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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원을 위한 모성 신화

문서에서 일본군 '위안부' 증언소설 연구 (페이지 45-51)

1. 해원(解怨)의 서사

1.3. 해원을 위한 모성 신화

이별하는 골짜기 에서 소녀의 모습을 한 순례는 오직 동수의 눈에만 보였다. 다른 사람들은 볼 수 없는 것을 보는 자, 다른 사람들은 들을 수 없는 것을 듣는 자, 임철우 의 소설에는 이처럼 남들보다 예민한 특별한 감수성의 소유자들이 반드시 등장한다.

이 인물들은 대체로 서술자와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 화자의 역할을 하며 서사를 이끌 어간다. 이들은 주연일 때도 조연일 때도 있지만, 그 자신이 커다란 상실을 경험한 죄 의식의 주체이자 역사적 주체라는 점에서는 공통적이다. 공교롭게도 이들은 항상 남성 이며, 죄의식과 부채감 외에 세속적인 희노애락이나 애증 같은 기타 심리적 갈등은 겪 지 않는다.

역사적 외상을 겪은 사람들이 모여 사는 ‘연극무대’ 같은 공간과 그곳을 지켜보는 남 성 주체, 이 두 쌍은 봄날 이후 쓰인 네 편의 장편 소설에 모두 동일하게 적용된다.

관찰자 역할을 하는 남성 주체는 그 무대를 스스로 찾아간 작가이자 이방인( 백년여관 , 황천기담 )이거나, 이제 막 그 세계에 진입한 감수성 예민한 신참들( 이별하는 골 짜기 , 돌담에 속삭이는 )이다. 다만 황천기담 에서는, 소설을 쓰기 위해 ‘황천’으로 들어간 작가의 역할이 서사의 도입과 마무리에 한정되어 미미한 대신 그가 맡아야 할 죄의식의 주체 역할을 ‘황천 이발소’ 주인인 남성이 일정 부분 나눠 맡게 된다는 점이 다를 뿐이다. 죄의식에 시달리며 스스로 ‘백년여관’을 찾아간 작가 ‘이진우’가 여기서는

둘로 나뉜 셈이다.

이 ‘외부자-관찰자’인 남성 인물들의 설정은 의도적이라 할 만큼 반복된다. 황천 기 담 과 백년여관 에서 더 이상 소설이 쓰이지 않는 남성 작가가 오지에 가까운 황천과 백년여관으로 들어가 그곳의 비극을 자신의 소설로 쓰고자 하는 점도, 이별하는 골짜 기 에서 강원도 산골 별어곡 사람들의 사연을 시로 쓰고 싶어 하는 동수가 황천 기담 의 황천 이발소 주인이나 돌담에 속삭이는 의 ‘한민우’처럼 아버지의 얼굴도 모르는 유복자이자 죄의식의 주체라는 점도, 모두 신기할 정도로 엇비슷하고 중복된다. 다시 말해, 네 편의 장편 소설은 이 글의 Ⅱ장 1절에서 다룬 것처럼 ‘유해 발굴 작업’ 중인 사생아 로맨스라는 골격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이런 극적인 무대와 주인공을 중심으로, 이별하는 골짜기 에서 암시 수준에 그쳤던

‘강신술 메타포’는 세 편의 작품에서 ‘모성 신화’의 형식으로 전환되며 강력해진다. 이 같은 모성과 환상성의 강화는 현실의 논리를 초극하려는 남성적 욕망에 따른 지극히 합당한 귀결로 보인다. 역사적 외상을 장소화한 폐쇄적인 무대를 특별한 자격의 시선 으로 바라보는 ‘남성-사생아-죄의식의 주체’는, 이곳의 ‘애도와 재생’을 위해 잃어버린 무언가가 도래하길 간절히 요청하고 있다. 그리고 스스로 ‘역사의 짐’을 지고 있다고 믿는 이 남성 주체에게 흔히 잃어버린 결여로 상정되는 것은, 자연이나 신화, 유토피아 쯤으로 타자화된 ‘여성성’의 영역일 가능성이 매우 크기 때문이다.

그래서 네 편의 소설은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네 가지 구성상 공통점을 지닌다. 첫 째, 소설의 배경으로 역사가 공간화된 장소, 다시 말해 황천이나 별어곡, 영도, 제주처 럼 한국의 비극적인 역사 그 자체를 상징하는 곳이 등장한다. 둘째, 이 공간들은 긴 시 간의 역사적 모순을 단일한 곳에 압축하기 위해 동화적·설화적으로 구성된 폐쇄적인 무대다. 셋째, 이 환상적인 무대가 ‘역사’이고 이 역사를 조망하고 사유하는 자가 남성 인 데 반해, 여성성의 영역은 역사의 외부나 초월로서 요청되거나 혹은 역사의 희생양 으로 전형화된다. 넷째, 이처럼 동화적·설화적으로 구성된 ‘유사 역사 무대’에서 남성 서사의 환상성은 그 역사의 외부인 여성성과 쉽게 결부되며 ‘여성 신화’에 기대게 된 다.

이렇게 해서 한국 근현대사의 비극을 상징하는 장소에 역사의 주체인 남성과 역사의 외부인 여성이 맞물린 임철우 특유의 마술적 리얼리즘은 탄생한다. 이처럼 실은, 역사 를 공간화한다는 것은 다소간의 위험을 지니기 마련인데, 시간의 축을 굽히고 압착하 여 한 장소에 집어넣기 위해 시간의 축을 대신할 어떤 동력, 예컨대 ‘마술적 힘’에 기 대기 쉽고, 일단 도입된 그 마술적 힘은 ‘해원의 유혹’을 뿌리치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렇게 백년여관 의 영도라는 섬에는 식민지, 6·25, 4·3, 보도연맹, 베트남 전쟁, 5·18 등 근 100년간의 역사적 비극으로 죽은 원혼들이 모여든다. 임철우를 연상하지 않을 수 없는 소설가(이자 죄의식의 주체인) 이진우 역시 이 넋들의 목소리에 이끌려 이곳 영도까지 찾아온다. 소설은 대를 이어 내려오는 역사적 고통과 원한을 유기적으 로 배치하고, 그 배치의 정점이자 결말에 해원을 준비한다. 그리고 이렇게 수많은 원혼 을 애도하고 환송하는 일은 ‘조천댁’의 해원굿으로 성사되는데, 당연한 말이지만 이 해 원이 가능한 이유는 이들이 모두 영도라는 무대에 모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때 빙의된 무당 조천댁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소리는 원혼들의 수만큼이나 갈라지고 찢긴 절규와 함성이 아니다. 영혼들은 “드넓은 바다 수면 가득히 들꽃처럼 무수히 피어난 작고 가느다란 불빛들”(374쪽)로 떠올라 단일하고 신성한 목소리로 합 일되고, 그 목소리는 우리로 하여금 현실의 절망적인 잔혹함 대신 비극적·신화적 숭고 를 경험토록 해준다.

“오오, 사랑하는 이승의 자식들아. 이젠 그만 우리들을 놓아다오. 분노와 증오, 원한 과 절망, 눈 부릅뜬 저주와 어둠의 시간들로부터 벗어나서, 아아 우리 이제는 그만 돌 아가려 한다. 한과 슬픔과 미련을 모두 지워내고, 이 추악한 지상의 시간, 서럽고 아픈 과거들을 이제 그만 너희에게 온전히 맡겨둔 채로, 저 영원한 망각의 세상에서 이제는 깊이 잠들고 싶다…… 가엾은 이승의 내 자식들아. 부디 너희의 눈물과 통곡과 슬픔을 이제는 거두어다오.” (373쪽)

여기, 빙의된 조천댁의 입에서 ‘어머니의 목소리’로 저주와 폭언이 튀어나온다면 그 야말로 언캐니 하겠지만, 조천댁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원혼들의 목소리는 시종일관 인 자하고 장엄하여 우리를 안도하게 해준다. 바로 여기서, 우리는 모름지기 애도라는 것 이 사회적인 의미에서건 문학적인 의미에서건 죽은 자가 아닌 산 자를 위해 필요한 일 임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난 이제 그만 편안하게 떠나고 싶으니 너의 슬픔을 거두어 달라’는 목소리는 누구를 위해, 누구의 귀에 들리는 것일까. 이 목소리를 듣고서 남은 자들의 마음이 편안해지기 위해서는, 결코 원혼들이 낯설거나 두렵거나 무엇보다 끈질 긴 존재여서는 안된다. 그들은 살아남은 우리를 ‘어머니의 목소리’로 따뜻하게 위로해 줌과 동시에 그 자신의 해원을 알리고 깨끗이 사라져줘야 한다.

돌담에 속삭이는 도 매우 유사한 구조를 지니고 있다. 이번 마술의 무대는 4·3 항 쟁의 비극을 안고 있는 섬, 제주도. 이 이야기는 “스스로를 수의 입은 죄수”(69쪽)라고

여기며 살아온 임철우적 인물인 한민우가 이주해오면서 시작된다. 그는 새로 살게 된 집 근처에서 4·3 당시 목숨을 잃고 지금까지 이승을 헤매고 있는 어린 영혼들의 존재 를 느끼게 되고, 그 영혼들이 ‘사천꽃밭섬’으로 무사히 떠나는 모습까지 지켜보게 된다.

이 작품이 아이들의 비극을 재현하는 방식은, 백년여관 보다 훨씬 더 알뜰하게 우리 의 감정을 ‘절약’해주는데, 그것은 대체로 ‘모성 신화’에 기댄 설화적, 아니 거의 동화적 설정에 기대어 이루어진다.

예컨대, 불길 속에서 죽어간 어린 영혼들은 “마치 잠에서 막 깨어난 것처럼” “입고 있던 옷 그대로, 몸엔 상처 하나도 없”(131쪽)이 깨어나, 제주의 삼신 할머니인 ‘폭낭 할 망’의 돌봄 속에 지낸다. 비록 오랜 기다림이 그들을 지치게 하지만, 그 기다림이 끝나 자 자식을 찾으러 온 ‘어머니’의 영혼과 손을 잡고 “천상과 지상의 모든 꽃들이 사시사 철 흐드러지게 피어나고, 온갖 새와 나비와 벌과 바딧불이 들이 날고, 귀여운 강아지와 고양이가 아이들이랑 온종일 함께 뒹굴고 뛰노는”(199쪽) 사천꽃밭으로 향하게 된다. 그 리고 그때, 한민우는 낙원으로 아이들을 데려가려고 찾아온 여인의 얼굴을 보며 깨닫 는다.

여인은 아이들을 그러안고 끝없이 눈물을 철철 흘리고 있다. 어느 순간 달빛에 드러 난 여인의 얼굴을 보자마자 한은 또 한 번 놀란다. 어찌 된 영문인가. 그 얼굴은 바로 한의 어머니다. (……) 한은 눈을 크게 뜨고 다시금 여인을 바라본다. 놀랍게도 그것은 이번엔 윤 씨 할망의 얼굴이 되었다가, 이내 또 다른 노인의 현무암 같은 검은 얼굴이 된다. (……) 한은 뒤늦게 깨닫는다. 자식을 잃고 찾아 헤매는 이 세상 어미들의 얼굴 은 모두가 똑같다는 사실을. (214쪽)

여성은 신이 될 수는 있을지언정, 개별적인 얼굴을 지닌 인간은 되지 못한다는, 이 남성 주체의 감격 어린 깨달음은, 4·3이라는 역사적 비극을 마술적으로 치유해줄 ‘폭낭 할망’과 ‘어머니’와 같은 여성적 존재에 대한 갈망에서 유래한다. 한민우처럼 죄의식에 가득 차 사유하고 반성하는 남성은 정확히 이 같은 방식으로 ‘죄’와 ‘역사’의 주체가 되 지만, 그 남성의 시야에 포착되어 추상화되고 신화화된 여성성은 역사의 외부, ‘사천꽃 밭’이나 ‘영도’와 ‘황천’처럼 마술적 세계에 잔존하게 된다.

영도처럼 한국 근현대사를 압축해놓은 마술적 장소인 황천을 다룬 연작 소설 황천 기담 역시 한 편41)을 제외한 나머지 네 편이 모두 여성 신화를 다루는데, 그 중 특히

41) 황천기담 에서 가장 완성도 높은 에피소드는 「나비길」이라는 작품이다. 이 이야기에도 환상적인

「월녀」는 서로 다른 이유로 고통을 겪고 있는 7명의 남성이 ‘월녀’에 의해 위로받고 다 시 살아갈 힘을 부여받는다는 이야기로 더할 나위 없이 신화적인 모성에 대해 찬양한 다. 그러나 황천이라는 곳의 마술적 리얼리즘을 빌어 과장되게 그려진 이 모성은 다소 수상쩍다. 밤이 이슥해지자 흥분과 기대를 안고 남의 눈을 피해 월녀의 집에 찾아가는 7명 남성의 모습은, 흡사 성매매 업소에 몰래 드나드는 남성들의 모습처럼 보일 지경 이다.

“밤이 이슥해지자, 이윽고 사내들이 월녀의 집으로 하나둘 모여들기 시작한다.”(206쪽)

사내들은 우물에 끝없이 차오르는 ‘우유빛 샘물’로 목욕을 하고, 알 수 없는 향기로 가 득한 월녀의 방으로 들어간다. “사내들의 몸과 감각과 의식이 차츰 몽롱하게 풀려간다.

오랫동안 얼어붙었던 그들의 가슴도 소리 없이 녹기 시작한다. (……) 어느 사이 사내 들의 눈에서 맑은 눈물이 방울방울 흘러내린다.”(209쪽) 성적인 함의로 읽을 수밖에 없 는 이 같은 문장들을 지나, 소설은 다 큰 사내들이 월녀의 저 거대한 ‘네 개의 유방’에 매달려 젖을 먹는 장면에서 절정을 이룬다. “흐벅진 달덩이 하나를 통째로 차지한 천 씨는 품에 안긴 채 서럽게 흐느끼기 시작한다.”(223쪽) 그리고 그들에게 젖을 물리며 월 녀는 이렇게 말한다.

“그래, 울어라. 마음껏 울어버려라. 울어야만 산다. 가슴속 돌멩이, 목구멍의 핏덩이 를 토해내야만 산다…… 내 가엾은 자식들아. 슬픔이 너의 힘이다. 분노와 한이 너의 힘이다. (……) 한사코 포기하지 말고, 어떻게든 이 끔찍스러운 생을 살아내거라……”

(224쪽)

남성에게 여성은 어머니/성녀 아니면 창녀로 존재한다고 했던가. 그렇다면 여기 묘 사되는 월녀의 모습은 그 두 가지가 합쳐진 결여 없는 완벽한 ‘여성성’에 대한 환상일 지도 모르겠다. 그녀는 평생 ‘처녀의 몸’이었기에 결코 창녀일 수 없지만, 젊은 시절

‘색시집’을 운영했고 주기적으로 “환희와 고통이 뒤섞인 열기에 휩싸여”(174쪽) 젖과 활 력이 부풀어 오르는 성적인 존재이기도 하다. 모성과 섹슈얼리티의 완벽한 결합, 이 결 합이 얼마나 비현실적인지는, 7명의 남성이 지닌 상처가 모두 역사와 현실에서 유래한

요소는 있지만, 그 환상성이 주제를 뒷받침하며 시적으로 한정되어 삽입되어 있고, 두 주요인물의 욕망과 갈등은 매우 구체적이고 ‘인간적’이다. 임철우의 애정 서사에, 유사한 수준으로 사유가 가 능한 두 명의 인물이 등장하는 경우는 극히 드문데, 이것이 가능한 이유가 두 인물 모두 남성인 일종의 ‘퀴어 서사’이기 때문이라는 점은 매우 아이러니하다. 여기 실린 연작 중 유일하게 ‘여자 없는 세계’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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