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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4주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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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ademic year: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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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4주차-금호강변을 따라 나타나는 문화지형 경관과 스토리(2)

6) 침산(砧山)과 연암산(燕岩山)

침산과 연암산은 신천과 금호강의 합류부 부근에 위치하는 구릉지로 선사시대 유적이 발굴되 기도 하는 곳이다. 신천을 중심으로 서쪽에 침산, 동쪽에 연암산이 위치한다. 침산은 곡식을 찧는 방아를 닮았다 하여 부쳐진 이름이다. 침산은 또한 봉우리가 다섯 개라 하여 ‘오봉산’, 1900년대 초, 대구부사겸 관찰사 서리였던 매국노 박중양 소유의 산으로 박중양이 침산을 오 를 때는 항상 작대기를 짚고 올랐다고 하여 ‘박작대기산’이라고도 불렸고, 소가 누워있는 모습 을 보여 ‘와우산’으로도 불렸다. 침산은 다양한 이름에서 보듯이 문화역사경관에 있어 꽤나 의 미가 있다. 특히 신천이 금호강으로 합류하는 수구에 위치하여 풍수적으로 ‘수구막이산’이라고 도 한다. 과거에는 존재했지만 지금은 사라지고 없는 여제단을 비롯해 서거정의 ‘대구십영’의 제10영인 ‘침산만조(砧山晩照)’ 즉, 침산에서 석양의 노을을 바라보는 모습을 노래한 바로 그 침산이다. 침산에서 내려다보는 대구분지 전경과 분지 내를 흐르는 금호강, 신천, 동화천 그리 고 분지를 에워싸는 팔공산과 앞산 등을 두루 조망할 수 있는 천혜의 장소다. 특히 신천을 중 심으로 침산과 마주보고 있는 연암산 역시 대구지역 선사인들의 유적과 유물이 곳곳에서 발굴 되고 있다. 연암산은 산격배수지가 있는 탓에 수도산으로도 불린다. 연암산에는 구계(龜溪) 서 침 선생을 배향하는 구암서원(龜岩書院)이 위치하기도 하는데, 원래 구암서원은 1665년(현종 6년) 연귀산에 구암사(龜岩祠)로 창건되었다가 나중에 구암서원으로 명칭 변경이 되어 1718년 (숙종 44년) 중구 동산동 229번지인 신명고등학교 자리로 이전하였다. 그 후 1868년 서원철 폐령으로 훼철되었다가 1924년 유림에서 다시 건립하였으며, 1995년 이후 현재의 장소인 북 구 산격동 연암공원이 있는 연암산으로 이전하였다.

당시 유림들이 구암서원을 세워 서침 선생을 배향하게 된 이유는 『달성서씨학유공파보 상권』

의 기록 중, 1800년 전후에 발간된 것으로 추정되는 송환기의 『성원현록』의 기록에 잘 나타 나 있다. ‘세종께서 구계 서침 선생이 살고 있는 달성의 지형이 말(斗)과 같아서 천혜의 성이 므로 국가에 바치고 대신에 남산 옛 역터에 더하여 연신지(蓮信池)와 신지(新池 또는 蓮信新 池)를 주고자 하였으나, 서침 선생은 나라 땅이 모두 국왕의 땅인데, 보상을 받음은 당치 않는 다고 하면서 사양하자, 세종은 그에게 다른 청을 하라고 했다. 이 때 서침 선생은 개인의 사 사로운 보상 보다는 대구 지역민 모두에게 혜택을 주었으면 한다면서 대구 지역민들에게 상환 곡 이자를 한 섬당 5되 감해주기를 청하자 세종은 서침의 인간됨을 높이 사고 그의 청을 들 어주게 되었다. 이로부터 대구 지역민들은 수 백 년 동안 상환곡 이자를 탕감 받게 돼 그 보 답으로 구계 선생의 공덕을 찬양하여 대구의 진산인 연귀산 북편에 구암사를 짖고 제향하였 다.’ 이처럼 침산과 연암산(그림 9)은 신천이 금호강으로 합류하는 곳에 신천을 경계로 마주보 면서 초기 대구 거주자들에게는 생활의 터전으로 주요했다. 즉, 침산과 연암산은 신천과 금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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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의 침수로부터 비교적 안전한 고지대에 위치해 있을 뿐 더러 주변 경계가 수월해 거주지로 선호되었던 것 같다.

7) 서거정의 ‘대구십영’ 중 ‘노원송객(櫓院送客)’의 배경이 된 팔달진나루터

노원 즉, ‘대로원’은 조선시대 대구 복쪽 관문으로 영남대로가 지나는 교통의 요충지였다. 지 금은 금호강에 팔달교(그림 10)가 놓여 있어 교통이 편리해졌지만, 교량이 없었던 조선시대에 는 팔달진이라 하여 나루터가 여객이나 화물 수송을 담당했다. 제8영 ‘노원송객’에서 표현된 영남대로변의 버드나무와 주막이 어우러진 모습, 금호강의 흰 백사장 등은 ‘금호강 생태하천 조성사업’에 담아 스토리텔링을 구성하기에 좋은 곳이다. 조선시대에는 지방에서 서울로 가는 9개의 주요 도로가 있었고 그 중 부산에서 서울로 이어지는 영남대로가 중심 도로였다. 영남 지역에서 서울로 가는 길로는 영남대로 외에도 영남좌로와 영남우로가 있었다. 영남대로는 조 선시대 영남지방과 수도인 한양 간에 인적, 물적 교류가 활발히 진행된 주요 도로로 오늘날의 경부고속국도나 경부고속철도와 같은 존재였다. 영남대로는 영남의 선비들이 한양으로 과거시 험을 보러 가던 꿈과 희망의 길인 동시에 수많은 물자를 교역하던 생명의 길이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이별을 노래하던 슬픔의 길이기도 하였다. 이처럼 대도시에 조선시대 대동맥인

‘영남대로’가 존재한다는 사실만으로도 큰 이야기 꺼리가 된다. 대구 도심지에는 아직도 영남 대로의 흔적이 오롯이 남아 있다. 예를 들면, 약전골목 남쪽에 위치하는 염매시장의 떡전골목 에서 신축중인 현대백화점 옆 골목을 지나 이상화 고택 서상돈 고택 주변을 따라 가는 길이 여기에 해당한다. 제대로 발굴하여 금호강까지 연결하면 우리나라 어느 올레 못지않은 문화와 역사의 향기가 가득한 대구만의 도심지 올레를 만들 수 있을 것이다.

그림 9. 연암산(왼쪽)과 침산(오른쪽) 전경 그림 10. 팔달교와 부근의 금호강 습지) 8) 와룡산(臥龍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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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룡산은 금호강물에 의해 깎여 만들어진 강가 절벽으로 생김새가 마치 누워 있는 용의 모습 을 보인다 하여 와룡산이라 불린다. 와룡산의 지명 유래는 와룡산 기슭에 ‘옥연(玉淵)’이라는 못에 살던 용이 승천을 하려는데 아녀자들이 이 광경을 보고 놀라 소리를 지르는 바람에 승천 을 못한 용이 그 자리에 누워 머무르게 되었다는 데서 비롯되었다는 이야기가 있어 흥미를 더 한다.

와룡산은 과거 대구의 중심지에 위치했던 경상감영을 등진 채 금호강변으로 향하고 있어 풍 수에서는 ‘대구를 거역하는 산’, 이른바 ‘역산(逆山)’으로 여겼다. 그래서 대구에서 좋지 않은 일이 생기면 으레 와룡산의 풍수적 해석에 근거하여 설명하려는 사람도 있었다. 와룡산을 용 으로 볼 때, 용의 머리 부분은 금호강 왼편에, 꼬리 부분은 오른편에 위치한다. 와룡산의 형성 과정을 잠시 살펴보자, 현재 쓰레기 매립지로 활용되는 가운데 움푹 패여 들어간 부분은 침식 에 약한 화강암으로 구성되어 있는 반면, 능선부분은 단단한 변성암으로 구성돼 있어 약한 부 분의 화강암과 강한 부분의 변성암의 침식의 차이성 때문에 말발굽 형의 와룡산이 만들어지게 된 것이다. 풍수에서는 역산으로 인식 돼, 찬 밥 신세지만 오늘날에는 대구시민들이 버린 각 종 쓰레기를 처리해 주는 훌륭한 쓰레기매립장으로서 대구시민들에게는 말 그대로 용과 같이 소중한 산이 되었다.

그림 11. 와룡산의 등고선도와 3D 모형도

9) 영벽정(映碧亭)

영벽정(映碧亭)은 1871년과 1895년에 각각 발간된 『영남읍지』 지도에 나타나는 정자로 지도 상에는 위치적인 정보가 다소 미흡하다. 현장답사를 통해 영벽정의 위치를 정확히 파악할 수 있었는데, 영벽정은 금호강변이 아닌 금호강이 낙동강으로 합류하는 화원유원지 부근에서 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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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 하류 쪽인 달성군 다사읍 문산리 낙동강변에 위치하고 있다. 그런데 『영남읍지』에 실려 있 는 지도에서는 금호강과 낙동강의 경계지대에 표시돼 있어 위치 정보가 모호하다. 영벽정의 한자어 표시에 있어서도 1871년(고종 8년)에 발간된 『영남읍지』에는 '映碧亭'으로, 1895년(고 종 32년)에 발간된 『영남읍지』에는 ‘影碧亭’으로 각각 다르게 표시되어 있으나, 현장답사를 통 해 확인한 결과 1871년에 발간된 『영남읍지』에 기록된 한자어가 맞는 것으로 밝혀졌다. 본 정자는 1571년 28세에 소과에 급제하고 성균관진사로 있던 다사읍 문산리 입향조인 아암공 (牙巖公) 윤인협(尹仁浹)이 창건한 것으로 현재 파평 윤씨 문중에서 소유·관리하고 있다. 정자 에 서면 화원유원지로부터 굽이쳐 내려오는 낙동강의 넘실거리는 물과 드넓은 백사장 그리고 탁 트인 시계가 압권이다.

그림 12. 영벽정 전경과 영벽정에서 바라본 낙동강 풍경

10) 화원유원지의 상화토대와 그 주변

화원유원지 부근의 하식애인 ‘상화대(賞花臺)’와 낙동강변의 ‘사문진(沙門津)나루터’와 관련하 여서는 많은 얘깃거리가 전해온다. 조선 초, 낙동강은 일본 사신과 상인들의 주요 통로로, 낙 동강을 통해 유입된 각종 물산들은 상주, 조령, 충주를 통해 서울로 운송되었다. 특히 1472년 (성종 3년)에는 왜물고(倭物庫)가 사문진나루터가 있었던 화원에 설치될 정도로 교역되는 물산 이 많았으며, 왜물고에는 사무역이 아닌 공무역으로 인해 생겨난 일본 물산들을 보관하였다가 판매를 하기도 하였다. 화원에 설치된 왜물고는 지명을 따라 ‘화원창’이라고 불렸다. 왜물고는 그 이후 사무역의 번성으로 인해 1479년(성종 10년)에 폐쇄되었다. 또한 달서구 파호동에 ‘강 창(江倉)’을 설치하여 대구 지역의 세곡을 거두어 보관하였다가 서울로 운송하기도 했다. 파호 동의 옛 이름은 ‘머무동’ 또는 ‘머무강창’이라고도 하였는데, 이는 금호강으로 올라오던 소금 배가 머무는 동네에서 비롯된 지명이며, 과거 이곳에는 뱀과 조개가 많이 서식하고 있었고 조 개와 뱀 간에 치열한 다툼도 있었다는 설화도 전해 내려온다.

사문진나루터 옆 화원유원지가 위치하는 성산리 일대의 성산(토성이 있다는 의미에서 유래된 지명)에는 646년 신라 선덕여왕 때 축조된 토성이 있는데(http://www.hwawon.or.kr), 모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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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술잔과 같아 ‘배성(杯城)’, ‘잔뫼’ 또는 ‘웅달성(雄達城)’으로 불린다. 또한 신라군의 무기와 군량미를 보관하던 창고가 있었고 조선시대에는 봉수대가 있었다. 신라 35대 경덕왕은 가야산 에서 병으로 수양중인 세자를 문병하기 위해 이곳에 들러 행궁을 두어 유상하였던 곳으로 상 화대(賞花臺)라 명명했다(그림 13). 특히 경덕왕은 이곳 경치에 매료돼 9차례나 들렀으며 들를 때 마다 마을이 빛이 환하게 났다고 하여 ‘구래리(九來里)’ 또는 ‘구라리(九羅里)’라는 지명이 생겼다고 한다. 이름조차도 꽃으로 가득한 풍경이 압권인 이곳의 지명은 ‘화원(花園)’이다. 상 화대 인근 산기슭에는 약 30여기 이상의 고분군이 분포하는데 당시 이 지역 호족 세력의 고 분군으로 추정되는 등 스토리텔링 개발에 필요한 다양한 소재들이 산재한다. 한편 상화대에서 바라보는 달성습지와 흰 백사장, 푸른 낙동강 물, 석양의 노을 등은 탁월한 경관을 연출한다.

이 밖에도 이곳의 경치는 빼어난 관계로 많은 시인묵객들이 찾아왔으며, 문인들이 읊은 ‘상화 대 십경’은 꽤나 유명한 한 시다. 또한 ‘사문진(寺門津)’이란 이름이 신라시대 본 포구를 중심 으로 양쪽으로 많은 절이 있었던 데서 유래한다는 설도 있으며, 일제강점기에 항일의식과 민 족의식을 고취시킨 1932년 개봉영화 ‘임자 없는 나룻배’의 무대로 이름 나 있는 장소다. 또한 1960∼70년대에는 사문진나루터를 통해 나룻배(뒤에는 동력선으로 개조됨)를 타고 화원읍 성 산리와 고령 다산면 주민들이 왕래하기도 했던 곳이다. 이처럼 사문진나루터가 있었던 현 사 문진교와 일대의 화원동산 주변은 낙동강, 금호강, 대명천이 합류하는 곳으로 생태적으로 민 감할뿐더러 경관 또한 수려하다. 또한 많은 문화역사유적을 비롯해 수많은 전설을 가지고 있 어 스토리텔링을 활용한 문화관광 콘텐츠를 개발하여 대구의 훌륭한 명소로 조성할 필요가 있 는 곳이다

그림 13. 화원유원지 부근의 하식애인 상화대 그림 14. 무태의 서계서원 내 환성정 11) 무태 금호강변의 환성정(喚惺亭)과 서계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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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읍지』 누정(樓亭) 편 기록에 의하면, 부(경상감영공원)의 북쪽 금호강가에 위치하고, 태암 (笞岩) 이주(李輈)가 건립했으며 1760년대 이미 정자는 허물어지고 없다고 한다. 이암은 임진 왜란 당시 대구에서 의병장으로 활약하였고 현재 서계서원에 배향되어 있다. 서계서원은 금호 강 북편 무태 작은 언덕 아래에 위치하는데 본 서계서원 내에 환성정이 복원된 상태로 위치하 나. 원래의 위치에 대한 고증은 이루어 지지 않은 상태다.

12) 기타 문화지형

금호강에는 숱한 이야기와 전설 그리고 민초들의 희로애락을 담고 있는 정감이 가는 문화지 형이 많이 분포한다. 특히 하천의 공격사면에 발달하여 하천침식으로 형성된 하식애에는 예로 부터 정자나 누각을 지워 두고 많은 시인묵객들의 회합장소는 물론 수려한 경관을 감상하는데 자주 이용되었던 명소였다. 대표적인 하식애는 이미 언급한 바와 같다. 이 밖에도 금호강변에 는 수려한 강가 절벽들이 더러 발달하는데, 예를 들면, 아양루가 위치하는 하식애(그림 15), 동촌얼음창고가 있었던 동촌유원지 일대의 하식애, 지금은 훼손되었지만 인터불고 호텔 건물 이 위치해 있는 하식애 등은 참으로 소중한 경관자원임에 틀림없다.

또한 강창교 부근 달서구 파산동 금호강 하식 절벽인 궁산(263m) 언저리에 위치하는 이락서 당(伊洛書堂)은 조선 정조 22년(1798년)에 한강(寒岡) 정구(鄭逑)와 낙재(樂齋) 서사원(徐思遠) 선생을 추모하기 위해 대구, 달성, 칠곡 등 아홉 문중 유생 31명이 힘을 합해 인재 양성을 목 적으로 창건하였다(그림 16). 특히 강창 일대에 발달하는 하식애는 붉은 빛을 띠는 퇴적암으 로 구성된 바위여서 적벽으로도 불린다(그림 16).

그림 15. 금호강 하식애에 위치하는 아양루 그림 16. 금호강 적벽의 하식애와 이락서당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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