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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聖)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告白)에 대한 분석적(分析的) 논평(論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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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SEP Original Article 精 神 分 析 :第 15 卷 第 2 號 2 0 0 4

J Korean Psychoanalytic Society Vol.15, No. 2, Page 239~247, 2 0 0 4

성(聖)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告白)에 대한 분석적(分析的) 논평(論評)

李 炳 郁

*

A Psychoanalytic Note on the Confessions of Saint Augustine

Byung-Wook Lee, M.D.*

머 리 말

성 아우구스티누스(354~430)는 북아프리카 태생의 사제 로서 로마 카톨릭 사회에서는 성인으로 추앙받는 인물이다.

그는 A.D. 397년부터 401년까지 그 유명한 [고백록]을 집 필하였다. 그가 남긴 [고백록]은 역대의 어느 참회록보다 진 솔한 자기 고백으로 일관하고 있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되는 저서이기도 하다. 루소나 톨스토이의 참회록도 그에 버금 가는 내용을 담고는 있지만 성 아우구스티누스만큼 철저한 자기 분석을 보이지는 않고 있다. 또한 아우렐리우스 황제의 명상록은 깊은 철학적 사색으로 정평이 나있지만 자신의 삶 에 대한 솔직한 인간적 성찰이 배제되어 있다는 점에서 아 쉬움이 남는다. 물론 같은 성직자로서 자신의 애정문제에 대하여 용기있게 기록으로 남긴 아벨라르와 같은 인물도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신 앞에 행한 자 신의 개인적 기도와 회개 내용을 과감히 대중들 앞에 공개 함으로써 진정한 신앙심이 무엇인지 온몸으로 드러내 보였 다는 점에서 그 차원이 다르다고 할 수 있겠다. 그것은 실로 대단한 용기를 필요로 하는 행위가 아닐 수 없다. 프로이트 가 자신의 인간적 치부와 약점을 용기있게 드러내기 시작할 무렵보다 무려 1500년 전에 이미 그는 자신에 관한 모든 치 부를 가감없이 공개한 것이다. 물론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은 심리학적 개념에 입각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가 보여 준 치열한 내적 성찰은 한치의 변명이나 최소한의 미적 치 장도 허용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그야말로 신에 대한 외경 심과 믿음의 신념을 여지없이 드러내 보여준 것으로 생각된 다. 신과 대중 앞에 동시에 그가 보여준 태도는 매우 일관된 것으로서 진정한 참회와 기도가 무엇인지 우리에게 산교육

과 지침을 제시하였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생애(生涯)

아우구스티누스는 서기 354년 11월 13일, 북아프리카 해 안에 위치한 항구도시 히포 부근의 작은 마을 타가스테에서 베르베르족 원주민의 아들로 태어났다. 당시 타가스테는 로 마제국의 통치하에 있었으며 누미디아지방으로 알려지고 있 었는데 그의 어머니 모니카는 비록 산악부족 출신이기는 했 지만 독실한 기독교인이었다. 반면에 아버지 파트리키우스 는 줄곧 이교도로 지내다가 죽기 직전에 기독교로 개종하였 다. 그는 3남매 중 장남으로 남동생 나비기우스와 여동생 페르페투아가 있었지만 특이하게도 자신의 여동생에 대해 서는 그 이름을 한번도 언급한 적이 없었다. 아버지 사망후 카르타고로 유학가면서부터 한 여자와 동거생활을 시작했 는데 그의 나이 불과 16세 때였다. 그는 18세 나이에 벌써 아들을 얻었으며 그 무렵 이단종파인 마니교에 입교했다. 학 업을 마치고 고향으로 돌아온 그는 교사가 되어 문법을 가르 쳤으나 신앙과 여자 문제로 어머니와 불화가 계속되었다. 카 르타고에서 수사학을 가르치면서 마니교에 대한 의혹이 깊 어졌으며 29세에는 어머니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로마로 갔 다가 중병에 걸려 고생했다. 당시 그의 어머니는 아들과 함 께 로마에 가기를 원하였으나 그는 어머니를 따돌리고 몰래 배를 타고 혼자 로마로 갔다가 병에 걸린 것이다. 그러나 한 친절한 마니교도가 그를 정성껏 간호하여 다행히 건강을 되 찾게 되었다. 30세가 되자 밀라노의 수사학 교수로 임명되 었는데 이듬해 오랜 기간 함께 했던 동거녀와 헤어지고 어 머니의 뜻에 따라 한 소녀와 약혼했다. 32세가 된 어느 여름 날 그는 성경을 펼쳐 읽으라는 음성을 듣고 영적 세계에 눈 을 떴으며, 다음해에는 암브로시우스에게서 직접 세례를 받 았다. 귀국을 준비하는 중에 어머니의 사망 소식을 들었으며 귀국 후에는 타가스테에서 곧바로 수도생활을 시작하였다.

*翰林大學校 醫科大學 精神科學敎室

Department of Psychiatry, Hallym University College of Medi- cine, Seoul, Kor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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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세에 이르러 드디어 그는 히포의 감독으로 임명되었으며 43세부터 고백록을 쓰기 시작하여 3년후 완성시켰다. 그 후 에도 그는 유명한 [신국], [삼위일체론] 등 기독교에 관한 수 많은 저술들을 남겼으며 그의 이성에 기초한 기독교신앙과 수도원 제도는 그가 비록 아프리카 원주민 출신이긴 했지 만 오히려 아우구스티누스에 의해 서구문명의 씨앗이 뿌 려졌다는 점에서 특기할만한 사건이 아닐 수 없다. 그는 서 기 430년 북방에서 내려온 반달족이 히포시를 포위한 상 황에서 76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아우구스티누스의 발달단계(發達段階)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록은 자신의 유아기 시절에 지은 죄에 대한 고백으로 시작된다. 물론 말을 배우기 이전의 단 계에 대한 직접적인 회상은 불가능했겠지만 그는 자신이 자 식을 키워본 경험을 토대로 그와 같은 유추를 하였던 것이다.

젖먹이 시절의 아기에게도 질투와 분노의 감정이 있음을 그는 이미 간파하고 있었다. 멜라니 클라인의 이론이 나오 기까지 무려 1500년 전에 있었던 관찰 기록이라는 점에서 아우구스티누스는 최초의 대상관계 이론가라고 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다. Kligerman(1957)은 이 점에 놀라움을 금치 못하면서 아우구스티누스가 유아적 단계에서 경험하는 부 정적인 감정을 일종의 죄악으로 간주한 것은 유아들의 세계 에도 성적인 요소가 작용하고 있음을 발견한 사실과 맥을 같이 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다만 프로이트는 구순기의 성 적 좌절 및 나르시시즘적 상처에 대해 언급은 하였으나 실 제 임상에서 흔히 마주치는 노이로제와의 관련성에 있어서 는 확신을 갖지 못하였으며 주로 오이디푸스 갈등과 관련 한 거세 공포와 남근 선망의 관점에 치우치는 경향을 보였 다. 그러나 원초적 단계의 모자관계에 주목했던 클라인은 남근 선망에 선행되는 유방 선망에 대하여, 그리고 거세 공 포 이전의 유아적 분노감정과 공격적 환상에 대하여 말하 고 조기 모자관계의 경험에서 동원되는 분리 및 투사적 동 일시 등의 원시적 방어기제의 역할을 강조한 바 있다. 아우 구스티누스가 유아기의 질투 및 분노 감정에 대하여 언급한 것은 프로이트조차 인식하지 못했던 실로 놀랄만한 지적이 아닐 수 없다. 물론 그는 기독교적 원죄 개념에 입각하여 파악한 사실이긴 하지만 그의 관찰력은 매우 정확한 것이었 다.“나는 유아시절에도 미움의 감정이 있었음을 시인하며 아마도 이것은 나의 모태로부터 이미 유전된 것이라고 생 각합니다. 내가 죄악 중에 출생하였음이여, 모친이 죄 중에 나를 잉태 하였나이다” 아우구스티누스는 말을 배우는 시기 에 대해서도 다음과 같이 언급하였다.“나는 분명히 기억합

니다. 내가 어떻게 말하는 법을 배웠는가를 기억합니다. 어른 들이 어떤 특정한 방법을 가지고 내게 말을 가르친 것은 아 니었습니다. 그러나 나는 울음을 터뜨리며 서투른 억양과 여러 몸짓으로 나의 생각을 표현하기 시작했고 나름대로의 의사를 가지게 되었으나, 하나님 당신께서 허락하신 지각을 가지고 나의 모든 의사를 표현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들이 어떤 특정한 사물을 보며 이름을 부를 때, 그들이 말하는 이 름과 그들이 가리키는 사물은 같은 것이라고 느꼈던 일이 기 억납니다. 따라서 그들이 하는 말을 계속해서 들을 때에 다 양한 문장 속에서도 여러 가지 단어들이 반복적으로 들려오 므로 점차 그 단어의 의미를 이해하게 됩니다(St. Augustine 1971)” 이는 마치 피아제의 지능발달이론과 흡사하다는 인 상을 받는다. 다만 그의 관찰과 기억에서 누락된 부분은 항 문기의 배변훈련과정에서 겪게 되는 긴장과 처벌에 대한 부 분 및 남근기의 오이디푸스 갈등, 그리고 형제갈등과 관련 된 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는 이 기간을 과감히 생략하고 학령기의 문제로 건너뛰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처럼 생략된 부분은 오히려 나름대로의 의미가 있을 것으 로 생각된다. 그는 아버지의 죽음에 대한 부분이나 동생들 에 관한 내용은 거의 언급하지 않았다. 그가 쓴 고백록의 주 인공은 전적으로 그와 어머니 그리고 신뿐이었다. 다른 가 족들은 모두 그의 관심 밖에 있었다. 그만큼 어머니를 향한 그의 독점욕은 매우 강렬한 것이었으나 성스러운 어머니에 대한 접근을 가로막는 현실적인 장벽은 오히려 그로 하여금 타락한 세계에서 무분별한 육체적 쾌락에 탐닉하도록 이끌 었던 것으로 보인다.

학령기의 주된 관심은 역시 체벌에 관한 것이었다.“비록

어렸지만 아주 간절한 마음으로 학교에서 매를 맞지않게 해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나의 부모님들도 물론 내가 잘 되기를

원하는 분들이지만, 나의 고통스러운 상처인 매의 자국을

보시며 더욱 나를 질타하는 것이었습니다. 사실 나를 매질하

는 그 사람 역시 별로 다를 바가 없습니다. 공놀이를 하다

가 친구와 다투어 매를 맞는 나보다도 오히려 동료 교사와

의 사소한 언쟁에도 앙심을 품고 질투하는 그가 더욱 나쁜

사람이 아니겠습니까?” 소년 시절에 그는 갑작스러운 위복

통으로 거의 죽을 뻔하였다. 그 때문에 세례 받기도 연기되

었다. 그러나 어머니의 극진한 보살핌으로 그는 회복될 수

있었다.“내 육신의 어머니는 당신을 향한 순결한 믿음을 지

닌 분일뿐만 아니라 더욱이 나의 구원을 위해 영적인 산고

를 치러주신 분입니다. 나는 그때 이미 믿었습니다. 그리고

아버지를 제외한 온 가족들이 믿었습니다. 육신의 아버지 대

신 나의 하나님 당신께서 나의 아버지가 된 것은 간절한 어

머니의 돌보심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이미 아버지의 존재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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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부하고 신과 어머니를 동급의 자리에 위치시키고 있었다.

아버지를 배제시키고 싶은 그의 욕구는 그만큼 어머니를 독 점하고자 하는 바램이 컸기 때문일 것이다.“나는 또한 탐심 의 노예가 되어 부모님의 장롱이나 책상에서 물건을 훔쳤 고 놀기를 좋아하는 친구들과 어울려 놀면서 훔친 것들을 나누어 주기도 했습니다. 우리는 즐겁게 어울려 놀았지만 결 국 그들의 친구가 될 수 있었던 것은 훔친 돈과 물건 때문 이었습니다” 로마제국시대의 청소년들이나 오늘날의 청소년 문제 사이에 다른 점이 별로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주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그의 고백은 계속된다.“오, 하나님! 이 불쌍한 죄인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소서. 가정교사, 학교 선 생님, 땅콩, 장난감, 참새 등을 맴돌았던 어린 시절의 작은 죄악들은 점점 성장해감에 따라 권력, 왕, 황금, 돈, 영토, 노예 등의 커다란 죄악으로 확산되어 갑니다” . 피터 블로스 의 청소년 심리학을 동원하지 않더라도 아우구스티누스가 몸소 체험한 청소년기의 반항과 정신적 방황은 시대적 차이 를 넘어선 보편타당한 청소년기 정체성의 혼란과 위기를 반 증하는 좋은 예가 되는 것으로 보인다. Dixon(1999)은 에 릭슨의 발달이론과 정체성 개념에 입각하여 아우구스티누스 의 정신적 방황과 혼란을 설명하였는데 특히 그녀가 제기한 문제는 각자의 아동기 경험에서 결코 자유롭지 못한 대다수 성인들의 경우와는 달리 아우구스티누스는 자신의 무의식 적 동기나 근원을 이해하지 못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강력한 영향력에서 벗어나 자기치유의 경험을 이루어냈다 는 점이 돋보이는 점이며, 그런 관점에서 볼 때 자신의 무의 식적 동기를 인식하지 않고도 의식적 노력만으로 갈등과 혼 란을 극복하고 자신과 이웃을 위해 헌신할 수 있는 여지가 존재하는 것이 아닌가 질문하고 있다. 그러나 모든 일반인 에게 그러한 초극의 길이 가능하다면 아우구스티누스와 같 은 인물을 굳이 성자의 대열에 올릴 필요까지는 없을지도 모른다.

Blos(1962)는 청소년기야말로 역설의 모순에 가득찬 시 기로 아이도 아니고 성인도 아닌 어중간한 위치에서 부모로 부터의 독립과 의존이라는 갈등 상황에 놓이기 때문에 그로 인한 정신적 방황으로 예기치 못한 돌출 반응에 휩싸이기 쉽다고 하였다. 따라서 그 시기에는 육체적 타락과 온갖 비 행에서부터 종교적 구원이나 심각한 고뇌에 이르기까지 양 극단을 오가는 혼란된 모습을 보이기 쉽다고 하였는데 아우 구스티누스도 그 예외가 될 수 없었다.“내 육신의 나이 열 여섯에 나는 어디에 있었습니까? 주(主)의 전(前)에서 기쁨 을 누리지 못한 채 미친 세상의 정욕에 이끌려 방황하고 있 었습니다. 부끄러운 죄악 속에서 헤매었고 정욕의 광란 속에 서 완전히 미쳐버린 시절이었습니다. 어느 날 아버지와 함께

목욕을 한 적이 있습니다. 그때 아버지는 성숙한 어른의 모 습으로 변해가는 나의 육신을 보았습니다. 그는 손자라도 본 듯이 기뻐하고 이내 이 사실을 어머니께 이야기했습니다. 이 는 마치 술 취한 자의 착각처럼 세상에 취하여 하나님을 잃 어버린 행위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독실한 신앙인인 어 머니는 내가 죄악의 길에서 방황할까 염려하고 있었습니다.

지금도 생생하게 떠오릅니다. 어머니는 행여 내가 음행을 범할까 누구의 아내와 간음할까 가슴을 태우며 염려하시면 서 기도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훈계를 듣는것이 내게는 너무 깐깐하게 느껴지고 사내답지 못하다는 생각도 들어 부 끄럽게 느끼기도 했습니다. 나는 친구들과 함께 패거리를 이 루어 타락의 도시 바벨론의 뒷골목과 환락의 진흙탕 길을 마치 값비싼 향수나 향유의 거리인양 쏘다녔습니다. 죄악 에 관하여 우유부단한 성격 때문에 사탄은 더욱 나를 유혹 하여 타락의 중심부로 이끌었습니다(St. Augustine 1971).”

아버지는 아들과 함께 목욕을 하면서 무엇을 보았던 것일 까? 그는 아들의 발기된 성기를 보았던 것이다. Kligerman (1957)은 이 장면에 주목하고 아우구스티누스가 아버지를 포함한 나체의 남자들과 함께 하면서 동성애적 반응을 보인 것으로 설명했다. 또한 어머니의 반응도 매우 이례적임을 지적하였다. 성적으로 회피적이며 지나치게 도덕적인 어머니 는 시종일관 아들을 부둥켜안고 울면서 기도하곤 했는데 이 러한 장면 역시 매우 에로틱하다는 것이다. 남편에 대해서 불감증적인 태도를 보이는 어머니가 자신의 근친상간적 욕 구를 감추고 아들과 함께 수시로 그러한 감정적 장면을 연출 했다는 것은 그러지 않아도 과도한 자극에 노출된 아들에 게는 상당한 성적 유혹으로 느껴졌을 것이며 동시에 심한 좌 절감을 심어주었을 것이다. 모니카에게는 자신의 아들을 다 른 여성에게 빼앗긴다는 것이 남편을 잃는 것보다 더욱 큰 아픔이요 참을 수 없는 모욕이었을 것이다.

따라서 성적으로 매우 조숙했던 아우구스티누스는 가족

의 지배자로 군림하던 아버지가 사망한 직후부터 어머니의

치마폭을 떠나 성적인 일탈로 치달았다. 불과 16세의 나이

로 그는 한 여성과 동거생활에 들어감으로써 육체적 쾌락에

탐닉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또한 종교적으로는 마니교에 들

어가 자신의 죄책감을 덜어보려고 하기도 했다. 마니교는 두

가지 신을 섬겼는데 하나는 선한 신이고 다른 하나는 악한

신을 동시에 숭배했다. 빛과 어둠의 두 신을 섬기면서 그는

자신의 도덕적 타락과 육체적 쾌락을 합리화시키고자 했던

것이다. 그것은 빛과 어둠, 천사와 악마 등 두 가지 양면성을

동시에 겸비한 아프락사스 신을 숭배했던 융과 헤세를 연상

시킨다(李炳郁 2002b). 그러나 악의 존재를 긍정하고 수용

하는 마니교는 죄악에 물든 아우구스티누스에게 일종의 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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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을 주었지만 그것은 마약의 효과와 비슷하다는 것을 그는 비로소 깨달았다. Ostow와 Scharfstein(1954)은 젊은 시 절 부모에 대한 반항과 복수심에 불탔던 아우구스티누스가 무절제한 방탕 생활을 청산하고 기독교에 입문하게 된 것 은 가장 절친한 친구의 죽음이 계기가 되었는데 그 때 아우 구스티누스는 자신의 삶에 통렬한 회의와 죄책감을 느끼고 일시에 인생 진로를 바꾼 것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고백록 에 의하면 아우구스티누스는 자신의 반쪽처럼 여기던 친구 의 죽음 이후에 기독교가 아니라 오히려 마니교에 심취했 다. 물론 그후 마니교에 실망하고 기독교로 돌아서긴 했지 만, 그의 개종에는 친구의 영향보다는 어머니에 대한 죄책 감이 더욱 큰 작용을 한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그 친구와 는 오랜 교분을 쌓은 적도 없었기 때문이다. 다만 아우구스 티누스는 그 친구가 죽기 직전에 의식이 없는 상태에서 세 례를 받은 사실에 대해 그러한 의례가 무슨 소용이 있겠는 가 하고 은근히 속으로 비웃고 있었는데 실제로 그 친구가 정신이 깨어난 후 예전과는 달리 지극히 평온한 모습을 보인 점에 충격을 받은 것은 분명하다. 그는 갑자기 자신의 죄악 에 대해 그리고 죽음의 공포를 느끼기 시작했으며 친구의 얼굴에서 선과 악의 두 가지 모습을 동시에 읽고 자신의 양 면성을 그에게 투사했는지도 모른다. 그것은 헤세의 소설 [데미안]에 묘사된 바와 마찬가지로 주인공 싱클레어가 친 구 데미안에게서 자신의 일부를 발견한 것처럼 아우구스티 누스 역시 그와 유사한 반응을 보인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 나 선악의 공존에서 벗어난 친구의 마지막 태도에서 그는 심한 좌절과 배신감을 느꼈을 수도 있다. 어쩌면 잠재된 동 성애적 욕구의 좌절이 그로 하여금 선과 악을 모두 인정하 고 포용하는 마니교에 더욱 심취하도록 이끌었을지도 모르 지만 결국 그러한 모든 성적 욕망과 쾌락에 대해 강한 수치 심과 죄의식을 감당할 수 없어 마지막까지 어머니가 굳게 지 키고 있던 천국의 문을 두드린 것으로 보인다. 이에 대하여 Capps와 Dittes(1990)는 아우구스티누스의 나르시시즘적 과대사고와 쾌락적 성향을 지적하고 그로 인한 수치심의 결과로 보았으며, Mallard(1994)는 친구의 죽음은 아우구스 티누스로 하여금 자기 연민을 자극하여 그 자신의 나르시시 즘적 쾌락과 고뇌 사이에서 혼란을 겪도록 이끌었다는 것 이다. 결국 죽은 친구를 향한 강한 사랑과 슬픔의 감정적 경 험은 아우구스티누스 자신에 대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는 주장이다(Starnes 1990). 그러나 아우구스티누스의 근원 적인 사랑과 슬픔, 애도반응의 대상은 바로 그 자신의 어머 니 모니카를 향했던 감정일 것으로 생각된다.

19세에서 28세까지 그는 실로 폭풍과 같은 혼돈과 갈등 의 어둠 속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찾고자 방황했다. 선과 악,

쾌락과 금욕, 신과 어머니, 구원과 징벌, 빛과 어둠 가운데 갈등하면서 그는 오랜 방황을 청산하고 결국 신과 어머니의 품안으로 귀의했다. 성직자 아벨라르와 수녀 엘로이즈의 안 타까운 사랑의 이야기는 이미 고전이 된지 오래지만, 그들은 현실적인 장벽 때문에 이루지 못한 자신들의 사랑을 독실한 신앙심으로 극복해 낼 수 있었다(Abelard 1974). 그러나 그들은 성자의 반열에 끼지 못하였으며, 오히려 철저한 타락 과 방탕으로 일관했던 아우구스티누스가 성자의 대열에 올 랐다. 죄악의 밑바닥까지 내려갔던 그는 뼈를 깎는 뉘우침과 거듭남으로 인해 더욱 큰 영적 진화에 도달될 수 있었다. 그 러한 점이 그를 더욱 위대한 성자로 추앙하게 만든 원동력이 아닐까 한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정신역동(情神力動)

아우구스티누스의 어머니 모니카 역시 독실한 신앙심으로 카톨릭사회에서는 성녀로 대우받는다. 그러나 실제 모자사이 에서는 갈등과 불화가 잦았으며 아우구스티누스는 이른 나 이에 이미 여성과의 동거생활로 인하여 아들을 훌륭한 성 직자로 키우려던 어머니의 기대를 저버리고 말았다. 뿐만 아 니라 아들은 어머니의 종교가 아니라 이단시되었던 마니교 에 입문하여 어머니를 실망시켰다. 이처럼 아우구스티누스는 종교와 성 문제로 일찍부터 어머니와 불화를 일으킨 것이다.

어머니의 과잉보호와 지나친 관심은 아들로 하여금 더욱 더 반대의 길로 나아가게 만들었던 것이다. 남편을 잃은 후에 어머니는 아들에 대한 기대와 의지로 자신을 지탱해 나갔지 만 아들은 자꾸만 그녀의 품안을 벗어나려 했다. 성적인 타 락으로 치닫는 아들에 대해 어머니는 참담한 기분에 빠졌 다. 일찌감치 아들의 결혼에 반대했던 그녀로서는 아우구스 티누스가 성직자의 길로 나아가기를 원했다. 그녀의 아들에 대한 과도한 집착과 집념이 강한 신앙심에서 비롯된 결과 였다는 관점은 지나치게 단순한 생각이 아닐 수 없다. 그와 비슷한 모성애적 집념을 흔히 경험하는 동양적 관점에서 이 해하는 것이 오히려 더 쉬울 수도 있겠지만 모니카가 보여 준 행동은 분명히 지나친 신경증적 집착으로 보인다.

Kligerman(1957)은 모니카의 순종적이고 헌신적인 태

도와 성에 대한 거부감은 상호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점을

시사하였다. 다시 말해서 그녀의 굴종적인 태도의 이면에는

불성실한 남편에 대한 적개심이 감추어져 있으며 내면적으

로는 남성들에 대한 경쟁심과 도덕적 우월감으로 충만해 있

었다는 것이다. 모니카의 태도는 따라서 남편과 아들을 좌

절시키기에 족한 것이었으며 자신의 아들로 하여금 평생 동

안 아버지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을 지니도록 영향을 주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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뿐만 아니라 아우구스티누스 자신의 남성성에 대해서도 지

속적으로 부정하고 거부하도록 영향을 주었다고 보았다. 그 녀가 자신의 아들을 신의 아들로 만들고자 하는 강한 집념 을 지닌 것도 모니카 자신의 성스러운 처녀로서의 신이 되고 싶은 백일몽과 관련된 것으로 결국 아들도 어머니의 소망 충족적인 환상을 공유하게 된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생각해 본다면 일찍 남편을 잃은 그녀로서 는 유일한 의지처가 큰 아들이었음에 틀림없다. 그리고 자신 의 아들을 성직자로 만들겠다는 그녀의 소망은 영원히 아 들을 자신의 곁에 붙들어 두려는 의도로 간주할 수도 있다.

만약 아들이 정상적인 결혼생활로 접어든다면 그녀의 존재 가치는 매우 희박해질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사춘기에 접 어든 아들의 남성다움을 남편으로부터 전해들은 직후 그녀 의 반응은 아들의 성적인 타락부터 염려했다. 성에 대한 그 녀의 지나친 적개심과 두려움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그 리고 그녀의 걱정은 현실로 나타났다. 어머니는 자신의 꿈 이야기를 통해서 아들의 마음을 되돌리고자 했다. 그녀의 꿈 내용은 다음과 같다.“어머니가 꿈에 보니 자신은 비통에 잠 겨 나무판자 위에 슬프게 서있는데 옆에 웬 아름답고 수려 한 모습을 한 젊은 청년이 어머니에게 다가서면서 유쾌하 게 웃더랍니다. 그 청년은 어머니가 울면서 슬퍼하는 이유를 물었습니다. 어머니는 그에게 내가 타락하여 방황하므로 마 음이 슬프다고 대답해 주었습니다. 그 청년은 어머니를 위 로하며 주의를 잘 둘러보라고 했으며 그때 어머니는 거기에 내가 함께 서있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어머니가 더 자세 히 살펴보니 나도 어머니 바로 옆에서 그 나무판자 위에 함 께 서 있었던 것입니다. 저는 어머니의 꿈 이야기를 듣고 반 항했습니다. 그리고 그 꿈의 의미를 왜곡하여 전혀 반대의 의미로 해석하였습니다. 즉 어머니와 나는 같은 판자 위에 서 있었기 때문에 같은 입장이며 따라서 어머니는 어머니의 고집을 버리고 나와 같은 입장에 서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어머니는 주저함이 없이 말했습니다.‘아니다. 네가 있는 곳 에 내가 있겠다는 의미가 아니라 내가 있는 곳에 네가 있겠 다는 뜻이며 네가 어디 있든지 또한 네 곁에는 주님이 함께 계신다는 의미란다.’ 나는 나의 그릇된 해몽을 매우 합리적 이며 그럴듯하게 어머니에게 논리적으로 설득하려 했지만 어머니는 전혀 동요하지 않았습니다(St. Augustine 1971).”

이 꿈의 내용은 아버지의 죽음을 상징하는 나무판자 위에 두 모자가 함께 서 있다는 점이 매우 시사적이다. 그 모습은 어찌 보면 위태스럽기도 한 장면이다. 장애물이 사라진 토 대 위에 어머니는 아름다운 청년을 만났고 그는 다름 아닌 이상적인 아들의 모습이기도 하다. 어머니를 멀리하려는 아 들이 결국에는 자신의 곁으로 돌아온다는 무언의 메시지가

담겨있는 내용이기도 하다. 아들은 그러한 점을 부인하려고 했으나 마침내 자신의 고집을 접고 어머니의 곁으로 돌아 오고 말았다. 어머니의 승리이기도 하다. 아들이 그녀의 곁 으로 돌아가기로 결심한 것은 스스로 믿듯이 신의 인도에 의 한 것이라기보다 그 자신의 무의식적 욕구 및 소망을 실천 한 것이기 쉽다. 물론 어머니를 배신했다는 죄책감도 매우 컸을 것이다.

387년 그의 나이 33세, 암브로시우스에게 세례를 받은 후 에 귀국을 결심하고 오스티아에서 배를 기다리고 있는 사 이에 어머니가 56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자신과의 관계에 서 참으로 우여곡절도 많았던 어머니를 졸지에 잃은 그는 이루 말로 다 할 수 없는 슬픔과 회한으로 괴로워했다. 어 머니에 대한 그의 회상은 다음과 같이 이어진다.“어머니는 이렇게 말씀하셨다.‘내 사랑하는 아들아, 이제 나는 이 육신 의 삶을 통해 아무런 기쁨도 찾을 수가 없단다. 내가 이 땅 에 남아서 더 이상 무슨 일을 하며 무슨 목적으로 살아야 하 겠느냐? 이 세상에서는 더 이상 바랄 아무런 소망이 없구 나. 이 세상에서 내가 미련을 두고 조금 더 살아보려고 애쓴 데는 오직 한 가지 이유가 있었단다. 그것은 이 어미가 죽기 전에 네가 그리스도인이 되는 모습을 꼭 보고 죽어야겠다 는 생각에서였다. 이제 하나님께서 나의 소망을 이루어 주셨 구나. 이제는 네가 세상이 주는 쾌락을 경멸하고 주님의 종 이 되었으니 말이다. 이제 내가 이 땅에서 할 일을 다 이루 었구나’ 이런 일이 있은 후 닷새 만에 어머니는 열병으로 몸 져눕게 되었습니다. 어머니는 열병으로 누우신지 아흐레 만 에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나는 어머니의 눈을 감겨 드렸습니 다. 허전한 내 마음은 슬픔의 대홍수로 흔들렸고 흐르는 눈 물은 걷잡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를 창조하신 하나 님이시여! 당신만이 아십니다. 자식을 위해 평생 고생하고 기도하신 어머니의 사랑과 이제 와서 철이 든 이 부족한 자 식의 짧은 효도가 어찌 감히 비교나 되겠습니까? 어머니는 내 생명의 지주였고 나에게는 너무 큰 위로였습니다. 그리 고 여지껏 나의 생명과 어머니의 생명은 하나였는데, 이것 이 이제 갈라지게 되었으니 내 영혼은 깊은 상처를 입었습 니다(St. Augustine 1971).”

어머니의 죽음을 계기로 그는 자신의 내부에 오랜 기간

간직되어 왔던 사랑에 대한 갈구와 좌절 및 애도반응을 재

경험 하고 슬픔으로 가득한 통한의 눈물을 통하여 일종의

카타르시스를 경험하고 스스로 치유되는 과정을 겪어나간

것으로 보인다. 그에게 회한의 눈물은 상처를 준 것이 아니

라 오히려 회복의 기능을 가져다 준 것이다. 그는 어머니의

죽음을 통하여 비로소 자신의 내면에 오래도록 간직해온 애

정의 진정한 대상이 누구였는지 깨닫게 된 듯하다. 그리고

(6)

성(聖)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告白)에 대한 분석적(分析的) 논평(論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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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순간 그는 자신의 나르시시즘적 자기애를 극복한 듯이 보인다(Brown 1968). 자기애를 극복한 토대 위에 그는 진 실로 이타적인 삶을 실천하기 위한 후기 반생의 터전을 마 련한 것으로 보인다. 그의 초기 반생을 따라다니며 끈질기 게 괴롭힌 자기애의 문제는 결국 성적인 일탈이나 현학적 인 논리에 의해서도 해결되기 어려운 문제였음에 틀림없다 (O’ Donovan 1980).

그런 점에서 Bion(1962)이 말한 보유(containment)의 개념은 아우구스티누스의 회심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수 있다. 엄마가 지닌 보유의 기능은 특히 이행기 시기(移行期 時期)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치는 것으로 비온은 프로이트 의 타나토스 개념을 유아가 느끼는 죽음에 대한 공포로 변 형시키고 아기의 부분 대상인 엄마 젖가슴과의 관계에서 유아가 엄마에게 투사하는 감정적 경험들을 엄마가 충분히 수용하고 해독시켜주지 못할 경우, 아기는 소멸에 대한 공 포로 생의 활력을 잃게 되어 그후에 상당한 감정적 흔적과 사고 장애를 남길 수 있다고 하였다.

또한 Bion(1959)은 이러한 보유 기능의 실패는 아기와 유방과의 적절한 관계를 파괴시키므로써 결과적으로 심각한 충동 장애를 야기 시킨다고 보았다. 아우구스티누스의 마음 이 흔들리기 시작한 것은 친구의 죽음이 계기가 되었지만 결 정적인 순간은 어머니의 죽음을 맞이하면서였다. 두 인물 의 죽음을 통하여 그는 죽음의 공포, 소멸의 공포에 직면하 게 되었으며 결국 그가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보다 포용적으로 자신을 담아주고 끌어안는 원초적 모성의 세계 로 돌아가는 것이었다. 그것은 어머니의 손길과 품안을 떨 치고 멀리 달아났던 자신의 과오를 뉘우치는 순간인 동시에 영원한 생명의 양식을 제공하는 어머니의 젖가슴과 다시 화 해를 도모하는 순간이기도 했다. 따라서 그는 신의 축복으로 가득찬 천국의 세계, 다시 말해 상징적인 어머니의 품안에 서 영원히 살기로 작정하고 자신의 모든 것을 신에게 의탁한 것이다. 그리고 아우구스티누스는 노년에 이르러 죽을 때 까지 그러한 언약을 굳게 지켰다. 생전에 어머니가 그토록 꿈꾸었던 백일몽이 실현된 것이다.

성(性)과 결혼(結婚)

아우구스티누스의 삶에서 이른 나이에 경험한 성과 결혼 의 문제는 그에게 이루 말할 수 없는 죄의식을 남겨주었다.

그는 아버지의 존재를 강력한 경쟁자로 인식했으며 어머니 와의 밀착된 관계를 유지하는데 있어서 매우 성가신 훼방꾼 으로 간주했다. 그러나 막상 아버지가 사망하자 어머니의 지 나친 간섭과 의존성에 대하여 반발하는 이율배반성을 보였

다. 어머니의 존재는 그에게 영원히 범접할 수 없는 이상적 인 존재로 남아있기를 바랬는지도 모른다.

그는 16세의 어린 나이에 이미 한 여성과 동거를 시작했 다. 그의 결혼에 적극적으로 반대한 어머니 의사를 무시하고 그는 육체적 쾌락에 탐닉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아우구스티 누스의 조숙성은 물론 조기 모자관계에서 어머니가 가한 성 적인 자극의 결과일 수도 있겠지만 그 자신의 강력한 근친 상간적 욕망에서 비롯된 것이기 쉽다. 그러나 아들이 자신 이외의 여성에게 관심을 보이고 접근하는 것에 대한 그녀의 지나친 간섭과 견제는 오히려 역효과를 낳았다. 그는 어머 니의 간섭에 짜증을 느끼고 더욱 타락된 길로 접어들었기 때문이다. 어머니는 결국 자신이 정한 소녀를 아내로 받아들 일 것을 아들에게 강요했다. 어머니의 고집은 마침내 아들 의 고집을 꺾는데 성공했다. 그는 기독교에 귀의하고 성직 의 길을 걸었으며 결국에는 성자의 대열에까지 오름으로써 어머니의 기대에 부응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육체적 쾌락 을 포기하고 금욕의 길을 실천해 보였다. 그것은 어머니가 바라던 길이었다. 그리고 두 모자는 세속적인 욕망의 덫에 서 벗어나 성스러운 관계로 발전하면서 오염되지 않은 유 아적 단계의 공생적 관계로 환원되었다. 그 관계는 신이 내 린 축복의 시기이며 때묻지 않은 순수 그 자체의 관계였기 때문이다.

성과 결혼에 대한 아우구스티누스의 견해는 당시 성직자

들의 부정적인 견해와는 달리 매우 진솔하다는 점이 특징

일 것이다. 그러나 성과 결혼의 가치를 인정은 했지만 성적

인 쾌락에만 탐닉하는 것은 신의 은총을 받아들이고 다가

가는데 다른 무엇보다 큰 장애물이 된다는 점을 강조했다

(Clark 1996). 아우구스티누스는 결혼에 있어서 성교는 종

의 번식을 위한 행위로서 이루어질 경우에만 가치가 있는

것이며 이러한 필요성에서 벗어난 성교는 더 이상 이성에 속

한 것이 아니라 열정에 봉사하는 것이기 때문에 바람직하

지 못하다고 말했다. 이러한 주장에 대해서 Duby(1988)는

평가하기를 아우구스티누스는 순결과 혼인을 구분하는 차

원에서 성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선과 악이라는 이분법적

경계를 오가면서 혼인과 간통의 관점으로 문제를 논한 것

같이 보인다고 하였다. 실제로 아우구스티누스는 정식 결

혼을 한 적이 없었다. 한편 독일의 카톨릭 신학자 Ranke-

Heinemann(1990)은 더욱 강도 높은 비판을 가했다. 그녀

에 의하면 아우구스티누스는 성적 쾌락에 대한 증오심과 혐

오감을 부추긴 장본인이며 다른 신경증적 환자들과 마찬가

지로 그는 사랑과 성을 따로 분리시켰을 뿐만 아니라 성에

대한 불안으로 성적 쾌락 자체를 마치 지옥 체험이나 악몽과

도 같은 것으로 간주했던 인물이라는 것이다. 아우구스티

(7)

李 炳 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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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스는 어떤 점에서는 몇 가지 오류를 범한 것이 사실이다.

그는 인간의 의지와 관계없이 나타나는 성적 욕망의 근본적 인 원인은 아담과 이브의 원죄에서 비롯되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따라서 성과 원죄를 연결시킨 그의 강박적인 사고는 그후 오랜 기간 카톨릭 사회에서 마치 정설처럼 받아들여 지게 되었다. 그러나 그의 생존 당시에도 그러한 논쟁은 치 열하게 전개되었다. 특히 이단 선고를 받은 펠라기우스파 추 종자들과의 논쟁은 바로 성에 대한 태도가 주된 핵심이었다.

그들은 아우구스티누스의 견해에 대해 반대하였으며 수도 사 조비니안도 주장하기를, 결혼한 신도들이나 독신주의를 고수하는 신도들이나 모두 동등한 자격으로 천국의 보상을 받는다고 항변하였다. 그러나 조비니안 역시 정통 교단으로 부터 정죄되었다. 아우구스티누스가 살았던 북 아프리카 원 주민 사회에 만연했던 각종 이단 종파와의 접촉과 논쟁은 Bonner(1986)가 제시한 바처럼 아우구스티누스의 사유 체 계에 보이지 않는 영향을 준 것이 사실이다. 그의 어머니 모 니카는 그러한 온갖 이설과 유혹들로부터 자신의 아들을 보 호하고자 혼심의 힘을 쏟았으며 결국 오랜 정신적 방황끝에 아들이 기독교신앙으로 회심하도록 하는데 성공했다. 아우구 스티누스의 평생 화두가 되었던 정욕의 문제는 단순한 선 과 악의 문제가 아니지만 그는 성과 결혼에 대해 부정적인 태도를 보였다기보다는 오히려 인간의 의지와 통제력을 뛰 어넘는 것으로 인정하고 다만 정욕이 신에게 다가가는 의지 를 약화시킨다는 점에서 주의를 환기시킨 것으로 보인다. 따 라서 그는 성과 결혼에 반대한 것은 결코 아니었다. 그러나 아우구스티누의 영향에 힘입어 그후 일천년 이상 카톨릭 사 회에 정착된 엄격한 금욕주의 전통은 마르틴 루터의 종교 개혁으로 일거에 무너지고 말았다.

아우구스티누스는 16세부터 동거하던 여인과의 사이에 서 사생아를 낳았다. 그러나 어머니의 개입으로 그는 15년 간 함께 했던 동거녀와 헤어지고 한 소녀와 정식결혼을 하기 로 약속했다. 그러나 그 소녀는 결혼 연령에 두 살이나 미달 이었기 때문에 그는 2년을 더 기다려야만 했다. 헤어지기로 한 동거녀는 사생아를 그에게 맡기고 아프리카로 돌아가 버 렸다. 그러나 그 사이에 그는 또 다른 정부를 사귀며 쾌락의 늪에 빠지고 말았다. 그는 자책감에 빠져 악의 기원에 대해 깊이 연구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 해답은 손쉽게 얻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는 개종한 이후에도 여전히 정욕 에서 자유롭지 못하였다. 그래서 그는 계속해서 신에게 호소 한다.“나는 망할 자이옵니다. 주님이시여 나를 불쌍히 여기 소서. 나는 병든 사람입니다. 분명히 당신은 내가 육체의 정 욕과 안목(眼目)의 정욕(情慾), 그리고 이생의 자랑으로부터 벗어나라고 명하십니다. 당신은 음란을 삼가라고 명하십니

다. 그러나 아직도 내 기억 속에는 나의 옛 습관이 고착시 켜 놓은 그같은 영상이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내가 깨어 있 을 때는 그러한 영상이 내 생각 속에 들어와 큰 힘을 발휘 하지 못하지만 내가 잠잘 때는 그 같은 영상이 내 속에 들 어와 내게 즐거움을 제공할 뿐만 아니라 나의 동의를 얻어 내어 실제 행동과 유사한 행위를 유발하고 맙니다. 오, 나 의 주님이시여. 그러할 때 나는 도대체 누구입니까? 오 전 능하신 하나님이시여. 당신의 손이 내 영혼의 모든 병을 고 칠 수 없으십니까? 당신의 크고 넘치는 은혜가 잠잘 때의 음란한 움직임을 제지할 수는 없으십니까?(St. Augustine 1971)” Dollimore(1991)는 동성애와 호모 공포증에 대한 역사적 사례를 탐색하는 가운데 아우구스티누스의 과도한 성적 집착을 일종의 성도착으로도 간주할 수 있다고 하였는 데 성에 대한 그의 중독증은 분명 정상적인 범주를 넘어선 것으로 보인다. 마르틴 루터는 자신의 과도한 정욕 때문에 발작까지 일으키며 투쟁하다가 결국에는 종교개혁을 통하 여 성직자의 금욕주의를 타파하고 마침내 결혼을 합법화시 키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아우구스티누스는 정욕과의 싸움에 서 오랜 기간 사투를 벌이다가 결국에는 하나님이 주신 모 든 것은 선하지만 문제는 인간의 의지에 달려있다는 결론 에 도달하므로써 정신적 평안에 도달한다. 프로이트가 처음 에 성욕설을 내세웠을 때 종교계가 보였던 심한 반발을 생 각해 본다면 마르틴 루터나 아우구스티누스가 그토록 처절 하게 씨름했던 정욕의 문제에 왜 사람들이 주목하지 못했는 지 궁금해진다. 아니면 의도적으로 회피하고 싶었는지도 모 른다. 프로이트가 강조했던 성과 공격성의 문제는 인간의 의식과 행동을 지배하는 강력한 동기임에 분명하다. 그러나 아우구스티누스와 루터는 성의 문제로 고통받았으며 로욜라 는 자신의 공격성 문제로 고통을 받았다. Mottola(1964)가 소개한 로욜라의 영성훈련기법도 알고보면 인간을 고통에 빠트리는 성과 공격성의 유혹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자기 단련법의 일종이라고 볼 수 있다. 아우구스티누스와 루터의 성과 결혼에 대한 태도에는 그들 자신의 개인적 체험이 중 요한 동기를 제공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이처럼 위대한 성자들조차 자신들의 성적인 고뇌와 갈등을 대중들 앞에 진 솔하게 고백한 점을 돌이켜 본다면 우리가 과연 그들만큼의 솔직한 자기 고백을 털어놓을 수 있을지 의문이 든다. 그러 나 정신분석의 출현으로 고해성사를 능가하는 자유연상의 기법은 그러한 고백의 가능성을 열어 놓았다고 볼 수 있다.

물론 그 때문에 숱한 비난을 감수해야 했지만 그러나 오늘

날에 와서는 분석을 받는 성직자들, 또는 성직자로서 분석

가가 된 사람들도 나오게 되었다는 점에서 시대의 변화를

절감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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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聖)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告白)에 대한 분석적(分析的) 논평(論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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맺 음 말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을 통해 살펴본 초기 반생의 삶 은 그에게는 그야말로 악몽과도 같은 정신적 방황의 시기였 다. 그것은 단순한 방황이 아니라 지옥의 나락에까지 이른 온갖 쾌락과 비행, 그리고 사교(邪敎)에 빠져든 시기였다. 그 러나 그는 인생의 대전환기를 맞이하여 기독교에 귀의하고 세례를 받으므로써 자신의 후기 반생을 금욕과 경건한 신앙 적 태도로 일관하여 사후에는 성자의 대열에까지 오르게 되 었다. 그를 구원한 것은 그의 어머니였으며 그 또한 어머니 를 구원한 셈이었다. 어머니의 평생 소원은 아들을 성직자로 만드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들 모자는 동일한 백일몽을 공 유한 사이였다. 성적인 욕망과 단절된 성스러운 영적 세계 의 추구는 세속적인 차원에 머물렀던 다른 가족들이 넘볼 수 없는 세계였기 때문이다. Foucault(1985)는 중세의 고해성 사에서 강요된 성에 대한 적나라한 고백이야말로 권력의 지 배구조를 유지하고 강화하는 강력한 도구로 이용되었음을 지적하였지만 다른 한편으로 본다면 어머니 모니카가 아들 을 붙들고 통곡하며 기도하는 장면처럼 성에 대해 거침없이 고백하는 고해성사 역시 상당히 에로틱한 장면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Allport(1967)도 지적한 바 있듯이 신앙이 흔 히 보여주는 신경증적 기능이 종교의 모든 것은 아니라고 본 다. 아우구스티누스의 경우에서 볼 수 있듯이 신앙적 고백과 기도의 치유적 기능은 오랜 세월 수많은 사람들에게 상당한 도움을 준 것이 사실이기 때문이다.

정신분석적 관점에서 살펴본 아우구스티누스의 핵심적 갈 등은 역시 모자관계에서 비롯된 의존과 좌절 및 분리불안의 문제, 오이디푸스적 갈등의 해결, 성적 욕망과 죄의식, 청소 년기적 정체성의 위기와 혼란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것으 로 보인다. 그의 근친상간적 욕망 및 마돈나 콤플렉스는 거 세공포와 맞물려 그를 세속적인 육체적 타락의 세계로 탐닉 하게 만들었으며 어머니에 대한 구원환상은 평생을 통한 성 직자의 길을 통해 실현되었다. 모자간에 이루어진 무언의 언 약은 두 사람 모두에게 각기 육적인 존재에 불과했던 남편 과 아버지에 대한 승리를 의미한 것이며 그들 간의 밀착된 관계 속에 하늘에 계신 신의 존재를 개입시킴으로써 이상적 인 삼위일체를 이루는 꿈을 달성시켰다. 성자의 도시 히포가 야만족들의 포위와 공격으로 위기에 놓인 가운데 조용히 숨 을 거둔 아우구스티누스의 모습은 평생을 두고 선과 악의 이 분법에서 자유롭지 못했던 그 자신의 화두를 떠올리게 하지 만 그는 철저한 자기 분석에 기초한 고백록을 완성시킴으로

써 자기 치유의 과정을 실천해 보인 것이며, 오늘날에 이르 기까지 그의 존재가 많은 사람들로부터 숭앙받는 이유도 그 의 심오한 신학에 있다기보다는 오히려 그처럼 진솔하고 처 절한 자기 고백의 용기를 보였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아우 구스티누스가 보여준 용기는 개인적 기도의 차원이 아니라 자신의 은밀한 욕망과 갈등을 여과없이 대중들에게 공개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 매우 이례적인 것임에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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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STRACT

A Psychoanalytic Note on the Confessions of Saint Augustine

Byung-Wook Lee, M.D.

The early half of St. Augustine’s life, revealed through his famous confessions, seems to have been a nighmare, marked not simply by adolescent wandering, but extremely corruptive experiences like sexual addiction, deviate behavior and paganish heresy. But he reached a great turning point in his life and converted to the Catholicism, posthumously being named a saint.

This paper explores St. Augustine’s confessions focusing on the mother-son relationship, including the mutual interdependency and separation anxiety, incestuous wishes, daydreaming, oedipal conflict, rescue fantasy, castration fear and guilt, latent homosexuality, adolescent paradox and identity crisis, and final resolution in ascetic spiritualism and altruism. St. Augustine went through the dichotomy of good and evil; he eventually overcame his long-standing obssesions and possessions colored by sexual desires. He confronted his mother’s death, and experienced deep sorrow and a dreadful sense of nothingness. Finally, regretful of his escape from his mother’s hands and breast, he sought reconciliation with his mother, choosing to return to the blissful paradise of his mother’s bosom.

I believe that St. Augustine has been admired by many people for such a long time because of his frankly confessed life history rather than his excellent theology. He was the first man with psychologically oriented consciousness, and his self analysis through his confessions helped him, in the manner of modern writing therapy.

KEY WORDS

: Augustine·Confession·Mother-son relations·Self-cure.

참조

관련 문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