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精神分析運動의 歷史的 背景에 대한 小考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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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SEP History 精 神 分 析 :第 17 卷 第 1 號 2 0 0 6

J Korean Psychoanalytic Society Vol. 17, No. 1, page 75~87, 2 0 0 6

精神分析運動의 歷史的 背景에 대한 小考 *

李 炳 郁

**

Note on the Historical Background of Psychoanalytic Movement

*

Byung-Wook Lee, M.D.

**

序 論

역사를 알면 미래가 보인다는 말이 있다. 다시 말해서 개 인이든 집단이든 역사를 제대로 알지 못하면 현재는 물론 미래에 대한 전망도 불투명해질 수밖에 없다. 따라서 개인 에서 출발하여 가족, 집단, 국가, 민족, 인류의 차원에 이르 기까지 그 역사적 전개 과정을 이해하는 일은 문제 해결의 가장 큰 관건이 된다. 정신분석은 개인사적 발달과정에 대 한 철저한 분석을 통하여 현재의 심리적 고통과 갈등의 근 원을 밝히고 그 해결책을 제시하고자 태어난 학문이요, 치 료기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처럼 누구도 생각하지 못한 전혀 새로운 분야의 발전 과정은 생각처럼 그리 순탄 치가 않았는데 그 사회적 배경에는 나름대로의 이유와 근 거들이 존재했기 때문이다. 정신분석의 출현은 오랜 기간 전통적 가치관에 안주하며 살아가던 서구인들에게 일종의 인식론적 혁명을 일으킨 사건이 되었다. 그리고 그러한 혁 명을 주도한 핵심 인물들의 대다수는 공교롭게도 유태인들 이었다. 프로이트, 아들러, 페렌치, 아브라함, 랑크, 클라인, 발린트, 하르트만, 코후트, 라이히, 에릭슨, 프롬, 페니켈, 알렉산더, 마알러, 스피츠, 비온, 샌들러, 에릭 번, 프리츠 펄스, 그리고 오늘날의 컨버그, 앙드레 그린, 크리스테바에 이르기까지 유대계 분석가들의 눈부신 활약과 업적은 가히 독보적이라 할 수 있다. 이들의 독주에 제동을 걸 수 있을 만한 인물은 융, 위니코트, 라캉, 설리반 정도일 것이다. 무 의식의 발견은 합리주의를 가장한 서구인들의 지적 허구성

을 여지없이 폭로하고 그 기초부터 뒤흔들어 놓는 결과를 낳았다. 서구인들이 당혹해 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따 라서 기존의 가치관을 고수하기 위한 반격과 견제가 동시 에 뒤따랐다. 정신분석이 생존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적절 한 대책이 요구되었다. 저자는 이 점에 주안점을 두어 정신 분석이 왜 운동으로 전개되어야만 했는지 그리고 이러한 운동에 제동을 걸기 위한 심리사회적 반동의 전개 과정은 과연 어느 정도였는지에 대해 문헌 고찰과 더불어 살펴보 고자 한다.

마음의 감옥

인류 역사를 통하여 수많은 선각자들이 인간 정신의 비밀 을 풀기 위해 노력해 왔다. 소크라테스는“너 자신을 알라”

고 했으며, 석가모니는 인간이 스스로 자신의 무지를 깨닫 고 고통으로 가득 찬 삶의 질곡으로부터 해탈에 이르는 길 을 제시하기 위해 수많은 설법을 남겼다. 예수 또한“진리 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는 선언을 통해 구원의 길을 제시했다. 헤겔은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을 통하여“노동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는 메시지를 남겼다. 한편, 데카르 트는“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는 말로써 인간 존엄 성을 유지하는데 있어서 이성적 사유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정신과 신체의 이분법적 사고를 통하여 근대 서양의학의 철 학적 기초를 제공하기도 했다. 반면에 파스칼은“인간은 생 각하는 갈대다”라는 주장을 통하여 인간의 사고뿐 아니라 감정의 중요성을 강조함으로써 데카르트의 독단적 선언에 반론을 제시했다.

19세기에 이르러 계급적 모순에 의한 사회적 불평등을 타파하고자 했던 칼 마르크스는 계급이 의식을 지배한다고 함으로써 노동계급의 계몽과 의식화를 통해 유토피아적인 평등사회를 구현시키고자 시도했다. 그러나 오로지 개인적 차원의 심리세계에 관심을 기울였던 프로이트는 무의식의 진

*本稿는 2005년 9월 24일 韓國精神分析學會 광주 모임에서 발표한 내용에 기초한 것임.

This paper was based upon a special lecture in Kwang-ju meeting of the Korean Psychoanalytic Society in 24th Sep- tember 2005.

**翰林大學校 醫科大學 精神科學敎室

Department of Psychiatry, College of Medicine, Hallym Uni- versity, Seoul, Kor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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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을 밝힘으로써 개인적 갈등과 모순의 악순환으로부터 해 방시킬 수 있는 심리적 치유기법을 세상에 내놓았지만 그 의 이론은 처음부터 강력한 사회적 저항에 부딪쳐 고전을 면 치 못하였다. 라캉은 더욱 노골적으로 데카르트의 명제에 도 전했다.“나는 내가 생각하지 않는 곳에 존재한다” 라는 라 캉의 선언은 인간의 사유라는 것이 얼마나 보잘것없고 신 뢰할 수 없는 것인지에 대한 강력한 반발의 표시였다. 프로 이트 역시 인간이 그처럼 굳게 믿고 의지하는 이성과 합리 성의 취약한 구조를 밝히는 동시에 인간의 사고란 결국 우 리가 인식할 수 없는 강력한 무의식의 작용에서 결코 자유 로울 수 없음을 밝힘으로써 서구적 합리주의에 정면으로 도전했던 것이다.

Waelder(1960)는 인간 정신의 구조적 취약성을 마음의 감옥이라는 표현으로 대신했다. 심리적 구조의 갈등과 모 순에 얽매인 신경증적 인간의 모습은 창살 없는 감옥에 갇 힌 죄수의 모습과 다를 바 없다는 의미겠다. 그러한 심리적 모순을 구조악이라고 간주한다면 우리는 사회적 구조악 뿐 만 아니라 개인적 심층세계 내부에도 그와 같은 구조악을 내포하고 있으며 동시에 일생을 통해 그러한 구조적 모순 과 갈등을 되풀이 하면서 살아가는 악순환을 보이기 마련 이다. 우리는 라디오 메시지를 들을 수는 있지만 그런 일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이해하지 못한다. 반면에 우리는 마 음의 감옥을 볼 수는 없지만 이런 일이 어떻게 이루어지는 지 이해할 수는 있다. 정신분석적 자기 이해는 결국 불필요 한 정신에너지의 낭비를 최소화하고 보다 창의적인 변화로 의 도약을 도모하는 작업이라고 할 수 있다.

플라톤의 동굴 비유는 따라서 매우 의미심장하다. 더욱이 오늘날에 이르러 눈에 보이는 것만을 실체라고 인식하기 쉬 운 젊은 감각적 세대들은 태양을 본 적이 없기 때문에 태양 의 실체를 인정하지 않으려 했던 혈거인들의 입장을 그대 로 답습하는 것과 같다. 따라서 그들은 태양을 직접 목격하 고 밖으로 나가 확인해보자는 현자의 권유를 단호히 거절 했던 것이다. 그러나 모차르트의 음악을 한 번도 들어보지 못했던 귀머거리가 모차르트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다고 해서 모차르트가 과연 존재하지 않는 것인가. 피카소의 그 림을 한 번도 볼 수 없었던 장님이 피카소를 모른다고 주 장해도 그와 관계없이 피카소는 존재하는 것이다.

오랜 세월 서구인들의 의식세계를 지배했던 기독교적 절 대주의는 19세기 중반에 이르러 서서히 무너지기 시작했다.

절대주의에 대한 반동으로 상대주의가 고개를 들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한 상대주의적 사조의 기치를 최초로 내건 장 본인은 이상주의적 평등사회를 이룩하고자 했던 칼 마르크 스였다. 그는 계급적 신분에 따라 상대적으로 인간의 의식

구조는 매우 다를 수밖에 없음을 실감하고 계급과 신분 타 파를 부르짖었던 것이다. 따라서 그러한 이상향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우선적으로 노동자들의 의식화가 이루어져야 하며 사회적 구조적 모순과 사회악에 눈 뜬 노동자들의 대동단결 이 요구된다고 주장한 것이다. 그리고 그처럼 결집된 힘을 바탕으로 과감한 공산혁명을 통해 이상적 사회로의 변혁을 꾀한다는 것이었다. 반면에 프로이트는 개개인의 갈등을 해 결함으로써 갈등 없는 사회를 추구한다는 입장을 보였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개인적 무의식의 의식화가 선행되어야 함 을 주장했다. 그는 인간의 발달과정에서 겪게 되는 심리적 경험의 차이에 따라 상대적으로 인격의 형성 및 신경증적 구조가 결정된다고 보았기 때문에 모든 인간 존재를 신의 예정된 창조물로 간주했던 기독교적 절대주의 관점에 정면 으로 반박하고 나선 셈이 되었다. 더욱이 프로이트는 사회 적 변혁에는 관심이 없었으며 오로지 개인 심리과정에만 자 신의 관심을 집중시켰기 때문에 보수파 뿐만 아니라 진보 적인 인물들로부터 일찌감치 경원시 되었다. 아인슈타인은 시간과 공간의 차원에서 관찰자의 위치에 따라 상대적으로 물질의 질량과 운동 방향이 달라진다고 주장함으로써 뉴턴 의 절대물리학을 일거에 무너뜨렸다. 낙하공의 비유는 그러 한 상대적 관점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예를 들어 어떤 아이 가 손으로 공을 튕기는 놀이를 한다고 할 때, 아이의 눈에 는 분명히 그 공은 중력의 법칙에 따라 위에서 아래로 떨 어질 것이다. 그러나 그 아이가 위로 올라가고 있는 엘리베 이터 안에서 공놀이를 한다고 했을 때, 밖에서 관찰하는 사 람의 눈에는 그 공이 아래에서 위로 올라가는 것으로 보일 것이다. 더 나아가 우주선을 탄 우주인이 그 모습을 관찰한 다면 공은 지구의 자전 방향대로 옆으로 회전하고 있는 것처 럼 보일 것이다. 한 마디로 요약하면, 공은 위에서 아래로, 아래에서 위로, 그리고 옆으로 동시에 움직이는 셈이 된다.

그렇다면 과연 진실은 무엇인가. 보이는 것만이 진실인가, 아 니면 보이지 않는 것도 진실인가. 또는 모든 것이 진실인가, 아니면 둘 다 거짓인가. 대답은 매우 어려워질 수밖에 없다.

정신분석은 그처럼 답하기 어려운 난제에 과감히 도전장을 던진 것이며, 오랜 세월 인류가 잊고 살았던 무의식의 세계 를 새롭게 발견하고 그 본질을 탐색하고자 시도한 것이다. 그 리고 그런 혁명적인 시도는 기존의 전통적 가치관과 정면 으로 부딪칠 수밖에 없는 운명의 길을 걸어온 것이다.

인과론과 목적론

정신분석이론의 발전과정에 있어서 프로이트가 보인 입장

은 시종일관 과학적 인과론에 입각한 심인결정론이었다.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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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7 럼에도 불구하고 정통 의학계는 그의 유사과학적 태도가 비

과학적이라는 이유로 정신분석의 수용을 거부했던 것이다.

그러나 프로이트를 거부한 것은 의학계뿐만 아니었다. 그 의 초기 제자들 가운데 일부에서도 프로이트의 결정론에 반 대하여 집단을 이탈하는 사람들이 나타나기에 이르렀다. 그 중에서 가장 먼저 반기를 들고 집단에서 뛰쳐나간 사람은 아들러였다. 그는 본래 질투심이 많았을 뿐만 아니라 뿌리 깊은 열등감에 젖어 있던 인물이었다. 따라서 그는 비인 외 곽지대에 천한 신분으로 비참하게 살아가는 장애인들에게 남다른 동정심을 지니고 진료도 해주곤 했다. 더욱이 아들 러는 학생시절부터 사회주의 이념에 몰두하여 프로이트와 공존할 수 없는 입장에 있었다. 융 역시 신비주의 지향적인 성향 때문에 프로이트와의 공존이 처음부터 무리였다. 결국 프로이트가 자연과학 모델을 지향하는 인과론자였다면 아 들러는 유물사관에 입각한 목적론자였으며, 반면에 융은 종 교적 모델 지향적인 신비주의 및 영지주의적 목적론자였기 에 이들 모두 프로이트와 공존하기가 어려웠던 것이 사실 이다. 결정론과 목적론은 이처럼 이론적 출발점부터 어긋날 수밖에 없는 갈림길이 되는 것이다.

과학적 인과론의 특징은 일반 대중들에게 인기가 없다는 것이다.“장난감 기차는 아빠가 태엽을 감아주기 때문에 달 린다.”는 식의 설명은 전혀 매력을 끌기 어렵다. 반면에 시 적 목적론은 대중들에게 인기를 얻기 쉽다.“장난감 기차는 아이를 즐겁게 해주기 위해 달린다.”얼마나 시적이고 매력 적인가. 따라서 미당 서정주 시인의“한 송이 국화꽃을 피우 기 위해 봄부터 소쩍새는 그렇게 울었나 보다.” 는 시구는 대 중들의 끊임없는 사랑을 받는다. 그러나“가을 국화꽃과 봄 에 우는 소쩍새와는 아무런 인과관계도 없다.” 라고 한다면 아무도 두 번 다시 그런 설명을 들으려고 하지 않을 것이 다. 그것이 설사 진실이라고 해도 말이다. 고대 로마인들은 인과론에 입각해서 번개는 구름끼리 충돌해서 일어나는 것 으로 설명했다. 반면에 동시대의 에트루리아인들은 목적론 에 입각하여 구름은 번개를 일으키기 위해 충돌한다고 설명 한 것이다. 결국 에트루리아인들은 과학적 사고방식을 지녔 던 로마인들에게 정복당해 멸망하고 말았다(Waelder 1960).

결국 각기 다른 사상적 배경을 지닌 목적론자로서 융과 아 들러는 인과론자 프로이트의 곁을 떠났다. 그러나 독자적인 길을 걷기로 선언했던 두 목적론자들은 프로이트와 같은 철 저한 인과론자에 대한 타도와 정복에는 결국 실패하고 말 았다. 정신분석이 살아남기 위해서는 어디까지나 과학 지 향적이어야 함을 누누이 강조했던 프로이트의 고집이 대중 적 호소력이 더욱 크다고 할 수 있는 목적론을 누른 것이 다. 아들러와 융이 프로이트에게 결별을 선언한 이후 프로

이트는 대신 페렌치와 칼 아브라함에게 강한 신뢰감을 표 시하였다. 그는 마음의 상처를 깊게 받았지만 크게 분격하 지는 않았다. 그러나 아쉽게도 아브라함은 일찍 요절하였고, 페렌치는 기법적인 측면에서 서로 다른 이견을 보여 그 관 계가 매우 소원하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신분석은 소멸 당하지 않고 끝까지 살아남았다. 대중적 인기에 연연 하지 않고 순수한 학문적 발전과 그 보존에 힘을 기울인 끈 질긴 지식운동의 결과였다.

정신분석운동의 발단

인류의 역사를 통해 가장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했던 세계 적인 규모의 운동에는 단연 십자군 운동과 공산주의 운동 을 꼽을 수 있다. 종교와 정치면에서 벌어진 이 두 가지 운 동은 세계사의 방향까지 바꾸어 놓았다고 할 수 있다. 비록 사회적으로는 도덕 재무장 운동이나 예술적 차원에서의 포 스트모더니즘 운동 같은 것도 예로 들 수 있겠지만 역사의 흐름까지 바꾸어 놓을 정도는 아니었다. 오히려 뿌리 깊은 반유대주의에 의한 나치즘 운동이나 그에 대한 반동으로 일어난 시오니즘 운동 등이 더욱 큰 사회적 파급효과를 불 러 일으켰다고 볼 수 있다. 물론 한반도 내에 국한된 천리 마 운동이나 새마을 운동과 같은 일종의 자립운동도 존재 했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경제적 차원의 부흥운동에 불 과했다.

프로이트에 의해 출발한 정신분석운동은 서구 지성인들의 강력한 반발과 압력에서 살아남기 위한 필사적인 자구책이 었다. 그 운동의 시발점이 되었던 비엔나 수요회는 1902년 에 창립되었으며 그로부터 6년 후인 1908년에 국제학회로 발전한 첫 모임이 잘츠부르크 대회로 가시화 되었다. 그리고 1909년 클라크대학 초청으로 이루어진 프로이트의 미국 강연은 정신분석이 비로소 국제적 인정을 받는 전환점이 되 었던 사건이었다. 그러나 1911년 바이마르 대회에 이르러 집단의 결속력은 현저히 떨어지고 말았다. 당시 참석자들 의 명단을 보면 프로이트, 페렌치, 융, 아브라함, 랑크, 쉬 테켈 등을 위시하여 루 살로메, 스위스의 정신의학자 오이 겐 블로일러와 빈스방거 그리고 오스카 피스터 목사, 영국 의 제임스 푸트남과 어네스트 존스, 아이팅곤, 뉴욕에서 온 브릴, 그리고 융의 부인 엠마 융과 그의 비서 토니 볼프, 그 외에 칼 란다우어 등 쟁쟁한 인사들이 대거 참여했으며 대회 자체도 매우 성공적이었지만 그러나 그 속사정은 간 단치가 않았다.

바이마르 대회는 프로이트의 추종 세력인 우파와 반항 세

력인 좌파로 갈리게 된 중요한 분기점이 되었던 대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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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순한 유태인들만의 결집과 독점적 집단이기주의에서 탈피 하여 진정한 순수 학문의 세계로 국제적인 인정을 받기 원 했던 프로이트 입장에서는 수요회 모임에서부터 그동안 자 신에게 헌신적인 노력을 아끼지 않았던 추종 세력의 반발 을 무마시키는데 상당한 어려움을 겪어야만 되었다. 유태계 제자들의 가장 큰 불만은 국제정신분석학회의 회장을 순수 독일계인 융에게 맡긴 점이었다. 융은 융대로 자신이 유태 인 신분의 프로이트에게 이용당한다는 인상을 받았을 것이 다. 결국 바이마르 대회 이후 정신분석의 결속력은 급격히 떨어지고 말았다. 그리고 그러한 붕괴의 조짐은 1913년 뮌 헨 대회에서 일시에 폭발하고 말았다. 일부 제자들이 학회를 탈퇴하여 프로이트의 곁을 떠났으며 믿었던 융마저도 결별 을 선언했던 것이다. 그러나 1908년 칼 아브라함은 프로이 트에게 보낸 서한에서 융에 대한 기대를 다음과 같이 적은 바 있다.“우리의 아리안 동료는 대단히 중요합니다. 그들이 없다면 정신분석은 반유대주의의 희생이 될 것입니다.” 따 라서 Freud(1914)는 정신분석의 적대자들로부터 학문을 보호하고 존속시킬 유일한 방법은 독일계 스위스인 융을 회 장으로 추대하고 그리고 국제학회 집행본부를 비인이 아닌 스위스 취리히로 옮길 구상을 했던 것이다. 이런 그의 구상에 대해 가장 강력하게 반대하고 나선 것은 물론 아들러였다.

그러나 융이 정신분석을 구원해줄 수 있으리라는 프로이 트의 낙관적 기대는 불과 수 년 사이에 심각한 우려로 나타 났다. 바이마르 대회를 겪고 난 이후인 1912년에 이미 어 네스트 존스는 융이 마치 자신이 세계를 구원하려는 그리 스도나 된 것처럼 처신한다고 프로이트에게 불평을 한 적 이 있는데, 이때 프로이트는 존스의 주장에 동조한 바 있으 며, 1913년에는 페렌치에게 보낸 편지에서“당신의 말이 옳소. 우리의 친애하는 스위스 양반은 지금 제 정신이 아닌 듯하오.” 라고 썼던 것이다(Noll 1997). 집단의 와해 위기를 경험한 프로이트는 결국 정신분석이라는 학문 자체의 존립 여부에 상당한 불안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내부적 결속의 유지를 위한 비밀 소위원회 구성의 제안은 어네스트 존스로부터 나온 것이었다(Jones 1957). 존스의 제안에 따 라 프로이트를 포함한 7인 소위원회가 조직되었는데, 페렌 치, 칼 아브라함, 오토 랑크, 한스 작스, 아이팅곤, 어네스 트 존스 등이 비밀 위원으로 지명되기에 이르렀다. 프로이 트로서는 그러한 비밀 조직을 통하여 내부적 결속은 물론 국제적 입지의 확산이라는 두 가지 명제를 동시에 추구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정신분석이 단순한 학문적 발전의 차원뿐만 아니라 사회적 운동으로까지 발전되어야 한다고 본 것이다. 정신분석은 그렇게 해서 일종의 지식운 동으로 발전하게 된 것이다.

정신분석운동의 확산

비인에서 시작한 정신분석은 비록 정통 의학계의 인정을 받지는 못했으나 국제학회의 결성으로 나름대로 그 위치를 넓혀 나갈 수 있었다. 그러나 정신분석운동 확산의 주체는 어디까지나 유태인 분석가들 중심이었으며 그런 점에서 뿌 리 깊은 서구인들의 반유대주의 성향을 자극할 여지는 충 분히 있었다. 그러나 Fine(1979)은 제1차 세계대전 이후 1920년대에 이르러 서구 지식인사회에 급속히 확산되었던 새로운 세계에 대한 희구와 낙관주의를 배경으로 하여 정 신분석의 보급이 더욱 촉진되었으며, 일종의 사회 개혁운 동 차원에서 인류의 복지에 크게 기여할 수 있으리라는 기 대에 부응한 것이기도 했다고 주장하였다. 그의 주장에도 일 리는 있지만 그러나 저자의 견해로는 당시의 그러한 낙관주 의는 정신분석에 대한 기대보다는 오히려 마르크스주의에 의한 사회 개혁에 더욱 큰 기대를 걸었던 것 같으며 정신분 석운동 자체에 대해서는 여전히 강력한 저항과 반감이 상존 하고 있었다고 여겨진다.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기 직전 1914년 초에 발표한 [정신분석운동의 역사]에서 이미 프 로이트는 운동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였으며, 이러한 운동의 본질과 목적에 대한 부분적인 단서를 제시하고 있다. 왜냐 하면 융과 아들러의 오해 및 이탈 문제에 대해 비교적 상 세히 언급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프로이트가 초두에 인용한“흔들리지만 침몰하지 않는다.” 라는 표어의 의미는 매우 시사적이다. 정신분석의 순탄한 항해를 방해하는 온갖 시련과 파도에도 불구하고 정신분석은 결코 무너지지 않고 앞으로 나아갈 것이라는 강력한 의지의 표현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시기에 사회 개혁 차원의 의미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이 없었던 것이다(Freud 1914).

그러나 프로이트는 억압과 저항의 개념이야말로 정신분

석의 초석이라고 하였다. 그렇다. 오랜 세월 유대인들이 당

했던 사회적 불평등과 부당한 억압 체제의 구조를 밝히고

그에 대해 저항하는 것이 정신분석운동의 기저에 놓여있는

또 다른 동기였을지도 모른다. 따라서 정신분석학이 운동

으로 발전하여 전개될 수밖에 없었던 배경에는 사회 개혁

을 통한 인류애의 발로라는 낙관주의뿐만 아니라 정신분석

에 가해지는 사회적 압력에 맞서기 위한 다소 편집증적 의

구심이 기저에 놓여 있었다고 보는 것이다. 당시의 모든 유

태인 분석가들은 일종의 피해의식에 사로잡혀 있었음이 분

명하며 특히 프로이트는 정신분석이 유태인들로만 이루어

진 학문이라는 오해를 불식시키기 위해 굳이 초대 회장에

독일계 융을 임명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고양이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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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9 어물전을 맡긴 결과가 되고 말았다. 프로이트는 융의 사상

적 배경에 대해 전혀 눈치 채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혹자는 1909년 미국 클라크 대학 강연을 마치고 돌아온 프로이트가 정신분석의 미국 상륙을 계기로 자신의 이론이 미대륙에 보급, 확산되는 것을 페스트의 확산에 비유한 말 에 의혹에 가득 찬 시선을 보내면서 마치 정신분석운동이 유태인들의 비밀지하운동식의 음모가 개재된 듯이 말하기 도 했지만 실상은 간단한 것이었다. 그는 자신에 대한 사회 적 편견과 경계심이 어느 정도인지 잘 인식하고 있었기에 혹시 있을지도 모르는 사회적 탄압에 대비하고자 한 것뿐이 며 그의 우려는 실제로 나치즘의 출현에 의해 현실화되기 에 이르렀던 것이다. 그가 정신분석의 확산을 페스트에 비 유한 것은 자신의 이론이 사악하고 그릇되었다는 의미가 아 니라 매우 낙천적인 성향의 미국인들이 정신분석이론의 본 질을 오해하고 왜곡시킬지도 모른다는 우려에서 나온 말이 었다. 전후 문맥을 생략하고 페스트라는 단어만 끄집어내 어 문제 삼는 태도는 프로이트의 진의를 몹시 왜곡시키는 결과를 초래하기 쉽다.

베를린 연구소는 칼 아브라함, 한스 작스의 주도로 후계 자들을 양성하였으며 런던은 어네스트 존스와 멜라니 클라 인 등이 이끌어 나갔다. 부다페스트에서는 산도르 페렌치와 게자 로하임 등이 독자적인 활동을 펴나갔고, 1926년에는 라포르그, 마리 보나파르트 공주, 그리고 뢰벤쉬타인 등의 주도로 파리 분석학회가 결성되었다. 미국에서는 1911년에 이미 아브라함 브릴의 주도하에 미국 최초의 뉴욕 학회가 결 성되어 정신분석의 발판을 마련했으며, 남미는 그보다 훨씬 뒤늦은 1942년에 앙헬 가르마가 아르헨티나의 부에노스 아 이레스 학회를 결성하였는데 클라인 학파의 영향을 크게 받 았다. 아시아에서는 막스 아이팅곤이 예루살렘에 정착하여 활동을 하였으며 영국의 지배를 받았던 인도는 기린드라- 셰크하르 보제의 활약으로, 그리고 일본은 1955년 고자와 헤이사쿠의 노력으로 분석학회가 결성되기에 이르렀다. 한 국은 그보다 훨씬 뒤늦게 조두영의 주도로 1980년에 가서 야 비로소 분석학회가 결성되었는데 발전 속도는 일본을 능 가하는 것이었다. 오늘날에 와서는 정신분석의 확산이 대만, 중국 등지로까지 진출하였으나 아직까지는 아시아권에서 이스라엘, 인도, 파키스탄, 일본, 한국, 중국 등을 제외하고 는 정신분석에 관심을 기울이는 나라가 없어 아프리카와 더불어 정신분석의 불모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1933년 히틀러의 집권으로 반유대주의가 확산되면서 노 골적인 탄압이 시작되자 수많은 유대인들이 구대륙을 떠나 게 됨으로써 유럽은 그야말로 엄청난 지식의 공백기를 맞 이하게 되었다(Hughes 1977). 아인슈타인을 비롯한 수많

은 과학자, 철학자, 사상가, 예술가들이 신대륙을 찾았다. 이 러한 지식의 대이동에 따라 대다수의 유대인 분석가들도 프 로이트처럼 영국으로 도피하거나 미국 땅을 밟았다. 산도 르 라도, 하인츠 하르트만, 에른스트 크리스, 헤르만 눈버그, 에릭슨, 뢰벤쉬타인 등이 뉴욕에 상륙하고, 한스 작스는 보 스턴에 도착했다. 하인츠 코후트, 카렌 호나이, 프란츠 알렉 산더 등은 시카고에 정착했으며, 로버트 웰더는 필라델피아 에 자리를 잡았다. 오토 페니켈과 에른스트 짐멜 등은 로스 앤젤레스에 정착했으나 페니켈은 미국적응에 어려움을 느껴 종전 후 독일로 다시 돌아갔다. 막스 아이팅곤은 자신의 조 상을 찾아 예루살렘에 정착했다.

대다수의 분석가들이 최후의 안식처로 정착한 미국은 그 야말로 정신분석의 새로운 요람이 되었다. 질적으로나 양 적으로도 미국에 자리 잡은 자아심리학은 클라인이 터전을 마련했던 영국의 대상관계이론을 훨씬 능가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클라인 학파는 미국 대신 남미를 석권하기에 이르 렀다. 따라서 미국의 영향을 많이 받은 한국은 클라인 대신 자아심리학 위주로 나가게 되었다. 방한 분석학자의 면면을 보면 그런 점을 손쉽게 알 수 있다. 에드워드 조셉, 로버트 월러스타인, 오토 컨버그, 아놀드 쿠퍼, 조셉 샌들러, 로버 트 타이슨, 샌더 아벤트, 데이빗 작스 등, 모두 정통파 분석 가들로 구성되어 있다. 비인에서 출발한 정신분석의 확산 은 이제 지구를 한 바퀴 돌아 한국, 중국 등 극동 지역에까 지 이르게 되었다. 물론 아직까지 이슬람 문화권과 아프리카 지역의 대부분은 정신분석의 발걸음이 전혀 미치지 못하고 있는 실정에 있다. 산업화 정도에 따른 경제력 차이뿐만 아 니라 종교적, 인종적 장벽이 그만큼 높기 때문이기도 하다.

사회적 저항

Freud(1925a)는 정신분석에 대한 광범위한 사회적 저항

을 현실로 인정하면서도 그러나 모든 과학적 활동은 새로

운 것 앞에서 결코 두려워해서는 안 될 것이라고 했다. 그

리고 이미 알려진 것과 친숙한 것에 안주하고 새로운 것을

두려워하며 거부하려는 회의주의를 비판하였다. 물론 프로이

트 자신도 정신분석이 지닌 본래의 목적, 다시 말해서 순수

한 치료적 목적에서 벗어나 일반심리학 차원으로 지나치게

확장된 점을 인정하였지만 그러나 새롭게 발견된 정신분석

의 가치는 부인하기 어려울 것이라고 하였다. 그는 정신분

석에 대한 강력한 저항들이 지적인 근거가 아니라 감정적

인 원천에서 나온 것임을 지적하면서 모든 인간을 환자로

삼는다는 점 때문에 전 인류의 감정이 상했을 것이라고 하

였다. 따라서 프로이트는 어떤 학설이 인류의 자존심에 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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精神分析運動의 歷史的 背景에 대한 小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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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한 모욕을 주었다는 점에서 진화론의 생물학적 모욕과 코 페르니쿠스의 우주론적 모욕에 이어 정신분석학적 견해야 말로 심리학적 모욕으로 불릴 수밖에 없음을 스스로 인정한 것이다.

프로이트가 의도했든 아니든 정신분석이론 그 자체는 서 구인들이 고수해오던 기존의 가치관을 완전히 뒤집어엎는 가 히 혁명적인 이론이었다. 정신분석의 출현은 그만큼 사회적 으로 강력한 반발과 견제를 받기에 충분한 일대 사건이었 다. 프로이트가 일으킨 이러한 인식론적 혁명은 그의 뒤를 이은 클라인, 코후트, 라캉 등에 의해 정신분석 자체 내에서 도 이어졌다. 클라인의 대상관계이론도 가히 혁명적인 변 화였고, 코후트의 자기심리학 역시 코후트 혁명이라고 불릴 정도로 돌풍을 일으켰다. 라캉의 이론 역시 정신분석의 불 란서 혁명으로까지 불릴 정도로 60년대 파리 지식인들을 흥 분시켰다. 그러나 대외적으로는 너무도 강력한 적들이 많았 다. 특히 정신분석을 에워싼 종교, 철학, 예술, 의학 등 네 분 야는 그야말로 난공불락의 요새처럼 요지부동이었으나 그나 마 예술 분야만큼은 정신분석을 가장 수월하게 받아들인 편 에 속하는데 그 이유는 항상 변화를 추구하는 예술의 속성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서구 전 통 지식사회는 정신분석에 대해 비판적이며 전적으로 수용 하지 않고 있다. 프로이트 생존 시에는 그런 경향이 더욱 두 드러져서 그는 그야말로 의지할 데 없는 유대인 방랑자처 럼 사면초가에 처해 있었던 것이다. 그는 스스로 고백하기 를,“정신분석의 최초의 대변자가 유대인이었다는 사실은 단순한 우연이 아닐 것이다. 정신분석을 지지하기 위해서는 반대자들 속에서 고립되는 운명을 기꺼이 감수하는 자세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운명이야말로 다른 어떤 민 족보다도 유대인에게 친숙한 운명이다.”라고 했던 것이다 (Freud 1925a). 오랜 기간 사회적 고립과 비난에 이미 익 숙해질 대로 익숙해진 거의 달관의 경지에 이른 유대인이 아 니고서는 할 수 없는 말이기도 하다.

1. 정신분석과 기독교

오랜 기간 서구인의 인식론 및 가치관을 지배해온 기독교 문화의 영향력은 실로 대단한 것이었다. 더욱이 정신분석이 론 자체가 그동안 기독교의 적으로 간주되어 왔던 유대인의 머리에서 나왔다는 사실이 서구인들에게는 몹시 불쾌했을 것이다. 또한 프로이트 자신은 스스로 무신론자임을 내세 움으로써 반종교적인 태도를 취했기 때문에 그리고 금욕적 인 태도를 미덕으로 간주하는 보수 기독교 성직자들의 신념 에 반하는 성욕설을 강조함으로써 급기야는 교황 비오 12세 가 1952년 바티칸의 공식적인 교시를 통하여 정신분석은

인간의 심성을 타락시키는 사악한 이론이라는 선언을 하기 에 이르렀다. 수억에 달하는 서구인의 정신적 스승임을 자 처하는 교황의 선언은 정신분석의 입지를 더욱 어렵게 만 들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교황의 선언은 지금까지 한 번도 철회된 적이 없기 때문에 아직 유효하다.

철학자 니이체는 일찍이“신은 죽었다” 고 선언했지만 그 는 유대인이 아니고 독일인이었기에 니이체를 흠모하는 서 구인들은 많아도 그를 욕하는 사람들은 그리 많지 않다. 인 종적 편견이 학문의 영역에서도 얼마나 심각한지 알 수 있 는 대목이다. 스위스의 목사 오스카 피스터는 한동안 프로 이트와의 교류를 통하여 정신분석과 기독교 정신의 통합을 위해 노력했지만 그의 시도는 프로이트의 확고한 신념의 벽에 부딪쳐 결국 실패하고 말았다(Gay 1987). Freud(1915) 는 자신의 무신론을 다음과 같은 농담에 비유했다. 신을 믿 지 않는 어느 보험 대리인이 중병에 걸려 사경을 헤매게 되 자 가족들은 목사를 모시고 와서 마지막으로 그를 설득하 여 믿음을 되찾고 죽어서 천국에 가게 해달라고 부탁하였 다. 목사와 환자 단 둘이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가족들은 초 조하게 그 결과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잠시 후 방문이 열리 고 목사가 나오더니 하는 말씀이 환자는 끝내 개종하지 않 았고 자기는 보험에 들었노라는 것이다. 프로이트가 인용 한 이 농담은 매우 의미심장하다. 환자는 신보다 돈에 대한 믿음이 강한 유태인을 빗댄 것일 수 있으며 목사는 신의 사 랑을 외치면서도 물질적 욕망에 가득 찬 서구인들의 이중적 인 기만성을 대표한다고 볼 수 있다. 여기서 프로이트는 자 신의 무신론을 변호하는 동시에 결국에는 자신에게 무릎을 꿇게 될 기독교사회의 운명을 예고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Freud(1907)는 종교를 일종의 강박신경증으로 보고 많

은 종교적 의례 역시 강박행동의 일환으로 간주했는데 테

오도르 라이크는 이를 더욱 정교화시켜 나갔다. 프로이트

는 종교적 신앙 대신 정신분석만으로도 얼마든지 바람직한

삶을 영위해 나갈 수 있음을 스스로 증명해 보이고 싶었던

것 같다. 그러나 종교인들에게는 이처럼 모욕적인 일도 없

었을 것이다. 프로이트는 감히 수천 년 간 유럽 사회를 지

탱시켜온 전통 기독교의 뿌리를 건드린 셈이다. 그런 점에

서 프로이트는 타협을 거부했으며 대외적인 측면에서 정치

적 또는 외교적 수완이 매우 부족했음을 보여준다. 그럼에

도 불구하고 Fromm(1967)은 자신의 종교론에서 종교에

대한 반대자로서의 프로이트와 지지자로서의 융에 관해 널

리 유포된 오해를 바로 잡고자 했다. 그에 의하면 프로이트

는 단순히 종교가 하나의 환상에 불과하다는 것을 증명하

는데 그치지 않고 종교는 좋지 못한 여러 제도를 승인해 왔

으며 역사를 통해서도 증명해 보였듯이 그것들과 동맹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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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동시에 비판적 사고를 금지했기 때문에 종교는 지성의 빈곤을 초래한 책임자로서 위험물로 간주한다는 것이다. 반 면에 융이 말한 무의식은 종교적인 의미로 해석될 수 있는 것으로 그는 우리 자신의 외부에 있는 힘에 의해 장악되는 것을 종교적인 체험으로 간주했기 때문에 융의 논리대로 말 한다면 정신이상도 일종의 종교적 현상으로 인정되어야 한 다고 비판했다. 그러나 구약 및 탈무드에 정통했던 Fromm (1966)은 그 자신의 입장을 무신론적 신비주의라 칭하고 프로이트의 리비도 중심 학설에는 반론을 제시했다. 그가 보기에 인간의 주된 문제는 리비도의 문제가 아니라 실존과 소외, 고통과 두려움, 사랑과 합일에의 욕구, 증오와 파괴 등이라는 것이다.

정신분석에 대한 관심을 유지하되 비판적 안목에서 교회 와 정신분석 양자 모두를 질타했던 한스 큉은 교회의 권력 남용, 종교의 지적 기만성과 사악함, 무의식적 영향의 중요 성이라는 세 가지 측면에서 프로이트의 종교 비판을 옹호 하였으나, 다른 한편으로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가 종교의 기원이라는 허구적인 주장, 신의 존재 유무를 규명하기에는 매우 적합하지 못한 분석적 방법론의 적용, 프로이트 자신 의 무신론적 신념의 근거가 매우 모호한 점, 과도한 성욕설 의 이론적 확장 등의 측면에서 비판하기도 했다(Ku ¨ng 1990).

미국의 종교심리학자 제임스 존스에 의하면, 정신분석이 본 능의 압제에 항거하여 이성적인 자기 통제를 목표로 한다는 점에서 그리고 초월적 존재에 의존하지 않고 자발적인 자기 통제의 길을 선택하도록 요구한다는 점에서 프로이트는 분 명 종교에 대해 반감을 지니고 있었음에 틀림없다고 하였 다. 그것은 다시 말해서 미신에 의한 통치보다는 이성에 의 한 통치, 교회의 권위보다는 자기 통제에 의한 도덕성을 강 조하는 것으로 인간은 그 어떤 보상을 바라는 환상을 버리 고 자기 스스로 책임을 져야한다는 점에서 가히 문화적 혁 명에 가까운 것이다(Jones 1991).

미국의 분석가 Meissner(1984)는 프로이트와는 달리 신 앙심을 유지하면서도 정신분석의 길을 얼마든지 걸을 수 있 음을 스스로 입증하면서 종교적 체험의 무의식적 본질을 탐 색하는 데 상당한 업적을 남겼다. 그는 신앙, 신의 표상, 상 징과 기도 등의 여러 종교적 형태들을 위니코트의 이행기 현 상으로 간주하면서 이들 현상 속에서 경험하는 주관적 요 소와 객관적 요소 사이의 상호작용을 특히 강조했다. 더 나 아가 Rizzuto(1979)는 상상력과 놀이의 중요성을 강조하 며 이행기 대상 및 환상 개념을 빌어 신의 존재 및 종교적 욕구를 설명하고자 했다. 반면에 Leavy(1986)는 그러한 시도들이 종교를 단지 우리 자신의 정신적 건강을 돕기 위

해 이용되는 곰인형의 수준으로 떨어뜨리는 것이라고 반대 하였다. 그러나 실제로 대상관계이론가인 위니코트, 페어베 언, 건트립 등은 모두 독실한 기독교인이었으며 건트립은 신 학교를 졸업한 목사 출신이기도 했다. 이처럼 오늘날에 와 서는 수많은 분석가들이 신앙을 유지하면서도 분석가로서 의 직분을 충실히 수행하고 있다. 물론 지나친 종교적 열정 은 예수의 선언처럼“마음속으로 강간한 것은 실제로 강간 한 것과 같다” 는 말씀대로 현실적으로 실천 불가능한 도덕 적 요구를 강요하기 쉽다. 반면에 지나친 분석적 열정은“어 느 누구도 일체의 방어를 동원해선 안된다” 는 태도를 지닐 수가 있는데 물론 이것은 지나친 오해에 불과하다.

2. 정신분석과 공산주의

칼 마르크스가 주창한 공산주의 이념은 레닌에 의해 현 실로 구체화되어 나타났다. 70여년에 걸친 이 거대한 사회 적 실험은 비록 실패로 끝났지만 한 세기에 걸쳐 수많은 사 람들을 희망과 고통 속에 빠트린 주범이었다. 만민 평등사 상에 기초한 공산주의 이념을 위해 수많은 사람들이 자신들 의 목숨을 초개와 같이 버렸으며 수억에 달하는 민중들의 가슴을 들뜨게 만들었다. 그러나 프로이트는 이 새로운 사 회적 실험에 매우 냉소적인 반응을 보였다. 그에게는 공산 주의 이념 자체 역시 종교에 준하는 신경증적 요인으로 파 악되었기 때문이다. 공산주의 이념운동의 선동성과 잔혹성 을 목격한 그로서는 공산주의 자체를 건강한 것으로 보지 않 았기에 당연히 비판적인 태도를 보였다. 따라서 스탈린 치 하의 공산당은 1926년 당 대변인 데보린의 선언을 통해 정 신분석을 자본주의 이념에 추종하는 반동적 사유의 산물로 간주하고 전 소비에트사회 내에서 정신분석을 말살해야 한 다고 발표하기에 이르렀다(Fine 1979). 그러한 선언 직후 소련에서는 정신분석이 사라지게 되었으며 오늘날에 이르 기까지 그 여파가 미치고 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유 태인에 대한 스탈린의 편집증적 의심도 한 몫을 거든 셈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트로츠키를 포함한 그의 강력한 정적 들이 모두 유태인들이었으며 정신분석 역시 유태인들이 주 도한 학문이었기 때문에 특히 그러했다.

실제로 러시아 혁명을 주도한 인물들의 대다수는 유태인

들이었다(이병욱 2005). 레닌, 트로츠키, 지노비에프, 카가

노비치, 카메네프, 라덱크 등이 그들이다. 초기 임시 좌파

정부를 이끌었던 케렌스키, 사회민주주의를 지향했던 멘셰

비키, 독일에서 사회주의 혁명을 주도하다 학살된 룩셈부르

크, 극단적인 무정부주의자 엠마 골드만, 오스트리아 사회

민주당을 이끌었던 오토 바우어(그는 프로이트의 환자였던

도라의 친오빠였다), 심지어 프라하의 봄으로 실각한 두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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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크도 유태인이었으며 미테랑 정권하에 잠시 수상을 지냈 던 사회주의자 파비우스 역시 유태인이었다. 유태인 마르 크스가 창안한 공산주의 이념에 이처럼 수많은 유태인들이 열광한 이유는 단 하나, 인종적 편견에 기초한 사회적 불평 등을 일소하고 새로운 지상낙원을 건설한다는 것이었다. 수 천 년에 걸친 부당한 박해와 멸시로 온갖 수모를 겪으며 살 아야만 했던 유태인들로서는 만민 평등사상을 내세운 공산 주의 이념이 마치 복음처럼 다가왔을 것이다. 그러한 미련 과 집념은 정신분석 내부에까지 영향을 미쳤다. 아들러가 그 선두 주자였으며 오토 그로스, 베른펠트, 빌헬름 라이히, 칼 란다우어, 하인리히 멩, 오토 페니켈 등이 그 뒤를 이었다.

더 나아가 정신분석과 마르크스주의를 접목하려는 시도로까 지 나타났는데 에리히 프롬이 그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소위 프로이트-마르크스주의(Freudo-Marxism)는 라이히와 프 롬 등에 이어 불란서의 철학자 알튀세르로 이어졌다. 그러나 소비에트 사회의 붕괴로 그러한 열정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 고 말았다.

3. 정신분석과 나치즘

나치즘의 대두는 전 유럽 사회를 긴장시켰다. 특히 모처 럼 자유를 얻고 사회적 기반을 잡아나가기 시작하던 유태인 들은 위기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노골적인 반유대주의 감정 을 부추기며 대중들을 선동하고 폭력을 서슴지 않는 나치즘 을 피하여 수많은 유태인들이 망명길에 올랐다. 프로이트를 포함한 대다수의 유태인 분석가들도 그들과 같은 운명을 걸 었다. 나치즘의 횡포를 직접 경험한 안나 프로이트는 아버 지와 함께 자살까지 고려할 정도였다. 파리의 마리 보나파 르트 공주의 노력으로 어렵게 런던 망명길에 오른 프로이 트였지만 그의 누이동생 네 사람은 결국 유태인 수용소에 서 희생당하고 말았다. 히틀러의 [나의 투쟁]이 프로이트 의 [꿈의 해석]을 정복하였을 뿐만 아니라 폭력이 지성을 완전히 압도한 시절이었다.

나치의 인종청소는 구대륙에서 정신분석이라는 학문 자체 의 소멸을 초래했다. 그 대신 당시 막강한 나치 실력자 괴 링 원수의 사촌이며 정신과의사였던 마티아스 괴링의 주도 로 새로운 정신치료학을 내세우기 시작했는데 소위 괴링 연 구소에서 시도한 통합적 정신치료 유형은 한때 융이 언급 했던 순수 아리안 심리학에 기초한 것이었다. 정신분석과 같은 성이론에 기초한 타락하고 불결한 유태심리학을 일소 하고 보다 정화된 순수학문을 세우겠다는 정치적 이념이었 다. 실제로 융은 이보다 훨씬 이전인 1934년 독일 중앙신 문(Zentralblatt)에 기고한 글에서 유태인들에 대해 다음과 같이 썼다(Kaufmann 1992).“그들은 우리의 약점을 본다.

유태인들은 여자들과 공통된 특징을 지니고 있다. 그들은 육체적으로 약하기 때문에 적의 갑옷에서 틈을 찾아내야만 한다. 한편 아리안인의 무의식은 폭발적인 힘과 아직도 채 워져야 할 미래의 창조적인 씨를 지니고 있다. 유목민의 기 질이 있는 유태인들은 아직도 스스로의 문화형태를 창조해 본 적이 없으며, 또한 결코 창조할 수도 없을 것이다. 아리 안인의 무의식은 유태인보다 더 많은 잠재력을 지니고 있 다. 내 생각에는 유태인에게나 맞는 범주를 기독교를 믿는 튜튼족과 슬라브족에 적용시킨 것은 의학 심리학의 가장 중대한 실수였다.” 이 글이 과연 인류 보편의 집단무의식을 주장한 대학자가 쓴 글이 맞는지 두 눈을 의심치 않을 수 없 다. 또한 독자적인 문화형태를 창조한 적이 없다는 대목은 동일한 이유로 세계사 항목에서 유태인을 제외시킨 영국의 대석학 아놀드 토인비의 주장과 일맥상통한다.

물론 하이데거와 같은 위대한 철학자도 나치 이념에 동참 함으로써 전후 상당히 난처한 입장에 놓이기는 했지만 인 간 존재에 대하여 그토록 심오한 성찰을 던질 수 있었던 철 인이 어떻게 그처럼 무모하고 야만적인 시대적 편견을 철 저한 반성 없이 경솔하게 수용할 수 있게 되었는지 역사적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박찬국 2001). 하이데거와 마찬 가지로 융 역시 동일한 게르만 민족의 후예로서 인종적 우 월감에 사로잡힌 결과, 중세 독일의 신비주의 및 고대 신화 에 몰두하게 되었으며, 그런 점에서는 독일 민족의 정체성 을 확립시키는데 주역을 담당했던 바그너, 그리고 위대한 순수 아리안족의 세계 지배논리를 펼쳤던 히틀러와 그 맥을 함께 하는 것이었다. 이들을 하나로 연결시키는 고리는 다 름 아닌 인종적 우월감과 신화적 신비주의 그리고 정서적 불안정이라 할 수 있다(안인희 2003). 시인과 철학, 음악 을 누구보다 사랑했던 독일인들이 그처럼 조잡하고 야만적 인 나치즘 앞에 무기력한 모습으로 일거에 무너진 이유는 앞서 말한 정서적 불안정 때문일 것이다. 비록 스위스인이 었지만 융이라고 거기서 예외가 될 수 없었다. 그는 무력으 로 세계를 지배하고자 했던 히틀러와는 달리 영적으로 세계 를 지배하고자 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자신의 앞을 가 로막고 있는 가장 큰 걸림돌은 바로 프로이트가 일으킨 정신 분석운동이었다.

Bair(2003)에 의하면, 2차 세계대전 당시 융은 히틀러 총

통의 주치의로부터 그의 이상해진 정신상태를 진찰하고 평

가해줄 것에 대한 의뢰를 받은 바 있지만 정중히 사절한 적

이 있었으며, 이로 인해 1943년 미 정보기관 OSS는 알렌

덜레스를 융에게 은밀히 파견하여 히틀러의 정신상태에 대

한 정보를 얻으려 했다는 사실을 밝혔다. 알렌 덜레스는 보

고서를 통해 융이 히틀러와 무솔리니의 사악한 특성에 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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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3 해 잘 인식하고 있었으며 그들에 대해 상당한 혐오감을 지

니고 있어서 정책 결정에 많은 도움을 받았다고 하였다. 알 렌 덜레스는 후에 미 CIA 국장이 되어 존 케네디 대통령 재 임 시에는 쿠바 침공을 시도하다 실패한 바 있으며, 아이젠 하워 대통령 재임 시 국무장관을 역임한 존 덜레스의 동생 이기도 하다. 서로 적대적인 나치와 미국에 대해 융이 보여 준 이중적 태도는 전후 그의 뒤를 꼬리표처럼 항상 따라다 닌 나치 동조자라는 악몽 같은 혐의에서 벗어날 수 있는 중 요한 근거가 되었지만 그러나 그것은 단지 운이 좋았을 뿐 이다. 전후 그에게 쏟아진 나치 동조 혐의는 융의 입장을 매 우 난처하게 만들었지만 그러한 오명은 단순한 모함도 아 니며 상당히 객관적인 근거에 입각한 것이었다. 융은 그러 한 혐의에 대해 그것은 단지 오해에서 비롯된 것으로 해명 하고 적당히 넘어갔지만 융의 페르조나는 자신의 그림자를 교묘한 방식으로 감추었을 뿐이다.

4. 정신분석과 시오니즘

서구사회의 반유대주의 전통은 실로 그 역사가 뿌리 깊 다. 셰익스피어는 대표작 [베니스의 상인]에서 유태인 악덕 고리대금업자 샤일록을 통하여 서구인들에게 전형적으로 사 악한 유태인상을 심어주었으며 찰스 디킨즈 역시 [올리버 트 위스트]에서 소매치기단의 유태인 두목 페긴을 통해 매우 부정적인 이미지를 각인시키는데 일조하였다. 제정 러시아 말기에는 시온의정서라는 위서가 배포되어 유태인들의 세계 지배전략에 대한 음모를 악의적으로 퍼뜨리기도 했다. 그 러나 무엇보다 반유대주의가 뜨거운 쟁점으로 사회 전면에 부각되었던 것은 1894년의 드레퓌스 사건이었다. 일개 무 명의 대위에 불과했던 유태인 한 사람이 전 유럽을 벌집 쑤 셔놓은 듯 첨예한 논쟁의 중심거리로 떠오른 것이다. 전 파 리 시민이 찬반 두 진영으로 나뉘어 뜨거운 논쟁에 휘말렸 으며 전 유럽 대륙이 그 귀추를 주목했다. 파리에서 사건의 현장을 직접 취재하고 목격한 유태인 기자 헤르츨은 조국 없는 서러움을 새삼 실감하고 오스트리아로 귀국하는 즉시 시오니즘 운동을 일으켰다. 그리하여 1897년 스위스 바젤 에서 제 1차 시오니즘 대회를 개최했다. 그러나 모든 유태 인 사회가 그의 주장에 동조한 것은 아니었다. 가장 극렬한 반대는 레닌, 트로츠키, 룩셈부르크 등의 공산주의 신봉자 들에게서 나왔다. 자신이 몸담고 살고 있는 세상을 변혁시키 면 된다는 것이 그들의 일관된 신조였기 때문이다. 동시대 를 살았던 프로이트 역시 드레퓌스 사건을 모를 리 없었겠 지만, 시오니즘에 대해 그는 시종일관 침묵으로 대신했다. 유 태인에 관한 주제는 매우 민감한 사안이었기 때문에 정신분 석의 발전과 존속에 전념했던 그로서는 신중한 태도를 견

지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Gay(1987)에 의하면, 프로이트는 내심으로는 은근히 시오니즘에 대해 동조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유태인 신분으로서 자신이 겪어야 만 했던 사회적 불이익에 대한 불만을 내색하지 않으려 애 썼다는 것이다. 그것은 그가 잡지 [유대인 La Revue Juive]

의 편집위원을 맡았다는 사실에서도 드러나듯이 프로이트는 결코 자신의 유대인 공동체와 단절한 상태로 지낸 것이 아 니며, 더욱 놀라운 고백은 자비나 슈필라인에게 보낸 서한 에서도 드러난다.“당신이 아들을 낳으면 그 애는 기운찬 시 온주의자로 자라나야 한다고 생각하오. 그 아이는 검은 머리 를 지녀야 하며… 노랑머리는 이제 그만! 도깨비불 따위는 꺼지라고 하시오… 우리는 유대인이며 유대인으로 남을 것 이오. 다른 사람들은 언제라도 우리를 이용할 것이며 결코 우리를 이해하지도 존중하지도 않을 것이오.” 프로이트는 유 대인으로서의 확고한 정체성을 유지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다만 그는 반유대주의의 뿌리가 얼마나 깊 게 자리 잡고 있는지 너무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스위스 의 게르만 영웅이었던 융에게 희망을 걸었던 것이다. 또한 그는 자신의 차남 에른스트가 시오니즘운동에 깊이 관여하 여 활동했을 때에도 굳이 나서서 제지하지 않았었다. 프로 이트의 페르조나 역시 융과 마찬가지로 자신의 그림자를 감 추고 있었던 셈이다. 그러나 다른 점이 있다면 프로이트는 억압받는 약자의 신분이었으며 융은 지배자의 특권을 누리 는 강자의 위치에 있었다는 점이라 하겠다. 지배자의 논리 와 피지배자의 논리는 그만큼 그 간격을 메우기 힘든 것 또 한 사실이다. 적자생존의 법칙을 강조하는 사회적 진화론과 생물학적 결정론이 나오게 된 배경도 그러한 반유대주의의 정당성을 자연과학의 영역에서 찾고자 했던 동기에서 비롯 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최창모 2004). 그런 성향은 융 이 추구했던 심리학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학문의 영역조차 인종적 편견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음을 입증하는 대목 이 아닐 수 없다.

5. 정신분석과 철학

Freud(1925a)는 일찍이 선언하기를, 대다수의 철학자들 은 의식 현상만을 정신적인 것으로 간주한다고 하면서, 자 기 관찰 이외에 다른 어떤 관찰 방식도 알지 못하는 철학 자는 그런 점에서 분석가를 따를 수 없다고 자신 있게 말 했다. 따라서 의학과 철학의 중간적 위치에 있는 정신분석은 이들 양측으로부터 인정도 받지 못하고 결과적으로 손해만 보게 된 것이다.

그러나 프로이트는 에로스의 중요성을 강조했던 플라톤이

나 쇼펜하우어의 존재를 서구인들이 너무 잊고 사는 것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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精神分析運動의 歷史的 背景에 대한 小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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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닌지 물으면서 자신의 이론을 범성론(汎性論)으로 몰고 가 는 반대자들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기도 했다. 그리고 정신 분석은 문화적 기만 상태를 유지하고자 하는 사회 체계의 약 점을 폭로하고 그것의 변화를 위해 충고한다고 말한 것이다.

정신분석의 관점에서 본다면 철학자도 성직자도 갈등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 그러나 서구철학은 완강하게 정신분 석을 거부하고 그 존재 가치를 인정하지 않으려 했다. 특히 독일 철학은 그 정도가 심했다. 또한 하이데거처럼 공개적으 로 나치즘에 동조한 인물도 있었다. 그리고 칼 야스퍼스는 철학과 정신의학을 두루 섭렵하면서 [일반 정신병리]라는 대 저를 낳으면서도 동시대의 뜨거운 화두였던 프로이트에 대 해 매우 냉소적인 시각으로 평가절하하면서 애써 무시하는 태도를 보였다(Jaspers 1963). 인간 정신의 실체에 대해서 는 이런 저런 설명만 가능할 뿐이지 도저히 이해할 수는 없 다고 본 야스퍼스 입장에서는 당연히 프로이트의 이론이 그 저 그럴듯한 설명에 불과했을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야스 퍼스는 정신분석이론에 대해 조목조목 들어가며 반론을 제 기한 것도 아니다. 그는 프로이트의 이론 자체를 이해하려 는 태도를 지닌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무시하고 들어갔기 때문에 일고의 가치도 없는 것으로 치부해버린 느낌이 짙다.

칸트에서 시작하여 헤겔에 이르는 방대한 독일 철학의 흐 름에 대해 프로이트가 너무 무지했었다는 비판도 있다. 그 러나 프로이트는 환자를 치료하는 의사였지 철학자가 아니 었다. 그렇게 따진다면 해박한 철학적 지식을 몸에 익힌 야 스퍼스는 물론 의사의 자격으로 [일반 정신병리]를 썼지만 일생 동안 병약한 몸으로 은거하다시피 했던 그가 실제 환 자를 치료한 임상 경험이 거의 전무했다고 본다면 과연 그의 주장이 얼마만큼 의학적으로 타당성이 있는 것인지 반문할 수밖에 없다. 프로이트는 어디까지나 자신의 임상 경험을 토 대로 이론을 전개한 것이지 단순히 추론과 사색에 입각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실존철학의 대가 사르트르는 죽을 때까지 무의식의 존재를 인정하기 거부했다. 철학자조차도 자신의 내면적 실상에 직면하기를 두려워한다는 점에서 일 반인과 다를 게 하나도 없다는 점을 행동으로 보여준 셈이 다. 반면에 알튀세르의 경우, 스스로 오랜 기간 분석을 받음 으로써 철학자로서는 드물게 자신을 탐색하는 용기를 보여 주었지만 그 치료는 별다른 성과를 얻지 못하였다. 정신분 석에 그나마 관심을 지녔던 철학자들은 대개의 경우 유태 인들이었다. 따라서 베르그송, 아도르노, 호르크하이머, 마 르쿠제, 한나 아렌트, 칼 포퍼, 마르틴 부버, 데리다. 들뢰즈, 가타리 등이 호의적이든 비판적이든 정신분석에 최소한의 관심을 기울였던 유태계 학자들이라면, 인간의 실존에 대해 탐구했던 하이데거, 야스퍼스, 사르트르 등은 애써 프로이

트를 무시했다. 서양철학이 이처럼 철저히 프로이트의 존 재를 무시한 반면에 융은 동양철학 및 사상에서 자신의 입 지를 확보하고자 했다.

6. 정신분석과 정신의학

오늘날에 와서는 많은 대학에 별의별 희한한 학과도 존재 한다. 그러나 유독 백여 년의 역사를 지닌 정신분석학을 전 문으로 다루는 학과는 어느 대학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분 명 환자를 치료하는 임상 분야임에도 불구하고 대학병원에 정신분석학과 역시 존재하지 않는다. 대학과 의학 두 분야 에서 공히 정신분석은 항상 배제되어 왔다. 사회적 차원에서 볼 때, 가장 보수적 집단이라고 할 수 있는 대학과 의학 두 집단에서 정신분석을 거부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프로이트 는 한 때 교수가 되는 것이 꿈이었다. 그러나 유태인이라는 이유로 그의 꿈은 좌절되고 말았다. 그는 어쩔 수 없이 개 업의 길을 걸으면서도 학문적 야심에 불타오르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야심은 끝내 정신분석이라는 또 하나의 거대 한 학문 분야를 개척해 낸 것이다. 자신의 꿈을 이루지 못 한 프로이트로서는 당시 인종적 편견에 가득 찬 대학 강단 에 대해 불만과 불신이 매우 컸을 것이다. 따라서 그는 대 학에 연연하지 않고 독자적인 학문의 길을 고집한 것이다.

그러나 만년에 이르러 그의 태도는 다음과 같이 다소 여유 있고 포용적인 모습을 보인다(Freud 1925b).“일부 분석 가들은 대학이 정신분석을 인정하고, 의학 교과 과정에 포함 되도록 하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다. 다른 분석가들은 대학 밖에 남아있는 것에 만족하면서 정신분석의 교육학적 의미 가 의학적 의미에 의해 퇴색되는 것을 방지하려고 한다. 때 로는 어떤 분석가는 정신분석적 발견이나 관점들 가운데 단 한 가지만을 강조하고 다른 것들을 희생시키려고 시도 하다 고립을 자초하는 일이 반복해서 일어나기도 한다. 그 러나 전체적인 모습은 높은 수준의 진지한 과학적 연구가 이루어지고 있다는 점에서 만족스럽게 생각한다.”

정신분석에 대해 완강하게 문을 걸어 잠근 유럽 정신의

학과는 달리, 미국 정신의학계는 정신분석에 대한 문호를 전

면적으로 개방하였으며 그 결과 5, 60년대는 정신분석의

영향아래 역동정신의학이 미국에서 황금기를 구가하였다. 비

록 향정신성 약물의 눈부신 개발로 그 영향력은 현저히 감

소하였지만 그러나 정신치료 분야에서의 위치는 아직도 확

고하다고 할 수 있다. 다른 한편으로 정신분석 측의 문제도

거론될 수 있다. 특히 헝가리 출신의 분석가 토마스 자츠는

미국에 정착하면서 반정신의학의 기치를 높이 내걸고 투쟁

했다. 영국 타비스톡 출신의 로날드 랭이 반정신의학 운동

을 전개하였듯이 자츠는 뉴욕을 중심으로 정신과의사들과 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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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 炳 郁

85 섰다. 랭은 비록 분석가는 아니었지만 정신과의사들의 환자

들에 대한 기계적인 접근방식을 비난하고 자신만의 독자적 인 치료공동체를 만들어 운영함으로써 극단적인 반정신의학 운동을 펼쳐 나갔는데 그러나 그의 야심찬 시도는 결국 참담 한 실패로 끝났으며 자신의 가족관계에도 악영향을 끼친 결 과 그의 말년은 매우 비참하다 싶을 정도로 불행한 여생을 보내야만 되었다. 그리고 그의 실패는 많은 정신과의사들로 부터 빈축의 대상이 되고 말았다. 이러한 비타협적인 비난 과 투쟁들이 정신분석을 정신의학계로부터 멀어지도록 유도 하고 경계의 대상이 되는 계기를 심어주었을 수 있다. 그러 나 오늘날에 와서 랭과 자츠를 말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어 쨌든 현대 정신의학은 오로지 생물지향주의 일변도로 흐르 는 추세이기 때문에 정신과의사들 가운데 정신분석에 대한 관심이나 그 임상적 가치에 대한 평가는 예전과 달리 현저 히 떨어진 것이 사실이다.

7. 정신분석과 예술

엄밀히 말하면 무의식의 존재를 처음으로 알았던 인물은 프로이트가 아니라 천재적인 예술가들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이미 예술가들은 누구보다 가까이 무의식에 접 근했던 사람들이라 할 수 있다. 프로이트는 이미 존재해 왔 던 무의식의 세계를 재발견한 것일 뿐이다. 소포클레스는 [오이디푸스 왕]을 통하여 비극적 운명의 힘을 암시하였지 만 그 힘은 결국 역동적 무의식의 힘을 가리킨 것이었다.

의지의 힘으로 물리치기 어려운 비극적 상황이 의미하는 것 은 우리 스스로 알지 못하는 각자의 내면적 모순에 기인한 것이기 때문이다. 셰익스피어도 햄리트의 우유부단함을 통 하여 그리고 오델로의 편집증적 의심을 통하여, 맥베드의 살 해욕구와 죄의식을 통하여 인간 심층의 모순적 구조를 드 러내 보여준 바 있다. 도스토예프스키 역시 부친살해를 비 롯한 병적 심리 과정을 적나라하게 보여주었으며, 프루스 트, 조이스, 버지니아 울프 등도 의식의 흐름 기법을 통하 여 인간 내면의 추악성을 여지없이 폭로했다. 카프카에 이 르면 인간 심리의 부조리성이 더욱 날카롭게 드러난다. 사 르트르는 인간의 의지에 대한 확고한 믿음을 작품화시켰지 만 상황에 따라 인간 의지의 힘이 얼마나 무력한지에 대한 깊은 통찰이 결여되어 있다는 점이 가장 큰 약점으로 남아 있다. 물론 그는 무의식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았지만 그럼 에도 불구하고 그의 인정과는 상관없이 무의식이 작용한다 는 사실은 경험을 통해 충분히 입증되고 있는 것이다. 소포 클레스에서 오늘날의 해롤드 핀터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호 머에서 보들레르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문학적 천재들은 무 의식의 존재를 이미 감지하고 있었으며 그것을 형상화시키

고자 애썼던 것이다. 심지어 프로이트의 존재를 전혀 알지 못했던 일본의 미야자와 겐지, 한국의 이상 등과 같은 동양 의 시인들도 20세기 초에 이미 무의식적 충동으로 인한 심 리적 고통에 대해 남다른 천재적 육감을 동원하여 작품화 시킨 바 있다. 다른 어느 분야보다 예술가들은 정신분석에 대해 호의적이었는데 그것은 그만큼 그들이 삶의 모순과 고 통에 민감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結 語

정신분석의 발전은 초반부터 그리 순탄치가 않았다. 사회 적 압력과 자체적인 내분 사이에서 프로이트는 매우 곤혹스 럽고 외로웠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온갖 시련을 극복 하며 학문적 전통을 소멸시키지 않고 지금까지 그대로 이 어왔다는 사실은 그저 놀라울 뿐이며, 동시에 오늘날의 기 반을 잡기까지 보여준 정신분석운동의 치열한 전개과정은 자유민주주의사회가 아니었으면 불가능에 가까웠을지도 모 른다. 프로이트가 비인이 아니라 런던에서 태어났더라면 정신분석의 발전이 더욱 수월했을지도 모르지만, 그러나 어 쨌든 백여 년의 적지 않은 기간 동안 서구사회 전반에 걸쳐 정신분석이 끼친 엄청난 영향력을 고려해 본다면, 서구사 상사의 한가운데 위치한 프로이트라는 존재의 위대함을 실 감하게 된다. 역사적 관점에서는 마르크스의 존재가 그보 다 더한 영향력을 끼쳤다고 할 수 있지만, 프로이트는 오로 지 개인적 차원에서 인간 정신의 구조적 모순을 밝히고 그 해결책을 찾으려 했다는 점에서 더욱 빛을 발하는 것이다.

비록 그의 이론이 완벽한 것은 아니었지만 앞으로도 더욱 발전할 수 있는 정신분석적 이상의 토대를 마련했다는 점 에서 인류지성사에 또 하나의 커다란 획을 그은 것만은 분 명하다. 프로이트 이전과 이후의 세계는 그만큼 다른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뿌리 깊은 서구 합리주

의 전통에 과감히 도전장을 던졌던 프로이트의 이론은 매

우 강력한 사회적 저항에 부딪쳐야 했다. 철학, 종교, 의학,

예술 등 거의 모든 분야에서 정신분석은 온갖 비난과 시시

비비를 불러 일으켰다. 특히 정신분석은 기독교 전통에 반

하는 무신론적 유태심리학이라는 오명이 프로이트의 입지

를 매우 난처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그의 우려는 현실로 나

타났다. 20세기 격변기를 거치면서 정신분석은 커다란 위

기를 맞이해야만 되었다. 그것은 정신분석이라는 학문 자체

의 소멸을 걱정할 정도로 생존에 사활이 걸린 문제였기 때문

이다. 공산주의사회는 정신분석을 자본주의사회의 이념에 추

종하는 반동적 학문으로 간주하고 모든 소비에트사회 내에

참조

관련 문서

Keywords: Anti-Soviet & Anti-Communist Movement, North Korea, Sinuiju Incident, Anti-Trusteeship Movement, Land Reform, Provincial, City and County Peopl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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