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검색 결과가 없습니다.

경북대학교 BK21+ 글로컬 역사문화 전문인력 사업단

N/A
N/A
Protected

Academic year: 2021

Share "경북대학교 BK21+ 글로컬 역사문화 전문인력 사업단"

Copied!
17
0
0

로드 중.... (전체 텍스트 보기)

전체 글

(1)

고대한국사에서 동아시아사를 전망(展望)하다

       

이성시(李成市:와세다대학 문학부 학술원)

머리말

  이번 「경북대 BK21 플러스 글로컬 역사문화 전문인력 양성사업단」이 주최하는 강연회에 발표할 기회를 주셔서 대단히 영광스럽게 생각합니다. 이 기회를 주신 주보돈 교수님께 다시 한번 감사말씀 드립니다. 1년 전부터 주보돈 교수님께 동아시아사에 관한 강연을 하도록 의뢰를 받았습니다. 그동안 저의 동아시아사에 대한 생각을 최근, 요미우리신문 디지털판(International: pinion: WASEDA ONLINE The Japan News by the Yomiuri Shimbun)에 게재했습니다.

영국의 EU탈퇴에 관해, 또 한국고대와 동아시아사에 대한 저의 연구를 소개한 에세이 「Brexit의 충격-동아시아사에서 희망을 찾을 수 있을까?」

(The Brexit Shock—Can We Find Hope in East Asian History?)가 금년 7·8월 일본어와 영어로 각각 소개되었습니다. 오늘 강연과도 관련 있는 내용이므로, 먼저 소개하고자 합니다. 에세이의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1) Brexit의 충격 6월23일의 국민투표로 EU탈퇴표가 잔류표를 상회하여 영국은 28개국으로 구성된 EU로부터 탈퇴하는 최초의 가맹국이 되었다. 이 뉴스를 접했을 때 지금까지 나의 연구가 전부 부정되는 듯한 충격을 받았다.  인류의 역사는, 각 지역의 공동체로부터 국민국가에 이르는 과정이 아니다. 그것은 통과점에 지나지 않으며, 제국가(諸国家)는 대립과 이해를 넘어 보다 큰 정치적· 경제적 공동체를 향해 확대되어 간다. 종래의 「역사」는 19세기 이래 국민국가를 도달점으로 생각했기 때문에, 과거에 투영시킨 역사상(歷史像)을 구축하여, 그것을 의문 없이 받아들여 왔다. 그러나 근대국가가 통과점에 지나지 않는다면 지금까지의 역사상은 새로운 현실에서 다시 써야 하지 않을까. EU의 착실한 확대과정을 보면서 그와 같은 확신이 강해졌다. 마침 나의 연구가 여러 가지 형태로 결실을 맺을 무렵이기도 했고, 베를린의 벽 붕괴 후, 유럽 현실의 동향은 연구에 큰 힘이 되었다. (2) 동아시아사 연구와의 만남

(2)

 70년대 초 대학에 입학하여 평생 조선고대사 연구를 하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 이유는 국내외에서 새로운 연구가 계속 나왔던 시기였기 때문이다. 한국과 북한의 역사학계에서는 전전(戦前) 일본인 연구자에 의해 강조된 타율성사관(他律性史観), 정체사관(停滞史観)의 극복, 나아가 조선 문화의 독자성의 해명 등이 과제로 되어 있었다. 요컨대 식민지사관의 극복을 지향하여, 지금까지 통설로 되어 있었던 연구에 회의(懐疑)를 품게 되었다. 그와 같은 남북 학계의 동향을 파악하면서, 1960년대부터 일본역사학계의 조류가 되어 있었던 「동아시아」라는 틀에서, 역사를 포착하는 방법론에 열중하게 되었다. 식민지주의의 극복은 필수과제이지만 그것이 지나치면 전전(戦前) 일본의 황국사관과 같이 쇼비니즘(排外主義)에 빠지는 것이 아닐까? 일국사(一国史)라는 틀은 역사의 다이나미즘을 잃게 하는 것이 아닐까?(1) 그러한 의문을 느끼며 70년대 말부터 동아시아의 시점에서 고대조선의 국가형성, 국제관계, 문화교류에 관한 논문을 쓰기 시작했다. (3) 동아시아사 속의 조선고대사   1998년 학위논문으로 정리한 저작은 조선반도의 고대를 대상으로 하는 연구이긴 하지만 굳이 『고대 동아시아의 민족과 국가』라는 타이틀로 간행했다. 그 전년(前年)에 쇼쇼인(正倉院)보물의 전래루트를 단서로 한 고대의 교류사를 『동아시아의 왕권과 교역』이라는 이름으로 발행했다. 그 후에 발표한 단행본도 『동아시아문화권의 형성』, 한국에서 간행한 사론집(史論集)도 『만들어진 고대 - 근대국민국가의 동아시아 담론 (創られた古代-近代国民国家の東アジア言説)』이라는 서명으로, 양쪽 다 「동아시아」에 주목했다. 일국사(一国史)에 환원(還元)할 수 없는 역사는 사료에서 얼마든지 찾아낼 수 있지만, 일국사라는 도그마가 「보아도 보이지 않는다」는 부자유를 가져온다. 예를 들면, 30만점 이상 출토된 고대일본목간은 「중국, 조선과 무연(無縁)으로, 일본열도에 독자적으로 생겼고 전개되었다」 라고 1996년 당시, 어느 학회에서 장로학자가 자신만만하게 주장하고 있었다. 그러나 최근 10년간 한국목간의 출토와, 목간을 근거로 한 한일비교연구에서 그와 같은 독선은 깨끗이 부정되고 말았다. 한국목간연구는 나에게 있어서 동아시아 문명의 전파와 수용의 다이나미즘을 뒷받침하는 귀중한 체험이기도 했다. 이와 같은 인식으로 이르는 과정은 단순히 새로운 자료의 발견에 있었던 것이 아니다. 이웃나라 연구자들과 인적교류를 깊게 맺으며, 서로 의견을 교환하면서 자료와 방법을 공유해 가는, 문자 그대로 공동연구를 심화시킨 성과이기도 했다. (4) 현실과 동아시아사 연구   90년 말 이후, 동아시아제국(諸国)에서 일어난 교과서 문제와 역사인식 문제에서 국가가 주도하는 공동연구가 개최되었다. 그 연구는 외교교섭과 같은 것으로,

(3)

내셔널리즘을 강화하는 것으로는 되어도 학문적으로는 아무런 결과를 낳지 못했다. 한편, 민간 연구자들의 교류가 강화되어, 한중일의 근현대사 부교재도 간행되었다. EU가 유럽의 역사를 교과서로 간행했듯이 동아시아에서도 동일한 역사교육의 필요성을 호소하게 되었던 것이다. 영국의 EU탈퇴가 발표되었던 직후, 어느 회합에서 머리말에 썼던 통한의 심정을 말했다. 2주 후, 영국의 역사가 티모시・가튼・애쉬가 EU탈퇴의 충격을 「나의 정치인생에 있어서 최대의 패배」라고 표현한 것을 아사히신문(7月14日東京版)의 인터뷰 기사에서 알게 되었다. 「문제는 지리적, 역사적, 문화적으로 귀속하는가가 아니라, 특정 정치 목표를 공유하는가, 어떤가라는 것입니다. (유럽과) 동아시와의 결정적인 차이는 거기에 있다」라고 그는 말했다. 그러나 동아시아에 희망이 없는 것은 결코 아니다. 그는 또 「가장 중요한 것은 글로벌화로 패자로 된 사람들에게 희망의 메시지를 주는 것입니다」라고 했다. 나는 「동아시아사」에서 희망을 찾을 수 있을지 어떨지를 절실하게 묻고 있다고 받아들였다. 이상의 내용을 나는 에세이에 썼습니다. 제가 한국고대사연구에서 출발했으면서도, 일국사를 극복하기 위해 동아시아사에 뜻을 두고, 그와 같은 시각에서 목간연구에 관여하게 되었던 일, 나아가 현재, 고대사연구에 종사하면서 동아시아 제국간의 역사인식문제에 깊은 관심을 갖고 있다는 점, 그리고, 동아시아사를 생각하는 것은 동아시아의 현실에 공헌하는 일이기도 하다는 저의 생각을 간결하게 썼습니다. 저의 한국고대사연구도, 나아가서는 동아시아사 연구도 일본학계와 일본을 둘러 싼 국제환경을 빼고는 말할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제가 한국고대사를 공부한 것과 동아시아사 연구로 향하게 된 계기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一. 내가 한국사를 배우고자 했을 무렵 저는 1952년 일본 나고야시(名古屋市)에서 태어나 의무교육으로 대학, 대학원까지 일본에서 교육을 받아왔습니다. 고등학교에서 대학에 진학할 70년대 초, 일본에서 활약하는 한국인작가 김달수씨가 일본열도 각지에 남아 있는 고대한국문화의 유적지를 방문하고 쓴 논픽션 『일본 속의 조선문화(日本の中の朝鮮文化)』 (第1巻、1970年、講談社)가 베스트셀러가 되었고, 역시 재일한국인작가 이회성씨가 1972년 『다듬이질을 하는 여인(砧を打つ女)』 으로 아쿠타가와상(芥川賞)을 수상하는 등, 일본국내에서 한일관계에 대해 새로운 관심을 갖게 되는 시기였습니다. 원래 중고등학생 때부터 역사와 고고학에 흥미를 갖고 있었는데, 고등학교 재학 중과 대학에 진학할 무렵, 한일관계사에 있어서도 센세이셔널한 화제가 이목을 끌어 더 한층 관심이 높아가고 있었습니다. 예를 들면 북한의 대표적인 학자 김석향씨의 저작 『고대조일관계사(古代朝日関係史)』(勁草書房,1969年)가 번역되었습니다.

(4)

고대의 한일관계사는 야마토(大和)조정의 한반도지배가 아니라, 한반도제국의 일본열도에 있어서의 분국(分国)의 역사(식민의 역사)라는 대담한 가설(仮説)이 학계를 흔들고 있었습니다.(2) 또 72년에는, 고대일본의 한반도 지배를 뒷받침하는 결정적인 사료인 광개토왕 비문은, 「육군참모본부에 의해 개찬되었다」는 학설이 발표되는 등, 일본의 대표적인 신문은 모두 제 1면에 이것을 소개하고 있었습니다. 일본 국영방송 NHK는, 비석의 개찬이 가능한가 아닌가를 실험해 보는 프로그램까지 작성하여, 이 설의 가능성을 강조하고 있었던 것을 기억하고 있습니다.(3) 거의 같은 무렵, 나라현 아스카무라의 다카마쓰총(奈良県明日香村高松塚)에서 벽화고분이 발견되자, 고구려 벽화고분과의 관계가 신문, 텔레비전 등 저널리즘을 떠들썩하게 해 도래인(帰化人)의 역할이 고대사에서 주목받게 되었습니다. 김달수의 『일본 속의 조선문화』는 더욱 더 많은 독자를 확보했고, 고대 한일관계사는 시민들도 합류하여 학계의 주류 학설에 대해 이의(異議)를 제기하는 움직임이 나타나고 있었습니다.  이와 같이 1970년대 초는, 고대 한반도와 일본열도와의 관계가 널리 사회문제로서 화제가 되었던 시기였습니다.(4) 그러한 조류 속에, 사회적으로 주목을 끌고 있는 고대의 한일관계사를, 대학에서 학문적으로 검증하고 싶다고 막연하게나마 생각했습니다. 희망한대로 와세다 대학 문학부에 진학했지만 한국사연구 전문가가 전혀 없었습니다. 동양사학과의 선생님이 학계에서 활약하고 있는 선생님께 소개장을 써 주셔서 타 대학과 학회를 방문했습니다. 일본을 대표하는 학회인 조선사연구회를 방문하자, 동경대학의 다케다 유키오(武田幸男) 선생님(5), 국학원 대학의 스즈키 야스타미(鈴木靖民) 선생님(6)을 소개시켜 주셨습니다. 두 분은 일본을 대표하는 한국고대사연구자, 일본사연구자입니다만, 이 두 분 선생님 슬하에서 학부와 대학원 강의, 연습 등을 수강하면서 한국고대사 공부를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二、일본에서 한국사연구의 위치 다소 기이하게 들릴지도 모르겠습니다만, 한국사는 일본에서 배우는 외국사 중에서도 상당히 특수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영국사와 프랑스사를 연구하고자 하면 영국과 프랑스라는 「본국(本国)」의 연구자가 주장하는 학설부터 배우는 것은 당연하고, 그들 본국의 연구로부터 완전히 떨어져서 일본에서 연구가 이루어지는 일은 거의 있을 수 없습니다. 새삼 말할 것도 없이 외국사연구는, 우선 그 땅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자신들의 과거에 관한 연구를 일단 받아들이고, 현지에서 연구 성과를 학습하는 일부터 통상 시작합니다. 외국사를 배운다는 것은 외국이라는 타자와 그 땅의 과거(그 땅에 거주하고 있어도 일반 사람에게는 알 수 없는 타자)라는 이중(二重)의 타자와 서로

(5)

마주 보는 것을 의미합니다.(7) 그런데 일본의 중국사연구에도 다소 비슷한 점이 있습니다만, 일본에 있어서 한국사연구는 장기간, 본국(한국과 북한)의 연구와는 직접적인 관계없이, 일본의 학계에서 어느 의미에서는 자기완결적으로 연구해 온 역사적 경위가 있습니다. 본디 일본의 한국사연구는 근대일본이 한국의 식민지통치를 위해, 그때까지의 토지소유관계를 명확하게 할 목적에서 「구관조사(旧慣調査)」를 시작했습니다. 그 사업의 일환으로, 역사, 민족, 습속 등, 여러 조사가 20세기 초에 착수되어, 이후 일본인에 의해 근대의 학문으로서 한국사연구가 이루어져 왔습니다. 식민지지배를 위한 학문이었기에 국가프로젝트로서 방대한 예산과 인재가 투입되었습니다. 근대적인 의미에서의 「한국사」연구는, 새삼 말할 것까지도 없이, 우선은 일본인에 의한 일본인을 위한 학문으로서 출발했습니다.(8)  1945년까지, 그와 같은 한국사연구가 일본인의 손으로 이루어졌습니다만, 식민지지배가 끝난 후에도, 본국에 있어서의 연구와는 별개로, 기존의 연구축적 위에, 전후(戦後) 일본에서 한국사연구가 재개되어, 국제적으로도 가장 높은 수준의 성과가 창출되었습니다.(9) 그러나 한국과 북한 연구와는 거의 단절된 형태로 행해져 왔습니다.(10) 그러한 의미에서, 일본의 한국사 연구는 다른 외국사, 특히 일본에 있어서의 유럽제국(諸国)을 대상으로 하는 역사연구와는 상당히 다릅니다.  단, 지배를 위한 역사연구라고 하면, 인도사를 비롯해 아시아제국의 역사는 크든 적든 식민지 종주국의 연구자에 의해 착수되었다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에 덧붙여 외국사로서 한국사의 특수성은 식민지에서 해방된 후, 본국의 역사연구가 전혀 다른 두 개의 체계를, 상호 대항하면서 금일에 이르기까지 만들어 오고 있다는 점에 있습니다. 1948년, 한반도 남쪽에는 대한민국이, 북쪽에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각각 다른 국가이데올로기로 성립하여, 자국을 정당화하기 위해 서로의 이데올로기에 의해 현재에 이르기까지의 역사를 각자 서술해 왔습니다.(11) 특히 북한에서는 주지한대로 역사적 유물론에 따르고, 해방 후 사회주의국가에 이르는 역사적 과정을, 소위 필연의 과정으로써 구축하고 있습니다.(12) 남북한에 고대사부터 근대사에 이르기까지, 상호 공유하는 역사가 전혀 없지는 않습니다만, 근대사의 인식에 대해서는 서로 너무나 큰 차이가 있습니다. 그와 같은 역사인식의 상위는 외국사로서 일본에서 한국사를 배우는 사람을 곤혹스럽게 만듭니다. 두 개 본국의 역사연구체계가 다른 것도 그럴 만한 이유가 있겠지만, 20세기 초 이후, 일본인이 담당해 온 한국사연구와 본국과의 상위가 가장 중요한 문제입니다. 그 차이를 생기게 하는 것은 남북양국의 연구가 공통적으로, 일본인에 의해 쓰여 져 온 한국사연구의 극복, 즉 식민지 사관의 극복이라는 공통과제를 내 세워 연구해 온 것이 일본의 한국사연구와의 차이를 두드러지게 하고 있습니다.(13) 남북한 양국이 극복의 대상으로 하고 있는 일본의 이전의 한국사연구에는 몇 개의

(6)

특징이 있습니다. 하나는 정체사관(停滞史観), 또 하나는 타율성사관(他律性史観)입니다. 전자인 정체사관은 19세기말, 한국이 독립적으로 근대국가를 만들 수 없었던 것은 한국에 내재적(内在的)인 문제가 있었다는 것입니다.(14) 후자의 타율성사관은 지정학적으로 중국과 일본 등, 외부세력(外圧)에 좌우되어, 역사적인 전개에 자율성이 없었던 점이 강조되었습니다. 이와 같은 식민지지배를 합리화하는 연구를 비판하는 것을 주요 과제로 하면서, 두 개 본국의 연구와 늘 마주하지 않으면 안되는 장소인 일본에서 조선사를 배우는 데에 큰 의의가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제가 여기에서 식민지주의의 문제에 굳이 언급한 것은 한국사가 안고 있는 「식민지주의의 극복(탈식민지주의)」(15)이라는 문제는, 실은 한국과 북한이라는 두 개의 「본국(本国)」이 존재한다는 것 자체가, 이 지역에 전전(戦前) 식민지주의를 미해결로 남긴 냉전구조가 여전히 존재하고 있음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따라서 분단의 해결은 일본과도 관련 있는 중요한 문제임과 동시에 냉전 후의 세계사적인 과제이기도 합니다. 또 인류사에 있어서도 보편적인 과제이므로, 한국사연구는 세계사적인 과제에 도전하는 것으로 될 수 있다는 점을, 대학과 역사교육의 장에서 늘 강조하고 있습니다.(16)   三、왜 고대사연구인가 이상과 같은 한국사연구의 특수성을 짚어보고, 왜 나의 연구대상이 고대사인가, 라는 점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그것을 단적으로 이야기하는 것은 한국고대사 연구가 우리들의 상상이상으로 한국의 식민지지배의 합리화에 동원되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런 이유로 해방 후 남북의 역사학계는 전전 일본인에 의한 한국고대사연구 비판에 다대한 힘을 소비해 왔다는 것은 새삼 말할 것까지도 없습니다. 예를 들면 한일합방이 있었던 1910년에 일본역사지리학회가 편찬한 『역사지리 임시 증간 조선호(歴史地理  臨時増刊  朝鮮号)』(1910年11月、三省堂書店)를 보면, 당시 일본을 대표하는 학자들이 집필하고 있는데, 이 특집의 목적은 고대 이래의 일본과 한국의 관계사를 설하면서, 한국병합을 칭찬하는 내용으로 편찬되어 있습니다. 실로 집필자 22명 중, 반수인 11명이 고대 일본의 한국지배에 언급하고, 그 해의 한국병합과 결부시키는 논문을 집필하고 있습니다. 요컨대, 고대사연구는 동시대의 한국병합이라는 현실 정치에 깊이 관여하고 있었고, 한국병합은 고대의 부활이라는 국민적인 통념을 형성하는 이데올로기로서 커다란 역할을 완수했던 것입니다.(17) 일본 학설사상(学説史上), 고대일본의 한반도 지배는 「임나일본부(任那日本府)」라는 통치기관을 통해 4세기 반에서 562년에 이르는 약 200년간에 걸쳐 이루어졌다고 생각해 왔습니다. 그런데, 1945년 이후 남북한 연구자들의 비판적 연구, 특히 한국은 1970년대 이후

(7)

개발과 함께 고고학의 발굴조사 성과 및, 한일 문헌학 연구 성과로 인해, 오늘날 일본 학계에 고대일본의 한반도 지배설은 그 논거를 잃어, 완전히 부정되고 있습니다.(18) 그러나, 고대일본의 한반도 지배설은 한국병합과 서로 겹쳐 국민의 통념이 되어, 근대 일본인의 아이덴티티의 핵을 형성하고 있었기 때문에, 한반도 지배설은 성립될 수 없다는 학계의 공통인식이, 아직도 일본국민의 상식으로 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한국고대사와 국민의식형성의 문제는, 일본인뿐만 아니라, 한국인에게도 마찬가지로 큰 문제입니다. 오히려, 반대로 한국, 북한에 있어서, 근대일본의 고대사 비판으로부터 출발한 김석향(金錫享) 『고대조일관계사(古代朝日関係史)』처럼, 지배의 힘을 한국에서 일본으로 전도(転倒)시킨 고대사가 해방 후, 양국민의 아이덴티티에 있어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는 사실도 경시할 수 없는 심각한 문제입니다. 사실(史実)과는 관계없는 과대망상적인 한국고대의 사극(史劇)이 대하드라마로 TV에서 힘을 발휘하는 것도 하나의 표현이라고 보고 있습니다.(19) 20세기 초, 청•러시아•일본이라는 대국의 틈새에 끼여, 근대국가형성의 도상에서 국가의 독립이 위태로움에 처했을 때, 신채호를 비롯한 계몽 역사가들이 고대한국의 역사를 설하면서 민족의식의 고양을 도모했습니다. 그들은 기원전 2333년에 건국했다는 단군신화를 높이 강조했습니다. 중국 동북지방까지 진출한 부여, 고구려, 발해의 역사판도(歴史版図)를 한민족의 옛 땅으로 설정하고, 그 광대한 지역에서 활약한 역사를 (근대적인 의미에서의) 한민족의 긍지로서 역설했습니다.(20) 이러한 배경도 있어서 고대의 한일관계사란, 고대의 문제에 그치지 않고 근현대의 조선인과 일본인의 아이덴티티가 뒤섞이는 장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21) 동북아시아라는 광대한 지역에서 활약했다는 한국의 고대국가형성사와 함께 고대한일관계사는 현재 한국인의 아이덴티티에 결부되어있다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러한 문제에서 고대사연구가 고대사에 그치지 않고 근현대에도 크게 관계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한국고대사연구는 근대한국사상사의 문제이기도 하며 특히 근대일본사상사의 문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四、왜 「동아시아사」인가 이어서 내가 동아시아사 연구에 관심을 둔 이유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흥미롭게도 한국에서는 동아시아의 어느 나라보다 앞서, 고등학교에서 한국사와 세계사를, 2012년부터 동아시아사 수업을 추가하여 정규수업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1990년 무렵까지 한국의 역사연구자 사이에서는 「동아시아」라는 말을 사용하여 역사를 말하는 것 자체를 금기시하는 분위기가 있었습니다. 한국에서 「동아시아」라는 말은, 1990년대가 되어 처음으로 인문사회과학 분야에서 사용하기 시작했습니다.(22) 25년 전까지 「동아시아」라는 역사를 금기시했던 지극히 정당한 역사적인 이유가

(8)

있었습니다. 1930년대 일본은 중일전쟁 과정에서 전쟁을 합리화하기 위해 「동아(東亜)」 및 「대동아(大東亜)」라는 말을 사용하면서, 전략적으로 근린제민족의 융화책을 연구자들에게 구상시킨 경위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동아시아(동아)는 명확히 1930년대부터 시작하는 일본의 중국침략과, 그것에 의해 야기된 중일전쟁을 정당화하기 위한 근대일본의 전략적 이데올로기였습니다.(23) 그러나 제가 역사연구를 시작할 무렵, 일본의 역사학계에서는 고대사연구와 근대사연구에 있어서 고대사도 근대사도 일본일국(一国)에서 연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과제를 역사연구자들이 주장하고 있었습니다. 특히, 일본을 대표하는 중국사 연구자・니시지마 사다오(西嶋定生)씨는 1962년부터 1970년경에 걸쳐 동아시아라는 틀에서 역사를 연구하는 의의를 이론화하고 있었습니다. 제가 대학에 입학하기 직전입니다. 니시지마씨에 의해 이론화된 동아시아 세계론은 약 50년에 걸쳐 일본학계의 일반론으로 되어있습니다.(24) 「동아시아세계」라는 개념은, 한자문화권과 그것을 형성시킨 중국의 황제를 중심으로 하는 정치권이 일체가 되어 형태가 만들어진 자기완결적(自己完結的)인 세계(동아시아세계)를 가리키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한자문화권이란 한자를 매개로 하여 유교, 한역불교(漢訳仏教), 율령, 등, 중국에 기원하는 문화를 수용한 지역입니다. 또 정치권이란 중국의 황제를 중심으로 형성된 국제질서가 영향을 미친 지역입니다. 중국의 황제가 한대(漢代)이후, 주변제국・제민족의 수장에게 중국의 작위와 관직을 부여하고 형성한 질서구조를 「책봉체제(冊封体制)」라고 부릅니다. 이와 같은 지역에 현재의 중국, 남북한, 일본, 베트남이 들어갑니다. 이러한 근대이전 2천년에 걸친 역사의 틀로서의 동아시아 세계론의 구상은 전전 체제하에서 독선적으로 특이화된 일본의 자기중심적인 역사관(황국사관)을 극복하고, 다시 한번 세계사의 문맥 속에서 일본사를 이해하고자 하는 시도입니다. 이 명확한 목적을 갖고 동아시아 세계론의 유래를 찾아 가면, 1950년대로 거슬러 올라가며 그 시대의 현실과 깊이 연관되어 있음을 확실히 알 수 있습니다. 이미 많은 졸고에서 서술했지만, 간단히 소개하면 1950년대 세계사 교과서 집필에 관여하고 있었던 우에하라 센로쿠(上原専禄:1899-1975)는, 세계사상(世界史像)의 자주적인 형성을 국민적 과제로 내걸고 있었습니다. 일본인은 세계사에 있어서 현대아시아에 대한 문제의식이 희박하다는 것을 호소하고, 일본은 미국의 정치종속화에 있어서, 이대로는 전후(戦後) 아시아·아프리카 제국과 직접 서로 마주 볼 수 없다. 이래서는 진정으로 세계사 안에서 살아갈 수가 없다고 우에하라는 심각하게 느끼고 있었습니다. 제 1차 세계대전 이후 세계질서는, 유럽인들이 지배의 대상으로서 만들어 낸 유럽의 질서이므로, 이것을 아시아・아프리카제국과 연대하여, 그 지배종속의 구조를 부정하고, 구조전환을 이루는 것이 현대의 절실한 과제라고 받아들이고 있었습니다.(25)

(9)

이와 같은 시점에서 세계를 마주 대할 때, 1950년대부터 60년대에 걸쳐 동아시아의 현실은 중국・한국・베트남・일본, 이 4개 지역이 세계정치의 문제구조 속에서 밀접하게 관계하며 존재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즉 4개 지역 모두 민족의 독립이라는 문제를 안고 있으며, 미국이 베트남전쟁을 매개로, 국가모순, 민족모순의 대립을 감소시키는 공통의 장(場)으로서 지역세계를 형성했다고 포착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지역세계로서의 동아시아는 미국의 제국주의적 지배에 대해 싸우지 않을 수 없다는 점에서 문제의 공통성, 일체성을 지닌 지역입니다. 이와 같이 공통점을 포착할 수 있었기 때문에 베트남은 동아시아의 불가결한 일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들 지역의 과거를 추구해 가면 2천년 이래 책봉체제에 의해 형성된 정치권과 문화권이 부상됩니다. 니시지마씨는 이러한 우에하라씨의 구상에 입각하여, 동아시아 세계론을 구축했습니다. 그런 연유로 1950년대부터 60년대에 걸친 일본인의 현실인식 없이, 동아시아 세계론은 있을 수 없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26) 따라서 1970년 이후, 일본 역사학계에서 주장되어 온 동아시아 세계론은 전전 일본의 정치 이데올로기와는 무관한 일본 역사가들이 현대적인 과제에서 제기한 사고입니다. 나는 현대적인 과제의식이 없는 역사연구는 무효라고 생각합니다만, 니시지마씨의 역사인식은 현재에도 유효하다고 생각합니다. 이론적으로도 유효성을 부정할 수 없다는 사실을 최근 전22권으로 간행된 『이와나미 강좌 일본역사(岩波講座日本歴史)』 의 제22권에 수록된 졸고 「동아시아세계론과 일본사(東アジア世界論と日本史)」에서도 썼습니다. 관심 있으신 분은 읽어 주시기 바랍니다. 바야흐로 「동아시아」문제는 일본뿐만 아니라 한국이 직면하고 있는 절실한 과제로서, 한국에서도 20년 가까이 다양한 논의가 속출하고 있습니다. 이 같은 상황에서 니시지마씨의 「동아시아 세계론」을 볼 때, 그 문제점은 선명해졌다고 생각됩니다. 현재의 유럽사 또는 세계사는 16세기 이후 유럽인의 세계 확대에 동반되는 유럽고유의 역사적 과제에 대응하기 위해, 유럽의 역사적 경험의 심부(深部)에서, 그들 자신의 과제해결을 위해 구상된 역사였습니다. 그렇다고 한다면, 동아시아제국이 연대하여, 스스로의 (동아시아제국의) 역사적 과제에 대응하기 위한 세계사를 새롭게 구상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것을 위해 우리들은 현재 동아시아제국이 안고 있는 현실의 과제에서 철저하게 출발해야 합니다. 동아시아의 절실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과거를 되물으면서 새로운 동아시아사, 새로운 동아시아 세계론을 추구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일본의 「동아시아 세계론」은, 소위 일본이라는 일인칭에서 구상된 역사 구조로, 그 약점은 「동아시아」가 일인칭의 문제일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우리들 동아시아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이 안고 있는 과제」라고 말하듯이, 2인칭으로 말할 수 있는 절실한 과제가, 역사라는 과거에 물음을 던져야 비로소 새로운 동아시아

(10)

세계론은 보다 풍부한 구조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동아시아제국은 19세기 이후, 구미열강제국과의 갈등을 경험하고, 또 동아시아제국도 상호 갈등을 되풀이하는 속에서, 유럽인이 만들어 낸 근대에 직면했습니다. 더욱이 동아시아제국도, 유럽근대에서 탄생된 근대성(modernity)을 체험하고, 동아시아 내부에 있어서 침략과 식민지지배를 강요하는 과정에서 격렬한 근대를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과정을 겪으면서 동아시아제국은 근대의 국가형성을 이루어 왔습니다. 그와 같은 동아시아제국이 현재 안고 있는 커다란 문제 중 하나가, 「식민지근대」가 낳은 격렬한 근대가 각각의 사회를 강하게 구속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동아시아 근대는 동일 문명권 중에서 식민지근대를 서로 강화하는, 소위 공범관계를 형성해 왔던 것에 특징이 있는 것 같습니다. 또 탈식민지주의적(포스트콜로니얼)인 상황은, 일본을 포함해 동아시아제국에 깊이 편재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러한 문맥에서 중요한 과제는, 19세기 이후 동아시아에 있어서 근대국가 형성과정과 그것에 의해 현재 직면하고 있는 제문제에 귀착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특히 동아시아의 탈식민지적 상황을 직시하고, 서로가 안고 있는 근대의 난제(難題)를 공통으로 극복해야 할 문제(크게는 이 지역의 평화와 인권, 구체적으로는 개발독재, 사형・낙태・장기이식 등 생명윤리, 레이시즘 (민족차별)문제, 환경문제 등을 다시 파악하여, 거기서부터 해방될 과정을 추구하는 사고법이 절실히 요구될 것입니다. 또 무엇보다도 동아시아사의 관점에서 저는 고대 동아시아에 있어서 동시대의 연관성의 추구를 연구해 왔습니다. 현대의 모순의 연쇄를 상기해 보면 알 수 있듯이, 그것은 단순히 국제관계와 문화교류를 중시하면 된다는 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예를 들면 이미 630년부터 640년대에는 당(唐), 고구려, 백제, 신라, 왜국에서 내란(권력투쟁)이 일어났고, 어느 인물에게 권력이 집중되어 중앙집권적인 국가체제가 가능했던 일 등은, 동아시아를 시야에 넣지 않으면 이해할 수 없는 문제라는 점에 주의를 환기시켜 왔습니다. 또 최근에는 왜 동시대에 당・신라・왜국, 세 나라에서 여제가 즉위했는가, 라는 문제를 실증적으로 명백히 밝히는 연구에 강한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동아시아의 권력집중현상과 마찬가지로 일국사(一国史)적인 방법으로서는 포착할 수 없으며, 여제의 문제도 동아시아라는 시점에서 해명할 수 있다고 봅니다.(27) 고대사에 있어서 동아시아사를 심화시킬 가능성은 앞으로 더욱 더 증가할 것입니다. 四、필드 워크와 한국에서 출토된 목간연구의 가능성 그런데 한국고대사 연구로 돌아가면, 처음에 서술했듯이 한국사는 전전 이래 일본의 연구와 남북한의 연구, 이 세 가지 입장에서의 연구가 있으며, 역사적 평가와 해석이 크게 다른 역사연구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은 연구자의 내셔널리티(국적)에 의해 구분되고, 교류하지 않고 상반되는 가설이 대립하는 배경의

(11)

이유는, 한국고대사에 관계하는 문헌자료가 압도적으로 부족했기 때문입니다. 한반도를 중심으로 활약한 여러 국가들을 정치적으로 통합한 신라가 멸망한 것은 935년인데, 한국고대사의 기본이 되는 편찬사료는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10세기까지의 역사를 연구할 때에는 동시대 중국의 문헌사료와 일본의 문헌사료를 참조하지 않으면 안 될 상황에 있습니다. 현재까지 확인 된 10세기 이전 문서는 몇 점에 지나지 않고, 후에 언급하듯이 석비와 금속에 기록된 금석문과 목간을 포함한 출토문자자료가 있기는 하지만, 목간을 사례로 취한다고 해도 현시점에서 약 700점에 지나지 않습니다. 중국과 일본이 20万에서 30万이라는 숫자에 비하면 그 숫자 단위의 차이가 너무 큽니다.(28) 저는 80년대부터 30년 이상, 은사님과 동료연구자와 함께 매년 한국 전 국토 및 중국의 요령성(遼寧省), 길림성(吉林省), 흑룡강성(黒竜江省), 북한 각지에 남아있는 고대국가(고구려, 신라, 백제, 가야)의 산성과 토성 답사를 해 왔습니다. 그러한 필드 워크는 적은 수의 문헌에서 고대사의 제사실을 해석하는 데에 상당히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제가 한국에서 필드 워크를 시작한 1970년대 말 이후, 때마침 한국에서는 5~6세기 석비와 목간이 계속 발견되어, 이 석비와 목간으로, 종래의 편찬사료에서 알 수 없는 사실들이 차례차례 밝혀졌습니다. 특히 5세기 중원고구려비(1978년)와 6세기의 신라적성비(1979년)의 발견은 한국고대사 연구에 큰 활기를 불어 넣었습니다. 이것을 계기로 이 무렵부터 대구를 중심으로 하는 고대사연구자가 신라 석비의 재검토를 하신 일도 잊을 수 없습니다. 한편, 같은 무렵에 신라의 도읍이었던 경주의 궁원지(宮苑池)에서 약 50점의 목간 출토가 보고되었고, 그 후, 백제의 도읍이었던 부여, 90년대 들어서는 이성산성(二聖山城) 등 지방에 소재하는 신라의 산성에서도 목간이 발견되었습니다. 이들 신라목간과 백제목간은 이미 필드 워크로 답사한 적이 있는 지역에서 발견되어, 이 목간에 대해 많은 관심을 가졌습니다.(29) 90년대에 들어서 우연하게도, 일본의 어느 잡지 특집에서 한국에서 출토된 목간에 관한 논문을 쓸 기회가 있었습니다.(30) 그 이후, 발굴현장과 목간의 성격을 추구하면서 한국에서 출토된 목간의 특징과 그것이 차지하는 위치의 중요성에 대해 검토하게 되었습니다. 특히 내가 주목한 것은 종래, 일본의 학계에서는 일본목간과 중국의 간독(簡牘: 木簡과 竹簡)과의 사이에는 거의 연관성을 찾을 수 없다는 것이 사실입니다. 실제로 목간의 형태도 서식도 완전히 다르다고 해도 좋을 정도로 상이합니다. 무엇보다도 사용된 시기의 차이가 현격합니다. 중국에서 목간이 사용된 것은 전국시대・진한(秦漢)시대부터 4세기경까지입니다. 그러나 일본에서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7세기 전반경입니다. 그래서 일본 고대사연구자들은 일본목간은 일본열도에서 고립되어 독자적으로 형성, 발전한 것이라고 굳게 믿고 있었습니다.

(12)

90년대 당시, 한국에서 출토된 목간은 100점 정도에 지나지 않았지만, 그러나 숫자의 예이기는 해도 일본에서 출토된 목간과 관련 있는 목간이 검출되어, 그와 같은 점을 구체적으로 지적한 일이 있었습니다.(31) 저는 일본의 목간학회에서 일본과 한국 양국에서 출토된 목간의 연관성에 관한 가능성을 서술했으나, 노대가(老大家)로부터 일본목간과 한국목간과는 관계가 전혀 없다고 부정당했습니다.(32) 그 후, 한국에서 새로운 목간의 출토가 이어지는 가운데, 2003년부터 와세다 대학 조선문화연구소는 한국의 국립문화재 연구소 및 국립창원문화재 연구소와 학술교류협정에 입각해 공동연구에 착수했습니다. 한국에서 출토된 목간에 대해 적외선 카메라로 조사를 함으로써, 수년 동안 한국과 일본에서 출토된 목간의 유사성을 명확히 구체적으로 지적할 수 있는 사례가 일거에 다수 검출되었습니다.(33) 주목해야 할 것은 이상과 같은 한국에서 출토된 목간과 석비 등의 출토문자자료의 검토를 통해, 고대에 있어서 한자문화의 전파와 수용 과정이 명확해 졌다는 점입니다. 종래, 일본학계에서는 고대일본의 한자문화는 도래인(中国系人士)에 의해 직접 중국대륙으로부터 전래되었다고 당연한 일처럼 여겨 왔습니다. 그러나 근년, 한반도의 한자문화를 매개로 한자문화를 수용한 과정이 5・6세기 석비와 목간에 의해 학술적으로 뒷받침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34) 중국문명 특히 한자문화가 주변 제지역에 전파・수용되어가는 과정에는, 반드시 매개자가 필요한 법입니다. 그래서 매개적인 기능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습니다.(35) 한반도와 일본열도 사이에 그와 같은 관계를 인정할 수 있을 뿐만이 아니라, 5,6세기의 석비와 목간을 보면, 신라의 한자문화는 명확히 고구려 한자문화의 영향을 받고 있다는 것을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36) 그런데, 90년대 초 목간이 발견되기 이전부터 계속 다녔던 함안 성산산성에서 현재까지, 약200점의 목간이 출토되어 있습니다. 그 목간은 당시 신라영역내의 성(城) ·촌(村)에서 가져온 곡물 등의 물자에 붙여진 화물 표찰입니다. 그 서식과 목간의 형태가 고대일본 목간의 원초형태라고도 해야 할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지금까지 중국목간과는 전혀 결부시키지 않았던 일본목간은, 6세기 중엽으로 추정되는 함안 성산산성 목간의 형태와 서식이 흡사하여 명백히 성산산성 목간은 7세기 후반이후의 일본목간의 선행형태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또 그 후, 7세기 초 복암리 백제목간의 발견으로, 일본 고대목간의 원류가 백제에 있었던 것을 국립 나라문화재연구소 연구자들도 인정하게 되었습니다.(37) 한국과 일본에서 출토된 목간의 비교를 통해 일본의 한자문화는 신라와 백제를 매개로 수용하고 있었을 가능성이 명확해 진 것입니다. 또 최근 성과로 1990년대 초, 평양에서 『論語』죽간(竹簡)이 기원전 45년 낙랑군(楽浪郡) 25현(県)의 호구통계부(戸口統計簿)와 함께 정백동(貞柏洞)

(13)

364호분에서 발견되었다는 사실이 최근 판명되었습니다. 발굴 후 약 20년이 지나 지극히 중요한 사실이 밝혀진 셈인데, 금후의 연구에 의해 어떠한 한자문화가 중국대륙에서 한반도로 전파되었으며, 그것이 한반도의 제국(諸国)에 어떻게 수용되어, 그것이 어떻게 변용되어 일본열도에 전파되었는가라는 문제가 해명될 날도 멀지 않았을 겁니다.(38)  한국고대사는 목간이라는 출토문자자료를 획득함으로써 한국사에 머물지 않고 동아시아규모의 역사연구에 중요한 열쇠를 쥐고 있는 연구 분야가 되었습니다, 끝으로 다음의 성과에 대해 언급하고자 합니다. 종래, 고대 일본의 중국문명화는 600년의 견수사(遣隋使)로 시작되어, 630년의 견당사(遣唐使)와 합쳐서, 약 100년에 걸친 중국과의 교류에 의해, 701년 대보율령(大宝律令), 즉 중국적인 법률체계에 입각한 국가제도를 완성시켰다고 생각해 왔습니다. 이것은 일본학계의 상식중의 상식이었습니다. 그런데 한국에서 신라와 백제의 목간이 출토됨으로써 700년 이전의 고대일본의 여러 제도(制度)는 수(隋)와 당(唐)의 제도가 아니라 백제, 신라가 수용한 중국의 여러 제도를 간접적으로 수용해 온 사실을 목간에 의해 뒷받침할 수 있었습니다. 즉 701년의 대보율령은 그 이전과는 격차와 레벨이 다른 중국적인 당의 제도를 직수입했다는 사실을 강조해 왔던 것입니다. 견수사(遣隋使)이래, 100년에 걸쳐 고대 중국을 배운 것이 아니라, 그 전에 이웃나라 한반도제국의 제도를 배우면서, 그것을 전제로 701년에 이르러, 목표로 해야 할 이상으로서의 중국적인 법제도를 정리한 것이 대보율령이라는 것을 뒷받침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이해는 한국목간의 발견 및 송대의 천성령(天聖令)의 발견과 연구로 인해 진전되어 온 연구 성과입니다.(39) 한국목간연구 성과는 동아시아 규모의 역사상(歴史像)의 변경을 재촉하고 있습니다. 맺음말 이상, 한국고대사에서 동아시아사의 전망이라는 주제 아래, 저의 연구의 발자취를 말씀드렸습니다. 동아시아사에 관해 마지막으로 말하고 싶은 것은 2002년 이래, 10년 이상 제가 적극적으로 관여해 온, 동아시아제국에 있어서의 역사연구자간의 역사대화입니다. 특히 2002년부터 개시된 민간 레벨의 한일역사인식대화인 「비판과 연대를 위한 동아시아 역사 포럼」은 잊을 수 없는 경험이었습니다. 포럼의 문제의식은 동아시아제국의 내셔널리즘이 억압적이고 보수적인 세력에 이용되기 쉬워(포럼의 키워드는 「적대적(敵対的)인 공범관계(共犯関係)」), 양국 간의 횡적인 연대가 곤란하여 제국가가 문제에 직면하면, 역사(내셔널리즘의 신화)를 끄집어내어 국민의 의식을 선동하기 때문에 역사인식문제가 반복되는 상황을 어떻게 단절할까, 그와 같은 때에, 국가가 제공하는 조직적인 허언(虚言)을 어떻게 탈구축(解体)할까, 라는 것이었습니다. 동아시아제국간의 연대를 저해하는 국가구조의

(14)

해명과 해체에 관한 일본과 한국의 역사대화의 성과는, 한국에서 2권, 일본에서 2권의 저작으로 출판했습니다.(40) 또 2013년부터 2015년까지 일본, 한국, 중국의 젊은 역사연구자 육성세미나를 주최해 왔습니다. 이제 막 학위를 취득한 세 나라의 젊은 역사연구자가 금후, 자신의 역사연구를 심화시켜 갈 때, 자국의 연구자뿐만 아니라, 항상 이웃나라의 역사연구자를 의식하면서, 새로운 역사를 구상해 주길 바라며 동경대학의 미타니 히로시(三谷博)씨와 함께 제안했습니다. 복단(復旦) 대학의 장상(張翔)씨, 서울 대학의 박훈씨 등 두 대학의 선생님과 함께 와세다 대학이 3년간에 걸쳐 세미나를 실시했는데, 실로 젊은 연구자들이 대화에 많이 참가해 주었습니다. 제가 연구해 온 고대사연구는 본인의 의도에 관계없이, 국제적인 청중의 비판을 두려워하지 않는, 편협한 내셔널리즘에 빠지기 쉬운 위험성을 띠고 있습니다. 이 점은 박노자(朴露子)가 『거꾸로 보는 한국사』(2010년)에서 지적한 그대로입니다. 내셔널리즘만이 아니라, 신자유주의와 글로벌화는 우리들의 시야를 좁혀, 문제를 단순화시키는 경향이 있습니다.(41) 항상 열린 시야에서 종전의 역사연구를 경신(更新)할 수 있도록, 또 남은 연구생활에서 조금이라도 더 많이 실천해 가고자 합니다. (1)この点を痛感したのは、朝鮮史研究会が1978年に『新朝鮮史入門』を企画し、「前近代の朝鮮文化史」の 執筆の依頼を受けたことを契機とする。当時ようやく学術論文を書き始めた頃であり、また日本に「韓国文 化史」に関する満足な概説書すらない当時、全く信じがたい「無謀な依頼」(「過剰な期待」?)を受けて困惑 した。しかしながら、原稿締め切りまで読んだ論文は著作を含めて300以上であったと記憶する。それらを まとめた冒頭において書かざるを得なかったのは、韓国文化史に関する言説の「ショービニズム」についてで ある。朝鮮史研究会編『新朝鮮史入門』(1981年6月、龍渓書舎)参照。 (2)日本古代史研究に与えた衝撃については、鈴木靖民『古代国家史研究の歩み―邪馬台国こら大和政権 まで』(新人物往来社、1983年)を参照。 (3)広開土王碑文研究の再検討は、日本近代史研究者である中塚明氏による「近代日本史学史における朝 鮮問題―とくに「広開土王碑」をめぐって」(『思想』561、1971年〔原載〕、『近代日本の朝鮮認識』研文出版、 1993年)によって着手され、それを受けて李進熙氏が陸軍参謀本部改ざん説を提起した。陸軍参謀本部の ス パ イ 活 動 が 碑 文 研 究 に 深 く 関 わ っ て い た こ と は 、 佐 伯 有 清 『 研 究 史 広 開 土 王 碑  』(吉川弘文館、1974年)によって解明された。しかし碑文の「改ざん」(その後「すり替え」と変更)という 李進熙の主張(『広開土王陵碑の研究』吉川弘文館、1972年)は、現在の研究では、日本のみならず、国際 的にも全く認められていない。その後の広開土王碑をめぐる研究に、李成市「表象としての広開土王碑文」( 『思想』842、1994年)、武田幸男『広開土王碑との対話』(白帝社、2007年)、同『広開土王碑墨本の研究』 (吉川弘文館、2009年)、李成市「石刻文書としての広開土王碑文」(『東アジア出土文字資料と情報伝達』 汲古書院、2011年5月)などがある。 (4)この当時の動向は、1974年の春に刊行された雑誌『東アジアの古代文化』(大和書房)に詳しい。この 雑誌の総目録と、その果たした歴史的な役割などについては「座談会『東アジアの古代文化』成果とゆくえ」 最終号(2009年、136号)を参照。 (5)戦後日本を代表する韓国史研究者であり、古代史のみならず、高麗史、朝鮮時代史にわたる多くの著 作がある。主著は『高句麗史と東アジア』(岩波書店、1989年)。緻密な史料批判の上に構築された実証史 学は、われわれ後学が継承すべき研究基盤である。個別実証論文のみならず、「奴隷制の封建制」(旗田巍

(15)

編『朝鮮史入門』太平出版、1966年)のような研究の手引きから、通史、概説、書評に至まで、知的刺激を うける著作が多数ある。 (6)日本列島内の多様な地域間交流をはじめ、韓半島、中国大陸、沿海州、オホーツク沿岸を含めた諸地 域との関係を、文献のみならずフィールドワークによって得られた考古学的知見を駆使して古代日本の対外 関係史を再構築している。交流史が相互関係であるがゆえに、韓国語や中国語がわからなければ、対外関係 史研究ができないことを、身を以て示されている主著は『古代対外関係史の研究』(吉川弘文館、1985年) 。 (7)私たちは百数十年前までの前近代の歴史を容易に理解できる漠然と考えているが、百年以上前のこと が現在の類推で容易に理解できると思うのは錯覚というほかない。外国の文化(異文化)が周到な調査によ って初めて理解できるように、自分の社会の過去も、相当の覚悟と準備がなければ理解することはできない 。百年以上前の歴史が容易に理解できないという指摘は、安部公房『内なる辺境』(中央公論社)を参照。 (8)李成市「コロニアリズムと近代歴史学―植民地統治下の朝鮮史編修と古蹟調査を中心に」(永田雄三・ 寺内威太郎・矢島国雄・李成市『植民地主義と歴史学』(刀水書房、2004年)。 (9)戦前における日本人研究の批判的検討は、朝鮮史研究会・旗田巍編『朝鮮史入門』(太平出版社、196 6年)、朝鮮史研究会編『新朝鮮史入門』(1981年、龍渓書舎)に収められた旗田論文を参照のこと。なお日 本における韓国史研究の現状については、朝鮮製研究会編『朝鮮史研究入門』(名古屋大学出版会、2011年 )参照。 (10)国際学術会議が日常化し、研究者相互の往来が頻繁になっている今日では全く信じがたいことであ るが、私が学部生、大学院生の頃には、本国(南北)の研究者が日本を訪れることは、ほとんどなく(高松 塚古墳発見の際に南北の代表的な学者が日本を訪れたのは希有な事例であった)、また日本の研究者が南 北を訪問することも極めて珍しいこととされた。韓国に留学する日本人研究者が皆無であったというわけで はないが、彼らは独裁政権に荷担しているかのように白眼視された。さらに80年代初頭まで、旅行すら許し がたい行為とみなされ、帰国後はつるし上げのような非難を浴びることがあった。 (11)私が学んだ韓国において編纂された代表的な通史には、国史編纂委員会編『韓国史』(1973年-1978 年)全25巻があり、北韓で編纂された通史に、『朝鮮通史』(社会科学院、1970年-1980)全30巻がある。 日本語で読めるものには、李基白(武田幸男監訳)『韓国史新論』(学生社、1979年)と孫永鍾他編『朝鮮 通史 上』(外国文出版社、平壌、1992年)が最も身近にあった。現在、 日 本 に お け る 最 も 詳 細 な 通 史 に は 、 武 田 幸 男 編 『 世 界 各 国 史 二  朝鮮史』(山川出版社、2000年)があり、現在、 (李成市・宮嶋博史・糟谷憲一編)『世界史大系 朝鮮史』全2巻、山川出版社)を編集中である。 (12)北韓のマルクス主義歴史学については、韓国の植民地支配からの独立を理論化した白南雲の1930年 代の歴史学を出発点としていることに留意する必要である。白南雲については、李成市「植民地朝鮮におけ るマルクス主義史学―白南雲『朝鮮社会経済史』を中心に」(磯前順一・ハリー・D・ハルトウーニアン編『マ ルクス主義という経験』青木書店、2008年)を参照。また、韓国の立場から北韓の歴史研究を分析したもの に、都晩会ほか『北韓の歴史研究』(歴史問題研究所、ソウル、2000年)がある。 (13)韓国人の立場から、日本における朝鮮史研究を多面的に批判した史学史には、李基白『民族と歴史― 現代韓国史学の諸問題』が泊勝美氏の翻訳によって日本に紹介された(東出版、1974年)。この書に掲載さ れた李基白氏の旗田巍『朝鮮史』(岩波書店)批判によって、旗田氏は当時、毎年増刷されていた同書の絶 版を決意させた。古代日韓関係と朝鮮王朝後期に対する叙述に、植民地史観を克服できていない箇所があ るという批判であった。遅きに失した感があるが、植民地主義批判の立場から、戦後の朝鮮史研究を批判 的に検証する時期に至っていると個人的には考えている。たとえば、植民地朝鮮から引き揚げてきた研究者 を中心に組織された朝鮮学会について、日本の学界において本格的な学問的分析がなされていないままにあ る。 (14)戦後日本の韓国史研究をリードした旗田巍による優れた史論集に(『日本人の朝鮮観』勁草書房、196 9年)と『朝鮮と日本人』(勁草書房、1983年)があるが、停滞論、他律性史観の批判については、各々収め られた論文を参照のこと。

(16)

(15)脱植民地主義(ポスト・コロニアリズム)とは、植民地体制が克服されず終わっていない状況をさす 。このような問題意識から植民地時代とそれ以後の日本と韓国の状況を、博物館を事例にして論じたものに 、李成市「朝鮮王朝の象徴空間と博物館」(宮嶋博史・林志弦・李成市・尹海東編『植民地近代の視座―朝鮮 と日本』岩波書店、2004年)がある。 (16)李成市「植民地文化政策の評価を通してみた歴史認識」(三谷博・金泰昌編『東アジア歴史 対話―国境と世代を越えて』東大出版会、2007年)。 (17)李成市「韓国併合と古代日朝関係史」(『思想』1029、2010年1月)。 (18)日本における最近の研究成果については、田中俊明『古代の日本と加耶』(山川出版社、2009年)が 教育者や市民に向けて分かりやすく問題点を説いている。 (19)たとえば、現在の北韓、中国、ロシアにまたがる地域に歴史を展開した渤海史に関する理解をめぐっ ては、上記の国々に加え、韓国、日本の五カ国で各々異なる。そのような研究状況について、李成市「渤海 史研究における国家と民族」(『朝鮮史研究会論文集』25、1988年)、同「渤海史をめぐる民族と国家─国民 国家の境界をこえて」(『歴史学研究』626、1991年)を参照。こうした史学史上の問題点については、李成 市「古代史にみる国民国家の物語」(『世界』611、1995年)で論じたことがある。 (20)注(19)に掲げた私の渤海史をめぐる南北国論批判は、韓国の学界において、しばしば批判の対象 となる。しかし冷静に考えてみるべきは、南北国論の端緒となった朴時亨の「渤海史研究のために」は、古代 の国家の性格は支配集団の「血筋」で決まると主張している。後に述べるように、現在の東アジア諸国が共通 して抱える問題の一つにレイシズムがある。とりわけ日本のレイシズムは深刻な状況にある。今一度、近代 国家において国民の血筋や出自を問題にし、さらに民族はずべて平等というわけではないと主張したのは人 類史上、誰であるのか、その彼が何を指示し、何を行ったのかをよく考えてみるべきである。しかも、この 東アジアにおいて国民の血筋を最初に問題にしたのは帝国日本の臣民たちであり、かれらは台湾、韓国など を植民地にする過程で民族的優越感を形成し、帝国が崩壊した後も「帝国を支えていた集団的な空想」が簡 単に変わることなく、「過去の植民地統治の階層秩序に固執」し、尊大な矜持から抜け出せない宗主国国民 の「殆ど滑稽」な姿に対して、酒井直樹(「パックス・アメリカーナの終焉とひきこもり国民主義」『思想』109 5、2015年7月)は「ひきこもりの国民主義」と評している。古代史に血筋を投影することの問題性を自覚す べきではないかと私は考える。 (21)李成市「三韓征伐」(板垣竜太他編『東アジアの記憶の場』河出出版新社、2011年4月)。 (22)いまでも想起されるのは、サバティカル(安息年)で1998年に韓国に滞在中、講演を依頼されると「 東アジア文化圏の形成」に関わる話しをした際に、必ず「大東亜共栄圏」と「東アジア文化圏」との違いを明確 にして論じるべきであり、軽々に「東アジア」を歴史の議論に持ち出すべきでないとの批判を受けたことであ る。その一方で、1998年は、韓国において「東アジア」や「東洋」を冠した季刊誌(『東アジア批評』『東アジア 文化と思想』『今日の東洋思想』)が多く刊行された年でもある。 (23)米谷匡史『思想のフロンティア アジア/日本』(岩波書店、2006年)。 (24)李成市「東アジア世界論と日本史」(『岩波講座日本歴史』22、2016年2月)。 (25)同上。 (26)同上。 (27)「東アジアにおける女帝の歴史」(『歴史地理教育』2016年4月号、2016年3月) (28)韓国木簡の概要については、李成市「東アジアの木簡文化―伝播の過程を読みとく」(木簡学会編『木 簡から古代がみえる』岩波書店、2010年6月)参照。 ( 2 9 ) 長 年 の 研 究 を ま と め た 拙 著 『古代東アジアの民族と国家』(岩波書店、1998年)は、その間のフィールドワークの恩恵なくしては考え がたい。 (30)李成市「韓国の木簡」(『月刊しにか』91-5、1991年5月、大修館書店)。 (31)李成市「韓国出土の木簡について」(1996年12月、木簡学会 第18回木簡学会研究集会)。 (32)李成市「草創期韓国木簡研究の覚書」(『木簡と文字』4、2009年12月、ソウル)。 (33)韓国古代木簡の図録には、国立昌原文化財研究所『韓国の古代木簡』(国立昌原文化財研究所、2004

(17)

年 ) 、 同 『 改 訂 版  韓国の古代木簡』国立昌原文化財研究所、2006年、昌原)、国立扶余博物館『百済木簡―所蔵品調査資料集 』(国立扶余博物館、2008年、扶余)、国立扶余博物館・国立加耶文化財研究所『木の中の暗号  木簡』(2009年、ソウル)を参照。なお、近年までの研究成果については、朝鮮文化研究所編『韓国出土木 簡の世界』(2007年、雄山閣)および、工藤元男・李成市編『東アジア古代出土文字資料の研究』アジア研究 機構叢書人文学篇第一巻、2009年、雄山閣)を参照のこと。 (34)李成市「韓国出土木簡と東アジア世界論―『論語』木簡を中心に」(角谷常子編『東アジア木簡学のため に』汲古書院、2013年3月)。 (35)同上。「媒介的な役割」は、これまで以上に注目してよい問題である。なぜなら、先端的なメディア論 に次のような指摘があるからである。「実際の歴史においては媒介者が、自分が媒介するものや、接続され る伝達経路に勝り、それを塞いでしまうのだ。(中略)中間者こそが力をもつのである。媒介作用こそがメ ッセージの性質を決定づけ、関係が存在よりも優位に立つのである」(レジス・ドブレ(島崎正樹訳)『レジ ス・ドブレ著作集1 メディオロジー宣言』NTT出版、1999年、8頁)という。 ( 3 6 ) 早 稲 田 大 学 朝 鮮 文 化 研 究 所 編 『 日 韓 共 同 研 究 資 料 集  咸安城山山城木簡』(アジア研究機構叢書人文学篇第3巻,朝鮮文化研究所・国立加耶文化財研究所編、20 09年3月)。 (37)李成市「羅州伏岩里百済木簡の基礎的研究」(鈴木靖民篇『日本古代の王権と東アジア』吉川弘文館、 2012年3月)。 (38)李成市「平壌楽浪地区出土『論語』竹簡の歴史的性格」(『国立歴史民俗博物館報告』194、2015 年3月)。 (39)李成市「日韓古代木簡から東アジア史に吹く風」(『史学雑誌』124-7、2015年7月)。なお、この点 を大隅清陽氏は、次のように表現している。「古代日本は一直線に7世紀初頭の遣隋使から8世紀初頭の大宝 律令へと古代日本の中国的律令の受容過程(唐風化)を信じていた従来の認識体系を捨て去らなければな らない」(大隅清陽「これらからの律令制研究―その課題と展望」(『九州史学』154、2010年2月)。 ( 4 0 ) 『 国 史 の 神 話 を 超 え て 』 (林志弦との共編、2004年3月、ソウル、ヒューマニスト社)、『植民地近代の視座─朝鮮と日本』(宮嶋博 史,林志弦,尹海東との共編、岩波書店、2004年10月)、『東アジアの記憶の場』板垣竜太・鄭芝詠他編、河 出出版新社、2011年4月)。 (41)ベネディクト・アンダーソン『ヤシガラ椀の外へ』(NTT出版、2009年)281頁。

참조

관련 문서

 사물과 한국의 서정을 바닥에 깔고 소묘적인 시를 썼지만 , 그의 문학적 성과가 집약된 것은 그의 단형임..  방법론적

* 이러한 기대심리의 투사 대상이 아들이나 남자 손자로 한정되고 있다는 점에서 전통사회에서의 사회적 기대가 얼마나 남자에 집중 되어

다니엘의 시대에 일어날 일이 아닌데도 다니엘이 그것을 간직해야 하는 것은 이 환상이 하나님 백성에게 전수되어야 하는 진리이기 때문입니다.. 다니엘이 살아간

 하버마스의 합리화에 대한 분석은 프랑크푸르트 학파에 비하면 덜 비관적이며, 이상적 담론상황에 대한 기대가 존재한다. 그러 나 생활세계의 합리화가

주력 수출 상품 추이...

Rest, fresh air, sunshine and skillful nursing work miracles every

각자 젂공이 있지만 젂공과 관렦된 젂시․조사․연구만 하는 것이 아니라 때로는 젂공과 무관핚 읷을 해야 하는 경우도 많음. 이러핚 경우에

전주 한옥마을 역사문화자원 활용... 전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