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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조선어의 검열과 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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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한 고찰* 1)

박광현**2)

1. 들어가면서 2. 조선 풍속의 연구 3. 조선어의 검열과 연구 4. 󰡔文章󰡕의 종군기와 니시무라 5. 결론을 대신하여

❚국문초록

식민지 시기의 조선문 검열에 있어서 “염라대왕”과 같은 존재였다고 일컬어지는 검열관 니시무라 신타로에 관해 연구한 이 논문은 아래의 세 가지 내용을 주로 다루고 있다. 우선, 니시무라의 첫 저서 󰡔朝鮮の 俤(조선의 모습)󰡕(1923)가 그와 유사한 ‘조선 사정(事情)’을 전하는 취지의 출판물과 어떤 변별점이 있는지를 살피고, 그것을 통해 그가 조선에 대

* 이 논문은 2005년도 한국학술진흥재단의 지원을 받아 수행된 연구 결과임 (KRF-2005-078-AS0051). 그 연구과제의 수행 중 2006년 8월 17일에 열린 「식 민지시기 검열연구의 토대 구축을 위한 자료집 편찬」이라는 과제로 열린 학술 심포지엄에서 발표한 내용을 토대로 작성된 논문이다. 심포지엄에서 토론을 통 해 많은 가르침을 주신 한만수 선생님과 정근식 선생님, 그리고 김재영 선생님 을 비롯해 1년 동안 과제 수행을 위해 애써주신 분들에게 감사드린다.

** 동국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 park-kh2000@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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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 어떠한 책무와 사명감을 가지고 조선에서 생활했는지를 살폈다. 다 음으로 업무상 일상적으로 조선어를 접해야 하는 검열관으로서 니시무 라는 과연 조선어에 대해 어떤 인식을 가졌는지를 살폈다. 그는 검열관 으로서뿐 아니라 조선어 연구자로서의 사명감을 자주 피력했는데, 이 논문에서는 그러한 발화의 관점과 그 내용이 지니는 의미가 무엇인지 를 살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니시무라는 히노 아시헤이(火野葦平)의

󰡔보리와 병대(兵隊)󰡕라는 작품을 총독부의 기획에 따라 󰡔보리와 병 정󰡕이라는 타이틀로 1939년에 번역하는데, 그와 비슷한 시기에 󰡔문장󰡕

에서는 「전선문학선」을 기획・연재하였다. 그 둘의 연관성을 살피면서 그의 번역 작업이 지니는 의미를 살폈다. 특히 󰡔국민문학󰡕 시대에 들어 서면서는 ‘편집자의 지위와 책임’이 검열의 한 부분을 담당하게 되는데, 편집자가 그러한 지위를 갖게 되는 데는 그의 번역 작업이 일정한 역할 을 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주제어 검열관, 니시무라 신타로, 조선 사정, 경찰, 내선일체

1. 들어가면서

우리 경무국의 장로(長老)이며 조선어 연구의 대가인 니시무라(西 村) 통역관은 결국 지난 8월 5일부로 퇴관했다. 본인에게는 공명을 이 룬 것이기도 하고, 또 고생해 키워온 언문신문이 신동아건설의 빛나는 국책에 따라 폐간을 결정한 때이기도 하다. 기회를 보는데 민감한 통역 관은 절호의 용퇴 기회를 얻은 것이라 생각하지만, 통역관이 없는 이후 언문 검열진에게 그 쓸쓸함은 실로 감추기 어려운 점이 있다. 통역관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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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문신문의 허가와 동시에 다이쇼(大正) 9년(1921) 3월에 임관하여 검열을 담당하며 오늘에 이르렀는데, 관대와 엄격을 적절하게 사용한 그 단속과 지도의 행정적 수완은 누구도 따를 수 없었으며, 그 위대한 공적은 길이 청사(靑史)에 장식될 만하다.

통역관의 조선어는 이미 정평이 나 있는 바, 다시금 내가 구차하게 사족을 달 필요가 없는데, 전공인 어학을 통해서 성취한 내선일체운동 에 대한 공로도 또한 우리들은 경모(敬慕)하여 마지않는 바이다.1)

위의 글은 식민지 조선에서 검열관으로 근무했던 니시무라 신타로의 퇴역을 맞아, 경무국 동료이자 후배인 히로세 시로(廣瀬四郎)가 쓴 송별 사이다. 니시무라 신타로는 1888년 효고(兵庫)현 출생으로 1910년 동 경외국어학교 한어과(韓語科)를 졸업한 후, 1912년 4월에 경성전수학교 의 교유(敎諭)로 조선에 건너왔다. 당시 경성전수학교는 그 곳을 졸업한 사람에게 판임 문관에 임용될 자격을 부여하는 학교였다.2) 1914년 12 월에 조선총독부 사법부(직급은 )로 옮긴 그는, 1918년에는 경성지방 법원의 서기 겸 통역생으로 직무하기 시작했다. 1920년부터는 경무국 으로 옮겨 통역생으로 근무하다, 1921년 3월 통역관으로 승진한 후 1940년 퇴역할 때까지 줄곧 통역관으로서 조선어 신문 및 잡지에 대한 검열을 담당한다. 공교롭게도 그가 통역관으로 복무하기 시작하는

1) 廣瀬四郎, 「西村通譯官る」, 󰡔警務彙報󰡕, 1940. 9.

2) 1911년 5월 3일에 공포 시행된 ‘조선총독부 및 소속관서 판임관 특별임용령’(칙 령 139호)이 1912년 3월 27일 개정되는데, 그에 따르면 조선총독이 정하는 시 험의 합격자 이외에도 경성전수학교, 관립고등보통학교, 조선총독이 이와 동등 이상으로 인정한 학교의 졸업자 등도 판임 문관에 임용할 수 있었다.(박은경,

󰡔일제하 조선인 관료 연구󰡕, 학민사, 1999, 45쪽) 지금도 서울대학교 법학과 동창회는 경성전수학교의 졸업생에게 회원의 자격을 주고 있다(http://www.

snulawa.or.kr/new_html/intro/index.php?checkPage=history_02 참조). 이 런 점에서 니시무라는 조선의 관료나 지식층을 형성할 예비생을 학생으로 대하 면서 이미 우월한 지위에서 조선 생활을 시작했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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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1년은 바로 조선과 동아, 두 조선어신문이 발행되기 시작한 해였 고, 또한 퇴역하는 1940년은 두 신문이 폐간되던 해였다.3)

이 글에서는 이상의 이력을 지닌 니시무라 신타로에 대해 세 가지 관점에서 살펴보고자 한다.

먼저, 조선에 교유라는 신분으로 처음 와 사법부를 거쳐 경무국에서 근무하기 시작할 당시까지 니시무라가 조선에서의 경험을 토대로 저술 한 첫 저서 󰡔朝鮮の俤(조선의 모습)󰡕는 어떤 책인지, 또 그 책이 그와 유 사한 취지로 출간된 다른 저서들과는 어떤 변별점이 있는지를 살펴보 도록 하겠다.

다음으로, 업무상 조선어를 일상적으로 접해야 하는 검열관으로서 니 시무라는 과연 조선어에 대해 어떤 인식을 가졌는지를 살필 것이다. 경 무국 도서과는 ‘국문’=일문과 조선문으로 각각 출판되는 검열 대상에 따라 검열 담당을 나누고 있었다.4) 주4)에서 제시한 바와 같이 정근식 의 조사에 따르면, 조선인은 조선어 문헌에 대한 검열만을 담당했는데, 니시무라와 같이 일본인으로서 조선문을 검열한다는 것은 그들이 그만

3) 인용문에서 알 수 있듯, 검열관으로서 니시무라의 활동은 식민지 조선의 언문 신문의 역사와 궤를 같이 했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문인들, 특히 언론인 출신 의 문인들의 회고 속에 그는 자주 거명되고 있다. “圖書課주임으로 우리나라 말 잘한다는 西村眞太郞이라는 자가 있었는데 이자가 검열을 좌지우지한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에 이자와 말해보고 싶은 일이 있었다.”(최승만)/“니시무라는 도서 과에 없지 못할 존재였으며 그 반대로 민간신문에 있어서는 염라대왕과 같은 사람이었다.”(김을한). 최승만, 󰡔나의 회고록󰡕, 인하대학교출판부, 1985; 김을 한, 󰡔사건과 기자󰡕, 신태양사출판국, 1960; 김을한, 日帝南綿北羊産金政策內幕, 󰡔言論秘話50元老記者들의 直筆手記󰡕, 한국신문연구소, 1978.

4) 식민지 조선의 검열관 및 검열기구를 제도사적으로 검토해온 정근식에 따르면 당시 검열체제가 완성된 것은 1926년 4월에 경무국 도서과가 설치되고부터라 고 한다. 그가 조사하여 작성한 「1927년 도서과 직무배치표」는 당시 검열 업무 의 분장을 확인하는데 중요한 자료가 된다(정근식, 「일제하 검열의 실행과 검 열관」, 󰡔식민지 검열체제의 역사적 성격󰡕 자료집, 12쪽 참조; 정근식・최경희,

「도서과의 설치와 일제 식민지 출판경찰의 체계화, 1926~1929」, 󰡔한국문학연 구󰡕 제30집, 2006년 상반기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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큼 높은 수준(?)의 조선어 능력을 갖추고 있음을 의미한다. 그래서 그 는 검열관으로서뿐 아니라 조선어 연구자로서의 사명감을 자주 표현하 는데, 이 글에서는 그러한 발화 내용의 의미를 살펴보도록 하겠다.

마지막으로, 니시무라는 1939년에 히노 아시헤이(火野葦平)의 󰡔보리 와 병대(兵隊)󰡕라는 종군기를 총독부의 기획에 따라 번역하는데, 그 번역 작업이 당시 󰡔문장󰡕에서 연재한 「戰線文學選」의 편집과 어떤 연관 이 있는지를 추론해 보고자 한다.

일반적으로 검열은 검열자와 피검열자가 지배자와 피지배자, ‘경찰하 는 자’와 ‘경찰당하는 자’라는 위계화된 관계 위에 상호 소통하는 것을 전제로 한다. 그러나 그 둘 사이에는 담론 봉쇄 전략과 우회 전략의 길 항, 타협과 공모, 엘리트 검열관의 자부심과 그들에 대해 조롱하는 피 검열자, 지배 집단과 피지배 집단 엘리트 사이의 미묘한 동질성과 공감 등이 있어 단순하게 설명할 수 없는 면이 있다.5)

그러한 사정은 이 글이 검열관 니시무라 신타로에 관한 연구임에도 불구하고, 그가 실제 검열에 관해 어떤 일을 행했는가라는 사실들을 정

도서과장 일본인 1

사무관 일본인 1

직위 서무계 일본어1계 일본어2계 조선어1계 조선어2

통역관 일본인 1 1

일본인 1 1 1 3

조선인 3 3

통역생 일본인 1 1

촉탁 조선인 2 3

고원 일본인 2 1 1 1 5

조선인 1 1 2

일본인 3 2 2 3 10

조선인 2 6 8

5) 당시 식민지 권력의 검열에 대응한 문인들의 대응방식에 대해서는 한만수의 다 음 논거들을 참고할 필요가 있다. 한만수, 「식민시대 문학의 검열 대응방식에 대하여」, 󰡔현대문학이론연구󰡕15, 2001, 357~358쪽; 「1930년대 ‘향토’의 발견 과 검열 우회」, 󰡔한국문학이론과 비평󰡕 30집, 2006, 3; 「식민지시기 문인들의 검열 우회 유형」, 자료집 󰡔일제하 한국과 동아시아에서의 검열에 관한 새로운 접근󰡕, 서울대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국제워크샵, 2006.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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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히 밝혀내지 못하는 이유가 되기도 한다. 검열은 분명 근대적 행정 행위이자 합법적인 법집행이었지만, 실제 집행과정에서는 모호하고 자 의적인 성격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동일한 작품이라고 해도 언제 어디 서 누가 검열했느냐에 따라 전혀 판이한 결과가 나타나기도 했다.6) 검 열도 사람의 일인지라 ‘누가-어떤 조건’에서 검열을 하였는지가 중요할 수밖에 없다. “1년 365일(휴일과 경축일을 제외하고) 일일 평균 31건 정 도”가 되며 “작년(1940-인용자 주) 1년간 검열관 한 사람의 검열 총수가 만 건 있었다”는 당시 ‘국문’(=일본어) 잡지를 검열했던 기시 가시로( 加四郎)의 진술에서 알 수 있듯이, 검열의 원칙이 모든 작품에 균등하게 적용되었다고 보기는 힘들다. 게다가 검열 대상이 지적 생산물인 만큼 그 자체로 다양한 해석의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기 마련이다. 실제 “그 때그때 기분, 환경, 컨디션 등에 좌우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7)

사실, 니시무라가 공식적으로 남긴 글들 중에서는 검열에 관해 직접

6) 이태준의 작품 「오몽녀」는 󰡔조선문학󰡕(1925. 7) 문예응모 입선작으로 뽑혔으 나 정작 발표는 󰡔시대일보󰡕를 통해 이뤄졌다. 같은 작품이더라도 신문/잡지에 대한 서로 다른 검열 기준 때문에 허가, 불허 판정이 엇갈리는 현상이 일어났 던 것이다. 또 최정희는 󰡔문장󰡕에 발표한 「天脈」 등의 작품을 모아 단행본으로 묶어 출판하려고 “朝鮮총독부에 세 번 검렬을 넣었는데 검렬을 넣을적마다 불 리워 드러가선 닥기 우기만 했다”는 것처럼, 발표 형식에 따라 불허 판정을 받 은 예도 있었다.(최정희, 󰡔天脈󰡕, 首善社, 1948, 1쪽) 이렇게 잡지와 신문이라 는 매체상의 차이뿐 아니라, 예술 장르상 해당 작품이 어디에 속하는지에 따라 서도 그 검열 결과가 전혀 다른 양상으로 나타났다. 가령 이기영의 󰡔고향󰡕의 경우 신문 연재시에는 검열을 무사히 통과할 수 있었으나 그것을 대본으로 삼 아 연극 무대에 올려졌을 때는 내용이 불온하다는 이유로 공연이 중지되는 결 과를 당해야 했다. 이런 기록으로 볼 때 검열의 기준은 사실 작품이겠지만, 작 품이 발표된 시간과 공간, 다시 말해 시국과 잡지의 성격에 따라 좌지우지되는 경우도 있었다고 할 수 있다.

7) “검열의 표준은 엄연히 존재하지만, 그 날 그 때의 기분, 환경, 컨디션 등에 좌 우되지 않는다고는 말할 수 없다. 우리들은 이것을 두려워한다. 검열은 일종 의 ‘재판’이다. 문서에 나타난 저자의 사상표현의 재판이다. 문자 그대로 예리 한 눈으로 어간의 숨겨진 사상까지 찾아내지 않으면 안 되는 동시에 그것은 어디까지나 공평무사(公平無私)의 태도로 행하지 않으면 안 된다.”(岸加四郎,

出版檢閱餘滴」, 󰡔國民文學󰡕, 1941. 11, 102~106쪽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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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급한 내용을 찾아볼 수 없었다. 따라서 그가 검열 행위 자체를 구체 적으로 어떻게 생각하는지 정확히 파악할 수 없다. 이 점은 다른 검열 관의 경우도 크게 다르지 않다. 그것은 이제까지의 검열관 연구가 제도 적 측면에서밖에 행해지지 못한 이유이기도 하다. 하지만 제도로서의 검열관에 관한 연구에서 간과할 수 있는 검열의 구체성이나 자의성을 살피기 위해서는 검열관 개인에 관한 연구의 필요성을 제기하지 않을 수 없다. 검열관에 관해 연구하는 데 부딪히는 한계를 전제로 할 때, 이 논문은 결국 검열관 개인에 관한 연구의 가능성을 타진하는 시론적 성격의 글임을 먼저 고백해 둔다.

2. 조선 풍속의 연구

니시무라는 1923년 경찰협회에서 간행한 첫 저서를 출간한다. 󰡔朝鮮 の俤󰡕이라는 제목의 이 저서는 두 개의 「서」가 실려 있다. 그 중 하나 를 쓴 신조 우지로(新庄祐治郞-경북 경무부장을 거쳐 신임 도서과장으로 부임한 인물)는 “朝鮮民性의 구명이 절실함”에 따라 “조선 풍속을 평이하게 해설 한 好著”라고 소개한다.8) 또 다른 「서」를 쓴 구니토모 쇼켄(國友尙謙-당 시 경무과장)은 “반도 풍물이 아직 세상에 드러나지 않은 비결을 밝히고 널리 在鮮警察官을 위해 이와 관련된 한 권의 책”이라며 “조선 사정 연 구자는 물론 경찰관의 실무상 자료로 삼으면 비익(裨益)할 것”이라고 이 책을 추천한다.9) 니시무라가 조선 생활 11년간의 경험과 지식을 바탕 으로 쓴 이 책은 「사교」, 「사회」, 「생활」, 「가정」, 「관혼상제」, 「여자」,

8) 西村真太郎, 「」(新庄祐治郞 書), 󰡔朝鮮󰡕, 警察協會, 1923, 1쪽. 니시무라가 부기에서 밝힌 󰡔朝鮮󰡕의 저술에 도움을 주었다는 김명환은 1875년생으로 한어 법률학교를 다니다가 1905년 경무청 총순으로부터 출발한 구한국 경찰출 신으로서 1920년부터 22년까지 고등경찰과에 복무하였다.

9) 「」(國友尙謙 書), 위의 책, 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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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예」, 「동식물」, 「천문지리」, 「잡록」 등 크게 10개의 장으로 분류하 고, 각 장별로 6개에서 17개 사이의 세부 항목을 두고 ‘조선 사정’을 기 술하고 있다. 그런 면에서는 ‘조선 사정’에 관한 기술물 중 󰡔朝鮮の俤󰡕 보다 앞선 시기의 다른 저서들이 채택한 기술 방법과 그다지 큰 차이는 없다고 할 수 있다.

이 책 역시 근대 일본 민권운동의 결사 중 하나인 민유샤(民友社)의 일원이었던 기쿠치 겐조(菊地謙譲)의 󰡔朝鮮王國󰡕(1896)나 시노부 준페이 (信夫淳平)의 󰡔韓半島󰡕(1901) 등이 출간된 이후로 줄곧 유지된 전통적인

‘조선 사정’에 관한 기술 방법을 따르고 있다. 조선의 지리, 사회, 역사 를 나눠 다루고 있는 저서들의 경우, 특히 조선의 각 계급, 도성과 촌 락, 종교에 관해 기술한 「사회면」의 내용이 니시무라의 저서와 비슷하 다.10) 단, 합병 이전의 저자들의 경우는 짧은 체류 기간의 경험 때문 에 문헌 기록에 의존하는 면이 적지 않았다는 차이를 가지고 있다. 그 리고 조선총독부는 니시무라의 󰡔朝鮮の俤󰡕보다 1년 앞서 󰡔朝鮮事情󰡕이 라는 제목의 책을 출판했는데, 이 책은 총독부의 기획물인 만큼 니시 무라의 저서에 비해 총독부가 조선에서 펼쳐온 시정의 치적을 중심으 로 일본 본국을 향해 제작한 것이라는 상대적인 특징을 지닐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면 󰡔朝鮮の俤󰡕는 어떤 내용의 책이었을까. 이 책에서 니시무 라는 “내지와 조선은 그 풍속 습관이 대체로 비슷하기 때문에 그저 다 른 점만을 써서 참고”11)로 삼는다는 기술상의 전제를 달고 있다. 그러 면서 크게 두 가지의 기술 원칙을 지키고 있다.

그 중 하나는 설령 풍속이 다르다고 해서 타인의 풍속을 우습게 여 기는 것은 결코 옳은 일이 아니며 타인의 풍속을 경멸하고 악평하는 죄

10) 菊地謙譲의 󰡔朝鮮王國󰡕(民友社, 1896)과 信夫淳平의 󰡔韓半島󰡕(東京堂書店, 1901)를 참조,

11) 西村真太郎, 앞의 책, 2쪽.

(9)

는 결코 도덕적으로 가볍지 않은데, 조선의 나쁜 풍속을 연구하여 ‘개 선’하는 것이 바로 “우리의 진정한 임무”이며, 그를 통해 미풍양속을 보 호하고 미화시켜야 한다는 원칙이었다. 이런 원칙에는 ‘우리’=‘내지인’

의 풍속은 단일하다는 전제가 필요하다. 즉, 거기에서 니시무라는 “내 지와 같이” 혹은 “내지에서 ○○하는 것과 같은”이라는 표현을 빈번히 사용하며, 타자의 풍속을 통해 단일한 ‘우리’=‘내지인’의 풍속과의 차이 를 발견하려 한다. 게다가 악속(惡俗)과 양속(良俗)을 분별할 때는 이미

‘우리’=‘내지인’의 풍속을 나뉠 수 없는 단일한 것으로 상정하고 있다.

그럼으로써 분리 불가능한 ‘우리’=‘내지인’의 풍속에 기초해 ‘경찰하는’

시선으로 발견된 타자의 악속은 ‘개선’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또 하나의 원칙은 ‘과거’ 혹은 ‘옛날’의 조선을 거론하면서 인간관계, 성명, 계급 등을 설명하고, 그것이 당시 사회에도 변함없이 아프리오리 적 원리로 작동하는 듯 이해하는 방식이다. 특히, 그런 원칙은 ‘장유유 서’를 비롯해 ‘옛 계급’, ‘고아기아(孤兒棄兒)’, ‘도적’ 등을 다룬 2장 「사회

」나 오리엔탈리즘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6장 「여자」에서 대체로 충실 히 적용되어 있다. 물론 이때도 ‘내지’와의 차이를 드러내는 데 주력하 지만, 오히려 그 비교 방법은 독자에게 ‘내지’의 ‘과거’ 혹은 ‘옛날’과 비 교할 기회를 제공하지 않으면서 ‘조선 사정’을 스테레오타입화하여 설 명한다. 그리고 만약 조선의 악속이 ‘개선’되어 양속화한 것이 있다면,

‘근년(近年)’의 일로서 ‘내지’ 문화의 유입 혹은 영향에 따른 것으로 이해 토록 만든다. 하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효는 백행의 기본’이라는 조선의 옛 미풍이 파괴되는 현실을 지적하면서 “최근은 경박한 서양물이 든 사 상이 침투해 와 ‘부자평등’이라며 돌발적인 주장을 하고” 있다고 운운하 고 그런 현실을 서양의 탓으로 전가한다. 이와 같은 기술의 원칙은 앞 선 시기의 다른 ‘조선 사정’에 관한 기술물들과 그다지 큰 차이는 없다 고 볼 수 있다.

한편, 이 책은 앞서 언급한 기쿠치나 시노부가 ‘조선 사정’에 관해 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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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한 기존 저서들과는 달리 특징적 목적을 한 가지 가지고 있다. 제1장

「사교」 중 첫 항목인 ‘조선의 풍속’에서 “내지인은 조선어라고 생각해서 아무렇지도 않게 사용하는 말에 조선어와 국어의 중간어가 많기 때문 에 주의해서 이 중간어를 남용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12)라고 한 것 처럼, 조선인과의 관계 즉 ‘사교’를 위해 명심해야 할 점들을 여러 곳에 서 빈번하게 제시하고 있다. 가령 프랑스의 선교사가 대원군에게 경어 사용을 잘못해 처형된 일화나 당시 차별어 중 하나인 ‘여보’라는 말을

“내지인은 그것을 무의식적으로 별 뜻 없이 사용하는 것인지 모르지만, 무견식(無見識)의 말이며 신사나 숙녀는 입에 담아서는 안 될” 말이라 며, 굳이 쓴다면 ‘여보쇼’라는 존경어를 써야 한다고 이른다.13) 이 책은 여느 책과 마찬가지로 조선을 스테레오타입화하고 있지만, 본국의 ‘내지 인’을 독자로 상정했다기보다 업무상으로나 일상적으로 조선인을 늘 대 해야 하는 ‘재조(在朝) 일본인’을 독자로 상정하고 있다. 일찍이 이런 목 적으로 기술된 ‘조선 사정’에 관한 서적은 없었다. 앞서 이 책의 「서」를 언급하며 지적했던 것처럼, “在鮮警察官을 위해” 출판된 이 책은 경무국 에 복무하던 니시무라가 ‘경찰하는 시선’으로 조선을 바라보고, 사고・판 단하여 그것을 통해 조선 사회를 ‘개조’해야 한다는 사명감을 가지고 쓴 책인 것이다.14)

12) 西村真太郎, 위의 책, 1쪽.

13) 西村真太郎, 위의 책, 12쪽.

14) 조선에서는 재조선 육군부대의 퇴영자(退營者)로부터 경찰관을 지원하는 자 도 적지 않았다. 조선에서는 2개 사단(제19사단, 제20사단)이 설치되어 있었 다. 그 소속연대로부터 퇴영하는 내지 출신의 청년은 매년 상당수에 달했다.

군인으로서 조선에서 2년 이상 생활하는 사이에 기후나 풍토 등을 통해서 애 착을 느끼고 가독상속(家督相續) 등 특별한 연이 없는 자는 그대로 조선 거주 를 희망하고 경찰관을 지망했다. 軍務에는 조선어가 무용했기 때문에 조선에 서의 응모자도 일본 내지에서의 지원자와 마찬가지로 강습소에서 조선어 교 육을 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교습과목 안에서도 조선사정과 함께 조선어는 ˙ ˙ ˙ ˙ ˙ ˙ ˙ ˙ ˙ ˙ ˙ ˙ ˙ ˙ ˙ ˙ ˙ ˙ ˙ 중요시되어 있었다˙ ˙ ˙ ˙ ˙ ˙ ˙ ˙ (坪井幸夫, 󰡔ある朝鮮総督府警察官僚回想󰡕, 草思社, 2005, 85쪽-강조 인용자).

(11)

앞서 인용문에서 히로세 시로가 칭송한 것처럼, 니시무라는 조선에 서 언문신문의 발행이 허가되는 1921년 3월에 검열관으로 임관하여

“고생하며 키워온 언문신문이 신동아건설의 빛나는 국책에 따라 폐간 을 결정할 때”, 즉 1940년까지 활동했다. 그 동안 그가 행한 검열 행위 는 바로 ‘재조 일본인’의 위치에서 식민지 조선에 대해 ‘경찰하는 시선’

과 ‘개조’의 사명감에 충만한 것이었다. 그러한 사명감에는 ‘내선어 동 조론(同祖論)’이라는 허구에 두 민족의 모든 관계를 상상적으로 일체화 하려는 본질주의적인 태도는 물론 조선 사회에 대한 숙지자라는 위치 에 스스로를 두려는 태도가 중요한 바탕을 이루고 있었다.

3. 조선어의 검열과 연구

니시무라는 1910년에 도쿄외국어학교 한어과를 졸업했는데, 거기서 조선어와 일본어의 ‘동원론(同源論)’을 주장해 일본 최초로 조선어 연구 자로서 박사학위를 취득한 가네자와 소자부로(金沢庄三郎)에게 수학했 다.15) 1913년에 조선으로 건너와 검열관으로 자질을 보인 것은 1915 년 사법부 법무과의 통역생으로 근무하면서부터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15) 그 논문의 제목은 󰡔日韓両国語同系論󰡕(1910)이었다. 니시무라는 “은사 가네자 와(金沢) 문학박사 환갑축하연이 도쿄 고쿠가쿠인(国学院)대학에서 개최되는 11월 5일에 원고를 탈고하여 그것을 󰡔조선󰡕의 여백에 게재하려고 하였다. 선 생의 논의를 벗어나지 못했으나, 참고서를 가지고 있지 않은 까닭이다. 단지 소극적으로 󰡔언해󰡕와 󰡔대일본국어사전󰡕을 인용하여 감히 여러 선배의 고설을 폄하한 점도 있지만, 오로지 관대한 노여움을 빈다. 만약 반발질정(反駁叱正) 의 논의가 있다면 기꺼이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 된다.”고 쓰고 있다(西村真太 , 「無限關係國語朝鮮語」, 󰡔朝鮮󰡕, 1933. 1. 174쪽). 또한 다른 글 에서는 “문학박사 가네자와(金沢) 선생의 󰡔일한양국어동계론󰡕 한 권은 이 글 을 편집하는데 유일한 근본 참고서였다. 권두에 이를 밝혀 선생의 은혜에 감 사한다”고 밝히고 있을 정도이다(西村真太郎, 「國語朝鮮語交渉」, 󰡔朝鮮󰡕, 1934. 7, 78쪽).

(12)

당시 그는 함흥지방법원 온성출장소에서 ‘서기 및 통역생’으로 근무한 바 있는데, 거기에서 그가 주로 담당한 업무는 재판소 내의 통역이지 않았을까 싶다. 그 후 1921년부터 경무국 고등경찰과로 자리를 옮겨 통역과 함께 조선어 출판물에 대한 검열 업무를 맡게 된다. 조선 생활 12년 동안 10년간의 통역 업무의 경험을 바탕으로 통역과 관련해 이런 자신감 넘치는 의견을 피력한다.

통역은 직역에 한한다. 의역이 가능한 사람은 그것으로 좋은 일이지 만 오류는 거기에 있다. 직역이라고 하더라도 ‘말을 타다’(직역하면 ‘馬 を乗って’이지만 정확한 일본어는 ‘馬に乗って’가 되는데 흔히 번역할 때 조사 を와 に를 혼동한다-인용자)와 같은 것이 아니다. 한 마디도 빼놓지 않고 그 위에 완전하게 직역하고 통변하고 싶다. 그것이 소생의 숙원이다.16)

이 글은 1925년에 잡지 󰡔조선어󰡕에서 기획한 “통역은 의역일까 직역 일까”라는 설문에 니시무라가 답한 것이다. 통역이란 A와 B라는 서로 소통하지 않는 두 언어를 옮겨 의미를 전하는 것을 뜻한다. A와 B 사 이에서 의미가 소통되기 위해서는 A와 B 각각의 언어 안에 내포된 문 화체계의 차이를 극복해야 한다. 통역을 매개로 존재하는 각각의 언어 를 둘러싸고 있는 문화체계는 민족 혹은 국가라는 컨텍스트의 차이에 따라 필연적이라 할 만큼 내셔널리티의 차이를 지니고 있기 마련이다.

그런 의미에서 통역은 그 내셔널한 속성을 초월하여 상호간에 의미가 소통할 수 있도록, 어찌 보면 트랜스내셔널한 작업을 최선의 과제로 삼 는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니시무라가 “한 마디도 빼놓지 않고 그 위 에 완전하게 직역하고 통변하고 싶다”는 자신감은 조선어와 일본어라

16) 西村真太郎, 「通譯意譯直譯か-朝鮮語界一問題-」 󰡔朝鮮語󰡕, 1925. 10, 47쪽.

(13)

는 두 언어를 둘러싸고 있는 컨텍스트에 대한 이해에 대한 자신감이라 고 할 수 있겠다. 앞장에서 논한 바처럼, 그때까지의 ‘조선 사정’에 관 한 출판물들과는 다른 목적에서 저술된 󰡔朝鮮の俤󰡕를 통해 ‘조선 사정’

에 관한 전달자로서의 면모가 통역자의 모습에도 이어지고 있다. 하지 만 통・번역은 서로 다른 언어・양식 사이에 존재하는 차이나 다양성 을 억압하고 동화와 균질화를 매개하는 본질적 방법일 수밖에 없다. 그 런 점에서 그가 말하는 ‘완전’한 통역의 가능성은 지극히 폭력적인 상상 의 소산이라고 할 수 있다.

󰡔朝鮮の俤󰡕에서도 「朝鮮文字」라는 항목을 통해 조선어에 대해 언급 하고 있다. “조선어는 어휘 수가 대단히 적어 대개의 의사는 한자로 발 표하지 않으면 안 된다. 구식 한자로는 근대과학을 발표할 수 없다. 오 늘날에는 일본어를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고 해도 무리가 아닐 만큼”17) 이라고 단정하며, 덧붙여 최근의 변화를 조금 언급하고 있다. 물론 이 런 견해는 당시 상황에서 현실 진단으로서 크게 잘못된 단정은 아닐 것 이다. 하지만 니시무라가 그런 사정들을 자신이 조선어를 연구하는 기 본 인식 내지 목적과 깊이 연관시켜 간다는 데서 그 단정은 중요한 의 미를 갖게 된다. 그리고 “언문 연구 등은 조금도 착수되지 않은 채 오 늘에 이르렀”다며 당시 조선어 연구의 현황에 대해 진단하고, 최근 새 로운 움직임이 있지만 “근본 문법을 정하지 않고 하는 일이기 때문에 너무도 근거가 박약”하다고 덧붙인다.18)

그와 같이 조선어 연구 현황이 ‘미간지’와 같기 때문에 조선어 연구

17) 西村真太郎, 앞의 책, 129쪽.

18) 그 내용을 조금 더 기술해 둔다. “최근 갑자기 옛 가나(仮名) 표기법을 연구하 고 원래대로 돌아가는 것이 옳다고 한다든지, 이미 옛 가나 표기법의 활자 등 을 만들고 있는 곳도 있으며, 또 언문이 종횡 10문자로 쓰지 않으면 안 되는 불편이 있기 때문에 그것을 로마자와 같이 횡으로 표기하는 등 다양하게 궁구 하고 있지만 근본 문법을 정하지 않고 하는 일이기 때문에 너무도 근거가 박 약합니다.”(위의 책, 같은 쪽)

(14)

가 필요하다고 강조하지만, 실제 니시무라가 조선어 연구와 관련해 본 격적으로 글을 발표하기 시작한 것은 1930년대에 들어서부터이다. 그 출발점이라고 할 수 있는 글은 「국어 미간지의 개척(國語未墾地の開拓)

」(1931)이다. 그 전까지 조선어와 관련된 언급들은 주로 ‘재조 일본인’

이라는 발화 위치에서 ‘재조 일본인’을 대상으로 이뤄진 것이며, 그 내 용은 조선어가 일상생활의 ‘편리’와, 또 일상에서 조선인과 대면할 때

‘올바른’ 태도를 위해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지방에 거주하는 동학제형(同學諸兄)은 대단히 난폭한 조선어를 사 용하고 있다.

… (중략) …

조선어를 안다면, 조선인에게 친선의 감정을 가질 수 있기 때문에 그 제일선의 무기가 난폭하고 세밀한 세공이 불가능한 조각도라고 하니 더욱 연마해 주길 바랍니다. 지방 사람들이 느끼는 가장 큰 고통은 방 언이다.19)

하지만 그는 「국어 미간지의 개척」부터는 ‘국어’=일본어의 기원을 규명하는데 조선어 연구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역설하기 시작한다.

국어와 조선어는 동원동근(同源同根)임에도 불구하고 국어의 설명에 조선어가 포함되지 않은 것은 심히 유감이다. 머지않은 장래 국어의 설 명에는 조선어를 통해서가 아니면 불가능하며, 사람들이 다투어 조선 어를 연구함으로써 국어의 미간지를 개척하게 될 것이라고 믿고 있다. 역으로 조선어의 미간지 개척도 국어를 온오(蘊奧)하는 것을 통해 많 은 부분의 신개지가 발견될 것이다. 더구나 중간에 유구(오키나와)어

19) 西村真太郎, 「學修瑣言」, 󰡔朝鮮語󰡕, 1925. 6, 61쪽.

(15)

가 존재하고 있다. 외계(外界)에서는 만주어나 몽고어가 있고, 조선어 의 사어(死語), 폐어(廢語)의 고어에도 소급하지 않으면 안 되지만, 거 기까지 손을 대는 것은 용이하지 않다.20)

위의 글은 니시무라의 조선어 연구에 대한 기본 인식을 엿볼 수 있 는 글일 뿐만 아니라, 그 논조 면에서 당시 총독부가 표방한 ‘내선일체’

와 밀접하게 관계되어 있음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는 글이다. 하지만 필자는 그런 측면보다 조선어를 언급하는 니시무라의 입장, 즉 발화의 위치가 󰡔朝鮮の俤󰡕 때와는 상이해진 점에 주로 주목하고자 한다. 다시 말해, ‘재조 일본인’이라는 아이덴티티, 그 중에서도 조선어 문헌의 검열 을 업(業)으로 삼고 있는 식민지 관료로서 자신의 위치를 확정하면서 새로운 입장을 견지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앞서 인용한 「학수쇄언( 修瑣言)」에서 그가 교설의 대상으로 삼고 있던 ‘재조 일본인’상은 일단 조 선어를 구사하는 것을 전제하고 있지만, 「국어 미간지의 개척」에서 조 선어는 이미 일상어라는 전제를 상실하고 있다. 그리고 그는 “실로 국 어와 조선어는 이렇게 광대무한한 관계가 있다는 것은 나로서도 놀라 지 않을 수 없으며, 나는 국어를 사랑하고 조선어를 존경하여, 점차 그 연구에 정진할 것”21)이라는 맹세와 함께 조선어 연구에 매진한다. 실 제 그는 “조선어는 집무상 필요하지만 (몰라도) 그다지 지장은 없다 해 서 공부하는 사람이 감소하고 있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라면서도 조선어 연구가 등한시되는 현실을 유감스러워 한다.22) 그 뒤를 이어

20) 西村真太郎, 「國語未墾地開拓」, 󰡔朝鮮󰡕, 1931. 4, 119쪽.

21) 西村真太郎, 「無限關係國語朝鮮語」, 󰡔朝鮮󰡕, 1933. 1, 174쪽.

22) 西村真太郎, 「朝鮮語硏究」, 󰡔警務彙報󰡕, 1936. 12, 32쪽. 니시무라는 ‘재조 일 본인’으로서 입장을 “신대(神代)부터 이어져온 내선일체에 매진하는 것이야말 로 조선에서 생˙ ˙ ˙ ˙ ˙ ()을 부여받은 우리 2천 3백만 동포˙ ˙ ˙ ˙ ˙ ˙ ˙ ˙ ˙ ˙ ˙ ˙ ˙ ˙ 의 지대지고(至大至高)의 책무가 아닐까 믿는다”(강조 인용자)라고 표현한다(西村真太郎, 「言語學上から 曾尸茂梨」, 󰡔警務彙報󰡕, 1938. 4, 113쪽).

(16)

“조선어를 알고 있으면 능률이 오르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느니, 또

“평생 조선어를 연구하는 사람은 조선 사정을 연구하는 것이며, 상주좌 와(常住坐臥) 조선을 접촉하는 것이 된다”는 항변은 오히려 조선어를 업 의 도구로 사용하는 자신의 위치에 대한 불안감의 호소로까지 들린 다.23) 그로 인해 니시무라는 자신이 연구하는 “두 언어의 친밀함 정도 가 단순한 동계동원(同系同源)이거나 모어가 같은 자매어 정도에 그치지 않고, 언어 내면의 철학적 정신까지도” ‘완전’히 동일한 국어와 조선어 의 관계 자체를 “정치의 최고지엄의 철학인 내선일체라는 영구불변의 금언”임을 밝히는 대상의 차원으로 상승시킨다.24) 또한 이로써 검열관 니시무라에게 통제의 대상이자 도구였던 조선어(연구)는 그러한 과거의 정의를 넘어서는 이념이자 실천의 대표로서 정위(定位)하게 된 것이 다.25) 그것을 가리켜 히로세 시로는 “전공인 어학을 통해서 성취한 내 선일체운동”(廣瀬四郎, 앞의 글)을 공로의 하나로 내세웠던 것이다. 하지 23) 니시무라는 조선어 연구의 필요성을 강조하며 이렇게까지 제안하고 있다. “먼 저 각 학교에서도 국어를 전문으로 교육하고 연구할 때 그 필수 병행과목으로 무엇보다도 조선어를 선택하도록 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아직 그 영단을 내린 것이 적은 것은 국어연찬의 진전을 막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중략) 조선어 연구자는 그 수가 매년 줄고 있고, (중략) 국어 수습자(修習者)의 수도 전조선 적으로 매년 증가하고 있는 성운(盛運)에도 불구하고 조선어와 국어의 동원 (同源) 연구가 의외로 흥()하지 않은 것은 학계의 불행이라고 할 수 있다”

(西村真太郎, 「國語朝鮮語交渉」, 󰡔朝鮮󰡕, 1934. 7, 75~76쪽).

24) 西村真太郎, 「天地日月信仰言語究明內鮮一體立證す」, 󰡔朝鮮󰡕 1938.

7. 47쪽.

25) ‘내선일체’에 입각한 ‘내선어’ 동원론을 줄곧 주장해온 니시무라의 조선어 연구 가 총독부의 구체적인 시책을 선전하는 데 이용되는 중요한 계기는 ‘창씨개명’

이 실시된 후부터였다. 특히 그의 「創氏雜攷」는 그 중요한 예가 될 수 있다.

“이와 같이 나()에 관한 모든 언어가 국어나 조선어나 서로 같은 것은 두 민 족이 태고에 동일 지역내에서 형제로 생존해 있었던 유력한 증거가 될 것이 다. 기원 2천 6백년을 기념한 영광스런 창씨개명도 그 옛날로 돌아간다면 동 일한 언어였던 것이기 때문에 가야마 미쓰로(香山光郎)라고 칭했다고 해서 그 것이 조선음이 아니라고 할 수 없다는 중요한 사실을 알게 되면, 거기에 아침 해가 비추고 있는 듯한 고양된 감정이 일지 않는가.”(西村真太郎,, 「創氏雜攷」,

󰡔警務彙報󰡕 1940. 5, 29쪽)

(17)

만 니시무라의 ‘내선일체’ 운동이 1930년대부터 재조일본인 사이에서 자신들의 아이덴티티를 모색하는 과정에서 보여준 실제적 가능성으로 서 ‘우리 조선’에의 일체화=‘토지에의 동일화’와도 깊이 연관된 것이라 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26) 기존 식민지 연구물에서는 흔히

‘내선일체’가 제국의 내셔널리티를 대표하는 슬로건으로 이해되어왔다.

하지만 조선어 연구자로서 니시무라가 느낀 존재적 ‘불안’이 언어적 동 일성을 규명하는 것이 ‘피의 동일성’이라는 허구로까지 확장시켜가듯 이, 오히려 ‘내선일체’가 실현되고 강요되는 과정을 보면 그것은 ‘외 지’=조선에서 삶의 뿌리를 내린 일본인에게는 지극히 존재론적인 문제 제기라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다시 말해, 식민지 본국에 서 발화된 ‘내선일체’와 ‘외지’에서의 제한적인 성격의 ‘내선일체’ 사이의 차이와 균열에 관한 본격적인 논의가 향후 필요할 것이다.27)

4. 󰡔文章󰡕의 종군기와 니시무라

끝으로 나는 이 西村氏譯 「보리와 兵丁」을 사흘 밤이나 걸려서 原文 과 對照해 가면서 읽으며 西村氏에 比해 朝鮮人인 내 朝鮮말이 얼마나 貧困한가를 섭섭하게도 깨다렀다는 것을 付記해둔다.28)

󰡔文章󰡕의 편집진 중 한 사람인 정인택은 1939년 9월호의 「신간평」에 서 “이 「보리와 兵丁」은 文學으로서의 價値라던가 地位는 如何間에 그

26) 박광현, 「‘재조선(在朝鮮)’ 일본인 지식 사회 연구」, 󰡔일본학연구󰡕제19집, 2006, 10. 참조.

27) 이 점에 관해서는 주26)의 논문에서 언급한 바 있으나, 본격적인 논의였다고 는 할 수 없다. 그런 부족한 점을 보완하여 향후 본격적으로 논의할 필요성을 느낀다.

28) 정인택, 「보리와 兵丁」, 󰡔文章󰡕, 1939, 10, 187~188쪽.

(18)

率直하고 崇高한 點에 있어서 事實上 戰爭下의 日本國民의 書인지 이미 오래”29)라고 지적하고, 마지막에 「보리와 兵丁」의 조선어역에 대한 의 의와 그 출판 의도를 앞에 인용한 총독부 문서과장 노부하라 기요시( 原聖)의 「序」로 대신하고 있다.30)

니시무라가 번역한 「보리와 兵丁」의 원작은 1938년 9월 改造社에서 출간된 󰡔麦と兵隊󰡕이며, 그 소설의 원작자 히노 아시헤이(火野葦平)는 중일전쟁에 종군하여 병사들의 생생한 인간성을 묘사한 이 종군기로 일본에서 인기 작가의 반열에 올랐고, 그 후에도 태평양 전쟁에도 종군 하여 일련의 병대(兵隊) 시리즈물을 발표하여 ‘兵隊작가’라는 칭호를 받 으며 인기를 누렸던 작가였다.31)

이 장에서는 󰡔문장󰡕이 창간 후 2호부터 연재하는 「전선문학선」과 관 련해 󰡔麦と兵隊󰡕의 번역자 니시무라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겠다. 󰡔문장󰡕

의 「전선문학선」 안에는 대개 일본 작가의 전쟁문학=종군기 중 그 일

29) 정인택, 위의 글, 187쪽.

30) 필자가 입수한 번역서 「보리와 兵丁」 중에는 이 글에서 인용된 「서」가 붙어 있지 않은 까닭에 이 「서」의 전체를 확인할 수 없었다. 「서」의 필자인 信原聖 는 당시 총독부 문서과장이었다. 1900년생으로 1910년에 부모를 따라 조선으 로 건너온 岡山현 출신으로서, 도쿄제대 독문과에서 수학하는 중에 고등문관 시험에 합격하여 경기도 보안과에 발령받은 후 함남도를 비롯해 경북도, 전북 도 등 지방행정직을 두루 거치며 “출세가도를 일직선으로 매진한” 인물이었 다. 그는 총독부에서 문서과장 등의 요직을 거쳐 1943년에는 평남도지사에까 지 오른다. 앞서 2장에서 언급한 新庄祐治郞信原聖의 이력에 관해서는 다 소 착오가 있던 것을 정진석 교수님이 수정해주었다. 특히 총독부 도서과장의 이력과 정보에 대해서는 정진석, 󰡔언론조선총독부󰡕(커뮤니케이션북스, 2005) 를 참조. 또한 「보리와 兵丁」의 번역 과정 중에 당시 문서과장 信原聖의 역할 에 대해서는 西村真太郎가 「諺文譯まで=飜譯着手決定する前後」(󰡔京城日報󰡕, 1939. 4. 11~19)에서 언급하고 있다.

31) 하지만 전후에는 전쟁 중의 명성과는 달리 ‘전범 작가’로서 전쟁책임에 대해 추궁을 받아 1948년부터 1950년까지 공직에서 추방되기까지 하였다. 추방 해 제 후 다시 작품 활동을 통해 문학적 역량을 발휘하며 다시금 유행 작가의 반 열에 올랐다. 하지만 자택의 서재에서 ‘전범작가’로서의 과거의 짐을 벗지 못 하고 살다가 1960년 1월 24일 수면제를 먹고 자살하였다.

(19)

부만을 발췌해 번역한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 소설 특집을 꾸렸을 때 (6, 7호)를 제외하고 2호(1939. 3)부터 17호(1940. 6)까지 「전선문학선」

이 연재된다.32) 하지만 그것이 단일한 편집으로서는 가장 오래 연재된 것임에도 불구하고 편집후기 등 그 어디에서도 그에 대한 언급이 없어 아쉽게도 정확히 그 편집 의도를 짐작할 수 없다. 당시 일본어를 발췌해 번역한 출판물의 대개가 그러했던 것처럼 이 역시 역자가 누구인지도 밝히고 있지 않다. 다시 말해, ‘당시 왜 󰡔문장󰡕은 「전선문학선」을 기획 했는지’, 또 당대 최고의 문예잡지를 표방하던 󰡔문장󰡕이 왜 굳이 종군기 의 일부를 발췌하는 수준의 번역문들을 게재했는지 짐작할 수 없다. 그 런 점에서 그 기획이 편집자의 자발적 의도라기보다 외부의 개입과 영 향력에 의해 이뤄진 것이 아닌가 하는 가정을 일단 해볼 수 있겠다.

<문장>은 원고가 다 모이면 반드시 총독부 도서과의 검열을 맡았다.

… (중략) …

총독부에서는 비위에 거슬리는 것을 깎아 없애는 것뿐이 아니라 깎 인 줄 수를 따로 기록하여 ‘성적’을 매기고 성적이 불량한 것은 폐간시 킨다는 경고를 퍼뜨렸다.

<문장>은 매번 붉은 줄에 관인(官印)이 찍힌 ‘삭제’가 나오고 ‘전문 삭 제’가 수두룩하여 더 이상 내기가 어려워졌다.33)

당시는 󰡔문장󰡕뿐만 아니라 조선에서 발행되는 모든 신문, 잡지는 총

32) 창간호의 경우 「전선문학선」은 편집되지 않았지만 그 대신 金眞火의 「支那事 變 從軍畵展覽會를 보고」가 실려 있다. 그리고 18호(1940. 7)부터도 「전선문 학선」은 잡지편집에서 빠졌지만 그 대신 19호(1940. 8)에는 大佛次郎의 종군 기 「宜昌從軍記」와 「襄東作戰從軍記」를 실고 있다. 그러나 그 내용은 「전선문 학선」에서 소개한 것보다 길 뿐만 아니라 「전선문학선」 편집의 연장으로 생 각해도 무방하리라 판단된다.

33) 강진호 편, 「문장・인문평론시대」, 조풍연, 󰡔한국문단 이면사󰡕, 1999, 243~

244쪽.

(20)

독부의 검열을 받아야 했다. 따라서 조풍연의 진술은 검열에 대한 아주 일반적인 회고라고 할 수 있다. 󰡔문장󰡕의 성격을 보아 이 잡지가 검열 때문에 입은 ‘상처’는 상대적으로 그리 크지 않은 것으로 생각되어 왔 다. 조풍연의 회고처럼, 물론 검열을 당한 측의 입장에서는 검열의 정 도와 상관없이 검열 그 자체가 출판의 가부를 결정할 정도로 외부의 커 다란 압력으로 여겨졌던 것도 사실일 것이다.34)

그렇다면, 이제부터는 검열과 「전선문학선」의 관계, 그리고 그 관계 속에서 검열관이자 󰡔보리와 兵丁󰡕의 번역자인 니시무라의 관련에 대해 살펴보자. 우선, 󰡔보리와 兵丁󰡕은 번역자가 당대 검열관일 뿐 아니라 총독부에서 발간한 기획 출판물이었다.35) 앞서 언급했듯 󰡔麦と兵隊󰡕가

“事實上 戰爭下의 日本國民의 書”이자 “日本出版界以來 初有의 成績으로

34) “금지사항이 많음에 따라서 발행책임자 측에서 부지불식간에 그 금지 사항들 을 게재해서 처분되는 것과 같은 재난을 제거하기 위해서 사변 이래 특히 편 의 수단으로서 원고검열을 실시했다. 이 원고검열이 실시되면, 검열자의 편에 서도 발행되어야 할 출판물에 대해서 책임이 있기 때문에 단속이 엄중해진 다.” (警務局T, 「檢閱雜感」, 󰡔警務彙報󰡕393호, 1939. 1)

35) 니시무라 신타로는 󰡔보리와 병정󰡕이 출판되기 전에 이 책의 번역 경위와 번역 을 하는데 드는 고충을 회고한 문장을 󰡔京城日報󰡕에 7차례에 걸쳐 연재하였 다.(西村真太郎, 「諺文譯まで=飜譯着手決定する前後」, 󰡔京城日報󰡕, 1939. 4.

11~19) 그는 연재의 첫머리에 어느 날 후루카와(古川) 도서과장이 자신을 불 러 경무국장의 허락도 받았으니 󰡔兵隊󰡕를 조선어로 번역하라고 지시했다 고 적고 있다.(4. 11일자) 또한 번역을 시작한 니시무라는 자신의 조선어 선 생인 연준(延浚)과 스승 가나자와 소자부로(金沢荘三郎) 등에게 이 책의 번역 에 착수했음을 보고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번역 완료 시점에는 당시 도서과 소속의 조선인 통역관(검열관)이었던 김영세, 김봉규, 장덕영, 이상억, 김용 완 등에게 읽히고 있다.(4. 18일자) 이 논문의 초고가 완성된 단계에 서울대 정근식 교수님이 이 자료를 필자에게 제공해 주었다. 이 자료를 통해 이 번역 에 임하는 니시무라 개인의 자세나 벅찬 감정 등을 알 수 있었을 뿐만 아니 라, 니시무라 개인의 번역이기도 하지만 총독부 도서과 전체가 가동되어 기획 된 것임을 알 수 있었다. 후루카와 도서과장은 니시무라에게 상하이(上海) 출 장을 주선하는 등 물심양면으로 지원한다. 니시무라는 그 출장에서 이 소설의 중요한 배경 중 하나인 중국의 보리밭을 직접 눈으로 확인하는 호기로 생각한 다. 이런 정보가 담긴 이 자료를 제공해 주신 정근식 교수님께 감사드린다.

(21)

實로 洛陽의 紙價를 暴騰케 했다”36)는 그 소설에 대한 정보는 식민지 조선에서도 이미 널리 유포되어 있었다.

󰡔麦と兵隊󰡕의 번역이 총독부로부터 결정되었을 당시를 동아일보는 이렇게 전한다.

전쟁문학의 최고봉을 점령하고 잇는 화야위평(火野葦平) 씨의 보리 와 병대(󰡔と兵隊󰡕)를 조선 총독부에서 순조선말로 번역하야 전조선˙ ˙ ˙ 에 보급˙ ˙ ˙ 하기로 되엇다.

종래 총독부에서는 시국인식철저를 위하야 각종의 인쇄물을 전조선 에 발표하야 시국에 대처할 지도를 주고 잇엇는데 … (중략) … 아직까 지 전장에서 황군용사의 전면적 생활 혹은 용감한 활동을 묘사한 장편 독물은 거의 없는 상태로서 총독부에서는 이때 보리와 병대에 관한 조 선어 번역권과 출판권의 무상양여를 받아 전조선에 무료로 반포키로 되어 목하 경무국(警務局)에서는 동경 주재의 좌좌목(佐々木) 파견원 을 통하야 관게 방면과 교섭중˙ ˙ ˙ 인데 번역에는 경무국 도서과 통역관(圖 書課 通譯官) 서촌진태랑(西村真太郎) 씨가 맡기로 되엇는데, 동씨는 필생의 힘을 다하야 원작자의 심경을 일으켜 총후반도민중을 향하야 황군용사의 자태를 소개할 모양으로 총독부가 솔선하야 문학적 저작의 번역에 당하기에는 첫 시험으로 그 성과는 자못 기대되고 잇다.37)

(강조-인용자)

이 기사가 쓰일 당시만 해도 󰡔麦と兵隊󰡕에 대한 번역 계획은 어디까 지나 아직 ‘교섭 중’이었다. 조선에서 전쟁문학의 ‘첫 시험’으로서 󰡔麦と 兵隊󰡕의 번역 기획은 이 ‘국민의 서()’를 통해 조선인에게 ‘총후’ 체제에 직면해 ‘시국인식철저’를 기하도록 한 목적에 따른 것이었다. 그것은 번

36) 백철, 「戰場文學一考」, 󰡔인문평론󰡕, 1939. 10, 48쪽.

37) 「동아일보」, 1938. 12. 25, 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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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의 차원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조선어 번역권과 출판권의 무상양 여는 물론 출판 유통 면에서도 전()조선에 무료로 배포할 예정이었을 정도로 ‘애국’적인 차원의 선전 기획이었다. 다시 말해 조선인에게 중일 전쟁에 대한 공감과 국민으로서의 동일성을 부여하여 제국 신민으로서

‘애국심’에 대한 공명을 이끌어내려는데 목적이 있었다고 할 수 있다.

1940년 8월, 니시무라가 퇴역할 당시 「동아일보」(1940. 8. 7)의 기사 는 그의 업적을 밝히며 우선 “수십만 명의 애독자”를 가진 󰡔보리와 兵丁

󰡕의 번역을 거론하고 있다.38) 그리고 그 다음에 조선어 연구의 업적을 찬했다. 실제 니시무라 번역의 󰡔보리와 兵丁󰡕 출판은 조선 문학계에서

‘전쟁과 문학’에 관해 활발하게 논의가 진행되는 계기를 마련했을 뿐만 아니라, “조선 최초의 전장문학”이라는 임학수의 󰡔戰線詩集󰡕(인문사, 1939. 9)과 박영희의 󰡔戰線紀行󰡕(박문관, 1939. 10)의 출판으로 이어지게 된다.

이헌구는 󰡔문장󰡕 1939년 10월호에 「전쟁과 문학」이라는 글을 통해 니시무라의 번역소설 󰡔보리와 兵丁󰡕을 언급하는데, 그것은 원작 󰡔麥と 兵隊󰡕가 발표된 지 꼭 1년만이며 니시무라의 번역이 총독부에서 출판 된 지 한 달 후의 일이었다. 이헌구는 “人類史上에 第一 큰 史實을 文學 위에 表現하려면 作家가 充分히 戰爭 그 全貌를 觀照할 수 있는 더 큰 藝術的 能力과 敎養을 가지지 아니하면 안 될 것”(143면)이라며 󰡔보리와 兵丁󰡕을 그 “절실한 예”로 들고 있다. 또한 “이번 事變을 取材한 「보리와

38) 󰡔보리와 兵丁󰡕은 초판 “만이천부 발행 즉시 매진”되었고(「매일신보」, 1939.

7. 15), 이후 약 6개월 동안 34판을 증판하면서(󰡔보리와 兵丁󰡕, 조선총독부, 1939, 251쪽) 조선 출판계의 유례없는 기록을 세웠다. 조선일보의 홍종인과 동아일보의 홍효민의 기사 등을 인용하여 주로 조선 언론계의 반응을 소개하 며 주35)에서 인용한 자료와 함께 번역과 출판 경위를 그가 직접 소개한 글

󰡔モダン日本󰡕(임시대증간, 조선판, 1939)에 「<보리와 병정>을 조선어로 번역 하고」라는 제목으로 실려 있다. 단, 이 글에서는 최근 번역된 󰡔일본잡지 모 던 일본과 조선 1939󰡕(홍선영 옮김, 어문학사, 2007. 213~221쪽)로 참고했 음을 일러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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兵丁」은 그러면 훌륭한 文學이 아니냐 하는 그런 單純한 常識的 疑惑도 가질 수 있으나, 이 作品은 比較的 忠實하고 生生하게 한 作家가 어느 時日을 두고 戰場에서 體驗한 事實과 人間的 感情을 如實히 描破한 點은 있다”(같은 면)고 평가한다. 그러면서도 “偉大한 하나의 記錄인 同時에 文學으로 完成되려면 作家로도 偉大해야” 하며, “그 관찰과 표현에 있어 서 상당한 時日을 요하지 않을 수 없다”고 진정한 평가를 유보한다. 그 점에서 같은 시기 󰡔인문평론󰡕(1939. 10)에 「戰場文學一考」라는 글을 발 표한 백철의 경우는 더 냉철하다. “󰡔보리와 兵隊󰡕가 斯代의 傑作으로 國 內國外에 推載되는 것은 推載하는 우리들 自身이 興奮된 데서 온 誇張이 많다. … (중략) … 󰡔보리와 兵隊󰡕는 日本出版界以來 初有의 成績으로 實 로 洛陽의 紙價를 暴騰케 했다고 하는 것이나 讀者들이 이 作品을 耽讀 하는 기분 위에는 讀者 自身의 知友 또는 親族을 直接 戰場에 보낸 興奮 된 感情이 多分히 氣分을 助長하는 것이 있다.”39)고 분석한다. 즉, 일본 인이 읽는 󰡔麥と兵隊󰡕와 조선인에게 읽히는 󰡔보리와 兵丁󰡕의 컨텍스트 적 차이를 냉철하게 지적하고 있다. 아무튼 그 평가의 내용이 어찌 되 었든, 󰡔보리와 兵丁󰡕이 ‘전쟁문학’에 대한 논의가 활발하게 되는 계기를 마련해준 것만은 분명하다.

그렇다면 󰡔문장󰡕은 니시무라의 번역을 통해 ‘전쟁문학’의 논의가 진 행되기에 앞서 「전선문학선」을 어떤 목적과 의도로 연재했던 것일까.

과연 󰡔문장󰡕에서 「전선문학선」은 편집자의 의도와는 전혀 무관하게 탄 생한 ‘사생아’일까. 그 점에 대해서는 앞서 지적했듯 충분한 근거를 찾 지 못해 정확히 대답하기 어렵긴 하지만 가설으로나마 질문에 답을 구 해보고자 한다.

󰡔문장󰡕에서 처음 ‘전선문학’을 소개한 것은 2호(1939. 3)부터이다. 2 호에 수록된 작품은 히노 아시헤이의 병대(兵隊) 시리즈 중 「흙과 兵

39) 백철, 앞의 글, 4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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隊」, 「담배와 兵隊」와 더불어 하야시 후미코(林芙美子)의 「戰線」이었 다. 그리고 이후 「전선문학선」 안에는 작가 15명의 작품을 소개하는 중에 공교롭게도 히노 아시헤이의 작품이 여덟 차례(다섯 작품)에 걸 쳐 가장 많이 소개되었다(표 참조).

여기에서 다시 총독부 경무국 및 도서과가 물심양면에서 지원해 이 뤄질 󰡔보리와 兵丁󰡕의 번역을 ‘교섭 중’일 당시로 논의를 돌려 보자. 원 작 󰡔麦と兵隊󰡕가 출판된 것은 1938년 9월, 그리고 1938년 12월 말에 총독부 경무국 도서과가 이 책의 조선어 번역을 계획한다. 그 때 니시 무라가 번역자로 선택되었고, 그는 󰡔麦と兵隊󰡕의 번역서가 “조선의 고 금을 통하야 처음 보는 대전쟁문학”이니 만큼 히노 아시헤이의 심경을

‘습취’하기 위해 “목하 세 번 네 번” 읽을 결심이며 조만간 히노 혹은 그 주변 인물이라도 만나 그의 인간적인 면을 알아볼 생각이라고 밝힌 다.40) 그리고 1939년 2월에 “모름지기 筆烽을 武器삼아 時局에 動員하 는 熱意가 없언 안될 것”이라는 권두언을 실은 󰡔문장󰡕이 창간된다.41) 그리고 󰡔문장󰡕에 「전선문학선」이 처음 게재된 것이 다음호인 1939년 3 월이다.

그 시점은 번역의 기획 단계를 끝낸 󰡔보리와 兵丁󰡕이 니시무라에 의 해 거의 번역이 완료된 단계였다.42) 즉, 전시체제라는 시국 속에 경무 국 도서과의 검열관(통역관) 니시무라가 󰡔보리와 兵丁󰡕을 번역한 것은

40) 「동아일보」, 1938. 12. 25, 2쪽.

41) 󰡔文章󰡕의 창간호에는 「전선문학선」이 들어 있지는 않지만, 김진화의 「從軍畵 家展을 보고」가 실려 있다. 경성 三中井화랑에서 11월 27일부터 12월 4일까지 열린 이 화전을 보고 김진화는 그 작품들은 “藝術을 위한 作品이 아니고 國家 으로 歷史記錄일 것”이라며, 덧붙여 “作家로써 藝術的作品創作하는 歷史的 記錄으로써 保存할 수 있는 것이 또한 畵家로써의 業績果然 클 것이 라고 生覺”한다고 적고 있다.(178~179쪽)

42) 󰡔보리와 兵丁󰡕의 번역 경위 및 고충을 밝힌 󰡔京城日報󰡕의 「諺文譯まで」가 그 해 4월 11일부터 연재된 것이라는 사실이 그것을 입증한다.(「諺文譯まで= 譯着手決定する前後(1)」, 󰡔京城日報󰡕, 1939. 4.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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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에서 전쟁문학의 “첫 시험”이었으며, 󰡔문장󰡕의 「전선문학선」은 그 에 앞서 기획되었던 것이다. 󰡔인문평론󰡕은 창간호(1939. 10)에서 조선 인의 전쟁문학에 대해서 항간에 “朝鮮 사람은 戰爭을 보지 못하였으니, 어떻게 文學을 쓰며, 어떻게 그 事實을 옴기여 놓겠느냐”는 문제 제기 를 하고 있다.43) 또, 그보다 앞서는 󰡔문장󰡕이 창간될 때 과연 조선인 작가의 전쟁문학에 대한 관심이 과연 「전선문학선」을 기획할 정도였는 지, 혹은 ‘내지인’의 종군문학을 어느 정도까지 공감하며 독서할 수 있 었는지는 의문이다. 그런 점에서 󰡔문장󰡕의 「전선문학선」 기획이 연재 된 이상 편집자의 의도와 전혀 무관하다고는 물론 말할 수 없으나, 동 시에 굳이 편집 의도나 번역자 등을 밝히지 않은데서 알 수 있듯이, 그 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문장󰡕의 편집진이 단독으로 기획한 것이 아 니라는 점은 짐작할 수 있다. 다시 말해, 그것이 경무국의 의도에 따른 기획일 가능성이 크다고 할 수 있다.44) 하지만 경무국의 의도가 전적 으로 니시무라의 의도일 수만은 없다 하더라도, ① 그가 경찰직의 종사 자들에게 ‘조선 사정’을 직역(直譯)해 전달하는 역할을 했던 점, ② 동 시기 전쟁문학 논의를 촉발시킨 󰡔보리와 병정󰡕의 번역자라는 점, ③ 일 찍이 조선의 출판에 대해 직・간접적으로 관여해온 점들을 생각할 때,

「전선문학선」의 편집에 경무국 도서과의 의도가 개입되었다면 그것은

43) 박영희, 「戰爭朝鮮文學」, 󰡔인문평론󰡕 창간호(1939. 10), 41쪽.

44) 이미 주35)에서 밝혔듯이, 니시무라는 번역과정 중에 이미 도서과의 조선인 통역관들에게 번역본을 돌려보게 했다. 뿐만 아니라, 완성된 번역본을 출판을 위해 총독부 문서과를 보냈을 때는 문서과에서 그것을 조선의 문사들에게 돌 려 수정토록 하였다. 특히 니시무라는 물론 그의 주위 사람들은 이광수에게 교정을 받는 것이 좋았을 것이라고까지 했다.(「諺文譯まで=飜譯着手決定す る前後(7)」, 󰡔京城日報󰡕, 1939. 4. 19.) 여기서 이러한 사실들이 중요한 것은 󰡔 보리와 병정󰡕이 그만큼 당시 조선 문단에 중요한 화제 거리였음을 말해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당시 조선문단에서 일어난 전쟁문학에 관한 논의에 서 󰡔보리와 병정󰡕의 역할이 컸다는 사실을 대변하는 대목이며, 또한 그것은 󰡔 문장󰡕의 「전쟁문학선」 기획을 비롯한 전쟁문학과 관련한 당시 논의들에 경무 국이 깊이 관여했음을 반증하는 것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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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시무라의 의도가 개입되었을 가능성이 그만큼 크다고 할 수 있다.

여기서 ③과 관련해 전술한 바 없으니 좀 더 언급하자면, 일찍이 니 시무라가 당대의 ‘광서(狂書)’라고 규정했던 「정감록」에 관해 쓴 글을 읽 어볼 필요가 있다.

최근에 이르러 조선총독부 경무국에서는 이 책(정감록-인용자)을 악 용하는 것은 그 비밀성을 역이용하는데 있다고 판단, 그것의 출판을 허 용하니 불과 몇 사람의 서적 브로커가 그것을 발행해 1천부 이내를 인 쇄한 것 중 불과 수십 내지 수백 권을 판매한 데 불과했다. 그랬더니 종래 본서를 악용했던 도배는 지금 시정에서 발매되는 정감록은 진짜 정감록이 아니라 신비하고 불가사의한 정감록은 따로 존재한다며, 자 신들이 신봉하는 것은 바로 그것이라고 암암리에 유언비어를 유포했 다. 실로 이상하기 짝이 없도다.45)

이렇듯 당시 검열 당국은 잡지나 신문의 기사 내용 혹은 편집에 관 여한 것뿐만 아니라, 개별적인 사회적 담론(?)이 가지는 ‘비밀성’이 사 회적 질서를 혼란케 할 때 오히려 ‘비밀성’을 공간(公刊)하는 방법으로 출판 시장 및 사회 사정에 관여하기도 했다. 니시무라는 이 글에서 「정 감록」의 공식 출판을 결정하는데 직접 간여했음을 언급하지는 않고 있 지만, 글 전체의 문맥으로 보아 그 결정의 당사자였음을 충분히 짐작할 만하다.

그리고 󰡔문장󰡕의 「전선문학선」 기획을 확대 해석하자면, 그것은 단지 검열 당국과 편집자(혹은 작가) 사이에서 검열이 ‘경찰하는 자’와 ‘경찰당 하는 자’라는 위계화된 관계 위에 이뤄진 것이라기보다, 이후 󰡔국민문학󰡕

시대에 들어서면 ‘편집자의 지위와 책임’이 검열의 한 부분을 담당하게

45) 西村真太郎, 「鄭鑑錄」, 󰡔警務彙報󰡕 1937. 5. 6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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되는 전조적 단계의 성격을 지닌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편집자의 지도성˙ ˙ ˙ ˙ ˙ ˙ ˙ 이라는 것은 결국 두 가지 측면에서 발현되는 것임 을 알 수 있다. 그 한 가지 측면은 국가 목적에 따르지 않는 것을 억압 하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국가 목적에 따를 것을 적극적으로 보호 조 장하는 것이다. … (중략) … 단적으로 말해, 오늘날 잡지 편집자는 검˙ ˙ ˙ ˙ ˙ ˙ ˙ 열 당국의 사무를 상당 정도 분담˙ ˙ ˙ ˙ ˙ ˙ ˙ ˙ ˙ ˙ ˙ ˙ ˙ 하고 있다고 해도 좋은 정도이다. 그 렇게 말하는 것은 편집자가 검열사무를 대행하고 있기 때문이 아니다. 어떤 하나의 작품을 실을 것인지 말 것인지의 근본문제에 한해서 편집 자는 국가 목적을 체현하고 스스로의 책임하에 결정을 한다는 의미이 며 또 그렇게 해야 한다는 의미이다.46) (강조점-인용자)

5. 결론을 대신하여

이상으로 식민지 조선의 조선문 검열에 있어서 “염라대왕”과 같은 존 재였던 검열관 니시무라 신타로에 대해 살펴보았다. 동시대를 살았던 피검열자의 회고에 따르면, “당시 圖書課에는 「니시무라」(西村)라는 통 역관이 있었는데 그는 한국어를 잘해서 한국신문의 검열관이 된 사람 으로 어찌나 성격이 날카롭고 매서운지 조금이라도 저희들에게 해로운 기사가 있으면 마치 족집게 집어내듯, 영락없이 그것을 적발하여 民族 新聞에 있어서는 가위 염라대왕과 같은 위인이었다.” 분명 조선인 입장 에서 그는 “우리 신문을 잡아먹으려는 총독부 관리”로 여겨졌기에 가해 자로서 거리감을 느낄 수밖에 없는 존재였다.47) 하지만 김동인은 회고

46) 「編輯者地位責任」, 󰡔國民文學󰡕, 1942. 10, 1~2쪽.

47) 본문의 인용한 일화는 김을한이 1926년 조선일보 기자로 입사하여 1930년 매 일신문사로 이직했기 때문에 1920년대 후반의 일을 회고한 것으로 여겨진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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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출 자료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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