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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엠마’와‘피의 로자’에 대한 분석적 논평(分析的 論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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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SEP Original Article 精 神 分 析 :第 15 卷 第 2 號 2 0 0 4

J Korean Psychoanalytic Society Vol.15, No. 2, Page 191~200, 2 0 0 4

‘붉은 엠마’와‘피의 로자’에 대한 분석적 논평(分析的 論評)

李 炳 郁

*

Psychoanalytic Note on Red Emma and Bloody Rosa

Byung-Wook Lee, M.D.*

머 리 말

20세기는 격동의 시대였다. 두 차례의 세계대전과 경제 대공황, 러시아혁명과 공산체제의 붕괴, 중동사태와 핵전쟁 의 위협 등 숨 가쁘게 돌아가는 정치적 격변의 와중에서 수 천만에 달하는 무고한 인명들이 희생되었다. 그러한 격 동기를 살다간 인물들 가운데 유독 불굴의 의지와 투혼으 로 일관했던 두 유대인 여성전사들이 있었다. 엠마 골드만 과 로자 룩셈부르크가 그들이다. 골드만은 리투아니아에 서 태어나 미국으로 이주하여 무정부주의 운동을 벌이다 가 러시아로 추방되었으며 룩셈부르크는 폴란드에서 태어 나 독일에서 혁명 활동을 벌이다 살해당했다. 같은 동시 대를 살면서 동일한 마르크스주의 이념으로 투쟁했던 두 여성은 대서양을 사이에 두고 유럽대륙과 북미대륙에서 각기 자신들의 이상을 위해 개인적인 삶을 희생해 가면서 거대한 체제를 상대로 외로운 싸움을 벌여야만 했다. 그 녀들은 오늘날 우리의 주변에서 흔히 목격하는 그러한 단 순 페미니스트들이 결코 아니었다. 그렇다고 여자 옷을 걸 친 남성들은 더더욱 아니었다. 그들은 철저한 사상으로 무 장된 혁명가들이었다. 그들은 탁월한 웅변과 이론으로 수 많은 대중들을 선동하고 감동시켰으며 자신들의 혁명운동 에 동참하도록 이끌었던 희대의 여성전사들이었다. 그러 나 그들에겐 적들도 많았다. 그들의 극렬한 운동에 반대 하며 깊은 혐오감을 표시한 사람들은 그들에게 각기‘피 의 로자’ ,‘붉은 엠마’라는 별명을 붙여 주었다. 타협할줄 모르는 그녀들의 공격적이고 도발적인 태도는 그런 호칭 으로 불리기에 족하였다. 심지어 그녀들은 ‘늙은 창녀’ 라고 불리며 조소까지 당했다. 이에 저자는 그토록 많은 남성들

에게 깊은 인상을 심어주었을 뿐 아니라 동시에 극도의 공 포심과 혐오감을 심어주기도 했던 두 유대인 여성, 골드 만과 룩셈부르크의 심리적 배경에 대해 알아보고자 하였 다. 결코 평범하지 않은 그들의 삶은 자신들로서도 물리치 기 어려운 그 어떤 강력한 심리적 동기에 의한 결과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비록 자신들이 속했던 사회와 시대로부 터 배반당하고 버림받은 불행한 여성들이었을지 모르지만 그러나 그들이 꿈꾸었던 이상적 사회의 건설에 대한 소박 한 꿈과 소망은 아직도 수많은 사람들에게 소중한 유산으 로 남아있다.

엠마 골드만의 생애(生涯)

엠마 골드만(Emma Goldman, 1869~1940)은 리투아니 아 태생의 유대인이었다. 당시 러시아제국의 영토였던 발 틱 연안 리투아니아의 작은 도시 코프노에 위치한 게토에 서 종교적으로 매우 경건한 분위기의 전통적인 유대인 가 문의 딸로 출생한 이 여성은 십대 소녀시절부터 이미 러시 아 무정부주의자인 작가 체르니셰프스키와 바쿠닌 등에 깊 은 영향을 받아 1882년 혁명가로서의 삶을 시작했으나 얼 마가지 않아 당국에 의해 체포되기도 했다. 1885년 이복언 니 헬레나를 따라 미국으로 이주한 그녀는 새로운 희망으로 기대에 부풀었으나 미국에서의 밑바닥 생활은 더욱 끔찍한 것이었다. 처음에 로체스터에 자리 잡고 의류공장에서 일하 던 그녀는 1889년 같은 동료 노동자인 야곱 커스너와 결 혼했으나 참을 수 없는 가난과 성격 차이로 인해 곧바로 이 혼하고 말았다. 때마침 시카고 헤이마켓 폭탄테러사건을 주 도하면서 시카고 경찰을 살해한 혐의로 일곱명의 무정부 주의자들이 교수형에 처해진 사실을 목격하고 분노에 가득 찬 엠마는 무작정 짐을 싸들고 뉴욕으로 향했으며 그곳에 서 아나키스트 신문 편집장인 존 모스트를 만나 그에게서 사상적인 영향을 크게 받았다. 존 모스트는 그녀의 카리스

*翰林大學校 醫科大學 精神科學敎室

Department of Psychiatry, Hallym University College of Me- dicine, Seoul, Kor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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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적인 특성을 곧바로 알아보고 이디쉬어를 사용하는 노동 자들로 하여금 파업을 선동하도록 그녀를 부추겼다. 이때 부터 그녀는 미국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무정부주의자로 두 각을 나타내기 시작하였다. 또한 이 무렵 그녀는 평생 동지 이자 반려자였던 무정부주의자 알렉산더 버크만과 운명적 인 만남을 가졌다. 1892년 이들은 한 조가 되어 피츠버그 인근의 카네기 철강공장에서 파업 노동자들을 탄압하고 살 해한 공장주 헨리 프릭을 암살하려 했다. 골드만은 비밀리 에 자금을 마련하여 총기를 구입해 주었으나 버크만은 부 상만 입혔을 뿐 암살에는 실패하고 말았다. 버크만은 투옥 되고 정부 당국은 무정부주의자들의 활동에 타격을 가하며 엄중 단속으로 대응했다. 그러나 골드만은 이에 굴하지 않 고 투쟁을 계속하다 1893년 무정부 활동의 연설에 대한 금지령을 위반했다는 죄목으로 경찰에 체포되어 투옥되었 다. 미국에서 정치적인 문제로 투옥된 최초의 여성이 된 것 이다. 1895년에 풀려난 그녀는 암살이나 대중파업과 같은 직접적인 행동에는 가담하지 않고 대신에 무정부주의 혁명 의 핵심은 도덕성의 혁명에 있다고 하면서 인종주의나 종교 적 권위주의와 같은 대중들을 사로잡는 환상들에 대한 도 전을 선언했다. 1907년에는 암스테르담에서 개최된 무정부 주의자 국제회의에 미국대표로 참석하였으며 그때까지는 투옥을 겨우 면할 수 있었으나 1916년 산아제한 운동으로 다시 투옥되었으며 이듬해인 1917년에도 반전운동 혐의 로 투옥되어 2년형을 선고 받았다. 이처럼 골드만 때문에 골머리를 앓아오던 미국정부는 드디어 1919년 그녀를 버크 만과 함께 러시아로 강제 송환시키고 말았다. 처음에는 노 동자들의 천국에 기대를 걸었던 이들은 그러나 얼마가지 않 아 공산주의자들의 폭정과 반유대주의의 잔재를 확인할 수 있었을 뿐이었다. 골드만은 레닌에 대해서도 공개적으로 비난을 가하면서 특히 그의 비민주적인 정책들에 반대했 다. 소비에트 정부에도 환멸을 느낀 골드만은 그 후‘조국 이 없는 여성’이라는 스스로에 대한 자조적인 평가대로 영국, 캐나다, 스페인 등지를 전전하며 살았으나 버크만은 1930년 이후 사회활동을 중단한 채 니스에서 어렵게 혼자 살다가 1936년 사망했다. 그러나 골드만은 1936년 스페 인 내전이 발발하자 1939년까지 스페인을 드나들며 다른 동지들과 함께 프랑코군에 저항해 투쟁하다가 파시스트들 이 승리하자 신변의 위협을 느끼고 프랑스로 피신했으며 그 후 1940년 캐나다 토론토에서 뇌졸중으로 쓰러져 71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그녀의 시신은 그 후 시카고의 아나키스 트 묘지 근처에 묻혔다(Wexler 1989).

로자 룩셈부르크의 생애(生涯)

로자 룩셈부르크(Rosa Luxemburg 1871~1919)는 폴란 드 자모시치 태생의 유대인이었다. 4남매 중 막내로 태어난 그녀는 어려서 골반염을 앓아 다리를 저는 신체장애인이었 으나 머리가 매우 명석하고 총명한 소녀였다. 당시 알렉산더 3세의 제정러시아의 지배하에 있던 폴란드는 차르체제의 혹독한 폭정에 시달리고 있었다. 로자의 아버지 엘리아스는 유대인 공동체와는 거리를 유지하며 그들의 논쟁에 휘말리지 않으려고 애쓴 인물로 열렬한 폴란드 애국주의자였다. 그녀의 조부는 목재상으로 재산을 모았다. 아버지는 자유사상을 신 봉하는 사람이었으며 어머니는 교양과 덕목을 갖춘 여성이 었다. 어려서부터 총명했던 로자는 읽기와 쓰기에 능했으며 5세때 이미 편지를 쓸 수 있을 정도였다. 3세때 가족이 바르 샤바로 이주함에 따라 그곳에서 학교를 다녔으며 남달리 조 숙하여 16세에 이미 혁명 활동에 가담하기 시작했다. 자유 주의, 민족정신, 절대주의에 대한 증오 등을 특징으로 하는 집안 분위기는 그녀로 하여금 사회적 부조리에 대한 의식에 일찍 눈뜨게 만들었다. 어머니의 귀여움을 독차지한 로자 는 막내의 특권으로서 아버지의 권위에 맞서곤 했다. 그녀의 부모는 자식들의 교육에 열의를 보였으나 어린 로자는 일찍 부터 반유대주의를 피부로 느끼며 세계의 질서에 대해 생각 하게 되었다(Gallo 2000). 1887년 바르샤바 제 2 여고를 수 석으로 졸업한 그녀는 불온한 정치적 태도를 지녔다는 이유 로 금메달을 수상하지 못했다. 1889년에는 혁명운동 지하 서클 활동이 발각되어 시베리아 유형에 처해질 위기가 그녀 에게 닥쳐왔다. 그녀는 자신의 신분을 위장한 채 국경을 넘 어 스위스로 피신했다. 취리히 대학에서 정치경제학을 공 부한 그녀는 그곳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망명자들의 모임을 통하여 러시아의 마르크스주의 지도자들과 교류를 가졌다.

1898년 구스타프 루벡과의 위장결혼을 통하여 독일시민권

을 얻은 그녀는 곧바로 독일 사회민주당에 가입하여 탁월

한 이론과 웅변으로 두각을 나타내기에 이르렀다. 1905년

러시아에서 1월 혁명이 일어나자 그녀는 바르샤바로 돌아가

혁명 활동에 가담했다. 대중파업을 주도하던 그녀는 1906년

당국에 의해 체포, 투옥되었으나 수개월 후 보석으로 풀려났

다. 그 후 베를린에서 7년간 학생들을 가르치는 가운데 [자

본축적론]을 집필했다. 그러나 볼셰비키와 같은 당 조직의

필요성에 대해 과소평가하고 자본주의는 스스로 붕괴하고

말 것이라는 그녀의 낙관론은 예상을 빗나갔다. 줄곧 반전론

을 펼쳤던 그녀는 전쟁을 반대하던 독일 사회민주당이 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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를 저버리고 전쟁 예산안에 동의하자 사회민주당을 탈퇴하

고 스파르타쿠스단을 조직하여 대항함으로써 1915년 다시 투옥되고 말았다. 1917년 러시아 혁명이 성공하고 1918년 에 독일에서도 혁명이 일어나 1차 세계대전은 종식되었다.

감옥에서 풀려난 그녀는 스파르타쿠스단을 중심으로 독일공 산당을 이끌었으나 극렬한 파괴분자, 잔인한 절름발이 계집, 피의 로자, 늙은 창녀 등의 별명으로 그녀에 대한 우익세력 의 온갖 악선전과 비방은 극에 달했으며 1919년 1월 스파 르타쿠스단의 봉기가 실패로 돌아가면서 그녀는 한낮의 대 로상에서 동료 리이프크네흐트와 함께 우익 테러 단체 민병 대원들에 붙들려 군용트럭에 실려 호송 도중 무참히 살해된 후에 란트베르 운하에 내던져졌다. 심하게 부패한 그녀의 시 신은 4개월 후에 가서야 발견되었다.

무정부주의(無政府主義)와 공산주의(共産主義)

엠마 골드만과 로자 룩셈부르크는 동시대를 살면서 혁명 적 투쟁으로 일관한 유대인 여성들이었다. 두 여성 모두 마 르크스주의를 신봉하였으나 골드만은 보다 철저한 무정부 주의(無政府主義)를 표방하였던 인물인 반면에 룩셈부르크 는 대중파업을 무기로 내세운 전투적인 혁명 투사였다는 점 에서 다르다(Nordquist 1996). 그러나 연약한 여성의 몸 으로 자신들의 신념을 위하여 개인적인 영달을 내던진 채 오 로지 억압받는 대중들을 위한 투쟁에 일생을 바쳤다는 점에 서는 20세기가 낳은 보기 드문 여전사(女戰士)들이었다고 할 수 있다. 앞으로도 그토록 과격한 여성들은 좀처럼 나오 기 힘들 것 같다. 뿐만 아니라 자신들이 속한 시대로부터 그 들만큼 철저하게 버림받고 배반당한 비운의 여성들도 드물 것이다. 그러나 스스로 선택한 운명의 길이었으며 스스로 자 초한 형극의 길이기도 하였다(안성일 2004). 골드만의 무 정부주의는 자본주의는 물론 소비에트 관료독재도 타도의 대상이었다. 뿐만 아니라 신과 교회의 권력, 귀족주의, 남성 우월주의, 가부장제도, 인종차별주의, 제국주의, 징병제도 등 에 대한 반대 및 자유연애와 산아제한 권장, 언론의 자유 등 모든 권력과 권위를 부정하는 입장이기 때문에 그녀의 무정 부주의는 발붙일 곳이 거의 없었던 것이 사실이다. Goldman (1996)의 [붉은 엠마가 말한다]는 무정부주의 및 공산주의 뿐 아니라 그 외 다양한 주제를 다루고 있는데 예를들어 섹 스, 매춘, 결혼, 종교, 교육, 감옥제도, 폭력, 전쟁, 질투심 등 에 대한 그녀의 관심이 반영되어 있다. 전통적인 결혼제도에 반대하고 자유연애를 주장한 그녀에게는 당연히 늙은 창녀 라는 악명이 뒤따랐다. 특히 골드만은 부당한 법적 구속 때 문에 본인의 의지와 관계없이 비천한 신분으로 태어나 고통

받는 수많은 아동들의 모습을 목격하고 산모의 자유로운 유 산과 산아제한의 권리를 주장했다. 그러한 골드만의 정신에 따라 오늘날 미국 일부에서는 제도권 의료정책에 대항하여 급진적인 엠마 골드만 클리닉이 운영되고 있기도 하다.

골드만은 히틀러와 스탈린을 포함한 모든 전체주의도 싸 잡아 비난했다. 국가권력에 대한 그녀의 극단적인 부정은 굶 주린 실업자는 가게에서 식료품을 훔쳐도 좋다는 선동으로 까지 이어졌다. 그녀의 증오에 가득 찬 공격적인 태도는 수 많은 남성들을 공포에 떨게끔 만들기에 족했다. 맥킨리 대통 령 암살의 연루 혐의로 감옥에 있으면서 전달된 골드만의 메 시지는 그녀의 독설이 어느 정도인지 짐작케 한다(Goldman 1930).“당신들은 한 아나키스트에 대해 개자식이라 저주한 다. 나 역시 당신들에게 그렇게 하고 싶다. 나는 당신들의 심 장을 갈기갈기 찢어내어 내가 키우는 개에게 먹일 것이다.”

골드만의 무정부주의는 그녀가 창간했던 월간지 어머니 대 지를 통하여 널리 알려졌으며 동시에 미국에서 수많은 논란 을 불러 일으켰다(Glassgold 2001). 인간의 머리에서 나온 모든 이데올로기 중에서 무정부주의만큼 과격하고 극단적이 며 비현실적인 이념도 드물 것이다. 지상의 모든 국경과 권 위, 종교와 차별을 부정하는 무정부주의야말로 자본주의사 회는 물론 공산주의사회에서조차 사회적 무질서를 초래하 기 십상인 매우 위험한 사상으로 간주될 수밖에 없었다. 그 러나 세상은 한 여성의 힘만으로 대적하기에는 너무도 크고 견고한 바빌론의 성곽과도 같았다. 그녀가 모두 반대하고 투 쟁을 벌였던 자본주의와 공산주의 그리고 파시즘이 득세하 며 3파전을 벌이며 주도권 다툼이 극에 달하던 1940년 5월, 한때는 세상에서 가장 위험한 여성으로 간주됐던 이 여성은 자신의 모든 노력이 수포로 돌아갔음을 깨닫고 모든 것을 체 념한 채 캐나다에서 조용히 숨을 거두었다(Moritz 2001).

남성들의 권위주의에 도전한 골드만과는 달리 룩셈부르크

는 여성인권 운동에는 관심을 보이지도 않았으며 그러한 운

동에 참여하지도 않았다. 자본주의 타도가 그녀에게는 더욱

급선무였기 때문이다. 룩셈부르크에 대해 Dunayevskaya

(1991)는 열렬한 여성해방론자로 그녀를 평가했지만 그것

은 사실과 다르다. 룩셈부르크는 진정한 사회주의 낙원이 건

설되면 남녀평등 문제는 자연히 해결되리라고 본 것이다. 그

러나 그녀는 러시아에서 진행되는 소비에트 관료화에는 분

명한 반대를 표시했다. Gallo(2000)는 룩셈부르크야말로 진

정한 인간적 사회주의를 지향했던 인물로 평가하면서 새로

운 독재로 치닫는 레닌의 방법론에 대해 분명한 반대를 표

시했던 그녀의 용기와 통찰력은 이미 그 시대에 소련식 사회

주의의 말로를 예견한 것이었다고 주장했다. 그녀 자신은 비

록 러시아혁명에 가담하기는 했지만 레닌의 토지분배나 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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족자결주의, 관료독재와 테러리즘에는 동의하지 않았던 것 이다. 따라서 레닌의 입장에서는 그녀의 존재가 소비에트 사 회 건설에 걸림돌이 되는 것으로 간주했다. 그러나 룩셈부 르크에게 있어서 민주주의 없이는 진정한 사회주의도 존립 할 수 없는 것이며, 사회주의가 없는 민주주의도 존재 가치 가 없는 것이었다(Bronner 1997). 따라서 룩셈부르크와 그 녀의 연인 레오 요기헤스는 인도주의와 민주주의에 입각한 사회주의를 내세웠으며 그러한 이유로 볼셰비키에 대항하는 멘셰비키를 지지하는 입장에 있었으나 독일사회민주당이 전쟁을 지지하고 나서는 바람에 사회민주주의와도 결별하고 러시아와는 다른 형태의 사회주의혁명을 일으키고자 했다.

Cliff(1986)가 말한 바와 같이 그녀는 이처럼 스탈린주의와 사회민주주의 모두에 반대함으로써 어찌 보면 고립을 자초 할 수밖에 없었다고 본다. 그녀가 쓴 [자본축적론]에 대하여 레닌은 한마디로 넌센스라고 일축했다. 반면에 룩셈부르크는 민중의 자발적인 의사와 관계없이 볼셰비키들이 일방적으로 추진했던 토지분배와 같은 국가정책 및 위로부터의 혁명을 명백한 반혁명으로 간주했다(Luxemburg 1979). 그 당시 요기헤스는 로자의 저술을 출판하고자 했으나 레닌의 비판 적 견해로 인하여 일이 생각처럼 순조롭게 진행되지 못하였 으며, 그 역시 1919년 살해당하는 바람에 그들의 활동은 물 거품으로 돌아가고 말았던 것이다. 그녀의 동지이기도 했던 Frolich(1972)는 룩셈부르크에 대한 평전에서 그녀는 마르 크스를 극복한 마르크스주의자였으며 레닌의 민족자결주의 에 반대한 이상주의자로서 그 어떠한 도그마도 거부한 채 이론과 실천을 겸비한 진정한 사회주의자였다고 평가했다.

붉은 엠마와 피의 로자, 두 여성 모두 늙은 창녀라는 모욕 적인 호칭으로 불리며 기득권자, 우익세력, 반유대주의자, 민 족주의자, 도덕주의자, 제국주의자 등으로 이루어진 전통적 기독교사회인 유럽과 미국 대륙에서 극도의 혐오 대상인 동 시에 타도의 대상이었다. 두 여성 모두 극단적인 이념 추구 와 배타적인 이상 추구로 인하여 자본주의 및 공산주의 국가 모두에서 배척을 당한 결과 그들이 발붙일 곳은 이 지구상 에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들이 의지할 곳은 단지 대 중들의 의식혁명에 있었지만 그들의 낙관주의는 불신과 두 려움에 가득 찬 대중들의 심리를 극복하기에는 역부족이었 다. 그들은 자신들의 신념을 전파하고 선동하는데는 천부적 인 재능을 발휘하였지만 그들 자신을 포함한 대중들의 근원 적인 심리를 파악하지 못했기 때문에 실패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들 못지않게 대중선동술에 능했던 나치즘이 결국 바이마르 공화국을 무너뜨리고 권력을 장악한데는 물론 대 중들의 심리를 정확히 파악하고 이를 교묘하게 이용하는데 성공했기 때문이다. 반유대주의는 그러한 대중선동술의 일환

으로 아주 적절히 활용된 예 중의 하나였다. 엠마와 로자의 비타협적, 공격적인 태도는 수많은 대중들의 전폭적인 지지 와 호응보다는 오히려 불안과 두려움을 조성한 결과를 낳았 으며 우익세력들은 그러한 대중들의 불안심리를 십분 활용 한 셈이다. 미래에 대한 확신이 없는 대중들은 차라리 권력 의 일부가 되어 그 힘을 공유하고자 하는 의존성을 보이기 마련이다. 의식의 변화를 통하여 개인적인 독립과 자주를 외 친 이 두 여성의 목소리가 드넓은 광장에 공허하게 울리고 만 것은 이 같은 대중들의 내면적인 심리적 취약성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기 때문이며 그러한 대중들의 회의적 입장을 인정하기에는 두 여성 모두 지나친 낙관론에 기초한 이상주 의자들이었기 때문이다.

방황(彷徨)하는 유대인

18세기 불란서 대혁명이후 절대왕정은 무너지고 자유, 평 등, 박애가 공화국의 기본 이념이 되었다. 그러나 19세기에 마르크스가 나타나기 훨씬 이전이었던 당시에도 불란서에는 생 시몽 등의 공상적 사회주의 이념은 이미 존재하고 있었 다. 마르크스의 국제공산주의운동에 힘입어 차르 체제를 뒤 엎고 러시아혁명이 성공한 것은 1917년 10월이었다. 공산 주의의 기본 명제는 평등이었다. 자유는 유보되고 박애는 혁 명의 걸림돌이 되었다. 평등의 이념은 재산권 및 생산품의 공유뿐 아니라 남녀간의 성차별도 철폐시켰다. 신분상의 제 한도 폐지되었다. 이처럼 만민 평등사상은 이념상으로는 지 극히 정당한 것이었고 억압받던 대중들로부터 열광적인 호 응을 얻었다. 그러나 이같은 평등주의는 오랜 전제주의에도 불구하고 전혀 새로운 것은 아니었다. 초기 기독교 공동체의 삶도 이와 매우 유사한 나눔과 공유에 기초한 평등사회였다.

그러한 이상은 중세 수도원사회에서도 보편화된 운동으로 진행되어 나갔다. 전통적으로 오랜 유목민사회였던 유대인 사회 역시 왕국 건설 이전부터 평등에 기초한 공동체적 삶을 영위하고 있었다. 물론 족장제도가 있었지만 그것은 탈무드 법을 능가할 정도로 권력을 행사할 수 있는 위치는 못되었다.

오히려 랍비의 존재가 대중들의 인생 대소사에 간여할 수 있

는 권한을 행사하고 있었다. 그러한 전통은 확고한 봉건체제

및 절대왕정체제로 발전한 유럽대륙에서는 통용될 수 없는

백일몽에 불과했다. 그러나 19세기 산업혁명과 식민제국주

의가 발흥하던 시기에 칼 마르크스가 나타나 자본주의에 대

항하는 국제공산주의운동을 일으켰다. 당시 그는 사회적으로

천대받는 유대인 출신이었다. 마르크스는 결국 독일에서 추

방되어 영국으로 망명하고 그곳에서 자신의 이념적인 노선

을 추구해 나갔다. 오랜 게토생활을 통하여 온갖 부당한 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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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과 박해를 받아온 유대인들의 유일한 희망은 체제의 변

화였다. 그러나 그것은 위로부터의 변화를 기대한 것이지 아 래로부터의 변혁이란 꿈도 꿀 수 없는 비현실적인 환상에 불과함을 잘 알고 있었다.

불란서혁명 이후 등장한 나폴레옹의 패권주의는 막강한 권력을 독점하던 유럽세계의 왕족들에게는 악몽 같은 존재 였지만 그는 전 유럽 대륙에 걸쳐 분포하던 유대인 게토사회 를 해방시키는 업적을 이루었다. 비록 제한적인 개방이기는 했으나 유대인의 사회적 진출은 눈부시게 증가하게 되었다.

보다 자유로운 평등사회를 꿈꾸는 많은 유대인들이 마르크 스가 전파한 공산주의사상에 매력을 느끼게 된 것은 지극히 당연했다. 러시아혁명을 성공시킨 핵심 인물인 볼셰비키주 의자 레닌과 트로츠키, 지노비에프, 라데크를 비롯하여 그들 에 반대한 과도정부의 케렌스키, 멘셰비키주의자 마르토프 등, 당시 러시아에는 거의 4만명에 달하는 유대인들이 공산 주의 활동에 가담하고 있었다. 독일 정부를 뒤에서 조종하 여 스위스에 망명중인 레닌 일행을 비밀리에 봉인열차로 호 송시켜 러시아로 잠입할 수 있게 성공시킨 파르부스 박사도 유대인이었다. 이들 유대인들은 시오니즘에 입각한 이스라 엘 독립운동 움직임에 대해서는 회의적인 입장을 보이고 있 었으며 오히려 자신들이 속한 사회 체제의 변혁을 통해 살기 좋은 평등사회를 이루고자 하였다. 초기 소비에트 연방을 실 질적으로 움직였던 인민위원회(Sovnarkom)에 속하는 절 대 다수의 인물들이 유대인들이었다는 사실을 인정한다면 그 후 유대인에 대한 스탈린의 피해망상적 수준이 어느 정 도였는지 가늠할 수 있다. 모두 22명의 인민위원 가운데 그 루지아 출신 스탈린과 부분적으로 유대인 혈통을 지녔던 레 닌을 포함한 3명의 러시아인, 그리고 1명의 아르메니아인을 제외한 총 17명의 위원들이 모두 유대인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들의 명단은 트로츠키, 지노비에프, 라린, 쉴리흐터, 란더, 카우프만, 쉬미트, 릴리나, 스피츠버그, 안벨트, 소콜니노프, 볼다르스키, 우리츠키, 쉬타인버그, 페닉스타인, 사비치, 자슬 로브스키 등이 그들이다. 레닌 사후의 권력 승계에서 트로츠 키를 물리치고 권좌에 오른 스탈린이 제일 먼저 착수한 작 업은 유대인에 대한 대대적인 숙청이었다. 소리없이 끌려가 재판 없이 처형된 유대인 간부들이 부지기수였다. 그러나 과학자, 예술가들은 처형만은 겨우 면할 수 있었다. 파스테 르나크, 에렌부르그, 쇼스타코비치, 에이젠슈타인 등이 그들 이다. 이들은 국제적으로 너무 알려져 있었기 때문에 처형할 수 없었다.

1894년은 유대인사회에서 특기할만한 해로 기억되는 시 기였다. 그 당시 룩셈부르크는 스위스 취리히로 망명하여 학 업에 몰두하면서 사회주의 서클에 드나들며 이념적 활동을

하던 시기였으며, 골드만은 미국에서 무정부주의 활동으로 체포되어 투옥생활을 하고 있던 시기였다. 또한 프로이트는 브로이어와 함께 [히스테리 연구]의 출판을 위한 준비에 여 념이 없던 시기였다. 그러한 시기에 때마침 터진 드레퓌스 사건은 자신들의 정체성에 비로소 눈뜨기 시작한 일부 유 대인 지식인들에 의하여 시오니즘 운동을 일으키게 만드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프로이트는 마르크스주의에 동의하지 않았으며 다른 종교와 마찬가지로 어떠한 이데올로기도 신 경증적 징후로 간주하였기 때문에 러시아에서 진행되는 새 로운 변화에 대해서 무관심으로 일관했다(이병욱 2003).

그러나 시오니즘 운동에 대해서는 내심 동조하고 있었다. 그 러한 배경에서 시작된 시오니즘 운동은 대다수의 유대인들 조차 회의적인 태도를 보였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그들이 바 라던대로 결실을 맺게 되었다. 그리고 새로운 희망에 부풀 어 그들의 신생 조국 이스라엘로 몰려들기 시작한 정착민들 은 자신들의 뼈아픈 과거 경험을 토대로 그 후 사유재산을 인정하지 않는 일종의 공산체제와 유사한 키부츠라는 독립 적 협동농장 건설에 몰두했다. 이는 스탈린이 대대적으로 전 개했던 국영집단농장 콜호즈와 거의 비슷한 체제였다. 그러 나 노동자들만의 지상낙원을 이룩한다는 공산주의 이상은 유럽대륙에서 시베리아에 이르기까지 70여년의 거대한 사 회적 실험 끝에 결국 참담한 실패로 끝났고 말았다. 마르크 스에서 시작하여 레닌과 트로츠키, 골드만과 룩셈부르크를 거쳐 프라하의 봄의 주인공, 체코 수상 두브체크에 이르기까 지 유대인들이 주도했던 노동자들의 이상적 사회 건설은 원 점으로 되돌아가고 만 것이다. 심지어 미테랑 정권하에 프랑 스 수상을 지낸 파비우스도 유대인 출신이었다. 그러나 낙관 적 이상주의에 기초한 유대인 사회주의자들의 꿈은 민족주 의에 입각한 소비에트 관료독재 및 세계의 자본을 독점하다 시피 한 유대인 자본가들의 회의적 현실주의 앞에 무릎을 꿇고만 결과가 되고 말았다.

1906년만 해도 골드만은 매우 낙관적인 견해를 보여주었

다. 조국이 없는 유대인들이야말로 사해동포주의적인 이상

적 사회를 건설하는데 아주 안성맞춤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러시아혁명으로 건설된 소비에트 사회를 경험한 이후에는

그러한 낙관적인 입장이 바뀌었다. 유대인 문제는 새로운 이

상적 사회에서도 여전히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로 잔존한다

는 실망감 때문이었다. 특히 그녀는 우크라이나에서 그런 느

낌을 강하게 받았다. 유대인에 대한 인종청소라는 그녀의 불

길한 느낌은 적중했다. 1937년 히틀러가 등장한 이후 그녀

의 입장은 다시 변화를 보였다. 그녀 자신은 시온주의자도

아니고 민족주의자도 아니지만, 유대인의 권리를 위해 일할

것이며 동시에 그들의 생명과 진보를 가로막는 어떠한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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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엠마’와‘피의 로자’에 대한 분석적 논평(分析的 論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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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에 대해서도 투쟁할 것임을 분명히 했다. 한 곳에 안주하 지 못하고 평생을 떠돌기만 했던 Goldman(1975)은 자신의 조상들의 운명을 반복하듯 집 없는 천사처럼 여기저기 방황 하며 지내다가 말년에 가서야 겨우 캐나다에 정착할 수 있 었다. 1940년 죽기 직전, 안식처를 찾지 못하고 평생을 방 황하는 유대인으로 살았던 골드만은 마지못해 인정했다. 유 대인들은 이 세상 어딘가에 그들만의 작은 은신처가 필요할 것이라는 점을 말이다. 그녀의 자조적인 말은 예언처럼 맞아 떨어졌다. 골드만이 죽은지 8년 후인 1948년 5월 이스라엘 공화국이 독립한 것이다.

엠마와 로자의 정신역동(精神力動)

일생동안 자신들의 이상과 혁명을 위해 그토록 희생적으 로 헌신하고 투쟁했던 골드만과 룩셈부르크의 무서운 힘과 에너지는 과연 어디서 비롯된 것일까 궁금하지 않을 수 없 다. 그녀들이 보인 엄청난 파괴력과 영향력은 분명 상식적인 이해를 뛰어넘는 것이기에 더욱 관심을 유발한다. 그들은 성적으로 억압되지도 않았으며 공격적이고 적대적인 태도 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의 동료들과는 깊은 연대의식을 보여 주기도 했다. 그런 점에서 그들에게 붙여진 반대자들의 악의 에 찬 별명, [피의 로자], [붉은 엠마] 등의 호칭은 일반 대 중들에게 매우 위험하고 잔혹한 극렬분자의 이미지, 또는 피에 굶주린 빨갱이 여성들이라는 부정적인 인상을 심어주 기에 충분했다. 그녀들에 가해진 이들 호칭은 그만큼 여성들 의 도전과 저항을 용납할 수 없다는 남성우월주의자 및 기득 권자들의 불안과 두려움을 반영하는 것이기도 하다. 동시에 그녀들은 그러한 남성들의 반발과 보복을 충분히 예상하면 서도 의도적으로 더욱 과격한 행동으로 나아갔다는 점에서 그러한 심리적 배경에 대해서 탐색해 볼 가치는 충분히 있다.

룩셈부르크는 키가 150 센티미터에 불과한 작은 체구의 절름발이 여성이었다. 중류층 유대인 가문의 4남매 중 막내 로 태어난 그녀는 5세 때 골반부위의 관절염으로 거의 일년 간이나 누워 지내야만 했다. 골수 결핵이라는 의사의 오진으 로 그녀는 영구적인 손상을 입게 되어 평생 동안 한쪽 다리 를 절어야 했다. 어린 나이에 불어 닥친 이러한 시련은 가족 구성원의 깊은 유대감으로 극복될 수 있었지만 그때부터 이 미 로자는 친구들의 놀림과 따돌림을 경험하면서 뼈아픈 신 체적, 인종적 열등감에 빠져 생각에 깊이 몰두하는 소녀가 되어 있었다.

그러나 부단한 독서와 글쓰기를 통하여 그녀는 자신감을 되찾고 도피가 아닌 정면 대결의 행동 방식을 선택하게 되 었다. 고등학교 시절부터 이미 그녀는 경찰의 주목 대상이었

으며 혁명적인 지하운동에 관여하기 시작하면서 가족들과도 단절되었다. 동료들이 줄줄이 체포되어 교수형 아니면 시베 리아 유형에 처해지는 상황에서 경찰의 포위망이 서서히 좁 혀 옴을 느낀 로자는 결국 스위스로 망명할 것을 결심했으 며 항상 그녀에 대해 불안해하던 가족들도 기꺼이 이를 도왔 다. 취리히에서 대학을 다닐 수 있게 된 것은 전적으로 부모 의 도움에 의한 것이었다. 당시 취리히는 혁명을 추구하다 도피한 망명자들의 집결지였다. 사회주의자 서클에 드나들면 서 그녀의 진로는 더욱 확고해졌다. 1890년 리투아니아 태 생의 유대인 청년 레오 요기헤스를 만나 사랑에 빠진 것도 그녀의 진로를 분명히 해주었다.

Ettinger(1988)는 룩셈부르크의 성격에 대해서 활달하 고 용기와 신념에 가득 찬 인물이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매우 불안정하고 융통성이 없으며 참을성이 부족한 그러나 감상적인 동시에 낭만적인 요소도 지니고 있었던 것으로 평 가한다. 그녀의 감상적인 측면은 특히 그녀가 남긴 서한집을 살펴보면 손쉽게 알 수 있다(Luxemburg 1993). 그러나 성 적인 자유분방함을 보였던 골드만에 비해 룩셈부르크의 초 자아는 상당한 엄격성을 유지한 것으로 보인다. 그녀의 이중 적인 태도는 물론 자신의 신체적 및 인종적 열등감이 동기 가 될 수도 있겠지만 그보다는 어린 시절 겪어야만 했던 심 리적 갈등이 주된 동기로 작용했을 수 있다. 그것은 자상한 어머니에게서 경험했던 유아적 전능감이 현실적 장벽 앞에 무너져 내리면서 그 모든 것이 환상에 불과했음을 깨닫게 되 는 나르시시즘적 상처로 인하여 더욱 큰 분노감정을 유발시 킨 것으로 보인다. 그러한 공격성은 그녀의 행동을 급진적 인 혁명활동으로 나아가게끔 만들면서도 보다 안전한 심리 적 도피처를 제공해준 가족 공동체, 더 나아가 어머니의 따 스한 품안에 대한 향수와 그리움을 더욱 자극했을 수 있다.

그러한 양가적인 태도는 당연히 그녀의 모습을 이중적인 것 으로 보이게 만들 수 있다. 따라서 룩셈부르크는 골드만과 같이 비참한 게토 생활도 폭군적인 아버지도 겪어보지 못했 기 때문에 가족의 소중함을 잘 간직하고 있었던 것이며 그래 서 로자는 항상 자신의 가족들에 대하여 일말의 죄책감을 지니고 있었다. 반면에 골드만은 가족이라는 체제 자체를 거 부하고 증오하며 파괴시키고자 하였다.

여성해방운동의 선구자적 인물로 로자 룩셈부르크를 높이

평가한 Haug(1992)는 가학적인 남성들의 전유물로 전락

한 여성들의 도덕적 매저키즘을 과감하게 극복할 것을 요구

하고 특히 여성들의 신체에 대해 사회가 주입시켜온 성적

인 조건화에 길들여진 현실에서 여성들이 과감하게 탈피할

것을 주장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가학과 피학은 성 차이

에 따른 별개의 차원이 아니라 상호 맞물려 돌아가는 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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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 炳 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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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 과정이다. 다시 말해서 한 개인의 내면에서도 가학과 피

학은 교대로 나타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도덕적 차원 에서 새도매저키즘을 논한 바 있는 Freud(1924)를 굳이 인용하지 않더라도 권력의 메카니즘 테두리 안에서 지배의 논리와 속죄양 만들기를 상호 연결시키고자 했던 Chancer (1992)의 주장에 귀 기울여볼 필요는 있다. 그녀는 개인의 독립만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자본주의 체제뿐 아니라 개인 의 의존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공산주의 체제 모두가 한결같 이 새도매저키즘적인 인간관계를 강요한다는 점에서 오히려 룩셈부르크의 입장에 가까운 통찰에 이르고 있다.

엠마 골드만은 소녀시절에 이미 러시아 무정부주의자 작 가 바쿠닌과 체르니셰프스키 등에 깊이 경도하여 혁명가로 서의 길을 꿈꿀 정도로 조숙하였다. 그녀가 자신의 학업을 계속하기를 요청하자 그녀의 아버지는 겨우 15세가 된 딸에 게 결혼을 강요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계집애 따위는 더 이상 배울 필요가 없어! 모든 유대인의 딸들이 알 아야할 것은 생선을 준비하고 국수나 잘 자르고 남자에게 애 들이나 여럿 낳아주면 되는 거야.” 이러한 아버지에 대한 반 항심으로 1885년 당시 16세의 골드만은 독한 마음을 품고 가출을 결심했으며 드디어 자유의 땅, 미국으로 가는 배에 몸을 실었다. 1890년대에 골드만은 미국에서 가장 급진적 인 선동가로 악명이 자자했으며“붉은 엠마 Red Emma” 라 는 호칭으로 불렸다.“피의 로자 Bloody Rosa” 라는 호칭으 로 악명을 날렸던 룩셈부르크와 함께 이들 유대인 여성들은 수많은 동시대의 남성들에게 공포와 두려움의 대상이 되었 던 것이다. 골드만은 자신의 유대인으로서의 정체성을 결코 잊은 적이 없었다. 어린 시절에 골드만 일가는 심한 유대인 박해 때문에 코프노를 떠나 쾨니히스부르크를 거쳐 페테르 스부르그로 이사했는데 이때 겪었던 러시아의 폭력적인 반 유대주의 경험이 그녀로 하여금 사회정의를 구현하는데 일 생을 바치도록 하는 주된 원동력이 되었다고 볼 수 있다. 전 기작가 Falk(1990)에 의하면 유대인에 저지른 잔인한 만 행 때문에 연약한 여자의 몸으로 적진에 홀로 걸어 들어가 아시리아의 포악한 장군 홀로페르네스의 목을 단칼에 자른 이스라엘의 딸 유딧의 동족을 위한 희생적인 용기가 그녀가 취할 여성 역할의 모델이 된 것으로 보았다. 그러나 골드만 은 유대인만을 위해 활동한 것은 결코 아니었다. 그녀는 부 당하게 억압받는 모든 이들을 위해 투쟁한 것이다. 그것은 물론 자신에게 주어진 부당한 사회적 조건에 일찍 눈떴기 때 문이기도 하지만 그녀는 러시아황제의 폭정에 노출되기 이 전에 이미 가족을 주무르며 지배했던 집안의 폭군 아버지에 대한 강한 반발과 분노를 경험한 상태였다. 골드만은 남성 들의 지배구조에 강한 저항감을 지니고 사회의 첫 발을 내

딛었으며 그런 점에서 그녀는 이성관계에서 개인적으로 갈 등도 많았다. 특히 시카고의 홍등가 산부인과의사이면서 사 회개혁가이기도 했던 무정부주의자 벤 라이트만과의 뜨거 운 관계는 거의 10여년에 이르는데 이 시기에 그녀는 자유 연애와 여성들의 독립심에 대해 목소리를 드높이며 가부장 적 가족체제에 대한 강한 반감을 드러내 보였다. 그러나 가 족이라는 오랜 역사를 지닌 체계 자체에 대해 매우 양가적인 태도를 지녔던 골드만은 그녀의 공적인 태도와는 달리 개인 적으로는 안락하고 안정된 관계를 유지하고 싶은 나머지 강 한 질투심에 사로잡히기도 했다(Falk 1990). 그녀의 이상주 의와 갈등을 일으킨 애정에의 갈망은 Duberman(1991)에 의해서도 지적된 부분이다. 그러나 그녀의 애정은 모두 일방 적인 사랑이었으며 그녀의 상대들은 대부분 심약한 남성들 이었다. 그녀의 선택은 항상 자신보다 연약한 인물들이었다 는 점에서 골드만은 항상 남성들 위에 군림하고자 하는 욕구 가 컸던 것으로 보인다. 벤 라이트만의 딸이었던 Carpenter (1999)는 오랜 기간 골드만이 일방적으로 묘사했던 자신 의 아버지에 대한 그릇된 이미지, 즉 무모하고 난잡하며 방 종한 파괴적인 모습의 인물상에서 벗어나 다분히 긍정적인 시각에서 묘사하고 있지만 실제로 그녀는 자신의 아버지를 만난 적이 없다.

1906년에 그녀가 발간한 잡지명은 [어머니 대지 Mother Earth]였다. 잡지는 그녀의 러시아 추방과 1차 세계대전의 발발로 인하여 1917년 폐간되었다. 골드만에 있어 아버지의 존재는 기억하고 싶지 않은 존재일 뿐이다. 그러나 어머니는 영원한 안식처를 의미한다. 마치 우리 모두가 흙으로 돌아 가듯이 대지는 우리가 되돌아갈 영원한 휴식처가 된다. 골 드만은 돌아갈 고향을 잃었다. 그녀의 심리적 공허감은 이 성과의 접촉으로 해소될 수 없는 보다 근원적인 성질의 것이 었기 때문에 그로 인한 좌절과 분노는 골드만으로 하여금 지상의 모든 권위와 체제에 대한 파괴적인 공격으로 치닫게 만들었을 것이다. 그것은 세상 전체를 상대로 한 힘겹고 불 가능한 투쟁으로 이어졌다. 이미 떠난 어머니의 품안으로 다 시 돌아갈 수 없다면 그러한 관계의 틀까지 부정하고 파괴 시켜버리려는 필사적인 시도였다. 물론 그러한 시도는 이데 올로기 추구라는 의상을 갖춘 모습으로 나름대로의 정당성 을 지닌 것이었지만 아버지의 권위를 부정하고 돌아갈 수 없는 어머니의 존재마저 부정하고자한 시도는 그녀의 행적을 통하여 충분히 짐작이 갈 수 있는 부분이기도 하다.

Brenner(1973)는 많은 혁명가들의 경우, 자신들이 의식

적으로 그토록 혐오하던 폭군적 지배자와 닮게 되고, 똑같은

지위에 오르며, 같은 특권을 누리는 동시에 동일한 권력을

행사하려는 무의식적 동기를 보인다는 점에서 매우 역설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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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엠마’와‘피의 로자’에 대한 분석적 논평(分析的 論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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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 듯하지만 이는 알고 보면 반항적인 아이들이 그들의 부모 와 동일시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혁명가들도 무의식적으로는 자신들의 지배자와 동일시한다고 하였다. 혁명가들이 폭군을 몰아내고 일단 정치적 권력에 도달하면 그들은 어느 틈엔가 폭군과 닮아간다. 폭군을 타도한 어제의 투사가 오늘의 새로 운 폭군으로 거듭나는 것이다. 그는 사회주의자였던 버나 드 쇼의 말을 아주 적절히 인용하였다.“모든 혁명이 이룩하 는 것은 억압의 짐을 한 어깨에서 다른 어깨로 옮겨놓을 따름이다” 물론 그는 이러한 견해가 그들의 열렬한 추종자 들에게는 악의에 찬 중상모략으로 받아들여질게 분명하다 는 말을 덧붙이는 것을 잊지 않는다.

사회주의적 경향의 분석가 Fromm(1963)은 성격이 운명 을 결정한다고 하면서 혁명적 성격(revolutionary charac- ter)에 대하여 말하기를, 그것은 권위주의적 성격과 마찬가 지로 정치심리학적인 개념이라고 하였다. 종종 혁명가들의 행동은 광신적으로 보이기는 하지만 광신자들은 확신을 갖 고 있지 않다는 점에서 혁명가들과는 다르며 권력자의 일부 가 됨으로써 자신도 그러한 권력을 공유하고 있다는 착각 을 지니게 되는데 이는 일종의 새도매저키즘적인 공생관계 를 의미한다고 하였다. 그에 의하면 혁명적 성격의 특징은 진정한 독립과 자유로서 공생적 애착관계와는 정반대의 개 념이라고 하면서 혁명적 인간이란 자신의 진정한 독립을 이 루고 현실에 대한 비판적 통찰을 획득한 인물이며 동시에 인간성과 일체화하고 있는 사람이라고 하였다. 그는 반항자 와 혁명적 성격도 따로 구분하였다. 즉, 반항자란 분노 때문 에 권위를 타도하고자 하는 사람이며 일단 권위를 타도한 이후에는 그 자신이 그러한 권위 자체가 되려고 한다는 점에 서 혁명적 인간과는 다르다는 것이다.

그러나 혁명가의 심리에 대한 일반적인 이론을 두 여성에 그대로 적용하기에는 무리가 따르는 측면도 없지 않다. 그 들은 아버지의 상징적 권위에 대항한 것은 틀림없지만 아버 지의 위치에 오를 수 있는 입장도 아니었고 그럴 생각도 없 었기 때문이다. 그들이 바란 것은 아버지의 권위와 존재를 재해석하는 동시에 모성적 권위의 회복에 있었다. 특히 골드 만의 경우, 아버지의 압제에 굴복한 어머니에 대한 연민과 실망감, 그리고 분노와 그리움 등 복잡한 양가적 감정이 그 녀로 하여금 거리로 뛰쳐나가 이 세상의 수많은 어머니와 아 버지들을 향해 소리높여 외치도록 만든 것이다. 엠마와 로자 는 한결같이 외쳤다. 불합리와 불공정, 부당한 폭압과 부조 리한 세상의 변혁에 대해서 말이다. 그것은 일종의 피해의식 에서 나온 것이기도 하지만 그녀들은 자신들의 실제 삶에서 도 뼈저리게 실감한 문제이기도 하였다. 그들은 이 세상을 바꾸려 하였다. 그러나 그들이 선택한 방법론은 분명 달랐

다. 골드만의 무정부주의는 사회의 근간을 이루는 가족마저 도 해체시키려는 시도였다. 모든 권위주의적 지배를 부정하 는 극단적인 입장을 취했던 것이다. 그것은 가족에 대한 증 오심의 표현으로 골드만 자신의 불행했던 아동기 경험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반면에 로자는 중도적인 위치에서 사 회주의 혁명을 꿈꾸었다. 가족의 중요성을 인정하면서 공 동체 구성원들간의 정서적 유대감을 강조하였기 때문이다.

그녀의 낙관주의는 매우 안정적인 모자관계의 경험에서 비 롯된 것으로 보인다. 반면에 골드만의 경우에는 극도의 염세 주의에 기초한 반동형성으로서의 낙관주의로 보인다. 혁명의 길을 걸었던 두 여성의 심리적 토대가 그만큼 달랐다는 사 실을 알 수 있다.

맺 음 말

골드만과 룩셈부르크는 부당한 권력과 체제의 억압에 과

감히 대항해 싸웠던 여성들이었다. 그들이 보인 투쟁은 단

지 자신들의 권익을 위해 남성들의 권위에 대항하는 오늘

날의 페미니스트들과는 그 차원이 다른 철저한 사상 투쟁

이었다. 그들의 투쟁은 모든 권위 체제에 대한 도전이었기

에 혹독한 탄압과 희생을 감수해야만 했다. 체포와 구금 등

도 각오한 필사적인 싸움이었다. 그러나 오늘날에 이르러

룩셈부르크를 기억하는 사람들은 많아도 골드만의 존재를

아는 사람은 그리 흔치 않다. 그 이유는 많겠지만 사회주의

가 철저히 봉쇄된 미국에서 활동했기 때문일 수도 있다. 상

대적으로 유럽에서는 사회주의 좌파 전통이 결코 낯설지 않

다. 두 여성은 모두 유대인 출신이었기에 사회적 불평등과

부조리에 누구보다 일찍 눈뜰 수 있었으며 동시에 유대인

이었기에 가혹한 박해와 수모를 당해야 했다. 그들은 모두

어린 소녀 시절부터 마르크스주의와 아나키즘에 빠지는 조

숙함을 보였으나 일생동안 가족을 지녀본 적은 한번도 없었

다. 자신들의 성적, 물질적 만족과는 담을 쌓고 오로지 이념

추구의 험난한 여정을 선택했던 이들 비운의 여성은 오늘

날에 와서는 여성 해방론자들의 우상이 되고는 있으나 그들

과 같은 길을 가라고 했을 때, 선뜻 나설 여성들이 과연 몇

이나 될런지 의문이다. 본고는 여성심리에 대한 일반론을

말하고자 한 것이 아니다. 그러나 극단적인 형태로 나타난

두 여성의 행동 이면에 놓인 심리적 동기를 논하면서 불가

피하게 여성심리를 언급하지 않을 수는 없겠지만 성급한

일반화의 우를 범하고 싶지는 않다. 다만 평범하지 않은 두

명석한 여성들의 비극적인 삶의 동기에 관심을 기울일 뿐

이다. 그런 관점에서 엠마 골드만과 로자 룩셈부르크는 권

력의 희생양들이며 가부장적 사회의 모순을 극명하게 드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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낸 심각한 부작용의 징표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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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엠마’와‘피의 로자’에 대한 분석적 논평(分析的 論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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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STRACT

Psychoanalytic Note on Red Emma and Bloody Rosa

Byung-Wook Lee, M.D

Red Emma and Bloody Rosa were the humiliating nicknames of Emma Goldman and Rosa Luxemburg, respec- tively. Goldman was a notorious anarchist in America, and Luxemburg was a unique revolutionary Marxist in Germany. Both were Jewish women born in Lithuania and Poland, respectively, under the Russian Czar’s oppression.

As students they became involved in Marxism and anarchism, and later left their homes to go to America and Switzerland separately.

Nowadays many feminists and women’s rights activists idolize both women, but both have been misunderstood by many people, both on the left and the right. This paper studies the psychological motivations and underlying conflicts in their extreme activities and their tragic life histories. My concern is not their ideological and political positions, but rather their psychological positions and inner lives. They were both very male-competetive, masculine, aggressive, hostile, provocative, sadistic, and inflexible socialist revolutionaries. They denied paternal authortarianism, and st- ruggled to destroy male-chauvinism. But they were very ambivalent to motherhood and heterosexual relationships, and they underestimated the value of family. As a result, they castrated and removed themselves from the Christian paradise.

KEY WORDS

: Goldman·Luxemburg·Marxism·Psychology.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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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st part:Residents and psychologists in the Department of Psychiatry, Seoul National University Hospital participated in the group discussion, focusing on the group’s impressi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