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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식론 제03주: 게티어 문제와 논파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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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인식론

(2)

지식의 분석: 지식의 JTB 분석

이미 여러 차례 말한 대로, 인식론의 주제는 지식과 정당화이다. 이 가운데 (명제적) 지식은 전통적으로 다음과 같이 분석됐다: (JTB) S는 p를 안다=dfS의 믿음 p는 참이고 정당화되었다. 만일 S가 p를 믿지 않는다면 S가 p를 안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다. 만일 p가 참이 아니라면 S의 믿음 p가 앎이라고 하기에 부족할 것이다. 만일 S의 믿음 p가 참이지만 잘못된 근거에 기초했다면 그 역시 앎이라고 할 수 없을 것이다. 따라서 최소한 S는 p를 안다면 S의 믿음 p는 참이고 정당화되었다 는데는 논쟁의 여지가 없다. 문제는 그 역방향이다.

(3)

게티어 문제: JTB의 반례

다음 경우를 생각해 보자: 영수는 그의 사무실 동료인 철수가 현대 그랜저 자동차를 몰고 다니는 것을 여러번 목격했고, 최근 그 차를 얻어 탄 적이 있으며, 또한 그 차가 자신의 차라고 말하는 것을 여러 번 들었다. 물론 영수는 철수가 그의 사무실 동료라는 것을 안다. 따라서 (1) 철수는 현대 그랜저 자동차를 소유하고 있으며, (2) 철수는 그의 사무실 동료 라는 영수의 믿음 (1)&(2)는 정당화되었다.

(4)

게티어 문제: JTB의 반례 (계속)

(1)&(2)는 영수의 다음 믿음을 논리적으로 함축한다: (3) 나의 사무실 동료 한 명은 현대 그랜저 자동차를 소유했다. 이제 다음 원칙을 생각해 보자: 정당화 폐쇄 원칙: 만일 p가 정당화되었고 p가 q를 논리적으로 함축하면 q 역시 정당화된다. 이 원칙은 너무나 당연하게 들린다. 따라서 영수의 믿음 (3) 역시 정당화되었다.

(5)

게티어 문제 : JTB의 반례 (계속)

그런데 사실은 철수가 몰고 다닌 현대 그랜저는 렌트한 차이며, 철수는 영수에게 계속 거짓말을 해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3) 은 참이다. 왜냐하면 (4) 갑수는 현대 그랜저를 소유했고, (5) 갑수는 영수의 사무실 동료이다. 물론 (4)&(5)는 (3)을 함축한다. 따라서, (6) 영수의 믿음 (3)는 정당화된 참된 믿음(JTB)이지만, 직관적으로 봤을 때, 영수의 그 믿음은 앎이 아니다. 따라서 이 사례는 JTB의 반례이다.

(6)

게티어 문제: 거짓된 전제

영수의 믿음 (3)가 앎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 그의 믿음 (3)는 그의 또 다른 믿음 (1)로부터 추론되었다. ● 그런데 그의 믿음 (1)은 정당화되기는 했지만 거짓이다. ● 거짓된 믿음으로부터 추론된 믿음은 직관적으로 봤을 때 앎이 아닐 수 밖에 없다.

(7)

게티어 문제: 전제의 제한

이렇게 봤을 때, 한 해결책은 (JTB)를 다음처럼 고치는 것이다: (JTB+) S는 p를 안다=dfS의 믿음 p는 참이고 거짓 전제로부터 도출되는 것이 아닌 방식으로 정당화되었다. 이제 영수의 믿음 (3) --- 나의 사무실 동료 한 명은 현대 그랜저 자동차를 소유하고 있다 --- 는 ● 참이고 --- 갑수가 현대 그랜저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 (4)에 의해 참이 된다--- ● 정당화되기는 했지만 ---철수가 현대 그랜저를 가졌다는 믿음 (1)로부터 도출되었다--- ● 거짓된 믿음으로부터 도출되었기 때문에 ---(1)은 거짓이다---지식이 아니다.

(8)

게티어 문제: 비추론적 정당화

그러나 다음 예를 생각해 보자 (슈토이프의 예): 정수는 [(7) "뜰에 내 고양이가 있다"]고 믿는다. 정수의 이 믿음은 [(8) "뜰에 내 고양이가 있는 것처럼 보인다"]는 그의 지각 경험에 기초한 것이다. 사실 이 경험은 뜰에 비춰진 홀로그램 때문이지만, 정수는 이 사실을 모른다. 공교롭게도, 뜰에 고양이가 있기는 하지만, 그것은 창 밑의 사각에 숨어 있다. 이제 정수의 믿음 (7)은 ● 참이고, ● 정당화되었으며, ● 거짓 전제로부터 도출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정수의 믿음은 앎이 아니다. 이것은 (JTB+)의 반례다.

(9)

게티어 문제: 오도적 지각 경험

정수의 믿음이 앎이 아니라는 우리의 직관은 오도적 지각경험 (8)에 의거해서 정수가 (7)을 믿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8)과 (7) 사이의 관계는 논리적 도출관계가 아니기 때문에 (JTB+)의 우항을 만족한다. 그렇다면 거짓된 전제뿐만 아니라 오도적 지각경험에 기초했다는 것도 정당화된 참된 믿음을 앎이 아니게 하는 요인이 된다고 생각할 수 있다. 이것은 다음과 같은 지식의 분석으로 이어진다: (JTB++) S는 p를 안다=dfS의 믿음 p는 참이고 거짓 전제로부터 도출되거나 오도적 지각경험에 의해 초래되는 것이 아닌 방식으로 정당화되었다.

(10)

게티어 문제: 운좋게 정당화된 참믿음

그러나 다음 예를 생각해 보자 (골드만의 예): 진수는 버몬트 주의 농장지대에서 차를 몰고 있다. 그가 지금 지나고 있는 지역에서는 더 이상 농장업이 활발하지 않지만, 관광객들을 위해서 앞면만 있는 가짜 헛간들이 설치되어 있다. 진수는 그 중 하나를 보고 [(9) "아, 저것은 헛간이구나"]하고 믿는다. 공교롭게 그것은 드물게 남아있는 진짜 헛간이다. 이 예에서 그의 믿음 (9)는 참이고, 정당화되었으며, 거짓 전제에서 도출되지도 않았고, 오도적 지각 경험에 의한 것도 아니지만 --- 그것은 진짜 헛간처럼 보이고, 또 진짜 헛간이다 --- 앎이 아니다. 왜냐하면 수많은 가짜 헛간들 사이에서 진짜를 보고 그 정당화된 참믿음을 가진 것은 순전히 운이었기 때문이다.

(11)

게티어 문제: 행운의 부재

따라서 (JTB)를 다음과 같이 수정할 것을 생각해 볼 수 있다: (JTB+++) S는 p를 안다=dfS의 믿음 p는 참이고 거짓 전제로부터 도출되거나 오도적 지각경험에 의해 초래되는 것이 아닌 방식으로 정당화되었으며 이것은 인식론적 행운의 경우가 아니다. 이 분석에도 반례가 있을까? 이 물음에 답하려면 우리는 어떤 경우가 인식론적 행운에 해당하는지에 대한 명확한 규준이 필요하다. 그러나 "인식론적 행운"은 그리 명료한 개념이 아니기 때문에, (JTB+++)에 반례가 있는지 없는지는 확언할 수 없다. 그렇지만, 어느 경우에건, 그 정의항이 불명료한 개념을 포함한다는 것은 (JTB+++)의 결함이다.

(12)

논파

지금까지는 우리는 (i) 지식에 대한 새로운 분석을 제안하고, (ii) 그 분석에 반례가 있는지, 있다면 (iii) 그 분석항에 새로운 조건을 추가함으로써 그 반례를 극복할 수 있는지 논의해왔다. 그러나 이런 접근 방식은 지나치게 대증처방적이다. 새 접근 방식으로서, 지금까지 논의된 반례들을 한 몫에 처리할 수 있는 조건을 찾으려고 생각해 볼 수 있다. 이를 위해 어떤 철학자들은 논파(defeat)의 개념을 도입한다:

d는 명제 p의 증거 e를 논파한다=dfe는 p의 증거이지만 d&e는

(13)

증거적 논파자와 사실적 논파자

그런데 논파의 개념은 두 가지로 분류될 수 있다: ● d는 p를 믿기 위한 인식주체 S의 증거 e를 증거적으로 논파한다=dfd는 e를 논파하고, S는 d를 위한 증거를 가졌다. ● d는 p를 믿기 위한 인식주체 S의 증거 e를 사실적으로 논파한다=dfd는 e를 논파하는 참된 명제이지만, S에게는 d를 위한 증거가 없다. 따라서 ● e가 p를 믿기 위한 S의 유일한 증거이고 d가 e를 증거적으로 논파한다면, S는 p를 믿음에 있어 정당화되지 않는다. ● e가 p를 믿기 위한 S의 유일한 증거일 때, d가 e를 사실적으로 논파한다 해도 S는 p를 믿음에 있어 정당화될 수 있다.

(14)

논파주의

이병덕 선생님은 논파주의를 다음과 같이 형식화한다: (D*) S는 p를 안다=df 1. p는 참되고, 2. S는 p를 믿고, 3. S는 p를 믿기 위한 적절한 증거 e를 가지고 있으며, 4. e를 사실적으로 논파하는 명제 d가 없다. 토론할 점: (D*)는 두 가지 측면에서 결함을 가진 형식화로 보인다. 어떤 면에서 그럴까?

(15)

논파주의 (수정)

그래서 나는 논파주의가 다음처럼 형식화돼야 한다고 본다: (D) S는 p를 안다=df 1. p는 참되고, 2. S는 p를 믿고, 3. S는 p를 믿기 위한 적절하고 증거적으로 논파되지 않은 증거e를 가지고 있으며, 4. S의 믿음 p를 위한 증거 e를 사실적으로 논파하는 명제 d가 없다. 세번째 조건은 대략 S의 믿음 p가 정당화되었다는 뜻이다. (이것은 증거주의를 전제하는 것으로 보인다.)

(16)

논파주의: 잘못된 전제의 배제

이제 (D)가 어떻게 게티어 문제와 같이 거짓에 의해 정당화된 믿음의 반례를 배제하는지 살펴보자. 그 예에서 ● [(3) "그의 사무실 동료가 그랜저를 가졌다"]는 영수의 믿음은 정당화되었지만 ● [(1) "철수가 그랜저를 가졌다"]는 거짓 믿음에서 도출되었다. 이때 (1)은 영수가 (3)을 믿을 이유가 되지만, (10) 철수는 그랜저 소유자가 아니며 단지 그 차를 렌트하고 있다 는 사실은 그 이유를 사실적으로 논파한다. 왜냐하면 (1)은 (3)의 증거지만 (1)&(10)은 (3)의 증거가 아니며, 영수는 (10)이 참이라는 증거를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p가 e로부터 도출되어 정당화되었을 때 [(d) e가 거짓]이라면 d&e는 p의 증거가 아니다.

(17)

논파주의: 오도적 지각경험의 배제

그렇다면 (D)는 슈토이프의 예와 같이 오도적 지각경험의 반례를 어떻게 배제할까? 그 예에서 ● [(7) "뜰에 내 고양이가 있다"]는 정수의 믿음은 정당화됐지만 ● [(8) "뜰에 내 고양이가 있는 것처럼 보인다"]는 오도적 지각경험이 초래한 믿음이다. 이 때 (8)은 (7)의 증거이지만 (11) 홀로그램이 정수에게 지각경험 (8)을 초래했다 는 사실은 그 믿음을 사실적으로 논파한다. 따라서 (D)에 의하면 슈토이프의 예는 앎의 예가 아니며, 이것은 우리의 직관과 일치한다. 일반적으로 말해서, [(d) 지각경험 e가 표상하는 바가 사실과 일치하지 않는다]면, e가 p를 믿을 좋은 이유라 할지라도 (d)는 e를 논파한다.

(18)

논파주의: 행운의 배제

마지막으로 골드만의 예를 생각해 보자. 진수는 [(9) "저것은 헛간이야"]라고 믿을 좋은 이유를 가지고 있다: (12) 저기 헛간이 있는 것같이 진수에게 보인다. 이때 (12)는 거짓 전제도, 오도적 지각경험도 아니다. 따라서 앞의 두 예와 달리 (9)를 믿을 이유로서 (12)를 사실적으로 논파할 참된 명제를 찾기 어려워 보인다. 하지만 다음 참 명제를 생각하라: (13) 이 들판에 있는 헛간처럼 보이는 물체들 가운데 진짜 헛간은 매우 드물다. 앞의 예들에서는 믿음 p를 위한 증거 e가 거짓 전제이거나 오도적 지각경험임을 보여주는 사실적 논파자 d가 주어졌던데 반해, 이 예에서는 e가 참이거나 맞다고 하더라도 p의 증거가 되지 못하게 하는 방식으로 d가 e를 논파한다.

(19)

논파주의: 단순화된 형태

그렇다면 게티어 스타일의 반례들, 즉 다음 유형의 반례들은 (D) 에 없을지도 모르겠다: S가 p를 모르지만 p와 관련하여 (D)의 네 조건을 만족한다. 잠정적으로 (D)가 게티어 문제에 대한 해결책이고, 나아가서 앎에 대한 정확한 분석이라고 가정하자. 그런데 (D)는 특이한 속성을 지니고 있다: (D)의 네번째 조건, 즉 사실적 논파자 d가 없다는 조건은, (D) 의 첫번째 조건, 즉 믿음 p가 참이라는 조건을 함축한다. 왜 그럴까?

(20)

논파주의: 잠재적 우려

논파주의의 이 특성에 대해 이병덕 선생님은 다음같이 말한다: 논파주의의 한 가지 중요한 특성은 네 번째의 조건이 첫 번째 조건, 즉 ‘p는 참이어야 한다’는 조건을 잉여적으로 만든다는 점이다. ... 이 귀결은 논파주의의 네 번째 조건을 비현실적으로 강한 조건으로 만든다. ... 이와 같은 특성에도 불구하고 논파주의가 옹호될 수 있는 이론인지 여부에 대해서는 제5장 ‘레러의 주관적 정합론’과 제9장 '실천적, 현상학적 인식론'에서 다룰 것이다. 여기서 네 번째 조건이 첫번째 조건을 잉여적으로 만든다는 것이 왜 전자를 비현실적으로 강하게 만든다는 것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그러나 나는 다른 이유에서 그 조건이 지나치게 강하다고 우려한다.

(21)

논파주의: 잠재적 우려 (계속)

다음 경우를 생각해 보자: 사철이는 오철이와 쌍둥이다. 어느 날 [(14) 사철이처럼 보이는 이가 강의 시간에 나타나서 교수님을 모욕했다]. 총장님은 [(15) 사철이가 교수님을 모욕했다]고 참되게 믿는다. 그런데 미영이는 [(16) 오철이가 명문대생인 사철이를 질투했으며 그 시간에 술마시고 어디론가 사라졌다]고 참되게 말한다. 총장님은 (16)을 모른다. 하지만 미영이는 사실 유명한 거짓말쟁이다. 이때 총장님의 믿음 (15)는 참이고, 증거 (14)는 총장님이 (15)를 믿을 이유이지만, (16)은 (14)를 사실적으로 논파하기 때문에 (D) 의 네 조건이 모두 만족되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경우에는 총장님 (15)를 안다고 말하는 것이 맞아 보인다.

(22)

논파주의: 잠재적 우려 (계속)

즉 그 네번째 조건은 너무 강하기 때문에 논파주의는 새로운 유형의 반례들에 노출될 수 있을 것 같다: S가 p를 알지만 p와 관련하여 (D)의 네 조건을 모두 만족하지 못한다. 만일 이것이 맞다면 이 반례는 (D)의 네번째 조건, 즉 사실적 논파자가 없어야 한다는 것이 "비현실적으로 강한 조건"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지만 이병덕 선생님이 그 조건이 비현실적으로 강하다고 간주하는 것은 이런 반례의 출현과는 상관없는 이유에 기인한다. 그 이유가 무엇인지는 5장과 9장을 배울 때 알아보자.

(23)

윤리적 행운 대 인식론적 행운

앞에서 우리는 인식론적 행운의 개념을 논한 적이 있다. 이것을 윤리적 행운의 개념과 비교하는 것이 도움이 될 수 있다: 신영이와 유영이는 평화로운 시골 동네에 태어나서 평생 도덕적 규범에 잘 부합하는 삶을 살았다. 그러나 신영이는 만일 대도시뒷골목에 태어났다 해도 올바른 삶을 살았을 인간인 반면, 유영이는 기회만 있었다면 ("있었다면!") 한국 국가사회당을 조직하여 총수가 되고 동남아인들을 수용소로 보냈을 인물이다. 이 경우 유영이가 한 착한 (혹은 착하게 보이는) 행동들은 평화로운 시골 동네에 태어났다는 윤리적 행운에 기인한다.

(24)

윤리적 행운 대 인식론적 행운 (계속)

이제 두 사람을 비교해 보자: 술람과 해식이는 각각의 시각에서 봤을 때 푸른 하늘과 마천루, 교외의 풀밭 등 정상적으로 보이는 세계에 살고 있지만, 사실은 술람은 통 속의 뇌이고 해식이는 실제로 정상적인 세계에 살고 있다. 이때 해식이가 가지고 있는 믿음들이 참된 믿음인 것은 정상적인 세계에 태어났다는 인식론적 행운에 기인한다. 마찬가지로, 골드만의 예에서 진수가 "저것은 헛간"이라는 참된 믿음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은 순전히 인식론적 행운에 기인한 것이다. 이때 인식론적 행운이란 것은 인식주체 S의 환경이 운좋게 맞아떨어져서 S가 p라는 참된 믿음, 또는 심지어 p라는 정당화된 참된 믿음을 가지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25)

행운: 운좋은 참믿음

보통 인식주체 S가 정상적이라면 그의 인식론적 목표는 참된 믿을 획득하고 거짓된 믿음을 피하는 것이다. 그러나 S가 이런 목표를 진정 추구한다면, 요행수를 바라기 보다는, 참일 것이 어느정도 보장되는 명제를 골라서 믿어야 할 것이다. 이 때문에, 플라톤의 테아이테토스 편에 등장하는 소크라테스는 참된 믿음만으로는 앎이 안 되고 더하여 그 믿음이 참되도록 "묶어주는 (tethered or tied)" 제 3의 요소가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후세 철학들은 이 제 3의 요소가 정당화라고 해석한다.

(26)

행운: 오류가능주의 대 오류불가능주의

그런데 정당화가 S의 믿음 p가 참이 되도록 보장해주는 역할을 한다면, 우리는 그 보장의 강도가 얼마나 되어야 하는지 궁금해지게 마련이다. 여기에 대해 두 가지 입장이 있을 수 있다: ● 오류불가능주의 (infallibilism): S의 믿음 p가 정당화되었다고 하려면 p가 거짓이라는 것은 불가능해야 한다. ● 오류가능주의 (fallibilism): S의 믿음 p가 정당화되었다고 해도 p가 거짓이라는 것은 가능하다. 다만 그 경우에도 S는 p를 믿을 좋은 이유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 오늘날 대부분 철학자들은 오류가능주의자들이다. 왜냐하면 오류불가능주의를 받아들인다면 정당화된 믿음을 거의 아무 것도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27)

행운: 운좋게 정당화된 참믿음

이제 S의 믿음 p가 정당화되었지만, 즉 S가 p를 믿을 증거 e를 가지고 있지만, e가 p의 참을 보장해 주는데 실패했다고 하자. 오류가능주의를 받아들인다면 이런 경우도 가능할 것이다. 그런데 e가 p의 참을 보장해 주지 못한다는 것이 p가 꼭 거짓이라는 것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운좋게도, e가 p의 참을 보장해 주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p가 우연히 참이 되는 경우도 생각해 볼 수 있다. 이 경우 S의 믿음 p가 ● 참이고 ● 정당화되지만 p가 참일 것을 보장해 주지 못했다 는 경우가 있을 수 있다. 이때 바로 S의 믿음 p가 앎은 아니지만 정당화된 참된 믿음이 되어 (JTB)의 반례가 발생한다.

(28)

사실적 논파자와 인식론적 행운

역사적으로 봤을 때, 앎의 개념은 곧 요행수가 아닌 ---즉 인식론적 행운의 경우가 아닌--- 참된 믿음의 개념이다. 따라서 인식론적 행운을 배제하기 위해서 어떤 조건이 필요하고 충분한지가 중요한 물음들로 대두된다. 따라서 (D), 즉 논파주의가 앎에 대한 정확한 분석인지 따지려면, "사실적 논파자의 부재가 인식론적 행운의 부재와 동치"인지 따져볼 필요가 있다. 물론 "사실적 논파자의 존재가 인식론적 행운의 존재와 동치"이지 따져도 된다.

(29)

사실적 논파자&JTB->인식론적 행운

이제 S의 믿음 p가 증거 e에 의해 정당화된 참된 믿음이라고 했을 때, e를 사실적으로 논파하는 d가 있다는 것은 그 믿음 p를 인식론적 행운의 경우로 만든다. 왜일까? 정의상 d&e는 p의 증거가 되지 못한다. 그런데 d가 사실이기 때문에 믿음 p가 증거 e에 의해 정당화되더라도 p의 참이 보장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p가 참이었던 것은 순전히 인식론적 행운이다. 골드만의 예를 생각해 보자. 진수가 "저것은 헛간이야!"라고 믿은 것은 "저기 헛간처럼 보이는 물체가 보여!"라는 증거에 의해 정당화되지만, 그 물체 주변에 수많은 가짜 헛간들이 있었다는 것은 그 믿음의 참이 순전히 인식론적 행운이었다는 뜻이다.

(30)

인식론적 행운&JTB->사실적 논파자

다음으로 S의 믿음 p가 참되고 증거 e에 의해 정당화되었지만, p가 참이라는 것이 인식론적 행운이라면, 그때에는 e를 사실적으로 논파하는 참된 명제 d가 존재한다. 인식론적 행운의 정의에 의해, (d) e는 S의 믿음 p를 위한 좋은 이유지만 주어진 경우에 e가 p의 참을 보장하지는 못한다. 명백히 d&e는 p를 위한 좋은 증거가 아니다. 또 S가 d의 증거를 가지고 있었다면 S의 믿음 p는 e에 의해 정당화되지 않았을 것이므로, S에게는 d의 증거가 없다. 따라서 d는 p의 증거로서 e를 사실적으로 논파한다. 토론할 점: 골드만의 예에서 이 점이 어떻게 드러나는지 논하라.

(31)

사실적 논파자와 인식론적 행운 (다시)

이렇게 봤을 때, S의 믿음 p가 참되고 e에 의해 정당화되었다면, 어떤 참된 명제 d가 e를 사실적으로 논파한다 IFF S의 참된 믿음 p는 인식론적 행운이다. 다시 말하자면 어떤 참된 명제도 e를 사실적으로 논파하지 않는다 IFF S의 참된 믿음 p는 단지 인식론적 행운이 아니다. 이렇게 봤을 때, 정당화와 사실적 논파자의 부재라는 논파주의의 두 조건은 믿음을 "참으로 묶는다"는 플라톤의 아이디어를 정확히 실현한다.

(32)

해결책 유형 1: DJTB분석

지금까지 우리는 게티어 문제에 대한 해결책들을 개별적으로 논의했다. 하지만 이런 다양한 해결책들을 보다 일반적으로 분류하는 것이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게티어 문제에 대한 전통적인 해결책들은 정당화, 참, 믿음과 결합하여 앎의 필요 충분조건을 구성하는 네번째 조건을 찾는 것이다. 이 조건이 무엇이건 "탈게티어화(degettierize)" 조건이라고 부르자. 우리가 탈게티어가 무엇인지 찾아낸다면 우리는 앎에 대한 다음 분석을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다: (DJTB) S는 p를 안다=dfS의 믿음 p는 참되고 정당화되었으며 탈게티어화되었다.

(33)

해결책 유형 2: WTB분석

또 한 가지 유형의 해결책은 제 사의 조건을 찾는 것보다는 참된 믿음을 지식으로 만드는 조건을 찾는 것이다. 이 입장을 대표하는 알빈 플란팅가의 용어를 도입하여, 그 제 3의 조건을 "보장(warrant)"이라고 부르자. 이 경우 다음과 같은 앎의 분석이 얻어진다: (WTB) S는 p를 안다=dfS의 믿음 p는 참되고 보장되었다.

(34)

탈게티어화란 무엇인가?

탈게티어화는 어떤 조건인가? 물론 우리는 이 물음에 대한 대답을 아직 잘 모른다. 논파주의가 맞다면 사실적 논파자의 부재가 탈게티어화 조건이겠지만, 아직 인식론자들 사이에 논파주의가 앎의 정확한 분석인지에 대한 합의는 없다. 한 가지 사소한 대답은 다음과 같은 것이 될 것이다: S의 믿음 p는 탈게티어화 되었다=df(S의 믿음 p가 참되고 정당화되었다 ⊃ S의 믿음 p는 앎이다.) 이 대답이 불만족스러운 이유는 무엇인가?

(35)

보장이란 무엇인가?

보장에 대해서도 비슷한 물음을 던질 수 있다: 보장이란 어떤 조건인가? 역시 사소한 대답은 다음과 같다: S의 믿음 p는 보장되었다=df(S의 믿음 p는 참이다 ⊃ S의 믿음 p는 앎이다.) 이 대답이 불만족스러운 이유는 무엇인가?

(36)

비교: DJTB versus WTB

DJTB와 WTB 분석들 사이에는 다음과 같은 차이점들이 있다: 1. DJTB분석을 지지하는 이들은 참된 믿음을 지식으로 만드는 조건이 정당화와 탈게티어화이며, 이 두 조건들은 각각 독립적으로 분석될 수 있다고 본다. 반면 2. WTB분석을 지지하는 이들은 참된 믿음을 지식으로 만드는 조건이 보장이며, 보장의 개념을 정당화와 탈게티어화의 연언으로 분석하는 것은 부적절하다고 생각한다. 의문점: 만일 WTB분석을 채택한다면 보장과 정당화의 논리적 관계는 무엇일까?

(37)

WTB 1: W->J but W=/=J

어떤 철학자들은 보장이 전통적 개념으로서의 정당화를 함축하기는 하지만 보장과 정당화가 같은 개념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이러한 논리적 관계에도 불구하고, W=JD를 만족하는 사소하지 않은 조건 D, 즉 탈게티어화 조건을 찾는 것은 불가능하거나 부적절하다고 생각한다. 그런 조건 D가 있다면 WTB가 앎의 필요충분조건이기 때문에 DJTB도 앎의 필요충분조건이 될것이다. 즉 이 입장을 DJTB(탈게티화된 정당화된 참된 믿음 분석) 으로부터 구분시켜주는 것은 보장의 개념이 정당화와 탈게티어화의 개념들을 가지고 분석될 수 있음을 부인한다는데 있다.

(38)

WTB 2: ~(W->J) (so W=/=J)

이 접근법을 채택하는 철학자들은 참된 믿음을 앎으로 만드는 어떤 사소하지 않은 조건 W가 존재하지만 이 조건은 정당화를 함축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골드만의 초기 입장에 의하면 S의 참된 믿음p가 지식이 되려면 S가 신빙성 있는 인식과정에 의해서 산출되면, 또 산출되어야만 한다. 이런 철학자들은 전통적인 JTB분석을 확장하여 앎의 정확한 분석을 얻으려 하기보다는 그 분석을 완전히 대체하는 앎의 정의를 찾아내려고 한다. 이 새로운 정의에 의하면 앎이 정당화를 요구하지 않기 때문에, 이 정의가 얼마나 우리의 일상적 앎의 개념을 포착하는지에 대해서는 의문의 여지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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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TB 3: W=J (so W->J)

또 다른 일군의 철학자들은 W=J, 즉 보장은 정당화와 같은 개념이라고 생각한다. 결과적으로 이들은 전통적인 JTB분석을 다시 도입하게 된다. 그러나 게티어 스타일 반례들은 어떻게 하나? 이 철학자들은 결과적으로 정당화의 전통적인 개념과는 다른 개념을 채택하게 된다. 예를 들어 게티어의 예에서 영수는 그의 사무실 동료가 현대 그랜저 오너임을 믿음에 있어서 정당화되지 않았다고 주장할 수 있다. 그 경우 영수는 그 참된 믿음을 알지도 못하지만 정당화되지 않았기 때문에 반례는 발생하지 않는다. 이병덕 선생님의 입장은 이 유형으로 분류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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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 지식의 JTB분석은 게티어 문제를 반례로 가진다. ● 정당화를 위한 증거를 참된 전제로 제한하거나 올바른 지각경험으로 제한하면 게티어 문제는 그 분석에 반례가 되지 못한다. 그러나 새로운 유형의 반례들이 발생한다. ● 논파주의는 이러한 반례들을 모두 한 몫에 제거하는 듯하다. ● 그러나 논파주의에도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다: 그 네번째 조건은 비현실적으로 강한 듯이 보인다. ● 그렇지만 인식론적 행운의 부재와 사실적 논파자의 부재는 동치이기 때문에, 논파주의는 인식론적 행운이 제거된 참된 믿음이 앎이라는 전통에 충실하다. ● 게티어 이후 앎의 분석은 DJTB(탈게티어화된 정당화된 참믿음 분석)과 WTB(보장된 참믿음)분석으로 나눠볼 수 있다.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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