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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공주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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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ademic year: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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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전시 ‘공산성-공주 역사기행 1번지-’ 연계 강좌

고구려, 아리수를 건너다

일 자 : 2013년 10월 23일(수) 장 소 : 국립공주박물관 세미나실 강 사 : 양 시 은 (서울대학교 박물관 학예연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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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강의 시작 이후부터 중간 쉬는 시간 전까지는 강의실에 들어올 수 없으며, 강의 도중 강의실 밖으로 나갔을 경우에도 중간 쉬는 시간 전까지 강의실에 들어올 수 없습니다. (3) 추가로 교재가 필요하신 분은 홈페이지→학술/교육/행사→교육자료에서 교재파일을 다운받아 활용하시기 바랍니다. (4) 강의 중에는 휴대폰을 꺼주시기 바랍니다. 제7기 역사문화아카데미 “국립공주박물관 특별전시 기행” 특별전 “공산성-공주 역사기행 1번지-” 연계 강좌 고구려, 아리수를 건너다 발행 국립공주박물관 우)314-020 충남 공주시 관광단지길34 TEL/(041) 850-6365 FAX/(041) 850-6350 gongju.museum.go.kr (재)중앙문화재연구원 우)305-500 대전광역시 유성구 테크노7로 32-9 TEL/(042) 933-2700 FAX/(042) 933-7300 www.jungang.re.kr 인쇄 (주) 계 문 사 / (02)725-5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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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 시 은 서울대학교 박물관 학예연구사

Ⅰ. 고구려, 아리수를 건너다.

1. 고구려의 첫 번째 원정

광개토왕비문에는 영락永樂 6년(396) 광개토왕이 백제를 공격하여 58성 700촌村을 획득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비문에는 ‘병신丙申에 왕이 친히 군을 이끌고 백제[殘國]를 토벌하였다. 영팔성寧八城 … 아단성阿旦城 … 등을 공취하고, 백제[殘國]가 의義에 복종치 않고 감히 나와 싸우니 왕이 크게 노하여 아리수阿利水를 건너 성을 포위하였다. 이에 백제왕[殘主]이 곤핍困逼해져, 남녀 생구生口 1천 명과 천[細布] 천 필을 바치면서 왕에게 항복하고, 이제부터 영구히 노객奴客이 되겠다고 맹세하였다. 태왕은 앞의 잘못을 은혜로서 용서하고 뒤에 순종해 온 그 정성을 기특히 여겼다. 이에 58성 700촌을 획득하고 백제왕의 아우와 대신 10인을 데리고 수도로 개선하였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비문에 따르면 3세기 말 고구려 광개토왕은 당시 백제의 도성이었던 한성漢城을 공격하여 아신왕阿莘王의 항복을 받아내고, 중국 길림성 집안시에 위치한 국내성國內城으로 돌아간 것으로 보입니다. 그렇지만 현재까지의 고고학 조사 결과에 따르면, 한강 유역에서 4세기 무렵의 고구려 유적은 확인되지 않고 있습니다. 이는 당시 광개토왕이 백제의 한성 일대를 영역화하지 않고 백제의 주권을 인정하고 돌아갔기 때문으로 판단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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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고구려의 두 번째 원정

󰡔삼국사기󰡕 백제본기에는 개로왕蓋鹵王(455~475) 21년(475) 가을 9월에 대한 기사에 고구려 장수왕이 아리수를 건너 백제의 한성을 점령한 기록이 남아있습니다. 백제본기의 당시 기록을 살펴보면 아래와 같습니다. 고구려 왕 거련巨璉이 군사 3만 명을 거느리고 와서 왕도인 한성漢城(현재의 서울)을 포위하였다. 왕은 성문을 닫고 능히 나가 싸우지 못하였다. 고구려인이 군사를 네 길로 나누어 양쪽에서 공격하였고, 또 바람을 이용하여 불을 놓아 성문을 불태웠다. 이에 인심이 대단히 불안해져서 나가서 항복하려는 자도 있었다. 왕은 곤궁하여 어찌할 바를 몰라 기병 수십을 거느리고 성문을 나가 서쪽으로 달아났다. 고구려인이 쫓아가 살해하였다. 이보다 앞서 고구려 장수왕이 몰래 백제를 도모하려 하여 백제에서 간첩間諜할만한 자를 구하였다. 이 때에 승려 도림道琳이 모집에 응하여 말하였다. “어리석은 이 승려가 아직 도를 알지 못하였으나 나라의 은혜에 보답하고자 생각합니다. 원컨대 대왕은 신臣을 어리석다 하지 마시고 지시하여 시키신다면 왕명을 욕되게 하지 않겠습니다.” 왕이 기뻐하여 비밀리에 백제를 속이게 하였다. 이에 도림은 거짓으로 죄를 짓고 도망하여 온 것 같이 하여 백제로 들어왔다. 이 때에 백제 왕 근개루近蓋婁가 바둑과 장기를 좋아하였다. 도림이 대궐 문에 나아가 고하였다. “신은 어려서 바둑을 배워 자못 신묘한 경지에 들었습니다. 원컨대 곁에서 알려 드리고자 합니다.” 왕이 불러들여 바둑을 두어 보니 과연 국수國手였다. 드디어 그를 높여 상객上客으로 삼고 매우 친근히 지내면서 서로 만나기가 늦은 것을 한탄하였다. 도림이 하루는 왕을 모시고 앉아 있다가 조용히 말하였다. “신은 다른 나라 사람인데 왕께서 저를 멀리하지 않으시고 은총을 매우 두터이 해주셨습니다. 그러나 저는 오직 한 가지 기술로써 보답하였을 뿐 일찍이 털끝만한 도움을 드린 일이 없었습니다. 지금 한 말씀을 드리려 하는 데 왕의 뜻이 어떠하실 지 알지 못하겠습니다.” 왕이 “말해 보라. 만일 나라에 이로움이 있다면 이는 선생에게 바라는 바이다.”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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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림이 말하였다. “대왕의 나라는 사방이 모두 산과 언덕과 강과 바다입니다. 이는 하늘이 베푼 험한 요새요 사람의 힘으로 된 형국形局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사방의 이웃 나라들이 감히 엿볼 마음을 먹지 못하고 다만 받들어 섬기고자 하는데 겨를이 없습니다. 그런즉 왕께서는 마땅히 존귀하고 고상한 위세와 부강[富有]한 업적으로써 남의 이목[視聽]을 두렵게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성곽은 수선修繕되지 않았고 궁실도 수리되지 않았으며, 선왕의 해골은 맨 땅에 임시로 매장되어 있고, 백성의 집은 자주 강물에 허물어지고 있으니 신은 대왕을 위해 찬성할 수 없습니다.” 왕이 “옳다. 내가 장차 그렇게 하리라.”고 말하였다. 이에 나라 사람들을 모두 징발하여 흙을 쪄서 성을 쌓고, 안에는 궁실과 누각樓閣과 대사臺榭 등을 지었는데 웅장하고 화려하지 않음이 없었다. 또 욱리하郁里河(현재의 한강으로 추정, 광개토대왕비에는 아리수阿利水로 표현됨)에서 큰 돌을 가져다가 곽槨을 만들어 부왕의 뼈를 장사하고, 강을 따라 둑을 쌓았는데 사성蛇城 동쪽에서 숭산崇山 북쪽에까지 이르렀다. 이로 말미암아 창고가 텅비고 백성들이 곤궁해져서 나라의 위태로움은 알을 쌓아 놓은 것보다 심하였다. 이에 도림이 도망쳐 돌아와서 보고하니 장수왕이 기뻐하여 백제를 치려고 군사를 장수에게 내주었다. 근개루近蓋婁가 이를 듣고 아들 문주文周에게 말하였다. “내가 어리석고 밝지 못하여 간사한 사람의 말을 믿고 썼다가 이 지경에 이르렀다. 백성은 쇠잔하고 군사는 약하니 비록 위태로운 일이 있다고 하더라도 누가 기꺼이 나를 위하여 힘써 싸우겠는가? 나는 마땅히 사직社稷을 위하여 죽겠지만 네가 이곳에서 함께 죽는 것은 유익함이 없다. 어찌 난을 피하여 나라의 계통을 잇지 않겠는가?” 문주는 이에 목협만치木劦滿致와 조미걸취祖彌桀取와 함께 남쪽으로 갔다. 이 때에 이르러 고구려의 대로對盧인 제우齊于․재증걸루再曾桀婁․고이만년古尓萬年 등이 군사를 거느리고 와서 북성北城(현재의 풍납토성)을 공격하여 7일만에 함락시키고, 남성南城(현재의 몽촌토성)으로 옮겨 공격하였다. 성안은 위태롭고 두려움에 떨었다. 왕이 성을 나가 도망가자 고구려의 장수 걸루桀婁 등은 왕을 보고는 말에서 내려 절한 다음에 왕의 얼굴을 향하여 세 번 침을 뱉고는 그 죄를 꾸짖었다. 그리고는 왕을 포박하여 아차성阿且城 아래로 보내 죽였다. 걸루桀婁와 만년萬年은 백제 사람이었는데 죄를 짓고는 고구려로 도망하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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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 문헌에 기록된 바와 같이 고구려 장수왕은 475년 당시 백제의 한성이었던 풍납토성과 몽촌토성을 점령하였습니다. 광개토왕대와는 달리 당시 고구려는 한성을 고구려의 영역으로 삼았고, 백제는 웅진(지금의 공주)로 도읍을 옮겨야했습니다.

Ⅱ. 고구려의 한강 진출

우리나라에서 확인되는 고구려 성은 크게 임진․한탄강 유역, 양주 일대, 한강 유역, 금강 유역으로 나누어볼 수 있습니다. 그 중 한강 유역에는 아차산 일원에 가장 많은 고구려 보루가 집중적으로 분포하고 있는데, 구의동보루, 홍련봉 1․2보루, 아차산 3․4보루, 시루봉보루, 용마산 2보루가 발굴조사된 바 있습니다. 백제의 도성이었던 한강 이남의 몽촌토성에서도 성 내에서 고구려 유구와 유물이 확인되어 475년 장수왕이 한성을 점령한 이후 고구려 군대가 주둔하고 있었음이 밝혀졌습니다. 고구려가 한강유역에 진출하여 유적을 남긴 것은 475년으로,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에는 장수왕 63년에 왕이 직접 군사 3만을 거느리고 백제를 침략하여 한성 (지금의 서울)을 함락시키고 개로왕을 죽인 후 남녀 8천명을 사로잡아서 돌아간 기록이 남아있습니다. 이로 인해 백제는 웅진(지금의 공주)으로 천도하였는데, 이와 같은 비극적인 상황은 당시 백제를 절망과 대혼란에 빠트렸을 것입니다. 백제는 이후 고대 국가의 기틀을 마련하였던 한성漢城을 되찾기 위해 총력을 기울이게 되었을 것인데, 당시 고구려에게 한강유역을 빼앗겼음에도 불구하고 백제본기에서는 여전히 한성漢城과 한산성漢山城 등과 같은 기사가 나타나고 있어 논란이 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역사기록과 관련하여 한성 함락 이후에도 한강유역이 여전히 백제 영역으로 남아 있었다는 주장이나 동성왕이나 무령왕대에 백제가 한강유역을 일시 회복했다는 주장이 제기되기도 하였습니다. 한편, 고구려가 한강 유역을 완전히 포기하게 된 것은 551년의 일로, 백제, 신라, 가야의 연합군이 고구려군을 임진강유역으로 몰아내면서입니다. 고구려본기에는 신라가 공격해 와서 10성을 빼앗아 갔다는 간략한 기록만으로 당시의 상황이 전해질 뿐이며, 백제본기에도 이와 관련 기사는 남아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당시의 상황이 좀 더 자세히 묘사되어 있는 것은 󰡔삼국사기󰡕 열전 거칠부편이나 󰡔일본서기󰡕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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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5년부터 551년까지 고구려가 한강유역을 점유하고 있었다는 것이 현재까지 학계의 통설이나, 역사학계에서는 1980년대부터 반론이 제기되어 왔습니다. 그러나 최근에는 서울, 경기, 충청, 강원 일대에서 성곽 외에도 고분이나 생활유적과 같은 5~6세기대의 고구려 유적 조사 사례가 꾸준히 증가하고 있어, 백제본기의 기록과 는 달리 고구려가 한강유역을 안정적으로 점유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증거가 되고 있습니다. <삽도> 한강유역의 고대유적 분포

Ⅲ. 금강 유역 고구려 성

금강유역의 고구려 성으로는 청원 남성곡산성과 대전 월평동 목책 유적이 확인되고 있습니다. 진천의 대모산성에서도 고구려 토기가 출토된 바 있습니다. 남성곡산성이나 월평동유적은 모두 목책을 이용하여 방어시설을 구축한 것이 특징입니다. 특히 남성곡산성은 2중 목책성으로, 동문지만 석축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중국 및 북한을 포함하여 현재까지 알려진 유일한 고구려 목책 성으로, 산성의 전체 둘레는 360m 가량입니다. 산성에서는 목책으로 이루어진 치도 확인되어 목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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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계에서도 치가 만들어졌음을 알 수 있게 되었습니다. 성 내부에서는 온돌이 딸린 건물지가 확인되었습니다. 금강 유역의 고구려 성에서 출토된 유물은 항아리의 경우 구연 형태가 서울의 몽촌토성 출토품과 유사합니다. 또한 월평동 목책 유적에서는 파상문이 시문된 토기가, 남성골 산성에는 소량이기는 하지만 타날이 물손질에 의해 지워진 토기들이 출토되고 있어, 해당 유적은 475년 고구려가 한성을 점령하고 남쪽을 영역화하면서 금강 유역에 진출할 당시에 축조된 것으로 판단됩니다. 이들 유적에서는 6세기대 고구려 토기가 발견되고 있지 않아, 목책에서 석축으로 방어체계를 전환하지 못한 채 5세기 말 내지는 6세기 초에 폐기된 것으로 판단됩니다. <사진 1> 청원 남성곡유적 전경

Ⅳ. 아차산 고구려 보루군

한강 북안의 아차산 일원에는 각 봉우리마다 보루가 축조되어 있는데, 상당수의 보루가 고구려에 의해 축조된 것입니다. 아차산은 용마산, 망우산 및 홍련봉과 시루봉 등 인근 산줄기를 포함하고 있으며, 동쪽으로는 구리시의 왕숙천, 서쪽으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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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의 중랑천이 아차산 남쪽의 한강으로 흘러들기 때문에 주변을 통제하기에 매우 적합한 위치입니다. 또한 아차산의 경우 해발 116m 내외인 홍련봉부터 해발 348m인 용마봉까지 다양한 높이의 봉우리로 구성되어 있기는 하지만 주변에 높은 산이 없어 아차산 보루군에서는 한강 이남 및 아차산 주변의 평야지대 등에 대한 감시가 용이합니다. 최근의 발굴조사 결과에 따르면 아차산 고구려 보루는 현재 조성된 석축 성벽보다 먼저 목책이 설치되어 있음이 밝혀졌습니다. 목책 구조가 가장 잘 남아있는 곳은 시루봉보루로, 2중의 목책열이 확인되었습니다. 바깥쪽 목책열은 대체로 석축 성벽의 하단부에서 그리고 안쪽 목책열은 석축 성벽 안쪽에서 확인되고 있습니다. 목책의 축조 방식은 우선 구덩이를 파고 나무 기둥을 세워 기초 틀을 만든 다음 목재를 이용하여 나무벽을 만들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목책 기둥의 간격은 대략 1m 가량이며, 홍련봉 1보루에서는 목책에 판재를 끼워 연결하였던 흔적도 확인되었습니다. <사진 2> 시루봉보루 항공사진 시루봉보루와 아차산 4보루에서는 목책이 석축 성벽 바로 아래에서 발견되고 있어, 목책을 폐기하고 석축 성벽을 구축하였음을 알 수 있게 되었습니다. 다만 목책과 석축 성벽이 어느 정도의 시간적 차이를 두고 설치되었는가에 대해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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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의 자료만을 가지고는 판단하기가 쉽지 않지만, 아차산 보루군에서는 다른 지역의 고구려 성곽에서 발견되고 있는 것과 같은, 5세기로 편년될 수 있는 문양 요소나 타날이 지워진 흔적 등이 거의 확인되지 않고 있어 5세기 보다는 늦은 시기에 축조되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석축 성벽은 기본적으로 경사면을 정리하여 석축을 쌓고 그 안쪽을 흙으로 채워 넣는 방식으로 축조하였습니다. 보통의 고구려 성벽에 이용된 석재는 바깥쪽에서 보면 잘 다듬어진 장방형이지만, 평면상으로는 쐐기 형태입니다. 앞부분에 비해 뒷부분의 뿌리가 길쭉하게 치석한 쐐기형 성돌과 이에 맞물릴 수 있도록 전체적으로 길쭉하게 치석한 북꼴의 성돌을 서로 맞물려 쌓는 것이 고구려 성벽 축조의 일반적인 방식이지만, 아차산 보루에서는 그러한 방식이 잘 확인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성돌을 1~2겹으로만 정상부의 평탄면까지만 쌓았습니다. 이후 뒷채움한 흙 위에 건물지 등을 조성하였는데, 뒷채움을 통해 산 정상부의 부족한 생활공간을 확장한 것으로 보입니다. <사진 3> 홍련봉1보루 항공사진 (고려대학교 고고환경연구소 제공) 홍련봉을 제외한 아차산의 각 보루에는 여러 개의 치雉가 설치되어 있는데, 돌 출된 치는 성벽에 접근하는 적의 측면을 공격할 수 있다는 점에서 매우 효과적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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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어시설입니다. 치는 보통의 성벽보다 견고하게 축조되며, 치가 설치된 부근의 체성벽 또한 보존상태가 양호한 것으로 볼 때, 방어적인 목적 이외에도 체성벽을 지지하는 보축의 역할도 함께 수행한 것으로 판단됩니다. 최근 아차산 보루군에서는 2중 또는 3중의 특이한 구조의 치가 확인되고 있는데, 용마산 2보루에서 건물지로 출입하는 고구려 시대의 나무사다리가 불에 탄 채 확인되고 있는 것으로 보아, 방어가 강화된 이러한 치가 출입시설의 역할도 함께 담당하였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한편, 보루 내에는 물이 나오는 샘이 없으므로, 성 내에 암반을 네모나게 굴토한 다음 벽체와 바닥에는 뻘을 채워 방수처리를 하고 다시 바깥부분에는 통나무를 쌓은 저수시설을 갖추었습니다. 또한 성 내에는 큰 비가 내렸을 때 원활한 배수가 이루어지지 않으면 성벽을 포함한 산성의 여러 시설물들이 파괴될 위험이 있기 때문에 사전 대비책의 일환으로 배수시설 또한 잘 갖추어져 있습니다. 이러한 배수시설들은 유적 전체에서 확인되고 있는데, 특히 건물지 아래에서도 발견되는 것을 보면 보루 내 시설물 중 배수로가 가장 먼저 축조되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사진 4> 아차산4보루 저수시설과 모식도 아차산 보루군에서는 여러 구조의 건물지가 확인되었습니다. 수혈(반지하식) 건물지가 일부 확인되기는 하지만 대부분은 방형이나 장방형의 지상 건물지입니다. 수혈 건물지는 구의동보루나 용마산 2보루 등에서 벽면에 탄화된 판재가 가로로 길게 확인되고 있는 것을 볼 때, 판자를 이용하여 벽체의 마감을 하였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수혈 건물지 외곽으로 기둥구멍 열이 발견되기도 합니다. 지상 건물지의 경우에는 주변에 소결된 점토 덩어리들이 확인되고 있어, 우선 석축으로 건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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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계 및 기초를 삼고 그 위에 점토와 볏집 등을 섞어 만든 벽체를 올린 담장식 벽체를 사용하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한편, 홍련봉 1보루에서는 기와 건물지도 확인되고 있는데, 지하식 벽체 건물지에 기와를 올렸던 것으로 보입니다. 건물지에는 대체로 1개 이상의 온돌이 설치되어 있는데, 고구려의 온돌은 고래가 하나뿐인 이른바 ‘쪽구들’로서 ‘ㄱ’자형과 직선형의 두 종류가 있습니다. 온돌은 지금의 온돌과는 구조가 달리 벽난로와 같은 형태로, 모두 외고래 형식으로 판석을 세워서 벽체를 만들고, 그 위에는 역시 납작하고 긴 판석으로 뚜껑을 덮은 뒤 짚을 섞은 흙으로 미장한 구조입니다. <사진 5> 구의동보루 온돌의 아궁이와 모식도 이 외에도 보루에는 여러 가지 시설물이 갖추어져 있었습니다. 아차산 4보루와 용마산 2보루에는 간이대장간 시설이 있어서 철기류에 대한 간단한 수리 정도는 직접 수행하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또한 아차산 3보루에서는 단야 시설과 방아확과 볼씨가 함께 배치된 방앗간 시설이 확인되기도 하였습니다. 아차산 보루군에서는 다량의 토기와 철기, 석기 등이 출토되었습니다. 우선 철기로는 투구를 비롯한 갑옷편, 칼, 창, 화살촉, 도끼 등과 같은 무기류와 재갈, 등자, 행엽 등과 같은 마구류, 호미, 삽, 낫, 쇠스랑, 가래, 끌, 착, 망치, 철기 제작용 단조 집게 등 다양한 농공구류, 철 솥, 철 항아리 등과 같은 생활용구 등이 확인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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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6> 아차산4보루 출토 투구 토기로는 항아리, 동이, 시루, 접시, 사발을 비롯한 6세기대로 편년되는 다양한 생활용기들이 확인되었습니다. 주로 황색, 적갈색 계통이 많고 회색과 흑색도 보입니다. 홍련봉 2보루에서는 ‘경자庚子’, ‘관옹官瓮’ 등이 새겨진 토기가, 아차산 4보루에서는 ‘염모형冉牟兄’, ‘지도형支都兄’, ‘후부도○형後部都○兄’, ‘하관下官’등의 명문 토기가, 시루봉 보루에서는 ‘대부정대부정大夫井大夫井’이 새겨진 명문 토기도 출토되었습니다. <사진 7> 용마산2보루 출토 고구려 토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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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8> 아차산 보루군 출토 명문 이 밖에도 홍련봉 1보루에서는 연화문와당을 사용하고 있는 기와 건물지가 확인되었는데, 󰡔신당서新唐書󰡕에는 고구려 후기에 기와가 왕궁이나 관청, 사찰 등에서만 사용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해발 125m의 홍련봉 1보루는 아차산에서 가장 낮은 곳으로, 일반인들이 가장 접근하기 쉽다는 점에서 대민對民 기능을 담당하는 행정관청이 들어서 있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소규모 관방유적들이 산줄기를 따라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마치 하나의 대형 성곽처럼 활용되었을 가능성이 있는 아차산 보루군의 경우, 군사적인 목적만을 가지고 있었다면 굳이 작은 보루에 기와 건물을 조성할 필요도 없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홍련봉 1보루 보다 규모가 크고 많은 시설과 중요 유물들이 확인된 아차산 3보루나 4보루에서는 기와가 출토되고 있지 않다는 점 또한 이러한 가능성을 높여주고 있습니다. 한편,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아차산 보루군은 역사적 정황으로 보아 고구려가 한성을 점령한 475년 이후부터 백제가 한강 유역을 탈환한 551년 사이의 어느 시점에 축조되고 활용되었을 것입니다. 그동안 발굴 조사된 유적의 구조나 농기구와 간이대장간 등의 시설물의 존재, 출토 유물의 수량으로 보아 비교적 오랜 기간 동안 고구려 군대가 아차산에 주둔하였던 것은 분명합니다. 홍련봉 2보루에서 520년에 해당하는 ‘경자庚子’명 토기편이 출토되었고, 토기의 형태 및 제작 기법에 대한 연구를 통해 아차산 일원의 고구려 보루는 대략 500년을 전후한 시점부터 551년까지 사용된 것으로 파악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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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공주박물관 특별전시 기행”

● 일 시 : 2013. 03. 27(수)~11. 27(수) / 15:00~17:00 ● 장 소 : 국립공주박물관 세미나실 ● 강의 일정 및 강의 내용 주제 연번 일자 강의 내용 특별전시 일 정 국립공주 박물관에서 느끼는 제주 문화 1차 03.27. 제주의 역사와 문화 (김동전, 제주대학교 박물관장) 제주의 뭍그릇과 섬그릇 (03.12.~05.26.) 특별전시 “제주의 뭍그릇과 섬그릇” (김진경, 국립공주박물관 학예연구사) 2차 04.03. 제주의 이야기, 본풀이, 신앙(김헌선, 경기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 3차 04.10. 제주 전통건축의 공간미학(김태일, 제주대학교 건축학부 교수) 4차 04.17. 제주도 옹기 - 허벅을 중심으로(이경효, 국립민속박물관 학예연구사) 5차 04.24. 계룡산 분청사기(김영원, 국립문화재연구소 소장) 6차 05.01. 제주도의 또 다른 문화를 들여다보기 - 제주유배문화 -(양진건, 제주대학교 교육학과 교수) 7차 05.08. 세계자연유산 제주의 지질학적 특성과 가치(손영관, 경상대학교 지구환경과학과 교수) 국립공주 박물관에서 느끼는 옛사람들의 삶과 죽음 8차 07.17. 기증, 문화 나눔의 소중한 실천(김미경, 국립공주박물관 학예연구사) 기증, 문화 나눔의 소중한 실천 (07.09.~08.25.) 9차 07.24. 죽음이 남긴 장례와 제례(정종수, 전 국립고궁박물관장) 10차 07.31. 우리의 옛 그림 - 조선 회화(홍선표, 이화여대 대학원 미술사학과 교수) 11차 08.07. 옛 사람들의 손맛을 담아낸 도자기(한국 도자의 이해)(이종민, 충북대학교 고고미술 사학과 교수) 12차 08.14 전통복식에 담긴 옛 사람들의 멋(고부자, 전 단국대학교 전통의상학과 교수) 13차 08.21 옛 문서로 본 인간만사 이야기(심재우,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 국립공주 박물관과 떠나는 공주 역사기행 1번지, 공산성 14차 10.02. 공산성, 공주 역사기행 1번지 (최장열, 국립공주박물관 학예연구사) 공산성-공주 역사기행 1번지-(09.26.~11.24.) 백제의 웅진성이며 왕성, 공산성 (이남석, 공주대학교 사학과 교수) 15차 10.16. 백제의 성곽(서정석, 공주대학교 문화재보존학과 교수) 16차 10.23. 고구려, 아리수를 건너다(양시은, 서울대학교 박물관 학예연구사) 17차 10.30. 신라의 도성(박방룡, 전 국립부여박물관장) 18차 11.13. 조선시대의 공산성(임선빈,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전임연구원) 19차 11.20. 근현대 시기의 공산성(지수걸, 공주대학교 역사교육과 교수) 20차 11.27. 고지도로 본 공산성(윤용혁, 공주대학교 역사교육과 교수)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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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화통신은 중국 과학원 환경지구화학실험실 정바오산(鄭寶山) 연구원의 말 을 인용 “취사와 난방을 석탄에 의존하고 있는 서남 지방에서는 주 농작물인 옥수수와

정림사지는 동남리에 위치한 백제시대 절터이다.. 부여나성은 부여읍 염창리에

현재 개도국에 속하거나 체제 전환국(중국, 러시아를 비롯하여 동구 등에 위치한 계획경제 체제에서 시장 경제 체제로 이 행한 국가들)들도 신흥 시장에

서쪽에서 본 서북쪽 성곽 모습 서북쪽 성벽 목책열과 부강시내

英佛연합굮이 광주 공격하여 함락하고 북상 하여 大沽포대 점령하고 天津을 육박하자 천짂조약(天津 條約 ) 체결... 남경을

¡ 민족 특색 말 문화행사를 중점적으로 개최하여 시장 수요에 맞는 전문적 품종의 번식군 을 완벽하게 갖추고, 특화마 품종 개발에 속도를 높이며, 조랑말 자원에 입각하여

그 당시 회화의 大宗을 이루는 산수화에서는 관념적 중국 산수화를 모방 하던 단계를 벗어나 우리나라의 자연 경관을 사생하는 실경,즉 실학사상을 바탕으로

現代 韓國漢字音 -ju형은 現代 中國漢字音에서 -uei형, -ei형, -i형으로 대응되며, 日本 常用漢字音에서는 -i형, -ui형으로 대응된다.. 現代