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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쓰이재벌에 대한 공격은 정당한 것인가?

문서에서 반기업정서 무엇이 문제인가? (페이지 180-186)

또 하나의 예를 마르크스주의에 경도해 있던 학생의 회상에서 보기로 하 자. 그 학생은 “단지 돈이 있다는 것만으로 왜 인격상의 차별이 발생하는 가… 다리 밑 土管에서 雨露를 피하는 가련한 사람들과 제국호텔의 휘황찬 란한 샹델리에 밑에서 샴페인을 건배하는 사람들과의 대립 …(그것이) 나를 마르크스로 기울어지게 했다”(文部省『左傾学生生徒の手記』1934-35年) 고 기술하고 있다. 여기서는 제국호텔에서 샴페인을 건배하는 것이 재벌의 정형 적 이미지가 되고 있다(安田 2002: 204).

극히 단편적이 자료이긴 하지만 대중들의 재벌 이미지는 자본의 운동법칙 이든가 축적양식 등 비인격화된 시스템으로 파악된 것이 아니라, 말하자면

“제국호텔에서 샴펜을 마시는” 구체적인 행동과 결합된 인격으로 파악되고 있다. 이러한 알기 쉬운 이미지는 광범한 대중 속에 깊이 잠재되어 재벌비판 의 감각적 기초를 형성하고 있었다고 생각된다.

대중의 반재벌적 감정은 재벌에 대한 우익의 비판과 공격에 대한 대중의 호응으로부터도 알 수 있다. 혈맹단사건은 발발 당시에는 오누마(이노우에 준노스케의 암살자)의 생가에 돌이 던져지는 등 비난이 일어났지만, 공판상 황이 신문에 보도되면서 전국에서 혈서의 감형탄원서, 여성의 흑발이 변호인 에게 다수 보내어지는 등, 대중들로부터 마치 사회 개혁의 의거로 받아들여 지기도 했다. 또 5・15 사건의 경우에도 주류 언론은 이에 대해 대체로 비판 적이었지만, 사회적 분위기는 동정적이었으며, 감형탄원서는 100만통에 달했 다고 한다.

(1) 달러 매입은 투기적인 것인가?

미쓰이는 투기적 목적으로 달러 매입을 한 것일까? 미쓰이는 투기적 목적 으로 달러 매입을 했다는 주장을 부정하였으며, 나아가서 합리적인 경제행위 라고 주장하였다. 달러 매입의 수괴로 지목되던 미쓰이은행의 필두상무이사 였던 이케다 시게아키는 회고록에서 “미쓰이은행에서는 당시 달러의 선물 약정 1,633만 달러를 가지고 있어 이 준비로 달러를 사둘 필요가 있었으며 또 전력회사의 외채 이자지불을 위해 535만 달러를 사지 않으면 안 되는 사 정이 있었다”(池田 1949: 135-170)고 하고 하여 미쓰이의 달러매입은 투기적 인 것이 아니라 정당한 경제적 행위였다고 해명하고 있는데, 당시의 미쓰이 은행도 같은 취지의 설명을 하고 있었다(三井文庫 1994: 191-192). 또 미쓰이 물산과 미쓰이신탁도 투기적인 예상에 의한 달러 매입이 아니라 무역자금조 달을 위한 정당한 상행위였다고 주장하고 이에 대해 12월 23일 성명을 발표 했다(三井文庫 1994: 193).

경제계에서도 미쓰이의 주장에 동조하는 의견이 있었다. 당시 이노우에 대 장성 장관의 오른팔로서 대장성국고과장이었던 아오키 가즈오(青木一男)는

“당시의 달러 매입의 약 절반은 내셔널시티은행 1행이 차지하고 있었으며 미쓰이은행의 달러 매입액은 스미토모나 미쓰비시에 비해 큰 차이는 없었 다”고 미쓰이은행만이 특별히 문제가 될 것은 없었다고 하면서, “일반적으 로 우리나라도 조만간 금수출재금지가 불가피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 이 모든 기회를 이용하여 미리 달러를 사 두려고 하는 생각은 경제적 상식 이라고 할 것으로 일국의 법제가 합법적 거래라고 하고 있는 것을, 애국심이 나 도의심으로 저지하려고 하는 것은 본래 무리라는 것을 굳이 말할 필요도 없는 것이다”(青木 1959) 라고 하여, 대장성의 관료이면서도 달러 매입은 경 제적으로 합리적이며 합법적인 것으로 이해하고 있었다.

우선 미쓰이가 어느 정도의 달러를 매입했는가를 보기로 하자. 야마사키의 연구(山崎 1988)에 의하면, 전술한 아오키의 말대로 외국은행인 내셔널시티 은행의 달러 매입이 압도적 비중을 차지하고 있음을 <표 1>에서 알 수 있 다.그러나 1931년의 9월을 경계로 하여 1930년 8월에서 31년 8월까지와, 31 년 9월에서 32년 3월까지의 두 시기로 나누어 달러 매입 상황을 보면, 달러 매입이 문제가 되었던 두 번째 시기에 미쓰이은행과 미쓰이 물산의 달러 매 입이 급속히 증가한 것을 알 수 있다. 즉 달러 매입에 대한 비판이 미쓰이에 집중된 것은 달러 매입이 문제가 된 31년 9월 이후의 미쓰이의 움직임이 두

드러졌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표 1> 대규모 달러 매입 은행 및 기업

(단위: 천엔, %)

1930.8-1931.8 순

1931.9-1932.3

기업명 금액 기업명 금액

내셔널시티은행 미쓰비시은행 스미토모은행 홍콩상하이은행 조선은행

Netherland Trading Society 미쓰이은행

미쓰이물산 챠타드은행 노무라증권

142,520(40.2) 34,300(9.7) 33,300(9.3) 21,450(6.1) 18,700(5.3) 15,085(4.3) 12,200(3.4) 11,731(3.3) 8,700(2.5) 6,399(1.8)

내셔널시티은행 미쓰이은행 스미토모은행 미쓰이물산 미쓰비시은행 홍콩상하이은행 조선은행 동양면화 챠타드은행 타이완은행

130,642(32.7) 46,550(11.6) 31,700(7.9) 30,054(7.5) 19,950(4.9) 19,200(4.8) 15,430(3.9) 8,888(2.2) 8,700(2.2) 8,250(2.1)

기타 포함 합계 354,420 기타 포함 합계 399,995

이처럼 31년 9월 이후 미쓰이의 달러매입이 돌출한 것은 최근의 연구(小倉  1990;武田1995)에 의하면 당시의 미쓰이은행이 의도적으로 엔저를 예상하고 달러 매입에 의한 환차익을 얻고자 했기 때문이었다. 당시의 미쓰이은행은 유휴자금이 발생하여 이를 해외에서 단기적인 자금운용으로 활용하고자 하 였다. 미쓰이는 유휴자금을 영국의 폰드에 투자했는데 영국의 금본위제 정지 로 인해 폰드가 하락했지만 폰드 자금이 동결되었기 때문에 이를 회수하지 못하게 되었다. 불행히도 미쓰이는 환 리스크를 커버하는 환예약을 해 두지 않았기 때문에 환차손이 발생하는 사태를 맞이하게 되었다. 당시 미쓰이 은 행은 약 8,000만엔을 런던에 두었는데 폰드의 가치가 약 3할 하락했기 때문 에 약 2,400만엔의 환차손이 발생하게 되었다. 이 손실을 메우기 위해 엔저 를 예상한 투기적 달러 매입을 했다는 것이다. 일본이 금본위제를 정지함에 따라 예상대로 엔의 가치가 크게 떨어짐에 따라 결국 미쓰이는 결국 달러매 입에 의해 막대한 이익을 올렸다.

그러나 이와 같은 달러 매입의 실상은 나중에 판명된 것으로 당시의 달러 매입에 대한 비판이 정확한 정보에 기초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이 방면의 전문가들은 달러 매입은 정상적인 거래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당시의 여론은 달러 매입의 경제적 합리성이나 국민경제에 대한 효과란 면에서 달러 매입

을 공격한 것은 아니었다. 여론의 주된 주장은 불황으로 국민들이 고생하고 있는데 재벌만이 부당한 방법으로 이익을 보고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부당 한다는 것은 금본위제를 유지하고자 하는 국가정책에 반해서 투기적인 달러 매입을 했다는 것이다. 미쓰이는 투기적 매입이 아니었음을 필사적으로 주장 하였지만 대중은 미쓰이의 주장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말하자면 모두 고 생하고 있는데 혼자 돈 벌고 있는 것, 그것도 국가정책에 반해서 돈을 벌고 있다는 것이 괘씸했던 것이다.

(2) 물산의 ‘상업주의’에 대한 비판

달러매입과 함께 미쓰이재벌 공격의 주재료가 된 것은 일본 최대의 종합 상사인 미쓰이물산의 노골적인 ‘상업주의’ 또는 ‘영리제일주의’였다. 당시 미 쓰이물산은 종합상사부문에서의 공룡적인 존재였으며, 미쓰이재벌 내에서도 가장 중요한 위치에 있었다. 따라서 미쓰이물산의 경영방침에 대한 비판은 바로 미쓰이재벌 전체에 대한 비판으로 확산될 수 있었다.

그렇다면 당시 비판 대상이었던 물산의 ‘상업주의’란 무엇인가? 당시의 신 문이나 잡지 등의 자료를 보면, 물산의 노골적인 이익추구에 의한 중소상공 업자의 몰락을 문제로 삼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예를 들면, 1934년 1월20일의 『東京朝日新聞』은 미쓰이물산의 필두상무 이사 야스카와 유노스케(安川雄之助)의 사임을 보도하는 기사 중에 “미쓰이 물산은 창업 이래, 미쓰이재벌의 직영기관이면서 철저한 커머셜리즘에 입각 하여, 영업범위의 확대, 이윤의 획득을 위해서는 국제상품에서 모든 국내상 품에까지 범위를 넓혀 그 사이 절대적인 자본력으로써 동종 상공업자를 압 박하여 재벌 횡포라는 소리조차 들리기에 이르렀다”고 보도하고 있었으며, 1934년 3월호 『改造』는 “물산이 철저한 커머셜리즘의 입장에서 영업범위 를 확대하여 국제상품에서 국내상품에 이르기까지 사업범위를 넓혀 거대한 자본력으로써 중소상공업자를 압박하는 것은 전 미쓰이를 직접적으로 대중 에 대립시키게 되었다”고 하여 동종상공업자의 초점이 중소상공업자에 있음 을 명확히 하고 있다.

이와 비슷한 언설은 1937년에 출판된 『미쓰이콘체른독본(三井コンツェル ン読本)』에서도 보인다. 즉 저자는 미쓰이가 반재벌감정의 중심에 있게 된 이유를 재벌로서의 ‘이익추급주의’에 있다고 하며, “특히 ‘돈벌이주의’의 대표

기관인 미쓰이물산이 세계 제일의 상사회사로서 철저한 커머셜리즘에 입각 하여 영업 촉수의 확대, 이윤의 독점화를 위해서 국제상품에서 모든 국내상 품에 이르기까지 사업을 벌려 그 사이에 세계적인 자본력으로써 동업 중소 공업자를 압사시키는 것과 같은 방식은 쌓이고 쌓여서 재벌 횡포에 대해 마 음 곳 깊은 곳에서부터 원한을 산 것이다”(和田 1937: 291)라고 하고, 국내상 품 중에서 위와 같은 예로 계란, 사과, 김의 독점을 추구하여 중소상공업자 의 터전을 빼앗았다고 하고 있다.

이와 같은 당시의 저널리즘의 주장은 과연 사실을 정확히 반영하는 것일 까?10) 적어도 당시 미쓰이물산을 실질적으로 지도하고 있던 야스카와가 적 극적으로 지방진출을 의도하고 있던 것은 사실이다. 야스카와가 물산의 지점 장 등에 대한 「申達」이나 「訓示」를 보면, 협동조합의 이용, 지방시장진 출이 신발명・신사업계획의 주시,동업자와의 협조,생산과정에의 진출,外 国間貿易의 적극화 등과 함께 중요한 영업방침으로서 반복되어 강조되고 있 다.

야스카와는 일본의 소공업, 소농 등 소경영의 독자의 경쟁력을 평가하고 소경영의 공동화에 의한 그 존속이라고 하는 소경영관을 가지고 있었다. 즉 협동조합을 이용하여 소경영의 단점을 극복하고 장점을 살리는 것이 가능하 다고 생각하고 협동조합을 적극 이용하는 방침을 제시하였다. 협동조합의 이 용이라는 방침은 나아가서 대규모경영과 소경영의 결합에 의한 소경영의 결 점 극복이라는 로직을 매개로 하여 미쓰이물산이 조합에 대신해서 소경영에 원재료나 자금을 공급하고 그 반대급부로서 제품의 판매와 수출을 담당함으 로서 소경영의 존속, 발전을 돕는다는 아이디어로 발전했다. 물산이 직접, 간 접으로 소경영과 거래를 왕성하게 한다는 것은 결구 동사의 지방시장에의 진출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실제로 미쓰이물산의 商内別商品取扱高를 보면 국내매매가 점하는 비중이 1920-26년의 23-25%대에서 28-32년의 30%대,33년의 40.1%로 경향적으 로 크게 상승하고 있는데 이러한 국내시장매매고의 신장은 협동조합의 이용, 지방시장 진출이라고 하는 방침의 결과라고 볼 수 있다.

이와 같은 지방시장 진출의 과정에서 중소상공업자에 대한 압박이 존재했 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야스카와는 ‘중소상공업자’의 압박이라는 비판에 대해 일본의 자원 부존상황에 적합하게 존재하는 가내공업의 발달을 상사가 조성

10) 이하의 내용은 山崎広明「三井物産と安川雄之助」(中川敬一郎編『企業経営の歴史的研究』岩波書店,1990)에 주로 의거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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