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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SEP Original Article 精 神 分 析 :第 15 卷 第 2 號 2 0 0 4
J Korean Psychoanalytic Society Vol.15, No. 2, Page 228~238, 2 0 0 4
사도세자(思悼世子)의 죽음에 대한 분석적(分析的) 고찰(考察)
李 炳 郁
*Psychoanalytic Note on the Death of Prince Sado
Byung-Wook Lee, M.D.*머 리 말
조선왕조 5백년의 역사에서 사도세자의 죽음만큼 수수께 끼에 쌓인 사건도 없을 것이다. 그것도 부왕인 영조에 의해 저질러진 사건이었기에 더욱 의문에 쌓일 수 밖에 없다. 자 신의 아들을 그토록 잔혹한 방법을 동원하여 죽음으로 몰 아넣을 정도로 왕의 정신상태가 비정상이었는지 아니면 세 자의 행동에 문제가 있었던 것인지 명확치 않은 상태로 오 로지 혜경궁 홍씨의 [한중록]에 의거한 주장들만 제기되어 왔다. 물론 조선왕조는 창건 초창기부터 부왕과 왕자들 사 이에 숱한 갈등과 반목을 보여 온 것이 역사적 사실임에는 틀림없다. 그러나 영조와 사도세자 간에 빚어진 갈등과 대 립은 매우 이례적이며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들 도 많은 것이 사실이다. 더욱이 백성들의 귀감이 되어야할 왕가에서 벌어진 부자지간의 살인행위였기에 더욱 충격적인 사건일 수밖에 없다. 그토록 큰 기대를 걸었던 영특한 맏아 들을 영조는 무슨 이유로 갑자기 뒤주에 가두어 죽도록 방 치하였는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거의 10일간의 여유가 있 었는데도 불구하고 영조는 끝내 자신의 명을 철회하지 않았 다. 비록 세자의 사후에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사도(思悼) 라는 시호를 내려 죽은 혼을 달래고자 했지만 이미 때는 늦 고 말았다. 저자는 영조와 사도세자, 부자지간에 빚어진 갈 등과 불화의 원인을 알아보고 정신역동적 차원에서 뒤주사 건의 심리적 배경을 탐색해보고자 하였다.
왕가(王家)의 내력(來歷)
사도세자의 죽음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를 중심으로한 왕
가의 내력을 우선 이해해야 될 것이다. 우선 1623년 인조 반정(仁祖反正) 이후 이어진 삼종 혈맥을 둘러싼 왕위 계 승 문제가 치열한 당파싸움을 불러일으키는 계기가 되었기 때문이다. 삼종이란 효종(孝宗), 현종(顯宗), 숙종(肅宗)을 말한다. 삼종이 거론되는 이유는 왕권의 정당성에 대한 의 구심에서 비롯된 것이기도 하다. 인조의 맏아들 소현세자 (昭顯世子)는 당연히 왕권을 이어받을 위치에 있었다. 그러 나 인조(仁祖)는 소현세자를 독살하고 그 부인마저 죽이고 말았다. 그리고 대신 차남 봉림대군(鳳林大君)을 세자로 책 봉했다. 봉림대군은 그후 17대 효종이 되었다. 효종은 딸 을 일곱이나 두었으나 아들은 단 한 명뿐이었다. 그가 커서 18대 현종이 되었지만 이때부터 유난히 왕손을 이을 아들 이 귀한 현상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현종 또한 아들을 하나 만 두었는데 그가 19대 숙종이다. 숙종은 인현왕후(仁顯王 后)에게서 후손을 얻지 못하자 희빈 장씨와의 사이에서 아 들을 얻어 그가 후에 20대 경종이 되었다. 그러나 희빈 장 씨는 종묘사직을 능멸하는 불온한 행위로 인하여 사약을 받 고 죽임을 당했으며 그나마 경종은 단명으로 세상을 떠나 고 말았다. 그리하여 숙빈 최씨에게서 얻은 아들이 후에 21 대 영조가 되었던 것이다. 영조는 30세에 비로소 왕위에 오를 수 있었지만 무려 52년간이나 옥좌를 지켰던 인물이 다. 영조는 영빈 이씨에게서 아들을 얻었는데 그가 바로 사 도세자다. 따라서 숙빈 최씨는 사도세자의 조모가 되는 셈 이다. 사도세자는 혜빈 홍씨와 혼인하여 아들을 얻었는데 그 가 후에 22대 정조가 되었으며 정조는 수빈 박씨와의 사이 에서 아들을 얻어 그가 23대 순조(純祖)가 되었다.
정치적(政治的) 배경(背景)
영조(英祖 1694~1776)는 노론(老論)이 선택한 왕이었 다. 비록 그는 노론의 뒷받침에 힘입어 겨우 왕위에 오를 수
*翰林大學校 醫科大學 精神科學敎室
Department of Psychiatry, Hallym University College of Medi- cine, Seoul, Kor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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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었지만 장희빈의 아들로 왕에 오른 경종(景宗)에 대한 독
살설에서 결코 자유롭지 못한 처지였다. 소론 강경파들은 영 조를 견제하기 위해 온갖 노력을 다 기울였던 것이다.
노론과 소론 어느 쪽에도 특별한 이해관계를 갖고 있지 않던 사도세자 입장에서는 자신의 부왕과 노론이 경종에 대 해 저지른 행위는 분명 역모에 해당되는 것이었다. 당연히 그는 노론의 독주에 대해 불만을 가질 수밖에 없었을 것이 다. 영조의 탕평책은 이미 한계를 보이고 있었다. 결국 그 의 탕평책(蕩平策)은 영조 31년 나주벽서사건을 계기로 영 조와 노론은 함께 동조하여 소론 세력을 완전 제거하고자 했다. 그리고 [천의소감(闡義昭鑑)]이란 책자를 통하여 경 종독살설을 포함한 자신과 노론의 연루설 등 모든 의혹을 일축하는 조치를 취하였다. 이러한 사건의 와중에서 사도 세자는 소론에 대해 매우 동정적인 입장을 취하여 노론의 반발을 크게 사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철저한 노론파에 속 하는 부인 혜빈 홍씨를 비롯한 외척들, 영조의 계비 정순왕 후와 후궁 문씨 등이 세자를 비난하고 나섰다. 사도세자는 그야말로 사면초가의 입장에 놓이게 되었다. 따라서 궁지 에 몰린 세자는 병을 위장하는 전술로 자신을 보호하려 했 다. 그러면서도 세자는 은밀히 소론과 결탁하는 자구책을 통하여 곤경에서 헤어나 보고자 몰래 관서행을 강행하는 결 정적인 실수를 저지르고 말았다. 결정적인 사건은 나경언의 고변으로 제기된 군사력 동원의 문제였다. 그것은 개인적 비행의 문제가 아니라 역모에 해당하는 실로 중대한 내용 이었다. 이덕일(2001)은 이러한 정치적 배경이 사도세자 의 죽음에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던 것으로 평가하고 세자 가 뒤주 속에 갇혔던 여드레 동안의 숨가쁜 과정을 상세히 기술하였다. 이처럼 나경언의 고변은 세자에게 결정타를 가 하였다. 원래 나경언은 정순왕후의 아버지인 김한구의 일파 에 속하는 윤급의 종으로서 세자를 폐위시켜 몰아내고자 하 는 노론세력들의 사주에 의해 세자의 비행을 낱낱이 폭로 한 것이었다. 이에 대노한 영조는 나경언을 참수시키고 세 자에게 자결을 명령하였으나 말을 듣지않자 그러면 뒤주 속 에 가두어 죽이라는 어명을 내렸다. 세자는 여드레 동안 신 음하다 숨을 거두고 말았다. 영조는 비록 노여움 끝에 맏아 들의 세자책봉을 폐하고 서인으로 만든 뒤 참살하고 말았 지만 후에 자신의 행동을 후회하고 사도(思悼)라는 시호를 내리기도 했다.
임오화변(壬午禍變)의 기록(紀錄)
사도세자(1735~1762)의 부인 혜경궁 홍씨(1735~1815) 가 남긴 한중록(閑中錄)은 사도세자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의 과정이 소상히 적혀있으나 그녀는 당시 막강한 실세로 권력을 독차지하고 있던 노론파 수장인 홍봉한의 딸이라는 점에서 기록의 공정성이 의심되기도 한다. 그녀는 영조의 성 격적 결함과 세자가 보인 광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라고 주 장하지만 병 때문이었다면 어의들에 맡겨 치료를 할 일이 지 뒤주 속에 가두어 죽일 일은 아닐 것이다. 뒤주사건은 1762년 영조 38년에 있은 일이다. 그리고 [한중록]이 쓰 여진 시기는 1805년 순조 5년 이후로 알려져 있다. 거의 40여년이 지난 후에 쓰여진 기록이다. 다시 말해서 20대에 청상과부가 된 사건 당시에 쓰여진 것이 아니라 70대 말년 에 기록된 다분히 정치적 의도에 따른 것으로 보인다. 왜냐 하면 자신의 아들인 정조가 즉위하면서부터 그녀의 친정은 몰락의 길을 걷기 시작했기 때문에 홍씨 입장에서는 친정 가문의 복권이 가장 큰 임무였던 것이다. 정조는 자신의 아 버지 사도세자를 죽게 한 노론에 대하여 큰 불만을 지니고 있었으며 실제로 홍씨의 오빠 홍낙임은 정조를 축출하려는 역모를 꾀하기도 했다. 정조가 죽고 그녀의 손자 순조가 즉 위하자 홍씨는 [한중록]을 남겨 자신의 가문의 복권을 다 시 일으키고자 한 것이다. 그녀는 60세에 한중록 1편을 쓰 기 시작했으나 사도세자에 대한 언급은 전혀 하지 않다가 71세에 쓴 4편에 가서 비로소 사도세자 죽음의 진상에 대 해 말하기 시작했다. 여기서 그녀는 증언하기를, 사랑하던 화평옹주의 죽음으로 상심한 영조가 세자에 대한 관심이 줄 어들고 15세의 어린 세자에게 국정을 맡기며 일선에서 물 러나자 세자는 더욱 공부에 태만해지고 무예와 풍류에만 빠 져 방탕해지기 시작했으며 급기야는 궁녀를 죽이는 살인까 지 저지르고 말았다. 부왕에 대한 두려움이 매우 컸던 세자 는 여승을 궁 안으로 불러들이는 등 더욱 방탕한 생활로 자 신의 괴로움을 잊으려 했으나 그의 비행을 낱낱이 고발한 나경언의 고변으로 결국 뒤주에 갇혀 죽게 되었다는 것이 다. 또한 그러한 조치는 전적으로 영조 개인의 발상에서 나 온 것이지 그녀의 친정 아버지였던 홍봉한은 아무런 책임 도 없다는 주장을 내세웠다.
[한중록]에서 밝힌 사실은 다음과 같다. 사도세자의 어머
니 선희궁이 영조에게 나아가 울면서 고하되, 세자의 병이
깊어서 그리된 일이니 왕의 옥체를 보존하고 세손을 구하여
종사를 평안케 하기 위해서는 큰 결단을 내리심이 옳은 일
이나 처분을 내리시되 세손 모자의 신변만은 보존시켜 달
라는 요청이었다. 영조가 이 말을 듣고 즉각 명을 내려 동
궁을 불러들이라 하였다. 혜경궁 홍씨가 뒤주를 준비하는 내
관의 모습을 보고 혼절하며 영조에게 달려가 아비를 살려
달라 애원했으나 영조는 칼을 품에 안은 채 계속 바닥을
내리치며 나가라고 호령했다. 사도세자는 부왕에게 백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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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하는 말씀을 올렸으나 어명을 거역치 못하고 뒤주 안으 로 들어갔다. 당시 홍씨 자신도 자결하려 했으나 세손을 생 각하여 참았다고 말한다. 그리고 영조의 대처분을 건의한 선 희궁도 비록 대의를 위한 것이었지만 아들의 죽음을 눈앞 에 두고 혼절하여 몸져 누우니 며느리 입장에서는 원통하 기만 할뿐이었다고 회고한다. 그리고 사도세자는 부인이 보 기에도 이상할 정도로 평소와 같은 두려움의 기색을 전혀 보이지 않은 상태로 덤덤하게 부왕에게 나아가 어명에 따 르면서 뒤주 안에 들어갔으며 처음에는 다시 뛰어나오려 했 으나 체념한 상태로 자신에게 주어진 운명을 받아들였다고 전한다.“당신의 용력과 장기로 궤에 들어가라 하신들 아무 쪼록 들어가지 마실 일이지, 어찌하여 들어 가셨는가. 처음 엔 뛰어나오려 하시다가 이기지 못하여 그 지경에 이르시 니 하늘이 어찌 이토록 하였는가. 만고에 없는 설움이며 내 가 문 밑에서 통곡하여도 소용이 없었다.” 고 기록하고 있다.
사도세자가 뒤주 속에 갇혀 죽은 1762년 5월 11일부터 21일까지의 과정은 이광현이 기록한 임오일기(壬午日記)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이 기록은 이조실록이나 한중록 등 과는 달리 정치적 색채가 비교적 적기 때문에 상당히 객관 적인 태도로 사실을 기록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당쟁(黨爭)의 역사(歷史)
효종의 북벌정책은 송시열을 위시한 서인을 등용하여 추 진되었던 사업이었다. 서인들은 이 때에 정치, 군사력을 장 악했다. 현종에 이르러 지나치게 강해진 서인을 견제하기 위한 수단으로 남인들이 등용되어 예송(禮訟)논쟁을 불러 일으켰다. 이 논쟁은 결국 인조의 차남으로 왕위에 오른 효 종의 왕위 계승 정통성에 대한 논쟁이기도 했다. 인조의 장 남이자 효종의 형이었던 소현세자는 억울하게 죽임을 당했 기 때문이다. 숙종에 이르러 남인은 축출되고 서인들이 집 권했으나 남인에 대한 처벌 문제로 자중지란을 일으킨 끝 에 노론 강경파와 소론 온건파로 분열되고 말았다. 1689년 장희빈 소생의 세자 책봉에 노론이 반대하자 남인이 다시 집권했다가 1694년 장희빈과 남인 세력이 축출되고 다시 노론이 집권했다. 이때 소론이 장희빈 소생의 세자를 보호 함으로써 노론과 소론의 대립이 본격화 되었다. 장희빈의 소 생이 세자에 책봉되자 소론이 득세했다. 그러나 경종이 병 약하여 건강이 좋지 못하자 노론은 숙빈 최씨의 소생 연잉 군을 옹립하려다가 축출당하고 말았다. 경종이 일찍 죽고 숙 빈 최씨의 소생이 결국 왕위에 올라 영조가 되었다. 영조는 탕평책을 통하여 붕당정치에 쐐기를 박으려 했으나 소론과
남인의 급진파가 노론 타도를 목적으로 일으킨 이인좌의 난 이 진압된 후 노론이 다시 집권했다. 사도세자는 매우 개혁 적인 인물로 노론은 그에 대해 경계심을 지니게 되었으며 그러한 위기의식 때문에 세자를 제거하게 되었다. 사도세자 가 죽은 후 조정은 또 다시 시파와 벽파로 갈라섰다. 시파 는 세자의 죽음을 동정하는 남인, 소론 그리고 일부 노론이 포함되고 벽파는 세자의 죽음이 당연하다는 다수의 노론파 가 해당된다. 정조가 즉위하자 그는 벽파를 견제하고 시파 를 등용하며 왕권 강화를 꾀했다. 그러나 정조의 갑작스런 죽음은 그 후 외척의 세도정치를 불러왔으며 안동 김씨 및 풍양 조씨 등 족벌정치의 해악이 커지면서 조선왕조는 서 서히 붕괴의 조짐을 보이기 시작했다.
심리적(心理的) 배경(背景)
임오화변은 1762년 5월에 일어났다. 당시 영조의 나이 68세요, 세자의 나이는 27세였다.
세자가 죽은 후에도 영조는 82세까지 장수하였으며 혜경 궁 홍씨도 80세까지 살았다. 심리학적 개념이 없던 시절에 있었던 사건의 진상과 그에 관한 기록을 통하여 심리적 갈 등문제를 탐색한다는 사실 자체가 무리한 작업임에는 틀림 없다. 그러나 5백년 조선왕조의 역사를 통하여 가장 충격 적인 사건에 들어간다고 할 수 있는 임오화변은 복잡다단 한 시대적 정치적 배경뿐 아니라 사건 당사자들간의 미묘 한 심리적 갈등과 마찰의 표출이라는 점에서 주목을 끌만 하다. 특히 영조의 심리상태와 세자의 정신 상태에 대해 주 목할 필요가 있다. 조선왕조는 그 출발부터 태조 이성계와 그 아들들 사이에 치열한 대립과 반목을 보인 것이 특징이 다. 소위 왕자들의 난은 아버지에 대한 노골적인 반발이었 다. 뒤를 이은 숱한 당쟁과 사화를 통하여 왕가 내에서 이 루어진 음모와 암투, 참살과 모반의 역사는 끝이 없었다. 인 조반정에서 시작된 왕권에 대한 정통성 시비는 그 후에 이 어진 효종, 숙종, 경종, 영조, 정조에 이르기까지 온갖 독살 설 시비와 더불어 치열한 당쟁의 불씨를 남기기에 충분했 다. 그러한 맥락에서 조선왕조 역사상 가장 큰 업적이 이루 어진 시기중의 하나로 손꼽히는 영정조 시대는 매우 아쉬 움이 크게 남는 시기로 기억될 수도 있다. 사도세자의 죽음 이 없었다면 그의 개혁정신은 크게 국력을 신장시켰을 수 도 있었을 것이며 동시에 정조도 의문의 죽음을 당하지 않 고 과감한 개혁정책을 추진해 나갔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영조와 세자간에 빚어진 갈등과 불화는 국익
에 큰 손해를 끼쳤던 사건으로 치부될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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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부자갈등(父子葛藤)
영조는 왕위를 물려줄 마땅한 후손이 없어 애를 태우다 40세가 넘은 늦은 나이에 귀한 아들을 얻어 대단히 기뻐하 였다. 영조는 즉각 세자로 봉하고 10세에 홍봉한의 딸 혜 경궁 홍씨와 혼인을 시켰다. 사도세자는 어려서부터 매우 영 특하여 3세때 [효경]을 읽고 [소학]을 떼었다. 1749년 영 조 대신 세자가 대리청정을 하였는데 부자간에 불화관계가 깊어진 것은 1752년 신하들이 병석에 누운 영조에게 세자 로 하여금 약을 권하도록 종용했으나 세자가 이를 거절하 자 더욱 표면화되기 시작했다. 세자의 입장에서는 영조가 약 을 물리치는 것이 자신의 허물 때문에 그런 것이라고 하여 자신은 면목이 없어 그럴 수 없다고 한 것인데 이러한 세자 의 태도가 영조를 노하게 만들었다. [한중록]에 보면 이들 부자간 갈등의 골이 깊어지기 시작한 모습을 자세히 묘사하 고 있다. 영조 32년 5월 당시 궁궐에 금주령이 내려진 때 인지라 세자의 옷차림이 흐트러져 단정치 못함을 보고 영조 는 세자가 술을 마셨나 의심하고 대노하여 세자를 뜰에 세 워놓고 술 먹은 일을 엄문하였는데 실제로 술 마신 일이 없 음에도 불구하고 너무 두려워서 감히 변명을 하지 못하는 성 품인지라 왕이 엄히 다그치는 바람에 하는 수 없이“먹었 나이다.”대답하니, 왕은 누가 술을 주었는가를 따졌다. 세 자는 마땅히 댈 데가 없는지라 엉뚱하게 주방 나인이 주었 다고 둘러대었다. 이때 보모 최상궁이 나서서“술 잡수셨다 는 말씀은 억울하오니 술내가 나는가 맡아 보소서.” 라고 아 뢰니 세자가 오히려 최상궁을 꾸짖으며 나서지 말라고 주 의를 주었다. 영조는 더욱 격노해서 감히 왕 앞에서 상궁을 꾸짖는 행위를 힐난하고 술을 준 나인을 멀리 귀양 보내라 하였다. 나중에 세자는 억울함에 못이겨 화증을 내면서 아 래 시종들에게 화풀이하는 가운데 촛대가 넘어져 불이 붙 었다. 이 화재사건으로 영조는 세자가 고의로 불을 지른 것 으로 알고 더욱 격노하여 모든 신하를 불러 모은 자리에서 세자에게 호령하였다.“네가 불한당이냐? 불은 왜 지르느 냐?”세자는 그 자리에서도 변명은 않고 스스로 방화를 한 듯이 말하니 부인 홍씨가 보기에도 답답했다고 하였다. 그 일로 울화가 치밀어 오른 세자는“아무래도 못살겠다.”하 면서 앞 뜰의 우물로 뛰어들려고까지 하여 주위사람들을 놀 라게 했다는 것이다. 또한 세자는 국정을 맡으면서 여러 개 혁적인 정책을 펴나갔는데 특히 영조의 왕권 계승의 정당 성에 관련된 민감한 사항에 대해 세자가 선대 왕인 경종을 동정하는 입장을 보이기 시작하자 이에 반대하는 노론과 그 들에게 동조한 정순왕후, 숙의 문씨 등이 영조에게 계속 세 자를 무고하는 발언을 하였으며 영조는 수시로 세자를 불 러 크게 꾸짖었는데 이로 인해 세자는 격간도동(膈間挑動)
이라는 정신질환에 걸리게 되었다. 격간도동이라함은 일종
의 발작 증세를 동반한 광기를 일컫는 것이지만 세자가 실
제로 그러한 정신병 상태였는지는 정확히 알 수가 없다. 그
러나 세자 자신의 변명에 의하면 자기의 화증(火症) 때문
에 빚어진 실수였다고 분명히 말했다. 화증이라면 부정적
감정 상태를 제대로 조절하지 못하여 생긴 결과라 할 수
있다. 金烈圭(2004)는 한국인 특유의 화에 대한 다양한
예들을 제시하였지만 세자의 병이 본인의 주장대로 화증이
었다면 그것은 오늘날의 기준에 따른다면 신경증에 해당되
는 것으로 적절한 약물치료와 정신치료로 회복이 가능한 상
태이기도 하다. 그러나 혜경궁 홍씨의 증언에 의하면, 평소
에도 세자가 소리에 민감하여 놀라기를 잘했으며 특히 뇌
성을 두려워했다고 전한다. 또한 때로는 물에 빠지기도 하
고 수시로 무명옷을 걸친 채 칼을 꽂아 만든 상장(喪杖)같
은 것을 가지고 다니기도 하여 부인이 보기에도 끔찍하고
놀란 적이 한 두 번이 아니라고 하였다. 또한 세자는 한 가
지 옷을 선택하지 못하고 무수히 많은 옷가지를 갈아입는
의대병환(衣帶病患)이라는 기묘한 증세를 보여 수십 벌의
옷을 마련하는 것도 매우 힘들었으며 마음에 드는 옷가지
를 준비하지 못하면 죽어나가는 내관 나인들도 부지기수라
하였다. 장님들을 불러다가 점을 치다가 그들이 말을 잘못
하면 가차 없이 죽이고, 기타 의관, 역관 등을 포함하여 하
루에도 시체를 대궐 밖으로 여러 명 쳐내는 일이 빈발하자
모두들 언제 죽을지 몰라 벌벌 떠는 일이 생긴 것이다. 그
뿐 아니라 세자는 갑자기 모르는 사람이 보인다고 하는가
하면 외출 시 바깥 동정을 살피다가 옷을 바꿔 입기도 하
고 비단 군복을 여러 벌 불에 태우기도 했다. 홍씨가 묘사
하는 세자의 증세는 환각증세 및 피해망상증에 가까운 것
이다. 울화가 치밀면 아무데서나 상말을 내뱉고 나이 70인
어머니 앞에서도 공손치 못한 말을 서슴치 않는 등 세자의
행태가 날로 극심해짐을 통탄하였다. 또한 여승을 포함한 시
녀들, 기생들을 불러 모아 잔치를 벌이며 한데 엉키어 노는
등 잡된 행각을 보이기도 하였다. 세자의 기묘한 행각은 이
에 그치지 않고 자신의 거처를 마치 빈소처럼 차려놓고 상
여 앞에 들고 가는 깃발 비슷한 명정(銘旌) 같은 것을 세
워 시체를 염한 뒤에 안치하는 형상처럼 만들어 놓은 곳에
서 잠을 자기도 했다. 이처럼 부인 홍씨는 자신의 남편을
정신병적 광인의 모습으로 묘사하고 있다. 이러한 세자의
모습을 목격한 영조는“네가 나를 없이 하고자 한들 어찌 생
무명 거상옷을 입었느냐.” 면서 불효로 간주하여 대노했다는
것이다. 세자의 행동은 분명 지나친 것임에 틀림없다. 상복
처럼 옷을 입고 돌아다닌 것은 아버지의 죽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그 자신의 부친살해 욕구를 드러낸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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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조가 세자에 대해 거의 피해 망상적 수준의 편집증을 보 일 수밖에 없는 도발적인 행동을 세자 스스로가 보여준 셈 이 된다. 또한 아버지의 도덕적 정당성에 아들이 의문을 지 닌다는 것은 도저히 용납될 수 없는 문제이기도 했다. 그것 은 아버지라는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영조는 어린 나이에 이미 끔찍한 궁궐내 암투에 휘말린 존 재였다. 어머니 숙빈 최씨와 희빈 장씨 사이에 벌어진 치열 한 암투와 반목은 노론과 소론이라는 정치적 배경을 등에 업은 싸움이기도 했지만 자신들의 아들에게 왕위를 계승시 키고자 하는 개인적 야심의 발로이기도 했다. 그 와중에 숙 빈 최씨와 그녀의 소생들이 겪은 수모와 심적 상처는 매우 컸던 것으로 보인다. 희빈 장씨의 세도와 오만이 극에 달했 을 때 인형왕후뿐 아니라 숙빈 최씨 일가의 운명도 풍전등 화와도 같은 위기에 몰리고 있었다. 더군다나 경종 독살설 의 소문은 그에 연루된 것으로 알려진 영조에게는 평생을 통하여 물리치기 어려운 아킬레스건이 되었다. 그러한 영 조의 가장 위험한 아킬레스건을 아들인 사도세자가 감히 건드린 셈이었다. 그것은 아버지에 대한 도전이요 복수였 던 것이다. 사도세자에게는 아버지에 대한 두려움과 적개 심이 동시에 존재했다. 그리고 자신의 의지와 관계없이 아 버지의 명으로 이루어진 강요된 혼인도 그에게는 불만이었 다. 당연히 세자비인 혜경궁 홍씨와의 관계도 원만할 수가 없었다. 불과 10세의 어린 나이에 혼인하고 15세라는 한 창 사춘기 나이에 아버지 대신 국정을 떠맡게 되었으니 아 무리 명석하고 총명한 세자라 해도 자신의 개인적 욕망을 억누르고 성인의 역할을 대행한다는 사실에 상당한 심적 부담이 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아버지에 대한 불만과 적개 심을 속이고 병석에 누운 아버지에게 약재를 올리라는 신 하들의 간청을 과감히 물리친 것은 자신을 기만하는 행위 에 대한 강력한 반발이었다.
영조는 아버지 숙종에 대해서 양가적인 감정을 지니고 있 었다. 자신보다 경종을 더욱 총애했기 때문이다. 이복형제 이기는 했지만 경종에 대한 질투심은 영조의 마음을 괴롭 힌 부분이기도 하다. 경종의 요절은 영조에게는 희소식이 아 닐 수 없었지만 자신에게 돌아온 온갖 억측과 의혹의 눈에 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었다. 왜냐하면 의관의 강력한 반대 를 물리치고 서로 상극인 음식을 경종에게 올려 먹게 하였 으며 그 후 곧바로 경종이 죽었기 때문이다. 경종은 생전에 자신의 이복동생인 영조가 노론의 역모 사실에 연루된 사실 을 알고도 그를 살려주었다. 그러나 노론 세력의 도움으로 그는 왕위에 오를 수 있었기 때문에 노골적으로 소론을 견 제했다. 사도세자 역시 아버지 영조에 대해서 양가적이었 다. 그가 영조의 반대파인 소론과 손잡으려 했던 것은 아버
지에 대한 복수요 도전이기도 했다. 사도세자는 자신의 무 덤을 스스로 파고 있었던 셈이다. 그가 지닌 거세공포는 극 에 달했다. 노한 영조의 계속되는 꾸지람은 그러한 거세공 포를 더욱 극대화시켰다. 세자가 보인 불안발작은 거의 공 황수준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Fenichel(1954)은 공 포를 극복하기 위한 방법으로 오히려 공포를 조장하는 상 황을 의도적으로 추구하는 역설적인 태도에 대해 말하였는 데 세자 역시 감당할 수 없는 불안과 두려움을 떨치기 위 한 자구책으로 아버지의 권위를 부정하고 무너뜨리기 위한 역모를 꾀했을 수도 있다. 영조가 아들의 정신 상태를 병으 로 이해했다면 당연히 요양을 시키거나 치료를 도모했을 것 이지만 죽이기로 작정까지 한 배경에는 소론과 손잡고 군사 력까지 동원할 기미를 감지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이덕일 (2001)은 어머니 영빈 이씨가 그러한 기밀을 영조에게 밀 고한 배경도 그런 차원에서 이해하였다.
한중록(惠慶宮 洪氏 2002)에 보면 아들의 행태에 격노한
영조가 칼을 곁에 두고 계속해서 바닥을 두드리는 장면이
나온다. 칼로서 세자를 겁주는 아버지의 행동은 아들의 거
세공포를 더욱 조장하는 모습임에 틀림없다. 아버지는 아
들이 자결하도록 명했지만 세자는 자결하지 않았다. 스스로
거세하도록 명한 것이다. 아버지의 명을 거역하자 영조는 뒤
주 안에 가둘 것을 명했다. 아들이 아버지의 권위를 정 거
부한다면 어머니의 자궁 속에 넣어주겠다는 매우 가학적인
조치였다. 결국 아들은 어머니 자궁 속에서 굶어 죽은 셈이
다. 영조는 친히 뒤주의 뚜껑을 닫고 자물쇠를 채웠으며 큰
못을 박아 동아줄로 꽁꽁 묶을 것을 명했다. 이렇게 해서
영조는 아들에 대한 배신감뿐 아니라 자신의 은밀한 업보,
다시 말해서 원망스런 어머니 자궁에 대한 복수를 일괄적
으로 한데 처리한 셈이다. [한중록]에 의하면, 세자는 평소
에도 땅을 파서 그 안에 세 칸짜리 집을 지어 뚜껑을 덮고
문을 내어 드나들며 그 속에 옥등을 켜 달고 앉아있는 수
가 많았으며 무기와 말을 그 안에 감추고 있는 등 기묘한
행동을 보였다고 전한다. 이덕일(2001)은 이러한 세자의 행
동 배경을 정치적 위기에 몰린 세자가 취했던 일종의 자구
책으로 보았지만 자구책치고는 매우 비현실적이며 기괴한
방법임에는 틀림이 없다. 오히려 엄습하는 거세공포를 감
당하기 어려운 나머지 가장 안전한 어머니 자궁을 상징하
는 토굴 속에 몸을 숨긴 것이 아닌가 여겨진다. 다가올지도
모르는 거세위협에 대항하기 위한 목적으로 무기도 함께 숨
겼을 수도 있다. 아버지와 아들 두 사람 모두 상대방을 향
해 각기 피해적 사고를 지니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
한 세자의 심리를 파악한 영조도 자발적인 거세 명령을 아
들이 거부하자 평소에 세자가 보였던 기괴한 방식을 좇아
李 炳 郁
233
궤짝 안에 가둔 것으로 복수한 것이다.
Ferenczi(1968)는 인간의 원초적인 욕망 가운데 하나로 어머니 자궁으로 회귀하고자 하는 욕망이 존재함을 말하였 다. 그러한 무의식적 소망은 인간 생활에서 매우 다양한 형 태로 나타나기 마련이며 심지어 부부간에 이루어지는 성생 활을 통해서도 그러한 욕망을 실현시키고자 한다고 주장하 였다. 영조와 세자 간에 이루어진 뒤주 사건의 심리적 이면 에는 이러한 무의식적 소망의 교류가 관여된 것인지도 모 른다. Fromm(1974)은 죽음과 친화적인 네크로필리아의 특 성을 말했지만 죽음을 자초한 세자의 행동은 스스로 무덤 을 파는 행위를 이미 생전에 보여주었다. 땅을 파서 집을 짓는가 하면 그 안에 들어가 혼자 앉아 있기도 하고 죽은 사람을 위한 상장을 들고 다니는 등 그가 보인 행동은 주로 죽음과 관련된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실제로 사람을 죽이 기도 했다. 세자는 분명 삶을 사랑하고 즐기지 못하였으며 타인과의 관계에서도 사랑을 주고받는데 미숙함을 보였다.
Menninger(1985)의 표현처럼 세자의 행동은 일종의 만 성적인 자살로 간주할 수도 있다. 그것은 순간적인 충동에 의한 것이 아니라 자신도 모르게 미리 예비 된 수순에 따 라 스스로 죽음의 길로 나아가게 하는 자기 파멸의 결과를 만들어갔다는 점에서 그렇다는 것이다. 자신의 의지에 반 하여 죽음으로 나아가는 사람은 오랜 기간에 걸쳐 자신의 생명을 해체하는 방향으로 몰고 간다는 사실을 본인 자신도 눈치 채지 못한다는 것이다. 사도세자 역시 자신의 목숨이 위태로워질지도 모르는 위험한 행동을 공개적으로 노출시 키는 모습을 자주 반복했다는 점에서 이러한 설명이 설득 력을 갖는 것이다.
영조가 명한 뒤주는 역설적이게도 세자의 장인 홍봉한의 귀띔으로 마련된 것이었다. [한중록]에서 가장 역점을 둔 부 분도 바로 이 뒤주 사건의 배후에 좌의정 홍봉한은 아무런 관련이 없었음을 밝히는데 있었지만 그것은 사실과 다르다.
영조는 세자로 하여금 자신을 변호할 기회를 전혀 주지 않 았다. 일개 천한 신분의 종이 감히 세자를 상대로 냈던 고 변이 무고임이 밝혀져 그 당사자인 나경언을 이미 처형시 킨 터에 그 배후세력을 밝히기를 거부하고 또한 피해 당사 자인 세자의 변을 들으려고도 하지 않았다는 것은 매우 이 해하기 힘든 대목이다. 영조는 이미 세자를 제거하기로 굳 게 작심한 듯하다. 그리고 영조의 판단을 더욱 흐리게 한 것은 역모라는 단어에 그 자신이 늘 갖고 있던 은밀한 약 점과 과민성에 기인한 것이 아닌가 여겨진다. 자신의 은폐 된 아픈 상처를 세자가 건드렸기 때문일 것으로 추정된다.
세자가 뒤주 안에 갇혀있는 동안 영조는 아들의 비호세력들 을 모조리 색출하고 처벌했다. 그리고 나중에 뒤주 한 부분
에 난 구멍을 통하여 세자의 측근들이 음식과 옷가지를 건 네준다는 밀고를 듣고 영조는 다시 내려와 손수 구멍을 밀 봉하는 행동을 보였다. 그리고는 단호한 음성으로 선언했다.
“세자를 폐하여 서인으로 삼는다.”아들에 대한 영조의 태 도는 잠시나마 이성을 잃었던 것으로 보인다. 70을 바라보 는 나이에 그가 보인 행동은 평소의 그답지 않은 모습이었 다. 영조는 원래 눈물과 정이 유달리 많은 임금으로 알려져 왔기 때문이다. 영조는 세자를 살려달라고 애원하는 신하들 은 모조리 삭탈관직하고 유배를 보내거나 처형시키도록 명 했다. 유일한 예외는 세자의 아들 세손뿐이었다. 당시 10세 의 세손은 아버지 곁에서 떨어지지 않으려 몸부림치며 아 버지를 살려달라 애원했으나 억지로 끌려나갔다. 나중에 정 조가 된 그는 이 사실을 잊지 않고 자신의 아버지를 죽음 으로 몰고간 배후세력들을 모두 극형으로 다스렸다. 사도 세자는 죽음의 현장에서 처음으로 외쳤다.“아버님, 살려주 옵소서.”세자가 왕에 대하여 아버지라고 부른 것은 그가 얼마나 다급한 상황에 처했던 것인지 알 수 있다. 결국 세 자는 뒤주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여드레 동안 그 안에서 버티다 굶어 죽었다.
2) 모자갈등(母子葛藤)
영빈 이씨와 세자의 모자관계는 정확히 알 수가 없다. 대 부분의 기록에도 영빈 이씨의 언행에 대해서는 거의 언급 이 없다. 그러나 뒤늦게 얻은 귀한 아들이라는 점에서 어머 니로서의 자존심은 상당히 컸을 것으로 보인다. 다만 추정 해 볼 수 있는 점은 정치적인 감각이 뛰어난 세자비에 비 해서 시어머니가 되는 영빈 이씨는 매우 소극적인 성격이 아니었나 짐작된다. 그리고 자신의 처신에 매우 조심스런 행 보를 보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선대에 이루어진 영조와 경 종의 미묘한 관계, 그리고 그들을 에워싼 장희빈과 최 숙빈 의 암투, 그녀들의 등뒤에서 엎치락 뒤치락 세력 다툼에 혈 안이 되었던 노론과 소론의 흥망성쇠 등에 대해 잘 알고 있 었을 영빈 이씨는 공개적인 기록에 거의 그 모습을 드러내 지 않았다. 또한 아들에 대한 모정이 부족한 것은 아니었겠 지만 궁궐의 법도 상 솔직한 모성애를 발휘할 기회는 적었 을 것으로 생각된다. 게다가 왕자의 주위에서 시중들던 시 녀들의 대다수는 경종을 모시던 인물들이었다. 어린 세자에 게 그들은 영조의 부정적인 측면을 계속해서 부각시켰다.
세자의 입장에서 적절한 모성애를 만끽할 기회는 매우
적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Mahler(1975)는 어머니와 아기
의 심리적인 분리과정에서 형성되는 개별화의 중요성에 대
해 강조하였다. 그 과정에서 아기는 대상 항상성을 획득하
게 되는 것인데 이러한 분리개별화 단계에 문제가 생길 경
사도세자(思悼世子)의 죽음에 대한 분석적(分析的) 고찰(考察)
234
우, 아기는 매우 불안정한 심리적 토대 위에서 성장하게 됨 으로써 향후 상당한 인격적 결함을 보이게 된다고 하였다.
정상적인 모자관계를 겪지 못했던 세자로서는 그러한 대상 항상성의 획득에 실패한 것일 수도 있다. 사도세자가 보인 매우 불안정한 행동을 보면 분리개별화 단계에서 파생된 분 리불안과 애정 결핍을 시사 하는 대목이 엿보이기도 한다.
유아기적 욕구의 좌절은 상당한 분노 및 적개심을 억압하는 데 어려움이 있었을 것으로 보이기도 한다. 궁녀를 살해했 다거나 여승을 궁으로 불러들이는 등 그가 보인 방탕한 엽 기적 행각은 유아기 시절에 당한 나르시시즘적 상처와 리 비도적 좌절에서 비롯된 공격성의 발로일 수도 있다. 이는 마치 어머니에 대한 분노와 적개심을 다른 무고한 여성들 을 희생양으로 삼아 분풀이한 것으로 보이기도 한다. 일본 의 분석가 오꼬노기 게이오(小此木啓吾 1999)는 고자와가 주장한 아자세 콤플렉스의 보편성을 알리는데 주력하였지만 어머니에 대한 아들의 살해욕구가 출생전 어머니 자신이 지 니고 있던 영아살해욕과 관련된다는 주장은 다소 억지가 가 미된 논리의 비약으로 보인다. 그런 점에서 李炳郁(2000) 은 아자세 일화와 오이디푸스 비극을 비교함으로써 아자세 콤플렉스 이론에 비판을 가한 바 있다. 오히려 대상관계이 론의 측면에서 본다면 모친살해욕구를 보다 용이하게 이해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아버지 영조나 아들 사도세자 두 사 람 모두 자신들의 어머니라는 존재에 대하여 양가적인 감 정을 지니고 있었다. 미천한 출신의 소생이었다는 점에서 부자 모두 왕위 계승자였음에도 불구하고 온갖 고초와 핍 박을 받았기 때문이다. 두 사람 모두에게 어머니의 존재는 지울 수 없는 낙인이요 뿌리칠 수 없는 업보였다. 이덕일 (2001)은 어머니 영빈 이씨의 이해할 수 없는 밀고 행위 에 대해서도 정치적인 이유를 들었지만 영빈 이씨는 아들 이 태어난지 불과 백 일만에 세자로 책봉되어 자신의 품안 에서 자식을 빼앗긴지 오래되었기 때문에 모자지간의 정을 서로 나눌 기회가 거의 없었으며 더욱이 장래가 매우 촉망 되던 아들이 부모의 기대를 저버리고 오히려 역모를 꾀한 다는 소문에 접하자 아들을 변호할 생각은 않고 그러한 사 실을 남편에게 밀고했을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중한 처벌 을 권고했던 것이다. 물론 혜경궁 홍씨가 기록한 [한중록]
의 목적은 남편인 사도세자의 죽음에 자신의 친정아버지가 전혀 무관함을 강변하기 위한 것이었기 때문에 그 책임을 영조 자신과 영빈 이씨에게 전가한 셈이지만 어머니로서 취 한 행보치고는 다소 이해하기 힘든 대목이 아닐 수 없다. 그 런 점에서 영빈 이씨는 자신의 아들에 대해서조차 매우 양 가적인 태도를 보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세자는 부인 홍씨 와도 만족스런 관계를 유지해 나가지 못하였다. 그의 미숙
한 이성 관계는 사랑과 미움의 통합이 요구되는 유아적 발 달단계에서 상당한 결함이 있었음을 나타내는 증거라 할 수 있다. 결국 부모와의 갈등 해결에 모두 실패한 세자는 정신적 성격적 파탄에 이르러 온갖 비행을 저지른 결과 뒤 주 안에 갇혀 죽임을 당하는 비극을 겪고 말았다.
3) 부부갈등(夫婦葛藤)
사도세자와 부인 홍씨의 관계는 상당히 혼란스럽다. 부부 간에 이루어진 세밀한 부분은 오로지 혜경궁 홍씨가 노년 에 회고록 형식으로 남긴 [한중록]이 유일한 증거가 되고 있지만 어느 정도나 객관적인 시각으로 기록된 것인지에 대 해서는 정확히 알 수가 없다. 다만 분명한 모습으로 비쳐지 는 부분은 부인에 대한 세자의 냉담한 태도라 하겠다. 또한 정신적으로 매우 불안정한 모습을 보였던 세자의 심리적 상 태에 대하여 비교적 소상하게 기록하고 있기 때문에 사료 적 가치는 충분하다고 본다. 사도세자와 부인 홍씨는 만 10 세의 동갑나기로 혼인했다. 10세라면 프로이트의 정신-성 발달단계에서 잠재기에 해당되는 나이로 거세공포 및 남근 선망의 갈등에서 벗어나 부모에 대한 동일시로 타협을 모 색하는 시기이다. Erikson(1963)은 이 시기에 주어진 과 제로 자발성과 열등감을 제시한 바 있다. 그러나 다른 한편 으로 이 두 사람은 당시 귀족신분의 자제로서 일반 아동들 과는 달리 특수교육을 받았다는 점도 고려해야 될 것이다.
특수교육이란 쉽게 말해서 귀족신분으로서 갖추어야할 의식
적 사고와 감정 조절 훈련 및 온갖 예의범절에 관한 내용
이 될 것이다. 따라서 어린아이다움의 자연스런 사고와 감
정 표현에 일찍부터 제약이 따랐을 것으로 보인다. 또한 말
이 일부일처제일 뿐이지 특수신분으로서의 성생활이 보장되
었기 때문에 정실부인 이외의 여성과 성관계를 맺는다는 점
에 있어서 죄의식 같은 것은 상상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적
어도 성문제에 있어서 초자아의 기능에 부분적으로 결함이
생긴 것일 수 있다. 사도세자 자신이 왕비의 소생이 아니었
음은 주지의 사실이며 어려서부터 그러한 사실에 일찍 접
했던 세자로서는 부부지간에 국한된 애정생활이라는 의식이
매우 미비했을 것으로 여겨진다. 그것은 달리 말해서 오이
디푸스적 소망, 즉 근친상간적 소망의 대리인으로서의 부인
에 대한 욕구충족이 사전에 차단되어 있는 동시에 그 결과
충족되지 못한 소망은 다른 적절한 분출구를 찾지 못한 상
태에서 세자의 연이은 일탈된 행동으로 나타났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의례적인 부부관계에서 비롯된 욕구 불만
은 그 원인 제공자이기도한 아버지에 대한 불만과 반항으
로 나타났을 수 있다. 그것은 아버지의 약점과 허점을 잡아
내고 그것에 집착하는 모습을 통하여 더욱 구체화되었다. 결
李 炳 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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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 알고 보면 아버지라는 존재도 그렇게 완벽한 인간이 아
니라는 결론에 도달함으로써 아들은 아버지에 대한 승리감 에 도취하여 자신의 손상된 자존감을 보완하는 것이다.
세자의 청소년기적 혼란은 또래 경험의 부족에 의해 더욱 증폭되었을 수도 있다. 아동도 아니고 성인도 아닌 어중간 한 청소년 시기에 겪게 되는 심리적 갈등은 Blos(1962)의 표현을 빌면 청소년기 역설(Adolescent Paradox)이라 불 린다. 일종의 통과의례처럼 이 시기의 청소년은 자신의 정 체성에 의문을 품고 몹시 방황하게 되며 자신에게 주어진 역할과 미래에 대한 설계에 몰입하게 된다. 15세라는 사춘 기 나이에 이미 영조를 대신하여 대리청정의 막중한 임무 를 떠맡은 세자는 당연히 자신의 성적 욕망과 더불어 정체 성 문제에 혼란을 느꼈을 법 하다. 일과 사랑은 이 시기의 세자에게 감당키 어려운 심적 부담으로 작용했을 수 있다.
여승을 궁궐 안에 들이고 궁녀를 살해한 행동 등은 세자 스스로가 자신의 정체성에 혼란을 느낀 나머지 저지른 본 의 아닌 행동이었을 것이다. 세자의 충족되지 못한 욕망에 서 비롯된 분노와 적개심은 부인과 어머니 대신 애꿎은 궁 녀를 희생양으로 삼아 분출된 것이다. 누구나 범접해서는 안될 여승을 불러들인 것도 감히 가까이 접근할 수 없는 어 머니라는 존재에 대한 근친상간적 욕구의 표현으로 보인다.
반면에 부인 홍씨는 성적인 만족의 추구라는 측면과는 일 찌감치 담을 쌓은 채 20대에 이미 청상과부가 된 이후 80 세를 일기로 장수하며 생을 마치기까지 수절한 상태로 지 냈다. 개인적으로 맺힌 한이 컸겠지만 의외로 신경증적인 징후를 보이지 않았다는 점에서 상당히 성격적으로 강인한 여성이었음을 알 수 있다.
사도세자(思悼世子)의 대상관계(對象關係)
프로이트의 고전적 이론의 핵심은 리비도 가설에 입각한 오이디푸스 갈등이었다. 앞에서 논한 바와 같이 사도세자 와 영조의 갈등은 전형적인 오이디푸스적 부자간의 대립과 반목으로 해석될 수 있다. 특히 세자의 거세공포는 Freud (1922)가 예시했던 표현대로 거의 정신을 잃을 정도의 극 심한 공황상태로까지 몰고 갔다. 세자는 분명 두려움에 떨 고 있었다. 자신을 보호해줄 인물들이 주위에 아무도 존재 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깊이 인식했기 때문이다. 그는 고립 무원의 상황에서 기묘한 행각을 통해 자신의 괴로움을 떨치 고자 시도하면서 더욱 더 퇴행적인 행동으로 나아갔다. Cha- ncer(1992)는 권력과 무력감 사이에서 새도매조키즘적 양 상이 어떠한 방식으로 드러나는가 하는 문제에 대하여 지 적한 바 있지만 아버지의 권력을 탐하고자 하는 욕망과 자
신의 무력함을 인식하는 과정에서 세자 역시 그와 유사한 갈등 상황에서 자신의 무력감에서 비롯된 좌절감과 적개심 을 궁녀를 살해하는 가학적인 행동을 통해 드러낸 것으로 보인다. 그런 점에서 세자가 보였던 퇴행적인 행동의 이면 에는 단순한 오이디푸스적 갈등으로만 설명되기 어려운 측 면들이 존재한다. 세자의 나르시시즘적 욕구의 좌절 및 보 다 근원적인 감정적 문제의 실패로 간주할 수도 있을 것이 다. Fairbairn(1963)도 인간의 공격성은 좌절의 결과로 나 타나는 것이라고 주장하여 프로이트의 본능설에 맞섰지만 사도세자가 보인 공격성은 지속적인 형태가 아니라 간헐적 이며 돌출적인 양상으로 나타난 점이 특징이다. 뒤주 사건 당일 세자가 보인 행동은 극히 정상적이었으며 그동안 자 신이 보였던 공격적인 양상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이병욱 (2004)은 분노와 공격성을 부정적인 관점에서만 볼 것은 아니며 사랑만을 강조하는 것도 매우 비현실적인 발상이라 는 점을 강조하였다. 왜냐하면 인간의 삶을 움직여나가는 강 력한 동력은 사랑뿐 아니라 공격성도 사랑에 못지않은 중 요한 역할을 수행하기 때문이라는 이유에서다. 사도세자의 문제는 분노와 공격성의 표출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그러한 부정적 감정을 상쇄시킬 수 있는 사랑의 부재에 있다는 것 이 정확한 지적이 아닐까 한다. 영조의 극단적 조치는 세자 로 하여금 현실감각을 되찾게 하는 효과를 가져다 주었지 만 그것은 단순히 아들 길들이기 차원의 제스처가 아니었 다. 실제로 영조는 다른 정치적인 이유로 아들을 죽이기로 이미 작정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세자가 보인 퇴행적 행동의 배경을 Klein(1948)의 대상
관계이론 차원에서 본다면 적절한 모자관계 형성의 결핍에
의한 결과로 비쳐질 수도 있다. 엄마의 젖을 빨면서 겪게 되
는 유아의 심리적 경험에 주목한 클라인은 이미 그 시기에
상당한 욕구 좌절과 그에 따른 공격적 환상에 대해 지적한
바 있다. 엄마의 젖가슴에 대한 선망과 적개심은 유아의 정
신세계에 온갖 공격적인 환상을 유발시키고 자신의 악한 측
면을 상대에게 투사함으로써 자신의 내면에는 선한 측면만
을 간직하고자 시도한다. 소위 편집적 입장에 놓인 유아는
이러한 분리와 투사의 기제를 통하여 자신의 중심을 잃지 않
으려 하는 것이다. 그리고 서서히 부분대상에서 전체대상의
존재를 인식해가면서부터 자신의 적대적 환상에 따른 죄의
식에 사로잡힌 나머지 우울 입장으로 나아가게 된다(Klein
1935). 이 시기에 사랑과 미움, 선과 악, 부분과 전체의 통
합적 기능이 형성되기에 이르는데 이러한 통합이 적절히 이
루어지지 못하게 되는 경우, 이후의 발달단계에서 이러한 감
정적 혼란의 연장으로 상당한 어려움을 겪기 마련이라는 것
이다. 따라서 이러한 시기에 모성적 기능과 역할이 그만큼
사도세자(思悼世子)의 죽음에 대한 분석적(分析的) 고찰(考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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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요하고 결정적인 요인임을 가리키는 것이지만 사도세자는 이 시기에 이미 상당한 좌절과 상처를 받은 것으로 추정된 다. Winnicott(1949)가 말한 홀딩환경(holding environ- ment)의 조성과 충분히 좋은 엄마 good-enough mother 의 역할이 사도세자에게는 결여된 것으로 보인다. 그 결과 로 생긴 애정의 결핍현상은 다음 단계인 항문기 및 남근기 에도 영향을 주어 건강한 갈등 해결 방식의 성공을 방해하 고 실패로 이끈 것으로 보인다. 소위 Balint(1968)가 말한 기본적 결함의 문제나 Bowlby(1969)의 애착경험 등에 문 제를 드러낸 것으로 추정되는 것이다. 사도세자는 유아기 부터 성인기에 이르기까지 진심에서 우러나온 깊은 정서적 유대관계의 경험이 부족했을 것이다. 그의 주위를 에워싼 인 의 장막은 의례적인 관계만을 강요하는 분위기였을 것이며 부모와의 진정한 감정적 유대관계 및 교우관계 역시 경험하 지 못하였다. 물론 그에게 주입된 의식교육과 의전교육은 표 면적인 그의 태도에 영향을 주었겠지만 보다 근원적인 욕구 충족의 결핍은 보상받지 못하였을 것이다. 또한 어린 세자 의 교육을 전담했던 최 상궁과 한 상궁은 적절한 역할 분 담을 통하여 엄부자모의 역할을 대행했던 것으로 알려지고 는 있지만 그것으로 세자의 내면적 통합을 기대하기는 어 려웠을 것이다. 오히려 과거에 경종을 모셨던 그녀들의 은 밀한 영향력에 의해 아버지 영조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이 심어졌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Bion(1963)은 모성적 기능의 한 요소로 알파요소의 중 요성을 강조한 바 있지만 유아의 내면적 감정세계에서 겪 게 되는 베타요소, 즉 유아의 내면에서 경험하는 온갖 독소 적 요소를 제거시키고 해독시켜주는 모성적 기능의 존재가 이 시기에 매우 중요하다고 말했다. 사도세자에게는 이러한 변환을 일으켜줄 수 있는 해독제로서의 인물을 경험하지 못 했다는 점이 지적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부정적 감정에 사로잡혀 정신적으로 방황하는 세자의 곁에서 이러한 완충 역할을 맡았어야할 어머니 영빈 이씨와 부인 홍씨는 오히 려 세자를 더욱 곤경으로 몰고 가는 이율배반적인 행보를 보였다는 점에서 세자는 더욱 고립무원의 상태에 빠지고 말 았던 것이다. 또한 Winnicott(1953)는 정상적으로 요구되 는 적절한 이행기 경험이 엄마와의 분리가 이루어지는 시 기에 매우 중요한 결정적 요인임을 지적한 바 있다. 마찬가 지로 모자간에 형성되는 심리적 공간의 경험이 이후 성인 기의 인간관계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서도 강조하였다. 그 러나 사도세자에게는 이러한 유아적 단계에서의 적절한 경 험이 부재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본다. 생후 불과 백 일 만에 어머니의 품을 강제로 떠날 수밖에 없었던 것은 그가 세자로 책봉된 탓도 있었기 때문이며 그것은 물론 왕손의
신분으로서 피할 수 없는 환경이었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모 든 왕족들이 유사한 양육방식에 의해 키워졌다고 해서 예 외없이 성격적, 심리적 손상을 입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사 도세자에게 특히 어떠한 요인이 관련되었는지 정확히 판단 하기는 매우 어렵다. 다만 그에게는 대상관계 측면뿐 아니 라 이후에 마주친 오이디푸스 시기의 삼각관계에서 빚어진 근친상간적 소망 및 거세공포의 문제가 성적 욕구의 좌절 과 함께 맞물려 그에게 주어진 신분에 걸맞지 않은 일탈된 행동을 야기시킨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적어도 사랑과 미 움의 적절한 타협과 통합에 실패한 점은 조기 모자관계의 경험에서 비롯된 결과이기 쉽다(Kernberg 1995). 인간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감정적 경험은 사랑과 미움으로서 이들 감정의 통합에 실패하게 됨으로써 겪게되는 심리적 불행은 이루 다 말할 수 없을 정도다. 그토록 중요한 사랑과 미움 의 감정은 인간이 태어나 최초로 만나게 되는 어머니와의 감정적 교류에서 그 근원을 찾을 수 있다(Balint 1952).
뿐만 아니라 어머니의 품에 안겨 젖을 빨고 만지는 등의 피부 접촉을 통하여 아기가 얻는 심리적 안정감은 기본적 신뢰감의 형성에도 중요한 요인이 된다(Bick 1968). 그런 관점에서 본다면 영조와 세자는 두 사람 모두 사랑과 미움 의 적절한 통합과 조화, 그리고 분노와 공격성의 건설적인 승화에 실패한 인물들이며 실제로 그들에게는 자신들의 정 신적 갈등과 문제를 해결해줄 수 있는 치료자가 존재할 수 없었다는 점에서 더욱 비극적인 결과로 치닫게된 것으로 본 다. 세자는 매우 영특한 인물이었음에 틀림없지만 그것은 인 지적 차원에서 일컫는 말일 뿐이며 그의 내면적 갈등이나 감정적 혼란은 거의 방치된 상태에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사도세자가 죽음을 모면하고 그 후 왕위에 올랐다 해도 자 신의 그러한 심리적 갈등과 부정적인 감정문제를 얼마나 성 공적으로 해결해 나갔을지는 누구도 장담하기 어려웠을 것 으로 보인다.
맺 음 말
사도세자의 죽음은 스스로 자초한 형벌이었다. 그것은 아
버지에 대한 분노와 적개심, 두려움과 불안에서 비롯된 결
과였다. 사도세자의 해결되지 못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와
거세공포는 아버지 자신의 해결되지 못한 열등감과 죄의식
및 피해의식과 맞물려 부자간의 치열한 자존심 대결로 치
달았으며 서로의 약점을 건드리며 상대를 괴롭혔다. 또한 그
의 어머니에 대한 근친상간적 소망 역시 아버지라는 커다
란 장벽에 가로막혀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을 그에게 안
겨주었다. 아버지가 선택해준 배필은 그런 점에서 거부의 대
李 炳 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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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일 수 밖에 없었다.
세자의 유일한 소망은 어머니일 뿐이며 아내 홍씨는 단지 아버지의 하수인에 불과한 존재라고 인식했을 것이다. 더욱 이 어머니는 비록 대의를 위해서라고는 하지만 왕에게 아 들의 처벌을 읍소함으로써 아버지 편에 가담했다. 세자는 더 이상 생존의 이유와 목표가 없어졌기 때문에 추상같은 아버 지의 영에 따라 서슴없이 뒤주 안으로 들어간 것이다. 그것 은 오기의 발동이며 자신을 배신한 부모에 대한 보복이기 도 했다. 우리는 영조와 사도세자 간에 이루어진 비극적인 사건의 전말을 통하여 아무리 철저한 교육과 의식절차에 따 른 훈련과정을 거친 왕손들이지만 그들 각자의 심리적 갈 등 해결에는 매우 취약한 구조와 능력을 지니고 있었다는 사실을 동시에 알 수 있다. 또한 신분과 교육의 차이를 뛰 어넘어 그리고 시대의 차이를 뛰어넘어 부모와 자식 간에 이 루어지는 갈등의 고리는 우리에게 여전히 제대로 풀리지 않 는 숙제임을 주지시켜준다. 사도세자의 죽음은 중세 한국을 대표하는 오이디푸스의 비극 그 자체였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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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세자(思悼世子)의 죽음에 대한 분석적(分析的) 고찰(考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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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STRACT
Psychoanalytic Note on the Death of Prince Sado
Byung-Wook Lee, M.D.Prince Sado (1735-1762) was locked in a rice chest and starved to death by royal command. His tragic death has been evaluated as the result of bloody party strife in the Chosun Dynasty, but from another point of view, the death of Prince Sado can be interpretated as self-induced punishment, happening psychologically at the vertex of an oedipal triangle. His aging father, King Young-jo, was paranoid about the crown prince whose death resulted from rage and hostility against his authoritative father. Prince Sado had doubts about his father’s justification to succeed the throne;he was aware of rumors that the late King Kyung-jong had been poisoned to death, and this was always an issue for party strife. Heebin Chang was the mother of Kyung-jong, and Sookbin Choi was the mother of Young-jo, but the two women hated each other.
Prince Sado felt guilty toward Kyung-jong and pitied him and he tried to conspire with the opposing party against his father. It was a kind of rebellion and immediately his father, the king, ordered Prince Sado to kill himself. When Sado refused, the violent and furious king commanded that he be locked in a rice chest where he eventually starved to death.
This paper reaches the following conclusions:
01) Prince Sado was overwhelmed by his own unresolved castration fear.
02) King Young-jo was paranoid and envious of his son.
03) Father and son shared a common ambivalence toward their mothers and unresolved oedipal conflict.
04) Prince Sado rebelled against his father, aggravating his father’s weak points.
05) The rice chest in which the prince died symbolizes the mother’s womb.
06) Prince Sado was surrounded by foes on all sides, and he was thouroughly isolated because he had no proper
protectors.
07) Prince Sado experienced early separation from his mother and did not have an object of constancy and basic
trust.
08) His narcissistic rage and frustration was put into action through deviate sexual and murderous behavior.
09) His marital life was unhappy because of his wife’s political attitude.
10) His mother and wife betray a secret to his father.
11) Prince Sado was an another Oedipus in a medieval Korean dynasty.
KEY WORD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