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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의 재벌비판과의 비교

문서에서 반기업정서 무엇이 문제인가? (페이지 191-196)

6.재벌의 전향

7. 한국에서의 재벌비판과의 비교

소화공황기 일본에서 일어난 재벌비판의 내용을 살펴볼 때, 한국에서 재벌 비판의 단골 메뉴로 등장하는 치부과정의 비도덕성, 오너에 의한 전제적 경 영에 관한 것이 보이지 않는 점17)은 대단히 흥미롭다. 정경유착에 대한 비판 은 일본의 경우에서도 보이지만 후술하는 바와 같이 재벌체제 형성과정 자 체의 비도덕성을 주장하는 견해는 나타나지 않는다. 일본의 재벌이 정치권력 과 유착된 政商에서부터 발전했다는 사실이나, 재벌의 소유권이 재벌 가족에 게 봉쇄적으로 집중되어 있다는 사실을 생각할 때, 이러한 비판이 보이지 않

17) 한국재벌부문의 문제로서, 정병후・양영식(1992)은 ①’경제력 집중’의 문제, ②소수 자연인에 의한 산업의 과 두지배와 부의 분제의 집중을 야기하는 ‘소유구조’ ③권위주의적 비효율성과 관료주의의 폐해를 가져오고 경 영부실 노사문제 격화를 야기하기도 하는 ‘소유경영체제’를, 김대환(1999)은 ①경제력집중과 시장효율의 파괴,

②권금유착과 민주화의 지체, ③언론지배와 모방문화의 유포를 들고 한국의 재벌은 탄생시부터 권금유착을 통 한 독과점적 지위를 누리면서 형성, 성장하였기 때문에 역사적 진취성을 찾아볼 수 없다고 한다.

는다는 것은 의외이다. 이하에서는 이러한 차이점이 나타나는 이유에 대해 살펴본다.

(1) 재벌의 치부과정에 대한 비판

막말유신기의 일본자본주의의 생성기에 정부의 특권적 보호 속에 거부를 축적한 三井·岩崎·住友·安田를 비롯해서 鴻池 渋沢·大倉 浅野·古河·五代 등의 호상을 政商이라고 불렀다. 일본의 재벌들은 대체로 이러한 ‘政商’에 그 기원 을 두고 있다. ‘정상’이란 단어가 현대에서는 일반적으로 “정치권력에 유착하 여 그 용무에 대응한 비즈니스에 종사함으로써 적은 코스트로써 많은 수익 을 획득하는 자” (森川 1978: 24)라는 의미로 사용되고 있는 바와 같이, 정상 이란 말에는 정치권력과의 유착이라는 부당한 방법을 통한 이익 획득이라고 하는 부정적인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재벌의 政商的 자 본축적에 대한 비판은 별로 보이지 않는다. 이는 정상으로서 활동한 메이지 초, 중기의 시대적 성격과 관련을 가지고 있다.

정상에 대해서는 이미 메이지기의 저명한 저널리스트 야마지 아이잔(山路 愛山)이 저서 『現代金権史』(1908)에서 따로 「政商論」이란 항을 마련해 다음과 같이 성격을 규정하고 있다.

“최초의 메이지정부, 특히 그 중심적 인물인 이와쿠라(岩倉), 오쿠보(大久 保) 등이 국가 스스로 主動의 위치에서 민업에 간섭하고 인민이 나아가기 전 에 국가가 먼저 나아가 인민을 지도・편달, 원조・보호함으로써 하루라도 일 본을 서양에 근접시키려는 노력을 하여 온 것은 사실로서, (중략)이처럼 정부 가 스스로 간섭하여 민업의 발달을 도모함에 따라 저절로 나타난 인민의 일 계급이 있으니 우리는 이를 이름하여 政商이라고 한다”.

아이잔의 입론은 메이지 초기 일본자본주의의 창립기에 국가의 보호간섭 의 필요성을 설파하고 여기에 정상의 필연성을 인정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楫西 1963: 11).

당시 메이지정부가 이식하고자 한 근대적 산업은 일본에서는 전혀 경험한 바가 없는 새로운 산업이었고 당연 그 사업에 뛰어든다는 것은 상당한 리스 크를 부담함을 의미했다. 정상은 정부에 대신하여 리스크를 부담하고 신산업 에 참여하였고 정부는 그 반대급부로서 정상을 보호하였다. 따라서 정상의 사업은 정부의 사업과 거의 일체화되어 진행되었다. 예를 들면 에도시대의

商家에 기원을 두고 있는 미쓰이는 신정부의 근대적 재정 및 금융제도의 건 설 업무에 참여함으로써 막말의 경영 위기에서 탈출하고 부를 획득할 수 있 는 찬스를 얻었으며, 미쓰비시는 신정부의 해운업 건설에 참여함으로써 거부 를 축적할 수 있었다.

따라서 정상이 축적한 부는 정치와의 유착관계에서 발생한 것이지만, 그것 은 사적 이익의 추구가 아닌 국가의 정책에 참여한 결과로서 얻어진 것이기 도 했다. 앞에서 인용한 아이잔의 정상론은 이미 1900년대 초에 정상이 단순 히 정경유착 관계에서 사적인 치부를 도모한 존재가 아니라 메이지 정부의 식산흥업정책에 참여한 존재로서 인식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인식 은 현재 일본의 사학계에서도 공유되고 있다.18)

그러나 정상적 활동이 언제나 합리화되고 사회적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사실 일본의 공업화가 진행되는 과정에서 미쓰이, 미쓰비시 등 은 스스로 政商的 활동에서 탈피하고 축적 기반을 산업부문에 기반을 둔 正 常的인 영업활동으로 이행시킴으로써 재벌로서 성장할 수 있었다. 재벌로서 의 위치를 확립한 후의 정경유착에 대해서는 사회적으로도 준엄한 비판을 받게 되었다. 그 대표적인 예가 미쓰이와 정우회, 미쓰비시와 민정당과의 밀 접한 관계에 대한 일반 대중의 부정적 시각이다. 이와 같은 재벌과 정당의 유착관계는 나중의 재벌비판에서 재벌과 정당이 함께 기존정치체제의 핵심 으로서 공격당하게 되는 근거가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재벌과 정당의 유착관계를 통해 재벌이 부당하게 부를 축 적했다고는 볼 수 없다. 정당정치가 실현된 후 다수의 정치권력과 연관된 오 직사건이 일어났지만, 1914년의 지멘스 사건에 미쓰이물산이 연루된 것을 제 외하면 재벌이 직접 이런 사건에 관련되 사례는 보이지 않는다. 1920년대의 대표적인 오직사건으로는 五私鐵疑獄사건(1929년), 賞勳局疑獄사건(賣勳事件, 1928년), 일련의 동경시의혹사건 등이 있었다. 이 사건들에는 다수의 정당 정 치가들이 관련됨으로써 정당정치에 대한 불신을 조장하는데 일조했지만, 재 벌이 관련된 것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이런 오직사건은 5사철사건에서 전형 적으로 보이는 것처럼 특정 지역과 관련된 사업을 둘러싸고 지방의 실업가 들과 그 지방을 선거구로 하는 국회의원 및 지방자치체 의원사이에서 일어

18)일본의 저명한 경제사상사 연구자인 長幸男는, “정상에는 분명 네거티브한 면, 예를 들면 뇌물과 권력과 같은 문제가 있지만, 그러나 뇌물이 유일한 수익의 원천과 같은 즉 뇌물이 시스템화되어 있는 사회(중략)는 아니었 습니다. 은행이라든지 대공장을 건설하는 경우 당시의 기술수준이나 경험에서 보면 대단히 위험성이 높은 사 업이었다고 생각됩니다. 따라서 어느 정도 지식이나 경험 또는 자본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정부와의 관계에 서 다양한 식산흥업적인 의미에서의 지시를 받아 사업을 했다고 하는 면이 정상에는 있습니다”라고 하고 있 다(中川敬一郞・長幸男・金原左門 1982).

났다. 재벌과 정당의 유착관계는 특정 이권의 제공과 그 반대급부로서의 뇌 물을 공여하는 관계라고 하기 보다는 정치자금을 제공하고 반대급부로서 체 제의 유지를 도모한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19)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일련의 오직사건이 재계 전체에 대한 대중의 불신을 높여 결국 재벌비 판으로 연결된 것은 아이로니컬하다.

(2)소유경영체제에 대한 비판

일본의 재벌은 거의 완벽하게 그 소유권이 재벌 가족에게 집중되어 있다.

미쓰이, 미쓰비시, 스미토모와 같은 재벌의 경우, 재벌가족만의 출자에 의한 지주회사가 산하 사업회사의 주식을 소유했다. 특히 직계회사로 불리는 주력 사업회사의 경우는 지주회사가 주식의 100%를 소유하는 경우가 일반적이었 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에서 나타나는 바와 같은 소유와 경영의 미분리 에 의한 재벌 오너의 세습독재체제에 대한 비판이 보이지 않은 것은 일본의 재벌은 경영자기업으로서의 성격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20)

물론 당시에도 기업의 오너나 주주의 전횡에 대한 비판이 있었으나 그것 은 오히려 비재벌계 기업에 대한 것이었다. 예를 들면 당시의 저명한 자유주 의자 경제학자이며 동양경제잡지를 주재하였던 다카하시 가메키치(高橋亀吉) 는 그의 저서 『株式会社亡国論』에서 당시의 일본경제의 곤란은 주식회사 제도의 결함에 근거하고 있음을 지적하고 그 원인은 이윤만을 추구하는 주 주의 전횡적 경영태도에 있다고 규탄하면서 그 대책으로 “금융업자의 산업 지배 확립에 의해 우수한 금융자본의 신용과 그 스태프의 관리경영”을 제시 하였다. 여기서의 금융업자란 당시 은행계를 지배하던 재벌자본을 의미한다.

오히려 재벌자본에서는 주주의 전횡적 태도가 없으며 그 스태프, 즉 전문경 영자들에 의해 관리 경영되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경영자기업으로서의 성격을 잘 보여주고 있는 재벌이 미쓰이나 스 미토모와 같이 에도 시대의 상가에 연원을 둔 재벌들이다. 에도 시대의 상가 에는 이른바 '반토(番頭)’ 경영이라는 관행이 있었다. 상가의 주인은 경영에 직접 나서지 않고 일상적인 경영은 반토에게 위임되었다. 또한 상가의 가족

19)미쓰비시는 민정당의 정치적 후원자였지만, 1916년부터 미쓰비시 재벌의 총수의 자리에 오른 이와사키 고야타 (미쓰비시의 창업자 이와사키 야타로의 조카)는 ‘정치 불간섭’를 신조로하여 “미쓰비시는 정치군사의 권외에 서서 국가경제에 대한 자기의 책무를 다하면 족하다”는 신념을 관철했다.

20) 정진성(1997; 2001), 森川(1980; 1991),橘川(1997),武田(1997)을 참조.

에게는 가헌이나 규칙이 존재하여 가족들의 경영 개입이나 생활에 대한 규 제가 있었다. 이러한 전통이 있는 기업에서는 근대화 이후에도 가족이 아닌 전문경영자에게 경영이 일임되었다.

미쓰이의 경우, 재벌 경영의 실권을 쥔 것은 가족이 아니라 미노무라 리자 에몽(三野村利左衛門), 나카미가와 히코지로(中上川彦次郎), 마스다 다카시(益 田孝)와 같은 외부인이었다. 특히 미쓰이의 공업화를 실행하여 정상에서 재 벌로의 이행을 이룬 나카미가와 시대(1891-1901년)에는 대학 졸업자를 다수 채용하여 전문경영자 체제를 확립했다(安岡 1978; 정진성 2002). ‘반토 정치’

의 전통이 있는 스미토모가에서도 막말 유신기의 혼란을 대반토 히로세 사 이헤이(広瀬宰平)의 지도 하에 헤쳐 나가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히로세의 독 재가 내외의 비난을 받으며 구식의 반토경영의 한계가 드러나게 되자, 히로 세는 1894년 사직하였다. 이후 이바 사다타케(伊庭貞剛)의 지도 하에 대학 출 신이나 정부 관료 출신의 외부 인재를 영입해 전문경영자 체제를 이루었다 (作道 1982).

한편 미쓰비시와 같이 막말유신기의 혼란기에 적수공권으로 일대 기업을 이룬 재벌의 경우, 재벌 가족의 리더십은 비교적 오래 지속되었다. 미쓰비시 의 창업자인 이와사키 야타로는 진두지휘형 기업가의 전형이라고 할 수 있 으며, 미쓰비시합자의 4대 사장인 이와사키 고야타는 ‘사장 독재’라고 할 정 도로 강력한 리더십을 발휘했다. 그러나 미쓰비시에서도 이미 야타로 시대에 대학 출신의 인재를 대거 등용하고 있었으며, 1919년의 본사조직의 개편과 이사회의 신설, 1931년의 사장실회의 설치 등에 의해 사장을 포함한 전문경 영자의 집단지도적 체제로 발전하였다(三島 1981).

이처럼 재벌은 대체로 19세기 말에서 1910년대에 걸치는 시기에 전문경영 자 체제를 형성하게 되었다. 이것은 챈들러가 정의한 바와 같은 엄밀한 의미 에서의 경영자기업은 아닐지 모르지만, 재벌 가족의 영향력이 전문경영자에 의해 현저하게 제약받게 된 것만은 사실이다.21) 이처럼 재벌에 전문경영자 체제가 성립됨으로써 재벌은 공업화에 적극 기여할 수 있었던 것으로 평가 받고 있다(森川 1980; 橘川 1995).

21) 챈들러는 “창업자 가족이나 금융업자의 대리인들이 더 이상 톱 레벨의 경영결정을 하지않고 이러한 결정은 그 회사의 주식을 거의 소유하지 않는 전문경영자(salaried managers)가 행하는 기업을 경영자기업이라고 이 름 붙일 수 있다”고 하고 있다(Chandler 1980: 14). 재벌 가족과 전문경영자와의 관계에 대한 상세한 논의는 정진성(1997)을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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