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사 - 통일신라사를 중심으로 제 4주차 : 전제주의하의 신라사회2
이러한 귀족들의 중심지는 왕경인 금성이었다. 왕경은 당 장안성의 조방제에 따른 새로운 도성제가 채택되었고, 그 유제를 아직도 발견할 수가 있다. 전국으로부터 재물이 모여든 왕경 은 신라 귀족의 낙원과도 같았다. 오늘날 경주에서 그 유적을 찾을 수 있는 임해전 ․ 포석정 등은 모두가 그들의 사치와 환락의 옛 모습을 말해 주는 것이다. 또 왕경에는 178,936호(戶) ․ 1,360방(坊) ․ 55리(里) ․ 35금입택(金入宅) ․ 4절유택(節遊宅) 등이 있었다고 하며,
성중(城中)에는 하나의 초가집도 없이 지붕과 담이 연하였으며, 노랫소리가 길에 가득하여 밤낮을 그치지 않았다.
는 기록도 역시 그러한 호사스런 모습을 나타내 주는 것이다.
신라의 전제주의적 성격은 군사조직면에서도 뚜렷이 나타나 있다. 삼국시대 신라의 중요한 군단은 6정(停)이었다. 그 조직면에서 부족적인 전통을 이어 내려왔다고 생각되는 6정은 통일 과 함께 그 이상의 발전을 정지하고 말았다. 그리고, 새로운 사회적 변화에 대비하기 위하여 새로운 군사조직이 이루어졌다. 그 대표적인 것이 9서당과 10정이었다.
9서당은 신문왕 7년(687)에 완성된 중앙의 군단이었다. 원래 모병에 의하여 조직되었다고 생각되는 서당은 점차로 증가하여 통일 뒤에 옷깃(금 衿)의 색깔에 의하여 구분된 녹금 ․ 자금
․ 백금 ․ 비금 ․ 황금 ․ 흑금 ․ 벽금 ․ 적금 ․ 청금의 9개 서당으로 정비되었던 것이다. 9서당 의 특징은 신라인뿐 아니라 고구려 ․ 백제 ․ 말갈 등의 이국민까지를 포함하는 점에 있는데, 이들은 왕에게 충성을 맹세한 왕의 직속부대 였던 듯하다. 귀족들이 그 지휘권을 장악하고 있 던 6정 대신에 9서당이 군제의 핵심이 되는 군단으로 등장한 것은 전제왕권의 강화책의 결과 라고 할 수 있다.
중앙의 9서당에 대해서 지방에 배치된 가장 중요한 부대가 10정이었다. 10정은 제일 지역 이 넓고, 또 국방상의 요지인 한산주에 설치된 남천정(이천)과 골내근정(여주)의 2개의 정을 비롯하여, 다른 8개의 주에 1개 정씩 배치된 음리화정(상주) ․ 고량부리정(청양) ․ 거사물정(남 원) ․ 삼량화정(달성) ․ 소삼정(함안) ․ 미다부리정(나주) ․ 벌력천정(홍천) ․ 이화혜정(청송)을 말하는 것이다. 이같이 전국에 고루 배치된 군단들이 국방만이 아니라 경찰의 임무도 담당하 였을 것임은 상상하기가 어렵지 않다. 이도 또한 전제왕권을 중심으로 한 신라의 집권적 성격 을 말해 주는 것이다.
이 밖에도 특별히 다섯 주에만 배치된 5주서, 9주의 주치에 각기 2개의 당이 고루 배치된 것으로 생각되는 만보당 등 여러 군단이 있었으나 중앙의 9서당과 지방의 10정은 그 중심적 인 존재였다. 이 같은 용의주도한 군사조직은 9주 ․ 5소경과 함께 전제주의적인 통치조직이 중요한 고리를 이루고 있었다.
통일을 전후하여 일반 민중의 생활은 점점 가난으로 기울어져 갔다. 빚을 갚지 못하여 노비 가 되는 예가 늘어갔다. 사회계층의 분열이 점차고 커져 간 것이다. 특히, 귀족의 근거지인 수 도 금성(경주)에는 많은 노비가 있었다. 왕궁에는 의식주(衣食住)를 비롯하여 여러 가지 일에
종사하는 많은 노비가 있었다. 또, 이미 말한 바와 같이 재상의 집에는 노동이 3천 명이나 되 었다고 전하는데, 귀족들이 상당한 노비를 거느리고 있었음을 짐작케 하는 것이다.
지방의 농민들은 보통 촌이라고 하는 말단 행정구획에 편입되어 있었다. 촌은 대략 10호 가 량의 혈연집단이 거주하는 자연촌락을 기준으로 편성된 것이었다. 이들 촌은 몇 개의 촌을 관 할하는 촌주(村主)를 통하여 집단적으로 국가의 지배를 받았는데, 이 목적을 위하여 촌 단위의 장적(帳籍)이 작성되었다. 최근에 일본의 정창원(正倉院)에서 헌덕왕 7년(815)에 작성된 것으 로 믿어지는 서원경(청주) 및 그 부근 4개 촌의 장적이 발견되었다. 3년마다 작성되는 것으로 여겨지는 이 장적에는 촌의 호수(戶數) ․ 인구수(人口數) ․ 우마수(牛馬數) ․ 토지면적(土地面 積), 뽕나무(상, 桑) ․ 잣나무(백, 栢) ․ 호두나무(추, 楸)의 그루수 및 호구(戶口) ․ 우마(牛馬)의 감소 등이 기입되어 있다.
이에 의하면 인구는 연령에 의하여, 정(丁; 정녀) ․ 조자(助子; 조녀자) ․ 추자(追子; 추녀자)․
소자(小子; 소녀자) ․ 제공(除公; 제모) ․ 노공(老公; 노모)의 6등급으로 나뉘어 있었다. 이러한 구분은 역역(力役)의 징수의 기준을 세우기 위한 것이었는데, 징수의 대상인 정의 수가 많고 적음을 기준으로 연(烟; 호, 戶)의 등급을 매기었다. 공연이라 부른 일반 호는 상상로(上上戶) 로부터 하하호(下下戶)에 이르기까지 9등급으로 나뉘어 있었다. 그런데 이 공연의 정의 수를 합계하여 일정한 단위마다를 1계연으로 계산하여 촌에서 역역을 징수할 수 있는 정의 총수를 파악하였다. 그런데 최근에는 호를 9등급으로 나눈 기준이 정의 수에 있는 것이 아니라 호의 재산의 정도에 있었다는 새로운 주장이 나와서 주목되고 있다.
또 이들 촌에는 관모답 ․ 전(田) ․ 내시령답 ․ 마전 등이 할당되어서 촌민에 의하여 경작되 었다. 촌주는 국가로부터 촌주위답을 받았으며, 촌민은 호에서 받은 논이란 뜻의 연수유답을 받았는데, 후자는 곧 성덕왕 21년(772)에 처음 주어졌다는 정전(丁田)이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위의 관모답과 마전에서의 수확은 국가의 수입이 되었을 것이나, 일종의 관료전(官僚田)으로 생각되는 내시령답과 촌주위답은 각기 내시령과 촌주의 수입이 되고, 연수유답에서의 수확은 농민의 수입이 되었을 것이다. 토지뿐 아니라, 뽕나무 ․ 잣나무 ․ 호두나무의 그루수가 기입된 것을 보면 여기에도 세(稅)가 부과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중앙귀족들은 가능한 한 농민으로부 터 많은 것을 거둬들이려고 한 것으로 보인다.
신라에서는 촌만이 아니라, 향 ․ 부곡 등으로 불리는 지방행정구획이 또한 설정되어 있었다.
종래 군 ․ 현 ․ 촌이 양인(良人)의 거주지인 데 대하여, 향 ․ 부곡은 노비적인 신분을 가진 천 민의 거주지로 생각되어 왔다. 그러나 향 ․ 부곡에도 군 ․ 현에서와 마찬가지 장관이 임명되고 그 주민도 군 ․ 현의 주민과 마찬가지로 인식되고 있었다는 주장이 나와서 주목되고 있다. 그 러므로 신라에서 농경에 종사하는 노동인구의 대부분을 차지한 것은 일반 자유민인 자영농민 이었음이 분명하다. 또 건축이나 주종(鑄鐘) 등 기술직에 종사하는 사람들도, 강고내미가 나마 의 관등을 받고 있는 것과 같이 그 신분이 하급 귀족에 속하고 있는 경우도 있을 정도여서, 결코 천민만은 아니었다. 따라서 이 시대를 노예사회라고 하는 주장은 잘못된 것임을 알 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