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이라 해서 해넘이 잔치를 벌였었지’, ‘문이나 문지방에 콩을 뿌리면 귀신이 달아나고 새로운 날이 올 것이라는 기대 속에 작은 잔치를 벌였고, 입춘대길(立春大吉)이나 국태민안(國泰民安)이라는 글귀들 을 써서 대문간이나 대문 앞 대들보에 붙였었지’. 이런저런 회상에 잠긴 채 차는 달려서 남한산성(南漢 山城) 안으로 접어들었다.
얼마 전 내린 눈들이 아직 녹지 않았는데도 산성 안의 음식점들은 손님 맞을 채비로 부산하다. 천천 히 눈 덮인 남한산성 길을 오르기 시작한다. 내린 눈이 올라가고 내려오는 사람들의 발자국에 녹아, ‘산 책길 같은 산성 길이겠거니’ 짐작하여 평상시에 신던 신발을 신고 온 일행들은 발을 옮기기조차 여의치 않아 보인다.
나라 안의 산성 중 가장 아름답고 잘 보존되어 있어 유 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남한산성은 경기도 광주 시 중부면 산성리에 위치해 있다. 남한산(南漢山)은 서울 분지를 끼고 동쪽의 지맥인 수락산(水落山), 불암산(佛巖 山)과 동남으로 이어지며, 서울 북쪽의 북한산(北漢山)과 는 한강을 사이에 두고 마주보는 위치에 있다.
북쪽의 개성, 남쪽의 수원, 서쪽의 강화, 동쪽의 광주 등 서울을 지키는 4대 외곽 중 동쪽에 있던 성이 남한산성이 다. 사적 제57호로 지정되어 있는 남한산성은 북한산성(北 漢山城)과 함께 도성(都城)을 지키던 남부의 산성이었다.
「고려사」와 「세종실록지리지」에 온조가 백제를 건국하여 위례성에 도읍한 뒤에 기원전 6년(온조왕 13년)에 이곳 남 한산성으로 천도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하지만 홍경모 (洪敬謀)는 「남한지(南漢志)」에서 그것을 부정하고 있다.
그때 온조가 도읍한 성은 광주고읍(廣州古邑)에 위치한 지 금의 금단산 아래에 있었다고 하며, 온조고성은 이성산성 (二聖山城)이라고 하였다. 「동국여지승람」에는 광주 일장산 성(日長山城)이 672년(문무왕 12년)에 새로 축성한 주장산 성(晝長山城)이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 성이 남한산성이 다. 남한산성은 둘레가 3,993보(걸음)로, 성 내에는 군자고 (軍資庫)와 우물이 일곱 개가 있는데 가뭄에도 물이 마르지 않으며, 논과 밭이 124결(結)이나 되었다고 한다.
남한산성 남한산성
남한산성이 현재의 모습으로 대대적인 개축을 한 때는 후금(後金)의 위협이 고조되고 이괄(李适)의 난을 겪고 난 1624년(인조 2년)이다. 이때 각성대사를 도총섭(都摠攝)으로 삼아 팔도의 승군을 동원하 였는데, 승군의 사역과 보호를 위하여 장경사(長慶寺), 옥정사, 국청사, 동림사, 개원사, 천주사 등 사 찰을 추가로 건립하여 모두 아홉 개의 사찰에 승군들을 머물게 하면서 훈련과 수도방위에 만전을 기 했다. 산성이 축조된 뒤 1639년(인조 17년)에 처음으로 기동훈련이 실시되었는데 참가한 인원은 1만 3 천여 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그 후 순조 때에 이르기까지 각종 시설이 정비되어, 남한산성은 우리나라 산성 가운데 시설이 가장 완벽한 성으로 손꼽히고 있다.
길이 미끄러운데도 산성을 찾은 사람들은 삼삼오오 짝을 지어 오르내리고, 곧 남한산성의 산 중 가 장 높은 산이라는 일장산(日長山, 453m)에 도착한다. 남한산성의 산 중 낮이 가장 길다고 해서 일장 산이라는 이름이 붙여진 이곳에는 일명 서장대(西將臺)라 불리는 ‘수어장대(守禦將臺)’가 있다. 수어 장대는 1624년(인조 2년) 남한산성을 축조할 때 동서남북에 세운 네 개의 장대 중 제일가는 장대였으 며, 당시 세운 장대 중 유일하게 남아 있다. 성곽을 따라 멀리 내다보며 적을 감시하고 주변을 살피기 위해 세워진 목조건물로, 수어장대에 서서 바깥을 바라보면 성 안이 훤히 내려다보이고 멀리 양주, 양 평, 용인, 고양, 서울의 풍경들이 시원스럽게 보인다.
이곳 수어장대는 조선 16대 임금인 인조가 병자호란 당시 45일을 머물면서 직접 군사를 지휘하고 격려하며 청군에게 항전하던 곳이다. 결국 인조는 삼전도로 내려가 청 태종에게 항복을 하게 되는데 이는 인조반정에 기인하고 있다.
연산군의 폭정 때문에 일어났던 중종반정과는 달리 인조반정은 광해군과 대북정권의 현실적인 청 나라와의 외교 그리고 폐모론을 반대하며 일으킨 쿠데타였다. 인조반정 이후 광해군이 표방했던 명과 의 중립 외교노선은 반청노선으로 바뀌고 말았다. 청나라와 조선을 형제로 보고 서로 예우(禮遇)하고자 했던 청 태종은 크게 분노하여 1627년 정묘년 1월에 3만 명의 대군을 이끌고 조선을 침공하여 정묘호란 우리 옛길 걷기 30
일장산(청량산)남한산성
남문 북문
산성리 망월사 장경사 수어장대
동문
약사사 산성공원
검단산 연자방이 앞 출발점
남한산성입구역 산성역
남한산
남한산성 길을 따라 걷고 있는 사람들
주로 남하하였다. 그러나 청나라와 조선 모두 전쟁을 계속할 여력이 없었기 때문 에 협상에 들어갔다. 그때 청나라는 조 선에 사신을 보내어 조선을 침략하게 된 이유를 말하고 요구사항을 내걸었다. 조 선의 만주 영토를 청나라에 내놓을 것, 명나라의 장수 모문룡을 잡아 보낼 것, 명나라 토벌에 조선군사 3만 명을 지원 할 것, 최명길이 강화회담에 나서서 청 과 형제관계를 맺을 것 등의 사항에 합 의하자 청나라는 철수하였다. 하지만 1636년 청나라는 정묘약조에서 설정한 형제관계를 폐지하고 새 롭게 군신관계를 맺어 공물과 군사 3만 명 지원을 요청한다. 조선은 그 제의를 거절하고 팔도에 선전 교서를 내렸다. 선전교서에는 조선 백성보다 향명대의(向明大義: 명나라를 향한 큰 의리)가 더 큰 목 소리로 주창되어 있었다. 명나라와의 의리를 지키기 위해 후금과의 화(和)를 끊는다는 선전교서였던 것이다. 결국 1636년 12월 1일, 청 태종은 군사 12만 명을 이끌고 조선침략에 나섰고 그것이 병자호란 이다. 인조는 1만 3천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남한산성에 들어가 진을 치고 명나라에 구원병을 요청하 였다.
이때 성 안에는 양곡 1만 4,300석(石), 장(醬) 220 항아리가 있었는데, 이는 겨우 50여 일을 견디어 낼 수 있는 식량에 불과하였다. 청군의 선봉부대는 12월 16일에 이미 남한산성에 이르렀고, 대신 담태 (潭泰)의 군사도 아무런 저항을 받지 않고 서울에 입성하여 그길로 한강을 건너 남한산성을 포위하였 다. 청 태종은 다음 해 1월 1일 남한산성 밑 탄천(炭川)에서 20만 명의 군사를 포진하고 성 동쪽의 망 월봉(望月峰)에 올라 성 안을 굽어보며 대치하였다. 큰 싸움은 없었지만 40여 일이 지나자 성 안의 상 황은 말이 아니었다. 남한산성 안에서는 화친을 주장하는 주화파와 외세의 침략을 죽음으로 막아내자 는 척화파의 화(和)·전(戰) 양론이 팽팽히 맞서 있었지만, 대세는 이미 주화파 쪽으로 기울고 있었다.
그때 조선의 상황은 어떠했는가? ‘임진강 북녘에서는 되놈의 씨가 배에 가득 찼고 굶주린 백성이 서 로 잡아먹었던’ 그 치욕을 임금이나 고관대작들은 사대주의 명분 때문에 알고도 모른 체 했던 것이다.
세자와 함께 남한산성에 들어온 지 45일 만에 결국 인조는 호곡(號哭) 소리가 가득한 산성을 뒤로 하고 삼전도(三田渡)로 내려가 항복하고 만다. “천은이 망극하오이다” 하며 아홉 번이나 맨땅에 머리 를 찧은 인조의 이마에는 피가 흘러내렸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치욕이 어디 그것뿐이랴. 결국 청 태종 은 소현세자와 빈궁, 그리고 봉림대군과 함께 척화론의 주모자 오달제(吳達濟), 윤집(尹集), 홍익한(洪
남한산성 동문
翼漢)을 볼모로 삼아 심양으로 돌아갔다. 병자호란의 후유증은 여러 형태로 나타났다. 수많은 고아들 이 생겨났고, 청군이 철수하면서 끌고 간 50만 명에 달하는 조선 여자들의 문제 또한 심각했다. 그들 이 여자들을 끌고 간 목적은 돈을 받고 조선에 되돌려주는 것이었다. 가장 싼 경우가 1인당 25냥 내지 30냥이었고, 대개는 150냥 내지 250냥이었으며, 비싼 경우는 1,500냥에 이르렀는데, 끌려간 사람들 이 대부분 빈민 출신이라 값을 치르고 찾아올 만한 입장이 못 되었다. 비싼 값을 치르고 아내와 딸을 되찾아오는 경우도 있었지만, 되돌아온 환향녀(還鄕女, 그 뒤부터 남의 남자와 잠을 잔 여자를 ‘화냥 년’이라고 함)들이 순결을 지키지 못하고 살아 돌아온 것은 조상에게 죄를 짓는 일이라 하여 이혼이 정 치, 사회 문제로 대두되기도 했다.
비록 한 달 반 남짓한 짧은 전쟁 기간이었으나 그 피해는 미증유의 국난이라고 일컬어지는 임진왜 란에 버금가는 것이었다. 조선왕조로서는 일찍이 당해보지 못한 일대굴욕이었다. 이로써 조선은 명과 의 관계를 완전히 끊고 청나라에 복속하게 되었으며, 이와 같은 관계는 1895년 청일전쟁에서 청나라 가 일본에 패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서인과 인조가 지나친 명나라 사대주의에 빠지지 않고 광해군이 추구했던 실리주의 노선을 제대로 이어갔다면, 두 번에 걸친 전란뿐만 아니라 오랫동안 중국과 맺어왔던 군신관계를 청산하고 형제관계 를 유지하면서 국가적 힘을 비축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나는 수어장대의 계단에 서서 남한산성의 지난했던 역사를 떠올려보며 그 시절을 살다간 민초들의 거친 숨결을 느끼고 싶었지만 바 람도 없이 햇살만 내리쬘 뿐이다.
수어장대는 단층 누각이었던 것을 영조의 왕명으로 ‘이층 누각’으로 지었으며, 바깥쪽 편액을 수어 장대(守禦將臺), 안쪽 편액을 무망루(無忘樓)라고 하였다. 무망루는 볼모로 잡혀갔다가 8년 만에 돌아 우리 옛길 걷기 30
수어장대
잊을 수 없는 그날의 역사를 되새겼다고 한다.
늦은 점심을 먹고 장경사로 향하는 길에 가파른 능선을 오르다보니 힘겹게 성을 쌓았던 옛 사람들이 어렴풋이 떠오 르면서 우리 어머니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퍼부어 댔던 욕설 들이 문득 떠오른다. 오사를 할 놈, 육시를 할 놈, 나가서 뒈 질 놈. 우리들의 어린 시절엔 아무렇지도 않게 들었던 그 욕 설들을 요즘 자라나는 남의 아이들에게 한다면 큰 싸움이 일어나고도 남을 것이다. 그중 오사(五死)라는 말의 본래 뜻 은 무엇인가. 배가 고파 죽고, 병들어 죽고, 더위에 지치거나 추위에 얼어 죽고, 운반하다가 힘에 겨워 돌에 깔려 죽고 그리고 매 맞아 죽는다는 다섯 가지 죽음의 유형을 뜻하는 말인데, 산성을 답사하다 보면 그 말을 이해할 수가 있다. 1,200여 개가 넘을 만큼 유난히 산성이 많은 한반도에서 살아온 우리 선조들은 유사시에 대비하기 위해 산성을 쌓다가 많이들 죽어갔던 것이다.
지금의 남한산성은 서울과 근교 사람들의 휴식처로 자리하고 있다. 지금 성곽 안에 남아 있는 건물 은 불과 몇 되지 않는다. 동·남문과 서장대, 현절사, 문무관, 장경사, 지수당, 영월정, 침괘정, 이서 장군 사당, 숭렬전, 보, 루, 돈대 등이 남아 있지만 그나마 고증이 제대로 되지 않은 채 보수하다 보니 광주목 관아 자리에는 호텔까지 들어서 있다. 나는 동문 문루에 올라서서 강 건너 산줄기를 따라 이어 진 남한산성을 바라보며 그 안에 살았던 사람들을 떠올려본다. 산성 안에 사는 사람들을 두고 “산성 사람들의 장사 솜씨는 개성 사람들보다 더 낫다”라거나 “산성 사람들은 광주 유수 등쳐 먹고 살았다”
라는 말이 있을 만큼 산성 사람들은 기질이 억척스럽고 이재에 밝았다고 한다. 그래서 그런지 광주 사 람들은 남한테 돈을 꿀 생각도 하지 않고, 남한테 아예 돈을 꾸어주지도 않는다고 한다. 그뿐 아니라
“산성 사람 빚은 안 갚고는 못 배긴다”라는 말까지 전해져 오고 있는데, 그것은 산성 사람들이 산성에 서 나는 매운 마늘을 먹기 때문에 기질이 그렇게 되어서라고 하지만 매운 마늘보다는 오랜 전란에 시 달리며 부대낀 탓이라고 보는 게 옳을 듯싶다. 남한산성의 오후는 많은 사람들로 장터처럼 북적대는 데, 내 마음 깊숙한 곳에서는 무거운 검은 구름이 뭉게뭉게 피어오르는 듯하다.
장경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