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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사 - 통일신라사를 중심으로 제 5주차 : 전제주의하의 신라문화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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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사 - 통일신라사를 중심으로 제 5주차 : 전제주의하의 신라문화1

통일신라에 있어서의 지배적인 사상은 불교였다. 불교는 위로는 국왕으로부터 밑으로는 일반 민중에 이르기까지 모든 신라인들이 한결 같이 우러러 받드는 종교로서 중대한 사회적 역할을 담당하였다. 그러므로, 당이나 혹은 멀리 인도에까지 가서 불법을 구하는 많은 승려들이 있었 다. 일찍이 원광이래로 자장 ․ 의상 ․ 원측 등의 명승이 중국에 가서 불교를 배웠는데, 원측 같은 승려는 길이 당에 머물러 역경과 저술 등으로 중국 불교의 발전에 공헌한 바가 컸다. 한 편, 혜초는 인도에까지 가서 성적을 순례한 여행기인 『왕오천축국전(往五天竺國傳)』을 남기어 유명하다.

이렇게 당에 유학하고 돌아오는 승려의 수가 많아질수록 당에서 성립된 여러 종파가 신라에 도 전하여지게 되었다. 이리하여 열반종(涅槃宗) ․ 계율종(戒律宗) ․ 법성종(法性宗) ․ 화엄종 (華嚴宗) ․ 법상종(法相宗) 등 교종(敎宗)의 5교가 성립되게 되었다. 이들 여러 교파 중에서 귀 족사회에서 가장 두터운 존신을 받은 것은 화엄종이다. 신라의 화엄종을 처음 하나의 종파로 서 성립시킨 의상은 중국 화엄의 대종사(大宗師)인 지엄의 제자였다. 귀국 후 부석사(浮石寺) 를 창건하고, 이를 중심으로 화엄종을 널리 전하였는데, 그의 밑에서 많은 제자가 배출되었다.

화엄사상은 일(一)이 곧 다(多)요, 다가 곧 일이라는 원융사상(圓融思想)이며, 일심(一心)에 의 하여 만물을 통섭하려는 것이었다. 이러한 사상은 전제왕권을 중심으로 한 중앙집권적 지배체 제와 일치하는 것이며, 귀족사회에서 크게 환영된 까닭도 여기에 있었을 것이다.

이에 대해서 원효는 여러 종파의 대립 의식을 배격하였다. 원효는 당대의 고승 중에서는 예 외적으로 당에 유학하지 않았으나, 그의 학승으로서의 위대함은 당에서조차 존경을 받을 정도 였다. 그는 법성종 계통의 사상을 주로 하였다고 하지만, 그러나 불경 연구의 범위는 지극히 넓어서 『화엄경(華嚴經)』에 조예가 깊어 때로는 화엄종이라 불릴 정도이며, 그 밖에도 『반야 경(般若經)』․ 『법화경(法華經)』․ 『열반경(涅槃經)』․ 『아미타경(阿彌陀經)』․ 『무량수경(無量壽經 )』․ 『금강삼매경(金剛三昧經)』․『대승기신론(大乘起信論)』등 여러 경(經) ․ 논(論)에 주소를 달았 다. 그는 한 경론에만 집착하지 않고 여러 종파의 모순이 보다 높은 입장에서 융화통일되어야 할 것을 주장하는 독특한 사상체계를 수립하였다. 『십문화쟁론(十門和爭論)』은 이러한 그의 사상을 담은 저서였는데, 이러한 까닭으로 해서 그는 후일에 화쟁국사(和諍國師)라는 시호를 받기에 이르렀다. 이 원효의 사상은 그 시대의 전제주의가 내포하는 사회적 모순을 사상적으 로 해소시키려는 노력의 소산으로 보인다. 원효의 『대승기신론소』는 중국에 전해져서 중국 화 엄학에, 『십문화쟁론』은 범어로 번역되어 인도의 불교계에 각기 영향을 미치었다.

위의 귀족불교와 함께 주로 민중에게 환영을 받은 것은 정토신앙(淨土信仰)이었다. 정토신 앙은 위로는 국왕으로부터 밑으로는 노비에 이르는 온 국민의 신앙의 대상이 되었으나, 이에 열성을 나타낸 것은 가난하고 억압받는 민중이었다. 그것은 우선 불경의 깊은 교리를 터득하 지 못하더라도 아미타불에 귀의한다는 뜻의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을 외는 염불(念佛) 만으로 아미타불이 산다는 서방정토(西方淨土), 즉 극락(極樂)으로 왕생할 수 있다는 단순한 교리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었다. 정토신앙이 민중불교인 것은 그것이 또 압박받는 자에게 환 영받는 불교였기 때문이었다. 정토신앙은 현세에 만족하는 것이 아니라, 현세를 괴로운 세계 라 생각하고 내세인 극락에 왕생하기를 기원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이유로 해서 정토신앙이 크게 풍미하여 허다한 민중들이 현세를 등지고 입산(入山)하였으며, 육신의 산몸으로 하늘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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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아 서방정토로 왕생했다는 설화까지 전하게 되었다. 전제주의하의 사회적 모순이 발전함에 따라서 나타난 민중의 염세적 경향을 반영하는 것이라고 해야겠다. 그러므로 이 정토 신앙의 유행은 전제주의적인 사회체제에 대한 민중의 소극적인 사상적 반항이라고 할 수가 있다. 이 정토신앙의 유행은 신라 불교계에 있어서 하나의 큰 변화라 하겠는데, 이 정토신앙을 널리 전 도한 것이 원효였다. 원효는 학승으로서도 위대했지만, 파계한 뒤에는 방방곡곡의 촌락을 돌 아다니며 범부왕생(凡夫往生)의 정토신앙을 전파한 유행승(遊行僧)으로서 오히려 더 위대하였 다. 그의 정토신앙은 『유심안락도』에 잘 나타나 있는데, 거기서 그는,

정토의 깊은 뜻은 본래 범부(凡夫)를 위함이지 보살(菩薩)을 위함이 아니다.

라고 하였다. 그의 전도 이후에 신라인의 10중 8 ․ 9가 불교를 믿게 되었다고 하니, 그가 민 중불교의 대전도자였음을 여실히 찾아볼 수 있다.

한편, 왕경(王京)에서 멀리 떨어진 지방사회에서는 법상종의 미륵신앙(彌勒信仰)이 크게 유 행하였다. 이 미륵신앙은 장차 미륵불이 이 지상에 와서 현세에 이상사회를 실현해 줄 것을 믿는 신앙이었다. 이 신앙을 크게 떨치게 한 것은 경덕왕(742~765) 때에 김제의 금산(金山寺) 를 중심으로 활약하던 진표였다. 그는 백제의 유민으로서 이 미륵신앙을 통하여 백제의 정신 적 부흥운동을 일으킨 것으로 이해된다. 그러므로 백제 유민들 사이에서 크게 환영을 받았으 며, 더욱 나아가서 고구려의 유민들 사이에서도 환영을 받기에 이르렀다. 이같이 미륵신앙이 백제와 고구려의 유민들 사이에서 환영을 받은 것은 신라의 중앙집권적인 전제주의 통치 밑에 서 억압받던 그들이 사상적으로 백제와 고구려의 부흥운동에 호응한 것이며, 그 전통이 견훤 과 궁예에까지 이어졌던 것으로 믿어진다.

신라에서 전제왕권이 강화되면서, 유교가 불교에 대항하는 독립된 사상으로서 대두하기 시 작한 것은 새로운 경향이었다. 이러한 경향에서 신문왕 2년(682)에는 국학(國學)이 설립되었 다. 그 후 성덕왕 16년(717)에는 당으로부터 공자(孔子) ․ 10철(哲) ․ 72제자(弟子)의 화상(畵 像)을 가져다 국학에 안치하였다. 이어 경덕왕 때에도 국학을 태학감이라 개칭하고 박사와 조 교를 두어 교수를 담당케 하였다. 이 국학에서는 3과(科)로 구분하여 교수하였는데, 3과의 과 목은 다음과 같았다.

(가) 『논어(論語)』 ․ 『효경(孝經)』 ․ 『예기(禮記)』 ․ 『주역(周易)』

(나) 『논어』 ․ 『효경』 ․ 『좌전』 ․ 『모시』

(다) 『논어』 ․ 『효경』 ․ 『상서』 ․ 『문선』

이에 의하면 『논어』와 『효경』은 3과 공통의 필수 과목이었고, 오경(五經)과 『문선』은 과에 따르는 선택 과목으로 되어 있었다. 이 국학에 입학할 수 있는 자격은 대사(大舍) 이하 무위자 에 이르는 귀족들로 되어 있는데, 주로 육두품 출신이 많이 입학하지 않았을까 추측된다.

이러한 교육기관의 정비를 기초로 하고 원성왕 4년(788)에는 독서삼품과라는 관리 채용을 위한 일종의 국가시험제도가 설정되었다. 이에 의하면 독서의 성적에 따라 3등급으로 나누어 채용하였는데, 국학에서 배운 책들이 시험의 대상이 되었다. 그러나, 오경 ․ 삼사 ․ 제자백가 의 책에 모두 능통한 자는 순서를 뛰어 등용하였다고 한다. 이러한 독서삼품과의 설치는 관리 채용의 기준을 골품제의 신분보다도 유교적인 교양에 두자는 것이었다고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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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같이 점점 국가의 관심을 크게 한 유교는 대체적으로 말한다면, 진골을 중심으로 짜여진 골품제도와 이를 옹호하는 불교에 대항하는 성격을 띠고 있었다. 이 유교를 주로 신봉한 것은 육두품 출신들이었으며, 이들은 현세적인 도덕지상주의를 내세우고 불교의 불토 중심의 이원 적 세계관에 비판을 가하였다. 이 시기 유교의 대표적 인물인 강수나 설총이 모두 그러하였 다. 강수는 임나 출신의 육두품으로서 외교문서의 작성에 공이 큰 것으로 유명하지만, 불교를 세외교라 하여 이를 비판하고 도덕을 사회적인 출세보다도 더 중요시하였다. 설총은 원효의 아들로서 역시 육두품의 신분이며, 구결로써 경서를 읽는 법을 마련하였다고 하는데, 그는

「풍왕서」에서 국왕도 향락을 배격하고 도덕을 엄격히 지켜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므로 유 교는 전제정치 하에서 진골에 대항하고 있었고, 오히려 왕권과 결합하여 성장하여 갔다고 할 수 있다.

우선 사학에 있어서는 김대문이 주목된다. 성덕왕(702~737) 때의 학자인 그는 『계림잡전』 ․

『고승전』 ․ 『화랑세기』․ 『악본』 ․ 『한산기』 등 신라의 역사와 지리에 관한 저술을 하여 당의 문화를 동경하는 당시에 있어서 독자적인 지위를 자랑하고 있다. 그러나 불행히 이들 저서는 전하지를 않고, 그 일면을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에서 찾을 수 있을 뿐이다. 진골 출신인 김대문은 전제 왕권에 대항하여 전통문화에 기반을 둔 공동체적 정신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하려고 노력하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이 밖에 김장청의 『김유신행록』 등 전기물이 많이 저술 된 것도 대개 같은 이유에서일 것으로 미루어진다.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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