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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죽도(墨竹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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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I. 조희룡의 시대와 생애

2) 묵죽도(墨竹圖)

빼앗긴 중국 송나라 유민들은 망국에 따른 '상실의 정서'나 '시련을 이기려는 의 지'를 난그림에 형상화했다. 그래서 그들의 난은 국토를 잃은 백성들처럼 뿌리를 드러내거나 비쩍 마른 잎줄기를 그렸다. 그러나 조희룡은 이들과 달리 '시의 자 유로움'과 '힘쓴 뒤의 산뜻한 즐거움'을 형상화 했기에 자유롭게 난잎을 삐치고 뿌리부분의 난잎은 벌려 그렸다. 조희룡은 여러 면에서 김정희를 추종했으나 그 의 목란을 보면 김정희의 엄격한 분위기 대신 필묵을 일종의 묵희(墨戱)로 여겨 부담없는 마음으로 그것을 즐긴 흔적이 역력하다.100)

일 따름이다’고 하여 자기만의 법을 일관되게 견지하고 있다. 그는 다른 사람에 게서 배운 지식이라고 할지라도 개개인의 성정이 다르듯이 작품에서도 다르게 나타날 뿐 아니라 이를 독창적인 개성으로 드러낼 수 있다고 강조하고 있다. 조 희룡은 대나무를 익히는 과정에서도 “나의 대 그림은 본래 법이 있는 것이 아 니고 내 가슴 속의 느낌으로 그렸을 따름이다. 그러나 어찌 스승이 없겠는가? 공 산(空山)에 만 그루의 대나무가 모두 나의 스승이니…”104)라고 하여 자신만의 화법을 강조했다.

“내 수법에도 있지 않고 고법에도 없으며 또한 고법과 내 수법 밖에도 있지 않 다. 붓끝의 금강저(金剛杵)는 습기(習氣)를 완전히 벗어나는 데 있다.” 이는 왕녹대 (王麓臺)가 스스로 <추산청상도권(秋山淸爽圖卷)>에 제한 말이다.105)

그는 “고법에도 있지 않고 내 수법에도 없으며…습기를 완전히 벗어나는 데 있다”면서 종래의 틀에서 탈피해 자신만의 죽화법(竹畵法)을 구현하고자 했던 의지와 노력을 보여준다.

“서법에 항관(行款)이 있으니 대를 그림에도 향관이 필요하다. 서법에 농담(濃淡) 이 있으니 대를 그림에도 농담이 필요하다. 서법에 소밀(疏密)이 있으니 대를 그림 에도 소밀이 필요하다.” 이것은 정판교의 대 그림에 대한 삼매(三昧)의 말이다.

고요한 방에서 향을 사르며 옛 예서를 배우니 가슴 속에 대가 있다는 것, 그 말을 잊어버렸네.

비로소 문자가 그림에 관계됨을 알게 되니 이는 문수부살의 불이문(不二門)이라네

이것은 내가 판교의 말을 보기 이전의 시이다. 판교가 과연 나의 견해를 먼저 터득 한 것이로다.106)

조희룡은 대나무를 그릴 때는 서법과 같이 행관을 따라 농담을 조절하고 성

104) 我竹本無法, 只寫胸臆, 而豈無師也? 空山萬竿, 皆吾師…, 『화구암난묵』, 9항, pp. 34-35 105) “不在我手, 不在古法, 又不在古法, 我手之外, 筆端金剛杵, 在脫盡習氣.” 此王麓臺, 自題秋山淸爽圖卷

語也. 『한와헌제화잡존』, 249항, p. 171

106) “書法有行款, 竹更要行款, 書法有濃淡, 竹更要濃淡, 書法有疎密, 竹更要疎密.” 此鄭板橋竹三昧語也.

“민(門+必)합(門+台)焚香學古隸, 此是文殊不二門.” 此余見板橋語以前詩也, 板橋果先得吾見解耳. 『화 구암난묵』, 15항, pp. 39-40

김과 치밀함을 잘 배치해야 한다고 밝힌다. 사람이 가야 할 길을 벗어나거나 글 씨가 행관을 벗어나면 볼 것이 없듯이 대나무 역시 행관에 따라 그려야만 볼품 이 있다. 그것은 마치 예서를 쓰는 것과 같으며 글과 그림이 공존하는 불이문이 된다. 작품상에 드러나는 조희룡의 대나무 그림은 정판교의 화풍과 강세황(姜世 晃, 1713~1791)․신위(申緯, 1769~1845)로 이어지는 맥을 갖고 있는 것으로 평가된다.107) 하지만 조희룡은 궁극적으로는 자신만의 작품세계를 구축하고자 애썼다.

조희룡의 8폭 병풍 가운데 하나인 <묵죽도(墨竹圖)>(도판 9)를 보면 앞쪽의 대나무는 가는 줄기에 부드러운 긴 잎을 농묵으로 그리고 배경이 되는 대나무는 담묵으로 처리해 다양한 구성과 배치, 잎사귀의 율동감이 화면에 생기를 주고 있 다. 고운 맵시가 드러나 있는 앞쪽의 대나무들과 안개에 싸인 듯한 뒤쪽의 대나 무들이 서로 조화를 이루며 전체적으로 아늑한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다. 이같은 죽화법은 정판교 이론과 맥을 같이 하며 “한 그루의 대나무는 수척하게, 두 그 루의 대나무는 넉넉하게, 세 그루의 대나무는 한 곳에 모이게 그리고, 네 그루의 대나무는 서로 돕게 해야 한다. 이것은 대나무를 그리는 제일의 원칙이다”108) 고 한 그의 말과도 부합되는 화법으로 보인다. 눈에 띄는 것은 묵죽도에 담긴 화 제인데, “나는 대나무를 그리는데 어떤 화법이 따로 있지 않다. 다만 가슴 속에 서 일어나는 것을 그릴 따름이다(我竹本無法 祇寫胸臆耳)”라고 하여 여기에서 도 그만의 법을 강조하고 있다는 점이다.

조희룡의 대나무 그림의 또다른 특징은 통죽(筒竹)이라고 불리는 늙은 대나무 를 화폭에 담아냈다는 점이다. 통죽은 오랜 연륜과 강인함으로 조선 중기의 대표 적인 묵죽화가인 이정(李霆, 1541~1622)과 유덕장(柳德章, 1675~1756) 등에 의해 조선 묵죽의 주요한 소재로 이용됐지만 그 후 강세황과 신위에 의해 묵죽 화풍이 변화되면서 거의 그려지지 않았다. 담담하면서도 우아한 취향을 추구했던 그들에게는 통죽의 강하고 거친 형상을 소재로 삼기에 적절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조희룡은 통죽의 강한 표현성에 주목해 이를 다시 화폭에 담아내 기 시작했다. <묵죽도(墨竹圖)>(도판 10)를 보면 여러 차례의 거친 붓질로 분방 하게 그려낸 통죽의 줄기는 힘찬 기운을 담고 있으며 하늘로 솟아올라가는 대잎

107) 유홍준, 『19세기 문인들의 서화』(열화당, 1988). p. 52

108) 一竿瘦, 兩竿够, 三竿湊, 四竿救, 此爲畵竹第一義. 『화구암난묵』, 16항, p. 40

과 더불어 매우 강렬한 인상을 전해준다. 이는 당대에 만연해가던 강한 표현 욕 구를 반영하는 것으로, 고아(高雅)한 문기(文氣)를 졸박하게 담아낼 것을 요구했 던 김정희의 가르침과는 상당한 거리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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