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교의 가족치료적 기능에 대한 단상 (斷想)
최 준 식
(이화여자대학교)
들어가며
가족 생활은 대부분의 인간사가 그렇듯 어느 문화를 막론하고 필연적으로 많은 문제와 갈 등을 야기한다. 그 가운데에는 인간적인 노력으로 풀 수 있는 문제도 있고 그렇지 않은 경우 도 있다. 전자의 경우에 대표적인 것으로는 유산 문제와 같은 것을 들 수 있을 텐데 이런 문 제는 가족 구성원간의 협의로 얼마든지 해결할 수 있을 게다. 그러나 가족사에는 인간적인 노 력으로 풀 수 없는 문제들이 어쩔 수 없이 등장하기 마련이다. 그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것은 뭐니 뭐니해도 가족 구성원의 손실을 가져오는 죽음이다. 인간의 노력은 아무리 장대한 것이 라 해도 죽음 앞에서는 그 위력을 발휘하지 못한다. 죽음이란 영역은 너무나 다른 영역이라 인간들은 이 다름을 해결하기 위해 종교적 의례를 발명해냈다. 가장 사랑하는 가족 구성원을 자신들이 전혀 알지 못하는 너무도 다른 영역으로 떠나보내면서 그 상실감을 극복하기 위해 인류들은 종교의례를 사용했고 아직도 사용하고 있다. 다시 말해 가족 구성원의 죽음이라는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여 가족 질서의 와해라는 절체절명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사령제(死 靈祭)나 제사, 혹은 굿과 같은 종교의례를 발명해냈던 것이었다. 사람들은 바로 이런 종교의 례를 통해 가족 안에서 치유를 달성하고 가족 생활을 계속적으로 영위했던 것이다.
인간 능력을 넘어서면서 죽음에 버금가는 가족 내의 위기가 있다면 그것은 질병이라 할 수 있다. 지금은 한층 덜해졌지만 전통사회에서 병이 걸리는 것은 죽음을 의미할 때가 많았 다. 병이 걸리는 것 역시 해당 가족에게는 심대한 타격이 아닐 수 없었다. 잘못하면 가족의 해체를 가져올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런 불가항력적인 상황에서 전통적인 한국인들은 무당에 게 귀부(歸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물론 이때 가장 많이 이용하는 매체는 굿이다. 한국인들은 이러한 가족적 위기를 맞이하게 되면 무교 의례인 굿을 벌여 나름대로 해결방안을 찾아 가족 의 지속을 꾀한다.
한국 가족들은 위에서와 같은 심대한 위기말고 그보다는 작지만 그래도 꽤나 강도 있는 사회적인 문제에 직면한다. 그 대표적인 것은 누가 뭐래도 고부간의 갈등이리라. 고부간의 갈 등은 가족을 와해시키는 그런 파괴력은 없을지 몰라도 오랜 기간에 걸쳐 만성적으로 가족간 의 조화를 해치는 역할을 했던 것은 사실이다. 이런 역기능을 해결하기 위해서 전통사회에서 는 역시 부분적으로 무교와 같은 종교의례를 이용해왔다. 부모와 자식간에는 고부간의 갈등만 있는 게 아니다. 아버지와 아들, 어머니와 딸 등과 같은 친족간에도 갈등이 없을 수 없다. 이 런 문제에 직면해서 전통적인 한국인들은 무당이라는 상담원과 굿이라는 종교의례를 적절하 게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이제 이 작은 글에서 무교가 이런 가족적 갈등의 치유를 위해 어떤 역할을 했는지 보도록 한다.
1. 유교와 무교의 상보적 기능
전통 사회에서 - 주로 조선 사회에 해당되는 것이지만 - 종교의 사회적 기능을 볼 때 유교 와 무교는 많은 면에서 서로 보완해주는 기능을 했다. 이것은 전통 유교인들이 무교에 대해 갖은 수를 써 가면서 탄압을 가했지만 무교가 절멸되지 않은 것으로도 그 정황을 알 수 있다.
조선의 유교적 엘리트들은 무당을 천민으로 강등시킨다든지 도성에 출입을 못하게 한다든지 혹은 무세(巫稅)를 가한다든지 하는 여러 가학적인 방법으로 무교를 억압했다. 성리학의 속좁 은 정통의식으로 인해 대종교인 불교가 억압을 당하는 상황에 무교가 온전히 살아남으리라고 생각하는 것은 너무 많은 것을 바라는 일일 것이다. 그러나 그런 극적인 억압 속에서도 무교 는 전혀 위축되지 않고 민중들 - 특히 여성들 - 사이에서 면면히 이어져 내려왔다.
사정이 이럴 수밖에 없었던 것은 인생에는 수많은 위기 국면이 있기 마련인데 유교라는 현세성이 유달리 짙은 단일 신념체계로는 그 다양한 국면들을 다 당해낼 수 없었기 때문이었 을 것이다. 이때 유교는 일반적으로 남성적인 원리 혹은 부계를 반영하는 반면 무교는 여성적
인 원리 혹은 모계를 반영한다고 말할 수 있다. 주지하다시피 한 가정이란 부계뿐 아니라 모 계도 당연히 존재하는 것인데 부계만 유난스럽게 강조하는 유교가 가정에서 일어나는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었을 게다. 이해를 돕기 위해 각 종교가 주관하는 의례를 가지고 양 종 교를 비교해보자.
우리는 가족적인 종교 의례라 하면 으레 제사를 떠올리기가 십상이다. 제사가 철저하게 남자 중심으로 행해진다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는 상식적인 이야기이다. 그런데 유교는 가부 장 중심적일 뿐만 아니라 죽음 뒤의 세계인 내세의 존재를 부정하기 때문에 제사나 유교식의 상례만 가지고 인간의 절체절명의 과제인 죽음의 문제를 극복하기는 어렵다. 우선 무엇보다도 유교의 제사는 그 대상이 상당히 장성한 다음에 죽은 남성에만 해당된다. 우리는 주위에서 어 린 아이 때 죽은 사람이나 처녀 때 죽은 - 다시 말해 후사를 남기지 않고 죽은 - 여성들을 위 해 제사를 드리는 것을 본 일이 없다. 그러나 이런 죽음은 전통사회뿐만 아니라 어떤 사회에 서든 항용 일어나는 것일 터인데 이런 죽음에 대한 배려는 유교에서는 발견되지 않는다. 그러 면 이 일은 누가 혹은 어떤 의례가 담당해야할까? 쉽게 짐작할 수 있는 것처럼 이런 죽음의 처리는 고스란히 무당이 하는 굿의 몫으로 남는다. 굿에서는 그 대상을 가리지 않기 때문이 다.
굿이 대상을 가리지 않는다는 것은 부계 혹은 모계를 가리지 않는다는 데에도 해당된다.
조선시대의 가족제도는 상당히 엄한 가부장제라 시집온 뒤 여성들은 자신들의 친정 부모들의 일에 참견하는 게 쉽지 않았다. 특히 그들이 죽은 뒤 제사 드리는 것은 생각할 수 없는 일이 었다. 참으로 이해할 수 없는 일이지만 조선의 주부들은 자신은 한번도 보지도 못했던 남편의 조상들에 대해서는 뼈가 빠지게 제사 음식을 만들어 바쳐야했지만 자신의 친정 부모 제사에 는 간단한 참여조차 가능치 않았다. 이러한 정황은 인간의 기본적인 감정에 위배되는 것이다.
아무리 사회에서 금압을 가해도 인간의 감정을 완전히 눌러놓을 수는 없는 일이다. 여기에 굿 이 다시 등장한다. 유교식 제사로는 친정부모 모시는 것이 불가능할지 모르지만 굿을 - 이 경 우에는 사령제(死靈祭) - 벌여 친정부모를 장사지내는 것은 얼마든지 용인이 되었다. 우리는 여기에서 제사와 굿의 상보적인 관계를 다시금 발견할 수 있다.
제사가 그렇거니와 상례에서도 유교와 굿은 서로 보완하는 성격을 갖고 있다. 유교식의 장례는 나름대로의 뛰어난 상징성과 기능성을 갖고 있지만 인간의 죽음 문제를 해결하는 데 에는 한계가 있다. 부모와 같이 지극히 중요한 가족 구성원의 죽음은 가족 전체를 패닉으로 몰고 갈 수 있다. 특히 부모가 비명횡사하거나 큰 한을 품고 죽었을 경우 자손들은 큰 죄책감 에서 헤어나기가 쉽지 않다. 전통 사회에서 온전한 죽음을 겪는 경우는 흔하지 않아 남은 사
람들은 항상 심리적 부담감에 시달려야 하는데 유교식의 장례는 바로 이점을 처리하는 데에 약하다.
이 두 가지 의례를 비교해보면, 우선 유교식 장례는 굿에 비해 매우 일방통행적이라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유교식 상례에서는 산 자들이 죽은 자들을 향해 일방적으로 의례를 올리기 때문에 쌍방 간의 교통을 기대할 수 없다. 따라서 죽은 부모에 대한 속죄적인 감정의 발산은 강도 있는 오열로밖에는 해소할 수가 없다. 그러나 이 점에서 굿 - 특히 조상신이 직접 내려오 는 오구굿이나 새남굿 - 은 유교식 제사와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큰 강점을 갖고 있다. 강신 이 되는 사령굿에서는 반드시 조상신이 내려오는 순서가 있는데 이때 자손들은 조상이 된 무 당과 대화를 나눌 수 있다. 자손들은 이때 부모의 황망한 죽음으로 미처 추스리지 못했던 여 러 감정들을 표출하고 해결할 수 있다. 강한 죄책감이 있다면 부모에게 용서를 빌고 사죄를 받음으로써 자손은 죄의식에서 얼마간은 벗어날 수 있는 것이다. 아울러 부모의 혼이 저승에 안착하는 것을 확인할 수 있기 때문에 자손들은 확실한 안도감을 갖고 사자와의 감정을 정리 할 수 있다. 이런 과정을 거쳐 산 자들로 하여금 다시 일상생활로 돌아갈 수 있는 것은 무교 의 사령제가 갖고 있는 독특한 특장이라 하겠다.
반드시 무당과 관계되는 것은 아니지만 유교의 제사를 보완하는 가족적 의례는 한 가지가 더 있다. 보통 10월 상달에 지내는 고사가 그것으로 제사가 완전히 남성 중심으로 수행되는 것에 비해 고사의 호스트(혹은 호스테스)는 전적으로 여성, 즉 주부이다. 많은 경우 고사는 무 당의 주재 아래 치루어지는 경우가 있어 다시금 무교와의 관계를 생각해 볼 수 있다. 고사란 주지하다시피 성주신이나 터주대감, 삼신할머니와 같이 집안에 거주하는 작은 신(lesser gods) 들을 모시는 의례이다(최준식, 1995). 이 신들은 대체로 여성성을 띠는 신들로 구성되어 있는 데 이 때문에 주부가 이 의례를 관장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2. 치료를 위한 무교의 방법들
무교를 정의할 때 가장 흔하게 언급되는 것은 사람의 힘으로 풀 수 없는 문제에 부닥쳤 을 때 무당의 중재 아래 신령의 도움을 받아 그 문제를 해결하는 것 이라는 것이다. 이때 무 당이 제시하는 문제 해결 방법은 크게 보아서 점과 굿이라는 두 가지 사안으로 나눌 수 있다.
큰 문제에 직면한 단골(무교 신자)이 무당을 찾아가서 도움을 청하면 무당은 물론 점을 보는 것부터 시작한다. 이때 만일 사안이 가벼운 것으로 판명되면 점에서 끝날 수도 있지만 점을
치면서 자연적으로 발생하는 카운슬링으로 치유가 힘들면 그 다음 단계의 처방이 이어진다.
즉 갖고 온 문제의 경중에 따라 부적이 처방될 수 있고 - 부적만으로도 안될 경우에는 - 치성 과 같은 작은 굿이 권해지기도 한다. 그러다 문제가 대단히 중해 안되겠다 싶으면 마지막으로 고단위 해결책이 제시되는데 이게 바로 굿이다. 그러나 크게 볼 때 부적 처방은 점에 포함시 킬 수 있고 치성은 굿에 포함시킬 수 있다는 의미에서 무당의 치료 행위는 점과 굿으로 대별 될 수 있다.
여기서 점이나 굿에 대해 자세한 것은 서술할 필요가 없을 게다. 이 주제는 전문 서적을 보면 될 것이고 우리가 특별히 관심 가질 분야는 양 행위에서 나타나는 치료적 효과이다. 우 선 점부터 보자. 점을 볼 때 나타나는 무당의 모습은 상담가의 그것과 비슷해 흥미를 자아낸 다. 의뢰인의 문제를 들어주고 나름대로 해결책을 제시해주는 그 모습은 전체적으로 볼 때 서 양식 교육을 받은 상담가의 모습과 그다지 다르게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세부적인 모습으로 들어가면 상당히 다른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우선 무당은 아마도 종교적 사제 가운데 한국 인들의 기본 심성을 가장 잘 아는 사람일 것이다. 그들은 한국인들의 문제를 잘 파악하고 있 고 따라서 그 해결책에 대해서도 확실한 처방전을 갖고 있다. 다시 말해 실의에 빠진 한국인 들을 가장 빠른 시간 내에 위로해줄 수 있는 방법을 알고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보자. 어 떤 사람이 본인은 열심히 한다고 생각하는데 하는 일 마다 되는 게 없었다. 이럴 때 무당은 이런 말로 당사자를 위로한다. 당신은 지금 비단 옷을 입고 밤길을 가고 있다 라고. 이 얼마 나 절묘한 비유인가? 비단 옷을 입었다는 것은 본인은 할 만큼 한 것을 의미하는데 밤길이니 아무도 그 옷의 화려함을 알아보지 못한다. 따라서 문제는 몰라주는 다른 사람에게 있지 노력 한 당사자에게 있는 것이 아니다. 이런 위로를 받으면 당사자는 금세 마음의 안정을 되찾는 다. 자기의 노력이 인정되었기 때문이다. 문제는 밖에 있지 자기에게 있는 것이 아니다.
이 경우에서도 잘 알 수 있는 것처럼 무당들은 대부분의 경우 문제를 외부로 투사시킨다.
쉽게 말해서 모든 것은 당신 잘못이 아니라 남의 잘못이라는 것이다. 가장 비근한 예가 신도 에게 꽤 심각한 문제가 발생했을 때 아무 연관도 없어 보이는 조상들 무덤 잘못 쓴 탓으로 돌리는 게 그것이다. 이런 진단은 정확하지 않을 수도 있고 그 효과가 오래가지 않을지도 모 른다는 단점이 있는 것은 확실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렇지 않아도 많은 죄책감이나 불안 감을 갖고 상담하러 온 내담자가 이 근거가 없을 수도 있는 진단에 마음을 누그러뜨리는 효 과가 있을 수 있는 가능성이 있는 것도 부정할 수 없다. 일단 자기 잘못은 아니라는 영적 권 위자의 진단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안도감을 가질 수 있기 때문에 내담자는 훨씬 느긋하 게 사태를 관망할 수 있는 시간과 여유를 가질 수 있다. 이 효과가 얼마나 갈 수 있을지는 미
지수이지만 내담자는 이제 자신의 마음을 더 열 수 있는 상태가 된 것이다. 다시 말해 치료자 와 내담자 사이에 라뽀가 형성된 것이다.
상담가로서의 무당의 모습 가운데 다음으로 특징적인 모습을 들라면 내담자와의 높은 수 준에서의 동일시를 들고 싶다. 서양식의 상담가들은 기본적인 수칙으로 내담자와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상담에 임하는 것이 상식이다. 무당에게는 이런 원칙이 없다. 이들은 철저하게 손님과 한 편이 되어 기뻐하고 슬퍼한다. 그들의 편이 되어주는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서글 픈 자기 운명에 외로움이나 소외감을 한껏 느끼고 있을 내담자에게 무당은 큰 원군이 된다.
무당이 손님에게 보이는 이런 개방적인 태도는 겉보기에는 연극처럼 보일지 몰라도 결코 아 무나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고통에 빠진 상대방에게 마음을 여는 것은 그 고통을 같이 나 누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에 아주 가까운 사이가 아니면 하기 힘든 행동이다. 이 까닭에 정신 과의들도 환자들과 정서적으로 동일시하는 것을 극력 꺼린다. 환자의 비정상적인 감정상태가 갑자기 의사에게 전이되어 올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느 정도는 환자의 감정이 전이되어 오기 때문에 정신과의들은 이것에 대비하여 철저하게 훈련을 받는다. 이것은 무당도 마찬가지 이다. 무당이 상대해야 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더 이상 갈 데가 없어서 무당을 찾아오는 것이 다. 많은 경우 이들은 고농도의 아픔을 갖고 있기 마련이다. 무당은 이런 이들을 상대하면서 그들의 고통을 같이 짊어진다. 무당은 이때 수반되는 고통을 감내해야 한다. 무당의 이런 능 력은 어디서 올까? 그 비밀은 무당이 되려할 때 겪어야 하는 신병에 있다. 무당은 신병을 치 르면서 좀더 강건한 존재로 변해간다. 이유도 없이 십 수년을 앓으면서 무당은 다른 사람의 아픔을 흡수해도 문제가 되지 않을 정신력이 강한 존재로 바뀌게 된다.
무당의 이 같은 전적인 동조에 내담자는 자신의 마음을 활짝 연다. 그리고 친한 친구에게 도 할 수 없었던 이야기들을 털어놓는다. 경우에 따라서는 북받치는 서러움에 마구 우는 경우 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한국 사람 - 그 중에서도 특히 여성 - 들은 무당 앞에서 가장 솔직해진다는 이야기가 있을 정도로 무당과의 관계는 특별나다. 내담자들의 이런 행동은 바로 치료가 되는 경우가 많다. 이른바 카타르시스이다. 단지 자기 말을 들어주는 사람 앞에서 자 기의 가장 내밀한 감정을 정화하는 것 자체가 그 사람으로 하여금 그 문제에서 벗어나게 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런 무당의 노력을 보고 있노라면 짧은 시간에 치료효과를 극대화시키기 위 해 고단위 항생제를 쓰는 느낌을 받는다. 물론 약발을 지나치게 확실하게 먹임으로써 그 치료 의 지속성이 얼마나 갈지 모른다는 의구심을 충분히 품을 수 있지만 무당의 이런 카운슬링은 분명 효과가 있음에 틀림없을 것이다.
점칠 때의 이런 상황은 굿을 하는 가운데에서도 그대로 나타난다. 점이 개인만을 상대하
는 것이라면 굿은 집단, 그 중에서도 가족 전체를 상대한다. 따라서 집단상담적인 치료행위가 굿판에서 종종 벌어진다. 굿을 통해 풀려고 하는 문제들은 대부분 가족 전체가 얽힌 문제들이 다. 가족들은 자기네들끼리는 공론화 될 수 없는 그들 안의 문제를 무당, 혹은 무당이 분(扮) 한 신령의 중재를 통해 굿판에서 공개적으로 꺼내놓고 해결을 도모하는 것이다. 여기에 대해 이부영 교수는 이렇게 말한다.
「무당」의 권위, 무속적 치료에 대한 신앙의 강조, 환자와 그 가족과의 감정소통, 집단적 인 강한 암시와 설득, 환자의 개인적 갈등의 극적 재현, 지성보다 감정에 호소하는 점, 가무 (歌舞), 그리고 환자 혹은 무당의 초인적 실체와의 교통, 그리고 병식(病識)이 없는 증후적 치 유 등 무속의 치병의식은 모든 다른 나라의 민간치료에서 학자들이 발견한 것을 다 가지고 있다(이부영, 1972).
같은 주제에 대해 김광일 교수는 굿에서 보이는 집단치료적인 기제로 다음의 몇 가지를 든다. 우선적으로 들 수 있는 것은 동일시(identification)인데 굿을 하는 동안 참석자들은 공수 를 받는 사람에 대해서 같은 감정으로 느끼고 같이 기뻐하고 슬퍼한다. 아픔과 기쁨을 같이 나누면서 자동적으로 집단 치유를 하는 것이다. 더 나아가서 무당이 몰아지경이 되면 참석자 들은 자신의 열등감을 보상하고 신격화 된 느낌을 갖는다. 그 뿐만이 아니다. 참석자들은 음 식을 나누어 먹으면서 강한 연대감을 갖게 된다. 이 때문에 촉매작용 혹은 접촉반응 (catalysis)이 일어나 그 결과 참석한 사람들이 은밀하게 갖고 있던 문제가 표면적으로 드러난 다. 드러난다는 것은 이미 해결의 길에 들어선 것임을 의미한다. 이것을 김 교수는 보편화 (universalization)의 치료 효과로 부른다. 서로의 문제가 공론화 되면서 자기만 문제를 갖고 있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도 같은 문제를 갖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자기 문제를 보편화 시킨다는 것이다. 아울러 타인의 해결 방안을 자기 것으로 삼아 자기 갈등도 해소한다. 굿에 는 자기를 타인 속에서 찾고, 그리고 타인 속에서 해결을 모색하는 집단적 분위기가 있는데 이런 것이 곧 집단정신치료의 지혜인 것이다(김광일, 1991).
이해를 돕기 위해 이와 같은 상황이 벌어지는 경우를 예로 들어 설명해보자. 정신분열증 과 같은 정신병 증세가 있는 남자 고등학생의 예인데(김광일, 1991) 굿을 벌이자 공수를 통해 제시된 병의 원인은 다음과 같았다. 즉 주된 원인은 조상들이 화를 낸 때문인데 우선 조상들 을 잘 모시지 않아 그러했고 그 다음은 가정의 화목이 없어 조상들이 또 화를 냈다는 것이다.
생생함을 살리기 위해 공수 내용을 직접 들어보자. 이 집안이 이래서야 아들이 병 안 나고
어쩔꼬. 화목하지는 않고 저마다 잘났다고 저마다 위하라고만 하니 집안 화목이 있을 수 있느 냐? 그래서 내가(조상신) 참다못해 벌을 주었다.... 화목하고 부지런히 살아라. 병의 주원인은 가정이 잘못된 데에 있었다. 따라서 가족 전원이 서로 참회하고 용서를 빌면 병은 자연히 치 료된다는 것이다. 구성원들이 곧 개과천선을 약속했음은 물론이다. 이렇게 해서 굿을 통해 잃 어버린 가족의 평화가 다시 올 수 있는 기회가 생긴 것이다. 한국 무교에서 병과 도덕성을 연 결시키고 있다는 것은 이부영의 관찰에서도 엿보인다. 가령 백약이 무효일 때 한국인들은 종 종 내가 누구에게 무슨 잘못을 했는가라는 질문을 던지는 게 그것이다(이부영, 1972).
굿에는 이와 같이 기존질서의 유지를 보완해주는 면이 있는데 이러한 예는 그 다음에 내 린 흥미 있는 공수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신령이 가족 간에 화목하라고 충고한 다음 내린 공 수는 뜻밖에도 병원에 가서 치료를 받으라는 것이었다. 박사님의 약을 사 먹고 말을 잘 들으 라. 치료를 열심히 성심껏 받으라. 그러면 2월쯤엔 병이 다 나을 것이다(김광일, 1991). 무당 의 이런 발언은 굿 이외의 다른 치료를 권한다는 의미에서 다소 의외일 수 있겠다. 그러나 짐 작컨대 굿의 주인공은 굿의 효능을 별로 믿지 않는 어린 학생이었기 때문에 무당이 그것을 헤아려 병원을 갈 것을 권했는지도 모를 일이다. 무당은 자기가 하는 굿의 권위를 앞세우기보 다 내담자의 상황을 감안해 굿 전체가 성공적으로 끝나고 참석한 사람들이 모두 해결책을 얻 기를 기대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런데 정작 굿의 효험을 본 사람은 그 학생이 아니라 할머 니와 계모, 그리고 그의 세 고모였다고 한다. 그들은 가정의 화목을 깬 주인공으로 이런 공수 에 뜨끔하여 각자 갖고 있었던 울분이나 이 학생에 대한 죄책감과 불안감을 해소하고 위로를 받았다는 것이다. 김광일 교수의 보고에 의하면 이 학생 역시 2개월 후에 병이 다 나았다고 한다. 이렇게 보면 굿은 당사자 개인뿐만 아니라 굿에 참석한 식구들 전원에게 치유의 기능을 했음을 알 수 있다.
게다가 굿은 축제의 성격을 지닌다. 굿하는 중간에는 참석자 전원이 같이 춤추고 놀 수 있 는 시간이 얼마든지 있다. 특히 무감 같은 순서에서는 당사자가 무당의 옷을 입고 직접 춤을 추므로써 흥을 더 돋굴 수 있다. 사람들은 이러한 놀이에서 자신들의 억압된 감정을 정화시킨 다. 우리 인류 사회에서 바로 얼마 전까지만 해도 어느 문화를 막론하고 축제가 성행했던 것 은 축제가 갖고 있는 사회 정화의 기능 때문이었을 것이다. 한번 화끈하게 놀므로써 지난 1년 동안 간직했던 죄의식이나 열등감 등에서 단번에 벗어나는 것이다. 굿은 이런 기제를 다 갖추 고 있다. 뿐만 아니라 굿에서는 문제를 공론화하고 무당을 통해 돌아가신 조상들과 대화를 할 수 있기 때문에 굿이 가져오는 치유 효과는 일반 축제의 그것을 훨씬 능가할 것이다. 물론 굿 에서 행해지는 치료가 반드시 성공적인 것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키에브라는 정신의
학자에 의하면 무당의 치유는 진정한 정신의학적 치유로 볼 수 없고 일종의 교정적(矯正的) 인 감정적 체험(corrective emotional experience)으로서 제대로 된 치유기능을 하는 병식(病 識)이 없는 방어의 재구성(repatterning)에 불과하다는 것이다(Kiev, 1964; 이부영, 1972 에서 재인용).
3. 심리학적으로 풀어본 무당의 상담 기술 및 치유 능력
우리는 앞에서 무당이 행하는 치유능력에 대해 보았다. 이번에는 무당의 치유능력을 과연 심리학적으로는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지 보려 한다. 이 주제에 대해서 나는 김광일 교수의 논의에 많은 의존을 하였다(김광일, 1991). 그에 의하면 굿에서 나타나는 정신치료적인 기제는 여섯 가지로 나타난다. 즉, 암시, 카타르시스, 제반응(除反應, abreaction), 설득, 전이, 집단치료 의 효과가 그것으로 굿을 함으로써 얼마간이라도 치료효과가 있는 병은 주로 심인성(心因性) 적인 것에 국한된단다. 이를테면 불안신경증이나 히스테리, 심인성 위장장애 등과 같은 질병 에만 굿의 효과를 볼 수 있는데 그것도 일시적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그 효과가 일시 적인가 아닌가 하는 것은 쉽사리 판단할 수 있는 게 아닐 것이다. 김광일 교수의 입장은 서양 정신의학적인 면에서 무교의 치유 현상을 재단(裁斷)하는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
첫 번째 기제인 암시는 아주 간단한 개념이다. 점이나 굿을 할 때 내담자에게 주술적 조작 으로 언제쯤 나을 것이라는 암시를 주면 그들은 그 암시대로 이루어질 것이라는 확신을 갖게 된다. 이렇게 되면 분명 치유의 효과가 나타날 뿐만 아니라 내담자의 가족들에게도 용기나 위 안을 주는 효과도 보여줄 수 있다. 두 번째 기제인 카타르시스는 앞에서 이미 많이 보았다.
특히 공수가 내려오면 환자나 가족들은 내심 깊숙하게 간직하고 있던 울분이나 고통을 마음 놓고 표현할 뿐만 아니라 크게 울면서 감정을 정화시킨다. 무당의 옷을 입고 춤을 추는 순서 인 무감 때에는 춤을 격렬하게 추면서 트랜스 비슷한 상태에까지 이르러 고뇌를 발산시킨다.
이런 상황이 얼마나 격(激)했는가 하는 것은 전래의 속담으로 며느리 춤추는 꼴 보기 싫어 굿 못한다 와 같은 것이 있는 것으로도 알 수 있다. 보통 때 죽어지내던 며느리가 굿판에서만 큼은 시어머니 눈치 보지 않고 마음대로 그동안 시어머니에게 눌려왔던 감정을 폭발시킬 수 있었던 것이다. 이것은 기능적으로 전통 사회에 있었던 탈춤의 연희와 비슷한 현상이라 하겠 다. 억압되었던 신분 질서를 탈춤 추는 하루만 뒤집음으로 해서 하층들의 숨통을 틔어주는 것 이다. 이런 억눌린 감정의 분출이 있어야만 하층민들은 나머지 364일 동안의 억압을 견디어낼
수 있게 된다. 다시 말해 신분제로 점철된 동네사회가 이러한 해방적인 유희 덕에 무너지지 않고 돌아갈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굿판에서 신나게 춤을 춘 며느리는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 시어머니의 모진 박해를 견딜 수 있는 힘을 얻게 되는 것이리라. 여기서도 나름대로의 가족치 료 기제가 발동되는 것이다.
카타르시스는 굿의 다른 거리에서도 발견된다. 조상 거리 때 조상이 무당의 몸에 들어오 면 의뢰자들은 자신의 괴로움을 조상에 대고 마음껏 하소연한다. 이것은 조상을 부모의 이미 지로 생각하기 때문에 나오는 현상으로 일종의 어리광이라 하겠다. 이때 빙의된 조상들은 많 은 경우 한을 발설하는데 이 한에 대해 이부영 교수는 설득력 있는 해석을 가한다. 그에 의하 면 죽은 조상의 한은 생자(生者)의 무의식 속에 잠재하는 아직 충분히 연소되지 못한 잉여감 정(emotional residue)이다. 그는 더 나아가서 융의 분석심리학적인 입장에서 이러한 의례는 무의식의 내용을 의식화 시켜 분열된 마음을 통일로 이끌어 완전한 자기로 가까이 가는 것을 가능케 한다고 주장했다(이부영, 1970). 일리 있는 주장이라 생각되는데 이를 간단하게 풀면 굿을 하는 동안 내담자가 자신의 문제를 조상들의 한인 것처럼 표출시켜 직접 대면함으로써 문제를 해결하는 심리적 과정이라 보면 대과 없을 것 같다. 이런 면에서 굿이란 죽은 자들을 위해 하는 것이 아니라 결국 산 자들의 안녕과 복지를 위해 한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는다. 자 신들의 내면적 치유를 위해 조상들까지 동원시키는 것이다.
인간의 물욕이 가장 잘 드러나는 거리는 대감거리이다. 대감은 보통 돈에 대한 욕심이 많 은 신령으로 나타나는데 이때 같은 류의 본능이라 할 수 있는 성욕도 자연스럽게 분출시킨다.
대감거리에 자주 있는 일인데 성적인 농담을 풀고 성적인 행동을 함으로써 참석자들은 성욕 의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된다. 또 어떤 때는 굿에 참석한 사람들이 느끼는 울분이나 원한들을 모두 잡귀의 장난으로 몰아붙인 다음 제웅 같은 것을 만들어 태워버리거나 처 죽이는 시늉을 하는데 이런 상징적인 행동에서도 참가자들은 낮은 수준에서 카타르시스를 느낄 수 있을 것 이다.
다음의 기제는 다소 전문적인 용어로 제반응이라는 것이다. 제반응이란 풀어 이야기하면 병적 관념을 없애는 것으로 각거리에서 만나는 신들과의 관계에서 많이 발견된다. 김 교수의 분석에 따르면 참석자들은 조상을 비롯한 신들에 대해 존경과 두려움이라는 양가감정을 갖고 있다고 한다. 인간보다 더 큰 존재로 인식하니 존경감을 갖지만 잘 알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 에 두려움 또한 갖고 있다. 존경감을 갖는 것은 심리적으로 문제가 될 것이 없지만 두려움은 마음에 상흔을 남긴다. 따라서 의뢰자들을 비롯한 굿의 참가자들은 이 감정을 극복해야 한다.
이런 현상은 물론 조상거리에서 가장 적나라하게 나타나지만 참가자들은 모든 거리에서 무당
에게 빙의된 신령들과 직접 대면함으로써 그 두려움을 어느 정도 해소하게 된다.
김 교수는 다음 기제로 설득을 들고 있는데 이게 과연 치유적인 기제가 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다소 의문이 간다. 김 교수는 그 예로 어떤 정신분열증 환자의 치유를 위해 벌어졌 던 굿을 든다. 이 굿에서 무당에 빙의된 신령은 이렇게 호통을 친다. 부모 형제 화목하지 못 한 것이 병의 원인이라... 이제 네가 병을 나으려 한다면 부모가 더 자식을 사랑해야 한다.
너는 부모의 말을 잘 들으라(김광일, 1991). 위에서 본 예와 비슷하지만 여기서 우리는 또 다 시 무교식의 가족 치유가 수행되고 있음을 발견한다. 일단 가족 내의 비화목함을 병의 원인으 로 잡는 것부터 해서 부모나 자식 양쪽에 도덕적 의무를 주지시키는 일로 흩어졌던 가족의 정을 다시금 연합시키는 것이 그것이다. 부모는 자식을 더 사랑해야 하고 자식은 부모를 더 공경해야 하는데 이 과업이 성공한다면 가족 내의 모든 문제는 풀릴 것이다. 이런 정황을 두 고 김 교수는 설득이라는 용어로 설명하고 있다. 이런 설득을 통해 무당은 의뢰자로 하여금 환경에 대한 통찰력과 적응력을 갖게 해 올바른 삶의 방향을 가질 수 있게끔 한다는 것이다.
다음 기제는 전이로 김 교수의 설명은 지극히 간단하다. 무당이 엑스타시 상태에 빠져 빙 의가 되면 무당의 인격이 신령이나 조상들의 인격으로 전이된다는 것이다. 그러면 의뢰자들은 그것을 그대로 믿게 되는데 이때 치유의 효과가 생긴다는 것이다. 양자간에 신뢰가 생겨 치료 가 가능하다는 것인데 만일 이런 전이 현상이 없으면 치료효과는 없게 된다. 이와 관련해 빙 의에 대한 김 교수의 해석은 약간의 언급을 필요로 한다. 그에 의하면 무당의 인격이 변하는 빙의 현상은 인격의 해리 현상이며 자아의 일과성 퇴행에 불과하다(김광일, 1991). 그러나 치 료 효과가 아주 없는 것은 아니다. 우선 다른 인격으로 변함으로써 괴로운 현실에서 도피할 수 있게 해준다. 그러나 반드시 도피만 하는 것은 아니다. 빙의는 환상 속에서 소원을 성취할 수 있는 기회도 제공한다. 특히나 빙의는 신과의 상징적 결혼을 의미하기 때문에 억압되었던 성욕도 발산할 수 있다. 아울러 자신의 위상이 신과 동격이 되기 때문에 열등의식을 보상할 수 있고 부모의 이미지인 신에 의존할 수 있어 불안을 극복할 수도 있다. 이런 게 모두 상징 적인 소원성취에 속한다. 마지막으로 빙의는 재생의 동기도 있다. 고통스러운 현실에서 벗어 나 일시적으로 어린 상태로 퇴행했다가 몰아상태에서 깨어나면 새롭고 활기찬 존재로 다시 태어나게 된다. 이게 바로 상징적인 재생이라는 것이다. 김 교수의 이런 해석은 다소 지나친 환원주의적인 해석으로 들린다. 영적인 현상은 영적으로 혹은 종교학적으로 해석할 때 그 전 체의 의미가 드러날 터인데 이렇게 심리학적인 시각에서만 조망한다면 부분적으로밖에는 그 의미가 드러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너무 프로이트 학파의 시각에 치우친 해석이라는 것도 지적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의 해석이 전적으로 틀렸다는 것은 결코 아니
다. 그저 한국 무교에 대한 부분적인, 그러나 매우 유용한 해석으로 받아들이면 문제가 될 게 없을 것 같다.
마치면서
이 짧은 글에서 가족치료사 혹은 영적 치유자로서의 무당의 역할이 얼마나 드러났는지는 미지수로 남는다. 글을 마무리하는 자리에서 나는 우리의 주제와 관련된 작은 예를 들면서 글 을 끝낼까 한다. 이것은 한 10년 전쯤 구례에서 내가 직접 참여 관찰을 했던 어떤 굿에 대한 이야기이다. 굿을 벌인 주인공은 큰딸을 잃은 아버지. 아버지는 피리 전공의 인간문화재 이수 자였고 딸 역시 대학서 국악을 전공했다. 딸이 죽은 것은 약혼자와 함께 시댁에 인사를 마치 고 돌아오는 길에 당한 자동차 사고 때문이었다. 약혼자는 고시까지 합격한 사람으로 아버지 는 이 사위를 몹시 자랑스러워했다. 사고로 딸은 죽었지만 남자 약혼자는 살았다. 우리 옛말 에 죽은 부모는 땅에 묻지만 죽은 자식은 가슴에 묻는다는 말이 있지 않은가? 자기 뒤를 이 어 국악인으로 가던 그 딸이 축복 받는 결혼을 하게 돼 더 할 수 없이 기뻤던 아버지는 딸의 예기치 못했던 죽음에 그저 탈진이었다. 아무 기력도 찾을 수 없었다. 그래 아버지는 딸의 비 보를 듣고 아무 것도 먹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망자는 보내야 하는 법. 구례는 전라도니 망자를 보내기 위해서는 씻김굿을 해야 한다. 날짜가 정해지고 그 전날 씻김굿의 인간문화재인 무당 김대례 씨가 왔다. 김씨는 굿하 기 전날 밤새 이 아버지를 보다듬었다 . 무당은 먼저 간 큰딸 때문에 가슴에 못이 박힌 이 아 버지의 찢긴 마음을 밤새 어루만졌다. 그 내용이야 알 수 없지만 한참 앞에서 본 것처럼 무당 은 한국인의 정서를 가장 잘 이해한다고 하지 않았던가? 따라서 이 무당 역시 이럴 때 한국 인을 어떻게 위무해야 하는지 잘 알았을 것이다. 이 무당은 아마 영적 치유자로서 역할을 제 대로 했었나보다. 밤새 최고의 상담가로부터 카운슬링을 받은 이 아버지는 굿하는 당일 아침 부터 그동안 접어놓았던 식사를 하기 시작했다. 무당과 오래 대화를 한 뒤 마음이 풀렸던 것 이다. 어떤 형태로든 치유가 된 것이다. 그리고 굿은 잘 치러졌다. 그것도 하루 온종일 노래를 하고 춤을 추면서 치러졌다. 밤새 상담을 받아 한껏 편해진 마음에 구슬픈 노래와 춤은 아버 지의 마음을 더 정화시켰을 것이다. 딸의 한도 다 풀어주고 넋을 깨끗이 씻는 순서도 무사히 마쳐지고 망자의 혼은 저승으로 보내졌다. 아버지는 그제서야 안도를 할 수 있었다. 산 자로
서의 의무는 다 한 것이다.
이렇듯 굿은 산 자를 위해 하는 것이다. 굿의 명색은 꼭 죽은 자를 저승에 보내기 위해 하 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사랑하는 사람을 잃고 갈가리 찢어진 산 자들의 마음을 달래기 위해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남은 사람들의 새로운 질서를 위해 굿이 벌어지는 것이다. 그토 록 사랑하던 사람이 남긴 빈 공간을 메우고 살아 남은 사람들로 다시 판을 짜기 위해 벌이는 게 굿이다. 그런데 죽은 사람은 말이 없는 법. 따라서 무당이 중재자로 나서야 한다. 남은 자 들은 무당을 통해 마음 속의 앙금을 털어 내고 다시 마음을 추슬러야 한다. 잃어버린 조화를 회복하고 새로운 생활을 할 수 있게 조력을 아끼지 않는 영적 상담가가 바로 무당인 것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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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부영(1972). 한국민간의 정신병 치료에 관한 연구- - 무속 사회의 정신병 치료. 최신의학 15(2), 66.
이필영(1988). 샤머니즘의 종교사상, 한남대 출판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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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흥윤(1997). 한국 巫의 세계. 민족사.
최준식(1998). 한국의 종교, 문화로 읽는다 1. 사계절.
A Survey on the Family Therapy of Korean Shamanism
Choi, Joon Sik
(Ewha Women's University)
In the latest dynasty of Korea(Chosun, 1392- 1910), Shamanism have played a complimentary role of Confucianism in sustaining the society. It helped people with mental problems in it 's own way when they had no knowledge of psychotherapy. We can summarize it 's functions of family therapy in several ways.
The first way of treating client in Korean Shamanism is to project his/ her mental problems into outer causes such as the anger of dead ancestor. Typical attitude of a shaman is, when hosting client, to be fully on her side, which makes her open her mind immediately. This attitude accelerates the healing process by eliminating the psychological gap between the shaman and the client effectively. In performing a kut, shamanic ritual of Korea, we can often find that group therapy can take place, when familial members are all participating in the ritual very seriously. In this ritual some spirit obsessed in a shaman takes charge of counseling the cli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