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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의 타문화권 선교의 역사와 현황

문서에서 박 박 박 재 재 재 현 현 현 (페이지 101-113)

이제 한국교회는 선교2세기로 접어들고 있지만 그 짧은 기간에 괄목한 성장을 하였다.루이스 부시의 표현처럼 이제는 전세계 교회가 한국교회를 주시 하고 있다.그래서 어떤 이는 “세계 선교의 역사적 촛불은 한국교회의 촛대위에 꽂혔다”고 선언하였다.이 얼마나 흥분된 명제인가?

서울신학교의 이강천 교수는 이러한 명제는 그 어떤 흥분할 만한 근거가 있는가 라고 반문하면서 2천년간 흘러온 선교의 역사의 흐름을 그의 책에서 밝 히고 있다.154)

예루살렘에서 시작된 복음전도운동은 안디옥 교회로,안디옥 교회에서 바 울 사도의 1,2,3차 전도여행을 통해 유럽으로 건너가 하나님은 로마제국의 수

154)이강천,『마지막 세기 마지막주자』 (서울:두란노서원,1991),27.

도에 새로운 선교기지를 세우셨다.이렇게 로마의 복음화는 아프리카 북부와 유 럽 남부와 서 아시아를 포함하는 지중해 연안 제국에 복음을 쉽사리 확산시키는 전략적 기지역할을 하게 되었고 기독교의 세계 정복을 위한 준비 도구가 되었던 것이다.155)그래서 A.D.313년 콘스탄틴의 밀라노칙령 선포 전후로 해서 복음은 로마제국의 국경을 넘어서 서반아,영국,아일랜드,에디오피아,인도 심지어 중 국에까지 퍼져 나갔고 기독교가 국교가 된 후에는 전 유럽으로 번져나가게 되었 다.로마에서 유럽을 복음화한 후 영국으로 건너간 개신교의 선교운동은 암흑기 와 종교개혁을 거치면서 체재정비를 한 후 17세기에 이르러 독일의 경건주의 운 동과 이어지는 영국을 비롯한 유럽개혁 교회의 대각성 운동을 통하여 선교의 열 정이 다시 불붙게 된다.

그 후 하나님은 영국의 윌리엄 케리로 하여금 본격적인 근대 선교 운동 의 역사를 열게 하셨다.1739년 6월 13일 윌리암 케리 선교사가 인도 선교사로 출항하였고 그의 영향을 받은 영국은 물론 유럽과 미국의 교회들이 앞 다투어서 선교회를 조직함으로써 선교 운동이 불이 타오르게 되었다.그후 미국의 교회는 16-17세기에 걸쳐 주로 영국을 비롯한 유럽에서 이주한 그리스도인들과 그들이 전도한 약간의 원주민들로 형성되었다.18세기에는 영국의 영적 대각성 운동이 곧 바로 미국으로 번져 부흥을 경험하게 된다.

한국교회는 위대하신 하나님의 은혜로 선교가 들어온 지 120여년 남짓한 짧은 선교역사를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한국교회는 그 동안 양적인 성장이 괄목할 만하여 세계기독교계가 부러워할 정도가 되었다.더욱이 70년대와 80년대 에 와서는 한국교회의 성장이 가히 폭발적이어서 1990년대 중반에는 한국교회의 숫자는 3만이 넘었고,교인수도 1천만이 넘게 되었다.그리고 한국교회의 해외선 교도 2005년에는 1만 4천여명이 넘는 해외선교사들이 세계 곳곳에서 복음을 힘 있게 증거하고 있다.

155)H.Kane,

(A)Concise History ofThe Christian World Mission

,박광철 역,『기독교 선교 세계사』 (서울:생명의 말씀사,1981),11-14.

한국교회는 이제 21세기 글로벌 선교의 리더 중의 하나이다.19세기 선 교가 영국을 비롯한 유럽 주도의 선교였다면,20세기 선교는 북미 주도의 선교였 으며,21세기 선교는 모든 대륙에서 모든 대륙으로,모든 민족에서 모든 민족으 로 나아가는 다극화된 글로벌 선교이다.한국 개신교는 이제 서구 주도 선교의 한 예외적인 세력이 아니라,‘삼분의 이 세계’(theTwoThirdsWorld)156)선교운 동의 주도세력이며,나아가서 글로벌 선교의 대표주자로서의 위상을 굳히고 있 다.21세기를 향하고 있는 한국교회는 초기부터 지금까지 어떻게 선교사를 파송 하며,어떤 선교정책을 수립하였는가를 알아보고,지난날에 일어났던 선교역사를 돌아보며 미래적인 입장에서 한국교회가 어떠한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 것인가를 제안하고자 한다.

1.한국교회의 초기선교

부흥 운동은 한국교회의 교세를 확장하였고,내적으로 교단적 조직을 구 축하였다.또한 점차로 선교사들의 지배에서 독립하여 자주적인 한국교회의 기틀 을 형성하게 되었다.157)역시 새벽기도,말씀에 대한 전념,정열적인 봉사 등은 부흥 운동의 결과인 것이다.

부흥운동의 목격자요,인도자 중에 한 사람인 방위량 선교사는 부흥 운동 이 회개운동,성결운동,선교운동을 가져왔다고 했다.1907년의 대부흥운동 이후 로 100만 구령운동의 대전도운동이 한일합방이 조인되던 1910년에 일어났고,역 시 해외선교운동도 일어나게 되었는데,이것은 교세확장을 위한 교회와 선교부와 156)‘삼분의 이 세계’(TheTwo-ThirdsWorld)란 표현은 과거의 제 1세계인 서 구 자본주의 권역을 제외한 제 2세계와 제 3세계를 합친 권역을 말하며,이들 국가들의 영토를 합치면 지구 표면의 거의 2/3정도에 달하며,인구 면에서는 2/3가 좀 넘는다고 해서 선교학계와 신학계 일부에서 이러한 표현을 쓰고 있다.이 표현을 처음 쓴 이들로 는 LarryKeyes와 LarryD.Pete등이다.(Pate1989,12-14).

157)『한국기독교사연구』 제10호,(1986.10.5),7.

의 협동작전이었던 것이다.158)이 운동의 성격을 규명해 보면 순수한 영적인 운 동이요 도덕적 운동이었으며,선교사와 한국 교인 사이의 상호 이해와 화해 기운 이 조성되었던 뜻있는 중요한 부흥운동이었던 것이다.또한 공동체적인 교회 의 식이 생기게 되었고 성경을 애독하게 되었으며 새벽 기도회의 습관이 생기게 된 것이다.뿐만 아니라 정기적인 사경회가 열리게 되고 활발한 전도활동이 전개되 었던 것이다.159)

이와 같은 부흥의 불길이 전국에 파급되기 시작한 1907년의 대부흥 운동 은 한국교회사에 있어서 하나의 전환점을 이루고 있다.그해 9월17일 평양 장대 현 교회에서 예수교 독노회가 조직되었다.한국인 장로36인과 선교사 33인과 찬 성회원 9인등 모두 78인의 회원이 참석하여 대한 예수교장로회 제1회 노회를 성 립시켰다.이 독노회는 가장 중요한 안건으로서 1901년에 설립된 장로회 평양신 학교 졸업생 7인을 안수하여목사로 세웠으며 그 중의 한사람인 이기풍 목사를 제주도로 파송하여 선교사업에 종사하게 하였다.또 이 첫 노회는 제일 중요한 안건으로 선교부를 심의 조직했던 것이다.한국교회는 이렇게 출발하면서 선교하 는 교회로 등장했다.‘블레어 선교사는 새로운 교회의 첫모임은 사실상 선교사를 해외에 파송하는 모임이었다고160)회고했다.

곧 뒤를 이어 1909년에 최관홀목사를 러시아의 블라디보스톡의 우리 동 포들에게 선교사로 파송하였고,한석진목사를 일본 도쿄에 파송함으로써 한국 유 학생들을 위해 3개월간 전도했으며,동경 전도사업은 1912년부터 감리교와 합동 으로 하게 되었다.1908년에는 평양전도회에서 여선교사 이관선을 보내어 이기풍 목사를 돕게 하였으며 1909년에는 숭실대학 학생들이 회원 중의 하나인 김형제 를 제주도에 보내어 1년 동안 전도하게 하였다.

1910년에는 100만의 구령운동에 호응하여 김영제와 김진근의 두 목사를

158)서명원,『한국교회성장사』(서울:대한기독교서회,1979),35.

159)이영헌,『한국기독교사』 (서울:컨콜디아사,1983),81.

160)W.N.Blair,

GoldinKorea

(New York:PresbyterianChurch,1957),67.

만주간도 지방으로 보냈다.감리교회에서는 1907년에 국내 선교회를 조직하였으 며,3년후인 1910년 후에는 이를 내외지 선교회로 확장하여 손정도 목사를 중국 만주에 파송하여 선교에 종사케 하였고,또 장로회에서는 방화중 목사를 멀리 미 주에 보내어 캘리포니아와 멕시코에 있는 이민 동포를 위하여 선교케 하였다.

1907년부터 1910년 사이에 한국교회는 일본과 중국 만주와 시베리아 그리고 미 국대륙과 멕시코에 이르기까지 거창하게 선교사업을 일으켜 세계 교회로부터 이 목을 집중시키게 되었던 것이다.

장로교는 독노회가 조직된지 5년 만에 총회를 결성하여 선교사를 파송하 기로 결정하였다.161)그리고 사병순,박태로,김영훈을 파견하였다.총회는 이들이 선교할 때에 교회설립보다는 중국 교회와 협력하여 사역하도록 하였다.이처럼 독노회 시절에 한국 교회가 나라를 잃고도 아시아를 향하여 활발히 선교하는 교 회가 되었다는 것은 보기 드문 일로서 장차 아시아와 세계를 향한 선교를 위해 사명감과 절대적인 가치를 지니고 있다는 것을 되새기게 해준다.계속해서 한국 교회는 1915년에 방효원,1917년에 홍승한,1918년에 박상순,1921년에 장덕로, 1923년에 이대형,1931년의 김순호,1937년에 방지일을 선교사로 파송하였다.이 와 같이 시작된 중국 산동 지방의 선교 사업은 방지일 목사가 공산치하의 중국 에서 끝까지 선교 사업을 계속하다가 1957년에 한국으로 돌아올 때까지 45년 동 안이나 계속된 것이다.

제주도 선교는 한국교회에 의해 시작되었고,모든 교회가 기도와 물질로 동참한 타문화권 선교였다.선교 동기는 독노회 설립가사의 표시였다.이는 목사, 남․여 전도사,평신도,학생들 및 현지인 성도들이 함께 사역한 아름다운 협력 사역과 팀 사역의 본을 보여준다.제주도 선교는 성경중심의 선교로 표적과 기사 가 동반한 성령의 나타나심이 선교사들과 함께 했다.

다음으로 일본선교의 네비우스 선교방법을 보면,이 기간 독노회는 한석

161)김광수,『장로회 신학대학 70년사』(서울:장로회 신학대학,1971),154.

진목사(1868-1939)에 이어 임종순목사를 동경 선교사로 파송했다.일본선교 또한 3자 원리에 의한 선교정책을 이행했다.또 고베 신학교에 유학중이던 학생들이 스스로 전도해 상당한 결실을 맺었다.고베 예배처소는 그곳 신자들이 129원을 헌금해서 세운 곳이다.1920년 9월 총회는 일본선교헌금을 했으며 1월 셋째 주일 을 정해 총회소속 전국교회가 일본과 해삼위(시베리아)선교를 위해 헌금했다.

일본선교는 점차 발전해 1933년 총회에서는 일본 선교비를 400원으로 삭감한 결 의를 보면,현지 성도들의 자립이 점차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었음을 엿볼 수 있 다.

일본 선교는 1912-1927년까지 장로교와 감리교가 연합으로 사역했다.이 연합사역 결과로 조선 예수교 연합 공의회가 주관해 동경,칸사이,규수 세 지방 으로 구분해 촉진되다가 1932년에는 일본 안에 시무하는 목사가 18명,기타 교역 자 7명,신자 2,414명,세례교인 826명,46개 교회로 성장했다.일본선교는 구제와 봉사 사역을 동반하면서도 순회 전도와 교회개척에 열심을 다했다.

시베리아 선교를 보면,시베리아 선교는 목사,전도사,권서인 등을 보내 함께 팀사역을 하고 장로교 감리교 선교사들이 초교파적으로 협력사역을 했다.

그러나 교회가 선교사를 파송해 놓고 재정 후원을 지속하지 못해서 선교사가 러 시아 정교회로 개종한 사건이 발생한 적도 있었다.최관홀선교사가 1910년에 정 교회로 갔다가 1919년에 다시 복직되었다.이러한 초기 시베리아 선교결실은 오 늘날 한인선교 사역을 하기 위한 기초가 되어 그 역사를 찾아서 교회설립이 가 능했고,비자문제해결에도 큰 도움이 되었다.1991년 페리스트로이카 물결을 타 고 많은 한인선교사들이 러시아에 가서 선교했다.

만주선교를 보면,한국교회는 1901-1945년 사이에 100명 이상을 공식적 으로 만주에 파송했다.그 결과 6개 노회가 조직되었고,만주는 한국,중국,일본 복음화의 관문지역으로서 전략적 거점이었다.또 만주에서 한인선교사들은 서양 선교사들과 팀으로 사역했을 뿐 아니라,서양 선교단체들과 협력사역을 했다.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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