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검색 결과가 없습니다.

기독교 토착화의 필요조건과 충분조건

N/A
N/A
Protected

Academic year: 2022

Share "기독교 토착화의 필요조건과 충분조건"

Copied!
28
0
0

로드 중.... (전체 텍스트 보기)

전체 글

(1)

1)송명철*

목 차 1. 들어가는 글

2. 버려야할 것들(1) 3. 버려야할 것들(2) 4. 찾아야 할 것들 5. 나오는 글

<국문초록>

이 논문은 새로운 토착화신학을 세우는 것이 아니라 토착화를 위한 필요조건과 충분조건을 탐구하는 것이다. 달리 말하면, 이 논문은 서양의 신학을 모방하지 않 고 한국적인 신학을 수립하기 위한 시도이다. 필요조건은 다음과 같다. 첫째, 기 독교에 내재한 반공주의, 무교와 유교 그리고 불교에 대한 배타주의를 제거하는 것이다. 둘째, 무비판적으로 수용한 기독교근본주의를 제거하는 것이다. 그러면 이제 토착화를 위한 충분조건은 무엇인가? 우선 종교적인 필요성 때문에 만들어 진 예수가 아니라 역사적인 예수를 이해하는 것이다. 달리 말하면, 예수는 가난한 자와 병든 자를 치유하고 자비를 베풀었다. 그는 도덕적 완전성을 실현한 참 사 람, 위대한 스승이 되었으며 마침내 신성한 존재가 되었다. 그래서 그는 공자나 붓다와 동일한 인물이다. 예수를 이렇게 이해해야 동양(한국)의 종교와 문화에 상응하는 토착화가 가능해 진다.

주제어 : 기독교, 토착화, 유교, 불교, 도교, 근본주의, 예수

* 전남대학교 철학과 강사

(2)

1. 들어가는 글

토착화(土着化)의 본 뜻은 어떤 제도나 사상, 풍습 따위가 그 지방의 성 질에 맞게 동화되어 뿌리를 내리게 됨이다. 기독교1)에서 토착화란 말은 가 톨릭과 개신교로 구분해서 볼 수 있다. 가톨릭에서는 선교지 주민을 기독교 화하기기 위해 교회가 그 지역 문화와 전면적인 동일화를 모색하고 교회의 본질을 구현하는 과정을 토착화(inculturation)라고 한다. 그리고 이를 통해 한국 교회는 한국적인 동시에 현대적인 것이 된다는 것이다. 개신교에서 토 착화는 상황화(contextualization) 혹은 문화화를 의미하며, 이는 서구 신학 의 모방이나 답습에서 벗어나 ‘한국적 신학’을 수립하기 위해 한국의 고유 한 정신문화와 종교 가치를 탐구 대상으로 삼는 신학의 토대이다. 따라서 기독교의 토착화는 서양 기독교의 ‘정통적’2)인 교리와 신학을 우리 동양(한 국)의 종교와 철학 안에서 새롭게 자리매김하자는 것이며, 그런 한에서 기 독교의 토착화는 진보적이고 변증법적인 작업이라고 할 수 있다.

기독교와 한국 종교 문화의 만남으로서 토착화신학은 감리교회 안에서 시작되어 1960년대에 본격적으로 시도된다. 초기 연구자들은 동서의 하늘(하 느님)이 다르지 않다는 입장을 취한다.3) 다석(多夕) 유영모에게 하느님은

1) 이 글에서 기독교라는 용어는 여기를 제외하고 특별한 언급이 없는 한, 개신교를 지칭 한다.

2) 필자는 ‘예수 자신의 말과 삶’을 지금 그리고 여기에서 실천하는 것이 ‘정통적’이라고 본다. 그러나 한국 기독교는 ‘예수에 대한 이야기’를 전하는 서양 기독교의 ‘전통적’인 교리를 무비판적으로 수용했다고 본다. 따라서 로빈 마이어스에 의하면, 참된 신앙은

‘예수에 대한 신앙’이 아니라 ‘예수의 길에 대한 우리의 신뢰’를 가리킨다고 말한다. 한인 철, 뺷예수, 선생으로 만나다뺸, 연세대학교 대학출판문화원, 2016, 36면, 각주 재인용. 비 교종교학자인 오강남에 의하면, 기독교의 역사적인 비극 중 하나가 예수님 자신의 가르 침보다 예수님에 대한 교회의 가르침이 더욱 중요한 것으로 여겨지게 된 것이라고 한다.

즉 “가르치는 예수(teaching Jesus)보다 가르쳐진 예수(taught Jesus), 선포하는 자 (preacher)로서의 예수보다 선포되어진 자(the preached)로서의 예수에 더 역점이 실리 게 된 것이라는 이야기다.” 오강남, 뺷예수는 없다뺸, 현암사, 2014, 195면.

3) 이정배는 기독교의 하느님을 우리민족이 상상하던 하느님 이해의 시각에서 이해하려

(3)

‘없이 계시는 하느님’이다. 이는 태극이무극(太極而無極)이며 진공즉묘유 (眞空卽妙有)라는 말과 상통한다고 본다. 하느님이 깃들어 있는 곳이 인간의 바탈(本性)이다. 바탈은 도덕적인 개념이 아니라 현상계를 초월한 것으로서 하느님이자 참나이다. 비록 몸나, 즉 육체적 욕구와 충동을 지닌 인간으로 태어난 예수는 바탈을 잘 끌고 나가서 얼나(영적인 존재)로 솟나(깨우치고 거듭나) 그리스도가 되었다. 그리고 예수는 부자유친(父子有親)한 존재, 즉 절대자와 하나가 된 존재가 되었기에 우리는 그를 스승으로 모시게 된다고 한다. 구체적으로 스승 예수를 닮아 사는 것은 공자가 말하는 살신성인(殺身 成仁)하는 것이다. 이를 불교식으로 말하면 탐(貪)하지 말고 하루 한 끼 먹고 (몸성히), 성욕인 치(痴)를 끊어 마음을 평정하고(마음놓이), 성냄(瞋)을 멀리 하여 지혜의 빛을 사방에 비춤으로써 사물의 이치를 제대로 보는(바탈태우) 수행이 필요하다.4) 윤성범은 유교적인 입장에서 기독교를 이해한다. 그는 뺷중용뺸의 성(誠)을 ‘하느님의 말씀(言)이 예수라는 인간이 됨(成)’으로 본다.

즉 ‘성이 하느님 그 자체인 동시에 하느님과 인간을 연결시키는 내재적 힘 즉 성령’5)이며, ‘예수 안에서 부자유친의 효(孝)는 성의 인식근거이고 성은 효의 존재근거’6)가 된다는 것이다. 유동식은 우리 종교문화의 근원인 무속신

는 감리교의 토착화신학 운동이 기독교의 외연을 넓힌 것으로 본다. 이정배, 뺷이웃종교 인들을 위한 한 신학자의 기독교 이야기뺸, 동연, 2013, 206~239면 참조.

4) 오정숙, 뺷多夕 유영모의 한국적 기독교뺸, 도서출판미스바, 2005, 121~137면 참조. 유영 모의 삶과 기독교, 그리스도 이해, 한글과 기독교, 종교사상의 계보와 의의 등을 알고 싶으면 다음 책을 볼 것. 김흥호․이정배 편, 뺷다석 유영모의 동양사상과 신학뺸, 솔, 2002. 또한 다석의 제자 박영호의 책, 뺷죽음공부뺸는 다석이 최종적으로 우리에게 어떤 깨우침을 주려고 한 것인지를 보여준다. 즉 제나(ego)에 대한 전적인 부정과 무화인 죽 음이야 말로 절대자와 합일하는 것이며, 결국 석가, 예수, 노자, 장자가 가르쳐준 공부라 는 것이다. 박영호, 뺷죽음공부뺸, 교양인, 2012, 289~381면 참조.

5) 이정배, 같은 책, 225면.

6) 같은 책, 226면. 윤성범의 유교적 토착신학, 이하에서 다루는 유동식의 풍류적 토착신학 그리고 변선환의 불교적 토착신학을 좀 더 정확히 알려면 다음을 볼 것. 이정배, 뺷한국 개신교 전위(前衛) 토착신학 연구뺸, 대한기독교서회, 2008, 133~224면.

(4)

앙을 모르고는 이 땅에 기독교를 뿌리내리게 할 수 없다고 본다. 그는 한국 민족의 종교사를 관통하는 것이 ‘한’이며, ‘본래 하나인 동시에 전체를 나타내 는 것으로 모든 것을 자신 속에 수렴시키는 큰 마음’7)으로 본다. 이 한을 토대로 불교는 형이상학적 초월성의 문화를, 유교는 사회 윤리적 측면을 강조 하는 삶의 문화를 창조했으며, 이제 기독교는 유교와 불교를 조화시킨 멋진 문화, 즉 풍류도의 현대적인 우리말 표현인 ‘한 멋진 삶’을 창출해야 한다는 것이다.8)변선환은 불교의 형이상학적 개념인 무(無)와 공(空)을 신비주의의 실체로 보지 않고 역사적인 악의 상징인 거대한 용과 싸워 이기는 거용 살해 자의 상징으로 이해할 것을 요구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붓다 또는 무와 공은 불교인들에게 실존의 그리스도로서 이해될 수 있다고 보고, 불교와 기독교가 서로의 지혜를 구하여 이 땅에 참된 책임공동체를 구현해야 한다고 본다.

종교다원주의의 맥락에서 그는 한국 기독교가 종교에 대한 ‘서구적 편견으로 부터의 자유, 교회중심주의란 우상으로부터의 해방, 기독교의 교리적 절대성 의 포기’9)를 해야 한다고 본다. 그리고 열강의 각축장이 된 현실에서 고난으 로 가득 찬 조선의 역사에는 세계평화를 위한 하늘의 뜻이 담겨 있고, 우리 민족이 이 뜻을 찾을 만큼 생각하는 백성 곧 ‘씨알’이 되라고 한 함석헌이나, 성서에서 일탈한 조선의 기독교와 교회제도를 비판하고 성서를 가르쳐 조선 을 새롭게 하는 것만이 복음, 즉 기독교의 존재이유라고 보았던 김교신 등은 한국적 주체성의 발견을 통한 토착화신학의 필요성과 가능성을 보여준 사람 들이라고 할 수 있다.

7) 이정배, 뺷한국개신교 전위(前衛) 토착신학 연구뺸, 대한기독교서회, 2008, 203면.

8) 이정배는 유동식이 예수 십자가 중심의 서구적 기독교가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신과 인간이 하나가 되는 한국적, 주체적, 풍류적 기독교가 인류의 미래를 걸머질 우주적 영 성으로 발전할 수 있으며, 한국 민족에게 주신 하느님의 은총이라고 확신했다고 본다.

이정배, 뺷이웃종교인들을 위한 한 신학자의 기독교 이야기뺸, 2013, 221면 참조. 그러나 보수 개신교의 입장에서는 유동식이 이웃 종교를 폄하하며, 기독교의 ‘부활’을 부정하는 것이라고 한다. 황종렬, 뺷한국 토착화 신학의 구조뺸, 국태원, 1996, 75~81면 참조.

9) 이정배, 같은 책, 237면.

(5)

필자는 전술한 토착화신학을 그대로 수용할 생각은 없다. 왜냐하면 그들 의 작업은 그들 시대의 기독교가 우리의 문화와 종교를 통해서 새롭게 해석 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지만, 그들로부터 30여 년이 지난 지금 토착화신학의 올바른 정립을 위해 반드시 해결해야할 문제가 무엇이 고, 해결의 실마리가 무엇인지 정확히 보여주지는 않는다고 생각하기 때문 이다. 그래서 필자는 다시 묻는다. 기독교가 여전히 우리의 삶과 정신에 올곧 게 자리 잡지 못하는 원인은 무엇인가? 어느덧 기독교와 교회는 한낱 ‘장 사’(business)이외는 아무것도 아니며, ‘아예 한술 더 떠 그들이 고의로 만들 어낸 허섭스레기들을 정당화하는 이데올로기’10)가 아닌가? 우리 안에는 여 전히 유불도의 온기가 남아 있음에도 이를 인정하지 않는 것은, 정작 본인이 흑인이면서도 무의식적으로 자신의 흑인성, 즉 자기 존재의 전부를 인정하 지 않기 때문에 나는 백인이라고 하는 것과 같은 것 아닌가? 그래서 ‘스스로 타자가 되어 자신을 불안정한 위치에 갖다놓고 항상 전전긍긍하며 버림받을 준비를 하고 있는’11)것이 지금 한국 기독교의 슬픈 운명이 아닌가? 만일 기 독교가 우리 문화와 종교를 다른 것이 아닌 틀린 것이나 못한 것으로 본다면, 우선 기독교 내부의 혁명이 필요하다. 혁명을 통해서 마침내 우리가 얻는 것은 ‘정통 기독교’, ‘탈은폐(aletheia)된 예수’가 될 것이다. 이로써 우리가 지양(Aufhebung)해야 할 토착화신학의 모습이 떠오르게 될 것이다. 이를 위해 필자가 취하는 전술은 토착화의 필요조건 곧 기독교가 반드시 버려야 할 현상과 충분조건 곧 기독교가 찾아야 할 본질을 적시하는 것이다.

10) Th.W.아도르노․M.호르크하이머, 김유동 역, 뺷계몽의 변증법뺸, 문학과지성사, 2010, 184면.

11) 이경원, 뺷파농뺸, 한길사, 2015, 141면.

(6)

2. 버려야할 것들(1)

인류의 보편적 문화현상 중 하나인 종교는 초월적 존재에 대한 경외의 감정, 절대자에 대한 의존감, 세계 해석의 원리 그리고 도덕적 의무의 입법 자 등으로 정의한다고 해도 언제나 변하면서 자라나도록 된 것이다. 이런 정의에 내포된 의미는 인간이 신과 관계맺음을 통해서 좋은 삶, 행복한 삶 을 살도록 도와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이 종교를 갖고 신을 믿는 것은 행복해지려는 충동을 갖고 있을 뿐만이 아니라 스스로 인격적 완성을 통한 완전한 존재가 되기를 소망하기 때문이다. 아직은 아니지만 신 과의 합일을 통해 그렇게 되기를 원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사실 ‘신은 환상 속에서 만족되는 인간의 행복욕’12)아닌가? 적어도 우리가 알고 있는 위대한 사상가들 곧 깨우친 이들은 행복(eudaimonia)을 삶의 궁극목적으로 삼았다. 동시에 그들은 행복을 성취하기 위해서 타자와 이웃을 인정하고 소 통하라고 가르쳤다. 이를 위해 기독교가 버려야 할 것들은 무엇인가?

기독교 특히 개신교가 이 땅에서 선교를 시작한 지 불과 100여 년만인 1985년에 신도수가 천만 명에 이르렀다는 것은 아마도 세계 선교사에서 전 례 없는 사건일 것이다. 그러나 급속한 성장 과정에서 많은 문제를 드러내 기도 했다. 가장 큰 문제는 우리의 전통 문화와 종교에 대한 폄하 및 극단적 배타성이지만, 그밖에도 그저 기도만 하면 모든 것을 이룰 수 있다고 생각 하는 망상, 교회제도의 비민주성, 자본주의 논리에 편승한 물신주의, 비합 리적 신념에 기인한 광신현상 등이 그것이다. 지금도 한국 기독교는 이웃 종교를 종교로 인정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특정한 시대에 특정한 목적에 맞춰서 생긴 전통적 교리들만이 절대불변의 진리라고 주장한다. 자기들만 이 정통이고 순수하다는 주장은 대단히 오만한 신학적 무지일 뿐이다. 그렇 다면 지금 오만과 독선은 어떤 것인가? 스스로 십자가 군병이 된 기독교는

12) 루트비히 포이어바흐, 강대석 역, 뺷종교의 본질에 대하여뺸, 한길사, 2006, 291면.

(7)

모든 여타의 가치를 거부하는 강한 배타성을 내포하고 있는 반공주의를 등 에 업고 어떤 모습의 사탄으로 변해왔는가? 도대체 무엇이 한국 기독교를 독재에 빌붙은 돼지떼로 전락시키고, 사람들이 교회를 떠나게 했는가?

2.1. 반공주의

일제 강점기의 기독교는 한국의 계몽주의 운동으로 인식되기도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일본의 강력한 탄압 속에서 ‘신앙의 내면화’ 혹은 천황을 신격화한 일본적 기독교로 변질한다.13)특히 일제 강점 말기에는 자의적으로 일제에 동조한 혐의를 지울 수 없다.14) 6․25전쟁 이후 공산정권이 기독교에 가한 탄압을 경험하면서 적극적으로 반공이데올로기를 수용하여 부흥의 전 기를 맞게 된다. 물론 이승만 정권은 월남한 기독인들에게 무상으로 교회 부지를 제공하는 ‘선’을 베풀기조차 한다. 남한사회에서 한국 기독교는 ‘가장 강렬하고도 잘 조직된 정치적 반공집단’으로 자신을 규정하기에 이른다.15)

13) 서정민, 뺷한국교회의 역사뺸, 살림, 2003, 3~26면 참조.

이 시기에 미국 기독교가 취한 입장은 무엇일까? 초창기 미국 선교사들이 조선 민중들 의 항일 운동을 간접적으로 지원한 것은 사실이지만, 공식적인 선교정책의 일환이 아니 라 선교사 개인의 인간적인 참여일 뿐이었다. 이상성, 뺷추락하는 한국교회뺸, 인물과사상 사, 2008, 210면 참조.

14) 최덕성, 뺷한국교회 친일파 전통뺸, 지식산업사, 2006, 18~27면 참조.

예를 들면, 1941년 무렵 한국장로교회 대표자들이 자의로 일본까지 가서 신사참배를 하기도 했다. 최덕성, 같은 책, 42면. 토착화와 관련한 기독교의 정체성 논란은 1930년대 로 거슬러 올라가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이 시기에 성서를 해석하는 입장이 크게 두 가지로 구분되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박형룡을 중심으로 한 보수주의는 성서가 오로지 하나님의 계시를 받아서 쓴 것이고 따라서 결코 오류가 있을 수 없다고 주장한다. 다른 한편으로, 김재준과 정경옥은 진보주의적이고 자유주의적 시각에서 성서의 권위와 권 리원천을 인정하고 존중하기는 하지만 그러나 성서 해석은 단순히 문자에 의존하는 것 이 아니라 그 작품이 써진 사회적․역사적․문화적 배경 등을 고려해야한다고 주장한 다. 박봉랑, 뺷신학의 해방뺸, 대한기독교출판사, 1991, 62~66면, 72~96면 참조.

15) 김경재, 「기독교의 성찰과 전망」, 뺷1945년 이후 한국종교의 성찰과 전망뺸, 한국종교사 회연구소 편, 민족문화사, 1998, 111면.

(8)

1960년대에 이르면 현재의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KNCC)의 전신인 한국기 독교연합회를 중심으로 한반도에서 공산주의를 소멸시키는 것이 우리 민족 을 구원하는 것이라는 ‘반공주의적 선민의식’을 조장하면서 교세를 확장한다.

이런 흐름은 1970년대에 이르러 대공투쟁의 핵심세력인 군인과 경찰을 기독 교인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운동으로 전개된다. 1980년대에 이르면 우파 기독 교 국제기구들과 연대하고 국내에서 여러 단체, 즉 기독교지도자협의회, 기독 교반공연합회, 구국십자군 등을 만들어 반공 활동을 지속한다. 1990년대에는 한국기독교총연합회(한기총)를 중심으로 조직력을 강화하면서 지배력을 강 화해 나간다. 그리고 2003년 초부터 한기총 중심의 반공적 행동주의는 극단적 인 친미주의를 공공연하게 드러내면서 미국의 부시정권과 함께 북한을 악의 축으로 규정하기에 이른다.16)우리 삶의 현장이 새롭게 변해가는 지금, 기독 교의 상식이 비상식이 된 지금, 상식인의 눈으로 보면 우리 기독교는 ‘점차 죽어서 그 뻣뻣한(死後硬直) 증세를 보여주고 있다.’17)

2.2. 이웃 종교에 대한 차별

우리 문화에 대한 선교사들의 부정적 시각은 우리의 종교에 대해서도 동 일하다.18)특히 미국 출신 선교사들은 미국에서 생겨난 보수주의․경건주 의․근본주의 선교 단체 소속으로, 비기독교적 종교 문화에 대해 부정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었기 때문에 조선의 선교에서도 동일한 태도를 취하고 있 었다. 그리피스(W. E. Griffis)는 조선인들의 종교생활을 실질적으로 지배 하는 것은 원시적인 자연 숭배라고 규정한다.19)우리나라에는 서구 문명이 달성한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사유가 결여되어 있으며 기독교에 버금가는

16) 강인철, 뺷한국의 개신교와 반공주의뺸, 중심, 2007, 15~93면 참조.

17) 존 쉘비 스퐁, 최종수 역, 뺷새 시대를 위한 새 기독교뺸, 한국기독교연구소, 2005, 45면.

18) 조현범, 뺷문명과 야만, 타자의 시선으로 본 19세기 조선뺸, 책세상, 2003, 121~143면, 158면 참조.

19) 이찬수, 뺷한국 그리스도교 비평뺸, 이화여자대학교출판부, 2009, 121면.

(9)

종교가 없다는 것이다.

(1) 무교

한국의 기독교는 무교가 한국 민중의 정신에 깊이 자리 잡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런 사실을 애써 부정할 뿐만 아니라, 종교적 가치도 없는 미신 에 불과하다고 폄하 한다.20)언더우드(H. H. Underwood)는 무교가 도덕적 감동을 제공하지 못하는 종교이며, 기독교 선교에서 ‘한국에서 대결해야 할 가장 완고한 적’21)이라고 한다. 선교사들은 무교가 선교의 방해물이며 심지 어 악마로 여겼다. 그들은 조선이 단지 미신이며 우상 숭배에 불과한 신앙 을 갖고 있기 때문에 미국처럼 근대적 국가로 발전하지 못했다고 본다. 그 러나 무교에 대해 지나치게 육체적이고 현세적이며, 따라서 내세적인 희망 이 결여된 것이라고 비난하거나, 신령만 잘 달래서 개인이 원하는 것만 얻 으면 그만일 뿐 공동체 사회에서 마땅히 있어야할 윤리관이 결여된 것이라 고 비난한다면 분명 잘못된 견해다. 왜냐하면 무교는 인간의 근원적이고 원 초적인 욕구인 배고픔의 충족, 다산, 풍요, 건강 등을 현실에서 충족하려는 희망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무교의 고유한 의례인 굿을 보면, 굿판이 막바지에 이르면 모든 사람들이 한데 어울려 먹고 마시며 흥겹게 논다.22)기독교의 관점에서 보면 그런 행위는 비이성적이고 난장판이라고 비난할 것이다. 그러나 사실 그런 난장판이야말로 하늘과 땅, 신과 인간, 주

20) 개신교의 견해와 달리 무교는 우리의 ‘민족종교’로서 한국 종교의 기층을 이루고 있다.

무교가 한 때 일제와 기독교 그리고 우리 정부에 의해서 탄압을 받았지만 오늘날에도 여전히 그 생명력이 유지되고 있고 앞으로도 한국 사회의 조화와 통일에 긍정적인 영향 을 줄 것이다. 조흥윤, 「민족 및 고유종교의 성찰과 전망」, 뺷1945년 이후 한국종교의 성찰과 전망뺸, 한국종교사회연구소 편, 민족문화사, 1998, 167~184면 참조.

21) 이찬수, 앞의 책, 2009, 123면.

22) 대표적인 예로, 마을 공동체의 안녕과 풍요를 기원하는 마을굿은 노동의 힘겨움, 일상의 단조로움, 구성원들 간의 불화를 해소하는 축제다. 거기에서는 신과 인간, 인간과 인간이 한데 어우러진다. 차옥승, 뺷한국인의 종교경험, 巫敎뺸, 서광사, 1997, 179~185면 참조.

(10)

인과 노예, 나와 너의 구분이 없어지는 통일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 이라고 할 수 있다.

사실 기독교는 무교의 기복(祈福)사상을 내재적으로 수용할 뿐만 아니 라, 선교를 위해 적극적으로 이용하고 있기도 하다.23) 결과적으로 오늘날 기독교 전도를 위해 무교의 끈질긴 생명력과 타협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무교의 여러 요소를 받아들여 한국 기독교는 ‘껍데기만 기독교이고 알맹이 는 무교가 되었다.’24)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2) 유교

유교는 윤리 체계일지는 몰라도 종교는 아니라는 것이 기독교의 입장이 다. 유교는 사람이 만든 신앙이고 따라서 초월적 존재인 신이나 사후세계에 대한 관념이 없기 때문에 종교의 범주에 포함시킬 수 없다는 것이다. 더구 나 축첩제도, 여성 차별 등을 인정하고 있기 때문에 유교는 전근대적이고 비문명적이라는 것이다. 선교사들은 심지어 유교 때문에 한국이 억압적이 고 보잘 것 없는 통치 체계를 유지하고 있다고 본다.25)

그러면 유교는 종교가 아니며 또한 조상 숭배는 전적으로 미신이고 심지 어 비문명적인 행위인가? 물론 우리는 유교를 종교가 아닌 학문 체계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종교란 것이 초월적인 존재의 유무, 혹은 세상을

23) 현세 기복적인 신앙이 표현되는 부흥회를 잠시 살펴보는 것만으로도 그런 사실은 충분 히 입증된다. 눈을 감고 손뼉을 치면서 같은 찬송가를 반복하고 몸을 흔들어 대는 모습, 큰소리로 소위 ‘통성기도’를 해대고 마침내 알아듣지도 못하는 ‘방언’을 마구 늘어놓으 면서 몰아지경에 빠지는 모습이야말로 무교와 다르지 않다.

24) 최준식, 뺷한국의 종교, 문화로 읽는다뺸, 사계절, 1999, 68면.

25) 이찬수, 앞의 책, 123면.

미국의 어떤 선교사는 유교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비판하고 있다. 유교는 믿음을 쇠약 하게 하고 사람을 거만하게 만들며, 여성을 이차적으로 노예적으로 객관화시키면서 윤 리와 발전을 저해한다는 것이다. 최대광, 「기독교근본주의의 정의와 미국과 한국의 기 독교 근본주의」, 뺷종교근본주의뺸, 모시는사람들, 2011, 65면 참조.

(11)

초월한 존재나 원리를 다루고 있는가의 여부에 따라서 규정될 수 있는 것 이라면, 유교는 분명히 ‘종교적’이다. 왜냐하면 유교는 인간의 삶을 설명하 기 위해 천(天)이나 태극(太極), 이(理)라는 초월적 개념을 사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종교가 자기 존재의 궁극적인 기원과 운명에 대한 관심에 서 초월적 존재를 필요로 한다면, 조상을 숭배하는 제사는 충분히 종교성을 지니고 있다. 제사는 조상신이라는 초월적 존재, 제사를 집전하는 제관, 그 리고 신도와 같은 참례자들로 구성되고 진행된다. 그리고 모든 과정이 끝나 면 술은 음복하고 음식은 제사에 참여한 자손들뿐만 아니라 이웃까지 함께 나누어 먹는다. 만일 기독교의 성찬식, 즉 예수의 살과 피를 상징하는 빵과 포도주를 나눠 마시는 것을 기독교의 종교성에 필연적인 것이라고 한다면, 제사에서 드러난 모습들은 유교를 종교로 간주할 수밖에 없도록 한다. 그러 므로 유교의 근본 개념인 인(仁)의 정신, 즉 사람이 타인과의 관계맺음 속 에서 반드시 지녀야할 도덕적 성품 혹은 타인을 배려하는 마음씨를 한국 기독교는 적극적으로 수용할 필요가 있다.

종교학적 관점에서 제사는 기독교가 갖고 있는 영생의 소망을 담고 있다.

왜냐하면 제사를 지내는 것은 자신의 존재가 근원적으로 부모에게서 왔고, 이후에는 자식을 통해서 지속 가능하다는 희망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 이야말로 유한자인 인간이 무한자인 신에게 육박해 가는 길이 아닌가?26) 그러므로 기독교는 유교와 같은 우리의 문화와 종교에 대해서 폐쇄적이고 차별적인 태도를 취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기독교가 이 땅에 올곧게 뿌 리를 내릴 수 있기 위해서 필연적으로 우리의 문화와 자연스럽게 조화를 이뤄야만 한다는 것이 시대적 요청이기 때문이다.

26) 기독교의 입장과 달리 금장태는 유교가 앞으로도 우리의 도덕적 전통질서와 물질문명 의 현대질서를 통합하고, 더 나아가 민족통합 및 문화적, 도덕적 조화기능을 발휘할 것 이며 도덕성과 시대정신의 활력으로 살아날 것이라고 한다. 금장태, 「현대 한국유교의 성찰과 전망」, 뺷1945년 이후 한국종교의 성찰과 전망뺸, 한국종교사회연구소 편, 민족문 화사, 1998, 53~54면. 참조.

(12)

(3) 불교

선교사들은 불교가 무식하고 미신적인 종교, 이타적이지 않고 이기적인 종교라고 폄하한다.27)불교는 타자의 구원과 깨우침에는 관심이 없이 오직 자기 자신의 정신적 안녕만을 추구하는 종교이며, 인간 본위의 종교에 불과 하다는 것이다. 불교가 삶이나 죽음의 문제에 무관심한 종교이기 때문에 실 제로 쓸모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불교는 인간의 궁극적인 문제에 대한 심오한 분석, 자비사상, 방 대한 양의 경전, 윤회와 업보설 등 보편적 종교로 손색이 없다. 불교는 초월 적인 신의 도움 혹은 신에 대한 전적인 복종과 믿음을 통해서 인간의 궁극 적인 문제를 해결하려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깨우침을 통한 문제해결을 강조하는 이성적 종교다. 주지하다시피 불교는 인간의 궁극적인 행복 혹은 좋은 삶은 욕심, 성냄, 어리석음을 버리고 자아중심적인 사유로부터 벗어남 으로써 가능하다고 가르친다. 이는 권력, 명예, 부와 같은 인간적 욕망을 버 리고 진정한 자아, 참된 자아를 회복함으로써 신령한 존재 혹은 하느님의 마음에 드는 존재가 될 수 있다는 예수의 가르침과 다르지 않다.28)더구나 한국의 기독교는 불교와 무관하지 않다. 불교의 미륵신앙은 조선시대의 계 급사회에서 민중이 희생당하였을 때 미륵세계가 도래하여 해방된다는 민 중의 소망이 담겨있는 신앙이다. 미륵신앙에서 볼 수 있는 민중 해방적 성

27) 이찬수, 앞의 책, 122면.

영국의 인류학자 비숍(I. L. Bishop)은, 한국의 승려들은 불교 역사나 교의, 불교 의식 의 취지에 대해 무지한 채로 대다수 승려들이 그저 몇 마디 음절만 공덕을 쌓느라고 끊임없이 반복하고 있으며. 예불할 때에는 그들 ‘스스로도 무슨 뜻인지도 모르는 산스크 리스트어나 티베트어 몇 마디를 중얼거리거나 큰 소리로 뱉어 내는 것일 뿐’이라고 비판 한다. 이찬수, 같은 책, 269면.

28) 사실 붓다의 ‘자비’, 공자의 ‘인’, 예수의 ‘사랑’은 종교의 심층 구조의 측면에서 보면, 참된 자아를 찾음으로부터 타자를 인정하고 배려하라고 하는 동일한 가르침이라고 할 수 있다. 오강남, 뺷종교, 심층을 보다뺸, 현암사, 2011, 123~140면, 342~347면, 439~455면 참조.

(13)

격은 기독교의 민중해방 이념과 상통하는 성격을 지닌다고 할 수 있다. 그 럼에도 불구하고 기독교의 불교에 대한 차별이 극단적으로 심해졌다. 이 때 차별은 단순한 인식적 차원이 아니라 직접적이고 물리적인 폭력을 동원하 여 불상을 훼손하거나 심지어 사찰에 불을 지르는 것과 같은 현상을 말한 다.29)이야말로 이웃을 사랑하라고 가르친 예수를 배반하는 것 아닌가? 그 래서 마침내 한국 기독교는 ‘성장주의, 승리주의, 성차별주의, 권위주의에 물든 역기능의 온상’30)이 되었다.

3. 버려야할 것들(2)

전술한 기독교의 현상들 곧 깊이 뿌리내리고 이윽고 새 봄과 함께 움터 올라서 우리 삶을 즐겁게 해줄 우리의 토양을 오염시켜 참담한 지경에 이르도 록 한 것들의 원인은 무엇인가? 기독교 근본주의다. 1910년에서 1915년 사이 에 미국의 프린스턴에서 개신교 운동 지도자들과 보수적 신학자들이 “근 본”(The Fundamentals)이라는 총서를 간행한 이후 사용된 근본주의는 ‘현대 자연과학과 철학 그리고 성서주석학에 대한 방어와 공격의 산물’31)이다. 즉 현대의 문화와 정신을 반영하지 못하고 과거 회귀적 경향을 보임으로써 기독 교의 정신을 역사적으로 과거에 제한한다.32)사실 나는 한국 기독교에 널브

29) 김종명, 「종교간 갈등 해소 : 전제와 대안」, 뺷종교근본주의뺸, 모시는사람들, 2011, 221~

246면 참조.

30) 김덕기, 「한국교회의 성서해석의 폭력성」, 뺷한국 기독교, 그 어두운 자화상뺸, 다산글방, 2002, 21면.

31) 한스 큉, 이종한 역, 뺷그리스도교, 본질과 역사뺸, 분도출판사, 2014, 787면.

32) 기독교 근본주의는, 헤겔이 비판한 종교와 같다. 그는 예수의 생생한 삶과 근본 가르침 을 제거하고 제도와 의례만 남은 ‘박제화 된’ 기독교를 죽은 종교 곧 실정(positive)종교 로 규정한다. 헤겔은 당시의 기독교가 독일 민족의 고유한 정서와 감정을 담아내지 못 하는 이질적인 종교일 뿐만 아니라, 민족의 정신을 도덕적으로 고양시키고 순화시키지 못한다고 비판했다. 그래서 그는 민중종교(Volksreligion)를 주장한다. 이 종교는 그동

(14)

러진 보수적이고 근본주의적 기독교 요소들과 맞대응하고 싶지도 않고 흥미 도 없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내가 관여 안 해도 이미 사라져 가고 있고, 그 자체가 타당성이 전혀 없으므로 곧 사라질 것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근본주 의자들은 자신들의 입장, 즉 오직 나의 하느님과 나의 전통만을 근본적이고 순수하다고 주장하며, 심지어 타자를 공격하고 정복해야 한다고 주장하기 때문에 큰 문제다.

서양선교사들, 숭미주의적 기독교인들의 미국식 근본주의는 철저하게 자 본축척의 논리, 미국의 패권주의 신화와 관련되어 있다. 예를 들면 미국의 기독교근본주의자들은 하느님이 미국과 미국 국민을 위해서 힘으로 세계 를 지배하고 끊임없는 성장과 풍요를 약속 했다고 한다. 그래서 미국에 반 하는 것은 하느님에게 반하는 것이며, 따라서 미국이 주체가 되어 전 세계 의 산업을 지배하고, 무엇보다 미국의 기독교는 순수하며, 영어는 모든 인 류가 배워야 할 언어라고 주장한다.33)

한국 기독교의 문제는 미국식 근본주의를 단순히 하나의 신학적 흐름이 아니라 오직 그것만이 정통이라고 생각하고 무비판적으로 수용했다는 점 이다. 미국 같은 근대적 국가, 문명화된 국가, 부유한 국가가 되려면 당연히 미국의 정치와 교육 그리고 무엇보다도 미국식 기독교를 철저하게 수용해

안 사회․정치적 제도나 종교의 강력한 계율 아래서 억압된 민중의 생생한 정서와 감정 을 일깨워서 민중이 스스로의 힘으로 바로 서게 하고, 그 민중이 스스로 인간으로 느낄 수 있도록 하는 종교다. G. W. F. Hegel, Volksreligion und Christentum, in, Hegels

theologische Jugendschriften(1907), Hrsg., H. Nohl. (Tübingen, 1966), p.5.

헤겔의 ‘민중종교’ 개념은 헤르더(Herder)의 ‘민족정신’에 영향을 받은 것 같다. 헤르더 는 당시 독일 문학이 외국의 이질적인 신화나 전설 등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여서 독일 의 고유한 민족정신이 노예상태로 전락했다고 보고, 독일민족의 전통적 정신의 회복을 주장한다. G. 루카치, 반성완 외 옮김, 뺷독일문학사뺸, 심설당, 1987, 15면.

33) 최대광, 앞의 글, 60~63면 참조. 선교사들의 이런 사고는 백인우월주의에 의한 미개민 족의 문명화 곧 미국화가 기독교화임을 의미한다. 그들의 의도는 한국의 기독교화와 식민지화였고, 실제로 선교활동중에 언더우드는 석유나 설탕, 농기구 등을 수입하여 경 제적 이득을 취하면서도 자기들의 일이 인류에게 봉사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만열, 뺷한국기독교와 민족의식뺸, 지식산업사, 2014, 467~470, 492~493면 참조.

(15)

야 한다는 것이다. 이로써 오늘의 한국 기독교는 우리의 전통종교에 대하여 전쟁 선포를 하고, 반 미국적, 반 기독교적인 것으로서 철저히 부정하고 심 지어 제거 해야만 하는 것이었다. 근본주의자들은 배타주의와 차별의 정당 성을 성서를 통해서 입증하려고 한다. 그러나 이처럼 딱딱한 율법주의, 도 덕적인 태만을 일삼는 교회, 하지만 불행히도 많은 기독교인들이 이것을 참 된 신앙이라고 믿고 있는 것은 어쩌면 우리가 만들어 낸 사탄적 기독교이 며, ‘그리스도의 깃발 아래서 사탄적으로 행동하는 그리스도의 교회다.’34) 최근 한국의 기독교근본주의는, 자유주의적이고 진보적인 그리고 합리적 이고 다원화된 새로운 사상을 반 기독교적이고 타락한 것으로 여기고, 그것을

‘근본’과 ‘순수’ 그리고 ‘정통’의 이름으로 바꾸려는 저항운동으로 발전하기에 이른다. 이때의 저항은 기독교가 정치세력화 하는 것을 의미한다. 한국 기독 교근본주의자들이 기독교 뉴라이트라는 이름으로 현실 정치에 참여하고 있 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35) 이들이야말로 유배당한 신자(a believer in exile)들이며, 이제 ‘교회’(ecclesia, 불려나왔다)로 나와야할 사람들이다.

34) 월터 윙크, 박만 역, 뺷사탄의 가면을 벗겨라뺸, 한국기독교연구소, 2005, 103면.

35) 2005년 11월 김진홍 목사는 ‘뉴라이트전국연합’을 결성한다. 이 단체는 미국의 부시정권 을 탄생시킨 ‘신기독교우파’(New Christian Right)를 연상시킨다. 반공이데올로기의 수 호를 중심으로 정치 세력화한 기독교 보수집단의 전형이다. 한국기독자교수협의회/한국 교수불자연합회, 뺷현대사회에서 종교권력, 무엇이 문제인가뺸, 동연, 2008, 161면. 유교를 국교로 삼은 한(漢)나라에서 공자의 이론을 따르지 않는 것은 최고의 신성모독죄로 다스 렸듯이, ‘종교가 정치집단화 하면 그 배타성은 절정에 달한다.’ 이기동, 뺷기독교와 동양사 상뺸, 동인서원, 2007, 208면. 사정이 이러하니, 기독교 근본주의자들은, 기독교 공동체의 진리를 보편성의 이름으로 다른 종교공동체에 강요하는 것을 거부한다는 공통점 그리고 진리의 다원성을 인정하고 장려하는 공통점을 지닌 포스트모던신학과 다원주의신학의 현실적 타당성을 부정할 수밖에 없다. 한인철, 뺷종교다원주의의 유형뺸, 한국기독교연구 소, 2005, 215~240면 참조.

(16)

4. 찾아야 할 것들

기독교근본주의처럼 오늘 한국 기독교 안에 팽만한 배타주의의 신학적 기원은 사실 니케아 신조로부터 비롯되었다고 볼 수 있다. 예수를 하느님과 동일한 본질(homoousios)로 규정한 것은, 오직 예수만이 유일한 구원자이 고 따라서 ‘기독교 신앙을 영원히 변질시킨’36)기독교만이 참된 종교가 되 는 것이다. 325년 콘스탄티누스의 별장이 있는 니케아에서 그렇게 결정된 이후, 이에 반대한 아리우스 장로파를 비롯해서 로마의 전통종교인 미트라 스 종교, 심지어 유대교까지 배척한 것은 잘 알려진 것이다.37)

누가 직접 종자를 가져왔든 아니면 누가 좋은 종자라고 가져다주었든 간 에 일단 그 종자를 심어서 열매가 튼실하고 좋은 것이 아니라 오히려 토종을 밀어내고 심지어 토양을 오염시켰다면 농부가 할 일은 무엇인가? 다시 그 종자를 심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하여 농부는 우선 토양을 갈아엎는 수고 를 해야만 하며, 우리의 에토스(ethos)에 알맞은 좋은 종자를 찾아야 할 것이 다. 들어오기 전부터 이미 배타주의라는 병균에 감염되어 있었던 기독교라 는 종자를 버리고 새로 구할 종자로서 기독교는 어떤 것이어야 하는가?

36) 로빈 마이어스, 김준우 역, 뺷언더그라운드 교회뺸, 한국기독교연구소, 2013, 108면.

37) 아리우스 장로파는 ‘예수는 하나님이기는 하지만, 참 하나님은 아니다.’고 주장했다. 리 차드 루벤슈타인, 한인철 역, 뺷예수는 어떻게 하나님이 되셨는가뺸, 한국기독교연구소, 2004, 103면.

CE 313년, 서로마의 콘스탄티누스는 밀라노 칙령을 통해 기독교에 대한 박해를 종식 하고 선교의 자유를 보장한다. 324년에 동로마를 포섭하고 단독 황제가 된 그에게 가장 큰 문제는 분열 없이 로마제국을 이끌어가는 것이었다. 그런데 당시 과학과 학문의 중 심지였던 알렉산드리아 교구에서 주교와 장로 사이에 교리 논쟁이 발생한 것이다. 알렉 산더 주교는 죄인이 죄인을 구원할 수 없으므로 그리스도 예수는 하느님일 수밖에 없다 고 주장한 반면, 아리우스 장로는 만일 예수가 하느님이면 하느님이 둘이 되므로 전통적 인 유대교 신앙에 어긋나며 따라서 예수는 도덕적 완성을 이룬 신적인 존재이기는 하지 만 참된 하느님은 아니라는 것이다. 원래 안키라(앙카라)에서 하기로 한 회의를 갑자기 자신의 별장에서 개최한 콘스탄티누스는 알렉산더 주교의 손을 들어준다. 그래야 초월 세계의 하느님 그리고 현실의 하느님인 황제가 양립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한인철, 뺷예수, 선생으로 만나다뺸, 265~275면 참조.

(17)

우선 초자연주의적 유신론에 물들지 않은 것이어야 한다. 왜냐하면 그런 신은 우리의 삶, 우리의 세계를 자기 마음대로 조작하고 처분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남성명사로 표현되는 ‘그’는 자신이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해낼 만큼 전적으로 자유롭다. 그 신은 그만이 전능한 힘을 가지며 따라서 사랑마 저도 임의적인 것이라서 정작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게 된다.38) 우리가 못하는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는 그 신은 아우슈비츠에서도, 금남로에 서도, 광화문광장에서도 자기의 ‘능력’대로 그리고 ‘자유’대로 아무 일도 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니 우리가 구하는 신은 폭군이자 동시에 무능한 아버지가 아니다. 차라리 오뉴월 땡볕에서 종일 김을 매고 돌아와서 자식을 위해 밥을 지으신 어머니, 쉬지도 못하고 밤이면 등잔불 켜놓고 베를 짜신 어머니, 돌아 가시는 마당에도 형제간의 화목을 바라시던 어머니다.39)

그렇다면 이제 우리가 다시 찾고 만나야할 예수는 누구인가? 한 인간으로 서 그는 어떤 삶을 살았는가? 그는 신비적 탄생과정을 거친 신의 독생자이고 인류의 죄를 대신해서 죽은 후 마침내 부활하여 신이 된 존재인가? 혹시 그런 예수는 신화적 상징과 필요에 의해 만들어진 교리의 감옥에 갇혀 단지 관념적인 믿음의 대상으로 전락한 존재, 교회의 권력에 의해 순치되어 지금 우리에게는 이미 죽은 존재가 아닌가? 그래서 우리는 부활절 이후 추종자들 에 의해서 채색된 전통적인 예수 곧 그리스도로 만들어진 예수가 아니라,

38) 데이빗 그리핀, 강성도 역, 뺷포스트모던 하나님 포스트모던 기독교뺸, 한국기독교연구 소, 2002, 275~282면 참조.

39) 히브리 성경에 2500번이나 나오는 ‘엘로힘’(Elohim)이라는 이름은 남성 신 ‘엘’과 여성 신 ‘엘로아’가 결합되어 복수를 나타내는 ‘임’이 붙여진 것이다. ‘전능하신 하느님’인 ‘엘 샤다이’(El Shaddai)도 어원적으로 ‘젖가슴을 가진 하느님’일 수 있다. ‘나는 나다’인 ‘야 훼’(Yahweh)도 “너희를 낳은 하느님”(신명기 32:18)에서는 ‘낳다’의 의미가 ‘어머니로서 산고를 치른다’는 뜻으로 보면 어머니다. 그러므로 기독교의 신은 최소한 아버지 이면서 동시에 어머니 같은 존재다. 오강남, 뺷예수는 없다뺸, 121~128면 참조. 그러기에 노자 역시 ‘도’(道)를 “寂廖獨立不改, 可以爲天下母”로서의 어머니에 비유한다. 우리의 근 원이시면서도 정작 본인은 드러내지 않고, 묵묵히 우리를 입히시고 먹이시어 살아가게 하신 어머니 말이다. 양방웅, 뺷노자, 왜 초간본인가뺸, 이서원, 2016, 22면.

(18)

1세기 팔레스타인에서 사회적 소외자들과 같이 호흡했던 역사적 예수 곧 하느님 나라라는 대안적 세계를 설계한 예수를 만나야 하는 것 아닌가?40)

예수는 목수(tekton)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농민계급 보다 낮은 장인계 급 출신이며 바로 그 아래 거지, 일용 노동자, 율법사회에서 추방당한 자, 노예 같은 ‘비천하고 희생 가능한 계급’41)이 있다. 그때는 ‘전쟁과 승리에 의한 평화’42)일 뿐인 팍스로마나(Pax Romana, 로마의 평화)를 건설한 옥타 비아누스가 아우구스투스(Augustus, 존엄한 자)가 되어 지배하고 있었다.

그러면 이제 예수가 지상에 실현하려고 했던 것은 무엇이고, 그 실현을

40) 마커스 보그․톰 라이트, 김준우 역, 뺷예수의 의미뺸, 한국기독교연구소, 2001, 93면 참조.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예수, 즉 성서를 통해서 만나는 예수는 예수 사후에 저자들이 속한 신앙 공동체의 존속과 정체성을 유지하기 위해 그들의 입맛에 맞게 신학적으로 재해석된 존재다. 이런 예수를 ‘신앙의 그리스도’ 혹은 ‘정경적(canonical) 예수’라고 하 며, 전문적인 신학용어로 말하면 ‘케리그마의 그리스도’(kerygmatic Christ), 즉 ‘선포된 그리스도’라고 할 수 있다. ‘역사적 예수’에 대한 연구는 1985년 존 도미닉 크로산(John Dominic Crossan)과 로버트 펑크(Robert Funk)가 설립한 ‘예수 세미나(Jesus Seminar) 에서 출발한다. 자유주의적인 신학자 74명이 참여하여 복음서에 기록된 예수의 어록들 중에서 후대 교회가 가필한 것들을 추려내고, 역사적 예수의 어록을 통해 예수의 참 모습을 밝히는 작업을 해오고 있다. 존 도미닉 크로산, 한인철 역, 뺷예수는 누구인가뺸, 한국기독교연구소, 2013, 20면. 이들의 연구는 예수의 유대적 배경을 무시한다는 비판을 받음에도 불구하고, “서구 신약학계의 통념이었던 종말론적 예수상을 부인하고 유대 사 회의 전통적 가치를 전복한 지혜 교사로서의 예수상을 주창했다.” 정승우, 뺷예수, 역사 인가 신화인가뺸, 책세상, 2005, 40면.

41) 존 도미닉 크로산, 같은 책, 68면. 특히 이스라엘을 직접 통치한 헤롯 일가는 황제의 신임을 얻기 위해 과도하게 세금을 거뒀고, 경제적으로 민중들은 도시의 부자들에게 농지를 임차한 소작농이나 일용 노동자가 되어 쉽게 병들거나 이방의 세계로 유랑할 수밖에 없었다. 종교적으로 보면 로마의 원로원과 비슷한 일종의 의회라고 할 수 있는 산헤드린을 장악한 사두개파, 경건주의자들이라고 할 수 있는 바리새파, 쿰란에서 살면 서 엄격한 공동체의 규율을 강조하고 종말론적 신학을 지녔던 급진주의적 엘리트 종파 인 에세네파가 있었다. 그 외에 반로마 무력투쟁을 이끈 젤롯당, 앗시리아에 의해 멸망 한 북이스라엘의 수도인 사마리아에 거주한 사람들로서 남유대 사람들로부터 ‘부정한 자’라고 소외당한 집단이 있다. 정승우, 같은 책, 86~100면 참조. 한인철, 뺷예수, 선생으 로 만나다뺸, 38~89면 참조,

42) 클라우스 벵스트, 정지련 역, 뺷로마의 평화뺸, 한국신학연구소, 1994, 38면.

(19)

위해 어떻게 살았는가? 나름 살만한 땅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로마제국 그리 고 거기에 기생한 유대 왕족과 제사장 계급들, 허다한 정결제도(purity system)를 만들어 민중의 숨통을 조인 바리새파들에 저항한 땅에서 태어나 고 자란 예수가 꿈꾼 세상은 무엇인가? 부모와 자식이 반목하고, 자식이 부 모를 때리고, 친구와 형제간이 다투고, 무법자 천지가 된 세상, 그래서 차라 리 태어나지 않는 것이 좋았을 세상, 마침내 ‘유한한 인간들에게는 단지 쓰 라린 고통만 남을’43)세상에 사는 사람들이 기다리는 나라는 어떤 것인가?

그것은 ‘예루살렘의 성전국가도 아니고, 헤롯의 독재국가도 아니고, 로마의 제국주의도 아닌, 제 4의 길, 즉 하나님 나라에 대한 꿈이었다.’44)

한국 기독교인들이 흔히 천당 혹은 천국으로 부르는 그 ‘하늘나라’는 저 하늘 어디, 즉 물리적 공간이 아니라 바로 이 ‘땅 위에서’ 이루어지는 나라 다. 나라 혹은 왕국에 해당하는 그리스어 바실레이아(basileia)는 영토 혹은 장소라는 뜻보다 주권, 통치, 원리라는 뜻이 더 강하다. 그러므로 하늘나라 는 하느님이 통치하는 나라, 신이 절대적 주권을 가진 나라이다.45) 그러므 로 그 나라는 ‘어디든지’ 일어날 수 있지만, 돈과 권력이 하느님자리를 대신 하면 ‘어디에도’ 없는 곳이다.

43) 헤시오도스, 김원익 역, 뺷신통기뺸, 민음사, 2003, 203면. 예수의 신앙공동체를 이루기 시작했을 때(B.C 1세기 무렵~A.D 2세기 무렵) 대부분의 사람들은 토굴과 비슷한 움막 에서 살았다. 소작농에도 해당되지 않은 사람들은 도시에서 날품을 팔거나 유랑민이 될 수밖에 없었다. 예수는 그런 사람들의 친구가 되었던 것이다. G. 윌스, 권혁 옮김, 뺷예수의 네 가지 얼굴뺸, 돋을새김, 2009, 191~227면 참조. 한국기독교청년협의회, 뺷재미 있는 신약이야기뺸, 녹두, 1993, 17~29면 참조.

44) 한인철, 앞의 책, 80면. 예수는 대제사장에게 내는 종교세, 헤롯 안티파스에게 내는 국 세, 로마제국에 내는 제국세 등에 시달린 이스라엘 민중들에게 위안이 될 희망의 나라를 상상한다. 즉 헤롯 ‘안티파스 통치기간 동안 갈릴리의 소작농들에 대한 경제적 수탈은 예수의 대안적 왕국운동의 배경’이 되었다. 잭 넬슨-폴마이어, 한성수 역, 뺷예수를 배반 한 기독교뺸, 한국기독교연구소, 2012, 300면.

45) 존 도미닉 크로산, 뺷가장 위대한 기도뺸, 김준우 역, 한국기독교연구소, 2017, 121면. 오강 남, 뺷종교, 심층을 보다뺸, 137면. 히브리어 ‘말쿠트’(malkuth), 아람어 ‘말쿠타’(malkutha) 역시 왕국이 아니라 통치(reigning)를 의미한다.

(20)

하늘나라가 도래하기 위해서는 우선 ‘회개’(metanoia)가 필요하다. ‘메타 노이아’는 생각을 바꾸라, 세상을 보는 법을 바꾸라, 깨우치라는 뜻이다. 그 러니까 ‘우리 내면의 가장 깊은 곳, 우리의 의식을 바꾸라. 그러면 천국이 바로 옆에 있다는 사실을 깨달을 것이다.’46)는 의미다. 인간은 누구나 배고 픔을 채우고 싶어 한다. 그러나 세상의 재화는 한정되어 있다. 만일 누군가 가 자신만의 배고픔을 채우기 위해, 자기의 재산만 늘리기 위해 수단과 방 법을 가리지 않는다면 세상의 평화는 요원해질 것이다. 물질적 부와 풍요를 추구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여기는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면, 정의와 사랑 의 신은 결코 그런 사람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을 것이다. 종교는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려도 안 다치는 것과 같은 초자연적인 능력을 보여 주는 것도 아니며, 종교적 권력을 갖는 것도 마찬가지다. 신이 맡겨준 종교 권력으로 사회적 약자를 보호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세속권력과 야합하 여 신성함을 해치는 것은 정녕 신을 배신할 뿐이다. 세상 권력은 또한 어떤 가? 누구나 출세하기를 바란다. 그러나 높은 권력을 가지려면 누군가의 희 생이 불가피하다. 모두가 신의 자식들인데 서로 할퀴는 것을 좋아할 부모는 없다는 것을 깨우치라는 것이다. 이것을 깨달은 사람 곧 지혜를 얻은 사람 들이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을 섬기는 거룩한 백성’(다니엘서 7:18)이며, 하 느님의 나라에 알맞은 ‘사람의 아들’(Son of Man)이다. 깨달은 사람들은 존 재하는 모든 것 안에서 신의 현존을 느낀다. 그들에게 하느님 나라는 미래 에 일어날 사건이 아니라, 지금 곧 일어날 일 그리고 ‘손 뻗으면 닿을 가까 운 곳’(near at hand)에서 이미 일어고 있는 나라다.

그러면 예수는 어떤 삶을 살았는가? 예수는 부자나 가난한자, 남자나 여자, 유대인이나 이방인을 모두 공평하게 대우함과 동시에 정치적․경제적으로 소외받고 차별을 당하는 자들의 고통과 슬픔 그리고 배고픔을 함께 나누는 삶, 질병을 ‘치유’(healing)한 삶을 살았다.47)그는 억압적 권력과 폭력에 ‘맞서

46) 오강남, 같은 책, 137면.

(21)

고’ ‘저항하라’고 가르친 급진주의자,48)폭력은 상대방을 향한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향해 되돌아오는 것임을 가르쳐준 존재다.49)예수는 그를 따르 는 무리들과 전혀 거리를 두거나 차별적 태도를 취하지 않았다. 또한 그는 역사적이고 실존적인 삶의 질곡에서 해방과 구원의 길이 있음을 가르쳐준 복음의 교사였고, 본래 자기 것만 지키려는 부족적 인간인 우리가 타인을 배척하고 증오함으로써 우리 자신과 희생자의 인간성을 동시에 파괴시킨다 는 것을 일깨워 준 참 사람(fully human)이다. 즉 우리가 예수에게서 발견한 본질 자체는 새로운 인간성(new humanity)에 대한 총체적 변화의 의미였으 며, 모든 인간에게 있는 질병인 모든 형태의 편견을 파괴함으로써 마침내 완전하고 자유로운 인간성을 온몸으로 살아낸 존재가 바로 예수다. 그러므로 구원이라는 것도 인간의 삶의 가능성을 보여준 참 사람 예수 안에서, 즉 부족 의 한계, 편견, 성차별 및 공포로부터 자유로운 실존 안에서 성립한다.50)그리

47) 신약성서 누가복음 6:20 곧 “너희 가난한 사람들은 복이 있다.”에서 나오는 그리스어

’가난한’(ptochos)은, ‘극빈의’라는 의미를 갖는다. 즉 “질병이나 빚, 징병이나 죽음에 의해 땅에서 쫒겨나 극빈과 거지 생활로 떨어진 가정의 상태를 가리킨다.” 존 도미닉 크로산, 김기철 역, 뺷예수뺸, 한국기독교연구소, 2007, 113면. 또한 크로산은 예수가 육체적 질병을

‘치료’(curing)한 것이 아니라, 육체적 질병에 수반된 정신적 혹은 종교적 고통을 ‘치 유’(healing)한 것으로 본다. 그래서 예수 운동의 핵심은 “개방된 밥상(open table)을 함께 나누고, 무상의 치유를 제공하는 것”이다. 존 도미닉 크로산, 뺷예수는 누구인가뺸, 147면.

48) G. 윌스, 권혁 옮김, 뺷예수는 그렇게 말하지 않았다뺸, 돋을새김, 2006, 86면. 그러나 폭력 적으로 저항하다, 폭동을 일으키다, 혹은 반란을 일으키다, 저항하여 봉기한다는 뜻을 가진 그리스어 ‘antistenai’는, 예수에게는 다른 의미가 숨겨져 있다. 그는 굴종도 아니며 폭력적 반격도 아닌, 도망치는 것도 아니요 싸우는 것도 아닌, 그래서 너의 인간적 존엄 성을 확보할 수 있고, 혁명 이전에 지금이라도 힘의 평형상태를 변화시키는 길을 찾아보 자는 것이다. 다른 뺨을 돌려 대주고, 속옷까지 벗어 주고, 일부러 더 많이 걸어가 주는 것은 폭력을 가하는 자 스스로가 죄를 짓게 하여 회개하도록 수치스럽게 만드는 동시에 지배체제의 불의함을 폭로하는 은밀한 전략이다. 그야말로 악을 악으로 되갚지 않으면 서 폭력의 악순환을 막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그는 ‘파격적’(subversive)이며 급진적 이다. 월터 윙크, 한성수 역, 뺷사탄의 체제와 예수의 비폭력뺸, 한국기독교연구소, 2015, 323~352면 참조. 리처드 호슬리 엮음, 정연복 역, 뺷제국의 그림자 속에서뺸, 한국기독교 연구소, 2014, 7~18, 129~144, 162~164면 참조.

49) 류성민, 뺷성스러움과 폭력뺸, 살림, 2005, 85~89면 참조.

(22)

하여 마침내 예수 안에서 인간과 신(devine)은 하나가 되고, 한 인간임에도 불구하고 마침내 예수는 ‘모든 존재의 근원’이 되었다.51)

이제야 한국적 토착화신학의 밑그림이 그려졌다. 한국적 기독교는 새로 운 인간성의 원형으로서의 참 사람, 타자 인정과 무한한 배려를 실천하는 성숙한 인격적 존재, 그가 곧 신적 존재인 예수를 따라 사는 것 혹은 마음속 에라도 그런 예수를 간직하는 신앙공동체로 움돋는 것으로부터 출발해야 만 한다. 그 바탕위에서 몸나로는 인간인 예수가 얼나로 솟나 그리스도가 되며 또한 부자유친한 예수와 하느님이 같다는 다석의 가르침이 다시 살아 나고, 공과 무의 형이상학에 힘과 역동성을 불어넣어 사슬에 묶인 하느님을 해방시키려고 했던 변선환을 다시 볼 수 있게 된다. 동시에 세상의 모순구 조 안에서 온 몸으로 고통을 감내하는 민중이야말로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인 예수이며, 밥을 나눠먹은 예수공동체로서의 교회는 배제와 폭력 이 없는 평등공동체임을 보여준 안병무를 다시금 존경할 수 있게 된다.52)

5. 나오는 글

한국 기독교는 그동안 교세확장만을 위해 헌금을 많이 내면 더 큰 복을 받을 수 있다거나 오직 자기 교회만이 참되다고 주장했다. 거기에는 오직 이기주의, 천박한 자본주의의 경쟁논리만 난무할 뿐이다. 오늘날 한국 기독

50) 존 쉘비 스퐁, 이계준 역, 뺷만들어진 예수, 참 사람 예수뺸, 한국기독교연구소, 2009, 341~

376면 참조. 칸트가 본 예수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단적으로 말해서 예수는 ‘도덕적 완전성을 구비한 인간’이다. 예수는 인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죽을 때 까지 악한 세력과 투쟁했고, 소외되고 가난한 무리들과 친구가 되었던 존재다. 예수의 그런 삶이 신이 원하 는 삶이었고 결국 예수는 역사적으로 도덕성을 실현한 존재, 신의 마음에 드는 존재가 된 것이다. I. Kant, Kritik der praktischen Vernunft, in, Kant Werke Bd.6, Hrsg, von W. Weischedel, (Darmstadt : Wissenschaftliche Buchgesellschaft, 1983), p.712.

51) 존 쉘비 스퐁, 뺷새 시대를 위한 새 기독교뺸, 126면.

52) 안병무, 뺷민중신학을 말한다뺸, 안병무전집2, 한길사, 38~42, 196~199, 221~223면 참조.

(23)

교는 강도의 소굴로 전락한 느낌이다. 각종 제도와 법규로 ‘종교의 생명력 과 종교인의 자유를 죽이는 교회, 권력과 부에 기생하는 교회’53)로 전락한 것 같다.

현대 사회는 분명히 다원주의 사회다. 다원화된 사회에서 문화 역시 다양 할 수밖에 없다. 당연히 문화 선택의 기회가 많아지고, 각자의 성향에 따라 서 특정한 종교를 선택할 자유가 있다. 그 선택은 존중 받아야 할 것이다.

붓다나 공자 그리고 예수의 궁극적인 가르침은 서로 배타적인 것이 아니라 상호 공존할 수 있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기독인들은 다른 종교에 대하여 배타적이고 폭력적이다. 이런 상황에서 기독교 토착화는 불가능하 다. 아니 엄밀히 말해서 이웃 종교를 배척하는 기독교는 참사람으로 살았던 예수, 그래서 우리에게도 ‘그렇게 살 수 있고 그렇다면 그렇게 살아야 한다’

는 실존적 결단을 가능케 하는 예수를 또다시 십자가에 못 박는 것이다.

이제 한국 교회와 기독교가 가야할 길은 무엇인가? 제국에 저항한 예수의 삶이 아니라, 새로운 이스라엘, ‘새로운 로마제국’54)인 미국의 근본주의를 따를 것인가? 그래서 세 명의 동지들과 어깨를 걸고 수류탄을 터트리는 마지 막 순간까지 인민공화국 만세를 외쳤던 장렬한 죽음이 아니라, 더 이상 아무 도 찾지 않는 교회 안에 홀로 버려져 ‘예수 천당 불신 지옥’을 뇌까리며 죽을 것인가? 이미 교회 기독교는 동유럽을 포함한 세계 도처에서 ‘빛바랜 마지막 유물’55)이 되어버린 지금에도 말이다. 아니면 하느님은 모든 관계를 단절한 절대자며 예수는 그와 동일한 존재라고 주장하지 않고, 예수는 우리가 본받아 야 할 사람, 올바른 삶의 길을 먼저 살아내신 스승, 그래서 본질적으로 붓다이 고 공자이며 노자였던 그런 예수를 따를 것인가 말이다. 만일 우리가 참된 종교, 참사람 예수를 재발견하기 원한다면, 교회와 결별하고 새로운 사고방식

53) 양명수, 뺷기독교 사회정의론뺸, 한국신학연구소, 1997, 189면.

54) 리처드 호슬리, 앞의 책, 9면.

55) 돈 큐핏, 김준우 역, 뺷예수 정신에 따른 기독교 개혁뺸, 한국기독교연구소, 2006, 106면.

(24)

을 배워야만 할 것이다. ‘메마르고 야윈 기독교가 세상에 줄 수 있는 것은 교리들, 신조들, 이론들, 예배의식들, 영적인 기도문들이 아니다.’56)그러니 이제 한국 기독교의 지도자들은 다시금 우리 토착문화와 전통 종교를 깊이 공부해야 한다. 큐핏의 말대로 ‘종교가 무엇이며, 그것이 어떻게 인간을 해방 시키며 우리로 하여금 우리 자신의 세계를 건설해나가는 일을 어떻게 도울 수 있는지를 다시 배워야만 한다.’57)이로부터 수 십 년 전 선배들의 치열한 고민에서 출발한 토착화, 토착신학이 새롭게 시작될 것이다.

참고문헌

강인철, 뺷한국의 개신교와 반공주의뺸, 중심, 2007.

김경재, 「기독교의 성찰과 전망」, 뺷1945년 이후 한국종교의 성찰과 전망뺸, 한국종 교사회연구소 편, 민족문화사, 1998.

김덕기, 「한국교회의 성서해석의 폭력성」, 뺷한국 기독교, 그 어두운 자화상뺸, 다산 글방, 2002.

김종명, 「종교 간 갈등 해소 : 전제와 대안」, 뺷종교근본주의뺸, 모시는사람들, 2011.

김흥호, 이정배 편, 뺷다석 유영모의 동양사상과 신학뺸, 솔, 2002.

금장태, 「현대 한국유교의 성찰과 전망」, 뺷1945년 이후 한국종교의 성찰과 전망뺸, 한국종교사회연구소 편, 민족문화사, 1998.

데이빗 그리핀, 강성도 역, 뺷포스트모던 하나님 포스트모던 기독교뺸, 한국기독교 연구소, 2002.

돈 큐핏, 김준우 역, 뺷예수 정신에 따른 기독교 개혁뺸, 한국기독교연구소, 2006.

로빈 마이어스, 김준우 역, 뺷언더그라운드 교회뺸, 한국기독교연구소, 2013.

류성민, 뺷성스러움과 폭력뺸, 살림, 2005.

리차드 루벤슈타인, 한인철 역, 뺷예수는 어떻게 하나님이 되셨는가뺸, 한국기독교 연구소, 2004.

리처드 호슬리 엮음, 정연복 역, 뺷제국의 그림자 속에서뺸, 한국기독교연구소, 2014.

56) 월터 윙크, 한성수 역, 뺷참사람뺸, 한국기독교연구소, 2016, 528면.

57) 돈 큐핏, 같은 책, 107면.

참조

관련 문서

미국 수로학 협회: The Hydrographic Society of America (THSOA) – 1984년 설립 선박항해 관련 비영리 단체: Center for Coastal &amp; Ocean Mapping/Joint.

◇ 영역분석을 통해 문화에 대한 탐색이 이루어진다.. ◆하나의 문화기술지로

• 슐라이어마허의 감성주의, 독일의 경건주 의, 미국의 성결-오순절 운동 등으로 성령 론은 급격하게 변화하게 되었으나 성령론 은 교회 운영 및 성도의 신앙생활의

수출보험 업무통합 전담...

여섯째, 한국에 대한 관심은 특히 전문적 분야에서도 높은 수준을 보이고 있 다. 일곱째, 스웨덴 사람들은 재즈, 기타, 앙상블 등 소규모 문화에 대한 수요도 크기 때문에

요약하자면 의사소통에 대한 불안을 제외하곤 전반적으로 영어 시험에 대한 불 안, 동료의 부정적 평가에 대한 불안, 교사의 부정적 평가에 대한 불안이 원어민 교사

특히, 범주들에 대한 형이상학적 탐구는 때때로 비단 우리의 언어와 상식을 정리하는 차원을 넘어서서 실제 세계에 관련된 문제들로 넘어갈 수 있다.. “재주넘기”는

이 활동을 통해 학생들은 하나의 미술사조로서의 옵아트 분야에 대한 이해를 높일 것이며 , 여기에 숨겨진 과학 원리에 대해서도 학습함으로서 미술과 과학의 연관성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