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검색 결과가 없습니다.

묵매도(墨梅圖)

문서에서 저작자표시 (페이지 53-60)

II. 조희룡의 시대와 생애

3) 묵매도(墨梅圖)

과 더불어 매우 강렬한 인상을 전해준다. 이는 당대에 만연해가던 강한 표현 욕 구를 반영하는 것으로, 고아(高雅)한 문기(文氣)를 졸박하게 담아낼 것을 요구했 던 김정희의 가르침과는 상당한 거리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109)

그는 청대(淸代) 매화도의 영향을 받아 구도와 화매법(畵梅法)을 변화시키고 이 를 바탕으로 자신의 필치와 묵법(墨法)을 살려 서예적이면서도 화려한 화풍으로 발전시켰다.

조희룡은 조선화단 최초로 연속식 매화병풍을 제작한 이로 꼽힌다. 연속식 병 풍은 세로축으로 연결된 병풍을 각기의 다른 화면으로 구성하는 것이 아니라 이 모두를 하나의 화면으로 보고 하나의 그림을 그려 세운 병풍을 말한다. 하지만 이 자체가 기존에 전혀 없었던 새로운 시도로 기록되지는 않았다. 조선 중기에도 이계호(李繼祜, 1574~1645)가 그린 <포도도(葡萄圖)>(도판 11) 등 연속식 병 풍이라는 형식적 실험이 없지 않았다. 다만 조선의 화단에 한해 매화로써 연속적 병풍을 최초로 제작한 이가 조희룡으로 기록된다는 점에서 그 의의가 있다고 할 것이다.(도판 12 참고)114)

근래 사람이 그린 매화 중 내 눈으로 직접 본 바로는 동이수(童二樹)․전탁석(錢籜 石)․나양봉(羅兩峯)의 작품은 모두 일품이다. 그러나 좌전을 끼고 정강성(鄭康成․鄭 玄)의 수레 뒤를 따르려 하지 않고 외람된 생각으로 나 홀로 나아가려 한다. 판향 (瓣香)은 우선 누구에게도 속한 바가 없지만 그 속하지 않은 것이 또한 속함이 다.115)

조희룡은 매화도(梅花圖)에 있어서도 앞사람들을 그대로 본뜨려 하지 않았다.

장륙매화(丈六大梅)는 이러한 정신에 의해 창안됐다. 그는 지금까지의 매화치는 법을 일부러 무시하고 가로 세로로 거침없이 휘두르게 된다. 글씨의 필법을 매화 줄기에 그대로 응용하면서 화선지 위에 줄기와 가지를 거침없이 뻗는다. 이는 지 금까지 법에 따라 그려오던 성긴 가지, 작고 아담한 줄기와는 전혀 차원을 달리 하는 모양이었다. 키가 일장 육척이나 된다는 석가모니불이 연상될 정도였 다.116)

불상 중에 장륙금신(丈六金身)이 있는데 나는 대매(大梅)를 일컬어 ‘장륙철신(丈 六鐵身)이라 하였다. 대개 장륙매화(丈六梅花)는 나로부터 시작된 것이다. 한 인장을

114) 정원희, 「우봉 조희룡의 창의성 고찰」(홍익대학원 석사논문, 2011), pp. 39-40

115) 近人寫梅, 以余目所及覩, 童二樹·錢籜石·羅兩峯, 皆逸品. 而不肯挾 ‘左傳’ 隨鄭康成車後, 妄意孤詣, 瓣香, 姑未有所屬, 其不屬, 亦屬耳. 『한와헌제화잡존』, 89항, p. 82

116) 김영회, 『2004 이달의 문화인물-조희룡(1월)』(문화관광부), p. 16

새겨서 오소산(吳小山:吳圭一)에게 줄 만하다.

佛有丈六金身. 余稱大梅, 爲丈六鐵身, 蓋丈六梅花, 自我始也, 可鐫一印, 屬吳小 山117)

조희룡은 자신이 새로 발견한 그림의 세계를 부처의 장륙금신을 본따 ‘장륙 매화(丈六梅花)‘라 이름하였다. 운동성이 강한 조형의 홍매와 백매 두 그루가 얽혀있는 <홍백매팔연폭(紅白梅八連幅)>(도판 13)은 조희룡의 장륙매화를 보여 주는 대표적인 작품이다.

줄기를 비워둠으로써 둥그런 나무의 덩어리감을 나타냈으며 꽃은 홍백의 물 감을 찍어 표현했다. 나무 두 그루가 얽혀있는 기본적인 구도는 청대 회화법을 담은 『개자원화전(芥子園畵傳)』의 영향으로 볼 수 있으며, 그 나무가 굵기 차이를 두고 서로 V자형으로 뻗어나감은 양주팔괴 나빙(羅聘, 1733~1799)의

<매화도사곡병(梅花圖四曲屛)>(도판 14)을 통해 그에게서 받은 영향을 짐작케 한다. 그러나 나빙의 작품이 구성면에서 질서가 정연하고 상승과 하강의 방향 성이 일정한데 반해 조희룡의 매화는 그 가지가 가진 방향이 동적이고 변화가 크다는 점에서 더욱 역동적이라고 할 수 있다. 뒤틀리고 구부러지면서도 화면 에서의 장악을 놓치지 않으려는 그 움직임은 조희룡만이 지닌 독창적인 세계를 보여준다.

나. 도화불사(圖畵佛事)-홍매도대련(紅梅圖對聯)

줄기가 커지고 꽃의 수가 늘어나는 형태상의 변화에 이어 조희룡의 매화는 질 적 변화를 보이기 시작했다. 그는 의미의 변화를 시도했다. 조희룡은 추위와 외 로움을 이기고 혹독한 환경에 굴하지 않는 선비의 의미를 가진 매화를 이제 천 수관음의 자애로운 마음을 가진 부처상으로 바꾸었다. 여기에서 매화꽃의 상징이 변화를 겪게 된다. 그동안 매화꽃은‘청빈 속에서 살아가는 곧은 선비정신’을 상징했으나 여기에서 한 발 더 나아가 ‘부처의 대자대비’로 탈바꿈된 것이다.

그에게 이제 매화도(梅花圖)는 부처가 된다. 벽에 걸린 매화도(梅花圖)를 감상 하는 사람들은 법당에서 부처를 보고 예불을 올리는 것이나 다를 바 없게 됐다.

매화그림으로 불사를 이루는 화법을 창안한 것이다.118)

117) 『한와헌제화잡존』, 219항, p. 154

연지(硏池)에 봄이 드니 온갖 꽃이 다투어 피는데 하나의 꽃이 곧 하나의 부처이 다. 이는 사람으로 하여금 용화회(龍華會:사월 초파일의 관불회)에 참여하게 하는 것 과 같다. 가히 그 향화정(香火情:부처에 대한 향념)이 깊음을 알 만하다. 그림으로 불사를 이루는 것은 나로부터 시작된 것이다.

硏池春生, 萬花迸現, 一花一佛, 使人如參龍華會上, 可知其香火情深, 以圖畵作佛事 自我始也119)

<홍매도대련(紅梅圖對聯)>(도판 15)은 매화가지의 짜임새, 활달한 필치, 홍매의 화사한 색감이 조화돼 조희룡 매화도의 개성있는 양식을 대표하는 작 품이다. 수많은 매화송이가 있고 역동적으로 움직이는 화려한 줄기가 있으며 적지 않은 규모감이 쏟아져 내리고 있다. 화제의 내용 역시 ‘연지(硏池)에 봄이 되니 만(卍)과 화(花)가 아울러 나타난다. 하나의 꽃과 하나의 부처는 마치 사람으로 하여금 용화회상(龍華會上)에 참여하게 하는 것 같다. 도화(圖 畵)로써 불사(佛事)를 짓는 것이 나로부터 시작되었다’는 앞의 내용을 담고 있다.

매화가지 기본 골격은 다른 <매화도(梅花圖)>(도판 16)와 비슷하지만 이것 (도판 16)이 굴곡이 크고 매우 역동적인 반면 개인소장의 홍매도(도판 15) 는 안정감 있게 배치됐다. 1대 4의 비율을 가진 두 그림이 대하여 만나는 지 점에서 나무줄기가 오묘하게 연결과 단절을 반복해 하나의 화면이며, 두 개의 화면이 되기도 한다. 매화가지의 질감을 표현하는 방법도 달라져서 담묵을 넓게 바르고 그 위해 진한 묵으로 점을 찍고 좀더 진한 농묵으로 군데군데 강조를 두어 변화를 주었다. 특히 이 작품은 화제의 서체와 매화의 감각이 상 호 상승작용을 일으켜 작품을 더욱 돋보이게 한다. 홍매도에 실린 화제가 위 의 내용과 같음을 보아 조희룡의 매화도는 절개와 고고함 등의 유교적 상징 성만을 내포하는 것이 아니라 도교적이며 불교적 색채가 혼합되고 화려한 장 식적 분위기도 감지된다고 할 수 있다.120)

118) 김영회, 『2004 이달의 문화인물-조희룡(1월)』(문화관광부), p. 19 119)『한와헌제화잡존』, 68항, p. 71

120) 이수미, 「조희룡의 화론과 작품」, 『미술사학연구』(한국미술사학회, 1993), p. 62

다. 용매도(龍梅圖), 매화서옥도(梅花書屋圖)

조희룡은 매화 그림에 몰두하면서 점차 중국풍에서 완전히 탈피했을 뿐아니라 자신의 고유양식을 갖게 됐다. 장륙매화와 도화불사에 이어 조희룡만의 독특한 매화 그리는 방법은 용 그리는 방식을 차용한 것이다.

일찍이 원나라 사람이 그린 용을 보니 먹을 퍼뜨려서 구름을 이루고 불을 머금어 안개를 만들었다. 용 중에는 승천하는 것과 내려오는 것, 굽어보며 바람을 일으키는 것, 노하여 노려보는 것, 걸터앉아 돌을 긁고 있는 것, 서로 바라보는 것, 서로 싸움 하는 것, 운무를 타고 뛰쳐 오르며 모래바닥에서 싸우고 물에서 솟아나오는 것, 구슬 을 장난삼아 다투는 것, 혹은 전체가 드러난 것, 혹은 한 팔이나 머리가 은약(隱約) 하게 보이는 것 등 거의 이름하지도 형용하지도 못할 정도였다. 매화를 그리는데 얽 힌 가지 오밀조밀한 줄기에 가득 꽃잎이 앞뒤로 피게 한 곳에 이르면 문득 이 생각 을 떠올리면서 기굴(奇崛)한 변화가 있게 한다. 용을 그리는 방식을 매화 그림에 도 입하는 것을, 그림을 알지 못하는 자들은 하한시(河漢視) 할 것이다.121)

조희룡이 그린 매화그림을 보면 용을 떠오르게 한다. 딱딱하게 마른 나무표피 는 비늘같고, 거칠게 휘며 뻗어나간 매화 둥치는 커다란 용틀임을 보는 듯 하다.

그림 속 펄펄 날리는 하얀 매화꽃잎은 구름인 듯, 하얀 눈인 듯 착각을 불러일으 키기도 한다. 대표적인 작품이 <묵매도(墨梅圖)>(도판 17)이다.

‘묵매도’는 파묵법으로 굵고 거친 줄기를 잡은 뒤 무수히 핀 매화꽃을 배치 하는 조희룡 매화도의 특징이 잘 드러난 작품이다. 먹을 번지게 처리한 매화등걸 은 마치 용이 몸을 쭉 펼치며 구름을 타고 비상하는 듯하다. 그 위에 가는 가지 를 짙은 먹으로 배치하여 농담과 음양의 조화를 이뤘다. 작품은 마치 용이 승천 하는 것처럼 긴 축에 역동적으로 치켜 올라간 나무와 서예적 필치의 가지와 태 점(苔點), 여기에 당시 간략하게 그리던 매화에서 과감히 탈피, 담채의 수많은 분홍 꽃잎이 어우러지게 함으로써 강렬하면서도 화려한 조희룡만의 개성을 창출 하고 있다. 조희룡은 매화줄기에 역동성을 부여해 나무에서 용이라는 생명체로

121) 嘗見元人畵龍, 潑墨成雲, 啜水成霧, 升者降者, 俯而欲噓者, 怒而視者, 踞而瓜石者, 相向者, 相鬪 者,乘雲躍霧, 戰沙出水者, 以珠爲戱而爭者, 或全體發見, 或一臂一首隱躍者, 殆不可名狀, 寫梅, 至 交枝攢柯, 萬花向背處, 輒存此想, 大有奇崛變態, 以畵龍入畵梅, 不知者, 爲河漢也. 『한와헌제잡 존』, 257항, p. 177

바꾸어 버린 것이다. 이를 통해 조희룡의 홍매도를 용매도(龍梅圖)라 부르기도 한다.122)

조희룡의 작품에서는 불교와 함께 도가적인 색채(도판 18, 도판 19)도 엿볼 수 있다. 그는 ‘꿈에 한 도사가 나뭇잎으로 옷을 지어 입었는데 아름다운 신채 가 풍겨져 나아 마치 종리권(鍾離權․仙人)인 듯 하였다.…세 번째 그루가 가장 기굴(奇崛)하여 으뜸이었소’123)라며 매화도를 선인의 매화나무로, 그것도 가장 빼어난 매화나무로 표현하고 있다. (도판 17)에서 보이는 홍매도는 가로누워 뻗 어나간 굵은 줄기와 아래로 꺾인 가는 가지, 활짝 핀 매화와 경쾌하게 써내려간 글씨가 서로 조화되어 아담하면서도 활기를 띠고 있다. (도판 18)은 붓이 온건 하게 운용된 점이 특징이다. 전통 문인화의 소박한 구성을 따르지 않고 홍매를 위에서 아래로 펼쳐놓은 수법에 풍성한 꽃잎, 가지에 농묵으로 윤기를 주고 있어 조희룡 고유의 분방함과 대담함을 느낄 수 있다. 더욱이 화제에 ‘단약(丹藥)을 오직 매화에게만 준다’는 내용은 도가적 색채에 그가 자주 취하고 있는 유희적 태도로서 그림의 분위기를 고양시키는데 기여하고 있다.124)

이와 함께 조희룡의 매화에서 빼놓을 수 없는 작품이 <매화서옥도(梅花書屋 圖)>(도판 20)이다. 필선은 가볍게 흩날리며 매화가지를 표현하고 그 위에 찍힌 흰 점들은 하얗게 만발한 매화꽃의 분위기를 잘 전달한다. 서옥(書屋)이 있는 중 경(中景)(도판 21)이 전면적으로 다가오고 활달한 필치로 화면 전체를 통일시킴 으로써 원경(遠景)의 거리감이 축소됐다. 또 서예적인 필치로 산과 나무, 매화를 나부끼는 듯하게 자유롭게 그려서 사물의 형태에 연연하지 않는 자세가 느껴진 다. 매화로 둘러싸인 서옥에 앉아 있는 선비는 송나라의 서호(西湖) 고산(孤山) 에 은거하며 매화와 학을 사랑하며 살았던 임포(林逋, 967~1028)125)일 것으로 추측된다. 매화서옥도에서는 초옥에 홀로 앉아 화병에 꽂힌 매화를 응시하는 선 비와 그를 둘러싼 서예적인 필치의 산, 가볍게 나부끼며 자유로이 그려진 매화를 통해 조희룡의 독창적 작품세계를 읽을 수 있다.

조희룡은 처음에는 육척의 매화를 창안하고 스스로 장륙매화(丈六梅花)라 이

122) 김영회 외, 『조선문인화의 영수-조희룡 평전』(동문선, 2003), p. 183 123) 『석우망년록』, 92항, p. 133-134,

124) 손순옥, 「우봉 조희룡의 서화연구」(원광대학원 석사논문, 2004)

125) “송나라의 은사(隱士) 임포. 담박하고 옛 것을 좋아했으며, 명리를 구하지 아니하였다. 서호의 고 산에 은둔하여 20년간이나 시정에 내려오지 아니하고 매화와 학을 사랑하며 살았다고 한다.”, 『석 우망년록』, 55항, p. 101

름 붙였다. 매화꽃도 간략하게 핀 몇 송이의 그림에서 수많은 꽃들이 앞다퉈 핀 모습으로 변모됐다. 또 매화의 의미도 선비들의 고결한 심성에서 부처의 자애로 운 마음으로 자연스럽게 변했다.

이를 종합할 때 조희룡 매화는 조선의 그림에서 상당히 창의적이며, 개성을 지 녔다고 평가할 수 있다. 당시의 흐름은 조희룡이 마음에 핀 매화를 표현하기에는 불편한 제약에 불과했는지도 모른다. 그의 매화는 남이 닦아놓은 길 안에서 꽃을 피우려 하지 않았기에 거침없고 자유스러우며 역동적일 수 있었다. 이것이 바로 조희룡이 추구한 유희와 수예를 통한 독창성을 실현한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문서에서 저작자표시 (페이지 53-60)

관련 문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