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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분석학을 넘어서

문서에서 일본군 '위안부' 증언소설 연구 (페이지 73-77)

2. 정신분석학적 서사

2.5. 정신분석학을 넘어서

야만, 그녀의 ‘소리’는 비로소 ‘문자’가 된다. 그래서 키틀러가 보기에, 작가와 정신분석 학자는 쓰일 수 없는 것을 기어코 쓸 수 있다고 주장하는 ‘문자 권력’의 잔재들이다.

그러나 ‘잔재’라는 말처럼, 그들의 고집이 아무리 셀지라도 매체의 발달은 거스를 수도 뒤집을 수도 없으니, 결국 히스테리는 매체에 의해 녹음을 넘어 녹화되고 재생되다가 놀랍게도 사라져버린다.

큰 히스테리 아치가 촬영 직후에 질병분류학 및 세상으로부터 사라져버렸다는 것은 전혀 놀랄 만한 일이 아니다. 셀룰로이드 필름 위에서는 실패라는 것은 없고, 영화 속 광인들은 언제나 ‘그렇게 할 기분’을 유지하고 있기 때문에, 실제 정신병원의 수감자들 은 그러한 종류의 공연을 포기할 수 있었고, 모든 저장매체는 심술궂게도 그들의 흥미 로운 독특함을 빼앗아갈 수 있었다.72)

어느 순간 전복적이었다 해서, 그것이 영원히 뒤집혀 있는 것은 아니다. 매체에 의해 포착된 히스테리의 무한한 재생 가능성은 히스테리자들로 하여금 더 이상 히스테리 발 작을 일으킬 이유를 빼앗아 버렸다. 그리고 아날로그 매체를 넘어 디지털 매체의 시대 인 지금, 우리는 ‘큰 히스테리 아치’가 일종의 상징이나 표상이 되어버린 지 오래임을 알고 있다.

학문이든 매체든 심지어 질병이든, 모든 담론과 지식은 권력과 불가분이며 통치성에 구성적이다. 그리하여 역설적으로, 중요한 의미들을 모조리 빼앗겨버린 ‘왕년’의 히스테 리는 모순된 의미층이 쌓인 하나의 기표로서 자유롭게 떠돌 수 있게 되었다. 예컨대, 히스테리는 푸코의 말처럼 여전히 위장의 전술일 수도 있고 (단, 정신의학 같은 교조 적 권력이 살아있을 때), 라캉의 말처럼 히스테리자의 담화를 구사할 수도 있고 (단, 분석가의 능력이 뛰어날 때), 키틀러의 말처럼 이미지화되어 영화에서 상영될 수도 있 다. (단, 관객이 그것을 원할 때)

김원일의 소설에서도 히스테리는 ‘분석가-소설가’의 문학적 욕망에 충실히 복무한다.

다시 말해, 이 소설의 히스테리는 미덕과 의혹을 동시에 가질 수 있다. 한여사의 히스 테리는 본 논문에서 다룬 히스테리 중 가장 라캉적인 의미의 히스테리로 히스테리자의 담화를 구사한다. 동시에 이 히스테리는 너무도 시의적절한 순간에 너무도 적합한 방 식으로 출현한, 잘 표현된 연출적 발화이기도 하다. 한여사의 발작 상황에서 발화되는 고통의 목소리는 기능적으로 잘 수행된, 제 자리를 잡은 영화적 연출이기도 한 것이다.

72) 프리드리히 키틀러, 유현주·김남시 역, 축음기, 영화, 타자기 , 문학과지성사, 2019, 267쪽.

폐쇄적인 무대를 만들고 그곳을 애도함으로써 ‘진짜 세계’에서도 애도가 가능하길 빌 었던 임철우의 욕망과 달리, 김원일의 욕망은 이 무대를 설명할 수 있으면 ‘진짜 세계’

도 조망할 수 있으리라,에 가깝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해석의 전략이고, 그래서 소설 은 출구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물론, 어떠한 해체적 전략에도 기저의 목적이 없을 리 없으니, 김원일의 복잡다단한 뿌리 중 적어도 하나의 뿌리는 성폭력 피해자에 대한 고 정된 전형을 거부하는 일이었으리라. 그리고 더 오랫동안 품고 있던 굵은 뿌리 중 하 나는 해석학적 욕망일 것이다. 이 욕망은 피해자의 발화를 가로채거나 그의 입을 봉할 필요가 없다. 이 욕망은 오히려 히스테리가 발화하길 원한다. 그 순간, ‘소설의 욕망’을 욕망하는 히스테리는 출현하고, ‘소설의 욕망’대로 삶을 은폐하고 누설할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위안부 피해자를 재현하는 문제에서 ‘증언’을 재현하는 문제로 조금 이동해 보자. 이제까지 살펴봤다시피 ‘분석가-소설가’는 작가주의적 감독처럼, 증언의 형태를 모두 녹이고 섞어서 새로운 형상으로 한여사와 그랜드 호텔을 빚어낸다. 물론 이 형상에 담겨있는 인간에 대한 이해는 정교하고, 이 형상을 통해 우리는 우리가 지 닌 위안부 피해자에 대한 주인기표를 의문시할 수 있지만 (그러니 이 소설은 확실히 분석가의 담화가 맞다. 독자로 하여금 히스테리자의 담화를 사용하도록 유도하므로), 그렇다고 해서 이 소설이 증언을 재현하는 것에 성공했다고 말할 수는 없다. 증언을 담고자 한다면, 소음을 삭제하지 않으려는 시도를 포함한, 분석가의 담화가 아닌 다른 방식이 필요하다.

라캉은, 정신분석학이란 ‘개별자’에 대한 과학이자, “개인을 존중하지 않고는 제 기능 을 발휘하지 못하는 기술”73)이라고 믿었다. 실제로 여기에 정신분석학의 의의가 있을 것이다. 그리고 임상의 차원에서, 외상 이후에도 삶을 살아가야 할 자아가 새롭게 ‘견 딜만한 현실’을 재구성하는 일은 분명 중요하고 긴급한 일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필 요하다고 해서 반드시 가능하다고는 말할 수 없다. 과연 역사적·사회적 외상을 경험한 개별자가 자신의 고통을 ‘개인적’ 경험으로 재구성할 수 있을까. 대답은 부정에 가깝다.

물론, 그렇다고 이들의 고통이 ‘민족의 고난’이나 ‘여성의 수난’처럼 집단의 경험으로 범주화되거나 승화되어야 한다는 말은 더더욱 아니다.

명백히 위안부 피해자의 고통은 피식민지 민족이자 여성이기에 겪은 것임을 부정할 수 없다. 그리고 그렇게 맥락화된 역사적·사회적 기호와 상징 들은, ‘나의 고통’이 ‘나 의 몸’에 새겨지는 내밀한 방식에도 분명한 영향을 미친다. ‘나의 육체’에 공유 불가능

73) 자크 라캉, 맹정현 역, 세미나01 , 새물결, 2016, 56쪽.

한 ‘나의 감각’이 새겨지지만, 역설적으로 ‘나의 육체’는 ‘나의 내면’을 훨씬 초과한다.

다시 말해, “육체는 주체화의 한 방식이다.”74)

그것을 누구보다 잘 아는 위안부 피해자들은, 많은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외부’를 향 해 증언해왔다. 아마도 이들이 서 있는 곳은, 집단적이기만도 사적이기만도 않은 마치

‘중간계’와 같은 공간일 것이다. 같은 경험을 하지 않은 재현 주체가 이곳을 찾아가기 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럼에도, 역사적 비극에서 유래한 개별자의 고통을 추상화하여 대상화하지 않으면서도 개인화해버리거나 외면하지 않으려면, 이 장소에 함께 머무를 방법을 찾아야 할 것이다. 이제, 이에 대해 이야기해 보자.

74) 미셸 푸코, 오생근 역, 육체의 고백-성의 역사 4 , 나남, 2019, 8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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