지만 그는 자신만의 작품세계를 창조하기 위해 주력했 다. 특히 조희룡이 난 그림 속에 담고자 한 것은 즐거움과 아름다움이었다. 조희 룡의 난은 고통 그 자체도 아니요, 고통을 극복하려는 의지도 아니었다. 그는

95) 畵蘭, 其題語, 必以寫蘭餘筆, 不易他毫, 其勢然也, 以畵入書, 以書入畵之際, 失其候則離矣, 非不欲易 筆, 寔不暇易筆. 『한와헌제화잡존』, 23항, p. 46

96) 위의 책, 14항, p. 38 97) 이 논문 pp. 10-11 참조

“성난 기운으로 대를 그리고 기쁜 기운으로 난을 그린다(怒氣寫竹, 喜氣寫蘭)”

고 하여 즐거움의 난을 강조했다.

그의 난 정신은 “노동하는 이들을 위로한다”는 자신의 묵란도(墨蘭圖) <위 천하지노인 '(爲天下之勞人)>(도판 7)에 선명히 드러나는 데 화제는 정판교의

<근추전색화(靳秋田索畵)>의 윗 부분을 옮긴 것이다.

어쩌다 열흘 또는 닷새의 겨를이 생기면 향기로운 난을 마주하고 쌀쌀한 차를 달 여 마신다. 때마침 산들바람이 불고 보슬비가 내려, 성긴 울타리와 좁은 지름길을 윤 택하게 하고 속객들은 오지 않고 좋은 벗이 갑자기 찾아온다. 적이 이런 날을 얻기 어려움에 스스로 놀라기도 한다. 무릇 난을 그리고 돌을 그리는 것은 그것으로 천하 의 수고로운 사람들을 위로하기 위함이다.98)

40대 중 후반 무렵의 작품으로 추정되는 <위천하지노인도>는 난에서 느낄 수 있는 생명력의 표현에 관심을 두고 하법에 구애받음이 없이 자유롭게 난잎을 삐 치고 뿌리 부분의 난잎은 벌려 그리고, 여유롭게 자라 통통하고 살지게 그렸다.

답답한 일상과 거기에서 탈출하는 기쁨이 하늘로 날듯 위로 솟아오르고 있고 멀 리 떠나가는 해방감이 좌측으로 주욱 뻗어있다. 특히 난 잎의 끝 부분을 가늘고 흔들리는 듯하게 표현하여 자유롭고 동적을 느낌을 주었다. 전체적 화면의 구성 을 보면 (도판 1)처럼 화제가 차지하고 있는 공간과 난이 차지하고 있는 공간이 비슷한 점이 눈길을 끈다. 이 작품의 주제는 ‘애쓴 뒤의 즐거움’이다. 거기에 는 힘들게 노동한 이들이 생각지도 않게 5일이나 10일간의 휴가를 얻었을 때의 기쁨이 흥분되어 나타나 있다.

나는 술을 마실 줄 모른다. 매양 비바람치는 한가한 창 앞에 무료한 때를 만나면 떻게 여생을 소일하며 보내리! 이것이 나의 현재의 가장 큰 용도이다. 한번 웃는 다.99)

묵란이 문인화의 소재로 각광받은 것은 원나라 때부터였다. 원나라에 나라를

98) 유홍준, 『19세기 문인들의 서화』 (열화당, 1998), p. 52

99) 余不解飮, 每値風雨閒牕無聊之時, 輒借蘭花墨氣之淋漓, 澆此磈磊, 天下若無寫蘭一法, 何以銷愛餘生!

是爲目下大用, 一笑. 『한와헌제화잡존』, 13항, p. 38

빼앗긴 중국 송나라 유민들은 망국에 따른 '상실의 정서'나 '시련을 이기려는 의 지'를 난그림에 형상화했다. 그래서 그들의 난은 국토를 잃은 백성들처럼 뿌리를 드러내거나 비쩍 마른 잎줄기를 그렸다. 그러나 조희룡은 이들과 달리 '시의 자 유로움'과 '힘쓴 뒤의 산뜻한 즐거움'을 형상화 했기에 자유롭게 난잎을 삐치고 뿌리부분의 난잎은 벌려 그렸다. 조희룡은 여러 면에서 김정희를 추종했으나 그 의 목란을 보면 김정희의 엄격한 분위기 대신 필묵을 일종의 묵희(墨戱)로 여겨 부담없는 마음으로 그것을 즐긴 흔적이 역력하다.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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