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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키 테러조직의 목표와 실태에 관한 고찰

주 터 키 대 사 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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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키 테러조직의 목표와 실태에 관한 고찰

2013년 12월

주터키대사관 도봉개 참사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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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 차

Ⅰ. 서론 1

Ⅱ. 터키내 테러조직의 태동 4

Ⅲ. 테러조직별 활동 7

1. 좌파 테러조직 7

가. 좌파 테러조직의 태동 7

나. 1980년대까지의 좌파 테러조직 10 다. 혁명인민해방당/전선(DHKP/C) 13

2. 분리주의 테러조직 18

가. 터키와 쿠르드문제 18

나. 쿠르드노동자당의 태동 19

다. PKK의 초기활동(1978-1984년) 21 라. PKK의 게릴라전 수행 시기(1984-1999년) 24 마. 외잘란 체포 이후의 PKK 활동 33

3. 이슬람 원리주의 테러조직 35

가. 터키 히즈볼라(Hizballah) 그룹 개요 35

나. 터키 히즈볼라의 태동과 활동 36

다. 알카에다 연계 테러단체의 활동 40

Ⅳ. 테러조직의 주요 공격형태 44

Ⅴ. 결론 48

참고문헌 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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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 서 론

2013년 5월 11일 터키 남부에 있는 시리아와의 작은 접경도시 레이 한르(Reyhanli) 시청 근처에서 2건의 큰 폭발사건이 발생하였다. 이 사건 으로 52명의 무고한 인명이 사망하였으며 수많은 부상자가 발생하였다.

3월 21일 테러조직 쿠르드노동자당(PKK, 이하 PKK로 함)1) 지도자 압둘라 외잘란이 옥중 서신을 통해, PKK 요원들의 무기해제와 철수를 호소한 이래, 터키내에서 평화의 무드가 조성되고 있는 상황에서 발생한 이 사건은 터키 국민들을 일순간에 큰 충격에 빠뜨렸다. 사건 발생 이후 부터 터키 검찰과 경찰은 조사를 벌여 혐의자 33명을 체포하였으며, 최근 관할 아다나(Adana) 검찰은 혐의자중 19명에 대해 국가의 단합(unity)을 훼손하였다는 혐의를 들어 종신형을 구형하였다.

터키의 국가안보에 있어서 최대 위협세력이었던 PKK와의 평화협상이 지속되어 터키 국민들이 낙관적 미래를 꿈꾸고 있는 상황에서 이러한 대규모 테러가 발생한 이유는 무엇일까? 터키 경찰은 10월 2일 레이한르 사건 수사에 대한 발표를 통해, 체포한 33명은 시리아 정부의 정보 기관과 관련되어 있거나, 불법 테러단체 터키인민해방당/전선 (THKP/C)의 지도자인 미흐라치 우랄(Mihrac Ural)과 관련된 인물들이 라고 밝혔다2). 레이한르 사건의 배경에 대해서는 앞으로 있을 재판과정 에서 상세하게 밝혀지겠지만, 이 사건은 PKK와 다른 이념과 조직을 가진 또다른 테러조직이 터키에 존재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터키의 국부인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Mustafa Kemal Ataturk)는 1923년 터키공화국을 건설하면서, 국가의 기본이념을 세속주의3) (secularism)로 두고 종교나 민족에도 불구하고 터키 영토에서 터키어를 쓰는 모든 사람들을 터키 국민으로 규정하였다. 이로 인해 과거 오스만 제국을 구성하던 다양한 민족들이 터키 국민으로 통합되었다. 이 과정 에서 아타튀르크는 법과 질서를 세우면서 국가의 안정을 유지하려고

1) 쿠르드노동자당을 의미하는 PKK는 쿠르드어 Partiya Karkeren Kurdistan의 약어임.

2) 2013.10.3 Hurriyet Daily News 보도

3) 터키는 종교는 이슬람이지만, 정치에 종교를 끌어들이지 않는다는 소위 ‘세속주의’를 표방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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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였다. 하지만 전세계적으로 혼동의 시대였던 1960대와 1970년대를 거치는 동안, 터키 내에서도 다양한 과격주의 그룹이 태동하였고 이들 그룹이 이합집산을 거쳐 여러 테러조직으로 발전하면서, 수시로 터키의 국가안보를 해치고 인명을 살상하였다.

2004년 7월 에르도안 총리는 본인은 테러로 인해 4만여명이 희생된 국가의 총리라고 말하면서, 터키가 왜 국제사회의 테러와의 전쟁을 지지할 수밖에 없는지를 강조하였다. 터키 대테러법은 제1조에서 테러 (terrorism)에 대한 정의를 통해, 테러는 터키 헌법에 규정된 터키 공화국(the Republic)의 특성(characteristics)과 정치적, 법적, 사회적, 세속적, 경제적 시스템을 변화시킬 목적을 가진 조직(organization)에 속하는 1명 또는 복수의 사람들에 의해 행해지는 모든 종류의 행동 (act)이다라고 규정하고 있다.

이와 함께, 대테러법은 테러 행위와 관련하여영토와 국민을 가진 국가(the State)의 불가분의 단합(unity)을 해치는 행동, 터키 국가 (Turkish State)와 공화국의 존재에 위해를 주는 행동, 국가의 권위를 약하게 하거나 파괴 또는 폭력으로 장악하는 행동, 기본권과 자유를 탈취하는 행동, 강제력과 폭력, 압력, 위협 등의 수단을 사용하여 국가 내외부의 안보, 공공질서, 보건을 해치는 행동이라고 구체적으로 명시하고 있다. 터키에 있어서 테러행위는 반드시 폭력행위에 국한하지 않으며 불법적인 가두시위, 은행․주택․상업시설․종교 및 교육시설․

정부 및 민간 차량․공무원 및 민간인의 신체에 대한 물리적 공격 (physical attacks) 등도 포함하고 있다4).

이 글은 터키의 대테러법상 테러의 정의에 기초하여, 터키 영토 내 에서 터키의 시설과 터키 국민, 그리고 외국인(외국시설)을 대상으로 테러활동을 전개해 온 테러조직들의 특성과 테러 사례를 살펴보고자 한다. 터키는 인근 주변국과 비교하여 연간 3천5백만 명의 외국 관광객이

4) Sahin, Bahadir and Ekici, Niyazi, "An Empirical Study on the Terrorists' Target Selection: The Turkish Case", Multi-Faceted Approach to Radicalization in Terrorist Organizations, The NATO Science for Peace and Security Programme, IOS Press, 2011, pp. 178-1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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찾는 매우 안정된 국가라는 데에는 이견이 없다. 다만, 이러한 안정된 환경 속에서도 터키의 안정을 해치려는 테러조직들이 존재하며 이들이 수시로 활동하고 안보를 위협하고 있다는 것도 사실이다. 이 글이 터키에 체류하는 우리 동포들과 투자활동을 하는 우리 기업들, 그리고 터키를 방문하는 우리 국민들에게 필요한 경각심을 주려는 목적도 있음을 밝혀둔다.

이 글은 터키 내 테러와 테러조직에 대해 대사관의 어떠한 입장을 반영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밝혀둔다. 공개된 자료와 참고 책자를 기초로 하여 최대한 객관적 사실을 위주로 서술하였다. 이 글의 첫 번째 장에서는 터키 내 테러의 역사에 대해 다루었다. 오스만 제국시대에서 부터 테러조직들이 실체를 나타낸 1970년대 이전까지의 사례를 설명 하였다.

두 번째 장은 테러조직별로 그 조직의 역사, 대표적 테러활동, 주요 특징 등에 대해 기술하였다. 터키 내에서 여러 테러조직들이 활동해 왔지만, 이 글에서는 그 이념을 기초로 좌파 테러조직, 분리주의 테러 조직, 이슬람 원리주의 테러조직 등 3개로 구분하였고, 주요 테러조직을 위주로 살펴보았다. 이 글에서는 여러 테러조직 중에서 쿠르드노동자당 (PKK)에 대해 보다 상세하게 다루었는데, 이는 터키의 국가안보와 지역 정세에 미치는 영향이 그 어느 조직보다 크다는 점을 감안한 것이다.

세 번째 장은 터키 내에서 활동해온 테러조직의 주요 테러형태에 대해 다루었다. 터키 경찰에서 연구를 수행한 바하디르 샤힌(Bahadir Sahin) 박사와 니야지 에키지(Niyazi Ekici) 박사의 2011년 연구를 토대로, 터키 내 테러조직의 주요 활동시기, 테러형태, 주요 테러목표 등을 서술해 보았다. 마지막 장에서는 터키의 테러와 관련하여 우리에 대한 시사점을 간단하게 요약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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Ⅱ. 터키내 테러조직의 태동

터키에 대한 테러는 오스만 제국5)시대에도 있었으나 이후 시대와 비교하면 그 규모는 크지 않았다. 오스만 제국시대 아르메니아 민족주의 혁명가들에 의해 2건의 유명한 테러사건이 일어났다. 1896년 이들은 이스탄불의 오스만 은행(Ottoman Bank)을 습격하여 4명의 직원을 살해 하였다. 이들은 1905년 술탄 압둘하미트 2세에 대한 암살을 기도하였 으나 실패로 끝났다. 1896년 사건에는 열강이 중재한 가운데 아르메니아 테러리스트들은 국외로 추방되었으며, 1905년 사건에서 술탄은 자신을 암살하려던 테러리스트들을 유럽 열강의 압력으로 사면하였다.

터키의 국부 아타튀르크는 1923년 공화국을 설립하면서, 종교(이슬람)가 정부정책에 개입할 수 있는 제도를 폐지하고 정교분리에 따른 세속주의 (secularism)를 터키 정치의 기본 골격으로 세웠다. 이에 대해 당시 보수 주의자들의 반발이 있었는데, 대도시 보다는 부족과 토호 세력의 영향력이 큰 아타톨리아 지방에서 저항이 거셌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1925년 동남부 지역에서 이슬람 지도자 셰이흐 사이트(Seyh Sait)에 의한 항거였다. 이슬람 칼리프 제도의 부활을 요구하며 쿠르드 민족주의를 신봉하는 그룹과 중앙정부의 통제에 저항하는 부족 그룹이 동참하였다.

터키는 쿠르드 등 소수민족이 존재하였지만, 아타튀르크와 그 이후의 터키 지도자들은 터키 내에서 터키어를 쓰는 사람들을 모두 터키 국민 으로 보고 국가적 정체성을 세우고자 하였다. 이는 단일 문화와 단일 언어를 갖는 국가를 세웠던 프랑스 모델을 따른 것이었다. 터키 정부는 다양한 배경을 가진 소수민족들을 통합하고자 하였는데, 터키 정부는 분리주의 민족주의(separatist nationalism)를 사회적 조화를 해치는 것 으로 간주하였다. 셰이흐 사이트의 저항에서도 쿠르드 민족주의 (Kurdish nationalism)를 추종하는 그룹이 있었으나, 이 저항이 진압된 이래 1960년대 말까지 이들의 조직적 테러행위는 나타나지 않았다.

5) 오스만제국은 현 터키공화국의 전신으로 1299-1923년까지 존속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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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대말 터키에서 발생한 학생운동은 좌파 및 우파 이데올로기 테러, 아르메니아 테러리스트들의 터키 외교관 암살 테러, PKK 등 분 리주의 테러, 이슬람 원리주의 테러 등 이후 테러의 선구자가 되었다6). 이 중에 아르메니아 테러리스트들에 의한 테러는 주로 터키 외부에서 발생했다는 점에서 터키 내부에서 주로 행해진 여타 테러와는 다른 특 징을 갖는다.

아르메니아 테러리스트들의 테러는 1975년부터 1985년까지 약 10여년 동안 터키 외교관이나 민간인들을 대상으로 했으며, 총 21개국에서 110건의 테러사건에서 42명의 터키 외교관이 암살당하였다. 이 테러는 아르메니아 해방을 위한 비밀군대(ASALA), 아르메니아 제노사이드 정의군(JCAG) 등 무장그룹에 의해 수행되었다. 이 조직들에는 주로 해외 거주 아르메니아인들이 주로 참여했으며, 이들은 오스만제국 시대 아르메니아인들의 민족적 증오(hatred)를 기초로 하였다. 그들은 터키 외교관들을 암살하면서도, 1915년 아르메니아인에 대한 대학살 사건7)에 대한 보복으로서 정당화하려고 하였다.

좌파 과격그룹의 전신은 1950년대 말 Think Clubs의 이름으로 구성 되었던 여러 대학의 토론조직이라고 볼 수 있다. 이들 클럽들은 정통 마르크스주의 노선의 터키노동자당을 지지하는 전국적 규모의 연맹으로 조직화되기도 하였다. 1961년에 12개 노조를 연합하여 창립된 터키노 동자당은 1969년 프롤레타리아혁명주의자의 통제를 받았다. 그후 터키 혁명청년동맹(DEV-GENC)으로 명칭이 바뀌어 폭력노선을 추구하였다.

이들은 학생, 노동자, 농민간의 혁명적 연대노선을 선동하였으며, 학생 들이 주도하는 게릴라전을 지원하기도 하였다.

학생운동 세력은 정반대 이데올로기를 가진 극우그룹인 네오 파시스트 그룹도 조직하였다. 이들의 상당수는 1960년대 후반 극우 학생조직을

6) Mango, Andrew, Turkey and the War on Terror For Forty Years We Fought Alone, Routledge, 2005 7) 터키와 아르메니아는 한국과 일본 사이의 과거사 문제처럼 소위 ‘아르메니아인 학살’과 관련한 과거사 문제를

갖고 있다. 아르메니아는 오스만 제국이 인종적․종교적으로 다른 150만 명의 아르메니아인을 조직적으로 살해 했으며, 이를 인종학살이라고 주장하는 반면, 터키는 조직적인 살해는 없었으며 내전 중 양측에서 30-50만 명씩 피해가 있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터키는 진실규명을 위한 역사위원회 구성을 주장하고 있다 (이희철,

「문명의 교차로 터키의 오늘」, 문학과지성사,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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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끌었으며, 이후에 극우 정당인 국가행동당(NAP)을 조직하기도 했다.

쿠르드 분리주의를 추구하는 대표적인 테러조직인 PKK도 최초에는 학생운동 세력을 기반으로 하면서, 점차 좌파 이데올로기를 기반으로 쿠르드 중심의 혁명을 이끌어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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Ⅲ. 테러조직별 활동 1. 좌파 테러조직

가. 좌파 테러조직의 태동

1970년대 터키 내 대학에서는 좌우파간 대립이 격화된 시기였다.

1970년에서 1972년 사이에 일어난 도시형 게릴라 그룹은 좌파 과격 학생 그룹의 부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역사적으로 볼 때 이러한 유형의 대 표적인 테러조직 리더로 볼 수 있는 이들이 데니즈 게즈미쉬(Deniz Gezmis), 마히르 자얀(Mahir Cayan), 에르투우룰 큐룩추(Ertugrul Kurkcu)인데, 이들은 교내 학생운동을 조직화된 테러조직으로 발전시키 는데 기여하였다고 볼 수 있다.

1960년대 후반의 터키 대학은 극좌계와 극우계간 폭력투쟁의 장이 되었으며, 대표적인 극좌 테러단체인 터키 혁명청년동맹(DEV-GENC, 이하 데브겐취)은 이 시기에 많은 과격 학생들을 끌어들인 조직이었다.

이 조직은 대학에 혁명 이데올로기를 확산시키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는데, 당시 극좌 학생들은 데미렐(Demirel) 총리가 이끄는 중도우파 정부, 극우파 과격 학생그룹, 터키에 주둔하고 미군, 터키가 회원국인 NATO 등을 적(enemy)으로 규정하고, 목적을 이루는 수단으로 각종 폭력을 사용하였다.

이 시기 좌파 테러조직의 해외 배후 중심지역은 1971년까지 약 50만 명의 터키 노동자들이 이주했던 서독이었다. 이들 노동자중 일부는 현지에 적응하지 못하고 마르크스주의, 이슬람 원리주의, 분리주의 등 과격 이 데올로기를 받아들였다. 서독은 터키내 혁명의 당위성에 대해 서유럽 자유주의자들의 지지를 이끌어 내는 선전과 홍보 측면에서도 중요했는데, 1971년 3월 터키에서 군사쿠데타가 일어난 직후 서독에서 자유터키 민주전선, 인민애국전선 등의 여러 조직이 결성되었다. 이 시기에 서독 내 터키계 라디오 채널인 비짐 라디오(Bizim Radyo, Our Radio)를 통해 반미 선동과 터키 정치체제 변화 요구 등 과격한 노선이 확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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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독이 좌파 테러단체의 선동 중심지라고 한다면, 터키와 인접한 불가리아와 중동국가들은 이들 단체에게 테러를 직간접적으로 지원하는 배후세력이라고 볼 수 있다. 터키의 좌파 테러단체들은 불가리아 공산 정권, 레바논에 있는 팔레스타인해방기구(PLO), 1966년 정권을 장악한 시리아 바트당 정권에 의존하였다. 터키의 테러백서에 의하면, 이들은 터키의 테러리스트들에게 다양한 형태의 무기들을 지원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초기 극좌 과격학생들은 정치적으로 막시스트 터키노동자당과 긴밀히 연계하였는데, 1969년 총선에서 이 정당이 매우 낮은 득표율을 보임에 따라 연계에서 이탈하여 해외에서 대안을 찾고자 하였다. 이들 중 일부는 1969-70년간 요르단에 있는 PLO 캠프에 가서 게릴라전을 수행하는 훈련을 받은 후, 터키로 귀국하여 터키 인민해방군(TPLA)과 터키 인민 해방전선(TPLF)을 조직하였다.

이러한 좌파 테러조직의 1세대들은 터키의 기준으로 볼 때 상당히 학력수준이 높았으며, 터키의 유수 대학인 앙카라 중동공대(METU)와 앙카라대(특히 정치학과) 등과 긴밀한 연관을 갖고 있었다. 그 예로 터키 인민해방전선의 지도자로서 터키의 테러조직의 기반을 닦은 마히르 자얀은 앙카라대 정치학과 장학생으로 2년간 수학했으며, 터키 인민해 방군의 이론가였던 시난 젬길은 중동공대 재학 중 뛰어난 성적을 남기 기도 하였다. 또한 자얀 그룹의 대표적 여성 요원이었던 일카이 데미르 (Ilkay Demir)는 터키내 최고 수준의 고등학교로 평가받고 있는 이스탄불의 미국계 여자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이스탄불대학 의과대학에서 수학하였다.

이와 함께, 이들 그룹의 특징을 보면, 1970년대 도시 게릴라 활동에 있어서 여성 요원은 매우 적었으며, 테러 지도자들중 상당수가 쿠르 드계 출신이 많았다는 것이다. 터키인민해방군의 주요 지도자인 데니즈 게즈미쉬와 유수프 아슬란(Yusuf Aslan)이 쿠르드계 출신이었다. 또한, 제1 세대 좌파 테러조직에는 몇몇 군대 장교 출신들이 혈연관계 등으로 참여 하였으며, 이들은 군대 내에 침투하여 테러활동을 조직하였다. 이들 그룹의 사회적 구성을 보면, 일부가 이스탄불, 앙카라 등 대도시 출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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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는 하나, 대부분의 요원들이 농촌 또는 소도시 출신이다. 이들의 테러조직 가담은 출신 또는 신분에 의하기 보다는 대학 내에서 좌파 과격주의라는 같은 이데올로기를 공유하는 측면이 강했다.

위에서 서술한 대로 제1세대 좌파 테러조직의 대표적 지도자는 터키 인민해방군을 주도한 데니즈 게즈미쉬와 터키인민해방전선의 지도자 마히르 자얀이었다. 게즈미쉬는 1965년 터키 노동당에 가입하였으며 1969년 말에는 요르단의 PLO 캠프에 가서 테러 훈련을 받기도 했다.

그는 미국 군인들을 포함하여 수차례 정치적 납치활동에 가담하였으 며, 터키 당국에 의해 체포된후 1972년 사형이 집행되었다. 그는 이론 보다는 행동을 강조한 지도자로, 법정에서 보여준 대담한 행동과 카리 스마적인 성격으로 인해, 터키의 과격그룹에게 있어서 순교자(martyr)의 원형으로 존경을 받았다.

마히르 자얀도 게즈미쉬와 같이 터키노동당원으로서 시작하여 대학내 학생운동을 주동하기도 했으며, 터키노동자당을 탈퇴한 후에는 과격그 룹인 데브겐취(DEV-GENC)에 가입하여 핵심 인물로 부상하였다. 이후 터키인민해방전선의 지도자로서 1971년 이스탄불에서 에프라임 엘롬 (Ephraim Elrom) 이스라엘 총영사 납치 및 살해를 포함하여 수 건의 테러를 조종하였다. 그는 1972년 사형선고를 받고 수감중인 게즈미쉬 등 8명의 테러요원들을 구출하려고 시도하던 과정에서 터키군과의 교전 중에 사망하였다.

자얀은 터키의 제1세대 테러요원 중에서도 게즈미쉬와는 달리 높은 수준의 지적 능력을 갖고 있었다는 점에서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터키의 사회경제시스템, 터키의 대미국 종속관계 등에 대한 다수의 글을 게재하는 등 혁명활동의 이론적 토대를 구축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테러활동에 있어서 무기의 사용과 자살폭탄 등 폭력전술을 선호한 자얀은 좌파 테러조직에 있어서 게즈미쉬와 같은 순교자로 추종되었다.

자얀의 이론적, 전술적 기여를 볼 때 후기 좌파 테러조직들은 모두 자얀의 추종자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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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대 초 자얀의 신식민주의선전을 기반으로 노동자의 해방을 구호로 하여 터키인민해방군(THKO)과 터키인민해방당(THKP)이 조직 되었다. 1972년 THKO와 THKP는 2명의 영국인과 캐나다인 NATO 레이다 기술자들을 납치하였다. 터키 북부의 테러조직 근거지에서 있 었던 터키군과의 교전 중 피납자들은 전원 사망하였다. 1972년 5월과 10월에 테러리스트들은 각각 터키 항공기 1대를 납치하여 불가리아 소피아에 강제로 착륙시키기도 하였다.

1970년초 좌파 테러조직의 활동은 1971년 3월 터키 군부의 정치개입을 가져오는데 상당한 기여를 했으며, 군부 정권은 1971년부터 1973년까지 강력한 대테러 조치를 단행하였다. 이로 인해 터키인민해방군과 터키 인민해방전선의 지도자들 상당수가 살해되고 주동자급들이 검거되어 수감되는 등 이들 조직은 큰 타격을 받았다.

나. 1980년까지의 좌파 테러조직

1970년 중반에 있었던 두 번째의 정치적 폭력은 제1세대 좌파 테러 지도자들이 없는 상황에서 발생하였는데, 이는 1974년말 집권한 뷸렌트 에제비트(Bulent Ecevit) 총리의 사회민주당 정권이 대규모 사면을 단행하여, 많은 테러 요원들이 대규모로 석방된 것이 계기가 되었다.

석방된 테러요원들 중 일부는 시리아로 가서 혁명 전사로 훈련을 받았 으며 일부는 유럽으로 가서 혁명을 선동한 후 터키로 돌아왔다. 또한 일부는 자유주의자로 전향하여 주류 정치권에 합류하였으며, 이들은 1980년대 투르구트 외잘(Turgut Ozal) 정권의 자유시장 정책과 유럽연 합(EU) 가입노력을 지지하였다.

석방된 테러리스트의 상당수는 다시 정치 테러에 가담하였는데, 이들은 데브욜(DEV-YOL, 혁명의 길)과 데브솔(DEV-SOL, 혁명좌파)과 같은 좌파 테러단체를 구성하고 활동하였다. 제1세대 그룹에서 부차적인 역할을 담당했던 데브욜 그룹의 오구잔 무프투오울루 등과 데브솔 그룹의 파샤 구벤 등이 새로운 지도부를 구성하여 1975년에서 1980년 까지 테러를 주동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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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5년 에제비트 정권 붕괴 이후 대학 캠퍼스(일부 고등학교도 포함)는 좌파 그룹과 우파 그룹 간 피비린내 나는 투쟁의 장이 되었으며, 이로 인한 희생자는 1977년 231명, 1978년 9월까지 898명, 1978년 9월에서 1980년 9월 군사쿠데타 이전까지 2,812명에 달하였다. 제7대 대통령 (1982.11월-1989.11월) 이었던 케난 에브렌은 3년간 계속된 한국전쟁에서 730여명의 터키 용사가 전사하였는데, 터키 내 형제끼리 싸움에서 엄청난 인명피해를 보았다고 한탄한 바 있었다.

희생자의 대다수는 학생들이었으나, 니하트 에림(Nihat Erim) 전 총 리가 1980년 7월, 명망 높은 자유주의 언론인 압디 이펙치(Abdi Ipekci)가 1979년 2월 각각 암살당하였다. 이러한 사회불안의 가장 큰 요인은 사회질서를 바로잡을 힘이 미약했던 연립정부였으며, 이 시기에 경합했던 중도우파 슐레이만 데미렐과 중도좌파 뷸렌트 에제비트는 이 슬람주의자, 극우주의자 등 파트너들의 지원이 있어야 정부를 구성할 수 있었다.

1970년대는 좌파 혁명그룹과 우파 민족주의 그룹(일부에서는 ‘이상주 의자’ 또는 ‘Grey Wolves’로도 불림)간 이념논쟁이 치열했으며, 이 과정 에서 터키 국부 아타튀르크가 주창했던 단일 세속주의 국가의 근간을 흔드는 종파분쟁도 발생하였다. 1978년 12월 순니계 폭도들은 터키 남 동부 도시 카흐라만마라쉬에서 이슬람의 이단이라며 알레비계를 대상 으로 한 폭동을 일으켜 109명이 사망하였다.

1971년 이전 좌파 학생운동의 주요 조직이었던 데브겐취 (DEV-GENC)는 수많은 분파 테러조직으로 분열되었는데, 1980년 통계에 의하면 좌파 테러조직이 24개에 달하였다. 이 중 현재까지 존속하고 있는 조직은 1978년에 결성된 데브솔과 마오주의 파르티잔(Maoist Partizan)이다. 전자는 혁명인민해방당/전선(DHKP/C)의 전신으로 유명 하며, 마오주의 파르티잔은 1972년 이브라힘 카이팍카야(Ibrahim Kaypakkaya)에 의해 결성된 터키 노동자․농민해방군(TIKKO)과 기본 노선을 공유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시기 좌파 테러조직은 구소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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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원하는 불가리아와 시리아로부터 대규모 무기를 공수 받았으며 이들 국가들은 테러요원 훈련까지 지원하였다.

1970년대 후반에는 좌파 테러조직과 함께, 네오 파시스트 계열과 쿠르드 분리주의 계열의 조직들도 결성되었다. 네오 파시스트 그룹에 서는 1960년대 후반 극우 학생조직을 이끈 이들이 지도부로 부상하였 으며, 이들은 극우 정당인 국가행동당(NAP)을 조직하기도 했다. 이들은 후에 이상주의 클럽협회(Ulku Ocaklari Dernegi), 이상주의 노선협회 (Ulku Yolu Dernegi), 이상주의 청년조직(Ulku Genc Dernegi) 등 극우 민족주의에 입각한 다양한 하부조직도 결성하였다. 이 시기 극우 테 러리스트로서 가장 유명한 인물은 메흐메트 알리 아으자(Mehmet Ali Agca)인데, 그는 1981년 5월 로마에서 요한바오로 2세 교황을 저격하였다.

한편, 쿠르드 분리주의 계열은 과거세대와 신진세력이 구성한 수 개의 그룹이 태동하였는데, 쿠르드노동자당(PKK, 당시 Apocular라고 불림)과 쿠르드국민해방(KUK)은 신진그룹이 주도하였으며, 혁명민주문화협회 (DDKD)는 구세대 과격그룹이 주도하였다.

제2세대 테러조직의 지도부 구성을 보면 제1세대와 같이 많은 대 학생들이 가담하였는데, 이들중 다수가 대학 중퇴자들로서 학력수준에 있어서 제1세대 지도부에 미치지 못하였다. 다만 대학생이 아닌 초중고 교사, 공무원, 전문가 등 다양한 분야의 인물들이 가담하여 지도부에서 활동한 것이 특징으로 나타났다.

지도부가 아닌 추종자(followers) 그룹에 있어서도, 제1세대가 주로 대학생이었던 반면에 제2세대에는 다양한 분야의 청년그룹이 가담하였다.

실제로 1980년 쿠데타 후 터키군이 수감 테러요원들을 대상으로 작성한 통계에 의하면, 대학생은 약 20%에 불과하여, 전문가(16%), 노동자 (14%), 공무원(10%), 교사(7%) 등으로 나타나고 있다8).

8) Sayari, Sabri, "The Terrorist Movement in Turkey: Social Composition and Generational Changes", Conflict Quarterly, Winter 1987, pp. 25-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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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테러리스트들의 약 20%가 정규 교육을 받지 못했다는 통계가 있으며, 또한 상당수의 테러리스트들이 농촌 사회의 빈곤계층에서 충원된 것으로 분석되고 있다. 이와 함께, 이 시기에 많은 여성들이 테러에 가담하였는데, 당시 여성 테러리스트인 날란 규라테쉬(Nalan Gurates)는 마르크스-레닌 무장선동연맹(MLAPU)에 참여하여, 1979년 미군 암살 등 여러 테러를 자행하기도 하였다.

이들 2세대 좌파 테러조직은 1세대가 이데올로기적 입장에 보다 치중했던데 비해, 즉각적인 행동과 총체적 투쟁 전술을 구사하였다. 이 들은 암살, 무장공격, 폭탄공격 등 무자비한 수단을 가리지 않았는데, 이러한 테러행위의 결과로 1975년부터 1980년까지 약 4,500명의 희생자가 발생하였다.

이러한 테러로 인한 사회불안은 1980년 군사쿠데타의 빌미가 되었으며, 군사정권은 수많은 테러리스트들을 수감시키거나 검거 과정에서 사살하 였다.9) 체포되지 않은 테러조직 지도자들은 서유럽이나 인근 중동국 가로 피신하였다. 이 시기에 터키 정부는 약 15,000여명에 달하는 수감 테러리스트들을 교화시키려고 하였으나, 당시 감옥의 환경은 테러리 스트들의 의지를 더욱 강화시키는 경향도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다. 혁명인민해방당/전선 (DHKP/C)

1980년 군부쿠데타 이후 등장한 군사정권은 강력한 대테러 조치를 통해, 약 18만명의 테러리스트를 검거하고 이들 중 25명을 처형하였다.

군사통치 이후 민간으로 이양되어 질서를 확립한 터키 정부는 1980년 대에 사회를 안정시키고 높은 수준의 경제성장률을 이룩하여, 1987년 유럽경제공동체(EU의 전신)에 정규 회원국 가입을 신청하였으며, 1996년 1월 유럽연합(EU)와 관세동맹을 체결하였다. 이러한 과정에서 좌파와 우파를 막론하고 테러조직들이 큰 타격을 입었으나 이 과정에서도 마 르크스 광신주의자들에 의한 혁명인민해방당/전선(DHKP/C)이 세력을 키워나가고 있었다.

9) Sayari, Sabri, "The Terrorist Movement in Turkey: Social Composition and Generational Changes", Conflict Quarterly, Winter 1987, p.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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⑴ 마르크스주의자들의 충원

구소련 붕괴후 터키 청년 사회에서 마르크스주의자들의 세력이 급격히 위축되었으나, 반식민주의, 반미주의, 반자본주의 등 과거 좌파 그룹의 이데올로기는 일부 단체를 통해 계승되었다. 터키에서 마르크 스주의의 광신자들은 터키 중동부 산악지대인 툰젤리(Tunceli) 주에서 지속적으로 충원되었다10).

이 지역은 쿠르드어를 사용하는 알레비계 주민들의 주요 거주지이기도 한데, 이들은 열악한 중동부 지역을 떠나 이스탄불 등 서부 대도시로 이주하였으며, 특히 이스탄불 외곽의 가지(Gazi) 지역을 중심으로 정착 하였다. 마르크스 테러리스트들은 그들의 고향인 툰젤리 주와 새로운 정착지에서 세력을 키워나갔다. 이들 마르크스주의자들의 성향을 일반적 으로 규정할 수는 없으나, 과격 무정부주의자로부터 반세계화, 환경주의 자 등으로 다양하게 포진되어 있다.

⑵ 혁명인민해방당/전선(DHKP/C)의 결성과 활동

DHKP/C는 폭력적 마르크스주의를 신봉하는 여러 좌파 테러 조직의 모조직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조직의 기원은 1972년 흑해 연안의 도시 시노프(Sinop)에서 발생한 영국 및 캐나다 출신 NATO 레이다 기술자 납치․살해 사건으로 거슬러 올라가며, 당시 조직의 명칭은 터키 인민 해방당/전선(THKP/C)이었으나, 이후 데브솔(DEV-SOL)로 바뀌었으며 이후 현재의 이름으로 개칭되었다.

DHKP/C의 전신 테러조직은 테러 수단으로서 고도의 정치적 암살을 자행하였다. 이러한 테러의 희생자 중에는 니하트 에림 전 총리, 8명의 은퇴한 군사령관, 2명의 검사, 1명의 영국인 보험매니저 등이 있다. 또한 1996년 1월에는 터키 유수의 기업그룹 사반지(Sabanci) 그룹의 총수인 외즈데미르 사반지(Ozdemir Sabanci)가 DHKP/C에 의해 희생되었다.

10) Mango, Andrew, Turkey and the War on Terror For Forty Years We Fought Alone, Routledge, 2005, p.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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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행태는 1977년 독일의 유명한 기업인 한스 마르틴 쉴라이어 (Hans Martin Schleyer)를 암살한 독일 적군파(RAF)의 테러 행태와 유사하다.

DHKP/C의 소위 ‘영웅’이자 현재의 조직 지도자라고 할 수 있는 두르순 카라타쉬(Dursun Karatas)는 1989년 터키 감옥에서 수감 중 탈옥 하여 서유럽으로 도주하였다. 그는 1994년 프랑스에서 인터폴에 의해 체포되었으나 이후 보석으로 석방되어, 네덜란드로 근거지를 옮겨 활동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네덜란드에서는 동 조직의 기관지 라고 할 수 있는 외즈구르룩(Ozgurluk, Freedom)이 마르크스 테러주의 자들의 활동에 관해 터키어, 네덜란드어, 아랍어 등으로 발간되고 있다.

아랍어판 기관지의 발간은 DHKP/C와 팔레스타인 테러조직인 PFLP와의 긴밀한 연계를 보여주고 있으며, 이들 2개 조직은 수시로 공동으로 성명을 발표하여 왔다. DHKP/C는 스페인의 바스크 분리주의 그룹 ETA와도 긴밀한 연계를 맺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DHKP/C는 1990년대 그리스에서 여러 암살을 감행하였는데, 1991년 터키의 유명 언론인 체틴 교르규(Cetin Gorgu), 1994년 주그리스 터키 대사관 할룩 쉬파히오울루(Haluk Spipahioglu) 참사관, 2000년 주그리스 영국대사관 국방무관 스테판 손더스(Stephen Saunders) 준장이 암살되 었다. 그리스 의회의 강력한 반테러법 제정, 그리스-영국 정보기관간 공조 등에 의해 그리스에서 DHKP/C에 의한 암살사건은 더 이상 발생하지 않았다.

1998년에서 2002년간 터키에서 DHKP/C에 의한 희생자는 53명에 달하며, 이들 중 21명은 민간인이고 그 외는 경찰관으로 알려져 있다.

민간인 중에는 2명의 미국인 군수업자가 포함되어 있다. 테러요원들은 이들 미국인들로부터 5대의 로켓발사장치, 250개의 폭탄을 탈취하였다.

터키 당국의 진압작전으로 상당수의 테러요원들이 체포되어 수감되었 는데, 이들은 감옥에서도 외부 테러작전을 모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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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키 당국이 이들을 분리하여 수감하려는 과정에서 단식투쟁, 분신 등 대규모 저항이 있었으며, 2004년 6월 기관지 외즈구를룩은 단식투쟁자 105인의 사진을 게재하여 터키와 유럽의 일부 자유주의자들로부터 관심을 받기도 하였다. 이러한 선동의 행태는 북아일랜드의 과격 테러 조직 아일랜드공화국군(IRA)의 모델을 차용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2004년 6월 이스탄불 NATO 정상회의 직전, DHKP/C 요원 세미라 폴라트(Semira Polat)에 의한 이스탄불 버스 폭발사건이 일어났으며, 같은 달 부시 미국대통령의 앙카라 도착전 앙카라 힐튼호텔에 격발폭탄 (percussion bomb)이 폭발하는 사건도 일어났다. 앙카라 사건은 마르 크스-레닌 공산당(MLKP)의 연계그룹인 빈민과 억압받는 자들의 군대 (FESK)가 자신들의 소행임을 발표하였다. 며칠 후 사회주의 플랫폼 (ESPG)이라는 그룹이 부시 대통령 방문에 대비하여 테러를 기도한 8명의 혐의자가 체포된데 대해 항의하기도 하였다. 이와 함께, 농촌지역에서는 치안군을 대상으로 한 게릴라식 공격도 계속되었다.

DHKP/C의 연계 그룹인 터키공산당(TKP, ML), 마오주의 Partizan, TIKKO, 터키혁명당(TDP) 등은 쿠르드 분리주의 테러조직과 1996년 협력 계약을 맺었는데, 이 계약은 PKK의 활동영역을 동남부에서 중부와 북부 아나톨리아로 확대시키는 것이었다.

DHKP/C는 1997년 미국, 2002년에는 EU에 의해 각각 불법 테러 단체로 되었다. 2004년 4월 터키와 유럽국가들에서 DHKP/C에 대한 동시 검거작전이 실시되어 터키에서 75명이 구속되고 독일, 벨기에, 이탈리아, 네덜란드 등에서 23명이 구속되었다. 이러한 진압작전에도 불구, 2004년 3월 터키의 지방선거를 방해하기 위해 2건의 자살폭탄 사건이 기도되었으며, 2004년 3월 이스탄불의 은행들을 대상으로 한 폭탄 설치, 토니 블레어 영국 총리 터키 방문 중 앙카라에서 발생한 폭 발사건, 5월 이스탄불 멕도날드 식당 폭탄 설치, 6월 이스탄불 은행 폭탄 설치, 9월 앙카라의 영국계 은행 HSBC 지부 격발폭탄 폭발 사건 등이 계속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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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HKP/C 요원들에 의해 경찰서와 은행을 대상으로 한 게릴라식 공 격도 계속되었는데, 이는 이 테러조직의 존재를 부각하기 위한 목적으 로 보인다. 하지만 2004년 중반 DHKP/C는 이 조직과 연계된 네덜란 드의 외즈구를룩과 터키의 에크멕 외 아달레트(Ekmek ve Adalet, bread and Justice) 등 어떤 언론에도 등장하지 않는다. 이들 언론은 테러조직 의 활동을 부각시키기 보다는 검거된 테러요원들의 고문 등 인권침해 내용을 집중적으로 보도하였다. 하지만 이 테러조직과 연계된 단체인 인민자유전선(Front of Peoples and Freedoms)은 2004년 6월 에르도안 터키 총리의 네덜란드 로테르담 회의 참석을 방해하기도 하였다.

⑶ 최근의 좌파 테러조직 활동

2012년 9월 이스탄불 술탄가지 지역에서 이브라힘 추하다르라는 테러범에 의해 자살 폭탄테러가 발생, 경찰과 민간인 여러 명이 희생 당하였다. 2013년 2월에는 앙카라 시내 미국대사관의 영사부 현관에서 자살 폭탄테러가 발생, 터키인 경비원 1명과 테러범이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 사건 이후 무암마르 귤레르(Muammer Guler) 터키 내 무부장관은 이번 사건이 좌파 테러조직 혁명인민해방당/전선 (DHKP/C)의 요원인 에제비트 산르의 소행이라고 발표하였다. 귤레르 장관은 산르가 수감 중이던 2001년 석방된 후 터키를 떠났으며, 이후 터키 당국에 의해 체포영장이 발부된 상황이었다고 하고, 범인은 위조여권을 사용하여 터키로 재입국하였다고 하였다.

터키 경찰은 산르가 독일에서 훈련을 받은 후 그리스를 경유하여, 다른 3명의 요원과 함께 이스탄불로 입국했다고 밝혔다. 경찰측은 6킬로 그램의 TNT를 몸에 두르고 택배기사로 위장하여 미국대사관 민원실로 들어왔다고 설명했다. 경찰측은 이전에 산르를 포함 자살폭탄테러 혐의자 15인의 리스트를 작성하여 전국 경찰서에 사진과 인적사항을 배포하였으며, 산르를 제외한 14인의 혐의자들을 추적하고 있다고 말 했다. 터키 일간지 하베르튀르크(Haberturk)는 시리아사태와 관련하여 NATO가 터키 남부에 패트리어트 미사일을 배치한데 대한 대응으로 이번 테러가 감행되었다고 보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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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5월 DHKP/C 요원들이 앙카라에 있는 터키 집권당인 정의 개발당(AKP) 본부 건물과 법무부 청사를 공격하였다. 터키 경찰은 2013년 5월말에서 6월까지 발생한 대규모 반정부 시위 과정에서 DHKP/C 등 상당수 테러조직이 주도적 역할을 했다고 발표하였다. 또한 9월에는 2명의 DHKP/C 요원들이 앙카라의 경찰청 본부 건물을 공격 하였으며, 범인 중 1명은 경찰과의 대치 중에 사망하였다.

2013년 5월 발생한 레이한르 사건(52명 사망)과 관련하여 터키 경찰은 좌파 테러조직 터키인민해방당/전선(THKP/C)의 지도자인 미흐라치 우랄(Mihrac Ural)과 관련된 인물들을 체포하였다. 이번 사건의 구체적인 배경에 대해서는 아직까지 알려지지 않고 있으며 재판 과정에서 좀 더 자세히 알려질 것으로 보인다.

이 사건을 보도한 5월 11일자 휴리엣 신문의 기사는 이 사건의 절박함을 잘 보여주고 있다. 사건 직후 사건현장을 방문한 취재 기자는 “레이한 르가 지옥으로 변하다”라는 제목으로 폭발 직후 인근 병원으로 후송된 부상자들을 위해 수혈을 요청하는 방송이 계속되었다. 시내 중심부를 피로 물들인 폭탄테러 직후 시민들은 공포감에 사로잡혔으며, 일부는 시리아인들에 대한 항의 구호를 외쳤다. 약 2 킬로미터 부근 지역에 영향을 준 연속된 폭발과 함께 시내는 아수라장이 되었고, 생사의 기로에 선 시민은 공포에 휩싸여 당황하였다. 시청 청사와 우체국 건물 앞에 주차된 수많은 차가 피해를 입었고, 불길과 연기 속에서도

“사람 살려”라고 소리치는 부상자들의 외침소리만 들렸다. 전기도 끊어졌으며 주말 휴가 중이던 의료진과 경찰들이 긴급 소집되어 대책 회의가 마련되었다.라고 당시의 참상을 기록하였다11).

2. 분리주의 테러조직 가. 터키와 쿠르드문제

11) Hurriyet, Reyhanli cehenneme dondu, 2013.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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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르드족은 터키 동부 타우루스 산맥과 이란 서부, 이라크 북부 등에 분포되어 사는 민족으로, 대부분 이란, 이라크, 터키, 시리아 등의 접경지역인 소위 쿠르디스탄에 집중적으로 살고 있다. 인구는 약 3천만명 정도로 추정되는데, 이 중 터키에 약 1,150만 명으로 가장 많 은 수가 살고 있다고 한다12).

1차 세계대전 이후 윌슨의 민족자결주의 주창으로 중동의 여러 민족 들이 독립을 쟁취했는데, 이 시기 쿠르드인들도 여러 지역에서 다양한 분리주의 운동을 벌였으나 설립에는 실패하였다. 1920년에 체결된 세 브르 조약은 쿠르디스탄 지역의 자치를 허용했지만 비준되지 않았다.

그들은 이후에도 터키와 이라크를 중심으로 거주 국가에 동화되지 않고 분리 독립을 추구하면서, 차별을 받기도 하였다.

터키에 있어서 일반적으로 쿠르드 문제란, 쿠르드노동자당(PKK) 등 분리주의자들에 의한 테러 문제, 낙후된 동남부 지역의 경제 개발 문제, 소수민족으로서의 정체성 문제 등으로 이해된다. 쿠르드 문제를 해결 하기 위해서는 한편으로 PKK의 무장을 해제시켜야 하고, 다른 한편으 로는 쿠르드계의 민주적 요구를 들어주고 이를 위해 법적 정비도 해야 한다. 터키 내 쿠르드인과 PKK와의 갈등을 해소하는 것은 터키 정부가 안고 있는 힘든 과제이다. 더구나 PKK의 경우 터키, 이라크, 이란, 시리아는 물론 유럽에서도 활동하고 있는 테러단체이기 때문에 국제적 대응이 필요한 사안이다.13)

나. 쿠르드노동자당(PKK)의 태동

쿠르드노동자당(PKK)은 1974년 앙카라에서 쿠르드계 공산주의계열 학생들이 그룹을 결성한 것이 기원이 되었다는 것이 대체적인 정설이다.

향후 PKK의 최고 지도자로 부상한 압둘라 외잘란(Abdullah Ocalan)은 당시 앙카라대학의 정치학과 학생이었다. 외잘란은 Abdullah의 약칭인 아포(Apo, 쿠르드어로는 삼촌을 의미)로 불리워졌으며, 당시 그룹 회원

12) Altan Tan, Kurt Sorunu, Istanbul: Timas Yayinlari, 2009, p. 33 (이희철, 상기 책 인용) 13) 이희철, 상기 책, pp. 4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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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은 자신들을 아포주(Apocu)로 부르고 자신들의 운동을 아포줄룩 (Apoculuk, Apo-ism)이라고 명명하였다.

1970년대 말에 부상한 아포주 운동은 공격적이고 폭력적인 특성을 띄었다. 이들 조직이 폭력적으로 변한 데는 외잘란의 성격탓도 있지만 그룹 회원들이 터키 사회에서 가장 낮은 사회계층 출신이었던 사실과도 관련이 있다. 외잘란은 1949년 유프라테스 강이 발원하는 샨르우르파 (Sanliurfa) 주의 가난한 쿠드드계 농가에서 태어났다. 그는 학교에서 터키어를 배웠기 때문에 어린 시절에는 집에서 쓰는 쿠르드어보다 터키어를 훨씬 잘 구사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외잘란은 앙카라의 등기지적 직업학교를 다닌 후, 토지등록국 공무원이 되었다. 직업학교를 다니는 중에 막시스트 이데올로기에 심취하였으며 이슬람 사원에 다니기도 하였다. 1968년 직업학교를 졸업한 후 디야르바 크르(Diyarbakir)에 있는 토지등록국의 서기 공무원으로 일하였으며, 1970년 이스탄불로 전근된 후 대학교 입학시험을 준비하였다. 그는 이스탄불에서 쿠르드 민족주의를 주창하는 마르크스 조직인 DDKO(Revolutionary Eastern Cultural Hearths)에 가입하였는데, 이 조직은 대표적인 극좌 테러단체인 데브겐취(DEV-GENC)의 분파였다.

외잘란은 1971년에 이스탄불 대학 법학과에 입학하였는데, 터키 중앙 정부의 공무원이 되기 위해 같은 해 앙카라대학 정치학과로 편입하였다.

당시 앙카라대 정치학과는 터키내 마르크스 이데올로기의 확산의 중심 지였으며, 다수 교수들이 이 분야의 권위자였다. 이 시기에 외잘란은 마르크스식 게릴라 전투인 인민무장투쟁에 심취하였으며, 결국 1972년 불법전단 살포 혐의로 구속되어 7개월간 군사감옥에 수감되었다.

그는 석방된 후 다시 정치학과에 복귀하였으나, 급진 좌파인 터키 사회주의노동자당(TSIP)과 연계된 앙카라고등교육학생회(AYOD)에 가입 하였으며, 이전에 가입한 DDKO의 후신인 혁명민주문화사회(DDKD) 활동도 지속하였다. 이 당시 외잘란은 사회주의 계열의 쿠르드 민족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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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룹인 터키 쿠르드민주당(T-KDP) 인사들과도 긴밀히 연계를 맺었는데, 이 그룹은 북부 이라크의 바르자니 계열로 알려져 있다. 이 시기에 외잘란은 같이 활동하던 여학생 케시레 일드름(Kesire Yildirim)과 결혼하였다.

외잘란과 10여명의 동료들은 1975년 수차례 회동한 후에 그들의 근거지인 앙카라 디크멘 지역을 떠나 터키 동남부로 가서 지역 조직을 설립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들은 당초에는 자신들을 쿠르드 혁명가들로 불렀으나, 이후 외잘란의 역할이 강화됨에 따라 아포주(Apo-ites)로 명명하였다. 그들의 초기 목표는 그들이 파시스트로 규정한 지역의 유지들과 투쟁하여 쿠르드 혁명의 입지를 구축하는 것이었다.

1978년 11월 27일 19명의 쿠르드 혁명가들은 비밀리에 디야르바 크르 주의 작은 도시 리제(Lice)에 모여, 쿠르드 국가 설립을 목표로 PKK로 약칭되는쿠르드노동자당14)을 조직하였다. 외잘란은 창립회의 에서 총서기와 7인 당집행부의 지도자 직책을 담당하면서 권력을 독점 하였다. 이후 다수의 PKK 창립멤버들이 외잘란의 지시에 따라 피살되 거나 권력에서 축출되었다. PKK는 급진 좌파 마르크스 이데올로기를 주창하였으며, 지도자인 외잘란의 성격으로 인해 초기부터 폭력사용이 전 형적인 특징으로 나타났다.

PKK의 활동은 터키 정부와의 투쟁단계와 관련하여 1978년 설립 이후 준군사 조직 전단계로 발전한 1984년까지의 시기, 1984년부터 외잘란이 체포된 1999년까지의 준군사 조직으로서 게릴라식으로 무장투쟁을 벌인 시기, 1999년 이후 외잘란이 장기 수감 기간 동안 외잘란없이 진행된 투쟁 시기로 나눌 수 있는데, 각 시기별로 PKK의 활동에 대해 살펴본다.

다. PKK의 초기 활동 (1978-1984년)

이 시기 여타 쿠르드계 공산주의 조직들이 주 공격대상을 터키

14) 쿠르드어 Partiya Karkeren Kurdistan, 터키어 Kurdistan Isci Partisi, 영어로 Kurdistan Workers Par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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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로 규정했음에 비해, PKK는 초기에 정치적인 라이벌인 여타 쿠르 드계 마르크스 그룹을 공격대상으로 간주하였다. 이러한 전략은 독립 쿠르드 국가를 세우기 위한 주요 장애는 터키 정부가 아니라 쿠르드인 들의 사고를 혼란시키는 여타 쿠르드 조직이라는 외잘란의 신념에서 연유하고 있다.

외잘란은 여타 쿠르드 그룹과 투쟁한 이후, 공격의 대상을 쿠르드 부족 지도자들로 확대하였다. 실제로 PKK 설립 후 2년여 동안 354명이 PKK에 의해 살해되고 366명이 부상당하였는데, 이들 중 대부분은 PKK에 의해 소위 파시스트 앞잡이와 반동주의자로 규정된 자들이 었다.

PKK에 의한 쿠르드 부족에 대한 공격은 외잘란의 출생지 산르우르파 주에서 시작되었으며, 이들 부족들은 PKK에 굴복하지 않고 치열하게 저항하였다. 이 시기에 터키군은 PKK와 대적하지 않고 심지어 PKK와 싸우는 친정부 부족을 지원하지도 못했는데, 이는 좌파와 우파 그룹간 극렬한 투쟁으로 인해 내전의 전단계까지 이른 터키 정치권의 위기상황과 결부되어 있다. 1979년 8월 20일 터키 국회에서 우파 지도자인 슐레이만 데미렐은 당시 사회민주계 뷸렌트 에제비트 총리에게 동남부 지역에서 아포주들이 국가처럼 행동하고 있다고 비판하였다. 초기 공격의 성공에 고무된 외잘란은 공격의 대상을 터키 치안조직(경찰)으로 전환하면서, 쿠르드계 주민들의 지지를 얻고자 하였다.

1978년부터 1980년 터키 군사쿠데타가 발발하기 이전까지 PKK의 활 동은 터키 동남부의 도시에서 게릴라식 투쟁이 주요 전술이었다. 이 시기에 가지안텝, 샨르우르파, 디야르바크르, 마르딘, 툰젤리 등 여러 도시 지역에서 군사조직이 설립되었다. 이러한 무장투쟁을 통해 PKK는 짧은 기간 동안 쿠르드계 조직의 가장 강력한 조직의 하나로 부상하였다.

PKK는 군사조직으로서의 체계도 갖추어 동남부에서 상당한 지지 기반을 확충하였으며, 쿠르드계 사회에서 전근대적 부족시스템의 정당성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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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화시켰다. 무엇보다도 가장 중요한 것은 쿠르드계에 있어서 PKK가 터키 국가통치권에 대항할 능력을 갖추었음을 보여주었다는 점이다.

이 당시 PKK가 불과 2천여명의 무장조직에 불과하였기 때문에, 터키 정부로서는 PKK를 전략적 위협세력으로 간주하지는 않았다.

터키 정부가 1979년 5월부터 PKK에 대한 색출작전을 벌이자, 외잘란은 체포를 피하기 위해 7월에 시리아로 도피하였다. 또한 1980년 터키에서 군사쿠데타가 발생하여 군부 정권이 들어선 이후 1982년까지 터키 정부는 대대적인 대테러 작전을 실시하였으며, 다수의 PKK 지도자들과 요원들이 체포되거나 시리아로 피신하였다.

이 시기 이전까지 PKK가 외부세력의 지원을 받지 않은 지역조직으로 머물러 있었음에 비추어, 외잘란의 시리아 도피 이후는 PKK의 국제적 연계 단계로 발전하였다. 당시 냉전 상황에서 구소련의 지원을 받고 있던 시리아의 아사드(Hafez al-Asad) 대통령은 PKK를 터키에 대적할 수 있는 유용한 카드로 활용하고자 하였다.

구소련측은 서방측의 보루인 터키를 견제하기 위해 불가리아, 시리아, 팔레스타인 등 대리세력(proxies)을 이용하여 PKK 카드를 활용하고자 하였다. 아사드측은 이러한 구소련의 기대를 충족시켜주는 한편으로, 시리아 영토였으나 터키 하타이(Hatay) 주로 복속된 영토 회복과 터키 와의 유프라테스강 수자원 분쟁에 대처하기 위해 PKK를 이용하려고 했다.

시리아 당국은 외잘란과 추종자들에게 레바논 베카계곡(시리아측의 통제하에 있었음)에 있는 팔레스타인해방기구(PLO)의 훈련장에서 훈련을 받도록 주선했다. 외잘란과 250여명의 PKK 요원들은 PLO 캠프에서 게릴라 훈련을 받고, 외잘란은 다마스커스에, PKK 요원들은 베카계곡의 PLO 캠프에서 각각 근거지를 구축하였다.

1980년에는 이라크 후세인 정권의 이란 침공으로 이란-이라크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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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발하였다. 시리아는 이란과 긴밀한 관계를 구축하고 있었으며, 북부 이라크의 마수드 바르자니측 쿠르드민주당(KDP)도 이란과 협력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1983년 PKK는 북부 이라크의 마수드 바르자니의 쿠르드민주당(KDP)측과 제휴협정을 맺었다. 터키와 전통적으로 경쟁관계에 있었던 이란도 상황에 따라 PKK를 명시적, 묵시적으로 지속 지원하였다.

이 시기 외잘란은 PLO 캠프에서 훈련시킨 PKK 요원들을 시리아에서 이란 및 북부이라크를 거쳐 터키 동남부로 잠입시키거나, 이란을 통해 직접 터키로 잠입시켜, 게릴라 투쟁을 벌이도록 하였다. 북부 이라크에 체류하는 PKK 요원들의 숫자는 400여명으로 불어났다. 당시 PKK의 목표는 군사적 공격이 아닌 정치적 선동이었기 때문에, PKK 요원들은 터키로 침투하여 무장 선동작전을 벌였다15).

이 시기에 PKK의 주요 전술은 터키 정부를 대상으로 한 선동전과 게릴라전이었는데, PKK에 협조하지 않거나 터키 정부에 협력하는 민간인(쿠르드 및 비쿠르드계 불문)을 대상으로 공격을 감행하였다.

1980년 11월 10일 PKK는 프랑스 스트라스부르의 터키 영사관을 대상 으로 폭탄공격을 감행하였는데, 동 공격은 아르메니아계 테러조직인 ASALA와의 합동작전이었다. PKK측은 이 시기의 폭력공격에 대해, 터키 정부가 쿠르드의 정체성을 압살하려는 조치에 대항하여 쿠르드인의 권리를 지키기 위한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라. PKK의 게릴라전 수행 시기 (1984-1999년)

1980년 군부 쿠데타로 등장한 군부정권은 1983년 통치권을 민간 에게 이양하였다. 1983년 말 터키 정부는 이라크와 국경안보 및 협력 협정을 체결하였다. 이란-이라크 전쟁으로 대터키 국경을 통제할 여력이 없는 이라크는 이 협정에 따라 터키군에게 추적권(right of hot pursuit)을 부여하였다. 터키군은 이라크 국경 10㎞를 진입하여 대테러 작전을 수행할 수 있게 되었다. 북쪽에서 터키군의 대테러 작전 수행과

15) Ozdag, Umit, The PKK and Low Intensity Conflict in Turkey, Frank Cass, London for the Center for Eurasian Strategic Studies, 2003, pp. 1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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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쪽에서 이라크군의 압력으로 바르자니의 쿠르드민주당(KDP)측은 공개 적으로 PKK에 대한 지원을 선언하였다.

1984년 4월 북부 이라크에 기반을 구축한 PKK는 터키 전역에서 터키군 및 정부기관을 대상으로 한 대대적인 공격을 감행하였다. 제밀 바익(Cemil Bayik), 두라 볼칸(Dura Volkan) 등 PKK 주요 지도자들이 북부 이라크의 PKK 캠프에 모여들었다. 이 시기 PKK의 전략적 목표는 장기간의 게릴라전을 수행하여 터키 내 혼란을 조성하는 것이었다.

공격 대상은 터키군, 경찰, 마을경비단 등 가리지 않았으며, PKK측은 정부 및 경찰건물은 물론 지방 관광지에서도 자살폭탄 공격을 감행하 였다. 일부 쿠르드 부족 지도자들은 터키 정부 공무원과 중앙 정부의 꼭두각시라는 이유로 납치와 살해의 대상이 되었다. PKK는 이스탄불과 터키 내 유명 관광지에서 서방 관광객들도 납치하였으며, 심지어 서부 유럽에 있는 터키 외교공관과 금융․상업시설에 대해서도 공격을 감행 하였다.

외잘란은 1973-78년을 이데올로기 구축의 시기, 1978-80년을 정치적 이데올로기 시험 시기, 1980-84년을 대규모 투쟁을 준비하는 시기로 규정하였다. 그는 1984년 8월 15일 밤에 PKK 요원에 지시하여, 터키 남부 소도시인 에르후와 셈딘리의 잔다르마 경계초소를 공격함으로써, 게릴라전, 소위 공개 투쟁을 개시하였다.

터키군 1명이 사망하고 9명의 터키군과 4명의 일반인이 부상하는 등 비교적 희생자 규모는 크지 않았으나, 이 사건은 외잘란이 전년도에

쿠르디스탄에서 폭력의 역할이라는 문서에서 규정했던 유혈테러 작전의 신호탄이었다. PKK 요원들은 공격 과정에서 쿠르드해방부대 (HRK)의 구축을 선언하는 유인물을 배포하였다.

터키 정보국은 터키 남부에서 PKK의 존재에 대해 알고 있었지만, 에르후와 셈딘리 공격시 사용한 HRK의 전술은 베트남전시 베트콩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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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술과 같은 것이어서 충격을 받았다. 이 공격이 있은 직후 약 200명의 PKK 요원들이 북부 이라크로부터 터키 남부의 하카리, 에르후, 시르낙, 반, 마르딘, 디야르바크르 등으로, 이란으로부터 카르스, 아으르로, 또한 시리아로부터 아드야만으로 이동하였다. PKK는 하카리, 에르후, 시르트, 비틀리스 등에 비밀기지를 구축하였다. 이러한 PKK의 게릴라 전술은 1998년까지 계속되었다.

터키 정부는 이미 1982년 헌법상 분리주의(separatism)를 명백히 부정하고 1983년 PKK가 장악한 일부 지역에 대한 비상사태를 선포하 였으며, 1984년 8월부터 연말까지 국경지역에서 PKK에 대한 대대적인 수색과 체포 작전을 개시하였다. 또한 바르자니의 쿠르드민주당(KDP) 측에 대해 터키-이라크 국경 상에 있는 PKK 요원들을 추방하도록 압력을 가했으며, 이란 정부에 대해서도 KDP가 PKK에 대한 지원을 중단하도록 압력을 가해줄 것을 요구하였다.

터키군은 10월말 북부 이라크 산악지대에 있는 PKK 캠프를 급습하였 으며, 터키군의 강력한 공격에 직면하여 PKK측은 추가적인 공격을 감행하지 못하고 북부 이라크로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또한 1985년 외잘 정부는 마을 단위의 경비단을 창설하는 행정개혁을 단행하였는데, 현지 주민들이 자체 경비단을 조직하여 PKK의 공격을 차단한 것은 PKK의 게릴라전 수행을 결정적으로 약화시켰다.

이러한 상황에 직면한 외잘란은 1985년 3월 춘계 공격을 선언하고,

시르트-하카리-반을 잇는 소위 삼각지대에서 터키 정부에 대한 조직적인 공격을 개시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공격에 대해 현지 쿠르드 주민들의 호응을 받지 못한 결과, PKK의 기관지인 세르베분(Serxwebun)이

모든 것을 다시 시작해야 한다고 보도한 대로 전술 실패를 자인할 수밖에 없었다16).

외잘란은 이러한 실패를 교훈삼아 1986년 10월 다마스커스에서 개최된

16) Ozdag, Umit, The PKK and Low Intensity Conflict in Turkey, Frank Cass, London for the Center for Eurasian Strategic Studies, 2003, pp. 1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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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KK 제3차 총회에서 스탈린식 당독재를 감행하여, 약 50명에 달하는 정적을 살해하였다. PKK는 쿠르드해방부대(HRK)를 해산하고 분대에서 부터 사단까지 위계서열을 갖춘 쿠르드해방군(ARGK)으로 개편하는 한편, 1985년 3월 21일 정치적 전위조직인 쿠르드 민족해방전선 (ERNK)을 창설하였다. 이와 함께, 젊은 요원들을 충원하기 위해 소위

군복무법(military service law)을 제정하고 터키 남부에서 강제적 으로 PKK 요원을 징집하였다. 강제징집에 반대하는 주민들에게는 잔인한 보복을 감행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일련의 국제적 환경이 외잘란의 터키에 대한 투쟁을 유리하게 하였는데, 첫 번째는 1986년 봄 에게해의 영유권과 관련하여 발생한 터키-그리스간 분쟁이다. 양국간 일촉즉발의 상황에서 터키 남부에 배치된 터키군의 핵심부대들이 에게해 지역으로 이전 배치될 수밖에 없었다. 이와 함께, PKK에 대해 이란이 지원을 확대하자, PKK는 터키 내에서 수집한 정보를 이란측에 제공하였다. 또한 PKK는 터키 내 미국 시설에 대한 공격을 약속하기도 하였다. 외잘란의 근거지 였던 시리아와 더불어 그리스와 이란의 지원으로 인해, PKK측은 1986년 시르트- 하카리-반삼각지대에 대한 공격을 재개하는 등 회복세를 보였다.

1987년 PKK의 쿠르드해방군(ARGK)은 군부대와 정부시설에 대한 직접적인 공격을 피하는 대신, 경계조치가 없는 쿠르드 마을과 소위 터키 동화정책의 기구인 학교와 교사를 대상으로한 무자비한 공격을 감행하였다. 1987년부터 1991년간 총 33개 마을이 공격받아 어린이와 여성을 포함한 36명이 사망하였다. 1987년에만 137개의 학교가 공격을 받았다17).

1987년부터 2002년간의 통계를 보면, 교사를 포함하여 총 307명의 공무원이 살해되었으며, 1987년 PKK에 의해 교사 한 명이 전기줄에 의해 살해된 것을 시작으로 96명의 교사가 피살되었다. 90명의 하급 공무원, 32명의 종교교육자, 4명의 의사, 3명의 시장도 희생되었다.

17) Ozdag, Umit, The PKK and Low Intensity Conflict in Turkey, Frank Cass, London for the Center for Eurasian Strategic Studies, 2003, pp. 2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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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KK의 공격으로 114개의 학교가 완전히 파괴되고 다른 127개의 학교도 파손되었다18). PKK는 아울러 현지 신문 판매원에게 살해위협을 가하 면서 신문 배포를 막았으며, 터키 정부가 쿠르드계 주민 집중거주지의 복지를 소홀히 한다고 비난하였다.

1989년 이란-이라크전의 종결 상황에서 북부 이라크에서 무기가 넘쳐났으며, 1990년 걸프전시 터키가 미국주도의 연합군에 가담하면서, 이라크의 사담 후세인은 터키의 적인 PKK를 직접 지원하였다. 1990년대초 사담후세인의 이라크내 쿠르드계 공격으로 대규모 쿠르드 난민이 발생 하여, 초기 난민수용에 적극적이었던 터키는 난민의 대량유입을 우려 연합국측에 북부 이라크에 쿠르드계 안전지대 구축을 요구하였다.

이는 역설적으로 PKK에게도 안전지대를 제공하였으며, 이후에 북부 이라크를 근거지로 한 PKK가 터키로 잠입하여 치고빠지기식 게릴라 공격을 가능하게 만들었다. 또한 1980년대말 구소련의 붕괴 상황에서 직접적 군사공격을 회피하는 미국의 정책전환은 결과적으로 북부 이라크 에서 PKK의 입지를 강화하는 계기가 되었다.

PKK는 이라크 북부에서 터키 동남부 지역으로 게릴라 공격을 지속 하는 한편, 1991년 12월 이스탄불 백화점의 방화사건(11명 사망)을 간접적으로 지원하는 등 서부지역으로 테러를 확산시키려고 하였다.

이로 인해 터키의 관광산업은 결정적으로 타격을 받았다. 1986년 스웨덴 에서 발생한 팔메 총리 암살사건에서 PKK는 유력한 혐의조직으로 추적을 받기도 하였다.

외잘란은 1980년대 말부터 1990년대 초까지 쿠르드계 주민들의 지지를 얻기 위해 좌파 세속주의 이데올로기를 포기하고 이슬람 신앙을 수용 하고자 하였다. 하지만 대도시권에 거주하면서 터키 사회에 편입되고 있는 쿠르드계 주민들에게 쿠르드 민족주의는 적극적인 지지를 얻지 못하였다. 실제로 1995년과 1999년 선거에서 쿠르드 민족주의를 표방한

18) Mango, Andrew, Turkey and the War on Terror For Forty Years We Fought Alone, Routledge, 2005, p. 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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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당인 인민민주당(HADEP)은 터키 총 유권자의 4% 지지를 얻는데 그쳤다.

이와 함께, 쿠르드 주민을 공격하는 전략을 변경하여 공격의 대상을 터키 정부와 외국 관광객으로 바꾸었다. 이로 인해 국제엠네스티와 휴먼라이트워치 등 국제 인권단체로부터 비난을 받게 되었다19).

1991년에서 1993년까지의 기간은 PKK의 활동이 가장 저조한 때로 간주되고 있다. 유엔이 걸프전 이후 북부 이라크를 쿠르드족의 안전지대로 설정함에 따라, 북부 이라크의 쿠르드 세력인 바르자니측(KDP) 및 탈라바니측(PUK)에 있어서 터키는 유일한 보급로이자 외부로 나아가기 위한 통로였다. 터키와의 관계개선이 필요했던 KDP와 PUK측은 PKK 와의 긴장관계를 보이기 시작했으며, 이들은 PKK를 터키-이라크 국경 지대에서 이라크 남부로 축출하기 위해 1992년 10월 2일 PKK측을 공격하기에 이르렀다.

바르자니와 대립각을 형성한 탈라바니는 이후 PKK 지원으로 돌아섰다.

이와 함께, 터키군은 병력 1만5천여 명과, 탱크, 헬기 및 전투기를 동원하여 PKK에 대한 총력 소탕작전을 벌였는데, 전투과정에서 PKK 측은 1,452명의 요원을 잃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게릴라전에서 능숙했던 PKK는 정확한 정보에 기초하여 탱크와 헬기를 동원하고 정밀타격을 가한 터키군과의 정규전에서는 당할 수가 없었다20).

1992년 10월 전투에서의 패배로 PKK는 이라크 북부를 후방기지로 삼아 터키-이라크 국경지대에 소위 해방구역을 구축하려던 야망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이 전투 이후 터키 정부와 바르자니측(KDP)은 PKK 요원들의 북부 이라크 기지 복귀를 차단하고 터키군에 의한 월경 공격을 재개하는 공동 작전을 전개하는데 합의하였다.

1990년대에 들어서서 PKK에 대한 터키의 공격이 고조되는 과정에서, 터키 정부는 이라크에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던 미국의 지지를 기대

19) Mango, Andrew, Turkey and the War on Terror For Forty Years We Fought Alone, Routledge, 2005, pp. 39-41.

20) Ozdag, Umit, The PKK and Low Intensity Conflict in Turkey, Frank Cass, London for the Center for Eurasian Strategic Studies, 2003, pp. 45-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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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였다. 하지만 이 시기에 양국의 우선순위는 확실히 달랐는데, 미국 입장에서는 사담 후세인이 미국의 이해를 해치는 제1위협이었다. 미국도 PKK를 테러조직으로 지정했으나, PKK 문제를 터키의 국내문제로 보고 터키의 대 PKK 투쟁은 터키측의 자위권 방어의 일환으로 간주하였다.

따라서 미국측은 PKK 문제 해결은 군사적 수단이 아닌 정치적 수단으로 해결하기를 희망하였다. 물론 이러한 미국의 입장은 1997년 불법 테러 조직으로 지정하고 1999년 터키측의 외잘란 체포시 결정적인 정보를 제공함으로써 바뀌었다21).

한편, PKK의 든든한 후원자였으면서도 내부적으로 쿠르드 문제를 갖고 있었던 시리아도 북부 이라크에서 쿠르드 세력이 사실상의 국가를 건설해 나가는 동향에 부담을 느꼈다. 1993년 1월 터키 슐레이만 데미렐 총리의 다마스커스 방문 이후, 시리아측은 PKK 지원을 대폭 축소하였다.

시리아는 데미렐 총리 방문 전 터키 외교장관과 내무장관의 다마스커스 방문시 안보 의정서를 체결하였으며, 이에 따라 1993년 1월 PKK에 대해 베카 계곡의 캠프에서 철수하도록 요구하였다.

이러한 전반적인 배경에서 PKK는 1993년 3월 외잘란은 일방적으로 휴전을 선언하였다. 외잘란으로서는 PKK 요원을 충원시켜 조직을 재결성하기 위해 시간을 벌기 위한 것이었으며, 그는 외면적으로 휴전과 함께 터키 정부에 대해 많은 정치적 요구조건을 제시하였다. 이 휴전 선언은 외잘란의 뜻과는 달리 PKK 무장 요원이 3월 24일 징집되어 부대로 가던 터키 장정 31명(5명은 민간인)을 살해하면서 짧게 종료되 었다. 외잘란은 자신의 과거 핵심 참모에서 이탈했던 셈딘 사큭 (Semdin Sakik)에 이 사건의 책임을 돌렸다. 사큭은 5월 24일 빈굘 근처에서 비무장 터키군인 33명을 살해하기도 하였다.

이 사건들로 인해 PKK 요원들에 대한 사면, 쿠르드계 주민의 정치적, 문화적 권리 강화 등 PKK측의 정치적 요구들을 호의적으로 검토하고 있었던 터키 정부는 PKK에 대한 전면전을 선포하였다. 터키 정부가

21) Ertem, Helin Sari, "Turkish-American Relations and Northern Iraq: Relief at Last?", Turkey in the 21st Century: Quest for a New Foreign Policy, Ashgate, 2011, pp. 58-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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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러에 대한 전면전을 선포한 것은 1984년 이후 최초의 사건이었다22).

외잘란은 이러한 상황에서 1993년에서 94년에 걸쳐 터키 전역에서 약 1만여명의 요원들을 총 동원하여 게릴라전으로 대응하였다. 그는 이 때 민간인을 주 공격대상으로 삼아 1994년 1월부터 11월까지 1,249 명을 살해하였다. 또한 통신시스템, 수리시설, 전력시설, 바쿠-제이한간 원유 파이프라인 등을 공격하여 원유의 수송을 차단하고자 하였다.

PKK측은 이러한 배경에서 터키-이라크 국경지대를 재장악하려고 하 였으며, 지도부의북부로의 진군노선에 따라 흑해지역으로 공격을 확대하였다. 외잘란은 1993년에 중동부 지역을 PKK의 5개 군사․행정 기구로 편제하였다. 이 시기 PKK는 민간인 공격에서 여성과 아동 요원들을 자주 활용하였다. 또한 흑해지역에서 기존의 좌파 테러조직과도 협력협정을 체결하여 공조하였다. 특히 1995년에는 혁명인민해방당/전선 (DHKP/C)과도 공동전선을 구축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민간인을 주 공격대상으로 한 전술은 PKK에 대한 지지기반을 약화시키는데 기여하였다. 특히 민간인 공격에서 여성과 아동을 이용한 것은 절대적인 약점이었다. 1995년 제5차 PKK 전당대회에서 외잘란은 학교 교사에 대한 살해는 실수라는 점을 인정하기도 하였다. 외잘란은 흑해지역에서 새로운 전선을 구축하기 위해 좌파 테러조직과 공조하는 한편, 이슬람주의자들의 지지를 얻기 위해 제5차 전당대회에서 PKK가 혁명적 사회주의와 혁명적 이슬람을 대변한다고 주장하였다. 하지만 혁명적 이슬람주의자들은 그들 자신의 테러조직들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PKK가 파고들기는 쉽지 않았다23).

이 시기 PKK가 터키내에서 터키군의 총력전에 대응하여 게릴라전을 수행하는 한편으로, 유럽에서 다양한 선동전을 전개하였다. 1995년 1월 유럽에 쿠르드 망명의회(Kurdish Parliament in Exile)을 설립하였

22) Ozdag, Umit, The PKK and Low Intensity Conflict in Turkey, Frank Cass, London for the Center for Eurasian Strategic Studies, 2003, pp. 48-49.

23) Mango, Andrew, Turkey and the War on Terror For Forty Years We Fought Alone, Routledge, 2005, p. 43.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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