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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키 역사 교과서에 나타난 아르메니아인 제노사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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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키 역사 교과서에 나타난 아르메니아인 제노사이드

정재윤1)

Ⅰ. 서론

Ⅱ. 이주정착법으로 기술된 아르메니아인 제노사이드 1. 오스만제국의 충성스러운 신민

2. 아르메니아인의 반란과 오스만제국의 대응 3. 아르메니아인의 테러활동

Ⅲ. 결론

◁ 목차 ▷

1) 한국학중앙연구원, 선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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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stract>

Armenian Genocide in Turkish History Textbook

Jeong, Jaeyun

This article is for examining representation of Turkish perspectives on the Armenian genocide in Turkish history textbooks. The Armenian genocide in Turkey is called the first genocide of the 20th century. Today, more than 20 countries around the world recognize the Armenian genocide, but Turkey denies it. In Turkish history textbooks, the Armenian Genocide was directly denied as well, emphasizing the sacrifice in the process of dispatch and settlement policy (Sevk ve İskan Kanunu) implemented in the First World War, and then highlighting the unilateral claim of the Armenians. In Turkish textbooks, the Armenians were one of the loyal citizens (Millet-i Sadıka) of the Ottoman Empire but were described as having constantly revolted for independence with the influence and support of the European powers. In particular Turkish textbooks state that Armenian militants in the 1970s were terrorizing Turkish diplomats and threatening Turkey. The consistent view of Armenian genocide in Turkish textbooks was the Ottoman Empire's inevitable response to the Armenian revolt. Since it was not intended for the extermination of Armenians but was sacrificed in the war, Armenian Genocide is described as a unilateral assertion by Armenians, not a fac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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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ey Words> Armenian Genocide, Turkish History Textbook, Turkey, Armenia, a unilateral assertion by Armenians

Ⅰ. 서론

4월 24일 아르메니아 대학살 추념일을 맞아 올해도 ‘가해자’ 터 키와 서방 사이의 신경전이 반복되었다. 4월 24일 AFP 통신 등에 따르면 아르메니아와 세계 곳곳의 아르메니아 교민사회는 100여 년 전 '메즈 예게른'(Meds Yeghern) 당시 목숨을 잃고 박해를 당한 선조를 기렸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이날 발표한 성명에서 "오늘 우리는 메즈 예게른을 기억한다. 오스만제국 말기 에 1915년부터 150만 아르메니아인이 추방되고, 학살되고, 죽음에 이르는 행진을 했다"고 표현했다. 이에 터키 정부는 “아르메니아 인이 허구로 꾸며낸 주관적 진술에 근거한 트럼프 대통령의 표현 은 아무런 가치가 없다”고 유감을 표명했고, 아르메니아 학살을 국가 추념일로 지정한 프랑스를 맹비난하였다2).

터키의 아르메니아인 대량학살은 20세기 최초의 제노사이드3)

2) 연합뉴스 2019년 4월 25일자 기사 ‘아르메니아 ’종족학살‘ 놓고 올해도 ’역사전 쟁‘ 되풀이

https://www.yna.co.kr/view/AKR20190425168000108?input=1195m

3) 제노사이드란 하나의 독립된 집단으로 생존하는 데 있어서 본질적으로 갖추어 야 할 기반 자체를 파괴할 목적을 가지고 다양한 행위를 통해 한 국가나 종교 혹은 민족 집단을 완전히 절멸(annihilation)하기 위하여 계획되고 공모된 행위 라 할 수 있다. 이 계획의 목표는 특정 집단의 정치제도와 사회제도뿐만 아니 라 문화・언어・민족・감정・종교 및 경제적 생존의 기반을 해체하고 개인적 안전과 자유 그리고 건강과 존엄성을 파괴할 뿐만 아니라 심지어 그 집단에 소속된 개인의 생명까지 파괴하는데 있다. 따라서 학살자들은 정치적・사회적 구조와 문화, 언어, 국민감정, 종교, 그리고 국가의 경제적 기반에 이르기까지 철저하게 파괴를 시도하고, 학살의 목표로 선정한 집단의 개인적 자유, 안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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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린다(김상기, 2008: 24; 허시, 2009: 340). 얼마나 많은 아르메니 아인들이 목숨을 잃었는지에 대한 공인된 통계는 없으나 1914년 에서 1918년까지 사망한 아르메니아인을 서구 학자들은 150만 명 이상, 터키 정부는 대략 60만 명으로 추산하고 있다(호바니시안, 2011: 187). 아르메니아인의 대학살을 제노사이드로 공식적으로 인정한 국가는 독일, 프랑스, 이탈리아 등으로 20개국 이상4)에 이 른다. 벨기에와 스위스의 경우 아르메니아인 제노사이드를 역사적 사실로 부인하는 자에 대해서 형사책임을 묻고 있으며, 2015년 유 럽의회는 터키에 아르메니아 대량학살을 인정하라는 결의안을 채 택하기도 했다. 프랑스는 2012년 ‘아르메니아 대학살 부인 금지법’

을 통과시킨 후(김영술, 2015: 221-222), 2019년 '아르메니아인 종 족학살 국가 추념일'로 공식 지정했다.

오늘날 국제사회에서 터키의 아르메니아인 대량학살은 제노사 이드로 규정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터키 정부는 이를 부인하고 있다. 그렇다면 터키는 아르메니아인 제노사이드를 어떻게 가르치 고 있는지 터키 역사 교과서에 서술된 아르메니아 관련 내용을 중심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역사 교과서는 특정 국가의 정체성과 애국주의를 육성하는데 기여하는 과거의 ‘공식적이거나 공인된 이야기’를 제시한다. 따라 서 국가와 사회의 관계에 일정한 질서를 부여하고, 국가공민으로 서의 자격에 대한 경계를 설정한다. 이것은 해당 사회 또는 국가 의 구성원은 과거에 대한 기억을 담은 매체들 가령 문화재, 박물 관, 기념행사 및 기념물을 비롯한 여러 비공식적인 매체나 창작품

위엄성, 그리고 개개인의 목숨까지도 근절하고자 한다(F. Chalk and K.

Jonassohn: 1990: 8; Lemkin, 2008: 80; 사만다 파워, 2004: 54-68; 김상기, 2008: 119 재인용).

4) 아르메니아인의 대학살을 제노사이드로 인정한 국가는 프랑스, 독일, 이탈리 아, 벨기에, 스웨덴, 네덜란드, 스위스, 러시아, 폴란드, 리투아니아, 그리스, 슬 로바키아, 사이프러스, 리비아, 우루과이, 아르헨티나, 베네수엘라, 칠레, 캐나 다, 바티칸, 호주 등으로 20개국이 넘는다(김영술, 2015: 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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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통해서 획득되기도 하지만, 가장 권위있고 체계적으로 전수되 는 방식은 제도교육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제도교육에 포함된 교 과서는 주변의 학교와 가정으로 전파되고, 직접적으로든 간접적으 로든 국가의 승인을 기반에 두고 있으므로 상당한 권위가 내재되 어 있다(김유경, 2003: 6; 헤인・셀든, 2009: 32-33). 특히 터키에 서 교과서는 법률에 근거하여 정부의 관리 및 감독 하에 제작된 다. 터키 교육부의 승인 절차를 통하여 제작된 교과서의 내용은 터키 정부의 공식적인 견해가 투영된 결과이므로, 터키 역사 교과 서에 수록된 내용은 공식적이거나 공인된 사실로 학교에서 교육 하는 중요한 지식으로 작용한다고 볼 수 있다(정재윤, 2017: 128).

이 글에서는 터키 교육부 홈페이지에 게시된 터키 역사 교과서 중 아르메니아 제노사이드 관련 내용이 수록된 6권의 역사 교과 서를 분석 대상으로 삼았다. 터키 교과서의 아르메니아 제노사이 드는 8학년 교과서 2권, 10학년 1권, 12학년 2권 그리고 학년 표 기는 없으나 중등교육과정용 역사 교과서 1권에서 나타나고 있으 며, 6권의 교과서는 아래와 같다.

-ATAŞ, Çiğdem(2017a). TÜRKİYE CUMHURİYETİ İNKILAP TARİHİ VE ATATÜRKÇÜLÜK 8 (터키공화국 혁명의 역사와 아타튀르크주의 8), TOP.

-ATAŞ, Çiğdem(2017b). T.C. İNKILAP TARİHİ VE ATATÜRKÇÜLÜK 8, (터키공화국 혁명의 역사와 아타튀르크주의 8), MEB.

-ÜRKÜT, Mahmut(2017). TÜRKİYE CUMHURİYETİ İNKILAP TARİHİ VE ATATÜRKÇÜLÜK (터키공화국 혁명의 역사와 아타튀르크주 의), ATA.

-TÜYSÜZ, Sami(2017). TARİH 10 (역사 10), TUNA.

-OKUR, Yasemin 외(2017). ÇAĞDAŞ TÜRK VE DÜNYA TARİHİ 12 (현대 터키와 세계사 12), MEB.

-AKGÜN, Ergün 외(2017). ÇAĞDAŞ TÜRK VE DÜNYA TARİHİ 12 (현대 터키와 세계사 12), BİR-Y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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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학년 교과서(ATAŞ, 2017a; 2017b)인 『터키공화국 혁명의 역 사와 아타튀르크주의 8』에서 아르메니아는 목차 구성에서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시기에 나타나고 있으나, 실제 교과서 내용은 오 스만제국 시기 튀르크인과 아르메니아인의 관계, 제1차 세계대전, 1915년 사건, 아르메니아인 테러 단체 그리고 오늘날 터키의 안보 정책으로 19세기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한 기간 동안의 터키와 아르메니아의 관계가 압축적으로 서술되고 있다.

ÜRKÜT(2017)의 교과서 『터키공화국 혁명의 역사와 아타튀르 크주의』5)는 제1차 세계대전 중 코카서스 전선에서의 전투를 소 개하면서 1915년 아르메니아인들의 폭동, 이주정착정책을 서술하 며 아르메니아인들이 주장하는 제노사이드는 정확한 근거 또는 증거가 없는 허위 선전 내용임을 기술하였다. 아르메니아 관련 기 술이 가장 많은 분량으로 소개되는 10학년 교과서(TÜYSÜZ, 2017) 『역사 10』에서는 19세기 오스만제국 시기 아르메니아 문 제가 출현하게 된 배경, 아르메니아인 테러조직과 반란 그리고 제 1차 세계대전의 발발과 아르메니아인 반란에 대항하여 오스만제 국이 취한 조치 그리고 전후, 냉전시대와 그 이후 아르메니아 문 제와 함께 아르메니아 테러, 오늘날 아르메니아 문제에 대한 터키 의 입장에 대해 구체적으로 서술하고 있다. 8학년과 10학년 교과 서와 달리 12학년 교과서(OKUR 외: 2017; AKGÜN 외: 2017)

『현대 터키와 세계사 12』에서는 아르메니아인 제노사이드를 설 명하는 직접적인 서술은 나타나지 않는다. 대신 데탕트시대 터키 의 외교정책을 소개하면서 아르메니아 테러조직의 목적과 활동에 대한 터키의 대응을 기술하였다.

터키 역사 교과서에서 학년에 따라 아르메니아와 관련된 서술 내용과 범위는 다소 차이가 있으나 8학년, 10학년 및 12학년에 걸

5) 사용학년이 나타나지 않은 Mahmut ÜRKÜT(2017) 교과서의 경우, 교과서의 제목과 목차 구성은 8학년 교과서와 동일하지만 교과서에 수록된 내용은 10학 년 교과서에 수록된 ‘제1차 세계대전 중 코카서스전선’과 중복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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쳐 소개된 아르메니아인은 오스만제국의 신민 중 하나였으나 유 럽 열강의 영향과 지원을 받아 끊임없이 반란을 일으켰으며, 제1 차 세계대전 시기 아르메니아인의 조직적인 테러 활동과 이에 대 한 터키의 조치가 있었으며 아르메니아인들은 이를 제노사이드로 주장하고 있으나 사실이 아님을 강력한 어조로 서술하고 있다. 그 후 현대 시기에 이르러서도 이러한 아르메니아인들의 테러 활동 이 이어지고 있고 이에 대해 오늘날 터키를 위협하는 요인으로 소개된다.

Ⅱ. 이주정착법으로 기술된 아르메니아인 제노사이 드

터키는 아르메니아인 제노사이드를 전면 부인하고 있으며, 수많 은 아르메니아인들이 희생한 것은 전쟁 동안 발생한 안타까운 사 건으로 아르메니아인을 대상으로 한 의도적인 집단학살이 아님을 주장하고 있다. 대신 터키는 제1차 세계대전 중 아르메니아인들이 적군의 편에서 반란을 일으키자 이를 저지하기 위해 ‘이주정착법 (Sevk ve İskan Kanunu/ Tehcir Kanunu)’을 제정 및 시행한 것 으로 설명된다. 물론 터키 교과서에서 ‘아르메니아인 제노사이드’

라는 용어가 언급되고 있으나 ‘아르메니아인 제노사이드’를 인정 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아르메니아 제노사이드를 직접적으로 부 인(否認)하기 위한 용도로 사용된다.

과거 사실 또는 진실을 부인하는 방식에 대해 코언(2009)은 문 자적, 해석적, 함축적 부인으로 나누어 설명하였다. 코언은 문자적 부인이란 엄연히 존재하는 사실을 일어나지 않은 것 또는 진실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것으로 사실적 부인 또는 노골적 부인으로도 표현하였다. ‘학살 따위는 없었다’가 여기에 해당하며 사실 자체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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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하지 않는 것이 문자적 부인이다. 해석적 부인이란 어떤 사건 이 일어났다는 사실 자체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지만 전혀 다른 형태로 해당 사건을 해석한다. 가령 민간인 학살을 ‘부수적 피해 (collateral damage)’로, 강제추방이 아니라 ‘인구 이동(transfer of population)’으로, 고문이 아니라 ‘경미한 물리적 압박’으로 보는 것이 여기에 해당한다. 해석적 부인에서는 기존에 명명된 단어를 다르게 바꾸고, 완곡한 표현을 사용하며, 기술적으로 전문용어 (jargon)를 활용함으로써 인지적 의미를 우선적으로 부정하고, 동 일한 사건을 다른 범주로 분류하고 재배치하여(코언, 2009:

58-59), 사건의 본질적인 내용과 핵심을 희석하는 역할을 한다.

함축적 부인은 어떤 사건에서 흔히 뒤따라오는 심리적, 정치적, 도덕적 함의를 축소 또는 부정하는 것을 의미한다. 소말리아에서 굶어 죽어가는 어린이들 그리고 동티모르에서의 집단학살 자체는 인정하지만, 가슴 아파하거나 시급한 조처가 요구되는 도덕적 사 건으로 여기지 않는 것이 함축적 부인에 해당한다(코언, 2009:

59-60). 부정의 방식은 하나의 형태가 아닌 여러 가지 방식이 중 복되어 나타난다. 문자적 부정과 해석적 부정이 결합된 사례로 코 언(2009)은 아르메니아 제노사이드와 홀로코스트를 제시하였다(코 언, 2009: 67).

뤼젠(Rüsen)은 과거의 부정적 또는 부담스러운 부분을 대면하 는 방식 중 하나로 ‘거부’를 소개하였다6). 거부는 자국의 정체성 이 형성되는 역사와 문화 속에 부정적인 과거가 위치할 수 없게 하며, 억압, 은폐, 치외법권화, 상대화, 역사적 의미 변화 (suppression, concealment, exterritorialization, relativization,

6) 뤼젠(Rüsen)은 과거에 대한 완전히 상이한 두 가지 접근 방법으로 부정적 과 거에 대한 거부와 수용을 제시하였다. 수용은 부정적 사건들을 자국의 역사 안으로 통합하여 역사의 양가성(ambivalence)과 이질성(heterogeneity)을 띤 요소를 부과하는 것으로 뤼젠(Rüsen)은 수용의 방식이 가장 정교한 방식이라 고 하였다(Rüsen 2009: 1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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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nging the historical significance)의 형태로 나타난다고 하였 다(Rüsen 2009: 168-169). 억압이란 부정적 기억을 억누르는 심리 적인 기제를 뜻하며, 은폐는 어떤 사실이나 사건이 실제로 발생한 사실은 알고 있으나 이를 감추거나 드러나지 않도록 하여 책임을 회피하는 것을 의미한다(방지원, 2017: 138). 치외법권화란 도전적 인 역사적 사건을 다른 역사의 영역에 할당하여 자신의 역사 외 부에 위치하도록 만드는 것을 뜻하며, 상대화는 같은 역사 안에서 긍정적인 역사를 강조하여 부정적 역사를 약화시키고자 한다. 역 사적 의미의 변화는 과거의 부담스러운 부정적 성격을 사라지도 록 하거나 또는 긍정적인 사건으로 전환하여 부담스러운 역사를 해석하는 방식이다(Rüsen 2009: 169)

저자(연도) ‘부정’의 방식

코언 (2009)

1) 문자적 부정 2) 해석적 부정 3) 함축적 부정

Rüsen (2009)

1) 부정적 과거에 대한 거부

① 억압

② 은폐

③ 치외법권화

④ 상대화

⑤ 역사적 의미 변화 2) 부정적 과거에 대한 수용

임지현 (2019)

1) 단도직입적 부정 2) 혐의 부정 3) 실증주의적 부정

<표 1> 부담스러운 과거에 대한 ‘부정’의 방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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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지현(2019)은 부담스러운 과거에 대한 부정 중 홀로코스트와 제노사이드에 대한 부정의 범위가 매우 넓은데 이는 전지구적 환 경 속에서 상호 영향을 주고받은 결과라고 하였다. 그는 부정을 단도직입적인 부정, 혐의 부정, 실증주의적 부정, 세 가지로 분류 하였다. 단도직입적인 부정은 상대방의 기억을 단순 부정하는 논 리로 비교적 단순하므로 부정임을 쉽게 인지할 수 있기 때문에 생각만큼 위험하지 않다고 설명된다. 혐의 부정은 상대에게 혐의 를 제기하여 격한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것으로 단도직입적인 부 정보다 교묘한 방식이지만 비교적 사용하기 용이한 측면이 있다.

혐의 부정은 진정성과 신뢰성에 흠집을 내어 혐의를 쓴 대상에 대한 불신과 의혹이 유발된 것만으로도 충분하므로 이를 제기한 당사자는 혐의를 굳이 입증할 필요가 없다. 실증주의적 부정은 혐 의 부정과 달리 자신의 주장에 대한 신뢰성을 높이는 수단으로 사용된다. 상대측의 주장으로부터 사소한 오류를 찾아 역사적 진 정성에 의문을 제기하고 결국 거짓이라는 인상을 주는 방식이다.

실증주의적 부정의 방식은 특히 통계 수치에서 빈번하게 사용된 다(임지현 2019: 58-64). 터키 교과서에서도 희생된 아르메니아인 의 수를 기술할 때, 수치 오류를 기반으로 한 실증주의적 부정을 발견할 수 있다.

터키 교과서에서 이주정착정책은 제1차 세계대전 중 터키의 동 부 아나톨리아 지역에서 아르메니아인들이 폭동을 일으켜 이 지 역 주민들을 학살하면서 지역의 안전을 무너뜨리고 오스만제국을 위협하게 되자 시행하게 되었다고 기술된다. 이주정착정책에서는 이주자들을 보호하기 위해 노력했음을, 나아가 이주정착정책은 아 르메니아인 대량학살이 아님을 반복적으로 서술하였다. 이주정착 정책은 반란여부를 중심으로 지역을 선정하였고, 고아들은 사전에 고아원으로 보내거나, 환자, 장애인, 의회 의원, 공무원, 교사, 개 신교와 가톨릭교 아르메니아인들은 이주 대상이 되지 않았다고 기술된다. 이주정착정책은 아르메니아인들을 이주시켜 아르메니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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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 건국을 저지하기 위해 이루어진 것으로 아르메니아인들을 말살하기 위한 것은 아니므로 안전보장이 우선시되었고, 경제적 지원을 통하여 이주민들의 요구사항들을 충족시켜주기 위한 노력 이 있었음을 서술하였다.

이주정책 시행 과정에서 부족들 혹은 도적들의 습격에 대응하기 위해 오 스만 정부는 광범위한 대책을 준비했다. 직권을 악용하는 관리들을 재판하여 다양한 형벌을 받게 했다. 이주 여정동안 발생하는 아르메니아인들의 모든 요구사항들은 오스만 제국에서 부담했다(ÜRKÜT 2017; 40-41).

이주한 아르메니아인들이 남겨둔 재산에 대해서는 지방 자치단체에서 확 인하여 지불될 것으로 약속하였다(TÜYSÜZ 2017: 204).

이주정책법은 공공질서가 어려운 상황에서 시행되었고, 이주정착 후, 이주 기간 동안의 어려움과 부당한 대우를 조사하기 위해 오스만제국은 조사위원 회를 설립하여 군인과 경찰 등 1,397명을 처벌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주 과정에서는 불리한 기상조건, 도로의 붕괴, 교통수단의 부재, 강도의 공격, 식량 부족과 전염병 등으로 아르메니아인들이 목숨을 잃었다. 당시 이주한 아르메니아인 수는 대략 383,000명으로 이주 과정에서 대략 56,000명의 인명 손실이 있었으나, 오늘날 아르메니아인들은 대략 1,500,000명의 아르메니아인 들이 목숨을 잃었다고 주장하고 있다(TÜYSÜZ 2017: 205).

전쟁기간 동안의 인명 손실 통계는 정확하게 측정하기 어렵지 만, 역사를 이해할 때 통계는 불가피한 측면이 있다. 희생된 개인 의 죽음이 ‘수백만 명’ 중의 하나라고 해서, ‘수십만 명’ 중 하나의 죽음보다 덜 중요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개인이 아닌 특정 사회 또는 국가 단위에서 통계는 어느 쪽이 더 큰 희생을 치렀는지에 대한 논쟁으로 쉽게 이어지며, 희생자가 더 많은 쪽이 도덕적으로 정당성을 확보할 수 있다고 여겨진다(임지현 2019: 10)7). 터키 교

7) 제2차 세계대전에서의 폴란드인 사망자 수, 난징대학살의 사망자 수에서도 어 느 쪽의 희생이 더 컸으며, 수치 측정을 누가 했는지에 따라 희생자 수는 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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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서에서 아르메니아인 희생자 수 또한 이와 동일한 선상에 있으 며 터키의 정당성을 확보하고 아르메니아인의 거짓을 증명하기 위한 근거로 제시되고 있다.

이어서 아르메니아인에 의한 터키 외교관 테러 내용이 교과서 에 수록되고 있다. 아르메니아인의 반란과 이주정착법은 12학년 교과서 2권을 제외한 4권의 교과서에서 기술되고 있으며 터키 교 과서에서 이주정착법이 서술될 때, 공통적으로 아르메니아인 테러 단체에 의하여 터키 외교관이 목숨을 잃는 내용이 함께 나타난다.

특히 아르메니아인에 의한 터키 외교관 테러 내용은 이주정착법 이 소개되지 않은 교과서에서조차도 빠짐없이 등장하는 특징이 있다.

터키 교과서에서 아르메니아인 제노사이드 관련 서술은 오스만 제국 시기 아르메니아 민족과의 관계에서부터 오늘날 터키의 외 교정책에 이르기까지 하나로 이어지고 있다. 이 과정에서 터키는 아르메니아인 제노사이드를 일관되게 부정하고 있으며 동시에 교 과서에 기술된 일련의 과정과 역사적 순간들은 제노사이드를 부 정할 수 있는 근거가 되어 상호 뒷받침하는 역할을 한다.

1. 오스만제국의 충성스러운 신민

터키 역사 교과서에서 아르메니아 문제를 설명할 때 공통적으 로 제시되는 역사적 배경은 아르메니아인이 오스만제국의 ‘충성스 러운 신민’이었다는 점이다. 아르메니아 문제가 출현하게 된 배경 을 서술한 오스만제국 시기뿐만 아니라(TÜYSÜZ 2017: 177), 제1 차 세계대전 시기 터키의 동부전선을 설명할 때에도 아르메니아 민족은 수세기 동안 함께 서로 화합하며 살았다고 언급된다 (ÜRKÜT 2017: 80). 아르메니아인들은 오스만제국이 제공한 혜택

편차를 보였다. 이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임지현(2019)을 참고하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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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받아 사회의 여러 분야뿐만 아니라 고위직까지 차지하며 튀르 크인에 우호적인 민족이었으므로 프랑스혁명으로 인한 민족주의 영향도 받지 않을 정도로 ‘충성스러운 신민(Millet-i Sadıka)’이었 다는 점이 부각된다. 그러나 오스만제국의 와해를 목적으로 한 외 부 세력 즉 러시아를 비롯한 유럽 열강이 아르메니아인들을 자극 한 결과 터키를 상대로 반란을 일으켰다고 서술된다.

아르메니아인들은 수세기 동안 아나톨리아의 여러 마을과 도시에서 터키 인들과 함께 살았다. 오스만 제국이 제공한 평온, 신뢰 그리고 평화로운 환경 으로부터 혜택을 받은 아르메니아인들은 중개업, 무역, 농업 및 다양한 기량 을 통해 부유해졌다. 19세기 중반 이후부터는 고위 정부 관료와 심지어 정부 의 장관직에도 임명이 되었다. 아르메니아인들은 오랫동안 프랑스 혁명이 발 생시킨 민족주의의 영향을 받지 않았다. 세르비아인들과 그리스인들이 오스 만 제국의 통치에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키는 상황에서도 아르메니아인들은 자치 또는 독립과 같은 요구를 하지 않았다. 오스만 제국에 대한 종속과 터 키 사회와도 융합되었기 때문에 “Millet-i Sadıka”(충성스러운 신민)으로 불 렸다(TÜYSÜZ 2017: 177).

아르메니아인들은 오스만제국 시절에 영토 내 다양한 지역에서 튀르크 민 족과 함께 공존하며 살았다. 아르메니아인들과 튀르크 민족의 평화와 행복 속 공존은 19세기 중후반까지 이어졌다. 19세기에 일어난 민족주의 물결은 제국주의의 지배하에 있던 민족들의 봉기에 길을 열었다. 단, 오스만 제국의 영토 내의 민족들은 외세 자극의 결과로 행동에 옮기게 되었다. 새로운 이익 을 원하는 일부 국가들은, 오스만 제국 내에 있는 비이슬람교도들의 권리를 보호한다는 역할을 자처했다. 이로부터 수년의 기간 동안 러시아와 영국을 필두로 오스만 제국의 와해를 원하는 유럽 열강들은 아르메니아 민족 역시 그들의 목적에 사용하기를 원했다. 러시아와 영국은 오스만 제국에 대한 야 망을 실현시킬 목적으로 아르메니아인들에게 폭동을 장려하였다(ATAŞ 2017b: 206).

튀르크 민족이 아나톨리아 반도를 정복하고 난 후 아르메니아 민족은 튀 르크 민족의 보호아래 수세기 동안 함께 서로 화합하여 살았다. 오스만 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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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절에는 다양한 관직도 역임하여 대사, 주지사 더 나아가 장관까지도 오를 수 있었다. 하지만, 프랑스 혁명을 기점으로 세계에 번진 민족주의적 사상의 여파와 영국과 러시아의 간섭으로 아르메니아인들은 오스만 제국에 대적하려 는 작업들을 시작하게 된다. 아르메니아인들의 목표는 독립된 하나의 국가를 수립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아르메니아인들은 오스만 제국영토의 다양한 지 역에 흩어져 살았기 때문에 그 어떤 지역도 튀르크인들에게 대항할 이유가 없었다. 정부 수립을 원한 아르메니아인들은 아나톨리아 동부지방의 소수였 을 뿐이었다(ÜRKÜT 2017: 80).

오스만제국의 통치 아래 아르메니아인들이 ‘평온’한 삶을 유지 하고 있을 때, 러시아는 오스만제국 영토에 있는 기독교인들을 보 호한다는 명목으로 아르메니아인들을 러시아 편으로 끌어들이려 했고, 러시아를 견제하고자 했던 영국 또한 아르메니아에 개신교 를 전파하고 아르메니아 역사와 문화 수업을 통해 국민감정을 동 원하고자 했다. 프랑스 또한 아르메니아에 천주교를 전파하기 위 해 교회를 설립하였다(TÜYSÜZ, 2017: 177)라고 서술하며 당시 오스만제국 내 아르메니아인에 대한 유럽 열강들의 지원활동에 대해 구체적으로 제시하였다. 오스만제국을 멸망시키기 위해 유럽 열강들은 아르메니아 민족을 활용했으며 아르메니아인들에게 폭 동을 장려하기 위해 무력 활동과 아르메니아 정부 수립을 위한 지원을 아끼지 않았음을 비중있게 서술하였다(ATAŞ 2017b:

206). 이어서 오스만제국에 거주중인 아르메니아인들 중 일부는 오스만제국에 반하는 어떤 행위도 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오스만 제국에 대한 지지를 이어나갔다(TÜYSÜZ, 2017: 178)고 기술함으 로써 오스만제국에 대한 아르메니아인들의 반감은 일부 아르메니 아인에 국한된 것이었고, 오스만제국의 충성스러운 구성원 중 하 나임을 강조하여 설명하였다.

그러나 터키 교과서에 서술된 것처럼 오스만제국 내 아르메니 아인의 상황을 단순하게 묘사하기 어려운 측면이 있다. 오스만제 국 시기, 도시에 거주했던 아르메니아인들은 교육을 받은 부유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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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층으로 사회적으로 높은 계층에 속해 있었으나, 농촌에 거주한 아르메니아인들은 대부분 문맹으로 경제적으로 열악한 위치에 있 었다(강윤희, 2018: 10). 이 중 동부 아나톨리아 지역에 거주하였 던 아르메니아인들은 근대교육의 혜택을 받아 성공적으로 아르메 니아인 밀레트 자치제도와 법을 마련하게 되면서 다양한 분야에 서 두각을 나타냈다. 물론 아르메니아인 인구의 대다수를 차지하 는 농민의 열등한 위치를 고려하면 소수에 해당하는 아르메니아 인들의 약진은 과장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 르메니아인들의 가시적인 발전은 같은 지역에 거주했던 쿠르드인 들의 두려움과 경쟁 심리를 불러일으키는 계기가 되었음을 부정 하기 어렵다(Donald Bloxham, 2007: 18; 이은정, 2016a: 100-101 재인용)8). 다양한 민족과 다양한 종교 그리고 다양한 문화로 표상 되는 오스만제국에서 아르메니아 민족이 충성스러운 신민에서 반 란 조직으로, 나아가 오스만제국을 위협하는 배신자로 변화된 원 인을 설명하면서 유럽 열강이라는 외적 요인만을 제시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 오스만제국 내에서 아르메니아인들의 위치와 상황에 대한 설명은 누락시켜 오스만 제국 내부의 민족 간 갈등의 책임 을 유럽 열강으로 전가하는 것은 설득력이 떨어진다. 물론 당시 오스만제국을 둘러싼 유럽 열강들의 정치 구도는 첨예하게 대립 되었으므로 외적 영향이 컸던 것은 사실이다9). 그러나 외부 요인

8) 오스만제국 탄지마트 개혁의 내용과 실패는 이러한 문제를 더욱 위기 상황으 로 몰아갔다. 탄지마트 개혁으로 촉발된 무슬림과 기독교인들의 간극, 그리고 경제적 차이의 불균형은 단순한 박탈감 이상으로 배제와 대립을 초래하는 결 과로 치닫게 되었다(이은정, 2016a: 100-101). 19세기 후반 오스만제국 기독교 인들에 대한 무슬림들의 집단감정이 부상하였던 관계를 논의한 내용은 이은정 (2016a)을 참고하기 바란다.

9) 제1차 세계대전 이후 터키는 협상국의 점령으로 인하여 주변국과 유럽 열강에 대한 불신에 사로잡히게 되었고 이는 ‘세브르 신드롬’이라 일컬어진다. 이로 인해 터키는 주변 국가를 적으로 상정하며 전쟁의 패배 원인과 국내의 문제를 외부 요인으로부터 기인한 것임을 주장하며, 자국에 대한 진정한 평가를 회피 하고 있고 이는 터키 역사 교과서가 가진 명백한 한계로 지적할 수 있다(이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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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으로 아르메니아 문제를 설명하는 것은 아르메니아인 제노사이 드를 부정하기 위한 사전 단계임을 유추할 수 있다.

2. 아르메니아인의 반란과 오스만제국의 대응

터키 교과서에서 유럽 열강의 지원을 받은 아르메니아인 단체 의 여러 무력 활동이 구체적으로 소개된다. 아르메니아 무장 단체 의 반란은 1890년에 에르주룸, 1892-1893년 메르지폰, 카이세리 그리고 요즈갓, 1894년 사손, 1895년 제이툰 등지에서 일어났으며, 1896년 반 지역에서의 반란이 가장 큰 규모였다. 같은 시기에 에 르진잔, 시바스, 비틀리스, 마라쉬, 우르파, 디야르바크르, 말라트 야 그리고 엘라즈으에서도 반란이 있었다. 아르메니아 게릴라 조 직은 이후 몇 년 동안 오스만 제국의 다양한 국내 및 국외 문제 해결을 위해 노력하는 것을 기회 삼아 반란 영역을 넓혔다. 1896 년 이스탄불의 오스만 은행을 폭파한 아르메니아 테러리스트들이 1905년에도 파디샤 압둘하미드 2세의 폭탄 암살을 시도했다. 아르 메니아 게릴라 조직은 1909년에도 아다나(Adana)에서 일으킨 사 건들로 많은 사람들을 죽음으로 내몰았다(TÜYSÜZ, 2017: 178;

ATAŞ, 2017b: 206). 특히 아르메니아인의 반란은 제1차 세계대전 에서 연합군이 아르메니아인의 독립을 약속하면서 그 규모가 더 욱 커지게 되었다. 지방의 정치세력을 보유한 아르메니아인들은 협회와 군사단체를 설립하여 제이툰, 마라쉬 등의 지역에서 대규 모 폭동을 일으키고 이 지역 사람들을 공격하고 학살하였다 (ÜRKÜT, 2017: 40). 특히 아르메니아 무장단체들은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러시아에 합류하여 오스만제국 군대를 공격하였 는데, 아르메니아인들 중에서도 아르메니아 무장단체를 비난하였 고, 무장단체를 반대하는 아르메니아인들은 아르메니아 무장단체

정, 2016b: 2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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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부터 공격을 받는 경우도 있었음을 서술하며, 오스만제국을 공 격하는 무장단체들은 일부 아르메니아인에 국한된 주장임을 강조 하였다.

일부 아르메니아인들은 트리폴리타이나 전쟁과 발칸 전쟁을 기회로 삼아 그들이 머물렀던 지역을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이 전쟁들 직후에 시작된 제1 차 세계 대전 속에서 전쟁의 득을 본 일부 아르메니아인들은 활동을 더욱 확 대했고, 코카서스 전선에서 러시아군과 함께 우리 군대를 공격했다. (그러나) 진실은 수세기동안 아나톨리아에서 무슬림 집단과 함께 평화와 행복 속에 살 아온 아르메니아인들이 이 공격을 인정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안타깝게도, 아 르메니아 무장단체들에 반기를 든 아르메니아인들 또한 그 아르메니아 무장 단체들로부터 처벌을 받았다(ATAŞ, 2017b: 206).

제1차 세계대전에서 오스만제국은 전투뿐만 아니라 아르메니아 게릴라 조직의 반란으로 인하여 난관에 직면하였음을 강조하였다.

아르메니아 반란군은 오스만제국의 국민들을 학살하고 건물을 불 태웠으며 반, 차탁, 비틀리스 지역을 비롯하여 제이툰, 안텝 지역 에 이르기까지 많은 지역에서 동시 다발적으로 반란을 일으켰으 며 이러한 반란은 오스만 군대에 치명적이었고 러시아 군대가 이 지역을 점령하는데 결정적인 도움을 주었다(TÜYSÜZ 2017: 202).

특히 TÜYSÜZ(2017)의 책에서는 오스만제국을 배신한 아르메니 아인에 대한 적대감이 노골적으로 제시된다(TÜYSÜZ, 2017:

203).

1914년 사르카므쉬작전에서 아르메니아 무장 그룹은 러시아와 연합하여 오스만군대의 뒤통수를 쳤을 뿐만 아니라 …(중략)… 아르메니아인들은 자발 적으로 러시아의 노예가 되어 그들의 앞잡이 노릇을 하였고 또한 러시아인들 과 함께 오스만제국 군대에 맞서 싸우고 있었다. …(중략)… 동시에 오스만 군대에 복무중인 일부 아르메니아 병사들과 장교들은 무기를 가지고 도망쳐 러시아 군대에 합류하기도 했다(TÜYSÜZ, 2017: 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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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메니아인들은) 자발적으로 러시아의 노예가 되어 그들의 앞잡이 노릇 을 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러시아인들과 함께 오스만제국 군대와 맞서 싸우 고 있었다(TÜYSÜZ, 2017: 203).

터키 역사 교과서에서 아르메니아인 제노사이드를 서술할 때 오스만제국이 처한 상황에 대해 매우 구체적으로 제시하고 있으 며, 오스만제국이 얼마나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었는지 비중있게 서술된 특징이 있다. 터키 교과서에서 이러한 어려움을 타개하기 위한 노력으로 이주정착법이 제정, 시행되었다고 반복적으로 제시 되고 있다. 이주정착법의 법령, 시행방법, 이주민들에 대해 어떠한 조치가 취해졌고 어떤 배려가 있었는지 그리고 위법을 저지른 오 스만의 관리들을 어떻게 엄벌했는지 지나치게 세부적인 내용까지 나열된다. 이 글에서 살펴본 자료는 터키 역사 교과서이므로 터키 의 입장이 가장 무게있게 소개되는 점을 감안한다 하더라도, 터키 측의 일방적인 내러티브만 전달하고 있어 ‘역사 교과서’라는 사실 을 무색하게 하며 동시에 오스만제국의 입장에 대한 오늘날 터키 정부의 성명서라는 인상을 지우기 힘들다. 상대적으로 당시 아르 메니아인들의 상황에 대한 서술은 당황스러울 정도로 나타나지 않는다. 아르메니아인들은 오스만제국의 충실한 신민이었다는 점, 아르메니아인들이 반란을 일으켰을 때, 모든 아르메니아인들이 오 스만제국에 대항했던 것은 아니었다는 점, 일부 아르메니아 게릴 라 조직이 러시아를 도와 오스만제국을 공격했을 때조차도 오스 만제국의 일원으로 러시아에 대항하여 성실하게 전투를 이끌었다 는 서술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내용은 선별적으로 터키를 옹호하 거나 변호하기 위한 목적으로 취사선택되어 일부 내용만 교과서 에 반영되고 있으며 아르메니아인의 상황에 대한 언급은 발견하 기 어렵다.

터키 교과서에서 아르메니아인들의 반란은 구체적으로 그리고 반복적으로 강조되는 특징이 있다. 게다가 오스만제국을 와해시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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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 위한 목적을 가진 유럽 열강과 아르메니아인이 합세하여 반란 을 일으킨 것은 터키 입장에서 충격적이었으며 제국을 위협하는 것으로 무엇보다 적극적으로 조치하고 해결해야 할 사안이었다.

따라서 아르메니아인들의 반란을 진압하고 이에 대한 조치를 취 하는 것은 당연한 순서였으므로 그로 인해 발생된 희생과 피해는 의도적인 결과였다기보다는 부차적인 것으로 인식을 유도하는 방 향으로 서술되었다. 터키 교과서 서술에 나타난 이러한 일련의 과 정은 터키가 아르메니아인 제노사이드를 부정하는 주요한 기반으 로 활용되고 있다.

3. 아르메니아인의 테러활동

터키 교과서에서 아르메니아인 제노사이드는 아르메니아인들의 일방적인 주장으로 해외에 거주하는 아르메니아인들이 이주한 국 가들에 동화된 결과로 기술된다. 그들은 민족의식을 지키기 위한 수단으로 대량학살을 주장하고 있는데 이는 사실이 아님을 터키 교과서에서는 본문 서술을 통하여 직접적으로 부정하고 있다.

아르메니아인들이 대량학살을 주장하는 목적은 터키로부터 영 토와 배상을 받기 위한 것으로 이를 실현하기 위해 아르메니아 무장단체는 구체적인 계획을 세워 활동하고 있으며 동시에 이들 은 해외에 거주하는 터키 외교관들을 대상으로 테러활동을 하고 있다고 기술하였다.

아르메니아 무장단체의 목표는 ‘세계 각국들 그리고 국제기구들 에게 터키가 아르메니아인들을 대량 학살하였음을 알리고, 터키가 세계 각국들의 압력 아래서 대량 학살을 인정하도록 하며, 터키의 대량 학살 피해자 또는 그들의 자손들에게 배상금을 지불하도록 하여, 터키의 동부 지역이나 아르메니아 서부 지역의 영토를 터키 로부터 제공받아 위대한 아르메니아 국가를 수립하는 것이었다 (TÜYSÜZ 2017: 206, 208; OKUR 2017: 160, AKGÜN 외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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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7).

아르메니아는 이를 달성하기 위해 이주 중 발생한 아르메니아 인 인명 손실을 터키의 계획된 대량학살의 결과로 주장하고 있으 며, 아르메니아인들은 스스로를 ‘억압받는 공동체’이며 ‘아나톨리 아 지역의 주권을 터키인들이 강탈했다.’고 주장했다. 아르메니아 인들은 이러한 주장으로 서방 국가들의 지지를 얻기 위해 노력했 으며, 1970년대부터는 터키인들을 대상으로 테러활동을 시작했다 고 제시하였다(TÜYSÜZ 2017: 206).

특히 아르메니아 테러 단체들에 의하여 목숨을 잃은 터키 외교 관들을 ‘순교(Şehit)’라고 표현하고 있으며, 당시의 소식이 게재된 신문기사를 주요 자료로 활용하고 있으며, 터키 외교관의 이름과 구체적인 지위가 사진과 함께 수록되어 있다(OKUR 2017: 160;

AKGÜN 외 2017: 177; ATAŞ 2017: 207; ATAŞ 2017a: 204).

내용 저자(연도), 학년

아르메니아인 제노사이드 (‘이주정착정책’)

아르메니아 무장 단체의 터키 외교관 살해

ATAŞ(2017a), 8 ○ ○

ATAŞ(2017b), 8 ○ ○

ÜRKÜT(2017), - ○ ○

TÜYSÜZ(2017), 10 ○ ○

OKUR외(2017), 12 × ○

AKGÜN외(2017), 12 × ○

<표 2. 터키 역사 교과서에 기술된 아르메니아인 제노사이드와 터키 외교관 살해 내용 기술 여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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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2>

주: <왼쪽: 신문기사 1>"ASALA 살인..이제 터키에도, 9년 동안 21명 순교",

<오른쪽: 신문기사 2>"이번에는 불가리아에서 사망! 철의 장벽 국가에서 처음 으로 외교관 순교"(ATAŞ, 2017b: 207)

<그림 1>

주: <왼쪽: 신문기사> 1975년 10월 23일 "비엔나 대사 다니쉬 투날르길 살해당하다." 유선으로 자신을 아르메니아 독립단체로 밝힌 제보자는, 해당 살인은 본인들이 의도한 것이고, 범인은 키프러스 로마인 혹은 그 리스계 공작원 3명인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오른쪽: 사진> 순교한 외 교 인사들 중 일부(OKUR et al., 2017: 1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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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기술은 가해의 역사를 피해의 기억으로 전환시킨 전형 적인 사례로 볼 수 있다(임지현, 2019: 103). 세계의 여론은 무고 한 희생자에게 더욱 동정적인 경향이 있기 때문에 여러 민족들은 세계무대에서 “누가 더 고통을 많이 받았는지”를 경쟁하는데 필 사적인 모습을 찾아볼 수 있다(임지현, 2016: 5). 이와 동일한 사 례로 일본의 원자폭탄 희생자가 있는데, ‘세계 유일의 피폭국’인 일본은 일본인들로 하여금 자신들의 희생을 자국의 전쟁 범죄와 가해행위를 상쇄하고도 남는 희생으로 여기게끔 만들었다. 일본인 들에게 아우슈비츠와 더불어 히로시마는 인간이 저지른 가장 끔 찍한 범죄행위의 상징이었다. 따라서 일본인들에게 히로시마와 나 가사키를 기억하는 일은 난징대학살이나 일본군 ‘위안부’, 연합군 포로 학대 등 일본군이 저지른 잔학행위를 잊어버리게 하는 일이 기도 했다(임지현, 2019: 103-104). 터키 역사 교과서에서도 터키 인의 희생을 인정받고 아르메니아인 제노사이드를 부정하며 책임 을 회피하기 위해 교과서라는 매체를 통하여 결백을 주장하며, 터 키 민족주의를 강조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터키 입장에서는, 1915년에 일어난 이주 사건은 결코 대량 학살이 아니다.

왜냐하면 1948년에 채택된 UN의 대량 학살 범죄 방지 및 처벌 협약에서 대 량 학살은 “국민, 인종, 민족 및 종교 집단을 전부 또는 일부를 파괴할 의도 로 행해진 행위”로 정의되기 때문이다. 전선 후방이 안전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주를 시행했고, 거주민들은 그 지역을 떠나야만 했다. 다른 한편으로는 대 량 학살 혐의가 형성되기 위해서는 국가에 의한 고의적인 파괴 의도가 있어 야 한다. 만약 오스만제국이 아르메니아인들을 의도적으로 학살하고자 했다 면, 이들을 이주시키지 않고 그들이 거주하던 곳에서 목숨을 잃게 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주정책을 시행하는 과정에서 임무를 소홀히 했던 사람들을 처벌하지 않았을 것이며 반대로 그들에게 표창을 했을 것이다.

(TÜYSÜZ, 2017: 208).

나아가 아르메니아인 제노사이드에 대한 오늘날 터키 정부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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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장이 교과서 본문의 서술 내용으로 수록되어 있다. 터키 정부의 입장이 직접적으로 표현된 글이 자료의 형태가 아니라 교과서 본 문의 서술 내용으로 다루어지는 것에 대해 우선적으로 의문을 제 기할 수 있을 정도로 놀랍다. 이는 터키가 아르메니아인 제노사이 드의 책임을 세계적으로 인정받은 것에 대해 위기감이 직접적으 로 반영된 것으로 해석 가능하다.

III. 결론

터키 교과서에서 아르메니아인 제노사이드에 대한 일관된 시각 은 아르메니아인의 반란에 대한 오스만제국의 어쩔 수 없는 조치 였으며, 특정 인종을 말살할 목적으로 계획된 것이 아니라, 전쟁 이라는 특수한 상황 속에서 희생된 것이므로 아르메니아인 제노 사이드는 사실이 아닌 아르메니아인들의 일방적인 주장으로 기술 된다. ‘아르메니아인 제노사이드’는 터키 교과서에서 ‘이주정착법’

으로 제시되고 있으며, 아르메니아인의 테러를 당한 터키인들을 순교자로 표현하며 오히려는 희생과 피해를 당한 당사자는 터키 인임을 강조하였다. 터키 교과서에서 오늘날 아르메니아인들의 일 방적인 주장은 세계적인 인정과 지지를 받으며 터키를 위협하고 있으며, 그들의 주장은 허구임을 교과서 본문 내용을 통해 구체적 으로 서술함으로써 터키 정부의 입장을 역사적 사실로 치환하고 있다.

물론 터키가 아르메니아인 제노사이드를 인정하는 문제는 윤리 도덕적인 차원에 한정된 것은 아니다. 아르메니아가 과거 아르메 니아인들이 거주했던 지역에 대한 영토 소유권을 주장하면서 정 치적 성격을 띠게 되었고, 아르메니아인 거주 지역은 쿠르드인들 이 대다수 거주하는 쿠르디스탄의 일부이므로 쿠르드족 문제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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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관되어 있으며(김영술, 2010: 421), 이웃 국가인 아제르바이잔과 의 외교문제 그리고 아제르바이잔과 아르메니아와의 관계에 이르 기까지 폭넓게 얽혀있는 특징이 있다. 그러나 오스만제국에서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터키가 처했던 복합적인 상황을 고려한다 할지라도 아르메니아인 제노사이드가 없었던 일이 되는 것은 불 가능하다.

터키 교과서에서는 아르메니아인 제노사이드에 대해 단도직입 적으로 사실 그 자체를 부정하고 있으며, 동시에 수많은 아르메니 아인들의 희생은 인정하지만 전쟁 시기의 부수적인 피해였음을 완곡하게 표현하여 책임을 축소하고 희석하고자 하였다. 또한 오 스만제국에 대한 아르메니아인들의 반란과 배신행위를 부각하여, 아르메니아인들에 대한 불신을 조장하여 아르메니아인들의 주장 은 신뢰할 수 없는 것임을 유도하였다. 이와 함께 아르메니아인을 대상으로 취했던 오스만제국의 조치(즉 제노사이드)는 처음부터 의도한 것이 아니라 아르메니아인들이 제공한 반란이라는 원인에 대한 후속적인 결과로 오스만제국의 행위에 대한 정당성을 확보 하고 이를 주입하고자 했다. 1970년대 아르메니아 무장단체들에 의해 목숨을 잃은 터키 외교관들의 사진과 신문 기사를 교과서 내용에 포함시킴으로써 전쟁 도중 목숨을 잃은 아르메니아인들의 희생보다 1970년대의 ‘무고한’ 터키 외교관들의 희생이 상대적으 로 더욱 가슴 아프고 중대한 일로 확대하였다. 이와 함께 터키 외 교관을 대상으로 테러를 행하는 아르메니아인들이 주장하는 제노 사이드는 믿을 수 없는 거짓으로 터키의 부정을 합리화하고자 하 였다. 이처럼 터키는 역사 교과서를 통하여 ‘아르메니아인 제노사 이드’라는 용어를 직접 사용하며, ‘아르메니아인 제노사이드’를 강 력하게 부정하고 있으며 교과서 전반에 걸쳐 다양한 ‘부정’의 방 식을 적극 활용하고 있다.

지금의 터키 교과서가 개선되기 위해서는 단순히 교과서 내용 수정의 문제를 넘어 오늘날 터키의 교육, 정치적 환경, 그리고 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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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 관계에 이르기까지 다각적인 차원에서의 변화가 총체적으로 모색되고 공동의 협력 체제가 우선적으로 구축되어야 할 것이다.

터키의 교과서는 국가의 엄격한 관리 하에서 만들어지고 제공되 므로, 교과서 개선은 결코 쉽지 않을 것으로 판단된다. 그러나 오 늘날 모범적인 역사 인식과 화해를 성취한 국가인 독일 교과서 또한 1970년대 이전까지 나치시대의 부정적이고 부담스러운 과거 는 회피되었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1970년대 이후가 되어 서야 독일 교과서에서 비판적인 나치의 과거가 서술되기 시작했 다는 점을 고려하면, 터키 교과서의 아르메니아인 제노사이드 문 제 또한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한 것이나 개선을 기대할 수 있 다고 본다.

<주요어> 아르메니아인 제노사이드, 터키 역사 교과서, 터키, 아 르메니아, 아르메니아인에 의한 일방적인 주장

<참고문헌>

강윤희(2018). 아르메니아 문제와 유럽 강대국 외교: 1877-78 러시아-투르크 전쟁 과 베를린 회의를 중심으로. 러시아연구28(2). 1-48.

김영술(2015). 아르메니아인 대학살을 어떻게 볼 것인가. 내일을 여는 역사 60.

220-2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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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고일 2019/05/28 심사일 2019/06/13 게재확정일 2019/06/25

Name Jeong, Jaeyun

Belong Center for International Affairs, The Academy of Korean Studies E-mail jjy@aks.ac.kr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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