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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멸의 사랑, 미디어의 ‘확장된 영역’을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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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미디어의 ‘확장된 영역’을 위하여

최 종 철*

1)

Ⅰ. 뉴미디어의 모순들

Ⅱ. 모순에 대한 비평적 응전

Ⅲ. 구원의 방식으로서 ‘기억하기’

Ⅳ. ‘확장된 영역에서의 매체’ - 크라우스의 기호사각형 읽기

Ⅴ. 불멸의 사랑

“와, 이 시체는 완전히 죽지 않았네.

우리가 알아채지 못한 방식으로 살아 있는 거야 (Wow, this dead body is not so dead.

It is alive in ways we do not recognize)”1) 핼 포스터

* 미야자키 국제대학교 부교수

이 논문은 한국미학예술학회 2019년 특별기획심포지엄에서 발표한 원고를 수정보완하여 게재한 것임.

* DOI http://dx.doi.org/10.17527/JASA.57.0.08

1) Hal Foster, “Is the funeral for the wrong corpse? An interview with Hal Foster Bret Schneider & Omair Hussain”, Platypus Review, vol. 22 (April 2010), p.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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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 뉴미디어의 모순들

디지털 미디어는 예술에게 축복이자 저주다. 그것이 축복인 이유는 키틀러 (Friedrich Kittler, 1943- ), 마노비치(Lev Manovich, 1949- ), 바이벨(Peter Weibel, 1944- )과 같은 뉴미디어의 선지자들이 예언해왔던 것처럼, 컴퓨터를 기 반으로 하는 디지털 매체가 자신의 “종합적 적용성”을 바탕으로 모든 개별 매체 와 문화적 생산물들을 포괄하는 보편성/일반성을 지닌 바, 이 보편성을 통해 예술 의 특권과 물신성이 해체되고 관객 경험이 무한히 확장되는 새로운 (민주적) 예 술의 시대가 열릴 것이기 때문이다.2) 그러나 이러한 미디어의 축복들 너머로 어 떤 저주의 징후가 감지되는데, 이는 디지털 시대의 기술적 확장이 정보문화산업 의 맹목적 논리들 속에서 예술의 종말을 견인하는 새로운 종류의 모순들로 귀결 되고 있기 때문이다.3)

뉴미디어의 모순이란 첫째, 오늘날 디지털 기술에 의해 ‘일반화’ 된 미디어 가 ‘특정적인’ 예술의 전통에 미치는 부정적 영향으로부터 기인한다. 21세기 웹 2.0시대의 개시는 디지털 기반의 창작/소통 과정을 대중화함으로써 예술의 특권을 해체했다. 디지털 미디어를 통한 창작행위는 창작자의 특수한 재능과 노력도, 특 정한 양식과 매체도, 미학적 엄정성과 제도적 뒷받침도 요구하지 않는 극히 일반 적인 문화 행위가 되어 버린 것이다. 이러한 일반성의 지평에서 예술가들은 새로 운 전형성을 드러내는데, 그것은 부리오(Nicolas Bourriaud, 1965- )가 요약한 바 와 같이, “정보의 벼룩시장을 뒤지고 그곳에서 수집된 이미지와 데이터들을 리믹

2) Peter Weibel, “The Postmedia Condition” (online), http://www.metamute.org/editorial /lab/post-media-condition (2019년 4월 12일 최종 접속), Lev Manovich, “Post-media Aesthetics,” in: Manovich.net (online), 2001, http://www.manovich.net/TEXTS_07.HTM (2019년 4월 12일 최종 접속).

3) 예술의 형식적 전통을 위협하는 디지털 미디어 아트의 모순에 관해서 논자는 다음의 논문에서도 간략히 언급한 바 있다. 최종철, 「로잘린드 크라우스 포스트 미디엄 이론 의 이중성에 관한 변증적 고찰」, 미학예술학연구 46집 (2016), pp. 211-263 (DOI:

10.17527/JASA.46.0.07), pp. 229-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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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하는 디제이나 프로그래머”의 모습이며, 이러한 전형성 속에서 “창조성과 독창 성 같은 예술의 역사적 관습들은 그 유효성을 잃고 만다.”4)

둘째, 예술이 데이터를 수집하고 가공하는 정보경험으로 일반화되자 예술의 특정한 형식적 가치를 규정하고 지속시키는데 공헌했던 미술사와 비평, 제도는 존립 근거를 잃는다. 오늘날 미디어 아트는 종종 혁신적인 정보기술을 뒤쫓으며 그것의 시연장이 되기를 마다하지 않고, 고양된 관객보다 불특정 다수의 사용자 (user)들에 봉사하고자 하는데, 이것에 대한 가치 판단은 그러한 기술의 혁신성과 실효성을 감지할 수 있는 과학자나 대중들의 것이지 특권화된 비평가, 큐레이터 의 몫이 아니다.

셋째, 이렇게 비평과 제도가 붕괴하자 득세하는 것은 개별 경험의 소비적 가치를 촉진할 감각적 자극들이며, 이러한 말초적 재미와 신기함은 예술의 가치 와 전위성을 결정하는 새로운 척도가 된다. 제도 밖에 있는 예술가들을 움직이는 것은 예술의 소비자와 이들의 취향에 민감히 반응하는 기업들이며, 이러한 상업 적 권력이 비평의 권위를 대체하게 되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예술가들은 상업문 화의 스펙터클들과 겨루어야하며, 이러한 대결 구도는 예술을 신자유주의적 문화 산업의 구조 안에 빠르게 예속시킨다.

넷째, 그리하여 예술은 예술과 예술 아닌 것 사이에서, 미학과 정치학 (혹은 미학과 상업주의) 사이에서 길을 잃는다. 오늘날 미디어 예술가들은 종종 거리의 광고판이나 비디오 게임, 공상 과학 영화의 한 장면 같은 형식을 통해서 소비문 화와 융합하려하거나, 디지털 커뮤니케이션의 실시간성, 쌍방향성을 통해 가상의 정치적, 이념적 공동체를 구축하고자 하는데, 이 중간적 위치에서 예술의 역할이 란 그저 정치적 이상과 상업적 욕망의 그럴싸한 판타지 ― 아도르노가 “미적인 가상의 패러디”라고 부른 것 ― 의 생산일 뿐, 결코 그러한 이상과 욕망을 충족시 키지 못한다.5)

4) Nicolas Bourriaud, Postproduction - Culture as Screenplay: How Art Reprograms The World (New York: Lukas & Sternberg 2002).

5) T. W. 아도르노, 미학 이론, 홍승용 옮김 (문학과 지성사 1984), p. 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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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째, 따라서 예술이 예술로서도 그리고 어떤 정치적, 기술적, 문화적 행 위로서도 규정될 수 없다면 결국 예술의 무위론 혹은 종말론이 다시금 득세하게 될 것이다. 이론가들은, 가령 조슬릿(David Joselit)처럼, 당대를 소비경제의 순환 구조 속으로 예술이 용해되어 버린 ‘예술 이후’의 시대로 보려 하거나,6) 부리오처 럼, 더 이상 독창적인 것의 생산이 불가능한 ‘포스트프로덕션’의 시대로 규정하려 할 것인데, 문제는 이러한 규정들이 동시대의 문화적 조건들 안에서 단지 한시적 으로만 유효할 뿐, 그것이 과거 혹은 미래와 맺는 관계에 대해서는 무관심하고 무책임하다는 것이다.

예술의 항구한 역사성을 배반하는 이러한 모순들로 인해 ‘뉴미디어라는 축 복’은 동시에 예술의 종말을 앞당기는 저주가 된다. 디지털이 개별 미디어들 간의 차이를 없앰으로써 매체의 개념을 폐기할 것이라 주장했던 키틀러 이래 모든 뉴 미디어의 신봉자들은 그래서 자신들의 혜안을 통해 스스로의 종말을 예언하고만 비극적 선지자 ‘카산드라’가 되고 만 것이다.7) 분명 오늘날 새로운 미디어 산업 속에서 예술의 “(디지털적) 확장”은 아도르노가 오래 전 문화산업에 대해 지적한 바 있는 것처럼, “수축으로 드러나고 말았다.”8) 이제 이러한 당대 문화의 기술적 가능성과 파국적 모순들 앞에서, 확장과 수축의 헤아릴 길 없는 변증적 연쇄 속 에서, 다시금 “예술에 대해 자명한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사실이 자명해지고 만 것”이다.

Ⅱ. 모순에 대한 비평적 응전

물론 미디어 아트의 비자명성은 (예술의 형식적 전통을 해체하고 뉴미디어 로의 확장을 견인했던) 포스트모더니즘의 관점에서 보자면 하나의 가능성이다. 비

6) David Joselit, After Art (Princeton, NJ: Princeton University Press 2013).

7) Rosalind Krauss, Under Blue Cup (Cambridge, MA: MIT Press 2011), p. 35 참조.

8) T. W. 아도르노, 미학 이론, p.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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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명성은 예술의 특권과 절대성을 해체하기 위한 발판이 되며, 특정성 너머로 무 엇이든 (누구든) 예술이 될 수 있음을 약속하는 다원주의의 내적논리가 되는 것 이다. 그러나 이 해체적 포스트모더니즘은 종종 반그린버그의 기치 아래 미학적 인 경험을 반미학적 담론 속으로 용해시켜 버리고, 그 속에서 어떤 유의미한 형 식과 구조도 거부한 채, 매체는 적이며, ‘화이트 큐브는 끝났다(white cube is over)’는 공허한 구호를 반복함으로써 진지한 예술의 죽음을 초래해 왔다. 오늘날 예술가들이 상업주의와 결탁하고, 관계미학의 모호한 정치적 이상주의를 쫓으며, 사회적 메시지를 구현할 수 있다면, 그 무엇이든 ― 동물 축사나 쓰레기 더미, 타 이 카레, 인터넷 포르노그래피, 개인 블로그 등등 (크라우스가 “참을 수 없이 가 벼운 것들”이라 부른 포스트 미디엄의 도구들) ― 예술의 범주로 끌어들이는 것 은 당대의 제도가 그처럼 비자명한 것들을 다원주의라는 이름으로 정당화하고 있 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론계는 이미 다원주의의 흉포한 확장에 대한 반격을 진행해 왔다.

이론가 로잘린드 크라우스는 예술의 자율성과 특정성을 거부하고 공허한 정치적 주장들을 관철시키기 위해 무엇이든 예술의 표식을 달아주었던 현대미술의 반 매 체적 조건들을 “괴물적 신화”라 규정하고, 오늘날 예술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 는 이러한 포스트 미디엄의 부정적 조건들을 발판 삼아 “박차고 나가는 역영(逆 泳)의 운동을 시작해야 한다”고 주장한 바 있다.9)

비평가 핼 포스터 역시 포스트모던 시대에 제도적 다원주의(institutional pluralism)가 획득한 정당성이란 ‘모더니즘의 비평적 일관성을 무너뜨리고, 그저 예술 기관들의 절충주의에 일종의 (미학적) 알리바이를 제공해 준 것 이외에는 없다’라고 진단 한다.10) 이 제도적 다원주의는, 예술에서건 정치적 담론에서건, 순 9) “(Good Artists today should be) challenging the post-medium insistence about the end of the space specific to art’s autonomy …; instead they rely on the resistance of its walls to penetration, the way the sides of a pool provide the swimmer with a kicking post against which to propel himself in a new direction.” Rosalind Krauss, Under Blue Cup, p. 25.

10) Hal Foster, “Against Pluralism,” Recodings: Art, Spectacle, Cultural Politics (Por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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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주의를 합리화하는 기괴한 면책효과로 귀결될 뿐이며, 이 면책효과를 통해 예 술기관들은 담론과 작가들을 통제하고, 비평의 날카로운 시각을 무디게 한다는 것이다.

물론 크라우스와 포스터를 비롯한 80년대의 이론가들은 포스트모던 미술의 다원적 진행을 기획하고, 그것의 반미학적, 탈구조적, 매체 일반적 상황을 ‘확장’으 로 기술한 장본인들이었다.11) 그러나 포스터가 최근의 인터뷰에서 “확장된 장은 이제 터져버렸다”라고 진술한 것처럼, 과거에 포스트모던의 저항을 확장으로 인식 했던 문화적 낙관주의는 부정성의 기약 없는 지속과 내파 속에서 어느새 비관주 의로 바뀌어 버린 것이다.12)

포스터는 특히 「엉뚱한 송장에 대한 장례식 This Funeral is for the Wrong Corpse」에서 모던적 전통에 대한 포스트모더니즘의 떠들썩한 장례식의 아이러니 는 그것이 “엉뚱한 송장에 바쳐진 것”이라고 일갈하며, 스펙터클과 장식주의로 변 질되어 버린 포스트모던의 맹목을 비판한 바 있다.13) 포스터에 따르면, 7-80년대 에 퍼졌던 예술의 종말론은 결코 실현된 적 없으며, 그러한 종말적 역사관 위에 건설된 포스트모던의 실천들 ― 코수스의 비물리적 개념화, 단토의 다원화, 데리 다의 해체주의, 기 드보르의 이미지론 ― 은 항상 문화시장의 절충적 논리에 종 속되어 왔다. 이들은 모더니즘의 죽음을 대체하는 역사적 대안이 되지 못하고 그 것의 범주론과 패권주의를 ‘우스꽝스럽게 반복’함으로써 예술에 대한 무관심과 단 절을 부추기는 새로운 권위주의로 남고 만 것이다.14) 반면 포스터에게 당대의 가 장 중요한 예술적 징후들은 여전히 죽지 않고 ‘살아 있는 것들(the living-on)’로 부터 포착된다.15) 왜냐하면 그러한 과거의 잔유물들이 시대성의 반영과 기억이라

Townsend, WA: Bay Press 1985), p. 13.

11) 로잘린드 크라우스 「확장된 영역에서의 조각」, 할 포스터 반미학 등의 저술을 보라.

12) Hal Foster, “Is the funeral for the wrong corpse? An interview with Hal Foster Bret Schneider & Omair Hussain”, p. 2

13) Hal Foster, “This Funeral is for the Wrong Corpse”, Design and Crime (And Other Diatribes) (New York: Verso 2002), pp. 123-143.

14) Hal Foster, “This Funeral is for the Wrong Corpse”, pp. 127-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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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예술의 항구한 임무를 이어가고, 이를 통해 역사의 망각에 저항하는 예술의 불멸성을 증거하기 때문이다. 예술의 어떤 항구한 가치가 시대의 집요한 살의에 도 불구하고 살아남아 자신의 역사를 지속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처럼 ‘완전히 죽 지 않고 우리가 알아채지 못한 방식으로 살아 있었던’ 가치들은 결국 발견되기 마련인데(포스터에게는 ‘병리적 징후’로서), 이처럼 낡았지만 여전히 살아 있는 것 들에 주목하고, ‘오래된 형식의 잔유물들(the remnants of old forms)’을 내파해버 린 포스트모던적 확장의 폭심에 다시 불러오는 것이야말로 비평의 새로운 임무가 된다.16)

Ⅲ. 구원의 방식으로서 ‘기억하기’

그렇다면 ‘이미 한 번 죽은’ 과거는 어떻게 구원되는가? 예술은 도처에서 목 격되는 디지털의 종말적 위협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불멸의 삶을 영위할 것인가?

크라우스에게 이 구원은 시대성의 흉포한 징후들에도 굴하지 않는 생의 의지로서

‘나는 누구인가’라고 묻는 기억의 행위로부터 시작된다.17) 뇌동맥이 파열되고 모 든 기억을 상실한 채 남겨진 크라우스 자신이 자의식을 향한 그러한 집요한 질문 들 속에서 되살아난 것처럼, 이 존재론적 질문은 반형식/반매체주의의 내파에 의 15) Hal Foster, “This Funeral is for the Wrong Corpse”, p. 129.

16) Hal Foster, “This Funeral is for the Wrong Corpse”, p. 137.

17) Rosalind Krauss, Under Blue Cup, pp. 2-3. “if you can remember ‘who’ you are, you have the necessary associative scaffold to teach yourself to remember anything.” / “The medium is the memory.” - 크라우스에게 기억이란 매체의 ‘존재 론적 각성’과 같은 것이다. 그것은 작가가 과거의 구체적인 사건을 기억해내고 그것을 작업의 소재로 사용(아카이브 작업들처럼)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매체에 투여되고 누 적된 관습들이 자동적으로 발현되도록 하는 기술적 자의식을 말하는 것이다. 본 논문 이 발표된 세미나에서 작가 서용선은 매체의 기술적 자의식을 꺼내고 활성화하는 ‘기 억’을 매체에 대한 길고, 집요한 숙련의 과정 속에서 자연히 도래하는 작업의 진정성 이라 설명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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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 빈사상태에 빠진 현대미술을 구원할 복음의 메시지가 되는 것이다.

크라우스에 따르면 현대미술에 회복불가능한 병증을 야기한 것은 그녀가

‘괴물적 신화’라 부르는 포스트 미디엄의 부정적 조건들로서, 그것은 예술의 전통 을 부정하고 작품의 특정한 경험을 경험-일반으로 치환함으로써 예술과 예술가의 존립근거를 와해시키고 말았다.18) 특히 이러한 포스트 미디엄의 괴물신화는 예술 의 범주와 독창성, 자율성을 부정하는 미디어 아트에 고스란히 전이되고 있는데, (서두에 언급한) 이러한 징후들은 분명 크라우스의 위기론에 신빙성을 더한다. 따 라서 그녀는 예술의 특정성을 구원하기 위한 ‘십자군 전쟁’을 시작한다. 그것은 1.

매체 개념을 재정의하고, 그에 따라 2. 특정한 경험으로서 예술의 항구한 가치를 기억해내며, 3. 당대의 기술들을 과거와의 연관 속에서 ‘재고안’함으로서 그것을 전 역사의 범주로 확장하는 것이다.

크라우스에게 예술의 특정성은 그린버그처럼 작품의 물리적 현실(매체)에 대한 분석을 통해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예술이 ‘세계의 현시(顯示)’라는 역사적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각 시대 안에서 필연적으로 취하는 ‘기술적 토대(technical support)’에 대한 ‘기억’을 통해 얻어진다.19) 기술적 토대란 항상 물리적 특성으로 귀결되고 마는 (그린버그적) 매체(medium) 개념을 대체하기 위해 크라우스가 제 안한 용어로서 그것은 캔버스나 대리석과 같은 물리적 매체뿐만 아니라, 제작을 위한 개념과 기술, 그리고 경험 모두를 포괄한다. 기술적 토대는 세계를 관객에게 현시하기 위해 예술이 취하는 특정한 기술적 의지로서 이를 통해 예술은 ‘작품’으 로서 관객에게 특수한 ‘에로스(고양된 예술경험)’가 되는 것이다.

크라우스의 매체론에서 관객을 예술 작품의 본질로 인도할 형식적 경험인

18) Rosalind Krauss, Perpetual inventory (Cambridge, MA: MIT Press 2010), p. xiv (Introduction) 크라우스는 언더 블루컵 Under Blue Cup에서 예술의 특정한 경험을 경험-일반으로 치환해버린 포스트 미디엄의 모순적 양식을 5가지로 지목하는데, 그것 은 개념미술, 설치미술, 관계미술, 해체주의, 그리고 디지털 미디어다.

19) Rosalind Krauss, A Voyage on the North Sea, Art in the Age of the Post-Medium Condition (New York: Themes & Hudson 1999), pp. 45-53 그리고 Rosalind Krauss, Under Blue Cup, p.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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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로스의 회복’은 매우 중요한 임무로 상정된다. 플라톤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는 에로스의 본질은 ‘아름다운 것에 대한 열망’으로, 물리적인 차원이 아닌 숭고하고 진실된 미를 지향하며, 항상 우리 안에 저장된 “기억에 의해 활성화”되는 영혼의 작용이다.20) 정신분석학자들은 이 에로스가 승화를 통해 창작을 추동하는 삶의 힘(프로이트)이며, 문명의 원동력(마르쿠제)이자, 동시에 그러한 문명의 어두운 이 면을 관할하는 금기와 위반의 명령자(바타유)라고 보았다. 이러한 주장들은 시각 적 무의식이나 비정형과 같은 크라우스의 글에서 반복되며 에로스에 관한 크 라우스의 사유를 형성했다. 특히 텍스트의 즐거움에서 작품의 경험적 차원을 강조한 바르트, 그리고 해석에 반대한다에서 예술에 대한 해석학적 접근을 거 부하고 예술의 에로스(the erotics of art)를 회복하자고 주장한 손택은 크라우스 에로스론의 직접적인 참조가 되었다.21) 즉 에로스란 “처음 마주하자마자 경험되 고 즐겨지는 그런 격앙된(바르트)” 사랑이며, “사물의 반짝임을 그 자체 안에서, 있는 그대로 경험하는 투명한(손택)” 사랑이다.22) 그것은 ‘기의가 아닌 기표에(바 르트)’ ‘내용이 아닌 형식에(손택)’ 맺히는 것이며, 그와 같은 몸(기표/형식)으로 관객을 “유혹”하고 그/녀를 “몰입”하게 만드는 “성애학(erotics)”이다.23) 크라우스 의 기술적 토대가 전 역사의 기억을 더듬어 소환해내는 에로스란 이처럼 ‘형식 속에서 환기되는 예술에 대한 감각적 경험’인 것이다.

20) Plato, Symposium, ed. Kenneth Dover (Cambridge, UK: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80) 참조.

21) Rosalind Krauss, Perpetual inventory, p. xiii (introduction) 그리고 Rosalind Krauss, Under Blue Cup, pp. 66-68.

22) 롤랑 바르트, 텍스트의 즐거움, 김희영 옮김 (동문선 1997), p. 100, 수전 손택, 해석 에 반대한다, 이민아 옮김 (이후 2002), p. 33.

23) 롤랑 바르트, 텍스트의 즐거움, p. 41, 수전 손택, 해석에 반대한다, p. 37, p. 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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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 2] 서용선, <뉴스와 사건>, 1997-1998, 캔버스에 아크릴, 250x600cm (좌상), 권하윤, <새 여인>, 2017, VR기기, 가변크기 (우상),

조은지, <땅, 땅, 땅, 흙이 말했다>, 2019, 복합매체/퍼포먼스, 가변크기 (좌하), 이우성, <밤, 걷다, 기억>, 2017-2019, 종이 위에 펜드로잉, 11x11cm (우하)

- 전시 ≪불멸사랑≫(2019. 2. 22-5. 12, 일민미술관, 서울)

기술적 토대는 시대의 기술적 역량과 관습에 따라 변하지만 에로스를 구현 하려는 그것의 특정한 의지는 결코 변하지 않고 보존된다.24) 원시 동굴의 벽화를 채웠던 동물들의 생기는 교회당의 프레스코가 현시하는 신들의 웅혼한 영기로, 서용선의 풍경들이 신문박물관을 무대삼아 발현시키는 역사적 현전성으로, 그리 고 이제 권하윤의 VR 작업들이 구체화하는 가상적 현실감으로 변모해 왔지만,

‘세계의 창문’으로서 혹은 ‘실재를 향한 열망’으로서 그것의 의지는 결코 변하지 않는 것이다.

기술적 토대는 물질/비물질을 구분하지 않는다.25) 에로스를 창출하는 특정 24) Rosalind Krauss, Under Blue Cup, pp. 3-16 참조.

25) Rosalind Krauss, Under Blue Cup, p. 4 (그리고 Rosalind Krauss, A Voyage on the North Sea, p. 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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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규칙성을 갖는 한, 그것은 (그린버그의 물리적 매체와 달리) 비물리적 과정과 기술 모두를 포괄하는 것이다. 기술적 토대라는 개념을 통해 가령 ‘영화’의 매체는 필름이나 카메라와 같은 물리적 조건 뿐만이 아니라, 찍기와 상영 그리고 극장의 환경과 관객의 경험 모두를 포괄하는 종합적 사태가 된다.26) 마찬가지로 조은지 의 퍼포먼스를 이루는 매체는 진흙이나 작가의 몸, 혹은 그러한 행위의 결과물인 벽면이 아니라, 그 모든 것들을 포함하여 던지기라는 표현의 원초적 의지와 수행 성, 그리고 (진흙이 화이트큐브 안에서 만드는 공격성의 관점에서) 미술관이라는 장소 모두를 포함한다.

기술적 토대는 자동적인 것이다.27) 그것은 그린버그의 이론에서와 같이 주 체의 의지를 투영하는 자기비판의 환원적 노력에 의해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당 대가 예술가들에게 부여한 기술-질료들이 자동적으로 ― “시의 창작이 소넷 등과 같은 시의 특정한 규칙에, 무용이 론도 등과 같은 움직임의 규칙에, 그리고 초상 화가 초상의 규칙에 자동적으로 반응하는 것처럼”28) ― ‘스스로의 진실을 지시 (pointing-to-itself)’하는 노력에 의해 구체화되는 규칙들을 의미한다. 이우성의 드 로잉들은 따라서 기억을 가시화하기 위한 임의의 선택이 아니라, ‘선긋기’라는 그 의 기술적 토대가 기억과 역사의 ‘선형성’이라는 구조와 자동적으로 조응한 결과 라 할 수 있으며, 바로 이런 의미에서 그의 드로잉은 매체적 필연성을 확보한다.

이와 같은 기술적 토대의 초역사성, 초물질성, 초의식성에 의해 구현되는 예 술의 에로스는 예술의 종말이 공공연히 거론되는 시대의 변덕에도 불구하고 ‘불 멸의 사랑’이 된다. 크라우스는 이러한 예술에 대한 사랑의 기억을 토대로 여전히 과거의 요구를 품고 있는 당대의 기술적인 매체들과 화해하기를 원할 뿐만 아니 라, 낡고 수명을 다한 매체들에 다시 생명을 불어 넣는데, 그녀가 ‘매체의 재고안

26) Rosalind Krauss, “Two Moments from the Post-Medium Condition,” in: October, vol. 116 (Spring 2006), p. 56.

27) Rosalind Krauss, Under Blue Cup, pp. 78-79, pp. 97-99 그리고 Stanley Cavell, The World Viewed (London: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79), pp. 101-108 (Chapter 14, “Automatism”).

28) Stanley Carvell, The World Viewed, p. 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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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reinvention of medium)’이라 부르는 이 기억의 노력 속에서 예술은 불멸의 역사성을 얻는다.29) 오직 ‘잠복된 채로 기다리던 과거’의 편린들이 기술의 새로운 손짓에 의해 ‘호랑이의 도약’처럼 현재로 뛰어나와 단절된 역사를 구원의 순간으 로 이끄는 것이다.30)

Ⅳ. ‘확장된 영역에서의 매체’ - 크라우스의 기호사각형 읽기

크라우스는 이 순간을 “매체의 확장(the medium as expanded field)”이라 부르며 다음과 같이 도식화 한다.31)

[도 2] 크라우스의 도식 ‘확장된 영역에서의 매체(The medium as expanded field)’ (from

Under Blue Cup

)

29) Rosalind Krauss, “Reinventing the Medium,” in: Critical Inquiry, vol. 25, no. 2 (Winter 1999), pp. 289-305.

30) Rosalind Krauss, Under Blue Cup, p. 88. “Benjamin sees history as anything but empty, frozen time. It is for him, the structure of latency. Something is lying in wait for the historical actor to which he will be instantly snatched back in time, as though by tiger’s leap (Tigersprung)”.

31) Rosalind Krauss, Under Blue Cup, p. 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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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기호사각형(semiotic square)’이라 불리는 이 도식은 프랑스 기호학자 그레마스(A. J. Greimas, 1917-1992)에 의해 정초된 것으로서, 기호들 간의 이항 대립적 관계 속에서 의미작용이 발생하고 확장하는 구조를 보여준다.32) 그레마스 는 야콥슨과 레비스트로스 등의 뒤를 이어 개별 기호들의 배후에 자리 잡은 의미 생성의 심층적 구조와 관계에 관심을 기울였는데, 이는 특히 (푸코적 관점에서) 진술들(statements)의 생성과 소통 과정(담론 Discourse)에서 드러나는 세계의 본 질(Episteme)을 밝히는 시도의 첫걸음이 된다. 그레마스의 기호사각형을 읽는 방 식은 다음과 같다.

[도 3] 그레마스 기호사각형과 활용예

좌측 원도식에서 상부의 수평축과 같이, 하나의 의미(S1)는 그것에 반대되는 의미(S2)에 의해 구분되고 정립된다. (우측의 ‘활용예’에서처럼) 마치 삶이라는 개 념이 죽음이라는 현상에 의해 분명해지는 것처럼, ‘반대관계’는 서로를 대립적으로 규정하며 의미화의 첫 번째 구조를 이룬다. 그레마스에 따르면 이 반대관계는 ‘함

32) Algirdas Julian Greimas, Structural Semantic: An Attempt at a Method, trans.

Daniele McDowell, et al. (Lincoln: University of Nebraska 1983), Algirdas Julian Geimas, On Meaning: Selected Writings in Semiotic Theory, trans. Paul J. Perron and Frank H. Collins (Minneapolis: University of Minnesota Press 19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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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관계(S1에 대한 ~S2의 관계 / 혹은 사각형에서 수직축)’와 ‘모순관계(S1에 대한

~S1의 관계 / 혹은 사각형에서 대각선축)’로 분기하며 “의미생성의 소우주”를 형 성한다. 마치 신호등의 노란불이 빨간불이나 파란불 다음에 켜짐으로써 선행하는 불빛의 의미를 부인하고(‘멈출 준비를 하시오’: 파란불 다음의 노란불) 또 포괄하 는 것처럼 (‘갈 준비를 하시오’: 빨간불 다음의 노란불) 하나의 개념은 그것에 대 한 전적인 반대(complex/상단부) 뿐만 아니라 중립적인 부정형(neuter/neutral/하 단부)들 속에서 더욱 풍부해 지는 것이다. 이에 따라 우리는 우측의 ‘활용예’에서 처럼 삶과 죽음이 서로에 대한 이항대립의 관계 속에서 분명해질 뿐 아니라, ‘살 아 있지 않음’이나 ‘죽지 않음’과 같은 이중부정의 상태 속에서 더욱 풍부해짐을 발견할 수 있다. 가령 햄릿과 같은 비극의 주인공을 규정하는 것은 자신에게 발 생한 삶과 죽음의 문제뿐만 아니라, 그러한 죽음의 부정(‘죽지 않음’ / 햄릿 왕의 망령)과 삶의 치욕스러운 붕괴(‘살아 있지 않음’ / 미쳐버린 오필리아) 사이에서 자신이 겪는 이중부정(사느냐 죽느냐에 관한 문제)의 상황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처럼 문학적 서사를 포함하여 인류의 모든 의미 체계는 기호사각형이라는 소우주를 시작으로 발전하고 확장한다. 확장의 과정을 다시 도식으로 설명하자면 다음과 같다.

[도 4] 그레마스 기호사각형의 확장도식과 활용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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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 사각형의 상단을 ‘완전한 대립(complex)’으로, 그리고 하단부를 중립적인 부정(neuter/neutral)으로 본다면 이 사각형의 오른쪽은 원관념(S1)에 대한 반대 (S2)와 모순(~S1)의 결합이므로 ‘부정(negative)’이고, 왼쪽은 원관념과 이중부정 (~S2:반대의 반대)의 결합이므로 ‘긍정(positive)’이 된다 (외부 다이아몬드 구조 의 각 꼭지점은 내부 사각형 모서리들의 합이다).33) 가령 활용예에서, 삶과 죽음 의 관계를 종교라는 확장된 범주에 넣을 수 있다면, 아래의 ‘죽지 않음’과 ‘살아 있지 않음’의 관계는 (종종 그러한 것들을 다루는) 미신이나 신화의 범주에 넣을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오른편에서 ‘죽음’과 ‘살아있지 않음’을 매개하는 것은 (아무런 생명력도 갖지 못한 채 죽음을 추동하는) ‘우상’과 같은 부정적 매개체일 것이며, 왼편에서 ‘삶’과 ‘죽지 않음’을 매개하는 것은 (삶을 주관하는 불멸의 존재 인) 신이나 ‘초월자’와 같은 긍정적인 의미체인 것이다.

크라우스는 「확장된 영역에서의 조각」(1979)이나 시각적 무의식(1994) 등 에서 당대의 주요한 예술적 실천의 숨겨진 원리를 구조주의적 도식들을 통해 설 명한 바 있다. 이는 그녀가 개별 작가나 양식에 대한 내러티브에 집중함으로써 미술사적 변화의 필연성에 무심했던 기존 미술사의 한계를 벗어나, 전 역사를 관 통하는 근본적이고 체계화된 미술사의 동인을 발견하고자 했기 때문이다.34) 특히 그녀의 이러한 구조주의적 노력은 기존의 패권적 양식이 새로운 양식들에 의해 위협받는 시기에 빛을 발해왔는데,35) 이는 기호사각형이 당대의 모순적 담론들을 이항대립적 구조 안에 수용함으로써 양자 모두를 확장의 동인으로 간주하고 있기 때문이다.36) 바르트는 문화적 담론에 수반되는 양립불가한 두 가지 가능성들의

33) Louis Hébert, “The Semiotic Square” (online) http://www.signosemio.com/greimas/

semiotic-square.asp 등 참조 (2019년 4월 12일 최종 접속).

34) Rosalind Krauss, The Optical Unconscious (Cambridge, MA: MIT press 1994),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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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 건축이나 조경의 영역으로 확장해가는 미니멀 조각이 조각의 전통을 위협할 때(「확장 된 영역에서의 조각」), 그리고 다양한 연극적 도구와 심리적 태도들이 모더니즘의 논 리적 형식을 위협할 때(시각적 무의식).

36) Rosalind Krauss, The Optical Unconscious, p. 21 크라우스에게 “기호사각형이란 두 가지 이항대립들 속에서 문화의 전 구조를 그리는 방법”이다. 크라우스의 시각적 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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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존을 “패러다임”이라 부른 바 있다.37) 크라우스가 기호사각형을 이해하는 방식 은 바로 이러한 패러다임적 성질에 기인하며, 언더 블루컵 Under Blue Cup이 다시금 기호사각형으로 마무리되고 있다는 사실은 그녀가 ‘기억’과 ‘망각’으로 양 분되는 당대의 매체적 현실을 일종의 패러다임으로 인식하고 있다는 것을 방증한 다.

크라우스에 따르면 당대문화를 그래프를 통해 구조화하는 일은 다양한 장점 을 갖는다. 그것은 먼저 “당대 예술(시각적 무의식에서는 모더니즘)의 내부적 논리를 포착할 수 있다”는 것이며, “조작의 희열을 수반하는 무한한 변용적 가능 성을 제공한다”는 것,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체계로서 한정되는 시스템을 갖 춘다는 점,” 그래프의 탐구자를 예술 내부로 인도하여, 그들로 하여금 “그 내부로 부터 형식에 숨은 가치를 발견하는 즐거움을 느끼게 만들고, 예술에 덧붙여진 물 질적 부가물에 현혹되지 않고 그것의 본질을 보게 하는 것,” 그리고 “당대 예술의 논리와 기반을 반박하고 거부하는 대안적 시각의 역사적 지평(historical terrain of antivision)으로 (그녀를) 이끄는 것”이다.38) 요컨대, 크라우스의 기호사각형은 당대의 문화 구조 자체를 표상한다기 보다 모순과 대립으로 점철된 구조의 숨겨 진 내부를 드러내고 그것을 창의적인 방식으로 변용/반박/확장하는 사유의 과정 을 보여준다.

따라서 크라우스에게 도식은 언제나 창의적인 변용에 의해 유용성을 드러내

의식은 (제목이 암시하듯) 프레드릭 제임슨의 정치적 무의식에 영향 받았는데, 제 임슨은 기호사각형을 텍스트의 지평을 객관적이며 물리적으로 드러내는 도구로서가 아니라, “어떤 특정한 이념적 의식의 경계들을 그려내고 그 의식이 닿을 수 없는 개 념적 지점을 나타내는 중요한 도구”로서 사용하고 있다. 크라우스 역시 그러한 무의 식적 지평의 구조화를 위한 도구로서, 그리고 당대의 (정치적/문화적) 갈등 속에서 질 서와 확장의 구조를 찾아내는 구조주의적 기술로서, 기호사각형을 차용한다. Frederic Jameson, The Political Unconscious (New York: Routledge 1983), p. 32.

37) Roland Barthes, The Neutral, trans. Rosalind Krauss and Danis Hollier (New York:

Columbia Univ. Press 2005), p. 42. “If there is a universal model for the very idea of paradigm, it is the yes/no (+/-) model”.

38) Rosalind Krauss, The Optical Unconscious, pp. 1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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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비평의 도구가 된다. 그러한 변용의 과정을 면밀히 살펴본다면 [도 5], 우리가 흔히 기호사각형이라 확신하는 것이 사실 그레마스의 도식과 ‘클라인 그룹’을 혼 합한 형식임을 알 수 있다.39) ‘클라인 그룹(Klein Four-Group/클라인4원군)’이란 1872년 독일의 수학자인 펠릭스 클라인(Felix Klein)에 의해 고안된 수학적 모델 로서 네 가지 원소로 구성되며 각각의 원소들이 특정한 조건 하에 교환 관계를 형성하는 그룹을 지칭한다.40) 수학적 모델인 클라인 그룹이 구조주의 언어학 도 식과 혼동되는 이유는, 그것이 후일 많은 구조주의 언어학자들에게 분석틀을 제 공했기 때문이다. 특히 레비스트로스는 자신의 문화인류학적 분석의 모델로 클라 인 그룹을 사용한 바 있으며, 그레마스의 기호사각형은 바로 이러한 선구적 연구 들의 영향 속에서 탄생했다.41) 그러나 이러한 연관들에도 불구하고 클라인 그룹 과 기호사각형은 본질적으로 다른 것이다. 전자가 수학공식이라면 후자는 의미생 성의 내적 구조를 보여주는 언어학적 표상형식이며, 전자가 이중부정의 수학적 논리를 구사한다면 후자는 의미가 생성되는 보다 복잡한 논리항들(반대/함의/모 순)을 포진시킨다. 크라우스의 도식들은 기호사각형의 표상형식을 차용하고 있지 만 논리적으로는 클라인 그룹의 수학적 원칙을 고수하고 있다. 이는 아마도 그녀 가 이중부정에 의해 균형을 유지하는 클라인 그룹의 원리를 통해 그 무엇에도 속 하지 않는 (neither/nor) 당대 미술의 모순적 균형을 설명하고자 함과 동시에, 그 레마스 기호사각형의 생성과 확장의 원리를 통해 그러한 모순들의 공존을 확장으 39) 크라우스 도식을 그레마스 기호사각형의 용례로 확신하는 국내의 연구자들과 달리, 크 라우스 자신과 동료들은 도식을 지칭할 때 ‘그레마스 기호사각형’과 ‘클라인 그래프’라 는 용어를 섞어서 사용한다.

40) http://mathworld.wolfram.com/Vierergruppe.html 참조 (2019년 4월 12일 최종 접속).

41) 레비스트로스는 1949년 박사학위 논문 「친족의 기본구조」에서 호주 원주민 부족인 카 리에라족의 결혼제도(4개의 분족들이 근친을 피하도록 설계된 결혼 규칙)를 클라인 그룹으로 설명한다. 이를 위해 그는 수학자 앙드레 베유의 도움을 받았으며 클라인 4 원군에 대한 설명을 따로 부록으로 덧붙였다. 레비스트로스는 후일 구조인류학에서 4원군을 보다 정교히 확장하며 인류학적/신화적 다양성에 구조적 틀을 부여한다. 그레 마스의 기호사각형은 바로 이와 같은 레비스트로스의 영감을 받은 것으로 알려진다.

그는 후일 「비교신화학 On Meaning」과 같은 자신의 저술에서 레비스트로스를 자세 히 언급하며 의미의 체계가 수학적 방정식으로 환원될 수 있음을 인정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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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 기술하고자 하는 이중적 의도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도 5] 그레마스 기호사각형(원도식/확장)과 크라우스 기호사각형 용례 비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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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쨌든, 이러한 절충적 방식으로 인해 크라우스의 기호사각형은 그레마스의 기호사각형과 미묘한 형식적 차이를 보이며 (위의 도판에서 볼 수 있듯 사각형 하단부의 좌우~S1/~S2가 바뀌었으며 그에 따라 외부항[Negative/Positive]의 해 석 역시 다르다), 데이빗 케리어가 지적하는대로 이러한 “유사과학적 태도 (pseudo-technicality)”는 많은 독자들을 당황시킨다.42) 물론 그레마스의 원도식 역시 (클라인 그룹과 같이) 완전한 수학적 자명성을 갖추고 있다고 볼 수는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도식의 각 항을 차지하는 네 가지 진술들은 어떻게 놓이던 나 름의 관계를 형성하기 마련이고 이러한 임의성은 사실 담론 구성/확장의 요소이 기도 하기 때문이다. 즉 기호사각형은 담론/세계의 존재 양태를 있는 그대로 보여 주는 것이 아니라, “개념단락의 가상적 지도(a virtual map of conceptual closure)”로서 그러한 담론을 구축하는 연구자의 의도(mind-map)를 보여주고 있 는 것이며,43) 이러한 관점에서 크라우스의 변용(그녀가 도식의 장점으로서 “조작 의 희열(The thrill of [the graph's] manipulation)”이라 부른 변용가능성)은 이해 된다.44)

그러나 이러한 이해와는 별개로 크라우스의 변용이 그레마스 기호학의 엄밀 성을 따르는 연구자들에게 초래하는 혼란은 여전하며, 크라우스 기호사각형에 대 한 오독이나 난독의 문제는 바로 이러한 혼란으로부터 기인한다 할 수 있다.45)

42) David Carrier, Rosalind Krauss and American Philosophical Art Criticism (Westport: Praeger 2002), p. 42.

43) Algirdas Julian Greimas, On Meaning: Selected Writings in Semiotic Theory, p.

Foreword xv (written by Fredric Jameson).

44) Rosalind Krauss, The Optical Unconscious, p. 20

45) 크라우스와 비정형을 공동집필한 이브-알랭 부와조차도 최근의 인터뷰에서 크라우 스의 도식을 여전히 이해하지 못했다고 언급한 바 있다 (Rosalind Krauss with Yve-Alain Bois, “The Brooklyn Rail” (online journal article), p. 2 text available at http://www.brooklynrail.org/2012/02/art/rosalind-krauss-with-yve-alain-bois) (2019년 4월 12일 최종 접속). 국내에서도 크라우스의 도식을 그레마스 기호학의 관점에서 해 석해내는 몇 편의 논문이 출간되었으나, 크라우스 도식과 그레마스 도식의 차이를 지 적하지 않은 채, 일방적인 그레마스 구조주의의 관점에서 그것을 해석해내는 일은 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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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라서 이해를 돕기 위해, 그리고 도식에 대한 읽기를 확장하기 위해, 나는 크라 우스의 도식을 그레마스의 원도식에 맞게 약간 수정할 것이다. 그것은 아래 그림 [도 6]과 같이 하단부 좌우의 진술들을 원위치 시킨 것이며, 그에 따라 외부항의 위치도 바뀌었다.

[도 6] 크라우스의 도식 ‘확장된 영역에서의 매체(The medium as expanded field)’를 그레마스 원도식에 맞게 수정

수정된 도식이 보다 명료히 구조화하는 것처럼, 당대의 예술은 ‘기억’(S1)을 출발점으로 삼아 그것에 반대하고(‘망각’: S2), 그것을 함의하며(‘망각하지 않기’:

~S2), 모순을 이루는(‘기억하지 않기’: ~S1) 관계망을 형성한다. 크라우스는 문화 의 전 구조(the whole of a cultural universe)가 이처럼 두 가지 상반된 가능성들 에 의해 규정된다고 보았는데, 위의 도식에서 드러나는 것처럼, 매체의 시대(매체 의 담론이 그 어느 때 보다 중요하게 다루어지는 20세기)는 ‘기억’으로 대변되는 모더니즘의 역사적 연속성과, 그리고 ‘망각’으로 대변되는 포스트모더니즘(포스트 미디엄)의 역사적 단절이라는 이항대립 위에 설립되는 것이다.46)

계를 갖는다 할 것이다.

46) 크라우스가 「아방가르드의 독창성: 포스트모던적 반복」 (1981) 등의 논문에서 주장했 던 것처럼, 모더니즘은 항상 자신의 기원에 대한 ‘지시하기’ 속에서 자신의 환원적 양 식을 구축한다. 크라우스에게 모더니즘의 격자(grid) 무늬는 세계의 창문으로서 회화 의 기원과 프레임을 지시/기억하려는 노력에서 유래하는 것이다. 크라우스가 모더니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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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호사각형이라는 의미체계가 지시하는 것처럼 하나의 의미는 그것과 연계 (혹은 대립)되는 새로운 의미들의 연쇄 속에서 확장된다. 즉 ‘기억’은 ‘망각하지 않 기’라는 진술 속에 여전히 자신의 의미를 간직한 채(<함의관계>) 새로운 소통방 식으로 분기해 나가며, 마찬가지로 ‘망각’ 역시 ‘기억하지 않기’라는 함의적 진술로 나아가는 것이다. 도식에서처럼, ‘기억’이라는 단호한 모던적 매체 관념은 (재고안 등의 방식을 통해) ‘망각하지 않기’를 끊임없이 상기시키는 ‘기술적 토대(Positive/

도식의 좌측항)’에 의해 매개되며, ‘망각’이라는 포스트모던의 요구는 ‘기억하지 않 도록’ 강요하고 순간적이며 임의적인 의미들에 복무하는 ‘키치(Negative/도식의 우측항)’들에 의해 매개된다.

그런가 하면 도식의 하단부에서, 기억은 다시 ‘기억하지 않기’라는, 망각은

‘망각하지 않기’ 라는 <모순관계>로 분기한다. 그리고 그 어떤 자명한 태도도, 잠 재적 가능성도 취하지 않고 단지 거부를 통해 자신의 입장을 드러내는 이 모순적 태도 속에 크라우스가 “지난 30여 년 간 오직 역겨움만을 자아냈다”고 까지 혹평 한 ‘설치’가 자리 잡는 것이다.47)

이 도식은 매체의 ‘순수한’ 지평에 설치나 키치, 그리고 기술적 토대와 같은 반대적, 함의적, 모순적 가능태들을 불러들임으로써, 특정성과 일반성, 예술과 비 예술, 역사와 현재 같은 모순들의 대립으로 파열하는 당대를 그녀가 70년대 조각 -건축-환경의 위태로운 대립으로부터 조각을 구원한 그런 방식으로 구원한다. 그 것은 시대의 병리적 모순들에 결코 굴하지 않는 생의 의지로서 ‘나는 누구인가’

혹은 ‘당대는 무엇인가’라고 묻는 비평적 자의식이자, 망각이 끊임없이 나로부터 밀어내는 예술의 에로스, 그 슬프고 아름다우며 결코 잊을 수 없는 예술의 첫 경 험을 다시 떠올리기 위한 노력인 것이다.

을 ‘기억’의 범주에 넣는 것은 모더니즘이 그러한 기억 속에서 자신의 진정한 역사성 을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반면 그녀에게 포스트모더니즘(포스트 미디엄)은 그러한 모더니즘의 역사적 기억을 거부하고 와해시키려는 노력들 속에서 자신의 미학적 주장 을 관철시키는 시도이다. 즉 ‘망각’이야말로 포스트모더니즘의 전략인 것이다.

47) Rosalind Krauss, Under Blue Cup, p. ix (Acknowledgem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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Ⅴ. 불멸의 사랑

나는 그것이, 전시 ≪불멸사랑≫이 지향하고 있는 것처럼, 생의 의지로서 혹 은 구원의 기대로서 사랑하기와 같은 것이라 생각한다. 즉, 첨예해진 디지털 문화 가 회화나 조각 같은 특정한 예술의 무용성과 종말을 앞당기고 있지만, 그 이후 의 예술이 무엇이든 예전에 우리가 특정한 작품과 나누었던 사랑의 기억들은 당 대의 기술 안에 ‘우리가 눈치 채지 못하는 방식’으로 살아남아 영원히 지속되는 것이다. 가상현실과 역사화, 미디어 아트와 펜드로잉이 복잡하게 뒤섞인 전시 ≪ 불멸사랑≫을 관류하는 하나의 전망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예술의 특정성이 와해 되어 가는 오늘날에도 가치 있는 경험은 항상 ‘특정한 형식(매체가 아니라 기술적 토대로서 기술과 물질, 기억과 감각을 포괄하는 형식)’에 의해 매개된다는 것이며, 바로 이러한 이해를 통해 ‘죽은 것으로 여겨졌던’ 회화와 조각은 시대의 대표매체 인 디지털 미디어 옆에 (혹은 그것과 함께) 자신의 합당한 자리를 마련한다는 점 이다.

왜 ‘불멸사랑’일까? 전시명이 갖는 갸웃한 아이러니는 그것이 두 가지 양립 불가능한 이해들 위에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일시적이고 피상적인 가치가 득 세하는 당대의 미디어 현실에 불멸이 어찌 가능하겠느냐는 자조와, 그럼에도 불 구하고 우리는 여전히 불멸을 소망한다는 것이 그것인데, 전시는 그러한 대립들 이 가시화되고 문제시되며 결국 화해되는 역설의 공간을 제공하는 것이다. 우리 모두는 생의 경험으로부터, 사랑이 결코 영원하지 못하고 예술도 퇴색하며 살아 있는 그 누구에게도 불멸이 허락되지 않음을 알고 있다. 그러나 우리의 사랑은 언제나 그처럼 불확실하고 항상 실패한 뒤에 비로소 깨닫게 되는, 그리하여 기억 속에서 영원히 지속되는 불멸의 사건이 아니었던가? 사랑처럼 예술도 기억 속에 서 영원하다. 모든 것은 반드시 소멸할 테지만, 그 필멸성은 (바쟁이 말했던 것처 럼) 예술에 영감을 주고, 사랑을 독려하며, 삶의 매 순간들을 더욱 값지게 만드는 것이다. 서용선의 지나간 풍경들이, 권하윤의 결코 촉지할 수 없는 가상들이, 이우 성과 베르쉐르의 선긋기가 유의미해지는 순간은 바로 그것이 흘러간 것들을 단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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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로, 죽은 것으로 남겨두지 않고 그처럼 지고한 (기억의) 형식들 속에서 현전 케 함으로써 역사와 예술에 불멸의 지위를 부여할 때다. 기억 속에 면면히 이어 지는 예술의 에로스, 그 감각적 경험이 매체의 변덕스러운 확장과 수축에도 불구 하고 여전히 작동하고 있으며, 이처럼 에로스가 매체를 뛰어넘어 자신의 생을 이 어갈 수 있다는 사실은 감각적 경험을 코드화하고 데이터화하는 디지털 시대에 예술의 불멸성을 입증하는 것이기도 하다.

앞서 설명한 것처럼 오늘날 뉴미디어는 예술의 불멸성과 필멸성을 동시에 전함으로써 새로운 종류의 모순과 위기를 불러왔다. 그러나 기억과 망각의 / 불멸 과 소멸의 이 변증적 연쇄가 ‘기술적 토대’라고 하는 기술중심적 가치 안에서 종 합의 계기를 발견하는 한, 뉴미디어의 ‘수축’과 ‘내파’는 다시 ‘확장’으로 기술될 수 있을지 모른다. 디지털에 의해 소멸하리라는 예술의 전통과 예술의 전통 속에서 배격되어 왔던 디지털이 ‘기술적 토대’라는 매개를 통해 어떤 종합의 계기를 마련 할 수 있다는 희망이야말로 ≪불멸사랑≫의, 그리고 이 논문의 진정한 메시지인 것이다. 나는 다음과 같은 도식으로 이러한 희망을 가늠해 보고자 한다.

[도 7] 확장된 영역에서의 뉴미디어(The new media as expanded field) (크라우스의 도식을 참조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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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도식이 지시하는 것처럼, 오늘날 ‘예술’은 불멸과 소멸이라는 상반된 가치들 사이에, 에로스와 타나토스 혹은 모더니즘의 (절대성을 향한) 상승의 충동 과 포스트모더니즘의 분열적 충동 사이에 자신의 지평을 마련한다. 그것은 소멸 하지 않으리라는 약속과 불멸할 수 없는 현실 사이에 움트는 우리의 ‘사랑’과 달 리, 그 기억과 망각의 인간적 대립의 반대편에서, 영원히 존재한다. 만약 ‘뉴미디 어’가 예술이 될 수 있다면, 그것이 소멸하는 것들을 탐닉하고 곧 망각되고 마는

‘디지털 스펙터클’들과 겨루며, 그 반대편에서 결코 소멸하지 않을 에로스의 기억 들을 되새기기 때문이다. 누구나 디지털 미디어를 이용해 무언가를 만들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단지 신기한 볼거리, 즐길 거리가 아닌 ‘특정한 작품’이 되는 순간 은 바로 이처럼 항구한 역사 속에 기억되고 보존되는 예술의 에로스가 대상 안에

‘기술적 토대’로서 견고히 자리 잡을 때다. 뉴미디어는 그렇게 당대의 기술적 혁신 과 과거의 역사적 가치 모두를 품으며 확장된다. 그리고 ‘뉴미디어의 확장된 영역’

은 ‘역사의 종말’이 공공연히 논의되는 역사의 가장자리에서 전 역사를 구원하는 불멸의 사랑이 이루어지는 곳이다.

48)

* 논문투고일: 2019년 4월 15일 / 심사기간: 2019년 4월 16일-2019년 5월 10일 / 최종게재 확정일: 2019년 5월 1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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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도판목록

[도 1] 서용선, <뉴스와 사건>, 1997-1998, 캔버스에 아크릴, 250x600cm (좌상), 권하윤, <새 여인>, 2017, VR기기, 가변크기 (우상), 조은지, <땅, 땅, 땅, 흙이 말했다>, 2019, 복합매체/퍼포먼스, 가변크기 (좌하), 이우성, <밤, 걷 다, 기억>, 2017-2019, 종이 위에 펜드로잉, 11x11cm (우하) - 전시 ≪불멸 사랑≫(2019. 2. 22-5. 12, 일민미술관, 서울)

[도 2] 크라우스의 도식 ‘확장된 영역에서의 매체(The medium as expanded field)’

(from Under Blue Cup) [도 3] 그레마스 기호사각형과 활용예

[도 4] 그레마스 기호사각형의 확장도식과 활용예

[도 5] 그레마스 기호사각형(원도식/확장)과 크라우스 기호사각형 용례 비교 [도 6] 크라우스의 도식 ‘확장된 영역에서의 매체(The medium as expanded field)’

를 그레마스 원도식에 맞게 수정

[도 7] 확장된 영역에서의 뉴미디어(The new media as expanded field) (크라우 스의 도식을 참조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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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문 초록

본 논문은 전시 ≪불멸사랑≫(2019. 2. 22-5. 12, 일민미술관)을 바탕으로 동 시대 예술 매체의 한계와 가능성을 되짚어보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오늘날 현대 미술의 주요 매체로 각광받는 디지털 미디어는 모든 개별 매체의 특성들을 포괄 하는 ‘종합성/일반성’을 바탕으로 예술의 영역을 확장했다는 긍정적인 평가와 함 께, 특정성(specificity)에 기반하는 예술의 물리적/형식적 전통을 와해시키고, 예술 에 고유한 경험(the Eros of art)을 경험일반으로 치환시킴으로써 예술의 존립근 거를 무너뜨린다는 비판을 동시에 받는다. 핼 포스터나 로잘린드 크라우스와 같 은 이론가들은 기술주의와 다원주의, 그리고 반매체주의에 경도된 채 예술의 형 식적 전통의 쇠락을 방관하는 현대미술의 맹목에 대해 경고해 왔으며, 포스트 모 더니스트들이 성급히 사망선고를 내린 예술의 모던적 가치를 구원하기 위한 노력 을 기울여 왔다. 특히 크라우스는 그녀의 ‘포스트 미디엄 이론’에서, 그린버그적 모더니즘에 대한 반감 속에서 예술의 자율성과 특정성을 거부하는 현대 미술의 경향을 ‘괴물적 신화’라 규정하고, 오늘날 반매체적/기술적 예술이 망각한 예술의 에로스를 회복하기 위한 ‘성전’을 개시한다.

논자는 본 논문을 통해 크라우스의 이론이 디지털 미디어의 광범위한 확산 에 의해 위기를 겪고 있는 현대미술에 어떻게 적용될 수 있는지 살펴보고, 이를 통해 예술의 항구한 가치인 형식적 경험(에로스)을 불멸의 지위로 이끌기 위한 방법을 모색해 본다. 특히, 논자는 크라우스가 (그녀의 포스트 미디엄 이론이 집 대성된 책) 언더 블루 컵의 말미에 제시한 ‘확장된 영역에서의 매체’라는 도식 (기호사각형)을 해석해보고, 이를 그레마스 원도식과의 연관성 속에서 창의적으로 수정하여, 그녀의 매체론에 대한 보다 확장된 조감을 제공할 것이다. 이를 통해 논자는 전시 ≪불멸사랑≫이 보여주고 있는 것처럼, 디지털 미디어의 첨예한 기 술주의 속에서도 예술의 항구한 가치가 결코 망각되지 않고 지속되고 있으며, 이 를 ‘기억’하는 것이야말로 미디어 아트가 혁신성과 역사성 모두를 아우를 수 있는 길이라 주장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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핵심어

그레마스 기호사각형, 기술적 토대, 로잘린드 크라우스, 미디어, 불멸사랑, 에 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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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STRACT

Amor immortal

, toward Media’s ‘Expanded Field’

Jong-Chul Choi*49)

This paper aims to clarify the limit and possibility of contemporary art medium (media) through the insight of the art exhibition Immortality in the cloud(2019. 2. 22-5. 12, Ilmin Art Museum, Seoul) in which artists on various mediums work to summon the spirit of the past - its love and (im)mortality.

Digital media have been celebrated for their ‘totality and generality’ bringing together all the merits of individual medium, while simultaneously criticized for eroding art’s specificity and physicality, a sine qua non for ‘the Eros of art.’

Hal Foster and Rosalind Krauss, the leading contemporary art critics, have already tackled the blind pursuit of anti-specificity (and immateriality) culminated in conceptualism, relationalism, and digital art. Although their theories in the past few decades fueled the efforts to navigate out from the old Greenbergian cannon, now they work to redeem those modernist values that we have perhaps too quickly pronounced dead. Krauss, in particular, calls the antagonism against art's autonomy and specificity as “a monstrous myth of post-medium,” and begins her own ‘crusade war’ to retake the Eros of art.

This paper examines how Krauss' critical defense works to control the brutal expansion of digital media, and how we can bring the Eros (guaranteed

* Associate Professor at Miyazaki International Colle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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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pecificity, technical support, and memory’ in Krauss' term) back on track in art history. This paper gives particular attention to Krauss' use of the

‘Greimas semiotic square,’ as I revise it to fit better into Greimas' original graph and our discussion on media. What this paper claims in the end is that art’s immortality will never fade even in the rise of digital technology and digital media gains its historical profundity and technological innovation only by laying its mnemonic emphasis on art's specific forms and experience.

Key Words

Eros, Immortality in cloud, Media, Rosalind Krauss, Semiotic square, technical Suppor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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