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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SEP Original Article 精 神 分 析 :第 15 卷 第 2 號 2 0 0 4
J Korean Psychoanalytic Society Vol.15, No. 2, Page 248~257, 2 0 0 4
루터와 로욜라의 종교체험(宗敎體驗)에 대한 분석적 논평(分析的 論評)
李 炳 郁
*A Psychoanalytic Comment on the Religious Experiences of Luther and Loyola
Byung-Wook Lee, M.D.*
머 리 말
인류의 역사에서 기독교문명의 존재는 그 영향력에 있어 서 거의 절대적인 위치를 차지하여왔다. 그리고 로마제국이 동로마와 서로마로 분리되어 세계를 지배하였듯이 기독교문 명 또한 신구교로 분리되어 로마카톨릭과 프로테스탄트로 양분되어 오늘날에 이르렀다. 기독교세계의 양분은 끊임없 는 종교전쟁이라는 엄청난 대가를 지불하였지만 그러한 분 리의 시발점은 결국 마르틴 루터의 종교개혁으로부터 시작 되었으며 그에 대한 반동으로 카톨릭사회 수호라는 기치를 앞세운 로욜라의 예수회운동이 출현하게 되었다. 이처럼 루 터와 로욜라 두 인물이 기독교사회의 진로에 끼친 영향은 가히 절대적이었으며 그들의 존재는 과거나 현재나 변함없 이 수많은 기독교신자들에게 카리스마적 존재로 추앙받고 있다는 점에서 관심의 대상이 아닐 수 없다. 특히 신대륙의 발견은 두 인물의 추종세력들이 경쟁적으로 자신들의 종교 적 기반을 확장하는 시험무대로 이용하게 만드는 계기를 마 련해줌으로써 북미대륙은 프로테스탄트 개신교의 영향권에 그리고 중남미대륙은 정통 로마카톨릭의 영향권 하에 놓이 게끔 되었다. 그중에서도 특히 로욜라의 강력한 지도력에 이끌린 예수회 신부들의 헌신적인 노력과 희생은 남미대륙 에서 눈부신 업적을 이루었지만 동양에서는 상대적으로 부 진한 성과를 보였다. 루터와 로욜라의 공통점은 그들 각자가 경험했던 특이한 종교체험을 토대로 서로 상반된 노선의 선도자로 나섰다는 사실이다. 루터는 프로테스탄트 운동의 강력한 지도자였으며 로욜라는 로마카톨릭사회의 부흥운동 에 있어서 실질적인 막후 실력자였다는 점에서 그들이 겪은
종교체험의 본질과 의미가 무엇인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또한 그들의 삶과 성장과정이 각자의 종교체험 및 그들의 향후 진로에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부 분이기도 하다. 현대의 대표적인 분석학자인 에릭슨과 마이 스너는 각기 루터와 로욜라 두 인물에 대한 정신분석적 차 원의 연구를 시도한 바 있으며 이에 저자는 이들의 연구업적 을 토대로 기독교사회 역사의 향방에 큰 영향을 끼친 마르틴 루터와 로욜라의 종교체험을 종합적인 비교차원에서 다루 어 보고자 한다.
루터와 로욜라의 신앙적(信仰的) 대결(對決)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 1483~1546)와 이냐시오 로 욜라(Ignatius de Loyola 1491~1556)는 동시대 인물이면 서도 전혀 상반된 종교적 배경을 지니고 살았던 사람들이다.
루터는 교황에 대항하여 파문당한 인물이었고, 로욜라는 교 황에 대한 절대적인 충성으로 성자의 반열에 오른 인물이었 기 때문이다. 1492년 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 이후 스페인 의 국력은 급속히 강성해 졌다. 그리고 통일된 스페인 왕국은 바티칸의 강력한 후원을 배경으로 중남미 대륙을 거의 독점 하다시피 하였다.
반면에 독일의 신성로마제국은 바티칸의 보호아래 있었지 만 명목상의 제국일 뿐 수많은 영주들이 군웅할거 하는 상태 로 실질적인 지배권을 행사하고 있었기 때문에 국제적으로 는 별다른 힘을 못 쓰는 형편에 놓여 있었다. 그러한 시대적 상황을 배경으로 루터와 로욜라는 각기 무기력한 독일과 강력 한 스페인 땅을 무대로 바티칸에 대한 상반된 태도로 상호간 에 견원지간이 되고 말았다. 루터가 일으킨 종교개혁의 여 파로 오랜 기간의 농민전쟁과 종교전쟁이 잇따랐지만 그럼 에도 불구하고 두 인물은 한번도 직접 대면한 적이 없었다.
1517년 교황령에 의해 판매되기 시작한 면죄부 사건에 대
*翰林大學校 醫科大學 精神科學敎室
Department of Psychiatry, Hallym University College of Me- dicine, Seoul, Korea
李 炳 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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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 즉각적인 이의를 제기하며 반박하고 나선 마르틴 루터
의 행동은 전 기독교사회를 술렁이게 만들었으며 그때까지 한 평범한 사제에 불과했던 무명인 루터를 전국적으로 일약 유명하게 만들었다. 루터는 급기야 바티칸의 존재를 부정하는 독립된 교파를 형성하여 복음루터교회가 탄생하는 밑거름 이 되었으며 그의 교파는 그 후 독일과 북구라파를 중심으 로 교세를 확장해 나갔다. 헨리 8세가 주도한 영국 국교회의 이탈과 개신교파의 비약적인 세력 확장으로 라틴 유럽을 중심으로 오랜 기득권에 안주해 온 로마카톨릭사회는 위기 의식을 느끼지 않을 수 없게 되었으며 이러한 시대적 상황 을 배경으로 전통적 카톨릭교회의 수호와 교황권의 보호를 기치로 내세우며 나타난 로욜라의 예수회 운동은 당연히 프 로테스탄트 운동과의 대결을 피할 수 없게 되었다.
1556년 로욜라가 죽었을 때 그의 제자들은 뜨거운 열정 과 충성심으로 인도, 중국, 일본, 신대륙 등지로 흩어져 외방 선교에 혼신의 힘을 쏟았다. 로욜라와 함께 예수회를 설립했 던 자비에르도 일본에 최초로 기독교를 전파한 장본인이었 다. 예수회는 전 세계로 퍼져나가면서 교육에 투자하여 수 많은 대학들을 설립하기도 했다. 우리나라의 서강 대학교도 그렇게 해서 탄생한 예수회 소속의 교육단체이며 중앙도서 관 이름도 그래서 로욜라 도서관이다. 신구교간에 벌어진 치 열한 교세 싸움은 그 후 수 백년에 걸친 오랜 세월동안 계속 되었다. 그리고 개신교 내에서도 수많은 교파로 분열되어 장 로교, 감리교, 침례교, 칼빈교, 루터교, 얀센교, 훅스교, 안식 교, 성결교 등이 각기 교세를 확장하며 전도에 열을 올렸다.
그리고 500여년에 걸친 신구교간의 치열한 분쟁과 반목은 지금까지도 북아일랜드에서 지속되고 있다. 16세기에 시작 된 루터와 로욜라의 신앙적 대결은 21세기에 도달한 이 시 점에서도 아직 승부가 나지 않은 상태로 남아있다. 그러나 첨예하게 대립한 두 인물 간에도 일치된 견해가 없는것은 아 니었다. 소위 반유태주의를 표방했다는 점에서는 기독교수 호라는 차원에서 두 사람이 일치된 입장을 보였다. 전략적 차원에서 로욜라는 은밀하게 자신의 목적을 추구해 나간 반 면에 루터는 노골적인 반감을 숨기려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대비를 이룬다. 따라서 루터는 모든 유태인의 거주지를 공 격하고 불태우라는 명령을 서슴지 않았지만(최창모 2004), 로욜라는 보다 장기적인 안목으로 교육에 투자할 것을 지시 하는 신중함을 보인 점이 다르다. 로욜라의 전략적 방침에 따라 그 후 예수회는 전 세계에 걸쳐 무수히 많은 학교들을 설립했으며, 이들의 기본 전략은 외방 선교에 치중하면서 현 지인의 관습을 존중하고 검소한 생활태도를 솔선수범하는 가운데 적극적인 봉사활동에 전념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원 주민들의 신뢰를 얻으면서 자연스레 기독교에 대한 호감을
갖도록 하는 전략을 밀고나갔던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더 라도 루터와 로욜라는 전혀 다른 포교 전략으로 임했다는 것 을 알 수 있다. 그러나 Paris(1983)와 같이 예수회의 존재 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이 적지 않은 것도 사실이다.
오늘날의 사회적 관점에서 두 인물을 평가한다면, 평민 출 신의 루터는 기득권층의 권위와 특혜를 타파했던 좌파적 혁 명투사였다고 할 수 있으며, 반면에 귀족 출신의 로욜라는 기득권 수호에 헌신적으로 봉사한 우파적 투사였다고 할 수 있다. 그들이야말로 전통적 기독교사회의 오랜 좌우파 대립 의 초석을 깐 셈이다.
마르틴 루터의 생애(生涯)
기독교의 역사에서 종교개혁은 기독교 전체의 기반을 뒤 엎은 엄청난 종교적 스캔들로 기록된다. 그러한 스캔들의 주 인공은 다름 아닌 독일의 마르틴 루터(1483~1546)였다.
그는 독일의 작센 지방 아인슬레벤에서 한스 루터와 마르가
레테 지글러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난 날은 마침 성
마르티누스의 날이어서 그에 따라 이름도 마르틴으로 지었
다. 그러나 이듬해 그의 가족은 만스펠트로 이주하였고 그는
14세까지 이곳에서 자랐다. 라틴어학교를 졸업한 후 집을
떠나 에어푸르트대학에서 인문학을 공부하고 22세부터는
아버지의 뜻에 따라 법학공부를 시작했으나 집에서 대학으
로 돌아가는 도중에 엄청난 뇌우를 만나 두려움에 떨다가 수
호성자인 안나의 도움을 구하고 수도사가 될 것을 맹세했
으며 그길로 아우구스티누스 수도회에 들어갔다. 24세에
사제 서품을 받고 첫 미사를 집전하였으며 이듬해에는 비
텐베르크대학에서 윤리학을 강의하기 시작했다. 1510년 그
의 나이 27세 때 수도회의 분쟁문제 해결을 위해 교황에게
올리는 상소문을 지니고 로마에 다녀왔으며 29세에는 비텐
베르크대학 신학부 교수로 정식 취임하여 죽을 때까지 교수
직에 있으면서 강의를 맡았다. 1517년 34세 때 유명한 [95
개조 반박문]을 마인츠 대주교 앞으로 발송했으며 그 이듬해
프랑크푸르트에서 개최된 도미니크회 총회에서 테체르가 루
터에 대한 반론으로 [106조문]을 발표하였다. 그와 동시에
루터에 대한 심문이 시작되었으며 그 후 교황청에서 파견한
특사와 치열한 논쟁이 계속되다가 결국 교황 레오 10세의
파문 위협이 있은 후, 루터가 시 광장에서 공개적으로 교회
법규집과 교황의 교서내용을 불태우는 행동을 보이자 1521
년 그의 나이 38세 때 정식 파문장이 그에게 전달되었다. 독
일 황제 카알 5세도 루터를 심문한 결과 그에게 이단을 선고
하였다. 39세에 그는 신약성서의 독일어 번역을 완성하고 그
의 나이 41세가 되었을 무렵 농민전쟁이 시작되었다. 그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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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이미 수도회와 결별한 그는 42세 때 카타리나 폰 보라와 결혼하였다. 다음해에 그의 첫 아들이 태어났으며 44세에는 딸 엘리자베트를 얻었지만 8개월 만에 사망하였고 46세에 다시 딸 막달레네를 얻었다. 그리고 49세 때 다섯째 아이 파 울이 태어났으며 51세에 막내딸 마르가레테를 얻었다. 54세 부터는 결석 증세로 시달렸으며 현기증도 심해졌다. 57세 때 그의 아내가 병석에 앓아눕게 되었으며 루터 자신의 병세 도 악화되어 그는 59세에 자신의 유언장을 작성하였다. 그 해에 딸 막달레네가 사망했다. 60세에 [유대인과 그 허위에 대하여]를 발표하여 반유대주의를 부추겼으며 62세에는 [악 마에 의해 세워진 로마의 교황에 반대하여]를 발표하였다.
그리고 63세에 만스펠트백작의 상속분쟁을 해결해주기 위 해 여행을 떠났다가 병세가 악화되어 곧 숨을 거두었다. 그 의 유해는 비텐베르크 교회에 안장되었다.
마르틴 루터의 정신역동(精神力動)
Erikson(1962)은 유명한 그의 저서 [청년 루터]를 통하 여 종교개혁의 장본인 마르틴 루터를 정체성의 위기 차원에 서 분석한 바 있다. 그에 의하면 루터 자신의 부친살해욕구 및 거세공포 그리고 항문기적 고착이 루터로 하여금 바티칸 의 아버지 교황을 거부하고 대적하게끔 이끌었으며 지상의 아버지를 포기하고 하늘에 계신 이상적 아버지를 열렬히 추 구하도록 하였다는 것이다. 가난한 광부였던 아버지 한스의 강요에도 불구하고 루터는 법학자를 원하는 아버지의 뜻을 결국 저버렸다. 그에게 있어서 아버지가 강요하는 법이란 결국 지상에 존재하는 모든 아버지들만 유리하게 만드는 불공평한 체제일 따름이었던 것이다. 따라서 그는 대학에 서 법학부 석사학위를 따는 성공을 거둔 이후에 자신도 설 명하기 어려운 무기력상태에 빠져버렸다. 일종의 성공우울 증 success depression 또는 성공공포증 success fear에 빠진 것이다. 그리고 대학으로 돌아가는 노상에서 마주친 뇌우 속에서 엄청난 공포감을 겪은 후에 이를 신의 계시로 받아들여 그 즉시 수도사가 되기로 결심하고 수도원에 들 어간다. 아버지 한스는 아들이 주장하는 신의 계시는 궤변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사실상 마귀의 음성을 들은것이라고 계속 주장했다. 그러나 루터는 일단 아버지의 의지를 꺾고 자신의 뜻대로 성공적인 신학자가 된 이후에는 그 화살을 바티칸의 교황에게로 돌린다. 항상 반항심에 젖어있던 루터 에게 권위적인 아버지와 교황의 존재는 강한 양가감정의 대 상이었다. 복종과 반항에 따른 죄의식 사이를 오가던 그에 게 지상의 부권을 거부하고 천상의 부권을 맞이하기까지에 는 상당한 정신적 방황이 수반되어야만 했다. 루터의 주된
갈등의 주제는 부권에 대한 반항인 것으로 보인다. 루터가 일으킨 개신교운동이 어원상 반항을 뜻하는 프로테스탄트 로 불리게 된 배경을 이해할만 하다.
그는 아버지의 권위와 요구에 반하였으며 모든 기독교인 이 따르는 지상의 아버지 교황이라는 존재에 감히 반기를 들 었다. 그러한 남다른 용기와 행동은 그 이면에 가로놓인 심 한 거세공포를 극복하기 위한 초강수였던 것으로 보인다. 더 구나 그는 왕성한 성욕의 소유자로 모든 성직자에게 강요 되는 금욕주의를 도저히 견딜 수가 없었다. 당연히 그는 그 러한 금욕주의에도 저항하였다. 이제 루터의 개혁을 통하여 개신교의 모든 성직자들은 결혼이 가능해졌으며 인위적인 금욕이라는 사슬에서 해방될 수 있게 되었다. 그것은 각자의 근친상간적 욕망을 대신할 수 있는 이성과의 결혼을 통하여 성적 욕구의 해소가 가능해졌음을 의미하며 그러한 욕구를 원천봉쇄함으로써 야기되는 온갖 변태적인 행위에서 벗어 날 수 있는 길이 열리게 되었음을 뜻하는 것이기도 했다.
따라서 잠재적인 오이디푸스 갈등의 해소는 더 이상 성모 마
리아 숭배의 필요성이 없어진 것이기에 오로지 복음이 전하
는 메시지 자체에만 몰두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마르틴 루터
는 이러한 무의식적 갈등 요인을 일거에 해소시켜주는 중추
적 역할을 떠맡은 것이다. 프로이트와 교류했던 스위스의 개
신교 목사 오스카 피스터는 로마카톨릭에 대한 비판에서 카
톨릭의 이상은 결국 자연이 준 본능적 욕구의 억압에 있으며
많은 성자들 역시 도덕적으로는 존경을 받고 있지만 그들
이 한평생 노력한 것은 결국 자신들의 욕망을 부분적으로 승
화시킨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하였다(Gay 1987). 그런 점
에서 마르틴 루터는 성직자에게 주어지는 가장 큰 짐 가운
데 하나를 덜어준 위대한 공로자였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그는 자신에게 금지된 근친상간적 욕구 및 성적인 욕망을 실
현하였으며 동시에 그러한 금지의 주범이었던 현세의 아버
지와 교황을 적대시하고 대항함으로써 자신의 거세공포를
극복하였다. 루터는 당당한 승리자가 되어 자신의 욕망을
만족시키고 불가항력적인 존재들이라고 여겨졌던 강력한
경쟁자들을 물리침으로써 당시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심리적 혁명을 일으킨 장본인이 되었던 것이다. Bainton
(1995)은 자신의 가족에 대한 루터의 각별한 애정을 묘사
했지만 그와 동일한 가족애를 지니고 살던 유대인 마을을 불
태우라고 독려한 그의 행동에 대해서는 별다른 주의를 두
지 않았다. 분명한 사실은 마르틴 루터가 이성적이기 보다는
매우 격정적인 감정에 사로잡힌 인물이었다는 점이다. 그
는 항상 불안정하고 때로는 우울에 빠졌으며 자신의 신념
에 대해서도 끝없는 회의와 확신 사이를 오가며 갈등하고 고
뇌한 인물이었던 것이다. 반항과 복종, 항명과 죄의식의 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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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은 마르틴 루터에게 주어진 미완의 숙제였던 것이다.
마르틴 루터의 종교체험(宗敎體驗)
마르틴 루터가 22세 때 집을 떠나 대학으로 가는 길에 뇌 우를 만나 공포에 질린 나머지 성 안나의 도움을 청한 끝에 기사회생한 경험을 하였는데 그 순간 루터는 수도사가 되기 로 작심하고 아버지의 뜻과는 정반대의 진로를 걷게 되었다.
곧바로 수도원에 들어간 그는 1507년 사제가 되어 미사를 집전했으며 20대 초반의 루터가 성가대석에서 갑자기 쓰러 지며 고함을 지르는 등의 발작을 보인 것도 바로 그 무렵이 었다. 마치 신들림과 같은 모습을 보인 루터는 계속해서‘그 것은 내가 아니다’라는 말을 큰소리로 외쳤다고 전해진다.
그 장면을 목격했던 세 사람은 이후에 루터가 유명해진 뒤에 도 그를 추종한 적이 결코 없었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그들은 루터가 당시에 귀신들린 상태였다고 판단했는지도 모른다. 루 터는 그러한 발작 이후 심한 우울과 회의에 빠지기도 했다.
루터의 정신적 혼란상태 및 그의 성격적 결함에 대해 가 장 날카로운 공박을 가한 인물로 악명을 날린 로마교황청 문 서실장이었던 하인리히 데니플레 Heinrich Denifle는 루터 의 발작을 신으로부터의 계시나 은총이 아니라 개인적인 원 인에서 찾았다. 따라서 그에 의하면 뇌우 속에서의 서약이 든 성가대석의 발작 및 그 후에 루터가 일으킨 종교개혁이든 무엇이든지 간에 그러한 행동들은 신의 개입이나 성령과는 아무런 관련도 없는 것이며 한 개인의 망상적 오류에서 비롯 된 것임을 분명히 했다. 그리고 한 인간의 환상을 교리의 위 치에까지 끌어올렸다는 점에서 루터교를 평가절하하고 루터 의 전 생애 자체가 어쩌면 악마의 유혹때문이 아닌지 의구심 을 표하기도 했다. 또한 그는 루터의 반항적 기질에 주목하 고 자신의 개인적 심성 때문에 세상을 뒤집어엎기를 강력히 원했던 혁명적 인물로 평가하고 그러한 루터의 특이한 재 능을 선동가, 거짓 예언자의 재능과 연관지었다. 데니플레의 주장은 물론 바티칸을 옹호하고 루터를 공격하기 위한 목적 에서 나온것으로 다분히 의도적인 경향이 농후하지만 나름 대로 설득력을 지니는 부분이 없는 것도 아니다. 단지 악마 와의 관련성을 무의식적 갈등이나 환상으로 대체한다면 오 히려 현대의 심리학적 이해 및 설명이 가능해질 수도 있다.
키에르케고르도 그의 일기에‘루터는 전 기독교 사회에 대단히 중요한 환자’ 라는 표현을 쓴 바 있다. 여기서 환자라 는 표현은 물론 정신질환을 의미한 것이 아니라 정신적 고 통을 겪는 인간이라는 포괄적인 의미였을 것이다. 성가대석 에서 돌발적으로 나타난 루터의 발작은 일종의 히스테리성 발작으로 보인다. 그리고 일생 동안 루터는 유달리 강한 성
욕을 물리치기 매우 힘들어했던 인물이었다. 금욕적인 수 도생활은 그러한 루터에게는 너무도 감내하기 힘든 과정이 었을 것이다. 결국 그는 면죄부 판매를 계기로 삼아 바티칸 의 위선적인 금욕주의에 반기를 들고 복음주의 개혁을 내세 워 그 자신도 결혼하여 많은 자식들을 두게 되었다. 루터의 아버지 한스도 자신의 아들이 성적인 문제로 금욕적인 수도 사 노릇을 견디기 힘들 것이라고 이미 예견한 바 있다. 아들 의 특성과 기질을 잘 파악하고 있었을 아버지가 그런 예견 을 미리 장담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그는 아들 의 자위행위를 목격했던 것일까? 그러나 어디에도 그런 내용 의 기록은 전해지지 않는다. 다만 루터가 강한 성욕의 소유 자라는 증언은 많이 있다. 전해지는 기록들의 대부분은 루터 의 갈등을 영적인 측면에서만 부각시켰을 뿐 성적인 갈등은 언급조차 없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마르틴 루터의 정신병리에 많은 관심을 지니고 연구했던 덴마아크의 정신의학자 Reiter(1937)에 의하면, 루터 자신이 그의 초기 강연에서 남성의 사정행위에 대해 상 세하게 언급한 내용을 밝히고 있다. 루터는 자발적인 사정 행위, 즉 자위행위와 본인의 의사와 관계없이 일어나는 사 정행위, 즉 몽정이나 지나친 긴장상태에서 일어나는 사정행 위 같은 현상간의 차이를 구분하고, 루터 자신은 그러한 경 험 이후에는 상당한 심리적 갈등상태에 빠진 나머지 단식 을 행해보지만 역설적으로 더욱 상태가 악화됨을 겪는다고 고백하였다. 수도사로서의 첫 출발부터 루터에게는 강한 성 적 욕구 자체가 가장 참기 힘든 부분이었을 것이다. 그가 성 가대석에서 갑작스런 히스테리 발작을 보인 모습도 성적인 좌절에 시달린 많은 여성들에서 관찰할 수 있는 발작 양상 과 크게 다를 바 없다. 중세에는 그런 히스테리 발작을 보였 던 수많은 여성들이 마녀로 단죄되어 화형에 처해졌던 기록 들이 많다. 프로이트의 리비도이론 및 actual neurosis 개 념도 유사한 증세들을 보인 여성 환자들과의 분석 경험을 토 대로 나온 것이며, 그러한 전형적인 사례들은 고도의 산업화 과정에서 많이 사라지긴 했지만, Abse(1987)의 사례들에서 도 보듯이 현대사회에서도 그러한 히스테리 발작은 보다 교 묘한 형태로 바뀌어 나타난다. 극적인 전환반응은 매우 드물 어진 것이 사실이나 해리성 반응을 동반한 신체적 전환증 세는 여전히 출현한다. 다만 성적으로 개방된 오늘날에 이르 러 성적인 억압의 결과로 나타나는 히스테리 발작은 매우 드물게 된것이 사실이다.
로욜라의 생애(生涯)
이냐시오 로욜라(1491~1556)는 스페인 북부의 명문 귀
루터와 로욜라의 종교체험(宗敎體驗)에 대한 분석적 논평(分析的 論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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족인 바스크 가문에서 11남매의 막내로 태어났다. 그의 본 명은 이니고 로페즈 데 레칼데. 귀족 가문의 막내아들로 태 어났다는 사실만으로도 그는 이미 기득권 사회의 수호천사 역을 떠맡을 운명이 예정되어 있었던 것처럼 보이기도 한 다. 로욜라는 실제로 처음부터 신앙심이 돈독했던 인물이 아 니었다. 오히려 그는 26세에 이를 때까지 세속적인 허영과 야심에 가득 찬 인물이었다. 1521년 프랑스군대가 피레네 산맥을 넘어 스페인을 침공하자 나바르공의 군대에 합류하 여 용감하게 싸우다가 다리에 심한 부상을 입어 귀향하게 되었으며 로욜라성에 머물면서 어느 정도 상처가 아물게 되 었을 무렵, 그는 성인열전과 그리스도의 생애를 읽고 깊은 감명을 받았다. 그리고 31세가 되었을 때, 신에 대한 봉사를 결심하고 로욜라성을 떠나 몽세라트의 베네딕토 수도원에 기거하던 중에 자신의 옷과 검을 모두 버리고 순례자가 되었 다. 그 후 작은 도시 만레사에 도착한 그는 카르도넬 강가 의 작은 동굴 안에서 기도와 금식으로 고행을 계속했다. 로 욜라는 매우 심한 우울상태에 빠져서 어떨 때는 자살까지 생 각할 정도였으며 이러한 고통스런 심적 과정을 통하여 그는 영적인 체험을 하게 되었다(St Ignatius 1992). 그 후로 전 혀 다른 사람이 된 로욜라는 신을 위한 봉사의 첫 단계로 다른 사람들을 돕기로 결심하였으며 그러기 위해서는 사도 의 길을 걸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는 33세의 나이로 고등 학교에 들어가 어린 소년들과 함께 라틴어를 공부하였으며 그 후에는 알칼라대학에서 수업을 계속 받았다. 학업 도중에 도 그는 만레사에서 얻은 영성수련 체험을 통하여 다른 사 람들에게 영적인 도움을 주고자 열심이었다. 36세에는 살 라망카로 가서 자신의 뜻을 펼치고자 하였으나 그의 의도를 의심한 종교심문관은 로욜라를 투옥하고 다른 활동을 금지 시켰다. 그러나 로욜라는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고 37세 때 파리로 가서 42세가 될 때까지 인문학과 철학을 공부했다.
그 와중에도 그는 계속 다른 사람들에게 자신의 영성수련을 지도했다. 이렇게 그는 자신만의 독특한 신비적 체험을 통 해서 이후에 예수회 훈련의 지침이 되었던 영적 훈련방법 을 실천해 나갔던 것이다. 그는 파리에서의 대학공부를 끝 내고 46세에는 드디어 사제 서품을 받았다. 1537년 그는 로 마로 가는 도중에 라스토르타의 성당에서 영적 환시를 경 험하고‘예수의 동반자’ 라는 단체를 조직했다. 1539년 로욜 라와 그의 추종자들은 새로운 수도회인 예수회 설립을 구 상하고 교황 바오로 3세에게 청원하여 1546년 마침내 인가 를 받기에 이르렀다. 로욜라는 선언하기를 교황의 지시에 대 한 무조건적인 충성과 믿음으로 강력한 예수 그리스도의 군 대가 될 것임을 공표하였다. 초대 총장으로 선출된 이후 그 를 따르는 예수회 사도들이 모든 대륙으로 흩어져 파견되어
나가면서 오늘날에 이르렀다. 그의 사후 66년이 지난 1622 년 로욜라는 바티칸의 교황 그레고리우스 15세의 공식 발표 에 의해 성인으로 추대되었다.
로욜라의 정신역동(精神力動)
이냐시오 로욜라는 스페인 북부의 외진 변방 바스크 지방 출신이었다. 비록 귀족가문이긴 했지만 그가 속한 지역의 바스크인들은 독립심이 유달리 강한 기질을 타고나서 오늘 날도 스페인으로부터의 분리독립을 외치며 끝까지 저항하 고 있는 특이한 민족이다. 소위 에타로 불리는 저항 단체는 지금도 험준한 피레네 산맥을 거점으로 하여 스페인의 부당 한 지배에 무력 저항을 보일 정도로 바스크인들의 반골기 질은 오랜 역사와 전통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Meissner(1992)는 로욜라 가문의 역사에 대해서도 소상 히 소개하고 있는데, 그에 의하면, 로욜라는 어느날 갑자기 야심에 가득 찬 세속적 군인에서 신성한 그리스도의 군대를 지휘하는 사령관으로 변신한 것으로 이를 종교에서는 회심 이라고 하는데 여기에는 상당한 죄의식이 관여된 듯 하다.
실제로 삶의 고통과 고달픔이 무엇인지 겪어보지 못하고 자 란 귀족 가문의 막내아들로서 단순히 영웅심과 허영심의 발 로에 이끌려 끔찍스런 살육의 현장에 동참하면서 느꼈을 정 신적 충격과 회의를 짐작해 볼 수 있다. 더욱이 중상을 입고 투병하는 가운데 자신의 장래 문제도 곰곰이 생각했을 법 하다. 가문을 승계할 장자의 입장도 아니었으며 그렇다고 학 문적 자질도 뛰어나지 못한 자신의 처지를 고려해 봤을 때, 그가 선택할 수 있는 당시의 가장 큰 출세의 문은 성직자가 되는 길이었을 것이다.
중세 유럽에서 카톨릭 성직자가 되는 길은 아무나 걷는 길 이 아니었다. 그리고 당시 바티칸의 영향력은 모든 왕족들 위에 군림하고 있던 실정이었다. 부모의 곁을 떠나 오랜 수 도생활과 조직운영에 몸담게 된 로욜라의 생애는 금욕과 기 도, 그리고 교황에 대한 절대적인 충성으로 일관한 삶이었다.
그는 자신의 아버지를 거부하고 그 대신 교황 및 신적인 아
버지를 섬기기로 결심하였다. 그리고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어머니를 소유하는 대신 성모 마리아 숭배에 몸담았다. 그의
오이디푸스 갈등은 자신의 고향에 잠시도 머무르지 못하게
끔 하였으며 먼 길을 떠나 그보다 더욱 성스러운 가치를 부
여해줄 수 있는 대상으로 향하도록 함으로써 그는 그런대로
만족된 삶을 영위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리고 끊임없이 출
몰하는 갈등적 요인과 맞서기 위해서는 반복적이고도 쉴 새
없는 묵상과 기도가 요구되었을 것이다. 이처럼 끊임없는 자
기감시와 단련 및 교육은 일종의 자기암시와 같은 작업으로
李 炳 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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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 철저한 의식전환과 변신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필수불가
결한 과정이 되는 것이다. 로욜라는 결국 교권과 교황에 대 한 충성심이 인정되어 성자로 시성됨으로써 자신의 부모와 형제들이 꿈도 꿀 수 없는 위치에 올라 그들을 오히려 영적 으로 인도할 수 있는 자리를 차지하는데 성공하였다.
로욜라의 종교체험(宗敎體驗)
로욜라의 종교체험은 다마스커스로 향하는 도중에 사도 바울이 경험했던 것과 유사한 환시경험이 특징이다. 바울의 회심과 관련한 종교적 환각 체험에 대하여 손진욱(2003) 은 바울 자신의 변화에 대한 열망과 심리적 위기의식이 투 사된 결과로 보았다. 로욜라 역시 그와 유사한 심리적 동요 와 위기감에 사로잡힌 상황에서 강력한 종교적 환각 체험 을 겪었던 것이다. 물론 그러한 환각 경험은 그가 동굴 안 에 은둔하며 오랜 기간 기도와 금식으로 자신을 단련하던 중 에 일어난 것이었기 때문에 단순히 감각박탈 상태의 결과 로 간주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신체적 상태뿐 아니라 당시 의 로욜라가 지녔던 심리적 상태에도 주목하지 않을 수 없 다. 당시 그는 심한 우울증 상태로 심각한 죄의식과 자학적 심리상태에서 자살까지 고려할 정도로 고통의 나날을 겪고 있었지만 자신만의 독특한 영적인 훈련방법을 통해 극복해 내었다. 로욜라가 작성한 영성훈련이라는 소책자는 예수회 의 가장 중요한 교과서로 인간의 내적 발전단계의 개요를 기록한 내용이다. 그가 영성훈련을 고안할 당시 그에게 가장 큰 영감을 불어넣어준 것은 성모 마리아였음을 그 자신이 스스로 확신하고 있었다. 거의 절망적인 심리상태에서 그가 경험했던 환시효과는 로욜라 자신의 내면적 상황을 그대로 반영한 것이기 쉽다. 로욜라로 하여금 세속적, 육체적 단계로 부터 영적 단계로 이끌어준 존재는 분명 성모 마리아였다.
그가 경험한 영적인 황홀경은 조기 모자관계의 공생적 단계 에서 경험하는 전지전능적 대양감으로 대변되는 합일적 경 지를 나타낸다. 깊은 절망적 우울감으로부터 조증적 방어를 통한 극적인 반전이 이루어진 셈이다. 이러한 심리적 과정은 뼈아픈 죄의식에 사로잡힌 로욜라로 하여금 일순간에 놀라 운 심기일전의 계기를 마련했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종 교적 열정에 사로잡힌 이후에도 그는 비슷한 환각을 경험한 다. 성지 순례에 실패한 후 로마로 입성하기 직전에도 그는 성모 마리아의 모습을 목격한 것이다. 마치 사도 바울이 다 마스커스에 입성할 때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목격했던 것 과 비슷하게 말이다. 그러한 체험은 놀라운 종교적 확신을 심어주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로욜라의 영적인 체험은 물론 그가 남긴 자전적 기록(St Ignatius 1992)에 의존하여
운위되고 있는 것이지만, 엄밀한 의미에서 그것은 본인이 쓴 기록이 아니며 로욜라의 회상에 기초한 구술 내용을 그의 한 추종자가 받아 적은 것이기 때문에 오늘날의 시점에서 그 진위 여부를 확인할 도리는 없다. 그러나 그와 유사한 영 적 체험은 이미 그 이전부터 동서고금을 통하여 흔히 목격되 고 언급되어온 내용이기 때문에 진위 여부를 가린다는 것은 큰 의미가 없을 것으로 생각된다.
예수회의 전통적 영신수련법은 로욜라가 창안한 것에 전 적으로 기초하고 있다. 그는 자신만의 개인적 수련법을 개발 하여 영적으로 거듭나는 과정을 기록으로 남겼는데, 특히 기도와 금식, 그리고 끊임없는 고행과 묵상에 더하여 이미 지 상상 및 시각적 훈련을 통한 신비적 경험을 강조한다는 점에서 Jung이 즐겨 시행했다는 이미지 응시법과 일맥상통 하는 측면도 엿보인다. 또한 이들 묵상수행법은 불교에서 말하는 관법(灌法)과도 일맥상통하는 측면도 있다. 예수회 전통에 따른 5단계 수련과정은 다음과 같다. 제1단계는 도 움을 청하는 기도로 자신의 내적인 상태를 살피고 깊은 통 찰을 구하는 과정이다. 제 2 단계는 반성과 감사의 기도로 자 신의 부족함과 나약함을 깨닫고 신의 선물과 축복에 감사 하는 마음을 갖는 과정이다. 제 3 단계는 자신의 행동에 대한 성찰이 요구되는 과정으로 신의 요구와 말씀 그리고 그에 대 한 자신의 응답이 무엇이었는지 살피는 과정이다. 제 4 단계 는 회심의 과정으로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신의 사랑을 확인 하는 과정이다. 마지막으로 제 5 단계는 미래를 향한 희망적 결단의 과정으로 신의 권능으로 강인해진 힘을 바탕으로 신의 인도에 따라 의지와 확신으로 전진해나가는 과정이다.
Mottola(1964)의 소개에 의하면, 각각의 수련단계에서는 5 가지 주제에 대한 집중적인 명상이 요구되는데 그것은 바로 창조, 인간, 신의 왕국, 그리스도, 삼위일체 등을 말한다. 약 4주간의 명상기간을 통하여 각 단계마다 각자의 삶의 혼란, 그리스도의 삶, 그리스도의 사랑, 십자가 처형, 그리스도의 부활 등에 대한 명상으로 이어진다. 로욜라의 묵상법은 오 관묵상을 특징으로 한다. 다시 말해서 인간의 오관 지각을 동원한 묵상을 통하여 신비적 감각체험을 능동적으로 지향 함으로써 일종의 영적 황홀경에 도달한다는 것인데 이는 인 도의 오랜 요가수행법이나 명상비법 등의 전통과도 일치하 는 특징을 보인다.
종교체험(宗敎體驗)과 정신역동(精神病理)
종교적 체험은 적절한 분석의 대상이 될 수 없다는 점은 이
미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러나 모든 종교적 체험이 성스럽고
영적인 것만은 아니다. 임상적인 관점에서 본다면 종교적
루터와 로욜라의 종교체험(宗敎體驗)에 대한 분석적 논평(分析的 論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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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상이나 환각 경험은 실로 빈번하게 목격되는 현상이며 또 한 다양한 종교의 이름으로 체험되는 모든 현상들이 고차 원적인 것만도 아니다. 문제는 그러한 체험들의 주체가 어떠 한 인격적 토대위에 어떠한 심리적 상태에서 이루어진 내 용인가 하는 점이 중요한 핵심이 된다.
저급하고 조잡한 내용들로 이루어진 종교적 체험들도 많 은 것이 사실이다. 소위 정신질환자들의 종교적 체험은 각 자의 정신병리를 반영하는 수가 많다. 따라서 건전한 인격 의 소유자 및 성자들의 종교적 체험과 환자들의 체험을 동 일선상에서 논한다는 것부터가 잘못된 것일 수 있다. 인간 심리의 특징 중의 하나는 자신의 내면적 상태를 외부로 투사 한다는 점일 것이다. 다시 말해서 부정적 감정상태에 몰입 된 사람은 마귀의 형상을 볼 가능성이 매우 높아지며 유아 적 황홀경에 도취된 사람은 사랑에 충만된 신의 은총을 마 주할 가능성이 높아지기 마련이다. 모든 종교적 체험을 병리 적 현상으로 간주하는 것은 매우 경솔한 일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적지 않은 경우에서 체험의 당사자 그 자신의 심리적 상태를 반영하는 수가 많기 때문에 분석적 논의가 결코 무가 치한 것만도 아니다.
Freud(1907)는 다양한 형태의 종교행위를 강박신경증의 보편적인 표출양식으로 보았다. 이러한 주장은 결국 종교와 정신분석이 더 이상 함께 공존할 수 없다는 극단으로 치닫게 되는 결과를 낳고 말았다. 프로이트의 이러한 관점은 그의 제자 테오도르 라이크에 의해 더욱 정교화되었다. 그러나 정 신분석과 관련하여 종교적 신앙 문제로 진지하게 고민했던 인물은 다름 아닌 스위스의 개신교 목사였던 오스카 피스터 였다. 그는 프로이트와 교류하는 가운데 종교 없이도 정신분 석은 잘 되어 나갈 것이라는 확고한 신념에서 한 치도 양보 않는 프로이트의 태도로 인하여 심각한 고민에 빠졌던 것이 다. 결국 종교와 정신분석의 결합을 시도하려던 그의 계획 은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Pfister 1963). 한스 큉은 프로 이트의 신관에 대한 논의에서 프로이트의 무신론적 태도는 그 자신의 아동기 경험에 기인한 것으로 보고, 특히 어떤 특 정 종교의 교리에 얽매이지 않은 부모의 영향과 어릴 적 그를 돌보아 주었던 카톨릭신자 유모에 대한 부정적인 경험, 그 리고 성장과정 중에 겪었던 반유대주의 경험 등이 프로이 트를 유물론적 무신론자로 이끌었다는 것이다(Ku ˝ng 1990).
종교를 보는 관점에서 프로이트와의 차별성이 가장 두드러 진 칼 융은 일찍부터 종교적 신비 체험에 주된 관심을 보였 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일생동안 교회 출입을 일체 하지 않았다.
Freud(1923)는‘이드가 있는 곳에 자아가 있게 하라’ 는 말로 교회의 권위에 정면 도전을 선언한 셈이다. 왜냐하면
미신에 의한 지배를 벗어던지고 이성에 의한 자기 극복을 말 한 것이며, 교회의 권위보다는 자기 통제에 의한 도덕성 발 휘가 가능하도록 이끄는 새로운 지식과 통찰의 깨우침이라 는 점에서 전통적으로 교회가 지배해온 서구정신사에 일대 지각변동을 일으킨 선언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모든 환 상을 포기하고 자신에 대하여 스스로 책임을 져야한다는 것 이며 동시에 신앙을 포기하고 도덕을 취해야 한다는 말이 기 때문이다(Jones 1991). 타협 형성을 누구보다 강조했던 Brenner(1973)는 종교도 일종의 미신에 기초한 것이라고 하였다. 그것은 종교가 미신에 불과하다는 의미가 아니라 종교의 근저에는 유아적인 마술적 사고의 흔적이 놓여있다 는 뜻일 것이다. Fromm(1959)은 정신분석을 포함한 모든 과학이 종교적 태도에 위협이 되는 것은 결코 아니라고 하였 다. 더욱 큰 위협은 인간 소외에 있으며 환상을 심어주는 사 회적 조건에 있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기도 하다.
종교체험에 대한 분석적 연구로 정평이 난 미국의 정신분
석가 Meissner(1984)에 의하면, 종교적 체험 및 태도에서
보이는 신경증적 요소와 마찬가지로 무신론적 태도에도 역
시 동일한 신경증적 요소가 내재된 것으로 보면서 종교는 유
아기적인 기능뿐 아니라 자아의 적응을 돕고 완성시키는 역
할도 한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그는 위니코트의 이행기 현
상 개념을 통하여 주관성과 객관성을 엄격히 구분한 프로이
트의 이원론을 넘어서고자 하였는데, 그가 말한 이행기 현상
으로서의 종교 개념은 마이스너의 핵심적인 이론적 토대가
되는 것이다. 이행기 현상이라는 것이 내부와 외부, 주관과 객
관 사이의 경계선 상에 존재하는 심리적 공간에서 이루어지
는 심리적 현상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유아기적인 주관성의
세계에서 성인기적인 개관성의 세계로 변천하는 과정에서 자
기를 위로하고 지탱시켜주는 기능을 하는 중간 대상의 존재는
인간의 성장단계에서 없어서는 안 될 매우 중요한 조건으로
서 작용한다. 그는 기도의 예를 들면서 기도의 실제적인 대
상은 존재하지 않지만 그 어떤 심리적 공간으로 들어가는 중
간 대상으로서의 기능이라는 관점에서 기도의 중요성을 강
조하였다. 마이스너와 마찬가지로 Rizzuto(1979) 역시 신의
존재에 대한 인간적 열망을 위니코트의 이행기 공간 및 환상
개념으로 설명하고자 했다. 물론 Winnicott(1953)는 모든
종교적 믿음과 환상이 이행기 대상과도 관련이 있음을 시사
한 바 있지만, 리주토는 한걸음 더 나아가 이행기 공간이야
말로 신이 존재하는 자리라고 하였다. 그녀에 의하면 예수야
말로 진정한 의미에서 최초의 정신분석가였다고 주장하였
는데 그런 점에서는 정신치료자로서의 예수의 행적을 연구
한 孫鎭旭(2002)과 비슷한 결론에 도달하고 있다. 리주토
의 입장과 마찬가지로 McDragh(1983)는 대상관계이론을
李 炳 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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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해 신적 존재에 대한 접근을 설명하고자 하였는데, 과연
신의 존재가 유아들이 경험하는 이행기 대상으로서의 곰 인 형과 유사한 존재에 불과한 것인가에 대하여 의문을 표시하 면서도 대상관계이론가들이 주장하는 분리불안반응과 모성 적 존재에 대한 합일에의 소망이 인간으로 하여금 끊임없이 신을 추구하도록 이끄는 동기가 될 수 있다는 점에서는 동의 를 표시한다. 孫鎭旭(2003)은 성 바울의 회심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종교적 체험에 주목하고 그러한 경험의 심리적 배경으로 그의 자기애성 인격 성향과 개인적인 갈등을 지적 하였지만 대상관계이론의 측면에서 그가 받은 자기애성 외 상과 심리적인 위기로 인한 이행기 상태로의 퇴행단계에서 겪은 종교적 체험이 아니었겠는가 생각해 볼 수도 있다.
또한 인도 태생의 영국 분석가 Bion(1963)은 유아의 내 면에 형성된 부정적인 감정 요소를 베타 요소라 하였는데 아 기가 이러한 감정을 엄마에게 투사하였을 때, 엄마가 이를 거부하지 않고 그대로 수용하여 독소적인 요소를 적절히 해독시켜준 뒤에 그것을 다시 아기에게 되돌려주는 작업을 통하여 아기의 내부에 보다 완화된 긍정적 요소, 즉 알파 요 소의 형성을 도와주는 기능을 강조하면서 이러한 엄마의 기 능을 분석가가 적절히 수행할 경우, 환자는 보다 성숙한 심 리적 성장과정을 경험해 나갈 것으로 보았다. 이러한 과정을 종교체험에 적용한다면 소위 기독교에서 말하는 성령에 의 한 거듭나기 또는 회개를 통한 구원의 체험이야말로 개인의 내면에 잠재된 독소적 베타 요소를 성령의 도움으로 보다 긍 정적인 알파 요소로 극적인 전환을 이루게 하는 모성적 기능 과 유사한 과정으로 이해할 수도 있을 것이다.
Alexander(1931)는 불교 수행의 특성을 인위적인 긴장 증(catatonia)에 비유했는데, 참선에 들어 벽면수도하면서 명상에 잠기거나 부동의 자세로 가부좌를 틀고 앉은 외면적 특성뿐 아니라 외부적 현상에 전혀 구애받지 않는 초탈한 마 음 상태도 함께 지칭한 것일 수 있다. 그러나 소위 해탈의 경 지가 전지전능감(omnipotence), 대양감(oceanic feeling), 황홀경(ecstasy), 무사무념(無思無念), 무한대의 해방감 등을 모두 뜻하는 것이라면 내부적으로는 조증적 방어기제가 극 대화된 상태라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견해에 대해서 는 너무 지나치게 피상적인 관찰에 입각한 주장이라는 비판 도 없지는 않다(李炳郁 2002). 그리고 국내에서 발표된 종 교체험에 관한 정신의학적 연구들은 주로 기독교에 치중된 감이 있다(孫鎭旭 2003, 孫鎭旭과 李符永 1983, 李靜姬와 李符永 1983, 조호철 등 1973).
모든 종교 체험을 정신병리 차원에서 보는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그러나 분명히 많은 정신질환자들의 경우에서 보듯이 정신병리 현상의 일부로서 다양한 종교 체험을 주장
하는 수도 많은 것이 사실이다. 정신병적 상태를 제외하고 라도 히스테리적 해리상태 또는 일종의 트랜스 상태에서 경 험하는 다양한 유사최면 상태는 일상생활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현상들이다(Abse 1987). 강렬한 종교적 열정에 사로 잡힌 경우에는 건강한 성인들에서도 일시적으로 이와 유사 한 트랜스 상태를 경험하는 수가 많으며 본인들은 그러한 경험들을 종교적으로 받아들이고 해석하기 쉽다. 조호철 등 (1973)이 조사한 바에 따르면, 안수기도를 받고 호전을 경 험한 사람들 중에는 히스테리성 전환반응도 일부 있었으며 이들은 자신들의 일시적인 호전을 종교적 기적으로 받아들 이고 널리 선전하는 수가 많다고 하였다. 李靜姬와 李符永 (1983)도 정신질환자에 대한 안수기도의 효과에 대해 조 사한 결과, 치유에 대한 기대와 감정적 격앙이 일시적인 호 전을 가져온 것으로 보았으며, 신앙치료의 경우에는 환자나 치료자 모두가 중세적 마귀관에 의해 상호 교감을 이룬 것 으로 보았다. 이러한 현상은 정신질환에 대한 교역자들의 태도에서도 드러나는데 대부분의 목사들은 정신이상을 악령 들린 상태로 간주했으며, 신앙치료의 필요성에 대해서도 대 부분의 신부들은 부정적인데 비하여 압도적으로 많은 수의 목사들이 찬성하고 있었다(孫鎭旭과 李符永 1983). 이처럼 기독교사회에서 금기시된 정신분석과는 달리 칼 로저스가 주장한 인본주의 심리학은 개신교 목사들이 신도들을 대상 으로 행하는 목회 상담에서 자주 인용되는 이론이다. 그러 나 그렇다고 해서 정신분석이 비인도적인 치료법이라고 단 정 짓는 것은 너무도 성급한 태도가 아닐 수 없다. Maslow (1994)는 종교와 과학 등 모든 분야에서 양극단의 이분법 적 사고가 지배하는 현실에 대하여 경계한 바 있으며 개인의 심리적 성장단계에서 종교적 체험의 중요성을 누구보다 강 조하였던 인물이기도 하다.
루터의 종교개혁이 일어나기 이전에는 모든 기독교 성직
자들이 금욕생활을 감수해야만 되었다. 물론 힌두교 성자들
이나 불교승들도 마찬가지로 인간의 성적 욕망을 깨달음으
로 가는 길에 가장 위험한 걸림돌로 간주하여 금기시해 왔
다. 그에 대한 반동으로 나온 것이 탄트라불교였으며 이들
밀교수행자들은 오히려 성적 희열을 통한 깨달음을 내세움
으로써 사회적으로 강력한 반발을 불러일으키는 자충수를
두고 말았다. 기독교사회에서 성자 대열에 오를 만큼 추앙
을 받아온 로욜라나 루터의 경우에서 알 수 있듯이 두 인물
모두 자신들의 삶의 행로를 결정지은 것은 바로 강력한 종
교체험이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생각해볼 수 있는 점
은 그러한 체험을 겪게 된 시점에 있어서 두 인물의 심리적
상태를 고려해 볼 수 있다. 루터나 로욜라 모두 당시에는 심
각한 정서적 혼란과 위기감에 빠져있을 무렵이었기 때문이
루터와 로욜라의 종교체험(宗敎體驗)에 대한 분석적 논평(分析的 論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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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루터는 자신의 주체할 수 없이 강렬한 성적 욕망에 대한 죄책감과 아버지의 권위에 대한 반항이, 그리고 로욜라는 어머니에 대한 합일에의 욕망과 아버지의 존재를 부정하고 자 하는 욕망 사이의 갈등에 대한 반동형성으로 절대적인 성 모 마리아 숭배와 교황권 수호에의 헌신이라는 사명감에 불 타오르게 만들었던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루터는 성적인 금지에서 해방될 수 있는 합리적인 장치를 마련할 수 있게 되었으며 로욜라는 자신의 금욕적인 태도를 고수하는 대신 영적인 수련방식을 통하여 이를 승화시켜 나갈 수 있는 강 력한 장치를 개발한 것으로 간주할 수 있다. 물론 이러한 관 측은 반종교적 관점에서 논하는 것이 결코 아니다. 일반적인 평신도들의 세계에서 흔히 관찰되는 종교 체험 및 심리적 상태와 동등한 입장에 놓고 평가해 보자는 시도일 뿐이다.
그런 점에서 Saint Augustine(1998)이 더욱 감동을 주는 것은 자신의 청년시절 무모할 정도로 육욕적 쾌락에 탐닉했 던 사실을 그의 참회록을 통하여 매우 진솔한 태도로 고백 함으로써 우리의 모습과 상당히 근접한 이웃으로서의 인간 적인 면모를 보여주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또한 그는 일회 적인 종교적 체험으로서가 아니라 일생을 통한 끊임없는 자 기 성찰과 반성으로 일관했다는 점에서도 루터나 로욜라와 는 차이를 보이고 있다. 불교에서 말하는 돈오점수(頓悟漸修) 논쟁의 차원에서 말한다면, 성 바울이나 루터, 로욜라 등은 돈오(頓悟)에 더욱 가깝고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오히려 점수 (漸修)에 가깝다고 말할 수 있다. 소위 성령 체험이란 감각 적 체험을 배제시킨 상황에서는 그 존립 여부를 확인할 길 이 실로 막연하다. 종교적 내용의 환청과 환시 경험을 보고 하는 정신병환자들은 단순히 정신상태가 병들어있다는 이유 만으로 종교인들과 동일한 영적 체험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것이 현실이지만 심리적 차원에서 본다면 양자를 구분지을 뚜렷한 방법론은 아직까지 존재하지 않는다. 종교는 오히 려 건강한 사람들보다 정신적으로 병든 사람들을 위해 존립 하는 것이기에 더욱 그러하다.
맺 음 말
프로이트는‘이드가 있는 곳에 자아(自我)가 있게 하라’
고 하였다. 그것은 모든 종교가 떠맡은 초자아의 역할을 견 제하는 말이기도 했다. 모든 초자아가 반드시 건강한 것만이 아님을 프로이트는 이미 간파했기 때문이다. 오히려 가혹한 초자아 때문에 빚어지는 병폐를 너무도 잘 알고 있었기 때 문이다. 이드가 발붙이지 못하도록 모든 종교는 오랜 기간 초자아적 기능에 충실했다. 그러나 프로이트는 이드와 초자 아 양측 모두를 견제하고 통합할 수 있는 자아의 독립적인
기능을 강조하고 나선 것이다. 그것은 전혀 새로운 시각을 보여준 결과를 가져왔으며 전통적인 교회의 권위에 의존해 왔던 서구인들 사이에서는 당연히 강력한 반발을 불러 일으 켰다. 프로이트가 던진 화두는 기독교사회에 수많은 논란을 가져왔다. 역사적으로 볼 때, 카톨릭 교회의 권위를 부정한 개신교의 저항은 그에 맞대응하는 수구파의 도전을 강화시 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프로이트는 그러한 악순환의 고리를 원천적으로 봉쇄하는 자아의 독립을 선언한 것이다. 본고에 서 다루었던 마르틴 루터와 이냐시오 로욜라는 신구교 사회 에서 각기 성자 대열에 오른 인물들로 추앙되어 왔다. 그러 나 후대에 이루어진 신화적 요소를 배제시킨다면 두 인물 모 두에서 심리적 존재로서의 나약한 인간성을 부정하기 어려 워진다. 물론 그들은 자신들이 일으킨 운동의 결과를 예측하 지 못했을 수도 있겠지만 그들로 하여금 그러한 방향으로 나가게끔 만들었던 심리적 동기에 대해서는 전혀 인식하지 못했을 가능성이 높다. 그들도 한 때는 동시대의 다른 지식 인들처럼 세속적인 야망과 탐욕에 이끌려 출세와 성공에 눈 이 어두웠던 적도 있었지만 나름대로의 극적인 계기를 통 하여 회심에 이르는 과정을 거침으로써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종교적 열정으로 자신들의 시대를 이끌었던 지도자들 이었다. 그러나 루터와 로욜라 모두 자신들의 성장과정에서 겪은 갈등과 좌절의 경험을 종교체험을 통해 극복하고 승화 시켰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보여준다. 두 사람 모두에게 아버 지라는 존재는 평생을 두고 극복해 나가야할 주된 과제가 되었지만 자신을 낳아준 아버지의 존재를 거부하고 아버지 의 대리인 교황과 절대적인 사랑의 아버지인 신의 존재에 전 적으로 매달린 삶이었다. 루터는 아버지와의 경쟁 대신에 교 황을 상대로 투쟁하였으며 로욜라는 아버지에의 충성과 어 머니에 대한 숭배를 교황과 신, 그리고 성모 마리아 숭배로 대체하였다. 아버지에 대한 루터의 반항은 프로테스탄트 운 동, 직역하면 반항운동으로 이어졌다. 교황과 신에 대한 절대 적인 복종과 헌신은 로욜라가 일으킨 예수회 운동의 근간을 이루는 것이었다. 그들의 도전과 반항, 그리고 복종과 헌신은 결국 그들 자신의 심리적 발달과정에서 야기된 부모와의 갈 등해결을 위한 자구책이었으며 개인적으로는 적합한 극복과 정이었다고 생각된다.
Referenc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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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STRACT
A Psychoanalytic Comment on the Religious Experiences of Luther and Loyola
Byung-Wook Lee, M.D.
Martin Luther and Ignatius of Loyola were charismatic leaders in the Christian world. They had in common extraordinary religious passion and peculiar religious experiences. For this study my interest lies in their religious experiences and the motivating forces behind their passionate movements for religious reformation.
This paper reviews their life histories, including the process of their psychological growth and the abrupt turning points in their lives. In my view, Luther failed to overcome his overwhelming sexual urges, and then he was obliged to marry and needed to rationalize his own drives. The main core of the Protestant movement was sexual liberation, free from Catholic asceticism. Luther showed resistance to his father, but Ignatius of Loyola was obedient to his father and worshipped his mother. The motto of Luther’s Protestant movement was disobedience, and that of Loyola’s Jesuit movement was absolute obedience. These mottos reveal each man’s their inner conflicts with his deep-seated urges.
I think that their protest and resistance, obedience and devotion to religious movements were rooted in their inner conflicts with parental imagos, and they accomplished successful sexual or asxeual lives.
KEY WORD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