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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해자 히스테리화 하기

문서에서 일본군 '위안부' 증언소설 연구 (페이지 66-70)

2. 정신분석학적 서사

2.3. 피해자 히스테리화 하기

우리는 앞서 이별하는 골짜기 의 순례 할머니의 치매에 대해 히스테리의 문학적 변 용이라고 설명했다. 이 소설의 한여사 역시 히스테리 발작 이후 치매 환자로 살다 죽 게 된다는 점에서, 두 소설 모두 ‘은유로서의 질병’인 ‘치매’를 통해 위안부 피해자의 기억과 증언의 불가능성을 재현하려 함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자세히 들여다보면, 실상

61) 브루스 핑크, 맹정현 역, 라캉과 정신의학 , 민음사, 2017, 52~54쪽.

62) 라캉의 이론에는, ‘주체’나 ‘욕망’처럼 가장 핵심적인 개념들이 일관성을 유지하지 않는다는 난점 이 있다. 그리고 이 개념들이 변화하면서 ‘분석의 성공’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또한 달라진다는 문 제도 존재한다. 그러나 ‘상상적 자아’에서 벗어나 ‘상징계의 주체’로 단단히 자리 잡아야 한다는 초 기나, 추가적인 분리를 통해 ‘맥동으로서의 주체’가 ‘환상의 횡단’을 감행해야 한다고 강조하는 후 기나 모두 ‘상상적 자아’의 단단한 ‘현실’에 균열이 발생하는 시점을 중시한다는 점에서는 공통적 이라고 할 수 있다.

두 ‘치매-히스테리’는 사뭇 대조적이다.

정신의학의 권력 에서, 푸코는 히스테리의 반대쪽 자리에 치매를 올려놓는다. 그에 따르면, 정신의학의 체계에 맞춰 스스로를 위장하는 방식으로 권력에 덫을 놓는 히스 테리와 달리, 치매는 정신의학 권력이 가장 선호하는 ‘광기의 이상형’에 해당한다. 치매 환자야말로 광기의 획일화·평준화를 꿈꾸는 ‘정신요양원’ 제도의 기능에 정확히 상응한 다는 것이다. 치매 환자에게는 히스테리의 전략과 같은 “표명도, 외면화도, 고비도 없”

다.63) 그 육체는 얌전하고 조용하며 그 입은 봉해진다. 끝없이 발화하며 주인기표를 건 드리는 히스테리와 달리, 치매는 권력의 체계에 누수를 일으키지 못하고 침묵한다.

분명, 역사적 비극 속에서 말을 잃어버린 순례는 소설 창작의 층위에서 히스테리의 문학적 변용에 해당한다. 그러나 동시에, 그녀가 모든 발화를 봉인 당한 채 다른 사람 에 의해 ‘상영’되고 있음을 떠올려보면, 소설 속 그녀의 병은 反히스테리인 치매에 해 당한다. 그래서 순례의 치매는 무성적이고 순수한 ‘소녀-할머니’의 육체를 만들어낸다.

반면 한여사의 경우, 그녀가 치매의 상태에 빠져드는 것은 명백히 히스테리 발작 이후 다. 그녀가 숲으로 달려가 쓰러졌을 때, 그녀가 느낀 쾌감, 숨이 차고 가슴이 찢기는 듯한 통증, 그럼에도 포기할 수 없었던 열락 등으로 묘사된 발작은 ‘쥬이상스’에 대한 설명과 유사하다. 한여사의 히스테리는 성적인 육체를 관통하며 등장하고, 그 육체는 결코 조용하지 않다.

임철우가 순례의 치매를 통해 고발하고자 한 것이 ‘순수한 소녀의 육체’에 뚫린 역사 적 폭력의 검은 구멍이라면, 김원일이 한여사의 히스테리를 통해 보여주고자 한 것은

‘소녀’와 ‘할머니’로 전형화·상징화될 수 없는 욕망과 수치와 자부와 허위의 복합체와 그 복합체의 균열로 인해 발생한 은폐와 누설이다. 그래서 순례의 도플갱어가 순결하 고 동화적인 소녀의 모습으로 강림했던 것과 달리, 한여사의 도플갱어는 언캐니하고 요약되지 않는, 섬뜩한 난장판으로 존재한다. 김원일의 세계에, 회복되어야 할 ‘원래 순 수한 것’은 애당초 존재하지 않는다. 오히려 ‘원래’의 세계란 무섭고 지독한 것이다. 만 약 ‘원래’라는 것의 근사치가 존재한다면, 그것은 그녀가 히스테리 상황에서 조우하게 되는, 끝없이 분열하고 증식하는 유령적인 것들에 가까울 것이다.

그녀의 히스테리적 망상 속에서, 그녀의 아버지는 “어둠 속에 낫을 쳐든”(54쪽) 모습 으로 고함을 지르며 달려왔다가 다시 땀 흘려 일하는 평범한 아버지로 변하고, 그녀의 어머니는 “그놈의 건빵공장에 왜 널 떠나보냈을까” 후회하며 “얼굴의 얽은 자국마다

63) 미셸 푸코, 오트르망 역, 정신의학의 권력 , 난장, 2014, 372쪽.

옹달샘처럼 눈물이 고여 반짝”이다가도 돌연 “더러운 세월을 살아오며 더 볼 무슨 낙 이 남아있다고, 넌 너무 명이 길구나”(52쪽)라며 그녀를 저주한다. 그녀가 동경해 마지 않았던 멀끔한 외모의 ‘홍학생’은 으스스한 해골이 되어 ‘남양’으로 향하는 ‘낡은 유령 선’으로 그녀를 끌어당기고, 어디선가 불어오는 ‘향기’마저도 “풍선처럼 질량감 있게 품 에 안”기다가 슬그머니 빠져나가며 “날 따라와”(49쪽)라고 그녀를 희롱한다.

그녀의 자아 역시 끊임없이 분열한다. 그녀는 어릴 적 이름인 ‘점아가’가 되었다가,

‘모리상’과 일할 때처럼 ‘한경자’와 ‘게이코’가 되었다가, ‘양공주’ 시절처럼 ‘한안나’가 되 었다가, 마침내 “가슴에 큰 점이 있는 여자”(62쪽)가 된다. 이름이 정체성의 상징임을 떠 올려볼 때, 계속 이름을 바꾸다 급기야 이름을 잃고 “가슴에 큰 점이 있는 여자”가 되 어버리는 자기 분열은, 지금 그녀의 자아가 제대로 유지되지 못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라캉은 그 유명하고도 복잡한 도식, 두 개의 거울을 통해 실제 꽃이 아닌 꽃의 거울 상을 보고 있는 ‘눈’의 그림에서, “주체로 하여금 보는 자의 위치에 있도록 규정하는 것”이 바로 상징적 관계라고 말한다.64) 우리가 미쳐버리지 않고 타인과 함께 살아갈 수 있는 것은, 우리가 상징계의 어느 자리에 위치하여 그 위치를 중심으로 상상적인 세계를 구성함을 의미한다. 즉, 상징계란 거칠게 말해 나의 ‘위치’인 셈이다. 그런데 지 금, 그녀는 자신의 위치 좌표를 확정할 수 없다. 그녀의 ‘보로메오 매듭’은 풀려버린 것 이다. 급기야 그녀의 입에서 위안소에서의 고통이 미처 “말이 되잖은 소리”로 흘러나 온다. “≒ × ÷ ≠ ∂ ∝ ∈ ¿ ! ……”(63쪽)

이렇게 에피소드의 후반부는, 초반부의 상상적 현실이 파편화되는 과정으로 채워져 있다. 이 과정에서, 독자 역시 한여사의 삶을 재구성해야 한다. 두말할 필요도 없이 그 녀에게 위안소의 경험과 양공주로서의 삶은 떠올리기 싫은 악몽이었다. 그래서 이 기 억은 히스테리 발작 이전까지 한여사의 회상 속에 전혀 등장하지 않은 채 억압되어 있 었다. 반면 한여사가 늘 가장 행복한 시절로 떠올리곤 했던 ‘노회장’과의 연애는, 비록 그 비중은 줄었지만, 발작 후에도 여전히 달콤한 파편으로 떠돈다. 그런데 여기서, 그 녀가 젊은 시절 일했던 제과점 주인인 ‘모리상’과의 이야기는 모호하다. 모리상에 대한 그녀의 발화는 전체 소설에 걸쳐 몇 차례 달라진다. 초반의 한여사는 “여자를 모찌처 럼 살살 다루”는 모리상을 통해 “성의 짜릿한 맛과 이치를 배우고 깨쳤”(26쪽)음을 들뜨 게 회상한다. 그러나 후반의 한여사는 “모리 사마는 계집 밝히는 간사한 도꾸, 개였

어”(77쪽)라고 거칠게 내뱉는다.

64) 자크 라캉, 맹정현 역, 세미나01 , 새물결, 2016, 254쪽.

여기서 우리가 주의해야 할 점은, 모리상에 대한 한여사의 변화를 ‘허위와 진실’의 대립으로 단순화해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그녀에게 모리상과의 일이 위안부나 양공주 의 경험처럼 악몽이기만 했다면, 그녀는 결코 그것을 회상하며 자신의 에로티시즘을 구성하지 않았을 것이다. 우리는, 발작 상태의 한여사 옆에서 그녀의 불완전한 말들을 듣고 있는 소설 속 주변 인물들과 마찬가지로 그녀의 마음을 정확히 알 수 없음을 인 정해야 한다. 그리고 우리가 자아를 형성하기 위해 필수적으로 수행하는 ‘위치 잡기’와

‘재구성’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면, 애초 ‘정확한 그녀의 마음’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 을 가능성이 클 것이다. 과거는 늘 재구성 중이고 그 재구성의 결과물이 ‘현실’이라면, 그녀가 히스테리 상태에 빠져들었을 때, 다시 말해 ‘사건’을 재경험하는 상태에 진입했 을 때, 그녀의 기존 현실은 이미 붕괴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우리는 이미 Ⅱ장 2절에서, 이렇게 기존의 현실을 향해 끈질기게 의문을 제기하는

‘히스테리자의 담화’에 대해 살펴본 바 있다. 라캉은, 주인기표에 복종하는 ‘주인의 담 화’나 주인기표를 그럴듯한 체계로 치장하는 ‘대학 담화’와 달리, 히스테리자의 담화는 의식과 무의식 사이의 모순과 주체의 분열을 드러내며 주인기표에게 항의한다고 설명 했다. 그렇다면 발작 상태에서 드러난 한여사의 ‘변심’은 충분히 이해가 간다. 이것은 비단 거짓과 사실, 기만과 회심의 이분법이 아니다. 그녀는 이제 자신의 주인기표를 스 스로 두드리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 히스테리적 담화는 치매로 쓰러진 그녀가 죽음 을 맞이하게 된 순간까지 사라지지 않는다. 죽기 전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하면 천당에 갈 수 있다고 설득하는 ‘윤선생’ 앞에서, 그녀는 끝끝내 이렇게 물을 뿐이다. “내, 가,, 도, 대, 체,, 누, 구, 냐, 고? 나, 는,, 누구인가?”(80쪽)

물론, 이 물음에 답할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다. 김원일의 세계는, 억압 뒤에 숨겨 진 진실이 언젠가는 드러나리라, 선언하는 폭로의 구도로 짜여 있지 않다. 소설은 은폐 와 누설 사이에서 아슬아슬한 균형점을 잡고 있다. 그런데 바로 이렇게 아슬아슬한 균 형점, 히스테리자의 담화를 끌어내는 균형감이, 라캉의 담화이론 중 마지막 담화형태인

‘분석가의 담화’다. 분석가의 담화는, 주인기표에 사로잡힌 피분석자를 탐문하고 자극하 여 그로 하여금 자신의 분열을 인정하고 히스테리적 주체로 전환하도록 돕는다. 소설 은 한여사에 대해, 바로 이 분석가의 담화를 구사하고 있다. 작가 김원일은 피분석자를 히스테리화하는 냉정한 분석가로 존재한다.65)

65) 브루스 핑크, 이성민 역, 「네 가지 담화」, 라캉의 주체 , 도서출판b, 2018, 240~24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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