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고일_2021.01.10 게재확정일_2021.02.10
문자와 이미지의 이분법을 넘어서
Beyond the Dichotomy of Text and Images
박지나, 고려대학교 일반대학원 영상문화학과
Park, Ji Na_Graduate School of Korea University Visual Culture Studies
차례 1. 서론
2. 활자 발명 이전의 문자와 이미지의 관계 2.1. 인류의 직립과 기초 조형 문법의 시작
2.2. 문자와 이미지 제작의 기원과 원문자(archi-criture)시대
2.3. 파르마콘(Pharmakon)으로서의 문자와 돌에 새겨진 살아있는 문자 2.4. 수도원시대, 중세 필사본과 공간적 상상력: 감각과 이미지의 노래
3. 활자 발명 이후의 문자와 이미지의 관계
3.1. 구텐베르크의 『42행성서에서 모던 타이포그래피까지 3.2. 지식 압축으로서의 『백과전서이미지와 이미지의 대량생산 4. 새로운 기초조형으로서 문자와 이미지: 이분법에서 이중성으로 5. 결론 및 제언
References
문자와 이미지의 이분법을 넘어서
Beyond the Dichotomy of Text and Images
박지나, 고려대학교 일반대학원 영상문화학과
Park, Ji Na_Graduate School of Korea University Visual Culture Studies
요약
중심어 문자 이미지 이분법 이중성 동시성 타이포그래피
이 연구는 기초 조형 교육에 대한 인문학적 고찰로서 문자(Text)와 이미지(Image)에 대한 기초 조형 교육의 새로운 방향성을 제시하는데 목적이 있다. 문자와 이미지는 그자체로 인간과 공존하는 인간을 둘러싼 시각 환경이자 시각문화이다. 본 연구에서는 새로운 기초조형으로서의 문자와 이미지를 기원 부터 역사적, 철학적, 문자학적으로 고찰하고, 디자인교육을 기존의 기초조형의 장(field)에서 인문학 의 장으로 확장시키고 재사유하고자 한다. 연구 범위는 문자와 이미지의 관계에 대해 활자발명을 그 중심에 두고, 활자발명 이후 연구들에 비해 비교적 선행연구가 미비한 ‘인류의 시원에서 인쇄술의 발 명 이전의 시대까지의 문자와 이미지의 관계’를 중심으로 서술하였다. 연구방법은 문헌연구로 문자와 이미지의 기원부터 살펴보는 계보학적 방법론을 취한다. 문자가 발명되기 이전에는 문자와 이미지는 분리되지 않았고, 음성언어, 몸짓 언어, 흔적들이 동시에 존재했다. 그러나 문자 발명 이후 문자와 이 미지는 ‘글/그림’, ‘쓰기/그리기’로 나뉘어졌다. 중세 채식필사본(Illuminated Manuscript)의 시대까지 도 이미지는 빛이 되어 문자를 이끌었다. 그러나 활자(인쇄술) 발명 이후 문자와 이미지의 관계는 점 점 문자중심으로 전환되었고, 19세기에는 중세 때 빛이었던 이미지는 오히려 문자에 끼어들어 간 삽 화(Illrustration)가 되었다. 그러나 21세기 기술영상매체의 발전과 변화 속에서 문자와 이미지간의 주 도적인 관계는 다시 역전되게 된다. 이처럼 기원부터 시대별 문자와 이미지의 관계를 살펴보면서 알 수 있듯이 문자와 이미지는 절대적인 이분법으로 설명할 수 없다. 주지하다시피 이항 대립적 사유의 위험은 대상들 간의 차이를 위계적으로 보고, 우위를 차지하는 쪽에서 폭력적 계층질서를 만든다는 것 에 있다. 따라서 새로운 기초조형으로서 문자와 이미지는 이제 ‘(문자)이미지’, ‘(이미지)문자’라는 ‘이 중성’, ‘동시성’의 방식으로 재사유해야 한다. 특히 시각디자인에서 타이포그래피의 기본요소는 문자와 이미지다. 따라서 타이포그래피 연구과 교육 역시 이중성과 동시성을 기반으로 한 인문학적 연구로 진 행되어야 하며 언어학, 예술, 철학, 역사학 등 다학제적으로 확장되어야할 것이다.
ABSTRACT
Keyword text image dichotomy duality synchronicity typography
This study proposes a new direction of Basic Design & Arts education based on the humanities research approach. To this end, this study aims to reconsider the meaning of text and image by accepting the perspective of humanities beyond the aspect of design and arts. Text and Images are essential human environments that gave birth to visual culture. which also gives rise to questions such as, 'How did written language look like before the invention of the text?' and 'How had the invention of the text changed the relationship between text and images?' I accept genealogical approach that examines the origins of text and images for a literature review to attempt to explore contextual research. Oral language, gestures, and other traces existed without employing priority exclusively before the literate culture while the advent of the literate culture brought human culture to an extreme difference such as 'text vs. images' and 'writing vs.
drawing' based on Western metaphysical traditions. Representative examples of this are as follows. The invention of the printing press led to the literate culture while images dominated over text in medieval manuscripts. However, digital technology that brought about multimedia development in the 21st century had changed the relationship between text and image again and made visual culture has been flourished. As noted, the risk of binary opposition lies in the hierarchical view of differences between objects and creating a violent hierarchy on the side of the dominance. Typography is a substantial as well as a basic element in design. To prevent from taking the risk of binary confrontational thinking, the study of typography that consists of not only text but also images has to take the view of duality and synchronicity of text and images. Further, it needs to go with multidisciplinary study along with Linguistics, Art, Philosophy, History, and so on.
이 논문은 한국기초조형학회 콜로퀴엄위원회의 2020년 연구주제인 ‘디자인 분야의 기초조형과 교육’이라는 주제 하에 진행된 논문입니다.
1. 서론
문자와 이미지는 인류 시작부터 인간과 공존하며 인간을 둘러싼 시각 환경이자 시각문화이다.
이미지의 기원은 언제일까? 인류가 문자를 발명하기 이전(preliterate)에도 문자의 역할을 하 는 것들은 어떤 모습으로 존재했을까? 본 연구는 문자(text)와 이미지(image)에 대한 인문학 적 고찰로서 기초조형 교육의 새로운 방향성을 제시하려는 의도에서 쓰였다. 새로운 기초조형 으로서의 문자와 이미지를 기원부터 역사적, 철학적, 문자학적으로 고찰함으로서 기존의 기초 조형의 장(field)에서 인문학의 장으로 확장하고 조망하려는 것이 본 연구의 목적이다. 연구 범위는 문자와 이미지의 관계를 아래의 표 <Table 1> 와 같이 활자발명(the invention of movable type)을 그 중심에 두고 크게 발명 이전과 이후의 문자와 이미지를 관계를 두 방향으 로 고찰하고자 한다. 그러나 본 고에서는 활자발명 이후의 연구보다 비교적 직접적인 선행연구 가 미비한 활자발명 이전 즉 ‘인류의 시원에서 인쇄술의 발명 이전의 시대의 문자와 이미지의 관계’를 중심으로 서술하고자 한다.1)
<Table 1> Text and Images Before and After The Invention of Characters and Types
연구방법은 문헌연구로 기원부터 살펴보는 계보학적 방법론을 취한다. 먼저 활자가 발명 이전, 인류의 시원(始原)을 따라가 보면 각 시대마다 문자와 이미지를 둘러싼 다양한 담론이 있었다.
문자발명 이전 이미 음성언어, 몸짓 언어, 낙서나 흔적이 존재했다. 데리다(Derrida, 1967/2010)는 그라마톨로지에서 이를 원-문자(archi-écriture)라고 명명했다. 원문자는 분리할 수 없는 관계로 글과 그림, 쓰기와 그리기의 이분법을 뛰어넘는다. 불분명하고 혼종적인 흔적(Trace)의 이미지이자 문자, 문자이자 이미지다. 그러나 본격적인 문자가 발명되면서 문 자와 이미지는 분리된다. 프랑스 구조주의 문화인류학자 레비스트로스(Lévi-Strauss, 1955/
2014) 역시 슬픈열대에서 “인류 역사를 통틀어 세계 어디서나 문자의 출현은 계급사회의 출현과 연관 있다고 지적하면서 문자라는 인위적인 기억이 부족 우두머리의 지배력을 강하게 했다”고 말한다. 고대 그리스의 소크라테스는 문자를 부정적으로 보면서 “일단 글로 쓰이고 나면, 모든 말은 장소를 가리지 않고 그것을 이해하는 사람들 주변과 그 말이 전혀 먹히지 않는 사람들 주변을 똑같이 맴돌면서, 말을 걸어야 할 사람들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을 가려 알지 못하네(Plato, Phaedrus, 275e).” 라고 했다고 한다. 그에게 문자는 ‘영혼 없는 기록’이며 ‘인간 의 기억능력을 망치게 하는 것’이었다. 이후 중세시대 문자는 이미지와 함께 체계적으로 구조화 되면서 전승된다. 중세 시대 문화와 예술 그리고 학문의 중심은 수도원이었고 문자기록 역시 수도원에서 담당했다. 신의 말씀인 성서에 빛을 만들어 내는 것이야 말로 채식필사본의 제작은 핵심 업무였다. 책에 빛을 만드는 사람을 일루미네이터(illuminator)라고 불렸다. 일루미네이터 는 성서에 금, 은 등으로 이미지와 장식 등을 그리는 사람을 말하는데 문자대로 ‘빛을 주는 사람’이라는 의미였다. 중세 필사본에서 이미지는 빛의 역할을 담당하며 주도적으로 문자를 이끌었다.
그러나 활자가 발명된 이후 이미지와 문자의 관계는 역전된다. 인쇄 초기에는 구텐베르크의 42행성서처럼 인쇄된 문자 위에 이미지를 덧입히는 형식으로 이미지의 역할은 계승되었다가 점점 문자 중심의 인쇄가 가속도를 가지게 된다. 하지만 문자중심이 절정이었던 18세기 계몽시
1) 다만 이 글에서는 문자의 특성을 세계문자학 입장에서 서양문자(알파벳)을 중심으로 고찰했음을 밝힌다. 이후 한글문자학의 특수성을 기반으로 문자(한글 타이포그래피)에 대한 연구는 별도로 진행하고자 한다.
대의 백과사전에서는 지식의 압축된 도판이미지가 백과사전에서 큰 활약했고, 19세 이후 석판 화, 사진, 영화와 같은 다양한 매체의 탄생과 함께 이미지는 폭발적으로 대량생산되었다. 그리 고 21세기 기술영상매체의 발전과 변화 속에서 그 관계는 다시 바뀌게 된다.
본 연구에서는 문자와 이미지의 관계를 기원에서부터 살펴 볼 것이다. 활자이전의 문자와 이미 지의 관계를 중심으로 인류의 직립에서 출발한 기초조형문법과 선사 원문자시대, 고대 파르마 콘으로서의 문자와 명각, 중세 수도원시대의 필사본까지의 문자와 이미지의 관계’를 살펴보고, 활자이후의 문자와 이미지의 관계까지 간략히 정리하고자 한다. 이를 통해서 인문학적 장에서 새로운 기초조형으로서의 문자와 이미지의 관계를 이분법이 아닌 이중성(duality) 또는 동시성 (synchronicity)으로 재사유하고자 한다.
2. 활자 발명 이전의 문자와 이미지의 관계 2.1. 인류의 직립과 기초 조형 문법의 시작
문자발명이전 문자와 이미지는 어떻게 탄생하고 조우했을까? 그 기원을 살펴보면 인류의 직립 에서부터 시작된다. 인류에게 직립은 하나의 사건이었다. 일반적으로 직립을 손의 자유와 도구 의 탄생으로 설명하지만 기초조형의 맥락에서 직립은 조형 문법의 기초를 탄생시켰다. 직립 후 인류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게 되었다. 이때 땅에서 하늘로 향하는 하나의 시선이 생긴다.
바로 ‘수직선’의 탄생이다. 그리고 걷는다. 이처럼 이동하면서 생기는 시선은 ‘수평선(지평선) 이다. 수직선과 수평선의 시선이 교차하면 십자가, 즉 X축과 Y축의 그리드가 완성된다. 따라서 십자가 문양을 기독교의 전유물이라기보다 어느 문명에서나 발견되는 인간조건에 기반한 보편 적 이미지이자 기호라고 설명할 수 있다. 인류는 직립을 통해 시선이 탄생했고, 눈이 있는 쪽이 정면(Façade)이 되고, 보이는 쪽은 앞(밝고, 분명하고 명확한 것, 긍정적인 것)과 보이지 않는 쪽은 뒤(어둡고, 불분명하고, 명확하지 않으며 부정적이고 알 수 없는 그래서 신비스런 곳)의 이항 대립구도의 쌍-개념이 생긴다. 이처럼 서구 형이상학의 이분법은 플라톤 식 이데아구조 에서 기인한 것이라기보다 ‘인간은 만물의 척도’, 프로타고라스의 말처럼 인간의 기본조건이 대립구조의 이분법으로 인간의 인식을 형성했다고 유추할 수 있다. 이는 음양으로 세계를 나누 어 설명하는 동양 사상도 인간의 보이는 곳과 보이지 않는 곳이라는 인식적 대칭개념을 상징화 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인류의 직립은 손의 자유로운 사용에서 도구의 탄생으로 이어지는 공식만을 탄생시킨 것은 아니다. 직립으로 시선이 탄생했고, 자유로운 손의 사용은 인류의 대뇌피질을 발달시켰다. 대뇌 피질은 말과 사고 활동, 언어의 중추가 되었다. 직립으로 인해 인간의 발성기관은 다른 포유류 와 다르게 척추와 머리뼈가 90도의 직각으로 꺾이게 되면서 후두가 성대 아래로 내려오게 되었 다. 직립으로 인류는 다양한 소리를 낼 수 있는 신체조건이 완성된다. 다양한 소리를 낼 수 있고 대뇌피질에서 특히 전두엽의 발달은 사고를 소리(말)로 생산해서 소통할 수 있게 된다 (Kim, S., 2017, pp.77~80). 또한 인류가 서있는 자리에서 해 뜨는 곳을 바라보고 양쪽 팔을 벌리면 해 뜨는 곳을 기준으로 동, 서, 남, 북이라는 방위가 탄생한다. 그리고 인간의 머리 위에 는 하늘, 초월적인 것이고, 인간의 발아래는 지하세계라는 개념이 형성된다. 이러한 인간의 근원적인 인식들은 세계 어느 문명에서나 동일하게 나타난다.
직립에서 기인한 ‘인간 몸의 조건’이야말로 인류의 사고방식과 삶의 기초조형 문법을 탄생시켰 다. 인간조건으로서의 ‘인간의 몸’은 그 형태와 구조가 인간의 기본적인 인식의 바탕이 되었다 고 할 수 있다. 정리하면 근원적인 인간의 기초조형은 바로 ‘인류학적 관점의 인간조건과 인식 이 탄생시켰다고 추론해 볼 수 있겠다. 나아가 근원적인 인간조건과 기초조형을 더 심도 있는 연구로 이어진다면 이러한 연구는 ‘조형인류학(Formative Anthropology)’ 또는 ‘인간조형학 (Anthropology of Formatives)’으로 명명할 수 있을 것이다.
2.2. 문자와 이미지 제작의 기원과 원문자(archi-criture)시대
인류의 삶의 방식이 사고방식과 표현의 기초조형 문법을 탄생시켰다면 동굴은 지상과 지하세
계를 연결하는 통로로써 두 세계를 중계하는 역할을 한다. 동굴 안에는 인간의 음성언어능력, 시각언어능력, 몸짓언어능력의 흔적(Trace)이 고스라니 남아있다. 대표적인 사례로 후기구석 기 시대 3만 7천 년 전에 그려진 것으로 추정된 쇼베 동굴벽화는 그 자체로 문자와 이미지의 기원이 된다.
선사고고학자 데이비드 루이스 윌리엄스(Williams, 2002)에 The Mind in the Cave라는 책 에서 동굴로 들어간 샤먼의 영적 경험, 환영을 통해 동굴 저 너머의 세계를 방문하고 돌아오는 것이라고 말한다. 동굴 입장은 구석기 시대의 정신의 세계의 일부로 들어가는 것을 상징한다.
다시 말해 동굴벽화는 지상의 이미지를 들고 가서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동굴의 지형학적 구조 와 샤먼의 만남이 정신과 물질의 상호작용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샤먼은 동굴 안에서 그림자의 움직임에 따라 실체가 없는 대상과 상호작용을 했다. 동굴이라는 자연과 당시의 인공조명인 램프가 샤먼의 의식으로 만나 인위적으로 만들어지는 그림자를 사용하여 동굴 벽화의 묘사를 만들어 냈을 것이라는 추측이 가능하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빛과 어두움은 삶과 죽음, 선과 악 등등의 은유로 설명되어져 왔다. 동굴은 사는 것이 죽은 것이고 죽은 것이 사는 것이라는 새로운 깨달음의 공간이었고 샤먼은 그 중간에서 매개의 역할을 했다고 설명할 수 있다.
데리다는 그라마톨로지에서 앙드레 구랑(André Leroi-Gourhan)의 설명을 인용하면서 최 초로 인간이 표현한 것은 사물의 모사나 현실을 재현한 형태가 아닌 ‘리듬’을 읽은 것이라고 말한다. 구랑은 호모사피엔스가 직립과 함께 언어체계를 갖추기 시작한 시기는 구석기 동굴에 그래피즘(graphism)이 나타났던 시기가 같다고 주장한다(Derrida, 1967/2010, p.244). 직립 이후 손의 자유로 인한 도구 사용과 말하기를 동굴벽화는 동시에 보여준다. 손은 뇌의 정신활동 을 통해 쓰고(문자), 그리게(이미지) 했다(Kim, S., 2017, pp.97~98).
그러나 예술의 기원으로만 동굴벽화를 볼 수는 없다. 윌리엄스는 동굴 벽화에 대한 다양한 이론 들2)(Anati, 1981/2008, pp.59~88)로 동굴 벽화에 대한 다양한 이론들로 동굴벽화를 제작했 다는 데에 비판하고, 이미지의 제작이 시작이 후기 구석기 시대에 되었다고 주장하면서 민속지 학적 연구와 신경심리학적 이론의 재배열을 통해서 이미지의 기원을 설명한다. 이미지의 제작 이 시작이 후기 구석기 시대에 되었다고 주장하면서 민속지학적 연구와 신경심리학적 이론의 재배열을 통해서 이미지의 기원을 설명한다. 윌리엄즈(Williams, 2002)에 따르면 6만 년 전~3 만 년 전 사이 호모사피엔스에게는 창조적 폭발(creative explosion)이 일어났고, 이때 이미지 와 언어가 같이 탄생했으며, 동굴 벽화와 가지고 다니는 조각품에 이르는 선사예술도 탄생했다 고 말한다. 그 당시 사회의 공동체의 상호 의존적으로 연결된 인식능력이 후기 구석기인들도 꿈을 꾸고, 환영을 경험하고 이를 동굴의 이미지로 남겨놓았다. 따라서 이미지제작의 기원은 동굴벽화에 관련된 기존의 학설처럼, 서정적 자기만족의 표현이나 심미적 표현으로 제작(유희 기원설과 같은...) 된 것이 아니라, 개념으로 발전해서 이미지로 제작된 것이라고 강조한다.
이에 대하여 윌리엄스는 인류의 의식이 개념으로 바뀌고, 그 개념이 이미지와 문자의 형태로 기록되고, 상징과 기호가 다시 당시의 구석기인의 의식에 반영되었을 것이라는 가설을 내세우 며 이미지 제작의 기원을 추적하는데 있어서 신경심리학적인 인간의식의 연구를 추가했다. 그 근거로 거의 5만년 동안 해부학적 구조가 바뀌지 않은 호모 사피엔스의 뇌가 현대인과 같기 때문에 오히려 현대인의 뇌는 선사시대를 열 수 있는 로제타스톤이 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는 동굴벽화는 후기 구석기인과 현대인이 공통의 신경학적 능력으로 불리는 변성의식상태 (altered state of consciousness)상태의 샤먼에 의해 제작된 것이며, 소나 말을 재현한 것이 아니라 샤먼의 내면의 정신세계를 묘사한 것이라고 설명한다. 또한 동굴 주변에서 작은 램프가 발견된 것은 램프라는 인공적인 빛과 자연 상태의 동굴이 샤먼의 트랜스 상태의 상호작용에 의해서 이미지와 기호의 형태로 탄생한 것으로 그는 이러한 행위의 누적작용이 오늘날의 문자 와 이미지의 형태로 동굴에 남아있게 되었고 이것이 ‘예술 조형의 초기형태’라고 분석한다.
다른 관점으로 아드리안 푸르티거는 구석기 시대의 모든 이미지는 인간이 메시지를 전하는
2) 예술로서의 예술이론, 감응주술이론, 신화와 관련된 이론, 달력이론, 샤머니즘에 관한 이론, 대모신에 관한 이론 등. 임마누엘 아나티 (Emmanuel Anati), 2008, 예술의 기원, (이승재 역), 바다출판사. pp.59~88 참조.
일종의 문자로 이해되고 의성어는 현재로는 부차적인 언어로 치부되지만 실은 언어 이외의 다른 표현과 함께 수천 년을 내려온 ‘기호’라고 말한다(Frutiger, 1989/2007. p.87). 동굴벽화 의 이미지를 하나의 기호로 본다면 오랫동안 선사예술을 연구한 임마누엘 아나티의 연구는 분석적으로 원시기호를 새롭게 볼 수 있는 지점을 제시한다.
아나티는 동굴에 남겨진 이미지를 ‘기원적 기호’라고 호칭하고 시각예술과 논리체계가 의미하 는 여러 요소들로 나누어 분석한다. 그는 동굴벽화나 바위그림은 최초의 인간이 그려낸 이미지 이자 대서사시이기 때문에 문법적 해석이 가능하다고 말한다. 기원적 기호의 첫째는 그림문자 로 실제 또는 상상 속 동물이나 구조물 등 알아볼 수 있는 형상이나 형태로 재현한 것을 말한다.
두 번째는 표의문자로 기초조형의 형태의 손자국, 지그재그, 십자가, 원, 점, 선 등 어떤 메시지 를 전하거나 생각을 전달하는 기호들을 말한다. 마지막 심리문자는 동굴벽화나 바위그림에서 사물을 재현한 것이 아닌 느낌이나 개념을 시각적으로 표현한 것으로 에너지의 표출이나 감정 의 표현, 욕구 발산의 표시 등을 말한다(Anati, 1981/2008, pp.414~440).<Figure 1>
<Figure 1> Black Outlines and A Horse Painted in Ocher (Lasco Cave, France), in This Picture-Ideogram Psychological Text is Included.
(Immanuel Anati(1981/2008), The Origin of Art, p.432)
여기서 주목할 부분은 심리문자인데 이는 마치 현대인의 SNS 이모티콘처럼 의식적으로 정의 할 수는 없지만 머릿속 어딘가에 깊이 박혀있는 감정을 표현한 것으로 문자를 보충해주는 역할 뿐 아니라 보다 정확한 감정 전달의 의사소통이었다. 이처럼 선사시대에 ‘흔적’이자 ‘그래피즘’
으로서의 ‘원문자’인 ‘기원적 기호’는 그림과 내용과 감정을 모두 포함하는 문자와 이미지의 대리보충(supplement)의 관계로 존재했다. 그러나 이미 기원에서부터 이미지이자 그 자체로 문자였던 기원적 기호였던 선사예술은 문자가 발명 이후 인간의 의식과 기억은 ‘문자’라는 추상 적인 틀 안으로 들어가게 된다.
2.3. 파르마콘으로서의 문자와 돌에 새겨진 살아있는 문자
문자는 발화와 동시에 사라져버리는 말을 보완하기 위해 발명되었다. 그러나 문자발명은 그 이후의 세상을 완전히 다르게 변화시켰다. 이에 관해서 고고학자인 데니스 슈만트 베세라트 (Denise Schmandt-Besserat)는 저서 문자는 어떻게 왔는가(How Writing Came About)
책에서 “문자의 발명은 수렵 채집에서 계급사회로 변화하는데 큰 기여를 했다.”라고 설명한다.
또한 레비스트로스(Levi-Strauss, 1955)도 “인류 역사를 통틀어 세계 어디서나 문자의 출현 은 계급사회의 출현과 연관이 있다. 문자라는 인위적인 기억이 부족의 우두머리의 지배력을 강하게 했다.”고 말한다. 심지어 알파벳과 여신의 저자 레너드 쉴레인(Shlain, 1998/2018)는 알파벳의 발명이 여신의 시대를 끝나게 했다고 주장한다. 이들의 주장처럼 문자는 계급과 관료 주의 사회로 진입하는 촉매제가 되었다.
최초의 문자로 알려진 수메르의 문자는 기원전 8500년경 고대 메소포타미아 지방에서 효율적 으로 자원과 노동력을 관리하기 위해서 수를 기억하고 나타낼 수 있는 회계중심의 문자를 발명 했다. 그 이후 약 6천년이 지나서 대부분의 세상의 이치를 표현할 수 있는 문자체계가 만들어졌 다. 이강서(Rhee, G. S., 1994)는 그의 논문 「플라톤의 파이드로스편에서의 문자비판」에서 알파벳을 도입 후 고대 그리스는 구술문화에서 문자문화로 큰 변화를 겪는다고 설명한다. 이제 청각 중심적 사고는 시각 중심적 사고로 대체되고 이제 ‘시적인 기억’이 아닌 ‘추상적인 사유’가 인간 인식의 중심에 놓이게 된다. 파이드로스에서 소크라테스는 문자를 부정적으로 생각했
다. 그 이유는 말(parole, speech)은 현장에서 소리로 생생하게 주고받는 영혼의 살아 있는 대화이지만, 문자(ecriture, writing)는 생명이 없고 영혼이 없는 기록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이 이야기에서 잘 알려진 ‘파르마콘’이라는 개념이 등장한다. ‘파르마콘’은 그리스어로 ‘묘약’이 라는 뜻으로, ‘치료제이자 독’을 뜻하는 양가적의 의미를 가진다.
실제로 문자의 도입은 해당 문화의 언어와 사유에 엄청난 추상성과 복합성을 초래했다. 기존의 사회적 유효한 지식은 기억에 의존했으나, 지식의 문서화는 추상화 작업을 가능케 했다. 문자를 통해서 학문과 이론이 성립되었고 지식생산의 복잡성은 특수한 지식영역을 담당하는 사람들을 중심으로 전문가 문화를 형성되었으며, 지식의 문자화는 지식수집으로 이어졌다. 그러나 특수 한 정보나 더 중요한 정보가 맥락에서 벗어나면 해석이 어려워지게 되었고 이를 해석 가능한 전문가 집단을 형성되게 된다. 이제 사회는 문자를 사용할 수 있는 전문가 집단에 의해 세분화 되었다. 문자사용은 고급문화를 성립하게 되고 계급을 공고하게 하는데 기여하게 된다. 어쩌면 소크라테스가 “문자는 모르는 것을 알게 해 주는 수단이 아니라 기껏해야 무언가를 아는 사람 에게 기억을 불러낼 수 있게 해 주는 상기수단에 지나지 않는다(A. T. Szlezak, 2001, p.68f)”
고 하며 문자를 폄하한 까닭은 파르마콘에서 독이 되는 부분에 대한 경고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자신의 말을 문자로 남기지 않고자 했던 소크라테스의 ‘말’은 제자 플라톤에 의해 ‘문자로 기록’되어 책을 통해 후세에게 전승되었다.
고대 그리스의 문화는 ‘시각’에 특별한 관심이 있었다. 레지스 드브레(Regis Debray)에 따르면 그리스 사람에게는 산다는 것은 ‘숨을 쉰다’는 것이 아니라 ‘본다’는 것 이어서, 죽었다는 표현 을 ‘숨을 거두었다’고 말하지 않고, 마지막 ‘눈길을 거두었다’고 말한다고 한다(Debray, 1992/2011, p.26). 다시 말해 죽는다는 것은 그리스 인에게는 시력을 잃는다는 뜻이다. 보여지 는 이미지는 살아있는 것이고, 믿음직한 것이다. 따라서 이들에게 형상을 만든다는 것은 이미지 를 다시 살아있게 하는 것이다. “형상은 에이돌론(eidolon)’, 즉 환영이자 이미지이며, 이미지는 그림자고, 그림자는 주체의 분신 같은 것으로 형상은 하나의 기호이기도 하다. 기호의 어원은 묘석을 뜻하는 세마(séma)에서 왔으며 묘지임을 알리는 것이라고 설명한다(Debray, 1992/2011, p.27).” 고대 그리스 로마에 남겨진 형상의 흔적은 죽은 이의 봉인과 묘석, 화폐, 그리고 암포라 항아리 등에서 발견된다.
기본적으로 문자가 추상화되는 과정에서 사라진 것은 이미지다. 그러나 이미지는 완전히 사라 진 것이 아니다. 이미지는 문자 안으로 내재화되게 된다. 그렇다면 이미지가 내재화되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여기에서 그리스 로마의 미학인 ‘고전적 형식미3)’를 말해볼 수 있다.
왜냐하면 그리스 로마의 거의 모든 조형물을 제작원리는 비례체계를 중심으로 제작되었기 때 문이다. 비례체계는 그 자체로 미학적 기준이 되고 하나의 글자꼴에서부터 도시 전체에 이르기 까지 모두 같은 조형의 원리가 작동한다. 예들 들면 오늘날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는 영문 디지털 폰트(font)4)중 하나로 트리얀(Trajan)5)이 있다. 주목성과 우아함, 가독성을 갖춘 이 폰트는 견고한 느낌과 함께 아름다운 비례가 돋보이 폰트로 로마시대의 ‘아우라’를 그대로 가지 고 격조 있고 클래식한 분위기를 만든다. 그 원형이 되는 것은 바로 트리야누스 기념비 (Trajan's Column)기단의 ‘명각(銘文)’이다. <Figure 2> 서기 100년경 로마에서는 돌로 건물 을 지은 후, 기념하기 위한 사람이나 건축가의 이름을 새기는 것이 존경의 표시이자 관습이었 다. 로마황제 트라야누스의 업적을 새긴 이 기념비의 문자와 이미지는 트리야누스 황제의 에이 돌론(eidolon)이고 환영이다.
이 문자들은 권위를 표현하기 위해 사용되었고, 그 글자 형태의 구조적인 비율은 오늘날 사용하
3) 여기에서 형식미는 수학적 비례체계에서 나타나는 미를 말하는 것으로 피타고라스의 영향 아래 있는 것이다. 즉 비례체계에 의한 규 칙적 배열과 비례, 부분과 전체의 조화와 균형미를 말한다.
4) 폰트(font)는 서체라기보다는 같은 크기의 모양을 가진 서체 한 벌 전체를 뜻한다.
5) 마스터 캘리그라퍼이자 로만 가톨릭 신부인 에드워드 케이치(Edward Caitch)라는 사람이 트라야누스 원주의 타입 페이스에 대해 조사를 하던 중, 쓰인 글자체가 캘리그라피를 기반으로 글자 끝에 끌을 넣어 세리프 식의 장식을 한 글자라는 이론을 주장했다. 이 런 케이치의 이론을 접한 어도비 사의 폰트 디자이너인 캐럴 트웜블리가 그의 리서치를 넘겨받았고, 그 과정에서 영감을 받아 1989년, 트라얀 패밀리 폰트를 발표했다. [서체 이야기] 할리우드가 사랑하는 서체, ‘트라얀’, 2015.12.18.
http://www.typographyseoul.com/news/detail/977
<Figure 2> Trajan's Column
는 문자나 글꼴의 고전적 기본 비율이다. 로빈 도드는 “이런 형태는 고대 그리스 로마의 문화에 서 형성된 형태의 기하학적 관계나 고전비율이 드러나는 서양의 타이포그래피는 유럽의 역사 에 문화적 미학의 근간을 이루는 원천중 하나로서 고대 그리스 로마 문화가 현재의 글자꼴에도 깊이 관여하고 있음을 말해준다(Dodd, 2006/2010, p.16).”라고 설명한다. 여기에서 주목해야 할 부분은 문자의 내용이 아니라 기표적인 특징이다. 고대 로마트리야누스 기념비에 새긴 글자 안에는 그리스 로마 시대의 고전적 형식미라는 분위기가 함께 새겨졌으며, 오늘날 디지털 폰트 에서 고전적 형식미로 소환되고 전승되고 있음을 잘 보여준다. 이것이 바로 ‘문자 안에 내제한 이미지성’이라고 설명할 수 있다.
2.4. 수도원시대 공간적 상상력과 켈즈의 서: 감각과 이미지의 노래
중세는 신의 목소리를 시각화하는 시대였다. 만약 신의 목소리를 감각으로 들었다고 치자. 이를 어떻게 표현 할 것인가? 감각적 경험과 개념적인 것이 일치하지 않는다. 감각으로 경험된 것을 감각으로 표현할 수 없을 때 인간은 이미지를 의존하게 된다. 문맹률이 높았기에 보이는 것과 읽는 것은 결합되었고, 이미지와 문자의 관계 역시 하나로 섞여있거나 오히려 이미지가 주도하 는 양상으로 발전했다. 고대 그리스 로마에서 드러난 비례체계에 의한 고전적 형식미는 중세가 되면 더 이상 중요하지 않게 된다.
중세를 대표하는 시각 조형물은 대성당이다. 중세 대성당은 서로마를 중심으로 초기기독교, 로마네스크, 고딕으로, 동로마를 중심으로는 비잔틴 양식이 천 년 동안이나 전개되었다. 모든 것이 기독교의 원리대로 이루어졌던 시기로 비례를 따르는 고전적 형식미와는 완전히 다른 양상으로 진행되었다. 중세 대성당은 단순히 미사나 기도를 하는 곳이 아니었다. 하늘과 땅 사이의 매개로 신과 인간의 중개자였고, 그 자체로 학교이자 성경책 또는 연극 무대, 사회생활 의 중심지이자 미적 감적을 일깨워 주는 공간이었다. 중세 시대 문화, 예술, 학문의 중심지는 대성당과 함께 수도원이었다. 중세수도원에서는 지식을 시각화했다. 중세 필사본은 4세기 이후 유럽 전역으로 퍼졌고, 5~12세기에 이르면 각각의 수도원에서 필사본 제작이 성행했다. 12세 기 말에는 대학에 필사실인 스크립토룸(scriptorum)이 생겼고 본격적인 종이의 등장이후 더 많은 필사본을 제작되었다. 어린 소가죽으로 만든 양피지를 벨럼(vellum)이라고 하는데 필사 본은 귀한 벨럼에 한 글자씩의 수행으로 창조되었다. 신의 말씀을 빛으로 만들어 내는 것이야 말로 중세 수도원의 핵심적 과제였다.
필사본의 가장 큰 특징은 빛나는 이미지가 주도적으로 성경의 문자를 이끌고 있다는 점이다.
이를 채식필사본채식(illuminated)의 뜻은 ‘밝게 빛을 내주는 것’으로 성서를 고귀하게 만드는 방법을 의미한다. 필립. B. 멕스에 따르면 일루미네이터는 필사본에서 “큰 앞머리글자와 본문을 아름답게 융합하는 그래픽적 해결로 디미뉴엔도(diminuendo)의 원리를 적용한다. 그래픽정보 의 크기를 점점 줄여나가는 것으로 커다란 장식과 본문의 문자를 무리 없이 통합시킬 수 있었 다. 복음서의 서두 페이지들 역시 전례의식이나 독서를 특별하고 신성하게 하기 위한 목적으로 앞머리 이니셜이 문자가 아닌 하나의 이미지로 혼합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Meggs, 1983/2002, p.65).” 이처럼 중세의 문자와 이미지는 분리되지 않은 모습으로 기록되었다.
중세 미술사가 마이클 카밀(Michael Camille)은 중세의 이미지에 대하여 중세 채색필사본에 있는 장난기 있는 주변 그림에서 대성당의 조각에 이르기까지 ‘문자와 이미지의 높은 문화와 낮은 문화의 명확한 분리가 현대적인 사고임’을 주장하면서, 중세 연구를 통해 항상 그런 것은 아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Camille, pp.129~130). 카밀은 중세 채색필사본의 여백의 이미지 를 주목한다. 그는 살펴 본 중세의 필사본들에 있는 이미지가 그 페이지의 본문 내용과 상관없 는 이미지로 가득한 것을 발견했다. 구체적인 예로 1317년 성 데니스의 삶 (the Life of St’
Denis)에 대한 그의 묘사를 살펴보면 “이 채색본의 그림에서 상류와 하류의 구별은 도시 공간 의 대표들에 남아 있지만 우리가 알고 있는 봉건제식의 중세의 수직 계층보다는 오히려 수평적 인 모습들이 이미지로 등장한다. 벽에 어깨를 문지르는 부자, 가난한자, 자유인, 부자유인, 소작 농인, 기사 그리고 성직자뿐만 아니라 떠오르는 중산층들. 책의 페이지의 아랫부분에서 도시의
현대적인 활기를 나타낸다. 중앙에 후원자 왕이 있고, 센 강 위에다리들, 와인통들을 나르는 상인의 배들, 다양한 상점들, 외과의사와 도로 포장인부들은 채색필사본에서 연속적으로 나타 난다. 특히 책의 아래 마진(margin)에서 도시로 진입하려는 생생한 장면들이 나타난다. 파리 시장들에서의 다양한 물건, 페르시아의 시장의 칼라 풍부한 천들과 다양한 염료들과 색들은 필사본의 마진들로 들어가게 된다. 이국적이고 익숙한 것과 함께, 시장에서는 이야기가 피어나 고, 음유시인들, 춤추는 곰들, 목욕탕에서 일하는 사람들, 칼갈이들 및 무역인들이 중세 필사본 의 여백에 나타난다(Camille, 1992, pp.133~134).” 카밀에 의해 주도면밀하게 관찰한 중세 필사본 속의 이미지는 성경의 내용과는 무관한 당시의 시끌벅적하고 활발한 도시의 이미지를 그대로 보여준다. 이처럼 중세필사본에 있는 이미지는 현대적인 의미의 삽화(揷畵) 즉 문자에 보충하기 위해 내용 사이에 ‘끼어든 이미지’가 아니고, 왜 그 이미지가 그 페이지에 들어갔는지 의문이 생기는 내용과 무관한 이미지들이 중세필사본의 주를 이룬다고 카밀은 지적한다. 이를 통해 알 수 있는 사실은 필사본의 이미지는 내용과 상관없이, 문자와 대등하게, 혹은 오히려 주도적으로 책을 이끌어가는 것이다. “필사본에서 나타나는 자유로운 이미지들은 12~13세기 이래로 가속화되었던 중세의 변화들, 즉 자본주의의 발달과 도시의 발달, 그리고 대학의 설립으 로 인한 새로운 독자층의 형성과 많은 사람들이 책에 대한 관심이 생겼으며 이를 통해 문자와 이미지의 관계 역시 미묘한 변화를 보이게 된다. 이 시기의 채색필사본은 문자와, 이미지, 서체 와 여백 등은 서로의 상관관계 속에서 중세 문화의 연속성과 이질성과 함께 파악해야 한다 (Semiosis Research Center(Kim, J.), 2013, pp.85~86).” 같은 지적으로 크리스티네 야코비 -미르발트(Christine Jakobi-Mirwald) 또한 중세의 책: 기능과 장식중 <5장 중부유럽 삽 화예술의 역사>라는 챕터에서 “삽화라는 단어가 현대적 개념이기 때문에 중세의 이미지를 설 명하는 번역어로 적절하지 않다”(Christine, 2004/2017)고 설명한다. 저자뿐 아니라 번역자, 편집자들이 무의식적으로 문자가 이미지보다 중요하다는 인식을 무의식적으로 드러내는 일례 라고 할 수 있다. 카밀의 지적처럼 ‘문자는 높은 문화’, ‘이미지는 낮은 문화’라는 현대적 의미의 삽화 개념으로 이해했기 때문이며 이는 실제 중세시대에서 나타난 이미지와 문자의 관계를 잘 이해하지 못했음을 반증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12세기 성직자이자 역사학자인 기랄두스 카브렌시스(Giraldus Cambrensis)는 ‘이것 은 사람이 아닌 천사의 작품이다’라고 말했다고 하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책’ 켈즈에 서 (Book of Kells)<Figure 3>를 살펴보자. 이 책은 ‘읽는 책’이 아니라 ‘보는 책’, 또는 ‘전례를 위한 책’으로 중세필사본 중에서도 백미로 꼽힌다. 프랑수아즈 앙리(Henry, 1974) 역시 “중세 초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시기에 서양에서 작성된 가장 빼어난 필사본이다. 복음서의 텍스트 사이에는 채식이 들어간 커다란 페이지가 자리 잡고 있다. 텍스트가 있는 페이지에서는 환상적 인 피조물의 길게 뻗거나 휘어진 몸을 표현한 채식으로 만든 첫 글자의 다채로운 아라베스크가 즐비하다. 이 놀라운 문양의 탐구에 몰두한 연구자는 곧 힘과 신비한 느낌에 한꺼번에 빠져든 다.”고 설명한다. 「켈트 교회의 위기와 섬양식의 결정」이라는 논문에서 김유리(Kim, Y., 2017) 는 “켈즈의 서는 섬양식 필사본6)의 대표적인 성경책으로 아일랜드의 보물이다. 6~10세기경 의 아일랜드와 브린튼 섬을 중심으로 하는 이 섬양식 필사본들은 대륙의 필사본과 구별되는 조형적 특징을 가지고 있다. 대륙의 필사본의 경우 ‘그림은 문맹인들의 문자’라는 대 그레고리 교황의 언급처럼 글의 내용을 전달하는 매개로서 직접적이고 재현적인 양식으로 나타나는 반 면, 8세기 정도에 만들어진 섬양식 필사본 켈즈에 서는 추상과 상징적인 표현으로 가득하다.
추상과 상징적인 표현으로 가득한 이 책은 유실된 것을 제외하고도 총 680페이지가 모두 다른 이미지와 문자로 장식된 신약성경의 4복음서로 되어있다.”고 서술한다. 켈스의 서는 신성함 그 자체를 책으로 시각적으로 형상화했고, 이 복음서에 나오는 모든 도상7)은 단순한 장식이 아니라 모두 각각이 하나의 상징체계로 ‘말씀’을 형상화 한 것이다. 책 문양과 함께 십자가 문양
6) 아일랜드와 영국에서 나타나는 필사본 양식을 부르는 말로 1901년 독일의 고문서학자 루드비히 타오브(Ludwig Traube)가 언급하 였다. Bernard Meehan, (1995), The Book of Kells: An Illustrated Introduction to the Manuscript in Trinity College, Dublin, Thames and Hudson, p.94.
7) 책, 십자가, 천사, 사람, 사자, 황소, 독수리, 성체, 성배, 포도 덩쿨, 공작, 비둘기 등
<Figure 3> Chi-Rho Page as The Key to Book of Kells
은 ‘벽사’의 기능까지 했다고 믿어져 왔다.
특히 켈즈의 서는 중세필사본이 공간에 대한 건축적 원리를 시각적 이미지로 바꾼 것임을 잘 보여주는 사례다. 이 책이 있는 아일랜드 트리니티 대학의 필사본의 책임자인 버나드 미한 (Bernard Meehan)은 켈즈의 서의 ‘캐논 테이블’8)이 로마네스크의 성당 건축적 구조인 바실 리카 양식을 형상화 했다고 주장한다. 이는 중세대성당의 공간적인 구조가 필사본의 구조와 같은 원리로 작동한다는 것을 의미한다.<Figure 4, 5> “켈즈의 서 본문을 마주하기 전에 5개의 기둥과 두 개의 아치를 묶은 큰 아치의 시각적 공간에서 성전에 들어가기 전 마음을 가다듬는 것과 같다. 페이지를 넘기면, 천사들과 아기 예수, 성모 그림이 나온다. 이는 성모 마리아에게 봉헌하는 것임을 상징하는 것이다. 4복음서의 본문이 시작되기 전 세련되고 화려한 장식의 끝을 보여주는 페이지로 ‘십자가 카펫페이지’9)가 있다. 복음서의 시작 부분이나 주요 전례시기의 앞에 배치되기 때문에 기도하는 자들의 공간을 시각적으로 상징하는 것이다. 카펫 페이지는 성경을 마주하기 전 기도 공간의 상징으로 경건한 마음자세를 요구하는 메시지다.
건축 공간에서 시간의 사유를 시각화한다(Bernard, 1995).”
<Figure 4> Canon Table in Book of Kells
<Figure 5> Columns of Romanesque Cathedral
월터 옹(Ong, 1982/2018)은 “쓴다는 것은 공간에 말을 고정시키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기억 은 ‘공간화’ 될 때 가장 오래 지속되었다. 인간에게 건축 이미지는 오래 각인되어 기억되는 까닭 에 기억에 공간감을 입혀서 재구성하는 방법을 사용했다(Kim, S., 2017, p.139).” 기억술에 관한 주목할 만한 문헌으로 영국의 역사학자 프란시스 예이츠(Yates, 1966)의 기억술(The Art of Memory)<Figure 6> 에서 예이츠는 이미지가 기억과 지식의 보조에 공헌했다고 주장 한다. “기억술의 첫 번째 단계는 ‘일련의 장소를 새기는 일’이었다. 수도사 개인의 기억 속에 안전하게 보관하는 것은 성경을 읽고 명상하는 기본적인 방법이 되었다(Solnit, 2000/2017).”
정리하면, 중세 ‘수도원의 공간 이미지’는 ‘수도사들의 기억술로 발전’했고 수도사들의 공간 기 억술 <Figure 7> 은 바로 성경 필사본의 제작 방식으로 이어졌다. 이후 필사본의 구조에서 공간이미지가 보존, 계승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수도사들의 기억술과 필사본은 15세기 구텐 베르크의 인쇄술의 발명이후 점점 명맥이 끊어지게 된다. 그리고 활자시대가 되자 이미지와 문자의 관계는 다시 역전된다. 물론 인쇄 초기에는 “독자들이 필사본에 익숙했기 때문에 초기 의 관습, 최초의 인쇄공이 그랬던 것처럼 인쇄술은 필사본의 형태여야 했다(McLuhan, 1962/2001, p.400).”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인쇄술의 활자는 더욱 정교해지고 이미지가 점 점 사라지면서 본격적인 문자중심으로 발전하게 된다. 그렇게 중세 시대의 이미지와 문자가 아름다운 공존은 인쇄술과 함께 기억너머로 사라졌다.
8) 켈스의 서 앞부분에 목차와 복음서의 위치를 설명해 주는 건축적 구조를 한 페이지를 말한다.
9) 중세 섬양식 필사본 성경에서 나타나는 특징으로 동방의 러그를 연상시켜서 이름이 ‘카펫페이지’라고 한다.
<Figure 6> Francis Yeates's Book The Art of Memory
<Figure 7> The Art of Memorywas A Method of Imagining An Architectural Space and Putting Objects in It.
3. 활자가 발명 이후의 문자와 이미지의 관계 3.1. 구텐베르크의 42행성서에서 모던타이포그래피까지
문자문화는 인쇄술을 통해서 전 사회로 확산되었다. 구텐베르크의 활자(movable type)는 기록 의 속도와 전파에 큰 공헌을 했고 활자의 사용으로 기록물의 양이 증가시켰고 예기치 않은 새로운 환경(field)를 만들었다. 마셜 매클루언(Herbert Marshall McLuhan)은 구텐베르그 의 은하계에서 인쇄술의 발명이후 인쇄기술의 내면화로 인한 새로운 인간이 형성된다고 주장 했다. 바로 “문자 인간(man of latters)”의 탄생이다(McLuhan, 1962/2001, p.400). “속독은 필사본의 경우에는 어려웠지만 획일적이고 반복성을 지닌 활자본의 경우에는 가능했다.” 이전 에 암송하고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활자 이후의 책은 묵독으로 혼자 읽고, 사고하고, 관찰하는 시간이 많아지게 되었고 ‘보는 책’에서 ‘읽는 책’으로 전환되었다.
“필사문화는 정신의 외화 혹은 발화가 매우 제한되어있었다. 그러나 인쇄와 함께 지방어는 공용 어로 발전하였다.”, “인쇄는 지방어들을 대중 매체 혹은 폐쇄된 체계 속에서 사용케 함으로써 근대적인 내셔널리즘이라는 획일적이고 중앙 집권적인 세력을 창출해 냈다.”, “책이 접근성이 좋고 휴대하기에 간편한 것으로 자연스럽게 바뀌었는데, 이러한 변화는 읽는 속도가 크게 빨라 지는 현상과 함께 일어났다. 속독은 필사본의 경우에는 어려웠지만 획일적이고 반복성을 지닌 활자본의 경우에는 가능했다. 접근성이 좋고, 휴대하기 용이한 책으로의 변화는 구텐베르크의 총체적 과업에 필수적인 요소인 대중과 시장과 함께 형성되어 갔다. 책의 선택과 보급 현상은 대중문화와 표준화의 출현을 암시하는 주목할 만한 경향으로 새로운 종류의 소비자 집단이 조직 되었다(McLuhan, 1962/2001, pp.375~389).” 이처럼 맥클루언에 따르면 ‘구텐베르크의 은하 계’가 문자와 이미지가 서로 보완적인 역할을 했던 중세를 끝냈다. 문자중심으로 전환되었고, 책의 대중화, 민주화가 실현되었고, 중산층 이하의 새로운 독자도 생겼으며, 더불어 교육이 확대 되고, 필사본으로 상류층에 귀하게 유통되던 책은 이제 상품이라는 이름으로 소비자를 기다리게 되는 독서 혁명을 가져왔다. 그렇게 활자 인쇄의 확장은 독서혁명, 과학의 탄생, 민족주의, 산업 주의, 대중시장, 그리고 보편적인 읽고 쓰기의 교육을 초래했다(Jay, 1993/2019, pp.100~103).
하지만 인쇄술 이후 근대의 책이 문자주도로 변한 것은 분명한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책 안에서의 이미지의 역할이 모두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앞서 로마시대의 트리야누스 기념비에 새겨진 명각의 아우라가 현대 디지털 폰트까지 영향을 준 것처럼 ‘문자 안에 내제한 이미지성’
은 중세 필사본에서도 계승된다. 장식이나 삽화와 같은 ‘대상으로 보여지는 이미지’는 사라져갔 지만 중세수도원에서 공간으로 페이지로 구조화되고 형상이 아닌 배경에서의 ‘작동원리로서의 이미지성’, 즉 배경과 여백과 같은 빈 공간, 틈, 사이 공간들과 본문을 보완하는 이미지성, 제목, 저자이름, 장르표시, 서문, 발문, 각주 뿐 아니라 표정, 손짓, 몸짓과 움직임 등도 모두 포함하는 의미의 이미지성은 근대이후 활자로 조판을 짜 맞추는 과정이나 활자 인쇄에서 페이지를 구성 하는 내재적 원리로 작동하게 된다.
‘문자에 내재한 이미지성’은 파라텍스트(para-texte)로 설명할 수 있다. 여기서 파라텍스트는 문자의 물리적 내부나 또는 물리적 외부에 위치하면서 책으로 만들어주고, 본문을 보완하는 것으로 표제지, 색인, 쪽, 마진과 같은 문자와 이미지이외에 책을 구성하는 여러 요소를 말한다.
오늘날의 의미로는 편집디자인, 타이포그래피는 이러한 문자와 이미지를 중심으로 파라텍스트 를 배치가 각각의 책의 궁극적인 목적에 맞추어 효율적으로 재배치하는 것을 말한다. 정리하면 말이 소리에서 분리되어 공간 속의 대상으로 정리되는 과정은 공간적 패턴으로 배열과 같은
‘이미지’로서의 페이지 구성 전통은 구텐베르크의 42행 성서로부터 근대까지 고스라니 이어졌 고, 19세기 예술로서의 책, 20세기 모던 타이포그래피에 이르기까지 서구 타이포그래피 전통으 로 내재화되어 계승되었다.10)
3.2. 지식 압축으로서의 백과전서이미지와 이미지 대량생산
백과사전은 지식을 편집해서 재구성 한 것으로 그 역사를 살펴보면 고대 로마의 철학자 테렌티우
10) 서론에서 언급한 것처럼 본 연구는 ‘인류의 시원에서 인쇄술의 발명 이전의 시대의 문자와 이미지의 관계’를 중심으로 고찰하였고
‘인쇄 발명 이후에서 디지털시대까지의 문자와 이미지의 관계’는 후속연구로 진행될 예정이다.
스 바로는 방대한 지식을 담은 저서 라틴어론저술에서 유래한다. 그 후에도 수도원의 수사들이 나 철학자들은 용어들을 편집해서 많은 종류의 지식으로 확장시키려는 노력을 하였다. 특히 백과 사전적 문장들은 종교학(신학) 또는 교양 과목(liberal arts) 같은 지식의 시스템들에 따라 후학 들이 학습하기 용이하게 배치되게 된다. 한 권(volume)에 섹션으로 나뉘고, 목적을 위한 컨텐츠 가 자연스런 순서로 편집되는 방식은 중세시대 때 완성이 된다. 1100년 이후 중세 필사본 형식으 로 ‘백과사전(Encyclopaedias)’이 만들어지기 시작한다(Twomey, 2008, pp.244~ 245)11). 세빌의 대주교였으며 석학으로 알려졌던 스페인의 이시도르(Isidore of Seville)는 저서로 어 원사전(Etymologiae)을 편저자로 어원백과사전 18권를 남겼다. <Figure 8> 어원사전은 당시의 교회와 신학적 문제는 물론 문법, 수사학, 수학, 의학, 역사 전반에 걸친 일종의 백과사 전. 컨텐츠를 재배열, 비유(allegory)를 추가해 서 “인체는 세계를 구성하는 4대 요소로 이루어 져 있다. 인간의 살은 흙의 성질을, 피는 물의 성질을, 숨결은 공기의 성질을, 체온은 불의 성질 을 지니고 있다.”라고 정의한 것으로 유명하다. 대표적으로 설교자의 ‘리브리 엘셈플로룸(libri exemplorum)’이라 불린 핸드북용 자료 책들로 제공된 4대 백과사전12)을 가지고 발췌의 연습 이 계속 되었다. 영국의 경우 이시도르의 백과사전은 문법의 연구로 사용되었고, 백과사전의 가장 중요한 중세 선구자는 바트홀로메우스와 네컴으로 설교를 위한 재료뿐만 아니라 과학적 정보를 제공으로 백과사전을 사용되었다. 백과사전들은 설교들과 자국어 문학에서 사용과 세 상을 이해하고자 하는 사물에 대한 언급들로 그 자체로 생생한 원고였고, 당시 성직자와 속세의 독자들 사이에서 인기가 있었다(Twomey, 2008, pp.244~245). <Figure 8>의 초기 필사본 (1100년대)은 <Figure 9>처럼 필사(1485)를 거쳐 <Figure 10>의 목판인쇄에 이르기까지 점차적으로 레이아웃이 정리되고 구조화 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Figure 8> Isidore of Seville and Etymologiae
<Figure 9> Bartholomaeus De Proprietatibus Reru (1485), Haarlem.
<Figure 10> Bartholomaeus Anglicus (c. 1496) from the Bridwell Library, This edition is illustrated with woodcuts introducing
11) 중세 대학과 수도원 텍스트에 대한 연구에 대하서는 Twomey, Michael, (2008), The Cambridge History of the Book in Britain에서 CHAPTER 10 University and monastic texts, pp.244~245.를 참고.
12) 세계 4대 백과사전이란 시렌 세스터 수도원의 대 수도 원장인 알렉산더 네컴(Nequam)의 물성론(De naturis rerum), 프란체스 코 수도회의 백과사전 편집자이자 학자였던 바르톨로마이오스(Bartholomaeus)의 사물의 속성에 관한 개론서(De proprietatibus reruc), 1240, Cantimpre의 토마스는 자연에 관한 위대한 백과사전 (Liber de natura rerum), c.1240, 보웬의 빈센트 (Vincent of Beauvais)의 자연의 거울 (Speculum maius), c.1245-55를 말한다. Twomey, 2008, pp.244~245 참고.
근대가 열리면서 본격적으로 목판 인쇄와 동판 인쇄가 많아지고 활자가 발명된 후에는 책의 출판의 양과 속도가 늘어났다. 그러나 본격적으로 정보를 압축하는 이미지 혁명은 중세가 아닌 근대에 일어난다. 계몽의 시대의 ‘이미지’는 새로운 방법으로 나름의 역할을 이어갔다. 주지하 듯이 근대의 과학혁명은 바로 ‘시각 혁명’이었다. 데카르트 이후 서구세계는 이성과 합리주의, 표준화와 계산가능성, 그리고 과학혁명을 이룬 계몽의 시대를 열었다. 이 시대는 ‘빛(=이성)’
에서 멀어진 것을 밝게 비추겠다는 뜻의 계몽주의(Enlightenment)의 시대였다. 이성의 빛으로 멀리 있던 모호한 것들을 분류, 설명, 정리하면서 근대는 시작되었다. 이 시대를 대표하는 학자 들의 주요한 연구주제는 ‘빛’에 대한 연구(optics)’였다는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다. 17세 기 이후 망원경이 세상에 알려지면서 갈릴레이, 요하네스 케플러, 데카르트, 뉴턴에 이르기까지 광학을 발전시켰다. 그리고 프랑스의 계몽사상가인 몽테스키외, 볼테르, 루소, 디드로, 엘베시 우스 등 데카르트의 후예들인 백과전서파들은 모호했던 것들에 이성의 빛을 비추어 각각 정의 하고, 분류해 정리한 것이 백과전서<Figure 11>13)이다.
디드로(Denis Diderot)와 달랑베르(Jean-Baptiste d'Alembert)가 공동 편집한 백과전서의 제1권이 나온 것은 1751년이다. 약 10년 뒤인 1765년에 본서 제17권이 나왔고, 또 약 7년 뒤인 1772년 도판집 <Figure 12> 제11권이 출간됐다. 그리하여 21년에 걸쳐 본서 17권, 도판 집 11권 등 총 28권이 완간됐다. 그러나 이성을 기반으로 한 문자로만 가득했을 것 같았던
백과전서는 ‘이미지’가 없었다면 불가능한 프로젝트였다. 여기에서 주목할 것은 바로 도판집 이다. 도판집이야말로 ‘지식 압축으로서의 이미지’로 구성되었다. 오늘날에도 본서 17권 보다 11권의 도판집이 18세기 계몽시대를 이해하는데 중요한 자료로 평가받는다(Kim, S., 2017, p.45).
19세기 산업혁명과 제국주의 그리고 자본주의의 원리에 따라 이미지가 대량생산되는 시대가 된다. 이 시기는 시각문화가 폭발하던 시기로 석판화, 광고, 포스터가 거리를 가득 채웠다. 인쇄 술의 발달로 책이 많이 출판되면서 도판이나 삽화의 양도 급증했다. 빅토리아시대 연구로 유명 한 리처드 엘틱은 “이 시대의 가장 큰 특징으로 ‘독서하는 대중의 탄생’을 말한다. ‘활자화 된 언어’의 독자층으로서 독서하는 대중의 등장은 빅토리아 시대의 또 다른 문화를 형성하였다.
19세기를 지나면서 보통교육을 받은 사람이 많아져서 결혼 기록부에 자기 이름을 적은 비율이 1841년에는 남성67%, 여성51%에서 1900년이 되면 양성모두 97%에 가깝게 상승했다 (Altick, 1973/2011, pp.107~108).”고 말한다.
그러나 이름을 쓸 수 있다고 독서능력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노동자 계급들은 장기간 노동으로 책이나 잡지를 읽을 수 있는 여유가 있을 리 없었다. 하지만 19세기 중반 이후 노동조건이 점차 개선되면서 독서의 확산을 촉진했다. 19세기 말에 이르면 독서에 열중하는 노동자가 공공 도서관 건물을 이용하거나 음악당, 값싼 극장, 스포츠 시합, 합창모임, 교회와 예배당에서의 오락과 철도 유람 등을 하는 수요가 늘어났다. 따라서 인쇄활자는 점점 더 극심한 경쟁을 치르 게 되었다(Altick, 1973/2011, pp.108~109). 그에 따르면 “빅토리아 시기의 대중은 전반적인 지식을 갖추지 못했고, 주의를 집중할 시간이 짧고, 흥밋거리 위주로 몰두하는 이 시기 대중의 특징은 적절하고 지속적으로 공급되는 책이나 신문, 잡지가 빅토리아 시대 인쇄물의 성격이 되었다. 문장과 문단도 이러한 대중의 취향에 맞게 바뀌어야 했다. 따라서 싼 가격으로 그 정도 를 취향과 흥미를 다룬 다량의 책과 신문, 잡지들이 날마다 쏟아져 나왔다. 싸구려 통속 소설과 스릴러, 감상소설을 끝없이 연재하는 값싼 주간지, 로맨스 물, 방화, 살인, 자연재해를 다룬 떠들썩한 뉴스들과 광고들까지 온갖 종류의 인쇄된 활자가 거리마다 가득했다. 시간의 여유가 있는 중산층의 경우 많은 여가시간을 독서에 할애했다. 하인들과 장인들을 고용할 수 있게 해준 여분의 용돈도 가질 수 있었다. 이러한 중산층을 겨냥한 인쇄물 시장은 날로 확장되었다. 이들 은 또한 배우기 위해 읽었다. 빅토리아 시대는 천체 역학에서 현미경으로 관찰할 수 있는 것까 지, 북극탐사에서 핀 만드는 방법까지, 심각한 사회문제에서 간결한 일화에 이르기까지 엄청난
13) 이 책의 정확한 명칭은 백과전서 혹은 과학, 예술, 기술에 관한 체계적인 사전(Encyclopédie, ou dictionnaire raisonné des sciences, des arts et des métiers)이다.
<Figure 11> Encyclopédie (1751)
<Figure 12> Encyclopédie, Volume 8, Plate 1,
"Relieur": Procedures for Binding A Book.
양의 정보는 그 만큼 많은 출판사들을 통해 발행되었다(Altick, 1973/2011, pp.111~112).”
19세기 본격적인 출판의 시대가 열리면서 이미지도 대량생산되게 된다. 특히 문맹이나 지식이 부족한 사람들에게도 정보를 잘 전달해야 할 의무가 삽화의 양을 많게 했다. 그러나 빅토리아시 대의 이미지는 자체 발신이나 정보의 압축보다는 내용(문자)에 종속되거나 장식의 수단이 된 다. 또한 일반적인 삽화(이미지)는 자본주의 시대의 마케팅의 수단으로 활용되면서 문자와 이 미지의 관계가 상보적인 것이 아니라 문자가 이미지보다 중요하다는 암묵적인 결론을 무의식 적으로 대중에게 전달하게 되었다. 19세기 이후 산업혁명, 제국주의, 자본주의의 논리에 따라 이미지가 복제되고 대량생산되는 시대는 시각문화가 폭발하던 시기로 석판화, 광고, 포스터가 거리를 가득 채우게 되고, 이후 사진, 영화와 같은 미디어의 등장했다. 사진의 탄생과 함께 나타난 ‘기술이미지’로 인해 문자와 이미지의 관계는 다시 역전 현상을 맞이한다. 20세기 중후 반이 되면 맥클루언의 말처럼 전자매체와 더불어 활자중심의 문자인간, 즉 구텐베르크의 은하 계는 끝나게 되고 새로운 “미디어는 인간의 의식을 재구조화”(Ong, W. J., 1982/2018)하게 된다.
4. 새로운 기초조형으로서 문자와 이미지: 이분법에서 이중성으로
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문자이전 시대에 동굴벽화의 흔적이나 기원적 기호로서의 문자에서부 터 문자의 파르마콘으로서의 문자, 켈즈의 서와 같은 중세 초기 필사본에서는 문자와 이미지 의 경계와 구별이 뚜렷하지 않았다. 14세기 성 데니스의 삶에 이르러서는 문자파트와 이미지 가 나뉘어졌지만 이때 이미지는 문자에 종속된 것이 아니라 이미지 스스로 독자적인 메시지를 내포하고 발신했었다. 이미지와 문자의 관계는 구텐베르크의 활자 이전시기까지만 해도 서로 공존하고 화합하면서 아름다운 앙상블을 만들어 냈다. 그러나 맥클루언이 미디어의 이해에 서 지적한 것처럼 문자의 발명(필사문화)에서 활자의 발명(인쇄문화)로의 이행되면서 문자를 리드했거나 자체로 다른 메시지를 전달했던 이미지는 문자에 종속된 것으로 이해되고, 보충, 보조하는 것이 되었다. “시각 기능을 강화하고 확장하는 표음 알파벳이 모든 문자 문화에서 청각과 촉각, 미각 같은 다른 감각들의 역할을 빼앗았다(McLuhan, 1964/2011, p.171).” 그러 나 문자중심의 정점이라고 여겨졌던 18세기 백과전서조차도 정보를 압축해서 한눈에 알 수 있는 도판의 이미지의 역할이 중요했음을 알 수 있었다.
매체철학자 빌렘 플루서(Vilém Flusser)는 인류문화에서 가장 중요한 두 가지 대립적인 전환 점이 존재한다고 보았다. 하나는 바로 ‘선형문자의 발명’이고, 또 다른 하나는 ‘기술적 이미지의 발명(Shim, H., 2012, pp.221~222)’이라고 말한다. 여기에서 그가 주목하는 것은 ‘이미지’,
‘문자’ 그리고 ‘기술적 이미지’다. 이를 시대구분으로 다시 표현하면, ‘이미지시대’, ‘문자시대’,
‘기술적 이미지시대’로 분류할 수 있다. 플루서는 이를 두고 각각 ‘주술사회’, ‘산업사회’, ‘지식 사회’로 분류하면서 문자이전의 시대는 순환적 사유방식이 지배적이었고 사유방식의 체계가 유기적으로 연결된다. 문자시대에는 선형적 사유방식이 지배적이었고 논리적 사유가 중요했 다. 기술적 이미지 시대의 사유방식은 개별적이며 모자이크처럼 구성되는 특징을 가진다고 말 한다. 이를 정리하면 아래의 표<Table 2>와 같다.14)
문자 이전 문자 이후 활자 이후
이미지 문자 기술적 이미지
이미지 시대 문자 시대 기술적 이미지의 시대
주술사회 산업사회 지식사회
순환적 사유방식 선형적 사유방식 개별적 사유방식
논리적 유기적 모자이크적
<Table 2> Vilém Flusser, A Turning Point in Human Culture: Images, Text and Technical Images
그러나 단순히 문자와 이미지가 어느 시대에 더 주도적이었는가를 알아보고자 하는 것은 이
14) 이 도표는 빌렘 플루서의 사진의 철학을 위하여에서 정리된 내용을 이글의 논지에 맞게 재정리한 것임. 심혜련, (2012). 20세 기의 매체철학, pp.221~222 참고.
연구의 의도가 아니다. 플루서가 정리한 문자이전, 문자이후, 활자이후라는 모든 시대를 관통하 는 이미지를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 바로 ‘내재적 이미지성’다. 앞서 설명한 트리얀 서체에서 고대 로마의 형식미를 찾아볼 수 있는 것도, 중세수도원에서 공간으로 페이지로 구조화되고 형상이 아닌 배경에서의 ‘작동원리로서의 이미지성’도 문자 안에 ‘이미지성’이 내제했기 때문이 었다. 중세 필사본은 구텐베르크의 42행서를 지나 19세기 아름다운 책 운동에서 모던 타이포그 래피까지의 여정에서 대상으로서의 이미지가 아닌 이미지성은 지속적으로 문자와 책의 외부와 내부에서 지속적으로 나타난다. 이처럼 의미화 되지 않더라도 존재하면서 나름의 역할을 하는, 형상보다는 배경으로서 여백으로서 존재하는 이미지를 앞서 ‘문자 안에 내제한 이미지성’이다.
이는 미첼(W. J. T. Mitchell)이 지적처럼 ‘이미지는 기호가 아닌 척하는 기호(Mitchel, 1986/2005, p.60)’이다. “내용과는 독립적으로, 개별 철자들은 이미지다. 즉 문자는 ‘형태’, 표 면 공간에 배열하는 순서와 크기, 텍스트의 시각적 구조 등을 통해 중요한 의미화에 기여(Kim, N., 2012, pp.17~24)”하는 데리다식 표기로 ‘(이미지)문자’이다.
데리다는 서양의 형이상학 전통이 음성중심주의(로고스 중심주의)라고 말한다(Derrida, J., 1967/2007, p.758~764). 여기서 로고스는 이성이다. 문자는 음성을 보조하고 활자의 발명이 후 이미지는 문자를 보조한다. 여기서 정리가 필요하다. 말(음성), 글(문자), 그림(이미지)의 순이다. 활판 인쇄술이 나온 이후부터 음성의 자리에 문자가 들어선다. 데리다는 쓰기(문자)는 문명을 가져왔지만, 인간으로 하여금 이미지적인 사고를 수축하게 만들었다고 설명한다. 이미 지는 다차원적 자유를 가지고 있고 문자는 다차원적 사유를 상실시켰다고 말한다. 따라서 데리 다가 말하는 문자의 개념은 이미지보다 우월한 그 무엇이 아니라 ‘이미지성을 포함하는 문자’라 하겠다. 그는 그라마톨로지에서 ‘문자 이전의 에크리튀르’를 설명하면서 서양 형이상학의 ‘이 항대립’과 ‘현전의 형이상학’을 해체하고자 한다. 서양의 형이상학은 세계를 이데아 / 그림자, 이성 / 감성, 본질 / 현상, 진리 / 허위, 정신 / 육체, 말 / 문자, 문자 / 이미지 등으로 대립으로 파악했다. 그러나 이항 대립적 사유의 위험은 하나가 다른 것보다 우위를 차지하고 지배하는 폭력적 계층질서가 내재하기 때문이다. 그는 파르마콘이 독인 동시에 약이듯이, 대립하는 것처 럼 보이는 양자는 이분법을 넘어 대리보충의 관계로 이해해야 한다고 설명한다(Jeong, I. K.
2017,pp.184~185).
이분법적으로 사고해 왔던 문자와 이미지의 관계를 재사유 해 보자. 문자는 본원적으로 이미지 성을 내포하고 있다. 문자는 구체적이고, 형태가 있으며 일정한 장소를 차지하는 3차원적인 공간 안에서 존재하기 때문이다. 반대로 이미지 또한 기호적, 문자적 속성을 가진다. 그동안 이분법적으로 사고해 왔던 문자와 이미지로는 오늘날의 문자와 이미지의 관계를 설명할 수가 없다. 앞의 고찰을 통해서 알 수 있듯이 인쇄술의 탄생 이전에도 이미 이미지와 문자는 완벽하 게 분리되지 않았고, 그 기원부터 문자와 이미지는 ‘분리 불가능한 것’으로 ‘문자는 이미지를 품고 이미지 역시 문자를 품는 방식’임을 알 수 있었다. 이에 대하여 적절한 비유로 분석심리학 자인 카를 융(Carl Gustav Jung)의 ‘비동시적 동시성’의 개념이 이에 대한 이해를 도울 수 있겠 다. 정리하면 융의 용어인 아니마(anima) 또는 아니무스(animus)와 같은 구조15)로 ‘문자 안에 있는 이미지성’, 또는 ‘이미지 안에 있는 문자성’로 설명할 수있고 또한 데리다식의 더블리딩 (double leading) 방식으로 ‘(문자)이미지’ 이거나 ‘(이미지)문자’로 표기한 ‘문자와 이미지’야 말로 ‘새로운 시대의 기초조형으로서의 문자와 이미지’라고 설명할 수 있겠다.
5. 결론 및 제언
이 연구는 문자와 이미지를 기존 기초조형의 장(field)에서 인문학의 장으로 확장시키고 재사 유하는 것을 목적으로 했다. 우리시대 새로운 기초조형은 기존의 점, 섬, 면과 같은 기하학적 기본요소를 넘어 시각디자인과 시각문화, 시각환경의 기본요소로서의 ‘문자’와 ‘이미지’에 대한 근원적 고찰이 요구된다.
인류의 시작과 함께 언어가 생기고, 언어는 소리언어와 몸짓언어, 공간을 차지하는 형태가 있는
15) 융의 분석심리학 이론에 따르면 아니마(anima)는 남성안의 여성성, 아니무스(animus)는 여성안의 남성성을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