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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서(書)․화(畵)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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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I. 조희룡의 시대와 생애

1. 시(詩)·서(書)․화(畵)론

조희룡은 성령론(性靈論)을 바탕으로 한 시·서·화 일치를 주장한다. 조희룡 이 말하는 성령은 하늘이 특별하게 부여하는 것이다. 그러나 성령은 아무에게나 부여되는 것이 아니라 특별한 사람에게 부여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성령을 타고 나지 못하면 아무리 노력해도 이뤄낼 수 없다는 것이 그의 예술론의 기본 골격이다.54)

조희룡은 여기에서 한 발 더 나아가 유희성과 자기만의 방식으로 작품을 생산 하는 독창성을 강조했다. 그는 그림에 작가의 뜻, 운치가 실리는 것을 가장 중요 하게 생각했으며 이것이 자연스럽게 드러나는 것을 창작의 목표로 삼았다. 이 과 정에서 필요한 것이 안목(眼目)과 솜씨로, 안목은 독서를 통해 키워지고 솜씨는 재력(才力)과 이에 상응하는 노력으로 얻어지는 것이라고 하였다. 조희룡은 그림 에 관한 자신의 의견을 펴는데 시론의 개념을 이용했으며 명말 이후에 이뤄진 남종 문인화론을 기반으로 해 직접 창작하는 사람의 시각으로 종합적이고 구체 적인 각론을 첨가했다.55)

서계(書契:중국 최초의 문자)가 생긴 이래, 천하의 온갖 이치는 옛 사람들이 모두 말하여 남김이 없다. 후대의 사람들이 비록 힘을 고갈시키고 생각을 다하여 옛 사람 들이 말하지 못한 곳을 창출하려고 해도, 끝내 옛 사람들이 이미 말한 것에서 벗어 나지 못한다. 섭석림(葉石林: 葉夢得)이 말한 바 “세상이 어찌 문장이 있으리요. 다

54) 허준구는 성령론을 천기론에 포괄되는 하나의 관점에서 출발한다. 천기에 대한 개념은 논자에 따라 약간의 차이는 있지만 대체로 비슷한 입장을 보이고 있다. 천지조화의 심오한 비밀, 생래적인 본래의 천성, 기욕, 물욕과 대립되는 순수한 마음, 자연 본성, 천성, 인위적인 조탁과 대립되는 영감, 진솔한 감정으로 분류될 수 있다. 결국 천기에 대한 개념은 인위적인 것과 대조되는 생래적 자연본성이나 천성으로 집약될 수 있다. 이러한 천기에 대한 개념은 성령과 크게 다르지 않다. 성령 또한 성정의 영묘(靈妙)로써 인간이 타고난 영감을 중시하는 면이나, 개성을 중시하는 점에 있어서 일치를 보이고 있다. 다만 유파적 개념이 강한 성령론이 천기론을 보다 점도 구체화되고 이론화되는 경향을 보이는 차이점이 있다. 위의 논문, pp. 177-178

55) 홍성윤, 「우봉 조희룡의 회화관」, 『미술사연구』, 통권 제21호(2007), pp. 95-102

만 글자를 줄이고 바꾸는 법만 있다”는 것이 그것이다. 글자를 줄이고 바꾸는 가운 데 문장의 경지가 계속해서 새로워진다. 옛 사람들이 이미 말한 것을 말하지 않은 것처럼 하는 것, 그것이 바로 묘체(妙諦)이다.56)

조희룡은 천하의 이치가 모두 말하여진 만큼 완전히 새로운 창작은 어렵다고 보고 글자를 줄이고 바꾸는 가운데 문장의 경지가 새로워진다고 강조한다. 하지 만 이미 있었던 것을 새롭게 하는 것, 그것은 충분히 창의적일 수 있다. 음악에 서 편곡이나 변주가 ‘또 하나의 독립된 작품’으로 인정된다면 문학에서 환골 탈태 수법의 독자성을 인정해야 한다고 본다.57)

시를 짓는 법은 제가(諸家)를 널리 종합하고 고인(古人)의 신수(神髓)를 터득하여 스스로 묘리를 창출하여 엄연히 일가를 이룸으로써 남이 보더라도 유래한 원류를 알 수 없게 해야 한다. 시험삼아 옛 시인들을 살펴보건대, 어찌 한 사람이라도 서로 닮 은 자가 있는가?

爲詩之法, 博綜諸家, 得古人神髓, 自出機杼, 儼成一家, 使人看之, 不知源流之所自來, 試觀古詩家, 豈有一家相似者乎? 58)

조희룡은 글 곳곳에 ‘기저(機杼)’라는 표현을 쓰고 있다. 이성혜는 “문학에서 기저란 수예, 즉 솜씨이다. 시인만의 독특한 솜씨, 그것이 기저이다”라고 밝히고 있다.59) 그와 관련지어 볼 때 위 글에서 말하는 ‘스스로의 묘리를 창출한다(自出 機杼)’는 것은 모방이 아닌 독창성을 의미한다. 그것은 언어와 수사, 구조, 격식 의 독창성이다. 시를 지을 때 여러 문장가의 글을 가져와 모으고 나열하는 것이 아니라 그 정수를 체득해서 새로운 창작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고인의 정수를 체득해 새로운 창작이 이뤄졌을 때 근원의 출처를 모르게 된다.

무릇 시를 지으매 매양 음식 찌꺼기를 주워 모으는 것을 면치 못하니 스스로 창의 (創意)를 내어 독자적인 성령을 표출한 자는 몇 사람인가? 안목은 한 세상을 짧게

56) 自有書契以來, 天下萬理, 古人說盡無餘, 後之人, 雖竭力殫思, 欲出古人所不道處, 而終不外乎古人已道 者, 葉石林所云 ; “世豈有文章? 只有減字換字法字” 是耳. 然減換之中, 文境轉新, 古人已經道者, 如不 經道者, 是乃妙諦. 『석우망년록』, 68항, pp. 115-116

57) 이지양, 「조희룡의 예술가적 자의식과 문장표현의 특징」(1998), p. 268 58) 『석우망년록』, 42항, p. 80

59) 이성혜, 『조선의 화가 조희룡』(한길아트, 2005), p. 128

보면서 옛사람을 넘어서고자 한다.…(중략)…이러한 재주와 능력을 지닌 사람이 있어 도 오히려 이와 같은데 하물며 그보다 하들인 사람에 있어서랴? 시를 짓는 어려움이 대개 이와 같은 것이다.60)

조희룡은 시에서도 성령론과 기저(機杼)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이는 조선 전반 기 사대부들이 주장하던 도문일치론(道文一致論)과는 대비되는 것이다. 도문일치 론이란 학문이나 도가 가슴에 쌓일 때 글이 되어 넘쳐 나온다는 것을 뜻하고 성 령론이란 시나 글이 그 사람의 영혼의 목소리이며 이는 영감에서 나온다는 것을 말한다. 조희룡은 옛 사람의 좋은 시구를 충분히 읽고 배워 체득한 후 개개인의 개성과 문체로 새로운 창작을 해야 한다는 점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조희룡이 단순히 표현기법의 참신성만을 부각시키는데 그치지 않고 그것을 통해 자신의 독자적 세계를 구축할 것을 강조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미 있는 것을 제대로 배우고 소화함으로써 ‘법을 넘어선 법’의 세계를 지향하는 ‘법고창신 론(法古創新論)’인 셈이다. 그러나 법고창신이라 해도 주제나 의경(意境), 예술 가의 정신자세의 문제라기 보다는 표현 기량을 높이고 기법을 새롭게 함으로써 새로운 경지를 이루자고 주장한다.61)

시를 짓는 법은 옛날 명장이 병사들을 통솔하는 것과 같아서 오직 운용(運用)을 어떻게 하는가에 달려 있다. 회음후(淮陰候)의 다다익선(多多益善)과 감흥패(甘興 覇)의 ‘백기취승(百騎取勝)’은 각각 그 재치(才致)를 다한 것이다. 여기에 사람이 있는 데 학식이 짧고 재주도 짧다면 감가(甘家)의 백기를 쓰고자 한들 그 어찌할 수 있겠는가?62)

60) 凡爲詩, 每未免掇拾餖飣, 自出機杼, 獨標性靈者, 凡幾人? 目短一世, 欲度越前人…(中略)…以有此才力 之人, 猶復如是, 況其下之哉? 其爲詩之難, 蓋如是. 『석우망년록』, 143항, pp. 185-186

61) 이지양은 조희룡의 법고창신론 배경과 관련, 첫째는 시나 문인화가 지닌 정형화된 표현 양식 때문 에 이같은 주장이 나왔으며, 둘째는 조희룡이 유학의 이념이나 양반 문인의 가치관에 대해 별반 애 착을 느끼지도 못했고, 혼란한 사회에 대해 별다른 전망을 발견하지도 못했기 때문에 자기 생활주변 의 사소한 문제에 의도적으로 관심을 돌렸던 것이 아닌가라고 진단하고 있다. 조희룡의 글에 시대적 고민이 제거된 것은 예술가로서의 낭만적 기질 탓도 있겠지만 유배생활을 했던 그의 현실적 처지와 도 무관하지 않았으리라고 본다. 이지양, 「조희룡의 예술가적 자의식과 문장표현의 특징」(1998), pp. 267-270 참조.

62) 爲詩之法 , 如古名將之統兵, 惟在用之之如何, 淮陰候之多多益善; 甘興覇之百騎取勝, 各極其致, 有人 於此, 學短才短, 欲用甘家之百騎, 其可得乎?, 『석우망년록』, 29항, p. 67

조희룡이 제안하는 시 짓는 방법은 개개인이 가진 개성에 여러 문장가의 글을 많이 보고 체득한 정수를 녹여서 독창적으로 짓는 것이다. 그렇게 하면 그 시의 근원은 ‘나’라는 한 개인이 되며 새로운 창작이 된다. 이는 명장이 병사를 거 느리는 것과 같아서 개인의 개성과 능력에 맞는 방법을 선택해야만 성공하는 것 이지 남이 취했다고 해서 따라하다가는 실패한다. 중국 한나라 때 한신(淮陰候) 이 다다익선의 방법을 택한 것은 이런 점에서 잘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옛 사 람의 시와 문도 역시 이와 같아서 각기 솜씨와 안목을 갖추고 있다. 반드시 이것 으로 저것을 비교할 필요가 없다. 다만 그 사람의 성령이 있는 곳을 보고서 자신 의 안계(眼界)를 넓혀야 한다.63)는 것이 조희룡의 주장이다. 조희룡의 독창성 강 조는 산문에서도 똑같이 드러난다.

…열 장의 편지로 말한다면 열 사람으로부터 온 것이지만 이쪽은 열 장의 답장이 한 사람의 손에서 나가게 된 것이니, 하나하나 창작으로 한 글자도 서로 중복된 것 이 없도록 한다는 것은 무리입니다. 적이 그러한 이유 때문에 옆에서 두 소년이 매 편지마다 기록하여 한 자(字) 한 구(句)라도 빠뜨리지 않고 있습니다. 만약 뇌동(雷 同)한 것이 있으면 오히려 답장으로서 멋이 없어질 뿐만 아니라 또한 나그네가 책상 에서 번민을 물리치는 하나의 유희이기 때문입니다. …64)

위 글은 임자도로 유배 간 자신에게 보내준 벗들의 편지에 대한 답신의 고충 을 토로한 것이다. 여러 벗들이야 각기 한 통의 글을 쓰면 되지만 자신은 혼자서 많은 답장을 써야 하므로 일일이 창작을 한다는 것이 어렵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답장 쓰는 격식을 하나 만들어 매 장마다 베껴쓸까 한다. 그러나 그것은 답 장으로서의 멋도 없고, 또 답신을 쓰는 일이 책상에서 번민을 물리치는 하나의 유희이므로 두 소년을 옆에 두고 한 자 한 구를 확인한다. 조희룡의 시문을 대하

63) “일찍이 단양을 유람하였는데 옥순봉(玉筍峯)·도담(島潭)·사인암(舍人庵)·삼선암(三仙庵) 등 여러 승 경(勝景)은 우열로써 차례를 매길 필요가 없다. 각기 기이한 경치를 갖추어서 모두 사람의 뜻에 맞는 다. 옛 사람의 시문 역시 이와 같아 각자의 솜씨와 안목을 갖추고 있으니 이것으로써 저것을 비교할 필요가 없다. 다만 그 사람의 성령이 있는 바를 살펴보아 나의 시야를 넓히게 할 것이다. 나는 늙었 으니 다시 유람을 다니지 못하겠지만 예전에 노닐던 것을 추억하매 산을 보는 방법이 글을 보는 방 법과 더불어 두가지 이치가 아니다. 마음을 같이하는 사람과 더불어 이를 논할 만하다.”, 『석우망년 록』, 74항, pp. 121-122

64) …論以十書, 卽自十人來. 而此則十書之答, 出於一人之手, 而各出機杼, 必欲無一字相襲者, 亦惑矣, 竊 有其故, 傍有二少年, 隨幅錄之, 隻字片句, 無一遺之, 若有雷同, 則還無味, 且客楊排悶之一遊戱也.….

『수경재해외적독』, 48항-春卿에게 답함, p. 100-102

는 태도는 이처럼 기존의 문장을 모방하지 않으며, 격식을 따르지 않는 독창성에 있는 셈이다.65)

조희룡의 시나 산문의 창작에 관한 이론은 앞에서 언급했듯이 그림과도 밀접 하게 관련된다. 조희룡은 당시 ‘완당 바람’의 예술적 자장(磁場)에 완전히 이끌려 들어가지 않고 나름대로 자신의 독자적인 길을 구축하고자 부단히 노력 했다.

…농묵(濃墨)과 담묵(淡墨)으로 마음 내키는 대로 종이 위에 떨어뜨려 큰 점, 작 은 점을 윤곽의 밖까지 흩뿌려 농점을 담점의 권내로 스며들게 하고, 담점은 농점의 권내에 서로 비치게 하니 준법(皴法)을 쓰지 않더라도 스스로 기이한 격(格)을 이루 게 된다. 이 법은 나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그러나 먹쓰기를 영묘하고도 활기있게 한 뒤에라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다만 한 점의 먹일 따름이다.66)

먹을 쓰는 법을 자유자재로 익힌 다음, 돌을 묘사하는 새로운 표현법을 찾아내 고서 ‘이 법은 나로부터 비롯된 것’이라고 자부하는 말 속에 표현을 새롭게 하기 위해 고심한 그의 노력을 읽게 된다. 그는 이런 노력을 통해 중국과 우리나 라의 화가들이 기법을 물려받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독자적인 문인화풍을 추구 했으며, 사대부의 여기(餘技)로 존재했던 문인화를 본격적인 서화예술로 독립시 키는 데까지 나아갈 수 있었던 듯하다. 조희룡은 종종 글 곳곳마다 ‘나의 법’

‘나의 길’을 강조한다. “나의 매화는 동이수와 나양봉 사이에 있는 데 결국 그것은 나의 법이다.”67)라든가 “정판교(鄭板橋)에게는 판교의 재력(才力)이 있는데 나에게는 판교의 재력이 없으니 비록 그것을 배우려해도 잘되지 못할 것 이다. 차라리 나의 재력이 미치는 곳에 맡겨 한 가지 내 법을 만들 따름이다 .”68) 혹은 “좌전(左傳)을 끼고 정현(鄭玄)의 수레 뒤를 따르려 하지 않고 외람 된 생각으로 나 홀로 나아가려 한다”69)라는 말을 통해서 쉽게 확인할 수 있다.

여기서 ‘나의 법’ ‘나의 길’은 모두 ‘표현 기법을 새롭게 함’과 깊은 관련 65) 이성혜, 『조선의 화가 조희룡』 (한길아트, 2005), pp. 129-132

66) …以濃墨淡墨, 隨意落紙, 以大點小點, 灑於輪廓之外, 濃點漬入淡圈, 淡點映帶濃圈, 不施皴찰(扌+

察), 自成奇格, 此法自我始也, 然用墨靈活, 然後可得, 不爾則直一墨點而已. 『화구암난묵』, 44항, p. 63

67) 『한와헌제화잡존』, 17항, p. 40 68) 위의 책, 171항, p. 129

69) 위의 책, 89항, p. 89

이 있다. 이런 자세는 근대로 오면서 작가의 예술적 표현기량이 점점 중시되는 예술계의 흐름을 생각할 때 매우 흥미롭게 주목해야 할 대목이라고 생각된다.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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