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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 간섭을 배제하고 자유 시장경제를 정착시키는 과업의 주된 수단은 국유화된 기업들을 민간부문으로 되돌리는 것이었다. 국유화는 1945년에 정 권을 잡은 노동당정부의 기본 원칙 가운데 하나였다. 노동당은 “자본주의적 착취로부터 노동계급을 해방시킨다”는 구실로 국유화를 진척시켰지만, 그것 은 대규모 관료조직을 만들어낸 것에 불과하였다. 대처가 집권한 1979년에 영국의 공기업은 국민총생산(GNP)의 11%를 생산하고 총투자의 15%를 차지 하고 있었다. 공공부문 취업자 수는 800만에 이르렀으며, 엄청난 파급효과를 지닌 기간산업 노동자들의 파업을 막기 위해 정부가 어쩔 수 없이 노조의 요구를 들어주는 악폐가 생겨난 결과 노조의 세력이 비대해졌다. 이미 1950 년대부터 더 이상의 국유화를 바라지 않는다는 여론조사 결과가 나왔다는 사실에서 알 수 있듯이 국민은 점점 더 비대해지는 국가를 우려의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국유화된 산업을 다시 민간부문으로 되돌리는 것을 반기지 않는, 즉 현상유지를 선호하는 분위기가 한동안 유지되었다.14) 민영화를 외친 선구자는 사실 마거릿 대처가 아니라 이녹 파월(Enoch Powell)이었다. 여러 면에서 대처의 출현을 예고했기 때문에 “세례 요한”이 라 불리게 된 파월은 이미 1960년대에 탈 국유화를 주장하면서 보수당에 압 력을 가하였다. 그러나 당시에는 보수당조차 사회민주적 합의를 고수하고 있 었기에 파월의 주장은 광야의 외치는 소리가 되고 말았다.

“헨리 8세의 수도원 해체 이후 가장 큰 규모의 소유권 이전”15)이라고 불 린 민영화는 결과적으로 대 성공이었고 그 규모에서 혁명적이었다. 20세기 영국에서 행해진 정책들 가운데 민영화만큼 다른 나라에 큰 영향력을 미친 것이 없었다. 흥미로운 사실은 대처가 민영화라는 용어를 몹시 싫어해서 그 단어를 사용하지 않으려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아무도 더 나은 용어를 생각

13) Thatcher, The Path to Power, 576.

14) Donley Studlar et al,, "Privatization and the British Electorate: Microeconomic Polic ies, Macroeconomic Evaluations, and Part y Support", American Journal of Political Scienc e, 34/4 (Nov. 1990), 1081.

15) Peter Saunders & Colin Harris, Privatization and Popular Capitalism (Buckingham: Open University Press, 1994), 6.

해내지 못했기 때문에 할 수 없이 사용했는데, 대처 임기 중에 민영화라는 단어는 시베리아로부터 파타고니아에 이르는 전 세계에서 통용되는 개념이 되었다.16) 민영화는 몇 가지 목표를 한꺼번에 달성할 수 있는 수단이었다.

첫째, 공기업의 적자 요인을 없애주고 둘째, 주식 매각으로 국고 수입을 증 대시켜 고질적인 재정적자를 청산해주며 셋째, 민간의 활력을 회복시켜 주는 방법이었다. 무엇보다도 민영화는 집산주의를 되돌리고 개인의 자유를 회복 시켜 줄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거시적 증거였다.17)

아이러니는 민영화가 처음부터 청사진이 있었던 것이 아니고 우연한 결정 과 실험으로부터 발전한 것임에도 대처 정부의 가장 성공적 치적으로 평가 받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대처의 초대 재무장관 제프리 하우가 나중에 솔직 히 인정했듯이 대처와 각료들은 처음에는 민영화의 중요성을 제대로 인식하 지 못하였다. 대처도 자서전에서, 1970년대 후반에는 민영화라는 개념이 너 무나 혁명적이어서 생각도 못할 일이었다고 회상하였다.18) 특히 그녀는 민영 화가 유권자들 가운데 보수당과 노동당 어느 한 편에 기울지 않은 부동표를 놀라게 할지도 모른다는 공포심을 가졌다. 그러나 일단 결과가 좋게 나타나 자 그 성공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버렸고, 나중에는 자신이 민영화를 사회 주의의 부패하고 마음을 좀 먹는 효과를 되돌리는 핵심 수단으로 간주했다 고 주장하였다.

가장 인기 있고 성공적인 사업은 공영 임대주택의 매각이었다. 1980년부터 공영 임대주택에 2년 이상 거주한 사람에게 주택 매입 선택권을 주고 집의 보유기간에 따라 가격을 낮추는 방식을 사용해 공정가격에서 최대 60% 할인 된 가격을 보장해 주었다. 대처는 원래 공영 임대주택을 판매하는 것에 반대 했지만 그 효과를 깨닫자 그것을 자신의 정치적 신념의 상징으로 추켜세우 면서 주택소유의 붐을 일으켰다. 즉 “수입 내에서 지출하라”는 자신의 경제 원칙을 무시하고 주택조합(Building Society)의 여신 조건을 완화시켜 준 것 인데, 그 결과 주택 담보 대출이 1980년부터 10년간 5배로 급증하였다. 각료 들은 대출 이자에 세금 공제 혜택을 주는 것을 없애자고 했지만 대처는 말 을 듣지 않았다. 1990년 대처가 물러날 때까지 총 150만 호의 공영 임대주택 이 팔렸다. 거주자가 곧 소유주가 되는 과정에서 혜택은 주로 숙련공들에게 돌아갔고 그 결과 중산층이 두터워졌다. 이를 두고 대처는 “재산 소유자들의 민주주의”라고 찬양하였다.

16) Nigel Lawson, T he View from No.11 (Doubleday, 1993), 198.

17) Ibid., 676.

18) Thatcher, The Downing Street Years, 677.

대처는 1991년 폴란드에서 행한 연설에서 자본주의가 가장 적극적 의미에 서의 민주주의임을 설파하였다.

내가 지지하는 자본주의는 힘을 가진 사람들이 공정함과 점잖음과 공공선 을 희생시켜 자신들의 이득을 취하는 그런 자본주의가 아닙니다... 자본주의 는 민주주의와 마찬가지로 대중에게 진정한 권력을 줍니다. 가장 적극적인 형태의 정치적 민주주의에서도 개인들은 기껏해야 지역적으로는 1년에 한두 번, 전국적으로는 몇 년에 한번 투표권을 행사하게 됩니다. 그러나 시장에서 사람들은 물건을 사는 행위를 통해 매일매일 경제적 선택권을 행사합니다.19)

공영 임대주택 판매와는 별도로 정부가 소유한 공기업 주식을 매각하는 민영화가 추진되었는데, 진정으로 중요한 민영화는 1984년 영국통신(British Telecom)의 매각으로부터 시작되었다. 대처는 처음에는 영국통신을 팔아치울 생각이 없었고 독점인 통신 산업에 경쟁을 도입하는 것에서 해결책을 찾으 려하였다. 그런데 시설 혁신을 위해 투자할 자본을 구하지 못하게 되자 민영 화가 대안으로 떠올랐던 것이다. 대처 정부는 소비자들에게 주식을 직접 판 매하는 방식을 택하기로 결정하고 유명 광고대행사를 고용해서 TV와 신문을 동원해서 선전을 폈다. 각료들은 주식이 다 팔릴 수 있을지 마지막 순간까지 불안해했지만 그것은 괜한 걱정이었다. 1984년 11월 첫 번째 판매 신청을 받 았을 때 100만 이상의 소액 주주들이 신청하였던 것이다. 영국통신 피고용인 들 가운데 96%가 주식 매입을 신청하였는데 그들은 민영화에 반대하라는 노 조의 명령을 거역하고 주식을 사기로 결정했던 것이다. 궁극적으로 정부 기 대보다 훨씬 많은 230만이 청탁하여 9.7대 1의 경쟁을 보였다.20) 영국통신의 주를 산 소액 주주들 가운데 절반은 전에 한 번도 주식을 소유해 본 적이 없는 사람들이었다. 물론 가격이 일부러 낮게 책정되었기 때문에 주식을 배 당받은 사람들은 큰 이익을 볼 수 있었다. 영국통신의 매각 후 영국가스 (British Gas), 영국석유(British Petroleum, BP) 등이 뒤를 이었다. 대처 정부 가 추진한 민영화에서 최대 규모는 70억 파운드 가치의 주식의 소유가 바뀐 영국석유의 주식 매각(1987)이었다. 영국석유는 영국에서 가장 큰 기업이며 세상에서 세 번째로 큰 석유회사였기 때문에 그것의 매각은 전 세계적으로 도 가장 큰 규모였다.

19) Margaret Thatcher, T he Collected Speeches of Margaret That cher ed. Robin Harris (HarperCollins, 1997), 506.

20) Lawson, The View from No.11, 207.

공기업의 매각은 엄청난 인기몰이였다. 민영화에 대한 반대는 오히려 보수 당 내에서 제기되었다. 보수당정부의 총리를 지낸 해럴드 맥밀런은 민영화를 두고 “대대로 내려오는 가보를 파는 짓”이라고 비난하였다. 이에 대해 대처 는 지금 팔아치우는 기업들은 자산이 아니라 빚일 뿐이라고 반박하였다. 민 영화가 성공이라는 사실이 입증되자 정부는 1989년 수돗물도 민영화하기로 결정하였다. 이미 전기산업에서 발전과 배전도 민간 기업으로 넘어갔다. 그 러나 수돗물의 민영화는 정치적으로 매우 민감한 문제였고 통신이나 석유의 경우와는 다른 문제점을 야기하였다. 여론조사에서 국민의 80% 가까이가 수 돗물의 민영화에 지속적으로 반대했는데, 물은 공기와 마찬가지로 신이 주신 물질이고 상업적 거래 대상이 아니라는 의식이 깊숙이 박혀있었던 것이다.

반대자들은 “봐라. 대처가 이제는 하늘에서 내리는 비까지도 팔아먹으려 한 다”며 비난하였다. 대처는 그에 대해 하나님이 비를 내리시지만 수도관과 기 계설비 같은 것은 함께 보내주시지 않았다고 반박하였다.21) 그럼에도 공중 보건을 민간 기업에게 믿고 맡길 수 없다는 대중 정서가 지속되자, 정부는 전국 하천 통제국을 만들어 규제와 환경의 의무를 공공부문에 남겨 두었다.

그러자 국민의 의구심이 사라졌고 수돗물의 민영화는 신속히 추진되었다.

대처 정부가 들어선 1979년부터 1992년까지 총 415억 파운드어치의 국가 소유 주식들이 민간인에게 넘어갔다. 1992년이 되면 이제 팔 것이 거의 없을 정도로 공기업이 해체되었고 석탄과 철도만이 공공부문에 남아있었다. 철도 는 민영화되지 않았는데 기술적으로 어려웠을 뿐만 아니라 국민들이 철도에 이상한 애착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대처 정부가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철 도의 민영화는 후에 메이저 정부 때 단행되었다. 영국의 성공적인 민영화 경 험은 이후 전 세계 모든 나라의 국영기업 민영화의 벤치마킹 모델이 되었다.

노쇠한 국민기업이던 독일의 폴크스바겐, 루프트한자, 프랑스의 르노 자동차 가 전적으로 또는 부분적으로 민영화의 길을 따랐다. 가장 빠른 속도로 민간 기업이 늘어난 곳은 과거 공산권 국가들로서, 1992년 러시아의 옐친 정부가 거대한 민영화 계획에 착수하였다.22)

민영화 덕분에 정부는 만성적 적자 예산을 면하게 되는 한편, 기업은 기업 대로 정부 간섭에서 탈피하여 보다 탄력적인 경영을 할 수 있게 된 결과 기 업의 자생력과 국제경쟁력이 강화되었다. 1989년 10월, 보수당 전당대회에서 대처는 “일주일에 200만 파운드씩 손해를 입히던 공공부문의 5개 산업들이 이제 민간부문에서 일주일에 1억 파운드씩 이익을 내고 있다”고 자랑스레

21) Thatcher, The Downing Street Years, 680.

22) John Mickelthwait & Adrian Wooldridge, 유경찬 옮김, 《기업의 역사》(2004, 을유문화사), 161.

보고하였다. 국민의 세금으로 유지되던 공기업이 이제 세금을 납부하는 기업 이 되었던 것이다. 공공부문 취업자 수는 800만에서 300만으로 줄어들었고 무엇보다도 생산성이 크게 향상하였다. 민영화된 기업에서는 비용이 30% 절 감되고 노동생산성이 19% 증가하였다. 영국항공(British Air)의 경우 종업원 1인당 생산성이 50% 이상 향상하여 세계에서 가장 수익성 좋은 항공회사로 다시 태어났다.23)

민영화는 그때까지 아무의 통제도 받지 않던 공공부문에 혁신을 주입시키 는 대 변혁을 가져왔다. 대처는 공공부문과 민간부문 사이의 차이에 관해,

“민간부문은 정부에 의해 통제되는 데 반해 공공부문은 아무의 통제도 받지 않는다는 것에 있다”는 아서 센필드(Arthur Shenfield)의 말을 즐겨 인용하였 다.24) 무엇보다도 민영화의 마력은 ‘파산할 수 없던 것을 파산할 수 있게 만 드는 것’이었다. 민영화된 기업들은 구조조정, 경쟁 등을 통해 제품과 서비스 의 품질을 향상시키고 가격을 하락시켜 파산하지 않아야 했고, 실제로 그렇 게 되었다. 그 결과 소비자들은 더 나은 서비스를 맛볼 수 있었다. 보통 몇 주씩 기다려야 했던 전화 개설이 며칠이면 끝났으며 가스나 전기 등 다른 민영화된 부문에서도 소비자의 요구에 신속하게 대응하는 변화가 일어났다.

대중은 처음에는 오랫동안 익숙해 있던 공기업이 해체되는 것에 불안을 느 꼈지만, 민영화 이후 다양한 서비스의 선택권을 누리게 되고 가격이 인하함 에 따라 만족하게 되었다. 영국통신의 소비자 부담은 35% 이상 인하되었고, 영국가스의 경우에도 소비자 가격이 비슷한 비율로 인하되었다. 수돗물의 경 우에도 민영화 후에 훨씬 많은 투자가 투입되어 물의 질이 좋아지고 사람들 도 만족하게 되었다. 즉 파산할 수 있다는 위협이 경영진과 노동자들로 하여 금 궁극적으로는 소비자에게 봉사하게 만든다는 말이 현실이 된 것이다.

대처 정부 하에서 민영화는 국가와 시민사회간의 새로운 관계를 묘사하는 용어가 되었다. 1979년에는 국가 소유의 산업과 기업들이 국민들의 일상생활 의 거의 모든 면에 침투해 있었다. 아침에 일어나 침대 옆 전등을 켜면 그때 사용되는 전기는 국가 소유였다. 라디오를 틀어 BBC 방송을 들어도 마찬가 지로 국가소유였다. 면도를 하고 샤워를 할 때 쓰는 물과 전기도 모두 국영 기업의 산물이었다. 아침식사를 준비한 가스불도, 식사 후에 걸려온 전화도 다 국유화된 것이었다. 식사 후 사람들은 국가 소유의 버스와 기차를 타고 일하러 나갔다. 한데 그 모든 것이 변하였다. 가스도, 수돗물도, 전기도 모두

23) Peter Clarke, Hope and Glory (Allen Lane, 1996), 381-382; S aunders & Harris, Privatization and Popular Capitalism, 20.

24) Thatcher, The Downing Street Years, 6.

문서에서 반기업정서 무엇이 문제인가? (페이지 151-15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